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시 모음 89편
《1》봄비
강계순
참혹하게 쓰러졌던 나뭇잎 위에
색색이 천을 놓아
하나씩 하나씩
궁핍의 겨울을 꿰매는 손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만유의 어깨 위에 내려
빈혈의 혈관을 채워 주고
서릿발 같던 하늘
비단 안개로 닦아 내어
천지에는
자근자근 땅 밟으며 일어서는
병후의 시력.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천년을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혼 불러내어
일으켜 세워 주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보는
약손.
《2》봄비 마중
강사랑
예쁜 임이 오신다기에
노란 우산 하나 들고 봄 마중 갑니다.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풍경을 한 아름 안고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어오십니다.
봄 바구니에 쑥과 냉이를 가득 담고
해맑은 미소 한가득 담아 오십니다.
진달래와 개나리를 닮아
가녀린 몸이지만
오시는 임 반기려 커다란 목련을 피웠습니다.
노란 우산 살며시 감추고
먼 길 오신임을 온몸으로 맞이하면
설렘에 순간의 행복은 기쁨의 눈물 되어
소리없이 대지의 깊은 곳까지 적십니다.
내일은 온 세상에 봄꽃이 만발할 것 같습니다.
《3》봄비가 되어
강선옥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대지를 적시고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살포시 새벽을 거두며
상큼한 아침을 깨웁니다.
소곤소곤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산천초목을 깨우고
어머니의 손길처럼 어루만집니다.
새벽을 깨우는 봄비의 속삭임처럼
늘 잔잔한 미소와 같이
사랑의 호수에 물을 담아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깊고, 넓게,
긴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행복의 천사가 되어
봄비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4》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강해산
오늘도 허전한 가슴 채우려
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나들일 간다.
가끔 복잡한 소음 속에 묻혀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싫지만은 않다.
모든 걸 벗어 던지고 뛰어든 불나방처럼
스스로 타서 재가 될 운명인 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모를리 없지만
오늘은 당당한 모습으로 활보하고 싶다.
언제부턴가 봄비가 싫어져
일부러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 지냈는데
이렇게 비 내리는 감상에 젖어
스스로 외로움을 떨치려 거릴 나선다.
시끄러운 음악과 걸 맞는 몸짓으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마음의 가면을 쓴다.
아, 돌아서면 사라지는 환상 속으로
신기루 속 엘도라도를 향해 걸어간다.
살얼음 위를 걷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5》새벽을 걷는 봄비
고은영
절망을 맛보지 않은 자는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한 때 나의 절망은 위험 수위를 넘었고
미치광이처럼 광폭하게 내게로 달려들었다
이 도봉산 언저리에
산 안개 뿌연 장막의 심연으로
봄 비가 추적추적 밤을 적신다
몇 개의 가로등만 구획을 가르고
점점이 고독한 빛들은 흩어진 채 출렁인다
아, 빗줄기
그리움에 흠씬 젖은 리듬은
어김없이 새벽 침묵을 깨트리고
피를 토하듯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하고 있다
《6》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7》당신은 봄비 같은 내 사랑입니다
공재룡
황사 같은 먼지 얼룩진 세월 속에
그저 옷깃 스친 인연이란 이유하나
눈비가 오는 날도 따스한 체온으로
나에게 등을 맞대어 준 당신입니다.
남처럼 가진 것도 잘난 것 없는 나
힘겨워 인생 고갯길밖에 없었는데
늘 내 곁에 그림자 같이 함께해 준
눈물겹도록 고마운 내 사랑입니다.
천둥 치는 날에 곁에 남아 주었고
반평생 지나 24평 아파트 장만에
세상 다 얻은 듯 천사의 미소 주는
당신은 진정 봄비 같은 사랑입니다.
《8》봄비가 가슴으로 내립니다
곽승란
꽃잎들이 서러움이라도
토해 내는 듯
비가 내립니다.
가뭄으로 여기 저기
뜨거운 악마의 손길을
저지하는 듯 비가 내립니다
방긋 방긋 새순들의
노래가 들리 듯
조용히 비가 내립니다.
