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상자 안의 신화 - 박건호

나는 어렸을 때
하늘에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초등학교 시절에 알았다
그래서 비밀을 간직하기 시작했다
뒷편 서낭나무에서 잡아오던 귀신도
여름 밤 우물가에 날아다니던 도깨비 불도
보지 않았던 것으로 했다
세상을 알지 말자
세상은 알면 아는 것 만큼 꿈들이 무너진다
그리하여 나의 어린 시절은 설레임과 함께
신화의 기슭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가
첨단과학 시대인 요즈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사건들이
가끔씩 나를 놀라게 한다
유리상자 안에서 시치미를 떼는 자
누구인가




★나무 - 김용택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가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강물에 눈이 오고 있었어
강물은 깊어졌어
한없이 깊어졌어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다시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지
그냥,
있었어
  

 

 

★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벽지를 바르며 - 고광근

 

일요일 아침
우리 가족 벽지를 바른다.
돌돌 감긴 벽지를 펼치니
화들짝 피어나는 꽃무늬

새해에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거라던 어머니
이사 대신
누렇게 바래 버린 벽지 위에
새하얀 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우리 가족 서투른 도배는
꽃무늬가 자꾸 어긋나고
쭈글쭈글 오그라들어도 신이 났다.

한나절 도배를 하고 돌아보니
벽마다 활짝 핀 꽃송이
우리 가족 웃음 송이
하늘도 새로 도배를 했는지
구름무늬 푸른 벽지를 두르고
창문 가득히 푸르게 비쳐 온다.

 

 

★아버지 보약 - 서정홍

형과 내가 드리는
아침, 저녁인사 한마디면
쌓인 피로 다 풀린다는 아버지
'58년 개띠'입니다.

나이는 마흔하고 아홉입니다.
이제 오십 밑자리 깔아 놓았다는
아버지 보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뭇잎을 닦다 - 정호승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햇빛이 말을 걸다 - 권대웅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감자의 맛 - 이해인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도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뱃속이 환한 사람 - 박노해

내가 널 좋아하는 까닭은
눈빛이 맑아서만은 아니야

네 뱃속에는 늘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이기 때문이야

흰 뱃속에서 우러나온

네 생각이 참 맑아서
네 분노가 참 순수해서
네 생활이 참 간소해서
욕심마저 참 아름다운 욕심이어서

내 속에 숨은 것들이 그만 부끄러워지는
환한 뱃속이 늘 흰 구름인 사람아


★강 - 황 인 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칠 것 같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말빛 - 이희중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그 책들을 읽으려 할 때

그 산을 오르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그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곁에서 당신들은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삶은 결국 내가 그 책을 읽은 후 어두워졌고

그 산을 오르내리며 용렬해졌으며

그 사람들을 만나며 비루해졌다

그때 덜 자란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야 했고

그런 내게 당신들은 도리 없는 범례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그 말을 해야 했다면,

누구한테선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했다면

그 누구도 필경 당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신들은 늘

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

사과와 사죄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

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

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

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

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

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엇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

 

 

 

★기적 - 마종기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ㅡ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눈보라 - 황지우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등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큰 손 - 박 덕 중


없음에서
있음이여

있음에서
영원한 있음이여

있음에서
없음으로 돌아가게 하심이여

당신의
큰 손 하나로
그렇게 됨이여


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참 맑은 물살 - 곽재구
- 희문산에서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마음 - 곽재구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 군데 입니다
작은 창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수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희망을 위하여 -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절망을 위하여 - 곽재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칠석날 - 곽재구

우리 할머니
채송화 꽃밭에서
손금 다 닳아진 손으로
꽃씨 받으시다가

이승길 구경 나온
낮달 동무 삼아
하늘길 갔다

반닫이 속
쪽물 고운 모시적삼도
할머니 따라
하늘길 갔다


★나목 - 박인걸

자신의 무성함을 뽐내며
거센 바람에 흔들려도
가지 끝의 한 잎까지도
악착같이 붙들고 살더니
입동(立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구나.

남은 것 하나 없이
발가벗은 몸으로
겨울 한 복판에 선다 해도
적나라한 모습에서
너의 참 모습을 읽는다.

거칠 것 하나 없는 홀가분함
흔들리거나 꺾일 일 없는 자유
숨길 것 하나 없는 자신감
있는 그대로 다가서는 친근함
자연 그대로의 정다움에서
나도 너처럼 나목이 되고 싶다
 
 
 ★산책 - 용혜원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있다
나만이 걷는다

시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치고 힘들고 어지러웠던
일상의 삶을 잠시 떠나는
쉼표의 시간이다

발끝에서 발끝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볍게 걷는다
심장이 따뜻해진다

눈으로 다가오는 푸른 나무들
마음으로 생명을 읽어 내린다
코끝으로 다가오는 싱그러움을
가슴에 담는다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불이 켜진 창마다 - 박목월


밤늦도록
불이 켜져있는
창을 생각한다.
불빛 앞에서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위대한 인류의 흥망과 업적을 공부하는
젊은 날의
흰 이마와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에의 확신과 신뢰로
오늘을 가꾸는
진리의 꽃나무.
비약에의 푸른 날개.
밤 깊도록 짜고 있는
꿈의 자리.
참으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성의를 다하는
심야의 집중
씨앗의 의지.
물론 내일은 오게 된다.
신뢰와 확신과 인내의
가지마다
만발하게 꽃피는
꽃나무의 축복.
더욱 참되게 아름답게 살려는
의욕의 지평선 위로
찬란하게 동트는
장미와 순금의 새벽.
미래의
신비스러운 베일을 벗고
면사포로 앞을 가린
소망의 신부.
정오의 하늘을 나는
희고 든든한 이상의 나래.
진실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밤 깊도록
불을 켜놓고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역사를 공부한

넉넉한 문맥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어린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그날을 위한
오늘의 발돋움
오늘의 열중.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창마다
신의 축복이
서려 있다.


★부드러운 직선 - 도종환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이 치켜세운 추녀를 보라한다
뒷산의 너그러운 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 발짝 물러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러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철 푸름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행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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