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시모음


1. 8월의 종소리 천상병 




저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땅의 소리인가?

하늘 소리인가?

 

한참 생각하니, 종소리

멀리 멀리서 들리는 소리

 

저 소리는 어디까지 갈까?

우주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

땅 속까지 스밀 것이고

천국에도 들릴 것인가

 


2. 8월의 바다  / 이채


8월의 바다
그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그리고 헤어졌을까


넘실대는 파도에 하얗게 이는 물보라
그 물보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밀려오고
그리고 쓸려 갔을까


그래서
겨울바다는
늘 쓸쓸한가 보다


8월의 바다
그 바다 저편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숲으로 떠 있는 외로운 섬 하나


하얀 갈매기 날으고
구름도 쉬어가는 그곳
그곳에 혹시
보고픈 연인이라도 머물고 있지나 않을까


그래서
그 섬은
늘 그리운가보다


3.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4.  8월의 소망   /  오광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반가운 8월엔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운 얼굴이 되고
만나면 시원한 대화에 흠뻑 젖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으랴?

푸름이 하늘까지 차고 넘치는 8월에
호젓이 붉은 나무 백일홍 밑에 누우면


바람이 와서 나를 간지럽게 하는가
아님 꽃잎으로 다가온 여인의 향기인가
붉은 입술의 키스는 얼마나 달콤하랴?

8월엔 꿈이어도 좋다.
아리온의 하프소리를 듣고 찾아온 돌고래같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를 듣고
보고픈 그 님이 백조를 타고
먼먼 밤하늘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면,



5. 8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여름 하늘은 알 수 없어라

지나는 소나기를 피할 길 없어

거리의 비가 되었을 때

그 하나의 우산이 간절할 때가 있지

여름 해는 길이도 길어라

종일 걸어도

저녁이 멀기만 할 때

그 하나의 그늘이 그리울 때가 있지

날은 덥고

이 하루가 버거울 때

이미 강을 건너

산처럼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지

그렇다 해도

울지 않는다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늘은 고달파도

웃을 수 있는 건

내일의 열매를 기억하기 때문이지

6. ​8월   /  이외수

여름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바다에 가지 못했다

흐린 날에는 홀로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막상 바다로 간다 해도

나는 아직 바다의 잠언을 알아듣지 못한다

바다는 허무의 무덤이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왜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채로

상처를 남기는지

바다는 말해주지 않는다

빌어먹을 낭만이여

한 잔의 술이 한 잔의 하늘이 되는 줄을

나는 몰랐다

젊은 날에는

가끔씩 술잔 속에 파도가 일어서고

나는 어두운 골목

똥물까지 토한 채 잠이 들었다

소문으로만 출렁거리는 바다 곁에서

이따금 술에 취하면

담벼락에 어른거린 던 나무들의 그림자

나무들의 그림자를 부여잡고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리석다

사랑은 바다에 가도 만날 수 없고

거리를 방황해도 만날 수 없다

단지 고개를 돌리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시간의 발굽 소리

나는 왜 아직도

세속을 떠나지 못했을까

흐린 날에는 목로주점에 앉아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인생은 비어 있으므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7.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 오는 것

풀 섭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 번쯤은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8. 중년의 가슴에 8월이 오면   /  이채

한 줄기 바람도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가 어디 있으랴

한 방울 눈물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여름 소나기처럼

인생에도 소나기가 있고

태풍이 불고 해일이 일 듯

삶에도 그런 날이 있겠지만

인생이 짧든 길든

하늘은 다시 푸르고

구름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데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여,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물소리에서

흘러간 세월이 느껴지고

바람소리에서

삶의 고뇌가 묻어나는

중년의 가슴에 8월이 오면

녹음처럼 그 깊어감이 아름답노라

​9. 바다  /  윤동주


실어다 뿌리는

바람조차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촘히

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海邊)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설워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10. 소낙비   /  윤동주

번개, 뇌성, 왁자지끈 뚜드려

머언 도회지(都會地)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 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庭園)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湖水) 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 한마음을 모셔 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1. ​해바라기   /  윤곤강

벗아! 어서 나와

해바라기 앞에 서라.

해바라기 꽃 앞에 서서

해바라기 꽃과 해를 견주어 보라.

끓는 해는 못 되어도,

가슴엔 해의 넋을 지녀

해바라기의 꿈은 붉게 탄다.

햇살이 불처럼 뜨거워,

불볕에 눈이 흐리어,

보이지 않아도, 우리 굳이

해바라기 앞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해를 보고 살지니,

벗아! 어서 나와

해바라기 꽃 앞에 서라.

​12. 목백일홍  / 김종길

나무로 치면 고목이 되어버린 나도
이 8월의 폭염 아래 그처럼
열렬히 꽃을 피우고 불붙을 수는 없을까


13.  8월 담쟁이  / 김종길

동그랗게 꿈을 말아 안으로 접을래
빠알간 흙벽 속으로 자꾸 말아 넣을래
다져서 쌓은 꿈들이 사방으로 터져도 


14. 8月 소나기  /  김명배

더럭더럭 운다,
8月 소나기.

늙은 부처가 낮잠을 깬다.

숲속 어디에
빤짝이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다. 


15. 8월의 시  / 오세영·

8월은
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
달이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가는 파도가 오는 파도를 만나듯
인생이란 가는 것이 또한
오는 것
풀섶에 산나리, 초롱꽃이 한창인데
세상은 온통 초록으로 법석이는데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16. 8월  /  목필균·

누구의 입김이 저리 뜨거울까

불면의 열대야를
아파트촌 암내난 고양이가
한 자락씩 끊어내며 울고

만삭의 몸을 푸는 달빛에
베란다 겹동백 무성한 잎새가
가지마다 꽃눈을 품는다

17.  8월의 나무에게   /  최영희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18.  8월  /  안재동

너만큼 기나긴 시간 뜨거운 존재 없느니.
뉜들 그 뜨거움 함부로 삭힐 수 있으리.
사랑은 뜨거워야 좋다는데
뜨거워서 오히려 미움받는 천더기.

너로 인해 사람들 몸부림치고 도망 다니고
하루빨리 사라지라 짜증이지.
그래도 야속타 않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삼라森羅 생물체들 품속에 다정히 끌어안고
익힐 건 제대로 익혀내고
삭힐 건 철저히 삭혀내는 전능의 손길.

언젠가는 홀연히 가고 없을 너를 느끼며
내 깊은 곳 깃든, 갖은 찌끼조차
네 속에서 흔적 없이 삭혀버리고 싶다.
때 되면 깊고 긴 어둠 속으로 스스로 사라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

19.  8월의 소망   /  오광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반가운 8월엔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운 얼굴이 되고
만나면 시원한 대화에 흠뻑 젖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으랴?

푸름이 하늘까지 차고 넘치는 8월에
호젓이 붉은 나무 백일홍 밑에 누우면
바람이 와서 나를 간지럽게 하는가
아님 꽃잎으로 다가온 여인의 향기인가
붉은 입술의 키스는 얼마나 달콤하랴?

8월엔 꿈이어도 좋다.
아리온의 하프소리를 듣고 찾아온 돌고래같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를 듣고
보고픈 그 님이 백조를 타고
먼먼 밤하늘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면,

20.  8월   /  반기룡

오동나무에 매달린
말매미 고성방가하며
대낮을 뜨겁게 달구고

방아깨비 풀숲에서
온종일 방아 찧으며
곤충채집 나온 눈길 피하느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푸르렀던 오동잎
엽록체의 반란으로
자분자분 색깔을 달리하고

무더위는 가을로 배턴 넘겨줄
예행연습에 한시름 놓지 못하고

태극기는 광복의 기쁨 영접하느라
더욱 펄럭이고 있는데

21.  8월 한낮   /  홍석하

밭두렁에 호박잎
축 늘어져 있는데

사철 맨발인 아내가
발바닥 움츠려 가며
김장밭을 맨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애가 타서 울어대는
청개구리

강물에 담긴 산에서
시원스럽게 우는
참매미

구경하던
파아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강물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22. 8월의 기도  /  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고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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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시모음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흠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7월의 시 /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랗게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면서

설레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송이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되십시요

 

7월을 맞으며 / 황금찬

 

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

바다의 꿈이

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

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

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

문득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

나비를 쫓아간다.

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장마 / 김명관

 

7월은

슬픈 하늘을 품고 산다

너를 사랑하고 부터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마음

사랑할수록 커져가는 목마름은

그렁그렁 눈물로 맺히고

눈물방울 떨어진 자리마다

낯선 인연 풀처럼 돋아도

너는 아직도 그 자리

    

7/ 정연복

 

시작이 반이라는 말

딱 맞는다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7

 

눈 깜짝할 새

두툼하던 달력이 얄팍해졌다.

 

하지만 덧없는 세월이라

슬퍼하지 말자

 

잎새들 더욱 푸르고

꽃들 지천에 널린 아름다운 세상

 

두 눈 활짝 뜨고

힘차게 걸어가야 한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몸 드러내는 정직한 시간

 

마음의 빗장 스르르 풀리고

사랑하기에도 참 좋은

 

7월이 지금

우리 앞에 있으니.

 

7/ 오세영


바다는 무녀

휘말리는 치마폭

바다는 광녀

산발한 머리칼

바다는 처녀

푸르른 이마

바다는 희녀

꿈꾸는 눈

7월이 오면 바다로 가고 싶어라

바다에 가서

미친 여인의 설레는 가슴에

안기고 싶어라

바다는 짐승

눈에 비친 푸른 그림자

 

7월의 바다/ 박우복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밀려드는 너와

흔적 없는 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너의 외침이 가슴을 때릴 때

나를 묶고 있던 온갖 기억들은

하얀 포말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슬퍼하지 말자

기뻐하지 말자

밀려드는 파도도 거부하지 말자

7월의 바다는

나의 마음을 먼저 알고

아픈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단 둘이만 있을지라도 !

 

7/ 홍일표

 

은행나무가 세상의 빛을 다 모아

초록의 알 속에 부지런히 쟁여넣고 있네

이파리 사이로 슬몃슬몃 보이는

애기 부처의 동그란 이마 같은

, 말씀들

무심히 지나치면 잘 보이지도 않는

한결같이 동글동글

유성음으로 흐르는

푸른 음성들

그 사이로 푸득푸득 파랑새 날고,

긴 개울이 물비늘 반짝이며 흐르는

나무 아래, 물가를 떠난 숨가쁜 돌멩이

말씀에 오래 눈 맞추어

온몸이 파랗게 젖네

그렇게 길 위의 돌멩이 떠듬떠듬 꽃피기 시작하네

 

7/ 윤성기

 

내 귀는 이른 새벽에 갓 피어난

해맑은 장미

강물 흐르는 7월의 가락에

소리 내서 날개 치며

아침이 열려오네

가지마다 잎새 우쭐대는 나무와

가는 목 뽑아 들고 폭우 속에서

잠이든 꽃꽃의 노래여,,

 

수채화 / 손월향

 

햇살 한 움큼

도화지에 쏟아 놓고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마음을 색칠하면

도화지에 퍼져 가는

지난여름

 

7월의 풀숲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숨었던 얘기들도

풀숲에서 일어나

 

7월의 초록빛 나무로

쑥쑥 자란다

 

7월의 정경 /운 가레띠


그대 여기에 몸을 던질 때

슬픈 장미 빛으로

아름다운 나뭇잎이 된다.

급류를 녹여 강을 마시며

암초를 깨뜨려 빛을 발한다.

격노에 고집하며 굴하지 않고

공간을 흐트려 조준을 가린다.

여름이다. 기나긴 세월을 따라

석화석처럼 굳어진 그 눈으로

지구의 골격을 할퀴며

나아간다.

  

7/ 이외수


그대는

오늘도 부재중인가

정오의 햇빛 속에서

공허한 전화벨 소리처럼

매미들이 울고 있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원고지 속으로

망명한다

텅 빈 백색의 거리

모든 문들이

닫혀 있다

 

인생이 깊어지면

어쩔 수 없이

그리움도 깊어진다

 

나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방마다 입주시키고

빈혈을 앓으며 쓰러진다

끊임없이 목이 마르다


7월에는 친구를 / 윤보영

 

7월에는

내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낸 친구를 찾겠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았던 친구!

 

설령 친구가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친구를 찾게 되면

내가 먼저 전화를 하겠습니다.

 

없는 번호라고 안내되어도

한 번 더 전화해 보겠습니다.

 

결번이라는 신호음을 들으면서

묻어 둔 기억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7월에 찾고 싶은 친구는

언젠가 만나야 할 그리움입니다

내 사랑입니다

    

7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 이채

 

묵묵히 견뎌내는

당신의 땀방울을 사랑합니다

구리빛 얼굴에 짠 내음의 소금기가

당신의 울타리안에서

기쁨의 샘터가 되고

가지마다 가득찬 보람의 열매들이

하나 둘씩 영글어가는 소리

싱싱하도록 젊은 7월의 숲에서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7월의 태양처럼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일과 사랑, 그리고 당신이 소망하는 것들

미래의 동산에 꿈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람의 밭에는

포기나 절망은 하루도 살 수 없는 땅일 겁니다

 

보리수 그늘 아래에 서서

내 마음의 작은 하늘을 열어놓고

석가가 다녀감직한 명상의 집을 짓습니다

행복은 하늘이 아니고

하늘 아래에 사는 연한 잎들의 흔들림 같은 것

그 잎 사이로 노래하는 산새들의 지저귐 같은 것

 

은 구슬빛 햇살에 아침부터 살갗이 덥습니다

지붕 위에 호박 덩쿨이 성큼 커버렸군요

당신의 땀방울 수만큼

빨갛게 익어가는 보리수 열매들, 그리고 또

호젓한 물가, 아버지를 닮은 한 그루의 나무를 떠올리며

꿋꿋히 살아가는 7월의 당신에게 푸른 편지를 띄웁니다

    

7/ 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 선 반환점에

무리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7/ 안재동

 

넓은 들판에

태양열보다 더 세차고 뜨거운

농부들의 숨결이 끓는다

 

농부들의 땀을 먹는 곡식

알알이 야물게 자라

가을걷이 때면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며

세상의 배를 채울 것이다

그런 기쁨 잉태되는 칠월

 

우리네 가슴속 응어리진

미움, 슬픔, 갈등 같은 것일랑

느티나무 가지에

빨래처럼 몽땅 내걸고

얄밉도록 화사하고 싱싱한

배롱나무 꽃향기 연정을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7월시 / 김진열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 선 반환점에

무리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7/ 유봉길

 

직장 잃고 집에서 빈둥대는

스물아홉살 옆집 아가씨

지어미 잔소리에

죄 없는 여름햇빛 나무라며

뽀얀 종아리 휘저으며

동네 슈퍼에 들러

오백원 짜리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싸구려 여름을

가슴 깊이 엎지르는

두터운 브래지어 같은

7.

 

7 / 반기룡


푸른색 산하를 물들이고

녹음이 폭격기처럼 뚝뚝 떨어진다

 

길가 개똥참외 쫑긋 귀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토란 잎사귀에 있던 물방울

또르르르 몸을 굴리더니

타원형으로 자유낙하한다

 

텃밭 이랑마다

속알 탱탱해지는 연습을 하고

나뭇가지 끝에는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오동통한 햇살로 푸르름을 노래한다

 

옥수숫대는 제철을 만난 듯

긴 수염 늘어뜨린 채

방방곡곡 알통을 자랑하고

계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문지방은

말매미 울음소리 들을 채비에 분주하다

 

수채화 / 손월향

 

햇살 한 움큼

도화지에 쏟아 놓고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마음을 색칠하면

도화지에 퍼져 가는

지난여름

 

7월의 풀숲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숨었던 얘기들도

풀숲에서 일어나

 

7월의 초록빛 나무로

쑥쑥 자란다


7월의 바다 / 황금찬

 

아침 바다엔

밤새 물새가 그려 놓고 간

발자국이 바다 이슬에 젖어 있다.

 

나는 그 발자국 소리를 밟으며

싸늘한 소라껍질을 주워

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

바다의 꿈이

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

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

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

문득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

나비를 쫓아간다.

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7월이 오면 / 손광세

 

그리 크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쯤

허름한 완행버스 대합실을

찾아가고 싶다.

 

죽이 다 된 캐러멜이랑

다리 모자라는 오징어랑

구레나룻 가게 주인의

남도 사투리를 만날 수 있겠지.

 

함지에 담긴 옥수수 몇 자루랑

자불자불 조는 할머니

눈부신 낮꿈을 만날 수 있겠지.

 

포플린 교복 다림질해 입고

고향 가는 차 시간을 묻는

흑백사진 속의 여학생

잔잔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려승의 밀짚모자에

살짝 앉아 쉬는

밀잠자리도 만날 수 있겠지.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체인을 죄고 기름칠을 하는

자전거방 점원의

건강한 웃음이랑

 

오토바이 세워 놓고

백미러 들여다보며 여드름 짜는

교통 경찰관의

초록빛 선글라스를 만날지도 몰라.

 

7월이 오면

시멘트 뚫고 나온 왕바랭이랑

쏟아지는 땡볕 아래

서 있고 싶다.

 

7월의 천사 / 장수남

 

칠월의 장마비가

쉬어가는 듯 잠시 목을 축이고

늦은 새벽

정형외과 632호 병실

창가 커튼 사이로 기웃거리며

엷은 아침햇살이 한 가닥 길게

내려앉는다

 

어제 떠난 두 사람

주인 보낸 침대 위엔 아픔의 상처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빈자리만

지키고 있다

나는 언제쯤 퇴원할까

마음만은 가볍지가 않다

만나야 할 사람 설렘 반 기다림 반

그리움이 넘칠 때

병실 출입문이 살짝 열리더니

가을 낙엽 위에 이슬 구르는 작은 목소리

혈압시간이에요

백의천사 환한 미소가

아침햇살 가득히 병실 안을 꽉

채워준다.

 

칠월 / 이오덕


앵두나무 밑에 모이던 아이들이

살구나무 그늘로 옮겨 가면

누우렇던 보리들이 다 거둬지고

모내기도 끝나 다시 젊어지는 산과 들

진초록 땅 위에 태양은 타오르고

물씬물씬 숨을 쉬며 푸나무는 자란다

뻐꾸기야, 네 소리에도 싫증이 났다

수다스런 꾀꼬리야 , 너도 멀리 가거라

봇도랑 물소리 따라 우리들 김매기 노래

구슬프게 또 우렁차게 울려라

길 솟는 담배 밭 옥수수 밭에 땀을 뿌려라

, 칠월은 버드나무 그늘에서 찐 감자를 먹는,

복숭아를 따며 하늘을 쳐다보는

칠월은 다시 목이 타는 가뭄과 싸우고

지루한 장마를 견디고 태풍과 홍수를 이겨 내어야 하는

칠월은 우리들 땀과 노래 속에 흘러가라

칠월은 싱싱한 열매와 푸르름 속에 살아가라


7월을 드립니다 / 오광수


당신 가슴에

빨간 장미가 만발한

7월을 드립니다.

 

7월엔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자꾸 듭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서

예쁘고 고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히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7월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당신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7월을 가득 드립니다.


