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을 통해 본 우리의 삶과 일상

 

 진영한빛도서관

     김종기

    목 차

 

<진영 한빛도서관 철학 강좌 개요> 3

 

1.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서양철학의 이성주의 5

I. 철학이란 무엇인가? 5

(1) 통합과학으로서의 철학 5

(2) 철학의 위기와 철학의 학문적 성격 8

(3) 철학하는 태도 9

II. 인간의 인식과 개념적 사고 10

III. 철학의 근본문제 및 여러 문제 13

 

2. 니체의 이성주의 비판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15

I.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토대 : 니체의 반본질주의와 반토대주의 15

1. 니체의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이성에 대한 니체의 비판 15

2. 큰 이성과 작은 이성의 관계 21

3. 니체의 유물론과 그 실천적 의미 25

4. 맺는 말 28

II. 포스트모더니즘: 숭고와 시뮬라크르 30

1.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비재현주의 30

2.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숭고와 시뮬라크르 34

 

덧붙임글. 매체이론과 문화이론 39

<진영 한빛도서관 철학 강좌 개요>

강사: 김종기 - 부산미학연구회장, 훔볼트대학교 철학박사, 부산대학교 강사(외래교수)

1. 교수목표 및 강의개요

 

(1) 교수목표

우리가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실제 우리의 삶은 모두 철학적 문제를 담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이 바로 철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뿐, 우리의 모든 삶은 철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이 강좌는 우선 스스로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철학을 막연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철학을 그 기초에서부터 쉽게 접근하여 철학을 더 친근하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다. 또한 이 강좌는 철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바탕으로 좀 더 높은 철학적 사색을 원하는 시민들에게 현재 전 세계의 사상문화의 지평에서 제기되는 높은 수준의 철학적 담론을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다.

 

(2) 강의개요

이러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이 강좌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및 칸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 그리고 데리다,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적 문제를 철학사적 맥락에서 해명한다.

이 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와 그 이후까지 사상 및 철학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철학이 비록 높은 수준의 이론적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실제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아울러 일상 삶에서 철학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2. 강의 계획

 

1.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서양철학의 이성주의

 

(1)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학문적 성격과 철학하는 태도

반성적 태도 (헤겔의 변증법과 대자존재)

(2) 서양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와 그리스의 자연철학들

-종교적신화적 세계관과 철학적 세계관 (신화에서 철학으로)

-철학의 위기와 철학의 변화

(3) 철학의 근본문제 관념론과 유물론 (플라톤과 마르크스)

-관념론과 유물론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일원론과 이원론은 어떻게 다른가?

(4)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서양철학의 이성주의합리주의 전통

-플라톤의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까지 본질주의의 흐름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진보적 역사관

(5) 이성주의의 보루 하버마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 비판과 미메시스적 행동양식

-하버마스의 목적합리성 비판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2. 니체의 이성주의 비판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1) 니체의 이성주의본질주의 비판과 니체의 비합리주의

-왜 니체는 플라톤과 기독교의 이원론을 비판하는가?

(2) 니체의 관점주의와 상대주의적 진리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와 삶의 미적 정당화

(3)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이성과 합리성의 폭력적 성질과 비이성과 비합리성

(4)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차연의 존재론/리오타르의 소서사이론

-서구, 백인, 남성, 이성 중심주의로서의 이성주의 비판과 해체

-거대서사(거대담론)의 종말과 소서사이론

(5)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언?

-테리 이글턴의 선언(“포스트모더니즘은 끝이 난 듯하다”)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명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1.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서양철학의 이성주의

 

I.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의 학문적 성격과 철학하는 태도

 

(1) 통합과학으로서의 철학

철학이란 어떠한 학문이며 무엇을 다루는가? 철학(哲學: philosophy)이라는 말의 어원은 philosophia이다. 이 말은 사랑을 의미하는 philos와 지() 또는 지혜(知慧/智慧)를 의미하는sophia의 결합어이다. 먼저 그리스어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가페(agápe), 에로스(éros), 필리아(philía) 및 스토르게(storgē)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실제 이 단어들의 의미를 각각의 맥락을 벗어나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아가페(ἀγάπη agápē)는 형제애 또는 자비심,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람 또는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고대의 맥락에서 어떤 사람의 자기 자식 및 배우자에 대한 느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 또한 성찬(love feast)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아가페는 자기 자식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랑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타인의 선을 의도(意圖)하는 것”(to will the good of another)으로 설명되었다.

둘째, 에로스(ἔρως érōs)는 대개 성적 욕정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현대 그리스어 ‘erothas’성적 사랑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그 자신의 정의를 더 엄밀히 구성한다. 비록 에로스가 처음에 어떤 인간에 대해서 느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관조(觀照)와 더불어 에로스는 그 사람 내부에 있는 미를 인식하는 것이 되며, 더 나아가 미 자체에 대한 인식이 된다. 플라톤은 육체적 매력을 사랑의 필수적 부분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따라서 통상 육체적 매력을 벗어남을 의미하기 위해서 플라토닉이란 단어가 사용된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고대의 가장 유명한 책, ?향연?(Simposium)에서 플라톤은 에로스가 미에 대한 인식을 상기시키며, 정신적 진리, 즉 우리로 하여금 에로틱한 욕망을 느끼도록 인도하는 젊은이의 아름다움의 이상적 형식을 이해하는 데 공헌한다고 논증하며, 따라서 저 육감적인 사랑조차도 존재의 비 신체적인, 정신적 진리의 면을 열망한다고 제시한다. 즉 에로스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초월로 인도한다. 연인과 철학자는 모두 에로스라는 수단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도록 고취된다.

셋째, 필리아(φιλία philía)는 통상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애정이 깊은 존경 또는 관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고결한 사랑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전개된 사랑의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잘 알려진 윤리학에 관한 저작,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필리아는 친구들, 가족 및 공동체에 대한 충심으로서 다양하게 표현되며, , 평등함, 친교를 요구한다. 나아가 같은 책에서 필로스(philos)’는 연인 사이 뿐 아니라, 가족간, 친구간의 사랑, 욕망이나 어떤 활동의 향유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일반적 유형의 사랑을 가리킨다.

넷째 스토르게(στοργή storgē)는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보통의 자연적인 감정이입이다. 고대에서는 드물게 사용되었고 전적으로 가족 내에서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스트로게는 폭군을 사랑하는 것에서처럼 단지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인내하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조국 또는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와 같이 거론된 네 가지 유형의 사랑 가운데에서 필리아와 유사한 사랑이 필로스였고, 따라서 필로스는 가장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한편 소피아는 지혜 또는 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소피아는 단순히 지식(知識)을 의미하는 것을 더 넘어선다. 지식이란 우리가 사전적으로 말해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한다. 이때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실천을 통해 얻은 지식은 모두 개별 과학의 영역에서 획득된 지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재 발전된 생명공학 및 생물학의 지식을 통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아주 정밀한 분자 또는 그보다 더 적은 소립자 단계에서 해명할 수 있는 지식을 쌓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정 능력이 떨어지는 난임 부부를 위해 체외수정을 통한 임신의 가능성을 높여왔고 이제 나아가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통한 난치병 치료의 정복에도 도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가능해진 것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물학 및 생명공학이 발전한다 해도, 이러한 개별 분과 과학은 왜 생명체가 존엄한지, 왜 인간이 존엄한지, 왜 어떤 인간이 존엄한지에 대해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은 가치와 의미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 및 의미에 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그리고 가치와 의미에 관한 물음에 답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에 더해 그것에 대한 주체의 태도, 실천적 입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철학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실천적 입장, 다시 말해 행동원리를 줄 수 있다.

그런데 고대에 철학은 지금처럼 인문학 또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에 국한된 학문이 아니라, 그 속에 모든 개별 분과 과학을 다 포섭하고 있는 일종의 통합과학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의 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은 철학자는 지금처럼 단순한 인문학자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 속에 물리학, 천문학, 수학, 기하학 등등의 모든 개별 분과 과학을 다 포괄하고 있는 통합과학자였다.

그리고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에 의해 철학의 기원이 마련되었다. 이때 철학이 통합과학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탈레스는 엄밀히 말해 철학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학문의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탈레스는 학문의 아버지일 수 있게 될까? 통상 우리는 탈레스의 철학적 세계 해석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신화적종교적 세계 해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그리스 신화, 무엇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세계의 최초의 모습은 카오스였다. 이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가 형성되고 그 최초의 존재로서 가이아(Gaia: 대지의 여신)가 태어났으며, 가이아는 처녀의 몸으로 우라노스(Uranos: 하늘의 신)를 낳는다. 여기서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하는 근원적인 존재는 에로스(Eros)이다. 그리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자식을 낳기 위해 서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래서 가이아에게 우라노스는 자식이자 남편이며 우라노스에게 가이아는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들에 의해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해 가이아가 낳은 자식을 다시 가이아의 자궁(Tartaros: 타르타로스)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해서 대양, 산맥 등을 상징하는 자연의 신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가이아의 자궁 속으로 밀려들어오게 되어, 고통을 받고 원한이 맺힌 가이아가 자신의 막내아들 크로노스(Kronos: 시간의 신)를 낳으면서 크로노스를 숨긴다. 그리고 이 크로노스가 장성하자 이 크로노스에게 큰 낫(Scythe, Sense)을 들려주어 이 낫으로 아버지의 남근(Phallus)을 쳐서 아버지를 죽이게 한다. 우라노스의 잘린 남근에서 떨어진 피가 땅에 떨어진 곳에서 거인족 기간테스와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가 태어난다. 한편 우리노스의 잘린 남근과 피가 바다에 떨어진 곳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다.

다른 한편 기독교의 창세기는 신이 그의 말씀(logos)으로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와 같이 신화나 종교는 세계의 궁극적 기원(arche)에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나 종교는 세계에 대한 해석 방식, 즉 세계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이나 종교적 세계관은 이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신앙 또는 상상력에 의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세계관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사유의 틀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는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만물을 생성시키고 소멸시키는, 최초의 신들에 속했던 에로스는 이후에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나타나며,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에게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기도 하며 또한 살인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화적 세계관이나 종교적 세계관은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적 세계관은 비논리적, 비합리적, 비이성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자 탈레스는 세계의 기원(아르케)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물로부터 세계의 모든 존재가 파생되어 나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탈레스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비교하고 유추하여 만물의 운동이나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물질로서 을 아르케로 선택했던 것이다. 물은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땅과 바다에 떨어진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생명도 원시 바다의 혐기성 세균에서 태어났다. 또한 세계의 모든 존재는 물, 즉 수분을 함유하고 있다. 이렇다면 물이 아르케라는 탈레스의 주장은 꽤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탈레스는 아르케를 신앙이나 상상력에 근거하여 찾지 않고, 당시의 가장 과학적인 토대, 즉 관찰, 비교, 유추 등의 과학적 방법과 이성적 사고를 통해 합리적으로 도출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아르케 이론은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다. 따라서 탈레스의 만물의 아르케는 물이다라는 단순한 명제는 인간이 비논리적, 비합리적, 비이성적 세계관으로부터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 세계관으로 전환하게 된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탈레스는 철학 또는 통합과학, 즉 학문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2) 철학의 위기와 철학의 학문적 성격

 

앞서 언급한 대로 철학은 애초에 지금처럼 그 영역이 축소된 인문학이나 정신과학이 아니었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통합과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의 역사에서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뉴턴이 태동시킨 근대 물리학의 완성이었다. 뉴턴은 자신의 물리학을 자연철학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뉴턴의 물리학이 탄생하자 거시 물리 세계에 대해서는 철학보다 물리학이 경험, 관찰, 실험 등의 방법을 통해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다양하게 변화하는 거시 물리 공간 속에서 물체들의 운동을 보편적 법칙(뉴턴의 운동의 법칙)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세계는 보편적 원리, 법칙을 통해 전체적이고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첫 번째 위기 국면에서 철학은 자신의 탐구영역을 더 이상 물리적 세계가 아닌 정신영역으로 축소 조정한다. 따라서 철학은 이제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이 된 것이다. 현재 인문학(humanities)이라고 불리는 학문들은 철학으로부터 물리적 대상을 다루는 여러 분과 과학들이 독립하고 난 뒤의 정신적 영역을 그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예를 들어 철학, 역사학, 문학 등등의 학문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과학으로 자신의 영역을 축소 조정한 이후, 철학에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서 사변적 추론을 넘어선 경험 및 실험에 바탕을 둔 경험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탄생하면서 촉발되었다. 이제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 또는 심리에 대해서 철학보다 더 명료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철학은 정신의 영역에서 마저도 다른 경험과학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에 철학에 찾아온 두 번째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는 철학의 한 분과 영역이 언어철학 또는 분석철학이다.

언어철학 및 분석철학은 이제 철학의 학문적 대상을 더 이상 과거처럼 직접적으로 세계의 존재 또는 존재자들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철학은 과거처럼 존재론적 문제를 탐구하지 않는다. 이제 철학의 작업은 세계의 존재 또는 존재자들을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다른 개별 분과과학의 언어를 검토하여 언어를 명료화하는 것, 나아가 특정 이론 또는 명제가 기존의 이론에 정합적인가를 탐구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따라서 철학의 작업은 메타언어적, 메타이론적 작업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언어철학 및 분석철학의 관점이다. 이 때문에 철학은 더 이상 세계관으로서의 성격을 잃는다. 이제 철학은 더 이상 세계관이 아니라 메타언어적, 메타이론적 작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철학자들에 따르면 철학은 다시 세계관이어야 한다. 이러한 견해를 명시적으로 표명한 바 있는 철학자들은 바로 칼 포퍼(Karl Popper)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세계의 여러 존재자 및 여러 영역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능력은 철학보다 개별분과과학이 더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어떤 작업을 하는 것인가? 철학이란 개별분과 과학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그 위에서 세계에 대해 전체적이고 통일적 해석을 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단순히 사변적인 추론을 통해서만 세계를 해명해서는 안 된다. 모든 개별과학의 성과를 통합하고, 그 위에서 세계와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해서 전체적이고 통일적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개별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들 개개의 것만으로는 세계에 대한 통일적 해석을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의미와 가치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개별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통일적 해석 및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철학은 고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통합과학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3) 철학하는 태도

 

우리는 앞에서 철학이 애초에는 통합과학이었다는 것과 현대에도 철학이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통합과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통합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수행하는 인간의 태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먼저 통합과학으로서의 철학은 세계관이었다. 애초에 통합과학으로서의 철학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세계를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철학자로서 탈레스는 자신의 과학적 방법과 이성적 사고에 의지하여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한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는 그의 ?과학의 새로운 도구?(Novum Organum Scientiarum: ‘new instrument of science’)에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 인식을 방해하는 과거의 오류, 편견, 선입견을 우상’(idola: The Idols)이라 부르고, 그것을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네 가지 우상으로 제시한다.

