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시모음

개 화 안도현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 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 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 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화 /- 인도의 고시

그대의 눈동자는 푸른 연꽃잎

그대의 치아는 하얀 말리꽃

향기로운 연꽃 내음 그대에게서 난다

그 몸도 꽃잎처럼 휘날리련만

낮으로 사모하고 사모하여도

돌과 같이 단단한 그대의 마음 .

 

- 윤여흥

꽃이 아름다워 쳐다보는 사람을

여자처럼 꽃은 의식하고 있을까

꽃이 거울을 보며 사람을 보고

사람을 위해 웃고 있는 것일까

수반 위의 꽃을 만지며 여자처럼

꽃의 은유를 만지며 생각하는

미학 또는 여자의 허구

여자의 속살처럼

훔쳐보기, 눈흘기기,여지없이

타락하기.

꽃을 주제로 한

꽃뱀의 혓바닥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또는

시법을 위하여.

 

꽃 꺾어 그대 앞에- 양성우

그대 큰 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꽃다운- 안정옥

오늘 문득 생각했지요

몇 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그때가 꽃다운 나날이었는데 혀를 차다가

몇 년 후에 혀를 차고 있을 지금을 헤아리면

지금은 분명 꽃다운 날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는 나날이 꽃다운데 그것도 모르고

내게서 이미 가버렸다고 믿고는

어려서 누군가 꽃다웁다고 하면 흘러버리고

이제 꽃다웁다고 말해주지 않는데 불현듯 나는

꽃 지는 이 가을에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은 향기에 빠져

거처가 없는 힘센 사랑 쑥쑥 자라더니

더는 들어서지 못해

제 몸을 밀치며 제 몸을 밀치며

이 떨림을 달래려

꽃 지는 가을 공원으로 갔지요

몸이 잠겨 실눈을 뜨고 햇살을 마주하니

피곤이 몰려와

몸을 뒤틀면 두두둑 타게지는 소리 그렇지요

좋을 때는 짧아서 가을 해도 짧고 공원도 텅 비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나날이 새로웠는데

나날이 꽃다웠는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나는

꽃 지는 가을에 불현듯 귀를 세우고

오늘 이 쓸쓸한 사랑을

오래오래 묵혔다가 내게 어떻게 다시 찾아오는지 기다리지요

 

꽃등 류시화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꽃 멀미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꽃밭 김수복

꽃밭 하나를 갖고 싶다.

힘이 자꾸 빠지는 흐린 봄날에는

작은 꽃밭 하나만이라도

갖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

이리저리 벌떼들이 잉잉거리는 오후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작은 꽃밭 하나를 갖고 싶다.

물을 뿌리고 희망을 키우는

절망하지 않는 작은 꽃밭 하나를

흐린 봄날에는 갖고 싶다.

 

꽃밭에 서면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샘 바람 - 이해인

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채하던

어느 옛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꽃 씨 서정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써야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 하나의 유리이슬이 되어야지.

은해사 솔바람 목에 두르고

내 가슴의 서쪽으로 떨어지는 노을도 들고

그대 앞에 서면

그대는 깊이 숨겨 둔 눈물로

내 눈 속 들꽃의 의미를 찾아내겠지.

사랑은 자기를 버릴 때 별이 되고

눈물은 모두 보여주며

비로소 고귀해진다.

목숨을 걸고 시를 써도

나는 아직

그대의 노을을 보지 못했다.

눈물보다 아름다운 시를 위해

나는 그대 창 앞에 꽃씨를 뿌린다.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을 위해

내 생명의 꽃씨를 묻는다.

맑은 영혼으로 그대 앞에 서야지.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 이해인

내가 심은 꽃씨가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의

그 고운 설레임으로

며칠을 앓고 난 후

창문을 열고

푸른하늘을 바라볼 때의

그 눈부신 감동으로

비 온 뒤의 햇빛속에

나무들이 들려주는

그 깨끗한 목소리로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친구와 오랜만의 화해한 후의

그 티없는 웃음으로

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못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꽃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앗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꽃을 주고 간 사랑 하덕규

언젠가부터 허전한 내 곁에 하얀 너의 넋이 찾아와

아주 옛날부터 혼자뿐이던 곁에 하얀 너의 넋이 찾아와

내 마음속에 조용한 돋움은

작은 그리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마음속에 세찬 울렁임은

한 때의 보고픔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젠 안녕 빠알간 꽃을 쥐어 주고 너를 돌아서니

찌르며 새겨지는 이 가슴의 한은 어데다 어데다

버려야 하느냐 사랑아

꽃을 쥐어 준 사랑아

이별인 듯 빨갛게 꽃을 쥐어 주고 떠난 사랑아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 구광본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이별이 아니고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피는 날에서 꽃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내 사랑은 빨간 장미꽃 R.버언즈(1759~1769)

내 사랑은 6월에 갓 피어난

빨간 한 송이 장미,

오 내 사랑은 부드러운 선율

박자 맞춰 감미롭게 흐르는 가락.

