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사랑이 가기전에 / 조병화

 

사랑이 가기 전에

이렇게 될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주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잎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가랑닢 내리는

 

가랑닢 내리는

오후의 잡초원 같은 내 가슴에

실망하기 쉬운 엷은 마음을 내리고

흐린 날이 머물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올시다.

깊은 산중

검은 열매와 같이 남모르게 익어가는

마음과 마음을 그대로 당신에 안기기 위하여

가랑닢 내리는 내 우울이

가슴에 소리 없이 고여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깊은 내 어둠의 거울

밤이 내리면

나 호올로 이 지구 먼 한자리

남어 있으면

별이 흐리다 개이고

별처럼

나와 내가 당신에 비쳐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羽毛와 같은 당신의 손으로

오랜 내 녹쓸은 마음의 유리창을 열어주십시오

열린 유리창 안에

나와 가까이 오시어

나에 안겨

당신의 비밀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을 가난한 나에게 담어 주십시오.

찬 겨울 눈 깊은 한 밤중

온 인생이 소리없이 사라지면

검은 장갑을 벗고

아름다울수록 허전해지는 마음의 거울을

이렇게 빈 가슴에 비쳐 보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행복은 내 것이 아니올시다.

충돌과 인내의 긴 인생

세월에

수레를 몰고

청춘이

사랑이

사업이

모주리 지나간 빈 자죽을

이렇게 둘둘둘 굴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여

검은 밤이여

훨훨 타오르는 마지막 이 가슴의 불꽃이여

황홀해지는 내 거울에 비쳐

이글 이글 이글거리는 내 육체를 보십시오

인생이 지나가면 회상이 남는다.

가랑닢 내리는 오후의 잡초원 같은

내 가슴에

영 흐리지 않을 마음의 거울을 비쳐 주십시오

실망하기 쉬운 내 가슴에

영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을 비쳐 주십시오

 

물떼와 같이 밀리는

 

물떼와 같이 밀리는

입술과 입술과 입술에 떠서

내 입술마저 믿을 수 없는

도시의 그늘에 끼어

 

당신의 이야기를 믿어도 좋겠습니까

당신의 믿음을 믿음으로 안어도 좋겠습니까

 

돈 떨어진 저녁 노을

대도시 한 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둥둥 내가 떠서

 

벗이

사랑이

인생이

비켜 가는

화펴의 고독에 끼어

 

그냥 그대로 당신의 말을 믿어도 좋겠습니까

당신의 믿음을 믿음으로 안어도 좋겠습니까

 

나의 소유는 외줄기 가는 생명

달달 서류에 닳아 빠진 젊은 조각

 

때가 오면

그날이 오면

모주리 보내야 할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희망과 동경과 미래와

오오......... 아스라지는 절망을 양손에 고이고

 

人間孤島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를 믿어도 좋겠습니까

당신의 믿음을 몽탕 내것으로 안어도 좋겠습니까

 

 

 

한 떨기 요란스러운

 

 

 

한 떨기 요란스러운 모란이라고 합시다

맑고 개인 오월 하늘 아래

어느 허무러진 궁터에 피어 난

당신은 한떨기 요란스러운 모란이라고 합시다

 

줄기줄기 당신이 당신에 취할 때마다

외로움이 사모칠 때마다

긴 밤을 호올로 이슬에 젖을 때마다

당신은 한 떨기 슬픈 모란이라고 합시다

 

꽃바람에 휩쓸릴 때마다 몰려드는 향기로운

허영과 명예에 대끼어

속속들이 익어들은 검은 씨앗을 안고

오월에 기울은 해 변에 호올로 남은

당신은 한 떨기 시들은 모란이라고 합시다

 

작은 행복이 줄기줄기 당신의 속속들이

몽탕 안겨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당신 곁에 머물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한 떨기 요란스러운 모란이라고 합시다

영 내 곁에 훈훈한

한 떨기 계절을 잃은 모란이라고 합시다

 

맑고 개인 인생의 하늘 아래

나와 함께 피다 질 어진 모란이라고 합시다

 

 

 

신들이 외출한 긴 계곡을

 

 

 