보낸 아쉬움이 너무도 커서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버린 듯
봄비가 하염없이
내 가슴에 내립니다
나의 마음은
햇살처럼 고운 듯 비가 내리지만
가슴 한켠에 그리움으로 내립니다.
《9》봄비에게 길을 묻다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람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10》봄비에 젖은
길상호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11》봄비
김덕성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결코 눈물이 아닌
사랑의 온정
희망을 잃고
우러르는 나무에게
하늘이 내려 주는
생명수
사랑을 안고
활짝 웃는 나무
두 팔 벌려
감사하고
《12》봄비
김병호
아직 엄마의 젖도 먹을
힘도 없을 텐데
눈도 옳게 뜨지 못했는데
몹쓸 비가 간난아기의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구나
빗소리에 놀란 간난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아직도 남은 추위에
감기가 걸리지 않을까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
깊은 잠이 든다
봄비는 마른 가지에 붙은
겨울을 녹이는 듯
아랑곳없이 봄을 재촉하고
꽉 다문 땅 끝 입술을 적시며
생동의 발걸음이 찬란하다.
《13》봄비
김석전
비가 그쳤네
햇빛이 반짝어리네
세수한 산과 들이
수군거리오
"어이 시원하구려."
"어이 시원하구려."
《14》봄비
김세영
간밤 빚은 은하의 눈물
촉촉이 젖은 봄 물 머금고
초록빛 싱그러움 그렁그렁
옹골차게 돋아나다
푸른 물 주르르 흘릴 것 같은
봄 눈망울 초롱초롱
마치 아기의 눈망울 같아
아니면 맑은 호수 같아
'풍덩'하고 빠져도 좋을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
《15》봄비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16》봄비
김영준
투신하여 내 몸을 꽂고 나면
어느 만큼 지나
그 자리, 구멍마다
제 이름 달고 투항하는 풀잎
그렇게 온갖 것들이 일어서고 난 후
드디어 그 눈짓 속에 파묻히는
나무
3월 지나며
어디선가 잦은 꿈들이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꿈속에서
많은 이름들이 가방을 열고 나온다
《17》봄비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18》봄비
김윤배
세상이 빗방울 위에 놓인다
겨우내 마른 소리를 내며 떠나려던 나무들이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발등에 누워 젖고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내, 지난 겨울이 저랬?가
숲이 빗방울을 조용히 내려서고
오랜 잠 괴로워했던 산갈대
툭툭 마디를 꺾는다
내, 지난 봄이 저랬던가
저처럼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얹혀
스거운 나이를 버리면
내 굽은 그림자가 끌고 온
메마른 마음 햇솜처럼 부풀어
꽃망울 벙그는 세상을
혼자는 갈 수 있으리
내 비록 네 마음 속에
싹 틔울 꽃씨 하나 묻어두지 못한
붙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19》비옷을 빌려입고
김종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 년 전
善竹橋가 있던
비 내리던
開城
호수돈 女高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려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20》봄비가 내립니다
김지순
상큼한 미소로 다가와
유혹하던 그대 있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처럼
한없이 흔들어 놓은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잎 뾰족하게 내밀며
제가 봄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좋아하고
잿빛 하늘을 좋아하고
신선한 바람을 좋아하는
그대가 아닌 내가 오늘은 있습니다
흐린 하늘 너무도 예쁜데
가슴은 텅 빈 벌판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비가 내리는 걸 아는 걸까요
지금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21》봄비 여자
김찬일
여간 걸어도 줄지 않을 것 같은
들길 걷다 봄비 만났네
내리는 빗줄기에 가려, 먼 들판은
풍경의 잔해로 눈꺼풀에 스며들고
들판 자욱이 봄 안개로 피어있던
야산의 진달래만, 허전한 눈망울 채웠네.
아직 찬비였지만 봄비에 젖은 진달래꽃
가슴에 붉은 아픔으로 떨어지고
봄 아지랑이에 숨어
지금까지 겨울 꿈 키워 온 여자 마을
봄비 따라 흘러가 보이지 않았네
아 아 겨울이면 잉잉거리는 바람으로 나타나
빈 나무가지 흔들던 여자
흰 눈 내리면 눈 위에 이름 모를 새
발자국으로 찍혀 있던 여자
그 오광대 각시 탈 망상같던 여자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키워 온
겨울 꿈 꺾어 놓고, 봄비의 여자
그 몸 벗어 놓고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22》아내의 봄비
김해화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 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뒤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원에 떨이미 해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23》봄비 그친 뒤
남호섭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 안개다.
