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春秋論上
辨이라
事有不幸出於久遠而傳乎二說이면 則奚從가
曰從其一之可信者라
然則安知可信者而從之아
曰從其人而信之가 可也라
衆人之說이 如彼하고 君子之說이 如此하면 則捨衆人而從君子라
君子博學而多聞矣나 然其傳不能無失也라
君子之說이 如彼하고 聖人之說이 如此하면 則捨君子而從聖人이라
此擧世之人皆知其然이어늘 而學春秋者獨異乎是라
孔子는 聖人也니 萬世取信一人而已라
三子者는 曰非公也라 是攝也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謂之公하고 而從三子謂之攝하고
三子者曰非趙盾也라 是趙穿也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趙盾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趙穿하고
買病死而止不嘗藥耳라하야늘 學者不從孔子하야 信爲弑君하고 而從三子하야 信爲不嘗
藥하니 其捨經而從傳者는 何哉오
經簡而直하고 傳新而奇하니 簡直은 無悅耳之言하고 新奇는 多可喜之論이라
是以로 學者樂聞而易惑也라
予非敢曰不惑이나
然信於孔子而篤者也니 經之所書는 予所信也요 經所不言은 予不知也라
難者曰 子之言은 有激而云爾라
夫三子者는 皆學乎聖人이요 而傳은 所以述經也니 經文隱而意深이어늘 三子者從而發之라
故經有不言하고 傳得而詳爾니 非爲二說也라하야늘
予曰 經所不書를 三子者何從而知其然也오
曰 推其前後而知之요 且其有所傳而得也라
國君必卽位어늘 而隱不書卽位하니 此傳得知其攝也요
弑君者는 不復見經하고 而盾復見經하니 此傳得知弑君非盾也요
君弑에 賊不討면 則不書葬이어늘 而許悼公書葬하니 此傳得知世子止之非實弑也라
經文隱矣어늘 傳曲而暢之하니 學者以謂三子之說이 聖人之深意也라
是以로 從之耳니 非謂捨孔子而信三子也라하야늘
予曰 然則妄意聖人而惑學者는 三子之過而已라
使學者必信乎三子인댄 予不能奪이어니와 使其惟是之求인댄 則予不得不爲之辨이라호라
01. 《春秋》에 대한 論 上
조리가 있다.
불행하게도 세월이 오래 흐른 뒤에 두 종류의 說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면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믿을 만한 한 가지 설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을 알아서 따르겠는가?
말한 사람의 德行과 名望에 의거하여 그의 說을 믿어야 한다.
衆人의 설이 저와 같고 君子의 설이 이와 같다면 중인을 버리고 군자를 따른다.
군자는 널리 배워 見聞이 많으나 군자가 전하는 설에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君子의 설이 저와 같고 聖人의 설이 이와 같다면 군자를 버리고 성인을 따른다.
이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春秋》를 배우는 자들만은 이와 다르다.
孔子는 聖人이니 만세토록 이 한 사람이 믿음을 받았을 뿐이다.
公羊高, 穀梁赤, 左丘明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널리 배워 견문이 많았지만, 그들이 기록한 傳에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공자가 기록한 經과 세 사람이 기록한 傳에 다른 점이 있으면, 배우는 자들은 차라리 經을 버리고 傳을 따르며, 공자를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믿으니, 심하도다. 그 미혹됨이여!
經에 魯 隱公의 일에 대해 “公과 邾儀父가 蔑에서 會盟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은공이 죽었을 때 “公이 薨하였다.”라고 기록하여 孔子는 시종 ‘公’이라 하였고,
세 사람은 “정식으로 卽位한 것이 아니라 攝行한 것이기 때문에 ‘公’이라 부를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公’이라 하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攝行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晉 靈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趙盾이 자기 임금 夷皐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임금을 시해한 자가 趙盾이 아니라 趙穿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한 자가 ‘趙盾’이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趙穿’이라고 믿었다.
또 許 悼公의 일에 대해 공자는 “許나라의 世子 止가 자기 임금 買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세 사람은 “허나라의 세자 지가 자기 임금 買를 시해한 것이 아니다.
買는 병들어 죽은 것이고 止는 藥을 맛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공자를 따라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믿지 않고 세 사람을 따라 ‘약을 맛보지 않았다.’라고 믿었으니, 經을 버리고 傳을 따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經은 簡直하고 傳은 新奇하니, 簡直한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없고 新奇한 것은 기뻐할 만한 의논이 많다.
이러므로 배우는 자들이 듣기를 좋아하고 미혹되기 쉽다.
내가 감히 “미혹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孔子를 독실하게 믿는 자이니, 經에 기록된 것은 내가 믿는 바이고 經에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모르는 바이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마음에 감발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이르는 것일 뿐이다.