칠월에 거두는 시 / 김영은


유월의 달력을 찢고

칠월의 숫자들 속으로

바다 내음 풍기는 추억의

아름다움을 주우러 가자

지나간 세월의

아픔일랑은 흐르는

강물 속에 던져 버리고

젊음을 주우러 가자

유월의 지루함 일랑은

시간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고

칠월의 숫자들 속으로

태양을 주우러 가자

팔월을 기다리는

시간일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같은 정열은 열정의

열린 가슴에 담아두고

우리 칠월의 구르는

숫자 속으로 타오르는

사랑을 주우러가자

단풍잎 물드는 구월엔

칠월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낙엽 지는 시월엔 또다시

사랑을 주우러가자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 / 박철


사랑은 큰일이 아닐겁니다

사랑은 작은 일입니다

7월의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바람을 불어주는 일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잠을 깬 이에게

맑은 물 한 잔 건네는 일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손등을 한 번 만져보는 일

여름이 되어도 우리는

지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작은 일에 가슴 조여 기뻐했듯이

작은 사랑을 나눕니다

큰 사랑은 모릅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라는

지구에서 큰 사랑은

필요치 않습니다

 

해 지는 저녁 들판을 걸으며

어깨에 어깨를 걸어보면

그게 저 바다에 흘러넘치는

수평선이 됩니다

7월의 이 여름날

우리들의 사랑은

그렇게 작고, 끝없는

잊혀지지 않는 힘입니다


7/ 유봉길

 

직장 잃고 집에서 빈둥대는

스물아홉살 옆집 아가씨

지어미 잔소리에

죄 없는 여름햇빛 나무라며

뽀얀 종아리 휘저으며

동네 슈퍼에 들러

오백원 짜리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싸구려 여름을

가슴 깊이 엎지르는

두터운 브래지어 같은

7


7월에게 / 고은영

 

계절의 속살거리는 신비로움

그것들은 거리에서 들판에서

혹은 바다에서 시골에서 도심에서

세상의 모든 사랑들을 깨우고 있다

어느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소명 앞에

그 미세한 숨결 앞에 눈물로 떨리는 영혼

 

바람, 공기, 그리고 사랑, 사랑

무형의 얼굴로 현존하는 그것들은

때때로 묵시적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안녕, 잘 있었니?"

    

7월의 편지 / 박두진


7월의 태양에서는 사자 새끼 냄새가 난다

7월의 태양에서는 장미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을 달리며

심장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7월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의

조국의 포옹

7월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칠월 / 조민희

 

햇살 짜글거려

화드득 타는 배롱나무

타는 매미 울음

타들어가는 밭고랑에

어머니

타는 속내가

녹음보다

더 짙다

    

7/ 권경엽


닮으라며, 하늘

되게 몰아치는 된바람

숲은, 숲은

아랫입술 잘근 깨물고

휘청이며 뒤척이며

새파래져 간다

   

7/ 김명배

 

자식을 앞세우고 남은

7

에밀레 에밀레 하얀 울음.

 

나는

너무 쉽게 울지만

너는 그렇게 울지 마라.

 

어디선가

부처로 태어날

돌 하나가

시방 막 작은

맥박을 시작한다.


7월의 고백 / 김경주


여린 태를 벗은 초목들의 뿌리는 힘차게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에 반짝이는 잎들은 왕성한 화학작용을 하며

대기는 신선한 공기들로 가득 찹니다.

그 나무의 꽃과 열매와 잎을 먹으며

애벌레와 곤충과 새들이 자라고 번성할 때

대지는 소란하고 풍성해집니다.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풀 한 포기에서 우주 끝까지

탄생부터 그 소멸에 이르기까지

계획되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 앉아

주님 계획대로 아름답게, 완벽하게 지어진

나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속삭입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이루는 너를 사랑합니다.

그 안에 온통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중년의 가슴에 7월이 오면 / 이채

 

탓하지 마라

바람이 있기에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열매가 있거늘

떨어진 꽃잎 주워들고 울지 마라

 

저 숲, 저 푸른 숲에 고요히 앉은

한 마리 새야, 부디 울지 마라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닌 것을......

산다는 건 그 어떤 이유도 없음이야

 

세상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부와 명예일지 몰라도

세월이 내게 물려준 유산은

정직과 감사였다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지

 

세상엔 그 어떤 것도 무한하지 않아

아득한 구름 속으로

아득히 흘러간 내 젊은 한때도

그저 통속하는 세월의 한 장면일 뿐이지

 

그대,

초월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7,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 김종해

 

흙은 원고지가 아니다.

한자 한자 촘촘히 심은 내 텃밭의 열무씨와 알타무씨들

원고지의 언어들은 자라지 않지만

내 텃밭의 열무와 알타리무는 이레 만에 싹을 낸다

 

간밤의 원고지 위에 쌓인 건방진 고뇌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텃밭에서 호미를 쥐어보면 안다

땀을 흘려보면 안다 물기 있는 흙은 정직하다

 

그 얼굴 하나 하나마다 햇살을 담고 사랑을 튀운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내 텃밭에 와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낸다

칠월, 아침밥상에 열무김치가 올랐다

텃밭에서 내가 가꾼 나의 언어들

하늘이여, 땅이여, 정말 고맙다


7월의 시 / 김태은


산이나 들이나 모두

초록빛 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임의 얼굴 환시를 보는 것도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적하고 쓸쓸한 노을 지는 창가에서

눈물을 견디고 슬픔을 견디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눅눅한 그림자까지

초록빛으로 스며드는 7월의 녹음

나무는 나무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모여사는데

홀로 있어 외롭지 않음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을 찾아

애절히 불타는 이 가슴을 식혀볼까,

 

6월도 저물어 한 해의 반 나절이 잦아드는데

노을빛 가슴을 숨기고

애연히 그리움으로 흐르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백일홍 / 원종구


누가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정한이 사무치면

저 또한 아닌 것을

님 향한 그리움인가

타향살이 설움인가

칠월 무더위에

백 날을 지고 피고

풍년을 바라오면

이팝꽃을 피울 것을

흉중에 서린 한

붉게도 피고 지고

무슨 사연

저리도 서러워

7월 무서리에

감은 눈 다시 뜨는

 

개망초 / 박준영


6, 7월 망초꽃

지천으로 피어있다

그냥

잡풀이었지

내 눈에 들기 전에

이름도 몰랐으니

복판은 한사코 마다하고

길섶에만 피어 있어

눈부시지도 않고

향기롭지도 않고

무엇 하나 내노라 할 게 없이

그냥 서 있는 거다

희멀겋게 뽑아 올린 줄기에

너더댓 가지 뻗고

다시 잔가지 서너 개 나뉘더니

가지마다 대여섯 작은 흰 꽃 피운다

외로운 건 참을 수 없어

무리로 무리로

종소리 듣고 타고 내린 달빛처럼

허옇게 또 허옇게

내려앉고 내려앉아

잡초마냥 민초마냥

이 강산 여기저기

이렇게도 뒤덮는다

이제

그 이름 물어물어

개망초로 알았지만

마음에 있어야 보인다고

50평생 살아 처음 보는 꽃의

눈부시지 않은 그 찬란이

알아주지 않는 그 영광이

날 이다지도 뒤흔들어 놓는다

6, 7월 개망초꽃

지천으로 피어 있다.

    

7/ 홍윤숙


보리 이삭 누렇게 탄 밭둑을

콩밭에 김매고 돌아오는 저녁

청포묵 쑤는 함실 아궁이에선

청솔가지 튀는 소리 청청했다

 

후득후득 수수알 흩뿌리듯

지나가는 저녁비, 서둘러

호박잎 따서 머리에 쓰고

뜀박질로 달려가던 텃밭의 빗방울은

베적삼 등골까지 서늘했다

 

뒷산 마가목나무숲은 제철 만나

푸르게 무성한데

울타리 상사초 지친 잎들은

누렇게 병들어 시들었고

상추밭은 하마 쇠어서 장다리가 섰다

 

아래 윗방 낮은 보꾹에

파아란 모기장이

고깃배 그물처럼 내걸릴 무렵

여름은 성큼 등성을 넘었다


칠월 / 이수인

 

장맛비 그친 하늘 위에

구름꽃 둥둥 피어나고

풀벌레 소리높여 노래하는

 

할머니 모시저고리보다

햇빛이 더 짱짱한 칠월

 

피자두 적포도 청포도 복숭아

한입 물면 새콤달콤한 달

바람이 인색하게 불어도

넉넉하게 살찌우고 가는 칠월

 

한 해의 반은 감사로 보내오니

남아 있는 소망도 접지 않게 하소서

멀리서 오고 있는 가을을 위해

나지막이 기도하게 하소서

 

칠월 / 나호열

 

눈 오는데 목욕하고 팥죽이나 먹으러 갈까

청포도 같은 싱그러움으로 익어 가야 할, 물들어 가야 할

입 안에 붉은 앵두 몇 알 터질 듯

오물거리는 그 말

 

사분음표로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그 말

 

마악 알에서 깨어난 휘파람새가

처음 배운 그 말

 

하늘을 푸른 술렁거림으로 물들이는 그 말

     

7월은 행복한 선물입니다 / 윤보영

 

7월입니다

1년의 반을 보내고

다시 반이 시작되는 7월입니다

7월도 의미 있게 보내겠습니다

 

지금까지

행복한 1년을 준비했다면

앞으로는

행복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나누면서 보태겠습니다

 

7월에는

친구를 만나고

주위를 돌아보며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습니다

부지런한 나를 위해

박수를 치겠습니다

 

하지만 7월도

사랑이 먼저입니다

7월 내내 웃으며 보낼 수 있게

내가 나에게 사랑을 선물하겠습니다

 

건강한 7!

웃음 가득한 7월로 만들어

마중 나온 8월을 만나겠습니다

사랑한다고 내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7월의 노래 / 엄기원

 

여름은 화안한 웃음인가 봐?

여름은 새파란 마음인가 봐?

풀도 나무도 웃음이 가득

온통 세상이 파란 빛이야

 

숲에서 들린다, 여름의 노래

들판에 보인다 여름의 빛깔

시원한 바람은 어디서 올까?

정말 7월은 요술쟁이야

    

7월의 고백 / 김경주


여린 태를 벗은 초목들의 뿌리는 힘차게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에 반짝이는 잎들은 왕성한 화학작용을 하며

대기는 신선한 공기들로 가득 찹니다.

그 나무의 꽃과 열매와 잎을 먹으며

애벌레와 곤충과 새들이 자라고 번성할 때

대지는 소란하고 풍성해집니다.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풀 한 포기에서 우주 끝까지

탄생부터 그 소멸에 이르기까지

계획되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 앉아

주님 계획대로 아름답게, 완벽하게 지어진

나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속삭입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이루는 너를 사랑합니다.

그 안에 온통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714일 밤 / 유금


큰비 뒤에 밝은 달 보니

오래 못 만난 벗을 만난 듯

쓸쓸히 사방의 하늘을 보니

 

달빛이 환하게 허공을 비추네

벌레는 곳곳에서 찍찍찍 울고

담 모롱이에는 서늘함이 가득하여라

 

방을 내고 뜨락에 못을 만들어

물 채우니 올챙이 생겨났어라

이슬 젖은 꽃에 거미줄 있어

 

큰 거미가 노인처럼 잠을 자누나

맑은 날씨 다시 돌아오니까

아내가 참외를 보냈군 그래

  

7월의 시 / 김태은

 

산이나 들이나

모두 초록빛 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임의 얼굴 환시를 보는 것도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적하고 쓸쓸한 노을 지는 창가에서

눈물을 견디고 슬픔을 견디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눅눅한 그림자까지

초록빛으로 스며드는 7월의 녹음

나무는 나무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모여사는데

홀로 있어 외롭지 않음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7/ 김지헌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

옆집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랑을 하고 있나봐

 

숨가쁜 호흡이 들려

 

잔뜩 귀 기울이다

더 가까이 가 보았더니

시치미 뚝 떼고

잔기침 소리만 내고 있잖아

 

짓궂은 생각이 들어

툭툭 건드렸더니

하늘 한쪽 기울여

가장 깨끗한 햇살 파편들을

눈 못 뜨게 쏟아 붓잖아.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이 오면 / 오정방


훨훨 날아가는 갈매기

옛친구같이 찾아올

7월이 오면

이육사를 만나는 것으로

첫날을 열어보리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7월이 오면

청포도를 맛보는 것으로

첫날을 시작하리

  

능수화는 피어나는데 / 신영자


능수화 꽃피움을 기다린 당신인데

꽃 향기 가슴져려 타는 꽃잎 눈물이네.

그윽한 주홍빛 향기는 애절한 눈길인가.

님 떠난 빈자리에 철없이 피운 꽃잎

한나절 여린가슴 서러움이 맴을 노네

창가에 시름없는 바람은 목소리의 울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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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시모음

 

1. 6월의 숲에는 / 이해인

 

초록의 희망을 이고

숲으로 들어가면

뻐꾹새

새 모습은 아니 보이고

노래 먼저 들려오네

아카시아꽃

꽃 모습은 아니 보이고

향기 먼저 날아오네

나의 사랑도 그렇게

모습은 아니 보이고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네

눈부신 초록의

노래처럼

향기처럼

나도

새로이 태어나네

6월의 숲에 서면

더 멀리 나를 보내기 위해

더 가까이 나를 부르는 당신

 

2. 6/ 이창호

 

​​지난 달력 한 장을 찢어 손바닥에 접어 올리니

손바닥 위에서 지난 5월이 너무나 작고 가벼워집니다

유리창에 물방울처럼 톡톡 웃음을 퉁기는 아침

알맞게 물이 오른 6월의 현관문이 열리자

펼쳐둔 종이의 여백을 열고 여름 나무들이 들어가 앉습니다.

한 잎 두 잎 그리움의 잎사귀가 늘어갈수록

종이 위에서 사연들이 더욱 푸르르 갑니다

당신, 지난 5월에는 달력 한 장의 무게만큼

편히 지내셨는지요? 여기 6월의 첫날 아침을

그려보냅니다

색다른 배경으로 깊어지는 창 밖 세상이

숲 속처럼 맑아지는 거리에서는 온갖 사물들이

밝은 조명을 단 아침 하늘 아래 주렁주렁

저마다의 녹음을 매달고 걸어다닙니다.

 

3. 6월의 달력 / 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4. 6/ 김용택

 

하루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에 바람이 불고

하루 해가 갑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

있곤 합니다

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

하루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해가 갑니다.

 

5. 6/ 이외수

 

​​바람부는 날 은백양나무 숲으로 가면

청명한 날에도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귀를 막아도 들립니다

저무는 서쪽 하늘

걸음마다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知天命)

내 인생은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보행에 불편을 드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래 전부터

그대에게 엽서를 씁니다

그러나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습니다

서랍을 열어도

온 천지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한평생 그리움은 불치병입니다

 

6. 6월의 시 /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7. 6월의 녹음 / 진의하

 

6월의 녹음은

고공을 꿈꾸는

새였다.

한사코 파닥이는 날개 짓

제 어둠의 그림자를

새까맣게 털어놓고 있었다.

우우

하늘을 우러러

어제보다 한 치씩

웃자란 목을 빼고

싱그러운 물빛 번쩍이며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다.

 

8. 6/ 황금찬

 

6월은

녹색 분말을 뿌리며

하늘 날개를 타고 왔느니.

맑은 아침

뜰 앞에 날아와 앉은

산새 한 마리

낭랑한 목청이

신록에 젖었다.

허공으로

날개 치듯 뿜어 올리는 분수

풀잎에 맺힌 물방울에서도

6월의 하늘을 본다.

신록은

꽃보다 아름다워라.

마음에 하늘을 담고

푸름의 파도를 걷는다.

창을 열면

6월은 액자 속의 그림이 되어

벽 저만한 위치에

바람 없이 걸려 있다.

지금 이 하늘에

6월에 가져온

한 폭의 풍경화를

나는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9. 6월의 꿈 / 임영준

 

깨물어볼까

퐁당

빠져버릴까

초록 주단

넘실대고

싱그러운 추억

깔깔거리는데

훨훨

날아보아도 될까

 

10. 6월의 장미 / 이해인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11. 유월이 오면 / 도종환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저녁 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12. 유월의 언덕 /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13. 유월 / 이바라기 노리코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을은 없는가

하루의 일과 끝에는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우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조끼를 기울이는

어딘가에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단 가로수가

어디까지나 잇달았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녘은

젊은이들의 다정한 속삼임이 충만한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들의

힘은 없는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숙함과 우스꽝스러움과 노여움이

날카로운 힘이 되어 솟아오르는.

 

14. 6/ 오세영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15. 금낭화 / 안도현

 

6,

어머니는 장독대 옆에 틀니 빼놓고

시집을 가고 싶은가 보다

장독 항아리 표면에 돋은 주근깨처럼

자잘한 미련도 없이

어머니는 차랑차랑 흔들리는 고름으로

신방에 들고 싶은가 보다

 

16. 6월의 童謠 /고재종

 

6월은 모내는 달, 모를 다 내면

개구리 떼가 대지를 장악해버려

함부로는 들 건너지 못한다네

 

정글도록 땀방울 떨구어서는

청천하늘에 별톨밭 일군 사람만

그 빛살로 길 밝혀 건넌다네

 

심어논 어린 모들의 박수 받으며

치자꽃의 향그런 갈채 받으며

사람 귀한 마을로 돌아간다네

 

17. 6/ 이정화

 

사방이 풋비린내로 젖어 있다

가까운 어느 산자락에선가 꿩이 울어

반짝 깨어지는

거울, 한낮

초록 덩굴 뒤덮인 돌각담 모퉁이로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독배암

등줄기의 무지개

너의 빳빳한 고독과

독조차

마냥 고웁다

이 대명천지 햇볕 아래서는

 

18. 6월에 쓰는 편지 / 허후남

 

내 아이의 손바닥만큼 자란

6월의 진초록 감나무 잎사귀에

잎맥처럼 세세한 사연들 낱낱이 적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쓸쓸한 이 그리움은

일찍이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잘도 피어나던 분꽃

그 까만 씨앗처럼 박힌

그대의 주소 때문입니다

 

짧은 여름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초저녁별의

이야기와

갈참나무 숲에서 떠도는 바람의 잔기침과

지루한 한낮의 들꽃 이야기들일랑

부디 새벽의 이슬처럼 읽어 주십시오

 

절반의 계절을 담아

밑도 끝도 없는 사연 보내느니

아직도 그대

변함없이 그곳에 계시는지요

 

19. 유월의 햇살 / 신석종·

 

지금, 밖을 보고 있나요?

햇살이 투명하고 눈부십니다

누군가 내게 준 행복입니다

 

지옥의 문을 들어서는 공간에

당신과, 하늘에는 햇살이 닿아 있고

땅으로는 지열이 닿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손 잡고, 길을 걷지는 못하겠지만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존재랍니다

 

삼월에 새싹 돋고

유월에 곧은 햇살 쪽쪽 내리꽂히는

이 세상은, 그래서 나에게는

화사하고 눈부신 낙원입니다

 

당신이 오로지 내게만, 문 열어 준

그 낙원에서, 나 살고 있습니다

 

20. 6월 기집애 / 나태주

 

너는 지금쯤 어느 골목

어느 낯선 지붕 밑에 서서 울고 있느냐

세상은 또다시 6월이 와서

감꽃이 피고 쥐똥나무 흰꽃이 일어

벌을 꼬이는데

      

감나무 새 잎새에 6월 비단햇빛이 흐르고

길섶의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는데

      

너는 지금쯤 어느 하늘

어느 강물을 혼자 건너가며 울고 있느냐

내가 조금만 더 잘해주었던들

너는 그리 쉬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 더 나누어주었던들

너는 내 곁에서 더 오래 숨쉬고 있었을 텐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떠나간 아이야

울면서 울면서 쑥굴헝의 고개 고개를

넘어만 가고 있는 쬐꼬만 이 6월 기집애야

돌아오려무나 돌아오려무나

       

감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쥐똥나무 흰꽃이 다 지기 전에

돌아오려무나

 

돌아와 양달개비 파란 혼불꽃 옆에서

우리도 양달개비 파란 꽃 되어

두 손을 마주 잡자꾸나

다시는 나뉘어지지 말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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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시 모음

 

오월이 돌아오면 ㅡ신석정ㅡ

 

오월이 돌아오면

내게서는 제법 식물 내음새가 난다

그대로 흙에다 내버리면

푸른 싹이 사지에서 금시 돋을 법도 하구나

오월이 돌아오면

제발 식물성으로 변질을 하여라

아무리 그늘이 음산하여도

모가지서부터 푸른 싹은 밝은 방향으로 햇볕을 찾으리라

오월이 돌아오면

혈맥은 그대로 푸른 엽맥(葉脈)이 되어라

심장에는 흥건한 엽록소(葉綠素)를 지니고

하늘을 우러러 한 그루 푸른 나무로 하고 살자

 

오월의 신록 ㅡ천상병ㅡ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5월 ㅡ 김태인 ㅡ

 

, 귀여운 햇살 보세요

애교떠는 강아지처럼

나뭇잎 핥고있네요

, 엉뚱한 햇살 보세요

신명난 개구쟁이처럼

강물에서 미끄럼 타고있네요

, 능청스런 햇살 보세요

토닥이며 잠재우는 엄마처럼

아이에게 자장가 불러주네요

, 사랑스런 햇살 보세요

속살거리는 내 친구처럼

내 가슴에 불지르네요

 

5월이 오거든 ㅡ 홍해리 ㅡ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5월 ㅡ 김상현 ㅡ

 

나와 봐

어서 나와 봐

찔레꽃에 볼 부벼대는 햇살 좀 봐

햇볕 속에는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려고

멧새들도 부리를 씻어

들어 봐

청보리밭에서 노는 어린 바람 소리

한번 들어 봐

우리를 부르는 것만 같애

자꾸만 부르는 것만 같애

 

5월의 초대 ㅡ 임영준 ㅡ

 

입석밖에 없지만

자리를 드릴게요

지나가던 분홍바람에

치마가 벌어지고

방싯거리는 햇살에

볼 붉힌답니다

성찬까지 차려졌으니

사양 말고 오셔서

실컷 즐기시지요

 

5월의 그대여 / 임영준

 

그대여

눈부신 햇살이 저 들판에

우르르 쏟아지고

계곡마다 초록선율 넘쳐흐르는데

아직도 그리움에 목말라

웅크리고만 있는가

때는 바야흐로

소박한 아카시아도 불붙는 날들인데

가시를 두른 장미도 별이 되는 날들인데

어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건가

 

5월 ㅡ 최금녀 ㅡ

 

여기 저기

언덕 기슭

흰 찔레꽃

 

거울 같은 무논에

드리운

산 그림자

 

산빛

들빛 속에

가라앉고 싶은

5.

