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장자莊子

 

요약

 

BC 290년경에 만들어진책으로, 전국시대의 사상가인장자[이름은 주(周)]의저서이다. 전문 6만 5,000여자이며, 「내편(內篇)」7편[〈소요유(逍遙遊)〉,〈제물론(齊物論)〉,〈양생주(養生主)〉,〈인간세(人間世)〉,〈덕충부(德充符)〉,〈대종사(大宗師)〉,〈응제왕(應帝王)〉]과〈병무(騈拇)〉 이하「외편(外篇)」 15편,〈경상초(庚桑楚)〉 이하「잡편(雜篇)」 11편 등 모두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붕도남(大鵬圖南)

 

북녘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그 등넓이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을 덮는 검은 구름과도 같다. 이 새는 바다에서 큰 바람이 이는 계절이 오면 천지(天池)라는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괴이한 일들이 실려 있는 『제해(齊諧)』라는 책을 보면,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3,000리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하늘을 날아올라 6개월 동안 쉼 없이 날갯짓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지상에서는 아지랑이와 먼지가 피어오르고, 모든 생명체의 입김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늘은 파랗다. 그 빛깔은 하늘의 본래 색깔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9만 리 먼 하늘에서 붕이 내려다보는 이 지상 세계도 파란색일 것이다.

 

물이 깊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이 마루에 괴면 작은 풀잎이 배처럼 뜰 수 있지만, 거기에 잔을 올려놓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날개를 띄워 올릴 힘을 얻을 수 없다. 9만 리 높은 하늘에 올라야만 붕의 날개가 강한 바람의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붕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자유롭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그 붕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해도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끝에도 못 닿고 때로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어찌 9만 리 먼 하늘까지 올라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정말 웃기는 놈이다.”

 

교외로 소풍을 나가면 하루 세 끼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백 리 길을 가려면 하룻밤 동안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려면 세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조그만 날짐승이 대붕의 비상을 어찌 알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조균(朝菌,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드는 버섯의 일종)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런 것이 짧은 수명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00년 동안은 잎이 피어나 자라는 봄이고, 또 500년 동안은 잎이 지는 가을로 천 년 동안 단 한 줄의 나이테를 만든다. 아득히 먼 옛날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000년 동안은 봄이고 또 8,000년 동안은 가을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작 700년을 산 팽조(彭祖)는 장수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본받으려 한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소요유(逍遙遊)〉

 

조삼모사(朝三暮四)

 

말은 ‘그렇다’와 ‘아니다’가 명확하다. ‘도’(만물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는 끝없이 변화하므로 완전한 존재일 수 있는데, 그 변화는 개별 사물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 곧, 그런 것은 그렇고, 아닌 것은 아니어야 한다. 말이란 의미가 정해지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 말로 표현하는 대상은 개별 존재임과 동시에 보편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은 풀포기와 큰 기둥, 문둥이와 미녀 서시(西施)를 그 예로 들어 보면, 전자는 작고 큼에서, 후자는 추하고 아름다움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실은 동일한 현상이다. 아무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괴이쩍은 사물이라 해도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똑같다.

 

이러한 형식뿐 아니라 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파괴로 보이는 현상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완성일 수 있고, 완성으로 보이는 현상도 파괴가 될 수 있다. 곧, 모든 존재는 형식에서나 운동에서나 구별이 없다.

 

이러한 만물제동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사물을 ‘용(庸)’(자연의 모습)에 맡긴다. 용(庸)은 용(用)과 통한다. 사물은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올바른 모습을 드러낸다. ‘용(用)’은 다시 ‘통(通)’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러운 작용에는 무리가 없다. ‘통(通)’은 또한 ‘득(得)’으로 이어진다. 무리 없이 작용할 때 사물은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인식은 만물의 실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 그대로 두려는 의식마저 사라진 상태가 ‘도’와 일체화한 경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선택을 고집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런 것을 두고 ‘조삼모사(朝三暮四)’라 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원숭이 조련사가 어느 날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서 말을 바꾸었다.

 

“미안, 미안.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지.”

 

그러자 원숭이는 좋아라 했다.

