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름난 여류시인들
1 화예부인(花蕊夫人)(883-926)
화예부인(花蕊夫人)은 혜비(慧妃) 서씨(徐氏)를 일컫는다.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의 왕 맹창(孟昶)의 처가 바로 화예부인이다. 시사에 정통하였고 재모겸비하여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불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충무절도사(忠武節度使) 왕전빈(王全斌)으로 하여금 군사 6만을 이끌고 촉으로 진공하도록 명령하였다. 14만이나 되는 군대를 지닌 촉이었지만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사십년을 풍족하게 병사를 길러왔지만 일단 적을 만나니 동쪽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다음과 같이 읋었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군왕성상수항기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첩재심궁나득지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십사만군재해갑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영무일개시남아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비로 삼았는데
후에 그녀는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진하였다고 한다
화예 부인
○ 화예부인의 신분에 관하여 두 가지 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1. 후촉 맹창의 비가 화예부인인데, 송태조 조광윤에게 맹창이 항복할 때 그녀가 사를 지었다고 한다. 송나라가 들어선 후 후궁이 되어 송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세상에 전해진 화예부인 궁사는 이전에는 대부분 그녀의 작품으로 여겼으나 근인의 고증에 따르면 실제로는 전촉 왕건의 비라고 적혀있다.
2. 오대의 여류시인,성은 서이고 이름자 출생은 자세하지 않다. 전촉 왕건(王建)의 비로서 소서비(小徐妃)라고 불렀으며 호가 화예부인이다. 후주 왕연(王衍)을 낳았으며 왕연이 즉위한뒤 순성태후로 봉해졌다. 그녀는 간신들과 결탁하여 조정을 휘어 잡았으며 벼슬을 팔아 방탕하고 시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同光 3년(925) 후당의 장종(莊宗)이 촉을 멸하자 그녀는 왕연과 함께 당에 투항하여 이듬해 처형되었다. 현재 화예부인궁사(花蕊夫人宮詞) 150여사가 전해진다. 근인의 고증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이 확실한 것은 90 여수라 한다. 궁사는 모두 7언 절구이며, 주로 전촉의 선화궁(宣華宮)에서 즐긴 일을 묘사하였는데 전촉 군주의 황음방탕한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 과장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중국은 성당盛唐 이래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구조가 발달하자, 경제적 상황은 여유로움이 생겨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안사지란 安史之亂(755~763) 이후에는 농촌경제가 피폐해지고 수많은 아녀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생妓生으로 전락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노비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매매도 가능했다. 소위 최하위의 천민계급, 부호나 권세가, 문인, 관료들의 성적인 노리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강요했던 유교의 예법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남성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문학사적으로도 비교적 풍부한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여성들은 사회 통념상 남성들의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개가 불행한 삶을 살다가는 비련의 여성들이었다. 비록 노리개 정도로 하찮은 여성, 그 속에서도 천한 여성들이었지만 문학사적인 측면, 특히 부녀시가婦女詩歌 쪽에서는 전례 없는 명성을 남기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는 중국의 당시를 모은『전당시全唐詩』가 입증하고 있다. 모두 9백 권이나 되는 이 책은 강희康熙 4년(1705) 칙명勅命을 받들어 팽정구彭定求 등이 그 이듬해에 완성, 1707년 성조聖祖의 서문을 붙여 간행되었다. 작자의 수 2천2백여 명, 시의 수는 약 5만 수로 작자의 선후에 따라 배열하고 약전略傳을 첨부했다. 이 속에 당대 여류시인의 작품도 상당히 많다. 여황제였던 무칙천武則天의 작품에서 일반 가정의 부녀자, 기생, 여도사에 이르기까지 2백여 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작품의 수가 비교적 많고 내용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여류시인으로, ‘이야李冶,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수한 신분이라서 궁중이나 일반 규중의 여인들과는 달리, 규범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대체로 자유롭게 남성들과의 교류가 풍부했다. 그래서 자유 분망한 사고를 지녔고, 소재 역시 다양하게 취하여 자신의 감정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당시』에는 이야 18수, 설도 87수, 어현기 50수가 실려 있다. 중국문학사에서 당대는 시의 황금시대였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거개가 중국을 일컬어 ‘시의 나라’라고 한다. 생활의 윤곽과 심미審美경험을 가장 아름답게 응축시킨 중국인 만큼 시를 사랑하고 즐겨 지은 민족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시를 두고서 ‘거울 속의 꽃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고 칭송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당初唐(618~712)에서 힘차게 열린 당시는, 성당盛唐(713~765)에 접어들어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맹호연孟浩然과 왕유王維의 시에서는 삶에 대한 관조는 물론 산수시의 진수를 체험하게 된다. 이백李白(701~762)의 시에서는 웅혼한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고, 시성으로 알려진 두보杜甫(712~770)의 시에서는 성당인의 기백으로 묘사한 안사의 난 전후의 사회상과 민중의 질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불세출의 대시인들이 끊임없이 출현, 당이라는 다양하면서 광대무변한 시세계를 형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사世事에 초연한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대가 드리우는 암류暗流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듯이, 시대의 흐름과 거기에서 건져 올린 다양한 감흥은 시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시詩로써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중에는 모순투성이의 시대를 아파한 시, 회재불우적懷才不遇的 정서를 읊은 시, 또는 정체된 역사의 비극,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가슴 아파하는 심정에서랄까. 