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꽃 진 자리 ==
피어날 때나
질 때나
동백꽃은 그저 횃불 같기만 한데
자세히 보면
불이 아니라 핏덩이다
꽃은 무엇이나
해를 바라는 법이지만
동백꽃은
유난히 추워 더욱 그랬다
머무는 곳마다
물 귀한 사막 같아서
동백꽃은 날 적부터 핏물 든다
핏덩이로 진다
진 자리가
피어난 자리와 똑같이 뜨거운 꽃자리는
땅 위에 오직
동백꽃 피고 진 자리뿐이다
(유용선·시인, 1967-)
+== 동백꽃 ==
붉은 핏덩어리 같은
동백꽃 꽃말을
오늘에야
뒤늦게 알았다
'그대만을 사랑해.'
그래
사랑이었구나
단 한 사람을 위해
온 마음 모아 살았기에
저리도 붉게
저리도 뜨겁게
활활 불꽃 되었네
불타는 심장 되었네.
(정연복·시인, 1957-)
오동도의 동백꽃 /정세일
오동도 섬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면 산위에서
꽃을 피우는 동백꽃 들은
꽃이 피고 지면은
내년에
피울 꽃을 피우기 위해
벌써부터 꽃봉우리를
가슴에 달 준비를 합니다
일년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 때문에
언제나 가슴 설레임이 있고
언제나 잠못이루는 날들이
길게 있습니다.
동백꽃 / 손병흥
한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붉게 피어나
온갖 시련마저도 굳건히 견디어 내고서
못내 시들지 않은 채 낙화하는 유일한 꽃
애타는 사랑이나 기다림이란 꽃말과 같이
향기 보단 붉은색 분홍색 등 화려한 빛깔로
새들을 유인하려고 꽃망울 터뜨리는 그 자태
꽃을 피울 때나 질 때도 변함없는 아름다움
미련 없이 온몸 던져서 꽃답게 지는 본성처럼
선홍빛 스며드는 한결같은 삶 추구하는 고운 모습
동백꽃에게 / 권오범
조금만 더 버티면 바위마저 들썽댈 봄인 것을
무에 그리 서둘러 꿈을 접는가
살다 보면 천륜마저 끊고 싶은 마음
어디 그대뿐이랴
눈부신 그 미모에 취해
살랑살랑 맴돌았을 바람
느닷없이 뒹구는 몸뚱어리 쓰다듬다
자책 못 이겨 까무러치면 어떡하라고
도톰한 입술에 미소만 걸쳐도
벌 나비 사족을 못 쓰고 달려와
인정사정없이 빨아대는 키스에
환희로 자지러질 것을
우리 이제
전생의 아픔일랑 호명하지 말자
사랑만 버무려먹고 살아도 아까운 생
에먼 햇볕마저 죄책감으로 스러지게 하지 말고
동백꽃 지다 / 고은영
계절의 길목
기우는 네 심지에
타들어 가는 사랑의 혼절 음은
핏빛보다 더욱 곱고 설웁네라
흘러가는 것들은 어느 세월에 건
돌아올 그 무엇보다 더욱 아름다웠느니
정 염의 가슴에 어찌 뜨거운 사랑마저
너보다 더 붉다고 하랴
진눈깨비 홀로 저며
고통의 근종에 불 같은 열꽃이 일고
다홍 같은 고름으로 양수 흘려 피운 넋
애달고 처연하니 네 고움도 잠시라
초경 같이 말간 얼굴
통증에는 비운의 만개도 잠시라
오히려 아름다워 아픈 얼굴임에랴
낙화하는 모진 절망
섧디 섧은 순결의 체취로
어이할꼬, 흐득흐득 우지마라
방안에 핀 동백
홍은택_
겨울이 가기 전에 꽃피고 싶었다 꽉 다문 잇새로 아뜩한 어지럼증이 새나왔다
이 방을 떠나야 한다 냉골의 장판에 싸늘한 몸을 세우려는 순간, 방안의 가구들
이 휘잉 돈다 채로 휘갈긴 팽이처럼 내 몸이 돈 것도 같다 몸 속에 붉게 피멍드
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캄캄한 방, 사방 벽에 별들이 돋아 무서운 속도로 돌
고 있다
춥다 지상에 서있는 것들 모두 이 어지럼증을 견디고 있나 눈을 감아야 환히
보이는 회전의 관성, 너를 중심에 두고 내가 도는지 내 속을 들여다보며 나 스스
로 도는지 문밖 바람이 채찍으로 내 정신의 몸통을 후려갈긴다 정수리 끝으로
몰리는 피, 핑그르르 원심분리 파편으로 피는 붉은 꽃잎들!
허공
김영미_
어디를 들이받는지 옷을 벗다보면
늘상 여기저기 피멍이다
통증이 피었다
진 자리
떨어진 동백 서너 송이
어디에 심하게 받쳤는지
석달 열흘 내내 정신이 멍하다
장산역을 내렸을 때
필히 들고 와야 할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멍청은 허공의 다른 말
멍청해진다는 것은
몸에
허공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말
내가 지금 나온 곳이 9번 출구던가
오락가락 헤매기를 한참
7번 출구 밖 다리를 쉬었던 돌부리에
거적때기로 버려져 있다
그 속에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머리와 가슴이 없다
내가, 허공이다
흰동백꽃
백영수_
파도처럼 부서지고 싶은 게다
내가 다시 너를
찾아왔을 때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이 겹겹이
하얗다
왔다 가는 바람을 잡아 두고 싶은 것이었을까
퍼런 손등 위로
너는 또 그렇게 새 하얀 눈을 모아 두었지만
핏줄을 내려 앉힌
뿌리를
깜깜한 눈에 나는 결국 알 수가 없었다
깃들어 슬픈 동박새의 자리에
곡(哭)이 아리도록
그 자리마다 노란 꽃 입술은 그래, 용서하지 못할 기억일 게다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_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꽃아, 뛰어내려라
마경덕_
나무도 똥을 눈다, 따신 바람 불면 겨우내 묵은 꽃똥을 일제히 싸대기 시작하는데,
오동도 동백숲, 나무 가랑이 밑에 똥덩이 널렸는데, 여기저기 용쓰는 소리 들리는데, 햐, 디딜 데 없는 똥밭이다.
