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 나호열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 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 나호열


사랑해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배웠다


♡사랑의 온도 / 나호열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물의 신비한 체온일 뿐이다


♡달팽이의 꿈 / 나호열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구겨 넣는다

언제나 노숙인 채로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 나호열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 나호열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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