2017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시부문)

 

갈라파고스 / 김태인

 

어둠이 입술에 닿자 몸 안의 단어들이 수척해졌다 야윈 몸을 안고 섬 밖을 나갔다가 새벽이 오면 회귀하는 조류(潮流), 금이 간 말에서 아픈 단어가 태어나고 다 자란 말은 눈가 주름을 열고 떠나갔다

 

남겨진 말의 귀를 열면 치어들이 지느러미를 털며 들이 닥쳤다.은어(隱語)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욕설이 귀를 깨문 몸 안에 손을 넣어 상한 심경을 꺼내 놓자 말수 줄은 언어의 생식기는 퇴화되어 갔다

 

파도를 멀리 밀어낸 밤은 등대를 잡고 주저앉았다 부레를 떼어낸 언어는 외딴섬에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발굽에 물갈퀴가 생기고 단어에 부리가 자랐다 비늘이 깃털로 변해 조류(鳥類)로 진화했지만 텅 빈 죽지에 감춘 내재율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아주 오래된 하늘에 운율이 돌면 첫 문장은 가슴지느러미부터 따뜻해졌다 야윈 말들이 하나 둘 돌아온 섬은 언어의 기원에 종말을 고하고, 밤은 더 이상 섬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동쪽으로 흘러든 난류는 바다거북 등껍질에서 불가사의한 문자를 캐고 암염처럼 굳어버린 죽은 언어를 떼내었다

 

남쪽 염전에서는 느린 운율과 음가들이 뿔 고동의 귓가에서 보송보송 말라갔다 새벽이 되어 방에 불을 끄면 되살아난 단어들이 몸 안에 환한 섬을 산란하는 것이었다

*갈라파고스 - 찰스 다윈이 발견한 섬 혹은 제도.

- 2017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꽃게 / 최병철

 

장손은 섬이었다

할아버지가 펼쳐놓은 바다에 담겨 있던 당신

잠시 뭍에서 맡은 쇠 냄새만

해안선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모퉁이에 헐렁하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기운 기둥을 일으켜 촘촘하게 그물을 걸고

부력으로 집안을 밀어 올렸다

뱃머리가 바다를 가를 때마다

철공소에서 대문을 만들었던 시간들이 솟구쳐 올랐다

가풍의 출입을 철대문으로 막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배를 저어갈 때 방향을 잡아 주던 어머니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철의 껍질에서 탈피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쯤

딱딱해진 가슴 위로 그물을 펼치고

휑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던 밤

팽팽한 수면을 찢고

그렁그렁 달빛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바다가 심심해지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법

기다림만 키우다 통발에 자신을 가두던 당신

절단기로 섬을 해체하고

배를 수평선 바깥으로 몰아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지만

집게발이 파도를 물고 놓지 않는다

- 2017 경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래를 격려하며 / 김예진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 2017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 2017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 2017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각시거미 / 이삼현

 

그녀와 나 사이,

서먹해진 간격에 집을 지은 거미

한 점 침묵으로 매달렸다

말끝을 세운 몇 가닥 발설이 한데 얽혀 덫이 되고

하루, 이틀, 사흘

무엇을 먹었는지 마셨는지 소식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있다

나는 여문 것을 좋아하고

그녀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지만 거미의 식성은 육식성이다

단단한 저녁이 말랑말랑해진 태양의 육즙을 천천히 삼키는 동안

거미는 한마디 미동도 없이 어두워졌다

몰래 들여다봐도 내통도 없다

팽팽하게 벌어진 틈새를 붙잡고

며칠 째 끈적끈적한 긴장의 끈을 당기는 저 고집은 불통이다

꼭 돌아올 거라고 활짝 열어둔 오늘이 무음無音으로 지고

내일의 가지에 또 무슨 꽃이 피려나

마음은 나팔처럼 불 수가 없다

경계를 풀고 다가올 기척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이 쉼표도 없이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죽은 듯 산 듯 다시 낮달이 떴다

- 2017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 /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윤장대 / 김성신

 

삼월 삼짓날은 윤장대를 돌리는 날

풍경소리 곱발 세우고

산자락은 그늘을 등지고 좌정한다

108배 올리던 법당에서

굽은 허리와 무릎 뼈 석탑처럼 일으켜 세우고

윤장대 돌리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묵은 발원이 한 각씩 깊어진다

상현달 달무리 지는 밤

아이의 울음소리 희미하게 살아나고

안간힘을 토해내던 흑백의 한 생

몸속 경()이 된 통증을

한 올 한 올 부풀리니

저만큼 솔바람에 가슴 쓸리기도 해

앞뒤 없는 회한과 갈망은

두 손 맞잡고

배웅하듯

한 곳을 바라보니

이마 위로 맺힌 땀방울

눈물의 동의인양 하염없이 흐른다

더 두툼해질 법문의 책장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들어가 있을

어머니의 비워낸 몸을

나는 가만히 부축하여본다.

- 2017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웨터 / 황성용

 

엄마 영정사진을 찍는 날

 

일생의 좌중을 한 번에 멈추고 그 안에서 골몰히 앞을 바라보는 한방의 시선, 시장 냄새도 들어간다

느슨했던 안이 넘어졌는지 엄마의 얼굴이 카메라 앞에서 손님 쪽으로 살짝 기운다

엄마 스스로 올올이 물 수 있는 어금니 하나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다 힘들었던 무게는 내리고, 쪼그렸던 다리는 반듯이 편다

푸르른 날과 무성한 날을 곱해도 영이 되는 적자의 숲에서 내려오지 못해 항상 엄마의 앞치마는 땀으로 젖어 있다

비누칠을 해도 빠지지 않을 때 방망이질의 쓰임에 따라 한 방에 끝내려고 사진사는 필요 없는 각도를 버린다

버릴 컷을 버려진 시간으로 남아 있을 때 엄마는 살림의 다이어트를 위해 땀방울 하나하나 털실로 꿰매는 절약 스웨터(sweater)

코가 빠져도 스웨터의 구멍을 버리지 않는 센스, 엄마는 유산의 단추 하나를 남겨둔다

나는 아침을 먹기 전에 빼빼한 삶의 스웨터로 찍힌 영정사진을 찾으러 간다

- 2017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질감 / 김순옥

 

방을 빼라는 집

주인의 목소리가 뜨거워

엉뚱한 방에 들어가 누워보아요

문지방에 끼인 돌멩이가 으스러져요

감긴 눈을 씹었어요

생선꼬리라도 주세요

돌멩이가 입 안에서 굴러다녀요

미안해요 뱉을 수가 없어요

입 깊숙이 밀어 넣어 볼까요?

늙은 복숭아 껍질에 돋은 거웃이

천일동안 타고 있대요

꽃을 달고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노랗게 곪아가는 눈

저만치

나는 엄마보다 더 늙었고

낯익은 젊은 여자 하나

생뚱맞은 얼굴로 거울을 빠져 나가요

불 꺼진 방 아랫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 2017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잔등노을 / 정연희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석철석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 2017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인트 공 /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두꺼운 부재(不在) /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 2017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목판화 /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 2017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허공에서 더 깊어지는 추위 / 김낙호

 

세 길 높이 배관 위

긴 칼 휘두르는 단단한 추위와 맞선다

방패는,

작업복 한 장의 두께

빈곤의 길이를 덮을 수 없는 주머니 속에서

길 없는 길을 찾는 추위에 쩍쩍 묻어나는 살점

더 먼 변두리의 울음소리를 막아보려

등돌린 세상처럼 냉골인 둥근 관을 온몸으로 데운다

두려움의 크기 따라 느리게

혹은, 더 느리게

허공을 차는 발바닥의 양력揚力으로 기는 자벌레

수평으로 떠 있는 몸이 공중을 써는 동안

바람은,

밀도 낮은 곳만 파고드는 야비한 마름

풍경風磬이 될 수 없는 공구들 부딪치는 소리

눈앞에 튀어 올랐던 땅의 단내가 목구멍을 채우는,

숨죽였던 모골이 축축한 닭의 볏이 될 때마다

날개 없는 포유류가 새가 된 적 없다는 걸

한 발 느리게 깨닫는다

떨어져 나갔다 다시 매달린 간으로부터

소름의 갈기가 잦아드는 한숨

자꾸만 밀어내는 세상의 복판을 자주 헛짚어

복부 근육으로 변두리를 붙잡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

허공을 기는 힘이 연소될 때마다

그나마 조금 환해지는 하루

- 2017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진단 / 신동혁

 

머리를 자르면 물고기가 된 기분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고 마지막엔 바다가 온다는 말을,

소금기가 남은 꼬리뼈를 믿습니다

훔쳐온 것들만이 반짝입니다

지상의 명단에는 내가 없기에

나는 나의 줄거리가 됩니다

나는 맨발과 어울립니다

액자를 훔치면 여름이 되고 비둘기를 훔치면 횡단보도가 되는

낯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쏟아집니다

멀리서 보면 선인장 더미 같습니다

서로를 껴안자 모래가 흐릅니다

모래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듯

빈 침대는 바다에 대한 추문입니다

나는 모르는 햇빛만을 받아 적습니다

혼잣말을 엿들을 때 두 귀는 가장 뜨겁습니다

지도를 꺼내어 펼쳐봅니다

처방전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듣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호주머니가 깊어집니다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공복 / 김한규

 

당신이 하고 있는 무엇

가만히 있게 가만히 두지 않는 시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왔네요.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왔습니다.

먼지가 부풀며 피에 섞인다

아스팔트가 헤드라이트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한 마디를 끝낸 입술이

냉동고 속에서 굳는다

언 것이 쌓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빈속이 쏟아져 내린다

무엇을 하기 위해 당신은

약봉지를 잊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나무 위에서 늦은 밥을 먹을 때

문은 닫히는 소리를 낸다

밝아올 것이라는 말을 지워버린

아침에는 감꽃이 떨어지고

눈물을 말리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고 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끝났습니다.

아니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연락하겠습니다.

- 2017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귀촌 / 정연희

 

귀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멀고 가까운 말들도

촌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귀가 된다

귀걸이처럼 빛나는 소문들

귀가 제일 빠른 곳은 촌이다

특용작물을 심은 노총각의 이야기, 젊은 며느리와 늙은 시어머니와 다국적 갈등, 파리 한 마리와 한나절을 놀았다는 과부댁, 허리가 점점 늦가을 풀포기처럼 구부러지는 재 너머 노인, 합죽의 입 꼬리에서 뛰어오는 손자들 부러운 마음 감추고 듣는 독거노인들 이야기가 점심 물린 마을회관에 가득하다. 토지수용 소문에 동네가 술렁이고 쇠약한 용돈을 먹고 약장사가 지나가고 나면 촌에는 보일러 공기구멍에 집을 짓는 새와 부엌이 놀이터인 쥐가 퍼트리는 소문이 있다

반상회가 끝난 자정 무렵

민화투 점수로 오고가는

소문의 끄트머리들이

텅 빈 까치집으로 들어간다

폐가는 집 비운 소문으로 흉흉하고

논두렁에는 논두렁 소문이 길게 늘어나고

어쩌다 주춤했던 귀들도

오일장 다녀 온 뒤로 다시 무성해지는

이발관 그림 같은 풍경에 뛰어든 사람들

밤이 빨리 찾아오는 촌 풍경에

바쁜 귀가 몰입해 있다

-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애인 / 유수연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자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했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면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전쟁의 시간 / 주민현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며 싸락싸락 소리가 났다.

라디오에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터무니없이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을 떠올렸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식탁 위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불안이 커튼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다시 자랄 것이다

식물이나, 아이나, 어둠 속에 수그린

수련이나, 오래 구겨져 있던 셔츠 같은 것이

교사나 수렵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뜯어진 커튼처럼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어 했다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반쯤만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식은 총구에서 나는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먹었고, 기도를 했고, 달력을 넘기며

고작 이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칼로 가른 물고기 뱃속에는 구슬이 가득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는 늙은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종려나무야, 다른 신발을 쥐고 태어난 깨끗한 발아,

이것을 좀 보렴, 이렇게 아름답잖니

신은 언제나 우리의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는 자주 누워 있었고 집 밖에 내어 놓은 의자는 비에 젖었다

전쟁이 끝나고 좀도둑 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곧 사월이 오면 먹을 게 좀 생길 거다

이웃집 사람들과 매일 대화를 했다

이 동네를 떠나세요,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가면 여기보단 지내기가 나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워서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조금씩 물고기의 형상을 닮아 갔다

오빠 마구간에서 새끼 양들이 태어났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증거 같은 것일까?

그 양들은 옆집에서 도망친 가난한 슬픔일 뿐이란다

사는 게 지옥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지옥엔 도달하지도 않았는걸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갔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 다시 건축되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안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더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 2017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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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어서

 

조미하

 

당신이 있어서

웃을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조용히 건넨 한마디에

용기를 낼 수 있고

세상과 맞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하는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이 내려준 선물 아닐까요.

당신이 있어서

따뜻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작은 것 하나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랑의 꽃 피우는 향기

 

김명숙

 

사랑의 언어는

그림자처럼 되지 않도록

표현은 정확하게 숨김이 없으며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해가는 바닷물처럼

그대를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에 담고 싶은 욕망이여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닌

우리들의 삶 전부이기에

서로가 아낌없이 숨김없이

하나가 되는 진실한 사랑이여

 

놓치지 않으려는

인생의 마지막 술래이길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그리움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도록 모아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의 사랑 받으며

추억들을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청춘의 향수를 뿌리며

 

남은 삶의 시간들을

영원히 지지 않는 사랑의 꽃으로만

향기롭게 피우리라.

 

 

차를 마시며

 

이가희

 

현룡사 스님께

두어 주먹 얻어 온 화개잎차

 

한잔 마시려고

마알갛게 우리니

방안 가득 목탁소리가 퉁긴다

풍경 흔들던 산바람 일어서

내 코끝을 휘감았다 놓아준다

천수봉 골짜기 쓸어 올리던 종소리

맑은 이슬로 고이고

찻잔 가득 녹아 있던

산새의 재잘거림이

모락모락 기어 나온다

눈감으면 비로소 들린다

빈 가슴속에 불어오는

산사 뒤 숲의 대바람 소리

 

입안 가득 번지는 햇살의 미소

 

 

그런 사람

 

인도 고대경전 글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과 번뇌를 벗어 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도 않는 사람

 

이미 강을 건너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 있어서도

삶과 죽음에 걸림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다섯 가지 감각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

 

당신이 있어서

 

조미하

 

당신이 있어서

웃을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조용히 건넨 한마디에

용기를 낼 수 있고

세상과 맞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 좋은 인연으로 함께 하는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늘이 내려준 선물 아닐까요.

당신이 있어서

따뜻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작은 것 하나도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껴주고 더 사랑해주기

 

신영란

 

소중한 사람이 이유 없이 화를 낸다고 생각되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세요.

 

당신은 믿었던 사람한테 상처받은 적 있나요?

그 아픔이 그 어떤 일보다

몇 배 더 크게 느껴진 적 없나요?

 

가까우니까, 사랑하니까, 믿으니까

잘못한 일이 있어도 용서해주고

 

다른 사람보다 당신을 더 많이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아픈 가시가 되어

마음에 와 박힌 적은 없나요?

 

어쩌면 오늘 당신의 소중한 그 사람도

그때의 당신과 똑같은 심정 아니었을까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고통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지 마세요.

당신이 슬플 때 그 사람이 같이 울어주길

기대하지도 마세요.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남의 고뿔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랍니다.

 

내가 힘들면 상대방은 더 힘들 거라 생각하세요.

나의 어려움을 누가 덜어주길 바라지 마세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내가 좀 더 무거운 짐을 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마음가짐

 

조미하

 

당신이 미소지으면

행복이 따라와요.

당신이 마음을 비우면

갈등이 사라져요.

당신이 집착을 버리면

사랑이 머물러요.

 

당신이 긍정을 얘기하면

부정이 도망가요.

당신이 꿈을 얘기하면

한 걸음씩 다가와요.

당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바퀴 달린 행복이 달려와요.

 

가을 저녁 어스름   미산 윤의섭

 

풀벌레소리

멀어지고

먼저 떨어진 낙엽이

홀로 얼굴을 붉힌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니

소나무 가지에

달이 걸렸구나

찬물이 바위로 흐르니

여름의 향기

시들었지만

머물만하지 않은가?

달이 뜨고

별이 빛나는

밤을 위하여

가을 저녁 어스름이 서산에 드리운다.

 

둘만의 사랑    정심 김덕성

 

가을아침

구슬프게 가을비 내리며

촉촉하게 젖는데

누구도 맛보지 못한

단 하나인 달콤한 사랑에

따뜻한 마음을 담고

차 한 잔 나누며

차 잔에는

분홍빛 코스모스 꽃잎을

살짝 띠워

사랑의 향이

그윽한 풍기는

둘만의 사랑 이야기로

행복한 꿈속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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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시 모음 89편

《1》봄비 

강계순

참혹하게 쓰러졌던 나뭇잎 위에 
색색이 천을 놓아 
하나씩 하나씩 
궁핍의 겨울을 꿰매는 손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만유의 어깨 위에 내려 
빈혈의 혈관을 채워 주고 
서릿발 같던 하늘 
비단 안개로 닦아 내어 

천지에는 
자근자근 땅 밟으며 일어서는 
병후의 시력.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천년을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혼 불러내어 
일으켜 세워 주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보는 
약손. 

《2》봄비 마중 

강사랑

예쁜 임이 오신다기에
노란 우산 하나 들고 봄 마중 갑니다.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풍경을 한 아름 안고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어오십니다.

봄 바구니에 쑥과 냉이를 가득 담고
해맑은 미소 한가득 담아 오십니다.

진달래와 개나리를 닮아
가녀린 몸이지만
오시는 임 반기려 커다란 목련을 피웠습니다.

노란 우산 살며시 감추고
먼 길 오신임을 온몸으로 맞이하면
설렘에 순간의 행복은 기쁨의 눈물 되어
소리없이 대지의 깊은 곳까지 적십니다.

내일은 온 세상에 봄꽃이 만발할 것 같습니다. 

《3》봄비가 되어 

강선옥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대지를 적시고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살포시 새벽을 거두며
상큼한 아침을 깨웁니다.

소곤소곤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산천초목을 깨우고
어머니의 손길처럼 어루만집니다.

새벽을 깨우는 봄비의 속삭임처럼
늘 잔잔한 미소와 같이
사랑의 호수에 물을 담아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깊고, 넓게,
긴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행복의 천사가 되어 
봄비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4》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강해산

오늘도 허전한 가슴 채우려
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나들일 간다.
가끔 복잡한 소음 속에 묻혀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싫지만은 않다.
모든 걸 벗어 던지고 뛰어든 불나방처럼
스스로 타서 재가 될 운명인 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모를리 없지만
오늘은 당당한 모습으로 활보하고 싶다.
언제부턴가 봄비가 싫어져 
일부러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 지냈는데
이렇게 비 내리는 감상에 젖어 
스스로 외로움을 떨치려 거릴 나선다.
시끄러운 음악과 걸 맞는 몸짓으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마음의 가면을 쓴다.
아, 돌아서면 사라지는 환상 속으로
신기루 속 엘도라도를 향해 걸어간다.
살얼음 위를 걷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5》새벽을 걷는 봄비

고은영

절망을 맛보지 않은 자는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한 때 나의 절망은 위험 수위를 넘었고
미치광이처럼 광폭하게 내게로 달려들었다

이 도봉산 언저리에
산 안개 뿌연 장막의 심연으로
봄 비가 추적추적 밤을 적신다 
몇 개의 가로등만 구획을 가르고
점점이 고독한 빛들은 흩어진 채 출렁인다

아, 빗줄기 
그리움에 흠씬 젖은 리듬은 
어김없이 새벽 침묵을 깨트리고
피를 토하듯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하고 있다

《6》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7》당신은 봄비 같은 내 사랑입니다

공재룡

황사 같은 먼지 얼룩진 세월 속에
그저 옷깃 스친 인연이란 이유하나
눈비가 오는 날도 따스한 체온으로
나에게 등을 맞대어 준 당신입니다. 

남처럼 가진 것도 잘난 것 없는 나
힘겨워 인생 고갯길밖에 없었는데
늘 내 곁에 그림자 같이 함께해 준
눈물겹도록 고마운 내 사랑입니다. 

천둥 치는 날에 곁에 남아 주었고 
반평생 지나 24평 아파트 장만에
세상 다 얻은 듯 천사의 미소 주는
당신은 진정 봄비 같은 사랑입니다.

《8》봄비가 가슴으로 내립니다

곽승란

꽃잎들이 서러움이라도
토해 내는 듯
비가 내립니다.

가뭄으로 여기 저기 
뜨거운 악마의 손길을
저지하는 듯 비가 내립니다

방긋 방긋 새순들의
노래가 들리 듯 
조용히 비가 내립니다.

보낸 아쉬움이 너무도 커서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버린 듯 
봄비가 하염없이 
내 가슴에 내립니다

나의 마음은
햇살처럼 고운 듯 비가 내리지만 
가슴 한켠에 그리움으로 내립니다.

《9》봄비에게 길을 묻다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람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10》봄비에 젖은

길상호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11》봄비 

김덕성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결코 눈물이 아닌 
사랑의 온정 

희망을 잃고 
우러르는 나무에게 
하늘이 내려 주는 
생명수 

사랑을 안고 
활짝 웃는 나무 
두 팔 벌려 
감사하고

《12》봄비

김병호

아직 엄마의 젖도 먹을
힘도 없을 텐데
눈도 옳게 뜨지 못했는데
몹쓸 비가 간난아기의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구나

빗소리에 놀란 간난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아직도 남은 추위에
감기가 걸리지 않을까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
깊은 잠이 든다

봄비는 마른 가지에 붙은
겨울을 녹이는 듯 
아랑곳없이 봄을 재촉하고
꽉 다문 땅 끝 입술을 적시며 
생동의 발걸음이 찬란하다.

《13》봄비 

김석전

비가 그쳤네
햇빛이 반짝어리네
세수한 산과 들이
수군거리오
"어이 시원하구려."
"어이 시원하구려."

《14》봄비 

김세영

간밤 빚은 은하의 눈물 
촉촉이 젖은 봄 물 머금고
초록빛 싱그러움 그렁그렁

옹골차게 돋아나다
푸른 물 주르르 흘릴 것 같은
봄 눈망울 초롱초롱

마치 아기의 눈망울 같아
아니면 맑은 호수 같아
'풍덩'하고 빠져도 좋을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

《15》봄비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16》봄비 

김영준 

투신하여 내 몸을 꽂고 나면 
어느 만큼 지나 
그 자리, 구멍마다 
제 이름 달고 투항하는 풀잎 
그렇게 온갖 것들이 일어서고 난 후 
드디어 그 눈짓 속에 파묻히는 
나무 

3월 지나며 
어디선가 잦은 꿈들이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꿈속에서 
많은 이름들이 가방을 열고 나온다 

《17》봄비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18》봄비 

김윤배

세상이 빗방울 위에 놓인다

겨우내 마른 소리를 내며 떠나려던 나무들이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발등에 누워 젖고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내, 지난 겨울이 저랬?가
숲이 빗방울을 조용히 내려서고
오랜 잠 괴로워했던 산갈대
툭툭 마디를 꺾는다
내, 지난 봄이 저랬던가
저처럼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얹혀
스거운 나이를 버리면
내 굽은 그림자가 끌고 온
메마른 마음 햇솜처럼 부풀어
꽃망울 벙그는 세상을
혼자는 갈 수 있으리
내 비록 네 마음 속에
싹 틔울 꽃씨 하나 묻어두지 못한
붙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19》비옷을 빌려입고 

김종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 년 전
善竹橋가 있던
비 내리던
開城

호수돈 女高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려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20》봄비가 내립니다

김지순

상큼한 미소로 다가와 
유혹하던 그대 있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처럼 
한없이 흔들어 놓은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잎 뾰족하게 내밀며 
제가 봄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좋아하고 
잿빛 하늘을 좋아하고 

신선한 바람을 좋아하는 
그대가 아닌 내가 오늘은 있습니다 

흐린 하늘 너무도 예쁜데 
가슴은 텅 빈 벌판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비가 내리는 걸 아는 걸까요 
지금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21》봄비 여자 

김찬일 

여간 걸어도 줄지 않을 것 같은 
들길 걷다 봄비 만났네 
내리는 빗줄기에 가려, 먼 들판은 
풍경의 잔해로 눈꺼풀에 스며들고 
들판 자욱이 봄 안개로 피어있던 
야산의 진달래만, 허전한 눈망울 채웠네. 
아직 찬비였지만 봄비에 젖은 진달래꽃 
가슴에 붉은 아픔으로 떨어지고 
봄 아지랑이에 숨어 
지금까지 겨울 꿈 키워 온 여자 마을 
봄비 따라 흘러가 보이지 않았네 
아 아 겨울이면 잉잉거리는 바람으로 나타나 
빈 나무가지 흔들던 여자 
흰 눈 내리면 눈 위에 이름 모를 새 
발자국으로 찍혀 있던 여자 
그 오광대 각시 탈 망상같던 여자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키워 온 
겨울 꿈 꺾어 놓고, 봄비의 여자 
그 몸 벗어 놓고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22》아내의 봄비 

김해화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 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뒤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원에 떨이미 해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23》봄비 그친 뒤 

남호섭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 안개다. 

산 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24》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5》봄비 오는 밤에

도지현

자작자작 
빗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풍기는 기름 냄새
가까이 다가갈수록 
빗소리는 더 거세지고
노릇노릇 지져진 부추부침개
시절을 안주 삼는
서민들의 애환이 
하루의 곡예를 잊기 위해
눈물을 털어 넣고 한을 토한다
그렇게라도해야지만
다시 내일을 일으킬 수 있음이니

자작자작 부침개 부치는 소리
끝없는 내레이션이 되어 흐르는데

《26》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 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27》봄비의 언어

박광호 

봄비엔
감미로운 삶의 진실과
사랑의 언어를 품고 있다.

음지에 잔설을 녹여
대지에 온기를 불어넣고
산 너울 계곡마다 봄 안개를 피우며 
침묵의 겨울 강을 건너 온
나목들의 애틋한 잎눈을 보듬는다.

새 삶의 봄 노래를 들려주며
움츠린 가슴에 희망을 안기는
봄비는
예외 없이 인간의 가슴에도
싹을 틔어준다.

남녘의 봄바람 불어오고
봄볕이 대지에 내려앉을 때
온 누리엔 푸름의 꿈으로
펼쳐 질 것이다.

《28》봄비소리

박금란

타이르듯 내리는 봄비소리
엄마가 불러준
‘......망치를 들고......’ 낮은 자장가가
되살아 돌아오니

구겨진 사랑 곱게 펴
차곡차곡 마른빨래 개듯
마음에 담네

민들레 귀 세우고
봄비 음악 담아
쫑긋 노란 꽃잎
우주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꿈을 꾸네

산목련 꽃잎
빗줄기를 젖줄기로
환한 세상 열어가는 꿈
나누어주니
전쟁고아 장수가 되어
나라를 구하고

북녘에서 피어난
남북을 잇는 무지개 꿈
봄비가 되어

자본주의에 불구가 되어
주저앉은 노숙자를
말갛게 씻겨주니

북녘세상 남녘세상 
하나 되는 세상
4.16리본 개나리 꽃잎으로 주르르 이어져
휴전선 허무네

가시철망도 녹이는
민족의 봄비는
우리 마음속에 담겨
평화의 노래 찰랑이네

우주의 노래 민족의 노래
날선 제국주의도
스르르 잠들게 하네
영원히 잠들게 하네 

《29》봄비

박동수

차분히 속옷 적시고야
꽁꽁 얼었던 짙은 그리움을
눈물이듯 내리는 봄비에
초록빛 뿜어내고
가슴속에 묻어둔 진한 사랑 
꽃망울로 밀어 낸다

질퍽이는 길을
맨발로 추적추적 걸어오는
그대 발걸음소리
수많은 색색으로 피워낸
꽃잎을 모아

봄비 오는 길 위에
꽃길을 만들고
차마 수줍어도 
봄비 따라 오는 님
오래오래 기다리리라

《30》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그리움을요 

《31》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데서 우레 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32》봄비를 맞으며 

박영웅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갑자기 그립다.

작은 풀꽂 한 송이도
노래가 되는 벌판에 서면

비로소 어깨 위에 쌓인
먼지의 무게가 느껴지고
흔들리는 시간을 실감한다.

초록빛 산허리를 돌아가는 안개여
가슴에 맺히는 빗방울이여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몹시 그립다.

