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 시모음

 

소라여인숙 / 김영식 강원일보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 漁勞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 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히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는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사람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 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덮는다

 

팥죽을 끓이며 / 임혜주 무등일보

 

그새 또 잊었다

오랫동안 또글또글해졌을 팥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옹골지게 굳은 팥에게도 껴안았던

햇빛 다 풀어 놓을 시간이 필요한 법

한 시간에 해치울 욕심 놓아두고

약한 불로 되돌린다 그제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는 선

믹서에 마저 갈아 체에 거른다

헤쳐진 살 고루고루 퍼지게

잘 저어야 하는데 반죽 다듬는 사이

파르르 넘친다 아, 이 불같은 성질

저어주지 않으면 밑이 타지고

위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야 마는

천천히 있어야만

지 성질 온전히 풀어지는

압축된 열

그래서 팥죽은 붉다.

 

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 안오일 전남일보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 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 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늙어 가는 판화”/ 이현수

 

조각도 앞에 손을 둔다

순간, 조각도가 날렵하게 손에 스쳤다

아직도 내 손에 깎아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어머니 얼굴은 남겨 둬야할 곳보다

파내야 할 곳이 더 많았다

얼굴 윤곽보다 뚜렷한 곡선을 여러 번 파내다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얼굴

그래서 더 어머니로 보였던 얼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조각도를 따라 비워지는 굴곡

그 허공에도 몇 겹의 층이 있어

잉크로 찍어내면 더욱 환해졌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주름의 공허

 

몇 번씩 그 결을 만지며

여백을 남기는 어머니

완성된 얼굴 판화가 내 어머니이기만 할까

하나면 충분할 것을 여러 장 찍어내며

확인하는 것이다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tracing paper 투사지, 透寫紙)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 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부레옥잠” /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공방(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 물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 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 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 낯을 보겠네.

[문화일보]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 / 김륭

1.

실직 한 달 만에 알았지 구름이 콜택시처럼 집 앞에 와 기다리고 있다는 걸

2.

구름을 몰아본 적 있나, 당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내 머리에 총구멍을 낼 거라는 확신만 선다면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지

총각이나 처녀 딱지를 떼지 않은 초보들은 오줌부터 지릴지 몰라

해와 달, 새떼들과 충돌할지 모른다며 추락할지 모른다며 울상을 짓겠지만

당신과 당신 애인의 배꼽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위질하는 것은 주차딱지를 끊는 말단공무원들이나 할 짓이지

하늘에 뜬 새들은 나무들이 가래침처럼 뱉어놓은 거추장스런 문장일 뿐이야

쉼표가 너무 많아 탈이지 브레이크만 살짝, 밟아주면 물고기로 변하지

3.

구름을 몇 번 몰아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해나 달을 로터리로 낀 사거리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만 꺾으면 집이 나오지

붉은 신호등에 걸린 당신의 내일과 고층아파트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보다 깊은 어머니 한숨소리에 눈과 귀를 깜빡거리거나 성냥불을 긋진 마

운전 중에 담배는 금물이야

차라리 손목과 발목 몇 개 더 피우는 건 어때? 당신

꽃 피우지 않고도 살아남는 건 세상에 단 하나, 사람뿐이지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새가 아니라 벌레야

구름이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발가락을 담아내는 그릇이란 얘기지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말이야 그걸 아는 나무들은 새를 신발로 사용하지

종종 물구나무도 서고 말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구름이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까

4.

아주 드문 일이지만 콜택시처럼 와 있는 구름의 트렁크를 열어보면

죽은 애인의 머리통이나 쩍, 금간 수박이 발견되기도 해

초보들은 그걸 태양이라고 난리법석을 떨지

 

[서울신문] “연금술사의 수업시대” / 이강산(이산)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손을 씻을 때마다 오래 전 죽은 이의 음성이 들린다. 그들은 서로 웅얼거리며 내가 놓친 구절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손끝으로 따라가며 책을 읽을 때면 글자들은 어느새 종이를 떠나 지문의 얕은 틈을 메우고 이제 글자를 씻어낸 손가락은 부력을 느끼는 듯 가볍다. 마개를 막아놓고 세면대 위를 부유하는 글자들을 짚어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물속에서 젤리처럼 유연하다. 그리고 오늘은 글자들이 춤을 추는 밤 어순과 문법에서 풀어져 서로 뭉쳤다 흩어지곤 하는. 도서관 세면기에는 매일 새로운 책이 써지고 있다.

 마개를 열어 놓으며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햇빛을 피해 구석으로 몰린 내 잠 속에는 오랫동안 매몰된 광부가 있어 수맥을 받아먹다 지칠 때면 그는 곡괭이를 들고 좀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가 캐내 온 이제는 쓸모없는 유언들을 촛농을 떨어뜨리며 하나씩 읽어본다. 어딘가엔 이것이 책을 녹여 한 세상을 이루는 연금술이라고 쓰여 있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매일신문] “스트랜딩 증후군” / 김초영

(strand : 좌초하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다, 사람을 무일푼이 되게 하다)

 

파일럿 고래들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일렬로 누워 있다.

