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암부(民巖賦)」..남명 조식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하여야 한다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들은 그들이 저지른 행동으로 스스로 무덤에 묻힐 것이다.



16세기를 살다간 처사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백성들이 처한 삶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하였다. 그의 문집인 『남명집』 곳곳에서는 백성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근심하는 남명의 모습이 발견된다. 제자인 정인홍은 스승의 행장에서,

  “백성들의 괴로움을 염려하여 마치 자기 몸이 아픈 듯이 하였고 회포가 이어져 이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혹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관리들과 더불어 이야기 할 때는 일분이라도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힘을 다해서 말했으니 혹 베풀어지기를 바라서였다.[念生民困悴 若恫懁在身 懷抱委襞 言之或至鳴噎 繼以涕下 與當官者言 有一分可以利民者 極力告語 覬其或施]”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연려실기술』에는 “일찍이 선비들과 말을 하다가 당시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곤궁한 데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嘗與士子 語及時政闕失 生靈困悴 未嘗不扼腕哽咽 至於流涕]”1)고 하여 조식이 백성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식의 적극적인 대민 인식이 구체화되어 있는 글이 『남명집(南冥集)』 권1에 실려있는 「민암부(民巖賦)」이다. 「민암부」에서 남명은 민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백성이 물과 같다 함은 예로부터 있는 말이다. 백성이 임금을 추대하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 내 진실로 알거니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이니, 험함이 밖에 드러난 것은 만만히 대하기 어렵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마음이니, 험함이 안에 있는 것은 쉽게 대한다. 걷기에 평지보다 편안한 곳이 없지만 맨발로 다니면서 살피지 않으면 발을 다치고, 거처하기에 이부자리보다 편안한 것이 없지만 모서리를 조심하지 않으면 눈을 다친다. 화는 실로 소홀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바위는 계곡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원독(怨毒)이 마음속에 있으면 한 사람의 생각이라 몹시 미세하고, 필부(匹夫)가 하늘에 호소해도 한 사람일 적에는 매우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저 밝은 감응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이 백성이라. 백성이 원하는 바를 반드시 따르니 진실로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과 같다.[民猶水也。古有說也。民則戴君。民則覆國。吾固知可見者水也。險在外者難狎。所不可見者心也。險在內者易褻。履莫夷於平地。跣不視而傷足。處莫安於衽席。尖不畏而觸目。禍實由於所忽。巖不作於溪谷。怨毒在中。一念銳。匹夫呼天。一人甚細。然昭格之無他。天視聽之在此。民所欲而必從。寔父母之於子。]」



  조식은 먼저 백성을 물에 비유하고 임금을 배에 비유하여 물이 배를 순항하게 할 수도 있고 빠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임금을 추대하고 갈아치우는 힘을 민에게서 찾은 것은 적극적인 대민인식으로서, 각종 경전을 적극 인용하고 있다. 원래 ‘민암’이라는 말은 『서경』의 ‘顧畏于民巖[백성이 바위임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십시오]’라는 말에서 비롯된 용어이며, ‘대군(戴君)’과 ‘복국(覆國)’의 논리는 『순자』「왕제(王制)」에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戴舟 水則覆舟[임금은 배이고 서인은 물과 같은데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엎기도 한다]’라는 표현과도 흡사하다. ‘天視聽之在此’라는 표현은 『맹자』「만장장(萬章章)」에 나오는 ‘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廳[하늘의 보심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따르고 하늘의 들으심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따른다]’는 내용과 유사함을 보인다. 결국 조식은 백성들의 힘을 중시한 각종 경전을 광범하게 인용하여 백성이 우선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 조식은 배를 뒤엎을 수 있는 민의 암(巖)이 생기는 원인을 당시의 현실 속에서 찾고 있다.