첫째, 종족의 우상(Idols of the Tribe: Idola tribus)은 우리 인간의 본성 때문에, 즉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족이기 때문에 유래하는 우상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인간의 감각이 사물의 척도라고 잘못 주장하지만, 사실상 모든 감각의 지각과 정신은 인간의 저울에 맞추어 형성된 것이며 세계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들의 감각과 사고에 기초하여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목적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세계 또는 우주를 목적론적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적 세계관이며, 이러한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이 세계가 그 내부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한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목적에 따라 물건을 만들며 그 물건은 우리가 부여한 목적을 그 내부에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세계가 특정한 목적을 그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 목적을 부여한 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목적을 부여한 자는 이 세계를 만든 자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로서 신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세를 지탱해 온 신 중심의 세계관이다. 이러한 신 중심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인 신앙을 진리의 근본 토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둘째,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 자연의 빛이 흩어지며 색깔을 없애버리는 자신의 특수한 동굴, 또는 굴속에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편견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사람이 동굴 속에 앉아 있다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 동굴 구멍만큼만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우상은 개인이 자신의 경험, 교양 및 인간관계에만 사로잡혀 대상 세계를 평가할 때 생기는 우상이다.

셋째,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 오고가는 일상의 사람들, 여러 지역,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혼란 또는 불명료성 때문에 유래하는 우상이다.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애매하다는 것과 모호하다는 것의 합성어이다. 애매하다(ambiguous)는 것은 명석하다(clear)는 것의 반대말인데, 명석하다는 것은 통상 분명하다, 명확하다는 의미로서 일의적(一義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애매하다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모호하다(vague)는 것은 뜻은 일의적이라 하더라도 그 범위가 불명료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적당하다라는 말이 그러한 모호함의 좋은 예이다. ‘모호하다의 반대말은 판명하다(distinct)이다.

넷째, 극장의 우상은 연극무대에서 펼쳐지는 철학자들의 잘못된 도그마, 잘못된 논증 법칙에 의해 인간 영혼에 새겨지는 우상을 말한다. 고대의 연극에서 관객들은 등장인물들, 특히 주인공의 역할을 하는 왕, 영웅, 신 등의 곧이곧대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전통적 관습이나 지도자, 또는 전문가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할 때 생기는 우상이 극장의 우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상들은 모두 우리를 종교적인 목적론적 사고, 개인의 경험,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 전통적 관습이나 지도자 및 전문가에 대한 의존 등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우상들은 모두 기존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런데 베이컨은 이러한 우상들을 깨트림으로써 중세의 암흑에서 벗어나 계몽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때 계몽의 정신이 바로 다름 아닌 철학의 정신이며, 그것은 기존의 것, 나아가 자신 또는 자신들의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데에서 생긴다. 실제 모든 학문은 이렇게 기존의 것, 전통적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관점에 설 때 발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판적 태도는 철학하는 태도이자, 학문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모든 학문이 이러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일상에서 보통 사람은 항상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익숙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라고 물음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비판적 태도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사고에 의해 우리는 우리로 모르는 채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가리고 있는 것을 다시 바라보면서 참된 진실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철학이 다른 개별 분과 과학과 달리 통합과학이 될 수 있는 것도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더 높은 차원에서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때이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기존의 것, 진리라고 통상 받아들여지던 것, 나아가 사회 및 정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이미 철학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철학자가 될 수 있다.

II. 인간의 인식과 개념적 사고

 

통상적으로 말한다면 인간 인식의 발전단계는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감성적 인식은 감각, 지각, 표상으로 나누어지며, 이성적 인식은 개념, 판단, 추론으로 나누어진다. 감각(sense)은 지각(perception)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는 기관의 생리학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각의 낮은 단계를 감각(sensation)이라 한다. 심리학에서 감각(sensation)과 지각(perception)은 인간과 동물의 체계에서 감각들(senses)들의 각각의 처리 단계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각 작용 또는 과정은 감각에서 출발하여 지각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감각(sensation)은 가장 원초적인 감각(sense) 과정이다. 감각(sensation)은 우리 신체에 구비된 감각기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살갗-촉각)에 가해지는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여 그 자극을 주는 대상이 지닌 속성을 1차적으로 인지하는 주체의 능력, 또는 그 작용을 의미한다. 이 감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신체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 대상을, 또는 우리 자신의 신체를 감지하여 그것의 형태, 그것이 내는 소리, 냄새, , 그것이 우리 피부에 닿을 때의 감촉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또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감각기관을 통해 신체 바깥의 사물이나 그 변화를 알아내는 작용, 또는 그러한 능력을 감각이라 한다. 또한 그러한 감각 작용을 감각(sensation)이라 한다. 따라서 그냥 감각이라 말할 때, 그것은 감각 능력(sense)이기도 하고 감각 작용(sensation)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우리 신체 바깥의 외부 대상, 또는 우리 자신의 신체를 인지할 때 우리는 단 하나의 감각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 여러 감각을 동시에 사용한다. 이렇게 감각을 종합하는 능력을 지각(perception)이라 한다.

감각(sensation)은 낮은 단계의 생화학적 및 신경학적 사건이며 감각기관의 수용세포들에 가해지는 자극들의 영향과 함께 시작한다. 감각은 어떤 자극의 기본적인 속성들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 나무는 매우 키가 커”, “이 나무의 표면은 딱딱해와 같은 진술에서처럼 대상의 원초적인 속성을 감지하는 과정이 바로 감각(sensation)이다. 이에 반해 지각(perception)은 감각적으로 입력되는 실제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인지나 이해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지각은 이 책상은 철제 책상이고 검은 색이 칠해져 있네라는 진술에서처럼 대상의 원초적인 속성에 대한 여러 감각을 결합하여 대상을 더 포괄적으로 인지하는 정신적 과정 또는 상태이다. 따라서 감각(sensation)의 목표는 감지이며, 지각(perception)의 목표는 환경에 대한 유용한 정보의 창출이다. 이러한 점에서 감각은 수동적 측면을 지니며, 지각은 능동적 측면을 지닌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외부의 대상 사물을 인지한다는 것은 감각에 바탕을 두지만, 단순히 감각을 통해서만은 그것에 대한 포괄적이며 통일적인 인지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외부 대상 사물에 대한 더 높은 인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에 의해 주체에 가해지는 여러 자극에 상응하는 여러 감각을 통합하여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대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자극을 포괄하는 능력이 감각을 통합하는 지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과 지각은 외부의 사물이 우리에게 가하는 자극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의 결과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과를 보고, 만지고, 맛을 보는 등의 여러 감각의 종합을 통해 사과를 지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과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진 과일인지를 주관적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 인지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사과에 대해 주관적인 이해를 획득한다.

이에 반해 표상(representation/: Vorstellung)은 과거에 감각, 지각한 것을 현재의 의식에 떠올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표상이라 할 때 이 말은 통상 표상능력을 의미하며, 표상능력에 의해 떠올려진 이미지를 표상이미지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사과라는 낱말을 들으면 각자 자기 머릿속에 또는 마음속에 사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각자가 과거에 사과를 먹고, 만진 경험, 다시 말해 감각하고 지각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과라는 낱말을 듣고 각자가 마음속에 사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할 때 각자는 각기 다른 사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왜냐하면 사과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과에 대한 개인의 감각, 지각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과라는 낱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푸른 사과를 떠올리는 반면, 다른 사람은 붉은 사과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내가 짜장면을 아주 맛있고 황홀한 음식으로 표상하는 반면, 나의 친구는 짜장면을 아주 형편없고 맛없는 음식으로 표상할 수 있다.

이렇게 표상 단계까지의 인식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다시 말해 표상 단계에서 각 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표상 단계에서 개인이 대상에 대해 획득한 이미지, 또는 상은 그 개인의 경험, 그 감각과 지각에 기초한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식론적으로 표상이라는 용어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재현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다시 말해 영어 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는 인식론에서는 표상이라 번역되며, 예술의 영역에서는 재현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기까지, 즉 표상단계의 인식까지를 감성적 인식이라 부른다. 그리고 표상단계의 인식은 구체적이며 개별적이어서 보편화될 수 없다.

이에 반해 만약 예를 들어 우리가 짜장면을 개념적으로 정의 내려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감성적 인식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이성적 인식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 논리학에서 어떤 개념의 정의(定義)는 최근류개념과 종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어떤 개념의 정의를 내린다는 말과 어떤 개념으로 지칭되는 대상의 본질을 밝힌다는 말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최근류개념과 종차를 통해 찾아낸 어떤 개념의 정의는 그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분필이라는 개념을 최근류개념과 종차를 통해 정의 내린다면 그것은 칠판에 쓰는(종차) 필기구(최근류개념)’가 될 것인데, 이것은 분필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칠판에 쓰는 필기구라는 분필의 본질은 현실에 존재하는 다른 분필들과 차이나는 자기만의 특질을 가진 무수한 개별적인 분필들이 가지는 구체적 성질[屬性]을 사상(捨象)하고 그것들의 공통적 성질을 뽑아 올려(抽象) 취해진 것이다. 이때 추상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개별자들이 지닌, 다른 개별자들과 다른 자기만의 속성을 던지고 그것들 사이의 공통성 또는 보편성을 취하는 사고 작용이다. 이 공통성, 보편성은 구체적 개별자들이 어떻게 나타나든 변하지 않는 동일한 성질이다. 따라서 어떤 개념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이러한 불변의 동일한 성질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짜장면의 개념을 정의 내린다면 춘장으로 만든 소스를 얹은(종차) 면음식(최근류개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짜장면을 개념적으로 정의 내린다면, 표상단계에서 각각의 개인에게 다른 기억을 통해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각각의 짜장면은 사라지고, 우리에게는 똑 같은 짜장면, 보편적 속성만으로 남겨진 짜장면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짜장면의 본질이라고 간주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개념적으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포착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이것이 개념적 사고의 특징이다. 개념적 사고란 어떤 대상을 개념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개념적 인식이란 개별 대상이 가진 특수성, 개별성을 무시하고 그것의 변치 않는 보편적 성질, 동일한 성질을 찾아서 그 대상을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의 예에서처럼 개별 분필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분필들과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특성(길이, 모양, 색깔 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필의 본질이 무엇인가, 또는 분필의 개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이 개별 분필들이 가지는 그것만의 특성, 즉 고유성을 무시하고(捨象) 그 개별 분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즉 보편적 속성, 또는 그들의 동일한 속성을 뽑아내어(抽象) 그것을 개념적으로 정의 내린다.

이러한 개념적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대상의 본질(적 속성)을 포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어떤 대상을 통일적이고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분필은 모양, 길이, 색이 어떠하든 칠판에 쓰는 필기구의 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분필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개념적 사고를 통해 대상 세계를 보편적이고 통일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변화화는 대상들(자연 및 세계) 속에서 변치 않는 법칙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변화하는 대상 속에서 불변적인 법칙을 찾아낼 수 있음으로써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연에 그저 적응, 동화되는 삶을 벗어나 자연을 가공, 변화, 지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우리의 문명, 나아가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개념적 사고의 덕분이다.

그러나 개념적 사고는 다른 한편에서 어떤 개별 대상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대상들과 공유하지 않는 그것만의 속성(성질)을 도외시, 무시 또한 억압, 배제하는 사고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말하는 동일화하는 사고’(identifizierendes Denken)로서의 개념적 사고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개념적 사고의 역사는 개별 대상들이 지닌 그것만의 고유한 속성, 즉 개념화될 수 없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를 억압해온 역사이다. 이러한 개념적 사고는 문명을 발전시키고 과학을 전개시킨 토대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 정점에서 자연을 총체적이며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여 우리 문명 자체를 위협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개념적 사고를 보완할 수 있는 것으로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을 제기한다. 원래 미메시스란 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전통적 철학이나 미학에서는 모방, 또는 모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이 미메시스라는 용어를 주체가 객체에 동화되고자 하는 행동양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개념적 사고가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라고 한다면, 미메시스적 사고는 아직 개념화되기 이전의 표상 단계에 머물러 있는 행동양식에 기초한 사고일 것이다. 개념적 사고란 앞서 언급됐다시피 개별자들(예컨대 개별 사과)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대상들(사과 일반)과 공유하지 않는 그것들만의 고유한 속성을 버리고(捨象), 공통적, 보편적, 동일한 속성만을 뽑아내어(抽象), 그것을 통일적이고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개별자들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이를 통해 주체로서의 우리는 객체로서 변화하는 대상들 속에 내재하는 법칙 또는 원리를 포착할 수 있다. 반면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에 바탕을 둔 미메시스적 사고는 개념화되기 이전에 개별적 대상들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대상들과 공유하지 않는, 또는 개념화될 수 없는 것, 즉 아도르노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비동일자를 억압 또는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메시스적 사고는 주체로서의 우리가 객체로서의 개별자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에 동화되고자 하는 행동양식에 기초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우리 문명이 도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념적 사고에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에게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이 남아 있는 분야는 예술이다. 왜냐하면 예술적 작업, 예술적 행위에서 우리는 개별자, 또는 비동일자를 억압,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존중하고 동화되는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III. 철학의 근본문제 및 여러 문제

 

1.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 철학의 근본문제

(1) 선차성의 문제

1) 관념론 의식정신 등 비물질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로부터 물질이 파생되었다.

2) 유물론 물질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로부터 의식정신 등 비물질적인 것이 파생되었다.

