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하는 모든분들 읽어바야할 글이라 싶어 가져왔습니다


공모전과 서예교육

의석 홍우기


Ⅰ 서언


두꺼운 종이에 빳빳하고 짧은 붓으로 여러 가지 색을 칠하는 서양화에 비해, 서예는 얇은 종이에 부드럽고 긴 붓으로 단번에 그어 완성하는 일회적이고 찰나적인 예술이다. 다시 말하면 서예는 맑은 인품과 축적된 학문이 온몸에 흠씬 녹아들었다가 일시에 한 획으로 분출되는 순간예술이다. 서예는 원래 실용의 범주에서 사용되었으나, 붓이 주요서사도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美的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예술의 경지로 승화하였으며, 실용을 뛰어넘어 보고 감상하기 위한 문화로 발전하였다. 서예는,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전람회문화로 변화하였는데, 전람회중에 서예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공모전이다.

국전이 그 수명을 다하고, 1990년대 즈음에는, 한국서단이 크게 3단체로 나뉘면서 공모전이 급속도로 늘어나더니, 현재에는 이삼백 개를 넘나드는 수가 생성․발전․쇠멸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시기이며, 인터넷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서예개인전․그룹전․회원전이 홈페이지나 서예전문카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얼마든지 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서예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가 있다. 이제는 국전시절과 같은 권위의식이 통하지 않는 시기이다. 공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고는, 서예가 실용적인 면에서 예술적인 면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있었던 한국의 20세기 서예공모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서예가 흥성하고 침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공모전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짚어보고자 한다. 또한, 21세기 인터넷시대에 심사위원․출품자․관람객이 함께하는 공모전과, 서예이론에 대한 연구가 미약한 한국의 서예계에 논문부문의 도입을 제시하면서, 우리 서예계가 공모전을 어떻게 운영하여, 어떻게 서예계를 활성화시키고, 공모전과 서예교육, 서예교육과 공모전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공모전의 변천


1. 실용에서 예술로

처음에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고 사용했던 것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갖가지 서사재료가 개발되었고, 그에 따라 문자를 사용한 사람들의 심미의식이 작용하면서 필획과 결구가 정리되었고 각종의 서체가 만들어졌다. 한글이나 한문의 각종서체는 모두 당시의 서사재료와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실용적인 면에서 사용되었던 서체이다.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편지글․竹簡․冊書․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각종 碑文 등도 모두 당시 발생했던 사건과 사람에 대한 사항을 종이나 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료에 기록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미적인 면도 있지만 모두가 실용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 실용서예1)는 서예의 기본적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기서 잠시 信札에 관한 구양수의 의견을 잠시 들어보자.


이른바 帖이란 그 일이 거의 모두 조문이나 애도문, 또는 안부를 묻는 말, 또는 이별을 전하거나 소식을 통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로 집안의 식구나 친구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것으로 불과 몇 줄의 글에 지나지 않았다. 대개 처음에는 잘 쓰려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표일한 필치에 흥이 나서 써내려가다 보면 혹은 예쁘기도 하고 혹은 밉기도 하면서 모든 형태가 저절로 나온다.2)


이를 통해 보면 帖은 일상적인 교류과정에서 씌어진 것이지만, 그 속에 작가의 표일한 필치와 흥취가 담겨있음으로 해서 예술적인 면이 드러나고 법첩으로까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옛날사람들은 거의가 소폭의 형식인 手札․詩稿를 冊頁이나 手卷으로 만들어 손안에서 감상하는 자신들의 書齋文化를 형성했을 뿐, 서예전을 열거나 서예전에 출품하기 위해 글씨를 쓰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문인사대부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수단에 불과할 뿐, 예술을 위한 궁극적 추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명나라 중엽이후 서예작품을 벽에다 걸어놓고 감상하는 條幅․對聯 등의 형식이 점차로 완비되었다. 즉 책상에서 읽던 서예가 벽에 걸어놓고 보는 서예로 작품의 형식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작품의 크기도 정밀한 소품에서 규모가 큰 대작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서예가 전람회문화로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3) 오늘날의 서예는 전적으로 감상을 위한 예술형식이 되었다. 일반적인 글씨마저도 이제는 거의 펜을 사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붓을 사용하여 편지를 쓰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랑방에 선비들이 모여 책을 베끼고 편지를 쓰는 모습은 인쇄와 복사,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특이한 괴물들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릴 기세로 밀려든다.