신들이 외출한 긴 계곡을

가벼운 여장으로

이렇게 나선

나 호올로 인간의 피고올시다

 

작은 행복이 있어야만 하면서

행복에 항거하는 나

 

명예와 허영이 가득 찬

어린 시절의 가슴은

무너지고

 

많은 유리들이 창 뚫린

텅 빈 내 마음의 동굴이올시다

 

보십시오

이 피서지의 가을처럼 넓어진

마음의 동굴을

끊임없이 흐르는 냉기 낀 기류를

 

유리창들은 깊이 닫히고

깊이 닫힌 유리창 안에 나는 갇혀서

무더운 맘

...어린 장미들 같이 솟은 별밭에

먼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

나 호올로 약한 인간의 피고올시다

 

바람이 지고

바람 같이 우울이 지고

외로움이 별밭을 밝혀서

 

 

도시와 문명의 틈바귀에 끼어

 

도시와 문명의 틈바귀에 끼어

작은 행복을 비비고 살아가는

부스러진 나의 사람들이여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을 가리고

긴 세월

너무나 많은 빈 밤들을

나 호올로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다리움이 사라진 까닭이 아니올시다

하나의 약속에

긴 긴 밤이 채워진 까닭이 아니올시다

 

낙엽과 햇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가을

가을 길 목에 서서

우리 서로 오랜 이야기들을 고이 끝내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

괴로운 날과 날들을 착한 마음으로

...이렇게 견뎌야 하는 마음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떼와 같이 밀리는 문명과 문명에

긴 방죽을 치고

별들이 고이는 물가에 모여

작은 행복을 소작하는 나의 벗들이

멀지 않어 가물이 끼기 전에

정과 정들을 기대려는 외로움들이 아니겠습니까

 

가을 하늘 먼 호수와 같이 끼어 있는

맑은 눈알들이여

부스러진 나의 사람들이여

 

 

외로운 내 벗이여

 

오오 사랑하는 사람이여

외로운 내 벗이여

 

외로움이 술술 가슴에 젖어들면

연한 눈을 감어 보십시오

 

먼 마음의 푸른 하늘이 아니겠습니까

푸른 하늘 아래

긴 긴 마음의 꽃 핀 뚝길이 아니겠습니까

뚝길에 그늘지어

줄기 진 아까시아 뚝길이 아니겠습니까

 

잎새와 꽃송이들이 가지 가지에

엉기어

하나절 훈훈한 바람에 푸르르고

수만의 떼를 진 꿀벌들이

날개치는

요란스러운 생명들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당신의 고향

 

회상과 내일에 잠기어

당신은

이 꽃 핀 고향의 뚝길을 서성거린다고 여겨 보십시오

 

여기는 병실이 아니올시다

맑은 내일에 누워

외로움이 가슴에 고여들면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당신 곁에

당신은 내 곁에

 

나란히

이렇게 훈훈한 생명의 뚝길을

서서히 서성거린다고만 여기십시오

 

당신이 가면 이 가슴은 당신의 무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얀 병상에 오랜 마음의 벗이여

 

 

 

무더운 여름 밤

 

 

 

 

무더운 여름 밤

밤에 익은 애인들이 물가에 모여서

길수록 외로워지는

긴 이야기들을 하다간 ......밤이 깊어서

장미들이 잠들어버린 비탈진 길을

돌아들 간다

 

마침내 먼 하늘에 눈부신 작은 별들은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무수한 눈알들처럼 마음에 쏟아지고

나의 애인들은 사랑보다 눈물을 준다

 

내일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우리 서로 이야기 못한 그 많은 말들을

남긴 채

영 돌아들 갈 고운 밤

 

나의 애인들이여

이별이 자주 오는 곳에 나는 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받아주는 곳에 내가 산다

 

무더운 여름

밤이 줄줄 쏟아지는 물가에서

이별에 서러운 애인들이 밤을 샌다

 

별이 지고

별이 뜨고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가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변명이 자라면 자라날수록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예 오해를 가진 채

이 길을 서로 갇지 않기 위하여선

오랜 세월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어

그 추운 겨울 밤

...이대로 내가 가면

당신이 긴 이야길 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긴 세월

...이렇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샘터

 

