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서와 창작에 대한 고찰




1. 서론

碑, 帖을 임서하는 것은 글씨는 배우는 첩경인데, 이는 碑, 帖은 시대성의 유산일 뿐 아니라 書家心血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張旭(장욱)의 말을 빌리면 '임서에 힘쓰다 보면 서법은 스스로 깨쳐진다' 한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서법을 바탕으로 창작하게 된다. 모방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글씨를 쓴다면 한갓 붓장난에 불과하며 기초없이 고층 건물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무릇 '法에 너무 얽매여서 탁 트이지 못한다'는 표현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트이고 트여 보아도 그 가운데 역시 法이 있음이다. 법이 없으면 俗이요 客氣일 뿐이고 마치 일본 書家들이 추구하는 前衛藝術, 혹은 墨象의 범주에서 노닐음이 될 뿐이니 이는 그야말로 새가 공중에서 싼 똥이 바닥에 펼쳐진 것에 조금도 나을 바가 없다.
임서 이전에 더욱 중요한 바는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다. 無師獨學이란 말이 있지만 스승없는 혼자 공부는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게 되어 자칫 邪道에 빠지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온전한 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스승이 있더라도 잘못 만나면 아무 소용없다. 스승을 잘못 만나 그 곳에서 십 여년 글씨를 쓰다 다행이도 눈에 뜨여 올바른 글씨를 쓰려 하면 나쁜 필법을 떨쳐 버리는 데 또한 몇 십년이 걸린다. 그러므로 이십 년이나 글씨를 썼다 해도 이제 正法에 입문한 초심자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좋은 스승을 만남은 복이라 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진정 좋은 스승은 자신의 법을 고집하지 않는다. 즉 집필, 운필에 기본이 잡히면 그 다음부터는 좋은 서체를 가려주고 글씨쓰는 마음과 자세,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가르치는 안내자 혹은 충고자의 역할만 할 뿐이다. 이것은 인격이라던가 개인의지를 존중하는 바여서 학습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고 또한 진정한 창작도 여기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2. 임서와 창작과의 관계

임서는 古法書를 보고 그것과 똑같이 募寫하는 것을 말한다. 창작이라 하면 임서로 얻은 법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일을 일컫는다.
그러나 임서도 창작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똑같이 베끼는 임서라 하여도 시대환경, 書寫道具등이 같을 수 없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서 그 개성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거의 예를 보아도 八大山人이 난정서(행서의 종류)를 임해 놓은 것은 원본과 조금도 같은 곳이 없이 자가풍으로 썼으나 분명히 끝에는 임서란 표를 하였다.

3. 임서와 창작의 六指

1) 專
一志로 專心해야 한다.
비단 글씨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는 모름지기 一心專念해야 됨은 말할 여지가 없다. 장자의 양생주에 보면 포정이란 이가 소를 잡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의역하여 그 내용을 대략 보면, <포정이 文專君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손, 어깨, 다리, 무릎의 동작이 음과 춤에 그대로 합치되어 그림같이 소를 해부함으로써, 文專君이 감탄하여 그 기술의 연유를 물으니 포정이 대답하기를 '저는 기술이 아닌 道로써 합니다.
처음 소를 잡기 시작할 때는 소 아닌게 없더니 3년이 지나서는 일찍이 全牛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소의 구조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며 감각으로 하지 않고 精神으로 하니 이것은 곳 天理입니다. 보통 소를 잘 잡는 사람이 칼을 한 달에 한 번 날을 다시 세우고, 아주 뛰어난 사람은 일년에 한번 가는데 저는 19년이 지났으나 이 칼의 예리함이 처음과 같으니 이것은 소의 세포 조직의 空洞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後人이 여기서의 全牛에 대한 해석을 포정과 소의 대립이 이미 해소된 物我一體로 풀이 하였다. 그러므로 포정이 소 아닌게 없더라 하였듯이 글씨를 씀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글씨로 보여서 物我一體가 되어야 지고한 法과 藝道에 들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2) 勤
쉬지 않고 열심으루 근면히 써야한다. 이것은 위의 專과 일맥 상통한다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일관성을 가지고 공부해야 함은 물론이고, 특별한 경우로 글씨는 못 쓸지라도 法書를 늘 완성하여 글자의 形과 態를 머리에 기억해 두어야 한다.
즉 글씨 쓰고자 하는 마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吉人의 예를 보면 金生이 봄 논에 물이 가득할 때 제자들을 데리고 들에 산보를 나갔을 때 제자가 글씨 잘 쓰는 비결을 물으니 아무 말 없이 지팡이로 그득한 물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것은 그 물이 다 닳도록 글씨를 쓰라는 교훈이었다.
그리고 옛 書家들이 벼루를 여러개 구명을 냈다는 얘기도 學書의 힘씀을 말하는 것이다.


