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시모음 45편

《1》10월의 기도

작자 미상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 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2》10월

김용택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맞춤의 감촉은 잊었지만
그 설렘이 때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0월이었지요.
행복했습니다.

《3》10월의 기도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주소서.

《4》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5》10월의 뜰

홍금자

칸나, 바이올렛……
꽃들의 어지러운 웃음도
종막을 내린
이젠
불기 없는 빈 방 같은
응어리진 삶이
계절의 끝에 서
밤은 내린다

덩치 큰 여자의 엉덩이처럼
시새움마저 사라져간
빈 뜰의 한 모퉁이에
허공처럼 남아 있는
풀잎 바람

쭈그러진 뱃가죽으로
헛구역질하는 임산부 마냥
바람 바람에
떠밀리는 잎새들

그날의 화사한 웃음과 색조는
가고 없어
나는 낙엽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을을 보낸다.

《6》10월의 시

이재호

왜 그런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가을비는 싫다.

새파랗게 달빛이라도 쏟아지면
나는 쓸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낙엽이 떨어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허전하기만 한 것은
군밤이나 은행을 굽는 냄새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왜 살부빔이 그리운가.
사랑이란 말은
왜 나에게 따뜻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여민다.
내 등뒤에는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음처럼 들린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7》10월의 시

이해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도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 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한점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 일지라도
자꾸 갈아 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 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 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 준 그 한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8》10월 어느 날

목필균

세월은 내게 묻는다
사랑을 믿느냐고

뜨거웠던 커피가 담긴 찻잔처럼
뜨거웠던 기억이 담긴 내게 묻는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렌지 위에 찻물로 끓는 밤
빗소리는 어둠을 더 짙게 덮고 있다

창 밖에 서성이는 가을이 묻는다
지난 여름을 믿느냐고

김삿갓 계곡을 따라가던 물봉숭아
꽃잎새 지금쯤 다 졌을텐데

식어진 사랑도
지난 여름도
묻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기울어진 가을 밤
부질없는 그리움이
째각째각 초침소리를 따라간다

《9》시월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10》10월이 오면

진의하

자연은
비우는 법을 알아
토실토실 가꾸어온 결실
미련 없이 훌훌 털어주네.

허공에 놀다가는 구름자락처럼
임자가 따로 없는
세상살이의 윤회
출렁거리는 메아리의 의미는
선회하는 빈잔.

채우고 마시고
비우고 채우는 동안
홍안의 붉은 넋
때묻은 온갖 시련 미련 없이 털어내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10월은
비움으로 넉넉한 잔치마당이라네.

《11》누가 쏘았을까 10월 심장을

원영래

누가 10월 심장을 쏘았기에
첩첩 산마다 선혈 낭자할까
골골 들녘마다 억새강이 흐를까.
내 안 뜨겁게 달구던 피도 흘러나가
가슴 저며 시려 오는 걸까.

《12》10월에는

박재성

10월
결실의 달
햇살 아래 익어 가는 결실을 만나러
벌판으로 나가보렴

황금벌판 한가운데서
벼 익어 가는 소리를 들어보렴

농부의 땀으로 일구어 놓은
벼이삭과
포근한 가을 햇살과의
진솔한 가을 이야기

감사와 응원 속에서
솟구치는 환희를
가슴에 새겨보렴

네가 일구어갈 내일의 소리
가슴 벅찬 그 환희로
너의 오감을 간질여 보렴

《13》시월

기형도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개의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굴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잠시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追憶들은 갑자기 거칠어 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 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 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 였던 때가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14》10월의 노래

백원순

산허리
여름내 머물던 구름들
푸른 하늘 높이 떠다니고
10월에 만난 연인들

스치는 바람
나뭇잎들 소슬 거리고
숲길 돌아서
만난 연인들

어두워지는 해질 녘
가을벌레들 노래하고
먼 길 모퉁이에서
만난 연인들

바스락거리는 나무들 옷깃
청량한 빛 내려앉고
별빛 언덕에서
만난 연인들

《15》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 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 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16》시월

민용태

하늘에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떼각떼각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소리
사무실이 바닥보다 창문 높이로 올라서고
벽에서는 횟가루 대신 구름냄새가 난다.