 

 

빨간 태양을 가슴에 안고

사나이들의 잠이 길어진 아침에

샘터로 나오는 여인네들은 젖이 불었다

 

새파란 해협이

항시 귀에 젖는데

 

마을 여인네들은 물이 그리워

이른 아침이 되면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태양을 안고

 

잎새들이 목욕한

물터로 나온다

 

샘은 사랑하던 시절의 어머니의 고향

 

일그러진 항아리를 들고

마을 아가씨들의 허트러진 머리카락을 따르면

나의 가슴에도 빨간 해가 솟는다

 

물터에는 말이 없다

 

물터에 모인 여인들의 피부엔

맑은 비눌이 돋힌다

 

나도 어머니의 고향이 그리워

희어서 외로운 손을

샘 속에 당구어 본다

 

해협에 빨간 태양이 뜨면

잠이 길어진 사나이들을 두고

마을 여인네들은 샘터로 나온다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해가 물든다

꿈이 젖는다

 

 

 

.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세아 동방 양지 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어 세상 수만리 나 찾어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어 왔습니다

 

 

가을은 당신과 나의 계절

 

이제 나에게 필요치 않은 계절은 돌아들 갔습니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가을은 못견디는 나의 계절이올시다

 

험악한 이별을 항상 피하기 위하여

살아 온 나

인내와 절망을 지속하는 나의 마음에

오늘은 맑은 나의 가을 하늘이올시다

 

무심히 사라지는 사랑과 스며드는 사랑

가벼운 여장에 계절은 바뀌고

가을이 내리는 밤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아

쉽사리 실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외로움은 또 하루만 견디면 사라지는 것

 

가을에 싸여 맑은 밤에 싸여

빙빙 도는 명동 주점의 거리

 

나의 재산은 우정과 고독

 

이제 나에게

필요치 않은 계절은 모주리 돌아들 갔습니다

 

하나의 순간을 위하여 긴 세월이

...이렇게 당신과 나 사이에 있었습니다

 

가을이올시다

가을은 못 견디는 나의 마음이올시다

 

 

생명은 하나의 소리

 

당신과 나의 회화에 빛이 흐르는 동안

그늘진 지구 한 자리 나의 자리엔

살아 있는 의미와 시간이 있었습니다

 

별들이 비치다 만 밤들이 있었습니다

해가 활활 타다 만 하늘들이 있었습니다

밤과 하늘들을 따라 우리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생명은 하나의 외로운 소리

 

당신은 가난한 나에게 소리를 주시고

갈라진 나의 소리에 의미를 주시고

지구 먼 한자리에 나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어차피 한동안 머물다 말 하늘과 별아래

당신과 나의 회화에 의미를 잃어버리면

나는 자리를 걷우고 돌아가야 할 나

 

당신과 나의 회화에 빛이 흐르는 동안

그늘진 지구 한자리 나의 자리엔

살아 있는 의미와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밤이 흐르고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밤이 흐르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듯이 밤이 흐느껴 우는

내 마음 텅 빈 방에 믿음이 없는 사랑

 

사랑이, 믿음이 지는

내 외로움 그대로 당신이 흐르고 있습니다

 

밤은 깊어서 좋은 것

사랑은 묵어서 좋은 것

 

밤이 흐르는 곳에 내가 흐르고

내가 흐르는 곳에 당신이 흐르고

 

세월의 골짜길 뚫고 당신과 내가 흐르고

당신에 둘둘 굴러 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내 마음은 밤, 믿음이 지는 사랑

 

장미의 혈액같이 피어오르는

피부에

내 마음 깊은 곳을 그대로 밤이 흐느껴 웁니다

 

 

당신은 고향의 우물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하고

굳게 닫힌 옛 문을 나 열고

당신 찾어 나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세월의 원시림 그대로

아무도 지나지 않는 맑은 당신 가슴 속 깊이

먼 내 우물에 어리어

 

슬픈 이끼 낀 입술에 빈 손을 몰고

이대로 나 찾어 들어도 좋겠습니까

 

밤이 개이고 물가에 이슬이 고이면

이슬에 몸을 닦아 별 아래

나 호올로 도는 길

 