(2) 세계의 가지성(可知性)의 문제

1) 우리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없다 관념론(불가지론)

2) 우리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유물론

 

2. 일원론과 이원론

1) 이원론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

2) 일원론 :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

 

3. 소크라테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서양철학의 이성주의합리주의 전통

-플라톤의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까지 본질주의의 흐름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진보적 역사관

 

4. 이성주의의 보루 하버마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도구적 이성 비판과 미메시스적 행동양식

-하버마스의 목적합리성 비판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2. 니체의 이성주의 비판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구조주의

 

I.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토대 : 니체의 반본질주의와 반토대주의

 

1. 니체의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이성에 대한 니체의 비판

 

니체는 칸트의 이성 비판을 수용하면서 또 그것을 뛰어 넘는다. 알다시피 칸트가 수행한 이성 비판은 전통적 형이상학이 이성을 무제약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사용되던 이성(Vernunft) 개념을 세분하여 오성(Verstand)과 이성(Vernunft)으로 나눈다. 칸트가 이성을 이렇게 세분하는 것은 이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밝히고자 하는 데 있었으며, 이때 칸트의 시도는 인식의 한계를 인식능력의 한계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심성(Gemüt)의 두 기본 원천인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에서 발생한다. 감성은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며, 오성은 이런 표상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감성은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자극을 받는 방식에 의해 표상을 얻는 능력(수용성)이다. 오성은 감성과는 반대로 표상 자체를 산출하는 능력 또는 인식의 자발성이다. 달리 말하면 오성은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오성은 규칙의 능력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규칙들을 매개로 현상들을 통일하는 능력이다.

반면 이성은 원리들의 능력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오성의 규칙들을 원리들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으로서 경험이나 어떤 대상에 관계하지 않고 오성과 관계를 맺으며, 감성계를 넘어서서 경험이 어떠한 실마리(Leitfaden)도 교정(Berichtigung)도 제공할 수 없는 인식을 탐구한다. 따라서 이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의 영역을 떠나며 경험에서는 어떠한 상응하는 대상이 주어질 수 없는 개념들을 통해서 우리의 판단 범위가 경험의 한계를 확장한다는 외관(Anschein)을 갖는 인식이다. 즉 이성은 오성과 달리 감각적 경험의 대상에 대해 사유하거나 또는 인식하는 능력이 아니다. 여기서 칸트는 우리의 사유가 경험을 벗어난 것, 또는 경험 이전의 것과 관계할 때는 이율배반에 빠지며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문제가 되는 한, 우리는 경험에 바탕을 둔 대상만을 알 수 있으며, 경험을 벗어난 대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를 나누며 현상만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며 우리가 물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념도 가지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에 제한되며, 경험을 초월하는 물자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 사유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무제약적 능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칸트의 이성비판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반복하여 말하자면 칸트는 순수이성 자신의 불가피한 과제를 신,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로 제시하고 이 과제의 해결을 노리는 학문, 즉 형이상학의 과제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으면서, 형이상학의 독단론적 방법을 비판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칸트의 이성비판의 과제는 이성이 이 대사업”(große Unternehmung)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칸트의 해답은 익히 알다시피 물자체에 해당하는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 신의 현존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 이성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 실천 이성의 영역에서 이러한 물자체의 개념들이 전제되거나 요청된다고 파악하는 것이 칸트의 주장인 것도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니체는 칸트의 이성비판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에서 물자체와 같은 궁극적 근원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는 점에서 칸트를 넘어선다.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은 이러한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것(비판필자)은 오히려 타협에서 소진되어 버린다. 마침내 칸트에 대한 니체의 관계는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계와 같다. 니체에게 문제되는 것은 마르크스에게서 변증법을 발로 세우는 것이 그랬던 것처럼 비판을 다시 발로 세우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먼저 니체가 칸트까지 포함하여 이전의 형이상학과 이성에 대해 어떠한 비판을 가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소크라테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구 형이상학의 이성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곳은 ?우상의 황혼? 가운데 철학에서의 이성이라는 절()이다. 이 절의 서두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의 특이성질(Idiosynkrasie)역사적 감각의 결여, 생성이라는 표상 자체에 대한 그들의 증오, 그들의 이집트주의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 철학자는 개념의 우상 숭배자들”(Begriffs-Götzendiener)이다. 이들은 감각이 참된 세계에 대해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믿고,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사기, 생성, 역사, 허위에서 벗어날 것그리고 무엇보다 몸을 버릴 것, 감각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여기서 니체는 과거의 철학자들, 즉 형이상학자들이 감각과 이성을 대립시키면서 우리가 존재자를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감각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서 니체는 감각과 이성을 대립시켜 감각은 우리에게 대상의 참된 모습을 속이며 오로지 이성만이 대상의 불변적인 본질 또는 참된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오랜 전통에 반기를 든다. 니체에 따르면 엘레아학파는 감각이 다양성과 변화를 보여준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이 어떤 것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보여준다는 이유 때문에,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고 파악하였다. 엘레아학파는 사물의 참된 모습이 불변적이며 고정적이라고 본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참된 모습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데 있다고 본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포착하는 능력은 이성이며, 감각은 우리에게 사물의 참된 모습을 속인다고 보는 데 있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니체는 그것(감각-필자)은 전혀 속이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물의 참된 모습을 포착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니체에 따르면 그 원인은 감각에 있지 않고 그것(감각-필자)의 증거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때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위조하게 하는 원인은 바로 이성이며, 이성이 감각의 증거를 위조하여 만들어 낸 예는 통일성(Einheit), 물성(Dinglichkeit), 실체(Substanz), 지속(Dauer) 등의 개념이다. 앞에서 니체가 철학자들이 개념의 우상숭배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을 대립시켜 어떤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은 개념, 판단, 추론으로 진행되는 이성적 인식의 과정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파악하는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을 비판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인식론적으로는 이성적 인식 과정의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개념(적 사고)인데, 통상적으로는 이 개념(적 사고)을 통하여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대상들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분필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각각의 개별적인 구체적 분필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에서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구체적 분필은 색깔, 크기, 모양 등에서 각기 다른 각자의 개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구체적 분필들이 어떠한 개별적 특성을 가지고 있든, 그것이 분필이라고 불리기 위해서, 또는 분필이기 위해서 반드시 지녀야 할 속성이 있다고 믿고 그 속성을 찾기 위해서 각각의 구체적 분필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특성을 버려나간다. 이것이 사상(捨象)이며, 사상의 결과 남는 것은 분필이라고 불리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속성, 성질 또는 보편적 속성, 성질이다. 이러한 성질 또는 속성을 뽑아 올리는 것이 추상(抽象)이다. 따라서 개념이란 추상화 작업을 거친 관념인 것이다. 이렇게 분필을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분필이라는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 방식, 즉 최근류(最近類) 개념과 종차(種差)를 통해 정의내리는 것과 동일하다. 이 정의 방식에 따라 우리는 분필의 최근류 개념을 필기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며, 필기구에 속하는 (필기구의) 종개념 가운데 하나인 분필이 필기구에 속하는 다른 종개념, 예를 들어 만년필, 연필, 볼펜 등의 종개념들과 가지는 차이, 즉 종적 차이는 칠판(흑판)에 쓰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분필의 본질은 칠판(흑판)에 쓰는 필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사유는 이성적 사유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을 대립시켜, 감성적 인식이 우리의 참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어떤 대상 또는 사물의 본질이란 감각적 경험과 무관한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 포착된다고 보는 것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에 반하여 니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감각이 우리를 전혀 속이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면 어떤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것은 감각을 인간 인식의 근본토대로 수용하는 입장일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칸트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칸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성이 없으면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떤 대상도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Gedanken)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따라서 개념을 감성화하는 것(즉 개념에다 대상을 직관 속에서 덧붙이는 것)이 필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직관을 오성화하는 것(즉 직관을 개념 속에 포섭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가 감각, 즉 감성적 직관이 인식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 그리고 개념적 인식은 감각(감성적 직관)을 토대로 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토대로 칸트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현상과 물자체를 나누며 현상만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며 우리가 물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념도 가지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적 선험철학의 이성비판은 초감각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무제약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성관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미 그 청년기의 저작에서 이성에 대한 이러한 선험철학적 반성을 파악하고 수용하고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알려진 의미심장한 망상(Wahnvorstellung)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사유는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사유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수정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이 확고한 믿음이다.” 나아가 그는 이 숭고한 형이상학적 망상(diese erhabene metaphysische Wahn)”학문의 본능으로서 덧붙여져 있으며 끊임없이 학문을 그 한계로 몰아간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학문의 정신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자연을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지식이 보편적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논리의 본질 속에 숨겨져 있는 낙천주의로서, 이 낙천주의는 우리 문화의 토대이며 확실해 보이는 영원한 진리에 의거하여 모든 세계의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시간, 공간과 인과관계를 보편타당한 절대법칙으로 다루었다.” 니체가 보기에 칸트는 이와 달리 시간, 공간과 인과관계란 단순한 현상유일하고 최고의 실재로 승격시키는 것그것(단순한 현상-필자)을 사물의 가장 내적이며 참된 본질의 자리에 앉히는 것그럼으로써 이것(본질)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봉사함을 밝혀주고 있다 이것이 니체가 파악하는 칸트의 승리, 즉 칸트가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서양 형이상학의 논리주의와 싸워 거둔 가장 어려운 승리 (der schwerste Sieg)”였다. 이와 같은 니체의 지적은 칸트와 니체 사이에는 이성비판의 형식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청년 니체가 칸트의 선험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상적 자양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앞서 우리는 순수 인식, 즉 이론의 영역에서 칸트가 이성의 능력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과제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이론의 영역에서는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초월한 대상들(Dingen an sich)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도덕적 실천의 영역에서 칸트는 자유가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속성으로 전제되어야 하며. 영혼의 불멸과 신의 현존이 순수실천이성의 요청이라고 본다. 칸트는 신, 자유, 영혼의 불멸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근거를 도덕적 의무에서 찾는다. 그는 이 도덕적 의무를 최고선을 나의 의지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나의 온 힘을 다하여 촉진해야 한다는 의무라고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존재자로서의 우리가 최고선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로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자유, 영혼의 불멸성, 신의 현존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것들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변 이성에 의해 반박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이런 물자체의 개념들을 실천적 의도에서의 요청으로서 정당화한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의 이성 비판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초감성적인 것 또는 초월적인 것을 이론적 교리(Dogmata)”로서 승인하는 과거의 형이상학의 독단론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지만 형이상학의 과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칸트는 비판을 인식과 진리의 모든 월권(Anmaßung)을 겨냥하는 힘으로 이해하지만, 인식과 진리 자체를 겨냥하는 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은 자유, 영혼의 불멸성, 신의 현존을 실천적 고려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의 비판은 타협으로 변한다. 앞서 언급된 니체는 비판을 다시 발로 세운다는 들뢰즈의 명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칸트의 비판을 완전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니체의 전략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비판을 시간적으로 한정하는 것(verzeitlichen)이다. 이를 위해 니체는 사물 배후에 세계의 바깥에서 몸에 선행하고 세계에 선행하며 모든 경우에서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인 비밀, 최초의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실제로 니체는 단편과 잠언의 형식으로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여러 곳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유지되어 온 세계의 단일성, 고정성, 불변성, 무제약적 실체, 본질, 의지의 자유 등을 거론하면서 형이상학은 인간의 기본적인 오류를 근본적인 진리인 것처럼 취급하는 학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니체는 여기서 현상과 본질, 육체와 영혼, 감각과 이성,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구상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청년기 니체가 특히 ?비극의 탄생?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이원론적 대립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면, 이 시기 니체는 이미 이원론적 세계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논리학처럼 엄밀해 보이는 학문조차도 현실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전제, 예를 들어 여러 사물들의 동일성, 서로 다른 시점에 있는 같은 사물의 동일성 같은 전제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제는 학문과는 상반되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니체는 세계에는 외면과 내면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파악하며, 물자체와 현상의 관련성을 구분하는 것을 오류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은 유기체의 발전 과정 전체에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서로 유착되어 과거 전체의 축적된 보물로서 지금 우리에게 상속된 한 덩어리의 오류와 상상력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일관되게 불변적인 것, 본질적인 것,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다음과 같은 그의 입장에 바탕을 둔다. 만물은 생성해 왔다. 절대적 진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니체가 비판을 시간적으로 한정하는 것(verzeitlichen)은 비판을 역사화하는 것(Historisieren)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철학함을 의미하며 인간의 실존 조건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한 도덕적 풍토(Klima)에 따라 인간의 충동이 각기 다르게 나타났고, 또 아직도 나타날 수 있는 성장의 다양성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비판을 역사화하는 것은 불변적인 것 및 본질적인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가변적인 것 및 현상적인 것과 구분하는 이원론적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불변적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니체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는 이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니체의 이러한 견해는 몸과 정신의 분리를 부정하는 관점으로 나아가며, 이 관점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네 번째 연설 몸을 경멸하는 자에 대하여에서 큰 이성으로서의 몸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표현된다.

 

2. 큰 이성과 작은 이성의 관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4부를 1885년에 자비로 출간하고 난 다음 1886년에 ?선악의 저편?을 또 자비로 출판한다. 그리고 1886년 여름부터 1887년 초까지 니체는 자신의 이전 저작들을 새로 출판할 목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서문을 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 ?비극의 탄생?의 서문 자기비판을 위한 시도, ?아침놀??즐거운 학문?의 서문들이 이때 작성된다. 그러니까 이들 서문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하고 난 직후 쓴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 서문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제기된 핵심 구상들이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는 ?즐거운 학문?의 제2판 서문의 일부분을 인용해 보자.

 

나는 전체적으로 보아 철학은 단지 몸[肉體]에 대한 해석, 혹은 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져보았다. 개인들에 의한 것이건, 계급들(Stände)에 의한 것이건, 또는 전체 종족들에 의한 것이건 간에 지금까지 사상사를 이끌어온 최고의 가치평가의 배후에는 몸의 특성에 대한 오해가 숨겨져 있다. 형이상학의 저 모든 대담한 미친 짓, 특히 현존재의 가치에 대한 형이상학의 대답은 특정한 몸의 증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니체는 미친 짓(Tollheit)’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여 몸과 영혼을 분리하면서 몸을 멸시하고 영혼을 본질적인 것으로 중시해온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을 직접 공격하고 있다. “우리 철학자들에게는 일반 민중들처럼 영혼과 몸을 분리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개구리가 아니다. 차가운 내장을 지니고서 객관화하고 기록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고 우리가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모든 것이며, 또한 우리와 만나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서양 형이상학의 이원론적 관점을 공격하는 니체의 입장은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감각과 이성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입장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개진하였다.