 

五月 ㅡ 김동리 ㅡ

 

5월의 나무들 날 보고

멀리서부터 우쭐대며 다가온다

 

언덕 위 키 큰 소나무 몇 그루

흰구름 한두 오락씩 목에 걸은 채

신나게 신나게 달려온다

 

학들은 하늘 높이 구름 위를 날고

햇살은 강물 위에 금가루를 뿌리고

 

땅 위에 가득 찬 5월은 내 것

부귀도 仙鄕도 부럽지 않으이.

 

5월의 노래 ㅡ 황금찬 ㅡ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 숲내를 풍기며

5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 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5월은 4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려 있던 난초가

꽃피는 달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5월이다.

 

감나무 있는 동네 ㅡ 이오덕 ㅡ

 

어머니,

오월이 왔어요

집마다 감나무 서 있는

고향 같은 동네에서

살아갑시다

 

연둣빛 잎사귀

눈부신 뜰마다

햇빛이 샘물처럼

고여 넘치면

 

철쭉꽃 지는 언덕

진종일 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마을 한쪽 조그만 초가

먼 하늘 바라뵈는 우리 집

뜰에 앉아

 

어디서 풍겨 오는

찔레꽃 향기 마시며

어머니는 나물을 다듬고

나는 앞밭에서 김을 매다가

돌아와 흰 염소의 젖을

짜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짙푸른 그늘에서 땀을 닦고

싱싱한 열매를 쳐다보며 살아갈

세월이 우리를 기다리고,

 

가지마다 주홍빛으로 물든 감들이

들려줄 먼 날의 이야기와

단풍 든 잎을 주우며, 그 아름다운 잎을 주우며

불러야 할 노래가 저 푸른 하늘에

남아 있을 것을

어머니, 아직은 잊어버려도 즐겁습니다

 

오월이 왔어요

집마다 감나무 서 있는

고향 같은 동네에서

살아갑시다, 어머니!

 

5월 ㅡ 오세영 ㅡ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오월 찬가 ㅡ 오순화 ㅡ

 

연둣빛 물감을 타서 찍었더니

한들한들 숲이 춤춘다.

 

아침안개 햇살 동무하고

산허리에 내려앉으며 하는 말

오월처럼만 싱그러워라

오월처럼만 사랑스러워라

오월처럼만 숭고해져라

 

오월 숲은 푸르른 벨벳 치맛자락

엄마 얼굴인 냥 마구마구 부비고 싶다.

 

오월 숲은 움찬 몸짓으로 부르는 사랑의 찬가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너 아니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네가 있어 내가 산다.

 

오월 숲에 물빛 미소가 내린다.

소곤소곤 속삭이듯

날마다 태어나는 신록의 다정한 몸짓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

 

오월처럼만

풋풋한 사랑으로 마주하며 살고 싶다.

 

5월 ㅡ 안재동 ㅡ

 

5월엔, 왠지 집 대문 열리듯

뭔가가 확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곳으로

희망이랄까 생명의 기운이랄까

아무튼 느낌 좋은 그 뭔가가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5월엔, 하늘도 왕창 열려

겨울 함박눈처럼

만복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5월엔, 아기 손처럼 귀엽고 보드라운,

막 자라나는 메타세쿼이아의 잎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만져보노라면

오랫동안 마음속에 응결되어 있던

피멍 하나 터져

그곳에서 새순이라도 쑤욱 돋아나는

느낌이 든다

 

5월엔,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여전히 그때의 그 싱그러운

당신의 얼굴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언제나

 

5월엔, 천지를 가득 채우는

따사로운 햇살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집먼지진드기 같은 잡념을 태워보자

어디에선가 꼭꼭 숨어

유서라도 준비할 것만 같은

그런 사람아

 

5월을 드립니다 ㅡ 오광수 ㅡ

 

당신 가슴에

빨간 장미가 만발한

5월을 드립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생길 겁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자꾸 듭니다

 

당신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많이 생겨나서

예쁘고 고른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히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모습을 자주 보고 싶습니다

 

5월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기분이 자꾸 듭니다

 

당신 가슴에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5월을 가득 드립니다

 

5월의 아침 ㅡ 윤준경 ㅡ

 

모두들 가고 있구나

5월 나뭇잎의 오케스트라를 들으며

초록의 터널을 지나

저마다 한 뭉치의 희망

넘치는 꾸러미 한아름 안고

사과씨 뿌려진 아스팔트 위를

나도 가고 있구나

삶은 이런 것이려니

늘 스치고 지나는 일도

문득 뜨겁게 다가서는 것

어둠의 황량한 거리 초록불 켜지면

저 당당한 어깨 한 치의 오차 없는

발맞춤을 보라

사과씨는 움이 트고 다시 태양은 뜨리니

저려오는 다리 아린 팔뚝도 잊고

5월의 새 아침, 가로수 아래

빛나는 이마

참 아름답구나

 

5월의 시 ㅡ 이문희 ㅡ

 

토끼풀꽃 하얗게 핀

저수지 둑에 앉아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는 한 덩이 하얀 구름이 되고 싶다.

저수지 물 속에 들어가

빛 바랜 유년의 기억을 닦고 싶다.

그리고 가끔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

저수지 물위에 드리워진

아카시아꽃 향기를 가져다가

닦아낸 유년의 기억에다

향기를 골고루 묻혀

손수건을 접듯 다시 내 품안에 넣어두고 싶다.

5월의 나무들과

풀잎들과 물새들이 저수지 물위로

깝족깝족 제 모습을 자랑할 때

나는 두 눈을 감고

유년의 기억을 한 면씩 펴면서

구름처럼 바람처럼 거닐고 싶다.

하루종일 저수지 둑길을 맴돌고 싶다.

 

5월의 시 ㅡ 이해인 ㅡ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색 서정시를 쓰는 5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 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지혜 속에 접어 둔 기도가

한 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5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히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 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는 축복을 쏟아내는 5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 되게 하십시오

 

5월이 오면 ㅡ김용호ㅡ

 

무언가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오월의 숲에 들면 ㅡ 김금용ㅡ

 

어지러워라

자유로워라

신기가 넘쳐 눈과 귀가 시끄러운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까치발로 뛰어다니는 딱따구리 아기 새들

까르르 뒤로 넘어지는 여린 버드나무 잎새들

얕은 바람결에도 어지러운 듯

어깨로 목덜미로 쓰러지는 산딸나무 꽃잎들

 

수다스러워라

짓궂어라

한데 어울려 사는 법을

막 터득한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물기 떨어지는 햇살의 발장단에 맞춰

막 씻은 하얀 발뒤꿈치로 자박자박 내려가는 냇물

산사람들이 알아챌까봐

시침떼고 도넛처럼 꽈리를 튼 도롱뇽 알더미들

도롱뇽 알더미를 덮어주려 합세하여 누운

하얀 아카시 찔레 조팝과 이팝꽃 무더기들

홀로 무너져 내리는 무덤들조차

오랑캐꽃과 아기똥풀 꽃더미에 쌓여

푸르게 제 그림자 키워가는 오월의 숲

 

몽롱하여라

여울져라

구름밭을 뒹굴다

둥근 얼굴이 되는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오월 ㅡ 피천득ㅡ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창 밖은 오월인데 ㅡ피천득ㅡ

 

창 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탈 같은 미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

 

5월의 느티나무 ㅡ복효근ㅡ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논물 드는 5월에 ㅡ 안도현 ㅡ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 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

 

5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ㅡ이채ㅡ

 

당신이 빨간 장미라면

나는 하얀 안개꽃이 되고 싶어요

나 혼자만으로는 아름다울 수 없고

나 혼자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고

당신 없이는 온전한 풍경이 될 수 없는 꽃

 

당신의 향긋한 꽃내음에 취해

하얗게 나를 비워도 좋을 꽃

그 잔잔한 꽃잎마다

방울방울 맺힌 그리움으로

당신만의 고요한 배경이 되고 싶어요

 

가끔 당신의 빛깔이 지칠 때나

가시 돋친 당신의 가슴이 아플 때면

당신을 위해 하얀 노래를 부르겠어요

눈 내리는 어느 날, 한 마리 겨울새가 불렀던

그 순백의 노래를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알알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애원하듯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꽃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이대로 하얗게 잠들었으면

 

당신 곁에 있으면 작아서 더 예쁜 꽃

여린 꽃 숨결이 멈출 때까지

소망의 은방울 종소리를 울리며

당신과 단둘이

사랑의 꽃병에 영원히 갇히고 싶어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ㅡ 하이네 ㅡ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

계절의 여왕 5월에게 ㅡ 정연복 ㅡ

 

5월이여

빛나는 5월이여

그대를 계절의

여왕으로 만드는 것은

꽃들이 아니라

연둣빛 이파리들입니다.

꽃은 피고

또 덧없이 지지만

이파리들은

그리 변덕을 떨지 않습니다.

세상에 새 삶의 희망을

선물하는 연둣빛으로

해마다 우리 곁에 찾아오는

5월이여

영원 무궁토록

우리를 기억하소서.

 

5월의 다짐 ㅡ 정연복 ㅡ

 

초록 이파리들의

저 싱그러운 빛

이 맘속

가득 채워

회색 빛 우울(憂鬱)

말끔히 지우리.

살아 있음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

살아 있음은

생명을 꽃피우기 위함이라는 것

살아 있는 날 동안에는

삶의 기쁨을 노래해야 한다는 것.

초록 이파리들이 전하는

이 희망의 메시지

귀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기리.

 

5월의 산 ㅡ 정연복 ㅡ

 

5월의 산에 들면

기분이 참 상쾌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연둣빛 이파리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오르막길 산행을 하면서

숨이 가빠오다가도

그 이파리들

한번 눈에 담으면

가슴이 뻥 뚫리고

피로감이 싹 가신다.

 

5월의 그대 - 생일 축시 ㅡ 정연복 ㅡ

 

하늘 푸르고 햇살 밝은

5월에 태어난 그대

자연과 벗하기 좋아하는

순하고 깨끗한 영혼 한결같아

지금껏 지상에서 쉰 일곱 해

긴 여행을 하고서도

연초록 이파리

5월의 나무들처럼 싱그럽고

한 송이 꽃같이 장미같이

여전히 눈부시게 아리땁구나.

동심(童心) 살아 숨쉬는

그대 마음속엔

세 개의 불멸의 보석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함께 있어

그대의 발길 닿는 곳마다

기쁨과 평화의 꽃이 피는구나.

아름다운 5월을 지으신

은총 많으신 그분의 귀한 딸

!

5월의 그대여.

 

5월의 기도 ㅡ 정연복 ㅡ

 

짙어지는 신록(新綠) 따라

나의 사랑도 깊어가게 하소서

길어지는 낮 시간 따라

내 맘속 그늘 옅어지게 하소서

 

오월, 비 내리다 ㅡ 박주현 ㅡ

 

오월을 흔드는 느닷없는 뇌성

바람 한 점 허공에 안겨

숨 크게 내려놓으며

메마른 손으로

기어이 비를 불러낸다

콰르릉거리는 허공의 분노

번쩍이는 성난 눈빛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직 잠들지 못하는

오월의 아픔이다

오월 광주의 아카시아꽃은

빗줄기에 휘청이며

코끝 찌르는 알싸함으로

아직도 악몽을 꾼다

초록이 빗물 속으로 스며든다

 

오월의 노래(1) / 괴테

 

오오 눈부시다

자연의 빛

해는 빛나고

들은 웃는다.

나뭇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

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

넘쳐 터진는

이 가슴의 기쁨.

대지여 태양이여 행복이여 환희여!

사랑이여 사랑이여!

저 산과 산에 걸린

아침 구름과 같은 금빛 아름다움.

그 크나큰 은혜는

신선한 들에

꽃 위에 그리고

한가로운 땅에 넘친다

소녀여 소녀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오오 반짝이는 네 눈동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종달새가 노래와

산들바람을 사랑하고

아침에 핀 꽃이

향긋한 공기를 사랑하듯이

뜨거운 피 가슴치나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게 청춘과

기쁨과 용기를 부어라.

새로운 노래로 그리고 춤으로 나를 몰고 가나니

그대여 영원히 행복하여라

나를 향한 사랑과 더불어..

5월의 노래(2) / 괴테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로,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로,

수풀 사이로,

나의 사랑은 어딜 가시나요?

말해줘요!

사랑하는 소녀

집에서 찾지 못해

그러면 밖에 나간 게 틀림없네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이 피는 5월에

사랑하는 소녀 마음 들떠있네

자유와 기쁨으로

시냇가 바위 옆에서

그 소녀는 첫키스를 하였네

풀밭 위에서 내게

뭔가 보인다!

그 소녀일까?

 

5월 아침의 노래 / 밀턴

 

마침 낮의 사자, 눈부신 햇볕이

동쪽에서 춤을 추며 나타나

꽃같은 5월을 이끌면

그녀는 푸른 무릎에서 노란 구륜초와

여린 빛 앵초를 집어 던진다.

환희와 젊음과 따스한 모정을 북돋우는

풍요한 5월이여, 환호하라

숲과 잔풀은 그대의 옷으로 단장했고

언덕과 골짜기는 그대의 은덕을 자랑했나니

그래서 우리는 아침 노래로 그대를 맞아

환대하며 오래 머물러 주길 기원하노라.

 

산과들.

 

, 오월 / 김영무

 

파란불이 켜졌다

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

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

오월이 종종 걸음으로 건너오면..

, 천지사방 출렁이는

금빛 노래 초록 물결

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

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고귀한 자연 / 벤존슨(1572-1637) 영국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나무가 크게만 자라는 것과 다르다

참나무가 3백 년 동안이나 오래 서있다가

결국 잎도 못 피우고 마른 통나무로 쓰러지기 보다

하루만 피었다 지는

5월의 백합이 훨씬 더 아름답다.

비록 밤새 시들어 죽는다 해도

그것은 빛의 화초요, 꽃이었으니

작으면 작은대로의 아르마움을 보고

삶을 짧게 나눠보면 완벽할 수 있는 것을..

그해 오월의 짧은 그림자 / 진수미

 

사랑을 했던가 마음의 때,

그 자국 지우지 못해 거리를 헤맸던가

구두 뒤축이 헐거워질 때까지

낡은 바람을 쏘다녔던가

그래 하기는 했던가

온 내장을 다해 엎어졌던가

날 선 계단 발 헛디뎠던가

하이힐 뒤굽이 비끗했던가

국화분 위 와르르 무너졌던가

그래, 국화 닢닢은 망그러지든가

짓이겨져 착착 무르팍에 엉겨붙던가

물씬 흙 냄새 당기든가

혹 조화는 아니었는가

비칠 몸 일으킬 만한던가

누군가 갸웃 고개 돌려주던가

달려오던가

아야야, 손 내밀던가

그래, 그 계단 밑,

아픈 복사뼈, 퉁퉁 붓고, 화끈 화끈 그게

사랑이라며

탈골하며 환하게 바람 스미던가 그래

사랑이던가 그 누군가는 혹.

 

5/ 권경업

 

물오른 보릿대궁

하늘대는 밭고랑 끝에

산자락은

버선발을 살며시 올려놓고

짙푸른 짧은 치마

수줍다고 얼굴 가리네

재넘어 영마루에

뭉게 구름 피어오르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 속에

칡 캐는 아이들의 마음은

짖궂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물결치며

푸르른 오리나무 숲으로 가네.

 

5월 ㅡ김영랑ㅡ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이랑 만이랑

이랑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숫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봉우리야 오늘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5月 恨 / 김영랑

 

모란이 피는 오월달

월계月桂도 피는 오월 달

온갖 재앙이 다 벌어졌어도

내 품에 남는 다순 김 있어

마음 실 튀기는 오월이러라.

무슨 대견한 옛날였으랴

그래서 못 잊는 오월이랴

청산을 거닐면 하루 한 치씩

뻗어 오르는 풀숲 사이를

보람만 달리던 오월이어라.

아무리 두견이 애닯아해도

황금 꾀꼬리 아양을 펴도

싫고 좋고 그렇기보다는

풍기는 내음에 지늘꼈건만

어느새 다 해-진 오월이러라.

 

푸른 5/ 노천명

 

靑磁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당 창포잎에 ㅡ

여인네 행주치마에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5월의 푸른 여신 앞에

네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 밀려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진 길을 걸으면

생각은 무지개로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뻗어나던 길섶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가잎나물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찾던 ㅡ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아니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이 모양 내 맘은

하늘 높이 솟는다

5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파꽃 / 김영준

 

빈 집임을 알면서도

전화를 넣어보았다

울림은 울림으로 되돌아 올 뿐

아무런 말도 하다

5월은 또 그렇게 시작되고

그냥 그 눈물마저 그리우므로

그립다는 말 한 마디 하고 싶었다

그립다아아아

오월 / 조연호

 

비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타는 소리보다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적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월 / 이은채

 

언덕은 멀리 귀를 모으고 숲은 고요했네

핀들핀들 몸을 흔들던 풀꽃방망이들 내 물컹한 종아릴 툭툭 치는 짓궂게 웃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몸을 옮기며 저 새들 힘차게 깃을 터는 숨 고르는

구름을 뚫고 내려온 햇살 어린 잎새에 내려앉는 조심스레 스며드는

꽃다지 냉이꽃 가늘가늘 목을 젖히며 웃는 몹시도 까불대는

 

내가 이 언덕, 귀가 확 트이면 알 수 있을까

앞섶 들추어 몰래 젖을 물렸을 저 샛강 낭창한 허리가 내 팔에 안겼다 스르르 풀려나가는 소리와

그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저물녘 강둑에 나앉아 듣고 있을 물이끼 자라는 소리 같은 거

지금 막 그대 이마를 스을쩍 문지르고 가는 햇살의 소리

그 햇살 꼴깍꼴깍 받아 마시고 있는 잎새의 푸른 목젖 소리 같은 거

언덕은 멀리 귀를 모으고 숲은 고요했네

 

오월 / 고창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꾸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오월의 잠 / 김은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같은 사랑을 되짚어간다

 

오월의 폐염전 / 김해빈

 

청갈대가 묵은대 밀어 올리는 한낮

불덩이로 이글거리는 함초 소금밭을 차지했다

한때는 볕에 끓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소금창고 네 귀퉁이에 잠든 소리 깨우고 낡은 수차에 절룩이던

바람 숨가쁘게 뛰어내려 오월을 마중하면

등졌던 바다 까치발로 걸어 들어와 메마른 고랑마다 핏줄로 잇는다

힘차게 흐른다 소금꽃도 피운다

바람아 수차를 돌려라 하얀 바다가 저기 돌아온다

 

봄날, 나에게 / 윤준경

 

, 이 때 쯤 죽으려므나

꽃피고 새 울 때

5월 어느날

한 닷새 비 안올 때 죽으려므나

허리 굽지않고

속옷 정갈히 빨아입다가

외로움 힘겹기 전, 어느 봄 날

한 사날 앓다가 죽어져

샛녹 풀 꽃잎 위에 뿌려지려므나

살가죽 뼈마디 다 흙에 놓고

혼이나 살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가보지 못한

먼 곳까지

훠어이 훠어이 날으려므나

 

모란꽃과 고추장 항아리 / 김금용

 

오월 햇살에 고추장 항아리 배부르다

열 남매 키운 기사식당 아줌마

저처럼 배부른 항아리 씻다가

붉은 입술 삐죽이며 함박웃음 짓는

장독대 옆 모란 꽃더미에 놀라

엉덩방아 찧으며 주저앉는다

눈치 빠른 봄바람

쓸쓸한 그녀 젖무덤 파고들며

주름 깊은 눈자위 군살 붙은

목덜미로 햇살을 부른다

장마와 가뭄을 이기고 오십 년

묵은 장맛으로 단맛 키운 항아리

오월 아침 모란꽃이 눈부셔도

굽은 허리 일으키는 산등성 너머로

우르르 몰려드는 꿀벌떼는

항아리 언저리에만 붙어 날개 비빈다

암술 올라타며 입술 부비다 말고

문 좀 열어라

배불뚝이 항아리를 두들긴다

 

라일락 /강은령

이 두터운 외투 속에 움츠리고만 있던 그 오월

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은 오직 그것 뿐이었을 때의,

눈감고 업은 내 아이와 오래도록 서있던

친정으로 가는 샛길 어귀 라일락 나무

구겨진 마음 풀어내 햇살 풀먹여 푸우우 품어내던 향분

옥양목 같은 생()의 강 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밥 정/ 정휘립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散調· 4

 

딸넴아, 지발 아무나 허고 밥 같이 먹지 말거라, ?

