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시 모음

 

첫눈  /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한설    / 博川 최정순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화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동천冬天  선벽鮮碧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 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덮으면

 

가마솥 꿩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 함께 하겠지요.

 

참새    / 博川 최정순
                   

함박눈 밤새 소리 죽여 소복소복
햇살 받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날 때
참새 무리 먹이 찾아 볏가리 날아들면
재잘재잘 소란스럽다.

 
Y자 나뭇가지에
넙적 고무줄 새총
살금살금 접근
눈치 챈 참새 도망간다.

 
참새 날아오는 길목
곡식 뿌려 놓고
삼태기 부지깽이 고여
줄 매어놓고
기다리던 아버지
포르르 날아든 참새들
삼태기에 가뒀다.

 

구어 먹고 볶아 먹던
아버지처럼 고소한 참새의 맛
지금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겨울 동화   /   博川 최정순
                         

동지섣달 동장군
칼 뽑아 여기저기 난도질
문고리 쩍쩍 손 달라붙고
가마솥 물 꽝꽝 얼고
외양간 소 코뚜레
고드름 맺히는 겨울

 
옷 버리면 어머니에 혼날까
장롱 속 잠자는
한여름 바지 꺼내 입어
콧물 묻은 주머니 얼고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산 중턱 비닐포대 타고
눈길 날아오면
아버지 걱정 담은 눈


나무 낫으로 깎아
팽이 썰매 연 윷가락 만들어 주어
동무들과 재미있었는데
아버지 따라 가버린 겨울의 끝자락에
추억만 대롱대롱.

 

겨울밤   /   博川 최정순
                  

꼬리 없을 것 같은 긴 겨울밤
자유 찾아 와,
감옥 아닌,
감옥 갇힌 아버지
이북 고향 부모 형제 그리움
잊기에 버리기에 너무 마음 쓰라려
눈물 펑펑 쏟으며 처연한 달빛만 보다
고향에서 먹던
절구에 찹쌀 찧어
손바닥만 한 떡 채반 말렸다가
가마솥 참기름 튀겨 자식들 먹였다
사르륵사르륵, 눈 내리는 밤에.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년 만의 폭설을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젊은 심장을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폭설 /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 ......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때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첫눈 / 유종인

 

어제는 수퍼에서 막걸리 한 병 사다 마시고

홀로 잠잠히 취해 잠들었다

초저녁잠은 내처 꿈이 없었다

아니 꿈이었다면 꿈에 밀려 사라졌다

땅이 다른 나라에 사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동안 기르다죽은 고양이와 개들도

모두 물너울 저편의 섬처럼 잠겼다

이상하다

참 이상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세상이 받아쓰기 백 점을 맞는 날이 있다

그저 받아만 놓고 백지로 크게 웃는 날이 있다

하늘 저편 나라에서도 누가

홀로 술 한 동이를 비우고

머리가 하얗게 세는 꿈을 꾸었던가 이하(李賀)

쓰지 말자, 오로지 쓰지 말자

백지에 대한 태만이, 이곳을 비운 사람들에 대한 공복의 예의다

 

대관령 옛길 /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니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주먹눈 / 전동균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을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지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그게 시야!

 

폭설/박이화

 

밤새 보태고 또 보태어 쓰고도

아직 못다한 말들은

폭설처럼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 그리움에 첩첩이 막혀

더 갈데 없는 곳까지 가볼까요?

슬픔에 푹푹 빠져 헤매다

함께 눈사태로 묻혀 버릴까요?

나 참 바보 같은 여자지요?

눈오는 먼 나라 그 닿을 수 없는 주소로

이 글을 쓰는 난 정말 바보지요?

그래도 오늘 소인까진

어디서나 언제라도 유효하면 안 될까요?