세 사람은 모두 聖人에게 배웠고 傳은 經의 내용을 서술한 글이니, 經은 글이 은미하고 뜻이 깊은데 세 사람이 이에 의거하여 의미를 밝혀낸 것이다.
그러므로 經에 말하지 않은 것을 傳에서 상세히 말한 것이니, 두 가지 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경에 기록하지 않은 바를 세 사람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변론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前後의 사실을 유추하여 알았고 전하는 말을 듣고서 알았다.
《春秋》에서는 國君에 대해 반드시 卽位 사실을 기록하는데 魯 隱公에 대해서는 ‘卽位’라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傳에서 攝政임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을 시해한 자는 다시 經에 드러내지 않는데 趙盾의 경우 〈‘宣公 6년 봄에 晉나라 趙盾과 衛나라 孫免이 陳나라를 습격하였다.’라고〉 다시 經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傳에서 임금을 시해한 자가 趙盾이 아님을 알았던 까닭이다.
또 임금이 시해를 당하였을 때 賊을 토벌하지 않았으면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데 許 悼公의 경우 〈‘겨울에 許 悼公을 장사 지냈다.’라고〉 장사 지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傳에서 世子 止가 실제로 시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까닭이다.
經의 기록이 은미한데 傳에서 곡진하게 드러내었기에 배우는 자들이 세 사람의 說이 성인의 깊은 뜻이라고 여겼다.
이러므로 세 사람의 설을 따랐을 뿐이지 공자를 버리고 세 사람을 믿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망령되이 성인의 뜻을 짐작하여, 배우는 자들을 미혹되게 하는 것이 세 사람의 허물일 뿐이다.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세 사람의 설을 믿게 하려 한다면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이 진실만을 구하게 하려 한다면 나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역주역주1 春秋論上 : 〈春秋論〉 上‧中‧下 3篇은 歐陽脩의 史論인데, 비록 3편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편의 글로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春秋》는 중국 제일의 編年體 斷代史로 孔子가 編修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문장은 간결하고 문맥에는 褒貶의 의미가 들어 있다. 《春秋》를 해석한 책으로는 《左氏傳》, 《公羊傳》, 《穀梁傳》의 三傳이 있다.역주2 傳 : 經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公羊高와 穀梁赤과 左丘明이 지은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春秋左氏傳》을 가리킨다.역주3 經 : 典範이 되는 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孔子가 지은 《春秋》를 가리킨다.역주4 公及邾儀父 盟于蔑 : 《春秋》 隱公 원년 經文에 “3월에 魯나라 은공이 주나라 임금 儀父와 蔑에서 만나 평화조약을 맺었다.[三月 公及邾儀父盟于蔑]”라고 하였다.역주5 公薨 : 《春秋》 隱公 11년 經文에 “겨울 11월 壬辰에 공이 薨逝하였다.[冬十一月壬辰公薨]”라고 하였다. 薨은 諸侯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역주6 趙盾(돈)弑其君夷皐 : 이 일은 《春秋》 宣公 2년 9월 乙丑 조에 보인다. 趙盾은 趙衰의 아들인 趙宣子로, 춘추시대 晉나라의 정사를 맡아보았다. 임금의 미움을 받고 망명하는 도중에 趙穿이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돌아왔는데, 《춘추》에 ‘趙盾이 자기 임금 夷皐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조돈이 돌아와서 임금을 죽인 조천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조돈이 임금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역주7 許世子止弑其君買 : 이 일은 《春秋》 昭公 19년 여름 5월 戊辰에 보인다. 당시 許 悼公이 병중에 약에 중독되어 죽었는데, 《춘추》에 ‘許나라의 世子 止가 자기 임금 買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세자인 止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은 탓이라 하여 죄를 준 것이다.