때로는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私道가 횡행하고 용기보다 비겁이 고상한 척도로 저울질 되는, 종내에는 인간성 상실로부터 시작하여 포근한 인간애와 깨끗한 양심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이르기까지 비정상적인 세태가 역사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기에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가슴앓이는 여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동양의 전통사상에 있어 이상理想은,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말한다. 천인합일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천도天道와 하나 되게 함이다. 즉 이기적인 탐욕을 극복하고 하늘이 준 인심人心을 바탕으로 인덕人德을 세움이다. 수기치인은 먼저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다음에는 남들을 사랑으로 품고 가르치고 그들도 인격자가 되게 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도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크게 이바지하지 못했다. 당대 여류시인들은 남성에 대해 공세적인 대담성으로 남성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교류를 가졌다. 현대적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여권주의女權主義(feminism)를 선각한 초유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을까. 천으로 멀쩡한 발을 옥죄었던 전족纏足을 풀어 헤친 지 1세기도 채 안 되는 중국에서……. 서양의 평등권 형성과정의 뿌리 역시 그리 오래지 않다.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신분과 계급의 대립 및 국가와 교회의 권력 구조적 형태이다. 이런 문화적 산물은 본질적인 인간과 인간을 사랑하는데 이바지하려는 선하고 자연스런 소질을 가려버린다. 그래서 투쟁해야 할 대상은 문화 전체이며 그 사회 전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악惡이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 자연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다.’라고 한 칼뱅주의자(calvinist)나 루소(rousseau)의 계몽주의啓蒙主義는 미국의 독립 전쟁에 힘을 가해주고, 나아가 로크(locke)의 사상을 전재로 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상과 인간만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인본주의 사상을 주지시켜 프랑스 혁명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얻어진 미국의 독립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한다’라는 독립선언문을 만들었고, ‘프랑스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혁명도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당대에는 기생 이외에도 도사道士라는 특수한 신분이 있었다. 시대가 어지러워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유교 예법에서 벗어나 불교나 도교 등에 귀의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승려나 도사가 생겨났다. 그것이 유일한 피난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속박과 법망을 피해 비교적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충실히 수도에 임하며 종교 계율을 엄수하는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수도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극소수의 여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대체로 개방적이었던 당대의 특수한 역사와 사회적 조건 덕분에 일종의 새로운 부녀자 계층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기생 혹은 도사라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을 가진 소외계층의 여인들이었다. 남성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적인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대의 기생들은 언변에 능하고 시를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모는 그 다음이었다. 당대에 있어 남성 못지않게 여류 시인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을 위하여 희생과 충성을 다해야만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무죄였고 만약 아내가 남편을 때리면 1년 동안 노역을 시킬 정도로 불합리한 구조였다. 그러므로 여기 이 세 여인은 기생 혹은 도사라는 신분으로 특수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신분 탓인지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고 비참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온다. 여인으로서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적 재능은 그대로 작품으로 남았다. 그들이 남긴 처절한 삶의 대가라고 할까. 오로지 삶의 무게와 깊이를 시에 의존했던 것일까. 여하튼 중국의 여류문학 사상 길이 남을 만한 명작이므로 이들의 시세계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2. 이야李冶 이야李冶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중국절강성 서북에 있는 오흥吳興 출신으로 천보天寶 연간(742)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년도는 대략 784년이라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타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시적 재능도 뛰어나, 5~6세 어느 날 부친이 이야를 안고 있었는데, 뜻밖에 시를 읊조렸다는 것이다.…때가 지나도/채워지지 않는 바구니/이내 마음/어지럽기만 하다(經未架却 心緖亂縱橫)…「장미를 읊다(詠薔薇)」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놀랜 부친은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내심 출가시키려고 결심을 했으나 이야는 가정에 매이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교道敎의 여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야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도교는 황제黃帝,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이다. 