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를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나라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했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 두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도

두고두고 되새길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 고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 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속 참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않다해 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일을하되,

미친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을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면,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 도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때는 여왕보다 품위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그 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 이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 인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기둥이 될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 다른 날에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날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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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시인의 짧은 시 모음

* 무늬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 어느 석양

동백꽃 꽃숲에 참새들이 떼지어 앉아

무어라 무어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동백꽃 송이들이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 하면서

무더기로 져내리고 있었습니다

* 빛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 봄눈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실은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가을

우주의 어떤 빛이 창앞에 충만하니

뜨락의 시린 귀또리들 흙빛에 몸을대고

기뻐 날뛰겠다

* 노래

깊은 산 골짜기에 막 얼어붙은 폭포의 숨결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다른 입김이 와서 그대를 녹여줄 때까지

* 한 생각

급한 걸음으로 산길을 달려 내려오던 바위는

무슨 생각이 나서 거기에 딱 멈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손에 턱을 괸 채

무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일까

* 밝은 날

지구의 한 끝에서 한 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는다



작은 눈을 들어 사방을 불안스레 돌아보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혼이다

* 인동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들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 대기의 힘

밤새 내리던 비 그친 뒤

아침 땅이 내뿜는 저 하늘의 신성한 기운

그 땅에 엎드려 경배한 뒤

인간의 굵은 팔을 뻗어 심호흡한다

* 라일락 향

이 세상의 향기란 향기 중 라일락 향기가 그중 진하기로는

자정 지난 밤 깊은 골목 끝에서

애인을 오래오래 끌어안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 신록

고목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보네

* 井蛙

저는 우물안 개구리입니다.

우물안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는 모르지만

하늘의 깊이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여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깊이는 알 고 있습니다.

​* 웅성거림

온다던 비가 드디어 두 시부터 오신다

꽃잎 바르르 떨고

잎새 함초롬히 입을 벌리고

그 밑의 자벌레 비로소 편편히 눕자

지구가 한순간 안온한 꿈에 잠긴다

* 아침이면

귀뚜라미는 밤새도록 방 밖에서 울며

아침이면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보석을 낳는다

이슬이다

* 비밀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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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시 모음


가난한 처녀 ㅡ 허난설헌
가득하다 ㅡ 유승도
겨울 ㅡ 윤동주.임길택. 조병화
겨울강 ㅡ 문인수.박남철.오탁번
겨울 강가에서 ㅡ 안도현
겨울 까마귀 ㅡ 김현승
겨울 강변에서 ㅡ 문인수
겨울 강구항 ㅡ 송수권
겨울 그리스도 ㅡ 김남조
겨울 나그네  ㅡ
겨울날  ㅡ 김광섭
겨울 노래 ㅡ 마종기.오세영.
겨울논 ㅡ 조용미
겨울, 동강 ㅡ 서원동
겨울 들판을 거닐며 ㅡ 허형만
겨울로 가는 마을 ㅡ 최하림
겨울 마음 ㅡ 이상화
겨울물오리 ㅡ 이창수
겨울바다 ㅡ 김남조
겨울밤 ㅡ 박용래. 복효근. 신경림 
겨울밤의 꿈 ㅡ 김춘수
겨울 사랑 ㅡ 고정희.문정희
겨울 삽화 ㅡ 안도현
겨울 아침 풍경 ㅡ 김종길
겨울 안부 ㅡ 권갑하
겨울 억새밭에서 ㅡ 주병률
겨울에게 ㅡ 마경덕
겨울을 기다림 ㅡ 김기택
겨울의 동화 ㅡ 최치언
겨울의 춤 ㅡ 곽재구
겨울 이야기 ㅡ 로렌스
겨울 일기 ㅡ 문정희
겨울 잠 ㅡ 박목월
겨울 저녁 서산에서 ㅡ 황동규
겨울저녁의 시 ㅡ 남진우.박주택
겨울 초대장 ㅡ 신달자
겨울편지 ㅡ 이해인
겨울풀 ㅡ 이근배
겨울풍경 ㅡ박남준
겨울 햇볕 ㅡ 허영자
고드름 ㅡ유지영
그 겨울밤 ㅡ안도현
그리움 ㅡ 이용악
그 밤에 내린 눈은 ㅡ 길상호
그 어둡고 추운, 푸른 ㅡ 이성복
그해 겨울 ㅡ 마경덕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ㅡ 이면우
깊은 눈 ㅡ 이재무

동모동월 ㅡ 박형준
동안거 ㅡ 고재종

몽유. 겨울밤 ㅡ 이경진

밤 ㅡ 심훈
백야 ㅡ 기형도
붉은 겨울 ㅡ 김수우

산가 ㅡ 도종환
서대문형무소 ㅡ 김광섭
설야 ㅡ 김광균

아무 생각없이 겨울 풍경 그리기ㅡ 최하림
아버지의 겨울 ㅡ 임길택
외딴집 ㅡ 장석남
이 밤의 툇마루 끝이 ㅡ 조정권

잿빛 겨울날 ㅡ 헤세
절정 ㅡ 이육사

초겨울 ㅡ 도종환
초겨울 편지 ㅡ 김용택

탕약 ㅡ 백석


 


가난한 처녀             허난설헌

쇠로 만든 가위 손으로 잡으니
밤 추위에 곱아오는 열 손가락
시집갈 남의 옷만 지어주고
해가 바뀌어도 혼자 산다네

허난설헌(1563-1589) 강원도 강릉 
   
             
가득하다   유승도(1960 - ) 서천


    산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개의 짖음도 흑염소의 울음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돌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날아가는 까치도 까치가 앉았던 살구나무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 밖으로 나서는, 아이의 목소리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하늘도 지우며 눈이 내린다
    방금 내린 눈까지 지우며 눈이 내린다      
       
  
겨울    윤동주(1917 - 1945) 북간도 명동촌.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라미
달랑달랑
얼어요
 
 
겨울         임길택

겨울이면 긴 목에
수건을 매어
파고드는 찬바람
막아보지만
찾아오는 고뿔 손님
어쩔 수 없네
삼십릿길 장터 약국
멀기만 하여
얇은 옷 바람 길
나설 수 없고
 
오미자 찻물 끓여
물을 마시며
아궁이에 불 지피어
맨발 달궈요


겨울       ㅡ조병화ㅡ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겨울 까마귀      ㅡ 김현승ㅡ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12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물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ㅡ
까각 ㅡ
  


겨울강       ㅡ문인수ㅡ

바람은 이제 엷은 살얼음으로 깔리면서 뻘밭 위에다가 덜렁 거룻배 한 척 올려놓고는
또 거기서 나와 처마 끝으로 어둑어둑 번져 가더니 이번에는 굴뚝 끝에서 오래 머리 풀고
몸 조심하거라...자주 편지하고...
이르며 사람들은,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땅끝에 이르러
집을 짓고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 갈대숲으로 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모로 누우며 ...
 
 
겨울강         ㅡ 박남철ㅡ

겨울강에 나아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 본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의 튕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흐를 것들이
쩡,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아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소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쩡 쩡
  


 겨울강        ㅡ오탁ㅡ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연기 마주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바람 사이로 봄기운 일고
오대산 산그리메 산매미 날개빛으로 흘러와
겨우내 얼은 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아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지 풀려 반짝이는 여울을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몸 뚱아리 꿈틀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겨울 강가에서      ㅡ안도현ㅡ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구항       ㅡ송수권ㅡ


상한 발목에 고통이 비듬처럼 쌓인다
키토산으로 저무는 십이월
강구항을 까부수며
너를 불러 한 잔 하고 싶었다
댓가지처럼 치렁한 열 개의 발가락
모조리 잘라 놓고
딱,딱, 집집마다 망치 속에 떠오른 불빛
게장국에 코를 박으면
강구항에 눈이 설친다
게발을 때릴수록 밥은 깊고
막소금 같은 눈발이
포장마차의 국솥에서도 간을 친다
현대시학.2001년 12월호.
 
 겨울 강변에서   ㅡ문인수ㅡ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겨울 그리스도       ㅡ김남조ㅡ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 같이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광막한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 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세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 올리시는
雪日의 주님
 


   겨울 나그네         김재진

점점 더 눈이 퍼붓고 지워진 길 위로 나무들만 보입니다
나무가 입고 있는 저 순백의 옷은 나무가 읽어야 할 사상이 아닌지요
두꺼운 책장 넘겨 찾아내는 그런 사상 말입니다
그대가 앉아 있는 풍경 뒤에서 내가 노을이 된 것은 알 수 없는 그런 사상 때문은 아닙니다
그대라고 부르는 그 이름의 떨림이 좋아 그대를 그대라 부르고 싶을 뿐,
또 한 번의 사라잉 신열처럼 찾아와서 나를 문 두드릴 때 읽고 있던 책 내려놓으며
그대는 나무가 입고 있는 그 차가운 사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대, 단 한번 내가 가슴 속에 쌓아두고 싶은 맹세나 기도 같은 그대
그대가 퍼붓는 눈발이라면 나는 서 있는 나무 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바람이라면 나는 윙윙 울고 있는 전신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눈 위에 세워놓은 이정표 따라 슬픔 쪽으로 좀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대는 쏟아지는 하늘입니다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 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겨울 노래         마종기

눈이 오다 그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 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 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겨울 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겨울 논            조용미

눈 온 뒤 겨울 논바닥 내려다보면
印花紋이다
빽빽한 문양을 찍고 백토를 채워넣은
흰 눈이 덮인
논은 커다란 분청사기
들은 도자기 가득한 가마터
저 촘촘한 무늬
사이로
꼬불꼬불 몇 사람이 인화된다
먼 길 가는 검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허공에 인화되어 박힌다
귀얄문처럼 바람이 휘익
들을 쓸고 지나간다
 


                                   




   겨울, 동강           서원동

문산나루 질퍽한 삼들
어라연 휘돌아 돌며 숨차 헐떡거리다
얼음짱 되어 문득 발걸음 멈춰 선곳
겨울 동강은
지친 몸 기대 술 곳조차 없이
삭막하다
산짐승들 뛰놀던 협곡 사이로
자갈톱 스쳐온 찬바람만
길게 한숨소리 내뿜고 있다
아무도 없다
앙상하고 고즈넉하다
응고된 피딱지인 듯
여기저기 나뒹구는 녹슨 깡통들
넝마 되어 펄럭대는 폐비닐 조각들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숨겨진 상처 마냥 한없이 삐걱거릴 뿐
 
겨울 동강은
이빨 빠진 늙은이가 뜯어먹다 남긴
풀빵처럼 곳곳에서 찐득거린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조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레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로 가는 마을           최하림