「궁실(宮室)의 넓고 큼은, 바위의 시작이요. 여알(女謁)이 성행함은, 바위의 계단이요, 세금을 기준 없이 거두어들임은, 바위의 쌓음이요, 도에 넘치는 사치는 바위의 세움이요, 부극(掊克)이 자리를 차지함은 바위의 길이요, 형벌의 자행은 바위를 굳게 함이다. 비록 그 바위가 백성에게 있지만, 어찌 임금의 덕에서 말미암지 않겠는가? 물은 하해(河海)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큰 바람이 아니면 고요하고, 바위의 험함이 민심보다 더 위태로운 것이 없지만, 포악한 임금이 아니면 다 같은 동포이다. 동포를 원수로 생각하니, 누가 그렇게 하도록 하였는가? 남산이 저렇듯 우뚝하지만 오직 돌이 바위가 된 것이고, 태산이 저렇듯 험준하지만, 노(魯)나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그 바위는 마찬가지로되, 안위(安危)는 다름이 있다. 나로 말미암아 편안하기도 하고, 나로 말미암아 위태롭기도 하니, 백성을 바위라 말하지 말라. 백성은 바위가 아니니라.[宮室廣大。巖之輿也。女謁盛行。巖之階也。稅斂無藝。巖之積也。奢侈無度。巖之立也。掊克在位。巖之道也。刑戮恣行。巖之固也。縱厥巖之在民。何莫由於君德。水莫險於河海。非大風則妥帖。險莫危於民心。非暴君則同胞。以同胞爲敵讎。庸誰使而然乎。南山節節。唯石巖巖。泰山巖巖。魯邦所詹。其巖一也。安危則異。自我安之。自我危爾。莫曰民巖。民不巖矣。]」


위에서 보듯이, 조식은 궁실의 광대, 여알의 성행, 세금의 과중, 사치의 지나침, 가렴주구의 성행, 형벌의 자행 등 6가지를 중요한 현실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바위가 험해지는 요인이 백성에 있고 민심은 임금의 덕에서 연유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식은 ‘여알(女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파생되는 척신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것이 관리의 부패와 세금의 과중으로 나타나 궁극에는 민에게 미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정치의 잘못은 ‘민암’을 더욱 공고히 하여 결국에는 복국의 원인이 됨을 경고하였다. 「민암부」의 마지막에서 ‘莫曰民巖 民不巖矣[백성을 바위라 말하지 말라 백성은 바위가 아니니라]’라고 표현하여 덕치가 행해지는 국가와 사회를 거듭 희구하고 있다.

「민암부」는 현실정치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민에게서 찾은 글로서, 백성을 기반으로 하여 척신세력이나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 공도론(公道論)을 무기로 등장하는 16세기 사림파 세력의 입지점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식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이 배출된 것을 보면 그의 민본사상은 실천성까지 수반했다고 볼 수가 있다.

2010년 12월 국회에서는 내년도 새해 예산안이 전격 처리되어 버렸다.

파행과 폭력이 오가면서, 국민의 눈과 뜻이 무시되는 안타까운 상황들이 수년간 반복되고 있다. 오늘날 국회의원들에게 조식의 「민암부」를 정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백성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위정자의 마음가짐이 더욱 절실한 시대이다.


民巖賦 (민암부) 曹植조식


六月之交 육월지교
灩澦如馬 염여여마
不可上也 不可下也 부가상야 부가하야
沓絩哉, 險莫過焉 답조재! 험막과언
舟以是行 亦以是覆 주이시행 역이시복
民猶水也 古有說也 민유수야 고유설야
民則戴君 민즉대군
民則覆國 민즉복국
吾固知可見者水也 오고지가견자수야
險在外者難狎 험재외자난압
所不可見者心也 소부가견자심야
險在內者易褻 험재내자역설
履莫夷於平地 이막이어평지
跣不視而傷足 선부시이상족
處莫安於임席 처막안어임석
尖不畏而觸目 첨부외이촉목
禍實由於所忽 화실유어소홀
巖不作於谿谷 암불작어계곡
怨毒在中 一念甚銳 원독재중 일념심예
匹婦呼天 一人甚細 필부호천 일인심세
然昭格之無他 연소격지무타
天視聽之在此 천시청지재차
民所欲而必從 민소욕이필종
寔父母之於子 식부모지어자
始雖微於一念一婦 시수미어일념일부
終責報於皇皇上帝 종책보어황황상제
其誰敢敵我上帝 기수감적아상제
實天險之難濟 실천험지난제
亘萬古而設險 긍만고이설험
幾帝王之泄泄 기제왕지설설
桀紂非亡於湯武 걸주비망어탕무
乃不得於丘民 내불득어구민
漢劉季爲小民 한유계위소민
秦二世爲大君 진이세위대군
以匹夫而易萬乘 이필부이이만승
是大權之何在 시대권지하재
只在乎吾民之手兮 지재호오민지수혜
不可畏者甚可畏也 부가외자심가외야