산 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24》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5》봄비 오는 밤에
도지현
자작자작
빗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풍기는 기름 냄새
가까이 다가갈수록
빗소리는 더 거세지고
노릇노릇 지져진 부추부침개
시절을 안주 삼는
서민들의 애환이
하루의 곡예를 잊기 위해
눈물을 털어 넣고 한을 토한다
그렇게라도해야지만
다시 내일을 일으킬 수 있음이니
자작자작 부침개 부치는 소리
끝없는 내레이션이 되어 흐르는데
《26》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 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27》봄비의 언어
박광호
봄비엔
감미로운 삶의 진실과
사랑의 언어를 품고 있다.
음지에 잔설을 녹여
대지에 온기를 불어넣고
산 너울 계곡마다 봄 안개를 피우며
침묵의 겨울 강을 건너 온
나목들의 애틋한 잎눈을 보듬는다.
새 삶의 봄 노래를 들려주며
움츠린 가슴에 희망을 안기는
봄비는
예외 없이 인간의 가슴에도
싹을 틔어준다.
남녘의 봄바람 불어오고
봄볕이 대지에 내려앉을 때
온 누리엔 푸름의 꿈으로
펼쳐 질 것이다.
《28》봄비소리
박금란
타이르듯 내리는 봄비소리
엄마가 불러준
‘......망치를 들고......’ 낮은 자장가가
되살아 돌아오니
구겨진 사랑 곱게 펴
차곡차곡 마른빨래 개듯
마음에 담네
민들레 귀 세우고
봄비 음악 담아
쫑긋 노란 꽃잎
우주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꿈을 꾸네
산목련 꽃잎
빗줄기를 젖줄기로
환한 세상 열어가는 꿈
나누어주니
전쟁고아 장수가 되어
나라를 구하고
북녘에서 피어난
남북을 잇는 무지개 꿈
봄비가 되어
자본주의에 불구가 되어
주저앉은 노숙자를
말갛게 씻겨주니
북녘세상 남녘세상
하나 되는 세상
4.16리본 개나리 꽃잎으로 주르르 이어져
휴전선 허무네
가시철망도 녹이는
민족의 봄비는
우리 마음속에 담겨
평화의 노래 찰랑이네
우주의 노래 민족의 노래
날선 제국주의도
스르르 잠들게 하네
영원히 잠들게 하네
《29》봄비
박동수
차분히 속옷 적시고야
꽁꽁 얼었던 짙은 그리움을
눈물이듯 내리는 봄비에
초록빛 뿜어내고
가슴속에 묻어둔 진한 사랑
꽃망울로 밀어 낸다
질퍽이는 길을
맨발로 추적추적 걸어오는
그대 발걸음소리
수많은 색색으로 피워낸
꽃잎을 모아
봄비 오는 길 위에
꽃길을 만들고
차마 수줍어도
봄비 따라 오는 님
오래오래 기다리리라
《30》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이
그리움을요
《31》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데서 우레 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32》봄비를 맞으며
박영웅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갑자기 그립다.
작은 풀꽂 한 송이도
노래가 되는 벌판에 서면
비로소 어깨 위에 쌓인
먼지의 무게가 느껴지고
흔들리는 시간을 실감한다.
초록빛 산허리를 돌아가는 안개여
가슴에 맺히는 빗방울이여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몹시 그립다.