發首篇所未盡하니 更明透라
孔子何爲而修春秋오
正名以定分하고 求情而責實하고 別是非明善惡이 此春秋之所以作也라
自周衰以來로 臣弑君하며 子弑父하고 諸侯之國이 相屠戮而爭爲君者가 天下皆是也라
於經에 宜如何而別白之며 宜如何而褒顯之아
其肯沒其攝位之實하야 而雷同衆君하고 誣以爲公乎아
所謂攝者는 臣行君事之名也라
夫攝者는 心不欲爲君而身假行君事니 雖行君事나 而其實非君也라
今書曰公이라하니 則是息姑心不欲之하고 實不爲之어늘 而孔子加之하야 失其本心하고 誣以虛名하야 而沒其實善이라
夫不求其情하며 不責其實하야 而善惡不明이 如此면 則孔子之意疎하고 而春秋繆矣라
春秋辭有同異하야 尤謹嚴而簡約하니
所以別嫌明微하야 愼重而取信이니 其於是非善惡難明之際에 聖人所盡心也라
息姑之攝也에 會盟征伐과 賞刑祭祀가 皆出於己하야 擧魯之人이 皆聽命於己하니 其不爲正君者幾何오
惟不有其名耳니 使其名實皆在己면 則何從而知其攝也리오
故息姑之攝與不攝은 惟在爲公與不爲公이니 別嫌明微가 繫此而已라
且其有讓桓之志를 未及行而見殺하니 其生也에 志不克伸하고 其死也에 被虛名而違本意하니 則息姑之恨을 何申於後世乎리오
其甚高之節과 難明之善을 亦何望於春秋乎아
今說春秋者는 皆以名字氏族予奪爲輕重이라
故曰一字爲褒貶이라
且公之爲字가 豈不重於名字氏族乎리오
孔子於名字氏族에 不妄以加人하니 其肯以公妄加於人而沒其實乎아
以此而言컨대 隱實爲攝이면 則孔子決不書曰公이라
孔子書爲公하니 則隱決非攝이라
難者曰 然則何爲不書卽位오 曰 惠公之終이 不見其事하니 則隱之始立을 亦不可知라
難者又曰 謂爲攝者는 左氏耳요 公羊穀梁은 皆以爲假立以待桓也라
故得以假稱公이라 予曰 凡魯之事가 出於己요 擧魯之人이 聽於己하며 生稱曰公하고 死書曰薨이어늘 何從而知其假오
02. 《春秋》에 대한 論 中
첫째 편에서 다 말하지 못한 바를 밝혔으니, 더욱 밝고 通透하다.
孔子는 무엇 때문에 《春秋》를 編修하였는가.
名分을 바로잡아 分數를 정하고, 情況을 상고하여 事實을 탐구하며, 是非를 분변하고 善惡을 밝히는 것이 《춘추》가 지어진 까닭이다.
周나라의 국력이 쇠퇴해진 뒤로 신하가 임금을 弑害하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며 제후의 나라가 서로 屠戮하여 다투어 군주가 되려고 한 것은 천하가 모두 그러하였다.
이러한 때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염치를 좋아하고 양보할 줄 알아 서로 君位를 쟁탈하던 亂世에 우뚝 서서 군위를 물려주려는 高節을 품었다면 孔子가 이를 알았을 것이다.
공자가 經에 어떻게 분변하여 명백히 하며, 어떻게 찬미하여 드러나게 하였겠는가.
隱公이 攝位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서 여러 군주의 예를 그대로 따라 기록하고 속여서 公이라고 하려 하였겠는가.
이른바 攝政이라는 것은 신하가 군주의 일을 대신 행하는 데 대한 명칭이다.
伊尹, 周公, 共和와 같은 신하가 일찍이 攝政하였지만 商나라와 周나라 사람들이 王이라고 이르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가령 息姑가 실제 섭정하였더라도 칭호가 正君과 다름이 없었다면 명분이 바르지 않고 시비가 분변되지 않는다.
대저 섭정이라는 것은 마음은 군주가 되려고 하지 않지만 몸은 군주의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이니, 비록 군주의 일을 행하더라도 실제는 군주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春秋》에 ‘公’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息姑의 마음은 군주가 되려고 하지 않았고 실제 군주가 되지 않았는데, 孔子가 〈‘公’이라는 명칭을〉 더하여 식고의 本心을 해치고 虛名으로 속여서 실제의 善을 없앤 것이다.
식고의 정황을 상고하지 않으며 사실을 탐구하지 않아서 善惡이 밝혀지지 않음이 이와 같다면 공자의 뜻은 엉성하고 《춘추》는 그릇된 것이다.
《春秋》는 말에 차이가 있어서 더욱 謹嚴하고 簡易하다.
이 때문에 의혹을 분변하고 미세함을 밝혀서 신중하여 믿음을 받았으니, 是非와 善惡이 밝혀지기 어려운 때에 성인이 마음을 다한 것이다.
息姑가 섭정할 때에 會盟과 征伐, 賞刑과 祭祀를 모두 자신이 주관하여 온 魯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명을 들었으니, 正君이 되지 못한 것이 얼마였는가.
즉위했다는 명분을 가지지 못하였을 뿐이니, 가령 명분과 실제가 모두 자신에게 있었다면 어떻게 그가 섭정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息姑가 섭정을 했는지 섭정을 하지 않았는지는 公이라고 하였는지 公이라고 하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이니, 의혹을 분변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것이 여기에 매여 있을 뿐이다.
또 桓公에게 군위를 물려주려는 뜻을 미처 실행하기도 전에 살해되었으니, 살아서는 뜻을 펴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虛名을 뒤집어쓰고 本心과 어긋났으니, 息姑의 한을 어찌 후세에 펼 수 있겠는가.
