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시인의 짧은 시 모음

* 무늬

나뭇잎들이 포도 위에 다소곳이 내린다

저 잎새 그늘을 따라 가겠다는 사람이 옛날에 있었다

* 어느 석양

동백꽃 꽃숲에 참새들이 떼지어 앉아

무어라 무어라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동백꽃 송이들이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고 하면서

무더기로 져내리고 있었습니다

* 빛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 봄눈

마른논에 우쭐우쭐 아직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실은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 가을

우주의 어떤 빛이 창앞에 충만하니

뜨락의 시린 귀또리들 흙빛에 몸을대고

기뻐 날뛰겠다

* 노래

깊은 산 골짜기에 막 얼어붙은 폭포의 숨결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다른 입김이 와서 그대를 녹여줄 때까지

* 한 생각

급한 걸음으로 산길을 달려 내려오던 바위는

무슨 생각이 나서 거기에 딱 멈춰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손에 턱을 괸 채

무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일까

* 밝은 날

지구의 한 끝에서 한 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는다



작은 눈을 들어 사방을 불안스레 돌아보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혼이다

* 인동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들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 대기의 힘

밤새 내리던 비 그친 뒤

아침 땅이 내뿜는 저 하늘의 신성한 기운

그 땅에 엎드려 경배한 뒤

인간의 굵은 팔을 뻗어 심호흡한다

* 라일락 향

이 세상의 향기란 향기 중 라일락 향기가 그중 진하기로는

자정 지난 밤 깊은 골목 끝에서

애인을 오래오래 끌어안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 신록

고목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보네

* 井蛙

저는 우물안 개구리입니다.

우물안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는 모르지만

하늘의 깊이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많은 여자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깊이는 알 고 있습니다.

​* 웅성거림

온다던 비가 드디어 두 시부터 오신다

꽃잎 바르르 떨고

잎새 함초롬히 입을 벌리고

그 밑의 자벌레 비로소 편편히 눕자

지구가 한순간 안온한 꿈에 잠긴다

* 아침이면

귀뚜라미는 밤새도록 방 밖에서 울며

아침이면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보석을 낳는다

이슬이다

* 비밀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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