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동두천 1 /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驛頭의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72. 독작 / 박시교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73. 맹인부부가수 / 정호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74.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 김남주

 

서른에서 마흔몇 살까지
황금의 내 청춘은 패배와 투옥의 긴 터널이었다
이에 나는 불만이 없다

자본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겨
금방 이겨
혁명의 과일을 따먹으리라고는
꿈에도 생시에도 상상한 적 없었고
살아 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나 또한 혁명의 길에서
옛 싸움터의 전사들처럼 가게 될 것이라고
그쯤 다짐했던 것이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
이것이 나의 불만이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
승리 아니면 죽음!
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
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
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
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는 싸웠다


75.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무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없는 모임을 끝낸 밤

헤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 수상하게 들어 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

 

76. 선림원지에 가서 / 이상국

 

선림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면산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눞다
절이름에 깔려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볕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으로 돌아가네

 
77. 남해 금산 / 이성복

 

女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女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女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떠나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서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78. 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79. 밤 미시령 / 고형렬

 

저만큼 11시 불빛이 저만큼

보이는 용대리 굽은 길가에 차을 세워

도어를 열고 나와 서서 달을 보다가

물소리 듣는다

다시 차를 타고 이 밤 딸그락,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듯

시동을 걸고 천천히 미시령으로 향하는

11시 내 몸의 불빛 두 줄기, 휘어지며

모든 차들 앞서 가게 하고

미시령에 올라서서 음, 기척을 내보지만

두려워하는 천불동 달처럼 복받친 마음

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

그는 가고 없구나

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

생수 한통 다 마시고

허전하단 말도 저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

---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

---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80.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 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 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81.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쇠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끊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벼텨온 것은

그 위로 밟고 자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짖누르는

답답한 것이였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찿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 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 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방면으로 그리고 수원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 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치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져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 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을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자욱이 된다.

 

82. 대꽃 7 / 최두석

 

물찬 은어가 영산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지느러미

스치는 바위. 노령 산줄기 하나 강물에 부딪쳐 일렁이는 금당
마을 바위. 어느 날을 기다려 바위는 자라기 시작했다.
담장의 호박이 자라듯이 그러한 속도로 몸 저리며. 그러면
서 자기 몸 깊슥이 핏줄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강물은 몸 부른 바위를 감돌아 몇십 삭의 나날을 흐르고
이윽고 바위에 균열이 왔다. 점점점 벌어지는 바위틈으로
물은 거센 아우성으로 흐르고 마을의 집이 한 채 두 채 무
너졌다. 강물에 돼지가 떴다. 바위 몸조각도 격류에 휩쓸리
기 시작했다. 몸조각 하나 둘 셋 넷 다섯......마침내 바위
가 낳고 있던 아이조차도, 겨드랑이에 날개 돋친 아이조차
도 강물에 휩쓸려갔다.

 
83.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낄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84.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85. 노숙 /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86.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86-2. 연탄재 - 안도현

발로 차지는 말아라
네가 언제 남을 위해 그렇게 타오른 적이 있었더냐 
 
86-3.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할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잔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아 발갛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86-4.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나는

87. 마음의 짐승 / 이재무

 

몸의 굴 속 웅크린 짐승
눈뜨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수성, 몸 밖의, 죄어오는 무형의
오랏줄에 답답한 듯
발버둥치네 그때마다 가까스로
뿌리내린 가계의 나무 휘청거리네
오랜 굶주림 휑한 두 눈의
형형한 살기에 그대가 다치네
두툼한 봉급으로 쓰다듬어도
식솔의 안전으로 얼러보아도
도박, 여자, 술로 달래보아도
오오, 마음의 짐승
세운 갈기 숙이지 않네

88. / 김용택

 

눈아

눈아

펑펑 내려라

우리 아가

눈 보며

잘도 자게

펑펑 내려라


89. 시다의 꿈 /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90. 행려 / 박영근

 

() 한 편을 쓰기가 이렇게 어렵다
하필이면 너는 백화점 입구에서 쁘렝땅인지
이랜든지 끝물이 된 옷들을 쎄일하고,
네 목에서 울리는 PCS 벨소리가
오래 허공을 떠돌다 돌아와 나를 울린다
어쩌면 쓰다 만 소설처럼 굴러다니던

