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현과 김응현

 김충현과 김응현은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두 형제은 한국 현대 서예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김충현(호는 一中)은 1921년에 김윤동의 다섯 아들 중에 둘째로 태어났고, 김응현(호는 如初)은 1927년에 넷째로 태어났다. 세도 가문인 선대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4대조는 고종 시대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일제 강점기이었지만 조선시대의 관습대로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조선 후기의 서예 양식을 가학(家學)으로 습득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가 고증학을 바탕에 둔 예서 형식의 추사풍 서체가 유행하였다. 안동 김씨의 가문에서도 추사체를 받아들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의 서체에도 추사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료직에 물러나서 소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선대는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書에 조예가 깊었던 윤용구, 김용진 등과 교류를 함으로 형제들은 윤용구와 김용진의 영향도 받는다. 특히 김용진은 안동 김씨로서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손자이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관리생활을 하면서 후진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안진경체와 한예를 잘 썼고, 서예정법을 강조한 인물이다. 이들 형제가 안진경체와 예서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김용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미전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서예가들은 조선 후기에 사대부 가문에서 보수적인 인물이 대부분이다. 광복 이후에 이들은 서예계의 원로가 되어서 한국 서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1920년 대에 출생함으로 서예계에 나아가게 된 배경이 다르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성장 배경을 보면 사대부 출신의 원로 서예가의 후광이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선배 세대들이 갖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을 버리지 않고, 광복 이후의 서예계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음은 지난 시대와 현대서예에 가교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한다.

 김응현을 조명해보면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의 가문으로서 항일적인 성향을 강하게 띈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 왜정 말기에 휘문 중학을 다닐 때는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일경의 눈을 피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도봉산에 숨어 들어가 보냈다. 이때 안진경체와 구양순체를 법첩에 의하여 철저하게 공부하였다. 이 경험이 그를 서예정법에 매달리게 하였다.

 김충현도 마찬가지이다. 항일 집안에서 자라면서 서예를 가학으로 공부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학교에 입학하여서는 습자 공부를 한 것이 서예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김충현도 김응현과 꼭 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즉, 조선 말에 사대부 가문이 통상적으로 하던 교육 방법에 의하여 한학을 배웠고, 서예는 가학으로 익혔다. 김응현처럼 법첩에 의거하여 중국 전통 서법을 고수하였다.

 김충현은 한글 학자인 정인보 밑에서 공부함으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김충현이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정인보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김충현의 사승 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에 살다(김충현의 글 모음집)에 의하면 소년 시절에 김용진에게 안진경체와 예서체의 체본을 받아서 임서로 익힌 후에 윤용구를 찾아가서 수정과 지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용진은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서 가학으로 전수하는 서예보다는 중국의 전통 서법을, 그것도 당나라 이전의 서법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김충현의 조부는 반대하였지만, 할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김용진을 따랐다고 말하였다. 김충현은 자신의 말대로 김용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광복 이후에 김용진은 서예의 원로로 대우받으면서 국전에 참여하는 등, 한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김용진의 도움으로 국전을 통하여 쉽게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충현은 1932년에 삼흥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를 거쳐서, 광복이 된 1945년에는 경동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는 교사 생활을 계속하면서 겸하여 서예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들 형제가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배경에는 국전이 있다. 김충현은 국전의 초창기에 이미 초대작가가 되었고(55년, 4회), 김응현은 무감사 특선을 하였다.(4회, 28세 때) 그러나 이후에 그들이 걷고 있는 행보를 보면 국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김충현은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두 형제는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국전이나. 서예활동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김충현의 서예관을 보자. 그가 언급한 말들을 정리해보면 그의 서예관을 엿볼 수 있다. 김충현의 서예관이 근, 현대 서예사에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서예론과 서법론의 논쟁에서 그의 서예관이 한 쪽의 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예는 고법을 본 받아야 하고, 고법일지라도 년대가 올라갈수록 글씨에 창의력과 창조력이 돋보이지만 근대로 내려올수록 답습하기에만 여념이 없기 때문에 좋은 서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논리는 그가 서예를 배운 갬용진의 이론을 그대로 베껴오듯이 닮았다. 그의 서예론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이것은 한국 서예계에서 지금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이론이다. 서예를 익히는 방법론에서 특정인의 글씨를 임모하면 속기(俗氣)가 베어들어서 좀처럼 빠지지 않으므로 고대의 법첩을 익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고대의 글자는 임모하여 배우되 현대 서예가의 글자를 임모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배울 때는 옛 법을 익히되 익히고 나서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이 법고창신의 뜻이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조금 다른 뉴앙스를 풍긴다. 당시의 서예계의 현황을 보면 김충현의 지론에는 다분히 서예계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미전 때는 ‘김돈희체’가 조선미전의 출품작에서 유행하였고, 국전 시대에는 ‘소전체’가 유행하였음을 비판하는 말로 느껴진다. 이들이 공모전을 장악하고, 서예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데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전을 장악한 세력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고 서예이론에서 서법론을 주장함으로 서예론자인 이들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근, 현대 서예사에서 조명하는 이유는 바로 서예이론을 두고 벌인 논쟁 때문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이론 논쟁이 아니고 당시의 서예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고, 그 결과가 한국 서예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사승 관계가 중세의 도제제도적 속성을 지녔고, 비평이라고 존재하지 않았던 서예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은 높이 싸주어야 할 것이다.