이 에미도 읍내 장날 품 팔러 나갔다가 그냥 그리 된겨, 거시기 학상學生들 데모대에 매급시 떠밀려 쫓기는디, 어치케 늬 아빠 용케 만나 아는 체 하고 밥 한 끼 얻어먹다 그냥 저냥 함께 살게 된 겨,

중에 젤 무서운 게 바로 밥 정인 것여.

 

늬 아빠, 자전거 타고 동사무소 심부름 다닐 때,

허줄근한 방위병 복장으로 그냥 쓰러지게 생긴 데다, 내 하필 최루탄에 눈물콧물 질질 흘리며 오도가도 못 허는디, 불쌍하게 주춤주춤 다가와 밥이나 그냥 한 번 먹자 혀서, 매급시 밥 한 끼 얻어 처먹다 그냥 저냥 늬가 톡, 생긴겨, (그리서 늬 이름이 오월인겨)

늬아빠 시원한 입 속에 그냥 홀딱 반한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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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시모음

1. 내 4월의 향기를 / 윤보영

 

내 4월은

향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3월의 피었던 꽃향기와

4월에 피게 될 꽃향기

고스란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눈빛가지 향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향기를 나누며

향기를 즐기며

아름다운 4월로 만들고

싱그러운 5월을 맞을 수 있게

마음을 열어 두어야겠어요

   

4월에는

한달 내내 향기속의 나처럼

당신에게도 향기가 났으면 더 좋겠습니다

   

마주보며 웃을 수 있게

그 웃음이 내 행복이 될 수 있기에..

   

2. 4월 / 안재동

   

사회의 엘리트 그룹에 진입하는 지름길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수천 편의 응모작품들 중 단 한 사람의

작품만이 행운의 여신에 의해 선택되는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해외유학 길에 올라 상처받지 않고

버젓하게 박사학위를 따오는 일도 

돈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십 내지 수백, 아니 수천 명이나 되는

종업원의 밥줄이 걸린, 크고 작은 

사업체 하나 망하지 않게 운영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 무더위나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일 년 내내 막노동판에서 

등짐을 져다 나르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 없어

세월아 네월아 하고 빈둥거리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고통스러운 기나긴 겨울 동안 묵묵히, 

바야흐로 세상 모든 나무들이 

다시 푸른 싹을 틔우며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자태를 갖추는데

세상 모든 꽃들이 

오래전 잃어버린 얼굴을 찾기나 한 듯 

감동처럼 느껴지는 새 얼굴과 

짙은 향기를 세상에 들이미는데

   

긴 시간, 내 속의 살았으되 죽은 영혼,

저 나무와 꽃들처럼 참 어려웠던 듯 

쉬운 듯 

이제 소생했으면 하는, 4월.

   

3. 4월의 노래 / 정연복

 

꽃들 

지천으로 피는데

   

마음 약해지지 말자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진달래 개나리의 

웃음소리 크게 들리고

   

벚꽃과 목련의 

환한 빛으로 온 세상 밝은 

   

4월에는 그냥

좋은 생각만 하며 살자. 

   

한철을 살다 가는 꽃들

저리도 해맑게 웃는데

   

한세상 살다 가는 나도

웃자 환하게 웃자.

   

4. 할머니의 4월 / 전숙영

 

시장 한 귀퉁이 

변변한 돋보기 없이도 

따스한 봄볕 

할머니의 눈이 되어주고 있다 

   

땟물 든 전대 든든히 배를 감싸고 

한 올 한 올 대바늘 지나간 자리마다 

품이 넓어지는 스웨터 

할머니의 웃음 옴실옴실 커져만 간다 

   

함지박 속 산나물이 줄지 않아도 

헝클어진 백발 귀밑이 간지러워도 

여전히 볕이 있는 한 

바람도 할머니에게는 고마운 선물이다

   

흙 위에 누운 산나물 돌아앉아 소망이 되니 

꿈을 쪼개 새 빛을 짜는 실타래 

함지박엔 토실토실 보름달이 내려앉고

별무리로 살아난 눈망울 동구밖 길 밝혀준다 

   

5. 사월의 시 / 이해인

 

꽃 무더기 세상을 삽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

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양 활짝들

피었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새삼스레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사한 맘이고,

   

고운 향기 느낄 수 있어

감격적이며,

   

꽃들 가득한 사월의 길목에

살고 있음이 감동입니다.

   

눈이 짓무르도록

이 봄을 느끼며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느끼며

   

두발 부르트도록

꽃길 걸어볼랍니다.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내년 봄은 너무 멀지요.

   

오늘 이 봄을 사랑합니다.

   

오늘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4월이 문을 엽니다. 

  

6. 4월의 만남 / 김덕성 

   

함께 사는 세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정이건 애정이건 만남은 

정이 오가면서 

믿음이 생기게 되어 

비로소 사랑의 꽃 피게 되나니 

   

4월의 만남으로 

미덥지 않는 선거용 악수가 아닌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한 믿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악수가 되고 

   

신중한 한 표 한 표 

깨끗한 선거로 뿌리를 내리는 4월 

4월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이요 축복이어라 

   

4월에 내리는 봄비 / 나상국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삼동추위 떠나가는 자리 

   

봄 언제 올까, 기다리는데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리더니 

   

며칠째 몸져누운 파리한 

   

온기마져도 사라진 

   

텅 빈 허허로운 벌판 같은 방안으로 

우울이 한 웅큼씩 찾아들더니 

   

저렇게 봄비가 내린다 

   

7. 4월에 / 정희성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 뿐

이 땅의 정처 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4월이여

   

8. 4월의 사랑은 / 이재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 

잔 거품 오르는 생맥주가 앞에 있다 

그리움 한 모금을 삼킨다 

   

이른 아침 산을 오르며 

가슴속 그리움을 물갈이 하는 여인은 

같은 시간 

물을 차며 수영을 하듯 

내 그리움을 가른다 

   

별빛 같은 아파트 저녁 불빛 속에 

사랑의 등대를 찾아 

항로를 바꾼 여인은 

자신만의 선착장에 

그리움의 배를 대고 안식하고 싶어 한다 

   

그곳엔 폭풍우도 

세상을 가를듯한 천둥번개도 없기를 

간절한 기도로 소망한다 

   

사랑의 동산에 

4월의 향기 짙은 개나리꽃도 피어주고

진달래꽃도 함께 피어주기 바란다 

   

다가올 

7월의 뜨거운 햇살처럼 

   

9. 4월과 아침 / 오규원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하네

밤새 젖은 풀 사이에 서 있다가

몸이 축축해진 바람이 풀밭에서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있네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 잠에 단단하게 들어있네

 

10. 봄이여, 4월이여 / 조 병화 

   

하늘로 하늘로 당겨오르는 가슴

이걸 생명이라고 할까자유라고 할까

해방이라고 할까

 

4월은 이러한 힘으로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밖으로, 밖으로, 인생 밖으로

한없이, 한없이 끌어내어

하늘에 가득히 풀어놓는다

 

멀리 가물거리는 것은 유혹인가

그리움인가

사랑이라는 아지랑인가

잊었던 꿈이 다시 살아난다

 

오, 봄이여, 4월이여

이 어지러움을 어찌하리

   

11. 사월에 걸려 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가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12. 4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4월엔 그대와 나

알록달록 꽃으로 피어요

빨강 꽃도 좋고요

노랑 꽃도 좋아요

   

빛깔도 향기도 다르지만

꽃 가슴 가슴끼리 함께 피어요

홀로 피는 꽃은 쓸쓸하고요

함게 피는 꽃은 아름다워요

   

인연이 깊다 한들 

출렁임이 없을까요

인연이 곱다 한들

미움이 없을까요

   

나누는 정 

베푸는 사랑으로

생각의 잡초가 자라지 않게

불만의 먼지가 쌓이지 않게

   

햇살에 피는 꽃은

바람에 흔들려도

기쁨의 향기로 고요를 다스려요

꽃잎 속에 맑은 이슬은 기도가 되지요

   

4월엔 그대와 나

알록달록 꽃으로 피어요

진달래도 좋고요

개나리도 좋아요

   

13. 사월 / 조성심

   

사월, 사월

사월을 입 속에서 되뇌이다보면

파아란 잎사귀가 돋아난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사월에 어찌 자리를 묵힐 수 있으랴

그냥 길을 보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 속에 들어오는 건

어제와 또 다른 숨막히는

사월의 드라마

그냥 빈 마음만 준비해도

사월 내내 누구나

초대받은 손님이 된다.

   

14. 4월 나무 / 최연창

   

움직임이 없다는 것

소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생명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움직임도 없이

소리도 없이

4월의 나무는 

생명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움을 틔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록의 잎들을 

가득 품고

푸른 봄을 이루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커다란 몸부림이었고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침묵의 노래였습니다

   

15. 4월이 오면 / 권영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16. 4월의 거리에 서면 / 노태웅 

 

벗이여 

체념의 행렬 깨우던 이 거리에 

4월이 오거든 

   

마음에서 멀어진 그날의 함성 

우리 모두의 바램 다시 한번 기억해다오 

   

창 밖 향나무 

당신을 위해 

몸을 태워 향기 날릴 때 

항거했던 아픈 가슴 

영원한 울림 그날을 기억해다오 

   

벗이여 

웃음으로 가득한 이 거리 

다시 4월이 오거든 

그때 많은 꿈 묻어둔 거리를 거닐며 

어제의 함성에 귀 기울여다오 

4월의 거리에 서면. 

   

17. 4월의 노래 / 정호승

   

사월이 오면 

 저 산을 뽑으리라 

 산새도 살지 않는 

 사람들도 쫓겨간 

 저 붉은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지리라 

   

 개꽃이 피고 

 개꽃잎이 흩어져도 

 저 붉은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지고 

 자유의 무덤 앞을 

 떠나가리라 

   

18. 아, 4월 / 이시영

   

감자 대를 뜯다가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오늘도 동냥 나가 나는 너를 기다렸다.

강 건너 버들잎 날리면

보리밭 둑을 타고 너는 오리라

뒷산에 진달래 붉게 울면

목발을 짚고 너는 오리라

땀에 젖은 얼굴 빛나는 함성

그날의 총탄 속을 뚫고

너는 다시 오리라

거친 땅이 낳은 아들 문둥이 아들

누더기 속에 간 오히려 깨끗한 사랑

두 팔에 덥석 안을 날은 오리라

아아 몇몇 해던가

먹구름을 몰아내면 또 같은 먹구름

소나기를 피하면 더 거센 소나기

너는 오지 않고 쉽사리 오지 않고

종살이에 지친 누이들

칡꽃이 희게 울 때 또 다른 주인 찾아 몸 팔러 갔네

종달이 빈 밭에 날 때

힘깨나 쓰는 동생들 서울 가 떠돌이가 되었네

애비 같은 비렁뱅이 되었네

아아 몇몇 해던가 기다림의 나날

한번은 박차고 나아가 맞이해야 할 날

가난하지만 자랑스럽게 우리가 우리 차지해야 할 날

크나큰 슬픔의 날 별빛 해방의 날 오리라

바로 너는 오리라 꽃수레 타고

가랑잎만 굴러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다리 밑 움막 열고 나와 나는 너를 기다렸다.

   

19.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 정해종 

   

우수 경칩 다 지나고 

거리엔 꽃을 든 여인들 분주하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살아 있으니 

말을 걸어 달라고 종알대고 

마음속으론 황사바람만 몰려오는데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나서 

마침내 바람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되어도 거센 바람이 되어서 

모래와 먼지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 

어느 하늘 한족을 자욱이 물들이고 싶다 

일렁이고 싶다

   

20. 4월 엽서 / 정일근

   

가슴으로 읽는 시] 사월 비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꽃잎 사이

착하고 여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의 시편들을

날려 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있습니다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21. 사월 비 / 이제하

   

보소, 보이소로 오시는 사월 가랑비

헤어진 여자 같은 사월 가랑비

잔치도 끝나고 술도 깨고 피도 삭고 꿈도 걷히고

주머니마저 텅텅빈 이른 새벽에

가신 이들 보이는 건널목 저편

사랑한다, 한다 횡설수설하면서

어디까지 따라오는 사월 가랑비

   

22. 봄, 사월에 / 이재무

   

꽃이 피는 속도를 그대 아는가

시속 40Km

남에서 북으로 나는 달리며

숨이 가쁘다네

   

저 사랑의 속도

뒤따르며 내 쉽게 지치는 것은

몸이 지친 탓만이 아니라네

   

꽃으로 살지 않고

함부로 꽃 사랑하고 노래한 죄

저리 커서 달아나는 님

   

길의 고비마다 불쑥 얼굴 내미는

돌팍과 자갈의 충고

그걸 알고 부르튼 마음의 맨발바닥

   

꽃이 피는 속도에 숨이 가빠서

나는 슬프네 나는 기쁘네

 

23. 4월 / 장석주

   

금치산자 같은 4월이 왔다간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시시하지?

하는 얼굴을 하고

   

방부 처리되지 않은 추억들이

질척거리는 침출수를

삶의 빈 틈으로 조금씩 흘러보낸다

   

개척자는 아니지만 무능이

뼈에 사무치는 것은

일품요리 같은 여자와의 연애가

곧 끝나고 말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무능과 게으름은

내 삶에 붙은 이면옵션이다

   

나쁜 패를 잡고 전전긍긍하는 노름꾼에게도

4월이 오고 내게도

사지를 절단한 편지가 도착하고

끔찍한 날들이 이어진다

   

머리 없는 남자가

낚시터로 가는 길을 묻는다

   

24. 4월에는 / 이명희

   

4월의 하늘은 친절하고 햇살은 상냥 합니다

담장에 기대인 목련의 성근가지에도 하얀 꽃이 피고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그리운 소식들이 

한꺼번에 들려 올 것 같습니다 

   

쌀쌀한 마음을 거두고 포근한 무릎을 내민 

그대의 살 내음에 취하고 싶은 날 

내 맘의 위안이고 희망인 그대를 만나기 위해 

땅을 일궈야 하겠습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꽃씨를 뿌려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인연으로 시작하는 사람들과 

다시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설렘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희망의 밭을 기름지게 일궈야 하겠습니다.

 

25. 사월의 꽃 / 김경숙

   

전국은 비상사태다

   

봄바람에 꽃들이

참았던 웃음 보내느라

하루해가 짧다고

노을 붙잡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밤이면 달빛 끌어안더니,

밤낮 가리지 않고

함박웃음 터뜨려 유혹하더니,

   

향기에 취한 사월

흔들리며 걸어간다

꽃바람 따라 어디든

   

26. 4월의 만남 / 김덕성 

   

함께 사는 세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정이건 애정이건 만남은 

정이 오가면서 

믿음이 생기게 되어 

비로소 사랑의 꽃 피게 되나니 

   

4월의 만남으로 

미덥지 않는 선거용 악수가 아닌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한 믿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악수가 되고 

   

신중한 한 표 한 표 

깨끗한 선거로 뿌리를 내리는 4월 

4월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이요 축복이어라 

   

27. 4월에 내리는 봄비 / 나상국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삼동추위 떠나가는 자리 

   

봄 언제 올까, 기다리는데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리더니 

   

며칠째 몸져누운 파리한 

   

온기마져도 사라진 

   

텅 빈 허허로운 벌판 같은 방안으로 

우울이 한 웅큼씩 찾아들더니 

   

저렇게 봄비가 내린다 

   

중년의 가슴에 4월이 오면 / 이채 

   

꽃이 예쁘기로 

앞서고 뒤서지 아니하니 

4월의 꽃이여! 

중년의 꽃이라고 꽃마저 중년이랴 

   

내 꽃의 빛깔이 바래지 않는 것은 

한때의 청춘이 그리운 까닭이요 

내 꽃의 향기가 시들지 않는 것은 

한때의 사랑을 못 잊는 까닭이다 

   

구름은 흘러도 흔적이 없고 

바람은 불어도 자취가 없건만 

구름 같고 바람 같은 인생아! 

왜, 

사람의 주름은 늘어만 가는가 

   

꽃이 예쁘기로 

피었다 아니 질 수 없으니 

4월의 꽃이여! 

그대, 젊음을 낭비하지 마오 

   

지나고 보니 

반 백년 세월도 짧기만 하더이다

   

28. 4월의 환희 / 이해인

   

깊은 동굴 속에 엎디어 있던

내 무의식의 기도가

해와 바람에 씻겨

얼굴을 드는 4월

   

산기슭마다 쏟아 놓은

진달래꽃

웃음소리

설레이는 가슴은

바다로 뛴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을 향해

바위 끝에 부서지는

그리움의 파도

   

못자국 선연한

당신의 손을 볼 제

남루했던 내 믿음은

새 옷을 갈아입고

   

이웃을 불러 모아

일제히 춤을 추는

풀잎들의 무도회

   

나는

어디서나 당신을 본다

우주를 환희로 이은

아름다운 상흔을

눈 비비며 들여다본다

   

하찮은 일로 몸살하며

늪으로 침몰했던

초조한 기다림이

   

이제는 행복한

별이 되어

승천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하신 당신 앞에

숙명처럼 돌아와

진달래 꽃빛 짙은

사랑을 고백한다

     

29. 4월, 진해만 / 정일근 

   

바다는 푸른 접시에 담겨 

신의 아침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신은 아페리티프를 주문해 놓고 

노래하듯 시를 읽거나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듣는다 

세일러복을 입은 갈매기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지나간다 

향커피 한 잔이 뜨거워지는 사이 

바다의 표정은 세룰리언블루에서 

색스블루(saxe blue)로 변해가고 

사월 바람에 꽃잎 몇 장 날아와 

접시 속의 가벼운 섬으로 앉는다 

   

후, 하고 꽃잎들을 불어본다 

자욱한 꽃향기 바다를 덮는다 

   

30. 사월 / 김현승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 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 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水仙)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 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迷信)의 달…… 

   

31. 4월의 불꽃 / 장수남 

   

그가 돌아왔다 

뜨거운 미소로 창을 두드리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4?민주의거 

영원한 민주의 불꽃 

4월 진달래 삼천리 흐드러지게 

붉게 꽃피우리라. 