《33》그 봄비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34》듣기 좋은 봄비 소리 

박종영

저 하늘 높은 구름이 
비 내리는 기운을 잃었던가 

오랜 가뭄이 봄 나무를 바삭거리게 하고 
며칠째 안개로 마음을 훔치고 가 
치미는 울화 보채더니 
오늘은 빗 임이 속닥거리며 내린다 

어느 임의 발길을 따라 
종종 걸음걸이 비구름 머리에 이고 
서늘한 눈물을 뿌린다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무수한 방울을 뭉쳐 내려보내는 
숨 가쁜 하늘의 숨소리, 

시냇물로 흐르다 
몸섞이며 일어서는 
물풍선의 포옹이 또르르 영롱하다 

기나긴 강물의 여로가 지금부터 시작인가 
물기를 입에 물고 할랑대는 새싹, 
연두빛깔이 비 갠 석양에서 곱다 

《35》봄비의 저녁

박주택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 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에 뿌리를 두고
한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기고
배후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36》봄비 

방원조

실바람 아지랭이
몰래 숨기고
언 세상 녹이려고 보슬비 와요

소곤소곤 봄 얘기
풀어 내리면
고개 내민 새싹은 세수하지요

《37》봄비 오는 날

백원기 

봄비가 보슬보슬 내려 
아침부터 차분한 마음이다 
들쑥날쑥하던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고 
선생님 들어오신 
정돈된 교실처럼 
앞을 보며 귀 기운다 

서툰 걸음 바로 걷듯 
흐린 생각 깨끗이 닦아 
내 갈 길 바로 찾고 
무릎 치며 갈 수 있길 
두 눈 감아 빗소리를 듣는다 

들판에는 새 생명이 소생하고 
이사 하는 사람 부자 된다는 
봄비 오는 희망의 아침 
마른 땅이 촉촉이 웃는다 

《38》봄비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려 -ㅁ 풋이 나는, 지난 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ㅡ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올 사람 기두르는 나의 마음!

《39》봄비 

허난설헌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제
뜬시름 못내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장 위에 지네

봄비는 보슬보슬 찬바람 숨어들제
뜬지름 못내 이겨 병풍을 기대서니
담장 위에 살구꽃 지며 갈 길 몰라 하더라

《40》봄비 닮은 그대 

서명옥 

좁다란 길목
작은 탁자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누가 볼까
애틋한 마음 흐르는
빗물에 내 사연 띄우고

고운 인연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봄비 닮은 그대

《41》봄비 

선미숙

내 작은 창을 두드리며 봄이 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잊지 않고 옵니다.

지독하게 춥고 길었던 한철을 견뎌내며
오랜 기다림에 지쳐가던 나무들은
머지않아 파란 웃음으로 반기겠지요

길가에 풀잎도 가녀린 몸을 일으키며 
겨울을 털어 냅니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은 
가슴에 스민 봄을 어쩌지 못합니다.

깊게 얼었던 땅을 뚫고 
돋아나는 싹이 더욱 푸르듯
아팠던 만큼 다져진 마음에 찾아올 사랑은 
이제 철부지가 아닐 듯합니다.

눈을 뜨게 해준 아픔이 고맙습니다.
내가 버린 그 세월이 나를 키웠습니다.
원망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비와 함께 고운 임도 봄을 안고 오겠지요.

《42》봄비 내리는 날 

손병흥 

긴 침묵 어린 온통 무거워져버린 마음속에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순식간에 자리한 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봄기운 가득한 흔적들 
추억들을 불러모아 살며시 스며드는 발자국 

머뭇거리듯이 다가서 버린 그리움이란 꽃향기 
저절로 가장 멋진 푸른빛이 되어버린 이른 봄날 

촉촉해진 대지위로 새싹 돋게 하는 그 멋진 풍경 
그냥 그렇게 활짝 핀 봄 싣고 부슬부슬 내리던 날 

마냥 떠오르는 아련해진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빗방울 되어 돋아난 아직도 내 안에 머물렀던 정겨움 

《43》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 소리가 들려온다
향국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 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 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물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뒤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44》봄비 

송연우 

애기 엄마 냄새가 난다 
창문에 기대어 선 별 목련나무 
꽃눈에 맺힌 빗방울 
젖꼭지처럼 물고 있다 
놀랠까 살금살금 발끝으로 건넌다 
연잎에 나부시 엎드린 
아침 이슬처럼 
다만, 맑음으로 
흙 밑의 풀싹들 
기지개 켜는 손 
일으키는 소리 
젖은 손 하나가 내 안에서 
중얼거리는 듯 
나무의 굳은 시간들 
부드러운 가위질로 잘라내며 
온 세상 
풀빛과 꽃 빛으로 솟음치게 한다

《45》봄비 

송정숙

봄비는 어머니다 
젖을 먹이듯 어루만져 
싹을 틔우고 
얼른 얼른 자라라 기도발로 
만물을 키워준다 

동전 한 닢 밭지않고 
높고 낮음 없이 
무상으로 받는 자연의 혜택 
이것만 알고있으면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다 

《46》봄비

신경희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창가에 흩어지는 빗방울이
당신의 소식인가 싶어서
창가에 다가섰습니다. 

맑은 빗방울 하나를 
손 위에 올려놓고
투명한 물방울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당신의 웃음이 내게 다가섰습니다. 

먼 하늘 끝에는 
당신이 있을 것 같아
눈을 들어 멀리 까지 내다보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마을에서
저 봄비를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당신도 문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음은 먼저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겠지요. 

《47》봄비 

안덕상

벌겋게 타오르는 산불 지지 누르려
너는 주룩주룩 쏟아지지만

너 달려오는 소리에 놀란 뿌리들
검은 산 빛 깨뜨리고
더 큰 불 지펴 놓고야 말겠다

마른 삭정이도 한껏 젖으며
이 밤 자고 나면
불이야, 크게 소리치며

《48》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49》봄비 내리는 저녁 

안종환 

차가운 눈물 
방울져 흐르는 
유리창을 넘어 

멀리서 
아주 멀리서부터 
낮게 깔리어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는 
저 지친 기적소리 

흐느끼며 떠나는 
그대의 마지막 
긴 한숨 소리 

《50》봄비

양광모

심장에 맞지 않아도
사랑에 빠져 버리는
천만 개의 화살

그대,
피하지 못하리

《51》봄비 

여관구

비가 가늘어서
가시 사이로
숨어 내리는 이른 아침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싶은
둥치 굵은 탱자나무는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이다.

마음이 깎이어
피부마저 얇아져서
추위를 막을 수 없더니

가는 비에
튼 살 사이로
진통을 새싹으로 밀어낸다.

가시 끝 봄비에는
눈물 맛이 섞여 있다. 

《52》4월 봄비 

오보영 

들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고 

메말라진 
가슴을 

적셔주고 싶어서 
소리 없이 네 곁으로 다가왔단다 

우리 서로 
차분히 

돌아보면서 
못다 피운 초록 잎새 
돋우자구나 

《53》봄비의 서곡 

오석란 

이제 막 벙그는가 했는데
나뭇가지 아래로
하나씩 둘씩 추락하는 꽃잎들

꽃향기를 탐내던 봄비가
유리창에 무수한 보표를 그려 음표로 매달리고
지나는 바람이
슬쩍 와 타주하듯 들려주는
봄비의 서곡

젖은 대기를 뚫고 날아오르던
새 한 마리
깃털이 젖는 줄도 모르고
봄날의 파적삼아 적요를 쪼고 있다

《5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55》봄비 

오정현

엄마의 술병은 손바닥만 한 방에서
엄마가 잠들어 있는 머리맡을
오래된 술친구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술병에 봄비가 촉촉이 내릴 때면
엄마의 눈가에도 비가 내렸다.

거리를 헤매고 집으로 돌아오는 빗방울이
엄마의 술병을 채우고
꽃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술병은 꼬꾸라져 철썩거렸다.

나는 술을 따르다
확 쏟아 버렸다.

엄마의 술병은 영취산에
진달래꽃을 피우러 가고 없는데
봄비가 내린다. 

《56》봄비에 울먹이는 미소들 

유일하 

꽃눈으로 날리어 
촉촉한 대지에 뿌려진 너. 

화사했던 미소의 향연은 
샘이 난 구름이 울어서 
화가 난 바람이 울어서 
속절없이 널 허무하게 한거야! 

세상을 미워해도 그들은 몰라 
때마침 지나간 봄비를 미워해! 

넌 내년에 다시필 수 있지만 
난 다시올 수 없는 과거를 
묻을 수밖에 없어! 

다음 생에는 
너처럼 꽃으로 태어나 
벌들과 달콤한 사랑할 거야! 
그때는 너희들의 
단란한 친구가 되겠지! 
그러니 슬퍼하지 마! 

《57》봄비 

이가원

살짝이
살짝이 오세요

서두르지 말고
달려오지 말고
돌아보지도 마시고

사뿐 사뿐
사뿐히 오세요

그대 오시는 길에
예쁜 꽃잎 다칠까 봐

그대 오시는 길에
그 꽃잎 아플까 봐

그대 오실때
그 꽃잎 떨어질까 봐 

《58》봄비에 젖어 

이경옥

보슬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이
내 작은 어깨 위로 흐르면
난, 그대의 가슴으로 파고들고픈
구멍 꿇린 마음이 된다
어쩌면 어제의 아픔보다
오늘의 행복함에 젖고 싶어서일까

내리는 빗방울 바라 보는 눈빛에서
그대를 더욱 생각게 하는 것은
하지 못하는 말을 품은
그대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일까
어제처럼 오늘도 비가 내리면
난, 그대의 생각 속에 머문다

《59》봄비

이경임 

새벽 2시에서 3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초침소리처럼

나의 출생신고에 사용된 숫자들처럼
나의 사망신고에 사용될 숫자들처럼

천진한 울음처럼
발랄한 체념처럼

그렇게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시계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마음 우물 속 개구리처럼

분주하게 폴짝거리며 힘 빼지 말고

하늘을 꼭 껴안고 더 많이 놀아야지
땅과 뒹굴며 더 많이 놀아야지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봄비의 촉감처럼

죽음의 촉감과 더 친밀해져야지

《60》봄비

이동순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 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 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61》봄비 속에 서 있는 그대에게

이상철 

속살거리는 봄비에
목련이 꽃 깍지를 벗듯이
따스한 내 입김에
그대 두꺼운 옷을 벗으려오.

투둑 거리는 봄비에
애기 꽃이 꽃망울을 부풀리듯
따스한 내 눈길에
그대 가슴에 불 지피려오.

꽃밭에 튀는 봄비에
새싹이 떡잎을 벌리듯이
나로, 나로 하여금
그대 두 팔에 안기게 하려오.

《62》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63》봄비 내리는 오후 

이승복 

막깨어나는 새싹곁에 
봄비가 내리는 오후 
생각의 껍질을 벗어 
눈감아 침몰하는 나 
내게서 사랑은 조용히 
먼발치서 흔드는 몸짓 
외줄타는 철지난 낙엽 
애달파했던 허기짐에 
몰래 귀동냥하는 사랑 
후조의 숨바꼭질 사랑 
붉게 그대의 향기가 
신기루 되어 보이는 
가슴차고 앉은 빈자리 
그림자로 따라 붙는 
고운님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봄비 내리는 오후 

《64》봄비 

이윤호

약속이라도 한듯이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겨울비라고 할 수도 없고
이른 봄비라고도 할 수 없는
그래도 우수가 코 앞이니
봄비라고 하겠다

농부의 땅이 해갈되어
기분은 좋다만은
내 기분은 영 내키지
않는다

아침부터 영화 한 편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오자는
마누라의 등쌀이
성가시어

《65》봄비에 젖은 사랑

이재옥

아름다운 것은 느리다는 걸 증명하듯
나뭇가지의 졸린 그리움 사이로
추적추적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립니다

당신을 만났던 별빛 쏟아지던 거리와
노을이 뜨거워서 철철 낭만이 흐르던 저녁
혼자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던 야릇한 미소
알몸 위로 쏟아지던 가냘픈 한숨까지
당신과의 모든 것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해한 손목 같은 튤립 붉은 꽃잎에 
첼로의 저음으로 나부끼는 봄비는 
날개 붓을 휘저어 사랑을 적시고 
온 세상을 적십니다

고뇌로 점철된 퇴색된 추억이 
비바람에 밀려도 아니
폭풍우에 세상 끝까지 실려가 뭉개져도
항거하지 못할 봄비의 의뭉한 허밍에 
사랑이 까무룩 잠들 듯 젖어 갑니다

《66》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통통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67》봄비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68》봄비 그리고 꽃비 

이호정

바람 불더니 꽃잎 날리고
진자리에 비가 앉습니다

뜨락에 핀 라일락
꽃향기 찬비가 시샘하는지
온종일 향기를 지웁니다

창가에 앉아서
네가 좋아했던 봄비를
내가 좋아 했던 찬빗방울을
헵니다

《69》봄비에 젖은 그리움

장성우

싸늘한 세상 그리움 내린다

봄비 내리는 사랑 
가슴 서서히 적시고
눈물 없는 세상 따뜻하게 한다

흐르는 세월 
비로 변한 겨울 있기에
혼자서 아픈 봄비를 맞고자 한다

황사로 오는 계절
봄비이기에 아픈 추억 
애틋한 그리움으로 불러서
이해하지 못한 사랑되어 흐르고 있다

《70》봄비처럼 그대 내 가슴에 내립니다 

장세희

초록향기 머금은 정원에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새싹들은 저마다 여린
솜털을 감추느라 아우성입니다.

봄비가 내리면 나는
왜 이렇게 설레일까요

그대가 유난히 생각이 나는
저 봄비의 속삭임

봄비가 속삭입니다.
보고 싶었어 라고
내 사랑아 잘 지냈니 라고
그대 목소리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밤 너무나 보고 싶어 
내 눈에 이슬 맺히게 한 바로 그대가
처연하게 오시고 있나 봅니다.

회색빛 하늘에서 봄비가
꿈결처럼 부드럽게 내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저 몸짓

내게는 그대가 봄비보다
더 감미롭게 내립니다.

포근하고 보드랍고 
잔잔하고 애틋하게
그대 봄비처럼 오늘
내 가슴에 내리고 있습니다.

《71》봄비 

장옥관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

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눈 희미한 콧노래

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

한 땀 한 땀
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

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
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

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

《72》봄비 

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 해도
반길 수 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73》봄비 

정동숙

주린 배 움켜쥐고 
소리 없는 울음 삼키며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 소리에 기대어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 보지만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쏟아 낼 듯한 하늘은
인색하리 만큼의 
동냥젖을 내주고는 

마른 목적실 겨를도 없이
정체돼 있는 구름 사이로
파랗게 미소짓고 있다

또 기다린다
속절없이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되어……

《74》춘흥 

정몽주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중이라 가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 불어나니
새싹들 여기 저기 솟아오르네

《75》봄비 

정민기 

바람의 손을 빌려 
빗방울을 훌훌 털고 일어난 
꽃잎이 환하다 
산자락은 커튼처럼 안개를 치고 
철 지난 늦잠을 자고 있다 
언제 찾아왔나! 작은 새 한 마리 
울고 간 흔적이 비친다 
임시로 열어놓은 우산 아래, 
지구에서 가장 예쁜 꽃을 심고 
나 지금 그 꽃을 위해 거름이 된다 
창문에 너의 생각 실루엣처럼 놓고 
이내 빗방울처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오늘 나는 비를 맞으며 봄을 걸었다

《76》봄비 

정소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77》봄비 오는 어느날 

정숙진 

연두빛 봄비가 
잎새에 속살거리는데
우리사랑 
우산속에서 속삭이네

거리는 연두빛으로 촉촉한데
우리입술도 함께 촉촉하네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은 
그칠줄 모르고 
우리의 포옹은 
따스하게 스며드네

얼마나 흘렀을까
우산은 저만치 굴러가 있고 
빗물은 슬며시 가슴을 만지네
화들짝 놀라 추스리고
빗길을 걷는 우리는
연두물이 들었네

《78》봄비 

정진규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 버린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 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 나의 땅 문서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품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다

《79》봄비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 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 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80》봄비야

조수정

네가 오려고 혹독히 앓았나 봐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
너처럼 대지 위에 떨어지는 눈물이란다

사뿐히 음악처럼 내려앉지만
대지의 깊은 곳을 적시고
생명을 움트게 하지
사랑은 생명인 거야

봄비야
너는 기다림을 아름답게 해
겨울의 상처를 씻어내리고
기적 같은 꽃몽오리를 피워내지

말하지 않아도 돼
조용히 임하는 네 발자국
그 속삭임은 천지를 깨우는구나
곧 그의 나라를 보게 될 거야

《81》봄비 

주용일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82》봄비 내리는 창가에서 

지소영 

당신의 창문이 보이지 않아
비가 되었습니다
창호지 뒤로 아련히 
웃풍처럼 흔들리는 것들을 보며 
온돌의 따뜻함에 잠들고 말았던 기다림 
색 없는 봄비였습니다

너의 줄기 사이로 내밀었던 봉오리
연두색 희망에 포장하듯 물을 주기도 하고
행여 꾸겨질까 
오른팔을 조심스레 받치고 
떨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날들

어딘가에서는 
상앗빛 추억 
소라의 고동처럼 들리고
첫사랑처럼 잠 못 이루던 타임머신의 그 자리에서
아직도 너로 나인 소망 한그루 
바람처럼 그리움으로 불고 있습니다 

갈 길을 보고 
돌아올 길을 그려 보고
되돌려야 할 길을 빗질해 봅니다
가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소중한 빛깔로
색칠을 하면서

미완성 작품이지만
불안한 그림자이지만
울퉁불퉁한 당신의 바다가 거친 파장이었던 이유도 배웠고
기대일 언덕 없는 외로움도 알았습니다 

우리라는 따스한 언어에 
당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당당한 진실로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3》봄비 소리에

최병창

보이지 않는 진동이 
마법의 순간처럼 흐르고 있었네

겨울이 풀려날 즈음, 신기하게도
온몸의 세포가 느린 행진을 시작하고 
겨우내 묵혀 두었던 살갗 위 비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시점에

스멀스멀 온기가 온몸으로 살아나듯
채 마르지 않은 
낱말들이 미동하듯 흘러내리고 있네

목마름에 눈뜨려는 빗소리를 
기다리지 않은 생명 어디 있겠는가
소리마저 미끄러지듯 봄비가 흘러내리네

끌어 안듯 속내까지 흠뻑 적시며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장맛비보다
겨우내 묵혀둔 머릿결 잔잔히 빗어 내리듯
소리마저 외롭다고 서툴게 뒤척이는 
그래서 흠모하며 집중하는 봄비인가보네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어 
꽤 오랜 시간을 다듬은 순간,
누구라도 기다림을 살필 자유는 있는 것

봄비가 소리처럼 내리고 있네
소리가 봄비처럼 내리고 있네,
이 비 그치면 눈을 뜬 새싹들은 
펴지 못한 날개를 다독일 테고 
먼데 소리로 닫혀있던 눈과 귀도 불러들일 것이네. 

《84》봄비 

한효상

조용히 내리는 봄비 
들뜬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대와 마주 보며 
해 맑은 웃음 지며 걸었던
그 길에 어제 같은 비가 내린다 

라일락 꽃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우리 사랑
꽃피웠는데 

덩그런 그리움만 
내 가슴에 남겨 놓고서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나요 

《85》봄비 그리움 

한효상

그대 마음이 시리면
내 마음은 잘강잘강
찢어집니다

그대 가슴이 아리면
내 가슴은 멍울 져서
긴 밤을 뒤척입니다

찢겨져 구멍난 가슴엔
송곳바람이 웅웅 거리며
할퀴고 갑니다

그대 떠난 빈들엔 
초록이 움트고 봄비는 아픈 비가
되어 그리움을 키웁니다

《86》봄비

홍명여

오랜 침묵을 깨는
격정의 선율
늑골 깊숙이 파란이 일고 
촉촉이 스미는 리듬에 맞춰 
진통하는 대지
지구는 숨죽여 지켜보는데

풀싹,
어둠을 뚫고 일어서는 
저 여린 당참,
방울방울 맺히는 초록빛 꿈 
그대!
봄이다
찬란한 그리움이다.

《87》봄비

홍수희

사랑 때문에
울고 싶은 날이다

사랑 때문에
젖은 유리창이 되고 
싶은 날이다

추억상자를 조심스레 
열기만 열면

스프링처럼 간단히 
튀어 오를 것 같은

너의 웃음소리 
오간 데 없이

꽃은 피는데 자꾸 
피는데 지치도록 
그리운 얼굴 때문에

하루 왼종일 
빗물에 젖어 울어보고 
싶은 날이다, 봄비 

《88》사랑의 봄비 

홍종흡

겨울 눈 녹은 양지 녘에
들꽃 씨 하나 겨울잠 깨어나 
하늘 향해 하품하는 이른 봄날
솔바람 찾아오는 싸리울에는

매화나무 가지 끝마다
새초롬 피어나려 애쓰는 꽃눈이
첫날밤 지새운 아내의 눈처럼
불그스레 물들어 피어나는데

새벽일 마다 않고 일어나
아침상 차리는 아내의 손끝은 
선녀가 내민 손처럼 참으로 고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가

이제 고생 그만 시켜줄 게-!
머쓱해 한마디 하는 사내 눈에는
이른 봄 피어나는 매화 꽃눈처럼
사랑의 봄비가 흘러내린다

《89》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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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 모음>

★아침  /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맑은 아침  /정세훈

이 아침
내 오줌빛이
왜 이토록
푸르고
맑으냐

지난밤 그리운 사람 만나서
그 사람 술잔에 술 한 잔 쳐주었네

 ★ 아침 / 천상병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복이 있을지어다
좋은 하늘에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 오늘 아침에  / 이봉직

오늘 아침 골목에서
제일 처음 눈 맞춘 게 꽃이었으니
내 마음은 지금 꽃이 되어 있겠다.

오늘 아침 처음 들은 게
새가 불러 주는 노랫소리였으니
내 마음은 지금 새가 되어 있겠다.

그리고 숲길을 걸어 나오며
나뭇가지 흔들리는 걸 보았으니
내 마음은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있겠다.

가지마다 예쁜 꽃이 피고
새가 날아와 앉아 노래 부르는
그런 나무가 되어 있겠다.
 

★  아침  / 윤동주

휙,휙,휙
쇠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른 소엉덩이처럼 푸르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소.

잎,잎,풀잎마다 땀방울이 맺혔소.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 아침인사  /  조희선

그만 일어나시게
아침이 오셨네.

그대 고단한 여행길 지친 것은 내 아네만
그래도 오늘 하룻길 또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루만 더
하루만 더

그대 여독을 핑계삼아 쉬는 건 좋네만
그러다 아예
추억과 회한에 매여
다시 길 떠나지 못할까 걱정되네.

그만 일어나시게
그대 다녀온 그곳보다 더 좋은 풍경과 인연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네.

이제 그만 툭툭 털고 일어나시게
갈 길이 아직 더 남았으니… 

★  아침을 여는 소리  / 유명숙

주인님
어서 일어나세요
단잠 깨우는
휴대전화 알람 소리
부스스 일어나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잔뜩 찌푸린 얼굴
애써 외면하고
그 낯선 얼굴에
최면을 건다

일그러진 표정에
다림질한다
고르게 다듬어진
밝은 표정
그래
그게 바로 너야

기다랗게 드리워진
커튼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연다
맑은 햇살
상큼한 바람
아!
상쾌한 아침
활기찬
하루의 시작이다

★ 아침 햇살   /  박인걸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맑은 아침 햇살이
집무실 가득하게
평온으로 채우고 있다.

인사말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들어와
마음 가득 부어 주는
흘러넘치는 평화

영혼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을 자아나고
따스한 손길로
본성적 선(善)을 일깨운다.

어둠을 몰아내고
희망으로 채워주는
아침 햇살은 과연
누가 보낸 선물일까 


★  아침이 즐거운 이유  /  하영순

아침 햇살
밤새 내린 이슬을 간지를 때
이슬은 또르르 연잎에 구릅니다.

내 사랑 눈빛
몸으로 받으며
하늘은 푸르르 날개를 폅니다.

사랑이 있어
오늘이 즐겁고
사랑을 줄 수 있어 아침이 즐겁습니다.
우유 빛 해맑은 웃음

그 웃음이
닫힌 문을 열어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주고도  
주고도
주어도주어도  
모자라는 샘물 같은 내 사랑

아침이 즐거운 이유
그녀 때문입니다

 ★ 아침  /  신혜림

새벽이
하얀 모습으로 문 두드리면
햇살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난 대지는
부산스럽기만 하다

나들이를 꿈꾸며
이슬로 세수하는 꽃들
밤을 새운 개울물
지치지도 않는다

배부른 바람
안개를 거둬들이며
눈부시게
하루의 문을 연다

 ★ 아침  /  이해인

사랑하는 친구에게 처음 받은
시집의 첫 장을 열듯
오늘도 아침을 엽니다.

나에겐 오늘이 새날이듯
당신도 언제나 새사람이고
당신을 느끼는 내 마음도
언제나 새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던 날의
설레임으로
나의 하루는 눈을 뜨고

나는 당신을 향해
출렁이는 안타까운 강입니다.
 
★   새날 아침에  /  문태준

새날이 왔습니다.
아침 햇살을 따사롭게 입습니다.
햇살은 사랑의 음악처럼 부드럽습니다.
아침은 늘 긍정적입니다.
아침은 고개를 잘 끄덕이며 수긍하는,
배려심 많은 사람을 닮았습니다.

어제의 우울과 슬픔은
구름처럼 지나가버렸습니다.
어제의 곤란을 기억해내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습니다.
간단하게 어제의 그것을
이 아침에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면 됩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하루가 앞에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됩니다.
 
★ 아침 언어  /  이기철

저렇게 빨간 말을 토하려고
꽃들은 얼마나 지난밤을 참고 지냈을까
뿌리들은 또 얼마나 이파리들을 재촉했을까
그 빛깔에 닿기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저 뜨거운 꽃들의 언어

하루는 언제나 어린 아침을 데리고 온다
그 곁에서 풀잎이 깨어나고
밤은 별의 잠옷을 벗는다

아침만큼 자신만만한 얼굴은 없다
모든 신생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초록이 몸 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곁에서
사람을 기다려 보면 즐거우리라

내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꽃의 언어를 주고 싶지만
그러나 꽃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나무에서 길어낸 그 말은
나무처럼 신선할 것이다
초록에서 길어낸 그 말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모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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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 대한 시 모음 71편

《1》어떤 친구

강대실

백년가약이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가?
어떤 친구가 차량 실족으로
병상 신세 지다 목발로 나와, 결국엔
일터에서 늙은 도짓소같이 되더니
생활 전선에 나섰던 부인
알바에 보험에 방물장사로 돌다
사방에서 떼이어 빚만 쳐지고
친구 역시, 산 입에
거미줄 치게 할 수 없어 투자했더니
덜컥 덫에 걸려 날리고 빚에 치여
하나는 몇 십 년을 통째로 쥐어 준 봉투
어디다 숨겼냐 하고
한쪽은 여우한테 홀려 쪽박 찼다고
서로 너니 내니 하다
얼기설기 마련한 아파트며
묻어 둔 땅 몇 평까지 홀랑 넘겨주고
끝내는 도장 찍고 돌아섰다 하네
금이야 옥이야 하다가도
한 번 토라져 등 돌리면
부부간은 깨어진 그릇 되는가?
질그릇 깨고 놋그릇 장만 못할진대. 

《2》못난 친구

강민경

커피에 꿀을 넣으려다가
꿀단지 앞에서 엎어져 죽은
바퀴벌레를 보는데
사랑하는 사람 지척에 두고 그리워하다
더는 그리워하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친구가 생각난다

누군가는 전생에 인연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전생에 원수라 하였지만
그래, 그게 그렇지 않아,
긍정하고 부정하는 사이
이웃집 오빠였거나, 누이동생 같았을
지척에 제 사랑이 있는데
건너지 못할 강 앞에서 애만 태우다
요단강 건넜다는 그 소문처럼

바퀴벌레의 죽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불길에 뛰어든
그 친구의 생애 같아
평소에
바퀴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는 나에게
때아닌 측은지심이라니!

하찮은 바퀴벌레의 죽음을 보면서
사랑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하늘나라를 선택한 그 친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3》술에게 친구에게

강효수

술에 취한 건지
친구에게 취한 건지
친구가 술에 취한 건지
술이 친구에게 취한 건지

술이 술에 취한 건지
친구가 친구에 취한 건지
우리가 술에 취한 건지
술이 우리에게 취한 건지

술이여 내 친구여
그대 내게 오려거든
나비의 애벌레 대지의
봄 아드레날린으로 오라

달과 별 깨지던 밤 불면의
모르핀으로 오라
입술과 혀로 피는
심장의 꽃으로 오라
엔도르핀으로 오라

죽이려 하는 영혼과
죽을 수 없는 영혼
불멸의 촛불로 오라
엑스터시로 오라

영혼의 불꽃 만남으로 오라
얼어붙은 자아의 해방구로 오라
갈 수 없는 금단 구역의
출입증으로 오라
시체는 두고 오라 

《4》친구에게

곽정숙

깔끔한 너에겐
밝은 옷이 잘 어울릴 거야

수줍은 네 미소
영원히 지녔으면 좋을 거야

즐거울 때 같이 기뻐해 주고
못할 고민 있을 때 묵묵히 들어주고
바다가 보고 싶을 때
말없이 같이 가줄 수 있는
허물없고 마음이 넓은 너이길 바랠 거야

그냥 네가 보고 싶을 때
전화해도 귀찮아하지 않고
재잘대는 수다 다 들어주는
그러면서 힘이 되어주는
그런 친구였으면 한다.