《33》그 봄비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34》듣기 좋은 봄비 소리
박종영
저 하늘 높은 구름이
비 내리는 기운을 잃었던가
오랜 가뭄이 봄 나무를 바삭거리게 하고
며칠째 안개로 마음을 훔치고 가
치미는 울화 보채더니
오늘은 빗 임이 속닥거리며 내린다
어느 임의 발길을 따라
종종 걸음걸이 비구름 머리에 이고
서늘한 눈물을 뿌린다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무수한 방울을 뭉쳐 내려보내는
숨 가쁜 하늘의 숨소리,
시냇물로 흐르다
몸섞이며 일어서는
물풍선의 포옹이 또르르 영롱하다
기나긴 강물의 여로가 지금부터 시작인가
물기를 입에 물고 할랑대는 새싹,
연두빛깔이 비 갠 석양에서 곱다
《35》봄비의 저녁
박주택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 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에 뿌리를 두고
한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기고
배후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36》봄비
방원조
실바람 아지랭이
몰래 숨기고
언 세상 녹이려고 보슬비 와요
소곤소곤 봄 얘기
풀어 내리면
고개 내민 새싹은 세수하지요
《37》봄비 오는 날
백원기
봄비가 보슬보슬 내려
아침부터 차분한 마음이다
들쑥날쑥하던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고
선생님 들어오신
정돈된 교실처럼
앞을 보며 귀 기운다
서툰 걸음 바로 걷듯
흐린 생각 깨끗이 닦아
내 갈 길 바로 찾고
무릎 치며 갈 수 있길
두 눈 감아 빗소리를 듣는다
들판에는 새 생명이 소생하고
이사 하는 사람 부자 된다는
봄비 오는 희망의 아침
마른 땅이 촉촉이 웃는다
《38》봄비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려 -ㅁ 풋이 나는, 지난 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ㅡ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올 사람 기두르는 나의 마음!
《39》봄비
허난설헌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제
뜬시름 못내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장 위에 지네
봄비는 보슬보슬 찬바람 숨어들제
뜬지름 못내 이겨 병풍을 기대서니
담장 위에 살구꽃 지며 갈 길 몰라 하더라
《40》봄비 닮은 그대
서명옥
좁다란 길목
작은 탁자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누가 볼까
애틋한 마음 흐르는
빗물에 내 사연 띄우고
고운 인연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봄비 닮은 그대
★
《41》봄비
선미숙
내 작은 창을 두드리며 봄이 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잊지 않고 옵니다.
지독하게 춥고 길었던 한철을 견뎌내며
오랜 기다림에 지쳐가던 나무들은
머지않아 파란 웃음으로 반기겠지요
길가에 풀잎도 가녀린 몸을 일으키며
겨울을 털어 냅니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은
가슴에 스민 봄을 어쩌지 못합니다.
깊게 얼었던 땅을 뚫고
돋아나는 싹이 더욱 푸르듯
아팠던 만큼 다져진 마음에 찾아올 사랑은
이제 철부지가 아닐 듯합니다.
눈을 뜨게 해준 아픔이 고맙습니다.
내가 버린 그 세월이 나를 키웠습니다.
원망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비와 함께 고운 임도 봄을 안고 오겠지요.
《42》봄비 내리는 날
손병흥
긴 침묵 어린 온통 무거워져버린 마음속에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순식간에 자리한 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봄기운 가득한 흔적들
추억들을 불러모아 살며시 스며드는 발자국
머뭇거리듯이 다가서 버린 그리움이란 꽃향기
저절로 가장 멋진 푸른빛이 되어버린 이른 봄날
촉촉해진 대지위로 새싹 돋게 하는 그 멋진 풍경
그냥 그렇게 활짝 핀 봄 싣고 부슬부슬 내리던 날
마냥 떠오르는 아련해진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빗방울 되어 돋아난 아직도 내 안에 머물렀던 정겨움
《43》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 소리가 들려온다
향국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 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 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물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뒤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44》봄비
송연우
애기 엄마 냄새가 난다
창문에 기대어 선 별 목련나무
꽃눈에 맺힌 빗방울
젖꼭지처럼 물고 있다
놀랠까 살금살금 발끝으로 건넌다
연잎에 나부시 엎드린
아침 이슬처럼
다만, 맑음으로
흙 밑의 풀싹들
기지개 켜는 손
일으키는 소리
젖은 손 하나가 내 안에서
중얼거리는 듯
나무의 굳은 시간들
부드러운 가위질로 잘라내며
온 세상
풀빛과 꽃 빛으로 솟음치게 한다
《45》봄비
송정숙
봄비는 어머니다
젖을 먹이듯 어루만져
싹을 틔우고
얼른 얼른 자라라 기도발로
만물을 키워준다
동전 한 닢 밭지않고
높고 낮음 없이
무상으로 받는 자연의 혜택
이것만 알고있으면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다
《46》봄비
신경희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창가에 흩어지는 빗방울이
당신의 소식인가 싶어서
창가에 다가섰습니다.