3) 傳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처음에는 한 두 개의 法書로부터 기초를 얻어서 차차 널리 보고 배워 衆長을 취하고 마침내는 자신의 개성에 맞는 法統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물론 각체의 서적을 다 임서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書藝史的인 측면과 서체의 흐름과 변화, 그리고 서예와 다른 미술들과의 관계의 理論方面에도 시야를 넓혀야 된다.
蘇東坡는 글씨쓰는 데 있어서 다 닳은 붓이 산을 이루어도 그 진수에 이름이 못 되며 만 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信韻이 동한다고 하였다.

4) 變
변화를 구해야 한다. 어떠한 서첩을 대하든지 그 맛과 특징을 잡아낼 정도가 되면 險絶(험절)을 구하게 된다.
한 점을 찍는데 붓끝을 엎고 제치며 한 획에서도 筆鋒에 起伏을 주는 것으로부터 結講(결강)이나 章法에서 脫法(탈법)하려는 의도가 생긴다. 이것은 인간이 미적 변화를 구하는 일면이며 찬란한 서예 문화가 이루어진 관건이다.
險絶에서 다시 평정을 얻어 양자가 서로 어울리면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할 수 있다.

5) 巧
이것은 위의 變과 통한다. 변화를 구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기교를 부리게 된다. 곧 법을 알면 기교를 부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인 듯 싶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과정으로서는 중요한 바 이지만 지나치면 제작의 의미가 있으므로 꾀글씨가 된다.
무릇 글씨는 점잖은게 최상이며 그러기는 참으로 어렵다. 글씨에 군획 떼기는 애인 떼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치 군자의 풍모와 같은 단정하면서도 멋을 부린 글씨를 써야 한다.


6) 神
書의 道는 神采(신채)가 으뜸이다. 書는 문자 내용을 쓰는 것에서 神采를 표현하게 될 적에 書法藝術의 성숙이라 할 수 있다.
神采는 神韻과 비슷한 말로 곧 작품중에 작가의 흉금과 기질, 정취, 사상, 감정등 정신 세계의 반영이어서 바로 개성미라고 볼 수 있다.
神韻이 감도는 작품은 奇하면서도 險하지 않고, 시시하지만 有味하며,奸邪하면서 俗하지 않고 秀하난 요염하지 않으며 못생겼으나 밉지 않은 경지이므로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고 볼수록 새로워서 그 느낌이 끝이 없다.


