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 이외희
내게 살며시
다가온 이 바람은
어디서 무얼 하러 왔을까?
머물지 않고
끝없이 스쳐만 가는
이 바람은
어디로 무얼 하러 가는 걸까?
살짝 다가왔다가
수줍어 살그머니
떠나가는 바람은
하고 싶은 말은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온종일 휘파람만
쓸쓸히 불어 대는
네 모습 같구나
★하나의 삶 / 정유찬
누구나
원하는 것은 같다
그것을 달리 표현할 뿐
우리는
모두가 다른 방법으로
같은 사랑을 원하고
모두다
같은 의도로
독특한 삶을 추구한다
이렇게
삶의 다른 모습들이 합쳐져
하나의 큰 삶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각기 다른 모두가 만드는
하나의 삶을 산다.
★부활의 장미 / 정문규
피었다 지는 것이야
쉬운 일이지만
그 향기까지야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쯤이야
쉽게 한다고 하지만
그리워하는 것까지야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먼 훗날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사무친 가시가 되고
당신은 숨가쁜 꽃봉오리가 되는
하나의 뜨거운 몸이 되어요
★매화 풍경 / 박종영
겨울 강을 건너온 매화 꽃잎 한 개
절정을 위해 상큼한 바람 앞에 서서
백옥의 여인이다
이내 펄럭이는 치맛자락
그때마다 하얀 속살이 좀처럼 인색하게
붉게 퍼진다
낡은 세월 모두 밀어내는
그대 향기 같아
그 추억의 허리춤을 살며시 당기면
저절로 안겨오는 그리움을 어쩌랴
★흔들림에 닿아 /이성선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 곳이 더 크게 나를 껴 안는다
흔든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용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봄바람 (양채영·시인, 1935-)
너는
매화꽃 가지에
은은히 숨어 있다
목련꽃에서는 더 환하다
절벽 난간 붉은 진달래꽃
신라적 노인의 헌화가의
간절한 숨소리로
너는 하늘거린다
새소리에도 봄물살에도
허리를 뒤틀며
재잘대고 깔깔댄다
눈을 감아도 너는
내 볼을 부비며
내 가슴을 파고든다
글쓰기 짧은시 모음
★비 / 김정란
어느 하늘을 돌아왔을까
내 쓸쓸함의 새 집 짓는 소리
살과 살 사이에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그 집 창가에 오래도록
머리 기대고 울지 않는, 우는 여자 하나
나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새…… 머무는 새……젖는 날개
언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비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비 / 김충규
비가 내린다 하늘의 한 끝에서
함께 출발한 빗방울들은
동시에 땅으로 닿지 않는다 그저
제 보폭으로 걸어 내려올 뿐이다 일찍
도착한 빗방울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쉰다
다 내려와 함께 뭉쳐 냇물을 이룰 때까지 냇물을
이룬 후 강을 이루고 강이 되어 멈춰 있다 큰 뜻 품은
놈이 바다로 향할 때 뒤에서 물살로 세계의 등을 떠민다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 나희덕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비 잠시 그친 뒤 / 허형만
한나절 퍼붓던 비잠시 그치자
잠자리 무리지어 된장잠자리 노랑잠자리
날개띠잠자리 무리지어 날 수만 있다면
일곱 번이든 여덟 번이든 아픔의 껍질을 벗고
그리움의 속내도 벗고
훠이훠이 청산이 좋아라 잠자리 무리지어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친 뒤.
★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을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하얀 비 / 송경동
양철지붕 두드리며 밤새 내리는 비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두드리는 겨울 찬비가 될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의 음계에 맞춰
내 노래 조율하는 법을 몰라 내 노래는 내가 죽어도
내 목 밖에서 객처럼 서성거릴 것인가
밤새 내 영혼을 두드리는 하얀 비
★바람편지 /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가을비 내리는 날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행복
밤이 깊도록
벗 할 책이 있고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됐지
그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친구여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인은 있어야 하겠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승부에 집착하지 말게나
3욕이 지나치면
벗을 울린다네.
★겨울나무 /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마지막 사랑 / 장석주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멀리 되돌아 오는 길이다
헤어짐을 준비하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보내줄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결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외려 너를 점점 멀리 두는 데
익숙해지는 일이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조용히 너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보내고 나서 나는, 하염없이
슬픔에 빠져 있겠다는 뜻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가슴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게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바람 속을 걷는 법 3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허구 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 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꿈 /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사 랑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네가 가던 그날은 /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사랑의 진리 / 원태연
만날 인연이 있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지나쳐도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헤어져야 할 인연인 사람은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엇갈린 골목에서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사랑의 진리이기도 하다.
★잡초 / 이 성 재
한겨울 잡초는 제 몸을 말려
동면하듯 누워 지낸다.