2. 鮮展과 國展시대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귀족의 저택이나 서당에서 명가(名家)의 서화를 완상(玩賞)하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미술전람회는, 1915년 고희동(高羲東)이 도쿄[東京]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개인전람회를 연 것이 처음이며, 1921년 서화협회4)에서 ‘제1회서화협회전’을 개최한 것이 한국에서 열렸던 단체미술전람회의 효시이다. 이 전람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던 1939년까지 19회전을 가졌고, 1922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5)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회전을 개최하였다. 선전은 일제강점기에 열렸던 전시였음으로, 일부인사들은 친일적인 성격을 띠었고 일부의 뜻있는 인사들은 항일적인 성격을 가지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1932년 ‘조선서도전람회’로 분리된 이후에는 친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완용과 김돈희 등이 심사에 참여하면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서예는 여러 가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이 한글전용6)이란 어문정책이다. 한글전용정책은 국민들이 한자를 멀리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고, 한자로 적혀있는 글이나 서예작품을 독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우리 선인들의 생활과 철학을 이해할 수가 없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된 지 3일 후 서울에서는 조선문화건설중앙위원회(약칭 문건)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설립되었다. 격동기에 만들어진 여러 예술단체들이 차츰 정비되어가면서, 1948년에 결성되었던 조선미술협회가 1949년 대한미술협회7)로 개편되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8)를 경복궁전시실에서 개최하였다. 국전은 그간의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서 1981년까지 30회에 이르는 동안 (6․25동란 기간에는 중단되었음) 이 나라 서단의 주춧돌과 기둥이 되는 서예가들을 배출시킴으로서 서단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냈다. 국전의 주최기관과 주관기관으로 1~16회까지는 문교부가 담당하였고, 17~30회까지는 문화공보부와 운영위원회가 담당하였다. 국전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고 추천 초대작가의 엄격한 구분이 제도화됨에 따라 서단 전반이 매우 경직되고 수직적인 상하의식이 팽배하였으나, 기초가 매우 빈약했던 서단에 전통서예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임서를 강조하면서 법고의 시대가 열렸다. 국전시대의 개막과 함께 서예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지망자들이 차츰 증가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동안 경향각지에 사설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9) 1960년대 후반 학교교육에서 습자시간이 사라짐에 따라, 서예는 자연 사숙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 이후 점차 서예학원이 활성화되면서 서예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3. 미술대전과 새로운 질서

1981년 30회를 끝으로 국전이 막을 내리고, 1982년에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10)을 개최함에 따라 미술대전시대의 막이 열렸다. 그 주최기관도 문화공보부에서 문예진흥원으로 이관되고 종래의 추천 초대작가 제도도 편대미술초대작가 제도로 통합개편되면서 서단의 활동연령층이 한층 젊어졌다. 이에 따라 종래와 같은 권위주의적 경향이 약화되었고 서예가들의 개성적인 창작활동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88년, 서예인의 보금자리 ‘예술의전당 서예관’이 개관되면서 서예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이곳에서는 공모전․그룹전․개인전․기획전을 비롯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다. ‘한국서예백년전’ ‘국제현대서예전’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고려말․조선초의 서예’ ‘조선중기서예’ ‘조선후기서예전’ ‘조선왕조어필전’ 등을 의욕적으로 펼쳐보임으로 해서 서예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한국서예청년작가전’을 열어 의욕적이고 감각이 풍부한 젊은 서예인들의 시각을 통해 서체의 다양화와 파괴적인 모습을 선보였고, 변화를 추구하고 연구하는 풍토를 진작시켰던 것은 한국서예발전에 대단히 큰 공헌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서단은 1989년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변혁의 조짐과 사건들이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한국미술협회11)로부터의 분리독립을 표방하면서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되었고,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와 한국서예협회의 화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국서가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서예대전12)과 대한민국서예전람회13)가 상호보완과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공모전에 대한 불신은 현장에서 직접 쓰고, 그 현장에서 즉시 심사하여 발표하는 휘호대회로 이어졌다. 국제서법예술연합에서 주최하는 ‘전국휘호대회’ 나, 예산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전국서예백일장’ 등이 그것이며, 미술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서예대전’은 공모작과 휘호작을 합산하여 심사하는 방식으로 작가들을 선발하였다.