끝없이 지루한 발자욱처럼 눈발,

어지럽게 쏟아지는 한길가

빨갛게 발 시린 우체통이

아직 그 자리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군요

한편에선 쿨룩이며 숨가쁘게 달려온 제설차가

눈길을 쓸고 거두어 위급히 병원 쪽으로 사라집니다

, 그렇군요

내 그리움도 이렇게 마냥

응달에 쌓아 두어선 안 되는 거군요

아직 남은 추위 속에

위험한 빙판이 될 수 있겠군요

슬픔에 몸둘 바 몰라

저 어둔 허공 속 지치도록 떠도는 눈발처럼

, 당신 기억 속에 쌓이지 말았어야 했군요

그러나,

그러나 그 사랑이 전부이고 다인 나에게는

해마다 어디로든 추운 겨울은 오고

큰 눈 도무지 그치지를 않네요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폭설/김명인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폭설/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찍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직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업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

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 하우스도 꽃집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루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 사랑이란

저러한 대적(大寂)의 이력서다.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나무· ·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 만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하자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설야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의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눈 내리는 날 / 류시호

 

높새 바람 지나 간 후

하늘이 무너지며

경부선 기차 기다리는

서울역 KTX휴게실 창밖

부끄러운 속 옷 보이듯

하얀 옷 입은 소녀가 다가오니

눈을 밟고 떠나고 싶다.

낙엽을 밟으며

세월 가는 게 서러워

목마름 달래려

수락산 오르던 것이 어제 같았는데

계절이 성큼

함박눈으로 차창을 가득 메우니

눈을 밟고 떠나고 싶다.

세월에 일그러진 내 마음

하얀 눈으로

마디마디 스며든 악취 씻어내고

가을배추, 시래기 된장국

고향집 노모 생각에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시나브로 되어

눈을 밟고 떠나고 싶다.

 

(삼보초등학교 교사 류시호)

 

임진각 기차역 / 김영재

 

임진각 기차역에 어둡도록 내리는 눈

슬픔 없이 잠이 들 사랑 찾아 날린다

오래된 먹물을 풀어 그리는 그림처럼

빈들에 눈이 내려 땅과 하늘 한몸이다

너와 내가 밟는 발자국도 하나이다

 

눈 내리는 저녁 숲에 서서 / 로버트 프로스트

 

이게 누구 숲인지 나는 알겠다.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내가 여기 서서 눈이 가득 쌓이는

자기 숲을 보고 있음을 못 볼 것이다.

내 작은 말은, 근처에 농가도 없고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한 해 가장 어두운 저녁에

서 있음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내 작은 말은 방울을 흔들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묻는다.

다른 소리라고는 다만 스쳐 가는

조용한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뿐.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눈 오는 지도(地圖) /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눈 쌓인 간이역에서 / 淸夏 김철기-

 

내 삶의 간이역엔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습니다

푸른 채소가 꿈꾸던 들녘

하얀 서리에 절여진 나무 잎새

하얀 눈이 내린 들판

아직 떠나지 못하고 바람으로 맴돌아 다닙니다,

바람이 불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에 달린 씨앗들이 마냥 여물어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내리는

내 가슴에 떨어지는

하이얀 눈송이들

저멀리 지평선 끝으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는 작은동네

길가 간이역에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습니다

수액이 없는 겨울 숲이 되기까지

빛 고운 날들을 가슴에 담고

그대 기다리는 동안

기적소리만 드리우고

눈밭에 남긴 발자국 하나, ,,

세월을 뒤로하고

그대 탄 기차를 난 기다고 있겠습니다,

 

/ 최하림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로 그런 밤엔 불을 찾자

몇날이고 몇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가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겨울까마귀가 중부 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 소리를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바다쪽으로

검은 머리를 빗겨내리며

붉은 불빛 속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도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습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뱃가게에서 솔을 한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습니다.

 

/ 황미나

 

눈은 죽은 자의 눈물이라

죽은 자는 이렇게 말없이

돌아 올 수 없는 이승의 한을

얼어 붙은 눈물로 덮어 버리는 거야

 

눈오는 날엔 / 서정윤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으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안도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눈사람 / 권혁웅

 

눈사람은 온몸이 가슴이다

큰 가슴 위에 작은 가슴을 얹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토록 빨리 녹는 것이다

흔적도 안 남는 것이다.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노강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걔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업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눈길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겨울 / 윤동주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어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램이

말랑말랑

얼어요.