맑은 빗방울 하나를
손 위에 올려놓고
투명한 물방울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당신의 웃음이 내게 다가섰습니다.
먼 하늘 끝에는
당신이 있을 것 같아
눈을 들어 멀리 까지 내다보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마을에서
저 봄비를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당신도 문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음은 먼저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겠지요.
《47》봄비
안덕상
벌겋게 타오르는 산불 지지 누르려
너는 주룩주룩 쏟아지지만
너 달려오는 소리에 놀란 뿌리들
검은 산 빛 깨뜨리고
더 큰 불 지펴 놓고야 말겠다
마른 삭정이도 한껏 젖으며
이 밤 자고 나면
불이야, 크게 소리치며
《48》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49》봄비 내리는 저녁
안종환
차가운 눈물
방울져 흐르는
유리창을 넘어
멀리서
아주 멀리서부터
낮게 깔리어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는
저 지친 기적소리
흐느끼며 떠나는
그대의 마지막
긴 한숨 소리
《50》봄비
양광모
심장에 맞지 않아도
사랑에 빠져 버리는
천만 개의 화살
그대,
피하지 못하리
《51》봄비
여관구
비가 가늘어서
가시 사이로
숨어 내리는 이른 아침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싶은
둥치 굵은 탱자나무는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이다.
마음이 깎이어
피부마저 얇아져서
추위를 막을 수 없더니
가는 비에
튼 살 사이로
진통을 새싹으로 밀어낸다.
가시 끝 봄비에는
눈물 맛이 섞여 있다.
《52》4월 봄비
오보영
들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고
메말라진
가슴을
적셔주고 싶어서
소리 없이 네 곁으로 다가왔단다
우리 서로
차분히
돌아보면서
못다 피운 초록 잎새
돋우자구나
《53》봄비의 서곡
오석란
이제 막 벙그는가 했는데
나뭇가지 아래로
하나씩 둘씩 추락하는 꽃잎들
꽃향기를 탐내던 봄비가
유리창에 무수한 보표를 그려 음표로 매달리고
지나는 바람이
슬쩍 와 타주하듯 들려주는
봄비의 서곡
젖은 대기를 뚫고 날아오르던
새 한 마리
깃털이 젖는 줄도 모르고
봄날의 파적삼아 적요를 쪼고 있다
《5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55》봄비
오정현
엄마의 술병은 손바닥만 한 방에서
엄마가 잠들어 있는 머리맡을
오래된 술친구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술병에 봄비가 촉촉이 내릴 때면
엄마의 눈가에도 비가 내렸다.
거리를 헤매고 집으로 돌아오는 빗방울이
엄마의 술병을 채우고
꽃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술병은 꼬꾸라져 철썩거렸다.
나는 술을 따르다
확 쏟아 버렸다.
엄마의 술병은 영취산에
진달래꽃을 피우러 가고 없는데
봄비가 내린다.
《56》봄비에 울먹이는 미소들
유일하
꽃눈으로 날리어
촉촉한 대지에 뿌려진 너.
화사했던 미소의 향연은
샘이 난 구름이 울어서
화가 난 바람이 울어서
속절없이 널 허무하게 한거야!
세상을 미워해도 그들은 몰라
때마침 지나간 봄비를 미워해!
넌 내년에 다시필 수 있지만
난 다시올 수 없는 과거를
묻을 수밖에 없어!
다음 생에는
너처럼 꽃으로 태어나
벌들과 달콤한 사랑할 거야!
그때는 너희들의
단란한 친구가 되겠지!
그러니 슬퍼하지 마!