嘻噓哉 蜀山之險 희허재 촉산지험  
安得以掩君覆國也哉 안득이엄군복국야재
究厥巖之所自 구궐암지소자
亶不外乎一人 단부외호일인
由一人之不良 유일인지부양
危於是而甲仍 위어시이갑잉
宮室廣大 巖之與也 궁실광대 암지여야
女謁盛行 여알성행
巖之階也 암지계야
稅斂無藝 巖之積也 세렴무예 암지적야
奢侈無度 巖之立也 사치무도 암지입야
捨克在位 巖之道也 사극재위 암지도야
刑戮恣行 巖之固也 형륙자행 암지고야
縱厥巖之在民 종궐암지재민
何莫由於君德 하막유어군덕
水莫險於河海 수막험어하해
非大風則妥帖 비대풍칙타첩
險莫危於民心 험막위어민심
非暴君則同胞 비폭군칙동포
以同胞爲敵讐 이동포위적수
庸誰使而然乎 용수사이연호
南山節節 維石巖巖 남산절절 유석암암
泰山巖巖 魯邦所瞻 태산암암 노방소첨
其巖一也 기암일야
安危則異 안위칙이
自我安之 자아안지
自我危爾 자아위이
莫曰民巖 막왈민암
民不巖矣 민부암의



유월어름 홍수의 계절
양자강 상류에 있는 암초의 물 말처럼 세차게 밀려오네
배가 올라갈 수도, 내려올 수도 없다네.
아아! 이보다 더 험난한 데는 없으리라
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
나는 진실로 아나니, 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위험이 바깥에 있어 좀체 가까이 않는다네.
볼 수 없는 건 마음인데
위험이 안에 있어 소홀히 대한다네.
걸어 다니기에 평지보다 더 평탄한 곳이 없지만
맨발로 살피지 않고 다니다간 발을 상하지
거처함이 이부자리보다 더 편안한 곳이 없지만
뾰족한 것을 겁내지 않다간 눈이 찔린다네.
재앙은 소홀히 하는 곳에 있는 법
위험은 산골짜기에만 있는 건 아니라네.
원한이 마음속에 있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이 아주 날카롭네.
보잘것없는 아낙네라도, 부르짖으면 하늘이 호응한다네.
하늘이 감응하는 것은 다른 이유 없어
하늘은 이 백성들 통해서 보고 들으니까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건 반드시 들어주기를
진실로 부모가 자식 돌듯 해야 한다네
원한 가진 한 아낙네 비록 애초에 보잘것없지만
끝내 거룩하신 하늘에게 갚아주기 바란다네.
그 누가 감히 우리 하늘을 대적하리.
실로 하늘의 험난함은 통과하기 어렵다네.


만고에 걸쳐 험함이 베풀어 졌거늘
얼마나 많은 임금들이 예사로 보아 넘겼던가.
걸. 주가 탕. 무에 망한 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에 망한 거라네
한나라 유방은 보잘것없는 백성이었고
진나라 호해는 높은 황제였다네
필부로서 만승의 천자가 되었으니
이 커다란 권한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다만 우리 백성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겁낼 것 없는 듯해도 매우 겁내야 할 존재라네


아아! 촉산의 험준함인들
어찌 임금을 넘어뜨리고 나라를 엎을 수 있으리오

그 위험함의 근원을 찾아 보건대
정말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네.
임금 한 사람이 어질지 못한 데서
위험이 극에 이르게 된다네.