무위無爲 자연을 주지主旨로 하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의 류流를 받들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미加味하여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술術을 구하고, 부주符呪, 기도 등을 행한다. 이러한 도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도사’라고 한다. 이야는 도교를 구실삼아 도사가 된 뒤에 여러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속박과 유교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보다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애욕의 화신이 되어 방탕하길 작심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관습을 거부하고 모든 속박에서 일탈하고 싶었을까. 가까이했던 고중무高仲武라는 남성은 이야를 평하길, ‘선비에게는 백 가지 행실이 있고, 여인에게는 오직 네 가지 덕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계란[이야]은 그렇지 못하다. 겉모습은 웅장한 듯하나, 쓴 시는 방탕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의 품행이 시에 비하여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남성을 뛰어넘었던 것일까. 사덕四德, 즉 부덕婦德, 부용婦容, 부언婦言, 부공婦工을 지키지 못한 여인. 이야와 친했던 남자는 육우陸羽와 유장경劉長卿이었다. 육우는 차를 무척 좋아해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다선茶仙’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다경茶經』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야가 생활에 어려움이 있거나 병들어 누웠을 때마다, 이야를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육우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장경은 이야를 가리켜, ‘여류시인 중의 호걸이다(女中詩豪)’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러 문사들이 모인 연회가 열렸다. 당시 유장경이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이야가 먼저 운을 띄웠다. ‘산 기운은 해질 무렵이 아름다운가요(山氣日夕佳)?’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장경이 이를 받아, ‘온갖 새들이 기탁할 곳이 있어 기뻐한다네(衆鳥欣有托).’라고 답했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문사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고 받은 두 구절은 모두 도연명陶淵明(365~427, 진나라 시인)의 각각 다른 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엄격한 사회에서 여성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성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배짱과 즉흥적인 시흥詩興이 얼마나 호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이야의 명성이 널리 펴져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궁궐에 들어가서 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이야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에 잡혀갔다는 설도 있다. 이 반란은 당나라 현종 말엽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이 먼저 군대를 일으키고, 사사명이 이를 계승하여 숙종肅宗의 광덕원년廣德元年에 사사명의 아들, 조의朝義가 죽을 때까지 전후 9년간이나 계속된 중국 역사상 유명한 큰 반란이었다. 현종은 촉나라에 망명하여 퇴위하고,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일으켜, 763년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당의 중앙집권제는 파탄에 빠졌고, 중국 고대사회의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야가 이때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올린 것이 발각되어 덕종德宗에 의해 매 맞아죽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참으로 기구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야가 남긴 시 가운데 5편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움, 그리고 원망 (상사원相思怨) 人道海水深 不抵相思半 海水尙有涯 相思渺無畔 携琴上高樓 樓虛月華滿 彈著相思曲 弦腸一時斷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내 그리움은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바닷물은 끝이라도 있을진대 내 그리움은 까마득히 끝도 없구나 거문고 옆에 끼고 누각에 오르니 누각에는 외로운 달빛만이 가득 하구나. 상사곡을 켜노라니 애타는 간장은 한순간에 끊어지구나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한없이 뻗어 나가, 그 깊이와 넓이가 바다보다도 더 막막해옴에 전율한다. 이야의 사모의 정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한성을 지향하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 형언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그리움에 압도되어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야는 가슴 가득한 그리움의 속앓이를 하면서도 그 그리움의 울타리에 갇혀있다. 마침내…거문고를 옆에 끼고 누각에 올라…주체할 수 없는 심경을 달래려고 한다. 하지만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지우기는커녕 되레 달빛은 더욱더 외로움만 북돋울 뿐 천지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인용한 시에서는 이야는 그리움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무엇 하나 감내할 수없이 몸부림친다. 임에게 의탁할 수 없는 그녀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임에게 기대고 싶어도 기댈 수 없는,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받을 수 없는 심화心火. 임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생긴 화풍병花風病,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상사곡을 연주해 보지만 애간장만 태운다. 오지 않는 임이 정녕 이야의 임인가. 이 시는 이러한 그리움과 원망이 축을 이루고 있다.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증오가 된다. 사랑의 늪에 빠진 여인의 일편단심이 전편에 흐르고 측민惻憫의 정을 자아내는 힘, 즉 파토스(pathos)가 아주 굵게 역동하고 있다. 그리고 측은지심이나 연민이나 공감적 비애를 자아내는 정황을 짜임새 있게 묘사하고 있어 애상감哀傷感을 더해준다. 