息姑의 매우 높은 절개와 밝히기 어려운 善心을 또한 어찌 《춘추》에 바라겠는가.
지금 《春秋》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모두 名字와 氏族이 기록되었느냐 기록되지 않았느냐로 輕重을 삼는다.
그러므로 “한 글자가 褒貶이 된다.”라고 한다.
또 ‘公’이라는 글자가 어찌 名字와 氏族보다 중하지 않겠는가.
孔子가 名字와 氏族에 있어서 망령되이 남에게 더하지 않았으니, ‘公’이라는 글자를 망령되이 남에게 더하여 그 실상을 없애려 하였겠는가.
이로써 말하건대, 隱公이 실제로 섭정하였다면 공자가 결코 공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공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은공은 결코 섭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卽位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惠公이 세상을 떠난 일이 魯나라 역사에 보이지 않으니, 隱公이 처음 즉위한 시기를 또한 알 수 없다.
孔子는 200년 뒤에 태어나서 遺書를 얻어서 《春秋》를 編修하였으니, 모르는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내용을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였다.”라고 하였다.
변론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섭정하였다고 이른 자는 左丘明이고, 公羊高와 穀梁赤은 모두 ‘대신 즉위하여 桓公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公이라고 假稱한 것이다.’ 하였다.”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魯나라의 정사가 은공 자신에게 비롯되었고 온 노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명을 들었으며, 살아서는 ‘公’이라고 일컬었고 죽어서는 ‘薨’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어떻게 가칭임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역주1 春秋論中 : 이 글은 隱公이 攝政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술을 전개하였다. 작자가 《春秋》에 은공을 ‘公’이라고 일컬은 것에 포착하여, 여기에 의거하여 사실을 논하고 이치를 분석하여 三傳에 이른바 은공이 섭정했다는 설이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역주2 有一人焉 : 魯 隱公을 가리킨다.역주3 懷讓國之高節 : 隱公은 惠公의 繼室인 聲子의 소생으로, 仲子의 소생인 桓公을 임금으로 세워 부친의 뜻을 이루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환공이 어렸기 때문에 그를 太子로 세우고 대신 攝政하였다.역주4 共和 : 周나라 사람으로 共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共和라고 일컬어지며, 伯爵을 지냈기 때문에 共伯和라고도 일컬어진다. 仁義를 행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제후들이 이를 높이고 어질게 여겼다. 周 厲王이 彘로 달아나자 天子의 일을 攝行하였다. 《竹書紀年 下》역주5 息姑 : 춘추시대 魯 隱公의 이름이다. 惠公의 長庶子로 혜공이 죽자 태자 軌가 어렸기 때문에 추대되어 11년 동안 攝政하다가 공자 翬의 참소로 시해되었다.역주6 傳信 : 확실한 내용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한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5년에 “봄 정월 甲戌 己丑에 陳侯 鮑가 죽었다.[春正月 甲戌 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春秋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였는가? 《춘추》의 원칙을 보면,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기록하고 의심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기록해두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03. 春秋論下
又發次篇所未盡하니 更洗發辨析이라
弑逆은 大惡也라
其爲罪也莫贖이요 其爲人也不容이요 其在法也無赦라
法施於人에 雖小必愼이온 況擧大法而加大惡乎아
旣輒加之하고 又輒赦之하면 則自侮其法하고 而人不畏니 春秋用法不如是之輕易也라
以盾爲無弑心乎인댄 其可輕以大惡加之아
以盾不討賊으로 情可責而宜加之乎인댄 則其後頑然未嘗討賊하고 旣不改過以自贖이어늘 何爲遽赦하야 使同無罪之人가
其於進退에 皆不可하니 此非春秋意也라
趙穿弑君은 大惡也어늘 盾不討賊하고 不能爲君復讐하고 而失刑於下하니 二者輕重은 不較可知라