가을이 저물 대로 저물어 꼭지가 떨어지고 나면
돌담의 맨드라미와 피마자들은 색깔을 잃어버리고 뒤안 우물도 말라붙어 소리를 죽인다
추수를 끝낸 농부들은
쇠스랑과 쇠갈퀴 써레 괭이들을 헛간에 가지런히 넣고 빗장을 지르고 나서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네거리로 나간다
여인들도 그림자를 끌고 마당을 지나간다
시월과 십일월은 잠시 숨을 죽이고 골목을 빠져 나간다
검은 까마귀들이 날개를 치며 논두렁에 내려앉다가 올라간다
아이들이 동구길에서 아우성친다 머리가 파르스름한 사미승이
논두렁 건너 소나무 숲길로 걸음을 재촉하며 간다
아직도 한 뼘쯤 해는 서산에 남아 있고
네거리에서 사람들은 넘어가는 해를 일없이 보고 있다
 
                              






겨울 마음              이상화

물장사가 귓속으로 들어와 내 눈을 열었다
보아라!
까치가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울음을 운다
왜 이래?
서리가 덩달아 추녀 끝으로 눈물을 흘리는가
내야 반가웁기만 하다 오늘은 따스겠구나








겨울물오리           이창수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도 겨울엔 뼈를 갖는다
그리움이 그리움을 지우는 물결이
세상의 여울을 거쳐 희고 단단한 물의 뼈대를 세운다
지느러미가 되기도 하고 날개가 되기도 하는 물살에 달빛이 부실 때
물오리들 깃털보다 가벼운 물의 뼈에 살을 붙인다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의 물리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밤            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강아지풀. 민음사. 1975년






 


겨울밤         복효근

감나무 끝에는 감알이 백서른 두 개
그 위엔 별이 서말 닷 되
 
고것들을 이부자리 속에 담아와
맑은 잠 속에
내 눈은 저 숲가에 궁구는 낙엽 하나에까지도 다녀오고
 
겨울은 고것들의 이야기까지도 다 살아도
밤이 길었다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고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1965년 한국일보 발표
 
                     
 
  겨울밤의 꿈    김춘수
저녁 한동안 가난한 시민들의
사로가 피를 데워 주고
밥상머리에
된장찌개도 데워 주고
아버지가 식후에 석간을 읽는 동안
아들이 식후에
이웃집 라디오를 엿듣는 동안
연탄가스는 가만가만히
쥐라기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그날 밤
가난한 서울의 시민들은
꿈에 볼 것이다
날개에 산호빛 발톱을 달고
앞다리에 세 개나 새끼 공룡의
순금의 손을 달고
서양 어느 학자가
Archaeopteryx라 불렀다는
쥐라기의 새와 같은 새가 한 마리
연탄가스에 그을린 서울의 겨울의
제일 낮은 지붕 위에
내려와 앉는 것을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닌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겨울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 삽화         안도현
남부시장 정육점 골목에
소피를 파는 집이 있다
 
소피는 소가 쿵쾅쿵쾅 걸을 때 소의 몸속을 돌던 뜨거운 것
이 핏속에는 겨울아침 언덕길을 오를 때 뿜던 콧김 같은 것도 혹 섞여 있을지 모르는데
 
못난 뿔처럼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거나
그 흔한 내장들처럼 평생 똥을 주무른 적도 없는
소피가, 지금은 차갑게 응고되어
붉은 고무 바께쓰에 담겨 있다
 
정육점 주인은 소의 살과 뼈를 잘 발라내
저울로 일일이 무게를 달아 팔다가
소피는 대접으로 움푹 떠서 판다
한 대접에 천원이다
 
 
 
 
 




     겨울 안부        권갑하
진저리치던 울음은 꼬투리째 떨어졌다
한낮의 막막한 현기, 뒤채던 애잔함도
먼 고요 줄을 고르듯 소슬한 현을 퉁긴다
노을처럼 그댄 타오르고 싶다지만
난 매정스레 업신여김을 받고 싶다
불감의 손 마디 마디 살얼음만 되감기는
떨어지며 피는 꽃이 어디 눈물뿐이랴
다 지운 생이라도 삭은 대궁은 남아
희디 흰 기다림으로 네 안부를 묻는다
<시선 봄호>
 


 
  겨울 아침 풍경    김종길
안개인지 서릿발인지
시야는 온통 우웃빛이다
 
먼 숲은
가지런이 세워놓은
팽이버섯, 아니면 콩나물
 
그 너머로 방울 토마토만한
아침 해가 솟는다
 
겨울 아침 풍경은
한 접시 신선한 샐러드
다만 초록빛 푸성귀만이 빠진
 
 




                           


 
   겨울 억새밭에서    주병률(1960 - ) 경주
나무에서도 소리가 난다고 했다
두릅나무에는 두릅 소리가 나고
느릅나무에는 느릅 소리가 난다고 했다
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개동백에 닿고
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눈보라에 닿아서
머지않아 봄이 오고 꽃이 핀다고 했다
얘야, 이 발자국 소리를 좀 들어보아라
이 소리가 두릅나무에 닿으면,
이 소리가 느릅나무에 닿으면,
눈보라 사이사이 맺힌 저 어둠에도
길도 되고 꽃도 되느니라
겨울 하루 탁발도 시원찮던 늦은 산길에서
한 마리 노쇠한 나귀처럼 털색도 바래고 뼈도 물러서
바람의 귀로나 들었어야 했던 노승의 한마디 말
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느릅나무 소리가 소리가 되면
하늘에도 길이 된다고 했던 말
땅에도 길이 된다고 했던 말
오늘은 눈보라 치고 성긴 겨울 억새밭에서
그 말들을 베고 누워도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게서 가서
나무에게 닿을 소리가 없다
두릅나무가 되고
느릅나무가 되어서 돌아올 소리가 없다
멀리 섬진강 저문 강에서
쩡쩡거리며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겨울에게        마경덕
내가 앉았던 자리가 그대의
지친 등이었음을 이제 고백하리
그대는 한 마리 우직한 소. 나는
무거운 짐이었을 뿐
그대가 가진 네 개의 위장을 알지 못하고
그대를 잘 안다고 했네
되새김 없이 저절로 움이 트고 꽃 지는 줄 알았네
내뿜는 더운 김이 한 폭의
아름다운 설경인 줄 알았네
그저 책갈피에 끼워 둔 한 장의
묵은 추억으로 여겼네
늦은 볕에 앉아 천천히
길마에 해진 목덜미를 들여다보니
내 많은 날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알겠네
거친 숨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대를 바라보면 기도하는 성자를 떠올리네
퀭한 눈 속의 맑은 눈빛을 생각하네
별이 식어 그대의 병이 깊네
 


  
                                           






 겨울을 기다림                 김기택
두꺼운 털 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운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겨울의 춤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겨울의 동화       최치언(1970 - ) 전남 영암
그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자전거 한 대 바삐 지나가고
집집마다 푸른 등잔을 내어걸고 있었다
눈은 더 깊이 무겁게 우리들의 가슴에 쌓였다
멀리 사이렌 울음이 길게 울렸다 그쳤다
잠을 뒤척이는 누군가의 꿈속에서
너는 성냥을 파는 소녀가 되었다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너는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불빛들이 모두 꺼져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하루치의 꿈을 시장에 내다 팔고
술에 취해 너의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텅 빈 주머니 속에는 너에게 던져줄 동전도 없었다
마지막 겨울은 너와 함께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겨울 이야기    D H 로렌스
어제 들판은 오직 흩어지는 눈발로 희부옇더니
지금은 가장 긴 풀잎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발자욱은
눈을 덮고 흰 언덕 끝 솔밭을 향해 걸어갔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의 엷은 휘장이 검은 숲과 희미한 유자빛 하늘을 가렸기에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초조하고 차갑게, 흐느낌 같은 것이 싸늘한 한숨에 스며들면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더욱 가까워질 뿐임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 선뜻 오고 마는 걸까
언덕길은 험하고 내 걸음은 더디다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왜 그녀는 오는 것일까
 


                           
 


 
    겨울 일기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 번 열지 않고
반추 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겨울 잠          박목월
천장 구멍에서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두 개의 수염이 짝 뻗은
쪼붓하고 조그맣고 놀란 얼굴
 
쩡쩡 얼음이 어는 밤
얼음 위에 바싹바싹 달빛이
부서지는 밤
 
오오 추워라
아랫목 이불 속에 우리 아기가
고개를 푹 파묻었다
방에는
일렁일렁 흔들리는 그림자
아직도 아버지는
글을 쓰시는데
저절로 전등이 흔들리는 밤
 
천장 구석에 쥐가
쥐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새까만 두 눈이 또록한
쪼봇하고 조그많고 놀란 얼굴
 
오오, 추워라
찡 울린 저 소리는
추위에 날무대가리가 터진게지
추위에 독이 갈라진 게지
새끼 있는 구멍으로
어서가 자거라
 
 
 
    겨울 저녁 서산에서        황동규
어른대던 사람들 둑에서 내려가고
한참 만에 사람 하나가 새로 올라간다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던 금 천천히 풀어지고
언제부터인가 눈이 자꾸
안 보이는 것을 찾고 있다
바티칸이 감추어 두었다
이따금 꺼내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그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 얼굴의 눈이
열심히 미켈란젤로를 찾는 그런 겨울 저녁
눈 친 벌판을 둘러보는 동박새의 눈
한 점 두 점 눈발이 시작되다
빗방울이 되어 날기도 하는
그런 저녁
가창오리 몇 마리 날아올라 허공을 휘돌다 사라진다
김용배의 설장구, 그 시원한 끄트머리!
빗방울 몇이 얼굴을 따갑게 때린다
손사래를 친다
지금 이곳이 지구 속인가 밖인가?
생각하다 말고 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 저녁의 시          남진우
 
 
 
 
 
   겨울 저녁의 시          박주택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 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 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겨울 초대장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아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겨울편지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어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겨울풀          이근배
들새의 울음도 끊겼다
발목까지 차는 눈도 오지 않는다
휘파람 같은 나들이의 목숨
맑은 바람 앞에서
잎잎이 피가 돌아
피가 돌아
눈이 부시다
살아 있는 것만이
눈이 부시다
 
 
 
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래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이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 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다가
언 몸의 세사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문 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겨울 햇볕      허영자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고드름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햇님이 문안드리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오신대
 
고드름 고드름 녹지 말아요
각시님 방 안에 바람 들으면
손 시려 발 시려 감기 드실라
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1924년 작곡.
 