 

눈내림 아침 / 윤이현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동구밖으로 멀어져간

발자국 두 줄

바스슥 바스슥

소리는 따라갔어도

두 줄 발자국은

의좋게 남아있네.

 

겨울 들판 / 이상교

 

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

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 정민기

하얗고

부드러운

양털이 날린다

넓고도

눈부시게

푸른 하늘 목장

양떼들이

뛰어놀며

날리는 하얀 솜털

소복소복 쌓이면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남길 텐데

새하얀 털실로 짠

하얗고 부드러운

엄마의 마음이다

 

/ 함동진

 

눈이 온다.

하느님은

세상 가득히 눈을 뿌려

하얀 도화지를 만드시고

겨울그림 그리시기를 좋아하신다.

혼자서 그리시지 않으시고

아무나 다 불러내어 함께

멋있는 거대한 화판의 그림을 그리신다.

노루 사슴 고라니

산토끼 꿩 다람쥐……

발자국 콕콕콕 찍어넣고

강아지 고양이 송아지 망아지

까치 참새 독수리……

발자국 총총총 찍어넣고

자동차 기차

자전거 우마차……

바퀴자국 줄줄줄 그어넣고

스키 눈썰매

자치기 연날리기……

알록달록 옷입어 꽃피우고

하늘의 하느님은

눈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좋아하신다.

 

 

 

눈 내리는 밤 / 강소천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발자국 / 작자미상

 

눈 위를 가면

발자국이 따라와요

내가 길을 잃을까봐

졸졸 따라와요

눈 위를 가면

발자국이 졸졸 따라와요

 

밤사이 내린 눈 / 백승은

 

밤사이 소리없이 펑펑

눈이 내려 온산은 하이얀 세상

저곳에 무엇을 그릴까?

파랑새를 그릴까? 구름을 그릴까?

아니아니 맛있는 사과를 그려야지

나무는 어디로 숨었지?

저 언덕에 숨었나?

저 바다에 숨었나?

햇살은 요술쟁이

지팡이로 훠이훠이

어느새 하하호호 웃는 나무

 

벙어리장갑 / 신형건

 

나란히 어깨를 기댄 네 손가락이 말했지.

"우린 함께 있어서 따뜻하단다.

너도 이리로 오렴!"

따로 오뚝 선 엄지손가락이 대답했지.

"혼자 있어도 난 외롭지 않아

내 자리를 꼭 지켜야 하는걸."

 

심술쟁이 눈 / 진호섭

 

팔랑팔랑

살랑살랑

하얀 나비눈은 좋아요.

펄렁펄렁

펑펑펑펑

회색 나방눈은 싫어요.

온 세상이

온통 무거운 눈

이글루가 되었잖아.

심술쟁이 눈아!

심술 그만

! !

 

하얀 눈과 마을과 / 박두진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이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오면

한개 한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겨울 / 손관수

 

눈이 오는 겨울

무얼 만들까

솜옷을 만들까

솜이불을 만들까

썰매를 탈까

눈싸움을 할까

어느세 봄이 오겠다.

 

첫눈 / 정연정

 

첫눈이 오면

봉숭아 물들인 사람

소원 빌고

수능시험 본

언니 오빠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첫눈이 오면

첫사랑 만나서

데이트하고

봉숭아 물들인 사람

수능시험 보고

기분이 상쾌해진 오빠 언니

첫사랑 만난 사람

모두 축하해요.

 

눈꽃 / 문지영

 

앙상한 나뭇가지에

어여쁜 꽃이 피었네

장미꽃일까?

아니야 아니야

장미꽃보다

더 예쁜 꽃일 거야

바람이 분다

눈꽃 사이로

꽃봉우리 하나가

기지개 펴고

또 일어났네

온세상이

눈꽃으로 뒤덮혀

내마음도 어느세

하얀 꽃이 되었네.

 

추위 / 박주찬

 

덜덜덜

떠드는 사람들

추위를 건져내려고

애쓰는 사람들

추위는

언제 없어질까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덜덜덜

하아얀 눈이 내리면

온세상은 웃음꽃이 피어요

산타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하하하

아이들은 밖에서

깔깔깔

 

/ 백경렬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눈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밟히고 눌리고

괴롭힘 받는 눈은

하늘이 그리워

눈물 흘려 물이어요

땅에 내린 눈은

안전한 지붕위 눈을

부러워하네요.

