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과 전각, 그리고 사경
서각
서각은 말 그대로 서(書)와 각(刻)이 합쳐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은 필서(筆書)이고,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은 각서(刻書)이다. 전통적으로 각서를 하는 경우는 각서자가 직접 글을 쓰지 않고 서가가 쓴 글을 새기기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칼로 글자를 새기기만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글자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뜻의 전달에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글자를 분명하도록 잘 새기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예술인 대접을 받지 못 하였다. 장인 취급을 받았다.
사찰이나 제실, 또는 정자 등에 걸려있는 편액이나 주렴, 기타 건물의 명칭을 새긴 현판, 제영(題詠), 기문(記文), 상량문(上梁文)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것은 그때의 명필가가 주로 글씨를 썼고, 각자공(刻子工)은 글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새기는 역할만 하였다. 이것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물이 아니고, 실용적인 용도로 새겼으므로, 새기는 사람은 기능적인 역할만 열심히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창의력을 쏟아부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글자를 잘 새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서각하는 사람을 장인으로 바라본 것은 한, 중, 일이 거의 같았다. 일본에서는 각자(刻字)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각서(刻書)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서각(書刻)으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서각을 예술의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외에도 인쇄용 목판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각자공으로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생활 용구에 장식적 목적으로 글자를 새기는 일이 흔하였다. 목각 분야의 전문인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사상에서는 기(技)와 공(工)은 천민이 하는 일이다. 라는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오래 동안 예술의 영역의 진입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각자공이 빚어내는 글자나 문양은 민족 정서 속에 녹아 있는 원초적인 전통미를 형성하였다.
70년 대로 접어들면서 이처럼 전통 공예를 하는 장인들을 발굴하여 한국미를 보존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갖자장 오옥진(吳玉鎭)이 무형 문화재 각자장 106호 지정되어 예술인의 대우를 받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그럼으로 현대 한국 서각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오옥진은 원래 소목장이었다. 그러다가 활자의 복원과 문헌 복원에 관여하면서 글자를 새기는 전문가로 변신하였다. 장인에서 예술가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희귀본인 목판본의 복원도 있었고, 문서 복원도 있었다. 고지도의 복원(판각으로)도 있었다. 이때의 새김질은 창의성의 발휘보다는 사실에 충실하게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것을 전통 서각이라고 말한다.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일반인들도 서각에 관심을 가지고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82년에는 전통 서각가들이 한국서각협회를 결성하였다.
사람들이 서각을 배우려 찾아오므로 사승 관계의 제자도 생겼다. 일부의 젊은 서각가들은 스승이 하는 전통 기법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변화가 없는 동일한 방법을 반복하여 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결과로서 ‘현대서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유파가 태어났다. 이들의 핵심이 되는 주장은 자서자각(自書自刻)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쓴 글씨를 새기므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들이 모여서 1990년 11월에 현댁서각연구회를 만들었다가 1991년에 현대서각협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매년 전시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 기존의 한국서각협회와 조금의 마찰이 있었으나 서예협회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원로 서각가가 자신을 예술인이라는 개념에 깊이 사로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장 쟁탈 따위의 이해가 걸린 문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전통 서각은 글씨를 분명하고, 잘 살려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서예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각자공은 보조적인 역할만 하였을 뿐이다.
1989년에 이현춘, 유장식, 안민관 3인이 서울의 백악 갤러리에서 ‘현대서각 3인전’을 열었다. 이들은 전통 서각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고 입체 성향의 서체와 작품 양식을 추구하였다. 전통적인 서각 작품은 판액, 현판, 주렴이나, 기타 여러 가지 판자성의 벽걸이 개념이 바탕이었다. 이들은 작품을 입체적 개념으로 제작하였으므로 조각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당시의 관중은 놀라움으로 바라 보았다. 미술전문지에서도 관심을 표하였다.
일반적으로 현대 서각의 기점을 이 3인전에 두고 있다. 이들은 서각의 개념을 바꾸므로 서각이 나아갈 길을 활짝 넓혔다. 서각을 재해석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서각을 예술로 받아들인 곳이 20년 쯤 앞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평면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하나의 아류로 취급받고 있다. 한국은 작품의 참신성과 다양성으로 이들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다.