   

32. 4월 / 오세영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33. 월에 / 채호기

   

겨울이 다 가도 

봄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깡깡한 얼음덩어리 속에서 

불쑥 몸을 돌려 

꽃으로 변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 깨어져 날카롭게 일어서는 

동지들의 아름다움이 

심장을 쩡쩡 울린다. 

잎 트고 어지러이 봄꽃들 피어나도 

얼음은 얼음 

영하 20도의 

차갑고 분명한 정신으로 

오월을 맞는다.      

     

34. 4월과 5월 / 박정만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봄빛보다 찬란하게 사라져간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너는 나를 그리며 더 큰 웃음을 웃고 있지만

네가 던진 함성도 돌멩이도 꿈 밖에 지고

모호한 안개, 모호한 슬픔 속으로

저 첫새벽의 단꿈도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세월의 앙금처럼 가라앉아

그것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되고

그 뿌리 속에 묻어 둔 불씨가 되는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파아란 보랏빛 얼굴로 웃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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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시모음


♡ 4월이 오면 ♡

ㅡ권영상ㅡ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 4월 ♡

ㅡ오순택ㅡ


봄은

민들레 노란 꽃신을 신었어요.

 

부리에 봄을 물고

노랑턱멧새도 와 있었어요.

 

나비는

젖은 날개를 말리느라

햇볕을 쬐고 있어요.

 

제비는

꽃잎 같은 새끼 주둥이에

벌레 넣어 주기에 바쁘답니다.

 

♡ 사월 ♡

ㅡ임보ㅡ


도대체 이 환한 날에

누가 오시는 걸까

 

진달래가 저리도

고운 치장을 하고

 

개나리가 저리도

노란 종을 울려대고

 

벚나무가 저리도 높이

축포를 터뜨리고

 

목련이 저리도 환하게

등불을 받쳐들고 섰다니

 

어느 신랑이 오시기에

저리도 야단들일까?

 

♡ 4월 ♡

ㅡ목필균ㅡ

 

벚나무 바라보다

뜨거워라

흐드러진 꽃잎에

눈을 다친다

저 여린 향기로도

독한 겨울을 견뎠는데

까짓 그리움 하나

삼키지 못할까

봄비 내려

싸늘하게 식은 체온

비벼대던 꽃잎

하르르 떨구어져도

무한대로 흐르는 꽃소식

으슬으슬 열 감기가

가지마다 열꽃을 피워댄다

 

♡ 맑은 꽃♡

ㅡ김여정ㅡ

 

눈물보다 더 맑은 꽃이 있을까

4월은 꽃이 많은 계절

4월은 눈물이 많은 계절

맑은 꽃 속의 샘물에 뜨는 별

예사로이 보면 안 보이는 별

별이 안 보이는 눈에는

눈물이 없지

사람들은 꽃만 보고

눈물은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샘물만 보고

별은 보지 않는다

광장에는 꽃의 분수

4월의 눈물이 솟는데

 

♡ 초록의 4월♡

ㅡ 김상현ㅡ

 

푸른 숨결이네

스스로 이는 참회의 바람이네

어린 손의 손짓이네

 

어린 손들이 하늘을 떠받치며

환호하는 감사,

겨울 내내 눈물로 퍼 올린

모세혈관의 힘겨움을 참아내

저곳들을 싹틔웠을

어머니에게 바치네

 

하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는

옹골찬 초록의 세상을 만드네.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ㅡ정해종ㅡ

 

거리엔 꽃을 든 여인들 분주하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살아 있으니

말좀 걸어 달라고 종알대고

마음속으론 황사바람만 몰려오는데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나서

마침내 바람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되어도 거센 바람이 되어서

모래와 먼지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

어느 하늘 한쪽을

자욱히 물들이고 싶다

일렁이고 싶다

 

♡4월의 노래♡

ㅡ안성란ㅡ

 

4월. 그대는 천진한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언어로

행복한 웃음을 만드는

더듬이를 달고

추억을 찾아가는 즐거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대는 새로움을 창조한

희망의 초록빛 여린 싹을 잉태하고

꽃피는 날

아름다운 색채로 수채화를 그리는

들녘에 푸릇한 새날의 축복을 낳아

꽃들의 향연이 열리는 푸른 초장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을 보내 주었다.

 

꽃의 향기는 조용히 와서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행복한 미소로 덮어놓고

우리네 삶에 새 생명을 주는

4월. 그대는 희망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다.

 

♡ 4월은 갈아엎는 달♡

ㅡ신동엽 ㅡ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4월의 시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4월 비빔밥 /박남수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4/문인수


절을 에워싼 산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빛이 비릿하다.

 

4햇살 /김태인


어머니, 어머니여

자애로운 어머니여

가지마다 새싹 돋게 하였듯

콘크리트 벽에 갇혀

핏기 잃은 가여운 생명에게도

당신의 젖꼭지 물려주오

 

4/ 한승수


여기저기 봄꽃들 피었다.

가로수 왕벚꽃 화려한 왕관을 쓴 채

임대아파트 울타리에 매달린 어린 개나리를 내려다보고

철없는 목련은 하얀 알몸으로

부잣집 정원에서 일광욕을 한다.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화려함이 다르고, 눈높이가 다르고

사는 동네가 다르지만

그것으로 서로를 무시하지 않는다.

빛깔이 다르지만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어우러져서 참 아름다운 세상.

 

4월의 편지 / 오순화


꽃이 울면 하늘도 울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아프면 꽃을 품고 있는

흙도 아프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웃으면 하늘도 웃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꽃이 피는 날 꽃을 품고 있는

흙도 헤죽헤죽 웃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나요

맑고 착한 바람에

고운 향기 실어 보내는 하늘이 품은 사랑

그대에게 띄우며

하늘이 울면 꽃이 따라 울고

하늘이 웃으면 꽃도 함께 웃는 봄날

그대의 눈물 속에 내가 있고

내 웃음 속에 그대가 있음을

사랑합니다

 

4/ 반기룡


바람의 힘으로

눈 뜬 새싹이 나풀거리고

동안거 끝낸 새잎이 파르르

목단꽃 같은 웃음 사분사분 보낸다

미호천 미루나무는

양손 흔들며 환호하고

조치원 농원에 옹기종기 박힌

복숭아나무는 복사꽃 활짝 피우며

파안대소로 벌들을 유혹하고

산수유 개나리 목련화는

사천왕처럼 눈망울 치켜뜨고

약동의 소리에 귓바퀴 굴린다

동구 밖 들판에는

달래 냉이 쑥 씀바귀가

아장아장 걸어나와

미각 돋우라 추파 던지고

둑방길에는 밥알 같은

조팝나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4/ 윤용기


잔인한 잔치

시작되었네.

처소 곳곳에

퉁퉁 불어 있던

몸 동아리

터져 나오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오듯

하늘 향해 천지를 개벽시키네.

날카로운 칼바람

견디어 온

환희의 기쁨 숨어 있었네.

 

4월에 내리는 눈 / 안도현


눈이 온다

4월에도

교사 뒤뜰 매화나무 한 그루가

열심히 꽃을 피워 내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맞는다

엉거주춤 담벼락에 오줌 누다 들킨 녀석처럼

매실주 마실 생각 하다가

나도 찬 눈을 맞는다

 

4월에 / 박종숙


숨죽인 빈 空間을 차고

새가 난다.

물오른 나무들의 귀가

쏟아지는 빛 속으로

솟아오르고

목숨의 눈부신 四月

유채꽃 향기로 가득하다.

아름다워라

침묵만큼이나

안으로 충동질하며

온 피 걸러

生命의 진액으로 타는

四月의 하늘이여.

다만 살아있음이

눈물겨워

 

4월에는 / 목필균


축축해진 내 마음에

아주 작은 씨앗 하나

떨구렵니다

새벽마다 출렁대는

그리움 하나

연둣빛 새잎으로

돋아나라고

여린 보라 꽃으로

피어나라고

양지쪽으로 가슴을 열어

떡잎 하나 곱게 가꾸렵니다.

 

4/ 오세영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4월의 바람 / 홍경임


모짜르트가 흐르는 거실에서

홀가분한 마음 되어

커피 한 잔 말없이 마시니

잠에 취했던 나의 영혼 기지개를 켠다

맑은 기분으로 4월의 햇살을 받으며

돌산 밑 작은 동네를 지날 때면

골목 파란 대문집 라일락 꽃잎은

내 볼을 어루만지는데

4월의 바람 오늘은 더욱

여며진 내 가슴을 헤집으며

어제와는 다른 몸짓으로 하여

나를 반긴다.

 

할머니의 4/ 전숙영


시장 한 귀퉁이

변변한 돋보기 없이도

따스한 봄볕

할머니의 눈이 되어주고 있다

땟물 든 전대 든든히 배를 감싸고

한 올 한 올 대바늘 지나간 자리마다

품이 넓어지는 스웨터

할머니의 웃음 옴실옴실 커져만 간다

함지박 속 산나물이 줄지 않아도

헝클어진 백발 귀밑이 간지러워도

여전히 볕이 있는 한

바람도 할머니에게는 고마운 선물이다

흙 위에 누운 산나물 돌아앉아 소망이 되니

꿈을 쪼개 새 빛을 짜는 실타래

함지박엔 토실토실 보름달이 내려앉고

별무리로 살아난 눈망울 동구밖 길 밝혀준다

 

4/ 박인걸


사월이 오면

옛 생각에 어지럽다.

성황당 뒷골에

진달래 얼굴 붉히면

연분홍 살구꽃은

앞산 고갯길을 밝히고

나물 캐는 처녀들

분홍치마 휘날리면

마을 숫총각들 가슴은

온종일 애가 끓고

두견새는 짝을 찾고

나비들 꽃잎에 노닐고

뭉게구름은 졸고

동심은 막연히 설레고

半白 긴 세월에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 시절

앞마당에 핀 진달래

그때처럼 붉다.

 

4월이 떠나고 나면 / 목필균


꽃들아, 4월의 아름다운 꽃들아.

지거라, 한 잎 남김없이 다 지거라,

가슴에 만발했던 시름들

너와 함께 다 떠나버리게

지다보면

다시 피어날 날이 가까이 오고

피다보면 질 날이 더 가까워지는 것

새순 돋아 무성해질 푸르름

네가 간다 한들 설움뿐이겠느냐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

눈부신 5월이 아카시아 향기로

다가오고

바람에 스러진 네 모습

이른 아침, 맑은 이슬로 피어날 것을

 

4월의 노래 / 노천명


사월이 오면은,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사월의 시 / 이해인


꽃 무더기 세상을 삽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

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양 활짝들

피었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새삼스레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사한 맘이고,

고운 향기 느낄 수 있어

감격적이며,

꽃들 가득한 사월의 길목에

살고 있음이 감동입니다.

눈이 짓무르도록

이 봄을 느끼며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느끼며

두발 부르트도록

꽃길 걸어볼랍니다.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내년 봄은 너무 멀지요.

오늘 이 봄을 사랑합니다.

오늘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4월이 문을 엽니다.


4월의 만남 / 김덕성


함께 사는 세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정이건 애정이건 만남은

정이 오가면서

믿음이 생기게 되어

비로소 사랑의 꽃 피게 되나니

4월의 만남으로

미덥지 않는 선거용 악수가 아닌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한 믿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악수가 되고

신중한 한 표 한 표

깨끗한 선거로 뿌리를 내리는 4

4월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이요 축복이어라


4월에 내리는 봄비 / 나상국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삼동추위 떠나가는 자리

봄 언제 올까, 기다리는데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리더니

며칠째 몸져누운 파리한

온기마져도 사라진

텅 빈 허허로운 벌판 같은 방안으로

우울이 한 웅큼씩 찾아들더니

저렇게 봄비가 내린다


4월에 / 정희성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

이 땅의 정처 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4월이여


4월의 사랑은 / 이재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

잔 거품 오르는 생맥주가 앞에 있다

그리움 한 모금을 삼킨다

이른 아침 산을 오르며

가슴속 그리움을 물갈이 하는 여인은

같은 시간

물을 차며 수영을 하듯

내 그리움을 가른다

별빛 같은 아파트 저녁 불빛 속에

사랑의 등대를 찾아

항로를 바꾼 여인은

자신만의 선착장에

그리움의 배를 대고 안식하고 싶어 한다

그곳엔 폭풍우도

세상을 가를듯한 천둥번개도 없기를

간절한 기도로 소망한다

사랑의 동산에

4월의 향기 짙은 개나리꽃도 피어주고

진달래꽃도 함께 피어주기 바란다

다가올

7월의 뜨거운 햇살처럼


4월과 아침 / 오규원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하네

밤새 젖은 풀 사이에 서 있다가

몸이 축축해진 바람이 풀밭에서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있네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 잠에 단단하게 들어있네


봄이여, 4월이여 / 조 병화


하늘로 하늘로 당겨오르는 가슴

이걸 생명이라고 할까자유라고 할까

해방이라고 할까

4월은 이러한 힘으로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밖으로, 밖으로, 인생 밖으로

한없이, 한없이 끌어내어

하늘에 가득히 풀어놓는다

멀리 가물거리는 것은 유혹인가

그리움인가

사랑이라는 아지랑인가

잊었던 꿈이 다시 살아난다

, 봄이여, 4월이여

이 어지러움을 어찌하리


사월에 걸려 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가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4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4월엔 그대와 나

알록달록 꽃으로 피어요

빨강 꽃도 좋고요

노랑 꽃도 좋아요

빛깔도 향기도 다르지만

꽃 가슴 가슴끼리 함께 피어요

홀로 피는 꽃은 쓸쓸하고요

함게 피는 꽃은 아름다워요

인연이 깊다 한들

출렁임이 없을까요

인연이 곱다 한들

미움이 없을까요

나누는 정

베푸는 사랑으로

생각의 잡초가 자라지 않게

불만의 먼지가 쌓이지 않게

햇살에 피는 꽃은

바람에 흔들려도

기쁨의 향기로 고요를 다스려요

꽃잎 속에 맑은 이슬은 기도가 되지요

4월엔 그대와 나

알록달록 꽃으로 피어요

진달래도 좋고요

개나리도 좋아요


사월 / 조성심


사월, 사월

사월을 입 속에서 되뇌이다보면

파아란 잎사귀가 돋아난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사월에 어찌 자리를 묵힐 수 있으랴

그냥 길을 보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눈 속에 들어오는 건

어제와 또 다른 숨막히는

사월의 드라마

그냥 빈 마음만 준비해도

사월 내내 누구나

초대받은 손님이 된다.


4월 나무 / 최연창


움직임이 없다는 것

소리가 없다는 것

그것은 생명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움직임도 없이

소리도 없이

4월의 나무는

생명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움을 틔우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록의 잎들을

가득 품고

푸른 봄을 이루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커다란 몸부림이었고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침묵의 노래였습니다


4월이 오면 / 권영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4월의 거리에 서면 / 노태웅


벗이여

체념의 행렬 깨우던 이 거리에

4월이 오거든

마음에서 멀어진 그날의 함성

우리 모두의 바램 다시 한번 기억해다오

창 밖 향나무

당신을 위해

몸을 태워 향기 날릴 때

항거했던 아픈 가슴

영원한 울림 그날을 기억해다오

벗이여

웃음으로 가득한 이 거리

다시 4월이 오거든

그때 많은 꿈 묻어둔 거리를 거닐며

어제의 함성에 귀 기울여다오

4월의 거리에 서면.


4/ 정연복


악의 없는 거짓말이

너그럽게 용납되고도 남는

만우절로 시작되는 4월은

통이 무척 큰 달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걷잡을 수 없이

지천으로 피는 꽃들 때문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꽃뿐이랴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초록 풀들과 민들레 앞에서

거짓과 기만의 세상은

한풀 꺾이고 만다


4월의 노래 / 정호승


사월이 오면

저 산을 뽑으리라

산새도 살지 않는

사람들도 쫓겨간

저 붉은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지리라

개꽃이 피고

개꽃잎이 흩어져도

저 붉은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지고

자유의 무덤 앞을

떠나가리라


, 4/ 이시영


감자 대를 뜯다가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오늘도 동냥 나가 나는 너를 기다렸다.

강 건너 버들잎 날리면

보리밭 둑을 타고 너는 오리라

뒷산에 진달래 붉게 울면

목발을 짚고 너는 오리라

땀에 젖은 얼굴 빛나는 함성

그날의 총탄 속을 뚫고

너는 다시 오리라

거친 땅이 낳은 아들 문둥이 아들

누더기 속에 간 오히려 깨끗한 사랑

두 팔에 덥석 안을 날은 오리라

아아 몇몇 해던가

먹구름을 몰아내면 또 같은 먹구름

소나기를 피하면 더 거센 소나기

너는 오지 않고 쉽사리 오지 않고

종살이에 지친 누이들

칡꽃이 희게 울 때 또 다른 주인 찾아 몸 팔러 갔네

종달이 빈 밭에 날 때

힘깨나 쓰는 동생들 서울 가 떠돌이가 되었네

애비 같은 비렁뱅이 되었네

아아 몇몇 해던가 기다림의 나날

한번은 박차고 나아가 맞이해야 할 날

가난하지만 자랑스럽게 우리가 우리 차지해야 할 날

크나큰 슬픔의 날 별빛 해방의 날 오리라

바로 너는 오리라 꽃수레 타고

가랑잎만 굴러도 나는 너를 기다렸다.

다리 밑 움막 열고 나와 나는 너를 기다렸다.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 정해종


우수 경칩 다 지나고

거리엔 꽃을 든 여인들 분주하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살아 있으니

말을 걸어 달라고 종알대고

마음속으론 황사바람만 몰려오는데

4월이면 바람나고 싶다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나서

마침내 바람이 되고 싶다

바람이 되어도 거센 바람이 되어서

모래와 먼지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

어느 하늘 한족을 자욱이 물들이고 싶다

일렁이고 싶다


4월 엽서 / 정일근


가슴으로 읽는 시] 사월 비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꽃잎 사이

착하고 여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의 시편들을

날려 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있습니다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월 비 / 이제하


보소, 보이소로 오시는 사월 가랑비

헤어진 여자 같은 사월 가랑비

잔치도 끝나고 술도 깨고 피도 삭고 꿈도 걷히고

주머니마저 텅텅빈 이른 새벽에

가신 이들 보이는 건널목 저편

사랑한다, 한다 횡설수설하면서

어디까지 따라오는 사월 가랑비


, 사월에 / 이재무


꽃이 피는 속도를 그대 아는가

시속 40Km

남에서 북으로 나는 달리며

숨이 가쁘다네

저 사랑의 속도

뒤따르며 내 쉽게 지치는 것은

몸이 지친 탓만이 아니라네

꽃으로 살지 않고

함부로 꽃 사랑하고 노래한 죄

저리 커서 달아나는 님

길의 고비마다 불쑥 얼굴 내미는

돌팍과 자갈의 충고

그걸 알고 부르튼 마음의 맨발바닥

꽃이 피는 속도에 숨이 가빠서

나는 슬프네 나는 기쁘네


4/ 장석주


금치산자 같은 4월이 왔다간다

사는 게 왜 이렇게 시시하지?

하는 얼굴을 하고

방부 처리되지 않은 추억들이

질척거리는 침출수를

삶의 빈 틈으로 조금씩 흘러보낸다

개척자는 아니지만 무능이

뼈에 사무치는 것은

일품요리 같은 여자와의 연애가

곧 끝나고 말리라는 예감 때문이다

무능과 게으름은

내 삶에 붙은 이면옵션이다

나쁜 패를 잡고 전전긍긍하는 노름꾼에게도

4월이 오고 내게도

사지를 절단한 편지가 도착하고

끔찍한 날들이 이어진다

머리 없는 남자가

낚시터로 가는 길을 묻는다


4월에는 / 이명희


4월의 하늘은 친절하고 햇살은 상냥 합니다

담장에 기대인 목련의 성근가지에도 하얀 꽃이 피고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그리운 소식들이

한꺼번에 들려 올 것 같습니다

쌀쌀한 마음을 거두고 포근한 무릎을 내민

그대의 살 내음에 취하고 싶은 날

내 맘의 위안이고 희망인 그대를 만나기 위해

땅을 일궈야 하겠습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꽃씨를 뿌려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인연으로 시작하는 사람들과

다시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설렘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희망의 밭을 기름지게 일궈야 하겠습니다.