 법첩을 임모하라는 그의 주장은 단순히 글자의 모양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글자의 듯을 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글자의 의미를 해석해야만이 서예에 작가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보수적인 서예이론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한다. 이 주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글자의 의미보다는 형태에서 미를 구하자는 즉, 조형미에 중점을 두는 서예론자를 겨냥하였음을 다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서예 교육론에서도 ‘법첩이 워낙 많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보편성이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지도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년대가 높은 법첩일수록 좋다. 년대가 낮은 글씨나, 괴이한 글씨는 단지 참고로 그쳐야 한다.(서예. 11월호. 20p. 1973)’라고 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현대의 서예가들이 조형미를 강조하여 자체를 흩뜨려서 씀으로 법첩에 벗어나는 것은 괴이한 글씨가 된다. 그의 언급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조형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그치는 것이 좋다’라는 말에는 절대 부정에서 한 걸음 물러 선 느낌을 주고 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도 전통 서법론으로는 새로운 이론의 미학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의 사조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김응현의 서예론도 그의 형과 같다.

 “여초(如初-김응현의 호)가 본격적으로 서법 수련의 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당 이후의 글씨를 익힌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임창순. 如初碎金(여초의 書 세계). p252. 이화문화사. 1987)”라고 말한 임창순의 말에서 김응현의 서예론을 엿볼 수 있다.

 김응현은 유희강에게도 서예를 배웠다. 유희강은 엄격한 고법주의자이므로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김응현은 법고원속(法古遠俗)을 주장하면서 고전에 법을 두어야 하고, 속된 것은 멀리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속(俗)의 개념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주장을 검토해보면 김충현의 지론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김응현은 누구보다도 김정희를 서예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의 서예론을 펼치면서 김정희를 사례로 든 경우가 아주 많다.

 “완당은 고전 없이 일점일획도 멋대로 한 일이 없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梣溪(침계)라는 두 글자를 예서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溪자는 예서에 있으나 梣자는 예서에 없는 지라 해서로 써 준 일이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완당이 얼마나 법을 지키고 작자(作字)에 세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김응현. 동방문자와 정음의 서법. 서예예술. 동방연서회. 1월호. p36. 1988)”

 이 외에도 김정희의 서예를 인용하여 자신의 서예이론의 근거로 삼는 글을 여러 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한국 서예사에서 그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는 연구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조선 말기의 한국 서예는 서예라는 개념보다는 서법 내지 붓글씨라는 생각이 강하였다. 한문을 공부하면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붓글씨 즉, 오늘의 개념에서는 필사의 개념이 강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여 조형미를 구현한다기 보다는 실용적인 용도로서 ‘달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서체는 송설페가 주종을 이루고, 과거시험을 볼 때 주로 사용하는 글씨체로서 즉 과장체(科場體)를 익혔다. 흔히 서당글이라고 부르는 글자체이었다.

