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은 누구?  



중국은 시국(詩國)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혹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라면 몇명의 대표적인 시인을 말 할수 있다. 하지만 중국 시인들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 누구냐 하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매 시대마다 기준이 있고 매개 사회계층에는 논리와 미학기준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고로 논쟁은 그칠새 없었다.

하지만 중국 고대 저명시인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시 수량이 "굳은 기준"으로 될 수있기 때문이다.

기재에 의하면 이태백이 평생 남긴 시가는 약 990수, 두보는 1,400수, 백거이는 2,800수, 소식(소동파)은 약 4,000수라고 한다. 애국시인 굴원은 비록 시 편폭이 길지만 수량을 놓고 볼때 겨우 25편에 불과하다.

자료에 의하면 륙유는 시를 가장 많이 남긴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평생 2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오늘날 보존된 시만 해도 9,329수에 달한다. 물론 수량도 중요하지만 질을 홀시할 수 없다. 청조황제 건륭은 평생 지은 시가 42,250수에 달하지만 세인들에 널리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일류 시인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륙유는 인구에 회자한 명언과 명구를 민간에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가 중화역사에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온 것은 시짓기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애국주의 정신때문이다.

륙유가 생활한 시대는 중화민족이 역사상 가장 굴욕받은 시대라 할 수 있다. 수백년간의 송왕조는 부패와 쇠락의 길로 나아갔고, 북방의 여진족이 송왕조를 점차 침범했으며 황제는 겁먹은 쥐처럼 비겁하게 현실을 회피할때 륙유 등 소수의 애국주의자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것이다. 평생 풍상고초를 겪어온 륙유의 노년시대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동배들이 흩어져 그의 시도 더이상 독자가 없어 본인한테 쓰는 "외로운 시"가 된 것이다.

륙유의 시는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세상뜨기전에 지은 "시아(示兒)"시는 중화 천추 시역사의 위대한 편장으로서 전체 세계문학사에서도 보기드문 명작이다.

륙유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여부에 대해서는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그의 빛나는 재능과 위대한 애국심은 우리가 지극히 탄복하는 바이다.

 

 

육유 [ 陸游 ] 1125 ~ 1210 (85)

 

철저한 항전주의자로 일관했던 중국 남송(南宋)의 대표적 시인.

약 50년 동안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 상(詩史上)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힌다.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저서에는 《검남시고(劍南詩稿)》등이 있다.

자 무관(務觀). 호 방옹(放翁)이며 산음(山陰:浙江省)에서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로 출생했다. 부친은 육재(陸宰)이며 병참보급을 담당하는 관리를 지냈다.

부친이 군사(軍事)일을 맡았지만 문(文)에도 밝아 집에는 많은 서적을 보유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북송(北宋)이 금(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게 멸망하여 정강(靖康)의 변을 겪고 있었고 그의 가족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침략자 금(金)나라에 대하여 철저한 항전주의자로 일관하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였으며, 주화파(主和派)를 경멸했다.

당시 남송 고종은 재상 진회(秦檜)와 함께 금과 화친을 목적으로 하였고 명장 악비(岳飛)까지 독살했다. 육유는 악비의 죽음을 한탄하며 애국충정에 찬 시(詩)를 남겼다.

육유는 여러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하였다가 쇄청시(鎖廳試)에 급제하였지만 진회의 방해로 결국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 고향 산음(山陰 : 현재의 紹興)으로 돌아가 시작(詩作)에 몰두하였고 병서(兵書)를 가까이 하며 검술연마에 힘썼다.

34세에 복주(福州)에서 첫 지방관리가 되었으며 여러지방의 지방관을 지냈다.

1162년 중앙으로 복직하여 추밀원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봉직했다. 남송 효종이 즉위하고 육유는 진강(鎭江)의 통판으로 임명되어 금(金)을 치고 옛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하지만 북벌론이 실패하고 주화파(主和派)가 득세하자 그도 벼슬을 잃고 낙향했다. 이후 정계 복귀를 했지만 번번이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육유를 유명하게 만든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당완(唐琬)과 혼인을 하였는데 며느리에 대한 어머니의 구박과 강요로 이혼을 하게되고 왕씨 여성과 재혼을 하게된다.

당완도 재가하여 조사정(趙士程)이라는 사람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사람이 10년 뒤 우연히 만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심원(沈園)의 벽에 시(詩)로써 화답했으며 이일이 있은지 얼마 후 당완은 죽고 말았다.

그때 심원의 담벼락에 남긴 시(詩)가 유명한 《채두봉(釵頭鳳)》이다.

이후에도 육유는 당완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회환을 많은 시로 남겼다.

65세 때에 향리에 은퇴하여 농촌에 묻혀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32세부터 85세까지의 약 50년간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상(詩史上)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고 있으며, 당시풍(唐詩風)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국토회복의 절규를 담은 비통한 우국의 시를 짓는가 하면, 가난하면서도 평화스러운 전원생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적한 시를 짓는 등, 매우 폭넓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검남시고(劍南詩稿)》(85권)가 있다.