그들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다.

 

중앙병원 307호실,

누워있는 엄마의 팔뚝에 옅은 햇빛이 스며든다.

오늘도 멍이 하나 더 늘었다.

의사는 건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굳어 가는

관절들을 만져보곤 했다.

스스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무의식 상태의 자살이죠.

의사는 녹음테이프를 재생하듯 또박또박 말한다.

녹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산소통이

조용한 병실의 오후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고래 떼는 죽고 말았다, 고 보도되었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감행했지만 전부 살려내지는 못했단다.

파일럿 고래들은 하늘로 날려던 것이었을까.

자살하기 위해 육지까지 올라온 고래들처럼

엄마가 가는 물줄기를 내뿜는다.

밀린 병원비가 불어나듯

투명한 오줌비닐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신문에 죽어있는 고래들의 사진이 실렸다.

죽은 고래들의 미약한 주파수가 좁은

병실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도 저 주파수를 쫓아 육지로 가고 있을지 몰라.

흑백의 고래 사진을 오려 엄마의 머리맡에 붙여두었다.

고래의 순한 눈이 감기고 있다.

눈알이 오랫동안 따끔거렸다.

 

[동아일보] (시조) “눈은 길의 상처를 안다” / 이민아

 

무제치늪* 골짜기에 사나흘 내린 눈을

녹도록 기다리다 삽으로 밀어 낸다

사라진 길을 찾으려 한 삽 한 삽 떠낸 눈

걷다가 밟힌 눈은 얼음이 되고 말아

숨소리 들려올까 생땅까지 찧어본다

삽날은 부싯돌 되어 번쩍이는 불꽃들

성글게 기워낸 길 간신히 닿으려나

내밀한 빙판 걷고 먼 설원 헤쳐 가면

삽 끝은 화살 같아져 모서리가 서는데

결빙에 맞서왔던 삽날이 손을 펴고

쩌엉 쩡 회색하늘에 타전하는 모스부호

마침내 도려낸 상처 한 땀 한 땀 기워낸다

 

*무제치늪 : 울산 울주군 삼동면 정족산(鼎足山)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습원(高層濕原). 6000여 년 전 생성됐으며, 지금도 수많은 습지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일보] “근엄한 모자” / 이기홍

 

오늘 예식장에 그를 데려가기로 합니다

그는 내 가슴속에 살면서도

맨 위에 올라가 군림하기를 좋아 합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 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주는 그가

차갑고 근엄한 얼굴을 치켜들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립니다

예식장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도

나보다는 그에게

더 깊은 관심을 표하기도 해 속이 몹시 상합니다

이제 그가 없으면 나는

사람들의 괄호 밖으로 밀려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난 외려 그의 보디가드가 됐습니다

그의 뾰족한 코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진 않을까

낯선 바람에라도 끌려가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조금도 맘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봐야 합니다

슬그머니 내 위까지 올라와 상전이 된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나 나는 이렇게

나와 다르게 살아야 하나요

그를 몰아내고 청바지 입기를 좋아하는

나를 데려올 수는 없나요

 

[한국일보] “엘리펀트맨” / 이용임 (elephant man 코끼리 인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 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 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 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 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 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 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광주일보] “몸의 저울눈” / 정재영

 

푸줏간 주인이 고기 한 칼 썩썩 썰어

, 저울에 올리자 바늘이 바르르 떤다

그의 손대중이 저울눈 하나를 겨냥해

잠시 그 경계를 넘나들다가 딱 그 눈금에서 멎는다

얼마나 칼질을 해댔으면……

칼 쥔 손에 저울눈 하나가 직감처럼 꽂힐 때까지

마음의 저울추가 수도 없이 진자운동을 거듭했으리라

모자라서 보태고, 넘쳐서 덜어내는

모자람과 넘침이 오락가락 셀 수도 없었으리라

내 몸에 던져지는 생의 부하를 짚어내면서

내 안에서도 저 저울처럼 바늘 하나가 수도 없이 흔들렸다

모자람과 넘침 사이에서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다

살코기 한 덩이에 요동치는 저울처럼 내 몸도

등짐이라도 끙, 지고 일어설 때면 바르르 떨던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저 푸줏간의 저울처럼 참 많이도 흔들리며 살아온다

저울은 이제 평정을 되찾았다

생의 무게를 내려놓고서야

꺾인 허리 반듯이 펴지던 어머니처럼.