서단이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술협회․서예협회․서가협회는 공모전의 권익과 공정을 위하여 서로간에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갖가지 혼란과 후유증이 생겨났다. 한편, 3단체의 초대작가들이 함께 ‘한국서예초대작가전’을 열어 서로간의 화합을 다지기도 하였고, 일발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전임대통령및현대서예가백인초대전’을 열었으며, 2004년에는 ‘현대서예가백인포럼’ 등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각 서단의 작가들은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통해 서단 서파의 경계를 넘어 발표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광명미협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서예한마당’에서는, 30명의 심사위원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정하게 채점하고, 심사점수를 즉석에서 집계하여 현장스크린에 발표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한국서도협회 서울․경기남부지회에서 주최하는 ‘한남서도대전’에서는, 서예이론정립을 위하여 논문부를 신설하였고, 또한 인터넷카페회원들이 투표를 하여 대상을 선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서단에서 불합리하게 실행되고 있는 공모전의 단점을 보완하여 서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서예계도 변해야 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상은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사라져가고 있으며, 서열과 上命下服의 개념이 아닌 창의와 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다음은 서예계의 변화를 바라는 오후규교수의 지적이다.


디지털 사회는 위계질서와 권위의식, 그리고 관습을 거부한다. 대신 토론과 논쟁, 그리고 창조적인 파괴를 필요로 한다. 서예가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바뀌거나 아니면 교육을 통해 이룩될 수밖에 없고, 고전 서예철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14)

Ⅲ. 공모전의 효과


1. 공모현황

오후규선생이 그간 월간서예나 한국서예학회에서 발표한 서예연감을 보면, 1999년에는 개인전이 57건 공모전이 153건이었고, 2000년에는 개인전이 139건 공모전이 120건 해외개인전이 13건이었으며, 2001년에는 개인전이 127건 공모전이 166/5건 해외개인전이 6건이었다. 2002년에는 개인전이 147건 공모전이 171건 해외개인전이 11건으로 조사되고 있다. 참고로 연도별 공모전신설은 1999년도 5건 2000년도 7건 2001년도 11건 2002년도 14건이다.15)

위의 자료를 통해보면 공모전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데, 여기에는 각 시군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성휘호대회․공모전․학생휘호대회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된 공모전의 숫자는 서예의 활성화라는 이면에 각 서예단체들이 지방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용이 같은 공모전을 매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공모전 심사의 공정성 문제나 여러 가지 이권상의 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각 서단마다 발표되는 초대작가를 보면 세 단체만 합하더라도 1000명이 훨씬 넘고, 여기에 이삼백을 헤아리는 공모전에서 배출된 초대작가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상당히 많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초대작가들이 한국서단에 존재하는데 2002년 서예개인전이 160건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면, 서예시장이 없고 경제침체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미미하다.

이들 전시는 공모전의 영향으로, 당해나 예기비풍보다는 장맹룡비나 장천비와 같이 튼튼하고 힘있는 글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기존의 해서와 예서중심의 단정한 글씨에서 벗어나고픈 작가들의 충동은 목간과 같은 자유로운 글씨를 유행시켰고, ‘필묵정신전’ ‘초신전’ 등에서 보이듯 초서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졌다. 대체로 스승에게 종속되어 있는 글씨가 아직 많이 보이기는 하나, 한글에서는 민간서체나 편지글과 같은 필체가 점점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고, 몇몇 작가는 다양한 법첩을 통해 얻은 다양한 필법을 구사하여 자신의 개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으니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순기능

