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노자老子

 

노담

 

요약

 

BC 510년경에 만들어진책으로, 자연에 순응하면서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살아야 한다는 동양적 지혜의정수를 담고 있다. ‘노(老)’는저자 노담의 성이고, ‘자(子)’는학자나 그 저술을 가리키는말이다. 따라서 ‘노자’란 노선생의 학설을 정리한책이라는 뜻이다. 전문 약5,400자이며, 보통 81장으로나누고, 제1~제37장을 상편,제38~제81장을 하편이라한다.

 

저작자노담(老聃)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노자는 ‘유약겸양부쟁(柔弱謙讓不爭)’의 덕을 설파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굴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부드러움은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필승의 방책이다. 버드나무 가지가 눈사태에도 부러지지 않듯 노자는 유연함을 생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리고 유연함의 극치를 추구하여 자연스러운 흐름과 모든 고정된 형태를 부정하는 경지에 이른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센 것을 꺾는 데 물보다 더 뛰어난 것 또한 없다. 이는 물이 철저하게 약하기 때문이다. 「제78장」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물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쇠와 돌을 마음대로 부린다. 형태가 없는 것은 도저히 파고들 틈도 없는 그 어떤 곳이라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제43장」

 

형태가 없는 것을 ‘무’라 한다. 이 무의 움직임을 ‘무위(無爲)’라 한다. 노자의 승부사로서의 진면목은 무위로 이기는 것을 가장 높이 산다는 데 있다.

 

훌륭한 무사는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잘 이기는 사람은 함부로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늘 남에게 겸손하다. 「제68장」

 

능동적인 것보다 수동적인 것이 중요하다. 이 가르침을 지키면 나아가도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도 휘두르는 것같이 보이지 않으며, 적을 쳐도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무기를 들어도 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제69장」

 

노자는 이처럼 ‘무’를 활용한 승리야말로 병법의 궁극으로 쳤다. 승부란 무조건 이긴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투쟁을 피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상대에게 패배의 굴욕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상대도 모르게 승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움츠리게 하고 싶으면 먼저 펴게 해 주고, 약하게 만들고 싶으면 먼저 강하게 해 주며, 멸망시키고 싶으면 먼저 융성하게 해 주고, 빼앗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제36장」

 

늘어날 만큼 늘어났으면 줄어드는 것이 도리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에 이기는 것은 이런 자연의 법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무위자연’(무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 식 승리법은 약자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강자가 계속 강자이기 위해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었다.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니 천하의 ‘여자’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손을 뻗지 않고도 남자를 마음대로 부린다. 큰 나라가 스스로 겸양하면 작은 나라가 저절로 따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양하면 큰 나라는 스스로 작은 나라를 받아들인다.

 

큰 나라는 모든 나라를 수용해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기를 원하며, 작은 나라도 큰 나라의 그늘 아래 있기를 바란다. 서로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큰 나라가 먼저 겸양해야 한다. 「제61장」

 

무위로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무위로 다스리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최고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이 군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다음으로 좋은 군주는 백성이 군주를 공경하며 찬양한다. 그보다 하수는 백성이 두려워하는 군주이며, 최악의 군주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한다. 군주는 백성의 자연스러운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뛰어난 군주는 함부로 명령하지 않고, 만사를 백성에게 맡겨 둔다. 그리하여 잘살게 되면, 백성은 그저 군주의 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리 된 줄로 안다. 「제17장」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노자가 전하고 싶은 말은 ‘대책 없이 있어라’라는 것이 아니다. 군주가 어떤 시책을 세웠는지조차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통치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이상적인 지도 방식은 농부의 작업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농부는 농작물을 잘 키우기 위해 밭을 갈고 성장을 방해하는 원인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다음 일은 자연에 맡기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흙 속의 돌멩이와 잡초, 해충 등은 인간의 간사한 지혜와 그 지혜로 인해 끝없이 비대해지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옛 성인은 백성을 영악하게 만들지 않고, 우둔하고 소박하게 만들었다. 백성이 영악하면 정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묘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간사한 꾀를 부리지 말고 무위의 정치를 해야 한다. 「제65장」

 

위정자가 재능을 중시하지 말아야 백성들은 다투지 않고, 귀한 물건을 중시하지 말아야 도둑이 생기지 않으며,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제3장」

 

백성들의 마음에서 욕망을 없애고, 대신 육체는 편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성인이 나라 다스리는 법이다.

 

이 부분을 두고 노자가 우민정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노자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의 사상은 결코 위정자가 백성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우민정치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정자들이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 때문이다. 백성이 반항하는 것은 그들이 술책을 부려 억압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목숨을 잃는 것은 그들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제75장」

 

천하에 금기가 많으면 백성이 가난해지고, 통치자가 지략이나 권모술수를 많이 쓰면 쓸수록 세상은 어둡고 혼란스러워지며,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불행한 사건은 더 많이 일어나고, 법률이 정비되면 될수록 범죄는 늘어난다. 「제57장」

 

2천 수백 년 전의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경쟁 사회의 정신적 피폐와 기술 문명의 발전에 따른 환경 파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한층 격렬해지는 생존 경쟁의 장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 길은 단 하나, 현세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의욕에 넘치지만, 나는 멍하니 모든 것을 잊고 있다. 나는 어리석어 무엇 하나 분별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명민하지만, 나는 도리에 어둡고 어리석다. 나는 정처 없이 출렁이는 바다이며, 그냥 스쳐 가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지만, 나는 우둔하고 촌스럽다. 나 홀로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자연이라는 어머니 품에 안기리라. 「제20장」

 

노자가 말하는 ‘나’라는 주체성은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바다처럼 형체도 없이 출렁이고, 무작정 부는 바람처럼 어떤 세속적 개념으로 잡을 수 없는 자유의 주체성이다.