열매 잃은 꽃들이 가슴밭에 피다 지고

향기 잃은 벌들이 빙빙 돌다 가고

세월에 세월처럼 남어

 

당신은 내 고향

수천년 호올로 잎새 아래 고인 내 고향 우물

 

텅 빈 가슴에 먼 별들을 안고

가시덤불 이 숲길 이슬지는 밤에

당신 찾어 나 찾어 나 돌아가도 좋겠습니까

 

 

水蓮花

 

水綠色 깊은 古宮

묵은 연못에

水蓮花는 피었네 활짝 솟았네

 

 

이렇게 비눌 돋힌 花冠을 쓰고

잎싸귀들이 첩첩히 엉긴 검은 물 위에

 

沐浴 丹粧을 한 詩人愛人들이

여름의 수레를 몰고

일년 한번 외떨어진 古宮을 찾어 왔네

 

변함이 없이 변하는 나의 가슴

물기는 가시고 남은 한자리

 

여름이 쏟아지는 대낮

그늘이 없는 水深

물자마리처럼 나는 떠 있네

 

 

 

여름이 하루와 같이 무거운 들

 

들 안에 늪이 고이고

부들이 무성한 늪가에 魚卵이 뜬다

 

水葉이 활짝 핀 맑은 그늘

한가한 水族

 

水深 깊이 구구락지 우는 마을에

어데선지 土酒가 끓는 냄새가 난다

늪은 가난한 아버지들의 고향

 

겁쟁이 미련쟁이

아무데도 쓸 곳이 없는 물뱀이 산다

 

물꽃이 피고

물꽃이 접히고

 

 

沙漠

 

사막은 항상 추억을 잊을랴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하더라

 

사막엔 지금도 <마리네.데트리히>가 신발을 벗은채 절망의 남자를 쫓아가고 있다고 하더라

 

사막에 피는 꽃은 이루지 못한 사랑들이 줄줄 피를 흘리며 새빨갛게 피어 있다고 하더라

 

사막의 별에는 항상 사랑의 눈물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다고 하더라

 

詩人이라는 나는 지금 서울 명동에서 술을 술술 마시고 있는데 항상 이런 인간사막에 살고 있는 것만 같어라

 

사막이여 물은 없어도 항상 나에게 밤과 별과 벗을

 

사막은 항상 네마음 내마음 가까이 사랑이 떨어질 때 생긴다고 하더라

 

 

마음의 터전이 무너지듯이

 

당신이 어느 한자리 의지할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인생 어느 한구석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외로움을 풀어 놓을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나의 외로움을 풀어 놓을 곳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터전이 무너지듯이

내 마음은 무너지고

 

가을이 깃들은

비내리는 마음

 

당신이 어느 한자리 의지할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인생 어느 한구석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나의 가슴은

 

나의 가슴은 첩첩히 쌓인

눈보라 속의 깊은 밀림이 올시다

 

밀림 속에 가쳐서 나올줄 모르는

작은 소리

 

멀리 당신을 부르는 냉랭한 소리

가슴 벽에 부딪쳐 되돌아 오는 소리

 

첩첩히 쌓인 마음의 밀림 속에서

당신을 모른체하는 마음이 올시다

 

꽃이 피다 마음에 썩고

지금은 한적한 나 호올로

 

나의 가슴은 첩첩히 쌓인

눈보라 속의 깊은 밀림이 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맑어지는 감정의 물가에 손을 당구고

이슬이 사라지듯이

거치러운 내 감정이 내 속으로

깊이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해와 달이 돌다 밤이 내리면

목에 가을 옷을 둘둘 말고

이젠 서로 사랑만 가지곤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워서 못 일어서는 서로의 자리 올시다

 

슬픈 기억들에 젖는 사람들이여

 

별 아래 밤이 내리고 네온이 내리고

사모쳐서 모이다 진 자리에, 마음이 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노래를 불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나 돌아 가

영 나를 내가 잃어버리는 순간

 

그날까지는 나를 내가 잃어버릴 수가 없듯이

그냥 이대로 당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목마른 가슴의 아픔입니까

 