 

겨울 바닷가 / 이승민

 

살랑살랑 솨 솨 솨

바람이 신나게 불어오면

찰랑찰랑 차 차 차

바다가 랄랄라 춤춰요

빙글빙글 빙 빙 빙

머리 위 연들이 감장 돌면

팔랑팔랑 파 파 파

높이멀리 떠가는 우리들

뿌우뿌우 뿌 뿌 뿌

뱃고동 소리 들려오면

끼룩끼룩 끽 끽 끽

갈매기 따라따라 춤춰요

와들와들 오 오 오

겨울이 춥다고 웅그려도

덩실덩실 덩 덩 덩

우리들은 모두모두 춤춰요

 

   

눈 시 모음 1

 

눈길 / 최영호

 

한 귀퉁이 헐린

아득한 하늘에서

눈발,

머리에 날리고

쏟아져 내려

기운 어깨에 쌓이고

바람 소리 깊고 먼

불혹의 고갯마루

발끝에 차여

눈을 털고 일어서는,

억새의 마디마다

튀는 조바심

 

눈꽃 아가 / 이해인

 

차갑고도 따스하게

송이 송이 시가 되어 내리는 눈

눈 나라의 흰 평화는 눈이 부셔라

털어내면 그뿐

다신 달라붙지 않는

깨끗한 자유로움

가볍게 쌓여서

조용히 이루어내는

무게와 깊이

하얀 고집을 꺽고

끝내는 녹아버릴 줄도 아는

온유함이여

나도 그런 사랑을 해야겠네

그대가 하얀 눈 사람으로

나를 기다리는 눈나라에서

하얗게 피어날 줄밖에 모르는

눈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결한 사랑을 해야겠네

 

눈발을 타고 / 김지하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머리칼 휘날리며

단 한 번 남쪽 하늘 바라보던

당신 얼굴을

나는 어제 보았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

떨어지는 물의 속도를 거꾸로 타고

잉어는 삼단 폭포를 뛰어오른다

내리는 눈발을 타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잠시라도 잠깐이라도

북녘 하늘을 향해

당신 눈빛을 보고 싶다.

 

/ 안도현

 

百濟 하늘을 기어 오르는 새떼여

누가 버린 땅 용케 찾아 다시 버리고 가는

눈발이여

나는 이다

처음으로 부르짖으며

쪽으로 말 몰아 달리던 견훤의

끝나지 않은 끝나지 않은

말발굽 소리여

 

눈사람 / 정호승

 

함박눈 내리면 서울역에

눈사람 하나 만들어야지

손 시리면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배고프면 군고구마 떡볶이를 사먹으며

하루종일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다가

내가 눈사람이 되어 늠름히 서 있어야지

사람들이 쓸쓸히 기차를 타면

영등포역에 기차가 다시 멈추면

발돋움

발돋움을 하고 오랫동안

손 흔들어 주어야지

 

눈의 축제 / 김남조

 

불시에 기억난 듯

찾아온 손님

백설 분분,

억만의 나비떼,

만발하는 흰빛의 황홀,

환경오염의 땅에

이리 지순함 괜찮은가

얼음강에도 눈

거대한 수정거울에

수정부르서기 부슬부슬 내리는 이거

산성눈

그런 것일 순 없지

불인두처럼

살결 데일 꺼야 꺼야...

