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시 모음

 

눈물 한 잎  /  장태숙

 

1월에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서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힘겹게 꽃잎 연

지친 무게를 보는데

실핏줄 툭툭 불거진 꽃술은 한파 견딘 심장에서

불꽃처럼 튕겨 나온 무언의 신열인데

단단한 살갗 뚫고 저리 환한 눈물 피웠는데

눈물 한 잎

팔랑, 떨어지며 공중에 길을 냈는데

공기의 출렁거림이 낸 시간만큼 느린 속도로

공중의 길이 비스듬한 곡선으로 열렸는데

매화나무 깊은 눈이 잠시 우두망찰 보고 있었는데

찰나에 상처 많은 바람이 속절없이 지우고 갔는데

그길,

사라진 길에서

갓 뽑힌 비릿한 깃털 냄새가 났는데

가지 많은 내 몸에서도

열꽃 같은 눈물이 피기 시작하는데

 

  돌매화나무처럼   /   원재훈

 

나의 사랑은 그러고 싶다

돌에서 피는 나무처럼 단단하고 싶다

들꽃보다 작은 그리움의 키를 낮추고

사람 하나를 사랑한다는 일이

높은 산에 저 스스로 씨 뿌리고

저 스스로 자랄 만큼만 자라는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돌에서 피는 사랑이고 싶다

하얀 마음 붉은 마음

돌 속에 스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런 돌매화나무처럼

손톱만한 키로 자라

한라산 백록담의 높이로 있는

그런 사랑이고 싶다

 

매화      /   박정만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따라

두 송이, 세송이..다섯 송이, 열 송이 ..

이렇게 꽃차례 서듯이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

이때 비로소 봄기운도 차고 넘치고,

먼 산자락 뻐꾹새 울음소리도 풀빛을 물고 와서

앉습니다 먼 산자락 밑의 풀빛을 물고 와서

매화꽃 속에 앉아 서러운 한나절을 울다갑니다.

               

매화    /     서정주

 

매화에 봄 사랑이 알큰하게 펴난다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

더 더는 못 견디어 하늘에 뺨을 부빈다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 번 나와 보아라

매화 향기에서는 가신 님 그린 내음새

매화 향기에서는 오는 님 그린 내음새

갔다가 오시는 님 더욱 그린 내음새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매화보다 더 알큰히 한 번 나와 보아라

                                    

매실을 따며     /      詩經

 

ㅡ 혼기가 찬 여자가 때를 놓칠까 당황하는 심경을 그린 노래

매화 열매를 따니 열매가 일곱 개 남았네

나를 찾을 임은 길일에 오시기를

매화 열매를 따니 열매가 세 개 남았네

나를 찾을 임은 이때를 놓치지 말기를

매화 열매를 따 광주리에 담았네

나를 찾을 임은 말이 났을 이때를 놓치지 말기를

 

 매화가 필 무렵      /     복효근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피멍울이 맺히는 것을

하염없이 열꽃만 피던 것을 ....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매화 곁에서  /    고재종

 

바람 치는 날이면

저물녘이면

나무는 제 가지를 윙윙 울리어

얼어붙는 꽃자리를 깨우던 것이

눈 내리는 날이면

새벽녘이면

떡가루 붓듯하는 눈발을 입고

순은의 눈꽃송이 피우던 것이

잉걸처럼 이글거리는

마음 날에는

참새 외톨 날아앉는 그 무게로도

가지는 그렇게 휘이더니만

쓸쓸하고 그립고 외롭기로야

그 무엇보다 한 뼘쯤은 더 높아서는

대한 지나 장독 깨는 추위를 밀고

가까스로 터뜨린

연분홍 몇 점!

네가 없어 홀로 보는

그 꽃 속에서

오늘은 한 시인이 태어나느니

정녕코 씩씩하긴 씩씩하여서

내 사랑도 향기 넘쳐

네게 닿으리

 

 매화나무 곁을 지나다    /       양문규

 

이른 봄날, 매화나무 곁을 지나는데,

여자가 흙 담장에 걸린 꽃가지를 꺾고 있다

하늘이 구름을 내려 꽃을 피우는가

그 여자 매화의 가지에 얹혀 흐느끼듯 꽃을 단다

지난 날들은 뒤돌아보지 마라

기우려진 몸이 헛되지 않았다고

속살이 열린, 하얀 꽃송이 허공 속으로 들어간다

햇살 따뜻해 바람 환한 날

사랑하고 싶어 매화나무 속을 엿보는데

매화나무 안에서 그녀가 옷을 벗고 있다

 

