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불자들은 좀 더 지식화 돼야 한다."

 

 출판사(민족사) 대표. 윤창화님.

(불교신문.. 윤창화의 프리즘) 

 

‘불자 지식화 운동’이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불자 지식화 운동’이란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현재 우리 불교도들이 지금보다는 좀 더 불교에 대한 지식,
지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로서 출가자(스님), 재가자(신도)를 불문하고,
현재보다는 더 불교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
즉 불교에 대하여 기본적인 교리 정도는 알아야 하고,
다음은 최소한 타인에게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불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설명은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자 지식화 운동이란..
출재가자 불문하고 지금보다 더 불교지식과
지적소양 갖추는 것.
 
 
그런데 우리 일반 불자들을 본다면
20년 이상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절에 다녔다고 하면서,
정작 간단한 교리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자들이 수두룩하다.
 
이것은 불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신도교육의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불자로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쳇말로
“친구 따라 강남이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필자는 우리 불교도들이 승속을 막론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현재보다는
더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박사학위 이상의 실력을,
일반 불자들은 대학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인들의 교육 수준이 대학 정도로
평준화되고 있기도 하지만,
 
불자로서 불교적 지식조차 일반 사회인들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별로 내세울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추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말 그대로 불교에 대한 교양 정도의 지식이다.
 
불자들이 갖추어야할 교양 정도의 지식이란
입문 정도로서, 초기불교의 교리인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육근, 육경, 육식, 연기, 오온, 무상,
고(苦), 무아, 열반, 해탈, 중도
그리고 대승불교의 교리인 공(空), 불성사상 정도이다.
 
 이 정도는 제대로 된 불교교양대학에서
6개월만 마음먹고 공부한다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시간적으로 대학과정과 비교하면 8분의 1 정도이다.
그것이 좀 무리라면 1년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류정신사 새 발견인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필자는 이것을 ‘불자들이 갖추어야할 불교적 지식’,
‘불교에 대한 교양적 수준의 지식’이라고 구분하며,
 
불자라면 누구든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초점이다.
 
그 정도도 자신이 없다면 불자라는 간판을 내리고,
차라리 교회에 가서 박수나 열나게 치고 영생을 부르짖으면서,
하느님이나 믿는 것이 행복할 것이다.
 
소위 불자로서 불교에 대한 기본적 교양도 갖추지 않는다면,
대화의 모멘트가 형성될 수 없고,
기복 외에는 설명할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기복적 신앙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종교는 모두 다 기복성을 갖고 있다.
 
나는 기복을 추구하는 것도 기왕이라면 좀 알고 신앙하는 것이
훨씬 더 기복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이고
공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몽매한 분은
“아는 것이 많으면 알음알이가 생겨서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無知)의 소산으로서,
부처님께서 가장 힘주어 척결하고자 했던
탐(貪), 진(瞋), 치(癡) 삼독 가운데 치(癡)이다.
 
‘치(癡)’란 어리석음, 무지(無知)로서
바꾸어 말하면
‘명석하지 못함’, ‘현명하지 못함’, ‘지혜가 없음’이다.
 
이제 곧 여름철이다.
여름철엔 모두 산으로 강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바캉스도 길을 알아야 재미있고, 고생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지(無知)와 어리석음으로
인류 정신사의 새로운 발견인 그 위대한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은
도저히 어불성설이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탐, 진, 치 삼독을 제거하고
밝은 지혜, 현명함, 명석함을 바탕으로
번뇌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작업인데,
어떻게 무지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국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육사외도의 일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사회는 때론 일시적인 후퇴도 있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점점 발전하고 정돈되어 가게 된다.
 
변혁의 사회에서는 때론 무식이 통하고 무지가 통하기도 하지만,
정돈된 사회에서는 지식이 통한다.
 
즉, 지적(知的)인 것이 바탕 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성과 지식이 바탕 되지 않고는
포교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게 되고,
또 사람들이 신뢰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발전 또는 역사발전의 정상적인 궤도이다.
사회가 정돈되면 그와 함께 지적 수준도 점점 보편화 되게 된다.
이런 점은 이미 방송매체의 보급으로 평준화가 되어 가고 있다.
 
 
불교교리 이해도 높이고 교리와 사회현상 접목해
생활에서 응용 가능한 현장 교육 시스템 필요..
 
 
과거의 종교 신앙은 무작정 믿는 형태였다.
그리고 아직 우리나라만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종교 장사가 잘 되어서 대기업을 능가하는 흥행을 하고 있지만,
이런 것도 서구 유럽의 예를 본다면 점점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는 지식수준의 평준화에 따라
종교도 지적(知的), 지성적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불교는 어떻게 불자 개개인을 교육하고
사회적 전범(典範)으로 길러낼 것인가?
 
한마디로 ‘불자 지식화 운동’을 통하여,
불자 개개인이 보다 지적이어야 하고,
지식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 교육의 방향도 고답적인 방법,
조금은 일방적 교리 전달 방법에서 벗어나
양방 통행적인 방법(토론)이어야 한다.
 
토론과 지적인 교육을 통하여
불자 모두가 자기 능력을 길러야 하고,
중도, 연기, 열반 등 대표적인 용어에 대한 개념 및
교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또한 신도 교육을 교리 해석과 병행하여
사회현상에 응용할 수 있는
현장 교육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종교사회에서, 특히 이교도들의 비이성적 태클을
거침없이 물리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신문 2638호 / 7월10일자 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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