나무닢이 그 무성한 가지에서 떨어져

산산히 허트러져 바람에 날리어 눈에 덮이듯이

 

향기에 아지랑이 핀 푸른 당신의 가슴을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세월의 아픔입니까

 

노래를 불러도 소리를 잃은 피리

먼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당신의 연한 눈이여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나 돌아 가

영 당신을 두고 당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날까지는 내 가슴에 아지랑이 그대로 끼듯이

아지랑이 속에

당신은 영 피어 오르는 내 마음의 먼 봄이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이제 나 돌아갈려고 합니다

영 문 닫혀버린 내 가슴을 안고

외줄기 줄줄 사라진 벗들과 같이

어두운 이 긴 길을

나 호올로 이제 나 돌아 갈려고 합니다

 

내 육체는 하나의 생명의 껍질

 

나를 둘러싸고 당신을 둘러싸고

또 그들을 둘러싸고

나비와 같이 빙빙 돌던 어리광도 말 재주도

 

이젠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이 땅 위엔 하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당신을 부르고 그들을 위해 노래 부르던

다만 하나의 소리만이 있었습니다

 

소리는 사랑, 육체에 묻힌 생명

 

내가 먼저 이 지구 한 자리

좁은 자리를 걷우고 돌아가면

나의 소리는 당신의 소리 속에

 

당신이 먼저 이 지구 한 자리

내 곁을 걷우고 돌아 가면

당신의 소리는 내 소리 속에 묻혀서

 

오 눈부신 생명의 수레이여

 

어차피 누가 먼저 내려야 할 수레를 타고

아지랑이 낀 차창에

바람이 일는 계단에

가랑닢 날리고 눈이 내리는 찻간에

 

나도 당신도 사라진 그들과 같이

이렇게 둘둘 끼어 내리는 것

 

자리를 잃은 나의 소리이여

 

어리광도 말 재주도 이젠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나 돌아 갈려고 합니다

 

영 잃어버린 내 소리를 걷우고

어두운 이 길

 

소리도 없이 사귐도 없이

이제 나 돌아 갈려고 합니다

 

 

당신과 나의 거리에

 

나와 가까이 하시질 마십시오

나와 멀리를 하시질 마십시오

나와 인연이 있는 것은 ...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 올시다

나는 싸느란 돌이 올시다

 

밤이여

 

밤에 익어 가는 내 작은 인연이여

엉긴 생명이여

 

나와 가까이 하시질 마십시오

나와 멀리를 하시질 마십시오

나와 인연이 있는 것은 당신의 나

 

 

당신이 돌아가셔야 하신다면

 

어차피 당신이 돌아가셔야 할 밤이시라면

내가 깊이 잠이 들거던 돌아 가 주십시오

 

그렇게도 돌아가셔야 할 몸이시라면

내가 깊이 잠이 들거던 돌아 가 주십시오

 

잎 떨어진 수목의 가지들에

찬 겨울 밤

작은 별들이 소리 없이 엉기듯이

 

잎 떨어진 내 가슴

가지 가지에 엉긴 당신의 소리와 소리

 

무수한 시간이 그대로 흐르고

시내물처럼 내 곁을 지나는 나의 밤

 

당신이 그렇게도 돌아 가셔야 할 몸이시라면

어차피 돌아가셔야 할 밤이시라면

 

소리 없이 타오르는 내 황홀한 가슴에

문을 닫고

내 깊이 잠이 들거든 고이 돌아가 주십시오

 

 

당신이 없는 침실은

 

당신이 돌아 가고

당신이 다시 찾어 오지 않는 나의 침실엔

긴 적막이 그대로 세월이었습니다

 

마침내 먼 인생이 홍수와 같이 밀리다

지나간 자리에 고요함처럼

당신이 돌아간 깊은 자죽엔 내가 남고

 

세월에 세월을 몰고 장미 뿌리를 캐어

뿌리를 다듬어 긴 장미못을 쳐야 할

오랜 내 침실의 어두운 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돌아간 세상은 쓸쓸한 유령

 

밤이 내리면 밤을 따라

비가 내리면 비를 따라

줄줄 생명의 외줄을 따라

나 돌아 오는 빈 침실

 