 

[부산일보] “붉고 향기로운 실탄” / 정재영

 

드티봉 숲길을 타다가 느닷없이 총을 겨누고 나오는

딱총나무에게 딱 걸려 발을 뗄 수가 없다

우듬지마다 한 클립씩 장전된 다크레드*의 탄환들 (*dark red, 검붉은?)

그 와글와글 불땀을 일으킨 잉걸 빛 열매를 따 네게 건넨다

실은 햇솜처럼 피어오르는 네 영혼을 향하여

붉게 무르익은 과육을 팡팡 쏘고 싶은 것이다

선홍빛에 조금 어둠이 밴 딱총나무 열매에 붙어

이놈들 보게, 알락수염노린재 두 마리가 꽁지를 맞대고

저희들도 한창 실탄을 장전 중이다

딱총을 쏘듯 불같은 알을 낳고 싶은 것이다

그게 네 뺨에 딱총나무 붉은 과육 빛을 번지게 해서

갑자기 확 산색이 짙어지고

내 가슴에서 때 아닌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고

막장 같은 초록에 갇히면 누구든 한 번쯤 쏘고 싶을 것이다

새처럼 여린 가슴에 붉고 향긋한 과육의 실탄을

딱총나무만이 총알을 장전하는 게 아니라고

딱따구리가 나무둥치에 화약을 넣고

여문 외로움을 딱딱 쪼아대는 해 설핏 기운 오후

멀리서 뻐꾸기 짝을 부르는 소리 딱총나무 열매 빛 목청

딱총나무의 초록이 슬어 놓은 잉걸 빛 알들이

겨누는 위험한 숲 내 손을 꼭 잡는다.

 

[영남일보] “떡갈나무 약국” / 임수련, 본명 임외자)

 

밤새 앓고 난 후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케?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죠

솜털 가운을 걸친 새들

자잘한 열매 알약들과 이슬 드링크 들고

분주하고요 떡갈잎 의자에 앉아 깔깔대는 노란 햇살들

눈곱 씻은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파

꼬마전구 도토리 알 켜져 있는 조제실 구석에선

약봉지 바스락대는 사슴벌레랑

무당벌레의 그루잠도 훔쳐볼 수 있어요

당신도 어디 아프신가요?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거리며 향과 색과 소리들이 화답하는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 보시죠

어린 살결처럼 싱싱한

푸른 그늘 대기실에 앉아 깨알같이 씌어진

마음의 처방전 읽고 있으면

어떤 상처도 아물게 한다는 까만 눈 속에 당신을 태운 다람쥐 한 마리

지구보다 더 너른 나무의 세계로 안내해 드리고요

 

떡갈나무약국의 주인장 오색딱따구리와

구름트럭 끌고 약 배달 온 빗방울의 경쾌한 대화도 들을 수 있죠

가끔 늦은 시간에 찾아가면 밤의 이마에 새겨진

따갑고 노란 눈동자들 등을 파고들고

약국 처마의 기둥들이 굵어지는 걸 볼 수도 있는 곳

참 그곳엔 그 기둥들도 혼신으로 즙을 짜낸다는군요

마음이 푸석하게 부어올 땐

딱따구리구리 마요네즈

?은 맛있어 인도사이다 인도사이다,

콧노랠 흥얼대며 떡갈나무약국을 찾아가 봐요.

 

[국제신문] “타임캡슐에 저장한 나쁜 이야기 하나” / 정태화

 

놋쇠숟가락 하나가 여닫이문 깊숙이 빠져 있었어 문고리 구멍에 꽂혀 타다닥 불꽃 튀어 오르는 길 척추脊椎를 느끼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달빛 파도에 쓸리며

흐느 적거리고 있었어 사내들 깊은 밤

주막거리 화투짝 속살에 파묻혀 놀고 있는 동안

공산명월空山明月 밝은 달이 만삭滿朔의 몸

쏟아져 내리고 때때로 주인 버리고 오는 신발들이 보이는 시간

그 신발 뒷굽을 척척 빠져나온 발자국들

저희들끼리 우루루 나뭇잎 따라 구르다가

돌담장 호박넝쿨 아래로 숨어 들어가 잠잠했어

 

이른 아침 백주에 궁둥이 까고 있는 호박덩이 몇몇에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똬리를 받쳐주다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줌을 누셨어

그 곳에 둥글고 하얀 어머니 궁둥이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어

밭두렁 무성한 잎새 바지 안에 잘 익은 오이들

매달려 있었지 이웃집 밭이랑에서

물오른 가지들이 불쑥불쑥 일어섰어

마음껏 부풀어 팽팽한 그것들과 함께 고추밭에

태양초 고추가 어찌 그리 뜨겁던지 퍼질러 앉은 밭고랑에

매끈매끈 고구마들이 얼굴 내밀고 있었어

저녁놀이 아궁이에서 왈칵 숯불을 뒤집어 놓을 때

어머니 볼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셨지

참 이쁘다 우리 어머니 태양초 고추 하나 머금은 듯

입술 붉은 어머니 고무신 탈탈 털어 낼 때쯤이면

짧은 어머니의 사내가 내려놓은 울음들이 달려 나왔지

왈칵 기다림이 반가운 아이들

앞장세운 변성기의 아이 하나가

감나무 키 큰 그림자

사립문 밖 보내놓고 있었지

 