소리치며 뛰어 내리는

화끈한 순종의

그 백설이고 말고

한 초월자 임하시어

혈관 실꾸리 자꾸자꾸 풀어

땅 속에도 물 밑에도

피가 잘 돌아,

투명한 보석두레박의

피곤 접곤 하시는구나

천상의 정령들이여

얼음과 소금으로

사람의 세상을 소독해다오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해다오

누구라도 참기 어려운

매혹의 흰 살결에

바람들 흘려 뒤쫓아가는데

아름다움이여

절망함으로

차라리 나는 평안하다

눈이여 땅끝까지 내려라

내려라 내려라

 

눈 위에 쓴 시 /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주먹눈 / 전동균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돌아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면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 김용화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나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첫눈 -첫사랑 / 조문경

 

눈도 코도 발가락도 없는 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첫눈이다, 첫 눈

처음으로 온 눈을 첫눈이라고 한다

처음 한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한다

처음 한 경험을 첫경험이라고 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가고 오면서

운명의 흉터처럼 맞이하는 그런

여지껏 처음 한 사랑을

그저 첫사랑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인즉 맞다

이제 보니 첫사랑은 해마다 올 수도 있다, 새로움을 열며

첫눈처럼 형체도 없이

첫눈처럼 짧은 느낌으로만

그렇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일 수도 있다

날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갔다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설레임은 첫사랑이다

사람들은 해마다 첫눈을 기다린다

 

저녁눈 /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 덮인 마을 / 신위

 

나이 들어 시를 쓰매

좀스러운 일은 다 버렸어라

잠이 적어지니 지난 일들 꿈꾸기 어려운데

겨우내 맨밥을 먹고 소금기마저 지웠어라

대나무를 꺾지 않으려 바람은 섬돌을 울리고

책을 읽으라 흰눈은 처마를 비추네

흰눈 속에 아늑히 묻힌 집들 그리고 싶어

정자 위에 올라 오래오래 바라보네

 

- 주요한

 

인경이 운다. 장안 새벽에 인경이 운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흰 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차디찬, 벗은 몸을 밤의 앞에 내어던지는 거리거리는 아편의 꿈속에서 허기적거릴 때, 밤을 새워 반짝이는 빨간 등불 아래 노는 계집의 푸른 피를 빠는 歡樂(환락)의 더운 입김도 식어져갈, 장안의 거리를 東西(동서)로 흘러가는 葬事(장사) 나가는 노래의 가-餘音(여음)이 바람 치는 긴 다리 밑으로 스러져갈 때, 기름 마른 등불이 힘없고 긴 한숨소리로 過去(과거)嘆息(탄식)을 겨워하면서 껌벅거릴 때, 꿈속에서 꿈속으로 웅웅하는 인경소리가 울리어간다. 새벽 고하는 인경이 울리어간다. 눈이 녹는다. 東大門(동대문) 높은 지붕 우에 눈이 녹는다. 청기왓장 냄새, 낡아가는, 丹靑(단청) 냄새, 멀리 가까이 일어나는 닭소리에 밤마다 뚝딱이는 도깨비떼들도 아름드리 기둥 사이로 스러졌건마는, () 아래로 기어드는 바람소리는 아직도 悽愴(처창)反響(반향)을 어둑신한 天井(천정)으로 보낼 때마다, 아아 무슨 설움으로 가슴막힌 바람소리를, 들으라 저기 헐어져가는 돌담장에서, 해마다 뻗어나는 머루잎 아래서 바람이 슬프게 부는 피리소리를. 흩어지는 눈에 섞여서 슬픈 그 소리가 나의 마음속에 부어내린다. 아아 눈이 녹는다. 새파란 이끼 우에 떨어지는 눈이 녹는다.

까치가 운다, 장안 새벽에 까치가 운다. 三角山(삼각산)나무 수풀에 퍼붓는 눈에 길을 잃고서, 어제 저녁 지는 해 빨간 구름에 표해두었던 길을 잃고서, 눈 오는 장안 새벽을 까치가 울며 간다. 까치가 운다.

, 인경이 운다, 은은히 일어나는 인경소리에 눈이 쌓인다. 장안에 넓고 좁은 길이 눈에 메운다. 님을 못 뵈고 죽은 색시의 설움에 겨운 눈물이 눈이 되어 나린다. 먼저 해 봄바람에 지고 남은 흰 복사꽃이 죄 품은 선녀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나린다. 안개에 싸인 아침은 저 높은 구름 우에서 남모르게 밝아오지마는, 바람조차 퍼붓는 눈은 장안거리를 가로막고 외로 메운다. 그침없이 끝없이 쌓인다, 쌓인다,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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