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불교운동

 

 

 

참불교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전 인도에서 연기법(緣起法)과 무명(無明) 그리고 팔정도(八正道)를

깨달으신 석존(釋尊)께서 개교(開敎)하신 불교(佛敎)가 이 땅에 전래되어진 지 어언 1600여년,

 

한 때 원효성사(元曉聖師)와 같은 큰 스승이 출현하시어 이 땅의 불교는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리하여 신라의 불교는 당나라 지역에 신라방이라는 독특한 불교학교를 세워 당(唐)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같은 외국의 승려들을 가르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종파불교(宗派佛敎)가 유입되면서 이 땅의 불교가 서서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조선 500년간의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의하여 멸망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가 화려하게 꽃 피울 수도 있었고 또 멸망할 수도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는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모든 것에는 인과(因果)가 있는 법.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 교리(敎理)가 민중의 삶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교리가 민중의 삶과 동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이 땅엔 불교란 없다.

물론 수많은 사찰이 있고 스님이 있고 신도가 있지만 불교의 핵심가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이라곤 거리에는 박수무당들이 불상을 모시고 만자(卍字)를 내건 사찰들과,

경전 한구절도 읽어보지 못하고 배출되어지는 승려들과, 무당같은 스님한테 점이나 치고

부적이나 쓰는 신도들과, 또 정법수호(正法守護)를 외치면서 부처님을 부적처럼 모시고

사는 승려와 신도들만이 있을 뿐이다.

 

오래 동안 앉아서 잠자기(장좌불와), 오래 동안 절문 밖으로 나가지 않기(두문불출),

문에 못질한 방안에 갇혀 오래 동안 앉아있기(폐관수행) 등의 묘기(?)로 배출되어지는

큰스님들이 존경받고.

 

부처님이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가면서 하는 백장청규(百丈淸規)가 불교의 계율이 되고,

겨우 견성(연기법을 깨우치는 것)하는 것이 불교 최고의 깨달음인 양 둔갑한 중국 불교의

혜능교(慧能敎)와 그들을 추종하는 한국의 선종이 불교의 정법이 되고.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인 전통사찰에 온갖 편의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문화재를 파괴하면서도

문화재 입장료를 받는 사찰들이 오늘날의 불교의 모습이다.

 

그리고 49재, 천도제 등 겉모양만 불교일 뿐 무당이 하는 굿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의미로

해석되어지는 불교 의식들이 불교의 모습이 되고.

 

불교의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석존을 추종하고 불교가 최고라고 외쳐 대는 연예인 팬클럽

수준밖에 안 되는 석존팬클럽회원들이 불교의 진실한 신도로 인정되는 현실을 보라.

 

과연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하여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땅엔 이미 불교가 사라진지 오래다.

그래서 진짜 불교를 전하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우치시고 용수, 세친 등 수많은 조사스님과 한국의 원효스님으로 면면히

내려온 그 가르침을 되살려 이 땅의 민중들과 나누려고 한다.

 

그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를 전할 뿐인데도 오늘날 불교행세를 하는 거짓불교가 하도 많아

정기간행물인 이 책자를 ‘참불교’라 이름 하였다.

 

그렇다면 불교와 불교 아닌 것 즉, 참불교와 거짓불교의 기준은 무엇인가.

 

먼저 그 내용이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사천법문이 두루 회통(會通)되는

일관성(一貫性)과 통일성(統一性)이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별성(個別性)과 보편성(普遍性)과 타당성(妥當性)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진리(眞理)란 남들이 반드시 인정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 오직 그 자체로 현현(顯現)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석존의 가르침을 왜 오해(誤解)하게 되었는가. 

대략 세 가지로 구분될 것이다.

 

 

첫째는 부처에 대한 오해이다

 

불교에 있어서 부처라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어진다.

 

하나는 진리(眞理)라는 뜻, 둘은 진리의 작용(作用)이라는 뜻, 셋은 진리를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에서의 진리란 연기법(緣起法)이다.

따라서 부처란 연기법이며, 연기법의 작용이며, 연기법을 깨달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연기법은 별개로 이해되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오해인 것이다.

 

 

두 번째는 중생(衆生)에 대한 오해이다

 

불교에 있어서 중생이란 무명(無明)이다.

