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성(文聖) 공자(孔子)
공자(B.C 551 ~ B.C 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魯)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둥(山东) 취푸(曲阜)시 동남쪽] 사람. 중국 춘추(春秋)시대 말기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며, 유학(儒學)의 창시자이다.
공자는 ‘인(仁)’을 최고의 도덕 가치로 보고 ‘인(仁)’사상을 제창하였으며, 최초로 사학(私學)을 설립, 널리 제자들을 받아들여 현자 70명을 포함한 3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공자의 사상과 학설은 주로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논어(論語)》에 집중적으로 담겨있으며, 《좌전(左傳)》과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도 공자의 언행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공자의 평생에 걸친 노력과 그 후 대대로 이어진 유가(儒家)의 발전으로 중국 유가 학설은 중화문화의 주류가 되었으며, 2천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중국인의 기본 사상이 되어왔다.
2.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
사마천(B.C 145 ~ ?). 서한(西漢)의 역사가이자 문학가. 자(字)는 자장(子長), 좌풍익하양[左馮翊夏陽: 지금의 산시(陕西)성 한성(韩城) 서남쪽]사람.
사마천은 10세 때부터 고문으로 된 서적들을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원봉(元封) 3년(B.C 108)에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어 천문 역법과 황실의 서적들을 담당하게 되었고, 덕분에 사관(史官)들이 소장한 도서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사마천은 그가 일생을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수십 년에 걸쳐《사기(史記)》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통사로 후대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마천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역사가이다. 그는 직언으로 인해 궁형을 당했으나, 오히려 그 분함을 승화시켜 저술에 임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으뜸으로 손꼽히는 걸작이자 중국인과 세계인을 위해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문화유산인 《사기(史記)》를 집필해 낸다.
3. 시성(詩聖) 두보(杜甫)
두보(712 ~ 770). 자(字)는 자미(子美), 하남 공현[河南巩縣: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궁현(巩县)] 태생. 일찍이 장안성(长安城) 남쪽 소릉(少陵)에 살면서 스스로를 소릉야로(少陵野老)라 칭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두소릉(杜少陵)이라 칭하였다.
두보는 당(唐)왕조가 쇠퇴기로 접어들 무렵에 살았던 사람으로, 일평생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았다. 그의 시는 풍부하면서도 다채로운 시풍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웅장하면서도 호방한가 하면, 처량하면서도 슬프기도 하고, 시어의 수식이 정교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는가 하면 또 때로는 평이하고 순박하기도 하다. 율시(律詩)에 뛰어났던 그는 신악부시체(新樂府詩體)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그의 시는 성율(聲律)이 조화롭고, 시어의 선택이 매우 정제되어 있어, 창작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는 “为人性癖耽佳句,语不惊人死不休:아름다운 구절을 지나치게 탐닉하여, 글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문구와 꼭 들어 맞는다. 때문에 중국문학사에서는 그를 시성(詩聖)이라 칭송한다. 두보의 시는 지금까지 1천 4백여 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이를 전하고 있다.
4.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
장중경(150 ~ 219). 성은 장(張), 이름은 기(機)이며 중경(仲景)은 자(字)이다. 남양 군열양[南陽郡涅陽: 지금의 허난성 덩현(邓县) 랑둥진(穰东镇)] 사람.
장중경은 많은 서적들을 읽고 여러 가지 각종 처방들을 널리 채집하여 한대(漢代) 이전 의학의 정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자신의 풍부한 실제 의료 경험에 근거하여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16권을 저술하였다. 후세 의학자들은 그를 의성(醫聖)이라 칭송했으며, 그가 저술한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의학의 경서로 받들었다. 장중경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은 인류 의학사상 최초로 ‘병리, 병을 다스리는 법, 처방, 약재’를 두루 갖춘 의학 전문서적인데, 처음으로 전염병과 각종 내과 질환의 병인(病因)과 병리(病理) 및 치료 원칙과 치료 방법을 체계적으로 기술하여 후세 각 진료과목의 임상 발전을 위한 탄탄한 이론적 기초 역할을 하게 된다.
5. 무성(武聖) 관우(關羽)
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동한(東漢) 말기 촉(蜀)나라 장수로, 의리를 중시하고 무예가 뛰어나 후세 사람들은 그를 ‘관성(關聖)’,‘관제(關帝)’라 칭했다. 관우는 촉나라의‘오호상장(五虎上将: 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 황충)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장수로서 남북조 시대부터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역대 제왕들의 숭배를 받아왔으며,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우상 중 한명으로 공자와 함께‘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칭해진다. 관우는 충정과 의리, 용맹함과 고강한 무예로 유명하여, 위문제(魏文帝) 조비(曺丕)와 신하들은 관우를 촉나라의‘명장’이라 칭했으며, 조조(曹操)의 가장 유명한 모사(謀士)인 곽가(郭嘉) 역시“관우, 장비는 일만의 적을 대적할 수 있는 장수이다”라고 칭송하였다.
6.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왕희지는 동진(東晉)의 서예가로 자(字)는 일소(逸少)이다. 본적은 낭야[琅琊: 지금의 산둥성 린이(临沂)]이지만 회계산(会稽山) 북쪽[저쟝(浙江) 사오싱(绍兴))에 거주하였다.