4. 學書의 순서

글씨를 처음 배울 때 어떤 체로 시작해야 좋은지에 대해서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글씨의 발달과정을 따라서 전서로부터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해서로 시작하여 다른 글씨로 옮겨가는 방법이다.
어느 방법이 좋다고 고집할 수도 없을뿐더러 개인의 차이와 재능에 따라 그 효과 또한 달라지니 단언할 수는 없고 두 방법을 그저 설명할 따름이다. 전서부터 쓰게 되면 초심자가 획의 원리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획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象形의 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지금의 글자와 비교하는 재미와 더불어 서법에 흥미를 갖게 된다. 전서의 원획에 파임과 방획을 곁들이면 자연스럽게 예서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전서에 일단 입문하면 그 맛을 거의 설렵하고 넘어가면 몰라도 잠깐 쓰다가 隸나 楷書로 넘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해서로 입문하는 것에 대해 宋高宗은 <글씨 배움에 반드시 正書로 시작해야 되는 것은 八法이 갖춰져 있고, 또 예서의 餘風이므로 해서를 터득하면 이미 行間에 노닐음이니 古聖에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였고, 豊坊이란 사람은 <글씨 배움에 반드시 해서를 익히고, 글자는 大字를 먼저 써야 한다.
그 다음에 행서, 초서를 쓰고 예서를 쓰려거든 전서를 꼭 써야 한다>라고 하였다. 글씨를 배우는 것도 차근차근 해야지 성급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손을 대면 체계를 이루지 못한다. 하여튼 篆을 먼저하든 楷를 먼저하든 마찬가지겠으나, 중요한 것은 한가지 체를 완전히 습득한 후에 다른 체로 넘어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대개 五體를 다 그런대로 구사하려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20년은 걸려야 하며 거기서 더 한걸음 나아가 뛰어난 書品을 남기는 것은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

5. 작품에 임하는 자세

작품을 하려면 누구나 마음이 설레인다.
이는 과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와줄까 하는 기대감과 남이 이것을 볼텐데 하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偶然得書]라는 말이 있다. 아무생각없이 쓴 것 중에서 더할 나위없는 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맨 처음 體制를 잡는다고 한번 써본 것이 그 뒤에 수 백번 심혈을 기울여 써 본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좋은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글씨는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써야 하는데, 보통 사람에게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나 남을 의식하면서 글씨가 는다. 작품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난감한 점에 접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애를 먹이는 것은 그 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작품의 체제에는 액자, 족자, 병풍, 가리개, 대련 등이 있는데 그 크기의 大小를 막론하고 어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체제의 여백을 그대로 벽에 붙여놓고 그 면을 바라보며 눈으로 글씨를 쓰며 면을 메꾸어 본다.
[腦中成竹]이란 말대로 이런 식으로 마음으로 글씨를 써 보는 것은 매우 좋은 훈련이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언뜻 마음에 맞는 체제가 구상되어 일사천리로 써 내려간 단 한번의 작품이 가장 고귀하다.
이것은 한 획에서의 일괄성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그 당시의 전부를 단 한번에 표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경지에 못 이른 사람은, 수백 수십장을 써서 그 중에 가장 나은 것을 추려내는 것이 글을 배우는 태도이다. 글씨는 印章을 찍음으로서 완전한 작품이 된다.
도장을 찍는 일은 자기가 쓴 글씨라는 개념 이외에 남의 玩賞物이 된다는 부담이어서 그 작품에 대한 책임을 확정짓는 순간이기 때문에 여간 어렵지 않고 또한 무척이나 신경 써지는 일이다. 작품이나 방명록에 이름 석자 잘 어울리게 쓰기가 참 어렵다. 인장을 누르는 일은 곧잘 [畵龍點睛]에 비유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다된 작품을 잘못 찍어서 구겨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6. 서예 창작에 대한 제언

[書者如其人也]란 말이 있다. 여기서의 [其人]은 그 사람의 모든 것으로 곧 印象이라 할 수 있다.
글씨를 쓰는 사람중에서 이 말을 모를 자가 없겠지만, 이 세상에는 눈살을 찌푸릴 글씨들이 판을 친다. 무지한 초심자들이 덧없이 방황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옛 선비들의 고고한 공부였던 것이 어느덧 할 일 없는 이들의 잡기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다행이 누가 알아주건 말건 고군분투하는 서예가들이 있어 그 진면목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서예 이론의 확립과 보급으로 차츰 서예에 눈을 뜨면 저속한 글씨는 사라지리라고 본다. 서예도 예술인가 하는 문제에서 특히 한글 세대에 발을 맞추려면 여러측면에 생각이 미치는데, 우선 한글 서예를 더욱 많이 보급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風을 창출해야 할 것이고, 일반인이 어렵게 느끼는 한문 서예 또한 새로운 보급 방법을 찾아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게끔 한다면 서예가 다른 예술과 공존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서예하는 모든분들 읽어바야할 글이라 싶어 가져왔습니다


