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빈산 /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82.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83. 고백성사 -못에 관한 명상 1 (못박는 사람) / 김종철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 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84. 서정의 취사 / 한분순
- 쌀을 씻다가
담아 보았더니 손에 가득 찼다.
무던한 물인데도 살갑게 달라붙는다.
손금을 드나들면서 숨결은 늘 고르다.
햇빛을 이고 서서
눈매가 문득 말갛다
이끼가 필 적에는
흐르던 땀도
머뭇해
봉긋이 부푸는서정
쌀이 익고 봄을 달인다.
85.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86. 아버지의 힘 / 유지효
아직은 잠들 때가 아닙니다.
아버님
가실 길이 남았습니다
깨어나십시오
그 용기와 힘을 보여주시고
담대함과 거침없음
사내다움을 보여주소서
너무나 약해빠져
실패를 겁내며
속으로만 욕을 하면서
계집애처럼
한만 쌓아가는 약골들에게
벼락을 내리소서
아버님
깨어나소서
87.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있다 / 이기철
떠나간 사람은 이별을 만들고
다시 만난 사람은 해후를 만든다
눈물은 꽃잎을 만들지 못해도
꽃잎은 눈물을 만드는 날이 있다
사랑은 떠나갈 때 가장 아름다운 것
이별을 흔드는 조그만 손짓은
인간이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인사
눈망울과 입술과 표정이 작별을 만들 때
울음은 가장 순수한 발명품
이 표절할 수 없는 의식은
누구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그러기에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 있다
88. 어쩌면 이것들은 / 이우걸
가을 꽃잎같은
아이들 찬송가 소리
정원은 일어나서 잎새의 작은 귀로
교회당 흰 벽에 쌓이는
노래를 듣고 있다.
섬길 이 없어도 고운
한나절 그 봄날을
하늘엔 마음처럼 둥둥 구름이 가고
햇볕은 가지에 닿아
천사의 얼굴을 한다.
어쩌면 이것들은 어젯밤 꿈이었을까
바람이 무심히 와서 나뭇잎을 흔들어도
이 강산 뼈에 사무친 칼소리가
걸어나오네.
89. 변성기의 아침 / 유재영
창 열린 집을 지나
자작나무숲을 지나
아그배꽃 핀 아침
장수하늘소가
묵은 가지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혀가 예쁜 새들은
조금 전부터
울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맑게 금이 가는
공기들의 푸른 이동
지빠귀 분홍색 알은
내일쯤이면
무슨 소식이 있으리라
안개가 떠난 자리
채식지 않은 은색 똥 몇 개
햇빛을 향해
우리가 남겨야 할 꿈처럼 누워 있다
90. 겨울강에서 / 정호성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91. 장국밥 / 민병도
울 오매 뼈가 다 녹은 청도 장날 난전에서
목이 타는 나무처럼 흙비 흠뻑 맞다가
설움을 붉게 우려낸 장국밥을 먹는다.
5원짜리 부추 몇 단 3원에도 팔지 못하고
윤 사설 뙤약볕에 부추보다 늘쳐져도
하교 길 기다렸다가 둘이서 함께 먹던...
내 미처 그때는 셈하지 못하였지만
한 그릇에 부추가 열 단, 당신은 차마 못 먹고
때늦은 점심을 핑계로 울며 먹던 그 장국밥.
92. 병속의 바다 / 최동호
피서객이 떠난 모래사장에
거꾸로 박힌 소주병이 바다를 들고 있다
대지의 형벌은
팔 들어 지울 수 없다
누가 사랑의 피리를 부는지
병 속에서 파란 바다 휘파람 소리 들린다
93.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는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 하면서
다시 알지
94. 파꽃 / 안도현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밀어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마당 안에 극지가 아홉 평 있으므로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먼 기차 대가리야,
흰 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95. 집 / 김용택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 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이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96. 그릇에 관한 명상 / 이지엽
흙과 물이 만나 한몸으로 빚어낸 몸
해와 달이 지나가고 별구름이 새긴 세월
잘 닦인 낡은 그릇하나 식탁위에 놓여 있네
가슴에 불이 일던 시절인 들 없었으랴
함부로 부딕혀 깨지지도 못한 채
숨 막혀 사려 안은 눈물, 붉은 기억 없었으랴
내가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나 갖는 일
무형으로 떠돌던 생각과 느낌들이
비로소 몸 가라앉혀 편안하게 잠이 들 듯
모난 것도 한때의 일 둥글게 낮아질 때
잘 익은 달하나가 거울 속으로 들어오고
한잔물 비워낸 자리, 새 울음이 빛난다
97.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98.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숲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99. 당신 생각을 켜놓은채 잠이 들었습니다 / 함민복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던 날
잠가놓은 심장 안으로 당신이 다가섰습니다
빗속으로 당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내 맘대루 되지 않는걸 어찌 하나요
빗방울 소리 흘러내리던 밤
가슴은 개천되어
당신의 마음이 흘러들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당신의 마음을 떠나보내고 싶었지만
떠나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내 옆을 서성거리고.
그래서....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힘들게 잠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잠든 사이에
꿈속에라두 다녀는 가셨나요
당신 생각에 켜 둔 촛불이
여름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오늘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 것 같습니다....
100. 애인 있어요 / 홍성란
노래자랑에 입상하신
여든한살 할머니가 분홍셔츠에
흰바지 차려입고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다소곳 환히 부르네.
숨은 턱에 찼으나 손모아
파르르 입술 모아
애인 있어요,
말 못한 애인 있다니
여든넷 어머니 그늘 겹쳐 오네.
새치 뽑던 파마머리 젖가슴 뭉클
잡히던 얼굴 *연하고질*이여,
희미한 내 노래여
나도 애인 있어요,춘천 어디
산비탈 가지마다 매어두신 실오리
실오리 스쳐 *돈담무심 *내려온 데
목메도록 애인 있어요
*천석고황*이여,희미한 내 노래여
골도 좋아 물 시린 집,
다시 못 올 흔들의자에
내가 버린 애인있어요.
나 날 적 궁전있으나
내가 버린 폐가 있어요.
101. 풍장 (風葬)·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2006-07-08
102. 그날 /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103.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104.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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