부부 (팔지八至) 至近至遠東西 至深至淺淸溪 至高至明日月 至親至蔬夫妻 지극히 가깝고도 멀기 만한 동쪽과 서쪽이여 지극히 깊고도 얕은 푸른 계곡이여 지극히 친하고도 소원한 부부관계여 위 시는 부부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1행 6언 4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至(이를 지)’가 8자가 들어 있어 시제詩題를 ‘팔지八至’라고 한다. 부부는 촌수가 없는 남남이면서 특별하고 친밀한 이성異姓 관계로서, 낯익은 것 같으면서 낯설고, 속이 깊은 것 같으면서 얕고, 높은 것 같으면서 밝고, 다정한 것 같으면서 소원한 관계임을, 가까움과 멈, 깊음과 얕음, 친함과 소원함으로 매우 역설적이고 상대적이며 모순적인 상극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이 시의 밑그림은 부부의 사랑을 막연하게 가깝고 깊고 높고 밝고 친한 것 같이 긍정으로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되레 멀고 얕고 소원한 것 같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부부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한 심상을 내비치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못하는 이야의 자격지심自激之心에서랄까. 다소 빈축이 엿보인다. 달밤의 이별 (명월야유별明月夜留別) 離人無語月無聲 明月有光人有情 別後相思人似月 雲間水上到層城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달은 소리가 없건만 밝은 달엔 빛이 있고 사람에겐 정이 있습니다 이별 뒤엔 임 생각이 달과 같건만 물 건너 구름을 뚫고 하늘에 이르렵니다. *층성層城 : 곤륜산崑崙山의 정상, 즉 하늘을 뜻함. 현대적 시각에서 이 시는, 시인의 삶과 사실들과 은밀한 경험을 다룬 서정시의 한 유형인 고백시(confessional poetry)이다. 고백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인, 또는 임상적인 세부사항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 담백하게 털어 놓는다. 시의 주제는 형상화된 중심사상이요, 그 의미를 뜻한다. 그러므로 주제는 시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 불가결한 것이다. 인용한 시의 주제는 석별의 정이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 이별을 서두르는 사람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임에 대한 여운은 애달프다. ‘밝은 달빛’과 ‘사람의 정’을 빗대면서 강력한 효과의 압축 은유로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언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이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은 달이 되어 임 계신 곳 어디인지 그리움으로 뒤덮고 싶은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아마 이야는 지금도 달이 되어 밤마다 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봄날의 회한 (춘규원春閨怨) 百尺井樓上 數株桃己紅 念君遼海北 抛妾宋家東 백 척 난간 위에 붉게 물든 복사꽃 아득한 북녘의 임 그리는 신세 홀로 버려진 몸이로다. * 요해북遼海北 : 요해, 요동의 남쪽으로, 먼 북방. * 송가동宋家東 : 이야 자신을 초사의 대가인 송옥에게 버러진 여인에 비유. 봄이 되어 누각에 오른다. 여러 그루의 복숭아 나뭇가지엔 어느새 붉은 복사꽃이 사방에 가득한데 떠난 임은 소식이 없다. 봄이 되니 임 생각이 간절하다. 고독한 외톨이, 임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아닌가 하면서 한탄하고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종결 부분이 ‘송가동’이란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이야 자신이 마치 송옥宋玉(BC290?~222?,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시대말, 의 문인, 작품형식, 내용 모두 굴원의 계승자로 불린다.)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일종의 패러디(parody)이다. 기교로 치면 상당한 기교인 셈이다. 여하튼 이야는 적어도 이 시에서는 자신보다 1천 년여 전의 시인이었던 송옥에게 버림받은 여인에 비유하여 처량한 신세를 읊고 있다. 버들 (류柳) 最愛纖纖曲水濱 夕陽移洞過靑蘋 東風又染一年線 楚客更傷千里春 低葉己藏依岸櫂 高枝應閉上樓人 舞腰慙重煙光老 散作飛錦빈翠裀 * 청빈靑蘋 : 부평초. * 연광煙光 :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뜻함. 연하디 연한 사랑스런 버들가지 굽이도는 물가로 늘어지고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 부평초 사이로 지나간다 동풍은 다시 한 해의 푸름을 물들여 주고 초객은 아득한 봄에 더욱 서글퍼진다 바닥의 잎새들은 물가의 노를 숨겨주고 높은 가지는 누각 위의 사람마저 가리운다 가늘고 연한 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 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가는데 흩어져 날린 솜 비단자락을 휘감아 도누나 여인의 가는 허리의 아름다움을, 그 하늘거림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세류미細柳美’라고 일컬었던가. 푸른 버들가지가 가는 허리를 뽐내며 물결 위에 미풍에 살랑거린다. 그처럼 싱그러운 자태로 젊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때 이야도 많은 남성을 두루 차지하면서 당당했었다. 하지만 가는 세월 무엇으로 막으랴. 회한과 탄식만 가득하다. 이야는 쇠락해진 자신의 늙음을 버들가지에 빗대어 비관하면서 읊은 시다. ‘석양으로 옮겨진 그림자’에서 이미 절망의 늪에 빠진 비극적인 처지를 형상화하고 현실적 상황을 ‘부평초’ 같은 삶, 의지할 데 없는 절대고독을 표출하고 있다. 동부새[東風]가 불어와 산과 들은 모두 푸름으로 물들었지만 옛 초나라의 나그네처럼 외려 봄날은 아득하고 서글프다. 물가에 풀잎들은 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랐고 높은 가지는 이제 사람마저 업신여기는 듯 가린다.…버들가지도 굵어만 가고/아름다웠던 시절도 다 지나는데…에서처럼 시의 바탕이 온통 무채색이다. 절망이다. 세월을 원망한다. 초연하게 세월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탄식과 회한으로 자책한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의 끈은 놓지 않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
3. 설도薛濤