《5》설화되어 가버린 산친구

권경업

밤새 눈 쌓인 자작나무 숲에
내려진 달빛이 모여
아침을 일깨우고
청봉을 넘던
동해의 푸른 바람이
그대 서있는 자리에서 머무노라

꿈길처럼 이어지는
공룡능선에
설화되어 흩날리다
가버린 산선배
오늘은 얼마나 귀가 시릴까

지천으로 피는 참꽃이
마등령 쪽에서 불타오를 때
우리는 선배가 남긴
산 노래를 백두대간에서 부르니

그대 영혼은
지금도 어느 설악의 골짜기를

《6》친구의 넋두리

권오범

못 배운 한 대물림 싫어
땅 팔고 소 팔어 먹물 멕여놨더니
써먹을 디 한군데 읍써 구들직장이니
복장 터질 수밖에

선보먼 퇴짜 맞어 장가는커녕
같이 늙어 가는 꼬락서니
집터가 삼살 방인지
조상 묘에 수맥이 흐르나

남의 자식들은 못 배웠어도 돈 잘 벌고
즈덜끼리 눈 맞어 잘두 살건만
허우대는 호랭이도 잡아먹게 생긴 것이
세상 겁나 입때껏 운전면허두 읍당게

허구한 날 컴퓨터 속 귀신과
고스톱만 치고 자빠졌으니, 위티게 헌댜
저 빌어먹을 꼴 보기 전에
내가 일찌감치 숟가락 놨어야 허넌디

《7》친구야

권옥희

우리의 떠남은
만남보다 먼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잔뜩 웅크린 고향 하늘을
품에 안고 가는 길은
비 오기 전의 정적처럼 늘 가슴이 먹먹했다

만만한 것 하나 없는 세상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살아도
오래된 그리움을 뭉텅뭉텅 잘라
베개 밑으로 숨기며
옹이처럼 단단해져 가는 그 먼 날들을
나는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안고 살았다

또 보자는 희망이 무거운 어깨에 얹어지고
잘 가라, 그래 잘 가라
애잔한 눈빛으로 발목을 잡아끄는
너의 안부를 못 잊은 듯 삼키면

내 가슴 여러 갈래에 너를 보낸 길이 나고
너무 많은 추억들이 바퀴자국 몇 개로
너를 따라가는 동안
나는 입이 얼얼하도록
친구야, 친구야! 부르고 있었다.

《8》친구에게

  권태원

오늘밤
별이 되어 뜨는 나의 사랑을
친구여, 너는 알고 있느냐

살아서도 죽어 가는
하느님의 빈 자리를
친구여, 너는 보고 있느냐

당신 앞에서 한없이 부서지고 있는
나의 생애를
친구여, 너는 느끼고 있느냐

《9》친구

김길남

어젯밤 꿈결에
먼저 간 친구를 만났다
아니 소문에 네가 갔다고 하던데 하니
친구 왈 지금 네 옆에 있는데 내가 어딜 가니

살아 생전 처럼
온 갖 얘기들을 얼마나 했는지
오랫만의 해후를 위해
술집에를 들렀다

한 참 너수레를 떨다
깨었더니 꿈이었다
아니 친구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날이 새면 전화-ㄹ 해 봐야 되는지 고민이다

생전 나와 같이 둘이서 산엘 가면
서로 앞 서거니 뒷 서거니 암벽도 빙벽도 같이 오르고
인생사 서로 토론하면서
식구들끼리도 오며 가며 그랬는데

《10》좋은 친구

김내식

먼 바다에서 육지로
뒷 물결에 밀려오는 파도
속절없는 겨울바람
밀어 대던 날

늘 푸른 소나무 숲 길
앞뒤로 걸어 오르며
떨어진 낙엽 밟고
흘러간 추억을 되살린다

짧아지는 햇볕 아래
과거를 다 아는 바람 맞으며
넓고 부드러운 바다를 끼고
한가로운 구름부부 함께 걷는다

멀리 밤으로 건너가는 다리 위
걸려 있는 낙조를 보며
부딪히는 술잔 속으로
황혼이 가라앉는다

《11》그 친구

김덕길

접속만 하면 방긋 웃음 보내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사이트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으면서 안부를 묻던 친구이었는데

장미꽃 곱게 피고
아카시아 향이 나풀거리는 오월이 되었을 때
꽃잎에 숨었는지
향기에 취해 잠 들었는지.
꼭 오월이 되었을 때
그 친구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
바다가 보고싶다 말했습니다.
섬에 가고 싶다 말했습니다.
어느 섬인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 빙그레 웃음 내 보이며
그리운 섬이라 말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잘 해준 것도 없었는데
바다 보여주겠단 약속도 못했는데
그리운 섬에 가자는 말도 못했는데
그 친구 그렇게 떠났습니다.

성남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
스치듯 한번쯤 그 친구 만났으면
이곳 저곳 사이트 항해하다
우연이라도 좋으니 한번만 보았으면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친구가
오늘은
자꾸 눈에 밟힙니다.
해 밝고 하늘 청아할 때 밟히지 않던
그 친구
우수에 찬 모습으로 구름 일렁이는
이 우중충한 날에는
추적 추적 비가 되어 내릴는지
자꾸만
내 눈가에 밟히고 있습니다.

《12》소식 마른 친구에게

김문숙

새벽 창으로 내어다 보니
큰 밤비 퍼부어
길 흥건 젖었구료

소식 마른 친구여
그대는 괞찮으뇨

그대 잠든 이 하룻 밤 사이
흠뻑 젖은 저 많은 사연
뉘, 다
읽어 내리까 만

나도 어서 잠들어
꿈으로 부치리다


《13》친구들이 그리운 날

김병훈

친구들이 그리운 날이면
소주한잔도 그리워집니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오늘 소주한잔 하자는
갑작스런 문자 메시지로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을
부끄러워 늘 숨겨 두었던
나의 소중한 친구들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서
늦은 밤까지 술잔을 들면
일상의 찌든 때로
메마르고 아팠던
사나이들의 뜨거운 가슴도
어느덧 술에 흠뻑 취해
희망으로 빛나는 별이 되어
서로를 다정하게 비추어주며
각자의 집을 향해 떠나지만
빈 술잔마다 남겨진 것은
나와 친구들의 깊고 진한
우정의 향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주한잔 그리운 날이면
보고픈 친구들에게
소주한잔 마시자고
문자 메시지를 보냅니다

《14》친구와 술

김병훈

내 휴대전화 단축번호
4번, 5번, 6번에
저장되어 있는 친구들
자칭 공인애주가 트리오와
나는 최근에 자주 술을 마셨다

성난 파도처럼 보이는
친구 A와 어제 만나서
나는 바다가 되어 술을 마셨다
바다처럼 친구 A의 괴로움을
조용히 들어주다가

검은 먹구름처럼 보이는
친구 B와 오늘 만나서
나는 하늘이 되어 술을 마셨다
하늘처럼 친구 B의 괴로움을
조용히 들어주다가

내일은 주인 잃은 낙타처럼 보이는
친구 C와 술 약속이 또 있는데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과연 나는 친구 C를 만나면
사막이 되어 술을 마실 수 있을까?

《15》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김소월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쓸데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었겠습니까!

오늘은 또다시, 당신의 가슴속, 속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

허수한 맘, 둘 곳 없는 心事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16》좋은 친구

김시천

가까이 있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대가 먼 산처럼 있어도
나는 그대가 보이고
그대가 보이지 않는 날에도
그대 더욱 깊은 강물로 내 가슴을 흘러가나니

마음 비우면
번잡할 것 하나 없는
무주공산
그대가 없어도 내가 있고
내가 없어도 그대가 있으니

가까이 있지 않아서
굳이 서운할 일이 무어랴

《17》친구

김안로

어둠을 보내고 다가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내 이마 위에 선


네 나중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나온 빛이었으나
내 시작은
또다시 무거운 눈을 떴지

내 손을 잡은 빛이여

《18》친구에게

김재진

어느 날 네가 메마른 들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면
소리 없이 구르는 개울 되어
네 곁에 흐르리라.

저물 녘 들판에 혼자 서서 네가
말없이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면
작지만 꺼지지 않는 모닥불 되어
네 곁에 타오르리라.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네가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다면
손수건 되어 네 눈물 닦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 내게 온다면
가만히 네 손 당겨 내 앞에 두고
네가 짓는 미소로 위로하리라.

《19》꽃 보다 친구

김종석

우리가 삼십 년 훌쩍 지난 날 만났었지
꽃씨 뿌리고 누군가 만들어 놨던
사이사이 꽃 길 걸으며 살아 왔는데

술, 마법의 목마름 채우고
그날 밤새 새로워진 길들의 향방
옛길을 더듬기 위하여 밤새 울부짖고

우리의 목소리는 도시 울리고
그 누구도 방해 하는 이 없어
도시도 잃어버린 길을 통곡하듯
어느 여름날 공원정자에서 밤을 세웠지

낡은 정자에 그 마법의 액체들과
삶은 돼지머리 반 조각과 양파와
매운 풋고추 된장 늙어버린 주름진
손길이 챙겨주는 대로 두 보따리

밤새 낡은 공원 정자는 지나버린
유행가의 울부짖음이 새벽 고요하게
바람불어 오며

지나간 세월 한탄과 파안대소가
밤새도록 도시는 잠 못 이루고
꽃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었네.

《20》그리운 친구

김종익

초록빛 시간여행은
그리운 눈물이 된다

따뜻한 고구마로
허기진 슬픔을
달래주던 다정했던 란이

억새풀로 노래하는
산들바람에 네 소식 물어도
고개만 살래살래 젓는다

냇물에 떠내려온 보름달에
소식 전해달라고
사연 적어보낸다

좋아한다고
수줍어 말못하고
가슴앓이만 했었다고

《21》내 친구는 다시

김준철

내 친구는 배를 움켜쥐고
낯익은 하늘에 별이 된다

별은,
별은 다시 신이고 싶다

더이상 무엇도 될 수 없는 신들의 외출에
사람들의 발길은 자신들의 동굴로 향하고
잊혀진 신들은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지만
개들만이 신경질적으로 하늘을 향해 짖는다

개처럼
개처럼 시간은 흘러
발정난 암캐의 울음소리에
밤은 새벽을 유산하고
그렇게 나른한 수음의 꿈으로 잠들려 한다

잠……
새벽녘 창틀에 끼어있는
햇살을 안고 잠든 친구가
아직은 깨어나지 않는다

친구는다시
사랑되지 않는 밤을 향해 돌아눕는다

《22》친구의 시집

김향숙

친구에게서 빌려 온 시집을 펼치니
마른 꽃잎 몇 장이 초르르 떨어진다

나보다 먼저 시를 만난 붉은 장미꽃잎
詩語의 가슴 어디 쯤에 젖은 몸을 부비어
애가 타고 목이 타고 입술 말라 갔을까

친구여
시보다 고운 그대 삶의 갈피마다
그 마음 꽃잎보다 향기로워라

《23》좋은 친구

나명옥

좋은 친구는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는 친구보다

친구의 기쁜 일에 질투나 시기함이 없이
함께 기뻐하고
웃으며 축하해줄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참다운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는
같이 어울리는 동안
혹 친구의 허물이 보여도 말하기 보다

그 친구만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해주고 감싸주며
오히려 그 허물마저
돋보이도록 해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좋은 친구는
서로의 간격이 없는
이미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무언의 동의를 얻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관계이기에
친구의 장단점마저
있는 그대로 아끼고 위하며
좋아해줄 수 있는
그 또한 자신의 한 그림자로 생각하는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친구입니다

《24》친구

류정숙

꽃가루 날리듯
오간 사연들
가슴에
화문으로
조각되고

노크 없이
찾아드는
향 묻은 꽃잎

기실 내겐
추억을 가두어 둘
빗장이 풀린지 오래다

무지개로
다리 놓은
가슴과 가슴 사이
크게 불러보는 날엔
환한 꽃잎이 핀다

《25》친구에게

박두순

친구야
너는 나에게 별이다.
하늘 마을 산자락에
망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별들
그 사이의 한 송이 별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둘레에서 돋아나는
별자리 되어
내 마음 하늘 환히 밝히는

기쁠 때도 별이다.
슬플 때도 별이다.

친구야
네가 사랑스러울 땐
사랑스런 만큼 별이 돋고
네가 미울 땐
미운 만큼 별이 돋았다.

친구야
숨길수록 빛을 내는 너는
어둔 밤에 별로 떠
내가 밝아진다.

《26》이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박영숙

꽃이 피는
외로운
봄날에는

격식과 예의를 떠나서
아무 때고 찾아가도
들꽃같이 순수한 미소로
두 팔 벌려 반기는
언니같이 다정한
이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비가 오는
슬픈 날에 찾아가면
무작정
흐르는 내 눈물 이해하며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내 슬픔 잠재울 수 있는
포근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엄마 같은
이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거짓과
숫자만이 넘실대는
인파 속을 헤쳐나갈 때면
물같이 투명한 충고와
칼날 같은 지혜로
바른길로 이끌 수 있는
선생님 같이 자상한
이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회색 빛 좌절이
거센 바람을 몰고 와서
넝마처럼 방황할 때가 내게 온다면
여명의 빛같이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는 봄비같이
언제나
희망과 사랑의 손 내미는
수도자 같은
이런 친구가 그리워진다

《27》그리운 친구들

박정순

구멍 난 검정고무신을 움켜쥔 채
운동장을 종횡무진으로
치닫던 코 흘리게 친구

여학생 고무줄놀이만 보면
끊고 다니던 개구쟁이 친구들
지금은 어데서 뭘 할까

빛 바랜 플라타너스 낙엽사이로
조각난 달빛이 얼굴을 여 밀면
가버린 추억들의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이제라도 다시 그 순간들
소쿠리로 주섬주섬 담아보려 해도
술술 빠져버린 시간들

잊혀진 추억들 한 움큼이라도 있으면
다시는 붙잡고 놓지 않으련만
어디서 쑥부쟁이 꽃처럼 부시시 웃고 있을까

아직도 그 허름한 운동장은
나를 부르고 있지만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추억

즐거웠던 순간들을
세월에 물려주고
추억의 고목에 기대여 있다 

《28》초등 친구

박태강

같이 뛰놀다 배우며
싸우면서 정이 든 친구
만나지 않아도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

각기 다른 길을 걸어
헤어진지 반세기 얼굴엔 골이 패이고
삶의 자욱 남아도
아이 그대로인 친구 만나 즐거웠노라.

걸어온 길 달라도
옛날 돌아가는 길 순간으로 짧아
너, 나, 모두가 하나되어
옛이야기 꽃피울 때 진정 행복하였다.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않아도
그리운 친구야
또다시 만날 수 있게 건강하여라

다음 또 웃으면서 만날 친구
저문 날의 달빛처럼
우리 밝히는 그리움은
잔잔한 행복이어라.

《29》친구

박현수

늦은 밤 친구가 그리울 때
불꺼진 방에서 수화기를 더듬는다.

익숙한 손놀림
수화기 건너 편한 목소리

응…… 나야……
그냥 후후 비가 와서

별다른 대화가 없어도
너의 숨소리만 들을 수 있으면……

늘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네 이름 석자에서 위안을 느낀다.

응…… 나……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지금도 나는 전화기를 더듬는다.
지금도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30》이런 친구가 좋다

송정숙

별빛도 한 잔 달빛도 한 잔
한 잔 술로 취하고 싶을 때
가끔은 눈물, 콧물에
주절이 궁상도 떨지만
어느 날은 빙그레 웃으며
시 한 구절 쓰는 친구가 좋다

누룩처럼 피는 곰팡이 벗삼아
푸른 하늘 있던가 모르다
눈사람을 만들고 허물다
모자가 필요하다며
이 모자 저 모자 씌우다
뛰어오라는 친구가 좋다

《31》보고 싶은 친구에게

신경숙

보고 싶은 친구에게
친구야, 해가 저물고 있다.
어두운 불투명의 고요가 찾아오면
난 버릇처럼 너를 그린다.
너의 모습,
네가 떠난 설움처럼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보고싶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의 미완성 작품처럼
자꾸만 보고 싶은 너.
우리가 이 다음에 만날 때는 어떤 연인보다도
아름답고 다정한 미소를 나누자.
나는 너에게
꼭 필요한 친구, 없어서는 안 되는 친구가 되고 싶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야!
해가 저물고 있다.
이렇게 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고 있다.

울어 본 적 있는 친구가

《32》친구

신순균

어릴 때부터
미운정 고운정 들어
가까이 하는 친구가 있다

멀리 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막연한 친구가 있다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친구
그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의 분신이 있다

만나면 부담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친구가 있다

있으나 마나 한 친구
내 삶에 백해무익한
골치 아픈 친구가 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목숨 바쳐 희생한
생명의 주인이 있다

《33》그 친구 생각난다

신재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었는데
웃고 즐긴 시간들 신이 났었는데
바람불어도 그리 춥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난히 생각난다.
그 친구 생각난다.
언젠가 그 모습 잊을까봐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질까봐
뚜렷이 바라보던 그 친구,
이제는 얼굴마저 희미해진다.

《34》보고 싶은 친구에게

신재순

친구야,
해가 저물고 있다.
어두운 불투명의 고요가 찾아오면
난 버릇처럼 너를 그린다.
너의 모습,
네가 떠난 설움처럼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보고 싶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의 미완성 작품처럼
자꾸만 보고 싶은 너.
우리가 이 다음에 만날 때는 어떤 연인보다도
아름답고 다정한 미소를 나누자.
나는 너에게
꼭 필요한 친구, 없어선 안 되는 친구가 되고 싶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야!
해가 저물고 있다.
이렇게 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고 있다.

《35》친구에게

심억수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에겐 함께할 친구가 많다고
그러나 정작 같이 있고 싶을 때
함께할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것을 느낍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에겐 좋은 친구가 많다고
그러나 정작 축하해줄 자리에
함께 할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기쁨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에겐 마음을 같이할 친구가 많다고
그러나 정작 외롭고 괴로울 때
달래줄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는것을 느낍니다.
내가 슬픔에 처해있을 때……

많은 생각속에 살아가는 세월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것은
내 가까이에 있는 친구라 생각합니다.

평생을 함께할
내 마음에 안식을줄
내 말에 귀 기울여줄
내 울음에 눈물 닦아줄
내 웃음에 기뻐해줄
그런 친구가 얼마나 있는지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눈을 감고 생각해 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나에게 득이 되든 실이 되든
그대가
나에겐
진정한 친구랍니다.

《36》사랑을 찾는 친구에게

심홍섭

친구를 위해
여기 영혼의 쉼터
안식의 의자
하나
비어 놓았습니다
별처럼
달처럼
살고픈 그대를 위해
사랑 하나
사랑 둘
사랑 셋
사랑의 메아리
가슴에 메아리 칠 때
휴식의 바다
밀물처럼
다가옵니다.

《37》소중한 친구에게

안근찬

친구라는 말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우정보다 소중한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친구
소중한 우정이길 바랍니다.

가끔 사랑이란 말이 오고가도
아무 부담없는 친구,

혼자울고있을때 아무말없이
다가와 "힘내"라고 말해주는 당신은
바로 내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당신의 어떤 마음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친구이고 싶습니다.

함께있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칭찬하는 친구이고 싶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당신이 있으면,
당신도 내가 있으면 만족하는
그런친구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행복이 없다면 그 행복을 찾아 줄 수 있고,
당신에게 불행이 있다면,
그불행을 물리칠 수 있는 친구이고 싶습니다.

각자의 만족보다는 서로의 만족에
더 즐거워하는 그런 친구이고 싶습니다.

사랑보다는 우정, 우정보다는 진실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친구이고 싶습니다.

고맙다는 말대신 아무말 없이 미소로 답할 수 있고,
둘 보다는 하나라는 말이 더잘 어울리며,
당신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 수 있는 그런 친구이고 싶습니다.
아무말이 없어도 같은 것을 느끼고
나를 속인다해도 전혀 미움이 없으며,
당신의 나쁜점을 덜어줄수 있는
그런친구이고 싶습니다.

잠시의 행복이나 웃음보다는 가슴깊이
남을 수 있는 행복이 더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친구 보다는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아낌의 소중함보다 믿음의 소중함을 더 중요시하는
먼 곳에서도 서로를 믿고 생각하는 친구이고 싶습니다.

당신보다 더 소중한 친구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에게 처음으로 행복을 가르쳐준 친구,
당신을 위해 늘 기도 하겠습니다.

《38》친구들

오하룡

만나자 해서 만나면 술판만 벌이는 친구들
서로 얼굴보고는 그만 쉽게 취해버리는 친구들
하나 쓸거리 없는 농담 잡담 질편히 쏟으며
실성한 것 같이 허허거리다가
유행가나 내 지르다가
한바탕 꿈꾼 기분 그 뿐
만나자 해서 만나면 술판만 벌이는 친구들

《39》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

용혜원

친구야!
우리가 꿈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

그때마다
우리들 마음에
꽃으로 피어나더니
아이들의 비누방울 마냥 크고 작게
하늘로 하늘로 퍼져 나갔다.

친구야!
우리들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커다랗게 웃었지.
우리들의 꿈이 산산이 깨져버렸을 때,
얼싸안고 울었다.
욕심 없던 날
우리들의 꿈은 하나였지.

친구야!
너를 부른다.
네가 내 가슴에 없는 날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40》고향 친구

유소례

따르릉……따르릉……
간이역을 굴절해 오는
폰 벨의 울림
세월을 껴입고 변색 된 음성이
내 가슴을 절이게 한다

고향은 간이역,
지치면 쉬어 가는 쉼터
정수리 위 별들은
너의 별, 나의 별
전선을 굴러 온 목소리는
가슴 설레는 네 별의 진동이다

서로 폰을 타고 나와
간이녁에 앉아서
포로 된 현실의 겉치레를 뜯어내고
별빛 속에 들어가
까마득히 묻어놓은 보고를 열어
푹 익은 풀빛 추억을 마셔본다 . 

《41》그대의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윤석구

내가 쓸쓸하고 허전할 때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친구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삶에 힘들어 할 때
따스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 주고, 위로 받는
가슴에 새긴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혼자라는 쓸쓸함에 밀려오는
외롭고 허전한 가슴의 울부짖음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고
조용히 들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우정을
가슴에 심은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서로 살아가는 하늘이 다르고
별꽃 모양이 다른 밤길을 걸어도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으로
그대의 영혼과 함께
인생의 들길을 걸을 수 있는
진정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
아주 가끔 목소리한번 들어도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찬란한 우정의 꽃으로
믿음직한 가슴을 지닌
그대의 소중한 친구이고 싶습니다

《42》친구

윤용기

오랜 시간의 벽을 쌓고 쌓아
살아 온 날들
전화벨이 울렸다.
새롭게 옛 영상이
순식간에 피---익 돌아간다.
너무 낡은 필름 속으로
나 자신도 빨려 들어간다.
아롱아롱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까까머리 중학시절로
되돌아간다.
세사의 고된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 있는
들꽃이 되어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친구야!
그 오랜 시간 속에
꽃피어 온 우정
가슴을 화알짝 열고
아름답게 피어 보렴아. 

《43》오래된 친구

윤의섭

그를 만나면
거울과 같은 얼굴이
나를 대하고
자리를 함께 할 때는
그림자 같이 가깝네

심성이 우물같이 깊으니
믿음이 깊고
바다와 같은 넓은 배려
편안함이 그지없네

삶에 지쳤을 때
소리 없이 위로를 주는

아!
오랜 시간을 농익은
나의 친구여!

《44》곁에 있으면 좋은 친구

이남일

뜰안에 친구하나 심고 싶다.
밤마다 달빛 가득 찾아올 때면
못 가에 그윽한 향기 화답하는
화사한 꽃 한 송이 피우고 싶다.

숲속에 친구하나 만나고 싶다.
종일 나무가지에 귀대고
지저귀는 노래 가슴에 담아도 좋을
작은 새 하나 부르고 싶다.

강가에 친구하나 노닐고 싶다.
별처럼 맑은 눈빛으로
부드러운 강바람과 만나는
언덕 위에 정자 하나 짓고 싶다.

마음의 향기 이슬로 영글었다가
아침이면 따뜻한 차 한잔 내어놓는
늘 곁에 있으면 좋은
친구 하나 만나고 싶다.

《45》내 친구

이문조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내 친구

밖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하고
구수한 육두문자(肉頭文字)도
곧잘하는데

집에만 들어가면
진짜 갱상도
말 없는 그 사나이

아(童)는……
밥(食)도……
자자……

《46》친구

이민숙

왼손을 내밀면
오른손 내밀어 손잡고
지친 어깨를 두드리던 친구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조용히 가슴과 눈빛으로 말하며
낙심했던 마음 위로했던 친구

고난이 닥쳐 눈물 흘리면
손수건 접어 건네며
말없이 일을 해결하고
웃어 주던 친구

주름살 마냥 늘어난 세월 앞에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고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살다 문득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때 꼭 떠오르는 얼굴

그립기만 하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친구

《47》친구라는 건

이성민

나와 너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이 더 정겨운 것이
친구라는 거지.
내가 지닌 고통의 무게보다
네가 보인 눈물 방울에
더 가슴 아픈게 친구의 마음.
친구라는 건
어느 지루한 오후 불쑥 날아든
한 통의 편지 같은 기쁨.
때론 모든 것에 너무나 실망해서
내 마음도 차갑게 얼어붙지만
잡아주는 따스한 네 손길이
세상엔 아직 잃어버린 사랑보다는
베풀어야 할 사랑이 많다는 걸 가르쳐 주지.
내게 남는 것을 나누어주기보다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줄수 있는,
친구의 사랑은 바로 그런걸 꺼야.
친구라는 건
너무 힘이 들어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라도
변함 없이 따사로운 웃음으로
다시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게 하는
그런 희망 같은 거란다.

《48》친구에게

이재호

이 세상에서
친구보다 더 값진 길이 있을까?

이 세상에서
친구보다 더 빛나는
그 어떤 발견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일이다.

내 괴로움을
그대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오는 들길에서
종달새의 노래 소리를 듣는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세월이 흘러 가더라도

우정이란
영원한 종교처럼
언제나 새롭고 거룩한 일이기에

친구여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뿐인
우정의 믿음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갈 일이다.

《49》별을 보며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티 없이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데까지 많은 이를 비춰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50》친구랑 장날에

이향아

내 창자 속까지 안다는 친구
그 친구 불러내어 장에나 가고 싶다.
화순 장날이나 담양 장날 언젠가
하루 골라서
기웃거려 반나절은 지나가게 두고
장터 국밥 허름한 포장을 밀면
와락 달려드는 눈물 같은 훈김
삐걱대는 걸상에 아무렇게 걸터앉아
숭덩숭덩 조선 파 듬뿍 얹어야지
뚝배기 넘치게 밥을 말아야지
세상이 변했어,
인심도 변했어
우리는 입 안 가득 세월을 씹으면서
파장이야
파장이야 웨쳐도 좋아.
떨이야 떨이야 목을 놓아도 좋아
친구 하나 불러서 장에나 가고 싶다.