就使盾爲可責이나 然穿焉得免也리오
今免首罪爲善人하고 使無辜者受大惡하니 此決知其不然也라
春秋之法에 使爲惡者不得幸免하고 疑似者有所辨明하니 所謂是非之公也라
穿은 盾族也라 遂弑어늘
而盾不討하니 其迹涉於與弑矣라
此疑似難明之事니 聖人尤當求情責實하야 以明白之니
使果無弑心乎인댄 則當爲之辯明이니 必先正穿之惡하야 使罪有所歸然後에 責盾縱賊이면
則穿之大惡이 不可幸而免하고 盾之疑似之迹이 獲辯이나
而不討之責은 亦不得辭라
如此則是非善惡明矣어늘 今爲惡者는 獲免하고 而疑似之人은 陷于大惡하니 此決知其不然也라
若曰 盾不討賊은 有幸弑之心하니 與自弑同이라
故寧捨穿而罪盾이라하면 此乃逆詐用情之吏의 矯激之爲爾니 非孔子忠恕春秋의 以王道治人之法也라
孔子患舊史是非錯亂而善惡不明이라
所以修春秋하니 就令舊史如此면 其肯從而不正之乎아
其肯從而稱美하고 又敎人以越境逃惡乎아
此可知其繆傳也라
問者曰 然則夷皐는 孰弑之오 曰 孔子所書가 是矣니 趙盾이 弑其君也라
今有一人焉하니 父病에 躬進藥而不嘗하고 又有一人焉하니 父病而不躬進藥하야 而二父皆死하고
又有一人焉하니 操刃而殺其父어든
使吏治之면 是三人者가 其罪同乎아 曰 雖庸吏라도 猶知其不可同也라
不躬藥者는 誠不孝矣라 雖無愛親之心이나 然未有殺父之意라
使善治獄者인댄 猶當與操刃殊科온 況以躬藥之孝가 反與操刃同其罪乎아
此庸吏之不爲也라
然則許世子止實不嘗藥이면 則孔子決不書曰弑君이니 孔子書爲弑君하니 則止決非不嘗藥이라
難者曰 聖人借止以垂敎爾라 對曰 不然하다
夫所謂借止以垂敎者는 不過欲人之知嘗藥耳라
聖人一言으로 明以告人하니 則萬世法也라 何必加孝子以大惡之名이리오
而嘗藥之事는 卒不見於文하니
使後世但知止爲弑君이요 而莫知藥之當嘗也인댄 敎未可垂而已陷人於大惡矣니
聖人垂敎가 不如是之迂也요 果曰責止라도 不如是之刻也라
難者曰 然則盾曷爲復見於經이며 許悼公曷爲書葬고 曰 弑君之臣不見經은 此自三子說爾니 果聖人法乎아
悼公之葬은 且安知其不討賊而書葬也리오
許之書于經者略矣라
止之事迹을 不可得而知也라
難者曰 三子之說은 非其臆出也라 其得於所傳이 如此라
然則所傳者를 皆不可信乎아 曰 傳聞을 何可盡信이리오
得於所傳者가 蓋如是어니 是可盡信乎아
03. 《春秋》에 대한 論 下
또 둘째 편에서 다 말하지 못한 바를 밝혔으니, 더욱 시원스럽고 조리가 있다.
弑逆은 大惡이다.
그 죄는 속량할 수 없고 죄를 저지른 사람은 용납할 수 없으며 法에 있어서는 사면할 수 없다.
사람에게 법을 시행할 때에는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삼가는데, 하물며 大法을 들어 大惡에 가하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이미 번번이 법을 가해놓고 또 번번이 용서해준다면 스스로 그 법을 업신여기고 남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春秋》에서 법을 씀이 이처럼 경솔하지는 않다.
三子가 《春秋》를 해설하면서 ‘趙盾이 逆賊을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大惡을 가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이윽고 趙盾이 실제로 시해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는 다시 經에 드러내어서 趙盾의 무죄를 밝혔으니, 이는 번번이 법을 가해놓고 번번이 용서해준 것이다.
趙盾이 시해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경솔하게 大惡을 가할 수 있겠는가.
趙盾이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이 實情을 책망할 만하여 大惡을 가해야 하였다면, 그 뒤에 趙盾은 끝까지 역적을 토벌하지도 않았고 이미 허물을 고쳐 스스로 속량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대뜸 용서해주어 죄 없는 사람과 같게 하였단 말인가.
어느 쪽이든 모두 옳지 않으니, 이는 《春秋》의 뜻이 아니다.
趙穿이 군주를 시해한 것은 大惡인데도 趙盾은 역적을 토벌하지도 못하고 군주를 위해 복수하지도 못하고서 아래에서 刑政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였으니, 두 사람의 輕重은 헤아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령 趙盾의 경우는 책망하는 정도로 할 수 있으나, 趙穿의 경우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지금 首罪를 면하여 善人으로 만들고 무고한 자에게는 大惡을 받게 하니, 이는 결단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春秋》의 법에 惡을 행한 자는 요행으로라도 죄를 면할 수 없게 하고, 의심이 가는 자는 판별하여 명확하게 해주는 바가 있으니, 이른바 是非의 공정함이라는 것이다.
三子의 설에 의거해보건대, 애초에 靈公이 趙盾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趙盾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趙穿은 趙盾의 一族인지라 마침내 靈公을 시해하였다.