그리고 무명이란 연기법을 거역하고자 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 무명은 현상계(現象界)의 창조자(創造者)이며, 연기법인 광명(光明)은 현상계의

지배자(支配者)이다.

 

따라서 무명이 없으면 현상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광명 또한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무명이란 소멸(消滅)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각(自覺)하고 소중히 간직하여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을 없애는 방법을 석존의 교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 두 번째 오해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 대한 오해이다

 

앞이 있기에 뒤가 있고, 뒤가 있기에 앞이 있어서, 앞과 뒤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연기법인 부처와 그것을 거역하고자 하는 중생의 관계 역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막혀 있는 서로의 관계는 회통(會通)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석존의 가르침이 말하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연기법을 거역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意志)가

사라지고 연기법에 순응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연기법과의 관계가 회통되어서 연기법을

거역하였음에도 연기법을 거역한 것이 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修行)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인 업(業)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석존의 가르침은 진리를 교묘하게 거역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순응하는 가르침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이 존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이나 마음의 상태를

문제 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것에 바로 세 번째 오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일까.

그것도 역시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헌 집을 부수지 않고 보수공사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독특한 사유방식에 의하여 발견되어지고 설해진 석존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듣는 사람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견해를 철저하게 버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유방식 위에 석존의 사유방식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석존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고의 골격을 허물고

석존의 가르침으로 새로운 골격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골격을 유지한 채로

석존의 가르침을 내장재나 외장재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보수공사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는 교과서(敎科書)는 읽지 않고 참고서(參考書)만 읽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 있어서 교과서란 석존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는 경전(經典)이다.

그리고 참고서는 경전을 해설한 조사(祖師)들의 논소(論疏)들이다.

 

따라서 경전을 읽다가 이해하지 못하면 논소를 읽어야 하는 것이 상식(常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불교연구의 관습(慣習)은, 교과서에 해당하는 경전(經典)이 아니라,

참고서에 해당하는 조사(祖師)들의 사상(思想)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과서를 충분히 이해한 자가 참고서를 저술하였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가 멋대로 한 이해로 저술된 참고서라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고의 골격을 유지한 채로 석존의 가르침에 멋대로 감동하여 그 감동에

복받쳐 저술한 논소들이 널리 유통되었고, 교과서는 안 보고 참고서만 보는 관습이 경전에 의한

검증(檢證)과정도 거치지지 않게 하였고,

그러다 보니 자기 멋대로 이해되어진 조사들의 개인적인 견해가 불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석존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주된 관심사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이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완전한 만족(滿足)인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행복(幸福)이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은 지극히 생활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석존의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특수하고 비세속적인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불교의 모든 형태들에서 빠짐없이 관찰되어진다.

인도적인 사고방식을 부수지 못하고 그 위에 덧칠해진 인도불교, 불교라기 보다가 도교(道敎)나

유교(儒敎)라고 해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중국불교 등.

 

더욱이 중국의 조사(祖師) 불교에 있어서는, 석존의 가르침은 조사의 사상을 변론하는 용도로나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역대(歷代) 조사들이 모두 석존의 가르침을 오해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박식(博識)하지 못한 필자의 견해에도 용수(龍壽)라든가 세친(世親)이라든가 또 원효(元曉) 보다

넓게 살펴보면 친란(親鸞)과 같이 석존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간파한 조사들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현재에는 이러한 조사들의 견해조차도 석존의 견해가 오해되어진 이유와

같은 이유로 오해되어져 있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이고 승려이다.

그 옛날 인도에서 자기 안위에 빠져 있는 승려들을 비판하며 대승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지금

이 땅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세상을 두드려 깨우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승려인 내가 참불교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참불교 학림 교과과정

 

따라서 참불교 학림의 교과과정은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공부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학(영어,일본어,산스크리트어,한자)

-역사(세계역사,서양사,중국사,한국사,일본사)

-철학사(서양철학사,인도철학사,중국철학사,한국철학사,일본철학사)

-불교사(인도불교사,중국불교사,한국불교사,일본불교사)

-불경(반야경,화엄경,법화경,무량수경)

-논소(용수의 대지도론 및 십주비바사론, 세친의 유식삼식송 및 무량수경우바리새원생게, 원효의 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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