공모전은 수상작 발표와 함께 대중의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큰 힘이 있고, 신진작가선발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금의 많은 서예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효과로 인하여 공모전의 수상작품이나 입․특선의 선발경향은 서예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鮮展이나 國展時節에는 어느 대가의 서풍이 유행하고, 어느 시기엔 唐楷․北魏楷書․木簡風 등이 유행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공모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은 시각적 충격을 주는 작품을 생각하게 되며, 보다 아름답게, 보다 강하게, 보다 특이하게 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여기에는 미술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서예창작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공모전은, 안목을 갖춘 심사위원이나 선배들의 시각을 통해 자신의 잘잘못을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입상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낙선을 하게 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이를 도약의 기회로 삼는다면 더 큰 발전을 예약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출품자들은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평소보다 많은 시간 작품완성에 골몰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작가들에게 그 동안에 익혔던 運筆․結構․章法 등등에 관하여 보다 자세하고 많은 것을 체득할 수 있게 한다. 작품하기에 좋은 문장을 분석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향을 보기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각종 전시회의 도록을 살펴보기도 한다.

전시장에서는 좋은 작품만이 좋은 학습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작품이다. 항상 눈에 익어있는 내 작품에서는 큰 결점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남의 작품에서는 사소한 것도 쉽게 보이며 좋은 작품에서는 좋은 면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공모전은 많은 이들의 다양한 수준의 작품을 통해 나의 작품을 제고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휘호대회는 공모전에서보다 더욱 많은 것을 얻게 한다. 각지에서 온 다양한 필법을 구사하는 여러 사람들의 운필법을 경험할 수 있고 직접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휘호에만 열중하기 보다는, 숨을 한 번 돌리고, 방해가 되지 않게, 주변에서 휘호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

3. 역기능

한국의 서예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생과 민주라는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중요시해야할 것은 실력과 권위의 문제이다. 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출품자보다 실력이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출품을 하면 입선도 하지 못할 사람이 심사를 하는 경우도 문제지만, 그 심사위원과 관련된 출품자가 많다면, 심사과정에서 사사롭고 불합리한 일들이 적잖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면, 서단은 공정함을 잃게 되고, 그 권위는 땅에 떨어지며 대중들의 마음은 냉정하게 서예를 떠날 것이다. 요즈음은 대상을 수상하고 입특선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그리 없는데, 이것은 공모전이 공정하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는 이들은 그나마 심각한 불황으로 기진맥진한 서예계에 한바탕의 상처라도 입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이의를 제기해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조용히 서단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은 통렬한 시각으로 현시대의 공모전을 바라본 전종주선생의 지적이다.


일부 기성작가들은 부패한 공모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들은 실제로 출품자들을 먹이사슬로 엮어서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명리만을 쫓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16)


또한 전․예․해․행․초에 능한 사람이 각기 다르고, 한글이나 그림에 능한 사람들이 따로 있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다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유로 어쩌다 어느 한 문하에 입문하면 거의가 평생동안 그 문하에서 사제관계를 유지하며 스승과 똑같은 필치를 구사하게 된다. 또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필사적으로 이를 쟁취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글씨를 잘 쓰는 법만 강조하며, 다양한 창작이나 교육내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습만을 해가며 공모전에 출품을 하고 있다.17)

사실, 공모전에 분명한 목적도 없이 출품을 계속한다면 공모전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기간 연구하고, 그 연구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작품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쉽게 마무리를 하게 되면서 질적 수준이 저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Ⅳ 공모전과 서예교육


1. 서예교사

우리나라 서예는 광복이후 60년대 중반까지 초등학교에서 습자시간이 설정되었지만 이후 그것마저 폐지되어 지금은 미술시간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었다. 공교육에서 서예를 허술하게 다루다보니 자연 사교육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사교육을 담당하는 서예교사의 자격기준도 허술한 건 마찬가지다. 이는 서예의 전문성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도 책임이 있지만, 그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지 못하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는 서예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 수백의 서예공모전이 ‘대한민국’을 표방하고 있고 모두가 공정하며 최고 수준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서예를 알지 못하는 공무원들은 이들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공무원의 잣대로 도지사나 장관 등등의 명칭을 들먹일 뿐, 인품․작품제작능력․교수능력 등등을 문제로 삼지 않는다. 삼개단체에서 초대작가가 되었거나, 제법 권위있다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상장도 인정되지 않지만, 초보자들이 응모하는 공모전이라도 상장구석에 ‘○○장관’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바로 자격이 된다. 또한 서예과목교사자격증이 없기에 어느 과목이라도 교사자격증만 있다면 결격사유가 없다. 더구나 지금 성황을 누리고 있는 각종의 문화센터 등은 아예 그러한 기준마저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제는 서예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교직과목을 이수하게 하고 그들에게 서예교사자격증을 만들어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서예교육이 시작되고, 이러한 바탕에서 다시 공모전이 이어지며, 그 공모전의 수상결과가 다시 서예교사 자격기준이 되고 있으니, 이는 원천적으로 상당히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2. 한국적 서예와 서예이론