그대 정녕 아름다운 연인이여

내 사랑 이렇듯 간절하오

온 바닷물이 다 마를지라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으리.

온 바닷물이 다 마를지라도

모든 바위가 태양에 녹아 없어진다 해도

모래알 같은 덧없는 인생이 다하더라도

내 사랑은 변하지 않으리.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사람아!

잠시동안 우리 헤어져 있을지라도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해도

그리운 님아, 나는 다시 돌아오리다.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하이네(1797~1856)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참으로 귀엽고 예쁘고 깨끗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서러움이

나의 가슴 속까지 스며든다.

언제나 하느님이 밝고 곱고 귀엽게

너를 지켜주시길

네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나는 빌고만 싶다.

 

노을 속의 백장미 헤르만 헤세(1877~1962)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환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누군가 내 마음을 적시네 이월하

누군가 내마음을 적시네

비내리는 풀밭처럼

소리없이 온 몸을 두드리며, 전율케하며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일어서게 하네

누군가 내마음을 적시네

장미꽃 붉은 꽃잎에 구르는 이슬로

날 물들게하네

여름이 지나고 고요한 날이 오면

나는 그대에게 가겠네...

 

땅속에 있는 수선화를 기다린다 이생진

겨울에 피는 수선화가 좋아

나처럼 혼자여서 좋아

매화처럼 나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흙속에서 나왔기에 흙냄새가 나서 좋아

죽은 사람과 살다 나와서 좋아

팔월은 수선화가 흙속에 묻혀 있는 시기여서

수선화는 수평선을 땅속에서 보겠지

수평선을 보며 자란 수선화

구엄리 수선화는 유명하니까

수선화도 수평선을 잊지 못해 밤마다 꿈을 꿀거야

구엄리는 수선화도 유명하니까

수평선도 수선화를 잊지 않으려고 꿈을 꿀거야

수선화의 꿈엔 흙이 묻었고 수평선의 꿈엔 물이 묻었어

구엄리는 꿈이 아름다워

해안도로를 질주하다가도 수평선 때문에 차를 세워 놓고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또 질주하던 사람

어디선가 꿈을 꿀거야

수평선에 뜬 수선화

나는 GNP가 늘어나는 것 보다 수평선이 늘어나는 것이 좋아

수평선은 사라진 것의 소실선

하늘로 사라진 것들의 소실점

수선화는 땅으로 사라진 것들의 소실점

두 소실점을 뛰어넘으면 소실되지 않은 것이 꼬리를 잡히겠지

나는 수선화의 뿌리처럼 모질게 살다 남은 봄을 기다리고 있어

돌아오지 않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리려 하니 기가 막혀

나는 수선화 앞에 서면 어미 잃은 강아지야

 

때없이 꽃은 시들어 무명씨

빛과 어둠

높음과 깊음이 교차하는 정점에

사람이 산다

별이 지고

빛이 돋아나는 정각에

꽃이 핀다

때없이 꽃은 시들어

의연히 봉인하는 영원의 서약

빛으로 돋아 깊음으로 내려가는

삶처럼

때없이 꽃은 시들어

씨앗으로 남긴 혈서

사람이 꽃이 되려한다.

 

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 모두

잠이기 전에.

동백꽃 문충성

누이야.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들어본 적 있느냐.

사각사각 맨발로 하얀 눈 한 겨울 캄캄함을 밟아올 때

제주바다는 이러저리 불안을 뒤척이고

찬바람을 몰아다니던 낙엽 소리 돌돌 잠재우며

밤새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아련히

나의 잠 속에 묻혀가고 있다.

 

두가지 국화 무명씨

산행길 수로옆 들국화

먼지만 가득

살짝 꺽어 먼지터니

깨끗한 아기손

가늘게 엉퀸

하얀 손톱 끝으로

살짜기 물들인

보라빛 메니큐어

옹기종기 몇채의 집

비니루 덮인 창문사이

인적의 숨소리와

가지런한 국화송이

사랑이 피워있는

두가지의 국화가

도시의 수증기와

맞닿아 섞여 있네

 

들꽃에게 서정윤

어디에서 피어

언제 지든지

너는 들꽃이다

내가 너에게 보내는 그리움은

오히려 너를 시들게 할 뿐,

너는 그저 논두렁 길가에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인간이 살아, 살면서 맺는

숱한 인연의 매듭들을

이제는 풀면서 살아야겠다.

들꽃처럼 소리 소문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었다 지면 그만이다.

한 하늘 아래

너와 나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살 수 있고

나에게 허여된 시간을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냥 피었다 지면

그만일 들꽃이지만

홑씨들 날릴 강한 바람을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

 

들풀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라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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