 
 그 겨울밤         안도현
 한숨 자고
 고구마 하나 깎아 먹고
 
 한숨 자고
 무 하나 더 깎아먹고
 
 더 먹을 게 없어지면
겨울밤은 하얗게 깊었지






 
그리움              이용악(1914-1971)
눈이 노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 어둡고 추운, 푸른   이성복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


 
                                     
 
그해 겨울              마경덕
흉년 든 그 해
탱자처럼 노랗게 황달을 앓던 아버지
눈 오는 아침, 재첩을 사러 간
엄마는 오지 않고
 
언니와 나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반 됫박 남은 호박씨를 까먹었다
 
종일 퍼붓는 눈
앞산의 눈썹이 지워지고
봉창 여닫는 소리, 잦은 기침 소리
뒤란 대밭 철퍼덕, 눈똥 누는 소리
 
쌀가루 같은 눈이 내려
가뭇없는 길
 
휘청, 발을 헛디딘 대숲은
한무리 새떼를 날려 보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면우
배추 무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 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 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누나           임길택
눈 내리는 날 시집을 가면서
포근한 눈 같은 마음도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가 보면
매형이 신던 양말 기워 신고
누나는 입던 옷뿐이었지요
 
누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고향 학골에 날아와
어릴 적 뛰놀던 길 돌아보는
그런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동안거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곰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동모동월冬母冬月      박형준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려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물가에 둥근 돌
빨래가 쌓였던 곳
돌덩어리 가슴에 박혀 울던 사람들
물결에 씻겨가네
 
물살 아래
누워 있네
 
처녀들 모두 떠나가고
얼음 구멍에 손을 넣고
어머니 빨래를 끄집어내시네
죽은 처녀들 끄집어내시네
 
물에 잠겨 있는 어머니
오늘밤 흰달로 오시네










몽유. 겨울밤             이경진(1968 - )2006년 계간<문예연구>신인상으로 등단.
잔업 끝내고 돌아온 어머니가 누에를 사오셨다
우리는 그것을 필통 세 개에 나누고 날마다 해질 무렵까지 뽕잎을 찾아 헤맸지만,
뽕나무들은 다 베이고 없었다
누군가 오동잎을 대신 먹여도 된다고 귀에 속삭였다
나는 누이와 막내를 이뜨기*까지 보내 오동잎을 따오게 했다
바람이 몹시 거칠어 동ㅅ생들의 손등은 항시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누에는 푸석푸석한 오동잎을 게걸스럽게 먹어댔지만,
살은 오르지 않고 점점 딱딱해졌다
위장약 같은 흰 똥도 쌌다
겁난 나는 문둥이들이돌아다닌다는 이뜨기 너머까지 동생들을 보냈다
그날 밤늦게 막내가 울면서 혼자 백열등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야근 나간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나는 온몸이 딱딱해진 막내의 몸을 껴안은 채 잠들었는데,
탄구멍처럼 활짝 열린 꿈속에서; 누이를 보았다
뽕나무를 발견했어. 오빠, 잘했지? 우리 이젠 더 큰 방으로 갈 수 있는 거지?
훔쳐 먹은 오디처럼 검은 입술로 웃고 있었다
골방에선 고치를짓지 못한 누에가 썩고 있었다
주인집 개가 짖고 있었다
 
*이뜨기ㅡ 예전에 익산 동산동 일대를 부르던 이름이다
옛날에 둑이 있었던 자리라는 뜻에서 옛뚝이, 또는 이뜨기라고 했다
 
 
 
밤          심훈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이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을 자맥질 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
별없는 하늘 밑에 들어줄 사람 없구나!
 
                          
 
 


 
 
白夜          기형도
눈이 그친다
인천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 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 파카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붉은 겨울            김수우(1959 - ) 부산
거대한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포장마차 붉은 천막
국물과 소주잔을 놓고 앉은 영혼이 풀럭댑니다
자정 넘도록
혼불처럼 울렁이는 깊은 산마루들
 
오래된 사랑은 늘어난 빚돈만큼 아득하고
처음 꾸는 꿈은 수취인 불명만큼 서러워
 
문득문득 오래된 것들이 처음처럼 돌아오는 바람 속
거대한 등을 가진, 꽃잎만 한 아비들
 
하늘 끝에서도 잘 보이는 홍등입니다
먼 데서 바라볼수록 살아, 깜박이는 한 송이 산나리
 
아침이면
우주를 전파상처럼 운영하기 위해 온몸으로 울어야 할
유난히 붉은, 주전자 같은 등들이
너울거립니다                        
 
 
산가          도종환
어제 낮엔 양지 밭에 차나무 씨앗을 심고
오늘 밤엔 마당에 나가 별을 헤아렸다
해가 지기 전에 소나무 장작을 쪼개고
해 진 뒤 침침한 불빛 옆에서 시를 읽었다
산그늘 일찍 들고 겨울도 빨리 오는 이 골짝에
낮에도 찾는 이 없고 밤에도 산국화뿐이지만
매화나무도 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화는 매화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고요하였다




  
 
  서대문형무소            김광섭
              ㅡ 독방 62호실의 겨울
하이얀 성에 싸인
낡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은 불고 불고
까치들 우는 저녁
 
태양을 등진
북향 철창 위로
검은 창막을
추근히 나리면
 
외론 등불 아래
붉은 옷을 걸치고
움직이는 그림자
슬픔을 깨우치나니
 
한숨에 젖어
때묻은 차디찬 벽
내일 물러갈 벽이로되
방은 모두다 무덤의 행렬
 
여기 생이 슷드려
정은 오고 가고
그리운 길
고요히 열리면
 
가슴 속 깊이
숨은 구슬들
흘러서 흘러서
눈물이 되나니
 
낮이나 밤이나
북향 철창은 어둡고
검은 창막 너머로
바람은 불고 불고 ...
1941년
<마음> 중앙문화협회 .1949년
 
김광섭은 일제 시대 창씨개명에 거역했다고 옥고를 치른 일이 있다




                                 

 
  설야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러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아무 생각없이 겨울 풍경 그리기         최하림
눈이 내리니
나뭇가지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지다가
눈을 털고 일어나고
다시 눈을 털고 일어나고 한다
오후 내내 그 일을 단조롭게
반복한다 우리가 날마다
아침을 시작하고 또
시작하는 것과 같으다
 
이런 날
하늘을 지붕 가까이
내려와 멈추고 세상 길도
들녘에서 멈추고 세상 길도
들녘에서 모습을 지운다
나는 천근 무게로 눈꺼풀이
내려앉아 꿈속처럼 눈을 감는다
아이의 속뼈같이 여린 가지들이
사라지고 또다시 가지들이
떠올라 머나먼 마을에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눈벌판을
마구 쏘다니고 싶지만
나는 결코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눈은 나를 덮고 또 덮으며
종일 내려 쌓인다


 
 
아버지의 겨울        임길택
부엌에서
아버지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탄 묻은 판자쪽을
주워다 놓고
온 집안 울리도록
바람구멍을 막고 있었다
 
산 너머 어디쯤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외딴집             장석남
겨울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
동그마한 흙마당에
나보다도 더 작은
하나님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떠
왔다갔다하시네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는 소리
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
그 그늘
모퉁이에서 들리네
 
                               
이 밤의 툇마루 끝이          조정권
산허리 둘린 안개 어둠에 잦아들고
언제 보아도 절벽 소나무는 급경사를 이루네
저녁부터 온 허공 잔잔히 메를 매기는
눈발 바라보네
이 밤의 툇마루 끝이 그대로 내밀어져
벼랑 꼭대기에 아슬히 나앉아 있는 것 같구나
 


 
   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육사( - 1944.1.16베이징감옥)
 
                          
잿빛 겨울날         헤세


고요하고 거의 빛이 없는
잿빛 겨울날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와 말하는 것이
싫은 툴툴거리는 노인이다
 
그가 강물 소리를 듣고 있다 젊은 강물이
충동과 격정에 가득 차 흘러가는 것이
그에게는 주제 넘고 실없게 생각된다
그 참을성 없는 힘이
 
늙은 겨울날은 비웃듯 눈을 찌푸린다
아직 더 빛을 아낀다
아주 살짝 눈 내리기를 시작한다
얼굴 앞에 베일을 드리운다
 
노인의 꿈속에서 그를 번거롭게 하는 건
갈매기들의 요란한 소리
메마른 가죽나무 속에서
지빠귀들이 다투는 소리
중요하다는
모든 요란한 떠벌림이 그는 우습다
혼자 중얼중얼 조금씩 눈을 뿌린다
어둠 속까지
 


  
 


  초겨울         도종환


올해도 갈참나무 잎 산비알에 우수수 떨어지고
올해도 꽃진 들에 억새풀 가을 겨울 흔들리고
올해도 살얼음 어는 강가 새들은 가고 없는데
구름 사이에 별이 뜨듯 나는 쓸쓸히 살아 있구나
  
                  
초겨울 편지           김용택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 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湯藥          백석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아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여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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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시 모음

1.봄 /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2.봄 /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람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갓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3.봄 / 김용택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최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4.봄 /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5.봄눈 / 정호승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6.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에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7.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8.봄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되어 짙어 오겠지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 지저귀고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속
수줍은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이 비 그치면
님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은 내 마음
땅에서 또 아지랭이 되어 타오르 겠지

9.봄비 1 -추억의 봄비. / 강해산


저기 비가 오네요.
기나긴 외로움 속에서
지쳐버린 마음에
아련한 추억을 적셔 주네요.

한동안 잊었던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이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귓전에 맴돌아가고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빗물 되어 흘러내리네요.

겨우내 추위에 굳어버린
추억에서 사라진 내가
세상에는 없는 당신을 잊을까봐
해마다 사월이 오면
당신은 봄비 되어
내 마음 속에 내리네요.

10.봄비 오던 날 / 최옥


혼잣말을 합니다
그대가 나를 조금만 자유롭게
하기를 그렇게 하기를...
가두었던 말(言)들을
빗물속에 흘려 보냅니다

구름처럼
먼 데 둘 수밖에 없는 사랑
수평선처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대

한때 당신을 향했던
불같은 몸살도
이제는 편안해진 그리움이길

재울 것은 재우고
깨울 것은 깨우며
봄비속에 연신 혼잣말을 합니다
가두었던 말(言)들을 풀어줍니다

11.봄은 간다 / 김 억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이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비낀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12.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3.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가 뛰놀아라.

14.다시금 봄날에 / 김남조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눈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없이 내리는 뜰에
핏줄기 얼음 어는
가랑잎 내 헐벗은 영혼아

15.봄 편지 / 이효녕


얼었던 땅위에 아지랑이
눈 속에 잠자던 하얀 꿈을 부르니
문을 열면 앞산이 달려와
내 가슴 어느 듯 흔든다

부드러운 사랑만큼 순한 미풍
눈을 뜨고 눈을 감고
내게 걸머진 삶의 무게
남쪽 향해 허리 굽힌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와 기웃거리며
기도로 머물어
다시 햇볕을 소유한 하늘 몇 평
봄날은 그대 가슴에 가까이 있다

16.초봄의 귀밑머리 /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죽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17.해마다 봄이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18.봄날,사랑의 기도 / 안도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했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도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 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19.이 봄의 축제 / 김종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풀잎은 일어서고
꽃들은 하늘에다 오색 종이를 날린다
일어선 풀잎 하나만 보아도
눈물나는 이 봄에
황사는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일어서라일어서라일어서라고
누가 외치지 않아도
저 하찮은 들꽃들마저 일어서서
하늘에다 오색 등불을 매단다
嚴冬에 엎드려 숨죽이던 것들아
척박한 황지에 뿌리내린 쑥맥들아
누가 오늘의 이 축제를 숨어서 구경하랴
그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그대 뜻에 따라
이 봄에 나도 풀잎으로 일어서서
황사 흩날리는 하늘에다 새를 날린다
아아, 이름을 짓지 않은 한 마리의 새를!