이를 위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세 번째 연설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큰 이성으로서의 몸의 관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바탕을 구한다. 먼저 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두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가 세계 너머의 세계를 믿는 자들처럼 한때 피안과 신에 대한 망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르면 피안과 신에 대한 망상은 단숨에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데에서 오는 피로감, 더 이상 아무 것도 의욕하려 하지 않는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피로감 때문에 삶의 토대인 자아(Ich)의 몸과 대지가 부정된다. 그러나 가장 공정한(redlichst) 존재인 자아(Ich)는 몸에 대해 꾸며대고 몽상하고 부러진 날개로 퍼덕거릴 때에도 몸을 원한다. 이것이 자아(Ich)모순이다. 그러나 자아(Ich)는 더욱 공정해지면 공정해질수록 몸과 대지를 더 찬양하고 경의를 표한다. 이와는 반대로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야말로 몸과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꾸며낸 자들이었다. 이들은 몸과 대지로부터 벗어났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가장 잘 믿는 것은 세계 너머의 세계와 구원의 핏방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몸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어지는 네 번째 연설에서 큰 이성으로서의 몸에 대해 직접 해명할 수 있게 된다. “자아(Ich)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몸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하나의 큰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하거나 사고를 할 때의 나 또는 자아는 인식 및 사고의 주체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인식의 주체이며 사고의 주체인 ’[自我, Ich]는 나의 몸[肉體, Leib]으로 드러나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아(Ich)가 몸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몸은 영혼이 깃드는 껍질이며, 영혼의 도구라고 이해해 온 플라톤이나 기독교적 관점, 전통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서 니체는 큰 이성과 작은 이성을 구분한다. 이때 작은 이성이란 사유능력과 인식능력으로 드러나는 인간 정신을 의미할 것이다. 니체는 우리의 사유능력과 인식능력을 작은 이성이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사유능력과 인식능력이 몸이라는 큰 이성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다음과 같다.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그대 몸의 도구이며, 그대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여기서 니체는 작은 이성으로서의 정신이 몸의 도구라고 말하면서 몸을 영혼이나 정신의 도구로 파악해 온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점을 뒤집고 있다. 알다시피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생각하고 있는 나(denkendes Ich)’를 내가 존재하는 근거로 간주하였다. 이때 생각하는 나(Ich)는 다름 아닌 인식의 주체이자 나아가 존재자의 궁극적 근거로 상승한다. 이것이 니체의 말처럼 전통적 형이상학이 [自我, Ich]라고 말하면서 이 낱말에 자부심을 느끼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나는 자아(Ich)의 사고활동을 드러내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사고작용 또는 사고활동을 자아(Ich)의 존재근거로 포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성이란 몸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가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니체는 이를 뒤집어 나 또는 자아보다 더 위대한 것이 나[自我, Ich]의 몸이며 몸이라는 큰 이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더 위대한 것은 그대의 몸이며 그것의 큰 이성이다. 그것(몸이라는 큰 이성-필자)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한다.” 여기서 나[自我, Ich](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이해되는) ‘생각하는 자아(自我)’로서 인식의 주체이자 사유의 주체이며, 니체의 표현에 따르자면 정신이라고 칭해지는 작은 이성이다. 여기서 니체는 인식이나 사유가 몸의 한 기능일 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말을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행위하는 데에도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자아를 행위하는 주체로서 몸이라는 큰 이성을 내세운다. 앞에서 언급된 영혼은 몸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이와 연관된다. 이 말은 영혼이 몸의 한 기능, 즉 인식하고 사유하는 몸의 기능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자아를 주체로서 드러내는 심급으로서의 몸은 인식과 사유라는 정신적 기능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육체적 기능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르면 인식과 사유의 기능에 해당되는 의식(Bewußtsein)은 작은 이성이며 몸은 이 작은 이성과 몸이 지닌 다른 기능을 모두 포괄하는 큰 이성이 된다.

그런데 니체는 이어지는 말에서 몸(der Leib)(정관사가 아닌 부정관사로서) ‘하나의큰 이성(eine große Vernunft)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에 따르면 여러 개의 큰 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배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몸 이외에 또 다른 큰 이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음에서 그 이유를 밝혀보자. “몸은 하나의 큰 이성이다는 말은 영혼은 몸[肉體]에 속하는 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에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 몸(der Leib)은 영혼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그러한 몸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러한 몸에서 영혼은 몸을 벗어나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몸이란 개개인의 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몸이 하나의큰 이성이다(Der Leib ist eine große Vernunft)”는 말은 개개인 각자의 몸이 각자의 큰 이성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몸이 하나의큰 이성이다라는 이 말은 몸 이외에 또 다른 어떤 큰 이성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몸이 바로 큰 이성이며 각 개개인의 여러 큰 이성이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되었듯이 작은 이성은 영혼, 정신 등으로 표현되어 온 사유능력, 인식능력 등 몸에 속하는 의식작용을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작은 이성은 큰 이성으로서의 몸의 한 표출형태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자아(Ich)는 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니체의 표현은 자아(Ich)는 그 존재근거가 사유에 있다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입장을 부정하는 것에 해당한다. 오히려 자아는 몸이며 몸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자아는 정신이나 영혼 등으로 불리는 작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고, 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큰 이성으로서의 몸은 사유능력, 인식능력 등의 작은 이성과 감각 및 감성적 인식, 그리고 나아가 감정, 의지 등 소위 이성의 타자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큰 이성인가? 그리고 이러한 큰 이성에서 영혼, 정신 등이라 불린 작은 이성을 제외한 부분이 감각 및 감성적 인식, 그리고 나아가 감정, 의지 등 이성의 타자를 나타내는가? 이러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전적으로 몸이라고 밝힌 니체는 자아 외에 자기(Selbst)라는 개념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느끼는 능력으로서의 감각과 인식하는 능력으로서의 정신을 몸이 포괄하며, 이러한 감각과 정신은 자체 내에 어떠한 목표(Ende)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감각과 정신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식을 일차적으로 감각적 지각(sinnliche Wahrnehmung)에 기인한다고 파악하는 경험론적 전통과 그 반대로 인식의 문제에서 감각적 지각보다 합리적 사고(rationales Denken)에 더 우선권을 부여하는 합리론적 전통을 비판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이 말은 감각(적 지각)도 정신(이성적 사고)도 인식에서 궁극적인 준거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피퍼의 해설에 따르면 이것은 또한 감성과 오성의 자주적 능력을 부정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감성적 직관과 오성적 사유를 인간 인식능력의 두 상호 독립적 자주적 근간으로서 가정하는 칸트적 인식론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니체에 따르면 이 감각과 정신의 배후에는 자기(Selbst)가 있고, 따라서 감각과 정신은 이 자기(Selbst)의 도구이자 장난감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자체 내에 어떠한 목표(Ende)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그들이 모든 사물의 목표라고 설득하려 한다. 감각과 정신은 그렇게 허황되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감각과 정신의 뒤에는 자기(自己, Selbst)가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으로도 찾고, 정신의 귀로도 듣는다. 자기는 항상 듣고 찾는다. 자기는 비교하며, 강요하며, 정복하며, 파괴한다. 자기는 지배하며 또한 자아(自我, Ich)의 지배자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의 배후에는 강한 명령자(Gebieter), 미지의 현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자기이다. 그는 그대의 몸속에서 살며, 그는 그대의 몸이다. 그대의 몸속에는 그대의 최고의 지혜 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자아와 그 자아의 자랑스러운 도약을 비웃는다.

 

니체가 자아(Ich)와 자기(Selbst)의 관계를 말하는 것을 이 인용문을 토대로 밝혀보면, 자기는 (인식을 위해) 감각과 정신을 도구로 사용하며 따라서 감각과 정신의 지배자이며, 나아가 자아(Ich)의 지배자이다. 이 자기가 자아가 생각하고 느끼도록 명령하는 심급(Instanz)이다. 그리고 이 자기는 자아의 몸이다. 그렇다면 자기와 자아, 그리고 몸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앞에서 나온 테제 자아는 전적으로 몸이며 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서의 자아와 (자기, Selbst)는 그대의 몸속에 살며 그는 그대의 몸이다라는 말 속에서 자기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2인칭으로 호칭하고 있는 그대(du)를 일인칭으로 바꾸어 써 보면, “자기(Selbst)는 나(Ich, 자아)의 몸속에 살며 나(Ich, 자아)의 몸이다로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란 자아와 다른 어떤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르하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니체가 말하는 자기는 총체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몸(Leib)의 표현이며, 또한 몸이 스스로를 통일된 단위로서 제시할 수 있는 전체 몸의 활동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자기란 각 개인이 영혼과 몸의 통일로서의 자아(Ich)를 드러내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말에 기초해서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자아와 그 자아의 자랑스러운 도약을 비웃는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말 속에서의 자아는 본래 자신을 몸과 영혼이 통일된 자아로서 각인하지 못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이해되는 자아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정신적 측면으로서 자아가 감각과 정신의 토대인 몸을 벗어나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지칭하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이것을 비판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을 큰 이성과 작은 이성의 관계로부터 말해 본다면, 작은 이성으로서의 정신은 큰 이성으로서의 몸을 벗어나서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큰 이성의 한 발현 양태일 뿐이다. 아울러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 이성이성의 타자라는 구분은 의미 있는 구분이 아니다.

3. 니체의 유물론과 그 실천적 의미

 

이렇듯 니체가 밝히는 자기(自己, Selbst)는 사고와 감정의 근원이자 몸과 영혼의 통일적 단위로서의 육체적 자아(自我, Ich)의 표현 형식이다. 반면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이해되는 자아(自我, Ich)는 몸[肉體]과 분리된 것처럼 나타나며 따라서 감각과 분리된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작은 이성으로서) 사유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정신이란 몸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창조하는 몸이 자신의 의지의 손으로서 삼기 위해 정신을 창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은 몸이라는 큰 이성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몸 철학적 관점은 유물론적 관점의 하나에 속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철학의 근본물음(Grundfrage)’에 따라 유물론과 관념론을 나누는 엥겔스의 견해에 비추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모든 철학의 중요한 근본물음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철학자들은 이 물음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양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자연에 대한 정신의 근원성을 승인한 사람들 그리고 이 세계는 예를 들어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의 경우 기독교에서보다 더욱 기이하고(verzwickt) 더욱 황당하다(unmöglich) 은 관념론 진영을 형성하였다.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다른 이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하였다.

 

이에 따라 예를 들어 말해보자면 헤겔의 철학은 관념론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존재에 대해 사유의 우선성을 말하고 자연에 대해 정신의 근원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연은 타재의 형식으로 있는 이념(die Idee in der Form des Andersseins)”이며, “절대적인 시초는 이념이며,”신적 이념자신으로부터 이 타자(자연-필자)를 끄집어낸다.” 다시 말해 헤겔은 정신 또는 사유가 자연 또는 존재보다 선차적이며, 나아가 자연 또는 존재가 정신 또는 사유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고 본다. 이 관점은 플라톤철학이나 기독교적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몸과 정신의 관계에서는 정신이 근원적이며 본질적이며 몸이 파생적이며 비본질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철학들은 철학의 근본물음이라는 틀에서 파악하면 관념론의 여러 유파에 속한다. 우리는 앞에서 니체가 철학자들의 특이성질(Idiosynkrasie)을 그들의 이집트주의라고 지적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것에 이어서 니체는 철학자들의 또 다른 특이성질을 지적하고 있다. 니체는 철학자들의 또 다른 위험한 특이성질이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을 혼동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하며, 나아가 철학자들은 가장 최후에 오는 것, 즉 최고의 개념, 다시 말해 가장 보편적인 개념, 가장 공허한 개념을 최초의 것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는 이들 철학자들에서 최후의 것, 가장 빈약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으로, 원인 그 자체로, 최고의 실재적 존재자(ens realissimum)로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니체가 비판하는 철학자들철학의 근본물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관념론 철학자들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니체는 몸이 근원적이며 몸으로부터 정신이 창조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니체의 입장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의 하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니체가 사물 배후에 세계의 바깥에서 몸에 선행하고 세계에 선행하며 모든 경우에서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인 비밀, 최초의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 나아가 현상과 본질, 육체와 영혼, 감각과 이성,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구상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입장은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명확하게 몸과 정신의 분리를 부정하는 관점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밝혔다. 니체는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통찰을 네 가지 테제로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네 테제의 핵심은 제4테제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테제. 세계를 기독교식이든 (결국은 교활한 기독교인인) 칸트식이든 참된세계와 가상의 세계로 나누는 것은 단지 퇴폐를 암시하는 것 몰락하는 삶의 징후 에 불과하다.”