‘3인전’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이 이현춘은 현대서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는 문자를 새겼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예술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쓴 글자를 내가 아무리 잘 새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작품이 될 수 없다. 즉 과거에 서각의 글씨를 쓴 사람(書家)와 새긴 사람인 각(刻)이 이원화 됨으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또 하나는 서각은 글자를 새기지만 글자를 그대로 부각시켜야 함으로 쓰는 행위와 동일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각은 회화나 조각 또는 전각처럼 독립된 장르가 아니고 단지 서예일 뿐이다.”
이로서 평면적이던 서예가 각을 통하여 입체적이고, 조형적인 개념으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 현대서각을 지향하는 사람은 서각이라는 말 그대로 서가 각을 앞선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따라서 자서자각(自書自刻)을 내세웠던 것이다
전통 서각을 하는 사람은 각(刻)이 우선이므로 좋은 글씨라면 굳이 내 글이냐, 남의 글이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현대서각에서 글의 조형미를 주장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지만 ‘현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김질이 아닌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여 작품 제작을 하는 것까지 서각이라고 해야 하느냐, 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전통파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1990년 대 내내, 거의 10년이나 계속하였다. 그러나 1999년에는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여 현대서각협회라고 명칭을 통일하였다.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현대서각의 대표적인 작가로 떠오른 유장식을 통하여 현대서각이 걸어온 궤적을 되살려 보자.
1970년 대에 서울에서 오옥진이 문화재 보수와 목판을 재현하는 전통 서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하는 주된 작업은 현판이나 주렴 등의 문화재 보수이었다. 작업의 성격상 긴 칼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정기호와 안광석이 전각가로 활동하면서 서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각 기법을 서각 작업에 활용하고 있었다. 유장식은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익히면서 스스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서각을 잘 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영남권에서는 이름이 쟁쟁한 서예가들이 자신의 글을 현판으로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 과정을 서예를 하는 사람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전통서각은 나름대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계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예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받아서 글자를 새기는 전통 서예에 회의가 생기자 이성조를 찾아가서 정식으로 서예를 배웠다. 이로서 자서자각이라는 주장을 펼 수가 있었다. 3인전의 작품평을 김양동은 이렇게 하였다.
“3인의 작업은 문자가 지닌 고전주의를 진부하지 않는 형식으로 변형시키기면서 조형 공간 속에 놀라울 정도로 밀도있게 구축하여 놓고 있다.”(가나아트. 11-12월호. 1989)
1989년에 서협이 출범하자 서협의 공모전에 서각은 하나의 장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다. 이로서 서각은 서예의 한 장르로 정식으로 진입하였다.
1989년에 ‘3인전’으로 이름을 얻은 이들은 대구에서 3미터 높이의 화강암으로 호국(護國)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의 재료는 나무가 아닌 화강암이었다. 이로서 나무라는 재료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에 변화를 가져왔다. 칼로서 새긴다는 방법론에서도 조각한다는 방식으로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실내의 벽걸이 형태가 아닌 실외에 설치한다는 조각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문자를 이용한 조형물의 형성을 두고 미술의 어느 장르로 분류해야 할 지를 두고 논란을 불러올 수 있었다. 정충락은 평 글에서 “유장식의 조형 시각은 보다는 종합적인 조형 언어를 담고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예술의 좋은 본보기로 예술 장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유장식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까지 문자라 함은 평면적인 2차원의 표현 영역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가원되었고, 이러한 그림을 간소화하거나 합병시키는 방법으로 고대에 문자를 창조하였다. 오늘의 현대 문자각은 평면의 문자를 다시 상형화하여 입체화함으로 문자를 도시 공간 속으로 끌어냄으로 입체조형 영역인 환경조각으로 나타났다.”
서각이 건물의 부속물 내지 장식물인 것을 독립적인 조형물로 형상화하여 환경조각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생각이었다.
“서각은 소재로서 목재를 많이 사용함으로 내부이 주거 공간을 부드럽고 안락한 장르로 꾸미려는 현대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서각의 존재 논리도 시장 친화성을 을 꼽고 있다. 전통 서각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유장식의 예에서 보았듯이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서각’이라는 이름을 걸고 예술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단순히 예술이기 위한 것이 이유가 아니다. 시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서예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시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회환경이 변하고 있는데도 그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서예의 경우는 변신을 하면서 시장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적인 정서를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함으로 엇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다
2000년에 있었던 제 18회 한국서각협회전에 대한 정충락의 평은 고무적이다.