20.봄꽃이 필 때 / 홍수희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 일입니다

자연도
삶도 순환하는 것

이 봄,
마른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듯이

돌아다보면
내 눈물에 이미
봄꽃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을

어이 그리
투정만 부렸는지요
시샘만 부렸는지요

네가 오면 오는 그대로
네가 가면 가는 그대로
웃고 말 걸 그랬습니다

21.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결움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의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22.청매화, 봄빛 / 이은봉


청매화 푸르른 꽃잎들, 밭두둑마다 푸시시 웃으며 뛰놀고 있다
킁킁킁, 꽃향기 벌떼처럼 코끝 싸하게 쏘아대는 마을......,
강언덕 저쪽 산비탈에선 일찍 핀 꽃잎들, 아랫도리를 꼬으며 이울고 있다
잠시 밭두둑에 서서, 옷매무새 고치며 슬픔 견디고 있는 여인......,
살며시 꺼내든 손거울 속으로, 또 하루치의 봄빛, 멈칫멈칫 스며들고 있다.

23.봄이 올 때까지 / 양선희


엄마,나 좀 밟아주세요.
더 깊은 땅내가 필요해요.
곧 내가 동사하겠어요.
이제 봄이래요.
진짜 봄이 오면
내 몸의 일부가 피리가 되는
내 몸 어딘가에 새 둥지를 품는
들쥐도 새끼 치는
꿈을 이룰 거예요.
진짜 봄이 올 때까지
제발 엄마,나 좀 꼭꼭 밟아주세요.

24.꿈같이 오실 봄 / 오광수


그대!
꿈으로 오시렵니까?

백마가 끄는 노란 마차 타고
파란 하늘 저편에서
나풀 나풀 날아오듯 오시렵니까?

아지랑이 춤사위에
모두가 한껏 흥이 나면
이산 저 산 진달래꽃
발그스레한 볼 쓰다듬으며
그렇게 오시렵니까?

아!
지금 어렴풋이 들리는 저 분주함은
그대가 오실 저 길이
땅이 열리고
바람의 색깔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얀 계절의 순백함을 배워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메마름을 버리고
촉촉이 젖은 가슴으로
그대를 맞이합니다.

그대!
오늘밤 꿈같이 오시렵니까?

25.봄이 오는 소리 / 남낙현


얼음장 밑에서 졸졸졸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꺼운 땅껍질을 뚫고 나오는
아주 작은 힘,,,
어떠한 힘으로도 막지 못한다.

작은 새싹 하나
우주를 뚫고
세상 구경을 나오려고 기지개를 켠다.

벌써 양지바른 언덕에
뾰족 나온 푸른 싹들
새생명의 탄생 알린다.

26.봄 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27.봄볕 속의 길 / 조태일


구겨진 마음들을
어서 어서 펴서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부드럽게 춤추며
봄볕 속의 길로 나서자.

착하고 격렬했던 뜻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너와 나의 길
가릴 것 없이
우리들의 길로 한데 합쳐서

손에 손에 자식들을 이끌어
한형제로
앞서가며 뒤서가며
마음을 활짝 열어
깨어나는 생명들의 소리를 듣자.

파고다공원에 내리는 봄볕도
수유리 4.19 기념탑에 내리는 봄볕도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나니,
춤을 추나니.

28.이른 봄 저녁 무렵 / 정희성


이른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29.지상의 봄 / 강인한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 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진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 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30.때때로 봄은 / 문정희


때때로 봄은
으스스한 오한을 이끌고
얇은 외투 깃을 세우고 온다.

무지한 희망 때문에
유치한 소문들을
사방에다 울긋불긋 터트려 놓고
풀잎마다 초록 화살을 쏘아 놓는다.

때때로 봄은
인생도 모르는 젊은 남자가
연애를 하자고 조를 때처럼 안쓰러운 데가 있다.

31.봄을 기다리며 / 양현근


스물스물 쓸쓸한 감성이
담벼락 한 귀퉁이
남루한 전단지에 갇혀있습니다
스물스물 젖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길을 거두어도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눅눅한 빛깔입니다
울어 버리든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불러보아도
따뜻한 웃음은 조립될 수 없습니다
허술한 마음의 이음새마다
푸른 별들은 초저녁부터 못을 박아대고
오늘 밤은
먼 곳에서 불쑥 달려올지도 모를
그리운 날들을 위하여
잎넓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밝은 꽃등 하나
그렇게 밤새 밝혀두렵니다
세상은 그렇게 이유없이 밝아올 겁니다.


32.봄이 오고 있다 / 강은교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3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눈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좀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34.무제치늪의 봄 / 정일근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舞祭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35.새봄.3 / 김지하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 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36.봄 기도 / 시.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37.봄날은 간다 / 시. 이승훈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
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
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
리로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
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
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
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도 가지 않는다 연
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
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38.봄의 메시지 / 유자효


설레고 싶다
달뜨고 싶다
신경을 올올이 곤두세우고 싶다
이국의 나무 냄새 같은 것
이방의 언어 같은 것
바다의 바람을 돛폭 가득히 안은
범선의 출항 같은 것
낯선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영혼은 때를 벗는다
모험을 도전하는 젊음에 의해
역사는 절망을 이겨 왔었고
세계는 생명의 자양을 얻었다
서투르고 싶다
어리고 싶다
순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때
금강석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싶다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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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1》
상자 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가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출처 : 《202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
빈집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출처 :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3》
조퇴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출처 : 《202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4》
비 오는 날의 스페인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출처 : 《2022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5》

목다보

송하담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출처 : 《2022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6》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출처 : 《2022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작》

《7》
왜소행성 134340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났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출처 : 《20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8》
경유지에서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끈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출처 : 《202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9》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출처 : 《202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0》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
 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
 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
 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
 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출처 :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1》
반려울음

 이선락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 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출처 : 《202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2》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 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 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 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출처 :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3》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출처 :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4》
엄마 달과 물고기

김미경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 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 거리다 곱은 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출처 :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5》
일 잘하는 요즘 애들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출처 :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6》
미역국

강일규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출처 :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17》
고요를 찾다

김종숙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 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출처 : 《2022년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시부문 대상 당선작》

《18》
럭키슈퍼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출처 :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19》
만유인력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 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출처 : 《2022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
시드볼트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
 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 의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 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출처 :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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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선화    / 이해인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2.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3.  수선화·1  / 김길자

자존심이란 그런 건가
소슬바람에도
서릿발같은 사랑
노란 향기로 피우기 위해
제 몸 녹여 피는
얼음 꽃


4. 수선화 앞에서  / 유소례

골반이 튼실해 씨방도 여물겠네

칼날 날개가 긴 척추 감싸고
오직 염원 하나
꽃네 마을 가는 길 위해
엄동을 깎아내고 있네

바람이 매울수록
탱글한 피관을 수직으로 타고
옹달샘 정갈한 물
시퍼렇게 퍼 올리고 있네

꽃네의 울, 여린 베일 속에
점화된 샛노란 눈빛이
운대감댁 별당아씨
청순한 부끄럼 닮았네

설한에 정제된 꽃내음이
살며시
내 하얗게 빈 마음에
정을 칠해 주고 있네.

5. 수선화   /  박정순

눈부시지 않은 모습으로
뜰 앞 정원의 모퉁이에서
봄을 안내하는 등을

아프로디테
가녀린 몸매로
긴 겨울 어이 참아내었는지
무명의 어둠 끌어안고
삭이고 삭인 고통의 흔적
그 얼굴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구시렁거리지도 않은
또 다른 별의 모습으로
꽃등을 켰다
항시 화려함이 아름다움은 아니듯
은은히 존재를 밝히는
가녀린 모습 앞에
마음도
한 자락의 옷을 벗고
노오란 향기와 모습 앞에
얼룩진 내 삶을 헹군다

6. 수선화  / 임종호
  
이역 수 만리에서 씨앗으로 왔다는
그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수선화 노오란 꽃이
청초한 그 꽃이 피었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가 곱게 피었습니다

7. 수선화    /권태원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살아갈수록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세상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속의 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당신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나도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의 기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8. 수선화·13   /  손정모

얘, 너도 주번이지?
꽃이 다 시들었어.
꽃병을 바라보던
소녀와 나
마주보며 웃음을 깨문다.

담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 언저리
산야엔 야생화가 굽이치고
물소리가 드높은 개울을
소녀가 건너뛴다.

여기 좀 봐.
물결처럼 남실대는 수선화에
소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내민 꽃병에 들어차는
노란 꽃잎이 눈부시다.

9.  수선화   /  이문조

강가에 피어난
노오란 꽃 한 송이
수줍은 듯 고개 내밀고

까아만 세라복에 흰 칼라
갈분 풀 먹여 다림질하고
단발머리 찰랑이며
하얀 얼굴 하얀 미소
꿈속인가 천상인가

어스름 달밤에
비단개구리 짝 부르는데
그리운 님 찾아
고갯길을 오릅니다

사랑하는 님 생각에
어둠도 산길도 무섭지 않더이다.  

10. 수선화  /  박인걸

눈이 아리도록 고와도
사랑해 줄 이 없으면 고독해
목을 길게 빼들고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는가.

그리움이 차오르면
얼굴은 점점 야위어 가고
소슬바람에도
힘없이 스러질 것만 같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은
돌담 아래 외로이 서 있는
수선화 닮은 여인아

11. 수선화  /  함윤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12. 수선화·2  /  이승익

서울 우이동에서 마음씨 곱기로 소문난
이 생 진 선생님
식산봉 아래 부끄러이 자고있는 통나무집 한켠에
물맛 좋은 제주생수병에 수선화 꽂아놓아
서울 우이동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수선화는 슬피 울고있다
수선화는 말을 잃은 것 같다
수선화는 생기가 없다
수선화는 졸고있다

아마도
수선화는 선생님 마음이 너무 그리워
하루 이틀 온몸을 바르르 떨다
끝내 자결한 모양이다

13. 그대 외로운 수선화야  /  탁정순

그대는 늘 아름답지만
고독에 갇힌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슬픈 운명

조금 외로우면 어떠리
산다는 것은
외로움으로 피어난 꽃 한 송이
네 모습인걸

이젠 벗어버리면 어떠리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에 젖고
몸과 마음은 늘 젖어있지 않은가

오늘이 있기에 내일도 있는 거야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일 거야

이젠 허전한 영혼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 따뜻한 내일을 기약해 보렴

과거는 언제나 추억으로 남는 것
그대 아름답지만
외로운 수선화야

14. 수선화  /  유국진
 
수선화!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지금까지 믿고 사실로 인식했던 것들이
이따금 사실이 아닌 거짓임을 알게 될 때도 있단다

참된 사랑은 거짓된 삶의 그늘에선 필 수가 없어
그러니 수선화야
늘 따사한 물가를 찾아
꽃 피기를 염원하지 말어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여 괴로워하지도 말어

사랑이란 스스로를 하염없이 태우는
순교자의 발걸음과 같은 것이란다
우리 인생에서
주어서 기쁜 것이 무엇 있겠니?
두루미 목빛 같은 의연함을 지니고
외로이 연못가에 홀로 핀 수선화야!