호롱불 밝혀야 어른어른 떠오르는 밥상

주춤주춤 아랫목이 내어놓은 보리밥 속에

언제 숨어들었나 고구마들 숨죽이고 있었지

등뼈를 쓰다듬는 어머니 능숙한 손길에

씨앗들 모두 빼앗기고 얌전해진

가지나물 오이냉채가 입맛을 당겼지

 

놋쇠숟가락으로 식구食口들이 밥을 먹고 있었어.

 

[경인일보] “소금쟁이를 맛보다” / 한창석

 

하늘과 수면 사이

왈츠처럼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사내는

愁心이 깊어 차라리 소금이 되면

감옥의 水深을 가늠해 볼 수 있을까 마음을 절였다

蓮塘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고 싶지만

후들거리던 다리 그 어디에

그처럼 완강한 삶의 근육이 붙어 있었는지

그래도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도무지 가라앉을 수가 없다

차라리 발을 굴러 하늘로 날아오르려 해도

날개가 없어 새의 그림자를 따라 못의 언저리까지 질주해 볼 뿐

潛泳昇天도 하지 못한 채 세상 바람이 죄다 그의 몫이다

젖을 수 없는 못은 도리어 沙漠

내려다봐야 보이는 하늘은 도리어 苦海

잔비를 맞으며 세상을 미끄러진 하루

잔비에도 등허리가 시큰했을 사내 생각에 코허리가 시큰하다

이 부딪쳐 깨어지는 수면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흐느끼는 세상

하루 종일 위태롭게 뒤뚱거렸을 사내

盡人事의 땀이 마르고 응답하지 않는 을 향한

巫女의 눈물마저 다 마르고 境界에 갇힌 자

마른 영혼을 찔러 혀에 가만히 대 보니

몸서리쳐지도록 짜다

타들어 간 鹽田의 까만 소금

刑期를 가늠할 길 없는 사내 어느 새

철없이 겁 없이 세상을 지치는 어린 새 끼 들을 수습하여

水草 사이로 부끄럽게 여윈 몸을 감춘다.

 

[동양일보] “오월” / 김영식

 

아이가 굴렁쇠를 굴린다

빈 골목이 출렁거린다

투명한 바퀴가 오후의 적막을 감는다

파닥거리며 햇살과 바람이

허공이 한 아름씩 감겨든다

감긴 것들이 말려 들어가

둥근 시간이 된다, 제 몸 속

길을 떠밀며 달려가는 아이

 

플라타너스 강둑 위

굴렁쇠가 아이를 굴린다

나무그늘 아래서 아이는

새소리처럼 지저귄다

자궁처럼 환한,

굴렁쇠 안 깊숙이 둥근 산이 눕는다

둥근 물소리도 따라 눕는다

 

들녘 끝

은빛실타래가 천천히

감긴 길을 풀어낸다

고요하던 풍경이 수런거린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길섶

햇살과 바람이 풀린다

노을 몇 점 걸어 나와

강가에 걸터 앉는다

 

텅 빈, 허공을 밀고 가는 아이

우주 한켠, 챠르르

지구가 굴러간다, 오월이

푸르게 자전한다.

 

[한라일보] “구포역‘ / 김재근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는 거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거

마른 겨울빛 받으며 벌서고 있는 나무같이 견디는 거, 아닌가

 

구포역, 휘파람 불며 기차는 몰려오고

사람들은 낙엽처럼 또 부서져 내린다

찬바람 부는 광장구석 어깨 구겨져 서성이면

비릿한 무엇이 목 어디 가시처럼 걸리고

 

야산 겨울 숲 너머로 하루해가 풀썩 지고 있다

 

늦은 역 광장은 묘지처럼 이제 적막하다

빈 소주병은 시린 기억들을 꽉, 채우고 뒹굴고 있다

꺼져 가는 모닥불 옆 용도 폐기된 라면박스와 신문지에 쌓여

사내는 잠이 들고

 

작은 불빛들이 다가와 사내의 이마를 만진다

깜박이는 노숙의 굽은 등대, 상처여

이 후미진 외곽이 그대의 둥지였구나

물새의 알, 깨어진 알이여

 

바람과 겨울바다를 건너 그대가 흘린 모래알

나의 무릎에서 어지러이 날아 오른다

첫 차가 오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그대와 나의 겨울을 태우고

목쉰 기적소리 오래 울리며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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