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金得臣) 1604(선조37)∼1684(숙종10)

 

조선 최고의 다독가(多讀家)

모든 것이 늦된 어린 시절, 10세에 겨우 글자를 깨치고 20세에 비로소 글 한 편을 짓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더욱 치열하게 노력하다
결국, 59세에 과거급제 당대에 인정받는 독자적인 시(詩) 세계를 이루다.
"용호(김득신의 대표시)는 당시(唐詩)에 넣어도 부끄러움이 없다."
- 효종 (1619 ~ 1659)
"재주가 남만 못하다 스스로 한계를 짖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 김득신 묘비문 中

백곡 김득신(栢谷 金得臣)

치열한 노력의 가치를 보여준 참된 지식인입니다.

조선 현종(顯宗) 시대의 문신(文臣)이자 시(詩)로 이름을 날린

 백곡 김득신(1604~1684)은 당대 최고의 독서광으로

남들보다 부족한 기억력과 노둔함을 벗어나기 위해

 몇 천, 몇 만 번을 되풀이해서 글을 읽어

비록 뒤늦은 나이였지만 59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당대를 대표하는 명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저서로는 시 1500여 수와 문 180여 편이 실린

‘백곡집’과‘종남총지’등이 있다.

 

조선의 시인.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충무공 시민(時敏)의 손자, 부제학(副提學) 안흥군(安興君) 치(緻)의 아들.

어머니는 사천(泗川) 목씨(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 김씨이며,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1662년 (현종3)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장악원 정·지제교(掌樂院 正·知製敎)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지냈다. 뒤늦게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일어날 사화(士禍)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취묵당(醉默堂)에 내려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74세에는 사도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이 되었고, 78세에는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80세에는 가선대부에 올랐고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되었다. 이듬해인 81세에 생을 마쳤다.

묘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문집으로

<栢谷文集>이 있고 평론집인 <終南粹言>,<終南叢志> 등이 있다.

백곡은 백이전(伯夷傳)을 1억1만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으며

그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니 효종이 그의 '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문보다는 시,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백곡집 외에 시화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가 있으며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국순전' '국선생전' 등 고려의 한 시대만 한정된 줄 알았던 술 가전계통의 소설이

조선조에도 그 면모가 지속됐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백곡은 노둔한 천품에도 불구하고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시(詩)로 일가를 이룬 '고음과 다독'

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경세치평(經世治平)이라는 유가적 이상을 당쟁의 현실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 번뇌를 토로하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시(詩)의식을 가지고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변천기에 활동했던 문예담당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실제 그는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주옥같은

시를 남겼는가 하면 한시비평의 기준을 마련한 비평가로 한국한문학사에 확고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중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백곡 김득신의 서재 억만재에 얽힌 내력은 아주 유명합니다.

백곡 김득신(1604~ 1684)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 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의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김득신은 머리가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십구사락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오히려 엄청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간서치였다는 말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서치는 책벌레라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편집증, 독서마니아 즉 독서광이었을 것입니다.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인데도 머리가 나빴던 그는 유명 작품들을 반복하며

읽으며 외웠습니다.

저는 청주에 살기 때문에 괴산의 능촌리 괴강 근처에 가끔 갈일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김득신이라는 인물에 호감이 갔습니다. 그리고 김득신에 대해서 알아보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옛집, 취묵당(醉墨堂)에

걸려 있는 ‘독수기(讀數記)’에 보면,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밝혔는데, 그 횟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가득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득신이 <사기>(史記) ‘백이전(伯夷傳)’을 무려 1억1만3천 번이나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책벌레 김득신의 책읽기에 대한 일화가 적잖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다.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습니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합니다.

 

80이 넘도록 장수한 백곡은 먼저 딸을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이의현은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백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수치요 굴욕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벌레 김득신은 40여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택당 이식)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시작도 하지 않고 재주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노력도 하지 않고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미련하고 둔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시작하다가 얼마 하지도 않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책벌레가 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끈기가 필요합니다. 목표가 필요합니다.

독서광이야기/ 김득신의 독수기에서 “그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아예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자이자 초서로 유명한 미수 허목(1595∼1682)도 56세 때 처음으로 최하 말직인

참봉(종9품)의 벼슬을 받았고 80세에 이르러 참판(종2품)에 오를 수 있었다.

명재 윤증(1629~1724)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36세 때 처음 종9품인 내시교관에, 53세에 성균관 사예(정사품)에 임용되었지만

관직을 받지 않았고 68세에 이르러 공조판서를 내렸는데 그래도 나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보듯이 조선시대에는 대학자여도 종9품에서 관직을 시작하는 게 관행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최말단인 종9품에 임용되었다.

요즘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5급 공무원이 되고 경찰대를 나오면 곧바로 파출소장에

임명하는 것도 난센스다. 인재가 많지 않았던 개발도상국 시절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요즘처럼 인재가 넘쳐나고 전문가나 경력자가 홍수인 시대에는 5급 공무원 시험이나

경찰대의 파출소장 임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학 교수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교수가 아니어도 인재들은 널려 있다.