사월의 꽃 / 김경숙


전국은 비상사태다

봄바람에 꽃들이

참았던 웃음 보내느라

하루해가 짧다고

노을 붙잡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밤이면 달빛 끌어안더니,

밤낮 가리지 않고

함박웃음 터뜨려 유혹하더니,

향기에 취한 사월

흔들리며 걸어간다

꽃바람 따라 어디든


4월의 만남 / 김덕성


함께 사는 세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정이건 애정이건 만남은

정이 오가면서

믿음이 생기게 되어

비로소 사랑의 꽃 피게 되나니

4월의 만남으로

미덥지 않는 선거용 악수가 아닌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한 믿음으로

나누는 사랑의 악수가 되고

신중한 한 표 한 표

깨끗한 선거로 뿌리를 내리는 4

4월의 만남은

우리에게 행복이요 축복이어라


4월에 내리는 봄비 / 나상국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삼동추위 떠나가는 자리

봄 언제 올까, 기다리는데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리더니

며칠째 몸져누운 파리한

온기마져도 사라진

텅 빈 허허로운 벌판 같은 방안으로

우울이 한 웅큼씩 찾아들더니

저렇게 봄비가 내린다


중년의 가슴에 4월이 오면 / 이채


꽃이 예쁘기로

앞서고 뒤서지 아니하니

4월의 꽃이여!

중년의 꽃이라고 꽃마저 중년이랴

내 꽃의 빛깔이 바래지 않는 것은

한때의 청춘이 그리운 까닭이요

내 꽃의 향기가 시들지 않는 것은

한때의 사랑을 못 잊는 까닭이다

구름은 흘러도 흔적이 없고

바람은 불어도 자취가 없건만

구름 같고 바람 같은 인생아!

,

사람의 주름은 늘어만 가는가

꽃이 예쁘기로

피었다 아니 질 수 없으니

4월의 꽃이여!

그대, 젊음을 낭비하지 마오

지나고 보니

반 백년 세월도 짧기만 하더이다


4월의 환희 / 이해인


깊은 동굴 속에 엎디어 있던

내 무의식의 기도가

해와 바람에 씻겨

얼굴을 드는 4

산기슭마다 쏟아 놓은

진달래꽃

웃음소리

설레이는 가슴은

바다로 뛴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을 향해

바위 끝에 부서지는

그리움의 파도

못자국 선연한

당신의 손을 볼 제

남루했던 내 믿음은

새 옷을 갈아입고

이웃을 불러 모아

일제히 춤을 추는

풀잎들의 무도회

나는

어디서나 당신을 본다

우주를 환희로 이은

아름다운 상흔을

눈 비비며 들여다본다

하찮은 일로 몸살하며

늪으로 침몰했던

초조한 기다림이

이제는 행복한

별이 되어

승천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하신 당신 앞에

숙명처럼 돌아와

진달래 꽃빛 짙은

사랑을 고백한다


4, 진해만 / 정일근


바다는 푸른 접시에 담겨

신의 아침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신은 아페리티프를 주문해 놓고

노래하듯 시를 읽거나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듣는다

세일러복을 입은 갈매기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지나간다

향커피 한 잔이 뜨거워지는 사이

바다의 표정은 세룰리언블루에서

색스블루(saxe blue)로 변해가고

사월 바람에 꽃잎 몇 장 날아와

접시 속의 가벼운 섬으로 앉는다

, 하고 꽃잎들을 불어본다

자욱한 꽃향기 바다를 덮는다


사월 / 김현승


플라타너스의 순들도 아직 어린 염소의 뿔처럼

돋아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는 그들 첨탑 안에 든 예언의 종을 울려

지금 파종의 시간을 아뢰어 준다.

깊은 상처에 잠겼던 골짜기들도

이제 그 낡고 허연 붕대를 풀어버린 지 오래이다.

시간은 다시 황금의 빛을 얻고,

의혹의 안개는 한동안 우리들의 불안한 거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검은 연돌(煙突)들은 떼어다 망각의 창고 속에

넣어 버리고,

유순한 남풍을 불러다 밤새도록

어린 수선(水仙)들의 쳐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개구리의 숨통도 지금쯤은 어느 땅 밑에서 불룩거릴 게다.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사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迷信)의 달……


사월의 시 / 이해인


꽃 무더기 세상을 삽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

오만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양 활짝들

피었답니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입니다.

새삼스레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감사한 맘이고,

고운 향기 느낄 수 있어

감격적이며,

꽃들 가득한 사월의 길목에

살고 있음이 감동입니다.

눈이 짓무르도록

이 봄을 느끼며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느끼며

두발 부르트도록

꽃길 걸어볼랍니다.

내일도 내 것이 아닌데

내년 봄은 너무 멀지요.

오늘 이 봄을 사랑합니다.

오늘 곁에 있는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4월이 문을 엽니다.


4월의 불꽃 / 장수남


그가 돌아왔다

뜨거운 미소로 창을 두드리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419민주의거

영원한 민주의 불꽃

4월 진달래 삼천리 흐드러지게

붉게 꽃피우리라.


4/ 오세영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4월에 / 채호기


겨울이 다 가도

봄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깡깡한 얼음덩어리 속에서

불쑥 몸을 돌려

꽃으로 변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 깨어져 날카롭게 일어서는

동지들의 아름다움이

심장을 쩡쩡 울린다.

잎 트고 어지러이 봄꽃들 피어나도

얼음은 얼음

영하 20도의

차갑고 분명한 정신으로

오월을 맞는다

    

4월과 5/ 박정만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봄빛보다 찬란하게 사라져간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너는 나를 그리며 더 큰 웃음을 웃고 있지만

네가 던진 함성도 돌멩이도 꿈 밖에 지고

모호한 안개, 모호한 슬픔 속으로

저 첫새벽의 단꿈도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4월과 5월 사이, 사랑아

세월의 앙금처럼 가라앉아

그것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되고

그 뿌리 속에 묻어 둔 불씨가 되는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파아란 보랏빛 얼굴로 웃고 있지만

 

4월의 향기를 / 윤보영


4월은

향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3월의 피었던 꽃향기와

4월에 피게 될 꽃향기

고스란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눈빛가지 향기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향기를 나누며

향기를 즐기며

아름다운 4월로 만들고

싱그러운 5월을 맞을 수 있게

마음을 열어 두어야겠어요

4월에는

한달 내내 향기속의 나처럼

당신에게도 향기가 났으면 더 좋겠습니다

마주보며 웃을 수 있게

그 웃음이 내 행복이 될 수 있기에..


4/ 안재동


사회의 엘리트 그룹에 진입하는 지름길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수천 편의 응모작품들 중 단 한 사람의

작품만이 행운의 여신에 의해 선택되는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해외유학 길에 올라 상처받지 않고

버젓하게 박사학위를 따오는 일도

돈도 있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하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십 내지 수백, 아니 수천 명이나 되는

종업원의 밥줄이 걸린, 크고 작은

사업체 하나 망하지 않게 운영하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 무더위나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일 년 내내 막노동판에서

등짐을 져다 나르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 없어

세월아 네월아 하고 빈둥거리는 일도

참 어려운 일이다.

고통스러운 기나긴 겨울 동안 묵묵히,

바야흐로 세상 모든 나무들이

다시 푸른 싹을 틔우며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자태를 갖추는데

세상 모든 꽃들이

오래전 잃어버린 얼굴을 찾기나 한 듯

감동처럼 느껴지는 새 얼굴과

짙은 향기를 세상에 들이미는데

긴 시간, 내 속의 살았으되 죽은 영혼,

저 나무와 꽃들처럼 참 어려웠던 듯

쉬운 듯

이제 소생했으면 하는, 4.


4월의 노래 / 정연복

꽃들

지천으로 피는데

마음 약해지지 말자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진달래 개나리의

웃음소리 크게 들리고

벚꽃과 목련의

환한 빛으로 온 세상 밝은

4월에는 그냥

좋은 생각만 하며 살자.

한철을 살다 가는 꽃들

저리도 해맑게 웃는데

한세상 살다 가는 나도

웃자 환하게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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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시모음


3/ 오세영

 

흐르는 계곡 물에

귀기울이면

3월은

겨울옷을 빨래하는 여인네의

방망이질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만발한 진달래 꽃숲에

귀기울이면

3월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오는 것 같다.

 

새순을 움 틔우는 대지에

귀기울이면

3월은

아가의 젖 빠는 소리로

오는 것 같다.

 

아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연녹색 잎들이 손짓하는 달, 3월은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 외치던

만세 소리로 오는 것 같다.

 

3, 들풀처럼 / 김지헌


초록의 계엄령

봄의 군단이 질주하고 있다

이제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리라

 

어깨동무하고 일제히

함성 내지르는 풀잎 시위대

 

무참히 꺾이는 한 시대의 반역자

강철 군단에도 봄은 온다

 

만 겹 철문 열어제치고

초록 들불 번진다

 

3월을 기다리며 / 나명욱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다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풀고

따뜻한 공기와 맑은 햇살을

가슴 아름 품을 수 있는 아름다운 3

 

3월의 첫 날에는

창문의 겨울 커튼도 밀어내고

구석구석 쌓여있던 먼지들도 털고

창살마다 하얀 페인트를 다시 칠하리라

 

베란다의 그 동안 버려두었던

파랑 빨강 하얀 화분들도 깨끗이 닦고

베고니아 피튜니아 꽃도 심을 준비를 하리라

3월이면 거리에도 꽃들의 향기로 가득할 것이다

 

3월에는 / 최영희

 

어디고 떠나야겠다

 

제주에 유채꽃 향기

늘어진 마음 흔들어 놓으면

얕은 산자락 노란 산수유

봄을 재촉이고

들녘은 이랑마다

초록 눈,

갯가에 버들개지 살이 오르는

삼월에는

어디고 나서야겠다

 

봄볕 성화에 견딜 수 없다.

 

3/ 임영준

 

다소곳한 햇살이 눈부시다

긴 잠에서 깨어났더니

담장이 조금 낮아졌구나

귀기울이면 모두 가까이 있는 것을,

대문을 활짝 열고

주단이라도 깔아야 할 것 같은

간지러운 나날이다

 

삼월 / 임영조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본다.

 

3/ 문인귀

 

나의 키만큼

삼월을 보태면

삼월은 나의 키만큼

발돋움한다

 

삼월 속의 태양은

연두색 종이를 오리며

한뼘만한 나의 뒤뜰에

바둑돌을 퉁긴다

 

나는 문을 열고

나의 키만한 겨울을 집어내면

나의 이마 높이로

태양이 내려온다.

 

3/ 박금숙

 

거친 눈발이 몰아치거나

느닷없는 천둥이 치거나

폭우가 쏟아지거나 하는 것은

참을성 없는 계절의

상투적인 난폭 운전이다

 

3월은

은근히 다림질한 햇살이

연둣빛 새순 보듬어주고

벚나무 젖빛 눈망울

가지를 뚫고 나와

연한 살내 풍기는

부드러움이다

 

꽃샘추위 시샘을 부려도

서둘러 앞지르지 않고

먼 길 돌아온

도랑물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일 줄 아는

너그러움이다

 

3월은

가을에 떠난 사람

다시 돌아와

추웠던 이야기 녹이며

씨앗 한 줌 나누는

포근함이다

 

3/ 김태인


아지랑이 밟으며

들로 산으로 뛰놀던 개구쟁이 녀석

때 구정물 뒤집어쓰고 코 풍선 불며

탱자나무 둔덕 잔디에 누워 깜빡 잠들고

가시에 찔려 꼼짝 못하고

탱자나무에 걸려 있는 봄볕

가시 하나 뽑아

부풀려진 풍선에 심술

지나던 하늬바람

숨어 있던 풍선 속 겨울을

북쪽으로, 북쪽으로

 

3월이 오면 / 이길원·

 

산으로 오르겠습니다

봄눈 질척이는 등산로 따라

이제 막 눈뜬 시냇물 소리에

가슴 헹구고

남쪽 바다 거스른 바람으론

얼굴 단장하겠습니다

옅은 새소리에 가슴 헤치면

겨울 나뭇가지 물오르는 소리.

 

산골 어디쯤 숨어 있는 암자 찾아

넙죽 절하고

두 손 모아 마음 접으면

선인(仙人) 사는 곳 따로 있을까

석양 등진 길손의 헤진 마음

어느 바람인들 못 헹굴까

 

칼바람에 웅크린 꽃잎

숨기던 화냥기 못 참아

입술 내밀어 보내는 교태에

가쁜 숨 몰아 쉬는

하늘 걸린 산

산으로 오르겠습니다.

 

3/ 홍일표

 

수암사 오르는 길은

갈참나무, 병꽃나무, 오리나무가

모두 입 다물고 묵상 중이었다

가장 먼저

산수유 노랗게 허공에 떠 있었다

쉬임없이 소곤소곤 종알대고 있었으나

골짜기의 물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좁은 산길 울퉁불퉁 박혀 있는 돌들이

툭툭 발목을 잡았다

줄레줄레 따라오던 잡념들은

그만 슬그머니 나를 놓아버리고,

수암사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어지는 고요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비로소 맑게 빛나는

바람소리, 새소리

고요 속에서 뭉클 내가 만져지는 순간

꿩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올랐다

 

3월의 마음 / 이풍호

 

꿈속에서

어딘가를 아득히 오고가다

깨어난 새벽

 

마시면 기침할 것 같은

솔내음

 

바람에 스며들어

잎새를 돋운다.

 

촉촉이 젖어오는 땅위를

쉬지 않고 맨발로 밟으면

이 아침에는

생각들이 넉넉해진다.

 

오직 사랑하므로

살아있음이여

 

그리움은

그립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다.

 

3/ 이생진

남쪽 공단에 마이크를 들이댄다

올봄에 계획이라도 있으면?

저는요 올봄에 적금 타는 게 있거든요

그것으로 아버지 경운기 사드릴래요.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

얼굴을 숨겨놓은 검은 스피커 상자

그것만 봐도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아버지에게 경운기 사 드릴래요

농촌에선 그게 필요하거든요.

 

마이크는 꺼지고

봄소식 전하는 노래가 들려온다

남쪽엔 고운 마음씨 때문에

고운 봄이 오겠다

 

3/ 조은길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3월은 말이 없고 / 황금찬

 

얼음이 풀린 논둑길에

소리쟁이가 두 치나 솟아올랐다.

이런 봄

어머님은 소녀였던 내 누님을 데리고

냉이랑 꽃다지

그리고 소리쟁이를 캐며

봄 이야기를 하셨다.

 

논갈이의 물이 오른 이웃집

건아 애비는

산골 물소리보다도 더 맑은 음성으로

메나리를 부르고

산수유가 꽃잎 여는 양지 자락엔

산꿩이

3월을 줍고 있었다.

 

흰 연기를 뿜어 울리며 방금

서울행 기차가 지나가고

대문 앞에서 서성이며

도시에서 올 편지를 기다리는

정순이의 마음은

3월 아지랑이처럼 타고 있었다.

 

3월이

두고온 고향에도

찾아왔을까

천 년 잠이 드신 어머님의 뜰에도

이제 곧 고향 3월을

뜸북새가 울겠구나.

 

고향을 잃어버리면

봄도 잊고 마느니

우리들 마음의 봄을 더 잃기 전

고향 3월로 돌아가리라.

고향의 봄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1.  가는 봄 3/ 김소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짇


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 잊게,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때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짇   

          

2.  경칩 / 박성우  

봇물 드는 도랑에

갯버들이 간들간들 피어

외진 산골짝 흙집에 들었다

새까만 무쇠솥단지에

물을 서너 동이나 들붓고

저녁 아궁이에 군불 지폈다

정지문도 솥뚜껑도

따로 닫지 않아, 허연 김이

그을음 낀 벽을 타고 흘렀다

대추나무 마당에는

돌확이 놓여 있어 경칩 밤

오는 비를 가늠하고 있었다

긴 잠에서 나온 개구락지들

덜 트인 목청을 빗물로 씻었다

황토방 식지 않은 아침

갈퀴손 갈큇발 쭉 뻗은

암수 개구락지 다섯 마리가

솥단지에 둥둥 떠 굳어 있었다

아직 알을 낳지 못한

암컷의 배가 퉁퉁 불어

대추나무 마당가에 무덤이 생겼다

 

3.  맑은 봄날 / 전영애

 

아직은 차가운 3

눈부신 청명

흙밑에 엉겨 있는

생명들의 연록빛 꼬물거림이

다 어려 비칠 것 같다

 

그 청명을

내다본다

헐레벌떡 집 한 채를

겨우 짓고

혹은 그나마 못 짓고 죽을 내가

 

4.  3 / 김광섭

 

3월은 바람쟁이

가끔 겨울과 어울려

대폿집에 들어가 거나해서는

아가씨들 창을 두드리고

할아버지랑 문풍지를 뜯고

나들이 털옷을 벗긴다

애들을 깨워서는

막힌 골목을 뚫고

봄을 마당에서 키운다

수양버들 허우적이며

실가지가 하늘거린다

대지는 회상

씨앗을 안고 부풀며

겨울에 꾸부러진 나무 허리를 펴 주고

새들의 방울소리 고목에서 흩어지니

여우도 굴 속에서 나온다

3월 바람 4월비 5월꽃

이렇게 콤비가 되면

겨울 왕조를 무너뜨려

여긴가 저긴가

그리운 것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

 

5.  3/ 김명희

 

3월은 느티나무 우듬지로 온다

얇은 햇살도 가지 끝으로 기대어 선다

아직은 잔설이 남아 발이 시리다

나는 가끔 발이 시려 잠을 설치곤 한다

발 아래 식구들 모여 살았던 곳

잔뿌리로 길을 내며 살을 비비고

온 몸으로 물을 나르는, 사이사이

유난히 싱그럽게 깨어나는 가지가 있다

그러나, 아직은 뿌리에 물을 모으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서둘러 몸만 빠져 나간다고 해서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보다

숨 가쁜 시간이 지나가고

흔들어 깨우는 바람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난 후, 가까스로 눈을 뜨는 나는

시린 두 손 합장하며 안도의 숨을 쉰다

작은 벌레 한 마리

점자로 가만가만

뿌리의 숫자를 더듬는다

 

6.  3/ 나태주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

새들은 우리더러

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

조르는구나

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

지껄이라 그러는구나

, 젊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새옷을 갈아입고

새 가방을 들고

새 배지를 달고

우리 앞을 물결쳐

스쳐가겠지

그러나 3월에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

 

7.  3/ 문인수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8.  3/ 에밀리 디킨슨

 

3월이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일전에 한참 찾았거든요

모자는 내려놓으시지요

아마 걸어 오셨나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 걸 보니

그래서 3,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나요?