먼 구름에서 알밤이 빠지듯
너는 그렇게 내 품에 떨어진다.
너의 얼굴을 보면 보석을 머금고 있는 것이
석류만이 아닌 것을 안다.

너의 가슴을 보면
사과나무 가지가 휘어진다.
서류뭉치들이 연이 되어 나르고
시계추 끝에선 포도송이가 여린다.

시월은 하늘과
하늘의 친척들이 몰려오는 달
꿈과 기다림이 현금으로 거래되고
온 도시가 잠깐
하늘의 식민지가 되는

《17》10월

용혜원

가을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계절은 없습니다

가을은 고달픈 이들에게
마음의 쉼터를 만들어줍니다

가을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열매 속에는
여름 햇살의 사랑 노래가 가득합니다

꽃피는 봄과
찬란했던 여름
열매로 가득한 가을
모두 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한 만큼의 행복을 갖고 나누는
당당하고 멋들어진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있습니다

떠나기 위하여
가을 나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온몸을 물들입니다

아름다운을 만드는
나무 잎새들의 마음이
감동을 만들고 있습니다

《18》시월(十月)

오정방

가을은 쓸쓸하나
시월은 슬프잖고

가을은 외로우나
시월은 고독찮네

루루루
풍성한 시월
노래하며 보낼래

《19》10월의 가을 아침

이세송

새벽이슬 한 방울 한 잎 모아서
어둠을 보내기 아쉬워하는 새벽 별과 함께
10월의 첫날 향기 곱게 옷을 입은
국화잎을 따서 차를 우려 봅니다.

그윽하게 허공을 가르며 피어오르는 국화 향기
별빛은 살포시 미소 머금은 차를 따르고
나는 고운 향기를 가슴 깊이 담으며
마음은 찻물로 몸을 적시고
잔잔하게 흐르는 Ralf Bach 에 건반 위 고운 손길은
정겨운 담소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찻잔 속에서 10월의 가을 아침이 어우러지고
창문을 두드리는 노란 옷 갈아입은 단풍잎은
가을 국화향기에 서서히 물들여 지면서
기다리던 그리운 님 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20》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21》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22》시월

임보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의
발성(發聲)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23》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24》10월이 떠나갑니다

이정순

화려하고
곱게 물든 가을
10월이 가고 있습니다

달콤한
사랑과 설렘의 가을을
가슴에 안은 채
보내야 하는 아쉬움은

10월을 이렇게 보내고
곱게 물든 잎새에
10월의 편지를 쓰겠다.

《25》시월

황동규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26》시월

전동균

벽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 녁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묵언수행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27》10월의 뜰

홍금자

칸나, 바이올렛
꽃들의 어지러운 웃음도
종막을 내린
이젠
불기 없는 빈 방 같은
응어리진 삶이
계절의 끝에 서
밤은 내린다

덩치 큰 여자의 엉덩이처럼
시새움마저 사라져간
빈 뜰의 한 모퉁이에
허공처럼 남아 있는
풀잎 바람

쭈그러진 뱃가죽으로
헛구역질하는 임산부 마냥
바람 바람에
떠밀리는 잎새들

그 날의 화사한 웃음과 색조는
가고 없어
나는 낙엽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을을 보낸다.

《28》시월

홍해리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 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 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잇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29》시월 초사흘

류제희

누가 던져놓았나, 길 없는
하늘중천에
막내고모 눈썹 같은 초승달

달빛에 야윈
미루나무 꼭대기에 서너 장
봉함엽서 떨고 있네.