“2000년을 맞이 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친 새김질의 잔치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참가한 회원들의 수도 수려니와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격조 높은 예술성에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해마다 환조 형식의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금년은 달랐다. 조각과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자료도 나무를 비롯하여 쇠, 포맅코타, 흙, 돌 등등 동원할 있는 것은 모두 등장하였다. 채색도 등장하였다”
“서각이 순수 예술로 정착하는데 10년에 끝났다.”(서예문화.10월호. 2000)
2004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제 1회 대한민국 서각대전을 개최함으로 미술의 한 장르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전통 서각이 현대서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서각가들이 예술가로서 표현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전통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용기가 있었다. 원로 서각가들이 못마땅해하는 일면도 있었지만 이전투구 형의 싸움을 하지 않고, 비교적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 큰 사회적 배경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서예인들이 작품 시장을 가지지 못한 체 오로지 공모전만 바라보아야 했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에 서각가들이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시장이 형성된 원인으로는 서각이 비교적 한국적 정서에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예인들도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과감히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전각
고래로부터 전각은 인장의 역할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명나라 때 문팽(1498-1537)이 전각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림이나 서예작품에 전각을 사용함으로 예술작품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희가 중국에서 금석학을 연구하여 많은 전각 작품을 남겼다. 그이 제자로 오규일을 꼽고 있으나 남아 있는 작품은 아주 드물다. 19세기 후반에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김태석에게 전해져서 전각의 명맥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각은 단순히 장인이 글자를 새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전을 주로 사용함으로 문자학에 조예가 깊어야 한다.
서각과 전각은 새긴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전통 서각과 전통 전각에는 차이가 있다. 서각은 주로 나무에 새긴다. 나무는 재질이 부드러워서 칼의 묘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를 드러낸다. 전각은 주로 돌에 새기므로 재질이 깨어지기 쉽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 전각은 인주에 묻혀서 종이에 찍어야만이 글자가 바르게 나타난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는 인주도 한몫을 한다 서각은 새기기만 하면 되지만 전각은 돌의 깨어짐(破라고 한다.)도 관여한다.
과거에는 서예나 그림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대에는 독립된 장르가 되어 있다. 공모전에서도 독립된 장르로 참여하고 있다. 전통 전각으로는 크기가 작으므로 표현에도 제한을 받고 있고, 관람자의 시선을 끌기에도 역부족이라고 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오세창은 김정희로부터 이어오는 전각의 맥을 현대로 이어주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또 한 사람은 김태식이다. 이들의 제자들이 한국 전각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오세창에게 직접 전각을 배운 사람으로는 이기우가 있다. 이기우는 ‘전각은 서예가 기초이므로 반드시 서예를 공부하고 나서 전각을 하라’고 강조하였다. 김태식은 중국에서 전각을 배워서 국민당 정부시절에 명성을 얻었다. 국민당 정부의 옥새도 그의 작품이다. 귀국 후에는 제자를 양성함으로 그도 역시 한국 전각의 맥을 이어주었다. 전각은 전서가 기본이고, 해서와 예서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전각을 하려면 서예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독립된 전각가는 거의 없다. 오세창처럼 서예가로 알려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네모꼴의 좁은 면적에 글자를 넣어야 함으로 문자의 형태에 변화를 많이 주었다. 이로서 조형미를 나타내므로 예술의 장르로 진입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예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서예의 한 장르로 독립하였다. 이기우는 오세창에게 전각을 배운 이외에도 이한복의 지도를 받았고,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함으로 현대적 포치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기우의 제자인 김양동, 황창배의 작품이 회화성을 띄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태식의 제자로는 김재인, 고봉주, 정기호가 있다. 고봉주(1906-1991)는 일본에서도 전각 공부를 하였으므로 섬여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을 지니므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정기호는 중국의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종의 옥새를 만들었다는 황소산에게도 배웠다고 한다. 도제 제도에 의한 장인의 수업을 받았다. 정기호의 제자에는 현대 전각가인 민홍규가 있다.
오창석 풍의 전각을 하는 전각가로서는 이한복-이기우-이택익 계열이 있다. 정문경은 제백석 풍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정문경의 제자에 정병례가 있다.