그런데 趙盾이 그를 토벌하지 않았으니, 그 행적은 시해에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는 의심이 가서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聖人이 더욱 마땅히 정황을 상고하여 사실을 탐구해서 명백하게 밝혔을 것이다.
만일 趙盾에게 정말 시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연히 죄가 趙盾에게 있는 것이니 ‘법을 위하여 惡名을 받았다.’고 하여 그 어짊을 칭찬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일 정말 시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를 위하여 판별하여 밝히되 필히 우선적으로 趙穿의 죄악을 바로잡아 죄가 귀착될 곳이 있게 한 연후에 趙盾이 역적을 풀어준 것을 책망한다면,
趙穿의 大惡은 요행으로 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趙盾의 의심 가는 행적은 분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趙盾이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책임은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是非와 善惡이 명백해질 터인데, 이제 惡을 행한 자는 면죄를 받고 의심이 가는 사람은 大惡의 오명에 빠졌으니 이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趙盾이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은 군주가 시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니 스스로 시해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趙穿을 논외로 두는 한이 있더라도 趙盾을 죄준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걱정하여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관리의 균형 잃은 치우친 처사일 뿐이지, 孔子가 忠恕의 태도를 견지하여 서술한 《春秋》에서 王道로 治人하던 법이 아니다.
孔子가 ‘舊史’의 是非가 혼란스럽고 善惡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근심하였다.
이 때문에 《春秋》를 편수한 것이니, 가령 ‘舊史’가 이와 같다면 孔子가 수긍하여 바로잡지 않았다는 말인가.
수긍하여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또 사람들에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죄악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란 말인가.
이는 와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혹자가 묻기를 “그렇다면 夷皐(晉 靈公)는 누가 시해한 것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孔子가 기록한 것이 옳으니, 趙盾이 군주를 시해한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그 아비가 병들었는데 몸소 藥을 올리면서 미리 맛보지 않은 경우가 하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아비가 병듦에 몸소 약을 올리지 못한 경우가 하나 있는데, 두 사람의 아비가 모두 죽었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쥐고 그 아비를 살해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관리에게 죄를 다스리게 한다면 이 세 사람은 그 죄가 같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비록 용렬한 관리라 하더라도 그 죄가 같지 않음을 알 것이다.
몸소 약을 올리면서 미리 맛볼 줄 모른 자는 어버이를 사랑하는 孝心은 있으나 禮를 익히지 못한 것이니, 이는 슬퍼할 만한 일이지 죄가 없는 사람이다.
몸소 약을 올리지 않은 자는 참으로 不孝한 것이니, 비록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다고 하나 아비를 살해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일 옥사를 잘 다스리는 자라면 응당 칼을 쥐고 아비를 죽인 자와는 다르게 법률을 적용할 것인데, 몸소 약을 올린 효자를 도리어 칼을 쥐고 아비를 살해한 자와 같은 죄로 처리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용렬한 관리도 하지 않을 짓이다.
그러한즉 許나라 世子 止가 실제로 약을 맛보지 않았다면 孔子가 결코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터인데 孔子가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止는 결코 약을 맛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聖人이 止의 경우를 빌려 가르침을 남겼을 뿐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른바 ‘止의 경우를 빌려 가르침을 남겼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약을 미리 맛볼 줄 알게 하고자 한 것밖에 안 된다.
성인이 한마디 말로 밝게 사람에게 고한즉 萬世의 법이 되는데, 어찌 굳이 효자에게 大惡의 汚名을 더하였겠는가.
약을 맛본 일은 끝내 글에 보이지 않으니,
가령 후세 사람들이 단지 止가 군주를 시해한 것만 알고 약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가르침을 남기지도 못하고 애꿎은 사람만 大惡에 빠뜨리는 것이니,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는 것이 이처럼 오활하지 않을 것이고, 정말로 止를 책망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각박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변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趙盾을 어찌하여 다시 經에 드러내었으며, 許 悼公이 죽었을 때 어찌하여 ‘葬’이라고 기록한 것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군주를 시해한 신하를 經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三子의 설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 과연 성인의 법이겠는가.
悼公이 죽었을 때 ‘葬’이라고 기록한 것은 逆賊을 토벌하지 않고 ‘葬’이라고 기록한 것인지 또 어찌 알겠는가.
止가 군주를 시해한 일로 經에 드러난 때로부터 4년 뒤에 吳나라가 許나라 군사를 패퇴시켰고, 또 18년 뒤인 定公 4년에 許男이 비로소 經에 보이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이상이 許가 經에 기록된 것의 대략이다.
止의 사적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三子의 설은 억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수받은 바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수받은 바를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전해 들은 것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公羊과 穀梁은 尹氏가 죽은 것을 正卿이라 하였고, 左氏는 尹氏가 죽은 것을 隱公의 어머니라 하였으니, 한쪽은 남자로 생각하였고 한쪽은 부인으로 생각하였다.
