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시작도 알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放下着 )
제가 키워온 ,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가을 엽서 –안도현 -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동백 -선운사에서 - 김명원
지고 말면 그뿐
흔적이 살아 있던 자리에
바람조차 성글 터인데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 어디에도 있었다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처럼
지고 나면 그뿐
아무란 자취 찾을 수 없어 눈 머는
깨끗한 허무였으면 좋겠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행복의 길
삶의 괴로움과 슬픔 같은 것
하나도 만나지 않고
오직 환한 기쁨과 웃음만 있는
평탄한 길이 아니다.
긴 세월 지상에 그려진
삶의 발자취 뒤돌아보면서
이제 웬만큼 보인다
참된 행복의 길.
가진 것 별로 없어도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었던 모든 길이
내 행복의 길이었음이.
★길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삭월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커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짜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긍정적인 밥 / 함민복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 함민복
여보시오―누구시유―
예, 저예요―
누구시유, 누구시유―
아들, 막내아들―
잘 안 들려유―잘.
저라구요, 민보기―
예, 잘 안 들려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최 안 들려서―
어머니―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예, 죄송합니다. 안 들려서 털컥.
어머니 저예요―
전화 끊지 마세요―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예, 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쇠귀에 경을 읽어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질긴 그림자 / 함민복
태양이 어서 일터로 나가라고
넥타이를 매주듯 그림자를 매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같은
색칠을 했다
농부도 들판에서 그림자를 파내고 있다
달이 뒤에서 앞에서 자신의 포즈까지 바꾸며
뒷모습만 나오는 흑백 그림자를 찍어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다른 색을 지웠다
올빼미가 제 그림자가 되어줄 들쥐를 내리 쪼았다
★감 나 무 /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옥탑방 / 함민복
눈이 내렸다
건물의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서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단면으로 잘려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招魂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리는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전구를 갈며 / 함민복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봄꽃 / 함민복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물고기 / 함민복
부드러운 물
딱딱한 뼈
어찌
옆으로 누운 나무를
몸속에 키우느냐
뼈나무가 네 모양이었구나
비늘 잎새 참 가지런하다
물살에 흔들리는
네 몸 전체가
물 속
또 하나의 잎새구나
★초승달 / 함민복
배고픈 소가
쓰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김포평야 / 함민복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 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불사 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탑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김포평야 물 괸 논에 아파트 그림자 빼곡하다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개 / 함민복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가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어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 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시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뀅기에 낀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