 

천지는 영원하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도 이와 같다. 사람 앞에 서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람 앞에 설 수 있다. 내 몸을 잊었기에 오히려 내 몸을 온전히 한다. 「제7장」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때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닌 인간은 번뜩이는 지혜의 빛과 의지의 불꽃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노자는 너무 넓어서 어떤 관점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인격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았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이 많으면 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욕망의 문을 닫는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마음의 엉킴을 풀어 헤친다. 자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풍진 세상과 어우러진다(和其光, 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주이라 한다. 그러므로 현동에 이른 사람을 보면, 친밀하게 대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이롭게 해야 할지 해롭게 해야 할지, 존경해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사람들은 가늠하지 못한다. 외부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하다. 「제56장」

 

인간이란 자연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 철학의 토대는 인간이란 자연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에 있다. 따라서 인간적 지혜의 이상적 형태는 만물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변화하는 실체로 파악하고, 우주 만물의 변화 속에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낸다.

 

그 법칙이란, 모든 현상의 배후에 깔려 있는 시공을 넘어선 본체와 그 운동 원리이다. 그 본체를 그는 ‘도’라고 했다. ‘도’는 ‘무(無)’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각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도는 한정될 수 없는 본체이므로 ‘무’라 할 수밖에 없지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된 현상, 곧 만물로 나타나므로 ‘유’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무는 극소를 나타내고, 유는 극대를 나타내므로 도는 소(小)이면서 대(大)이다. 이처럼 도는 모든 대립을 통일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도 안에 포괄되는 대립 관계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무는 늘 유로 바뀌려 하고, 유는 늘 무로 바뀌려 한다. 이렇게 대립하고 서로 전환하려는 운동이 도의 법칙이다.

 

대립 상태를 내포하면서, 그 대립적인 것으로 바뀌려 하는 것이 도의 운동이다(反者, 道之動). 늘 소극을 지키려 함으로써 한없이 적극으로 통한다. 그것이 도가 작용하는 형식이다(弱者, 道之用). 만물도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 곧 현상 일반에 도달한다. 그 유의 근원을 더 파고 들어가면 ‘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른다. 「제40장」

 

서로 대립하는 것의 상호 전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됨으로써 끝없는 생성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노자의 자연관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각에 사로잡혀 대립하는 것의 일면[예를 들어 미추(美醜)에서의 미]만을 고집함으로써 자연의 변화에 어긋나는 작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끝없는 미망(迷妄)에 빠지는 것이다.

 

책 속의 명문장

 

道可道, 非常道 / 도가도, 비상도

진정한 도는 절대 불변의 고정된 도가 아니다. 만물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진정한 인식은 사물을 늘 변화 속에서 파악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아름답다고만 생각할 뿐, 아름다움이 곧 추악한 것임을 모른다. 모든 대립적인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의 일면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上善若水 /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기르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이 물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功遂身退, 天之道 / 공수신퇴, 천지도

공을 세우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니, 끝까지 올라가면 이제 남은 것은 내려가는 일뿐이다. 성공했다고 그 지위를 끝까지 지키려 하다가는 재앙을 부를 따름이다.

 

大道廢, 有仁義 / 대도폐, 유인의

사람들이 인이니 의니 하게 된 것은 무위자연의 대도가 사라지고 작위(作爲)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뒤부터이다. 도덕이 필요 없는 세상이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이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만족하고 물러설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오래 지탱할 수 있다.

 

大巧若拙, 大辯若訥 / 대교약졸, 대변약눌

진정한 기교는 치졸해 보이고, 진정한 웅변은 어눌하게 들린다. 모든 진실은 작위를 버리고 자연의 길을 따르므로 오히려 진실되게 보이지 않는다.

 

노담은 춘추시대 말기의 현자로,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 적이 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라고 한다. 초(楚)나라 출신으로, 주나라 왕실에 소속되었으나 주나라의 덕이 쇠약해지자 함곡관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 자료가 없어 우화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며, 설령 그의 존재를 긍정한다 해도, 『노자』라는 책의 저자가 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노자』는 『노자서(老子書)』 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고도 부른다. 그 용법이나 문자들을 보건대, 전국시대 이후의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상적으로는 전국시대의 양주(楊朱), 송견(宋銒), 윤문(尹文), 전병(田騈), 신도(愼到), 장주(莊周)와 같이 훗날 도가(道家)주로 분류되는 학파의 설이 혼재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도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사상을 집약하고 체계화해 노담이라는 이름에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도’를 체현한 성인만이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정치론은 이윽고 법가의 설과 결탁해 군주 독재 체제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원리를 설파한 군사론은 ‘손자’의 병법과 연관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노자』는 후한 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하상공(河上公) 주석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의 주석본이다. 1973년에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굴된 『노자』 고사본 2종류는 전한(前漢) 초기나 그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현존하는 텍스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데, 내용은 위의 2가지 주석본과 별 차이가 없고, 다만 상편과 하편의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현대 중국에서는 노자가 달성한 변증법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사상 전반은 귀족 계급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비판해 왔으나, 비림비공[批林批公주, 린뱌오(林彪)주와 공자를 비판한 것] 운동 이후로는 그 사상의 병가적 또는 법가적인 측면을

평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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