이 놈들, 사람이 곁에 와도 엉덩이 까놓고 볼일 본다. 그늘에 앉은 연인들의 어깨에 철퍽, 봄마중 나온 아지매 얼굴에
철퍽, 당최 나올 것이 나오지 않는다. 변기에 앉아 연신 끙끙대는 어머니. 무엇이 그리 단단히 막혔을까 길은
사라진지 오래, 살 길이 막막한 몸 속에도 길이 있다는데, 들어가면 나올 길도 있다는데,욕실문 사이로 장작개비
같은 허벅지 보인다. 언제부턴가 문을 열어 두고 볼일을 보신다. 답답해, 답답해, 자꾸 문을
열어젖힌다. 붉은 동백을 피우신 어머니. 서서히 몸이 닫히는 중이다. 창 밖으로 또 봄은 가고.
겨울 선운사에서
이상국_
누가 같이 자자 그랬는지
뾰로통하게 토라진 동백은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절 아래 레지도 없는 찻집
담벼락에서 오줌을 누는데
분홍색 브래지어 하나 울타리에 걸려 있다
저 젖가슴은 어디서 겨울을 나고 있는지
중 하나가 잔뜩 허리를 구부리고
고해(苦海)만한 절마당을 건너가는 저녁
나도 굵은 체크무늬 목도리를 하고
남이 다 살고 간 세상을 건너가네
낯익은 밥 냄새
이시하_
저노무 동백
내년엔 파버려야 쓰긋다
둥근 뼈가 마늘 쪼개다 하는 푸념
동백이 엿듣고는 파르르 떤다
내 몸에 오소소 소름 돋는 소리
살갗들이 귀 쫑긋 세우는 소리
어무니, 버릴 거면 저 주세요
오이야, 후딱 가져가그라
내 몸 하나 지탱허기두 구찬은데
성성한 저것을 우예 돌보누
어여 파가라, 하신다
당신 가신 후
혼자 남을 동백이 노상 근심인 게다
잘 살까 싶은 게 애물단지인 게다
흙까정 퍼가라, 낯선 곳서 살려믄
지 먹던 밥 냄새라도 맡아야지
나무에게도 고향이란 게 있을까
나고 자란 곳의 바람, 하늘, 햇빛, 눈, 비 같은 것들을
나이테 사이사이에 끼워두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때로 저 먹던 밥 냄새 그리워
시름시름 말라가기도 하는 걸까
마늘을 다 쪼개신 어머니, 휘둘휘둘 나가신다
나는야 죽을 때까정 여그, 내 밥덩이 먹구 살란다,
하시며
동백을 보며
이향아_
봄이라고 너도나도 꽃피는 게 싫다
만장일치 박수를 치며
여름이라 덩달아서 깔깔대는 게 싫다
봄 여름 가을 꿈쩍도 않다가
수정 같은 하늘 아래 기다렸었다
마지막 숨겨 놨던 한 마디 유언
성처녀의 월경처럼 순결한 저 피
헤프게 웃지 않는 흰 눈 속의 꽃
사람들은 비밀처럼 귀속말을 하며
늦게 피는 꽃이 무서운 꽃이라네
발끝으로 숨을 죽여 지나가면서
늦게 피는 꽃이 그중 독한 꽃이라네
맴돌다가 맴돌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이
늦게 피는 꽃이 처음 피는 꽃이라네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송재학_
백련사 동백숲 근처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성성은 잘려진 분지를 둥글게 감싼다
어떤 흉터라도 희고 부드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잎은 범종의 공명으로 두터워졌다
번개도 그 나무의 속을 엿볼 수 없다
혹한만이 그 나무를 서서히 열어 보인다
동백이 피운 꽃이란 동백이 스스로 불켠 창의 넓이
붉은색의 극점까지 가서 꽃잎으로 흰 눈의 숨은 핏빛을 비교하는
붉은색이란 그때 떠도는 넋에 가깝다
엎드린 꼽추처럼 병을 집어삼킨 둥근 혹을 달고 동백은
다시 움츠린 몸으로 제 신열의 암자를 세운다
무위사
조정_
절 마당에 발 디딜 데가 안 보여
마애 부처가 돌 속에서 나오다가 멈춘다
아이고오 똥도 씨언하게 못 누고 가네
노래하는 새를 찾아 벽화각 돌던 여자가 뛰쳐나가고
죽은 그림에서 산 새를 찾던 여자는 여자대로
동백은 제 꽃을 툭툭 밀어 떨어뜨린다
나도 똥, 눌까 말까
사람들이 해우소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
많은 괄약근이 한꺼번에 나무관세음하는 초파일
앙큼한 꽃
손택수_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리토피아_ 2006년 봄호
백련사 동백숲 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애틋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 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네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물결로든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보긴 걸어볼 참인가
-중앙일보:문예중앙 / 미당문학상수상작품집중에서
동백꽃이 지는 날 / 안도현
나 오래 참았다
저리 비켜라
말 시키지 마라
선운사 뒷간에 똥 떨어지는 소리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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