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화   /   유치환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더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그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려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우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올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 절후에

멀잖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 수선화  /    김동명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애닯은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가엾은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은

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이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 수선화  /  이병기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 두고
그 위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

투술한 전복껍질 바로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있는 해형 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우기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연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

★  수선화   /  신석정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 수선화   /  나태주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 등 뜨신 안방이었드란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뽀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수선화   /  이해인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


★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수선화·1   /   김길자

자존심이란 그런 건가
소슬바람에도
서릿발같은 사랑
노란 향기로 피우기 위해
제 몸 녹여 피는
얼음 꽃 

★ 수선화 앞에서  /  유소례

골반이 튼실해 씨방도 여물겠네

칼날 날개가 긴 척추 감싸고
오직 염원 하나
꽃네 마을 가는 길 위해
엄동을 깎아내고 있네

바람이 매울수록
탱글한 피관을 수직으로 타고
옹달샘 정갈한 물
시퍼렇게 퍼 올리고 있네

꽃네의 울, 여린 베일 속에
점화된 샛노란 눈빛이
운대감댁 별당아씨
청순한 부끄럼 닮았네

설한에 정제된 꽃내음이
살며시
내 하얗게 빈 마음에
정을 칠해 주고 있네. 

★ 수선화   /   박정순

눈부시지 않은 모습으로
뜰 앞 정원의 모퉁이에서
봄을 안내하는 등을

아프로디테
가녀린 몸매로
긴 겨울 어이 참아내었는지
무명의 어둠 끌어안고
삭이고 삭인 고통의 흔적
그 얼굴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구시렁거리지도 않은
또 다른 별의 모습으로
꽃등을 켰다
항시 화려함이 아름다움은 아니듯
은은히 존재를 밝히는
가녀린 모습 앞에
마음도
한 자락의 옷을 벗고
노오란 향기와 모습 앞에
얼룩진 내 삶을 헹군다 

★  수선화    /   임종호

이역 수 만리에서 씨앗으로 왔다는
그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 새 싹이 돋았습니다

수선화 노오란 꽃이
청초한 그 꽃이 피었습니다
담으로 바람 가려 주고
남서쪽 활짝 열어 주어
따뜻한 하늘 손길 내리게 한
고요한 뜰에
수선화가 곱게 피었습니다 

★  수선화   /  권태원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살아갈수록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세상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나도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속의 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

당신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나도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의 기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  수선화·13   /   손정모

얘, 너도 주번이지?
꽃이 다 시들었어.
꽃병을 바라보던
소녀와 나
마주보며 웃음을 깨문다.

담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 언저리
산야엔 야생화가 굽이치고
물소리가 드높은 개울을
소녀가 건너뛴다.

여기 좀 봐.
물결처럼 남실대는 수선화에
소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내민 꽃병에 들어차는
노란 꽃잎이 눈부시다. 

★  수선화  /   이문조

강가에 피어난
노오란 꽃 한 송이
수줍은 듯 고개 내밀고

까아만 세라복에 흰 칼라
갈분 풀 먹여 다림질하고
단발머리 찰랑이며
하얀 얼굴 하얀 미소
꿈속인가 천상인가

어스름 달밤에
비단개구리 짝 부르는데
그리운 님 찾아
고갯길을 오릅니다

사랑하는 님 생각에
어둠도 산길도 무섭지 않더이다

★   수선화    /    박인걸 

눈이 아리도록 고와도
사랑해 줄 이 없으면 고독해
목을 길게 빼들고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는가.

그리움이 차오르면
얼굴은 점점 야위어 가고
소슬바람에도
힘없이 스러질 것만 같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은
돌담 아래 외로이 서 있는
수선화 닮은 여인아 

★  수선화  /  함윤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  수선화·2   /   이승익

서울 우이동에서 마음씨 곱기로 소문난
이 생 진 선생님
식산봉 아래 부끄러이 자고있는 통나무집 한켠에
물맛 좋은 제주생수병에 수선화 꽂아놓아
서울 우이동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수선화는 슬피 울고있다
수선화는 말을 잃은 것 같다
수선화는 생기가 없다
수선화는 졸고있다

아마도
수선화는 선생님 마음이 너무 그리워
하루 이틀 온몸을 바르르 떨다
끝내 자결한 모양이다

★ 그대 외로운 수선화야   /  탁정순

그대는 늘 아름답지만
고독에 갇힌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슬픈 운명

조금 외로우면 어떠리
산다는 것은
외로움으로 피어난 꽃 한 송이
네 모습인걸

이젠 벗어버리면 어떠리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에 젖고
몸과 마음은 늘 젖어있지 않은가

오늘이 있기에 내일도 있는 거야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일 거야

이젠 허전한 영혼을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고
더 따뜻한 내일을 기약해 보렴

과거는 언제나 추억으로 남는 것
그대 아름답지만
외로운 수선화야 
 
★ 수선화   /  유국진

수선화!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지금까지 믿고 사실로 인식했던 것들이
이따금 사실이 아닌 거짓임을 알게 될 때도 있단다

참된 사랑은 거짓된 삶의 그늘에선 필 수가 없어
그러니 수선화야
늘 따사한 물가를 찾아
꽃 피기를 염원하지 말어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여 괴로워하지도 말어

사랑이란 스스로를 하염없이 태우는
순교자의 발걸음과 같은 것이란다
우리 인생에서
주어서 기쁜 것이 무엇 있겠니?
두루미 목빛 같은 의연함을 지니고
외로이 연못가에 홀로 핀 수선화야!

수선화야 수선화야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나를 보게 되고
죽음도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고
내 가진 모든 것 사라진다해도
행복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게 된단다

몸과 마음이 너의 꽃잎처럼 맑고
순결해지고
우주의 신비가 늘 봄비에 가득 젖어
빛나고
그리고 마침내 하늘과 바다와 산과 호수가
가슴에 다가와
수선화야!
가난한 우리는
그 속에 꽃핀 너의 눈망울을 보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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