네 러시아 기행담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경계가 사라진 백야의 세계와
떠돌이 오퍼상을 유혹하는
무너진 사회주의 뒷골목의 딸라 이야기를 나는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네가 서 있는 기다림의 밑바닥
다 내려갈 수 없는, 탕진해버린 시간의
무덤 속을 비추고 있는 광고탑의 위용 앞에서
()란 또 무엇일까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뒹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
먹다 남긴 소주병처럼
그 속에서
깨어나지 않는 꿈처럼


91. 우기 / 도종환

 

새 한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92. 안개 /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93. 태아의 잠 1 / 김기택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따뜻한 실핏줄마다 그것들은 찰랑거린다 때로 갈비뼈 안에서 멈추고

오랫동안 둔중한 울림이 되어 맴돌다가 다시 실핏줄속으로 떨며 스며든다

이 소리들이 흘러가는 곳 어딘가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한 아이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생각 없는 꿈이 되려고 놀란 눈이 되고 간지러운

손가락 발가락 꿈틀거림이 되려고 소리들은

여기 한 곳으로 모이나보다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

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 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94. / 함민복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 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 준다.
말랑말랑 힘
말랑말랑 힘


95. 저 숲에 누가 있다 / 나희덕

 

밤구름이  익은 달을 낳고 
달이 다시 구름속으로 숨어버린  
숲에서는 .......타닥... 
상수리나무가 이따금 무슨 생각이라도   
 열매을 던지고 있다 
열매가 저절로 터지지 위해 
나무는 얼마나 입술을 둥글게 오무렸을까 
검은 숲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
나는 그제야 알게도 된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 
...타다닥..따악......타르르... 
무언가 짧게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소리 같기도  
 소리들은 무슨 냄새처럼 나를 숲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어둠으로   가을숲에서 
밤새  열매를 던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끝내 보지 않아도 좋으리 
그가 던진 둥근  몇개가 
걸어가던  복숭아뼈쯤에......굴려와 박혔으니 

 
96.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

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

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

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낯추

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

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

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

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97. 그리운 시냇가 /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히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98.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99.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면서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 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100.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 김선우

 나는 그를 죽이는 중입니다
잔뜩 피를 빤 선형동물, 동백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그는 떨어져 꿈틀대는 빨간 벌레들을 널름널름 주워 먹었습니다

나는 메스를 더욱 깊숙이 박았지요......

마침내 그의 흉부가 벌어지며 동백꽃이 모가지째 콸콸 쏟아 집니다

피 빨린 해골들도 덜걱덜걱 흘러나옵니다

엄마 목에 매달린 아가 해골이 방그레 웃습니다

앉은뱅이 해골이 팔다남은 사과를 내밉니다 사과는 통째 곯았습니다

그가 번쩍, 눈을 부릅뜹니다 흘러나온 것들을 단숨에,

뱃속에 도로 집어넣습니다......

나는 날마다 그를 죽일 궁리를 합니다

비대해져 살갗이 몸에 맞지 않게 된 그는

쪼가리 살갗을 들고 매일 내 방으로 옵니다

나는 그의 몸피에 새로 난 살갗을 재봉질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 일로 생계를 꾸려가지요)

그의 몸은 가속으로 거대해져갑니다

숱한 살갗을 어디에서 벗겨오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싱싱한, 피냄새가 묻어 있습니다......

오늘 밤 나는 그를 죽일 겁니다

그는 내게 남은 마지막 진피를 원할 테지요,

자장가를 부르며 사타구니 살갗을 벗겨내겠지요

내일이면 그는 핑크빛 합성피부를 가져와

손수 박음질해줄 겁니다 리드미컬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대표명시 100선 (41-80)  (0) 2017.01.26
한국 대표 명시 100선 (81-104)  (0) 2017.01.26
신경림 한국명시 100선 (41-70)  (0) 2017.01.23
신경림 한국명시 100선 (1-40)  (0) 2017.01.23
세계 명시 100선 (81-116)  (0) 2017.01.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