공모전은 서예교육의 결과이다. 출품자들은 배우고 익히지 않은 것을 공모전에 발표할 수가 없다. 지금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개성이 강한 인터넷시대이다. 그러므로 궁중에서 모든 언행을 통제받고 숨죽이듯이 지낸 궁녀들의 한글이, 찢어진 청바지에 배꼽을 드러내놓은 젊은 이들의 생기발랄한 젊은 가슴속으로는 파고들까 의문이 된다. 古人들이 작은 붓으로 쓴 碑文을, 우리가 왜 그렇게 큰 붓으로 재현하려고 애써야할까를 재고해보고, 서예작품의 규격도 우리의 현실에 맞게 고쳐야한다. 우리나라에 산재해있는 古人의 명적들을 탁본하고, 탁본한 자료중에 학습하기에 좋은 것들은 모아서 법첩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생각해보자. 간혹 탁본을 하러가면 정말 좋은 글씨들이 많은데, 이렇게 무조건 중국의 글씨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가 고민해야한다. 공모전에, 우리 풍의 글씨를 우선해서 선발하면 사람들은 우리글씨에 눈을 돌릴 것이다. 무조건 우리의 법첩이라고 사람들이 배울 리는 만무하다. 정말로 좋은 비문을 교재로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글씨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면, 많은 이들이 배우고 이러한 운동에도 동참할 것이다. 공모전은 서예교육의 결과로 나타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모전을 통해 새바람을 진작시키고 선도하는 역할도 있어야 한다. 누가 안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가능한 곳부터, 나부터 하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의 서예이론과 비평문화정착을 위해 논문부문의 신설이 시급하다. 이는 대학에 서예과가 신설된 지 15년이 되었고, 수도권 몇몇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인재들도 많아졌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서예인들이 서예와 서예이론을 함께 병행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모든 것을 수준있게 잘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공모전에서 한글부문․한문부문․사군자부문․전각부문을 나누어 놓은 것처럼,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한 서예이론을 전공한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논문부문을 신설해야 한다. 글씨가 아닌 논문부문에서 그들을 초대작가로 만들어 그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전념하여 논문을 쓰고, 서론이나 관련 서적을 번역하고, 평론을 하는데 마음을 기울이게 한다면 한국서예문화는 더 큰 발전을 기약할 것이다.

그해 실시된 공모전에 대하여 비평가에게 글을 부탁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예술작품에서 비평은 매우 중요하다.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작품을 보다 의미있게 감상할 수 있고 흥미진진하게 이해할 수가 있으며,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창작의욕을 일으키게 한다.18) 이점에 대하여 김병기선생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공정하고 권위있는 서단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문에 바탕을 두고서 객관적인 평을 할 수 있는 권위있는 평론이 먼저 활성화 되어야한다. 평론이 활성화되면 서단의 어지러운 상황을 교통정리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예단체는 평론의 도움을 받아 남발된 초대작가를 정리하고 공모전 때마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우수한 작품을 입상작으로 선발함으로써 공정성과 권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서예의 장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19)