시아 (示兒)   /육유 (陸游)

示兒 시아   아이에게 보이다

 

死去元知萬事空 사거원지만사공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지만

 

但悲不見九州同 단비불견구주동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못 보는 게 슬플 뿐

 

王師北定中原日 왕사북정중원일

천자의 군대가 북쪽 중원을 평정하는 날

 

家祭無忘告乃翁 가제무망고내옹

집안 제사 때 아비에게 알리는 일 잊지 말아라.

육유 (陸游)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담은 시 채두봉(釵頭鳳)

 

남송시대의 대표적인 시인 육유는 1만수의 시를 지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

일생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85세까지 장수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니 그만큼 많은 시를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는 우국의 기개를 강렬히 노래하는 것에서부터 부인과 이별한 아픔을 안타깝게 노래하는 것, 전원으로 돌아간 소박한 서정을 노래하는 것 등으로 다양하게 전해져 온다.

 

​특히 그는 조국인 송나라가 금나라에 침략당하고 짓밟히는 아픔을 겪으면서,

죽을 때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철저하게 항전을 주장한 우국시인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시아(示兒)라는 시는 중국인들이 침략을 당해 국토를 잃으면, 이 시를 자주 인용하여 비분강개한 심정를 토로했다고 할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임종하기 전에 자식을 불러 썼다는 이 시는, 죽으면서까지 조국인 송나라의 국토를 회복하기를 염원하는 처연한 심경이 담겨져 있다.

죽으면 만사가 공(空)이라는 사실까지 이미 깨우쳤지만, 평생을 품어온 우국지심은 버리지 못하고 자식에게 유언으로 남기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7언의 네줄에 불과한 짤막한 시이지만, 시인의 조국애(祖國愛)가 매우 강렬하게 느껴져 가슴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육유는 당완이라는 외사촌 누이와 결혼하여 금슬이 좋았으나 고부간에 사이가 좋지 못해 어머니의 강요로 둘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다.

육유와 당완은 헤어져서 재혼을 하였으나 서로 잊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는데, 우연히 꽃이 아름다운 심원에 나들이를 갔다가 7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육유는 당완의 남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으나, 쓰라린 마음과 북받치는 감정을 달랠 수 없어 채두봉(釵頭鳳)이라는 시를 담벽에 써놓게 되었다.

 

당완도 그 시에 화답하여 다시 채두봉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너무 가슴이 아파 몸져누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채두봉은 비녀 끝머리의 봉황무늬 장식을 말하는데, 두 사람이 부부로서 다정하게 지냈던 지난날을 회상하고 아파하는 뜻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채두봉(釵頭鳳)

비녀머리의 봉황

육우(陸游)

 

1 절

홍화수 황신주 红酥手 黃呻酒

그대의 고운 손으로 내게 황등주를 따라줄 때는

 

만성춘색궁장류 滿城春色宮牆柳

성안에 봄빛 가득하고 담장의 실버들은 너울거렸지

 

동풍악 환정박 東風惡歡情薄

사나운 동풍에 짧은 우리 인연은 사라지고.

 

​일회수서 기년리색 一懷愁緖 幾年離索

그리움과 한에 젖어 몇 년을 보냈던가

 

착 착 착 錯 錯 錯

아~ 돌이킬 수 없는 내 잘못이로다.

 

2 절

춘여구 인공수 春如舊 人空瘦

봄은 예전과 같은데도 사람은 덧없이 여위어 가니,

 

누흔홍읍교초투 淚痕紅邑鮫消透

연지 묻은 붉은 손수건 눈물에 젖는구나.

 

도화락 한지각 桃花落閒池閣

복숭아꽃 떨어진 연못가의 누각은 스산한데,

 

​산맹수재 금서난탁 山盟雖在 ​錦書難托

굳은 맹세 하였건만 정을 담은 편지 우가 전해 주랴.

 

​막 막 막 莫 莫 莫

아~ 이 마음 어이할꼬 어이할꼬.....

 

화 채두봉 (和 釵頭鳳)

채두봉에 부쳐

당완의 시

 

1 절

세정박 인정악 世情薄 人情惡

세상살이 고달프고 메마른 인정속에,.

 

우송황혼화이락 雨送黃昏花易落

황혼녘에 내리는 비에 꽃잎이 쉽게 떨어지는구나

 

효풍간루흔잔 曉風干淚痕殘

새벽바람 불어와도 눈물자국 남아 있고,

 

욕전심사 독어사란 欲箋心事 獨語斜欄

내마음을 전하고자 문설주에 기대어 읊조리네

 

난 난 난 難 難 難

아~ 내 마음 괴롭고 막막하기 그지없구나.

 

2 절

인성각 금비각 人成各今非昨

사람은 각각 따로 되었고 오늘은 그 때가 아니네

 

병혼상사추천삭 病魂常似秋千索

괴로운 마음은 언제나 시름이 적적하여라

 

각성한야란산 角聲寒夜蘭珊

피리 소리 차갑고 밤은 깊어 쓸쓸하건만

 

파인심문 연루장환 怕人尋問 烟淚裝歡

헤어진 것을 사람들이 물어볼까 눈물을 감추며 즐거운 척 하네

 

만 만 만 瞞 瞞 瞞

자꾸만 흐르는 눈물 감추고 또 감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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