백곡 김득신(1604~1684)은 무려 59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과거시험은 요즘

 사법고사나 행정고시 공부하는 것보다 더 경쟁이 치열했다. 3년에 한 번씩 보는데

단 70명 정도밖에 뽑지 않았다. 대부분 30대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다 계속 떨어지면

포기를 하는데 김득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거시험을 때려치우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늦게 나간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첫 관직으로 성균관 학유(요즘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동료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홍천현감과 정선군수에 뽑혔지만 신하들이 그를 적임자가 아니라고 저지하는 바람에 결국 부임하지 못했다. 결국 김득신은 7년 동안 벼슬을 하다 68살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기와 끈기로 예순을 앞두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보람도 없이 초라한 귀향이었다. 충북 괴산에 가면 ‘취묵당’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김득신이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말년을 보낸 곳이다.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시를 416수나 남겼다. 신흠·이정구·장유와 함께 조선시대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시인으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고위 공무원에는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백곡 김득신이 끝까지 과거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합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평소 총명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아들이 비범하지 못하고 평범한 아이들보다

어리석은 듯 보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노둔’하다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어리석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똑똑하고 총기가 있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한결같은 소망인데

소년 김득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자 아버지는 보다 못해

아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내리기로 했다. “떨어지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60세까지는

과거에 응해보라”는 지침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는 나이 제한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탓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던 것처럼

책벌레가 되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사시지 않으시렵니까?

또한 책벌레 중의 책벌레가 되어 최고의 지성으로 남고  싶지 않으십니까?

 

춘수(春睡)-김득신(金得臣)
봄잠

驢背春睡足(려배춘수족) : 나귀 등에서 봄잠이 곤하여

靑山夢裏行(청산몽리행) : 꿈속에서 푸른 산을 지나간다.

覺來知雨過(각래지우과) : 깨고서야 비가 온 줄 알았으니

溪水有新聲(계수유신성) : 개울물에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야음(夜吟)-김득신(金得臣)
밤에 읊다

露滴寒空月正西(로적한공월정서) : 찬 하늘 이슬 지고, 달은 서편 이윽한데

欲成佳句意都迷(욕성가구의도미) : 좋은 시구를 지으려도, 마음은 온통 어지럽다

秋宵難作還家夢(추소난작환가몽) : 가을 밤 고향집으로 가는 꿈도 꾸기 어려운데

窓外鵂鶹樹樹啼(창외휴류수수제) : 창밖에선 올빼미가 나무마다 울고 있구나

 

용호(龍湖)-김득신(金得臣)
용호에서

古木寒雲裏(고목한운리) : 차가운 구름 속, 고목

秋山白雨邊(추산백우변) : 가을산에는 비가 내린다

暮江風浪起(모강풍랑기) : 저문 강바람에 물결 일어

漁子急回船(어자급회선) : 어부는 급히 배를 돌린다

 

여관야음(旅館夜吟)-김득신(金得臣)
여관의 밤

永夜坐不寐(영야좌불매) : 긴 밤 잠이 오지 않아 앉았노라니

霜威透褐衣(상위투갈의) : 차가운 서릿기운 베옷을 파고든다

呼僮催鞴馬(호동최비마) : 하인 불러서 말 안장 재촉하니

月落衆星微(월락중성미) : 달은 지고 뭇 별빛 흐려지는구나

 

 

龜亭(구정)-김득신(金得臣)
구정에서

落日下平沙(낙일하평사) : 저무는 해 모랫벌에 지는데

宿禽投遠樹(숙금투원수) : 새들은 잠자리 찾아 먼 나무로 날아든다

歸人欲騎驢(귀인욕기려) : 돌아가는 사람 당나귀 타려는데

更怯前山雨(갱겁전산우) : 눈 앞의 산에 비내릴까 다시 두려워진다

 

 

湖行詩(호행시)-金得臣(김득신)
호행시

湖西踏盡向秦關(호서답진향진관) : 호서를 다 지나 진관을 향해가니

長路行行不暫閑(장로행행불잠한) : 긴 여정 잠시도 쉬지 않고 가고 또 간다.

驪背睡餘開眼見(여배수여개안견) : 당나귀 등에서 졸다가 눈 뜨고 또 보고

暮雲殘雪是何山(모운잔설시하산) : 저문 구름 남은 눈, 이곳이 어느 산일까.

 

 

題畵(제화)-金得臣(김득신)
그림에 부쳐

古木寒煙裏(고목한연이) : 찬 안개 속에 고목 서있고

秋山白雲邊(추산백운변) : 흰 구름 떠있는 곳에 가을 산이 있다

暮江風浪起(모강풍랑기) : 저무는 강에 풍랑이 일고

漁子急回航(어자급회항) : 어부는 급히 고깃배를 돌린다.

 

 

湖行絶句(호행절구)-金得臣(김득신)
호서지방 여행

湖西踏盡向秦關(호서답진향진관) : 충청도 다 돌아보고 경기로 향하네

長路行行不暫閑(장로행행불잠한) : 긴 길을 가고 또 가고 잠시도 쉬지 않았네

驢背睡餘開眼見(려배수여개안견) : 나귀 등에 졸다가 문득 눈 떠보니

暮雲殘雪是何山(모운잔설시하산) : 저문 구름, 남은 눈, 도대체 어느 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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