수선화야 수선화야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나를 보게 되고
죽음도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고
내 가진 모든 것 사라진다해도
행복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게 된단다

몸과 마음이 너의 꽃잎처럼 맑고
순결해지고
우주의 신비가 늘 봄비에 가득 젖어
빛나고
그리고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호수가
가슴에 다가와
수선화야!
가난한 우리는
그 속에 꽃핀 너의 눈망울을 보게 된단다.

15. 수선화의 기도  /  강은령
        
주께서는 금잔을 주시어
청정한 마음과
담을 만큼의 복을 주셨나이다
봄의 형상을 입게 하시고
빛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시나이다
내 속에 선한 것들을 담게 하시어
고여져 썩지 않게 하시려고
기울여 흘려내게 하시오니
향은 흘러 시내를 이룹니다
햇살 아래 뿌리 내려
아삽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
무명 같이 그렁이는 눈망울들
봄을 담아 그 얼굴에 어룽지게 하시오니
주의 앞에서 순백하달 수만은 없는
숙여진 목덜미로
주의 은혜 찬양하게 하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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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섬 달이 밝은 밤에 망루에 혼자 앉아서

큰 칼 옆에 차고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깊은 근심에 잠겨 있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한 가락 피리소리에 애간장이 다 끊어 지는구나

 

[철령 높은 봉에] - 이항복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뛰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철령 높은 봉우리를 쉬어서 넘어가는 저 구름아

귀양가는 외로운 신하의 억울한 눈물을 비처럼 띄어가지고 가서

임금님 계신 깊은 궁궐에 뿌려서 나의 충성심을 알려 드리려무나

 

[세상 사람들이] - 인평대군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 괴야

남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을 고치고저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살아서

자기의 잘못은 다 잊어버리고 남의 흉을 보는구나

남의 흉을 보기 전에 자기의 잘못을 먼저 고쳤으면 좋겠구나

 

[심산에 밤이 드니] - 박인로

 

심산에 밤이 드니 북풍이 더욱 차다

옥루고처에도 이 바람 부는 게오

긴밤에 치우신가 북두 비겨 바래로다

 

깊은 산 속에 밤이 깊어가니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 바람이 더욱 차다

임금님 계시는 궁궐에도 이 찬 바람이 불고 있을까

긴긴 겨울 밤에 춥지는 않으신지 임금님을 북두성 별에 견주어 바라본다

 

[동창이 밝았느냐] -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동쪽 창문이 벌써 밝았느냐 종달새가 우지짖고 있다

소를 먹이는 아이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고개 너머에 있는 이랑이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

 

[오늘도 다 새거다] - 정 철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어든 네 논 좀 매어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오늘도 날이 다 밝았다 호미를 메고 들로 나가자꾸나

내 논을 다 맨 뒤에는 네 논도 좀 매어 주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뽕잎을 따서 누에를 먹여 보자꾸나

 

[이고 진 저 늙은이] - 정 철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머리에 이고 등에 짐을 진 저 늙은이 짐을 풀어서 나에게 주시오

나는 젊었으니 돌덩이인들 무겁겠소

늙은 것도 서러운데 무거운 짐까지 지셔야 되겠소

 

[지당에 비 뿌리고] - 조 헌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었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안개가 끼었는데

강가에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어 있는가

저녁놀 속에 외로운 갈매기만 오락가락 날아다니는구나

 

[동지달 기나 긴 밤을] - 황진이

 

동지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남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지달 긴긴 밤의 시간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뭉치어 넣어 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펼쳐서 긴긴 시간으로 이으리라

 

[청산리 벽계수야] -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푸른 산 속을 흐르는 맑은 냇물이여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하지 말라

한 번 바다로 흘러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것이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 비치고 있으니 놀다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

 

[청산은 어찌하여] - 이 황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사람들도 그치지 말고 영원히 푸르게 살아야 하리라

 

[고인도 날 못 보고] - 이 황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뵈

고인을 못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옛날 훌륭한 사람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예사람을 못 보는데

옛사람은 못 보아도 그들이 행하던 훌륭한 길이 가르침으로 남아 있네

옛적의 훌륭한 길이 앞에 있는데 올바른 도리를 따르지 않고 어쩌리

 

[청초 우거진 골에] - 임 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꽰어 하노라

 

푸른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잠을 자느냐 누워 있느냐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두고 흰 뼈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고 권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슬퍼 하노라

 

[고산 구곡담을] - 이 이

 

고산 구곡담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를 상상하고 학주자를 하리라

 

고산에 있는 아홉 굽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조그만 집을 짓고 지내니 벗들이 다 모여든다

아아 중국에 있는 무이산을 상상하며 주자[중국 최대의 학자]를 배우리라

 

[어버이 살아신 제] - 정 철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섬기는 일을 잘 하여라

돌아가신 후에 슬퍼한들 무엇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이 부모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노라

 

[마을 사람들아] - 정 철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 곧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어 밥 먹이나 다르랴

 

마을 사람들이여 옳은 일을 하자꾸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옳은 일을 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 갓이나 고깔을 씌어 밥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마음이 어린 후이니] -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구나

구름이 첩첩한 깊은 산속에 어느 임이 찾아 올 것인가마는

낙엽이 지고 바람 부는 소리에 행여나 임이 왔는가 싶구나

 

[장검을 빠혀 들고] - 남 이

 

장검을 빠혀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큰 칼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밝고 맑은 천지에 전쟁의 기운이 덮혀 있구나

언제 전쟁을 없애고 평화로운 세상 만들 수 있을까

 

[삼동에 베옷 입고] - 조 식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추운 겨울에 베옷을 입고 바윗굴 속에서 눈비를 맞고 살면서

구름 낀 햇빛[임금의 은총]을 쬔 적이 없지만

서산에 해가 진다[임금의 죽음] 하니 눈물이 나는구나

 

[풍상이 섯거 친 날에] - 송 순

 

풍상이 섯거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바람 불고 서리가 내린 날에 막 피어난 노란 국화꽃을

[명종 임금께서] 좋은 화분에 담아 홍문관에 보내 주시니

복숭아 오얏꽃은 꽃인 체도 하지 마라 국화를 보내신 임금의 뜻을 알겠구나

 

[오리의 짧은 다리] - 김 구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

항복무강하사 억만세를 누리소서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이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검은 까마귀가 백로처럼 희게 될 때가지

끝없이 복을 누리시고 길이길이 사시옵소서

 

[태산이 높다 하되] - 양사언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하늘 아래에 있는 산이로다

마음을 먹어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가 없겠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말하는구나

 

 

[이런들 어떠하며] - 이 황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이 이러타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을 고쳐 무엇하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선비가 이렇게 산들 어떠하리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쳐서 무엇하리

 

[가마귀 눈비 맞아] - 박팽년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흰 듯하지만 속은 검구나

야광주 명월주 구슬은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고 빛난다

단종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초당에 일어 없어] - 유성원

 

초당에 일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어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워라

 

조용한 집에 한가하게 있다가 거문고를 베고 누워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을 꿈 속에서 보려 하였는데

문 앞에서 고기잡이들이 부는 피리소리가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詠笠 (영립)] (삿갓을 읊은 시) -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浮浮我笠等虛舟하야(부부아립등허주)

나의 삿갓은 빈배와 같이 가볍고 가벼워서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한 번 쓰자 어느듯 사십 평생이 흘렀구려

牧竪行裝隨野犢이요(목수행장수야독)

목동의 신세는 들에서 소를 따라 다니는 것이고

漁翁身勢伴江鷗(어옹신세반강구)

늙은 어부의 신세는 강가의 갈매기와 벗하고 지낼뿐이네

閑來脫掛看花樹(한래탈괘간화수)

한가로우면 삿갓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꽃구경을 하기도 하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이나면 삿갓을 벗어들고 달구경하러 누각에 오른다

俗子衣冠皆虛飾이지만(속자의관개허식)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뿐이지만

滿天風雨獨無愁로다(만천풍우독무수)

온 세상의 가득한 비바람에도 실속있는 삿갓 쓴 나만은 걱정이 없네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 리 머나먼 길[강원도 영월]에서 고운 임[단종]을 이별하고

내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시냇가에 앉아 있으니

저 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흘러 가는구나

 

[간밤에 불던 바람 ] - 유응부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 다 기울어 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지난 밤에 불던 바람에 눈과 서리까지 몰아쳤단 말인가

우뚝 솟은 큰 소나무[단종 따르는 충신들]가 다 쓰러져 가는구나

하물며 아직 못다 핀 꽃[이름 없는 선비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추강에 밤이 드니] - 월산대군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가을의 강물에 밤이 깊어가니 물결이 차구나

낚시를 드리워도 고기가 물지 않는구나

욕심도 잡념도 없는 달빛만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다

 

[짚 방석 내지 마라] - 한 호

 

짚 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짚으로 만든 방석을 내지 마라 낙엽 위에 못 앉겠는가

관솔 불을 켜지 마라 어제 진 달이 다시 환하게 돋아온다

아이야 막걸리와 산나물이라도 좋으니 푸짐하게 차려 오너라

 

[강호에 봄이 드니] - 맹사성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 삼고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 군은이샷다

 

아름다운 자연에 봄이 돌아오니 미칠 듯한 흥이 절로 일어난다

시냇가에서 탁주를 마시는데 싱싱한 물고기를 안주로 삼아

이 몸이 이렇게 한가하게 지낸는 것도 또한 임금님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봄이 드니] - 황 희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희는 밭을 가니

뒷 메헤 엄기난 약을 언제 캐랴 하나니

 

아름다운 자연에 봄이 오니 이 몸이 할 일이 많다

나는 그물을 깁고 아이는 밭을 갈고 있는데

뒷산에 많이 핀 약초를 언제 다 깰 것인가

 

[대추 볼 붉은 골에] - 황 희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듣드리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대추가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이 뚝뚝 떨어지며

벼를 베어낸 그루에는 게가 기어 내려가는구나

술이 다 익자 체를 파는 장사가 오니 새 술을 걸러서 먹어야 겠구나

 

[삭풍은 나무 끝에] - 김종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에라

 

찬 겨울 바람은 나뭇가지에 스치고 밝은 달은 눈 속에서 싸늘한데

서울에서 머나먼 변방의 성루에 큰 칼을 짚고 서서

긴 휘파람과 큰 고함 소리에 감히 거칠 것이 없구나

 

[장백산에 기를 꽂고] -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야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오

 

백두산에 깃발을 꽂고 두만강 물에 말을 씻기니

쓸모없는 선비들아 우리가 바로 대장부가 아니냐

공이 큰 신하의 그림이 걸리는 누각에 누구의 얼굴 그림이 먼저 걸리겠느가

 

