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명시 100

1.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 오상순

2. 진달래 / 김소월

3. 석류 / 조운

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5. 님의 침묵 / 한용운

6. 고향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7. 오감도 / 이상

8. 향수 / 정지용

9.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10.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이은상

11. 떠나가는 배 (나도야 간다) / 박용철

12. 모란꽃 / 조종현

13.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14. 바다와 나비 / 김기림

15. 광야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이육사

16. 행복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17. 모란이 피기 까지는 / 김영랑

18.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신석정

19.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20. 그날이 오면 / 심훈

21. 병든 서울 /오장환

22. 가을의 기도 / 김승현

23. 오랑캐꽃 / 이용익

24.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25. 선운사 동구 (선운사 동백꽃 보러갔더니) / 서정주

26. 개화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 이호우

27. 설야 / 김광균

28. 백자부 / 김상옥

29.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30. 나그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31. 승무 / 조지훈

32. 서시 / 윤동주

33. 풀이 눕는다 / 김수영

34. 외따로 열고 / 이영도

35. 목마와 숙녀 / 박인환

36. / 김춘수

37.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 구상

38. 솔개 / 김종길

39. 장식론 / 홍윤숙

40. 가을 잠 (가슴들이 쉬자) / 김남조

41.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천상병

42. 사랑이 가기전에 / 조병화

43. 낙화 / 이형기

44. 북치는 소년 / 김종삼

45. 어머님의 아리랑 / 황금찬

46. 내 산하에 서다 / 이태극

47. 라일락 향기 / 문덕수

48.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49. 항아리 / 박희진

50. 갈대 / 신경림

51. 저문 산 (일락서산에 개구리 울음) / 박용래

52. 풍선 날리기 / 성찬경

53. 대나무에게 / 최승범

54. 백두산 / 고 은

55. 껍데기는 가라 / 신동옆

56.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당신은 우리 편이 되어야 합니다) / 이성부

57. 이 세상의 긴강 / 마종기

58. 노트북 연서 / 김후란

59. 밥을 멕이다 / 정진규

60. 살다가 보면 / 이근배

61. 조국 (祖國) (청산아 왜 너는 말이 없어) / 정완영

62. 풍경 / 김제현

63. 찔레꽃 (모순의 향기) / 허영자

64. 이 시대의 시쓰기 / 이승훈

65. 푸른 하늘과 붉은 황토 / 조태일

66. 우리들의 우산 / 김종해

67. 화엄별관 / 이상범

68. 편지 / 김초혜

69. 너를 위한 노래 / 신달자

70. 노래의 자연 / 정현종

71.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72. 나는 내가 낳는다 / 유안진

73. 눈 내리는 마을 / 오탁번

74. 바지락 줍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시간) / 이가림

75. 질라래비훨훨 / 윤금초

76.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 이건청

77. 마음하나 / 조오현

78. 천년의 잠 / 오세영

79. 캘린더 호수 / 서정춘

80.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하네 나는) / 강은교

81. 빈산 / 김지하

82.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83. 고백 성사 (못박는 사내) / 김종철

84. 서정의 취사 / 한분순

85. 멀리서 빈다 / 나태주

86. 아버지의 힘 / 유지효

87.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있다 / 이기철

88. 어쩌면 이것들은 / 이우걸

89. 변성기의 아침 / 유재영

90. 흔들리지 않는 갈대 / 정호성

91. 장국밥 / 민병도

92. 병속의 바다 / 최동호

93. 나를 키우는 말 / 이해인

94. 파꽃 / 안도현

95. / 김용택

96. 그릇에 관한 명상 / 이지엽

97. 담쟁이 / 도종환

98.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99. 당신 생각을 켜놓은채 잠이 들었습니다 / 함민복

100. 애인 있어요 / 홍성란

101. 풍장  (風葬)   /  황동규)

102. 그날   /  이성복

103.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104.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1.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 오상순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 그리고 밤을 다스린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의 象徵(상징)이요 아시아는 밤의 實現(실현)이다.
아시아의 밤은 永遠(영원)의 밤이다. 아시아는 밤의 受胎者(수태자)이다.
밤은 아시아 産母(산모)産婆(산파)이다.
아시아는 실로 밤이 낳아준 선물이다.
밤은 아시아를 지키는 主人(주인)이요 ()이다.
아시아는 어둠의 검이 다스리는 나라요 世界(세계)이다.