 매화나무 앞에서   /  최두석

 

봄꽃 병그는 창덕궁 안

수백 년 묵은 매화나무 앞에서

임진왜란 뒤 명나라에서 보내왔다는

매화나무 앞에서

꽃을 꽃으로만 순수하게

보지 못하는 나는 난시일까

매화가 눈 속에 핀다는 말은

이 따스한 봄날에 분명

사대부의 사치에 지나지 않아

누군가 야유했듯

화양동에 송시열의 유언으로 지었다는 만동묘

만동묘를 받들던 정신의 생생한

상징처럼 보인다

이제 만동묘는

제사 지내는 자 발이 끊겼으되

매화나무는 시대와 전혀 무관한 듯

꽃술을 내밀고 향내를 풍기며

우아하게 온몸으로

관광 나온 양키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다

 

 매화를 생각함    /  나호열

 

또 한 발 늦었다

일찍이 남들이 쓰다 버린

쪽박같은 세상에

나는 이제야 도착했다

북서풍이 멀리서 다가오자

사람들이 낮게 낮게

자세를 바꾸는 것을

바라보면서

웬지 부끄러웠다

매를 맞은 자리가

자꾸 부풀어 올랐다

벌을 준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매화 앞에서     이해인

 

보이지 않게

더욱 깊은

땅 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 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잡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매화, 흰 빛들    /   전동균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 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 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 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매화   /  복효근

 

가령

이렇게 섬진강 푸른 물이 꿈틀대고 흐르고

또 철길이 강을 따라 아득히 사라지고

바람조차 애무하듯 대숲을 살랑이는데

지금 이 강언덕에 매화가 피지 않았다고 하자

그것은, 매화만 홀로 피어있고

저 강과 대숲과 저 산들이 없는 것과 무에 다를 거냐

그러니까 이 매화 한 송이는

저 산 하나와 그 무게가 같고

그 향기는 저 강 깊이와 같은 것이어서

그냥 매화가 피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머, 산이 하나 피었네!

강 한 송이가 피었구나할 일이다

내가 추위 탓하며 이불 속에서 불알이나 주무르고 있을 적에

이것은 시린 별빛과 눈맞춤하며

어떤 빛깔로 피어나야 하는지와

어떤 향기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연습했을진대

어머, 별 한 송이가 피었네! 놀랄 일이다

벙긋거릴 때마다

어디 깊은 하늘의 비밀한 소식처럼이나 향그로운 그것을

공짜로 흠흠 냄새 맡을 양이면

없는 기억까지를 다 뒤져서 늘어놓고

조금은 만들어서라도 더 뉘우치며

오늘 이 강변에서

갓 핀 매화처럼은 으쓱 높아볼 일인 것이다

 

 매화 풍경    /    박종영

 

겨울 강을 건너온 매화 꽃잎 한 개

절정을 위해 상큼한 바람 앞에 서서

백옥의 여인이다

이내 펄럭이는 치맛자락

그때마다 하얀 속살이 좀처럼 인색하게

붉게 퍼진다

낡은 세월 모두 밀어내는

그대 향기 같아

그 추억의 허리춤을 살며시 당기면

저절로 안겨오는 그리움을 어쩌랴

 

 백설이 자자진 골에     /       이색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는 어늬 곳에 피였난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흰 눈이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악하구나

(절개를 나타내는)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모르고 있도다

역사적 전환기에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난 시조

 

, 양화소록   /   조용미

 

올봄 하릴없이 옥매 두 그루 심었습니다

꽃 필 때 보자는 헛된 약속 같은 것이 없는 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의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나를 내내 붙들고 있는 꽃 핀 복숭아나무는 흰 나비까지 불러들입니다

당신은 잘 지냅니다

복사꽃이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슬아슬 잘 지냅니다

가는 봄 휘영하여 홍매 두 그루 또 심어봅니다

나의 뜰에 매화 가득하겠습니다

 

설중매  /   반기룡

 

뼈와 살이

녹아내려도 괜찮습니다

정수박이에 얼음살이

용대리 황태처럼

촘촘히 박혀도 상관없습니다

물관부가 터져 피가

홍건히 흘러도 괘념치 않습니다

솔향기 부르고

피톤치드 내음 맡으며

가슴엔 데살로니가 전서 516절을

아로새기며 추위를 견디렵니다

동토의 땅에 직립한 채

배냇저고리 두르고

잉걸불 같은

만개의 기쁨 누리려

내공을 쌓고 또 쌓으렵니다

새살 돋기 위한

인고의 세월은

능히 견딜 수 있으니까요

 