양한(兩漢),서진(西晉)시기와 비교해 볼 때, 왕희지 서풍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운필이 세밀하며 구조에 변화가 많다는 점인데, 그의 서법은 부드럽고 기품이 있으며 운필이 자유로워 예서(隸書)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으며, 물 흐르듯 아름다운 금체(今体) 서풍을 창조하여 후대에‘서성(書聖)’으로 숭상되었다. 현존하는 왕희지의 진본 필체는 매우 찾기 어려우며 우리가 접하는 것은 모두 모사본이다.
왕희지는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는데, 해서체 작품으로는《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黄庭經)》이 있고, 초서체 작품으로는《십칠첩(十七帖)》, 행서체 작품으로는《이모첩(姨母帖)》, 《상란첩(喪亂帖)》등이 있으며, 행서와 해서로 쓰여진 《난정서(蘭亭序)》가 가장 대표적이다. 왕희지의 서법은 후대까지 줄곧 서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적으로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서체를 따라 배우려고 하는 풍조가 크게 일었었다.]
7. 화성(畵聖) 오도자(吳道子)
送子天王圖(송자천왕도)의 일부 그림
오도자(약 686 ~ 760전후), 양적[陽翟: 지금의 허난성 위현(禹县)] 사람. 당(唐)나라 시대의 화가로 도현(道玄)이라 이름하기도 하며, 회화사에서는 오생(吳生)이라 존칭된다.
문인명사들과 교류하며, 각지로 유람하기를 즐겼던 그는 초년시기 육조시대 풍의 유려하고 섬세한 필법을 배웠으나, 중년 이후에는 웅장하고 기세가 빼어난 성숙한 필치를 갖게 된다. 그는 인물, 불상, 신상과 귀신, 산수, 초목, 조수, 전각등 각종 제재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인물과 불상에 뛰어났다. 또한 예술성에 있어 그의 창조정신은 매우 풍부하여 일설에는 ‘산수화의 일대 변화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하기도 한다. 오도자의 진본 작품은 이미 송대(宋代)부터 그 모습을 보기 어려웠으며, 지금까지 전하는 중요 모사본으로 《송자천왕도(送子天王圖)》가 있다. 이 작품은 송대 사람이 모사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오도자의 풍격에 비교적 근접한 것으로 평해지고 있다.
8. 다성(茶聖) 육우(陸羽)
육우(733 ~ 804)의 자(字)는 홍점(鴻漸)이다. 또한, 달리 이름을 질(疾), 자(字)를 계자(季疵)라고도 하며, 호는 다산어사(茶山御史)이다. 당(唐) 현종(玄宗) 개원(开元) 연간에 태어났으며, 복주 경릉군[復州竟陵郡: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톈먼현(天门县)] 사람이다.
육우는 평생 차를 즐겼으며 다도에 정통했는데, 당나라 초기 이후 각지에서는 차를 즐기는 풍속이 점차 유행하였고, 그는 반평생 차를 즐긴 자신의 경험과 차에 관한 지식을 모으는 등 십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중국 최초의 차 문화 저작인 《다경(茶经)》을 탈고하였다. 《다경(茶经)》이 세상에 소개됨으로써 세인들은 차에 관해 잘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가 창조해 낸 다학(茶學), 다예(茶藝), 다도(茶道) 사상및 그가 저술한 《다경(茶经)》은 중국 차 문화사의 한 획을 긋는 시대적 지표가 되었다.
9. 병성(兵聖) 손무(孫武)
손무(B.C 535 전후 ~ ?),제(濟)나라 낙안[樂安: 지금의 산둥성 훼이민(惠民)] 사람. 춘추시대 말기의 군사가로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후세 사람들은 손자(孫子) 또는 손무자(孫武子)로 존칭하였다.
손무는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만난 뒤 장군의 직을받고 오자서(吴子胥)와 함께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는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전쟁은 백성과 군사들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사이므로 진지하게 다루고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그는‘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과 같은 체계적인 전략 전술의 원칙을 만들어 내고, 합리적인 병사의 운용 및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기이한 책략등을 사용하여 승리를 이끄는가 하면 침착하고 냉정하면서도 과감한 용맹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지형적 특징과 정찰, 군대 기강및 교육등 각 방면에 대해서도 중요한 원칙들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원칙들이 집대성된 것이 바로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중국 최초의 병법서이자 세계 군사 역사상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저작이다.
10. 주성(酒聖) 두강(杜康)
두강(약 B.C 10세기경), 자(字)는 중녕(仲寧).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수현 강가위[白水縣康家衛: 지금의 두캉진(杜康镇)]사람으로 술을 잘 빚었다고 한다. 두캉천의 샘물은 은은하게 솟아나와 겨울에도 마르지 않으며 4리를 흘러 바이쉐이하(白水河)로 흘러 들어 가는데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이 물에서 술맛이 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강은 바로 이 물을 가지고 술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술의 제조는 중화민족 음식문화의 일대 사건이다. 두강은 최초로 술을 만든 시조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화하(華夏)민족 술 문화의 원류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는 술에 그 지방의 풍토와 인정을 함께 담아 빚어냈으며, 술로써 오랜 바이쉐이(白水) 문화를 빚어냈다. 삼국시대 조조(曹操)가 “무엇으로 근심을 풀까? 오로지 두강뿐이구나.”라고 천고의 절창을 지어 음송할 만큼 향기 짙은 두강주는 황토고원의 순박함과 열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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