아시아의 밤은 ()없이 깊고 속모르게 깊다.
밤은 아시아의 心臟(심장)이다. 아시아의 心臟(심장)은 밤에 鼓動(고동)한다.
아시아는 밤은 呼吸(호흡)기관이요 밤은 아시아의 呼吸(호흡)이다.
밤은 아시아의 눈이다. 아시아는 밤을 통해서 一切相(일체상)을 뚜렸이 본다.
올빼미 모양으로
밤은 아시아의 귀다. 아시아는 밤에 一切音(일체음)을 듣는다.

밤은 아시아의 感覺(감각)이오 感性(감성)이오 性慾(성욕)이다.
아시아는 밤에 萬有愛(만유애)를 느끼고 임을 抱擁(포옹)한다.
밤은 아시아의 食慾(식욕)이다. 아시아의 몸은 밤을 먹고生生(생생)한다.
아시아는 밤에 그 靈魂(영혼)의 양식을 ()한다. 猛獸(맹수) 모양으로
밤은 아시아의 芳醇(방순)한 술이다. 아시아는 밤에 노래하고 춤춘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이오 悟性(오성)이오 그 ()이다.
아시아의 認識(인식)叡智(예지)信仰(신앙)도 모두 밤의 實現(실현)
이요 表現(표현)이다.


아시아의 마음은 밤의 마음
아시아의 生理系統(생리계통)精神體系(정신체계)는 실로 아시아의
밤은 神秘的(신비적) 所産(소산)인저
밤은 아시아의 美學(미학)이오 宗敎(종교)이다.
밤은 아시아의 唯一(유일)한 사랑이오 자랑이오 보배요 榮光(영광)이다.
밤은 아시아의 靈魂(영혼)宮殿(궁전)이오 個性(개성)의 터요

性格(성격) 의 틀이다.
밤은 아시아의 가진 무진장의 寶庫(보고)이다.
마법사의 魔術(마술)의 보고와도 같은밤은 곧 아시아요 아시아는 곧 밤이다.
아시아의 悠久(유구)生命(생명)個性(개성)性格(성격)歷史(역사)
는 밤의 記錄(기록)이오. ()의 발자취요 밤의 造化(조화)

밤의 生命(생명)創造的(창조적) 發展史(발전사)

보라! 아시아의 山河(산하) 大地(대지)物相(물상)風物(풍물)

品格(품격) 文化(문화) 有相(유상) 無相(무상)一切相(일체상)이 밤의 洗禮(세례)를 받지 않는 () 있는가를
아시아의 山脈(산맥)은 아시아의 물의리듬象徵(상징)하고 아시아의 물의
리듬은 아시아의 밤의 리듬을 상징하고


아시아의 딸들의 칠빛같은 머리의 흐름은 아시아의 밤의

그윽한 呼吸(호흡)의 리듬한손으로 地軸(지축)을 잡아 흔들고 天地(천지)含吐(함토)하는 아무리 억세고 사나운 아시아의 사나이라도 그마음 어느 구석인지 숫처녀의 머리털과도 같이 끝모르게 감돌아드는 밤 물결의 흐름 같은 리듬의 曲線(곡선)은 그윽히 서리어 흐르나니

그리고 아시아의 아들들의 자기를 팔아 술과 ()와 한숨을 사는
浩蕩(호탕)放遊性(방유성)도 감당키 어려운 이밤때문이라 하리라.


밤에 취하고 밤을 사랑하고 밤을 즐기고 밤을 嘆美(탄미)하고 밤을 崇拜(숭배)하고밤에 나서 밤에 살고 밤속에 죽는 것이 아시아의 運命(운명)인가.
아시아의 沈黙(침묵)靜謐(정밀)幽寂(유적)枯淡(고담)典雅(전아)曲線(곡선) 餘韻(여운)玄晦(현회)幽影(유영)後光(후광)과 또 滋味(자미) 醍醐味(제호미)는 아시아의 밤()들의 饗宴(향연)交響曲(교향곡)樂譜(악보)인저崇嚴(숭엄)하고 幽玄(유현)하고 神秘(신비)롭고 不思議(불사의)한 아시아의 밤이여太陽(태양), 燃燒(연소)하고 刺激(자격)

하고 誇張(과장)하고 傲慢(오만)하고 君臨(군림) 하고 命令(명령)한다.