 조선 후기에 김정희가 중국의 고증학을 공부하여 도입함으로 비각의 글씨체를 본 받는 즉, 법첩의 글씨가 유입되었다. 이후에는 필사의 붓글씨가 법첩을 근간으로 삼는 서예가 나타났다. 김응현은 광복 이후의 서예사에서 과장체(서당글)를 배격하고 법첩의 글씨를 받아들인 인물로 자리 매김하고자 한다. 이로서 고대 중국에서 사용하였던 여러 서체를 받아들여서 서예에 법첩을 적용함으로 오늘의 서예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뿐 아니고, ‘동방연서회’라는 사숙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서예를 일반인에게 확산시킨 공로도 인정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움과 창의력, 작가의 개성적인 독창력을 중요시하는 현대 미학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통의 맥을 이어간다는 명분아래에 서예가 너무 보수적으로 흐르게 하여 현대인의 미적 감각을 서예에 수용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이 한국 서예사에 남긴 업적 중의 하나는 동방연서회를 조직하여 민간에서 서예 교육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1958년에 깁용진을 초대 회장으로 하고, 김충현이 간사장을 맡아서 발족하였다. 이후에는 김충현이 회장을 맡아서 단체를 이끌었다. 김응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창립 취지는 “한국 서예계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기사반정(棄邪反正)의 원동력이 되고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김용진-김충현-김응현의 서예론이 동방연서회가 지양하는 서예론이 되었다. 두 번 째는 사(邪)를 버리고 바른 서예를 세운다는 것이다. 손재형 계열의 서예가들이 서예론에서 조형미를 주장하면서 글자의 모양을 괴이하게 바트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다.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중국의 고대 법첩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회도 가졌고, 고서화 감상회도 가지면서 서예에 대한 연구와 탐구도 하였다.

 1969년 5월에 회장을 맡았던 김용진이 작고하자 (그는 연서회에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주었다.) 제 2기의 성격을 띄고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때는 김충현 대신에 아우인 김응현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운영 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동방연서회를 거쳐간 인원이 거의 2000여 명이나 되었지만 조직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였다. 이때의 취지도 서법의 정도를 세운다는 것과 서예 강좌를 활성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응현이 68년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한글 서예에 시비를 건 저변에는 동방연서회라는 민간 조직이 배경으로 존재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서예계에서 국전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음도 주지해야 한다.

 1972년에는 김응현이 동방연서회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서 동방연서회에서 교육하는 서예이론이 김응현의 서예론이 바탕을 이루었다. 이것은 기사반정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 서예계의 중심 세력에 도전이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동방연서회는 1973년에 ‘書通’지를 발간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서예 교육을 펼쳤다. 이로서 70년 대의 동방연서회는 개인의 사숙 단계를 벗어나서 사회 교육을 하는 단체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것은 서예인구가 70년 대에 들어서서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 교육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었음을 뜻한다.