따라서 니체의 유물론은 이원론적 대립을 가정하여 내세, 변하지 않는 본질,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그런데 니체의 유물론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실천적 관점을 모두 포괄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달리 실천적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 유물론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피안 또는 물자체와 같은 궁극적인 것을 존재론적 관점 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관점, 또는 가치 평가적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유물론에 바탕을 두어 우리로 하여금 현세의 삶을 비방하고 왜소화하고 의심하여 현세와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내지 않을 것, 나아가 다른’, ‘더 나은삶이라는 환각(Phantasmagorie)을 가지고 삶에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을 가르친다. 니체는 삶을 부정하려는 의지, 감추어진 파괴본능, 삶에 대한 비난과 비방을 가르치는 도덕에 등을 돌리고 이와는 반대되는 반기독교적인 이론과 평가를 고안한다. 그리고 반기독교인의 올바른 이름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니체의 유물론은 긍정의 유물론이며, 따라서 (슬로터다이크의 용어를 빌어, 그리고 그의 해설에 기대어)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니체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에 바탕을 두어, 몸으로서의 자기는 자아에게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 고통과 기쁨을 향유할 것을 명령한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초인[克服人]의 과제가 대지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대지란 우리가 몸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이 현실세계와 다름없다. 그리고 대지는 초감각적인 세계의 하늘이 폐지되고 난 다음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름이다. 니체에 따르자면 몸으로서의 자아(Ich)가 큰 이성의 의미에서 선()을 요구하는데, 이 요구는 다름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감각, 즉 고통과 쾌락이 혼합된 것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하는 최상의 덕은 창조적인 덕이다. 여기서 창조적인 덕이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덕을 말한다. 또 새로운 가치란 피안과 내세를 던지고 난 다음 현세에서 우리가 만들어내어야 하는, 현실을 긍정하는 가치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몸과 정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몸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유물론은 그의 몸철학에 바탕을 둔다. 그리하여 니체는 몸을 경멸하는 자에 대하여라는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에서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을 다음과 같은 테제로 마감하고 있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는 일더 이상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초인[克服人]에 이르는 다리가 아니다.” 이렇게 현실 긍정의 새로운 가치를 가르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은 초감각적인 것이 제거된 현실세계로서의 대지에 뿌리내리고자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렇게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몸을 벗어나 이루어질 수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대지의 존재로서 자신의 실존(existence)의 높이와 심연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자아를 포함하는 자기 극복의 고결한 이상으로서 제시되며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는 자로서의 초인[克服人]에 이르는 다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은 몸을 경멸할 수가 없다. 따라서 니체의 유물론은 고통과 기쁨이 혼합된 이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대지와 몸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실천적 유물론이라 할 수 있겠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네 번째 연설 몸을 경멸하는 자에 대하여(“Von dem Verächtern des Leibes”)에서 전개된 큰 이성으로서의 몸에 대한 니체의 진술을 통해 니체가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과 이성에 대해 어떠한 비판을 가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니체는 감각과 이성을 대립시켜 감각은 우리에게 대상의 참된 모습을 속이며 오로지 이성만이 대상의 불변적인 본질 또는 참된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오랜 전통에 반기를 든다. 니체는 현상과 본질, 육체와 영혼, 감각과 이성,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구상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몸이라는 큰 이성또는 큰 이성으로서의 몸이라는 구상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표현한다. 니체는 작은 이성큰 이성을 구분하여, 인식과 사유의 기능에 해당되는 의식(Bewußtsein)은 작은 이성이며 몸은 이 작은 이성과 몸이 지닌 다른 기능을 모두 포괄하는 큰 이성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니체의 관점에 따르면 몸이 스스로를 통일된 단위로서 제시할 수 있는 전체 몸의 활동적인 형태가 자기(Selbst)이다. 이로부터 자신을 몸과 영혼이 통일된 자아로서 각인하지 못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점을 비판한다. 이에 따르자면 작은 이성으로서 정신은 큰 이성으로서의 몸을 벗어나서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큰 이성의 한 발현 양태일 뿐이다. 그리고 정신이 몸이라는 큰 이성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그의 입장은 철학의 근본물음이라는 틀에서 파악해 보면, 유물론의 한 갈래에 포함된다. 니체의 유물론은 이원론적 대립을 가정하여 내세, 변하지 않는 본질,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을 부정하며, 우리로 하여금 디오니소스의 가르침에 따라 현세의 삶을 긍정하는 것을 알려주는 실천적 유물론이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필자는 니체의 유물론은 긍정의 유물론이며,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이라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유물론은 고통과 기쁨이 혼합된 이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대지와 몸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실천적 유물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실천적 유물론은 내세에서 받을 보상을 위해 그리고 내세에서 위로받기 위해 현실의 삶을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것, 그리고 현실의 삶에서 겪는 고통을 묵종하거나 묵인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현실의 삶 그 자체를 향유하기를 가르친다. 그 말은 니체가 1886년에 쓴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스스로 인용한 차라투스트라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웃는 자의 이 왕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내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대들 더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워라 웃음을

 

약어목록

 

Enz. II: Enzyklopädie II, Die Naturphilosophie

FW: Die fröhliche Wissenschaft

GD: Götzen-Dämmerung

GT: Die Geburt der Tragödie

GMS: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KrV: Kritik der reinen Vernunft

KpV: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KSA: Friedrich Nietzsche: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änden

MA: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Z: Also sprach Zarathustra

 

 

 

 

 

 

 

II. 포스트모더니즘: 숭고와 시뮬라크르

 

1.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비재현주의

 

형식주의 모더니즘과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포괄하는 고전적 모더니즘에 속하는 전통을 혁신적으로 변화, 발전시키고 그 가능성이 소진될 때까지 지속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모더니즘을 후기 모더니즘(late modernism)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이 후기 모더니즘의 흐름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들어와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고,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지칭하는 명칭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하나로 통일할 수 없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도 확실히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시기적으로 어떤 것의 뒤, 이후라는 의미를 지니며, 내용적으로 벗어나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시기적으로 모더니즘 이후의 어떤 사조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용적으로 모더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사조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예술 및 사상의 흐름이 통용된 지도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앞서 언급된 이글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언을 선언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론가가 있음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이론이며, 나아가 단순히 미적 감수성에 그치지 않고 신념, 태도, 철학, 사회 현상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와 그것의 다양한 현상 형태 및 사상 이론적 토대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한 정리가 힘들 정도로 실로 많은 저작과 개론서들이 나와 있으며 또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와 그것의 현상 형태에 대한 고전적인 기술은 이합 합산의 글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견해일 것이다. 이합 합산은 60년대 말, 70년대 미국의 예술 평론 논쟁을 거치면서 ?포스트 모던적 전환?이라는 자신의 책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 1939년생)?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에서 1972715일 오후 332,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공공주택 프루잇-아이고(Pruitt-Igoe)가 폭파된 날을 모던 건축이 죽고 포스트모던 건축이 시작된 날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젠크스는 모던 건축이 엘리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균일하고 중성적인 국제적 양식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이중 코드화에 바탕을 둔 다의적이고 복수적 기호 체계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철학, 사회과학 이론에 의해 이론적 바탕을 구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준 사람들이 리오타르,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이와 연관하여 광의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 문학과 예술을 포함하는 문화(협의의 포스트모더니즘), 2) 철학과 사상을 포함하는 인문과학(포스트구조주의), 3)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을 포함하는 사회 이론(포스트포드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이 그것이다.

먼저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한 배경은 서구적 진보와 발전 신념의 붕괴,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좌표상실, 문화 무감각주의, 예술창작에서 소재와 주제의 빈곤, 기법과 기교의 곤궁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이합 합산에 따르자면 불확정성, 단편화, 탈정전화(Decanonization), 주체의 상실(Self-less-ness) 및 깊이의 상실(Depth-less-ness), 재현불가능성, 아이러니(irony), 이종교배(Hybridization), 카니발화, 퍼포먼스 및 참여, 구성주의[constructionism, 구축성], 내재성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 핫산은 불확정성과 내재성을 포스트모던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불확정내재성(indetermane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핫산의 견해는 라캉, 데리다, 푸코, 들뢰즈, 바르트, 혹은 크리스테바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의 입장에 근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년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상업적인 문화 대중주의, 고도기술 의존성, 표피성, 탈전체주의, 탈중심주의, 주체의 상실, 패로디, 혼성모방(pastiche), 장르해체 등으로 들고 있다. 또한 상호텍스트성, 자기 반영성과 메타픽션도 덧붙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실존적 위기의식, 소외, 고립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계승하고 있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실험되던 형식적 급진성과 전위적 실험성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 모더니즘에서 등장하는 급진성, 전위적 실험성을 더 과격하게 극단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달리 탈중심적이며, 유기적 구성을 거부하며, 임의성과 유희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대체하는 것이며 모더니즘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기부터, 20세기의 후반부를 거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서양미학의 주된 흐름은 이렇게 모더니즘 예술과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들과 그들의 핵심 이론, 예를 들어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주의 및 범텍스트주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반총체성과 범권력주의,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거대서사 비판과 소서사이론,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물라크르는 모더니즘 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읽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제시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의 방법론에 원천적 토대를 제공해 준 것은 무엇보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구조주의 언어이론이다.

소쉬르는 전통적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관점과 달리 언어는 언어 외적인 요소, 즉 언어 바깥의 실재 사물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언어는 그 자체에 의해 설명되는 자족적인 기호의 체계일 뿐이다. 그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의미하는 것, signifiant)과 기의(의미되는 것, signifié)의 결합인데, 이때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며, 따라서 규약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기표의 의미는 그 기표가 가리키는 실재 사물 자체의 본질적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와 갖는 차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분필을 분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필이라고 지칭되는 사물이 가진 그 내부의 본질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물을 지칭하는 가능한 여러 기표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이 기표가 그 대상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약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사회적 협약에 따른 것으로서 규약적이며 임의적이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방법론을 제공한다.

한편 데리다는 소쉬르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특정 사회마다 임의적이지만 어느 특정 사회에서 의미 전달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그 사회 내에서는 고정된다고 파악하는 것까지 부정한다. 예컨대 우리가 사전에서 분필의 기의를 찾는다면, 칠판에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하는 필기구라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분필의 기의가 궁극적으로 다 드러난 것이 아니다. 이 기의 속에 칠판, 글씨, 필기구, , 사용이라는 다른 기표들이 있고, 따라서 이 분필이라는 기표의 기의를 확정하기 위해서 또 다시 이 기표들의 기의를 찾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면 어떤 기표의 최종적 기의는 확정되지 못하고 계속 지연(遲延)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차연(différance, 差異+遲延) 개념에 의해 고정된 실체, 확실히 규정된 것을 추구하는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을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어떤 사물 또는 존재의 고정된 본질과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부정하는 범텍스트주의로 나타난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다양한 현상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불변의 동일성, 어떤 사물들의 불변적 본질, 고정된 실체 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관점주의적 봄(perspektives Sehen), 단지 관점주의적 인식이라고 파악하는 니체의 관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화적 맥락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해석하는 세계는 단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니체는 우리의 해석을 벗어나는 어떤 단일한 물리적 실재도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으며, 따라서 언어 속에서 작용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믿는다. 이것은 바로 데리다의 범텍스트주의로 이어진다. 그의 말대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텍스트 속에서 그 상호관계에 따라 의미를 획득할 뿐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미학 및 예술작품 해석으로 옮겨보면 어떤 그림이 그 그림 바깥의 어떤 실재를 지시하고 있다는 지시-참조관계에 기초한, 모더니즘의 한 신념을 부정한다. 이것은 또한 당연히 모더니즘 이전까지 통용되는 재현의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술작품이 특정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본질을 재현한다는 하이데거의 관점도 뛰어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작품이 하나의 올바른 해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용, 해석에 열려 있다는 관점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푸코는 어떤 형태의 전지구적 이론화, 다시 말해 총체성의 관점을 억압적인 것이라 보고 총체성을 거부한다. 따라서 푸코는 니체의 영향 속에서 근원적 법칙이나 숨겨진 의지 등에 의해 역사의 전개를 설명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이며 포괄적인 역사이론을 거부한다. 계보학적 관점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면 사물들 배후에는 언제나 동일시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나며, 무시간적이며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19683월에 푸코는 헤겔에서 사르트르에 이르는 총체화(Totalization) 작업을 낡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참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범권력주의를 내세운다. 그것에 따르면 권력이란 소유물이나 역량이 아니며, 경제에 종속되거나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권력관계는 군주나 국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권력은 한 개인이나 계급의 소유물로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권력은 단순히 획득하거나 탈취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란 중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복잡한 관계 망 속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저항의 핵심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저항을 이끄는 단일계급이나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양한 형태의 저항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푸코의 사회철학적 입장도 미학적 관점에서 포착해보면 재현의 원리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푸코는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회화를 분석하면서 그림과 사물과의 지시-참조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재현의 원리의 파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마그리트는 이 지점에서 대상 사물과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 그림이 맺고 있는 연관을 끊어버린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말해보자.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린 그림, 즉 시뮬라크르와 파이프라는 물건, 즉 원본이 맺고 있는 지시-참조관계를 거부한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파이프 그림을 재현의 원리에 따라 아주 잘 그려놓고, 그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을 집어넣어 그림이 대상 사물을 재현하고 있다는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회화사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전통적 재현의 원리를 부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현대 예술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인가의 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다시 말해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대상을 재현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초현실주의 회화의 일파로 분류할 수 있는 마그리트는 재현의 원리를 통해 재현을 파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마그리트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을 작품 안에 배치하는 방식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 前置)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낯익은 물체를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음으로써 꿈속에서나 가능한 화면을 구성한다. 그런데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그 어떤 그림보다도 정확한 재현의 원리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마그리트 그림 속에 나타나는 세부적인 부분들은 현실의 사물을 아주 정확히 재현의 원리에 따라 모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재현의 원리를 통해 재현을 파괴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그림 바깥의 어떤 실재를 직접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마그리트의 <행복한 손>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이 그림에는 제목이 지시하는 재현 대상, 즉 손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랜드 피아노와 그 피아노를 둘러싸고 있는 아주 큰 반지가 있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우리가 이라는 기표를 접할 때, 그것의 기의가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손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원본으로서의 실제 손과 그것의 모사인 그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 대신 손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반지를 재현하고, 또 그 손을 통해 연결되는 피아노를 재현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가 실제 사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끊어버리면 이미지는 이미지끼리 상호 연결되면서 무한한 활주 놀이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마그리트는 유사(類似, resemblance)에서 상사(相似, 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상사를 유사와 반대로 작동하게 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인다. 그림이 어떤 사물을 재현하고자 할 때 그 그림은 그 사물을 닮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상사는 되풀이에 쓰인다. 애초에 상사는 유사에 이어서 계속 진행되는 비슷한 것의 되풀이로 나타난다. 그런데 유사에서 지시-참조 관계가 끊어지면 상사에서는 애초부터 지시-참조 관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상사는 단지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관관계로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상사는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상사는 어떤 것도 확언하거나 재현하지 않으며 화폭의 구도 안에서 달리고 늘어나고 퍼지고 서로 응답하는 전이(轉移)의 놀이를 개시한다. 상사가 유사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놀이를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림, 즉 이미지가 모델의 재현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이미지는 모델과 닮기보다 다른 어떤 이미지를 더 닮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닮은 이미지들의 활주 놀이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마그리트는 낯선 이미지를 결합시키기도 하고, 사물의 크기를 바꾸기도 하고, 거짓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렇게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해석하면서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데리다와 푸코는 고전적 모더니즘(또는 그 이전)과 후기 모더니즘의 여러 작품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를 읽어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 주고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 속의 숭고와 시뮬라크르

 

이와 같이 어떤 대상과 그것을 재현한 그림 사이의 지시-참조 관계가 단절되면, 다른 말로 하여 재현의 원리가 파괴된다면 이제 회화는 전통적인 의 범주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재현의 포기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범주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리오타르다. 앞에서 예를 든 표현 및 초현실주의는 재현의 포기와 연결되지만 그러나 여전히 재현의 원리 자체를 내집어던진 것은 아니다. 마그리트는 재현을 통해 재현의 원리를 파괴하며, 표현주의는 재현의 원리를 통해 내면의 격렬한 감정,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방식이든 재현의 포기는 그것이 반구상을 통해서든 형상의 왜곡을 통해서든 부분적으로 구상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레디메이드도 구상적 형태 자체를 벗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작품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뉴먼의 작품은 단순히 재현의 포기’, 또는 비재현주의라는 틀을 통해서 이해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범주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숭고의 개념이다.