 설중매     /     함민복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 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설중매 앞에 서서   홍해리

1

수억 광년을 잠자던 별들이

싸늘한 영혼으로 터뜨리는

하얀 불꽃이다

 2

싸락눈 같은 창백한 속삭임

새벽 4시의

無明

3

별똥별의

추락

화사한, 화사한

마침표

4

천상의 문양

가지마다

청청백백

청허 淸虛로다

5

청천벽력 같은

투명한

불꽃 앞에

그냥 죄스럽다

마냥 부끄럽다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     김용택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서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어리고 셩근 매화       /       안민영

 

어리고 셩근 매화 너를 밋지 안얏더니

눈 기약 능히 직켜 두셰 송이 푸엿구나

촉 잡고 갓가이 사랑할 졔 암향暗香 부동浮動 하더라

연약하고 엉성한 매화 너를 믿지 아니하였더니

눈 오면 피겠다는 약속을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촛불 잡고 너를 가까이 바라보며 즐길 때 그윽한 향기조차 떠도는구나

                           <금옥총부>에서

 

 첫매화 / 도종환

 

밤에는 부엉이 우는 소리 산 가득 하더니

아침에는 딱따구리가 요란하게 나무 둥치를 쪼아댑니다

숲의 새들이 점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지리산에 사는 후배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섬진강 하류를 따라 곡성 쪽으로 내려가다가 첫매화를 보고는

생각이 나서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편지와 함께 보낸 사진에는 열일곱 시골 소녀처럼

보얀 매화꽃이 다소곳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피지 않은 채 맺혀 있는 꽃봉오리들은 아기를 가진

여자의 젖꼭지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배의 편지에 의하면 이 매화나무는

큰 상처를 입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굵은 가지가 여러 군데나 잘려나간 채 덜덜 떨며

겨울을 보낸 나무라 했습니다

 

상처받은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후배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상처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

태풍에 크게 꺾인 경상도 벚나무들이

때 아닌 가을에 우르르  꽃을 피우더니

섬진강 매화나무들도 중상을 입은 나무들이

한 열흘씩 먼저 꽃을 피웁니다

 

전쟁의 폐허 뒤에 집집마다 힘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낳던 때처럼

그렇게 매화는 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인 저꽃이 아프게 아름답고 상처가 되었던

세상의 모든 첫사랑이 애틋하게 그리운 아침

꽃 한 송이 처절하게 피는 걸 바라봅니다 ....

문득 꽃 보러 오시길 바랍니다."

 

저는 "상처 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지요"하는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산줄기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꽃 한 송이도 상처를 딛고 피고, 상처 속에 핀 꽃들로 하여

봄이 오는 지리산을 생각했습니다

 

설해를 입은 우리 집 마당가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솔방울을 매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람도 쇠약해질 때 사랑의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무릇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존 본능이

그렇게 몸에 작용을 하는 거겠지요

그러나 이 매화꽃에는 본능을 넘어서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저는 답장을 쓰며 후배에게 편지를 옮겨

한 편의 시로 만들고 싶은데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상처 입은 나무에서 첫매화 피는 걸 바라보며 보낸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이 저에게는 시처럼 다가왔습니다

 

호조일성          신석정

                                  

갓 핀 청매 성근가지

일렁이는 향기에도

자칫 혈압이 오른다

어디서 찾아든

볼이 하이얀 멧새

그 목청 진정

서럽도록 고아라

봄 오자 산자락

흔들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속에

청매에 멧새 오가듯

살고 싶어라

 

홍매      이상국

                                   

늦은 사랑이 내게로 왔다

가장 늦은 사랑이 첫사랑이다

봄여름가을

꽃시절 다 놓치고

언 땅 위에서

나는 붉어졌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봄이라 하지만

꽃물을 길어올린 건

겨울이다 인색한 몇 올의

빛을 붙들어 온몸을 태운

한 그리움의

失性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는가

지금 그리워해도 되는가

너는 묻지 않았으니

스스로 터져 봄날이 되는 사랑아

아직 얼어붙은 하늘에 뾰루퉁 입 내민

붉은 키스

가장 이른 사랑이 내게로 왔다

                                         

홍매화     /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은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홍매화 겨울 나기   최영철

 

그 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막 피는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 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건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올리는

홍매화 겨울 나기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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