공모전과 서예교육

의석 홍우기


Ⅰ 서언


두꺼운 종이에 빳빳하고 짧은 붓으로 여러 가지 색을 칠하는 서양화에 비해, 서예는 얇은 종이에 부드럽고 긴 붓으로 단번에 그어 완성하는 일회적이고 찰나적인 예술이다. 다시 말하면 서예는 맑은 인품과 축적된 학문이 온몸에 흠씬 녹아들었다가 일시에 한 획으로 분출되는 순간예술이다. 서예는 원래 실용의 범주에서 사용되었으나, 붓이 주요서사도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美的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예술의 경지로 승화하였으며, 실용을 뛰어넘어 보고 감상하기 위한 문화로 발전하였다. 서예는, 20세기에 이르러 다시 전람회문화로 변화하였는데, 전람회중에 서예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공모전이다.

국전이 그 수명을 다하고, 1990년대 즈음에는, 한국서단이 크게 3단체로 나뉘면서 공모전이 급속도로 늘어나더니, 현재에는 이삼백 개를 넘나드는 수가 생성․발전․쇠멸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시기이며, 인터넷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서예개인전․그룹전․회원전이 홈페이지나 서예전문카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얼마든지 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서예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가 있다. 이제는 국전시절과 같은 권위의식이 통하지 않는 시기이다. 공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고는, 서예가 실용적인 면에서 예술적인 면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있었던 한국의 20세기 서예공모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서예가 흥성하고 침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공모전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짚어보고자 한다. 또한, 21세기 인터넷시대에 심사위원․출품자․관람객이 함께하는 공모전과, 서예이론에 대한 연구가 미약한 한국의 서예계에 논문부문의 도입을 제시하면서, 우리 서예계가 공모전을 어떻게 운영하여, 어떻게 서예계를 활성화시키고, 공모전과 서예교육, 서예교육과 공모전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공모전의 변천


1. 실용에서 예술로

처음에 사람들이 문자를 만들고 사용했던 것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갖가지 서사재료가 개발되었고, 그에 따라 문자를 사용한 사람들의 심미의식이 작용하면서 필획과 결구가 정리되었고 각종의 서체가 만들어졌다. 한글이나 한문의 각종서체는 모두 당시의 서사재료와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실용적인 면에서 사용되었던 서체이다.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편지글․竹簡․冊書․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한 각종 碑文 등도 모두 당시 발생했던 사건과 사람에 대한 사항을 종이나 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료에 기록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미적인 면도 있지만 모두가 실용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 실용서예1)는 서예의 기본적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여기서 잠시 信札에 관한 구양수의 의견을 잠시 들어보자.


이른바 帖이란 그 일이 거의 모두 조문이나 애도문, 또는 안부를 묻는 말, 또는 이별을 전하거나 소식을 통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로 집안의 식구나 친구들 사이에 주고받았던 것으로 불과 몇 줄의 글에 지나지 않았다. 대개 처음에는 잘 쓰려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표일한 필치에 흥이 나서 써내려가다 보면 혹은 예쁘기도 하고 혹은 밉기도 하면서 모든 형태가 저절로 나온다.2)


이를 통해 보면 帖은 일상적인 교류과정에서 씌어진 것이지만, 그 속에 작가의 표일한 필치와 흥취가 담겨있음으로 해서 예술적인 면이 드러나고 법첩으로까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옛날사람들은 거의가 소폭의 형식인 手札․詩稿를 冊頁이나 手卷으로 만들어 손안에서 감상하는 자신들의 書齋文化를 형성했을 뿐, 서예전을 열거나 서예전에 출품하기 위해 글씨를 쓰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문인사대부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수단에 불과할 뿐, 예술을 위한 궁극적 추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명나라 중엽이후 서예작품을 벽에다 걸어놓고 감상하는 條幅․對聯 등의 형식이 점차로 완비되었다. 즉 책상에서 읽던 서예가 벽에 걸어놓고 보는 서예로 작품의 형식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작품의 크기도 정밀한 소품에서 규모가 큰 대작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서예가 전람회문화로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3) 오늘날의 서예는 전적으로 감상을 위한 예술형식이 되었다. 일반적인 글씨마저도 이제는 거의 펜을 사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붓을 사용하여 편지를 쓰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랑방에 선비들이 모여 책을 베끼고 편지를 쓰는 모습은 인쇄와 복사,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특이한 괴물들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릴 기세로 밀려든다.