잠 자는 나무벌레처럼 연한 혈액에

슬픔이 서리다 흐르고

기쁨이 깃들다 사라지면

 

별이여

 

별들이 겹쳐드는 문 앞에

맑은 나 호올로

 

당신이 돌아간 깊은 침실은

긴 적막이 그대로 세월이었습니다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 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 자리 자리마다 가라앉아

귀중한 생명들을 여물게 하였습니다

 

보시다 시피

어젠 담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 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상수리를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 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골을 걷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는 나의 자리

검은 수림처럼 그대로 말 없이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소리 없이 밤이 내리면

 

소리 없이 유리창에 밤이 내리면

당신이 없는 이 침실은 그대로 무덤

 

인색한 애정에 상한 산비둘기처럼

마음의 날개를 접고

 

나 돌아가는 길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서 헤어지는 것

 

바람과 같이 냉기와 같이 사라지는 자리

소리 없이 유리창에 밤이 내리면

당신이 없는 내 가슴은 빈 당신의 무덤

 

인색한 애정의 부스럭지를 밟으며

나 돌아 가는 길

 

 

하나의 꿈인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닢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 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랑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내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한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하는 것은

 

가시지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冬日

 

회색 하늘에 나무 상수리 사이로 연시와 같은 해가 솟는다

 

나는 해보다 일찌기 깨어 맑은 연시와 같은 해가 동쪽 하늘에 솟아오르는 것을 유리창 아래로 기다리곤 한다

 

나의 방은 까치집 같이 높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바람이 술술 지나고 나는 겨울 속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가느다란 水銀柱하나 三十七度 附近

 

나는 내 체온에 의지하여 산다

 

까치집 같이 높은 자리에서 빨간 새털과 같은 이불을 둘둘 말고 해를 내려다 본다

 

맑은 연시와 같은 해가 크레온 화집처럼 재빛 하늘 검은 나무 상수리 사이로 나와 내 가슴 아래로 솟아 오른다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그냥 멍하니 노상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새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그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대로 하얀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닢들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 텅 빈 하늘에

 

눈이 내립니다 눈이 내립니다

내 마음 속 텅 빈 먼 하늘에서

눈이 내립니다

 

오늘은 외로움도 없이 슬픔도 없이

마냥 마음 속으로 술술 눈이 내립니다

 

고운 마음과 마음이 서로의 긴 세월처럼

제 자리 자리에 쌓이고

 

서로에 깊이 간직한 마음

마음을 닫고 우리 서로 죽으면

이야기들만 남는 것

 

소리도 없이

마냥 어린애처럼 이야기에 안겨

 

듣고만 싶은 낮은 그 말소리도 없이

마음과 마음의 거리에 마냥 하얀 눈이 내립니다

 

슬픔도 외로움도 그 많은 희망도 없이

오늘은

내 마음 가지 가지에

 

고이 얼어 부스러지는 당신의 눈물처럼

...하얀 눈이 내립니다

 

 

마침내 깊은 안개가 개이듯이

 

...마침내 깊은 안개가 개어지듯이

으스러진 내 가슴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고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은 잠시 내 곁에 그대로 있어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을 만났을 때와 같이

그렇게

당신을 그대로 상처없이 돌려 올리기 위하여

당신은 잠시 내 곁에 그대로 있어주십시오

 

살아서 한번 피는 꽃

 

나 먼저 져서

당신을 먼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남기고

당신과 내가 그날과 같이 멀어질 때까지

남은 시간 당신은 잠시 그대로 내 곁에 있어 주십시오

 

희망은 내것이 되다 말고

나는 나를 버리고

소리 없이 지나는 외로움

 

마침내 깊은 안개가 개어지듯이

으스러진 내 가슴에서

당신의 흔적이 고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은 잠시 내 곁에 그대로 있어 주십시오

 

 

早春

 

우울한 이월이 가누나

하늘과 땅이 활짝 풀리누나

 

까치집 같이 높은 맑은 유리창을

열고

 

자고 일어난 내 침대에도

솔개미처럼 먼 당신의 눈에도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세월을 재우고

 