오로지 몸을 세울 그날을 위해
겉을 감추고
때가 되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는다.
세월의 옷을
갈아입는다.
세월에 무딘 내 몸은
한겨울의 옷은 갈아입었지만
마음의 옷은 아직도
지난 겨울의 옷 그대로구나.
하여
너는 잠시 나의
스승이 된다.
★산 아래 살면서 / 김 선 자
이른 아침
신문을 집어 들고
산을 본다
모진 말 견디기 힘들 때
마당에 나와 서서
산을 본다
산도 수심 가득히 나를 본다
내가 슬프면
산도 슬프고
내가 외롭고 힘들면
산도 외롭고 힘드나 보다
산 아래 살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우리 마음 속에서 싹이 트는 것을‥‥‥‥
★헹구는 마음 / 김 성 자
안개 자욱한 새벽길
누구의 발자국
지나가지 않은 숲가에
선한 아기 눈망울 같은
이슬들을 모아
이별이 머물던 자리
칼바람이 지난 자리
그 울음이 묻은 상념
헹구고 헹군다.
갓 벙글은 목련꽃
속살처럼
순결함을 위해
마음을 헹군다.
하늘에 닿고 싶은 내 마음
그래서 오늘도 헹구며 살아간다.
★봄 편지 /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기다림의 대천항 연가 / 송미숙
파도를 품에 보듬어
해지는 밤바다는 빈 밥그릇
두 손 모으는 정화수에
기다림은 하이얀 소금 꽃
어디 먼 바다 우렛소리
등댓불 걱정스레 깜박이는데
나아질 수 없는 상사병
아낙은 정화수 곁에서
밤샘으로 하는 뱃멀미로
천만년 긴 시간이 흐르고
떠오르는 태양, 밥그릇 가득
웃음소리 담는다.
★하얀 미소 속의 구절초 / 송미숙
비바람 없는 날은
소쩍새 울음으로
허기진 세월 허기로 달래는
후미진 절벽 모퉁이에
먼산바라기 여인의 고운 자태로
기다림이 익숙한 목이 긴 꽃
세파에 꺾이어 홀로 피어
시나브로 어둠이 내리면
지친 세상이야기들
퇴근하는 발자국소리로
임의 눈물 가득 채운
꽃병을 꿈꾸는 하이얀 미소……
★봄비 그리고 꽃비 / 이호정
바람 불더니 꽃잎 날리고
진자리에 비가 앉습니다
뜨락에 핀 라일락
꽃향기 찬비가 시샘하는지
온종일 향기를 지웁니다
창가에 앉아서
네가 좋아했던 봄비를
내가 좋아 했던 찬빗방울을
헵니다
★봄이 오면 / 정해정
봄이 오면
가로수 꽃비가
내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대
생각에
나는 봄이 된다.
보라 빛
나폴 나폴
나비가 날아와
꽃술에
입맞춤 할 때
나는 봄이 된다
웃음 꽃
한 잎 두 잎
연두 빛
초록 마음에도
봄이 왔다.
★석류 / 문태준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가을 하늘에 수놓는 마음 / 최영애
길을 걷다 주운 것은
벌레 먹은 낙엽뿐인데
내 가슴은
당신을 불러 세워요
당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아
새싹처럼 올라오는 마음
당신에게 전하는 마음 한 잔으로
청량한 가을 하늘을 수놓아요
★꿈 / 최영애
하얗게 덮어 가는
그리움 위로
설레는 작은 세상
추억의 오솔길은
사는 이유가 되고
희망이 되니
그 계절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아
조심스레 엮어 봤던 소망들
하늘 정원
그 길에도 올려 보니
어쩜 저리 예쁜지
★동백꽃 / 안광수
기다리다 못내 울음으로
터뜨린 가련한 동백꽃
그리운 님이여
서글픈 마음이 어찌
내 모습보다 더하겠나요
온몸이 찢어지듯 물든
내 모습이 아픔보다 힘든
그대 그리움에 물든 내 모습
발길 닿는 곳이면 따라
가고픈 사정을 손꼽아
통곡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온몸이
희생돼도 님 곁에 있고
싶어요
★비가 내리면 / 안광수
비가 내리면
그 사람이 생각나고
울고 있는 그 사람이
그리워지며
멍든 가슴에
빗물로 그 사람이
문질러 주니
더욱더 그리워지는
빗물의 소리를
지금도 마음은
그 사람 옆에
있으니까
★하늘 바라기 / 박종영
여름 한 철,
해만 사랑 하다가
영 돌아서지 않는 목줄기,
초가을 바람에 옷고름 풀고
헤픈 웃음 쏟아내도
더욱 미움만 타네
그래서 세상인심은 돌고 도는 것,
골고루 바라기 할 것이지
오메, 짠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