칸트에서 숭고란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타난 바 있었다. 이때 숭고란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대할 때 나타나는 주관적 감정이다. 칸트에서 수학적 숭고란 단적으로 큰 것”, 다시 말해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는 큰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역학적 숭고란 자연의 위력이 너무 강해 그것이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표상될 때 나타난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재현의 포기로 나타나는 현대 예술을 설명하기 위한 범주로서 숭고를 도입한다. 이러한 숭고를 드러내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숭고의 간접적 묘사이다. 숭고가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는 큰 것이라면 캔버스는 유한한 크기를 가진다. 무한히 큰 것을 유한한 화폭에 옮기기 위해 낭만주의 화가들 또는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택한 방식은 자연을 크고 위력적으로, 인간을 작고 미약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숭고를 묘사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의 묘사를 아예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말이나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전통은 헬레니즘에서는 침묵을 숭고의 수사로 제시한 롱기누스, 헤브라이즘에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한 구약성서의 형상금지’(Bildverbot)의 계율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현의 원리에 충실하여 화폭에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하고자 했던 고전주의자와 달리 낭만주의자들은 장엄한 자연과 왜소한 인간을 대비하여 숭고를 묘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리오타르에게 숭고 미학의 단초를 제공한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이 숭고를 실천하는 방식은 화폭에서 모든 이미지를 지우는 것이다. 그의 캔버스에서는 인식될 수 있는 재현대상은 모두 사라지고, 형태와 색채는 최소한의 것으로 환원된다. 뉴먼의 미니멀리즘 미술은 이렇게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흔히 숭고는 쾌와 불쾌가 혼합된 모순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설명된다. 버크에게 숭고는 즐거운 공포”, 즉 생명을 박탈당할 위험에서 오는 공포와 그 위험이 사라질 때의 안도감에서 생기는 기쁨의 혼합감정이었다. 그리고 칸트에서도 숭고는 쾌와 불쾌의 모순적 감정에서 유래한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숭고에 관한 판단이다. 다시 말해 취미판단과 숭고에 관한 판단은 두 종류의 미적 판단(beiderlei Arten ästhetischer Urteile)”이다.

그런데 취미판단에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구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쾌에 의한다면 숭고의 감정은 구상력과 이성의 불일치에서 나타난다. 즉 무한히 큰 대상(또는 무한한 자연의 위력)과 마주칠 때 우리의 구상력은 머리에 그것의 상을 떠올리지 못한다. 이때 우리는 구상력의 좌절에서 오는 불쾌를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감성적 척도가 도달할 수 없는 큰 것을 내면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 칸트의 말을 그대로 빌면 감성의 모든 척도가 이성의 이념들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숭고의 감정이다. 따라서 숭고는 위대한 자연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을 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있는 인간의 이념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사막이나, , 피라미드 등과 같이 절대적으로 광대한 자연, 대양의 폭풍이나 분출하는 화산과 같이 절대적으로 강력한 현상들은 다른 모든 절대적인 것들과 마찬가지로 지각/감각적 직관을 통하지 않고 이성의 이념(Idee)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런 대상들 앞에서 재현능력, 즉 구상력은 그 관념과 일치하는 재현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재현의 실패로 인해 고통이, 즉 주체 내부에서 지각될 수 있는 것과 표상, 혹은 재현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이 고통은 쾌락을, 사실상 이중의 쾌락을 가져온다. 그 하나는 구상력의 무능력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데에서 오는 쾌락이다.” 따라서 숭고는 구상력과 이성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긴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정적인 미적 감정과는 반대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리오타르에 따르면 숭고의 감정은 칸트처럼 거대한 크기(수학적 숭고)나 큰 위력(역학적 숭고)을 가진 자연을 대면할 때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숭고의 감정은 사건성의 체험에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리오타르는 오히려 버크(Edmund Burke, 1729-1797)에 기댄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칸트는 숭고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위협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라는 버크의 논의를 제거해 버렸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미는 긍정적인 쾌락을 주지만, 이러한 만족보다 더 강력한 열정과 결합되어 있는 쾌락이 존재하며, 그것을 그는 고통이며 지연된 죽음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그러한 완전한 정신적인 열정을 버크의 용어를 빌려 공포(terror/Schrecken)라고 파악한다. 그런데 공포는 박탈과 연결되어 있다. 빛의 박탈은 어둠의 공포이며, 타자의 박탈은 고독의 공포이며, 언어의 박탈은 침묵의 공포이고, 대상의 박탈은 무의 공포이며, 생명의 박탈은 죽음의 공포이다. 공포감을 주는 것은 그것은 일어난다가 일어나지 않는 것, 일어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버크는 이 공포가 쾌락과 결합되고 숭고감정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발생시키는 위협이 지연되고, 저지되고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협 또는 위험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이러한 지연이 (긍정적인 만족에서 오는 쾌락이 아닌-괄호는 필자) 안도감에서 오는 쾌락을 가져다준다. 이것 역시 박탈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한 단계 멀어진 박탈이다. 영혼은 빛과 언어와 생명이 박탈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박탈당한다. 버크는 이러한 제2의 박탈에서 오는 쾌락을 긍정적인 쾌락과 구분하고 전자에 희열(delight)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따라서 숭고한 감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매우 크고 매우 강력한 대상은 영혼으로부터 <그것이 일어난다>를 박탈하려 위협하고 그 영혼을 경악감(더 저급한 정도의 긴장에서는 영혼은 경외, 경의, 존경에 머물러 있게 된다)으로 사로잡는다. 따라서 영혼은 멍한 상태가 되어 무력해지며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예술은 이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안도의 쾌락, 희열의 쾌락을 유발한다. 예술의 도움으로 영혼은 삶과 죽음 사이의 동요된 영역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 동요가 영혼의 건강이요 생명이다. 예술은 그 매개물이 무엇이건 간에 강력한 효과를 추구하라는 숭고미학의 압력하에서 단순히 미적이기만 한 모델의 모방을 포기하고 경이롭고, 이상하며, 충격적인 조합을 생산해낼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충격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이며, 지연된 박탈의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따라서 예술은 더 이상 모델 앞에서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술은 재현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려 한다. 예술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다.” 이제 예술은 재현불가능한 것을 묘사하고자 한다. 따라서 리오타르의 말처럼 숭고는 예술 자체에 있지 않고 예술에 대한 관조에 있게 되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에 대한 증거를 뉴먼의 작업에서 찾는다. 현대예술에서 숭고는 공포(버크)와 절대적으로 크거나 위력이 큰 것(칸트)을 넘어 놀라움이나 경탄을 일으키는 것으로 바뀐다. 이제 현대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과거의 예술은 관습적 언어가 있었기에 그 익숙한 코드에 따라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에는 이렇다 할 해석의 코드가 없다. 이미 존재하는 코드(양식)에 따라 메시지(작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가지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작품과 맞닥뜨리는 관객은 작품 앞에서 번번이 충격을 받게 된다. ‘쇼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적인 미적 범주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리오타르의 숭고론을 통해 현대예술이 재현을 포기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리오타르의 숭고론은 비구상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논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숭고라는 범주를 구상, 나아가 설치미술에까지 적용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면 우리는 현대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주 또는 원리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즉 가상실재를 지칭한다.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이미지이며 또한 실재를 흉내내는 파생실재[hyper-reality, 極實在]이다. 그리고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상품을 살 때 상품의 사용가치, 즉 유용성 때문에 상품을 사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자는 상품이 가진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 그 상품을 산다. 상품은 더 이상 그 사용가치로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과 가지고 있는 차이, 더 구체적으로는 계층적, 신분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 또는 기호로서 소비된다. 이렇게 현대소비자본주의 사회는 상징의 교환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예술 역시 이 교환의 체계에 예속되어 있다. 오늘날 예술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기호로서 소비된다.

나아가 현대 사회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위치가 전도되어 시뮬라크르가 더 실재인양 행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사실성의 거짓 재현이 아니라, 실재가 더 이상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전략이다. 그런데 시뮬라크르는 세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각각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 첫째, 전근대(premodern)에서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는 실재의 사물을 위한 인공적 장소생산자이다. 이때 대상들과 상황의 독특함은 그것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복제될 수 없는 실제적 의미를 가지게 한다. 둘째, 산업혁명의 근대성(modernity)과의 연관 속에서 어떤 사물을 대량으로 복제하고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와 실재의 구분은 사라지고 그 사물은 상품이 된다. 여기서 실재를 모방할 수 있는 상품의 능력은 개인이 기능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어떤 유용성을 소비하고자 할 때 원본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셋째 탈근대(postmodernity)에서 시뮬라크르들은 원본을 능가하여 실재와 그 재현 사이의 구분은 사라진다. 이제 시뮬라크르들만 존재하며 원본성은 완전히 의미 없는 개념이 되어 버린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소비자본주의사회는 실재를 없애버리는 완벽한 시뮬라시옹의 세계다. 시뮬라시옹은 더 이상 영토 그리고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산출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실재와 가상, 모델과 재현된 것, 원본과 복제, 기표와 기의의 차이는 사라지고, 두 대립항들이 하나로 결합된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출현한다.

우리는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을 통해 현대예술, 특히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가능성을 손에 쥘 수 있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작품들, 예를 들어 척 클로스(Chuck Close, 1940년생)의 회화나 듀안 핸슨(Duane Hanson, 19251996)의 조각 또는 설치작품은 실재를 모방하면서도 더욱 실재적인 것처럼 드러나며, 뒤샹과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산업적으로 대량복제된 산물들을 예술에 끌어들임으로써 예술마저 시뮬라크르의 영역에 끌어들인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원본-시뮬라크르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시뮬라크르에다 실재의 옷을 입힌다.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여러 가지 색의 실크스크린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반복된 이미지가 복제되면서 작품은 시뮬라크르의 계열로서 재배치된다.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실재를 지시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만을 지시한다.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전략은 데리다의 차연의 존재론이나 (이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을 더 넘어 나아간다. 데리다가 텍스트나 그림에 대한 궁극적 해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무한한 해석 가능성에 열어 놓는 것은 차이의 놀이가 지니는 창조성 또는 생산적 효과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차이의 생산이 극한에 도달하면 모든 차이가 지워지고, 이 세계는 동일자의 무한 증식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의미의 불확정성이 극단에 도달하면 모든 의미가 사라진다 할 것이다. 이제 이 세계에서는 실재와 연관이 사라진 시뮬라크르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모든 의미가 상실되며, 그리하여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어떤 저항도 무의미하며, 가장 적합한 저항은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드리야르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 및 포스트구조주의는 침로를 잃어간다. 이제 더 나은 사회, 더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덧붙임글. 매체이론과 문화이론

 

1.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주요의제

 

'계몽'의 개념

계몽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

비판이론 1세대와 도구적 이성 비판

④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

 

1. 계몽(啓蒙, Enlightenment, Aufklärung)의 개념

 

(1) 계몽의 사전적 정의: '계몽'의 말뜻은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면 계몽 또는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주로 교회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절대적인 권위로부터 벗어나 경험 및 이성에 근거하여 세계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지적 운동을 말한다.

(2) 계몽주의 및 계몽철학의 근본 신념: 자율적인 인간 이성을 인식의 방법 및 인식 내용의 참 또는 거짓, 그리고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 행위의 규범을 결정하는 궁극적 심급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3) 계몽의 도구로서의 비판: 여기서 계몽철학은 영국의 경험론(베이컨, 로크, 홉스, )과 대륙의 합리론(데카르트, 말브랑슈, 볼테르 및 백과전서학파,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에 그 뿌리를 두며,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비판 철학은 내용적으로 계몽철학의 정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계몽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미성숙함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에 바탕을 두어 칸트는 계몽의 구호자신의 오성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칸트에 따르면 이 계몽에는 자유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으며, 자유라고 불릴만한 모든 것 가운데에서 가장 무해한 것은 모든 곳에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2. 계몽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

 

(4) 계몽적 이성: 이러한 관점에서 계몽적 이성은 전승된 권위와 전통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성은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체계에 대한 비판의 과정으로부터 생긴,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및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로부터 칸트를 거쳐 헤겔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근세철학에서 고찰되는 이성을 의미한다.

(5) 계몽의 기획: 이러한 의미에서 계몽의 기획(Program)역사적으로 보면 르네상스로 되돌아간다. 르네상스 시기의 인간들이 고수했던 것은 중세적 전통과 권위에 저항하고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기 위한 토대로서의 고대 그리스 정신을 다시 포착할 수 있었던 이성적 사유능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에 기대어 말한다면 계몽의 정신은 미신, 종교적 세계관, 비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과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 자연관, 사회, 국가질서모든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이성의 법관 앞에서 정당화하거나 존재를 포기해야 했다”(엥겔스 ?반듀링론?). 우리는 이러한 이성을 계몽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6)도구적 이성: 그런데 이렇게 해방의 기능을 하던 계몽적 이성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계몽의 변증법?(1944년 초판, 1947, 1969)에서는 명시적으로 도구적 이성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비판?(1946)에서 도구적 이성이란 인간에 의해 인간적 자연(인간)과 인간 외적 자연(자연)을 지배하는 도구로 되어버린 이성을 말한다.

 

3. 비판이론 1세대와 도구적 이성 비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지닌 문제의식은 자유와 정의의 확대를 지향하는 현대(근대)적 이성의 기획에 바탕을 둔 현대사회가 왜 폭력과 억압이 만연한 사회로 전락하는가라는 물음에 바탕을 둔다. 비판이론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올바른 시대 진단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재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1) 마르크스는 경제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전복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비판이론의 견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몇 가지 근본적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첫째,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삶의 조건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임금인상, 복지향상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체제 내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될 것이라는 사실. 둘째, 자본주의가 경제 공황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셋째, 현실 사회주의가 관리되는 사회로 전락할 것이라는 사실. 넷째. 사회정의와 자유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이해로 인해 사회주의 사회도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로 추락했다는 것,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의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관리되는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 (2)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총체적 관리 체계의 야만성은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형식화되고 도구화된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되었다. (3) 도구적 이성은 인간에 의해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이성이다. 그리고 도구적 합리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율적(능률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계산적 (타산적) 합리성이다. (4) 도구적 이성은 정의, 평등, 자유, 행복, 관용 같은 이념들조차도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의미 없는 허구적 관념으로 치부한다. (5) 도구적 이성이 전면화한 세계에서는 어떠한 이성적 원칙도 정당화될 수 없다. (6) 어떤 원칙도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원칙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원칙이 될 수 있는 곳에서는 오직 유용성의 척도인 돈과 권력만이 가장 강력한 원칙이 된다. (7) 돈과 권력이 가장 강력한 원칙인 세계에서 이성은 현실의 지배 원칙을 비판할 힘을 상실하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나머지 현실긍정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8) 현대 사회에서는 억압적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비판적 이념과 원칙이 폐기되고,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이성조차 도구화되었다. 이성의 광기는 나치강제수용소에서부터 언뜻 무해한 듯 보이는 대중문화의 영향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는 집단적 광기로 드러난다. 이성은 인간을 통해 생산, 재생산되는 세계의 질병에 대해 반성해야만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다.