봄은 오누나

활활 봄이 풀리누나

 

사랑은 없어도

꽃술에 취해

 

봄에 밀려

당신을 두고서도 나는 둥둥 떠 가누나

 

 

봄은 밤으로부터 하늘로

 

봄은 밤으로부터 하늘로

하늘로 피어 오릅니다

 

밤이 하늘로 봄으로

뭉게 뭉게 풀려 사라집니다

 

참혹한 나의 밤이여

겨울이여

 

사라지는 세월처럼 여인처럼

고운 눈썹으로

 

<안녕!>

 

사랑은 내 것이 아녀도

듣기만 해도 좋다

 

선혈처럼 상처진 가슴에 가슴에

가시꽃처럼 보얀 아지랑이 끼고

 

소식이 없는 마을에서 나비와 같이

하늘이 가까워 옵니다

 

깊어진 마음의 골짜기로

술술 눈얼음이 풀려서 내립니다

 

 

人生合乘

 

義務와 같이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안고

五人乘 人生合乘에 끼면

 

車窓은 봄

 

활짝 개인 하늘 아래

京仁街路 八十餘里 잔잔한 起伏

果樹園 가지들이 손목을 흔들고

보리 밭 양지에 풀물이 든다

 

봉봉

 

인생의 안개가 온 몸에 낀채

늘어진 陵線에 아지랑이가 핀다

 

 

片片花心

 

꽃이 지누나

기다려도 무심한 봄 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은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몸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세상에 한번 피어

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하늘이 넓어 산이 깊어

가지에 피어도

피다 지는 마음은 나 여기 마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깊은 골에

봄이 무거워 봄이 지누나

 

 

德壽宮

 

잔디가 해진 연못 가로

나비는 비틀 비틀

 

물을 뿜는 물개는 발가벗고

석조전 앞뜰

 

솜털이 앙상한 등넝쿨 잎새 아래

직업이 싫은 사내는 낮잠이 들었다

 

뭇사람들이 흘리고 간 일요일

종이 담배 껌 껍질

 

늙은 과부들이 쓸어 가는 월요일

이슬진 오전

 

진달래 연분홍

입술 연지는 허트러지고

 

모란 단장하는 덕수궁 늦은 아침

늙은 마음

 

잔디 아스라진 연못 속에서

이슬 같은 햇살이 솟아든다

 

 

飛行機

 

孤兒와 같은 아이들을 양손에 잡고

日曜日

昌慶苑 어린이 飛行場 入口에 머물면

 

五十圜 旅券

가벼운 手續

 

巴里

羅馬

華府

慶州

 

빙빙 돌아

아이들은 하늘에 뜨고 서글픈 아버지

 

하늘에서 박수와 같이

아이들은 가는 손목들을 흔들고

 

나의 얼굴에선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도 없다

 

빠이 빠이

 

물거품처럼 부풀어오르는 나의 이름이여

屈辱

 

 

閑島

 

바다는 水綠色

인생은 初綠之五月

내 다음 閑島

 

絶壁에 서서

海原千里 가고픈 마음

되돌아오는 물결

 

水泡와 같은 裟婆航路

旅客船 뜨고

멀리 여인의 웃음소리

 

보라색 손수건이

季節風 船頭

맑은 사랑처럼 파다긴다

 

바다는 水綠色

내 마음 海原千里

...

初綠之閑島

 

 

지나는 길에

 

외로운 당신 방에서 쉬었다 갑니다

 

오늘은 무더운

여름 밤

 

세상이 어떻게 되었든지

당신의 빈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어차피 가는

여정

총총한 별밭

 

당신의 입술이 이슬에 젖어

어데선지 이슬처럼 돌아 올 무렵

 

자취 없이

외로운 자리에서 당신 없이 나 돌아갑니다

 

눈을 감으면

그때까지 하얀 자리

 

인생에 정을 주고 거두지 않은채

나 돌아가는

나의 여정

 

당신의 향기를 남긴채

당신이 빈 방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김 수영 대표시모음

 

33-2.<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33-3.<>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33-4.병풍(屛風)-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33-5.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33-6-폭포(瀑布)-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33-7<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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