2. 鮮展과 國展시대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귀족의 저택이나 서당에서 명가(名家)의 서화를 완상(玩賞)하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에서의 본격적인 미술전람회는, 1915년 고희동(高羲東)이 도쿄[東京]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개인전람회를 연 것이 처음이며, 1921년 서화협회4)에서 ‘제1회서화협회전’을 개최한 것이 한국에서 열렸던 단체미술전람회의 효시이다. 이 전람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던 1939년까지 19회전을 가졌고, 1922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5)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23회전을 개최하였다. 선전은 일제강점기에 열렸던 전시였음으로, 일부인사들은 친일적인 성격을 띠었고 일부의 뜻있는 인사들은 항일적인 성격을 가지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1932년 ‘조선서도전람회’로 분리된 이후에는 친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완용과 김돈희 등이 심사에 참여하면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서예는 여러 가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이 한글전용6)이란 어문정책이다. 한글전용정책은 국민들이 한자를 멀리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고, 한자로 적혀있는 글이나 서예작품을 독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우리 선인들의 생활과 철학을 이해할 수가 없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된 지 3일 후 서울에서는 조선문화건설중앙위원회(약칭 문건)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설립되었다. 격동기에 만들어진 여러 예술단체들이 차츰 정비되어가면서, 1948년에 결성되었던 조선미술협회가 1949년 대한미술협회7)로 개편되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8)를 경복궁전시실에서 개최하였다. 국전은 그간의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서 1981년까지 30회에 이르는 동안 (6․25동란 기간에는 중단되었음) 이 나라 서단의 주춧돌과 기둥이 되는 서예가들을 배출시킴으로서 서단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냈다. 국전의 주최기관과 주관기관으로 1~16회까지는 문교부가 담당하였고, 17~30회까지는 문화공보부와 운영위원회가 담당하였다. 국전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고 추천 초대작가의 엄격한 구분이 제도화됨에 따라 서단 전반이 매우 경직되고 수직적인 상하의식이 팽배하였으나, 기초가 매우 빈약했던 서단에 전통서예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임서를 강조하면서 법고의 시대가 열렸다. 국전시대의 개막과 함께 서예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지망자들이 차츰 증가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동안 경향각지에 사설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9) 1960년대 후반 학교교육에서 습자시간이 사라짐에 따라, 서예는 자연 사숙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 이후 점차 서예학원이 활성화되면서 서예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3. 미술대전과 새로운 질서

1981년 30회를 끝으로 국전이 막을 내리고, 1982년에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10)을 개최함에 따라 미술대전시대의 막이 열렸다. 그 주최기관도 문화공보부에서 문예진흥원으로 이관되고 종래의 추천 초대작가 제도도 편대미술초대작가 제도로 통합개편되면서 서단의 활동연령층이 한층 젊어졌다. 이에 따라 종래와 같은 권위주의적 경향이 약화되었고 서예가들의 개성적인 창작활동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88년, 서예인의 보금자리 ‘예술의전당 서예관’이 개관되면서 서예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이곳에서는 공모전․그룹전․개인전․기획전을 비롯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다. ‘한국서예백년전’ ‘국제현대서예전’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고려말․조선초의 서예’ ‘조선중기서예’ ‘조선후기서예전’ ‘조선왕조어필전’ 등을 의욕적으로 펼쳐보임으로 해서 서예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한국서예청년작가전’을 열어 의욕적이고 감각이 풍부한 젊은 서예인들의 시각을 통해 서체의 다양화와 파괴적인 모습을 선보였고, 변화를 추구하고 연구하는 풍토를 진작시켰던 것은 한국서예발전에 대단히 큰 공헌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서단은 1989년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변혁의 조짐과 사건들이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한국미술협회11)로부터의 분리독립을 표방하면서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되었고,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와 한국서예협회의 화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국서가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서예대전12)과 대한민국서예전람회13)가 상호보완과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공모전에 대한 불신은 현장에서 직접 쓰고, 그 현장에서 즉시 심사하여 발표하는 휘호대회로 이어졌다. 국제서법예술연합에서 주최하는 ‘전국휘호대회’ 나, 예산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전국서예백일장’ 등이 그것이며, 미술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서예대전’은 공모작과 휘호작을 합산하여 심사하는 방식으로 작가들을 선발하였다.