, 3월 바로 저랑 이층으로 가요

말씀드릴 게 얼마나 많은지요

 

9.  3/ 임영조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 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 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말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을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가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 본다

 

10.   3/ 장석주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쇄빙선 같이

치욕보다 더 생생한 슬픔이

내게로 온다

슬픔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모자가 얹혀지지 않은 머리처럼

그것은 인생이 천진스럽지 못하다는 징표

영양분 가득한 지 3월 햇빛에서는

왜 비릿한 젖 냄새가 나는가

산수유나무는 햇빛을 정신없이 빨아들이고

검은 가지마다 온통 애기 젖꼭지만한 노란 꽃눈을 틔운다

3월의 햇빛 속에서

누군가 뼈만 앙상한 제 다리의 깊어진 궤양을 바라보며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3월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는 이들은

부끄러워하자

그 부끄러움을 뭉쳐

제 슬픔 하나라도 집어낼 일이다

11.  3/ 헤세

 

초록빛 새싹으로 덮힌 기슭에

벌써 제비꽃 푸름이 울려 퍼졌다

오직 검은 숲을 따라서만

아직 눈이 삐죽삐죽 혀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방울방울 녹아내리고 있다

목마른 대지에 흡인되어

그리고 저 위 창백한 하늘가에는

양떼구름이 빛 반짝이는 떼를 이뤄 흘러가고 있다

사랑에 빠진 피리새 울음은 나무 덤불 속에서 녹는다

사람들아, 너희도 노래하고 서로 사랑하라

 

12. 3월과 4월 사이 / 안도현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 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 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13.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 , ,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14. 3월 삼질날 정지용

 

, 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 머리

삼월 삼질 날,

질나라비, 훨 훨

제비 새끼, 훨 훨

쑥 뜯어다가

개피 떡 만들어

, 호 잠들여 놓고

, , 잘도 먹었다

, , 때때 중

우리 애기 상제로 사갑소

 

15. 3월에 / 이해인

 

단발머리 소녀가

웃으며 건네준

한 장의 꽃봉투

새봄의 봉투를 열면

그애의 눈빛처럼

가슴으로 쏟아져오는

소망의 씨앗들

가을에 만날

한 송이 꽃과의 약속을 위해

따뜻한 두 손으로

흙을 만지는 3

나는 누군가를 흔드는

새벽 바람이고 싶다

시들지 않는 언어를

그의 가슴에 꽂는

연두색 바람이고 싶다

 

16. 3월에 오는 눈 / 나태주

 

눈이라도 3월에 오는 눈은

오면서 물이 되는 눈이다

어린 가지에

어린 뿌리에

눈물이 젖어 젖는 눈이다

이제 늬들 차례야

잘 자라거라 잘 자라거라

물이 되며 속삭이는 눈이다

 

17. 3월의 바람 속에 / 이해인

 

어디선지 몰래 숨어들어 온

근심, 걱정 때문에

겨우내 몸살이 심했습니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내 마음의 산기슭에도

꽃 한송이 피워 내려고

바람은 이토록 오래 부는 것입니까

3월의 바람 속에

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

아직은 시린 햇볕으로

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 ...

당신을 만나는 길엔

늘상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바람이 좋고

바람이 좋아 살아 있는 세상

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

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

당신이 계시기에

나는 먼데서도

잠들 수 없는 3월의 바람

어둠의 벼랑 끝에서도

노래로 일어서는 3월의 바람입니다

 

18. 3월의 시 / 워즈워드

 

수탉은 꼬기오

시냇물은 졸졸

작은 새들은 짹짹

호수는 번쩍번쩍

푸른 들판은 햇볕에 졸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

힘센 자와 같이 일을 하네

소들은 풀을 뜯으며

고개 한 번 쳐들지 않네

마흔 마리가 한 마리같이!

패한 군사들처럼

흰눈은 물러가고

헐벗은 언덕 위에서 쩔쩔매네

소년농부ㅡ 이따금 ㅡ

환호성을 울리고

산에는 기쁨이

샘물에는 숨결이

조각구름은 떠가고

푸른 하늘은 끝도 없어라

비는 그치고 간데 없네!

 

19. 3, 플라타너스 / 마경덕

 

도로변 플라타너스기둥

일렬로 서있다

지나가던 봄이 죽었나 살았나 귀를 갖다댄다

얼룩버짐 온몸에 퍼져있다

도심을 가로지른 전선 아래

버스가 줄지어 달려가고

몸통만 남은 플라타너스

머리 위 전선을 비집고

막무가내 뭉특한 모가지를 디민다

퍽퍽, 맨몸으로 허공을 들이받는

, , 가지 끝

짐승 냄새가 난다

나무는 지금

터진 살을 꿰매는 중.

길을 가다가

성난 뿔을 보았다

허공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릴 들었다

 

20. 3월 해 / 헤세

 

이른 더위에 취해

노랑나비 하나 비틀거리고 있다

창가에 앉은 채 끄덕끄덕

노인 하나 졸며 쉬고 있다

봄잎을 뚫고 노래하며

한때 나비는 집을 떠났었다

그 많은 거리의 먼지가

그 털 위에 내렸다

꽃 피는 나무와

나비들이 그 노란빛을

아직은 늙히지 않았어도

오늘까지만은 같은 것인 듯 보여도

하지만 색깔과 향기는

열어졌고 비워졌다

빛은 서늘해지고 공기는

숨 쉬기 더 힘들고 어렵게 되었다

봄은 나직이 윙윙거린다

그 노래, 아리따운 노래를

하늘이 푸르고 희게 흘러간다

나비가 황금빛 퍼덕임으로 날아간다

 

21.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22. 處容 斷章 김춘수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23. 춘분 / 권 천학

 

봄이면 눈이 없어도

눈 뜰 줄 아는 나무처럼

땅심 깊숙이 물관부를 열고

투명한 물길을 여는 나무처럼

초록 잎새 끝까지 밝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나무처럼

눈감고 있으면서

속눈 틔우는 나무처럼

실버들 가지 연두 빛으로

몸 트기 시작하는 춘분 때쯤

환절기의 몸살감기를 앓는

내 삶의 낮과 밤

일교차 심한 봄추위 속에서

어느새 새 촉을 뽑아 올리며

푸릇푸릇 몸을 튼다

 

24. 춘분 / 노천명(1912 1957)

 

한고방 재어놨던 석탄이 퀭하니 나간 자리

숨었던 봄은 드러났다

"얼래 시골은? 나왔갔늬이"

남쪽 기집아이는 제 집이 생각났고

나는 고양이처럼 노곤하다

 

25. 춘분 / 원재훈

당신과 나의 그리움이

꼭 오늘만 같아서

더도 덜도 말고, 하루 종일 밤과 낮이

낮과 밤이 잘 빚어진

떡 반죽처럼 만지면 기분 좋을 때,

내 슬픔, 내 기쁨, 꼭 오늘처럼 당신이 그리워서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싶어라

당신의 눈물로 나의 손을 씻고

가끔씩 나의 창문을 두드리는 허전한 나뭇잎의 마음을

잡고 싶어라

새순은 돋아나는데

아장아장 봄볕이 걸어오는데

당신이 그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살고 싶어라

 

26. 춘분 / 이성교

 

해야 해야 나오너라

구름 타고

물 건너고

복짓개 들고

나오너라

구름다리 넘으면

목 마른다는데

그때 한 입 뿜어

짚신 신고 나오너라

꽃은 바람에

펄펄 날려도

사랑은 한결같이

높기만 하여

흙탕물 먼 곳에

질펀히 번져 가누나

춘분은

해와 달이

입맞추는 날

내사

강릉 색시를

잊을 길 없어

봄볕에 나폴대는

긴 갑사댕기를

어느 뉘 가슴에 묻어주랴

 

27. 춘분 / 장승진(1974 - ) 전남 장흥

 

낮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방치됐던 묵정밭에서

잔돌멩이들이 눈을 뜹니다

볕 좋은 하루가 노릇노릇 익어갑니다

너무 익은 부분을 바람이 식혀줍니다

그 가운데 당신이 놓아둔 삽 한 자루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납니다

돌아온 시력을 다시 끌어당깁니다

참새가 밭두둑에 앉아 목을 빼더니

무리를 찾아 떠나갑니다

바람이 참새를 힘껏 밀어줍니다

기억의 저편, 우두커니 선 나무에

초록 기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잎이 자라는 대로

운명의 손금도 알 수 있겠지요

당신이 지펴 논 봄기운이

초록 불꽃으로 타올라 세상을 달굽니다

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이 불꽃의 일렁임 때문이겠지요

이제 바람과 불꽃에

음습한 나를 말려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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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시모음

 

1.2월 /박동수

 

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의

틈을 채우며

이별의 아픔과

만남의 즐거움의 사이에서

기다림의 미덕을

익혀가는 2월

 

꽃을 실은 봄은

아름다운 2월의 등을 딛고

환한 봄의 가슴을 열어

봄을위해 남겨둔

곱고 고운 배려할 줄 아는 땅

2월의 가슴에

씨앗을 심게 되는 줄은

 

2.2월 혁명 /임영준


이제

한 꺼풀 벗고

당당히 나서 볼까

핑곗김에 둘렀던

장막도 걷어야지

햇살 마중 나가던

새순의 속삭임이

불을 지폈다

 

3.2월에 띄우는 겨울 서한 /정윤목

 

여기 저기

푸르렁 푸르렁

날개 퍼덕이는 참새들

보여 주네요

그대 고우신 모습

 

한 모롱이 돌아 나가면

검푸른 간월 포구 앞 바다정경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것

쫘악 내래 편

갈매기 그 곁 또 다른 늠름한 갈매기들

 

몰라도 좋아요

이대로 그냥 좋아요

웃으면 더 좋아요

크으게 활짝 웃으면

아아주 대만족이죠

 

삶이란 늘 겨울같은 것

겨울처럼 차가와도 좋아요

얼음처럼 냉혹하고 녹아 물이 되어도 좋아요

여기, 있음에

오! 님께서 보내주신 선물, 비장한 목숨이여

 

4.2월의 길섶에서 /은파 오애숙

 

1월의 첫 단추

잘못 끼웠다고 주저 앉아

낙망하지 않고 일어나

새로운 결심

가슴 속에 박제 시키어

잘못 끼운 단추 다시 풀어

재 자리 끼워 넣고

남은 단추 11개 바라보며

다시 세파 휘모라쳐 온다해도

푸른동산 기대로

희망의 나래 펼치어서

앞만 보고 달리는 2월 입니다


5.2월이 가네! /김안로 


겨울 꽁무니 따라 짧은 2월이 가네!

추위를 타는 사람들

재촉하지 않아도 보폭은 넓어

걸음 빠르더니, 두고 가는 것 없이

겨울 떠나네!

그래서인가

겨울은 그리움만 길다.

거칠고 차갑더라도 순간

한 이틀 따뜻하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마른 겨울

대지가 목말랐는데도

죽은 것처럼

참고 있던 잎눈도 꽃눈도

어둠을 헤집고 나오는 별처럼

앞 다투어 빛을 발하니

2월, 저만치 멀어지네!

 

6.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희숙


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별이 서툰 자를 위해

조금만 더 라는 미련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미처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아직은 이라는 희망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갓 사랑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리운 너에게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따스한 가슴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7.2월을 보내며 /藝香 도지현


삭막한 빈 뜰에

노란 복수 초 움트게 하고

투박한 가지 눈 내려도

발그레한 매화 피워 내어

경이로움, 눈뜨게 하는

귀한 달 가며 속삭이는 말

녹의홍상 입은 새색시가

단아한 걸음으로 온다고

반가이 맞아 주라 하며

애상에 젖는 마음 다독여 주는데

 

8.2월의 시 /이지영

 

전철역 공중전화 부스에서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보내라는

음성을 바람에 날리고

안산행 열차를 탄다

나를 태운 열차는

꿈 속에서

당신이 사는 마을로 달리고

마음은

꽃 수풀을 지나 호수에서 흔들린다

하루 해는 너무 짧고

겨울 저녁은 빨리 어두워지는데

이 저녁을 헤매는 맨발에

감싸주는 당신이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

순수의 꽃잎 열고 이 세상을 살고 있다.

 

9.2월의 노래 /목필균

 

잊혀진 이별이 어디 있으랴

내가 너였어도

네가 나였어도

꿈길 만이 길이라

동백꽃 흥건하게 내려앉는데

입춘 대문 활짝 열면

큰 호흡으로 들어서는 햇살로

겨우내 동여 맨 옷고름 풀어내면

지천으로 피어날 꽃들

홍매화 피어나고

눈 비비면 일어설 산수유도

네 숨결로 노래하는데 ​

어찌 내가 네게로 가지 않을까

먼 길 거슬러 올라가며

 

10.2월의 어느 날(산유화) /은파 오애숙

 

2월의 어느 날

사윈 산야에 봄햇살

살며서 미소 할 때

호젓이 피어있는

너의 살폿한 향그러움 

희망의 샘물이런가

설레임 가~아득한

첫사랑의 풋풋함으로

동면에 들어선 내게 

사윈 심연 속에 

다시 피어난 산유화가

날 새노래로 깨운다

 

11.2월 예찬 /양광모

 

이틀이나

사흘쯤

더 주어진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니?

2월은

시치미 뚝 떼고

빙긋이

웃으며 말하네.

겨울이 끝나야

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봄이

시작되어야

겨울이

물러가는 거란다.

 

12.二月이 짧은 까닭을 /이 탄

 

二月이 짧은 까닭을

내작은 生의 戀人은 알까.

休暇를 기다리는

親舊의 패스포트에서

더욱 眞實한 날짜여.

「어느때고 우리들 중에서 누구 하나가 輸血을 받을 것이다.」

꼭 몇 년을 정하고 사는 것도 아닌 果園의 나무들

「왜 저렇게 눈썹은 어두울까 왜 저렇게 愛情의 全部를 모를까.」

우리들이 完熟하기엔

그 며칠이, 모자라는

二月이 짧은 까닭을 

내 작은 生의 戀人은 알까.

우리는 기다리며 살았지만

二月이 지나면

무엇을 기다렸는지

對答하지 못한다.

「그저 季節안의 雜貨, 

잠깐 帽子자도 쓸 時間에

氾濫하는 事情들.」

 

13.2월 /안수동

 

 자다말다

 북치는 봄비 기척에 벌

 떡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단전에 기를 모으니

 얼음장 낭심을 뚫고

 울큭불끈 꽃

 대를 드는

 그리움의 춘정 春情

 오랜 기다림의

 발기 勃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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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의  시 모음

《1》
1월의 기도

작자 미상

시작은 모름지기 완성에 이르는
첫 번째 작업임을 알게 하시고
그 결연했던 첫 마음이 변함 없게 해주시고
모든 좋은 결과는 좋은 계획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2》
1월의 기상

작자미상

시작은 모름지기 완성에 이르는
첫번째 작업임을 알게 하시고
그결연했던 첫마음이 변함없게 해주시고
모든 좋은 결과는 좋은 계획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시오

《3》
1월의 그리움

고은영

방패연을 날리던 종순 이 뒷꼬랑지에
작은 행복이 히죽 웃으면
복사뼈 드러난 가는 발목이 유난히 추워 보이던 방죽
1월에는 나무 팽이가 골목마다 팽팽 돌았지

바람 한 줄기 돌아내리는 자락
배고픔에 매몰되던 시간이
저 단층의 허름한 목조 집 대문에 이르기까지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걷다 보면 어슴푸레 날은 어둡고
따뜻한 우동 국물 한 사발이 언제나 그리웠지

살에는 바람의 등걸에 올라탄 방패연이
쩔쩔매며 기우는 황혼을 손사래 치고
깊어지는 추위를 타고 겨울의 저잣거리에서
가난한 것들은 가끔 서글픈 꿈을 품었지
그 소박한 꿈을 꾸는 동안은
춥게 구부린 목덜미가 따듯해 왔었어

그래 그래 거기에 우리의 늪지가 있었지
습하고 축축한 물관을 따라 졸졸 흐르던
가난한 사랑의 징표 같은 것
사방에 푸른 이끼로 덮인 세월마다
그리운 이들이 찍어 놓은 한 초 롬 슬픈 발자국들

《4》
1월 1일

공인배

엄머, 클랐네
내나이 한살 더먹었네
새해가 시작되고 20대가
지나가네..

엄머, 클랐네
친척들은 결혼하라 날리네
새해가 시작되고 잔소리는
흘려보내네

엄머, 클랐네.
내아이 분유 값 기저귀 값
새해가 시작되고 시작된
가족의 부양

엄머, 클랐네
조카들이 나에게 절을 하네
새해가 시작되고 조카들의
귀여운 압박

엄머, 클랐네
내 아들 군대간다고 날리 치네
새해가 시작되고 복학시기
마추려는 아들의 군 입대

엄머, 클랐네.
내 손주들이 날 보며 웃네
새해가 시작되고 손주들
보는 재미가 생긴 나

엄머, 클랐네
저 멀리 어머니가 보이네

《5》
1월의 밤

김기덕

한 해의 처마 밑에
나는 나의 가슴속을
몽땅 밖에 걸어 놓고 조언을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오가는 길손들의 시선을 모아
별빛 밝은 긴긴 이랑을 짓고

천하의 꽃나무들이
열심히 꿈 밭을 가꾸는
1월의 밤을 새기며
두 눈이 멀도록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일 힘든 강추위가 좋았습니다
그 속에서 진위를 가려내고 싶었고
영하의 강한 의지를 연마하는
1월의 사나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6》
1월에 바라는 소망의 기도

김영국

1월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 기쁨과 만족을 느끼고
굿은 일엔 당당하게 맞서는
지혜와 재치가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1월에는
모든 사람이 꿈을 안고
푸른 하늘에
힘찬 날갯짓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암울했던 모든 시름
불어오는 질풍(疾風)에 날려버리고
갈망하고 소망했던 모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1월에는
평화의 종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아름다운 축복이 가득한 세상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시기와 다툼이 없는
고운 마음만을
가슴에 새겨지기를 기도합니다.

《7》
1월의 그리움

김영달

바람 소리만 들려도
쭈뼛거리는 가슴의 옹아리가 있다
소리없이 휘갈기는 하이얀 눈의 세상위로
허하게 쓰러지는 마음 하나 있다

길모퉁이 낮게 걸린 햇살 안은채
피워무는 담배 연기에
당신이 다가서고 멀어지는
1월의 어느 오후가 그리움으로 번진다

대지를 가로질러 엎어진
비취색 눈꽃을 가슴에 담고
한잔의 커피 머금으니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 있으니
그 그리움의 통곡인가 싶다

뼈속을 흐르는 1월의 칼바람에
얼어붙은 땅끝의 서러움에
그리움의 싹마저 돋아나니
바다른 건너뛰고 하늘을 찢어버려
당신을 잊어보지만
겨울 나그네 처럼 아른거리는
1월의 그리움은 끝없는 눈발되어 대지를 나뒹군다

《8》
1월 그 길 위에서

김재미

시린 1월의 길 위에서 바람을 맞는다는 건 무모함에도
움츠러드는 몸 부러 날개를 펴고 싶은 건
상처한 몸도 아니요, 외로울 일 없었던 일상
고독을 읽어내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그 어떤 것 때문이다.
멀리 대부도의 수평선이 아득한 그리움에 출렁거리고
잠시 멈춘 발걸음, 발에 걸린 돌멩이 하나 툭 툭 차 버리자니
채인 설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 할까 그대로 두었다.
정신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맡기자니
길섶부터 둥지를 틀어버린 억새풀의 사락거리는 소리
마치 마음의 부대낌의 발로 같아 귀를 틀어 막아도
선명히 박히는 그 몸부림에 맺힌 비명이
어느 날인가 혼자임에 치를 떨며
술김에 통곡해대던 어린 여자 아이였던 듯
사랑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몰랐던 스무 살의 그 때,
꽃망울의 둥근 몸체로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근질근질 아릿아릿, 꽉 막힌 듯 체기가 떠나지 않았던 건
터트려야 활짝 피어나는 나이임을 뒤늦게 알아버린 탓.
산등성이로부터인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로부터인가
웅, 웅, 웅, 누군가 차가운 공기를 휘저으며 울고 있다.
아름답게 덧그린 그림이 삭막하기만 한 1월의 샛길에서
분명 홀로 서 있는 건 나인데, 누군가 서늘하게 울고 있다.