인명사전에 설도薛濤(770~850)는 중국 당대의 명기名妓, 여류시인, 만년에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초당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서쪽의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은거, 그곳에서 많이 나는 양질의 종이에 붉은 빛깔로 부전附箋을 만들어 촉蜀의 명사들과 시로 증답贈答했는데, 이런 식의 전지가 후세에 내려오면서 ‘설도전’으로 유명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도에 대한 기록은 현재 부분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의견이 분분하고 정확한 생몰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대략 대력大曆 연간(768 혹은 770)에 태어났고 대화大和 6년(832)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자면 거의 60세 이상을 산 것 같다. 설도의 자는 홍도洪度(혹은 弘度)이며 원적은 장안長安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 관리직에 있었던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설도는 16세에 관가의 기생이 되어 기적妓籍에 들어갔다. 설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8세에 이미 시를 읊고 지울 줄 알았다. 시적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설도의 명성은 날로 유명해져 꽃을 찾는 벌들처럼 사방에서 남정네들, 특히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설도와 가깝게 문인들은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772~846), 유우석劉禹錫(772~842), 왕건王建(768~830), 장적長籍 등이었고, 장수들은 위고韋皐, 고숭문高崇文, 무원형武元衡, 은문창殷文昌, 이덕유李德裕 등 20여 명이 넘었다. 서천 절도사였던 위고는 설도를 기생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 칭하며, ‘재색을 겸비한 여인’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원형은 설도의 시문의 재능을 높이 사서 ‘교서랑校書郞’이란 벼슬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건의했지만 기생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설도를 여교서고라 불렀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기생을 ‘교서’라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도의 미모에서랄까 시적 재능에서랄까,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연인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리고 연가戀歌를 읊었다. 왕건은「설도에게(寄蜀中薜濤校書)」라는 시를 통해…먼 곳 교변에 있는 여교서 설도/비파 꽃 안에서 문 닫아 걸고 살아가는가./재색을 겸비한 그대 이제는 보기 힘드니/봄바람 다스리는 자도 모두 그대만 못하구나(萬里橋邊女校書 枇杷花裏閉門居 掃眉才子干今小 管領春風總不如)…라고 하며 사모의 심정을 그렸다. 설도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다했을까. 청대淸代 건강乾降 연간에 성도成都 통판通判 왕준汪雋(?)은 이 시를 벽도정薜濤井의 돌비석에 새겼고, 그 비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설도가 당시 대단한 여류시인이면서 명기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아닐까. 원진 역시「설도에게(寄贈薛濤)」라는 시를 통해…임의 말 아름답기가/앵무새 입술을 훔친 듯하고/문장은 봉황의 털을/나눈 듯하다(言語巧倫鸚鵡舌 文章分得鳳凰毛)…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설도는 그런 원진에게 시를 보내어 정을 통했다. 원진보다 10여 살 연상의 여인. 설도가 원진을 만난 시기는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긴 때였다. 특히 설도의 시 중에는 이별 노래의 연작이 대단히 유명하다. 수많은 남자들과의 짧은 만남, 그리움과 원망, 이별의 슬픔들이 여기에 녹아 있다. 설도는 시를 지어 종이에 적어서 틈틈이 여러 연인들에게 보내곤 했다. 지극한 정성이 깃든 시를, 그 종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붉은 색종이였다. 그리고 당시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비록 비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자기 관리에 있어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평생 가정을 가져 보지 못하고 혼자서 살다간 여인, 그러나 많은 문인이나 풍류객들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자유 분망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만년에는 기적妓籍에서 나와서 완화계에 은거하며 지내다가 여도사로 변하여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연인 중 마지막이었던 단문창이 설도의 묘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설도의 생몰년대나 사적이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은 기생이라는 평범하지 못했던 비운의 결과가 아닐까. 지금도 성도에는 설도정이라는 우물이 있어서 이 우물에서는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붉은 종이, 설도전도 이 물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설도의 시는 주로 남자들과의 음풍농월, 자유로운 사생활, 그런 반면에 신세 한탄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담고 있다. 봄날의 그리움 (춘망사사수春望詞四首)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間相思處 花開花落時 攬草結同心 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絶 春鳥復哀吟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那堪花滿枝 翻作兩相思 玉筯垂朝鏡 春風知不知 * 결동심結同心 : 중국 고대에 사람의 징표로 비단 띠를 허리에 두르는 것. * 지음知音 :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로 그리운 임을 뜻함. * 옥저玉筯 : 옥으로 만든 젓가락으로 미인의 눈물에 비유.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으며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어라 묻고 싶구나 어디에 계시는지 꽃 피고 꽃 지는 이 계절에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임에게 전하려했던가 봄날 그리움을 이제는 접으려하니 저 꾀꼬리조차 서글피 지저귀는 구나 바람에 꽃은 시들고 또 시드는데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하구나 임과 함께 사랑 나눌 수 없어 실없이 홀로 이 마음 달래본다 날마다 방울지는 쓰라린 눈물을 살랑대는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질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봄날을 맞이하여,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취를 읊은 시다.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계 중에서도 특히 가을을 많이 읊었고 다음으로는 봄을 많이 읊었다. 가을은 주로 낙엽을 보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삶의 유한성에 대한 우수와 고뇌를 읊었다면, 봄에는 인동忍冬 내지 염정과 그리움을 주로 읊었다. 설도는 이 시에서 그리움, 외로움, 회한, 실망, 비애 등 다양한 심경을 그렸다. 자연현상을 빌려, 봄날에 꽃이 피고 지고, 새가 지저귀고, 봄바람이 살랑대는 변화 속에 투영된 설렘이 기약 없이 떠난 임, 그리움의 대상과 아울러 절대고독을 고조시킨다. 