《57》봄비
이가원
살짝이
살짝이 오세요
서두르지 말고
달려오지 말고
돌아보지도 마시고
사뿐 사뿐
사뿐히 오세요
그대 오시는 길에
예쁜 꽃잎 다칠까 봐
그대 오시는 길에
그 꽃잎 아플까 봐
그대 오실때
그 꽃잎 떨어질까 봐
《58》봄비에 젖어
이경옥
보슬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이
내 작은 어깨 위로 흐르면
난, 그대의 가슴으로 파고들고픈
구멍 꿇린 마음이 된다
어쩌면 어제의 아픔보다
오늘의 행복함에 젖고 싶어서일까
내리는 빗방울 바라 보는 눈빛에서
그대를 더욱 생각게 하는 것은
하지 못하는 말을 품은
그대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일까
어제처럼 오늘도 비가 내리면
난, 그대의 생각 속에 머문다
《59》봄비
이경임
새벽 2시에서 3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초침소리처럼
나의 출생신고에 사용된 숫자들처럼
나의 사망신고에 사용될 숫자들처럼
천진한 울음처럼
발랄한 체념처럼
그렇게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시계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마음 우물 속 개구리처럼
분주하게 폴짝거리며 힘 빼지 말고
하늘을 꼭 껴안고 더 많이 놀아야지
땅과 뒹굴며 더 많이 놀아야지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봄비의 촉감처럼
죽음의 촉감과 더 친밀해져야지
《60》봄비
이동순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 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 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61》봄비 속에 서 있는 그대에게
이상철
속살거리는 봄비에
목련이 꽃 깍지를 벗듯이
따스한 내 입김에
그대 두꺼운 옷을 벗으려오.
투둑 거리는 봄비에
애기 꽃이 꽃망울을 부풀리듯
따스한 내 눈길에
그대 가슴에 불 지피려오.
꽃밭에 튀는 봄비에
새싹이 떡잎을 벌리듯이
나로, 나로 하여금
그대 두 팔에 안기게 하려오.
《62》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63》봄비 내리는 오후
이승복
막깨어나는 새싹곁에
봄비가 내리는 오후
생각의 껍질을 벗어
눈감아 침몰하는 나
내게서 사랑은 조용히
먼발치서 흔드는 몸짓
외줄타는 철지난 낙엽
애달파했던 허기짐에
몰래 귀동냥하는 사랑
후조의 숨바꼭질 사랑
붉게 그대의 향기가
신기루 되어 보이는
가슴차고 앉은 빈자리
그림자로 따라 붙는
고운님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봄비 내리는 오후
《64》봄비
이윤호
약속이라도 한듯이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겨울비라고 할 수도 없고
이른 봄비라고도 할 수 없는
그래도 우수가 코 앞이니
봄비라고 하겠다
농부의 땅이 해갈되어
기분은 좋다만은
내 기분은 영 내키지
않는다
아침부터 영화 한 편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오자는
마누라의 등쌀이
성가시어
《65》봄비에 젖은 사랑
이재옥
아름다운 것은 느리다는 걸 증명하듯
나뭇가지의 졸린 그리움 사이로
추적추적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립니다
당신을 만났던 별빛 쏟아지던 거리와
노을이 뜨거워서 철철 낭만이 흐르던 저녁
혼자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던 야릇한 미소
알몸 위로 쏟아지던 가냘픈 한숨까지
당신과의 모든 것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해한 손목 같은 튤립 붉은 꽃잎에
첼로의 저음으로 나부끼는 봄비는
날개 붓을 휘저어 사랑을 적시고
온 세상을 적십니다
고뇌로 점철된 퇴색된 추억이
비바람에 밀려도 아니
폭풍우에 세상 끝까지 실려가 뭉개져도
항거하지 못할 봄비의 의뭉한 허밍에
사랑이 까무룩 잠들 듯 젖어 갑니다
《66》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통통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67》봄비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
《68》봄비 그리고 꽃비
이호정
바람 불더니 꽃잎 날리고
진자리에 비가 앉습니다
뜨락에 핀 라일락
꽃향기 찬비가 시샘하는지
온종일 향기를 지웁니다
창가에 앉아서
네가 좋아했던 봄비를
내가 좋아 했던 찬빗방울을
헵니다
《69》봄비에 젖은 그리움
장성우
싸늘한 세상 그리움 내린다
봄비 내리는 사랑
가슴 서서히 적시고
눈물 없는 세상 따뜻하게 한다
흐르는 세월
비로 변한 겨울 있기에
혼자서 아픈 봄비를 맞고자 한다
황사로 오는 계절
봄비이기에 아픈 추억
애틋한 그리움으로 불러서
이해하지 못한 사랑되어 흐르고 있다
《70》봄비처럼 그대 내 가슴에 내립니다
장세희
초록향기 머금은 정원에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새싹들은 저마다 여린
솜털을 감추느라 아우성입니다.