전수받은 바라는 것이 대개 이와 같으니,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역주1 春秋論下 : 이 글은 趙盾과 許나라 太子 止가 실제 군주를 시해한 자임을 闡明하고, 《春秋》 三傳이 다른 사람에게 惡名을 받도록 한 것과 ‘藥을 맛보지 않았다.[不嘗藥]’고 한 설을 반박한 것이다.역주2 加之大惡 : 三子의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左氏傳》 宣公 2년에 “太史가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조정에 보이자, 宣子(趙盾)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太史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正卿이 되어, 도망하면서는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穀梁傳》 宣公 2년에 “史官 董狐가 역적을 기록하기를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趙盾은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도다. 누가 내가 임금을 죽인 자라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董狐는 ‘그대가 正卿이 되어, 조정에 들어와 간함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가서 도망하면서는 멀리 가지 않았소. 또 군주가 시해되었는데도 돌아와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趙穿과 뜻을 함께한 것이오. 뜻을 함께하였다면 무거운 죄명을 쓰는 것이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겠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公羊傳》 宣公 2년에 “직접 군주를 시해한 자는 趙穿인데 어찌하여 趙盾이 시해하였다고 하였는가?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역주3 旣而以盾非實弑 則又復見於經 : 趙盾이 실제로 군주를 시해한 자가 아니라고 여겨서 趙盾의 이름을 다시 《春秋》 속에 드러냈다는 뜻이다. 《公羊傳》의 설에 의거하면, 《春秋》에서 記事할 때에는 군주를 시해한 사람의 이후 행적은 다시 기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經에 드러났다는 것은 《春秋》 宣公 6년에 “봄에 晉나라 趙盾과 衛나라 孫免이 陳나라를 침공하였다.”라고 한 기사를 가리킨다.역주4 靈公欲殺盾 盾走而免 : 《春秋》 宣公 2년과 《公羊傳》 宣公 6년의 기록에 의거해보면, 晉 靈公이 無道하여 趙盾이 누차 간하였는데, 靈公은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도리어 鉏麑를 시켜 趙盾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鉏麑는 趙盾이 어진 신하라고 생각하여 趙盾을 죽이지 않고 스스로 자살하였다. 그 뒤 靈公은 다시 趙盾을 연회에 초대하여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趙盾을 죽이려 하였는데, 趙盾을 侍衛하던 사람이 구원해주었다. 이에 趙盾은 도망하였다.역주5 爲法受惡 : 《春秋》 宣公 2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太史가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조정에 보이니, 趙宣子(趙盾)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太史가 “그대가 正卿이 되어 도망하면서는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인가?”라고 하자, 趙宣子는 “아아! 《詩經》에 ‘나의 생각함이여. 스스로 이러한 憂患을 끼쳤도다.’라고 하더니 나의 경우를 이르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孔子는 “董狐는 옛날의 좋은 史官이니 법대로 기록하여 죄악을 숨기지 않았다. 趙宣子는 옛날의 좋은 대부이니 법을 위하여 惡名을 감수하였다.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역주6 不習於禮 : 古禮에 어른을 侍藥할 때에는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본 이후에 올렸다. 《禮記》 〈曲禮 下〉에 “군주에게 병이 있어 약을 드실 때에는 신하가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을 보며, 어버이에게 질병이 있어 약을 드실 때에는 아들이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역주7 自止以弑見經……吳敗許師 : 《春秋》 昭公 23년에 “戊辰에 吳가 鷄父에서 頓, 胡, 沈, 蔡, 陳, 許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胡子 髡과 沈子 逞은 죽었고, 陳의 夏齧을 붙잡았다.”라고 하였다.역주8 又十有八年……許男始見于經而不名 : 《春秋》 定公 4년에 “3월에 공이 劉子, 晉侯, 宋公, 蔡侯, 衛侯, 陳子, 鄭伯, 許男, 曹伯, 莒子, 邾子, 頓子, 胡子, 滕子, 薛伯, 杞伯, 小邾子, 齊의 國夏와 召陵에서 회합하고 楚를 침략하였다.”라고 하였다.역주9 公羊穀梁……一以爲婦人 : 《公羊傳》과 《穀梁傳》에서는 尹氏를 周王의 大夫로 보았는데, 《左氏傳》은 魯 惠公의 부인이며 魯 隱公의 모친인 聲子로 보았다. 《春秋》 隱公 3년의 “여름 4월 辛卯에 尹氏가 졸하였다.”라는 기록에 대해 三傳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公羊傳》에는 “尹氏는 누구인가? 天子의 大夫이다. 어찌하여 尹氏라고 하였는가? 貶下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穀梁傳》에는 “尹氏는 누구인가? 天子의 大夫이다.”라고 하였다.