흰 눈발 서성이면
덧나던 그리움도, 기우뚱
헛발 딛는 초저녁

《30》시월 비

정소슬

우수수
지는 낙엽은
나무의 한쪽 밑동에만
쌓이고

뚝- 뚝-
떨구는 빗방울은
내 한쪽 가슴만
적시운다

《31》시월 이야기

이향지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32》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33》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최원정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34》시월은

박현자

시월은
내 고향이다
문을 열면
황토빛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엔
국화꽃같은 구름
국화향 가득한 바람이 불고

시월은
내 그리움이다
시린 햇살 닮은 모습으로
먼 곳의 기차를 탄 얼굴
마음밭을 서성이다
생각의 갈피마다 안주하는

시월은
언제나 행복을 꿈꾸는
내 고향이다.

《35》시월의 기도

박현희

힘없이 떨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찬란했던 삶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소서.

맨 처음 하늘이 열리고 생이 시작되어
유(有)가 생성되기 이전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처음 내딛던 첫발 첫걸음을 생각하게 하소서.

오고 가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뒤돌아볼 겨를 없이 정신없이 달려온 고단함에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각오로 힘찬 출발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하소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잎이 떨어지는 아픔의 시간을 겪으면서
한층 성숙한 나로 거듭나게 하소서.

《36》시월의 사유

이기철

텅 빈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혀지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월급봉투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비자금
영변 경수로 대북송금 김정일 트로츠키 조정래 천리안 이회창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거지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쫓겨난 염소처럼 나는 혼자 면사무소 옆길을 걷는다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37》시월의 장미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을 맞으며
똑똑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38》시월이어서 좋다

최명운

시월!
누구는 시월이 쓸쓸하다는데
난 시월이라서 참 좋다
들녘 산
넉넉하고 풍성하게 가득 차지 않은가
초록빛 이파리
붉거나 노란색으로 물들어
저녁놀처럼 불거지면
거룩하고 성스러워 환희롭다
밤이슬에 눅눅히 젖으면 어떤가
바람결에 떨어지면 어떤가
일 년 절반을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지 않았던가
시월이어서 좋다
가을이라서 좋다
간절히 바랐던 그 무엇
중단할 수 있으니 가볍지 않은가
실수가 있었다면
눈감아 줄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내려놓고 비우고
빈 그릇 채우듯 기다리면 되지 않던가.

《39》10월

문인수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40》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41》10월

임영준

혹시
다 마셔버렸나요
빈 잔을 앞에 두고
후회하고 있나요
옆구리가 시리고
뼈마디가 아린가요

차분히 지켜보세요
저 깊은 하늘소(沼)에서
붉은 술이 방울져 내릴 겁니다
다시 잔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42》10월 어느 날

홍경임

10月 태양빛에
가득 찬 오늘
나 죽어도 좋으리

10月 비껴진 햇빛에
코스모스 흐느끼는 이 날
나 생을 마쳐도 좋으리

들국화 비에 젖는
10月 어느 날
나 본향으로 돌아가도 좋으리.

《43》10월 엽서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 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44》10월 창호문

유안진

찬서리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는가
어느덧 우리 사랑은
창호문의 꽃무늬

대장부 천금 목청
대닢으로 푸르러 있고
그 옆에 향기 높아
국화는 나의 뜻

절반은 고전이요
나머지는 현대이나
아직도 한 채의 한옥 같은 내 사랑아
이제부터 불빛이
긴 밤을 지킬지니

낙엽 같은 맨발로
홀연 돌아오는 밤도
창호문 바른 솜씨 보아서 아시리.

《45》10월에는

정연화

코발트빛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눈부신 가을 햇살처럼
따뜻한 가슴이고 싶습니다

10월에는

길섶에 핀 들국화처럼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련한 그리움 하나 품고 싶습니다

10월에는

단 한사람 누군가 있어
잠 못 이루는 밤이어도

가을
가을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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