《51》친구 안부

이현기

건강한가
모두 묻지 않았 다네
야속다 하지 마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침묵으로 말 했지
무거운 침묵으로
이 사람
노장 친구 들아
이제 철이 들었나
외 로움이야
외로움 속으로 들어 가면
그만 이지
소박한 친구 처럼
배우지 못하고
살아간 그대가 더 좋아
형 아우 내것 네것
없이 살아간
소박한 친구들
오늘은 핏대 올리며
눈 부라리고
삿 대질 하 다가도
내일은 웃어 버리던
친구들……
꾹 참아 버린
아름 다운 인내
우리 시간 이었다
가슴에 숨은 앙금
바다 깊은 물에
밀려 보냈지
비까지 내리던 날 이면
대포집
한사발 회포 푸는
참 아름다운 시간 이었다
언제나 맘 언저리에
숨어 있는 사연……
불쑥 나타날 때면
참기 어려운 시간들
어제도 오늘도
안부 묻지 않았다네
용서 하게나

《52》친구와의 추억

임계자

호롱불빛 머금은 문 창호 사이로
초승달 따라 떠나버린 친구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었다면

개구멍 앞에서 민들레꽃 들여다보던
여울목에서 뒷걸음질하여
달아나지 않았을 것을

거미줄에 달려있는 이슬방울에서도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잔솔밭 바람이 잠들고 나니
총총이 박혀있는 추억들이
떠나버린 슬픈 초승달빛 되어
담 없는 추억을 비추네

어제도 오늘도
이제까지 그 모습들 별처럼 빛나서
발길에 차이는 조약돌 하나에게도
떠나 보내고 싶지 않는
너와 나의 우정의 추억이 아니던가

《53》친구와 함께

이임영

마음에 맞는 친구와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일에 관해서도 좋고
사랑에 관해서 건
아니면 가족이나 삶에 관해서
같은 시절 같은 공간에 머물러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시절
삶의 곳곳에 섭렵했거나
미완으로 매듭지어졌던
보따리 다 풀어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삶의 노고에 대해 위로해주고
늦은 오후의 햇살의 여유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으나
선하고 온화한 중년의 여유를 누려보고 싶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돼보기도 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열변도 늘어놓으면
쉽게 코드가 조율되어질 수 있고
마음을 나눠서 채워가질 수 있어서
서로에게 할애 한 시간에 대해
보람을 만끽할 수 있는
친구가 있음을 확인해보고 싶다

헤어지고 나면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가슴 가득 채운 기쁨의 충만감으로도
두고두고 삶의 힘이 되는
친구와 함께 하고싶다

《54》이런 친구가 됐으면 해

정승혜

반짝 하다 사라지는 유행가보다
가끔 들어도
어느새 가사를 외워버린
순간순간 다른 느낌을 주는
그런 음악 같은 친구

기쁠때보다
힘들고 외로울때
망설임 없이 연락할 수 있는
목소리만으로
서로를 느끼는 친구

사람들이 그러잖아
진실한 친구 세 명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그 중에 하나가 나이고 싶어

《55》이런 친구가 됐으면 해

정승혜

반짝 하다 사라지는 유행가보다
가끔 들어도
어느새 가사를 외워버린
순간순간 다른 느낌을 주는
그런 음악 같은 친구

기쁠때보다
힘들고 외로울때
망설임 없이 연락할 수 있는
목소리만으로
서로를 느끼는 친구

사람들이 그러잖아
진실한 친구 세 명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그 중에 하나가 나이고 싶어

《56》외로운 벗에게

조병화

고독하십니까,
운명이옵니다

몹시 그립고 쓸쓸하고, 외롭습니까,
운명이옵니다

어이없는 배신을 느끼십니까,
운명이옵니다

고립무원, 온 천하에 홀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계시옵니까
그것도 당신의 운명이옵니다

아,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전생의 약속인 것을
그곳에 그렇게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 있는 것도
이곳에 이렇게
가랑잎이 소리 없이 내리는 것도

《57》친구

천양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58》나의 친구

최다원

나의 친구는 남의 어려움을 보려한다
나의 친구는 남의 말을 새겨듣는다
나의 친구는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남을 대한다
나의 친구는 남을 존경하는 태도를 갖는다
나의 친구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말을 한다
나의 친구는 늘 신중하게 행동한다
나의 친구는 의문점이 발견되면 풀려 애쓴다
나의 친구는 화나는 일에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나의 친구는 정의롭게 이득을 얻는다
나의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할까 

《59》친구야

최대희

보고 싶다 친구야 라는
말을 들으면
어두웠던 마음이 보름달처럼
환해지지요

보고 싶다 친구야 라는
말을 들으면
한겨울의 외로움도 군고구마처럼
따듯하지요

보고 싶다 친구야 라는
말을 들으면
봄날의 버들눈처럼
새 희망이 움트지요

비가 오는 날
활짝 핀 우산을 건네주는
둥근 마음 그리워

오늘, 그대에게
보고 싶다 친구야 라고
편지를 씁니다.

《60》친구에게

최복현

친구야
널 한 번도 미워해 본 적이 없어
나를 멀리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네가 밉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미웠어

이렇게 비가 오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리울 땐
자꾸 네 생각이 나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우정이란 걸 넌 아니?
사랑보다 더 깊은 추억을
새겨 준 친구야

《61》친구의 편지

최영희

친구에게서
고향의 구름을 걷어 쓴 편지가 왔습니다

우리가 향수에 젖는 것은
풀 내 나는 비릿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끝에 묻어, 끝도 없이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이끼로 내려앉는
습한 그림자 하나 걷지 못하는
애틋함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우리 가슴에는
언제나 허공에 너울지는
고향을 향한 영혼의 몸짓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나고 지는
풀 한 포기도 제 뿌리내린 흙의 내음은
쉽게 덜지 못 하겠거니
우리 가슴에는 늘, 안개처럼 젖어드는
고향이 있었습니다
친구여,
내게 보내 온 편지는 잔잔한 바람이었습니다
누었던 풀 포기가 바람에 일렁이듯
우리의 서러웠던 기억까지 그리움의 물결을 이룹니다
편지 속에는, 학교 가는 길
한낮의 굽이를 넘기는 애절하던 새소리,
그리고 가슴을 에이듯 씽씽 울어 대던
놋재를 돌아온 바람소리도 들립니다
그곳이,
그곳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62》친구란

U. 샤퍼

친구란
같이 웃어 줄 사람
같이 울어 줄 사람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며
같이 싸워 줄 사람

친구란
가장 귀한 재산이며,
지극한 기쁨이며,
애정으로 포장하고,
완벽으로 줄을 맨

친구란
하늘로부터의 선물

《63》한 둘

허형만

이만큼 살다보니
함께 나이 든 친구 한 둘
뭐 하냐 밥 먹자
전화해주는 게 고맙다

이만큼 살다보니
보이지 않던 산 빛도 한 둘
들리지 않던 풍경소리도 한 둘
맑은 생각 속에 자리잡아 가고

아꼈던 제자 한 둘
선생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말 건네주는 게 고맙다

《64》친구 시인

홍경임

이 날 이 때 까지 가난 아귀와 동거하는
친구 시인이 있다

장녀였던 그녀는 열일곱살때 부터
집안 청소 시장 보기 국수가게 부수러기 국수 줍기

열여섯 열일곱 학교 다니며
공장에서 미싱시다 일하기

열 여덟 살 회사에 급사로 들어가 야간학교 다니며
낮에는
남 출근하기 전 3시간
남 퇴근 후 3시간 더 일하여 수당 받아
식구 먹여 살리기

가진 거라곤 불알뿐인 남편과 사랑으로 결혼하여
십육년간 월세방 전전하다
간만에 전세방 하나 얻었는데
시동생 약 먹고 죽는다 자살 소동 벌여
병원비로 전셋돈 마저 날아갔단다

이제 달거리도 끊긴 마흔 후반의 여인
고물로 모은 헌 책장사 너무 힘이 들어
집어치우곤 요사인 Y시 외곽에서
꽃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이름하여 꽃 편지 꽃가게를 하며
오늘도 손님들께 향기 없는 환한 미소로 꽃을 판다.

《65》친구

홍수희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항상 조잘댈 준비가 되어 있지
체면도 위선도 필요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웃을 수 있지
애정이 있으되 묶어 놓을 이유가 없네
사랑하되 질투할 이유도 없네

다만 바라거니
어디에서건 너의 삶에 충실하기를
마음 허전할 때에
벗이 있음을 기억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셨네
우정의 나뭇가지에 깃든
날갯짓 아름다운 새를 주셨네

《66》내 사랑 친구

김옥준

마음속 밑바닥 무명 자리에
자리 깔고 누운 그리움
그, 그리움 속 공허함 비집고
그 우정은 내 가슴 속 깊이
한뼘 한뼘 그 불량을 키워 갔지
한때는 솟구치는 감정을 포개면
찻집으로 밥집으로
헤매면 우정을 키웠지
친구는 날이 갈수록 무장된
언어의 마술사로 언제나 본인 뜻대로
합리화시키면 난 늘 매료되고
부족한 나의 가슴을 메우면
촌스런 나의 행동을 휘감았지
싱글이란 너의 자유를 만끽했지만
웃음으로 코팅된 뒷모습엔
진한 고독의 외로움이 흐르고 있었지
그 고독 그 외로움
어루만져 주지 못한 이 친구
이해하겠니
용서하겠니
제대로 따뜻한 차림새도 하지 못하고
뜨거운 가슴 열어 보이지도 못하고
만나면 늘 그렇게 바삐 돌아가곤 했지
우정은 파랗게 파랗게 새봄에도 잘 자라겠지
우리 두 사람 잘 키웠으니까

《67》보고 싶다 친구야

노정혜

다정 다감한 친구야
어디서 무얼 하나
꽃 진자리에 초록으로 물던 지금
너무 보고 싶다
친구야! 꿈 많은 소녀
우리는 서로 경쟁하며 공부했지
정 많은 내 친구야
각자의 독특한 개성
꿈 많은 소녀
지금은 노을 진 언덕
우리는 많이들 변했지
지금의 모습 어떻게 변했나
행여 만나면 몰라 볼가 두렵기도 해
보고 싶은 내 친구들
서녘 노을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
부르고 싶은 내 친구들
건강하게 아름답게 익으가길

오늘 밤 꿈속에서
우리 같이 만나자

《68》친구

문정희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누가 몰랐으랴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끝까지 함께 갈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언젠가가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홀연 다가와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69》추억 속의 친구

용혜원

추억 속에
얼굴로만
남아 있던
친구가

낙엽 지던 날
전화를 했다

"늘 보고 싶었다"고
"늘 보고 싶었다"고

추억 속에
얼굴로만
남아 있던
친구가

눈이 오던 날
전화를 했다

"늘 기억하고 있었다"고
"늘 기억하고 있었다"고

《70》친구에게

전혜령

오늘은
문득 멀리 있는 친구에게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합니다.

날은 점차 어두워지고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면
작은 별 하나 떠오릅니다

그 별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친구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집니다.

삶은 타오르는 촛불처럼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누군가에게 빛을 던지는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됩니다.

문득 작은 별 위에
사랑 하나 걸어두고 싶습니다.

《71》애인 같은 친구

이호길

삶이 힘들어 피곤할 때
초라한 선술집에서
가을밤처럼 깊은 우정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어쩌다
비 갠 오후처럼
싱그러운 마음이 들면
분위기 있는 노래방에 가
서로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책갈피처럼 단짝인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그립지만
언제나 부담이 되지않고
좋은 마음으로 지켜주는
애인 같은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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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시 모음 70편

《1》찔레꽃

강금중

한라산 바람
망월동 푸른 벌판에
찔레꽃 두고 왔다

수의를 찢긴 가슴
섧은 꽃
무덤을 감싼 찔레꽃


사안
사람이
우리의 말 전할 수 없음
안다

아직
한라 혼백은
시들은 찔레꽃

바당 속 누이들
앙가슴
섧다

《2》찔레꽃

고은영


보아주는 이 없는
깊은 산,
그래서
물빛 서러움일레라

하이얀 미소
순결의 서약으로 떠도는
슬픈 입맞춤
외로운 몸짓일레라

우수수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깊은 언어의 침묵
아, 고독한 사랑일레라

천년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임을 그리다
이는 바람에 포물선 그리는
너의 하얀 비망록

《3》찔레꽃

공재동

찔레꽃은
서러운 꽃
눈물나는 꽃

배고픈 설움을
뻐꾸기는 알아

학교 갔다
돌아오는
십리 산길에

누나가 따서 먹던
하얀 찔레꽃.

배고파
따서 먹던
눈물의 꽃
찔레꽃.

《4》하얀 찔레꽃 향기 따라서

공재룡

무너진 산비탈 황톳길 돌아서
해맑은 방울방울 하얀 찔레꽃
향기 가득히 고운 미소짓는다.

어릴 적 오빠 등에 잠들었던
철부지 누이가 고운 여인 되어
소꿉친구 돌이네! 시집을 갔다.

구름 머무는 찔레꽃 숲길 돌아
떠날 때 울던 누이가 오려는가.
종일 앞산에 까치만 울어댄다.

《5》찔레꽃

권도중

못 보고 살아도
가시처럼 닿았다

내 구원이
절절했던
귀한 사람아

찔레꽃
절면서 마을 밖
저 끝을 가고 있다

새순 쭉쭉 꿈을 누르고
간절함이 울며 온다

받아줄 데 없는 마음
쪽지 쪽지로 하얗다

순정은 갈 곳 없어서
진 꽃잎 모아
가슴 덮는다

《6》찔레꽃

권경업

그 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한없이 투명한 가을하늘
가을하늘에 핀 찔레꽃이었습니다

아니 아니, 지금 피어서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나려고
깔딱고개로 깔딱고개로
무서리는 넘어 와

아픔 몇 없다면 어찌 세상일일까

보시오, 땅 위는 다 아픔이라오
도선사 대웅전 부연 끝
뎅그렁, 풍경(風磬)을 울리며
가을하늘 날아오는 물고기 한 마리

아! 윤회(輪廻)의 이 봄날
내 안에, 내 안에 가득한 만다라
하얀 찔레꽃 덤불

《7》그대 내 마음에 찔레꽃 향기 같이

한휘준

그대 사랑은
먼 산 속에 있을지라도
내 마음에 찔레꽃향기같이
살풋 살풋 나래 쳐 온다.

그대 사랑의 체취는
파아란 하늘 그득
내 가슴에 은은히 아려온다.

그대 사랑은 깊은 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잠들지 못하는 향 짙은 그리움이다.

찔레꽃 깊은 밤 소리 없이
진한향수 흩뿌리고 다가서는
하얀 달빛의 미소 띤 순백의 사랑이다.

그대 사랑은
깊어 갈수록 피 흘려야 하는
가슴앓이 가시 상처가 있는
숨어 울음 우는 사랑이다.

영롱한 이슬 같은
고독이 밤을 지새우다 못해
풀잎마다 송알송알 맺히도록
잠들지 못하는 향 짙은 그리움이다.

그대 사랑은
먼 산속에 있을지라도
내 마음에 찔레꽃 진한 향기같이
하얗게 울려온다.

그대 사랑은
접동 접동 접동새 울음이 되어
밤새 목이 메이도록
깊은 산속을 메아리 치는
피울음 삼키우 듯 애달픈 그리움이다.

《8》찔레꽃

김경렬

오매불망 그리움에
달빛도 녹아들고

가시가 가슴을
깊게 파고들어도

님 향한 일념에
빨간 염낭을 키운다

《9》찔레꽃

김귀녀

찔레꽃 피는 오월
낙산사 가는 길
날 건드리지 마세요. 가시 도친 말
나를 부른 건가요?

오월 고개를 넘는 찔레꽃 향기
하얗게 피우는 봄밤에
나도 당신에게 가시 도친 말

당신에게 서운하게 한 말
날 건드리지 마세요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슬픔 툭툭 흘리며
달빛 받으며

미안타
미안타

《10》찔레꽃

김근이

황토 언덕에
기다림도 바램도 없는
시간에 밀려와
여기, 가난을 자리한
소박한 화심

황혼의 애걸에
호소로 뭍일듯

어느 눈밭 길에서 줏어온
무뉘도 아닌
소복 단장한 옷 매무새에
여미는 저녁 바람이 차
움추린 송이송이

그리움에 지친 얼굴로
돌아와 마주서면
단정히 옷깃을 여미며
송이송이
눈물로 보내주는 꽃 잎파리 

《11》찔레꽃 연가

김근이

찬바람 몰아치던 들판에서
가시 넝쿨 위로
그리움으로 태운
빨간 열매 매달고
서리 맞고 눈비 맞으며
오직 이 날을 기다려
그리움으로 피운 내 꽃이여

오월을 건너온
작은 바람결에도
수줍어 움 추리며
애띈 소녀의 미소 같은 모습으로
짧은 기간 내 마음을 사로잡아준
그 정 아쉬움으로 맺어놓은
푸른 열매 매달고
유월 한 달음을 힘겹게
달려가는 내 사랑아

들판에서 산비탈에서
계곡에서 외로움 도사려 안고
푸른 태양을 이고
오직 순정으로만 자라 그라
여름가고
가을 서리에
네 사랑이 붉게 익어 가는 날
비로써 나는 네 사랑을
온 몸으로 감사 안으리

《12》하얀 찔레꽃

김길자

가난의 눈물인가
삶을 딛고 돋아난 아픔인가
허공에 하소연하는 향기에
서슬 퍼런 가시로도 지킬 수 없는
푸른달* 며칠
뻐꾸기소리 산울림 구비돌 때
아침 햇살이 달콤하여
가슴 뭉클하도록 평화롭게 피어
끈적끈적 떠나지 않는 벌 같은 사랑
꾸밈없는 그 다솜*
내 안에 가시로 박혀
나는 기억 속에 잠시 맴돌다
언젠가, 나에게도 오월이 오면
비에 흠뻑 젖은 여인을 찾아
흰모시적삼 앞섶에 피어나리라

《13》찔레꽃 사랑

김덕성

그것이 네 마음이요
네가 아닌가

수줍어
숲 속에 깊숙이 숨은
하얀 찔레꽃

비록 여리지만
햇살에 곱게 빛나는 하얀 얼굴
내 마음을 비추는구나.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네 진심을
모를 리 있겠는가

사랑을 지닌
눈부신 하얀 순결
내 마음 가득 담아 기억하고 싶어

이제는
네게 향한
내 사랑을 알아주겠지? 

《14》찔레꽃

김선옥

오솔길 옆에 하얗게 핀 찔레꽃
진한 향기는 없어도
그윽한 눈길로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네
연한 가시로 온몸을 감싸고
님 그려 지키는 정절이
한없이 고와 보이네
꽃그늘 밑에 누워 쳐다보는
파아란 하늘은
온통 그리운 님의 얼굴로
가득히 다가오네
연한 새순을 꺾어 입에 씹으며
배가 고파 찔레순을 꺾어 먹든
옛날을 회억하네
희디흰 찔레꽃이 뭉텅이로 핀
그 오솔길
봄바람에 실려 오는 그윽한 향기가
온 가슴을 그리움으로 물들이네

《15》찔레꽃

김신오

곱디곱게
꽃으로 피어나
내 밥 먹고
열심히 살아도

따라다니며
병신이라 놀리는
저 아이들

너희들 무서워 산골로 간다
서러운 마음
나 홀로 웃으러 간다

《16》찔레꽃

김윤자

겨울 강을 건너온
어머니
파르르 시린 입술로
고뇌의 가시덤불
보듬어 안고
버선발 질긴 목심으로
피워내는
하얀 모시 꽃등
그 빛으로
강산은 밝아오고
조국은 여물어 간다.

《17》하얀 찔레꽃의 미소

도지현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조각들이 오늘 따라 찬란하다
찬란한 햇살과 대비해서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시로 무장하고 손사래 치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파리한 얼굴이
마음 한 귀퉁이를 싸하게 만드는데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가시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시 속에 갇혀
모든 가시를 가슴에 꽂고 있다
진한 고통을 승화시킨
하얗게 미소 진 그녀의 모습에서
고독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데
그 미소 뒤에 숨은 진실은 무엇일까

《18》찔레꽃

류종호

이 땅의 외지고 외진
산비탈 돌틈을 비집고
하얀 소복차림으로
눈익어 오는 것들

벌 나비 짝해 데불고
달디단 입맞춤으로 젖으며
보잘것없는 사랑의 시대
맑게 깨우치는 것들

세상엔 아직도
한 무리의 사랑이 저렇게 펄펄 살아서
짬도 없이 허리 굽힌 하루를
선들바람으로 토닥이는구나

사람아
사랑은 이렇게 가난한 자의 땅에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오나니
내 사랑을 익히지 않고는
저렇게 펄펄 살아보지 않고는
떠나지 못하겠구나, 죽지 못하겠구나.

《19》찔레꽃

박계희

여기
풀섶을 돌고 돌아
그리로만 피어나던 슬픔이
점점이 선을 그으며
개구리 울음보다
더욱 붉게 벗기어 놓은
달빛을
절름거리며 절름거리며
베어먹는 예감으로
있네
서 있네

《20》찔레꽃 바라보며

박광호

어느 누구 보살핌 없이
초록 숲에 자리하고
순결로 피어나
초여름 햇살에 평화를 만끽하는
순백의 사랑,

너의 순정을 실려 보낸 실바람에선
유년의 고향을 불러오는 향내가 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우리 곁에 늘 같이한
정절의 꽃이여!

너를 주제로한 노래도 많아
정겹게만 느껴지는 그 이름 찔레꽃,
바라보는 내 마음도
왜 이리 편안한가.

《21》찔레꽃 연가

박광호

이른 봄 너의 사랑 맛보여주던
찔레 순,
그리고는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주는
5월의 찔레꽃,
너를 바라보니 왜 그리
유년이 그리워지는가?

찔레 순 입에 물고
눈웃음치던 영희 그리고 철민이……

아득한 그 세월에
소식 없이 늙어진 그 모습들 떠올리니
그리워 눈물 고여지고
한 숨 절로 난다

찔레꽃,
순수하고 정갈한 네 모습
바라 볼 때면
언제나 그리워지는 유년의 세월.

《22》찔레꽃

박상희

초여름 아침 햇살이 하얗게 웃는다.
유년 시절
싸 근한 꽃잎 따 먹으며 등교하던 그 길에
찔레꽃 하얗게 웃는다
보자기 둘둘 말아 동여맨 책 보따리
순박했던 마음
그때도 찔레꽃 하얗게 웃었다
크고 작은 돌멩이 걷어차며
긴 개울 따라 올라
돌 뒤지면
물방개, 가재 놀라 웅크리던 하교 길
그때도 찔레꽃 하얗게 웃었다

마음은 그때 그대로인데
세월은 나를 이만큼 데려다 놓고
노란색 어린이 등교 버스가 지나가고
이름 모를 바쁜 차들이 지나가고
초여름 아침 저 외진 언덕에
찔레꽃 하얗게 웃는다.

《23》찔레꽃 이야기

박이도

찔레꽃을 아느냐
찔레꽃은 몰라도
찔레꽃 냄새는 알지요

시집간 아낙네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들이 풍겨주던 찔레꽃 냄새
살 냄새는 알지요

유월, 감자바위 골짜기의
찔레꽃을 보러 가요
저마다의 옛이야기
찔레꽃 童話를 들려줘요

《24》비얀리 찔레꽃

박이현

어찌 하시다가
하늘로 오르지 못한 선녀님
장광을 걷다가
검불에 보드라운 발을 찔리셨다.

기우뚱 넘어지실라
달님이 아슬아슬
지켜보신다.

몸의 문고리 꼭 잡으신 선녀님
눕지 않으시고
바위틈에 기대이신다

지켜보는 이 있어
달밤은 고적하지 않다 

《25》고향 찔레꽃

박종영

별처럼 서러운 꽃
언제나 고향 언덕배기에서 핀다

청보리 배를 불리는 오월
알싸한 향기는 절망의 벽을 넘어
골고루 후미진 들녘에 퍼진다

달빛 부서지는 외로운 밤
떠나간 이별 하얀 웃음으로 달래는 향기,
그 향기 가슴에 담아보면
순이도 보이고,
철수도 보이고,

어느새,
은빛 왕관으로 치장하는 흘러간 청춘이
높고 푸른 허공에 쏘아 올리는 세월,
그리움이다.

《26》찔레꽃 필 무렵

박현태

한밤
가슴이 아픈 소리를 내면서
몇 개의 뼈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제 몸 속에서 튀어나온
비명 소리를 잡기 위하여
마음이 손을 휘저었다
그리움이 벌떼처럼 사방에서 몰려
하얗게 핀 찔레꽃에 앉는다
순간 아찔한 가시에 찔리며
아야야 하고
다시 그 봄 속에 나른하게 눕는다.

《27》찔레꽃

백우선

꽃사과빛이 잠든
반도의 산하
포복의 숨가쁜
6월의 산하에서

나는 또
짐승
꽃사과를 입에 깨문
무서운 짐승이 된다.

꽃이 피면서
수많은
소복(素服)
찔레꽃이 피면서

피어나 시들지 못할
칼의

피어나 나부끼면서.

《28》찔레꽃

백원기

담장 너머로 내민 얼굴
찔레꽃 하얀 얼굴
내가 태어난 오월의 꽃
찔레꽃이 피면 엄마 생각이나요
장 보고 돌아오실 때 뛰어나가면
바람결에 풍겨오던 찔레향
산책길에 스며드는 엄마 냄새
그리운 냄새 고운 냄새
오월이면 생각나는
찔레꽃 엄마 냄새
그리워 코 벌름거리며
찔레 향을 맡아봅니다
생각이 나네요, 오월이 오면
순이와 손잡고 뛰놀다
낮에 한 약속 지키고 싶어
어스름 달밤 호랑 바위에 앉아
포르스름 어색한 얼굴 바라볼 때
괴괴한 밤 공기 타고 흘러들던
찔레꽃 감미로운 냄새가

《29》찔레꽃

변형규

앙탈도 귀엽던 단발머리 가시내
팔목이 가늘어 호미자루 무겁다더니
돈 많고 잘산다는 서울로 팔려 가서
몸도 마음도 오지리 뺏기고
앙칼지게 가시만 달고 와서는
봄날, 논두렁에 퍼질고 앉아 운다.
해도 기운데 들어가지 않고
오빠 미안해요 퍼질고 운다.
오월 한 달을 하얗게 운다.

《30》찔레꽃

변형규

앙탈도 귀엽던 단발머리 가시내
팔목이 가늘어 호미자루 무겁다더니
돈 많고 잘산다는 서울로 팔려 가서
몸도 마음도 오지리 뺏기고
앙칼지게 가시만 달고 와서는
봄날, 논두렁에 퍼질고 앉아 운다.
해도 기운데 들어가지 않고
오빠 미안해요 퍼질고 운다.
오월 한 달을 하얗게 운다. 

《31》찔레꽃 타령

서지월

임아,
백 고무신 벗어두고 간 임아
하얀 찔레꽃 수북이 피어서
오늘같이 서러운 날이면
온 몸에 찔레가시 바르고
나도야 남풍따라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까부다.

아아,
장독간에 숨겨둔 얼레빗 마저 꺼내
머리 빗고서
그 더운 머리털 날리는 구름 따라
나도야 정처 없이 떠날까부다.

《32》찔레꽃 그녀

성백군

봄볕 모여드는
돌담 밑 길가 찔레
햇살 불러와 세상 바라기에 설레는 마음을
꽃봉에 연서로 적더니
꽃잎 벌어지는 날 마침표를 찍고
바람 불 때 바람 편에 부쳤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급하게 서둘다 보니
주소도 못 적고 수취인도 잊었다고
아무 데나 마구 꽃 내를 흘립니다
나비도 오고 벌도 오지만
개미도 오고 진드기도 모이네요
누가 내 님인지 사랑 고백하기도 전에
화냥년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고 찔레꽃
갓길에 나와 팔자타령 합니다

어찌합니까
아비 모르는 새끼도
제 뱃속으로 낳았으니 자식인 것을
제 새끼 예쁘다고 들여다보면
방긋 웃으며 향내를 풍기다가도
꺾으려 들면 가시를 세우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듭니다

조심하세요. 길가 꽃이라고
함부로 대하다가는
상처 입고 몸 상하고 패가망신합니다.

《33》찔레꽃

성진명

나날이 푸르러 가는 산골짝마다
붕붕, 나폴 나폴, 쑥쑥, 꿩꿩……. 빛나는 함성은
새 생명 원소를 실어 나르는
사랑의 세레나데이던가?

구렁이 기어간 듯
구부렁구부렁 산골짝 다랑논에는
못줄도 뛴 듯 만 듯, 공일 맞은
식구들 옹기종기 모내기한다.

콩자반 가죽무침 간고등어 비린
무시지짐에
보리밥 배불리 점심을 채우고
새참엔 국시에 막걸리도 댓 사발 먹었다.

저문 해 비끄러맬 수 없어
초가둥지 찾아 돌아오던 길가에
흐드러진 찔레꽃,
하얗게 웃을 땐 제법 곱더구나.

《34》찔레꽃

송기원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
꿈결같이 사람 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또다시 도는
그런 산모롱이 아래 아늑한 곳에서는
개 짖는 소리, 된장국 냄새, 밥 짓는 연기 속에서
마을의 불빛들 하나 둘 밝게 켜지고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갈 길도 돌아설 길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혀버릴 때
그대 대신에 느닷없는 수천 수만 찔레꽃 송이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렇게 그대 대신에 피어올라서
돌아설 한 가닥 외길 비추어주었습니다.

《35》찔레꽃

송정운

눈물 많은 꽃 하얀 찔레꽃
아픈 상처로 가시는 펄펄 살아
하얀 눈물 향기 되었다네
보고픈 하늘아래 하얀 얼굴
하얀 마음 밤 벌레 소리
가도 가도 끝 없는 길 하얀 찔레꽃 향기

《36》찔레꽃

신경림

아카샤 꽃냄새가 진한 과수원 샛길을
처녀애들이 기운없이 걷고 있었다
먼지가 켜로 앉은 이파리 사이로
멀리 실공장이 보이고 행진곡이 들리고
기름과 오물로 더럽혀진 냇물에서
아이들이 병든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그루 찔레꽃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은 어둠 번지는 종소리
보리 팬 언덕 그 소녀를 찾고 있었다
보도는 불을 뿜고 가뭄은 목을 태워
마주치면 사람들은 눈길을 피했다
겨울은 아직 멀다지만 죽음은 다가오고
플라타나스도 미루나무도 누렇게 썩었다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그루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 허물어진 방죽 아래 숨어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을 울고 있었다

《37》찔레꽃

신종범

한시도 잊지 못한 극성스런 치정을
말갛게 꽃대에 올려 불 환히 밝힙니다.
그 마음
흰 나비 되어
까마득히 오릅니다.

당신은 가시 솟는 아픔을 아는가요?
어젯밤 서몽에서 무지개가 일길래
오늘은
혹시나 하고
동구 밖을 봅니다.

기다림은 칼바람에 솔래솔래 씻겨가고
마음에 눈 내려 얼어붙어 가는데
주홍빛
돋을 양지에서
붉은 망울 아립니다.