이 시는 상당하게 감성에 빠져 있는 듯하다. 보들레르(1821~1867, 프랑스 시인, 소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아동과 회복기의 환자와 예술가가 공통적으로…‘사물에 대하여, 지극히 사소하게 보이는 것까지도, 생생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본다고 했다. 그래서 감성은 오관을 통해 사물의 체험을 생생하게 느끼는 데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서의 능력이라기보다 감각적 체험의 능력이다. 진정한 시인은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각이 혼합된 심상을 지녀야 한다. 이 시는 지나친 감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비애만 증폭시킨다. 연못가 연정 (지상쌍조池上雙鳥) 雙樓綠池上 朝暮共飛還 更憶將雛日 同心蓮葉間 푸른 연못가 오리 한 쌍 아침저녁 함께 노닙니다 아기오리 탄생할 날 생각하고 생각하며 연꽃 사이에서 마음을 함께 합니다. 연못가에서 노는 한 쌍의 정겨운 오리를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움과 기생으로서의 앞날을 탄식하며 읊은 시다. 설도는 많은 남성을 상대하면서 지내던 신분이라, 오직 한 남자만 섬기며 살아가는 여염집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대수롭지 않은 미물들도 모두 제 짝을 이루는데 설도는 그렇지 못하다.…아침저녁/함께 노닙니다…에서는 부러움이 가득 찬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쌍의 오리보다 더 못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자탄하듯 후회가 서려있기도 하다. 물가에 오리도 보금자리를 틀고 제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처지에 비해 설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님을 탄식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느 부부들처럼 정녕 살가운 가정을 갖고 싶은 것이다. 정상적인 인생살이는 결혼을 통하여서 생명과 삶의 구실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천도천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예기禮記』에,…‘혼례는 모든 문화와 예절의 근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내면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도리지만 설도에겐 먼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곤순坤順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부러워하는 심리가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능운사 (賦陵雲寺二首) 聞設凌雲寺裏苔 風高日近絶織埃 橫雲點染芙蓉壁 似待詩人寶月來 聞設凌雲寺裏花 飛空撓噔逐江斜 有時鎖得(상=女+常)娥鏡 鏤出搖臺五色霞 (내 한자엔- 계집이름 ‘상’-이 없음) * 능운사凌雲寺 : 사천성 樂山縣에 있는 절. * 상아0娥 : 달 혹은 달에 사는 선녀. * 보월寶月 : 당 개원 때의 詩僧으로 無畏法師와 더불어 불경을 번역했다고 함. * 요대搖臺 :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곤륜산 위에 있는 단상. 그곳에서 신선이 살고 있으며 해와 달이 나온다고 함. 여기서는 능운사 달빛 아래 흩날리는 꽃을 형용하고 있음. 능운사의 이끼 센바람 따가운 햇살에 온갖 먼지 털어낸다 가로 놓인 구름 부용벽을 물들이고 시인 보월을 기다리는 듯하다 능운사의 꽃 하늘에 날아 비탈길 감아 돌아 강가로 달려 간다 때로는 달빛 거울 잡아 놓은 듯하고 하늘의 오색 무지개 새겨 놓은 듯하다 세월 속에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능운사의 경내를 둘러보다가 임의 숨결을 느끼면서 읊은 시다. 능운사는 설도가 사모하는 장수, 위고가 완성한 절이다. 그래서 설도에게 있어 능운사는 예사로운 절이 아니다. 능운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임, 그 자체이다. 위고의 흔적 속에 그의 체취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능운사의 이끼, 구름, 꽃, 달, 바람 등등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랑의 일부이다.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며 속삭임이다.…때로는 달빛 거울/잡아 놓은 듯하고/하늘의 오색 무지개/새겨 놓은 듯하다…에서 설도는 능운사에 압도당했다. 그녀가 능운사를 대함은 곧 오매불망寤寐不忘, 그 꿈이 현실 같기 때문이다. 비유比喩는 시인의 특수한 직관능력이다. 직관이 없이는 시를 쓸 수가 없듯이 그 직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부여받은 천부적 소질이다. 그리고 시에 있어 여타 기교는 여벌이다. 문법과 수사학修辭學을 파고든다고 모두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사학은 말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말을 꾸미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사학은 천재의 능력이 아니고 누구든지 배우면 터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시를 가르친다고 해서 시인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수사학적 비유는 명백한 유사성類似性을 근거로 하여 한 낱말을 다른 말로 대치代置하면 끝나는 것이지만, 시작 비유는 그러한 대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낱말이 각각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의미의 배경이 그대로 강하게 느껴지도록 남아 있다. 시「능운사」는 이 점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라고 하겠다. |
4. 이청조(李淸照)
중국 제일의 여류 문인 이청조(李淸照) - 꽃과 달은 옛날 그대로이건만 - 1. 중국사에 여류 문인이 등장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송대(宋代)의 이청조(李淸照)는 중국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작품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중국의 문학을 흔히 “한문(漢文),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 이라 하듯이 당대는 시(詩)가 문학을 대표하였다면, 서민적 사회였던 송대는 문예의 꽃이 피면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음곡(吟曲)에 따라 노래하도록 지어진 사(詞)가 널리 유행하였다. 사는 오언절구나 7언 율시와 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섬세한 미적 의식이나 정감을 개인의 독백 형식으로 풀어놓는데 이청조는 바로 이런 사의 명인이었다. 2. 유년시절 이청조(1084~1151경)는 산둥(山東)성 지저우(齊州: 지금의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태어났다.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또는 ‘수옥(漱玉)’이라 하였으며 양송(북송과 남송)의 전란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여류 사인(詞人)이다. 