봄비가 내리면 나는
왜 이렇게 설레일까요
그대가 유난히 생각이 나는
저 봄비의 속삭임
봄비가 속삭입니다.
보고 싶었어 라고
내 사랑아 잘 지냈니 라고
그대 목소리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밤 너무나 보고 싶어
내 눈에 이슬 맺히게 한 바로 그대가
처연하게 오시고 있나 봅니다.
회색빛 하늘에서 봄비가
꿈결처럼 부드럽게 내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저 몸짓
내게는 그대가 봄비보다
더 감미롭게 내립니다.
포근하고 보드랍고
잔잔하고 애틋하게
그대 봄비처럼 오늘
내 가슴에 내리고 있습니다.
《71》봄비
장옥관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
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눈 희미한 콧노래
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
한 땀 한 땀
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
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
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
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
《72》봄비
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 해도
반길 수 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73》봄비
정동숙
주린 배 움켜쥐고
소리 없는 울음 삼키며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 소리에 기대어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 보지만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쏟아 낼 듯한 하늘은
인색하리 만큼의
동냥젖을 내주고는
마른 목적실 겨를도 없이
정체돼 있는 구름 사이로
파랗게 미소짓고 있다
또 기다린다
속절없이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되어……
《74》춘흥
정몽주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중이라 가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 불어나니
새싹들 여기 저기 솟아오르네
《75》봄비
정민기
바람의 손을 빌려
빗방울을 훌훌 털고 일어난
꽃잎이 환하다
산자락은 커튼처럼 안개를 치고
철 지난 늦잠을 자고 있다
언제 찾아왔나! 작은 새 한 마리
울고 간 흔적이 비친다
임시로 열어놓은 우산 아래,
지구에서 가장 예쁜 꽃을 심고
나 지금 그 꽃을 위해 거름이 된다
창문에 너의 생각 실루엣처럼 놓고
이내 빗방울처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오늘 나는 비를 맞으며 봄을 걸었다
《76》봄비
정소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77》봄비 오는 어느날
정숙진
연두빛 봄비가
잎새에 속살거리는데
우리사랑
우산속에서 속삭이네
거리는 연두빛으로 촉촉한데
우리입술도 함께 촉촉하네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은
그칠줄 모르고
우리의 포옹은
따스하게 스며드네
얼마나 흘렀을까
우산은 저만치 굴러가 있고
빗물은 슬며시 가슴을 만지네
화들짝 놀라 추스리고
빗길을 걷는 우리는
연두물이 들었네
《78》봄비
정진규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 버린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 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 나의 땅 문서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품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다
《79》봄비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 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 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80》봄비야
조수정
네가 오려고 혹독히 앓았나 봐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
너처럼 대지 위에 떨어지는 눈물이란다
사뿐히 음악처럼 내려앉지만
대지의 깊은 곳을 적시고
생명을 움트게 하지
사랑은 생명인 거야