《38》찔레꽃 연가

심의표

짙푸른 송림사이 달리는 화심
게으른 뻐꾸기 울어 시샘해도
수줍은 듯 뽀얀 얼굴
내 고향 뒷동산 한 자락 깔고 누워
낮 익은 길손 마음 설레게 한다.
활짝 핀 그리움 하나
연녹색 풀섶에 살며시 묻고 서서
뿌옇게 떠오르는 달빛 맞으며
정든 임 기다리는 열아홉 순정
순애보 같은 사랑을 안고
꽃향기 풀어 순수의 눈빛 열어간다.

《39》찔레꽃 미소

안국훈

한 시절 죽도록 사랑하던 이름
안타깝게 잊혀만 가는데
꽃피는 봄날 맞아
누구라고 감히 잠들 수 있으랴

신비로운 우주는 오늘도
기다리던 저 둥근 달빛 아래
연분홍빛 구름을 산자락에 멈춰놓고
경이로운 기적을 잉태 중이다

밤새워 뒤척이던 그리움에
먹 갈며 글 쓰노라면
밤하늘 눈부시게 별빛 반짝이고
시린 눈물방울 끝에 연초록 봄빛 번진다

가시덤불 속 수줍게 핀 그녀 미소
한 줄기 바람에 하이얀 설레임 전하면
만나고 싶은 마음에 억겁의 세월을 돌아온
그리도 꿈꾸던 내 사랑 아니더냐

《40》찔레꽃

안수동

슬픔이 점령군이 되어
나를 허물기에 그냥 뒷길에 웅크렸네
굳이 말하라 하면
아픔 없는 사랑은 없다는데
나를 용서 못함도
가시를 숨기지 못함도 모두가
사소한 일에 상처 입는 사랑 때문인데
너 보내고 내가 핀들 그게 무슨 꽃이리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나는 살 수가 없네
이유 하나 제대로 있는 눈물
꽃향기인 양 흘리고 싶어
찔레꽃은
봄 내내 하얗게 울지 않느냐.

《41》찔레꽃 향기는

안행덕

외진 산길 아무데서나
하얗게 웃는 찔레꽃
알싸한 향기는 애틋해서
소리 없는 울음이네
하얗게 피는 꽃 찔레꽃은
애달픈 전설 가슴이 찡해서
서럽도록 좋아라
그리움에 야위어 가시만 남은 꽃대에
하얀 꽃잎은 잎마다 눈물 고여서
나를 울리네
애절한 그리움으로 향기 만들어
나 여기 있다오
지나가는 바람, 옷깃에 매달려
향기만 전하고
저만치 달아나 숨어서 우네

《42》찔레꽃

안희선

하이얀 착각
미안하다
너를 꽃으로 보았구나
눈물 아롱진
독백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는
꽃잎 속을 닮았지
문득, 현기증 같은
그리움
엄마의 따스한 품에
아련히 잠긴

《43》찔레꽃 사랑

양전형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한다
풀과 나무는 물론 세상 무엇이든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 넘치고 넘쳐 마침내
찢어진 가슴 열며 상처투성이 꽃
왈칵왈칵 구구절절이 피워내는 것
그리고 아픔이 큰 꽃일수록
고웁고 향기 더 나는 것

사랑은 아프게 해야 한다
꽃이 아프게 피어나듯
가슴이 찢기도록 해야 한다
상처는 정녕코 아름다운 것이므로

아, 저 하늬 길목 갯도랑 찔레꽃
한겨울을 얼마나 아파했을까
온몸 가시에 뚫리는 고통 견디며
누굴 저리 활활 사랑했을까

《44》찔레꽃

양현근

이제 쉬었다 가요
나무 작대기도 거기 내려놓으시구요
당신이 좋아하시는 찔레꽃도 환하게 피어났어요
찔레꽃가뭄 들면 하늘만 바라보던
섬진강 웃대꿀 열댓마지기 논배미는
평생을 지고도 다 못진 당신의 등지게였다지요
경운기도 못 다니는 비좁은 논둑길을
등판이 휘도록 혼자 짊어지고 다녔다지요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괜찮다 괜찮다 하며 어깨의 통증
밤새도록 돌아눕곤 했다지요
당신의 헛기침이 다져놓은 신작로를
말표고무신이 까까중 머시마들을 데리고 다녀요
벌써 마을은 지워지고 모판 한 짐이 참방거려요
이제 내려놓으시라고 달빛은 졸졸 따라다녀요
무논자락에선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새도록 들판을 감았다 풀었다 하네요
허기진 하루 돌아설 때
당신이 내려놓은 무거운 등지게는
이제 내가 지고가요
흙냄새 맡아 새파래지는 아랫대꿀 지나
미루나무 한 소절 낭창낭창 휘어져가요

《45》찔레꽃에게

양해선

갈수록
꿈틀거리는
가슴
다독일수록
더더욱
버둥댄다
가만두어도
아프다
자그마치
찔러라

《46》찔레꽃

오세영

더럽히고 싶다.
한 방울의 피를
순결은 육신의 감옥,
수인(囚人)으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창녀로 살고 싶다.
아름다움은 왜 항상 갇혀 있어야만
하는가,
아름다움의 밖이 기쁨이라면
그 안은 슬픔이다.
서슬 푸른 가시로도 지킬 수 없는
하늘,
사랑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는 것을
일컬음이다.

아아, 나는 이제 밝은 햇빛을 보아 버렸다.
사내와 눈 맞아 가출을 기도하는
소녀처럼
울타리를 타고 넘어 허공으로, 허공으로
내닫는
찔레꽃.

《47》찔레꽃 내 고향

유응교

멀고 먼 나라로
고향을 떠나
살아 보신 적이 있나요

가난하게 살아도 고향이 좋고
지위가 낮아도 내 부모가 좋고
남루한 옷을 입어도 내 형제가 좋아요.
고향을 떠나 살아본 사람만이
제 심정을 아실 거 에요.

그러나
그리운 고향에 찾아 왔건만
부모 형제 이미 떠나시고
형제는 찾아 볼 수도 없이
고향집이 잡초에 묻혀 있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겠어요.

고향산천 골짜기마다 개울가마다
제가 소복을 입고 외롭게
울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아셨죠
부모 형제 애타게 그리며
목놓아 부르는 제 외침이
애잔한 향기로
바람결에 산천을 헤매는 까닭을
이제야 아셨죠

고향은
외로운 마음의 안식처라고 하지만
흙먼지 속에 엎드려 울고 있는
저를 안아 주세요
전 지금 너무 외로워요.
부디 고향에 오시거든

《48》하얀 찔레꽃

유인숙

가만히 눈감으면
그 옛날
5월 푸른 하늘 우러러
배고프면 하나, 둘 따먹었다던
내 언니 부르던 하얀 찔레꽃

슬픈 향기 싸하게
온 가슴 후비고
애달픈 곡조에 묻어 나온 그리움
아, 그리움이
너무도 희어 섧다

그것 참, 가난도 희었더구나
창백한 얼굴에 번지던
몹쓸 버짐처럼
성난 가시 곧추세운 나무마다
처량하게 피어오른 백색의 꽃 무리

세월이 흐른다고 잊혀지더냐
눈감으면 떠오르던
지난 추억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던
내 언니 부르던 하얀 찔레꽃

《49》찔레꽃

윤갑수

길섶에 별빛모아 하얀 꽃 섬 만드니
파란하늘 꼭대기 두둥실 떠가는
조각구름처럼 널브러지게 하늘거린다.

살랑 이는 바람 결에 저물어가는 햇살
찔레꽃 향기에 취했는가?
묽게 수놓은 내 눈가에
사랑하는 아내의 고운 입술을 포갠 듯
내려앉은 빠알간 햇살
흐드러지게 핀 어두운 과거의 봄을
그리워한다.

저 하늘 끝 그리움을 매달아
뒤돌아본 추억속의 청춘의 봄처럼
넘실거리는 추억들
찔레꽃 잎들이 하나둘 꽃비가 되어
눈가에 흩날리운다.

밤새 달려온 계절의 뒤안길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들이
우수수 땅에 눕는다.
하얗게 내리는 비가 봄날을 데려간다.

《50》찔레꽃 향기

이경옥

가까운듯 멀리 있어도
너의 향기는 언제나 내 마음속을 헤집어드네
문득 네 향기가 그리워 고개를 들면
진하게 밀려 오는 그리움

눈 감아 아른거리는
너의 모습에 휘청거리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봐도
어느새 너의 곁으로 달려 가고 있네

《51》찔레꽃

이외수

마음으로만은
사랑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사어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52》찔레꽃의 노을

이원문

작년 그 작년
네 하얀 찔레꽃
네 하얀 꽃에
바람 불던 날
다음을 기약 하며
오늘을 기다렸다

하얀 꽃송이
가냘픈 너의 꽃
네 하얀 꽃에
이슬 앉던 날
그 약속 기다리며
오늘 너를 찾았다

《53》산천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이은경

선배,
오늘은 약통을 책장에 들어 옮기다가
스텝이 꼬여 넘어질뻔 했어.
간신히 살아났지만 눈물이 치솟더라
이렇게까지 살려고 애쓰야되나 싶어지더라.
서러워서 울었다.
산천에 하얀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할머니가 나타나서
나 대신 식구들에게 말을 전해 주는 거야.
대신에 흰 머리칼 하나 얻고 그래도 서럽다.
내 서러움에는 정체가 없다.
산천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54》찔레꽃

이재봉

오월의 숲길을 거닐다
한 무더기 꽃을 보았네
멀리서 보니 아카시아 같고
가까이서 보니 들장미 같네
순백한 냄새에 취해 코를 댔더니
슬프도록 하얀 꽃송이가 툭 떨어지네
찔레꽃 그늘에 앉아 숨어 울던
옛 누이의 눈물처럼

《55》찔레꽃

이해인

아프다 아프다 하고
아무리 외쳐도

괜찮다 괜찮다 하며
마구 꺾으려는 손길 때문에

나의 상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남모르게
내가 쏟은
하얀 피
하얀 눈물
한데 모여
향기가 되었다고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라고
당신이 내게 말하는 순간

나의 삶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축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56》찔레꽃

이현우

부활하는 넋인가 보다.
흙먼지 자욱한 포연(砲煙) 속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가시와 향기
멍울져 돌아앉은 산과 들마다
유월이면 네 모습 소복이었다.
낭자한 꽃싸움 풀숲에 묻고
홀연히 떠나버린 봄의 끝 자락
축배도 영화도 아랑곳 없이
오롯이 피어 오른 무명의 향불이여.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외로운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사는 길 너무 멀어라.
끓던 여름 타는 가을 다 보내고
재 되어 물이 되어 겨울 강에 닿으면
하얗게, 하얗게, 더욱 아프게
쌓여가는 어둠 속 눈이 오리니
계절마저 잊었나 갈은리(葛隱里) 하늘
활짝 열고 부활하는 넋인가 보다. 

《57》찔레꽃 피는 계절

이효녕

창문 두드려 돌아온 계절
너의 따뜻한 마음의 문 활짝 열어
모든 꽃잎이 흩어져 떨어진
산비탈 언덕 위에 하얀 찔레꽃 향기
너의 가슴에 듬뿍 넣어주고 싶다

풀잎 사이 튼튼하게 뿌리 뻗은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맴도는 나비
피어나는 꽃의 마음을 아는 사람
따가운 가시 잎사귀 사이 감추던 시간마다
한 무더기 하얀 별 쏟아 놓고
별똥별 밤새 바라보고 나서
어린 나뭇가지들에 달린 바람 털며
하얀 향기에 눈을 감고
아주 오래도록 너와 같이하고 싶다

창문 활짝 열어 별을 노래하는 동안
뾰족한 가시에 찔린 상처
밤이면 밤마다 이슬에 젖는 날이 많았다

오늘은 그 아픔의 상처마다
꽃잎 속에 활짝 펼쳐놓고
향기를 내어주는 이 시간
고요한 향기로 너의 곁을 항상 맴도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어딘가 날고 싶다

《58》찔레꽃

장사익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59》찔레꽃

전병조

보리향기 푸르른 오 월이 오면
산으로 강으로 들길로
찔레꽃 개구쟁이들 봄나들이를 가겠지

팔 걷고 도랑 치며 가재 잡다
배 고프면 따 먹었던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한 입에 노오란 하늘이
찔레꽃 두 입에 서울 간 누이의 얼굴이
눈물겹게 그리워지던 찔레꽃 그 언덕

배 고픈 아이들은 종일토록
찔레꽃 덤불을 찾아서 헤매곤 하였지

어쩌면 남 몰래 훔쳐 본
<지아>의 속살과도 같았던 새하얀 찔레꽃
그 꽃잎 베어 물고 하늘을 바라보면

남몰래 <지아>와 입 맞추다 푸드득 산꿩에 놀라버린
지독히도 무안했던 어느 봄날, <지아>도 떠났고
산꿩의 소리는 여전히 골마다 우렁찬데

땅거미 밟으며 홀로이 길을 걷는 동구 밖
서산에 걸린 노을이 시리도록 아팠다

이제 나 떠나고 없어도
고향의 찔레꽃 여전히 화려한 자태를 뽐낼 테고
개구쟁이 악동들 여전히 떼를 지어
봄나들이 산꿩과 숨바꼭질 즐기겠지

《60》찔레꽃

정민호

청 밀밭 햇살 머금고
산새 한 마리 날아 와
하얗게 흩어진 꽃들의 미소를
하나씩, 하나씩 골라내고 있다.

오솔길 따라 나서면
구름은 새털처럼 피어오르고
멀리보이는 보리밭 언덕에도
환한 얼굴로 도론, 도론 핀다.

살짝 불어오는 푸른 바람결에
흩어지는 부끄러운 꽃내음,
곱게 뻗어 나간 덩굴 속에서
누나의 뒷모습으로 머리 숙어 앉는다.

청자 빛 하늘 자락이 내리고 있는
비탈 밭 언저리엔 지금
맑은 산울림으로 나는 산 꿩 한 마리,
새하얀 찔레꽃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61》싸리재에 찔레꽃이 필 때부터

정세일

사랑하는 나의 당신이여
당신의 그리움 속으로 다시 걸어간 날입니다
싸리재 고개위에
별들이 숨겨놓은 그리움의 보물찻기
솔가지에도
풀잎 사이에도
싸리나무들의 종아리에도
비가 소리없이 이슬비로 내린날
그래서 당신의 어린날
그 산 중턱에서
혹이라도 까치들이 울면
그리운 임이 올까봐
산까치 노래를 혼자서 중얼거려봅니다
산에서만 살고있는
말하는 까치들의
가을 말하기
가을책 읽기
수필처럼 청아하게
그리움 낭송하기
그래서 뒷문 밖에는 도토리들의
노래들이 들려올것 같습니다
네가 울면 우리 임이 오신다는데
너마져 울다 서산너머
그래서 이 애태움 하나만으로도
이슬비가 되어버린
당신의 그리움속으로 걸어간 날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긴 긴 여름날부터 하얀 교복을 입고
싸리재에 찔레꽃이 필때부터
그 향기로움으로 기다리고 있는
당신이 숨겨놓은 이 그리움은
별들이 숨겨놓은
보물찻기를 하려고 저 고개를 넘어서
이미 갔습니다
산까치처럼 임을 기다리는날에 말에요

《62》찔레꽃

정연화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
내 어릴적 낭자머리에
비녀꽂은 우리 엄마같다

하얗게 피어서
향기마저 은은한
저 찔레꽃이
옥양목 저고리를
풀먹여서 다려입은
정갈한 우리 엄마같다

부드러운 찔레순
꺾어서 먹었던 어린시절

하얀 찔레꽃 앞에서
젊었을적 우리 엄마와
고향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한다

《63》찔레꽃

차성우

동산에 오르면
찔레꽃 향기
꽃잎마다
미소짓는 그대의 얼굴
행여나 오실까
뒤돌아보면
보리밭 종달새만
노래부르고
어느 세상
아득한 동리
그대 사는가,
꽃잎만 하얗게
짙어가누나.    

《64》찔레꽃의 전설

최영희

봄이면 산과 들에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
고려시대 몽고족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라는 소녀가 있었다네
십 여년 만에 고향 찾은 찔레 소녀
흩어진 가족을 찾아
산이며 들이며 헤매다
죽고 말았다네
그 자리에 피어난 하얀 꽃
그리움은 가시가 되고
마음은 하얀 꽃잎, 눈물은 빨간 열매
그리고 애타던 음성은
향기가 되었네
내 고향 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슬프도록 하얀 꽃
지금도 봄이면
가시덤불 속
우리의 언니 같은 찔레의 넋은
꽃으로 피네.

《65》찔레꽃

최제형

찔레꽃 피어
오월이 오지
떡갈나무 새닢 돋는 산비탈에서

초생달 아련히 봄바람 맞는 저녁
처량한 개구리 울음은
무리져 고향 떠난 이들
서럽게 토하던 가슴 한 조각

찔레꽃 지면
오월이 가지
함박눈같이 흰 꽃닢 날리며

꾀꼬리 종일 울던 연둣빛 산골
차마 못 잊어 소주 한 잔 기울이면
수줍게 떠오르는 예쁜 순이 얼굴

달밤에만 피어
하얗게 쏟아놓는 그리운 편린 뒤로
어느새 슬그머니 유월이 오지.

《66》찔레꽃

최창화

5월이면 찔레꽃 핀다
내 어머니 가시던 날 고이 신으셨던
버선발같이 하얀 그 꽃이
해마다 이맘때면 잊지도 아니하고
양지쪽 함초롬 또다시 핀다

내 어머니 계실 적 늘 하시던 말씀
거스르지 말거라 누누이 일러주셨건만
그 말씀 거역하고
날마다 쿵쿵 가슴에다 박았던
그 많은 못 중에
끝내 단 한 개도 뽑지 못하시고

그 말씀 잊지 말라며
해마다 이맘때면 잊지도 아니하고
가시 달린 하얀 꽃 되어
또다시 핀다.

《67》찔레꽃 향기에 쌓인 그리움

하영순

모퉁이 돌아돌아
산길 어귀
찔레꽃 향기 초여름 햇살 젖어든 오월

세상에 태어나서
탯줄 떨어진 자리
채 마르기도 전에

하얀 꽃가마 타고 가신 님
그때는
서러움도 그리움도 미처 몰랐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찔레꽃 향기 가슴을 적시면

심장에서 치미는 그리움
목젖을 막아도
그립다. 말못하고
찔레순 꺾어 씹어 삼키며 참아온 세월

서산에 산 까치 지저귀는데
찔레꽃향기 고개를 넘어
아카시아 꽃잎으로 피리를 봅니다

그리워 그리워서
피리를 붑니다

찔레꽃 하얀 계절에!

《68》그대도 찔레꽃보고 있을까

허정자

라일락 향기 실바람타고
하늘하늘 날아서
그대 있는 곳까지
가려나?
실록이 무루 익어
가지마다 푸르럼이
그대 있는 곳에도
울창하게 섰는가?
임이여
밭둑 밑에 앙증맞은
찔레꽃도
하얗게
피였습니까?
임 그리워 밤새
하얀 불 밝히는
찔레꽃 말입니다
떠날 줄 모르고
행여나 오실님 기다리는
찔레꽃
아예 오실 때 까지 기다리려고
밭둑밑에 퍼질러 앉아 있는
찔레꽃 말입니다

《69》찔레꽃

허호석

옛생각
잊을까봐 꽃 피우고
잊으라 꽃 지우는가

찔레꽃
향기로 물들었던 연정
언제까지 피고 질 이야기를
나눠가진 우리는 누구였나

생각나는 사람
하나 있으면 행복인 걸
꽃은 져도
봄은지지 않는 것을

《70》찔레꽃

홍해리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 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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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시모음 73편

1.  12월의 안부

강민경

전력을 다해 달리다가
잠시 쉬는 듯 뒤돌아보는데
세월은 그대로 흐르고 있네

부딪침과 느낌과 직감으로
존재와 행동을 되짚어 보노라면
스스로 깨트려
작아져야 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네

숱한 시간의 흐느낌
열두 굽이돌며 제 아픈 곳 닦아 줄
내일을 향해 가는 새 힘은
오직 새로운 길을 트는 일이라는
당부 한마디,

12월은
자기가 가진 최상의
선물을 건네주느라 골똘하네. 

2. 12월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3. 12월의 단상

구경애

저기 벌거벗은 가지 끝에
삶에 지쳐
넋 나간 한 사람
걸려 있고

숭숭 털 빠진
까치가 걸터앉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참새는 조잘거리고

지나던 바람은
쯧쯧,
혀차며 흘겨보는데

추위에 떨던 고양이 한 마리
낡은 발톱으로 기지개 편다.

 4. 12월

권현형

대관령 계곡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나무숲은 저 혼자 깊어가고
나는 묵묵히 부는 바람 속에 갇히고

덜컹거리는 밤기차
멀리 인가들이 낮은 음으로 흔들리고

때묻지 않은 것이 두려웠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깊이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묻고 싶네

곤두박질하는 흰 산맥들, 산맥들
아, 낭떠러지보다 내겐 왜
지상이 더 어지러운가

 5. 12월에 내리는 눈

김사랑

이른 봄날
노랗게 핀 꽃망울 산수유꽃은
어디로 가고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만 남았다
너의 눈물이 얼고 녹는 사이
말랑말랑 해진 너의 감성이
12월의 눈송이속에서 시들해진다
눈발은 벌떼처럼
허공을 펄펄 날아 떠돌더니
시든 풀잎에 내려 앉는다
이내 녹아 사라지고
너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12월의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남도의 끝 바다에 가서
그리웠던 심장을 꺼내
푸른 바다에 던져 버리고 싶다
산수유빛 노을이 번지고
검은 물새의 그림자을 따라
별이나 따러 가고 싶다

 6. 12월의 시

김사랑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네

일년동안 쌓인 고통은
빛으로 지워버리고

모두 다 끝이라 할 때
후회하고 포기하기보다는
희망이란 단어로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네

그대 사랑했으면 좋겠네
그대 행복했으면 좋겠네

 7. 12월의 연가

김사랑

그대여, 사랑하시나요
그대여, 행복하시나요
그대여, 희망이있나요

차디찬 12월의 거리에
눈물나도록 아파할 때
그대를 위로 해줄 사람이 있나요

인생의 길목에서
홀로 고독하게 방황할b때
사랑의 불빛이 될 등대가 있나요

12월 함박눈이 내리면
지난날의 상처일랑
순결한 눈 속에 묻고 가요

새날이 시작되면
우리 손을 마주잡고
함께 그 길을 가요 

8. 12월 마지막 날

김윤구

겨울밤 익어 가는 굴다리
양 곱창집 천장에 머문 숨소리가 千斤이다.

녹아나리는 소주병의 주둥이에
重한 중력의 힘 솟구치는 풍경이
여기저기서 고단한 현실의 속내처럼
발끈하고 굴다리 밑 중 드리운 석양은
서운하게 저물어 간다.

12월 깊은 밤 그렇게 익어가고
무심히 잊으려 애쓰는 추억과 사연도
해 저물어 달빛 드리운 소주잔에 찰랑이며
진눈깨비 훑는 유리창엔
마지막 야윈 달이 되어 멎는다.

질퍽한 회색 도시의 푹한 거리처럼
아련한 빛의 피사체를 낳는
가로등이 머문 세월은 삶에 반비례하며
석쇠에 흔적을 남기는 곱처럼 우리네
얄궂은 일상이 기억되는 밤은 지워진다.

내일이면 다가올 壬辰年 새해를 드리울
흑룡의 잔등엔 고단과 현실을 털어 버릴
꿈과 희망 맑은 기운 품은 해님이길 기원하는
굴다리의 밤은 고요에 잠들고 있었다. 

9. 12월의 연가

김준태

겨울이 온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멀리서 밀려오는 찬바람이
꽃과 나무와 세상의 모오든 향기를 거두어 가도
그대여, 나는 오히려 가슴 뜨거워지리
더 멀리서 불어오는 12월 끝의 바람이
그 무성했던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버릴지라도
사랑이여, 나는 끝끝내 가슴 뜨거워 설레이리
저 벌판의 논고랑에 고인 조그마한 물방울 속에서도
때로는 살얼음 밑에서도 숨쉬며 반짝이는 송사리떼들
그 송사리떼들의 반짝임 속이라도 내 마음을 부벼 넣으리
어쩌면 상수리나무 몇 그루처럼 산등성이에 머무는
우리 시대 그대여, 겨울의 그 끝은...
오히려 사랑의 처절한 불꽃으로 타오르리
지금은 두 손뿐인 그대여.  

 10. 12월의 시

김춘천

연초,
가슴에 품었던 소망이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한 장 남은
올해의 달력을
새해 달력으로 바꾸어 달 때쯤엔

더도 덜도 말고
삼백예순날의 노력만큼
만면에 웃음 가득했으면 좋겠다

다섯 날의 부족한 부분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오지 못한 희망되어
내년을 기약하며

칠흑의 밤을 다리 끌며 걷던 미혹의 괴로움도
갈피 모를 길에서 방황하던 번뇌의 얽매임도
빗장 두르고 반목하던 혼돈의 마음도

별빛 불러모은 오늘의 창가에 편히 머물러
화해와 화합의 악수로
해탈의 어둑새벽을 열었으면 좋겠다

지나간 날들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맞이할 날들은 부푼 기대에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희디흰 면사포 바래도
날마다 정성스레 가꾸어온 인고의 꽃
여일 새로 여무는 빛살에도 함초롬 지지 않도록 

11. 12월은 숨겨놓은 애인이다

김호삼

첫눈이 밥물처럼 넘치는 하늘에
푹푹 연기마저 불어넣는 지상의 굴뚝
바짝 마른 갈대가 세상의 아랫목을 데운다

12월은 대책 없이 뜨거운 계절이다

레이스 달린 애인의 속옷처럼
뜨거운 눈이 가슴에 내리고
나는 겨울 열대야에 잠을 버린다

낙엽을 안주머니에 숨기는 나무
속으로 속으로만 연둣빛 꿈을 꾸는

12월은 숨겨놓은 애인이다

12.  마무리하는 12월

나명욱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달랑 남기고 있는 2009년
주황빛 노을 펼쳐지는
겨울 문턱에 들어선

계획하고 소망했던 일들은
얼마나 이루고 노력했던 해였는지
단 한 가지라도 마음속의 꿈을
생각만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했는지

이제 지울 것 지우고 마무리할 것은 하자
슬픈 그리움도 아픈 상처도
부질없는 미련 따위도
깨끗하게 새로움으로 시작될
경인년 호랑이 해를 맞아
다가올 뜨거운 태양빛
힘찬 희망만을 기억하자

다시 가슴이 뛰는 새해가 온다
매년 찾아오는 파랑새 한 마리
햇살을 타고 온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꿈을 맞이하라고
행복을 맞이하라고
아쉬움으로 남더라도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다시 파랑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려 보자
내일은 언제나 푸르다고 

13.  12월의 밤거리

노민환

한 장 남은 달력이
노점 할머니 등 뒤에서 외롭고
미련 같은 아픔으로 무작정 걷는 어둠에서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산다는 의미도 잊어버린 채 불빛 싸늘한 거리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굴곡진 세월을 닮은
저음의 음악이 들리는 곳에서
언뜻 스치는 어디서 본듯한 여자의 얼굴엔
회색의 그림자가 눈물처럼 번짐을 느끼며
잠시 멈췄던 걸음 작고 초라한 포장마차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다

성냥갑 같은 네모 안은
포장 밖 쓸모없는 아귀다툼의 세상보다는
추위를 버티기엔 한결 아늑해서
취기 오른 다양한 군상들 속 이야기 틈바구니에 앉아
뜨거운 어묵 국물에 닭똥집 천천히 소금에 찍어 거푸 소주를 마신다

휘청이며 걸었던 삶도
지금은 모든 사람 사이에 섞여야 하고
도깨비장난 같은 악다구니는 또 무슨 소용인가
허기진 가슴 채우는 인생의 한가운데로 모여
서로 손잡고 걸어갈 세상으로 이제 다시 돌아왔음을 알아야 할 때다.

14.  어느 12월의 끝자락

노민환

겨울비에
작은 낙엽 하나
슬픈 계절 끝자락에 밀려
외로움에 우는 내 사랑과 함께 떠난다

늘 목마른
사랑은 또 그렇게
한 아름 미움만 가슴에 품고
비에 젖은 세월처럼 흘러 강으로 간다

추억에
아물지 않은 상처
한 폭 그림으로 남기고
보일 듯 말듯 눈물 숨긴 그대는
바람 지나는 언덕에서
다시 달려오는 사랑도 외면하고 간다

저기
비 내리는 거리에는
12월의 짙은 입술로 치장한
마지막 일요일이
술집 여자처럼 빨갛게 엎드린 날
겨울의 강을 따라 기다림도 떠나간다.

 15.  12월에

명위식

가지 끝 대롱거리던
마지막 잎새까지
겨울비에 젖어
처연히 고개를 떨구고
구름안개에 가려
심란한 아침 하늘.
세월의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간신이 정신 가다듬고 보니
어느새 끝자락에 와 있네
가는 이를 붙잡을 힘조차 없어
물끄러미 쳐다 보다
다시 허리를 곧추어 세우네.
덤불사이 분주히 넘나드는
참새들 마냥 신이 났네. 