그녀의 아버지 이격비(李格非, 자는 文叔) 역시 북송시대 저명한 문장가이다. 유명한 문장가 소식(蘇軾)이 이격비를 특별히 아꼈는데 소식을 따라 학문을 크게 익혔으며 ‘소문후사학사(蘇門後四?士: 이격비(李格非), 료정일(廖正一), 이희(李禧), 동영(董?)를 이름)’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격비는 산문, 시, 사에 뛰어났는데 이런 재능이 이청조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격비는 영리를 구하지 않은 청렴한 관리 생활을 하였다. 이청조의 어머니 역시 명문집안 출신으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청조는 문학적 분위기가 농후한 가정에서 풍부한 역사와 문학 자료에 친근감을 가지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산수가 수려한 지난(濟南)에서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내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그녀는 경사자집(?史子集), 시사가부(詩詞歌賦) 및 여러 문체에 눈을 돌려 문학적 재능을 개발하여 나갔다. 3. 결혼 이청조는 18세에 조명성(趙明誠, 자는 ?甫)과 결혼하였다. 조명성은 당시 인재들이 모이는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태학생이었는데, 금석문(金石文)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명성의 아버지 조광지(趙挺之)도 고관에서 봉직하고 있었으니 그 역시 명문가문 출신이다. 당시 풍습대로 그들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하였지만 이들은 서로 사랑하며 상대를 존경하였다. 결혼 초의 생활은 부유하였고 남편 조명성과 함께 공동으로 서화 금석문을 수집 정리하였다. 조명성은 아내의 해박함과 문학적 재능에 감탄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송대는 여성에게 전족(纏足)을 시키는 등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기던 시대였지만, 그는 출중한 재능과 소탈한 성격을 가진 아내를 존중했으며 이청조가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외조를 하였던 것이다. 이청조 역시 남편이 공명심이나 부를 탐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일에 존경을 표하면서 그를 사랑했다. 조명성은 나중에 금석문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결국 구양수를 이어 저명한 금석학자가 되었는데 이는 이청조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성품과 취향이 비슷했던 이들 부부는 ‘선 결혼 후 연애(先結婚後戀愛)’, 이른바 ‘먼저 결혼하고, 후에 연애한’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던 것이다. ? 4. 당쟁과 전란으로 인한 수난 훗날 이청조의 아버지는 당쟁에 휘말려 정치적 모함을 당하고 그의 가문도 자연 몰락하였다. 당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부국강병을 위하여 신법을 내세우자 보수파들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사마광을 중심으로 한 구법당과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이 대립하는 이른바 당쟁이 일어났는데, 이 때 이청조의 아버지는 구법당에 속해 신법을 반대하였다. 조정에서는 사마광 등 300여 명의 구법당 인사들을 간당(姦黨)이라 하여 그 이름을 돌에 새겨 전국 여러 곳에 세워(이것을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라 함) 탄핵할 정도로 억압하였는데 이청조의 아버지 이격비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청조가 시집을 간 그 이듬해, 친정아버지 이격비는 탄핵되어 옥에 갇혔다. 반면 시아버지 조정지(趙挺之)는 구법당을 탄핵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청조가 당시의 재상에게 마음을 감동시키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낸 바람에 이격비가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많은 구법당 관료 학자들이 제거되고 이격비 가정도 몰락하게 되었다. 반면 조정지는 반대파 탄핵에 대한 공이 인정되어 후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니 알고 보면 이청조는 정적(政敵)의 집안에 시집을 간 셈이었다. 1126년에는 ‘정강(靖康)의 변’이 일어났다. ‘정강(흠종의 연호)의 변’이란 여진족이 세운 금(金, 1115-1234)이 북송을 침입하고 휘종(徽宗;上皇), 흠종(欽宗) 등을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북송이 멸망당한 사건을 말한다. 요를 멸망시킨 금이 1123년 연경 부근의 6주를 송에게 할양해 줄 때 송과 맺은 약속을 송이 이행하지 않는다 하여 금은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였다. 이에 송은 세폐(歲弊)의 지불, 영토 일부의 할양 등을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으나 송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금군이 재침하여 카이펑을 함락하고(1126), 이듬해에는 휘종·흠종을 비롯한 황후·태자·비빈·대신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을 뿐 아니라 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갔는데, 이로 인하여 북송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송왕실을 재건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린안(臨安, 오늘의 杭州)에 도읍하니 이를 남송(1127-1279)이라 한다. 이런 전란 가운데 이청조 부부도 사람들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정처 없는 피난길에도 이들 부부는 오직 서화 및 골동품에 대한 애착뿐이었다. 피난 생활 중 이청조 남편 조명성은 남송 지배 하에서 후저우(湖州)의 지사(知事)로 명을 받았다. 평소 관직에 관심 없던 그였지만 나라가 여진족에 빼앗기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선뜻 응했다. 그러나 후저우 지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청조는 고향도, 사랑하는 남편도 전란 중에 잃고 말았다. 당시 이청조의 나이는 45세였는데 남편이 병사하자 이청조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꽃이 피고 달이 뜬 한가위 밤에 이미 세상을 떠나 없는 남편과의 다정했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그녀가 지은 시가 유명하다. 한없이 깊어만 가는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몸부림치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십오 년 전 달빛 어린 꽃 아래서 (十五年前花月底) 서로 함께 그 꽃 보며 시를 지었도다. (相從曾賦賞花詩) 지금 보니 그 꽃 그 달 옛날 그대로이건만 (今看花月渾相似) 이내 마음 어찌 옛적과 같으리오 (安得情懷似往時) 그녀는 외로운 신세가 되어 항저우(杭州), 위에저우(越州) 등지를 돌아다니며 지내다가 만년에는 진화(金華)에 있는 동생 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는 다시 남편이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작업하던 『금석록(金石錄)』이라는 책을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금석록』은 철, 동 비석 등에 새겨진 글을 모아 연구한 책으로, 그녀는 예술품과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가면서 저서를 완성하였다. 