[이 몸이 죽어 가서] - 성삼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 몸이 죽은 뒤에 무엇이 될 것인고 하니

봉래산[서울 남산] 높은 봉우리에 우똑 솟은 큰 소나무가 되어서

흰 눈이 온 세상에 가득 찰 때 홀로 푸르고 푸르리라

 

[수양산 바라보며] - 성삼문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정 채미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수양산 바라보며 옛날 중국(은나라)의 절개의 선비 백이와 숙제를 한탄한다

절개를 지키려면 굶주려 죽을 것이지 고사리는 왜 캐어 먹었는가

비록 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누구(주나라)의 땅에 났던 것이냐

 

[이런들 어떠하며]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렇게 지내면 어떻고 저렇게 살아가면 어떻겠는가

만수산에 자란 칡넝굴이 얽힌 것처럼 살아가도 어떻겠는가

우리도 이처럼 어울려서 오래오래 살아가자꾸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몸이 죽고 또 죽어 백 번이나 다시 죽어서

백골이 썩은 흙이 되어 혼백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임금[공양왕]을 향한 변함 없는 충성심이야 변할 리가 있겠는가

 

[오백년 도읍지를] - 길 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오백 년의 서울이었던 개성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오니

자연은 옛날과 변함 없으나 훌륭한 옛사람들은 간 곳이 없구나

아아 고려의 태평성대가 허무한 꿈이라 여겨 지는구나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 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흰 눈이 자욱한 골짜기에 구름[이성계 무리]이 험하게 일어나는구나

반가운 매화[우국지사]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망해 가는 고려 왕조]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하는구나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 하노라

 

흥하고 망함에 운수가 있어 궁궐터인 만월대에는 가을 풀이 쓸쓸하구나

오백 년 고려 왕조의 업적이 목동의 피리 소리에 깃들어 있을 뿐이니

해질 무렵 지나가는 손이 슬퍼 눈물 겨워 하노라.

 

[눈 맞아 휘어진 대를] - 원천석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 턴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눈을 맞아서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고 말하는가

쉽게 휘어질 절개일 것 같으면 눈 속에서도 푸르겠는가

아마도 추의을 꿋꿋이 견디는 절개는 너뿐인 것 같구나

 

[내해 좋다 하고] - 변계랑

 

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녀든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나에게 좋다고 해서 남에게 싫은 일 하지 말고

남이 한다고 해도 올바른 일이 아니면 따라 하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지켜서 타고난 본성대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가마귀 검다 하고] - 이 직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까마귀의 색깔이 검다고 해서 백로야 비웃지 말라

겉이 검다고 해서 속까지 검을 것 같으냐

겉은 희면서 속이 검은 것은 백로 너뿐인 것 같구나

 

서산대사

 

踏雪野中去하야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이라(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이라 (수작후인정)

 

눈이 많이 내린 산야를 처음 걷는사람이여

절대로 비틀걸음을 걷지 말고 바른걸음으로 걸으소서

오늘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이 발걸음은

반드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인생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우 탁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이 된 산에 눈을 녹인 봄바람이 잠깐 불고 간 데가 없다.

잠깐동안 봄바람을 빌려서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귀 밑의 오래된 서리(흰 머리카락)를 녹여 보고 싶구나

 

[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에 달이 환히 비치고 은하수 흐르는 시간이 자정인데

한 가닥 봄날의 애뜻한 마음을 소쩍새가 알겠는가마는

정이 많은 것도 병인 것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 최 영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 설악 들게 갈아 두러 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날래고 훌륭한 말을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깨끗이 씻겨서 타고

좋은 칼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 메고

대장부의 나라 위한 충성된 절개를 세워 볼까 하노라

 

[가마귀 싸우는 골에]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가마귀 힌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간신]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충신]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가 백로의 횐 빛을 시기하여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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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인 구함

가졌다고 콧대 높다든가
쥐뿔도 없이 카드 긁어대는
그런 사람 말고
선바람에 칼국수도 만족해하는 사람

피 말리는 악처처럼
후회로 자반뒤집기 하게 만드는
생파리같은 사람 말고
베잠방이처럼 조금 헐렁한 사람

재물 욕심이 남산만해
거머리처럼 자근대는
꽃뱀 같은 사람 말고
삶이 근근자자해 웅숭깊은 사람

춘정의 갈망으로 몸부림치며
세상 욕구불만 다 끌어안아 우중충한
그런 사람 말고
구름에 엎질러진 노을마저 미소로 수거해
마음 살찌울 줄 아는 사람

목로주점 막걸리 한잔에도
노가리 물고 희희낙락
분위기 거들 줄 아는
하여간 껄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
죽도 밥도 안 되는 시는 몰라도 되는


(권오범·시인)


2. 그러나 애인은

애인은, 금세 날아가 버리는 향수
애인은, 헛웃음치는 꽃
뜻밖에 불어와 뜻밖에 지는
애인은, 바람보다 허무한 바람

그러나 애인은, 늘 맑은 우물
끝없는 추억이 거기에 솟고
끝없는 눈물이 거기에 괴고
끝없는 서정이 거기 비침에


(정숙자·시인)


3. 애인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어
꽃눈을 피워내는
간지러운 바람이었네

굳은 몸을 흔들어 깨워
연초록 사랑의 움을 밀어내는
젖은 바람이었네

소리 없이 스며들어
내 마음까지 칭칭 동여맨
질긴 밧줄이었네


(김윤호·시인)


4. 애인

보란 듯이 자꾸
길 헤맨다

이젠 지쳤다고
늘상 투정부린다

나는 당신의 애인 중
가장 못생긴 애인,

어쩌다 눈길 주시면
화르르 피어나다가

어쩌다 눈길 거두시면
눈물 뚝뚝 흘리는

타다만 촛불
오르다만 화살 기도

혼자서는
아무 것 하지 못한다

풀어놓고 가야할
사랑의 타래

갈수록
자꾸 얽혀만 간다

나는 당신의 애인 중
가장 철없는 애인


(홍수희·시인) 

5. 넌 내 애인

밤이나 낯이나
짬나면
네 눈빛 바라보고 달래본 내 마음

네가 있어
행복이란 달콤한 그 맛을 알았지
네가 있어

때로는
세월의 가지 끝에 무슨 청승이야 하면서도
내 사랑 신의 은총이기에
무한대의 행복지수 비할 곳이 없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네가 있어
내 은밀한 마음 네게 쏟아 부어도 듣는 이 없어
내 비밀 모두를 판화로 쏟아본다

네가 있어 너에게


(하영순·시인)


6. 너의 애인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애의 입술
그 애의 가슴

하염없이 그냥
넋없이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애의 빨간 입술과
수줍은 가슴

바라볼 수 없는 건
그 애의 눈
그 애의 깊은 눈

어쩌다 한 번 보고 나서
괜히 나 혼자 술을 퍼마시게 하는
아름다운 눈
참 슬픈 눈

언제나 너만을 보고 있는
착한 그 눈.


(김영승·시인, 1959-)


7. 애인

누가 지금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장석주·시인, 1954-)


8. 백치애인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 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아.


(신달자·시인, 1943-)


9. 옛 애인

거짓말처럼 그 사람을 만나기도 하네
이름은 기억하지만
얼굴은 생각나지 않던 사람이네
아니 얼굴은 기억하지만
이름이 영 낯설었던 사람이네
이 세상 모든 옛 애인의 기억은
읽다가 행간을 놓쳐도 좋을 주간지 같네
갑자기 혓바늘이 돋네
그래서 바보처럼 묻기도 하네
누구시더라


(강연호·시인, 1962-)


10. 애인

자명종은 내 사랑하는 애인입니다
어떤 애인을 그리도 밤마다
끌어안고 몸부림을 칠 수 있을까요
새벽마다 이십 여분을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자명종은 내
품안에서 떨어져 나가고 나는
주방으로 달려갑니다
예약해 놓은 전기밥솥을 확인하고
엊저녁 잠자리에서 머릿속에 그려놓은 아침 메뉴판을
떠올리며 반찬을 만들고 도시락을 챙기고 교복을 다리고
일곱 시가 되면 아이를 위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지요
내 애인도 내 품안에서 떠나야 할 날도 며칠 안 남았지요
왜냐고요?
수능시험이 이제 한 이십 여일 남았거든요


(권복례·시인)

11. 떠난 애인에게

네가 먼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시간
나는 강의실로 들어가고 있었어
잘 가, 잘 살아,라고
바닥에 뒹구는 잎새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숨겨 나는 말했어
하늘도 한 번 바라보았어
구름이 한두 뭉치 있지만 푸르더군

우린 화를 내다 여러 해의 그리움을 마감해 버렸어
신부가 바뀌었다고 생각지 않니?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어
들렸어
슬프게,
그래,라고 하는 네 마음

우린 매정한 체하느라고 애를 썼어
사실은 자신이 없어서였을 뿐인데
그게 효과가 있었지
충분히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지
세상에 충분한 사랑이 있다는 것처럼
아주 거만했지

물론 돌이킬 순 없지
그냥 이렇게 말하는 거지
어제부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그 동안 배워온 세상 사는 기술이 있지
(배신하고 배신당한 일이 한두 번인가
살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그게 좋아
아무쪼록 우리 죽을 때까지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자
맨 얼굴 내밀지 말자

나머지 삶도 살아야 하니
잘 가, 다시는
이승에서 부르지 않을 이름

살아가는 일이 견뎌내는 일이 될지라도
잘 가, 잘 살아,
우리 이렇게 살아 가


(양애경·교수 시인, 1956-)


12. 그대, 그리고 나

그대가
꽃잎이라면

나는
그대에게 내려앉아

산산이 부서지는
한줄기 햇살이고 싶어라.

이 목숨
다하는 그 날까지

아니,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의 파도 너머

영원히 변함없이
하나이고 싶은

아름다운 연인(戀人)
그대, 그리고 나


(정연복·시인, 1957-)


13. 애인의 조건

제 애인이 될 조건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루 내내 키스하는 겁니다. 새벽에 시작해서 해거름녘에 단 한 번 숨을 돌리고 다시 푸른 새벽이 될 때까지 입을 맞추는 겁니다. 그럴 사람이 있다면 제가 당신 죽는 날, 그 하루 내내 당신 입술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내뱉은 마지막 호흡을 제가 삼켜 당신을 가슴에 묻고 그 호흡을 제 마지막 호흡으로 저 또한 당신과 한 호흡으로 죽겠습니다.