16.  12월의 기도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재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17.  12월에

박상희

가슴에 담아두어 답답함이었을까
비운 마음은 어떨까

숨이 막혀 답답했던 것들
다 비워도 시원치 않은 것은
아직 다 비워지지 않았음이랴

본래 그릇이 없었다면
답답함도 허전함도 없었을까
삶이 내게 무엇을 원하기에
풀지 못할 숙제가 이리도 많았을까

내가 세상에 무엇을 원했기에
아직 비워지지 않은 가슴이 남았을까
돌아보면 후회와 어리석음만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걸.

또 한해가 가고
나는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18.  12월의 눈물

박우복

잿빛 하늘이 가슴에 닿으면
까닭 없이 솟아나는 눈물
목적지 없는 길을 나서면
앙상하게 남은 빈 가지들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대로 주저앉아
흘러간 세월을 뒤집어보면
모두가 그리움

나이를 셈하지 않으련다
흘린 눈물보다 많지 않으니
차라리 12월에는
가슴이 넓은 사람의 품에 안기어
차분히 눈물을 나누고 싶다.

 19.  12월의 뒷모습

박우복

부르는 날에 찾아와서
보내는 날에 떠난다면
아쉽지는 않을 텐데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고
보내지 않아도 떠나가는
야속함에 젖어

가만히 뒷모습을 바라보면
쓸쓸함이 길게 늘어져 있다

꺾어진 갈대의 마디처럼
첫눈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20.  12월의 이야기

박우복

12월이 곁에 있다
한 해의 모든 것을 담는
넓은 바다 같은 모습으로

새해 첫 날
힘차게 솟던 태양도
바람에 닳고 세파에 쓸려
부서진 조각들을
가슴에 쓸어 담을 때
나의 긴 그림자도 함께 담아
12월의 바다 속에 묻어 버리고
다시 한 번 길을 나서련다

작은 것 하나 이루지 못해도
12월은 존재해야 한다
지쳐버린 사람들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21.  12월의 코스모스

박우복

가늘게 목을 내밀고
애처롭게 햇살을 마신다

팔랑거리는 꽃잎 사이로
찬바람이 밀려오면
수줍은 인사도 못하고
몸을 가누기에 바쁘다

무슨 죄목으로
12월에 피어나
옥살이를 자처할까

지켜보는 마음 속을
눈물로 채우면서. 

22.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23.  12월의 노래

박종학

마침내 달랑 한 장
그렇지만 마지막은 싫어요
처음 시작이라 불러 주세요
차가운 손길
하지만 마음만은 아니랍니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입니다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나를 보면 추억으로 여깁니다
나를 보면 삶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입니다
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나는 12월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과 함께
외로운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해를 뒤돌아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기쁨의 합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싶습니다
나는 12월입니다 

24.  12월

반기룡

한 해를 조용히 접을 준비를 하며
달력 한 장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며칠 후면 세상 밖으로
사라질 운명이기에 더욱 게슴츠레하고
홀아비처럼 쓸쓸히 보인다

다사다난이란 단어를 꼬깃꼬깃
가슴속에 접어놓고
아수라장 같은
별종들의 모습을 목격도 하고
작고 굵은 사건 사고의 연속을
앵글에 잡아두기도 하며
허기처럼 길고 소가죽처럼 질긴
시간을 잘 견디어 왔다

애환이 많은 시간일수록
보내기가 서운한 것일까
아니면 익숙했던 환경을
쉬이 버리기가 아쉬운 것일까

파르르 떨고 있는 우수에 찬 달력 한 장

거미처럼 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
병술년에서 정해년으로
바통 넘겨 줄 준비하는 12월 초하루

25.  12월의 꽃

백창훈

12월에도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네

사랑이란 나무에는
천연부동액이 내재해 있어
혹한의 추위에도 살아남아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네

사랑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

하느님은
사랑의 나무에
함박눈 내려 포근히 감싸게 하시네

오! 사랑은
겨울햇살 앞에 서 있는
눈꽃나무
참으로 숭고하여라!

그대와 나의
변치 않는
사랑의 꽃

26.  12월의 편지

성백군

돌아보니
다 떠나고 혼자 남았습니다
13월은 없고 11월로 뒤돌아가자니
이미 다 뜯어버린 달력
한 장만 달랑 남았습니다

크리그마스 파티, 망년회 등
아직 동그라미 몇은 남았지만, 그러기에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인생의 남은 날 중에서
굄돌 하나씩 빠지는 기분입니다
시간이 핏방울 같아
그 밑에다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자
밉더라도 웃자, 욕심내지 말고 마음 비우자)

아까운 것들아
믿는 것은 속이는 것이었고
미루는 것은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씨앗을 심지 않으면 1월이 와도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새해가 없습니다

앞을 보니
절벽입니다. 가던 길이 끊였습니다
몇 발자국 안 남았습니다
회계하는 자만이 유언장에 도장을 찍고
뛰어 내릴 수가 있습니다
1월은 12월 다음에 오는 순서가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달입니다 

27.  12월 어느 오후

손석철

덜렁 달력 한 장
달랑 까치 밥 하나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썰렁 저녁 찬바람
뭉클 저미는 그리움

28.  12월

신남춘

다양 각색으로 달려왔던 한해인데
이제 잊혀 질 날들이 빼곡하게
그리움처럼 쌓인 채로 길을 틉니다.
아쉬움도 반성할 줄도 알았건만
왜 진작 깨우쳐 보질 못하였는지
어찌 보면 못난이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정말로 대견스러운 것은
생의 고통과 아픔을 꾹 참아가면서
위기와 고비를 넘긴 삶이었기에
변화무쌍한 기후에 항상 순응하며
한해를 낀 긴 터널마저도 무탈하게
거침없이 질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이
나랑 함께 눈을 마주 칠 날도 몇 날
손으로 세어 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이만 때면 모임의 초대장이 쌓이고
사람들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면서
송년 모임 하루를 마치 일 년 인양
사람들 사는 냄새가 물씬 번집니다.

다 담으려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고
어느 때 보다도 아름다운 날 몇 날은
서로가 향기 나도록 장식을 하렵니다.
다만 이제 배부르게 채운 것을 비우고
다시 채워야 할 자리를 만들어 주면서
12월의 달력을 아주 내리기 전까지는
사랑의 불씨 또한 그대로 남기렵니다. 

29.  12월의 송가(送歌)

신영

이별이란 말보다는
그리움이란 말을 남기자.
작은 삶의 울타리 안에
크고 작은 기쁨과 행복
상흔으로 남은 좌절과 슬픔과 고통
울퉁불퉁하고
올록볼록했던 삶의 길목에서
화들짝 웃음도 지어보고
울컥 화를 풀어 콧물 눈물도 흘리며
걸어왔던 한 해 동안의 삶
잘 살았구나!
이 많은 사람과
수없이 많은 일 들 속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행복한 사람.
이른 새벽 바다를 가르고 오르던 붉은 태양
한낮의 뙤약볕으로 온 세상을 어루고
저녁이면 제 몸을 다 태우며
서산을 향해 돌아가는 놀 빛 석양처럼
아쉬움이란 말보다는
기다림이란 말을 남기자.
새로운 날을 함께 기다림으로 마주하자.

 30.  12월을 보내며

안국훈

마지막이라 말하기도
아까운 게 시간이다
남은 세월이 짧을수록 더 소중하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되지만
인간에게는 추억이 된다
한해를 보내려니 후회가 앞서지만
희망찬 새해를 맞노라니 가슴 설렌다
12월이 다 가기 전에
그리운 사람에게 안부 전하고
보고 싶은 이 찾아가 차 한 잔 나누어라
사랑을 놓치면 눈물이지만 찾아가면 기쁨이 된다
우리는 뜻하지 않는 만남을 행운이라 부른다
삶이 소중하다고 너무 조급하게 다그치지 말라
아무리 애쓰지 않아도 인생은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찌 산입에 거미줄 치랴
물을 너무 주어 시드는 난초를 보라
부족하면 갈증이지만 넘치면 욕망 속에 빠져
절망의 늪에 허우적대며 가쁜 숨 쉴 때 있다
바위가 이끼 때문에 뒤척인 적 있던가
지나가던 멋진 총각을 바라보는 처녀의 미소처럼
채 피지 않은 장미꽃이 가장 아름답다
가끔은 삐딱하게 걸린 액자도 자연스러울 때 있다
그대가 12월의 무게만큼 그리워진다
그대를 보내려니
채워지지 않는 술잔이 더 정겹다 

31.  12월의 아침 바다

안국훈

순리에 따르는 게 세상사는 이치거늘
욕심은 또 다른 욕심 낳고
집착은 더 강한 집착을 부른다
생동감 있고 본연의 색깔과 구도 살아야 삶이다
마음의 평화 얻으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소박한 재미를 알아야 안다
기계는 고장나고 사람은 실수 한다
마음이 불안하면 몸이 불편해지고 다친다
사랑하는 마음은 잠시 방관하지 않고
욕심 내려놓는데서 시작한다

구속하는 것도 바로 자신이고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도 바로 자신이나니
마음 다스리는 삶은 늘 자신 안에 있다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내려놓으면
자칫 모든 걸 잃게 되지만
한 번 사는 삶, 얻고 잃음은 스스로의 몫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은 풍요로운 삶이다
아침 겨울바다를 보면
피지 않아도 영혼의 향기 그윽하고
시들지 않아 육신의 내음 그리워진다

 32.  12월의 참사랑

안국훈

아름다운 사랑은
먼저 사랑하는 것이고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고
미워하는 사람 마다않는 마음이고
아낌없이 모든 걸 주고 또 주는 사랑이다

눈부신 사랑은
그냥 좋아 그리워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고
마지막 날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참사랑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떠나는 사람 고이 보내주는 사랑이어라  

33.  12월 저녁의 편지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34.  12월 한 해의 끝에서

안희선

흐르는 세월에 내몰리듯 그렇게 떠밀려 살다보니,
횅하니 벽에 남은 달력 한 장이 외롭습니다

한 해의 끝에서 그 달력을 걷어낼 때마다,
내 안에서 부서지는 나의 소리를 듣습니다
감당하지 못했던 나날들이 부끄러운 기억으로
차가운 살 속 깊이 파고듭니다

창 밖을 보니, 마지막 이파리를 벗고
겨울을 입은 나무들이 외롭지만 의연한 모습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슬픔 같은 것이
잠시 눈동자에 어리다가 이내 흔들립니다

왠지 고독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향기가 되고 싶은 매혹적인 우울함이
텅 빈 몸에 차오릅니다
그러나, 이 겨울은 낯설기만 합니다
지난 가을의 길목에서 돋아난 그리움이
한껏 부풀어,
낙엽도 아닌 것이 가슴 위에 아직도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이 겨울은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저 홀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럴땐, 정말 누군가의 전부가 되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쓸쓸함을 배웠던 날처럼,
지워지는 한 해의 끝이
눈 앞에서 하염없이 흔들립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헛헛함으로 쓰러질 것 같은 날......

그리움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내 안에서 조용히 불러봅니다

비록, 낯선 바람에
한없이 흔들리는 빈 몸이더라도
이제사 겨울로 떠나는 나의 계절이
차갑지 않기 위해
작은 불씨 하나 그렇게 가슴에 지피렵니다

 35.  12월 눈이 내리는 날

안희선

알고 있나요
아니, 기억하고 있나요
약속한 사랑을 만나러 갔던 길을
유난히 추웠던 날에 하얗게 내리던 눈을
그대 이외에는 모든 게 멈춘 듯한 시간을
아름다운 빛만 하얗게 꽃 피우던 날을
저 하얀 눈도 언젠가는 녹아지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란 잠시 뿐이라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미련곰탱이 같은 가슴도 있어서
하늘 내리는 눈송이마다 하얀 그리움으로
아직도 그대를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단 것을

내 안에 하얀빛으로 고요하게 남은 그대여,
나를 잊은 빈 마음이라도 좋으니 오세요

아니면, 그대의 하얀 그림자라도 보여주세요
저 하얗게 내리는 눈처럼

 36.  12월의 기도

양애희

축복의 하이얀 그리움 따라 훨훨 날아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모두 만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하는 가슴 오려붙인
1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문 시간들 사이로 깊은 침묵이 어른거리는
어둠 지나 길게 흐르는 아픔 여의고
한 그루 맑은 인연 빗어대는,
빛이 나는 1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장 깊이 동여맨 나뭇잎 바스락바스락,
온몸이 아파올 때
푸른 약속 흔들며 바람을 덮는,
따뜻한 12월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색 불빛 찬란한 거리, 그 어딘가,
주름진 달빛 사이로 허기진 외로움 달래는
영혼 살포시 안아주는,
그런 1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문 강가, 뉘 오실까
깊은 물소리만 허망한 심장에 출렁거릴 때
가슴 빈터에 흠뻑 적셔줄 꽃씨 하나 오롯이,
진하게 품는 12월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억의 창문마다 뒹구는
허공의 손끝 삐걱이는 낡은 커텐 걷어
세상 칸칸에 행복이 흩날리고
찬란한 춤사위가 벌어지는, 반짝반짝
별모양의 12월이면 참 좋겠습니다 

37.  12월의 공허

오경택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 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 보따리 움켜쥡니다

내 안에 웅크린 욕망의 응어리는
계란 노른자위처럼 선명하고
뭉개도 뭉그러지지 않을
묵은 상념의 찌꺼기 아롱지는
12월의 공허

작년 같은 올 한 해가
죽음보다 진한 공허로
벗겨진 이마 위를 지나갑니다.

 38.  12월의 독백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39.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40.  12월 중턱에서

오정방

몸보다 마음이 더 급한 12월, 마지막 달
달려온 지난 길을 조용히 뒤돌아보며
한 해를 정리해보는 결산의 달
무엇을 얻었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를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이해할 자를 이해했고
오해를 풀지 못한 것은 없는지
힘써 벌어들인 것은 얼마이고
그 가운데서 얼마나 적선을 했는지
지은 죄는 모두 기억났고
기억난 죄는 다 회개하였는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한 일에 만족하고 있는지
무의식중 상처를 준 이웃은 없고
헐벗은 자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있고
꼭 기억해야할 일을 잊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 저런 일들을 머리 속에 그리는데
12월의 꽃 포인세티아
낯을 붉히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41.  12월이 오면

우태훈

한껏 기대에 부풀어오른다
사각사각 내 님이
오실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내 님이 오신다면야
내사 장미의 뜰로 나아가
맞이하리라

내 님은 장미의 궁전 뜰로
오신다고 하였다

하냥 슬픔에 젖어 오시는
님이건만 내 반갑게
맞으러 나아가오리다

12월이 오면 한껏
기대에 부푼다

 42.  12월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43.  12월의 기도

윤여선

뼛속 깊이
애틋한 축복의
음성 틔우는
12월 곱다 한 하늘이래

갈 곳 없어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 위

구원의 비명 토하지
못 하고
냉동의 몸덩이
늙은 생명
저 가여운 영혼
당신 자식 일진데

정녕
평등한 삶의 양식
이 땅 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이시여
그릇된 양심 거부
굶주려 죽는 것 죄라면
이 목숨 가져가소서

 44.  12월에는

이경옥

가고 또 가도 끝은 있으련가
한 해의 마지막 12월
기다리고 있을 것을 향해
값진 것을 이루기 위하여
숨 고르지도 못하면서
달음질하여 왔네

이제 12월을 뒤로하고
떠나려한다
기쁨으로 행복했고
안타까움으로 설레이고
이루지 못한 소망은
다시 새해에 희망으로 두련다

 45.  12월의 강에서

이상례

12월의 강에 서면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 그물을 던진다거나
열정이 식은 뒤에도
강가의 돌들이 둥글어지는 것과
이제는 홀로 남아 지난 이야기를 하려한다

언제부턴가 내 가슴 속 깊이
뜨건 이슬로 숨은 그대
사랑이라는 말과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과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성숙한 듯 내 영혼의 슬픈 눈

12월의 강에 서면
그대 어느 바람결에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어도
그대가 한 번씩 나를 부르는 소리에
겨우내 얼었던 강물이 녹아 내리는 듯
내 숱한 날의 이별이란, 이별이 아니라
그저 멀리 바라볼 뿐이다

46.  12월 1일

이영균

12월 춥다.
춥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앙상한 나무들 탓일까
얼어오는 손끝 시린 탓일까
다홍 입술 가려 곧추세운 옷깃

애써 따뜻한 생각을 해 본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카페오레
한없이 포근한 그녀의 커다란 눈
안개꽃 잔잔한 미소

그래도 춥다
쓸쓸하다
12월은 따뜻한 그녀의 미소보다
바람에 쓸려가는
발소리 움츠러들던 기억이 더 크다

 47.  12월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폭설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48.  12월 달력을 바라보며

이인자

한 해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11월 달력을 넘겼다.

그러고 보니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한해를 보냈던가?

돌아보니 뽀오얗게 내리는 눈발에
하얗게 덮어버린 들판처럼
모두가 파묻쳐 아무 색갈 찾을 길 없다

기쁘고 즐거워 가슴이 따뜻해 졌던 붉은 색갈 있었고
외롭고 허전함에 파아랗게 질닌 형광색 있었으며
때로는 저무는 인생에서 낭만을 음미하여
포근함과 행복을 주는 황희의 황금빛도 있었으련만
이제 돌아보니 모두가 한가지 색이었음은...

아무리 헤쳐보려 해도
모두가 하아얗게 덮혀 버린 들판 처럼
뽀오얗게 묻쳐 버린 지난날은
무지개 색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는 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49.   12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12월엔 그대와 나
따뜻한 마음의 꽃씨 한 알
고이고이 심어두기로 해요
찬바람 언 대지
하얀 눈 꽃송이 피어날 때
우리도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온 세상 하얗게 피우기로 해요

이해의 꽃도 좋고요
용서의 꽃도 좋겠지요
그늘진 외딴 곳
가난에 힘겨운 이웃을 위해
베풂의 꽃도 좋고요
나눔의 꽃도 좋겠지요

한 알의 꽃씨가
천 송이의 꽃을 피울 때
우리 사는 이 땅은
웃음꽃 만발하는 행복의 꽃동산
생각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사랑이 될 때
사람이 곧 빛이요 희망이지요

홀로 소유하는 부는 외롭고
함께 나누는 부는 의로울 터
말만 무성한 그런 사랑말고
진실로 행하는 온정의 손길로
12월엔 그대와 나
예쁜 사랑의 꽃씨 한 알
가슴마다 심어두기로 해요 

50.  12월의 노래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말을 많이 했던
빈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51.  열두 달의 친구

이해인

1월에는
가장 깨끗한 마음과 새로운 각오로
서로를 감싸 줄 수 있는
따뜻한 친구이고 싶고

2월에는
조금씩 성숙해지는 우정을 맛 볼 수 있는
성숙한 친구이고 싶고

3월에는
평화스런 하늘 빛과 같은
거짓없는 속삭임을 나눌 수 있는
솔직한 친구이고 싶고

4월에는
흔들림 없이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으로 대할 수 있는
변함없는 친구이고 싶고

5월에는
싱그러움과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우리 서로에게만 전할 수 있는
욕심많은 친구이고 싶고

6월에는
전보다 부지런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한결같은 친구이고 싶고

7월에는
즐거운 바닷가의 추억을
생각하며 마주칠 수 있는
즐거운 친구이고 싶고

8월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들어하는 그들에
웃는 얼굴로 차가운 물 한 잔 줄 수 있는
여유로운 친구이고 싶고

9월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고독을 함께 나누는
분위기 있는 친구이고 싶고

10월에는
가을에 풍요로움에 감사 할 줄 알고
그 풍요로움을
우리 이외의 사람에게 나누어 줄줄 아는
마음마저 풍요로운 친구이고 싶고

11월에는
첫눈을 기다리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열중하는 낭만적인 친구이고 싶고

12월에는
지나온 즐거웠던 나날들을
얼굴 마주보며 되내일 수 있는
다정한 친구이고 싶다. 
 
52.  12월엔

이희숙

그리움이 얼마나 짙어
바다는 저토록 잉잉대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깊어
온몸으로 뒤척이는지 묻지 마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돌아선 이별처럼
사연들로 넘쳐나는 12월엔
죽도록 사랑하지 않아도 용서가 되고
어쩌다보니 사랑이더라는
낙서 같은 마음도 이해가 되는 12월엔 

53.  12월

임영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54.  12월

임영준

잊혀질 날들이
벌써 그립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자꾸 생각납니다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먼저 건네게 됩니다
암담한 터널을 지나야 할
우리 모두가
대견스러울 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을 꼭 품고 싶습니다
또 다른 12월입니다

 55.  12월 사랑

장성우

더 많이 아쉽고,
달랑 한 장 남은
12월 달력처럼 고독한 사랑입니다

하아얀 눈에
추억을 파묻고
아듀..
낮은 곳을 찾는 12월의 사랑입니다

구유에 오신 예수님
성탄 꽃을 가슴에 넣고
하늘 영광 땅에 평화를 전하는
신비를 담은 애틋한 그리움의 사랑입니다

12월 사랑은
긍휼을
듬뿍 온 누리에 보내는
복되고 행복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56.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달에

전영애

시작은 부실하고
허점 많이도 보였지만
점차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고
인간성에
정을 더 많이 느낀 게 사실입니다

내 능력이 되는 한
다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고
내 전부를 걸고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진실함과 믿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때로 서운한 점은
당신이 내 마음을 몰라 줄 때이고
나의 실수가 보이면 덮어 주고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불러주며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주길 기대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배려 다 하며
당신의 여자로 사랑받고 싶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슬프고 아픕니다

사랑하는 당신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달에
한 통의 편지를 당신께 받고 싶습니다

 57.  12월의 일기

전진옥

한 장 남은 달력, 12월이군요
어느덧 겨울이 온 모양입니다
길 풀섶 작은 풀꽃마저도
제 미소 잃고 꽃향기마저 사르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허공 하늘에 바람 소리
휑하니 쓸쓸하지만
여름내 흘린 땀방울이
바람 소리 그립게 하듯
겨울 여백도 아름답습니다

떠나보내야 함은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하고
오고 가는 계절의 순환 앞에
또 새로운 무언의 희망이 열리니
처음처럼 새로이 태어나는 마음

온몸으로 솟구쳐 꿈을 펼쳐내는 태양처럼
내 삶의 이유가 아름답다면
올 한해도 나눔을 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58.  12월

정연복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뒷맛이 개운해야
참으로 맛있는 음식이다

뒤끝이 깨끗한 만남은
오래오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두툼했던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걸려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보석같이 소중히 아끼자

이미 흘러간 시간에
아무런 미련 두지 말고

올해의 깔끔한 마무리에
최선을 다하자.

시작이 반이듯이
끝도 반이다!    

59.  12월의 햇살 같은 시

정연숙

가슴에 심은 기다림 하나가
눈이 오면 날개 짓을 합니다
가슴에 심은 그리움도
눈이 오는 날이면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소중한 님의 창가로 가서
살며시 창문을 엽니다
그리운 것들은 어디에 있든
늘 나와 동행합니다

눈꽃 내려앉은 설원의 아름다움은
한 장의 편지가 되어
뒤돌아보지 않겠다던 것을
꺼내어 펼치려 합니다

눈발이 날리면
더욱 순해지는 가슴들
그 그리움의 연서
한 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밤새 하얀 길 걸어갑니다
아직도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60.  행복한 12월

정용철

나는 12월입니다.
열 한달 뒤에서 머무르다가 앞으로 나오니
친구들은 다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았네요.

돌아설 수도,
더 갈 곳도 없는 끝자락에서
나는 지금 많이 외롭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나는 지금
나의 외로움으로 희망을 만들고
나의 슬픔으로 기쁨을 만들며
나의 아픔으로
사랑과 평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이제부터 나를
"행복한 12월"이라 불러 주세요

 61.  12월의 기도문

정재삼

청마(靑馬)가 떠나고 있습니다.
올 한 해
고마워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갖게 해 주소서

그 동안 쌓였던 적폐(積幣)로
좌절의 늪 벗어나게 해 주시고
회상의 무거운 짐 내려놓게 해 주소서

청마(靑馬)여!
당신이 머문 한 해 동안
그리 슬픔만 가득한 응어리
그 죄 떨칠 수 있게 해 주소서

청마(靑馬)여!
올 한 해는
희망의 손길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고
전진을 미룬 어리석음 용서 해 주소서

청마(靑馬)여! 잘 가소서!
당신이 가신 뒷자리
순한 청양(靑羊)이 오는 첫 날부터
아름다운 꿈이 또렷이 새겨져 실현되는
새해 되게 해 주소서

 62.  12월의 엽서

정재삼

지구 한 점(點)의 구석에
지금
내가
12월의 엽서를 받아 들고 섰다

가을이 빠져나간
시린 그 자리에
빼곡 담겨있는 사연들 중
가슴 아픈 사연들이
가슴 속 저며 든다

따뜻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운 12월

올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누구나 한번 쯤
사랑의 손길을 내어 보라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63.  12월

정창현

저물어 가는 한 해
삶에 기준일까?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보내는 가슴 속 쓰린 이 후련한 이
모두 각각 다른 의미를 주겠지

비가 온다.
들판에 소 떼가 풀 뜻 는다.
어린이 멱 감으며 즐기고
먹구름 한 덩어리지나 가는 찰나
김매는 농부 농주 한잔 참 들고

서리 내린다
곳 불 든 잎 얼굴 붉히고
갈무리 바쁜 농부 하늘 볼 틈 없고
조각구름 뜬 파란 하늘 높기만 하네.
살살한 서리 바람 불어오네.
동동 걸음 쳐 아랫목 찾는 어린이

눈이 온다.
핫바지 저고리 갈아입고
겹바지 저고리 서답 너덜하고
때묻은 마음 서답 너덜하고
목도리 칭칭 감고 눈물 흘리며
재물 받쳐 서답 삼는 부엌
가마솥 군불 지피는 늙은이
강아지 어린이 눈 위에 뒹굴고

동 장군 온다.
아랫목 차지 누가 하나
까치, 까치설날 저기 오고
한 해 저물어 간다. 

64.  12월 송가

조용순

잿빛 하늘이 내려앉은 으스름한 들녘에
한 해의 끝자락이 차가운 바람 속에 휘날려
삶의 진액들이 저무는 강으로 흘러간다

생의 궤적은 흔들어대는 바람의 강도가
이즈음 더 커져서
소용돌이치는 형상의 물살 속으로
역사는 다시 한해를 끌어가고

강 건너 숲에서 날아온 작은 새도 결별을 고하는지
젖은 날개 파닥이며 쓸쓸히 떠나는데
아직도 떠날 수 없는 마음 자락 하나 허공에 걸려
진실의 갈구가 펄럭인다

삭막한 삶의 언저리로 순백의 눈꽃송이라도 쏟아지면
보내는 가슴이 덜 추울까

 65.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천상병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66.  12월 그대와 춤을

최명운

짧은 12월 햇살 뉘엿뉘엿 사라지고
빛바랜 잔영 밝히는
가로등이 애잔하다
어슴푸레 밤이 깊을 무렵
물안개 서릿발로
넋이 깃든 풀잎에 솜털처럼 달라붙어
영혼을 달랠 것이다
아니 함박눈 내려
온 세상 덮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감나무
바닷 속 산호초가 되고
장독대 쌓인 눈은
지혜로운 어머니 心志 될 것이다
개구쟁이 뛰어 놀기 좋은 논배미에
노루나 고라니 먹이 찾아 내려오고
의뜸의 하늘궁전으로 바뀔 것이다
냇가 덩굴을 찾은 참새무리
말초적인 자아도취에 빠질 것이다.

 67.  12월의 시

최연홍

12월은 잿빛 하늘, 어두워지는 세계다
우리는 어두워지는 세계의 한 모퉁이에
우울하게 서 있다
이제 낙엽은 거리를 떠났고
나무들 사이로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눈이 올 것 같다, 편지처럼

12월엔 적도로 가서 겨울을 잊고 싶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한 해가 가는 것을 잊고 싶네
아니면 당신의 추억 속에 파묻혀 잠들고 싶네
누군가가 12월을 조금이라도 연장해준다면
그와 함께 있고 싶네
그렇게 해서 이른 봄을 만나고 싶네, 다람쥐처럼

12월엔 전화 없이 찾아오는 친구가 다정하다
차가워지는 저녁 벽난로에 땔 장작을 두 고가는 친구
12월엔 그래서 우정의 달이 뜬다

털옷을 짜고 있는 당신의 손,
질주하는 세월의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그 후에 함박눈 내리는 포근함

선인장의 빨간 꽃이 피고 있다
시인의 방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다
친구의 방에는 물이 끊고 있다
한국인의 겨울에는

 68.  12월은

하영순

나에게
칭찬하는 사람 거리를 두고
항상
회초리든 사람을 가까이 하면
매사 형통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
쓴맛 보다
단맛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
더러는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쑤세 뭉치 같은 세상
가만 두어도
또 한해는 간다.