 

실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노여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시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천균(天鈞)’(만물제동의 원리, 자연의 조화)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兩行)’(양은 사물과 나, 행은 장애가 없음. 사물과 나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곧, 모든 모순과 대립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무한한 자유의 경지)이라 한다. 〈제물론(齊物論)〉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이 소를 잡다)

 

인간의 생명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롭다.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앎의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앎의 작용으로 선악을 구별한다. 그러나 선이건 악이건 간에 사회적 명성이나 형벌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 지나지 않으니, 그러한 선악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면 평안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어느 날,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위(魏)나라 혜왕(惠王) 앞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았다.

 

포정이 소를 손으로 잡고, 어깨에 힘을 넣어 발의 위치를 잡으며 무릎으로 소를 누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고기와 뼈가 깨끗이 발라졌다. 그 리듬을 탄 칼질 소리는 마치 ‘상림무(桑林舞)’(은나라 탕왕이 즐기던 무곡)나 ‘경수회(經首會)’(요임금이 즐기던 무곡)처럼 들렸다.

 

“아! 참으로 신기로다!”

 

혜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포정은 그 말을 듣고 칼을 놓더니 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공하오나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이 극한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저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감각이 멈추고 마음만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입니다. 소의 몸에 자연스레 나 있는 틈을 따라 칼질을 하므로 커다란 뼈는 물론이고 근육이나 살이 마구 얽힌 부분이라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발라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고, 꽤 솜씨 있는 요리사라 하더라도 1년에 한 번은 칼을 바꿉니다. 왜냐하면 뼈에 부딪쳐 날이 빠지거나 오래 사용하는 사이에 칼날이 무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보십시오. 19년이나 사용한 것입니다. 벌써 수천 마리의 소를 발랐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지 않습니까?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일 충분한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뼈가 얽힌 어려운 부분에 이르면 마음을 다잡고 긴장합니다. 눈을 한 점에 집중하면, 동작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칼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모를 지경에 이릅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흙덩어리처럼 뼈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면 긴장을 풀고 칼을 든 채 일어서서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봅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그렇게 선 채로 있다가 이윽고 냉정을 되찾으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혜왕은 감동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 참된 삶을 누리는 방법)의 이치를 터득했노라.” 〈양생주(養生主)〉

 

무용(無用)의 용(用)

 

목수 석(石)이 제나라를 여행하다가 곡원(曲轅)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을 모신 사당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고, 지상에서 7~8척 높이가 된 지점에서야 가지가 뻗어나 있었다.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지만 해도 수십 개는 되었다. 그 주위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목수 석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한동안 그 나무를 바라보던 제자가 스승 석에게 달려가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렇게 훌륭한 나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석이 대답했다.

 

“건방진 소리 말거라. 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배를 만들면 그냥 가라앉을 테고, 널을 짜면 금방 썩을 것이고, 그릇을 만들면 곧 망가질 것이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를 테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 게야. 그러니 저건 재목으로 쓸데가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저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게야.”

 

목수 석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대체 나를 어디다 비교해서 쓸모없는 나무라 하느냐? 필시 인간에게 유용한 나무에 비교했을 테지. 하기야 배나 귤, 유자 같은 열매는 익으면 사람들이 따 먹고, 그러다 보면 가지도 부러질 테지.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질 것이야. 결국 그 나무들은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삶이 괴롭고, 그러니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어 버리지. 스스로 세속의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날까지 오로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이제 천수를 마감하려는 때에 이르러 마침내 아무 쓸모 없는 나무가 되었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야. 만일 내가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베어졌을 것이야.

 

다시 한 번 말해 두겠는데, 너나 나나 어차피 자연계의 사소한 현상에 지나지 않아. 그런 물건이 다른 물건의 가치를 정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너처럼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야말로 실제로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야. 그런 쓸모없는 인간이 나처럼 쓸모없는 나무의 진가를 알아볼 리 없지.”

 

다음 날 아침, 목수 석이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자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간절히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면서, 왜 사당 앞의 신목(神木)이 되었을까요? 신목이란 사람을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목수 석이 대답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저 상수리나무도 겨우 신목이 되어 사당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야. 사람들이 비판을 하면 자신을 헐뜯는 소리라며 들은 척도 않아. 신목이 안 되었더라면 잘려 버리고 말았을 테지. 사람들이 저 나무를 신목이라 우러러보는 것도 당치 않아. 나무 자신은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따름이니까.” 〈인간세(人間世)〉

 

좌망(坐忘)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저도 이제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인의를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된 일이구나. 하지만 아직 모자란다.”