3. 출품시의 유의사항

공모전에 출품하는 사람들이나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은 다음의 몇 가지를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이는 공모전의 당락과도 직접 관련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하는 것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작품을 하기 전에 우선 내용파악을 하였으면 한다. 예전에는 한문에 문리를 얻은 선비들이 글을 썼기에 당연히 알고 글을 썼지만, 요즈음은 내용은 접어두고 글씨부터 배우는 것이 다반사다. 문인화 작가들도 화제내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림의 분위기와 畵題의 내용이 다르면, 작가의 실력이 의심스러워지고, 겸하여 작품의 격을 심하게 떨어진다. 또한, 자신이 지은 시가 아니라면 반드시 출전을 밝혀두는 것이 좋다. 그 당시에는 기억이 날 수 있어도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면 글씨를 쓴 자신도 어디에서 골라 쓴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감상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알면서 보게 되니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誤字·脫字에 대하여 신중해야 한다. 서예작품은 글을 쓰는 것인데, 정작 글자를 빠뜨리거나 잘못 쓴다면 엉뚱한 뜻이 되기도 하고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서예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문서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요즈음 인쇄되어 나오는 한시를 번역한 책에서 오자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를 부채질한다. 한문독해능력이 약하고 원전을 볼 수 없는 이들은 해석이 되어있는 책을 구입하는데, 이를 참고로 하는 작가라면 아무리 확인해도 오자나 탈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시나 확실히 알고 있는 시가 아니라면, 항상 원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놔야 할 것이다.

셋째, 자신의 개성이 승화된 글씨를 써야 한다. 법첩을 임서해도 모양만을 보고 그대로 베껴 쓰는데 열중한다면 이 역시 창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벌들이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며 흡입하는 바로 그것을, 벌이 아닌 주사기로 빼내서 모아놓으면 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법첩을 늘 임서하지만 나의 개성이란 침으로 법첩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결국 법첩은 법첩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법첩에서 요구하는 주된 用筆․結構․章法을 생각하고, 輕重․方圓․主賓․剛柔․虛實 등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양을 흉내내기에 바쁘다면, 아무리 국그릇을 드나들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 숟가락처럼, 서예의 본령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서예가들이 남의 흉내를 내다가 중도에서 좌절하고 많다. 어느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지만, 정작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4. 관객을 위한 배려

서예전은 해마다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으나 거의가 개막시간 정도만 조금 붐빌 뿐 그 이후에는 관람객이 매우 드물다. 어느 누구는 “사람 보러 가지 뻔한 글씨 보러 가냐?”고 말한다. 이는 서예전이 전시의 본래 목적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작품이 언제나 비슷하고 변한 것이 없다면 뻔한 전시장에 대중들의 바쁜 발걸음이 옮겨질리 만무하다. 이러한 관점을 통감하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는 예술의 전당 이동국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서예인구가 500만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자기작품 남의작품 다 떠나서 그 자체의 감동을 위해 전시장을 찾는 유료관객이 예술의 전당의 기획전의 경우 앞에서 본대로 대체로 50-100명 남짓한 것이 사실이다. 작가만 있고 관객 즉 그것을 소비할 사람이 없는 예술이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를 이제 대중들이 심판하고 있다.20)


작품을 할 때에는, 다양한 고전을 깊이 공부하고 많은 생각을 하여, 훨씬 변해진 모습으로 대중앞에 나서야 하며, 대중들이 관심이 없다고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로 우리가 다가가야하며, 대중을 위한 서예교육에도 눈을 돌려야한다. 서예학원이나 대학․초중등학교․문화단체․문화센터 등에서도 서예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강좌가 필요하다. 이는 전문교육과는 달리 일반인의 관심을 증대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공모전전시장에서 서예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전문작가가 직접 안내를 해주는 방법이나, 그에 관한 자료를 제시해준다든가, 영상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끌어 주는 방법을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서예관련 유적지를 답사하고, 탁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탁본을 해본 사람들은 주변의 비석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고, 자연 거기에 쓰여진 글씨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실제의 작품을 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홈페이지나 인터넷카페를 이용하여 동시에 전시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으려면 우선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고 그만한 비용을 수반하지만, 인터넷은 책상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여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그 내용을 읽어나갈 수 없었더라도, 홈페이지나 서예전문카페의 화면에 작품내용을 비롯하여, 서체에 대한 설명, 작품제작의도 등을 곁들인다면 관객들은 전시장에서보다 더 진하게 감동할 수 있다.