(김하인·시인,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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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조 모음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섬 달이 밝은 밤에 망루에 혼자 앉아서

큰 칼 옆에 차고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깊은 근심에 잠겨 있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한 가락 피리소리에 애간장이 다 끊어 지는구나

 

 

[철령 높은 봉에] - 이항복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뛰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철령 높은 봉우리를 쉬어서 넘어가는 저 구름아

귀양가는 외로운 신하의 억울한 눈물을 비처럼 띄어가지고 가서

임금님 계신 깊은 궁궐에 뿌려서 나의 충성심을 알려 드리려무나

 

[세상 사람들이] - 인평대군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 괴야

남의 흉 보거라 말고 제 허물을 고치고저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살아서

자기의 잘못은 다 잊어버리고 남의 흉을 보는구나

남의 흉을 보기 전에 자기의 잘못을 먼저 고쳤으면 좋겠구나

 

[심산에 밤이 드니] - 박인로

 

심산에 밤이 드니 북풍이 더욱 차다

옥루고처에도 이 바람 부는 게오

긴밤에 치우신가 북두 비겨 바래로다

 

깊은 산 속에 밤이 깊어가니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 바람이 더욱 차다

임금님 계시는 궁궐에도 이 찬 바람이 불고 있을까

긴긴 겨울 밤에 춥지는 않으신지 임금님을 북두성 별에 견주어 바라본다

 

[동창이 밝았느냐] -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동쪽 창문이 벌써 밝았느냐 종달새가 우지짖고 있다

소를 먹이는 아이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고개 너머에 있는 이랑이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

 

[오늘도 다 새거다] - 정 철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어든 네 논 좀 매어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

 

오늘도 날이 다 밝았다 호미를 메고 들로 나가자꾸나

내 논을 다 맨 뒤에는 네 논도 좀 매어 주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뽕잎을 따서 누에를 먹여 보자꾸나

 

[이고 진 저 늙은이] - 정 철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머리에 이고 등에 짐을 진 저 늙은이 짐을 풀어서 나에게 주시오

나는 젊었으니 돌덩이인들 무겁겠소

늙은 것도 서러운데 무거운 짐까지 지셔야 되겠소

 

[지당에 비 뿌리고] - 조 헌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었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안개가 끼었는데

강가에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어 있는가

저녁놀 속에 외로운 갈매기만 오락가락 날아다니는구나

 

[동지달 기나 긴 밤을] - 황진이

 

동지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남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지달 긴긴 밤의 시간 한가운데를 베어 내어

봄바람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뭉치어 넣어 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펼쳐서 긴긴 시간으로 이으리라

 

[청산리 벽계수야] -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푸른 산 속을 흐르는 맑은 냇물이여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하지 말라

한 번 바다로 흘러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것이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 비치고 있으니 놀다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

 

[청산은 어찌하여] - 이 황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사람들도 그치지 말고 영원히 푸르게 살아야 하리라

 

[고인도 날 못 보고] - 이 황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뵈

고인을 못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옛날 훌륭한 사람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예사람을 못 보는데

옛사람은 못 보아도 그들이 행하던 훌륭한 길이 가르침으로 남아 있네

옛적의 훌륭한 길이 앞에 있는데 올바른 도리를 따르지 않고 어쩌리

 

[청초 우거진 골에] - 임 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꽰어 하노라

 

푸른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잠을 자느냐 누워 있느냐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두고 흰 뼈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고 권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슬퍼 하노라

 

[고산 구곡담을] - 이 이

 

고산 구곡담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를 상상하고 학주자를 하리라

 

고산에 있는 아홉 굽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내가 조그만 집을 짓고 지내니 벗들이 다 모여든다

아아 중국에 있는 무이산을 상상하며 주자[중국 최대의 학자]를 배우리라

 

[어버이 살아신 제] - 정 철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섬기는 일을 잘 하여라

돌아가신 후에 슬퍼한들 무엇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이 부모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노라

 

[마을 사람들아] - 정 철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 곧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어 밥 먹이나 다르랴

 

마을 사람들이여 옳은 일을 하자꾸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옳은 일을 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 갓이나 고깔을 씌어 밥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마음이 어린 후이니] -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으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구나

구름이 첩첩한 깊은 산속에 어느 임이 찾아 올 것인가마는

낙엽이 지고 바람 부는 소리에 행여나 임이 왔는가 싶구나

 

[장검을 빠혀 들고] - 남 이

 

장검을 빠혀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에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 볼까 하노라

 

큰 칼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 보니

밝고 맑은 천지에 전쟁의 기운이 덮혀 있구나

언제 전쟁을 없애고 평화로운 세상 만들 수 있을까

 

[삼동에 베옷 입고] - 조 식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추운 겨울에 베옷을 입고 바윗굴 속에서 눈비를 맞고 살면서

구름 낀 햇빛[임금의 은총]을 쬔 적이 없지만

서산에 해가 진다[임금의 죽음] 하니 눈물이 나는구나

 

[풍상이 섯거 친 날에] - 송 순

 

풍상이 섯거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바람 불고 서리가 내린 날에 막 피어난 노란 국화꽃을

[명종 임금께서] 좋은 화분에 담아 홍문관에 보내 주시니

복숭아 오얏꽃은 꽃인 체도 하지 마라 국화를 보내신 임금의 뜻을 알겠구나

 

[오리의 짧은 다리] - 김 구

 

오리의 짧은 다리 학의 다리 되도록애

검은 가마귀 해오라비 되도록

항복무강하사 억만세를 누리소서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이 다리처럼 길어질 때까지

검은 까마귀가 백로처럼 희게 될 때가지

끝없이 복을 누리시고 길이길이 사시옵소서

 

[태산이 높다 하되] - 양사언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하늘 아래에 있는 산이로다

마음을 먹어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가 없겠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말하는구나

 

 

[이런들 어떠하며] - 이 황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이 이러타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을 고쳐 무엇하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선비가 이렇게 산들 어떠하리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쳐서 무엇하리

 

[가마귀 눈비 맞아] - 박팽년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흰 듯하지만 속은 검구나

야광주 명월주 구슬은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고 빛난다

단종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초당에 일어 없어] - 유성원

 

초당에 일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어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워라

 

조용한 집에 한가하게 있다가 거문고를 베고 누워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을 꿈 속에서 보려 하였는데

문 앞에서 고기잡이들이 부는 피리소리가 잠든 나를 깨우는구나

 

[詠笠 (영립)] (삿갓을 읊은 시) -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浮浮我笠等虛舟하야(부부아립등허주)

나의 삿갓은 빈배와 같이 가볍고 가벼워서

一着平生四十秋(일착평생사십추)

한 번 쓰자 어느듯 사십 평생이 흘렀구려

牧竪行裝隨野犢이요(목수행장수야독)

목동의 신세는 들에서 소를 따라 다니는 것이고

漁翁身勢伴江鷗(어옹신세반강구)

늙은 어부의 신세는 강가의 갈매기와 벗하고 지낼뿐이네

閑來脫掛看花樹(한래탈괘간화수)

한가로우면 삿갓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꽃구경을 하기도 하고

興到携登翫月樓(흥도휴등완월루)

흥이나면 삿갓을 벗어들고 달구경하러 누각에 오른다

俗子衣冠皆虛飾이지만(속자의관개허식)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뿐이지만

滿天風雨獨無愁로다(만천풍우독무수)

온 세상의 가득한 비바람에도 실속있는 삿갓 쓴 나만은 걱정이 없네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여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 리 머나먼 길[강원도 영월]에서 고운 임[단종]을 이별하고

내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시냇가에 앉아 있으니

저 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면서 밤길을 흘러 가는구나

 

[간밤에 불던 바람 ] - 유응부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 다 기울어 지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지난 밤에 불던 바람에 눈과 서리까지 몰아쳤단 말인가

우뚝 솟은 큰 소나무[단종 따르는 충신들]가 다 쓰러져 가는구나

하물며 아직 못다 핀 꽃[이름 없는 선비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추강에 밤이 드니] - 월산대군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가을의 강물에 밤이 깊어가니 물결이 차구나

낚시를 드리워도 고기가 물지 않는구나

욕심도 잡념도 없는 달빛만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다

 

[짚 방석 내지 마라] - 한 호

 

짚 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짚으로 만든 방석을 내지 마라 낙엽 위에 못 앉겠는가

관솔 불을 켜지 마라 어제 진 달이 다시 환하게 돋아온다

아이야 막걸리와 산나물이라도 좋으니 푸짐하게 차려 오너라

 

[강호에 봄이 드니] - 맹사성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 삼고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 군은이샷다

 

아름다운 자연에 봄이 돌아오니 미칠 듯한 흥이 절로 일어난다

시냇가에서 탁주를 마시는데 싱싱한 물고기를 안주로 삼아

이 몸이 이렇게 한가하게 지낸는 것도 또한 임금님의 은혜이시도다

 

[강호에 봄이 드니] - 황 희

 

강호에 봄이 드니 이 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희는 밭을 가니

뒷 메헤 엄기난 약을 언제 캐랴 하나니

 

아름다운 자연에 봄이 오니 이 몸이 할 일이 많다

나는 그물을 깁고 아이는 밭을 갈고 있는데

뒷산에 많이 핀 약초를 언제 다 깰 것인가

 

[대추 볼 붉은 골에] - 황 희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듣드리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대추가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이 뚝뚝 떨어지며

벼를 베어낸 그루에는 게가 기어 내려가는구나

술이 다 익자 체를 파는 장사가 오니 새 술을 걸러서 먹어야 겠구나

 

[삭풍은 나무 끝에] - 김종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에라

 

찬 겨울 바람은 나뭇가지에 스치고 밝은 달은 눈 속에서 싸늘한데

서울에서 머나먼 변방의 성루에 큰 칼을 짚고 서서

긴 휘파람과 큰 고함 소리에 감히 거칠 것이 없구나

 

[장백산에 기를 꽂고] -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야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가 먼저 하리오

 

백두산에 깃발을 꽂고 두만강 물에 말을 씻기니

쓸모없는 선비들아 우리가 바로 대장부가 아니냐

공이 큰 신하의 그림이 걸리는 누각에 누구의 얼굴 그림이 먼저 걸리겠느가

 

[이 몸이 죽어 가서] - 성삼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 몸이 죽은 뒤에 무엇이 될 것인고 하니

봉래산[서울 남산] 높은 봉우리에 우똑 솟은 큰 소나무가 되어서

흰 눈이 온 세상에 가득 찰 때 홀로 푸르고 푸르리라

 

[수양산 바라보며] - 성삼문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정 채미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수양산 바라보며 옛날 중국(은나라)의 절개의 선비 백이와 숙제를 한탄한다

절개를 지키려면 굶주려 죽을 것이지 고사리는 왜 캐어 먹었는가

비록 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누구(주나라)의 땅에 났던 것이냐

 

[이런들 어떠하며]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렇게 지내면 어떻고 저렇게 살아가면 어떻겠는가

만수산에 자란 칡넝굴이 얽힌 것처럼 살아가도 어떻겠는가

우리도 이처럼 어울려서 오래오래 살아가자꾸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몸이 죽고 또 죽어 백 번이나 다시 죽어서

백골이 썩은 흙이 되어 혼백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임금[공양왕]을 향한 변함 없는 충성심이야 변할 리가 있겠는가

 

[오백년 도읍지를] - 길 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오백 년의 서울이었던 개성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오니

자연은 옛날과 변함 없으나 훌륭한 옛사람들은 간 곳이 없구나

아아 고려의 태평성대가 허무한 꿈이라 여겨 지는구나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 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흰 눈이 자욱한 골짜기에 구름[이성계 무리]이 험하게 일어나는구나

반가운 매화[우국지사]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망해 가는 고려 왕조]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하는구나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 하노라

 

흥하고 망함에 운수가 있어 궁궐터인 만월대에는 가을 풀이 쓸쓸하구나

오백 년 고려 왕조의 업적이 목동의 피리 소리에 깃들어 있을 뿐이니

해질 무렵 지나가는 손이 슬퍼 눈물 겨워 하노라.