4.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

 

그런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을 역사적 계몽 시기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류 문명사의 전 과정으로 확대하여 포착한다. 이러한 점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는 명제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이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의 의미는 인간이 신화를 통해 세계를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그 속에 이미 인간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바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밝히는 계몽의 목표는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내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 왔다는 말 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계몽의 프로그램(綱領)은 세계의 탈주술화(탈마법화)이며, 여기서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붕괴시키려 한다.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의 의미는 인간이 계몽(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자연을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 자신을 다시 억압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하는 계몽의 역설은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방의 기능을 하던 계몽적 이성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이로 인해 야기된 계몽의 자기파괴, 이것이 현재 인류가 당면한 난관이다.

바로 여기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먼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자유가 계몽적 사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데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물음은 왜 인류는 참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지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들에 따르면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를 신장시켜 주고 나아가 인간의 해방을 주도하던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되어 버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뒤엉켜 들어간 구체적 역사형태나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은 단순히 도구적 이성의 비판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류 전체의 문명사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이 요청하는 것은 인류가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으려면 계몽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계몽의 자기반성이며 또한 이성의 자기비판이다.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읽어갈 수 있다. 이때 핵심 명제는 "계몽이 자신 속에 내재된 퇴행적 계기에 대한 반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계몽은 자기 자신의 (퇴행의) 운명을 확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우리는 어떻게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3. 계몽 개념 자체에 들어있는 퇴보의 싹이란 무엇일까?

4.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비판이론의 도구적 이성비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계몽의 변증법?

 

주요의제

 

소외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소외론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

 

?계몽의 변증법?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 중 하나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소외 이론, 루카치(Georg Lukács, 1885-1971)의 사물화 이론이다. 따라서 첫 번째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및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사상적으로 중요한 한 토대를 제공하는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과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소외란 무엇인가 - 소외개념의 간략한 사적 고찰

 

원래 소외’(Entfremdung)라는 말의 가장 일상적인 의미는 인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서로 소원(疎遠)하게 됨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전체적인 사회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가 사물들 또는 물건들의 관계로 나타나고 인간들이 물질적 정신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 낸 생산물, 사회관계, 제도 또는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힘으로서 인간들에 대립할 때, 이 관계 및 전체 상황을 소외라 한다.

소외라는 개념은 영국의 고전정치경제학에서는 양도(讓渡)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양도란 상품교환관계에서 자신의 생산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이며, 어떤 대상은 양도 과정을 거치면 그것을 생산한 자로부터 소원해진다, 타인의 것이 된다. 한편 18세기의 사회계약론에서 소외는 개인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유를, 사회계약을 통해 군주나 대표에게 위탁함(양도)을 의미하였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소외개념을 좀 더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소외를 (인간의) 정신이 그 본질적 존재에 도달하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정신이 자신의 외적인 것에 양도되는 (또는 정신이 스스로를 외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묘사한다. 이때 소외란 정신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대상화된 단계를 나타낸다. 여기서 헤겔은 모든 것은 소외과정에 의해 자신의 올바른 위치로 복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헤겔에서 외화와 소외는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소외란 절대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라도 반드시 거쳐야 될 긍정적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포이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는 이러한 헤겔의 관념론적 구상을 비판하고 소외개념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포이어바하에 따르면 인간은 유()적인 존재로서 그 자신이 신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개별자로서 인간은 유한하지만 유적 존재, 쉽게 말해 인류 전체로서 포착되는 집합적 존재로서 인간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본질을 대상화하여 숭배하는 인간의 이중적 자기 소외의 발현형태이다.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창조물이 자신에게 낯선 객관적 힘으로서 자신에게 대립하여 나타남으로써 스스로가 자신의 사상적 산물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낯선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여기에서 포이어바하는 종교를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산물로 파악하면서, 종교가 필요하지 않는 참된 인간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을 그의 종교비판의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포이어바하는 종교적 소외의 사회적·물질적 근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2. 마르크스의 소외론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저작은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 본질의 왜곡된 발현이라고 보는 점에서 헤겔과 다르며, 나아가 현실적인 소외 현상의 사회적 원인을 밝히는 점에서 포이어바하와 다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단순히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지 않고, 인간의 내면적인 고유한 힘을 실현하는 생명활동으로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노동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 대항하는 노동이며,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노동은 거미나 꿀벌의 작업과는 달리 노동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노동의 결과를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난 다음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이 과정은 인간의 창조적 본성이 발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은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표현을 위한 목적 그 자체이다. 노동은 인간이 유()로서 자신의 보편적 본질을 발현하고 자신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기 창조 행위인 노동은 사적 소유와 노동의 분화과정을 통해 소외되기 시작한다. 사적 소유와 노동의 분화과정을 통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며, 노동생산물은 생산자로부터 소원해진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의 소외과정이 가장 격렬하게 드러나는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 내의 소외 과정은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고 본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첫째, 노동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생산사회이며, 거기에서는 노동자의 노동력도 자본을 매개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을 대가로 자본가에게 양도하며, 자본가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기술이나 능력을 사용하여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하여 상품이 된 생산물은 그것을 만들어 낸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며, 노동자는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생산물은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위력으로서 노동자에게 대립하고 노동자를 지배한다.

둘째, 노동(활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이미 노동이 자기실현이라는 본래적인 목적이 아니라 노동 이외의 다른 욕구를 위한 수단, 즉 생계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 노동자는 노동과정에서 자신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하며, 육체적·정신적 힘을 발전시키기보다는 황폐화시키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 속에서 고통을 느끼며 휴식을 취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셋째,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개별적 존재인 동시에 유적 존재이다. 인간 개개인의 발전은 전체로서 인간 유의 발전이며, 유적 본질의 실현은 개체의 실현이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에서는 노동이 육체적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므로 인간의 유적인 삶은 붕괴된다.

넷째,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되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형태의 소외는 단순히 개개인의 노동자나 노동자 계급의 소외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유적 생활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할 때, 그 과정에서는 소외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들이 인간 유()의 일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구성원인 다른 사람들도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 인간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소외의 형태들은 화폐의 물신성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사유재산제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고 있는 힘을 갖고자 한다. 그 힘은 돈에서 나온다. 돈은 모든 것을 사 들일 수 있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욕구는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돈에 대한 욕구로 집중되며, 돈은 이제 세속적인 신이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욕망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는 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격렬하게 나타난다.

 

3.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

 

루카치의 사물화이론은 그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는 혁명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각국에서 이어진 혁명운동은 모두 실패하고, 대체로 유럽의 혁명운동은 이 무렵을 고비로 퇴조해 간다. 여기서 루카치의 문제의식은 혁명의 사회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었는데도 혁명이 지연되고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구해 보는 것이었다. 루카치는 그 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위기보다 뒤쳐져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먼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루카치는 상품 구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노동력까지 포괄함으로써 사회적 존재 전체의 보편적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카치는 상품구조의 본질을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 또는 물건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서 구하고 이것을 사물화라고 칭한다. 이것은 ?자본론?의 상품물신성에 관한 장에서 전거를 구한 것이다. 루카치는 사물화의 기본 구조를 인간 특유의 활동인 노동이 객체적인 어떤 것,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인간에게 낯선,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것으로 된다는 데서 찾는다. 이런 점에서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은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첫째 객체적 측면에서는 기성의 상품들 및 사물들의 관계의 세계가 정립되어 이 세계의 법칙이 자기 근거를 갖고 스스로 작동한다. 둘째 주체적인 측면에서는 인간의 활동(노동)은 인간에게 대립되게끔 객체화, 상품화된다. 인간의 주체적 활동과 이 활동의 산물이 인간에게 대립되어 객체화하고 일종의 제2의 자연이 되어, 주체였던 인간이 객체에 종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루카치는 이러한 사물화의 발생을 노동과정의 합리화를 통해 설명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특유의 조직 원리에 대한 막스 베버의 사회학적 분석을 마르크스의 분석과 결합시킨 것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을 지배하는 원리는 계산, 계산 가능성에 바탕을 두는 합리화의 원리이다. 합리화는 주체와 객체에 일정한 변화를 일으킨다. 객체적 측면에서는 노동과정이 추상적 합리적 부분작업으로 분해되며, 따라서 전체로서의 생산물에 대해 노동자가 맺는 관계는 해체되고 생산물 자체의 질적, 유기적 통일성과의 단절이 일어난다. 생산의 객체가 해체되는 것은 주체적 측면에서는 곧 주체가 해체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노동자의 인간적, 개성적, 질적 속성들은 배제되며, 인간은 노동과정의 본래적 담지자가 되지 못하고 기계화된 부분으로서 기계적 체계에 끼워 맞춰질 뿐이다. 이 원리는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법률, 국가, 관료제 등을 지배하는 원리가 됨으로써 삶의 모든 형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의식의 속성이나 능력들마저도 상품화되어 사물로서 현상하게 된다.

그리고 노동과정의 합리화와 기계화는 노동자의 작업을 활동성이 없는 무기력한 것,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contemplation, 관조)으로 만들며 이에 따라 주체의 태도도 관조적인 것이 된다. 노동자는 기성의 법칙들에 개입하지 못하고 자연 법칙적인 진행과정을 바라보고 수동적으로 이에 적응할 따름이며, 자본가 역시 사물화에 지배되므로 자본의 법칙적 운동 및 위기에 대해서 관조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사물화는 관조적인 주체의 태도와 함께 사물화된 의식 구조를 산출한다. 이러한 의식에서는 주체와 객체는 분열되고 각각은 파편화된 채 파악된다. 즉 여기에서는 매개와 총체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사물화된 의식구조는 어떤 현상의 본질과 원인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물화된 의식을 통해서는 사회적 위기 또는 문제를 그 본질에서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은 바로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에 바탕을 두며, 나아가 그들의 '계몽' 비판은 도구적 이성 비판을 넘어 인류의 문명사 전 과정으로 확대된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하자.

 

생각해 볼 문제

1. 종교가 인간의 이중적 자기소외의 발현형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노동이 인간의 자기 창조 행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3. 돈의 물신화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4. 우리는 어떻게 사물화된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

 

 

 

 

 

 

 

 

 

 

 

 

 

 

 

3.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주요의제

 

아도르노의 계몽비판과 그 철학적 토대

오딧세우스, 부르주아적 개인의 원형

개념적 사고 - 억압과 지배의 싹

 

1.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과 그 철학적 토대

 

첫 번째 글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계몽의 변증법?을 읽어갈 때 가장 핵심적 명제는 "계몽이 자신 속에 내재된 퇴행적 계기에 대한 반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계몽은 자기 자신의 (퇴행의) 운명을 확증할 수밖에 없다"라는 명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카거(R. Kager)?계몽의 변증법?주체성의 고고학이라고 지적한다. 이 고고학을 통해 우리는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의 주체성이 형성되는 과정, 또 인간 주체가 인간 행위의 객체인 자연을 억압하고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을 억압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계몽의 변증법?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는 두 번째 글에서 살펴 본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는 상품 교환이 사물화의 기원이지만 아도르노는 그것이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도구적 이성의 역사적 전개형태일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표는 베버가 그리고 있는 사회적 합리화 과정, 마르크스와 루카치가 밝히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 현상, 지배와 사물화를 이론적 바탕으로 취하면서 이보다 더 나아가 계몽된 이성이 실제로는 폭력과 지배의 화신이라는 것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었다.

계몽과 그것을 주도하던 이성이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총체적 소외 및 사물화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 이것이 ?계몽의 변증법?의 근본 테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계몽된 이성은 더 이상 이전의 미신, 억압 등등으로부터 해방의 능력을 가진 수단이 아니다. 또한 계몽의 결과로 도달된 사회적 삶의 끊임없는 합리화, 관료화, 과학화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경제, 근대 관료주의 및 기술적 진보는 전통과 생태적 환경의 대규모적 파괴로 점철되고 있다. 이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취하고 있는 '계몽'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이를 위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주체적 의식이 발전되는 것을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으로부터 개념적 사고로 이어지는 발전사의 과정에서 포착하고 있다. 인간은 주체적 의식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는 객체 또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포착하지 못하며, 대상과 비슷해지거나 동일해지고자 하는 행동양식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우리에게 찌꺼기로 남아있는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은 무서운 것 또는 위협적인 것에 맞닥뜨렸을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또는 몸이 굳어지는 것 등이다. 이것은 과거 인류가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위협적 대상을 만나 죽은 체하는 행동양식에서 유래한다. “인간이 자연처럼 되고자 하는 곳에서 인간은 자연과 반대로 경직된다. 무섭게 보임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의태(擬態)의 한 형태이다. 인간에서 그와 같은 경직반응은 태고적인 자기 보존의 도식이다. 생명은 죽음에 동화됨으로써 존속을 위한 공물(供物)을 치른다.”