인터넷카페를 통해서 대상작을 결정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공모전이 한문․한글․사군자 등등의 부문에서 최고작을 뽑아놓고 그중에서 대상작을 결정하는데, 바로 이부분에 대한 결정을 서예에 관심이 있는 카페회원들에게 맡겨보는 것이다. 설령 투표를 하러 카페에 입장한 사람이라도 투표만 하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저곳 돌아보며 다른 서예작품을 감상하고, 한시를 감상하며, 서예에 관련한 질문과 대답을 돌아보면서, 서예에 매료될 수도 있고, 그 단체의 목적이나 취지 등을 알게도 될 것이다. 수상작이 결정되면, 대상․우수상․특선․입선작 모두를 카페에 올려놓고 회원들에게 작품사진아래에 ‘꼬리글’을 달도록 한다면, 대중들은 나름대로 그에 대한 평을 쓸 것이다. 이는 심사위원에게는 공정을 유도하고, 대중들에게는 관심을 유도하는 좋은 제도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이들은 서예를 감상하는 층이 될 것이고, 서예작품을 구매하는 층이 될 것이고, 또 서예에 입문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Ⅴ 마치며


작품에 임하는 작가는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공모전에 출품을 하는 입장이거나 어느 누가 심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수상에만 관심을 갖기보다는, 나의 개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여유있게 평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진정한 작가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작품은 스승이 하는 것도 아니요, 선후배가 하는 것도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내 호와 이름을 쓰고 내 도장을 찍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작품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작가의식이 있어야 한다. ‘가훈써주기’와 같은 행사는 가급적 자제하였으면 한다. 그냥 써주면 받아가는 사람들이야 좋겠고,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고맙기 한량이 없겠지만, 그들은 싸구려로 얻은 작품이라고 그냥 싸구려로 생각하며, 다른 기회가 되면 또 그렇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남에게 주기도 하니 더 큰 문제이다. 결국 작가는 서예의 보급을 위해 인심을 쓰고 있으나,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바로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셈이다.

공모전은,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질을 높이고, 다른 서파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다. 하지만, 초대작가나 수상에 목표를 두고, 수상만을 위해 애쓴다면 분명 이는 서예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어느 해에 한번 받은 대상이나 우수상이라는 명예가 언제나 그 사람의 작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부단히 정진하고 연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작가는 언제라도 그 명예와 권위가 추락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서예기법이나 쓰기자체에 대한 교육외에, 관객들이 서예에 친숙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교육방법이나 공모전도 생각해야 한다. 인터넷의 홈페이지나 카페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장에 젊은 학생들을 끌어들여서 이들에게 서예를 알게 하고 서예에 흥미를 갖도록 도와주고, 그들의 느낌을 존중해주며 그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요즘 서예계가 여러모로 어려워졌으나, 이젠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비난하기 이전에 나부터 바르게 선택하고 나부터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알고 있어도 실천으로 옮겨놓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좋은 제도가 있어도 바르게 실천하고자하는 의지가 없다면 역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공모전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지금의 서예계가 진정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간파하여 끊임없이 반영하고 기획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응모자들도 진정 서예계의 미래를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면, 모든 계파를 떠나 동참하고 활성화시켜야 한다.


주)

1) 고대서예는 줄곧 실용과 더불어 떨어질 수 없었으며 서예의 존재형태도 주로 다음과 같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새김과 주조의 수단을 빌어 骨․金․石․碑․崖 등에 형태를 남겼으니, 예를 들면 甲骨文․金文․大小篆․碑誌․墓誌․磨崖文字 등이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쓰는 수단을 빌려 종이나 비단 등에 문자를 남겼으니 예를 들면 書契․公文․信札 등이 그러하다.

2) 郭魯鳳, 「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 中國美術學院博士學位論文, 1999. , p.81.에서 재인용.

3) 郭魯鳳, 上揭書, p.82.에서 내용요약.

4) 서화협회: 신구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向學後進)의 교육 및 공중(公衆)의 고취아상(高趣雅想)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8년 6월 16일 서화애호가 김진옥(金鎭玉)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협회취지서와 규칙을 채택하는 한편 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간사 김균정(金均楨)을 선출하였다.