세월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이 이름지어
세월이 간다고 하니
나도 따라 갈 수밖에

 69.  12월은 사랑의 달

하영순

산과 들
골목골목 구석구석
찍어 놓은
발 도장이 얼마나 될까

감춰 놓은 자국마다
사색의 실타래를 풀어
씨줄 날 줄 엮어
베를 짜리라

고운 실 곱게 뽑아
비단 짜서 복주머니를 만들고
고운 마음 크게 뽑아
가마니를 짜고
그 안에 꼭꼭 사랑을 다져 담아

숨길 머무는 우리 사는 세상에
남김없이
날려 보리라
하얀 눈송이처럼

70.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71.  12월 닮은 한사람

허정자

이파리 하나 없는 빈가지에 걸터앉아
눈부시게 반작이는 저 흰 눈
찌든떼 끈적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말끔 하게 차려 입었다고 골목으로
확성기 들고 인정해 달라고 외치는 군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털면 먼지 나지 않는 의복이 어디 있으랴
그 자리 올라가면 북적대는 시야에
저절로 앉은 먼지

그래도 웃옷 벗어 자주 자주 털어보는
옥상위에 햇빛과 대화하는 어진 한 사람
지지하여 평화의 노래 부르고 싶은

12월 닮은 인도자 한분 횟불 들고 마중 가고싶다.

 72.  12월 1일

홍윤숙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73.  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 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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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시모음

 

1. 11/고 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2. 11/ 박영근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3. 11/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

 

4. 11/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5. 11/ 이수희

 

내 그림자가

고집을 피우고

슬그머니 꼬리가 무딜까봐

감나무 몇 잎이

가지를 놓지 못합니다

시간의 그늘을 저만치 두고

비릿한 눈물마저 마른

하늘 끝마저 멉니다

그가 내민

연서를 따라가다가

벌레먹은 낙엽이 되고

휑하게 길어진 돌담길

긴장한 상념도 움츠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걸립니다

땅위를 걷는 모든 각진 마음들이 뒹굴어

제 가슴만 헐어내고

제 허무함만 세우고

그래도 그의 가슴마다 기슭마다

세상의 뿌 리를 더 환하게

달고 있습니다

 

5. 11/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박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릉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거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6. 11/ 이창숙

 

조용히 흔들림 없이, 손 내밀지 않고 두려움 없이,

어둠과 사유하기,

나무들이 11월의 집을 짓고 있다

허름하게 집 지을 짚 몇단만 있으면 되지

다 읽지 못한 책은 그냥 덮어두고

쓰지 못한 시()는 바람에게 들려주고

보고 싶음은 붉은 울음으로 떨궈내고

안쓰러움은 발 밑에 묻어 두지

한밤중에도 나무들은 사이사이 눈을 뜬다

흔적지우기 긴 몸 소름돋는 쓸쓸함 꼭꼭 쌓아두기

구석구석 빈자리 채워가기로.

 

7. 11/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8. 11/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빚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9. 11/ 황인숙

 

너희들은 이제

서로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

11

햇빛과 나뭇잎이

꼭 같은 맛이 된

11

엄마, 잠깐 눈 좀 감아봐! 잠깐만

잠깐 잠깐 사이를 두고

은행잎이 뛰어내린다

11월의 가늘한

긴 햇살 위에

 

10. 십일월 / 이정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고 또 날린다.

찌푸린 하늘은 할미꽃

떨어져 날리는 잎사귀마냥 모두들 바쁘다.

푸시시한 얼굴에 초겨울 그림자가 스치고

쪼달림의 모습 모습이다.

잘 익은 밤나무

밤톨 한 알 없이 다 털리고

주황색 감나무에

달랑 까치밥 한 알뿐이다.

뿌연 하늘이 멍하니 내려 보이는 빈 벌판

허허로운 허수아비

심장도 멈추었다.

소용없는 바람만이 차가워서 흐느끼고

코스모스와 들국화도 흑흑 따라서 운다.

멀거니 할미꽃도 운다.

모두들 앙상하게 남아서 운다.

 

11. 11월은 / 진 란

 

은색 바람으로 몸을 닦으며

시린 들판에 그대라고 써도 좋으리

 

살얼음 오싹한 하늘 웅덩이에

이마를 기대고 선 나목으로

꼭감은 그대 눈 속에서

불꽃같은 별밤을 꿈 꾸어도 좋으리

봄이 피는 꿈

눈밭에 떨어진 푸를 씨앗들

겨우내 바람 치대는 소리에 귀를 씻으며

하얀 적설로 눈사람이 되어도 좋은

망부석의 전설이 되어도 좋은

 

12.11월에 /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13. 11월에 / 고혜경

 

달빛에 홀로 선 나목

투명한 새벽에 젖어

멀어지는

가을의 마지막 얼굴 되어

볓 빛보다

더 시리게 떠나간다

 

사라져 흙이 되는 것마다

의미는 남아

이슬이 채 밟히지 못한 시간 앞에

때를 따라 아름답게 서성이는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마른 잎

천 년을 두고도 남을

사랑보다 더 깊은 의미의 진실이구나

 

14. 11월의 편지 / 목필균

 

지구가 뜨거워졌는지

내가 뜨거워졌는지

아직 단풍이 곱다

갈색 플라타너스 너른 잎새에

네 모습이 서있고

11월이 되고서도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

꼬깃꼬깃 접힌 채

쓸려간다

모니터에 네 전령처럼

개미 한 마리

속없이 배회하는 밤이 깊다

네가 그립다고

말하기보다 이렇게 밤을 밝힌다

11월 그 어느 날에

 

15. 11/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것 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6. 11월의 시 /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을 비우고

초연히 겨울을 떠나는 모습

독약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도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

 

17. 11월에 /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18. 11월의 시 /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에

시름을 떠넘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19. 11월의 시 / 홍수희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20. 11월의 시 / 이재곤

 

맺히고,

익어서

지닐 수 없을때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다시,

또 다시 살아도

지금같을 삶이 슬퍼서

그때도 지금 같이 울리라

눈에 들여도

가슴에 들여도

채워지지않는 삶의 한도막

슬퍼서 너무슬퍼서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21. 11월의 시 / 이임영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황량한 가을 바람이 몰아치며

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11월엔 누구도

절망감에 몸을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이 황량해도

단지 가을걷이를 끝내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수확물이 그득한 곳간을 단속하는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이게 하여 주십시오

 

낮엔 낙엽이 쌓이는 길마다

낭만이 가득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사는 창문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게 하시고

지난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랑의 대화 속에

평화로움만 넘치게 하여 주소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이야

머나먼 전설 속 나라에서 불어와

창문을 노크하는 동화인양 알게 하소서

 

22.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울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23.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24.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25. 11월의 서 / 이정인

 

따스한 봄 빛 향기에 끌려

빗장을 내리고

움 터 자란 새 순은

중년의 울타리에

하얀 목련처럼 감싸는 이 없이

피다 지고

 

어설프게 타다 진

숯불인가!

무더운 밤

그리운 새벽바람 한 줄기는

어느 새 싸늘한 얼굴로

찾아와 있다.

 

갈잎 떨어지는

가을 숲에는

잎 새 보다 더 큰 비명으로

세월을 아파하는

역류의 모난 반란만

산만하게 흩어지고

 

가지에는

마지막 남은 잎 새하나

어둔 밤하늘에

시리도록 하얀 얼굴로 떠 있는

보름달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다.

 

26. 11월의 풍경, 하나 / 진 란

 

몇일 내내 퍼붓던 빗방울들이 멈추었다

목울음에 잠긴 세상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어지는

눅눅한 사잇길에서 눈 악무는 아수라 여자

밤새 지나간 흔적 없는 텅 빈 길 위에

지친 몸으로 드러누었던 은행잎이

도시를 흔들어 깨우는 타이어에 휘쓸려

맨발의 무희처럼 달려가는데

비안개가 피어오르는 흐린 유리창에

당신은 누구시냐고

어디서 쉬었느냐고

젖은 속내 감추어 쓴 편지 한 장

새벽잠 속에 가만히

밀어놓는다

 

27. 11월의 나무<김경숙>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28.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29.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30.11의 저녁 / 김 억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수풀로

작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며

저녁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은 회한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31. 입동 저녁 / 이성선

 

벌레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도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 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32. 입동이후 /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33. 늦어도 11월에는 / 김행숙

느릿느릿 잠자리 날고

오후의 볕이 반짝 드는 골목길

가을 냄새가 시작된다

 

시들어가는 시간

사람들이 종종걸음 치는 저녁 때면

어김없이 등줄기가 시리다

 

갑자기 햇살이 엷어지고

나뭇잎 하나 툭! 떨어져 내리면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마른 풀잎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으리라

늦어도 11월에는.

 

34.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35.11월을 빠져나가며 /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내리는 눈이라도 기념으로 맞아두자

마른 풀대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무와 나무들 사이가 분명해지고

강가에 서면 흐르는 물소리들도 한껏 야위어 속살 다아 보인다

서로 벌어져 있다

가장 견고하다는 네 사유의 책갈피도 여며지지 않는다

머물렀다고 할 수 없다

서둘러 11월은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36. 11월을 보내며 / 정아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늘 목에 가시 되어

남아 있는 가을

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덩달아 통곡을 하게 하고

어디쯤 오고 있는지

내 아픈 겨울

힘들게 오르는 가파른 언덕 길

늦은 가을 국화 한 송이

눈물새 울음 배어 목이 쉬는데

어느 시간 속에 건 찾아내어

함께 있자 한다

함께 있자 한다

 

37. 11월 이후 / 진 란

 

지순한 하늘에 몇 개의 이파리 팔랑이며

따순한 햇살에 맨 몸 다 드러내고

남루한 숨소리 몇 바람 지나더니

욕심 비워 나목일래

검은 둥치의 발등에 풀새들 내려앉은

오후, 곰실곰실 피어난 비탈에 서서

꿈을 몰아 뿌리 올리는 연리봉으로

만나고저, 오래오래 바라다가 눈부처 들어

연리지로 맞잡은 손, 천년고독을 기다리는

나무로 서고저

 

38.11....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39. 11/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좋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40. 11/ 박용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1. 11/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다라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다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42. 11/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키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는다.

 

 

43. 11월이 지는 날 / 이영균

 

눈부시게 저무는 저 노을빛은

땀내며 타들던 산골 그 아궁이 장작불빛 같다

 

아이의 사타구니가 노릇노릇 익고

불 내를 품은 얼굴엔 졸음이 잔뜩 달라붙을 때쯤

밥 냄새를 뿜던 장작불 삭은 재 속에서 터지던

알밤의 요란한 웃음

아버지의 등에 업혀온 장작도

호주머니에 담겨온 알밤도

그 저녁 담 넘어 퍼지던 촌락의 냄새도

노을을 등지고

그 돌아서서 웃으시던 아버지의 환한 빛인 듯

11월의 노을빛은 아직 저리 눈부시다.

 

결실을 내어주고 뿌리 밑 샘까지 말려버린 고목

그 저녁 빛 속에 학 다리로 환히 서 있다

 

44. 11마지막 기도 / 이해인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사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45. 11/ 송정란

 

바싹 마른 입술로

나뭇잎 하나 애절하게

자작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곧 어디론가 떠날 듯한

몸짓으로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고개를 내젓고 있다

양재동에서 안양으로 가는 913번 좌석버스

차장 밖으로 이별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마다 잎을 갈아치우는

나뭇가지의 완강한 팔뚝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린 잎들이 모조리 소스라쳐 있다

더 이상 내줄 것 없는 막막함으로

온몸 바스라질 것 같은 눈빛으로

속이 다 삭아버린

사랑에 매달리고 있다

입을 앙다문

여윈 나뭇잎 같은 계집 하나,

바싹 마른 입술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46. 11/ 노연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얼음이 가득하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움츠린 어깨마다 수북한 근심

어둠은 더 빨리 얼굴을 들이민다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뒤쫓아도

늘 손은 비어있다

 

비어 있어도 아름다운 나무들

제자리 묵묵하게 삶을 다진다

비늘 떨군 담담함으로 12월을 기다린다

 

마지막이란 이름 붙은 것의 앞은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거름이라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

 

낙엽을 떨구는 몸짓을 사람들도 한다

잠시 어깨 움츠렸다가

눈이 오면 곧 환하게 웃는다

 

47. 11월의 마지막 날 / 진장춘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

첫눈이 내리다가 비로 바뀌고

다시 비가 눈으로 바뀌곤 한다.

가을과 겨울이 시간의 영역을 다툰다.

 

단풍나무는 화려한 가을 송별회를 하고

눈바람은 낙엽을 휩쓸며 겨울의 환영회를 벌인다.

가을과 겨울이 줄다리기를 하지만

위풍당당한 겨울에 가냘픈 가을은 당할 수 없다.

젊은이들도 첫눈을 반기며 만남을 약속한다.

가을은 울며 남으로 떠난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내년에 오리라.

계절의 쳇바퀴는 누가 돌리나?

추동춘하 추동춘하 추동춘하...

계절의 쳇바퀴를 돌리면서 세월은 간다.

세월이 가면 사람도 가고 만물도 흐른다.

 

48. 11월의 허수아비 / 김태인

 

오소서, 오소서

상처뿐인 이 계절에 오소서

 

기다리다 흘리는 눈물이

차갑게, 차갑게 얼어붙어

날카로운 고드름 되어

그대 가슴 찌르기 전에

 

그리움에 지친 영혼

구름처럼 붉은 노을 되어

어딘지 모를 곳에 부서져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넘치는 사랑으로

누렇게, 누렇게 삭아 내리는

저 들녘의 얼빠진 바람둥이들

돌아보지 말고 빨리 달려와

 

모닥불 같은 사랑으로

굳어진 혈관을 달구어

녹슬어 멈춰 버린 심장에

뜨거운 피를 부어 주오

 

그대여, 그대여,

꿈속에서 서성이는

신기루 같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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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시모음 45편

《1》10월의 기도

작자 미상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 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2》10월

김용택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맞춤의 감촉은 잊었지만
그 설렘이 때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0월이었지요.
행복했습니다.

《3》10월의 기도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주소서.

《4》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5》10월의 뜰

홍금자

칸나, 바이올렛……
꽃들의 어지러운 웃음도
종막을 내린
이젠
불기 없는 빈 방 같은
응어리진 삶이
계절의 끝에 서
밤은 내린다

덩치 큰 여자의 엉덩이처럼
시새움마저 사라져간
빈 뜰의 한 모퉁이에
허공처럼 남아 있는
풀잎 바람

쭈그러진 뱃가죽으로
헛구역질하는 임산부 마냥
바람 바람에
떠밀리는 잎새들

그날의 화사한 웃음과 색조는
가고 없어
나는 낙엽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을을 보낸다.

《6》10월의 시

이재호

왜 그런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가을비는 싫다.

새파랗게 달빛이라도 쏟아지면
나는 쓸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낙엽이 떨어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허전하기만 한 것은
군밤이나 은행을 굽는 냄새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왜 살부빔이 그리운가.
사랑이란 말은
왜 나에게 따뜻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여민다.
내 등뒤에는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음처럼 들린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7》10월의 시

이해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도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 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한점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 일지라도
자꾸 갈아 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 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 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 준 그 한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8》10월 어느 날

목필균

세월은 내게 묻는다
사랑을 믿느냐고

뜨거웠던 커피가 담긴 찻잔처럼
뜨거웠던 기억이 담긴 내게 묻는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렌지 위에 찻물로 끓는 밤
빗소리는 어둠을 더 짙게 덮고 있다

창 밖에 서성이는 가을이 묻는다
지난 여름을 믿느냐고

김삿갓 계곡을 따라가던 물봉숭아
꽃잎새 지금쯤 다 졌을텐데

식어진 사랑도
지난 여름도
묻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기울어진 가을 밤
부질없는 그리움이
째각째각 초침소리를 따라간다

《9》시월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10》10월이 오면

진의하

자연은
비우는 법을 알아
토실토실 가꾸어온 결실
미련 없이 훌훌 털어주네.

허공에 놀다가는 구름자락처럼
임자가 따로 없는
세상살이의 윤회
출렁거리는 메아리의 의미는
선회하는 빈잔.

채우고 마시고
비우고 채우는 동안
홍안의 붉은 넋
때묻은 온갖 시련 미련 없이 털어내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10월은
비움으로 넉넉한 잔치마당이라네.

《11》누가 쏘았을까 10월 심장을

원영래

누가 10월 심장을 쏘았기에
첩첩 산마다 선혈 낭자할까
골골 들녘마다 억새강이 흐를까.
내 안 뜨겁게 달구던 피도 흘러나가
가슴 저며 시려 오는 걸까.

《12》10월에는

박재성

10월
결실의 달
햇살 아래 익어 가는 결실을 만나러
벌판으로 나가보렴

황금벌판 한가운데서
벼 익어 가는 소리를 들어보렴

농부의 땀으로 일구어 놓은
벼이삭과
포근한 가을 햇살과의
진솔한 가을 이야기

감사와 응원 속에서
솟구치는 환희를
가슴에 새겨보렴

네가 일구어갈 내일의 소리
가슴 벅찬 그 환희로
너의 오감을 간질여 보렴

《13》시월

기형도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개의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굴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잠시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追憶들은 갑자기 거칠어 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 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 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 였던 때가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14》10월의 노래

백원순

산허리
여름내 머물던 구름들
푸른 하늘 높이 떠다니고
10월에 만난 연인들

스치는 바람
나뭇잎들 소슬 거리고
숲길 돌아서
만난 연인들

어두워지는 해질 녘
가을벌레들 노래하고
먼 길 모퉁이에서
만난 연인들

바스락거리는 나무들 옷깃
청량한 빛 내려앉고
별빛 언덕에서
만난 연인들

《15》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 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 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16》시월

민용태

하늘에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떼각떼각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소리
사무실이 바닥보다 창문 높이로 올라서고
벽에서는 횟가루 대신 구름냄새가 난다.

먼 구름에서 알밤이 빠지듯
너는 그렇게 내 품에 떨어진다.
너의 얼굴을 보면 보석을 머금고 있는 것이
석류만이 아닌 것을 안다.

너의 가슴을 보면
사과나무 가지가 휘어진다.
서류뭉치들이 연이 되어 나르고
시계추 끝에선 포도송이가 여린다.

시월은 하늘과
하늘의 친척들이 몰려오는 달
꿈과 기다림이 현금으로 거래되고
온 도시가 잠깐
하늘의 식민지가 되는

《17》10월

용혜원

가을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계절은 없습니다

가을은 고달픈 이들에게
마음의 쉼터를 만들어줍니다

가을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열매 속에는
여름 햇살의 사랑 노래가 가득합니다

꽃피는 봄과
찬란했던 여름
열매로 가득한 가을
모두 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한 만큼의 행복을 갖고 나누는
당당하고 멋들어진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있습니다

떠나기 위하여
가을 나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온몸을 물들입니다

아름다운을 만드는
나무 잎새들의 마음이
감동을 만들고 있습니다

《18》시월(十月)

오정방

가을은 쓸쓸하나
시월은 슬프잖고

가을은 외로우나
시월은 고독찮네

루루루
풍성한 시월
노래하며 보낼래

《19》10월의 가을 아침

이세송

새벽이슬 한 방울 한 잎 모아서
어둠을 보내기 아쉬워하는 새벽 별과 함께
10월의 첫날 향기 곱게 옷을 입은
국화잎을 따서 차를 우려 봅니다.

그윽하게 허공을 가르며 피어오르는 국화 향기
별빛은 살포시 미소 머금은 차를 따르고
나는 고운 향기를 가슴 깊이 담으며
마음은 찻물로 몸을 적시고
잔잔하게 흐르는 Ralf Bach 에 건반 위 고운 손길은
정겨운 담소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찻잔 속에서 10월의 가을 아침이 어우러지고
창문을 두드리는 노란 옷 갈아입은 단풍잎은
가을 국화향기에 서서히 물들여 지면서
기다리던 그리운 님 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20》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21》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22》시월

임보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의
발성(發聲)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23》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24》10월이 떠나갑니다

이정순

화려하고
곱게 물든 가을
10월이 가고 있습니다

달콤한
사랑과 설렘의 가을을
가슴에 안은 채
보내야 하는 아쉬움은

10월을 이렇게 보내고
곱게 물든 잎새에
10월의 편지를 쓰겠다.

《25》시월

황동규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26》시월

전동균

벽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 녁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묵언수행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27》10월의 뜰

홍금자

칸나, 바이올렛
꽃들의 어지러운 웃음도
종막을 내린
이젠
불기 없는 빈 방 같은
응어리진 삶이
계절의 끝에 서
밤은 내린다

덩치 큰 여자의 엉덩이처럼
시새움마저 사라져간
빈 뜰의 한 모퉁이에
허공처럼 남아 있는
풀잎 바람

쭈그러진 뱃가죽으로
헛구역질하는 임산부 마냥
바람 바람에
떠밀리는 잎새들

그 날의 화사한 웃음과 색조는
가고 없어
나는 낙엽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을을 보낸다.

《28》시월

홍해리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 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 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잇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29》시월 초사흘

류제희

누가 던져놓았나, 길 없는
하늘중천에
막내고모 눈썹 같은 초승달

달빛에 야윈
미루나무 꼭대기에 서너 장
봉함엽서 떨고 있네.

흰 눈발 서성이면
덧나던 그리움도, 기우뚱
헛발 딛는 초저녁

《30》시월 비

정소슬

우수수
지는 낙엽은
나무의 한쪽 밑동에만
쌓이고

뚝- 뚝-
떨구는 빗방울은
내 한쪽 가슴만
적시운다

《31》시월 이야기

이향지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32》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33》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최원정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34》시월은

박현자

시월은
내 고향이다
문을 열면
황토빛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엔
국화꽃같은 구름
국화향 가득한 바람이 불고

시월은
내 그리움이다
시린 햇살 닮은 모습으로
먼 곳의 기차를 탄 얼굴
마음밭을 서성이다
생각의 갈피마다 안주하는

시월은
언제나 행복을 꿈꾸는
내 고향이다.

《35》시월의 기도

박현희

힘없이 떨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찬란했던 삶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소서.

맨 처음 하늘이 열리고 생이 시작되어
유(有)가 생성되기 이전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처음 내딛던 첫발 첫걸음을 생각하게 하소서.

오고 가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뒤돌아볼 겨를 없이 정신없이 달려온 고단함에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각오로 힘찬 출발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하소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잎이 떨어지는 아픔의 시간을 겪으면서
한층 성숙한 나로 거듭나게 하소서.

《36》시월의 사유

이기철

텅 빈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혀지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월급봉투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비자금
영변 경수로 대북송금 김정일 트로츠키 조정래 천리안 이회창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거지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쫓겨난 염소처럼 나는 혼자 면사무소 옆길을 걷는다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37》시월의 장미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을 맞으며
똑똑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38》시월이어서 좋다

최명운

시월!
누구는 시월이 쓸쓸하다는데
난 시월이라서 참 좋다
들녘 산
넉넉하고 풍성하게 가득 차지 않은가
초록빛 이파리
붉거나 노란색으로 물들어
저녁놀처럼 불거지면
거룩하고 성스러워 환희롭다
밤이슬에 눅눅히 젖으면 어떤가
바람결에 떨어지면 어떤가
일 년 절반을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지 않았던가
시월이어서 좋다
가을이라서 좋다
간절히 바랐던 그 무엇
중단할 수 있으니 가볍지 않은가
실수가 있었다면
눈감아 줄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내려놓고 비우고
빈 그릇 채우듯 기다리면 되지 않던가.

《39》10월

문인수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40》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41》10월

임영준

혹시
다 마셔버렸나요
빈 잔을 앞에 두고
후회하고 있나요
옆구리가 시리고
뼈마디가 아린가요

차분히 지켜보세요
저 깊은 하늘소(沼)에서
붉은 술이 방울져 내릴 겁니다
다시 잔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42》10월 어느 날

홍경임

10月 태양빛에
가득 찬 오늘
나 죽어도 좋으리

10月 비껴진 햇빛에
코스모스 흐느끼는 이 날
나 생을 마쳐도 좋으리

들국화 비에 젖는
10月 어느 날
나 본향으로 돌아가도 좋으리.

《43》10월 엽서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 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44》10월 창호문

유안진

찬서리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는가
어느덧 우리 사랑은
창호문의 꽃무늬

대장부 천금 목청
대닢으로 푸르러 있고
그 옆에 향기 높아
국화는 나의 뜻

절반은 고전이요
나머지는 현대이나
아직도 한 채의 한옥 같은 내 사랑아
이제부터 불빛이
긴 밤을 지킬지니

낙엽 같은 맨발로
홀연 돌아오는 밤도
창호문 바른 솜씨 보아서 아시리.

《45》10월에는

정연화

코발트빛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눈부신 가을 햇살처럼
따뜻한 가슴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길섶에 핀 들국화처럼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련한 그리움 하나 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단 한사람 누군가 있어
잠 못 이루는 밤이어도

가을
가을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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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시 모음 59편

 1. 갱년기의 9월

강민경

9월 맞는 뼈 끗에
쌓이는 바람의 촉수
내게 수상쩍은 통지서를 내미네요

시리도록 투명한 햇살에
나뭇잎이 스치는 바람처럼
거둬 간직할 수도 없는 흰 구름처럼
나는 내 몸을 송두리째 내주어
지글거리는 신열을 다스린 등줄기에
얼음물 끼얹는 세월 유정함에
높아만 가는 하늘이었네요

세월이 세월을 불러
바람을, 흰 구름을,
누렇게 물든 벼이삭에,
잔가지에 매달려 붉어지는 사과에
갱년기 고개 넘는 법을 가리키며
동동걸음 쳤던 한 호흡 사이는
태양이 여름을 분탕(焚蕩)을 치다 지쳤을 때
혼이 맑아지듯
제가 지워지는 줄도 모르는
숨막히는 절정

제 살점 녹여 키워낸 장성한
아이들 보여 준, 훈훈하고 확확 거리는
확실한 메시지였지요.

 2.  9월도 저녁이면

강연호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3.  9월

권오범

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쥐어짜
너덜너덜해진 구름
하늘이 아무렇게나 널어
솜처럼 보송보송 말려놓은 추석 단대목
새물 내 머금은 바람
조석으로 오스스 내려와
열린 창 핑계삼아 무단 침입해
닭살 돋도록 경망스럽게 살랑거리지요
언제부턴가 귀뚜라미 소리가
이명 처럼 은근히 뇌로 파고들어
이 마음 이간질해대는 것이
가을이 분명한가 보다
뜨락을 무성하게 점령한 채
광신적으로 하늘 우러러 사랑 구걸하는
코스모스 떼 아우성에 질렸는지
대추들도 붉으락푸르락 늙어가고 

4. 9월이 오면

권정아

조석(朝夕)으로소슬바람 불고
하늘 더 높아
가을햇살 눈부신 9월이 오면

들녘마다
알알이 익어가는 오곡들과
과수원에 풍성한 백과(百菓)들
태풍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튼실한 결실 맺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봄부터 여름내 고생하신
검은 얼굴 농부(農夫)님들
태양(太陽)같은 미소를 머금고

우리들 식탁이
매일매일 윤택(潤澤)해지도록
전능(全能)하신 주님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5. 9월의 가을을 느끼며

김영국

높아만 가는
파란 하늘빛이 어찌나 고운지
새하얀 새털구름이 시샘하듯
우아하게 뽐내듯이 날갯짓을 하고

부끄러운 듯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가녀린 꽃대엔
연분홍 치마저고리 걸치고
수줍은 미소를 보내오는 모습을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느낍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녘에는
알알이 익어가는 나락
동구 밖 과수원에는
탐스럽게 속을 꽉 채우는 실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농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르고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산들산들 불어오는 가을바람의 연주 속에
빨간 고추잠자리 어여쁘게 춤을 추며
풍요로운 가을을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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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월의 아름다운 고백

김용복

9월의 마지막 날
출가한 막내딸이 퇴근길에
외식하자고 연락이다.

수술을 앞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딸의 효성이 고마웠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아내와 함께 식사하며
소주 한 병에 시름을 적셨다.

아내의 손 옆구리에 끼고
공원 길 몸을 부딪치며
마지막 9월을 즐겼다.

왼팔로 껴안은 아내에게
여보! 당신을 사랑하오!
아름다운 고백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는 지난 세월이
아쉬웠다고 눈물 떨군다.

 7. 9월에는

김정원

9월에는
붉은 과꽃이 피어 있는
넓은 정원에 앉아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가슴에
가득 담고 싶습니다

이글거리던 태양과
새벽부터 단잠을 깨우던
매미의 울음소리까지도
짧은 여름날의 추억을
하얀 도화지 위에
스케치하고 싶습니다

9월에는
갈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서서
일년을 하루같이
그리워하는 당신의 안부를
바람에 묻고 싶습니다.

 8. 9월이 오면

김향기

웃자라던 기세를 접는 나무며 곡식들,
잎마다 두텁게 살이 찌기 시작하고
맑아진 강물에 비친 그림자도 묵직하다.
풀벌레 노래 소리 낮고 낮게 신호 보내면
목청 높던 매미들도 서둘러 떠나고
들판의 열매들마다 속살 채우기 바쁘다.
하늘이 높아질수록 사람도 생각 깊어져
한줄기 바람결에서 깨달음을 얻을 줄 알고,
스스로 철들어가며 여물어 가는 9월. 