봄비야
너는 기다림을 아름답게 해
겨울의 상처를 씻어내리고
기적 같은 꽃몽오리를 피워내지
말하지 않아도 돼
조용히 임하는 네 발자국
그 속삭임은 천지를 깨우는구나
곧 그의 나라를 보게 될 거야
《81》봄비
주용일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82》봄비 내리는 창가에서
지소영
당신의 창문이 보이지 않아
비가 되었습니다
창호지 뒤로 아련히
웃풍처럼 흔들리는 것들을 보며
온돌의 따뜻함에 잠들고 말았던 기다림
색 없는 봄비였습니다
너의 줄기 사이로 내밀었던 봉오리
연두색 희망에 포장하듯 물을 주기도 하고
행여 꾸겨질까
오른팔을 조심스레 받치고
떨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날들
어딘가에서는
상앗빛 추억
소라의 고동처럼 들리고
첫사랑처럼 잠 못 이루던 타임머신의 그 자리에서
아직도 너로 나인 소망 한그루
바람처럼 그리움으로 불고 있습니다
갈 길을 보고
돌아올 길을 그려 보고
되돌려야 할 길을 빗질해 봅니다
가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소중한 빛깔로
색칠을 하면서
미완성 작품이지만
불안한 그림자이지만
울퉁불퉁한 당신의 바다가 거친 파장이었던 이유도 배웠고
기대일 언덕 없는 외로움도 알았습니다
우리라는 따스한 언어에
당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당당한 진실로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3》봄비 소리에
최병창
보이지 않는 진동이
마법의 순간처럼 흐르고 있었네
겨울이 풀려날 즈음, 신기하게도
온몸의 세포가 느린 행진을 시작하고
겨우내 묵혀 두었던 살갗 위 비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시점에
스멀스멀 온기가 온몸으로 살아나듯
채 마르지 않은
낱말들이 미동하듯 흘러내리고 있네
목마름에 눈뜨려는 빗소리를
기다리지 않은 생명 어디 있겠는가
소리마저 미끄러지듯 봄비가 흘러내리네
끌어 안듯 속내까지 흠뻑 적시며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장맛비보다
겨우내 묵혀둔 머릿결 잔잔히 빗어 내리듯
소리마저 외롭다고 서툴게 뒤척이는
그래서 흠모하며 집중하는 봄비인가보네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어
꽤 오랜 시간을 다듬은 순간,
누구라도 기다림을 살필 자유는 있는 것
봄비가 소리처럼 내리고 있네
소리가 봄비처럼 내리고 있네,
이 비 그치면 눈을 뜬 새싹들은
펴지 못한 날개를 다독일 테고
먼데 소리로 닫혀있던 눈과 귀도 불러들일 것이네.
《84》봄비
한효상
조용히 내리는 봄비
들뜬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대와 마주 보며
해 맑은 웃음 지며 걸었던
그 길에 어제 같은 비가 내린다
라일락 꽃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우리 사랑
꽃피웠는데
덩그런 그리움만
내 가슴에 남겨 놓고서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나요
《85》봄비 그리움
한효상
그대 마음이 시리면
내 마음은 잘강잘강
찢어집니다
그대 가슴이 아리면
내 가슴은 멍울 져서
긴 밤을 뒤척입니다
찢겨져 구멍난 가슴엔
송곳바람이 웅웅 거리며
할퀴고 갑니다
그대 떠난 빈들엔
초록이 움트고 봄비는 아픈 비가
되어 그리움을 키웁니다
《86》봄비
홍명여
오랜 침묵을 깨는
격정의 선율
늑골 깊숙이 파란이 일고
촉촉이 스미는 리듬에 맞춰
진통하는 대지
지구는 숨죽여 지켜보는데
풀싹,
어둠을 뚫고 일어서는
저 여린 당참,
방울방울 맺히는 초록빛 꿈
그대!
봄이다
찬란한 그리움이다.
《87》봄비
홍수희
사랑 때문에
울고 싶은 날이다
사랑 때문에
젖은 유리창이 되고
싶은 날이다
추억상자를 조심스레
열기만 열면
스프링처럼 간단히
튀어 오를 것 같은
너의 웃음소리
오간 데 없이
꽃은 피는데 자꾸
피는데 지치도록
그리운 얼굴 때문에
하루 왼종일
빗물에 젖어 울어보고
싶은 날이다, 봄비
《88》사랑의 봄비
홍종흡
겨울 눈 녹은 양지 녘에
들꽃 씨 하나 겨울잠 깨어나
하늘 향해 하품하는 이른 봄날
솔바람 찾아오는 싸리울에는
매화나무 가지 끝마다
새초롬 피어나려 애쓰는 꽃눈이
첫날밤 지새운 아내의 눈처럼
불그스레 물들어 피어나는데
새벽일 마다 않고 일어나
아침상 차리는 아내의 손끝은
선녀가 내민 손처럼 참으로 고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가
이제 고생 그만 시켜줄 게-!
머쓱해 한마디 하는 사내 눈에는
이른 봄 피어나는 매화 꽃눈처럼
사랑의 봄비가 흘러내린다
《89》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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