 

[눈 맞아 휘어진 대를] - 원천석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 턴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르르랴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눈을 맞아서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고 말하는가

쉽게 휘어질 절개일 것 같으면 눈 속에서도 푸르겠는가

아마도 추의을 꿋꿋이 견디는 절개는 너뿐인 것 같구나

 

[내해 좋다 하고] - 변계랑

 

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 아녀든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나에게 좋다고 해서 남에게 싫은 일 하지 말고

남이 한다고 해도 올바른 일이 아니면 따라 하지 말라

우리는 천성을 지켜서 타고난 본성대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가마귀 검다 하고] - 이 직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까마귀의 색깔이 검다고 해서 백로야 비웃지 말라

겉이 검다고 해서 속까지 검을 것 같으냐

겉은 희면서 속이 검은 것은 백로 너뿐인 것 같구나

 

서산대사

 

踏雪野中去하야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이라(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이라 (수작후인정)

 

눈이 많이 내린 산야를 처음 걷는사람이여

절대로 비틀걸음을 걷지 말고 바른걸음으로 걸으소서

오늘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이발걸음은

반드시 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인생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우 탁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저근듯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이 된 산에 눈을 녹인 봄바람이 잠깐 불고 간 데가 없다.

잠깐동안 봄바람을 빌려서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귀 밑의 오래된 서리(흰 머리카락)를 녹여 보고 싶구나

 

[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에 달이 환히 비치고 은하수 흐르는 시간이 자정인데

한 가닥 봄날의 애뜻한 마음을 소쩍새가 알겠는가마는

정이 많은 것도 병인 것 같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 최 영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 설악 들게 갈아 두러 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날래고 훌륭한 말을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깨끗이 씻겨서 타고

좋은 칼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 메고

대장부의 나라 위한 충성된 절개를 세워 볼까 하노라

 

[가마귀 싸우는 골에]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가마귀 힌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간신]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충신]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가 백로의 횐 빛을 시기하여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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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숙시모음 10

1. 그리움 속에 피는 눈꽃 / 송미숙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꽃이 휘날리는 날

눈꽃으로 뿌려진 눈부시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길을 걸어본다

 

그대가 특별한 날 선물해 준

운전용 기모 장갑과

스카프를 두르고

순백의 눈길을 걸어본다

 

가방에 시집 한 권

향수 대신 따스한 커피

보온병에 담아 메고

네게로 향해 본다

 

마음보다

발길이 더 분주한 이 시간

봄을 만나기 전

확실한 하얀 눈으로

발 도장을 찍는 이 순간

강렬한 햇볕으로 하얀 보석은

어느 순간 물이 되어 흐른다

 

가끔은 산길도 물길도

걷는 게 인생이기에

긴 겨울의 차가운 눈길도 걸어야

따뜻한 봄 꽃길을 우린 걸어갈 수 있다.

 

2. 기다림의 대천항 연가 / 송미숙

 

파도를 품에 보듬어

해지는 밤바다는 빈 밥그릇

두 손 모으는 정화수에

기다림은 하이얀 소금 꽃

어디 먼 바다 우렛소리

등댓불 걱정스레 깜박이는데

나아질 수 없는 상사병

아낙은 정화수 곁에서

밤샘으로 하는 뱃멀미로

천만년 긴 시간이 흐르고

떠오르는 태양, 밥그릇 가득

웃음소리 담는다.

 

3. 당신 그리워하며 하고 싶은 말 / 송미숙

 

언제 보아도 늘 변함이 없는 당신이

내게 존재하고 있어

진실이 없는 이 세상에

당신의 꽃 같은 마음이 있기에

내가 당신 마음에 항상 있는 것처럼

당신을 지켜만 봐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문득 당신이 내 곁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 같아

두려움에 잠겨

긴 잠을 잘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당신이 고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당신이 먼저 사랑의 말을

걸어주기라도 한다면

 

나 기다림에 지쳐 슬프고 고독할 때

또 보고 싶음에 지쳐 있다 하여도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사랑하리라

아름다운 미소로 고백하고 싶어요

 

예쁜 내 마음의 꽃들에 솔직히 고백했어요

해 뜨는 이른 새벽이면 그 예쁜 꽃들이

내가 당신에게 하고픈 그 말을 곱게

아름답게 당신에게 전할 거예요.

 

4. 미처 피어보지 못한 사랑 / 송미숙

 

기억 속에 잊혀진 그 이름으로

세월 흐르고 흘러가도

가슴 깊이 잠겨 있는 슬픈 사랑

 

그 이름 모를 들꽃

풀잎에 사랑을 쓴 그 슬픈 사연들은

파릇한 잎새에 그리움을 실어

넓고 드높게 펼쳐만 간다

 

채우지 못한 인연이라

그리움 두고 가야 한다면

눈물로 여백을 하얗게 남기어

늘 그대에게 간절히 전해지기를

나는 소망하련다

 

언젠가 채우지 못한 그 사랑을

내 마음에 깊게 간직하며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 속에 상상해 보련다.

 

5. 봄날의 주말농장 풍경 / 송미숙

 

따스한 봄비로 차가움을 어루만져주고

농장 땅바닥에 핀 키 작은 이름 모를 꽃에는

꿀벌들이 예쁘게 노느라 바쁘구나

 

가끔씩 불어오는

봄 향기 담은 바람에 냉기는 있으나

추운 겨울을 이겨낸 키 작은 봄나물과 새싹은

새 생명의 기다림과 설레임을 느끼게 한다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추어

호미 끝은 예쁘게 춤을 추고

꿀벌들은 꽃향기에 취한 듯

한 수 시를 을픈 듯 소리를 내고

 

창틀에 턱을 걸치고

옆 산을 바라본 봄 풍경은

새떼들이 소풍 가듯

대나무에 줄지어 사뿐히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님과 같이 나란히 누워

한눈에 들어오는 봄

수채화를 보며 여유와

한해 시작의 봄 향기에 스르르 꿈나라로

 

집에 오는 길에 마주친

한 쌍의 고운 천사 같은 눈을 가진 고라니는

반가운 듯 밝게 웃어주듯 껑충거린다

 

봄은 소생하는 만물들에게

아름다운 희망이구나

 

6. 아버님께 보내는 편지(아버지의 등) / 송미숙

 

님이시여, 당신이 그립습니다

어릴 적 배앓이가 심할 때면

늘상 업고 주무시던 나의 아버지

그토록 심하던 배앓이도

아버지 등에 업힐 때면 스르르 잠이 들곤 했습니다

 

낮동안 지쳐 있던 몸을 잠시라도 쉬고자

내려놓으실 때면

심술궂게도 다시 아파했던 철부지 딸

그래서, 당신은 지친 몸으로 밤새 저를 업고 주무셨고

저는 그 따뜻한 아버지 등에서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세월의 배앓이는 지금도 그칠 줄 모르고

기댈 곳 없는 허전함을

그리움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당신을 등에 업을 수 있는

세월의 무게가 되었는데……

 

그런 당신이

그런 아버지의 따뜻했던 그 등이

가슴 저리게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7. 하얀 미소 속의 구절초 / 송미숙

 

비바람 없는 날은

소쩍새 울음으로

허기진 세월 허기로 달래는

후미진 절벽 모퉁이에

 

먼산바라기 여인의 고운 자태로

기다림이 익숙한 목이 긴 꽃

세파에 꺾이어 홀로 피어

시나브로 어둠이 내리면

 

지친 세상이야기들

퇴근하는 발자국소리로

임의 눈물 가득 채운

꽃병을 꿈꾸는 하이얀 미소...

 

8. 참 고운 사랑과 인연 / 송미숙

 

아픔의 슬픈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착한 눈에서

슬픈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고운 사랑이다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까지 적셔오는

따뜻하고 훈훈한 사랑을 전할 때

그것이 참다운 고운 사랑과 인연이다

 

따뜻해져 오는

아름다운 참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그 참 사랑의 뜻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의미 깊은 사랑을 하며

그 속에 꽃 같은 사랑을 피우는 사랑이

고운 사랑과 인연이다

 

오늘도 저 먼 산을 바라보며

참다운 고운 사랑의 인연을 지켜내리라~

 

9. 우리들의 참 고운 행복 / 송미숙

 

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만의 기쁜 행복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많은 날을 살아 왔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이

무엇이 나의 삶을 그리도 바쁘게 했는지…….

 

뒤돌아 볼 새 없이

한길만을 고집하며 걸어온 삶이

그래도 조금씩 평온함으로 느껴지는 건

모든 벗이 내게 있고 내가 나눈 이야기에

그들이 울고 웃으면 아름다운 행복을 찾을 때

나는 참으로 행복하지요

 

내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적 호의호식이 아닌

그저 나의 대화 속에 서로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우리의 아름다운 대화의 인연 때문이겠지요

 

나는 늘 고운 꿈을 꿉니다

모두가 지금껏 힘겹게 살아온

삶의 이야기 속에

나의 고운 대화가 그들에게 있어

 

지난 아픈 세월의 여운을 버리고

참 고운 행복 속에서 희망의 세월을 회상하며

함께 웃고 저 고운 꿈속에서 아름답게 춤추며

희망의 노래를 예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만의 참 고운 행복이 아니라

우리들의 참 고운 행복이 열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봅니다.

 

10. 웃음꽃으로 살다 / 송미숙

 

마음이 지루하고 허전하다 느껴질 때

또 무료함 속에 답답하다고 여겨질 때

그럴 때는 마음을 전부 다 비우고

농장 앞에 꽃 앞에 서보자

 

농장의 잡풀이 피워낸

볼품없는 꽃이라도 좋고

기형으로 일그러진 꽃이라도 상관없이

마음 다 비우고 꽃에 다가가 보자

 

그 꽃향기 속에

아름다운 고운 웃음꽃이 있고

남들에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꽃들의 웃음에서 참 고운 인생의 가르침이 있다

 

그래!

내 마음 이렇게 답답하고 허전해도

농장의 꽃들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참 아름답고 곱게 웃음의 춤을 추는구나

 

나는 이제 이름 없는 꽃들과

볼품없는 꽃들을 보며

그들의 고운 웃음 속에서 허전함과 답답함이

얼마나 그릇된 것임을 배우고 간다

 

이제 인생의 여로에서

이름 없는 꽃들처럼 고운 웃음꽃으로 살다가

남은 인생의 여행에서

고운 행복을 찾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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