궁궐을 넓고 크게 짓는 일은, 백성들을 성나게 하는 시초요
여자들이 들락날락 임금을 자주 만나는 일은 백성들을 성나게 하는 과정이요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은 백성들의 분노를 쌓아 가는 것이오.
도에 지나칠 사치함은,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킴이요
탐관오리가 자리를 차지함은, 백성들의 분노를 이끌어냄이요
형벌을 멋대로 쓰는 일은 백성들의 분노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일
비록 그 위험이 백성에게 있지만
어찌 임금의 덕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강이나 바다보다 더 큰 물은 없지만
큰바람만 없으면, 고요하다네.


백성들의 마음보다 더 위태한 것은 없지만
폭군만 아니라면 다 같은 동포라네
동포를 원수로 만드는 건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남산 저리 우뚝한데, 거기에 돌이 험하게 붙어있고
태산이 저리 험준하지만, 노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네


그 험준함은 한가지라 하지만
편안해지느냐, 위태로우냐는 다르다네.
임금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게 되기도 하고
임금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네.
백성들의 마음 위험하다 말하지 마소
백성들의 마음은 위험하지 않다네.



*민암부(民巖賦)-‘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말. 그러므로 남명의 이 글은 ‘통치자인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여 편안히 살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 된다. 서경(書經) 「소고(召誥)」에, “백성의 암험함을 돌아보아 두려워하소서(顧畏于民碞)”라는 말에 연원(淵源)하는데, 「민암부」의 ‘암(巖)’자가 판본에 따라 ‘암(嵓), 암(嵒)’으로 되어있고, 서경에는 ‘암(碞)’으로 되어 있지만 다 ‘암(巖)’과 같은 뜻이다. 글자 ‘암(巖)’은 ‘바위’뿐 아니라 ‘고준(高峻), 험요(險要), ‘험(險)하다, 위험(危險)하다, 암험(巖險)하다’ 등 뜻이 되기도 한다.

*유월지교(六月之交)-交는 ‘즈음’, 시간 혹은 지역이 인접함을 가리킴 곧 춘하지교(春夏之交)는 봄과 여름 사이의 환절기 즈음.

*염여(灩澦)-염여퇴(灩澦堆). 중국의 사천성(四川省)을 흐르는 양자강(揚子江)의 구당협(瞿塘峽) 어구에 있는 거대한 바위의 지명(地名)인데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 바위 주변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물결 때문에 배가 지나가기가 매우 위험한 곳이라,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대아래(對我來:나를 마주 보고 오라)’라는 글자를 마주하여 배가 나아가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으나, 피하여 가려고 하면 급한 소용돌이에 말려 배가 전복된다고 한다. 중공 정부 수립 이후 선박 왕래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폭파해 버렸다고 하는데, 글자 여(澦)는 ‘예’로 읽기도 한다.

*답조재(沓絩哉)-‘답(沓)’은 ‘물이 끓어넘치는 모양, 물이 넘쳐흐르는 모양’, ‘조(絩)’는 ‘비단을 길게 펼친 모양’

*민유수야(民猶水也)-여기서의 ‘유(猶)’는 ‘같을 유’

*고유설야(古有說也)-예로부터 있어 왔다는 말은 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임금은 배이고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엎기도 한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는 구절 및 서경(書經) 「소고(召誥)」 ‘王不敢後 用顧畏于民碞’의 세주(細註)에, “소씨(蘇氏)가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실을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엎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백성보다 더 암험한 것은 없다(蘇氏曰 民猶水也 水能載舟 亦能覆舟 物無險於民者矣)’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측(則)-법칙칙/곧즉/본받을측. ‘법 혹은 법칙, 곧(금방, 즉시, ~한즉슨), 본받다, 모범으로 삼다’ 등의 뜻을 가진 글자.

*대(戴)-떠받들다, 추대(推戴)하다.

*압(狎)-익숙하다, 친압하다(서로 흉허물없을 정도로 사이가 친함), 가벼이보다.

*설(褻)-무람없다(윗사람이나 친한 사이에 버릇없이 예의를 지키지 아니하다). 친압하다.

*이(夷)-평평하다.

*선(跣)-맨발, 돌아다니다.

*임(袵, 衽)-이부자리, 옷깃, 옷섶.