1974년에 김영기(화가)와 이가원(한문학자)이 주동이 되어서 한국전각협회를 만들었다. 회원은 21명이었으나 대부분이 서예가이었고, 전문 전각가는 거의 없었다. 1974년에 제 1회 전각협회전을 개최하여 1978년까지 5회를 열었다. 1978년에는 한국전각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은 아주 미미하였다. 1990년까지는 협회전도 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7년에 미술대전의 공모전에 전각부를 신설하였다. 동아미술제에서도 한국의 전통미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처음ㅇ부터 전각부를 두었다.
1992년에는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한,중,일 3국의 전각 교류전으로서 ‘92서울국제전각전’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전각은 활기를 띄지 못하고 있고, 전문 전각인도 거의 없다. 교육도 전통적인 도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기호에게 사사하였다는 민홍규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에 그를 찾아갔을 때는 2년 동안은 온갖 허드레 일로 시간을 보냈다.’ 전각 교육의 실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후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각은 문자를 이용한 디자인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서예의 미래에 하나의 돌파구를 열어주리라고 생각된다. 전통 전각의 틀에서 벗어나서 현대 전각을 추구한 전각가로는 정병례가 있다. 그는 ‘인장포’를 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전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정병례는 ‘현대전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통 전각에서 벗어나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선 사방 3cm 크기의 좁은 면적에서는 표현의 제한이 심하였다. 그 크기에서 벗어났다. 글자 이외의 온갖 조형을 새겨 넣었다. 빨간 인주색 대신에 오방색을 사용하였다. 오방색 이외로는 금니와 은니도 사용하여 회화화 하였다. 전통서각계에서는 곱지 않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현대전각을 하는 사람은 모각을 뛰어 넘으므로 서예에 존속되지 않는 독자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예가 미래에도 예술의 장르에서 존속하기 위해서는 전각의 디자인화를 통하여 시장을 확보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병례의 실험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사경
서예 분야에서 미술의 장르에 아직까지 정식(?)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는 ‘사경’이 있다. 사경은 서각보다 훨씬 더 장인의 솜씨를 요구하고 있다.
사경은 불경을 붓으로 필사하는 작업이다. 기본적으로는 서예의 한 영역이다. 신라 시대의 백지묵서(국보196호)도 사경이므로 그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원, 금자원, 은자원을 두고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사경은 불교 경전을 복사하는 것이므로 임하는 자세에서 서예적 붓글씨와는 차이가 있다.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규범성도 철저히 지켜야 함으로 사경은 해서을 선호한다. 해서체는 기필과 행필, 수필 등에 흐름이 일관되게 순일한 상태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강조하는 서예가들은 사경을 소홀하게 다루었다. 사경은 신앙에 의한 자기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수가 많으므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정신성을 고양시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사경도 나름대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사경은 정신성의 발휘가 중요함으로 감성적인 표현은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사경의 미학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고갈되어가는 인간성을 되살리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럼으로 오늘날에 가치를 더해가는 것이 사경이다. 사경은 최근 10여 년 사이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사경은 서예의 한 영역으로 전통 필법의 기법 위에 존재한다. 서사 재료와 도구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서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서예보다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경필 사경과 컴퓨터 사경이 나타남으로 서예가 보이는 경직성을 탈피하고 있다. 현대사경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김경호를 꼽을 수 있다. 고려 사경을 모본으로 스스로 익힌 후에 현대사경을 쓰고 있다. 2000년에 결러리 동국에서 ‘외길 김경호 사경전’을 열었다. 그는 사경서체를 연구함으로 사경을 한국 서예의 한 분야로 수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경은 서예와 회화, 그리고 공예를 활용하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지녔지만 기본은 어디까지나 서예이다. 먹물 대신에 금니와 은니도 많이 사용함으로 서예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경의 표지나 변상도까지도 그리므로 회화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김경호는 제자를 양성함으로 사경 인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2000년 5월, 2006년 3월, 그리고 2007년 6월에 사경 개인전을 열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일반인에게 사경을 알리고, 보급하는데 큰 일을 수행하고 있다. ‘ 월간 서예문화’지의 공모전에서는 사경을 하나의 장르로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로서 사경은 점차 서예의 한 분야로 수용되어 감으로 더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사경이 오늘날에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가 사경수행을 통하여 심리치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서예의 영역을 확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사경의 개인전도 요즘은 자주 열리고 있다. 앞으로는 미술대전‘에서도 사경이 한 부분으로 참여할 날이 올 것이다 2010년에는 사경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므로 서예 근, 현대사에 또 하나의 흐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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