후에 『금석록』은 중국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청조는 문학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시(詩), 사(詞), 문(文), 부(賦) 등의 장르에 탁월한 작가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명성을 높인 것은 사(詞)이다. 젊었을 때 이미『사론(詞論)』펴 일가를 이루었다. 그녀가 지은 사의 작풍은 사체와 음률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서정적인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미(優美) 섬세함을 기조로 하면서도 당시의 구어(口語)를 대담하게 삽입하여 재기 넘치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특히 유랑 후의 작품에는 인생의 고독과 불안을 투시한 청렬(淸冽)한 맛이 가미된 송사(宋詞)의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그녀는 이안체를(易安體)를 창립하였고 아울러 남당의 황제 이욱(李煜), 송대의 진관(秦觀), 주방언(周邦彦) 등과 함께 이른바 ‘완약파(婉約派)’ 를 이루어 중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청조는 남편이 죽은 지 3년 후에 장여주(張汝舟)와 재혼하였다. 남편과의 사별, 금의 침입으로 인한 전란, 거기에 몸에 병까지 들어 더욱 생활이 처참하게 되었을 때, 장여주가 찾아와 그녀를 격려하자 심약해 있던 이청조는 그에게 마음을 주고 재혼하였다. 외로웠던 이청조는 의지할 대상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여주가 50세가 다 된 이청조를 아내로 맞은 것은 그녀의 재산이 탐이 나서였다. 그렇기에 장여주는 그녀의 재물만을 탐하면서 학대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자주 다투게 되었다. 끝내 이청조는 남편과 약 100일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재가한 것에 대해서는 일부 비난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이청조의 탁월한 문학적 소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청조가 절개를 지키지 않고 다시 재가를 했다는 데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나 왕안석도 과부의 재혼을 권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재혼이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당시 몰락한 가정의 여인의 몸으로 혼자『금석록』이라는 방대한 거작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생에 대한 예리한 묘사는 사색의 여운을 남기고 그녀의 작품 세계를 보면 전반기에는 밝은 면이 많았으나 후반기에는 쓰라림, 애달픔 등이 많이 배어있다. 당쟁, 전란, 거기에 남편의 죽음, 재혼, 방랑 생활 등 시대의 아픔과 환경의 변화는 그의 삶을 애달프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많이 그렸는데 그녀의 작품은 표현이 섬세할 뿐 아니라 심정과 자연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사색의 여운을 남겨주고 있어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말년의 작품 『성성만(聲聲慢)』은 자연의 정경과 심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후반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地?花堆? (널리 펼쳐진 정원의 황화(국화 꽃) 떨어져 쌓이는데 ) 憔悴損 (시들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고 있으니 ) 如今有?堪摘 (지금 어디서 더 딸 것이 있으랴) 守著?兒 (창가에 기대어 그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自?生得黑 (외롭게 어찌 밤을 맞으리오) 梧桐更兼?雨 (떨어지는 오동잎 거기에 더불어 내리는 가랑비) 到?昏 点点滴滴 (황혼에 이르러 뚝뚝 떨어지니) ?次第 (이러한 정경 ) ?一?愁字了得 (어찌 한낱 ‘수(愁)’라는 한자만으로 다 표현해 낼 수 있으리오) 이청조는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과의 사별, 재혼의 실패 등 실의에 찬 생활을 하다가 1151년에 지난에서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산둥성의 지난시에 가면 천성광장(泉城廣場) 맞은편에 맑은 샘이 있는 표돌천공원(?突泉公園)이 있다. 공원 안의 수옥천반(漱玉泉畔)에 그 고장 출신의 여류작가 이청조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청조기념당(李?照紀念堂)을 만들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하여금 그녀를 기리도록 하고 있다. 산둥성 칭저우(靑州)시에서도 칭저우시 박물관 옆에 이청조기념관(李?照記念館)을 설립하여 유물들을 진열하여 두었다. 이청조는 그간 『이안거사문집(易安居士文集)』,『이안사(易安?)』등 7권의 수필과 6권의 사집을 냈으나 소실되고 단지『수옥사(漱玉詞)』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조금씩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남송 시대의『악부아사(?府雅詞)』가운데 있는 「이이안사(李易安詞)」23수, 명말 『수옥집(漱玉集)』의 17수, 청말 『수옥사(漱玉詞)』의 50수, 조만리(趙万里) 편집의『수옥집(漱玉集)』60수, 중화인민공화국시대의『이청조집(李?照集)』78수 등이 있으며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出版社)에서 간행한『이청조집교주(李?照集校注)』는 비교적 잘 정비된 전집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이청조의 작품(사, 시, 문 등)을 총망라하여 수록하고 있어 이청조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청조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의 시사(詩詞)에 대한 많은 번역서가 나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詞)의 장르가 가장 뒤진 감이 든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한시를 구체시(舊體詩)라 부르면서 한시보다는 시사를 더 애호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청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인(詞人)이다. 여성 특유의 예리한 묘사와 사색의 여운을 남겨주는 그녀의 작품은 오늘날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은 그녀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인으로 그녀를 추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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