《左氏傳》에는 “여름에 君氏가 졸하였으니 바로 聲子이다. 군주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君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左氏傳》 宣公 2년에 “太史가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조정에 보이자, 宣子(趙盾)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太史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正卿이 되어, 도망하면서는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穀梁傳》 宣公 2년에 “史官 董狐가 역적을 기록하기를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趙盾은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도다. 누가 내가 임금을 죽인 자라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董狐는 ‘그대가 正卿이 되어, 조정에 들어와 간함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가서 도망하면서는 멀리 가지 않았소. 또 군주가 시해되었는데도 돌아와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趙穿과 뜻을 함께한 것이오. 뜻을 함께하였다면 무거운 죄명을 쓰는 것이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겠소?’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公羊傳》 宣公 2년에 “직접 군주를 시해한 자는 趙穿인데 어찌하여 趙盾이 시해하였다고 하였는가?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역주3 旣而以盾非實弑 則又復見於經 : 趙盾이 실제로 군주를 시해한 자가 아니라고 여겨서 趙盾의 이름을 다시 《春秋》 속에 드러냈다는 뜻이다. 《公羊傳》의 설에 의거하면, 《春秋》에서 記事할 때에는 군주를 시해한 사람의 이후 행적은 다시 기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經에 드러났다는 것은 《春秋》 宣公 6년에 “봄에 晉나라 趙盾과 衛나라 孫免이 陳나라를 침공하였다.”라고 한 기사를 가리킨다.역주4 靈公欲殺盾 盾走而免 : 《春秋》 宣公 2년과 《公羊傳》 宣公 6년의 기록에 의거해보면, 晉 靈公이 無道하여 趙盾이 누차 간하였는데, 靈公은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도리어 鉏麑를 시켜 趙盾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鉏麑는 趙盾이 어진 신하라고 생각하여 趙盾을 죽이지 않고 스스로 자살하였다. 그 뒤 靈公은 다시 趙盾을 연회에 초대하여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趙盾을 죽이려 하였는데, 趙盾을 侍衛하던 사람이 구원해주었다. 이에 趙盾은 도망하였다.역주5 爲法受惡 : 《春秋》 宣公 2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太史가 “趙盾이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조정에 보이니, 趙宣子(趙盾)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太史가 “그대가 正卿이 되어 도망하면서는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시해한 것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인가?”라고 하자, 趙宣子는 “아아! 《詩經》에 ‘나의 생각함이여. 스스로 이러한 憂患을 끼쳤도다.’라고 하더니 나의 경우를 이르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孔子는 “董狐는 옛날의 좋은 史官이니 법대로 기록하여 죄악을 숨기지 않았다. 趙宣子는 옛날의 좋은 대부이니 법을 위하여 惡名을 감수하였다.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역주6 不習於禮 : 古禮에 어른을 侍藥할 때에는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본 이후에 올렸다. 《禮記》 〈曲禮 下〉에 “군주에게 병이 있어 약을 드실 때에는 신하가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을 보며, 어버이에게 질병이 있어 약을 드실 때에는 아들이 먼저 이상이 없는지 맛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역주7 自止以弑見經……吳敗許師 : 《春秋》 昭公 23년에 “戊辰에 吳가 鷄父에서 頓, 胡, 沈, 蔡, 陳, 許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胡子 髡과 沈子 逞은 죽었고, 陳의 夏齧을 붙잡았다.”라고 하였다.역주8 又十有八年……許男始見于經而不名 : 《春秋》 定公 4년에 “3월에 공이 劉子, 晉侯, 宋公, 蔡侯, 衛侯, 陳子, 鄭伯, 許男, 曹伯, 莒子, 邾子, 頓子, 胡子, 滕子, 薛伯, 杞伯, 小邾子, 齊의 國夏와 召陵에서 회합하고 楚를 침략하였다.”라고 하였다.역주9 公羊穀梁……一以爲婦人 : 《公羊傳》과 《穀梁傳》에서는 尹氏를 周王의 大夫로 보았는데, 《左氏傳》은 魯 惠公의 부인이며 魯 隱公의 모친인 聲子로 보았다. 《春秋》 隱公 3년의 “여름 4월 辛卯에 尹氏가 졸하였다.”라는 기록에 대해 三傳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公羊傳》에는 “尹氏는 누구인가? 天子의 大夫이다. 어찌하여 尹氏라고 하였는가? 貶下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穀梁傳》에는 “尹氏는 누구인가? 天子의 大夫이다.”라고 하였다.
《左氏傳》에는 “여름에 君氏가 졸하였으니 바로 聲子이다. 군주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君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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