*예(銳)-미세하다. 원문의 ‘예(銳)’자는 문맥의 흐름상 ‘날카롭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召公) 16년조의 ‘불역예호(不亦銳乎)’라는 예에 의거하여 ‘사소하다‧미세하다’는 뜻으로 풀이함.

*소격(昭格)-법도를 밝게 하다.

*천시청지재차(天視聽之在此)-맹자(孟子) 「만장(萬章)」에, “하늘의 보심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따르고, 하늘의 들으심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따른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이라 하였다.

*식(寔)-참으로, 진실로.

*황황(皇皇)-임금, 천자 또는 상제에 관한 사물 위에 붙이는 말. 상제(上帝)-하느님

*설설(泄泄)-느슨하게 풀어진 모양. 泄泄猶沓沓也蓋弛緩之意.

*한유계(漢劉季)-한(漢) 나라의 시조(始祖) 유방(劉邦).

*진이세(秦二世)-진(秦) 나라의 이세(二世) 임금 호해(胡亥).

*희(譆)-탄식하다. 암(掩)-보이지 않게 가리다.

*촉산(蜀山): 중국 사천(四川) 지방의 험한 산악을 범칭한 것.

*궐(厥)-그, 그것.

*단(亶)-진실로.

*갑잉(甲仍)-첫번째 원인.

*여(輿)-비롯하다. 권여(權輿).

*알(謁)-아뢰다. 여알(女謁)-임금의 총애를 틈타 비빈(妃嬪)이나 궁녀(宮女)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렴(斂)-긁어모으다, 거두어들이다.

*예(藝)-분별하다(分別), 대중하다(準也), 법(法也).

*부극(掊克)-부(掊)는 그러모으다. 조세를 과하게 거두어들이어 백성을 해치는 일 혹은 그리하는 사람. 맹자(孟子) 고자(告子) 집주(集注)에 ‘掊克聚斂也’ 참조.

*륙(戮)-형벌을 내리다, 죽이다.

*종(縱)-비록.

*첩(帖)-타첩(妥帖), 타첩(妥貼), 별탈없이 일을 순조롭게 끝냄.

*용(庸)-써, ~로써.

*절절(節節)-우뚝한 모양

*남산절절 유석암암(南山節節 維石巖巖)-원문의 ‘남산절절 유석암암(南山節節 維石巖巖)’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의 ‘절피남산 유석암암(節彼南山 維石巖巖)’을 인용한 것이다. 이 시는 임금이 태사(太師) 윤씨(尹氏)를 등용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한 것을 풍자한 것인데, 우뚝한 남산에 험하게 붙어 있는 바위는 백성의 암험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인용한 것이다.

*태산암암 노방소첨(泰山巖巖 魯邦所瞻)-원문의 ‘태산암암 노방소첨(泰山巖巖 魯邦所瞻)’은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閟宮)」에 나오는 말로, 노(魯)나라가 주공(周公)의 성덕(聖德)에 힘입어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이 험준하게 솟아 있는 태산을 보면서 임금을 그 태산처럼 우러러본다는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백성은 오로지 나랏님을 두려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도 가족을 데리고 유랑걸식하다. 굶어 죽은 수 많은 사람들을 본 문정왕후-명종시절을 본 그는

"배는 물이 있어 가지만 물은 때로는 배를 뒤집기도 한다." 고 썼다.

"보잘것 없는 아낙네도 하늘을 감동시킨다." 감동적인 시이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가져온 왕실의 약화로 인하여 피폐해진 나라의 살림을 피부로 겪으며 피를 토하듯 써 나간 글이다...



------------------------------------------------------------------------------

1501년 아버지 조언형(曺彦亨), 어머니 인천 이씨, 국(菊)의 따님 사이에 3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나,


5살 때 부친이 문과급제로 서울 종로로 이사가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웠으며, 9살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함에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 할 일 없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 하였고

18살 때 아버지가 함경도 단청군수로 있을 때 유학 경전 외 천문, 지지, 의학, 수학, 궁마, 항진 등 다양한 재능을 익혔으며,

           마음 은 있으되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면서 정신력과 지구력, 인내심과 담력을 키우느라 두 손에

           물그릇 을 받혀 들고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하였다.