 

며칠이 지난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예악(禮樂, 예절과 음악)을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다.”

 

며칠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욱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발전하였느냐?”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좌망?”

 

공자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손발과 몸을 잊고,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텅 비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선악의 구별이 없어지고, 도와 함께 변화하면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대종사(大宗師)〉

 

책 속의 명문장

 

壽則多辱 / 수즉다욕

“아들이 많으면 두려움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일이 많아지며, 오래 살면 욕됨이 많아진다.” 요임금의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많은 집착에 얽매인 단계이며 『장자』가 이상이라고 한,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 「천지(天地)」

 

蝸牛角上 / 와우각상

달팽이(蝸牛) 뿔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동을 부리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말이다. 위나라 혜왕이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대진인(戴晋人)이라는, 장자와 같은 유형의 인물이 두 나라가 싸우는 형국을 달팽이 뿔 위의 싸움이라는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편 데서 생겨난 말이다. - 「칙양(則陽)」

 

鑑於止水 / 감어지수

흐르는 물은 거울이 될 수 없지만, 고인 물은 어떤 모습도 비추어 낸다. 그처럼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동의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 삼지 않고, 가라앉은 물을 거울로 삼는다)와 같은 뜻이다. - 「덕충부편(德充符篇)」

 

莫逆之友 / 막역지우

마음속에서부터 서로를 이해하며 뜻이 통하는 친구. - 「대종사」

 

螳螂之斧 / 당랑지부

낫 같은 다리를 치켜들고 수레에 대항하는 사마귀의 모습을 빌려,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나무라는 말로 쓰인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의 안합(顔闔)은 난폭하기로 유명한 위(衛)나라의 태자 괴외(蒯聵)의 선생으로 초빙되자,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蘧伯玉)에게 어떤 자세로 태자를 가르쳐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거백옥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마귀는 팔뚝을 휘둘러 수레에 맞섭니다. 제 능력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요. 선생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태자에게 강요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인간세」

 

『장자』 33편 가운데 장자 자신이 쓴 것은 「내편」 7편뿐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세의 장자학파 사람들이 장자에 가탁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장자가 살았던 연대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몽현[蒙縣,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邱縣)]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고, 옛날에 몽현의 옻나무 밭을 지키는 관리였다. 그리고 위(魏)나라 혜왕(惠王), 제나라 선왕(宣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다고 한다. 위나라 혜왕의 재위 시기는 BC 370~BC 319년이고, 제나라 선왕의 재위 시기는 BC 319~BC 301년이므로, 장자는 BC 4세기 후반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장자의 경력에 대해서는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 아내가 있었고[〈지락편(至樂篇)〉], 제자가 있었다는 것[〈산목편(山木篇)〉, 〈열어구편(列禦寇篇)〉]을 알려 주는 에피소드나, 그의 가난에 대해 말하면서 감하후(監河侯)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는 이야기[〈외물편(外物篇)〉], 넝마를 입고 위나라 혜왕을 만난 이야기[〈산목편(山木篇)〉] 등으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사기』에는 장자를 재상으로 삼으려는 초나라 위왕(威王)의 요청에 대해 진흙탕에 뒹굴어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로 보기 좋게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장자는 만물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도(道)’라 하고, 그 ‘도’에서 보자면 모든 사실에는 구별이 없다[만물제동(萬物齊同), 곧 만물은 모두 동일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고 했다. 그리고 이 ‘도’와 일체화하는 것, 곧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자유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을 위한 수양을 ‘심재(心齋)’주, ‘좌망(坐忘)’주이라고 했다. 또한 자연을 훼손하는 인위적 행위를 배척하고, 인위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쓸모 없는 것이 실제로는 유용하다고 말했다.

 

훗날 『장자』는 무위자연의 처세 철학을 주장하는 『노자(老子)』와 일체화되어, 노장 사상(老莊思想)주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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