9. 9월에는

김홍성

9월은 화가처럼 예쁜 그림을
가슴으로 그리고 고운 색깔로
하나하나 채워 가는 마음속에
화가 하나 두고 있습니다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사랑의 깊이를 느끼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맑은
눈물하나 담고싶은 가을 향기
가득하고 풍성한 9월입니다

9월엔 사랑을 하세요
쏟아질듯 그렁그렁한 별빛과
한 여름에 사랑을 속삭이던
풀벌레들의 아름다운 언어들이
9월의 아름다운 시가 될 것입니다

풍성한 오곡 백과가 무르익어 가고
부족했던 마음은 넉넉한 보름달이
그늘진 곳까지 밝혀주며
강강술래 가락에 밝고 동그란
보름달이 자꾸만 차 오릅니다

 10. 9월이

나태주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속을 떠나야 한다

 11. 다시 9월

나태주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아올랐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

 12. 단풍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13. 9월에 드리는 기도

도지현

9월엔 기도하나니
갈바람 황량하게 불어도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봄에 부는 훈풍이게 하소서

가을 들녘의 풍요로움
풍요 속에도 빈곤은 있나니
누구의 마음속에서도
시름과 한숨이 없게 하소서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
시나브로 붉어 가는 산야
그 붉음이 많은 이의 가슴에
사랑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여름 내내 괭이질 한 농부의
가슴 골로 여울지는 땀
힘들여 일한 그들에게
풍요를 가득 안겨주게 하소서

삭막에 물드는 계절이지만
바람 속에 낭만이 묻어오니
촉촉하게 젖어드는 가슴 되어
모든 이들이 시인이게 하소서

 14. 9월의 당신은

도지현

어느새 창가에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나붓하게 내려앉았어요

언제부터인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가슴에 알알이 수를 놓아요

소슬한 바람이
시린 가슴에 파고들면
뻥 뚫린 마음 때론 허전해져요

그렇게 푸르던 잎새
점점 갈 빛으로 가고 있어
나를 보는 것 같아 애잔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여물어 가는 계절
9월의 당신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15..구월이 오는 소리

류교열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꿈을 꾸듯 날개를 펼치며
세월 가는 소리 여름 가는 소리
가슴을 파고드는 내 님 옷깃 여미는 소리
바람 불어 매미의 열창 저 멀리 흩어지고
코발트 빛 파란 하늘에 사랑이 녹는다

가슴 부풀어 입술에 숨을 불어넣어
그대 영혼에 구구절절 구절초 피워 놓고
가을 햇살을 한 아름 끌어 심장에 걸고
맑은 하늘을 보며 사랑하고 싶다

푸른 초록빛을 머금은 나뭇잎
울긋불긋 고운 옷 갈아입을 채비하고
이꽃 저꽃 옮겨 앉으며 입맞춤하던 나비
서둘러 사랑을 나누고 유영하던 꽃밭에
꽃잎 하나 베고 누워 울음을 터트린다

구월이 오는 소리
빨간 고추잠자리 매혹적인 색깔로
자태를 뽐내며 푸른 창공을 채색하고
파랗게 펼쳐지는 푸른 하늘에 또박또박
내 님에게 사랑의 가을 편지를 쓴다

 16..9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까지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 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17..9월

목필균

태풍이 쓸고 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 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 따라
바삭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18..9월의 시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19..9월

문인수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20..9월의 기도

문혜숙

나의 기도가
가을의 향기를 담아내는
국화이게 하소서

살아있는 날들을 위하여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한쪽 날개를 베고 자는
고독한 영혼을 감싸도록
따스한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시작이
당신이 계시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길목이게 하소서

세상에 머문 인생을 묶어
당신의 말씀 위에 띄우고
넘치는 기쁨으로 비상하는 새
천상을 나는 날개이게 하소서

나의 믿음이
가슴에 어리는 강물이 되어
수줍게 흐르는 생명이게 하소서

가슴속에 흐르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마른 뿌리를 적시게 하시고
당신의 그늘 아래 숨쉬게 하옵소서

나의 일생이
당신의 손끝으로 집으시는
맥박으로 뛰게 하소서

나는 당신이 택한 그릇
복음의 사슬로 묶어
엘리야의 산 위에
겸손으로 오르게 하옵소서 

21..9월의 약속

박연욱

나의 밤 하늘에는
오염 되지 않은 작은 성(星)이 있다
속세의 번뇌를 건너뛰고 비답이 담긴
항아리 찾으러 매일 밤 빈 성(星)을 맴돈다
맑은 한 영혼의 마중을 준비하면서
기쁜 몸짓으로 한바탕 가을바람이 불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공허한 마음의 길 잃은 언어들이 밤안개에
뒤섞여 갈곳 잃고 대지로 안갯비 되어
버들피리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흙으로 빗은 회복할 수 있는 양심을
하얗게 발자국 뒤로하고 시월을 맞이할 것이다
농익어 가는 이 가을은 모든 것을 주고받으며
명경(明鏡) 개울에 또렷이
기도하는 열정 드러나도록 붉게 풀어놓으리
침묵의 눈빛으로 바라만 보던
희망을 잉태 한 성(星)
9월엔 가슴 시리도록 고요의 시간 준비하리라
멀었던 하루의 끝 혼자 맴돌다
잠드는 섬
흐려졌다 가깝게 흔들리는 질척이던 길
오랜 세월 동안 길 잃지 않은
늘 한결 같은 북극성이 있었다.

 22..9월이 온다

박이도

9월이 오면
어딜론가 떠나야 할 심사
중심을 잃고 떨어져갈
적, 황의 낙엽을 찾아
먼 사원의 뒤뜰을 거닐고 싶다
잊어버린 고전 속의 이름들
내 다정한 숨소리를 나누며
오랜 해후를, 9월이여

양감으로 흔들리네
이 수확의 메아리
잎들이 술렁이며 입을 여는가

어젯밤 호숫가에 숨었던 달님
혼사날 기다리는 누님의 얼굴
수면의 파문으로
저 달나라에까지 소문나겠지

부푼 앞가슴은 아무래도
신비에 가려진 이 가을의 숙제

성묘 가는 날
누나야 누나야 세모시 입어라

석류알 타지는 향기 속에
이제 가을이 온다
북악을 넘어
멀고 먼 길 떠나온 행낭 위에
가을꽃 한 송이 하늘 속에 잠기다

 23..9월의 시

박해옥

물 드는 감잎처럼 고운 하늘이
서서히 기우는 해거름
한들대며 손 흔드는
강아지풀의 청순함으로
샛노란 달맞이꽃이 피는 언덕

구석구석 숨어서
사랑을 구애하는
풀벌레의 호소음으로
환청으로 들리는 노래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애오라지
월장성구의 시구를
나의 선생이시여,
이 가을엔
낭낭히 들려 주오소서.
그의 존재가
속울음 삼켜야하는 가장이라서
거짓으로라도 용감해야하는 남자라면
따스한 가슴 같은 언어로
주저앉은 그대의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한사람을 그리워함이 시려서
갈바람처럼 방황하는
새가슴의 여인에게
한 소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날개 휘날리며 달려가
연민의 그대가 되고 싶습니다.
한 잎 두 잎
눈물 같은 낙엽이 내리고
또 그렇게
세상의 소망이 여물 때까지

 24..9월의 기도

박화목

가을 하늘은 크낙한 수정
함지박 가을 파란 햇살이 은혜처럼 쏟아지네
저 맑은 빗줄기 속에
하마 그리운님의 형상을 찾을 때, 그러할 때
너도밤나무 숲 스쳐오는 바람소린 양
문득 들려오는 그윽한 음성
너는 나를 찾으라.
우연한 들판은 정녕 황금물결
훠어이 훠어이 새떼를 쫓는 초동의 목소리
차라리 한가로워 감사하는 마음
저마다 뿌듯하여 저녁놀 바라보면
어느 교회당의 저녁종소리
네 이웃을 사랑했느냐?
이제 소슬한 가을밤은 깊어
섬돌 아래 귀뚜라미도 한 밤내 울어예리
내일 새벽에는 찬 서리 내리려는 듯
내 마음 터전에도 소리 없이 낙엽 질텐데
이 가을에는 이 가을에는 진실로 기도하게 하소서
가까이 있듯 멀리멀리 있듯
가까이 있는 아픔의 형제를 위해

또 나를 위해


 25..9월

반기룡

오동나무 뻔질나게
포옹하던 매미도 갔다

윙윙거리던 모기도
목청이 낮아졌고
곰팡이 꽃도 흔적이 드물다

어느새 반소매가
긴 팔 셔츠로 둔갑했고
샤워장에도 온수가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다

푸른 풀잎이
황톳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메뚜기도 한철이라
뜨겁던 여름 구가하던 보신탕집 문지방도
먼지가 조금씩 쌓인다

플라타너스 그늘이 구멍 뚫린 채
하늘이 푸르디푸르게 보인다

짝짓기에 여념 없는 고추잠자리
바지랑대가 마구 흔들린다 

26..나의 9월은

서정윤

나무들의 하늘이, 하늘로
하늘로만 뻗어가고
반백의 노을을 보며
나의 9월은
하늘 가슴 깊숙이
젊은 사랑을 갈무리한다

서두르지 않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아직 지쳐
쓰러지지 못하는 9월
이제는
잊으며 살아야 할 때
자신의 뒷모습을 정리하며
오랜 바람
알알이 영글어
뒤돌아보아도, 보기 좋은 계절까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으로 영그나?
순간 변하는
조화롭지 못한 얼굴이지만
하늘 열매를 달고
보듬으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27..9월을 기다리는 어느 날에

심재천

날짜 가는 소리 따라 시간은 멈출 줄을 모르는 채 똑딱똑딱
어디로 가는지
팽이도는 초칩 겁 없이 추파를 돌리다 꼬물꼬물
정지된 깡다구를 분출하며 움직이다
되묻은 침묵만 그저 돌아 갈곳이 없다
쉴 곳을 찾은 방랑자가 되어 철지난 아쉬움만 붙잡다
정 붙이는 그곳에서 넋나간 장벽 사이를 허물어
시간은 급행열차를 타고 허덕거리는 숨만 참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고 가는 시간을 막을 수도 없고
그저 하늘이 주신 사랑만을 건네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떨림
철없이 감싸 안은 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음미하다
태워도 재가 되지 않고
버려도 그때 그 자리로 슬그머니 돌아와
어쩌면 그게 못다 핀 꽃 위에 머물고 있는 그리움 아닐까
구월을 기다리는 어느 날에 철부지처럼 뛰도는 텃밭에서
생각해 봅니다 

28..9월을 기다리는 어느 날에

심재천

날짜 가는 소리 따라 시간은 멈출 줄을 모르는 채 똑딱똑딱
어디로 가는지
팽이도는 초칩 겁 없이 추파를 돌리다 꼬물꼬물
정지된 깡다구를 분출하며 움직이다
되묻은 침묵만 그저 돌아 갈곳이 없다
쉴 곳을 찾은 방랑자가 되어 철지난 아쉬움만 붙잡다
정 붙이는 그곳에서 넋나간 장벽 사이를 허물어
시간은 급행열차를 타고 허덕거리는 숨만 참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고 가는 시간을 막을 수도 없고
그저 하늘이 주신 사랑만을 건네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떨림
철없이 감싸 안은 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음미하다
태워도 재가 되지 않고
버려도 그때 그 자리로 슬그머니 돌아와
어쩌면 그게 못다 핀 꽃 위에 머물고 있는 그리움 아닐까
구월을 기다리는 어느 날에 철부지처럼 뛰도는 텃밭에서
생각해 봅니다 

29..9월

안재동

징검다리는
흐르는 물살에 잘 버텨야 한다.
자칫 중심을 잃어 제자리를 이탈하거나
급류를 이기지 못해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사람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9월은
최대한 편하고 좋은 징검다리가 되려 애쓴다.
사람들은 심성 고운 그런 9월을 사랑한다.

길목을 지키는 존재란
으레 긴장되고 분주하게 마련이지만
가을의 길목에 선 9월은
언제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풍성한 들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즐거운 마음을
선선한 공기를 들이켜는 사람들의 싱그러운 호흡을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잘 알기 때문이다.

9월의 들녘에선
여름내 살쪄 올라 사람들을 뒤뚱거리게 했던
무료와 권태의 비계덩이들이
예리하게 날 다듬은 낫이며 호미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농부들의 힘찬 손길에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고 있다. 

30..9월의 약속

오광수

산이 그냥 산이지 않고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약속이 되고 소망이 되면
떡갈나무 잎으로 커다란 얼굴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서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손 내밀면 잡을만한 거리까지도 좋고
팔을 쭉 내밀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어도 좋을 거야
가슴을 환히 드러내면
알지 못했던 진실함들이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산울림이 되고
아름다운 정열이 되어
우리는 곱고 아름다운 사랑들을 맘껏 눈에 담겠지

손잡자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우리는
9월이 만들어놓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약속이 소망으로 열매가 되고
산울림이 가슴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어
하늘 가득히 피어오를 변치 않는 하나를 위해! 우리

 31..9월과 뜰

오규원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32..9월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33..9월이 가기 전에 보내는 연서

유영종

그대 가슴에 숨어있는 정
9월이 가기 전 보고 싶어
붉게 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쓸어 갈
바람 같은 사연이지만
당신께 새겨 두고 싶은 한마디
여적 품고 있었던 사랑

나를 벗어주고 싶었고
그대를 덮어주고 싶었던
마음의 잎 새가
해 맑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부서져 내리는 기분을 감싸 주듯
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잊었던 듯 찾아와
노랗게 다가오는 은행잎
숲길을 걸으며
함께 '시몬'이 되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마루 밑에 울던 귀뚜라미
시월이 오면
방안으로 들어와 노래하듯
그대
내게 찾아들어
새 노래로 울어주리라 기다립니다.

그땐 우리
깊은 겨울을 맞는다 해도
낯선 곳을 향해
떨림의 뿌리가 된다 해도
연리지처럼 부둥켜안고 뻗어 가렵니다.

 34..수채화에 빛인 9월

유영훈

해가 진 저녁이나
여명의 새벽
열려진 창을 넘어 가을이 옵니다

한 낮에

공원 베치우에 스켓취북 우엔
검푸른 나무 잎이 여름을 그립니다

가는 여름은 공원에서 졸고
오는 가을은
가없는 드높은 하늘에서 흰 구름이 되여 가벼이 떠돌고

세월
가고 오는 구도가 잡히지 않은 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인생 또한
별로 내세울 것 없이 삭아
9월의 희미한 수채화가 되여 갑니다

하지만
늦게 들어온 이 마을에서
세상을 위해 멋진 수채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멋진 수채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35..9월의 생이 가기 전에

윤여선

9월의 별꽃이 바람에 실려
마당 가 담장 아래 소녀의 볼살에
포송하게 돋아난 솜털같이
꽃망울 피우는 밤

가슴 울리는 그리움의 기억 속
새하얀 솜빛 같이 스며나는
웃음으로 불러보는
이름

어디였을까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물음표 들고
잎새의 흔들거림처럼
기웃거리다

향긋한 9월의 별꽃 곱게 눌러쓴
그림자만이 오가는 허름한 빈터
벤치 가 물음표 내려놓고
눈감으니

아! 야릇한 자태로
황홀한 사랑 세차게 부려 놓는 임
구월의 생이 임의 기억
지우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
나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못 견디게 그리운지
묻고 싶다

 36..9월의 소리

이세송

오늘 저녁노을은 유난히도 붉고
화려한 자태를 보이면서
서서히 먼 추억의 자리로 떠나려는
8월의 마지막 노을 빛을 선물하며

조금씩 초저녁 별빛에
가을을 열려하는 9월이 고개를 들고
다시 맞는 새벽에는 찬 서리 라도 보여 주려는 듯
제법 쌀쌀한 감이
운무 덮은 산자락을 맴돌아 간다.

8월의 마지막 긴 그림자
아쉬움 속에 가지 못한 늦여름과
숲 사이 스쳐오는 바람소리 듣고

어디선가 숨어 우는 귀뚜라미
잘 가라며 귀뜰 귀뜨우 구슬픈 이별의 노래 불러준다.

9월의 소리에 담장 넘는 박은
조금씩 익어가려 하고
키다리 아저씨 코스모스는 옹기종기 모여서
들녘 익어 가는 소리와 함께
분홍 옷 하얀 옷 노랑 옷 입고 서서
뜰 앞을 가득 메워 버린다.

지나가던 때 이른 철새 한 마리
마지막 8월의 저녁 노을 빛 물든
긴 그림자와 함께 뜰 앞 나뭇가지 위에 누워버린다.

 37..9월의 코스모스

이세종

가는 바람에도
꽃잎 입술에 꼭 물고 서서
분홍빛 붉은빛 하얀빛 곱게 물들이고
긴 대에 매달려 9월을 기다리는 코스모스

은은하게 잊는 듯 없는 듯
향기 바람에 전하며
고운 미소 가득담은 키다리 코스모스
벌써 물 가득한 몽우리 열고
9월을 맞이하려 곱게 단장 하였구나.

하늘 가득한 고추잠자리
너를 반기며 바람노래 부르고
고운 모습 시샘하듯
성급한 나뭇잎 조금씩 단풍 물들이며
9월을 노래하려 한 것 목청 다듬는 소리

붉게 물들인 체 9월을 준비하는 하늘은
알알이 영글어 가는 들녘에
스러진 8월에 긴 그림자 드리우며
하늘 깊숙이 열매 달고 보듬어줄
9월의 코스모스 너에 고운 손길 기다린다.

 38..가을에 전령 9월

이세종

하늘 높이 뭉게구름 손잡고
날아오르는 고추잠자리
바람이 불러주는 휘파람 소리에
두리둥실 춤을 추고

해지는 들녘 어스름이
붉게 물든 노을 빛에
아쉬움 가득 담은 8월의 태양은
서서히 긴 그림자 속에 눕는다.

풀숲에 작은 벌레
떠나는 자리에서
슬픈 이별을 노래하며

서서히 찾아드는
가을에 전령 9월은
나의 마음 가득한 곳에
바람 부는 저녁 숲이 되어 간다.

들 꽃잎 시든 자리에 작은 꽃씨
이별에 눈물 흙에 묻으며
기다림의 자리에 길게 눕고
달빛 가득한 자리에
따스한 가을 빛 되어
별빛 포근한 사랑에 품이 되어 준다.

 39..9월의 메아리

이용옥

8월의 끝자락에
밀물처럼 흘러간 길고 긴 여름

푸른 들녘에 어깨동무하여
오곡백과들이 무르익어

추수하는 풍족한
인정이 넘치고 넘치면
오고 가는 동네마다
풍년가를 부르네

두둥실 둥근 달이 뜨는
보름에 꽃무늬 띄고

경관을 물들인
연분홍 난풍 잎새에서

흥겹고 너울진
축제가 노을저
메아리 울리네

 40..9월이 오면

이향아

옛날에 본 서양 영화 '9월이 오면'이 생각난다.
9월이 오면
등불을 높이 켜단 낯익은 문간
옥빛으로 가라앉은 거울 앞으로
고개 숙여 가만히 돌아오겠노라는
9월이 오면
지난 여름 흐느낌은 묻어버리고
소식처럼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천천히 일어서겠노라는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아마.

그 시절 나는 어리고 꿈은 어여뻤었다.
풋나물 분내 번지는 땅끝 어딘가
금단추 별을 따듯 서성이곤 했었다.
9월이 오면,
9월이 오면,
그 후로도 9월은 해마다 와서
아직도 못다 사룬 꿈을 밝히고
분별 없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41..9월이 오면

이혜우

깊은 밤 하얀 이슬 내려
가을꽃 목축여주고
해가 추분점에 올라
하지처럼 밤낮이 키를 잰다

산그늘 서둘러 내리는
짧은 햇살에 노처녀 고개 숙이고
둥근 가을 달밤에 보람 찾는
인정 깊은 사랑을 꿈꾸게 한다

속 깊은 결실 이루어
풍요는 허리띠 풀어주고
하늘에 흰 구름 높이 떠돌며
산자락에 알록달록 신방 꾸미니

어디선가 불러주는 9월의 노래에
강아지 살찌는 소리 들린다

 42..9월 여정

임영준

비울 만큼 비웠으니
욕심 좀 내어도 좋으리

별도 밤도 가까우니
담담히 조우할 수도 있겠지

아무리 매정한 날들도
잠시 묵상에 들지 않을까

향기 고픈 나그네는
그리움을 따라 흐른다 

43..9월이 오면

임영준

되돌릴 수 있을까
동구 밖 웅크린 그리움을

뜨거운 열정의 밤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내내 시름하던 추억들이
잘 영글어갈 수 있을까

9월이 오면 우리
보다 깊이 스며들 수 있을까 

44..구월

임우성

그대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구월이다

이 가을
제대로 약 찬 내 그리움
독하게 매웁겠다.

 45..9월

장건섭

九月은
허무의 바다

어머니의
쪽빛 저고리 안에
감춰진 恨

그리움이고,
황혼의 탄식

九月은
슬픈 離別의
임시 정거장. 

46. 9월

정연복

여름 끝물의 더위와
가을의 신선함

미지근한 온기와
서늘한 냉기가 함께 있어

산에 들에 오곡백과
무르익는 달.

어느새 종반으로 치닫는
올해의 지난날 뒤돌아보며

생활의 결의
새롭게 다지는 달.

 47. 9월 첫날의 시

정연복

어제까지 일렁이는
초록 물결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은 누런 잎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쉼 없이 흐르는
세월의 강물 따라

늘 그렇듯 단 하루가
지나갔을 뿐인데.

하룻밤 새 성큼
가을을 데리고 온

9월의 신비한 힘이
문득 느껴진다.

 48.  9월이 오면

정용철

9월이 오면 잊고 지낸 당신을 찾아
집을 떠날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당신을 잊은 것은
당신을 떠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9월이 오면 당신에게 편지를 쓰겠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우체국 계단을
내려올 때 햇살 한 줌이
내 어깨에 내려와 말할 것입니다
"나는 알고 있어, 너의 사랑을"

9월에는 고통도 사랑인 줄 압니다
9월에는 이별도 사랑인 줄 압니다
9월에는 익어 가는 모든 것이
사랑인 줄 압니다

9월이 오면 당신은 그곳에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들판의 바람처럼 달려가
당신이 흘린 그리움의 눈물을
닦아주겠습니다

 49. 9월이 오는 소리

정헌영

멀어져 가는 여치 매미 소리
가느란 햇살에 익어 가는 벼이삭
수수밭에 앉은 고추잠자리의 날갯짓
파란 하늘 아래 흔들리는 코스모스
이 모든 정겨운 모습에서 가을빛을 본다

9월이 오는 소리에서 그리움이 녹고
스미는 가을빛에
사랑은 알밤처럼 익어 가는데
살찐 염소가 초원을 헤매며 사랑을 부르면
품속 그리움 꺼내 별빛 외로움을 훔친다

지난여름 된더위 소낙비에 얼룩진 마음에
흰 구름 뭉게뭉게 피어올라 천사 같은
그대를 그리면
내밀한 속 타는 마음 감추고 바라보는 내 마음은
실바람에 실려온 한 잎 이파리로
풀밭을 떠도는 신세 되어
가을빛 노을보다 더 붉은 여린 가슴만 쥐어뜯는다.

 50. 9월의 아침

조미경

향긋한 커피 한잔을 타서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푸른 산을 바라보며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느껴 본다

푸른 산에서는
산새들 소리 요란하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땅에서는 가을의 서늘함

달콤한 빵 한 조각에
고운 미소가 흐르고
슬며시 황홀한 기분에
행복한 마음이 된다

9월의 아침은 싱그러움이 넘치고
입가에 맛있는 음악이 흐르고
음악처럼 아름다운 선율에

오늘 하루도 행복하다

 51. 9월의 오솔길

조용순

미명에 소슬바람이
가슴으로 살포시 스며들어
흔들리는 그림자를 끄집어낸다

더위를 지나온 후줄근한 나태를 일으켜 세워
태초의 신선한 바람이 사색의 오솔길로
손잡고 데려가는 구월 새벽

자작나무 숲을 지나
한층 맑아진 소리로 노래 부르는 계곡 물에
손 담그고 마음도 담가 하늘을 찬양하라 하네
지금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산야를 곱게 물들이기 위한 숨결이
저쪽 산모퉁이서 들려오는 구월의 오솔길로 들어서니
천지 만물의 사랑 노래가 드높여야 할 구원의 빛살 속으로
아름답게 스며들고 있네 

52. 9월이 찾아오면

채린

9월이 찾아오면
먼 하늘 바라보며
한차례 홍역을 앓겠지

온 세상이 추억으로 잠길 때쯤
높고 아득한 밤하늘에
넋을 빼앗기고 모래톱에 서 있겠지

아직도 끝내지 못한
미완성 이야기 애달파
하얀 모래를 적실지도 몰라

한차례 획 지나가는 밤바람들의
홀로 사랑 아픈 이야기에
집에 돌아올 시간이 늦어지겠지

하늘하늘 잠자리 날개 달면
오작(烏鵲)이 아니라도 영겁의 시간이 지나면
먼 행성에 닿을 날 있으리 

53.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꽃잎 진 장미넝쿨 아래
빛 바랜 빨간 우체통
누군가의 소식이 그리워진다

망초꽃 여름내 바람에 일던
굽이진 저 길을 돌아가면
그리운 그 사람 있을까

9월이 오기 전 떠난 사람아

지난해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시간처럼
타오르던 낙엽 타는 냄새가
올 가을 또한 그립지 않은가

가을 오기 전
9월,
9월에 그리운 사람아. 

54. 단풍이 물들면 보고 싶어요

최한식

 그리움이 낙엽처럼 쌓이는
오솔길에서 당신을 못 잊어,

시간이 지나면 잊힐까 하였는대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오면은,

다시 또 생각나는 당신의 얼굴
언젠가는 잊히겠지 하면서도,

그러다가 다시 또 떠오르는
당신에 얼굴. 이 가을이 지나고,

낙엽이 흩어지면 잊어질려나
그리움만 쌓이는 계절인가보다 .  

55. 9월의 느낌

최홍윤

철 지난 바닷가
파도의 음률 차갑고,
이별을 준비하던 마음도 쓸쓸하다.
고요한 호수에
반짝이는 물 비늘 물 비늘에 잠수하고 마는
황혼녘에 물고기들,
단지 빈틈없는 나무 숲이
느슨하게 볕을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에게
따가운 가을을 내준다.

고향언덕에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5월에 흐드러지던 밤꽃이 붉은 알밤이 되고
토실한 대추 알 수줍게 익을 거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다
살가운 물소리로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옛주인 곤히 주무시는 산자락에는
천지사방에 흩어진 손들이 모여 들고
길 떠나간 외기러기의 안부도 전해 오리라!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파도의 운률로 가슴이 따끈,
따끈한 詩를 써봐야겠다. 

56. 9월의 詩

최홍윤

9월은
모두가 제자리를 찾는 달이다

철 지난 바닷가
이별을 노래하는 파도의 음률 쓸쓸하고
물 비늘 반짝이는 황혼녘의 호수
호수에 잠수하고 마는
물고기의 행적도 고즈넉하다

단지,
빈틈없던 나무들 숲에
따가운 볕 느슨하게 들이고
파닥이는 작은 새들의 노래 한결 맑다

교정에 돌아온
그을린 얼굴들도 해맑게
시루 속에 콩나물처럼 성큼 컸다.

돌아 오는 길에
고향 언덕에 잠든 핏줄의 영혼이 깨어나면
산자락에는 시퍼런 밤송이 붉게 웃을 데고
마당가 대추알도 토실하게 수줍어 할 거다

흐르는 살가운 물소리에
가물거리는 내 기억을 더듬고
사랑방 주인들 곤히 잠든 산맥 자락에 가서
공손이 절을 올리고,

그제야,
떠나려는 기러기 떼처럼
안부를 내려놓고
사람 떠나 외로운 파도의 운율 벗을 삼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가슴이
따끈해 지는 시를 써야겠다.  

57. 9월의 시

함형수

하늘 끝없이 멀어지고 물 한없이 차지고
그 여인 고개 숙이고 수심(愁心)지는 9월
기러기떼 하늘가에 사라지고
가을 잎 빛 없고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 더욱 창백하다
눈물 어리는 9월
9월의 풍경은 애처로운 한 편의 시
그 여인은 나의 가슴에 파묻혀 우다

 58. 9월

헤세

정원이 슬퍼한다
꽃송이 속으로 빗방울이
차갑게 스며든다.
임종을 향하여
여름이 가만히 몸을 움츠린다.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잎이 황금빛으로 바래져 하나씩 떨어진다.
죽어 가는 정원의 꿈 속에서
여름은 놀라고 지쳐 웃음 짓는다.

여름은 아직도 장미 곁에
한참을 머물며 위안을 찾다가
그 크고 지친 눈을
조용히 감는다.

 59. 9월

홍수희

소국(小菊)을 안고 집으로 오네
꽃잎마다 숨어 있는 가을,
샛노란 그 입술에 얼굴 묻으면
담쟁이덩굴 옆에 서 계시던 하느님
그분의 옷자락도 보일 듯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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