 1972년에 신문회관에서 가진 세미나에서 김응현이 발표한 요지의 글은 동방연서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준다. 동방연서회를 이해하는 것은 70년 대의 한국 서예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전의 서예부는 보통 80-90 점의 작품이 진열되는 데 대체로 4-5 종의 부류로 나뉘어져 형식이나 수법이 동일한 바 서체의 질은 따질 것 없이 천편일률적인 괴이한 형상이 오히려 통상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타락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단체전이란 명색의 전시는 더욱 단조로운 일인지(一人枝)에 거치는 폐단을 드러 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단지 국전을 바라보는 김응현의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70년 대에 서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개인 사숙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많아졌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70년 대의 서예계는 개인의 서숙이 (서예학원 또는 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시대적 특징을 지닌다. 덩달아서 서숙기관은 생계수단으로 삼는 전문적인 서예인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지에 그치는 폐단’이라는 지적은 그와 같은 시대 사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김충현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를 돌아보자. 196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로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은 전문 서예인으로도 살아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뜻한다. 60년 대인 이때는 김충현같은 서예의 대가들은 서숙을 열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서예가들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이었다. 김응현과 동방연서회를 이끌면서 서예 강좌를 개설하고, 서예 교육 교본을 출판하는 등 생활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1965년에 한일 협정으로 일본의 서책이 밀려오면서 출판사업은 접었다. 1969년에는 동방연서회를 떠나서 인사동에 일중묵연(一中墨緣)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이 사실은 독립하여 서숙을 가질 만큼 사회 여건이 성숙하였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70년 대가 되면서 많은 서예가들이 개인 서숙을 열었다. 그만큼 서예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서예인이 나타났음을 말한다.

 김충현은 처음부터 국전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전의 실권은 손재형이 쥐고 있었으므로 국전에서 자신이 입지를 세울 수가 없었다. 70년 대의 후반에 이르러서 국전을 벗어나서 작가로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국전의 운영의 실세들과 거리를 둔 김응현과는 다르게 김충현을 손재형의 계열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강력히 부인한다. 이런 면에서는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론에서 같은 유파이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김응현도 국전의 심사위원도 함으로 국전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골적으로 손재형 일파에는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72년도 조선일보 기사는 서울에 관인 서예학원이 7개소, 인가 받지 않는 곳이 10개소라고 하였다. 74년도 기사에서는 관인 서예학원이 25개소, 개인지도를 하는 서예학원은 50여 개소라고 하였다. 70년 대에 서예 인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다.

 ‘한국 서예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 상황을 살펴보자.(書通. 창간호. 1973.)

 “요즈음 흔히들 한국 서예가 부흥한다고 말한다. 거리마다 연구소가 난립하고, 서예전이 뒤를 잇고, 필물점이 치부하고 있다. 외적 상황으로는 수긍이 간다. 그런데도 악필른 천하를 횡행하고, 본질을 외면한 잡기가 서예로 행세한다. 이런 사이비 서예가의 난무와 대중의 무지는 상승하여 우리 서예계는 타락하고 있다.”

 70년 대는 한국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대학생의 눈을 통하여 바라 본 서예계의 문제점을 보면 “남성이 적어서 지속적인 발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라고 지적하였다. 생활의 여유를 가진 주부층이 서예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광수는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교양주의 문화’라고 하였다. 광복 이후에 여성에게 개방된 교육 기회는 많은 고학력 여성을 배출하였다. 60년 대부터 전개된 산아제한 운동은 저자년 출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여 가정주부를 육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경제적인 여유는 주부 계층의 인구가 문화를 향수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이들은 방송국, 박물관, 도서관, 심지어는 백화점에서까지 문화교실을 열었다. 서예는 인기있는 과목이었다.

  이런 이유로 70년 대에는 많은 서예학원이 생겨났고, 이들이 서예전을 열었다. 이런 이유로 서예 전시회가 많아진 반면에 질은 낮아졌다는 지적은 맞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계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이들에게 질이 높은 서예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마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리즘의 문화 향수층이라는 것이다. ‘교양주의’로서 만족한다는 것이다. 서통지에서 지적한 문제점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대학생의 지적은 국전의 비리에 관한 지적과, 근본이 없는 서법이 횡행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문화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그릇에 담긴 물처럼 사회의 배경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형태를 만들려고 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조명해봄으로 70년 대로 접어드는 시대의 서예사를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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