 

그리고 男性的(남성적)父格(부격)이오積極的(적극적)이오攻勢的(공세적)이다. 따라서 物理的(물리적)이오 現實的(현실적)이오 學問的(학문적)이오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 이오 鬪爭的(투쟁적)이오 物體的(물체적)이오 物質的(물질적)이다. 太陽(태양)의 아들과 딸은 기승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건설 하고 파괴하고 돌진한다. 白日下(백일하)自信(자신)있게 萬有(만유)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綜合(종합)하고 統一(통일)하고 ()할줄만 알고 ()하는줄 모르고 氣勢(기세)좋게 모험하고 制作(제작)하고 외치고 몸부림치고 疲勞(피로)한다.
差別相(차별상)低廻(저회)하고 ()()固執(고집)한다.
여기 뜻아니한 悲劇(비극)胚胎(배태)誕生(탄생)이 있다


 

2. 진달래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3. 석류 /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맛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것 같지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울타리 넘어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 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닽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는 제비야 깝지지마라

맨드라미 마들 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 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므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로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5.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6. 고향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고향을 돌아가자

나의 고항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살리 없으련 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재가 되고

장독대 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 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7. 오감도 / 이상

 

詩題1

十三人兒孩道路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一人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二人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二人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一人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兒孩道路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시제2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 넘어야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8.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돗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9.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 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 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섧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피오닐 : 개척자 선구자

 

10. 고지가 바로 저긴데 /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 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11. 떠나가는 배 (나두야 간다)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야.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12. 모란꽃 / 조종현

 

하얗게 못 핀 것이

네 그렇게 부끄러워

5

훈풍에 넋두리나 하잔 거냐

뜬구름

같은 사랑을

어쩌자고 하느냐.

-덕수궁에서

 

13.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백석(백기향)이 사랑한 김진향(김영한)에게 쓴 시

 

14.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5. 광야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하여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친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6. 행복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려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17. 모란이 피기 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의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는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8.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산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때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즈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위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세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 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 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샛빨간 능금을---------
또오똑  따지 않으렵니까

 

19.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20.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21. 병든 서울 /오장환

 

8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 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 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15, 915,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22. 가을의 기도 / 김승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23. 오랑캐꽃 / 이용익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골짝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흘러갔다

너는 오랑캐의 피한방울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24.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를 입에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25.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 서정주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


26. 개화 (開花)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27. 설야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28. 백자부 / 김상옥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29.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 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북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30.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녘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31. 승무 / 조지훈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32.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33. 풀이 눕는다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null)

34. 외따로 열고 / 이영도

 

비 오고 바람 불어도

가슴은 푸른 하늘

홀로 고운 성좌

지우고 일으키며

솔바람

머언 가락에

목이 긴 학 한 마리

멀수록 다가드는

사모의 공간 밖을

만리도 지척같이

넘나드는 꿈의 통로

그 세월

외따로 열고

다둑이는 추운 마음

 

35.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36.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37.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 구상

 

山頂 올라가 붙은
판자집 창에
머리에 부스럼 자국이  선머슴처럼
얼굴을 대고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저기흐르는 푸른 강에
물고기들이 흐느적 놀듯이
여기黃土 굳은 땅에
개미가 들락날락 일하듯이
첫째 우리 인간도
서로 물어 뜯지 말고
아우성도 없이 살아야 함을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한낮의 白金같은 날빛을
온몸에 받으며
누구나 落望 휘장을
스스로 가리지만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마침내
광명을 누릴  있음을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뼘도 안되는 꽃밭에
코스모스가 서서 피고
채송화가 앉아 피는 것을 보고
만물은 저마다 分數 다할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이제사 겨우 눈꼽이 떨어지는
鮮明으로
眞善美 저렇듯 實在한다는 것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알아낸다.

 

38. 솔개 /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 제사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 기왓곡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 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39. 장식론 / 홍윤숙

 

여자가
장식(裝飾)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生鮮) 같다든가
(陳腐(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 만도
빛나는 장식(裝飾)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원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裝飾)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生活衣裳(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疲困)으로
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滿發)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裝飾)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落葉)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紫水晶)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40. 가을 잠 (가슴들이 쉬자) / 김남조

 

네 이름에 이어진 건

여기 잠들어라

가을의 가슴 안에 쉬어라

죽을 뻔 죽을 뻔

그쯤이나 하다가

얼마 헐거워진 너를 풀어 뉘이련다

자거라 자거라 잠의 노래 부르리라

가을이 이렇게 큰 몸인 줄

내 몰랐어라

온 누리 복되고 위안인 줄

내 몰랐어라

네 마음에 이어진 건

모두 잠들어라

어머니의 품이니 쉬어라

아흔아홉 가파른 고개

너를 등에 지고 온

여윈 빈 지게 비스듬히 세워 두고

나도 잠들어 쉬련다

쉬련다

사랑이여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오는 날의 詩  (0) 2017.06.09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시모음  (0) 2017.04.27
한국 대표명시 100선 (41-80)  (0) 2017.01.26
한국 대표 명시 100선 (81-104)  (0) 2017.01.26
신경림 한국명시 100선 (70-100)   (0) 2017.01.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