 

2. 오딧세우스, 부르주아적 개인의 원형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무엇보다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신화, 지배, 합리적 노동이 뒤섞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오딧세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신화와 계몽, 미메시스와 합리성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호머의 신화는 이전의 신화를 계몽적 요소, 즉 정돈하는 이성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오딧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랑 속에서 위험에 빠지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에 대한 묘사이다. 오딧세우스가 이러한 방랑 도중에 마주치는 자연의 위험 및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하는 책략이 바로 의식적으로 취해진 미메시스이다. 여기서 오딧세우스는 부르주아적(시민적) 개인의 원형이다. 오딧세우스는 확고한 자기의식을 통해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희생의식을 주재하는 사제이다. 이때 자연을 지배하는 정신은 자연과 겨루지만 자연의 우월성을 반복해서 인정한다”. 이 단계에서 자연에 비해 물리적으로 연약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연에 순응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이렇게 오딧세우스적 책략의 틀은 주체인 인간이 의식적으로 객체인 자연에 동화됨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딧세우스의 책략은 합리화된 미메시스이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이 바로 주체와 객체의 화해라고 파악하며, 인간 의식의 발전 과정을 이러한 미메시스적 행동양식이 개념적 사고에 의해 축출되어 간 과정이라고 본다. “문명은 타자에 대한 유기적인 순응인 본래의 미메시스적인 행태 대신 주술의 단계에서는 우선 미메시스를 조직적으로 숙달하게 되며, 마지막 역사의 단계에서는 미메시스를 합리적 실천인 노동으로 대체한다. 제어되지 않는 미메시스는 추방된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개인의 원형인 오딧세우스의 행동이 자본주의적 현대에서 사라져 버린 주체와 객체의 화해의 형식을 보여주는 행태의 본보기라고 포착한다. 사이렌의 에피소드에서 고대적 이성(Ratio)을 소유한 오딧세우스는 우세한 자연의 힘을 인정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신화의 법칙, 즉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법칙을 아는 오딧세우스는 동료들에게는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을 돛에 묶게 한다. 이로부터 그는 자연법칙을 따름으로써 그 법칙이 가진 파괴적 힘으로부터 벗어난다. 여기서 오딧세우스는 이성을 통해 의식적으로 미메시스적 행동을 취한다. 즉 오딧세우스의 행동은 합리적 미메시스다. 그로부터 그는 자연의 파괴적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면서 자기의 목적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오딧세우스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자연을 억압해야 했다. 즉 그는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 내부의 자연, 즉 욕망과 꿈을 포기해야 했다. 개념적 사고를 통해 자연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합리적 이성은 인간 내부의 자연, 즉 감성적 욕구 및 자연과 직접적으로 일치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게 한다.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는 인간 의식과 자연지배의 합리화가 강화될수록 인간 내부의 자연에 대한 억압도 강화되어왔다. 바로 이것이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 사고이다. 오딧세우스의 방랑의 재구성을 통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문명사는 인간의 자연지배, 사회적 계급지배, 개인의 충동지배라는 나선형의 필연적 과정이다.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에서 모든 실천에 내재해 있는 지울 수 없는 미메시스의 잔재는 망각되도록 강요된다” “대량생산의 시대에서는 천편일률적이고 범주화된 노동이 개인적인 노동을 대체한다. 경제에 의해 결정되는 전체사회의 방향은 개인을 자율적인 존재로서 유지시켜주는 인간 내부의 여러 장치를 위축시킨다." 이전에는 부르주아들이 강제된 노동을 양심의 의무라고 포장하여 자신과 노동자들에게 주입시켰다면, 이제는 인간 전체가 억압의 주체나 객체가 되었다. 이제 인격체로서의 인간, 이성의 담지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에서 드러난, 계몽의 정신이 진보에서 퇴보로 전락한다는 테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정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 (2) 자기 지배적인 주체의 자연지배는 자연의 황폐화로 변한다. (3) 주체의 자기 보존은 자기 부정이 된다. (4) 정의와 자유의 증대는 동시에 부정의한 사회 권력과 부자유의 증대에 상응한다. 따라서 결국 계몽의 변증법은 객관적으로도 광기로 넘어간다”.

 

3. 개념적 사고 - 억압과 지배의 싹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른다면 이와 같이 계몽된 이성이 실제로는 폭력과 지배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개념적 사고 속에 이미 억압과 지배의 싹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이 신화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계몽적 이성의 부정적 측면만이 잘못 발현된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계몽의 토대인 개념적 사고에 기인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몽 스스로가 다시 신화로 퇴보하는 원인이라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결정적으로 개념적 사고,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동일화 사고에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개념적 사고 나아가 동일화 사고를 통해 언어적으로 매개된 의식 생활의 모든 수준에서 (교환의 원리와 모든 등가의 형식을 통해) 세계를 통일적이며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갈 수 있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총체적 지배와 억압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계몽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며, 전자는 증대하는 합리적 사고의 도움을 통해 인간이 자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반면, 후자는 인간이 그 합리적 사고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는 문명의 파괴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계몽이 다시 신화로 퇴행하게 된 상황이란 계몽이 이렇게 개념적 사고 및 합리적 사고, 즉 합리성에 기반하여 자연과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퇴행을 막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계몽의 자기반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합리성에 의해 야기된 문명의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개념설명)

미메시스: 미메시스는 그리스어로 '모방'('복제'라기보다는 '재현'의 뜻)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서 미메시스 개념은 보통의 철학적 전통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그들에서 미메시스 개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세계의 예술적 모사나 모방이 아니라, 인간학적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플라톤에서 미메시스는 매우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메시스는 세계의 단순한 모상이며, 밝은 이념의 흐릿한 현상과 이면상이었다. 예술작품은 플라톤에서 현상하는 것의 모상으로서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거짓 현실을 한번 더 위조하는 가상의 가상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술은 조심스럽게 향유되어야 하며,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야기하기 때문에 인륜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은 그의 국가에서 이것을 철학자를 통해 통제하고자 한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작품을 모사(模寫)라는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어느 정도 진실된 복제라고 본다. 또한 예술작품은 자연현상을 모방하는 것이든 비극에서처럼 인간적 특성을 모방하는 것이든 어떤 대상의 질적 특징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이 파악하는 것과는 달리 철저히 인식을 확장하며 더 나아가 카타르시스적 기능을 가진다. 왜냐하면 예술은 관찰자를 정서적으로 고양시키고, 격정과 불안을 순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해석은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미메시스는 단지 예술가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행위 일반으로서 간주되기 때문이다.

 

 

4.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주요의제

마르크스주의의 문화 개념 이해의 변천

벤야민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③ ?계몽의 변증법?에서 드러난 문화산업론

 

1. 마르크스주의에서 문화 개념 이해의 변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를 사회 구조의 문제와 연관시켜 이해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구성체론에 따르면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토대를 구성하며, 그 위에 상부구조가 형성된다. 상부구조는 정치관계와 사회적 의식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관계는 정치제도 및 법률제도, 그것에 상응하는 정권기관, 당파 등의 단체와 시설들을 망라한다. 그리고 사회적 의식형태는 정치 관점, 법률 관점, 도덕, 철학, 예술, 종교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는 상부구조의 현상에 포함된다. 이때 문화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먼저 청년기의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의식 형태라고 파악하며, ?독일이데올로기? ?자본론?에서는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지배적 관념의 일종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관념 영역 중에서도 전도되고 왜곡되었으며 환상적인 의식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왜곡과 환상이 이데올로기는 아니고,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으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착취와 모순을 감추고 왜곡함으로써 그에 봉사하는 의식 형태들만이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하였으며, 긍정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레닌(Vladimir Ilich Ulyanov Lenin, 1870-1924)과 함께 확산된다.

레닌은 이데올로기를 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게끔 체계적이며 가다듬어진 사상이라고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라고 무조건 잘못된 관념이 아니며, 이데올로기는 계급의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하는 투쟁의 영역이다. 그리고 루카치(Georg Lukács, 1885-1971)는 레닌의 관점을 계승하여 이데올로기를 서로 다른 계급의 이해관계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에 따르면 모든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계급의식은 왜곡되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이지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보다 진보적이며 진리성(비은폐성)을 담고 있다. 그런데 루카치는 이데올로기 중에서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문화 영역 전반에 침투해 있다고 본다. 이에 바탕을 두어 루카치의 문화 비판은 문화 작품들의 진리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계급적 성격을 폭로한다. 이로부터 루카치는 참된 문화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럼으로써 인류 전체의 해방과 자유를 추구하는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레닌과 루카치의 긍정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수용발전시켜 가장 창조적인 성과를 낸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특수한 관념의 체계이자 세계관이며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고취하는 능력과 관계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세계관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 원칙들의 통일이다. 이로부터 그람시는 문화를 서로 다른 계급들 간에 헤게모니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라고 파악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데올로기가 계급분열에 입각한 불균등한 권력 관계 및 그로부터 파생된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고 파악한다. 즉 어떤 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를 위해 모순과 억압으로 가득 찬 현실의 참된 모습을 은폐시키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지배와 종속 관계를 영구하게 만들기 위해 특수하게 왜곡되고 전도된 관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산물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으며 세계를 거짓되게 그려내고, 사회의 모순들을 은폐하며 규격화되고 동질화된 문화 상품의 소비를 부추김으로써 대중들의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사고를 억누르고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순응케 한다고 비판하였다.

 

2. 벤야민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론에 제한하여 살펴보면, 문화산업은 대중문화를 총괄하는 체제이며, 이 문화산업이 대중을 기만하고”, 이를 통하여 대중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문화 전체는 역사적 동학(動學)에 포함되고 관습도덕예술종교철학 등과 같은 문화 영역들은 특정한 사회 형태의 유지나 파괴에 직면하여 그때마다의 역동적인 문화 요인들의 연관 속에서 형성된다. 문화는 모든 개별 시기에서 문화들의 변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힘들의 총괄 개념이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 비판의 철학적 전략은 첫째, 바로 이 문화 비판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대다수의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간을 억압과 지배로 몰아넣는 현 상황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사회적 총체를 구성하는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모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의 부정 신학의 이념, 부정의 영원한 이행이라는 이념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 비판은 다음과 같은 다중적 측면을 가진다. (1)현대 문화 일반에 대한 비판, (2)좁은 의미에서의 문화, 즉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한정하여 복제 기술이 몰고 온 문화의 대중화 현상에 따른 여러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 (3)현실의 부정으로서 예술 이론이나 미학의 전개가 그것이다.

그런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기술적 복제에 적용되는 새로운 기술이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과 상상력을 확대시켜준다는 긍정적 측면과 원작이 지니는 아우라의 붕괴라는 부정적 측면을 가진다고 파악한다. 그렇지만 대량 복제 기술이 가져온 문화적 변화에 대한 벤야민의 평가에서는 긍정적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술의 진보에 따라 대중은 예술을 접하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며, 따라서 인식 능력이 향상되고 나아가 감상적 태도 뿐 아니라 비평적 태도도 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를 통한 예술의 대중적 보급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수요 창출을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예술의 대중적 보급은 박물관이나 수집 애호가의 수장에 갇혀 있는 예술을 사회에 되돌려 주는 해방적 기능을 한다.

 

3. ?계몽의 변증법?에서 드러난 문화산업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벤야민과 달리 기술적 복제를 통한 대중문화의 확산은 대중 의식의 진보에 방해되며, 예술(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이 기술(궁극적으로 경제)에 예속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 및 해방의 실현에도 방해가 된다고 파악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보기에 기술(복제) 시대의 대중문화를 총괄하는 거대한 체제인 문화산업은 현존하는 것과 기술을 통제하는 권력 등을 우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산출한다. 요컨대 대중 조작과 대중 기만을 통한 욕구 체계의 조작, 문화의 획일화, 대중의 자율성의 감퇴, 대중의 사고 능력의 저하, 문화 영역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이성의 지배가 정치 영역으로까지 넘어가게 됨에 따라 초래되는 민주주의의 파괴, 문화 및 오락의 상품화, 문화의 자본 또는 경제에 대한 종속 등이 문화산업론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판이론에서의 문화 비판은 현대 사회의 불행과 모순을 비판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민중의 자발적이며 자율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민속예술 또는 민중예술, 그리고 고급예술과 달리 이 문화산업은 아도르노의 말로써 표현하면 그 고객을 의도적으로 위로부터 통합하는 것이다.” 이때 위로부터 통합한다는 것은 위로부터 정해진 목적에 문화산업의 고객, 즉 대중을 종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은 무엇보다 문화산업을 관할하는 자, 즉 자본가의 이윤추구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본가가 만들어내는 문화상품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증식의 원리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산업의 매체로서 아도르노에 의해 포착된 것은 잡지,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였다. 이러한 대중매체를 통해 자본가가 문화상품을 판매하고, 대중들이 매체를 통해 주어지는 문화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문화상품 생산자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 문화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따라서 자본가와 문화상품 생산자는 소비자인 대중에게 자신들의 문화상품이 사용가치를 통해서든 교환가치를 통해서든 대중의 욕구와 욕망을 실현시켜준다는 것을 내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을 관할하는 자는 대중이 문화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들의 욕구 및 욕망이 충족된다고 느낄 수 있도록 대중을 기만해야 한다. “문화산업은 자신이 행하는 기만이 욕구의 충족인 것처럼 소비자를 설득하려 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문화산업이 무엇을 제공하든 소비자는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주입시킨다.” 이러한 문화산업의 체계에서 대중은 문화상품의 소비자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구성할 수 있는 문화의 주체가 아니며, 문화산업을 관할하는 자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대상으로서 객체이다.

그런데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평가는 다음의 구절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문화산업의 전체결과는 반계몽이라는 결과이다. 문화산업 속에서는 호르크하이머와 내가 명명하였듯이 계몽, 즉 진전하는 기술적 자연지배는 대중기만, 즉 의식에 족쇄를 채우는 수단이 된다. 그것(문화산업)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의식적으로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는 개인의 형성을 가로 막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은 성숙한 인간에게서만 보존되고 전개될 수 있는 민주적 사회의 전제일 것이다. 대중이 부당하게 위로부터 대중으로서 모욕을 당한다면 대중을 대중으로 만들고 대중을 경멸하며 ()시대의 생산적 힘이 인간에게 허용한 만큼 성숙할 수 있게 되는 대중의 해방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문화산업이다” (Résumé über Kulturindustrie). 문화산업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도구적 합리성으로 전락한 계몽적 이성에 대한 아노르노의 비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때 문화산업은 이윤창출의 도구로서 대중매체를 이용하며, 나아가 대중매체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문화)산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중기만을 수행하는 매체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대중문화론 및 문화산업론은 더욱 간략하게 대중문화는 자본가의 상품으로 제작되는 문화산업에 기초한다.” “대중문화는 대중기만을 통해 대중의 해방을 저지한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이와 같이 계몽비판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에서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나아가 인간 삶의 전 과정이 사물화되어가는 문화적 현상을 밝혀가는 논증절차라고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화산업론은 계몽이 인간의 해방을 실현하지 못하고 억압을 만들어내는 한 양식으로서의 대중문화를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계몽비판의 지평에서, 현대사회에서 계몽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나아가 인간 삶의 전 과정이 사물화되어가는 문화적 현상을 밝히고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시각은 어떻게 달리 나타나는가?

2.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은 어떤 점에서 도구적 이성계몽에 대한 비판인가?

3. 대중문화가 인간 해방 또는 민주주의의 확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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