《9》
1월이라는 섬

김종제

그 섬은 늘 우기雨期이거나
만년설이었으므로
그 섬에 들어간 사람은
행방불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섬의 살갗은
무슨 고대의 짐승처럼
늘 축축하게 젖은 비늘로 덮여있다고
소문만 무성했는데
처음부터 그 섬으로 가는 길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매 번 붉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
틀림없이 그 섬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로
바닷가는 자주 얼어붙었다
섬이란 어쩌면
짙은 안개 같은 것이라고
한 치 앞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얼음의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이
뭍으로 돌아온 것을 본 적이 었었으므로
섬이 되어 가라앉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섬은 늘
무엇이든 다 집어삼킬 듯
원초적인 눈빛이었다

《10》
1월

목필균

새해가 밝았다
1월이 열렸다

아직 창밖에는 겨울인데
가슴에 봄빛이 들어선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연륜이 그어진다는 것이
주름살 늘어난다는 것이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이
모두 바람이다

그래도
1월은 희망이라는 것
허물 벗고 새로 태어나겠다는
다짐이 살아 있는 달

그렇게 살 수 있는 1월은
축복이다

《11》
1월에는

목필균

첫차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레고,
어둠 털어 내려는 조급한 소망으로
벅찬 가슴일 거예요

일기장 펼쳐들고
새롭게 시작할 내 안의 약속,
맞이할 날짜마다 동그라미 치며
할 일 놓치지 않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하고요

각오만 해 놓고 시간만 흘려 보낸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올해도 작심 삼일, 벌써 끝이 보인다고
실망하지 말아요

1월에는
열 한 달이나 남은 긴 여유가 있다는 것
누구나 약속과 다짐을 하고도
다 지키지 못하고 산다는 것
알고 나면
초조하고 실망스러웠던 시간들이
다 보통의 삶이란 것 찾게 될 거예요

《12》
1월의 연가

문현우

가슴 벽에 간직한
그리움의 노우트에
님 향한 애틋함
조금씩 새겨가면
물빛 그리움은
조금씩 스러져 갔어요

무딘 펜이 달리는
행간 사이로
당신 향한 애절함이
흐릿하게 담기면

멀리서 다가오는
긴 흐름의 강물
엷은 파문 남기며
한 편의 시를
남기게 했지요.

《13》
1월의 시

박광호

새해 새 아침에는
가슴에 해를 품었다

암청색 옷을 벗으며
새뜻한 소망이 솟구쳤다

하늘에로 기도를 보내고
흙을 파고 씨를 심었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깨달음의 산하여

억만년 힘차게 출렁이는
동해 서해 남해여

격동의 아픔 속에
연면히 이어온 역사

꿋꿋이 견딘 인고와
슬기와 강인함 속에

오늘을 엮어 가는 생명력
우리를 살리는 맥박이여

서로 마음을 열고
봄을 향하여 나아가라

힘차게 지축을 울리면서
뜨거운 쇳물을 쏟으면서.

《14》
1월의 기도

박성일

주여!
새로운 한 해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고 오는 날들이
아이들의 이가 자라나는 것처럼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시고
희망차고 보람된 나날들이 되게 하소서

주여!
새해에는 더욱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손을 내밀어 모르는 이웃들의 손을 잡게 하시고
주위의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둘러보게 하시어
세상을 주의 사랑으로 품게 하여 주소서

주여!
새해에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더욱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의 부족함을 가지고 아파하면서
나 자신을 성숙시키는 시간들이 되게 하소서

주여!
주님이 주신 새로운
꿈과 희망과 사랑의 마음으로
힘차게 새해의 첫 발을 내딛게 하시고
한 해 동안 이 마음 변치 않도록 지켜 주소서

《15》
1월의 연가

배월선

흐릿한 하늘의
눈송이가 되어도 좋고
하얀 그리움 속
물안개 되어
잊지 못할 가슴에
쌓여도 좋겠고
털어 낸 겨울 나목의
빈가지 끝에
매달렸던 추억을
들추어내어
작은 꽃씨 하나로
남겨두어도
입김 불며 데워질
겨울이라면
늦게 오는 봄이라도
탓하지 않고
1월의 기다림이
그대만큼 따뜻하겠다.

《16》
1월 어느 달밤에

신남춘

조각달 하나 하늘에 떠 있는
1월, 어느 달밤에 나는
위로 손을 쭉 펴 벌 받고 있는
앙상한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그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 한마디 못하고 이를 깨물고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봅니다.

달빛 흐려지면서 차가운 밤
바람은 코끝을 때리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부비면서
오지 않을 사람을 생각합니다.

졸지 말라고 말 좀 해보라고
흰 눈발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1월, 어느 달밤에 나는
곁에 와 누운 달빛을 봅니다.

《17》
1월

신달자

때는 새벽
1월의 시간이여 걸어 오라
문 밖에 놓인 냉수 한 그릇에
발 담그고 들어오면
포옥 삶아 깨끗한
새 수건으로
네 발 씻어 주련다
자세는 무릎을 꿇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도
환히 미소 지어리니
나의 두 손은 잠시
가슴에 묻은 채 쉬리라.

《18》
1월에 쓰는 엽서

신현복

우리,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어제까지의 시간을 용서 받고
삶에 새벽 같은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마음속에 작은 항아리를 들여놓고 사랑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묵은 신문의 슬픈 기사에도 눈길이 필요한
늘 배고픈 우리들 사랑이지 않나

그 먼 별도
그 작은 초승달도
가슴 따뜻하게 해주는 약 숟가락 크기의 빛으로 사랑 받지 않나
마른 들풀에게는 봄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가난한 마음에는 행복의 싹을 잃지 않게 하는
작지만 큰사랑의 빛

우리 1년 동안 베풀 그 빛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슬픔은 기쁨으로
미움은 용서로
불행은 행복과 찬란한 희망으로……

《19》
1월의 해와 하늘

안재동

수십 억 년쯤,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세월
날마다 변함 없이 뜨고 지는 해.
해는 똑같은 해인데
12월에 떠오르는 해는
낡아 보이고
1월에 떠오르는 해는
새로워 보인다.

사랑과 미움
적과 동지
아름다움과 추함
빠름과 느림
배부름과 배고픔
편안함과 불편함
강인함과 나약함

본질은 같으나
느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그 무엇들,
세상에 너무 많은

1월 어느 날의 청명한 하늘,
12월 어느 날에 청명했던 바로
그 하늘이 아닌.

《20》
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 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서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21》
1월

용혜원

1월은
가장 깨끗하게 찾아온다

새로운 시작으로
꿈이 생기고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올해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기대감이 많아진다

올해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
올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올해는
먹구름이 몰려와
비도 종종 내리지만
햇살이 가득한 날들이 많을 것이다

올래는
일한 기쁨이 수북하게 쌓이고
사랑이란 별 하나
가슴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22》
1월의 기도

윤보영

사랑하게 하소서.
담장과 도로 사이에 핀 들꽃이
비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새벽잠을 깬 꽃송이가
막 꽃잎을 터뜨리는 향기로
사랑하게 하소서.

갓 세상에 나온 나비가
꽃밭을 발견한 설렘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바람이 메밀꽃 위로
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여유로
서두르지 않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그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늘 처음처럼, 내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게 하소서.

《23》
12월31일과 1월1일

이사빈

12월31일과 1월1일은
수많은 날들의 낮과 밤이 교차하는 하루 일뿐
그 하루를 연결해주는 고리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지는 해를 되돌아 반성하고
떠오르는 해를 맞아 미래를 설계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잘 알지만
무언가 좋지 않았던 기억들은
지난해라는 세월 속에 묻히기를 바라고
새로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꿈을 꾸며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이 펼쳐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허나
실상은 또 다른 미지의 꿈이 아니라
어제 꾸었던 꿈의 연속이기에
머지않아 제자리로 회귀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1월1일에 굳게 다짐했던 마음은 망각해버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12월31일이 다되도록 막연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12월31일과 1월1일이 다시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미련과 아쉬움에 후회의 몸짓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며 다시금 부산을 떨어
잠시라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속에 빠질 것이다

《24》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죽여 흐르는
불면의 가움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25》
1월 판화

이인평

말죽거리, 생선 좌판의 정씨
겨울 오후
칼 번득이는 인심
단번에 토막토막 잘리는 햇살 담아 주는 정씨

생태 국물맛 나는 세상이라도 왔으면
비늘 가지런한 시절이라도 한번 와 봤으면
말발굽 소리에 기쁜 소식 하나 누가 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 아직 차다

말죽거리, 양재 사거리에서 한빛은행 쪽으로
쏟아지는 겨울 빛이
생선비늘을 번뜩일 때, 가슴 환해진 정씨
세월 토막토막 자른다
생선구이처럼 탄 얼굴로 건네주는
거스름 잔돈 같은 날들이 빛에 젖는다

빚진 세상 끄트머리 툭탁 잘린
지느러미 쌓인 통 속으로
에누리 떨어져 나간 세상 주둥이들도 보여
정씨, 발로 툭 한번 차고는
매운탕 얼큰한 웃음 한 봉지씩 담아내는
말죽거리, 생선 좌판
해가 좀 짧다

《26》
1월의 시

이해인

첫 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한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 놓고 가라

부디 고운 저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27》
1월에 쓰는 편지

임송자

어제가 아껴 쓰고 남겨 둔 시간을
오늘이라 하겠습니다
아련해지려는 시간을 붙잡아
첫새벽 물열매로 열게하는 영롱한 그 마음을
처음이라 하겠습니다

새해 첫날이 오면
첫마음을 잡기 보다는 거꾸로
그리운 옛 것들로 마음이 꽉 찹니다
멀어질수록 선명한 그리움말입니다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의 마른 수수깡 울음이며
얼음장밑에서 푸른 숨 죽이던 미나리꽝이며
초가집 처마에 꿈처럼 열리던 고드름
그리고 우리들 어린 꿈이 한 뼘씩 자랄때마다
낮아지던 골목의 흙담들
상처없는 그 날들이 못견디게 그립습니다

첫날이 되면
고치고 싶은 것들도 참 많습니다
어머니를 옆에 두고도 '니 엄마 못 봤냐'고 묻는
아버지를 고치고 싶고
자주 어긋나는 어머니 삭은 뼈들을 고치고 싶고
내 곁에 사는 바람과 구름, 그리고 햇살을
옛것으로 고치고 싶습니다
상하지 않은 머언 먼 어제로 가서
다시 출렁이며 흘러 오고 싶습니다

《28》
1월에 드리는 기도

장성우

새벽이 열리면
하아얀 눈을 밟고 걸어가는 인생 고갯길
새로운 하늘에서 맑은 종소리를 듣게 하소서

멀고 먼 나그넷길 예비하신 은총
찬미와 함께 새 생명 활짝 열리고
새로 시작하는 1월에 헌신의 상급이 눈처럼 쌓이는데,

삶이 다이아몬드처럼
새벽을 깨우는 첫 기도의 시작
시대를 지키는 파수꾼 맡겨진 달란트 충성 되게
눈 덮인 교회당 벌판 아름다운 인생길에서
이웃을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하늘처럼 받들게 하소서

환한 새벽으로 시작하는 길
하늘에서 내리는 천사의 마음
올해에는 동서남북 풍성한 영혼의 숲
피 흘린 제단 핏자국 넘쳐나 통일의 기쁨 되게 하소서.

《29》
1월

장태숙

새벽을 더듬으며 비가 온다

축축한 한기 겨울 그림자 따라 스미고
성탄절의 설렘과 제야의 가파름이
썰물처럼 사라진 개펄 같은 시간

침울한 손가락들 세상의 구멍마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딱딱한 가슴팍 깊숙이 후벼 파면
하옇게 부푼 새순 같은
별 하나
소망처럼 건질 수 있을까?

묘비처럼 서있는 1월의 썰렁한 어깨에 흘러내리는
긴 어둠의 눈망울에서 죽은 영혼의 냄새가 난다

눈은 먼 곳에서만 내리고
눈은 높은 곳에서만 내리고

《30》
1월의 시

정성수

친구여
최초의 새해가 왔다.

이제 날 저무는 주점에 앉아
쓸쓸한 추억을 슬퍼하지 말자.

잊을 수 없으므로 잊기로 하자.
이미 죽었다.
저 설레이던 우리들의 젊은 날
한마디 유언도 없이
시간 너머로 사라졌다.

스스로 거역할 수 없었던
돌풍과 해일의 시절
소리 없는 통곡과
죽음 앞에서도 식을 줄 모르던 사랑과
눈보라 속에서 더욱 뜨거웠던 영혼들
지혜가 오히려 부끄러웠던 시대는 갔다.

친구여, 새벽이다
우리가 갈 길은 멀지 않다.

그믐날이 오면 별이 뜨리니
술잔이 쓰러진 주점을 빠져나와
추억의 무덤 위에 흰 국화꽃을 던지고
너와 나의 푸른 눈빛으로
이제 막 우주의 문을 열기 시작한
저 하늘을 보자

지치지 않는 그 손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야 할 또 다른 길 위에
오늘도 어제처럼
투명한 햇빛은 눈부시리니.

《31》
1월의 기도

정윤희

1월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분들이
원대한 꿈 희망찬 미래들
기쁨과 만족을 나눌 수 있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1월에는
푸른 창공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저 철새들처럼
암울한 걱정 근심 모두 다 저 바람 속으로 날려 버리고
소망하는 꿈들이 멋지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32》
1월

주용일

서릿발 차면 하얗게 부서지는
수정 얼음들의 찬란한 스러짐 위로
낯익은 눈빛의 그대가 왔다
거리 두리번거리며 골목 기웃대며
눈가루에 희망의 이스트 섞어
새로운 양식을 마련하는 우리들,
불면의 머리 위로 첫눈처럼 다가왔다
까치 울음마다 한 땀 한 땀
세상 낡고 헐은 곳 기우며
뿌연 안개 헤치고 그대는 재림했다
안 보이는 찰나를 경계로
태양은 이미 어제의 태양이 아니고
사람은 벌써 지난 사람이 아니다
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이 지은
열두 궁궐 삼백육십다섯 칸
그 빈 칸 안에 우리들은
저마다의 소망과 기도를 쓴다
순백의 눈 맞이 걸음 꾹꾹 눌러 찍는다

《33》
1월

최명진

모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아래층 노점천막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길을 지나간 구두 굽들의 높이만큼

쓸린 눈 무더기가
외눈가로등 밑에 수북이 쌓였다

창밖은 내내 시시하고
늦게 잦아든 겨울 속으로
꽃처럼 성에가 핀다

더딘 구름 속
찬 햇살이 얼핏 고개를 민다
새벽일을 마치고 온 엄마는 늦은 잠을 잔다
산토끼처럼
발자국처럼
듬성듬성

길은 조용하다
이 도시에서 자란 옆집아이처럼

긴 겨울이 시작됐다
1월의 달력은 두껍고

아직 눈을 털지 못한 녹슨 그네가
빈 놀이터에 나란히 매달려있다

《34》
1월

최명진

모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아래층 노점천막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길을 지나간 구두 굽들의 높이만큼

쓸린 눈 무더기가
외눈가로등 밑에 수북이 쌓였다

창밖은 내내 시시하고
늦게 잦아든 겨울 속으로
꽃처럼 성에가 핀다

더딘 구름 속
찬 햇살이 얼핏 고개를 민다
새벽일을 마치고 온 엄마는 늦은 잠을 잔다
산토끼처럼
발자국처럼
듬성듬성

길은 조용하다
이 도시에서 자란 옆집아이처럼

긴 겨울이 시작됐다
1월의 달력은 두껍고

아직 눈을 털지 못한 녹슨 그네가
빈 놀이터에 나란히 매달려있다

《35》
1월의 편지

홍수희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내리자 마자 녹아버리는
진눈깨비처럼
첫날에 했던 다짐들
그 후회의 흔적마저
지금은 돌아보기 슬픈
기억이지만

사랑은 거듭하여
일어서는 것
내가나를 용서하여
기쁘게 희망하는 것

해마다 맞이하는
1월이 새로운 것은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를 위하여
다시 시작하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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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오려나 / 공석진

 

보일 듯 말 듯

솜털 갯버들

가물어 지친 개울에

비 내리면

만개하려나

혹독한 겨울 지나

으스스히 부는

꽃샘바람쯤이야

마음 너그러지면

사랑이 오려나

쑥쑥

,이 봄에

몸이 마르는 소리


겨울 끝에서 / 김용호

 

더디게 오는 봄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 내부에는

주기적으로

봄의 그리움이 생성되었습니다.

이 모양 없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지난해의 봄이

내 기억 속에 쉼 없이 깜빡거립니다.

지난해 민들레꽃 피는 고샅길을

아장아장 걸었던 노랑 병아리처럼

겨울 끝에서

봄이 아장아장 걸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초롱꽃 / 初月 윤갑수

 

수줍어 고개 떨군 서글픈 초롱꽃

바람에 종소리 젱그렁

울릴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삽 다리 건너온 햇살은

얼굴 비추건만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땅 끝 세상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만 아른거릴 뿐이다.

 

파도 같은 사랑 / 초암 나 상국

 

그대와 나 사이 밀물과 썰물은 늘 불규칙하게

그렇게 왔다가 갔다

파도가 높이 칠수록 바다는 넓어졌고

내 사랑은 점점 더 야위어만 같다

 

사랑이라는 걸 알았을 땐 / 초암 나 상국

 

바람이 흔들고 간 자리 꽃 향이 그윽합니다

언제나 응달지던 자리에 어느 날부터

햇볕이 들기 시작 하였고

설레이는 마음 처음에는 정확히 그 감정이 뭔지를 잘 몰랐습니다

아니 애써 무관심 한 척 외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외면하려 할수록 깊어가는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햇빛이 사라지고 또 다시 응달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알았습니다

때 늦은 후회가 밀려들면서 가슴을 저리도록 난도질을 합니다

 

행여나 / 초암 나 상국

 

행여나 그대 오려나 기린의 모가지로 기다리며

그리움으로 지새운 나날들 그 얼룩 위로 이젠

두께를 알 수 없는 먼지가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채석강처럼 쌓여

무너져 내릴 듯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오늘을 살며

행여나 그대 오는 길

잊지는 않았는지....

이별 후에 / 초암 나 상국

 

된서리 맞은 듯 바삭하게 말라버린 마음의 상처

차라리 흰눈이라도 내려서 모든 기억을

백지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사랑이라는 덫 / 초암 나 상국

 

뿌리칠 수 없는 그대의 매혹적인 유혹의 덫에 걸려

보이지 않는 오라 줄에 묶여 사랑의 포로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여도 좋으리

그대의 품 안에 안주하여 그대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만 있다면

그대의 덫에 걸려주리라

 

누드화 / 초암 나 상국

 

그녀는 예뻤다 원초적 사랑을 위해서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

허울 좋은 망상도 때 묻은 사치도 벗고 신비에 휩싸여 있었던

자존심마저 벗으니 더는 버릴 것도 애써 가릴 것도 없었다

 

사랑은 그런거더라 / 초암 나 상국

 

널 죽도록 사랑하는데 넌 나의 사랑은 쳐다도 보지않고

넌 널 외면하는 사랑에 목을 메더라

우리 같이 서로를 사랑하면 좋을텐데

사랑은 그런거더라 이기적인 사랑에 눈이 머는 거

 

눈 오는 밤에 / 초암 나 상국

 

눈 오는 밤에 창문 넘어 먼 산을 바라보니

오랫동안 잠 못 이루며

베갯잇 적시었던 사랑이 불현듯 되살아나

텅 빈 가슴속으로 눈처럼 다복다복

수북이 쌓이어만 간다

보고 싶다 / 초암 나 상국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을 하니 보고 싶은 그녀가

팽구르르 춤을 춘다

실컷 보라는 듯 만저보고 싶다

생각을 하니 날 잡아 보라는 듯

자취를 감추네

깨고 보니 꿈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사랑타령 / 초암 나 상국

 

사랑은 주고받는 거라는데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애도 아니면서 어리광을 부리듯

나만 바라봐주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해 줄 것을

바라며 보이지 않는 오라 줄로 꼼짝 못 하게

얽어맨 것은 아닌지 몰라

사랑타령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진짜 친구 / 성백군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만

우리는 모두 세상 삶 동안에

진짜 친구 하나씩 가지고 산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십오 분을 견디겠다고 900번을 세는데

처음에는 일 초에 숫자 하나씩 느긋한데

시간이 갈수록 열이 오르고 땀이 나오고……,

견디기가 힘들면 셈이 빨라진다

십 분에 900번으로 끝난다

 

피곤한데

엄두가 나지 않는데

몸살감기로 아파 죽겠는데

이미 그 모임에 사회를 맡았으니 가야 한다고

비틀거리며 따라나서는 몸

 

사람아, 세상에 속아

친구 같은 것은 없다고 친구를 부정하는 사람아

네 안에 있는 몸과 마음

그만한 친구가 어디 있는가?

가짜 친구에게 속아 진짜 친구를 홀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느니, 그게

평생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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