5) 조선미술전람회: ‘선전(鮮展)’으로 약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오세창(吳世昌) ·고희동(高羲東) ·안중식(安中植) 등이 조직한 서화협회(書畵協會)와 서화협회전이 심상치 않은 민족의식과 주체성 있는 단합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데 주목한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에서의 문화정책을 표방하고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으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정하고 작품을 공모하여 그해 6월 1일 제1회 전람회를 열었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사군자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공모 시상하였으며 1944년 제23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6) 1945년 11월, 사회각계층의 인사80여명으로 ‘조선교육심의회’를 조직하고 각종교육문제를 분과별로 토의하게 되었는데, ‘교과서분과위원회’에서는 최현배 장지영이 크게 활약하고 조진만 황신덕 피천득 등이 이들에 협력하여 같은 분과 소속위원인 조윤제의 반대를 꺾고 “한자사용을 폐지하고 초등 증등학교의 교과서는 전부 한글로 하되, 다만 필요에 따라 한자를 도림(괄호)안에 적어 넣을 수 있음”이란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결의안은 전체회의의 토의를 거쳐 1945년 12월 8일 통과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한글전용”에 대한 최초의 공식결의로서 이것이 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시행된 한글전용정책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안이 통과되자 미군정청은 바로 이를 재가하여 우리나라 각급학교의 교과서는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나오게 되었다. 한글학회, 「한글학회이사회회의록 제1권」『한글학회50년사』, 1771 pp418-41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5.에서 재인용

7) 대한미술협회: 광복 직후 좌익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를 모체로 재조직된 미술 단체이다. 숙명여고 강당에서 가진 준비대회에서 선출된 23명이 전국에서 98명의 회원을 추천하여 결성하였고, 초대회장에 고희동(高羲東)과 평의원 15명, 상무위원 10명이 선출되었다.

8)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하여 국전(國展)이라고 한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미술인의 보호와 육성을 위하여 문교부 내에 미술분과위원회를 두고 여기에서 국전 규약을 만들어 이듬해 11월 경복궁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9) 송하경, 『신서예시대』, 도서출판 불이, 1996. pp.12-14.내용참조.

10) 대한민국미술대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국전) 1982년 1월 16일 제도를 개편하면서 기성작가전과 분리하여 순수한 작가 발굴 및 육성을 위하여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되다가 이후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고 있다.

11) 한국미술협회: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미술협회가 한국미술협회의 모태(母胎)이며, 정부 수립 후 대한미술협회로 개칭되었다. 1955년 위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미술계의 양대 산맥인 홍익대학파와 서울대학파가 갈등을 빚으면서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로 분리되었다. 이후 5 ·16군사정변 속에서 민족미술의 발전 도모와 상호간의 협조를 표방하면서 두 미술가 단체는 통합되었고, 1978년 사단법인체로 등록하여 조직이 강화되었다.

12) 대한민국서예대전: 1989년 사단법인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된 뒤,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6일까지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이후 매년 열리는 서예 공모전이다.

13) 대한민국서예전람회: 198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폐지되고, 1992년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가 창립된 뒤, 이듬해 4월 2일부터 30일까지 제1회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서가협회가 주최하는 서예공모전으로, 한국 서단(書壇)의 화합과 신뢰를 구축하고, 한국 서예계를 빛낸 참신한 신인들을 발굴·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14) 오후규, 「IT시대에서의 서예철학과 서예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101.

15) 오후규, 「2002년도 대한서예연감」『월간서예』, 미술문화원, 2003.2. p.113.

16) 전종주, 「한국 현대서예의 방황과 오류」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79.

17) 최병식, 「한국서예에 대한 재검증과 서예교육의 개선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66. 에서 내용참조.

18) 李完雨, 「21세기 한국서예의 방향」『동양예술』, 한국동양예술학회 2000.

p.38.

1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p.33-34.

20) 이동국, 「서예 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52.


參考文獻

곽노봉,「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 中國美術學院博士學位論文, 199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송하경, 『신서예시대』, 도서출판 불이, 1996.

오후규, 「2002년도 대한서예연감」『월간서예』, 미술문화원, 2003.2.

──, 「IT시대에서의 서예철학과 서예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이동국, 「서예 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李完雨, 「21세기 한국서예의 방향」『동양예술』, 한국동양예술학회 2000.

전종주, 「한국 현대서예의 방황과 오류」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최병식, 「한국서예에 대한 재검증과 서예교육의 개선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이 글은 2004년 9월 4일 광명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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