20세 때 생원 진사 양과에 1~2등으로 합격을 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대사헌)가 죽고 숙부인

            조언경(曺諺卿)이 멸망하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엿으며,



22세 때 충순위(忠順衛) 조수의 따님 남평 조씨와 결혼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접하고 크게 깨달은것이 "벼슬에 나가서는 유익한 일을 하고 집이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가

            벼슬을 하면서 하는 일이 없고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가 없으면 배우고 익힌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며

            무엇을 공부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그때까지 이것저것 공부하던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사서

             (論語, 大學, 中庸, 孟子)와 육경(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 樂記)에만 전념하였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21년간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합천 삼가에서 장사를 지내고 3년동안 여묘생활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맨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으며, 남명 사상 속에 항상 민생을

            잊못하는 것은 이때 생민의 어려움을 실제로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학문과 인격을 닦았으며 여기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 청향당 이원(淸香當 李源),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송계

            신계성(松契 申李成) 등 명류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퇴상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44세 때 1544년 6월에 늦게서야 얻은 외아들 차산(次山)이 9살의 나이에 죽었는데, 남명은 9살 때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적이 있건만 아들은 9살 때 살아나지 못하고 죽고야 말았다.

45세 때 1545년 을사사화로 친구인 이림(李霖), 성우(成遇), 곽순(郭珣) 등이 죽고 모친도 사망 3년 동안 여묘 생활을

        하였으며 김해생활 17년을 마감하고,

47세 때 고향 합천 삼가로 다시 돌아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처사로서

       언론을 발하여 국정을 비판하였으며, 이때 학문(學文)과 도덕(道德) 인격(人格)과 사상(思想)은 널리 알려져 오건

       (吳建),  정인홍(鄭仁弘), 노진(盧鎭), 하항(河沆) 등 기성학자들이 남명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52세 때 몇 년전 음식과 의복 손질할 손이 필요하여 삼가에 살던 선비 송린(宋璘)의 딸을 부실로 맞아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아들 차석(次石)을 얻었다.



55세 때 1555년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현감직을 받는 대신 온 나라를 진동시킨 상소문 단성소(丹城疎)를 올리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에 달했다.

57세 때 부인에게서 둘째 아들 차마(次磨 칠원군수)가 태어났으며

60세 때 송씨 부인에게서 셋째 아들 차정(次碇 정이품 가선대부)이 태어났다.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金行 정사품 문관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외손녀)은 김희삼(金希三)의 아들 김우옹에게

      시집 보내고   작은 딸(외손녀)은 곽월(郭越) 아들 곽재우에게 시집 보냈다.



61세 때 선생의 고향 합천 생활 22년을 마감하고 마지막 도장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시윤동에 산천제

      (山川濟)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 김면 곽재우, 최영경, 김웅 이때 배우러 온 사람들은 조종도,

     정구 정탁 등이였으며,

66세 때 1566년 명종 임금이 5, 7, 8월 연이어 상서원 판관에 재수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자 명종과 독대(獨對)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는 깊은 정과 믿음이 있어야 하며 훌륭한 제왕은 신하를 친구처럼

       허심탄회(虛心坦懷) 한  의견을 나누어야 하고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려 시급한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11일

       만에 덕산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시국은 중종이 죽고 12살에 왕이 된 명종 임금제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고, 섭정을 놓은 뒤에도    툭하면 왕을 불러 지시하고 심지어 임금의 뺨을 때렸다고 야사는 전한다.

       누이를 등에 업고 설친 윤원형(尹元衡)의 세도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고 윤원형의 서울의 집만 해도

       16채나 되었다고 하니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정대신들은 배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가 설치고 왜구가 들끓는 것은 정한 이치였다.



72세 때 1572년 2월 8일 남명이 천수를 다하고 운명(運命)하자 조정에는 재물과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사간원 대사간을 추증하고 다시 광해군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政)의

'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漢文기초공부》  (0) 2025.02.13
깜빡하기 쉬운 漢字 表記  (0) 2024.11.22
사자소학  (1) 2024.08.07
사자소학  (1) 2024.08.05
천도책 [ 天道策 ]  (8) 2024.07.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