서단이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술협회․서예협회․서가협회는 공모전의 권익과 공정을 위하여 서로간에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갖가지 혼란과 후유증이 생겨났다. 한편, 3단체의 초대작가들이 함께 ‘한국서예초대작가전’을 열어 서로간의 화합을 다지기도 하였고, 일발에 그치기는 하였지만 ‘전임대통령및현대서예가백인초대전’을 열었으며, 2004년에는 ‘현대서예가백인포럼’ 등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각 서단의 작가들은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통해 서단 서파의 경계를 넘어 발표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광명미협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서예한마당’에서는, 30명의 심사위원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정하게 채점하고, 심사점수를 즉석에서 집계하여 현장스크린에 발표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한국서도협회 서울․경기남부지회에서 주최하는 ‘한남서도대전’에서는, 서예이론정립을 위하여 논문부를 신설하였고, 또한 인터넷카페회원들이 투표를 하여 대상을 선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서단에서 불합리하게 실행되고 있는 공모전의 단점을 보완하여 서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서예계도 변해야 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상은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사라져가고 있으며, 서열과 上命下服의 개념이 아닌 창의와 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다음은 서예계의 변화를 바라는 오후규교수의 지적이다.


디지털 사회는 위계질서와 권위의식, 그리고 관습을 거부한다. 대신 토론과 논쟁, 그리고 창조적인 파괴를 필요로 한다. 서예가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바뀌거나 아니면 교육을 통해 이룩될 수밖에 없고, 고전 서예철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14)

Ⅲ. 공모전의 효과


1. 공모현황

오후규선생이 그간 월간서예나 한국서예학회에서 발표한 서예연감을 보면, 1999년에는 개인전이 57건 공모전이 153건이었고, 2000년에는 개인전이 139건 공모전이 120건 해외개인전이 13건이었으며, 2001년에는 개인전이 127건 공모전이 166/5건 해외개인전이 6건이었다. 2002년에는 개인전이 147건 공모전이 171건 해외개인전이 11건으로 조사되고 있다. 참고로 연도별 공모전신설은 1999년도 5건 2000년도 7건 2001년도 11건 2002년도 14건이다.15)

위의 자료를 통해보면 공모전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데, 여기에는 각 시군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성휘호대회․공모전․학생휘호대회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된 공모전의 숫자는 서예의 활성화라는 이면에 각 서예단체들이 지방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용이 같은 공모전을 매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공모전 심사의 공정성 문제나 여러 가지 이권상의 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각 서단마다 발표되는 초대작가를 보면 세 단체만 합하더라도 1000명이 훨씬 넘고, 여기에 이삼백을 헤아리는 공모전에서 배출된 초대작가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상당히 많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많은 초대작가들이 한국서단에 존재하는데 2002년 서예개인전이 160건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면, 서예시장이 없고 경제침체의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미미하다.

이들 전시는 공모전의 영향으로, 당해나 예기비풍보다는 장맹룡비나 장천비와 같이 튼튼하고 힘있는 글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기존의 해서와 예서중심의 단정한 글씨에서 벗어나고픈 작가들의 충동은 목간과 같은 자유로운 글씨를 유행시켰고, ‘필묵정신전’ ‘초신전’ 등에서 보이듯 초서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졌다. 대체로 스승에게 종속되어 있는 글씨가 아직 많이 보이기는 하나, 한글에서는 민간서체나 편지글과 같은 필체가 점점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고, 몇몇 작가는 다양한 법첩을 통해 얻은 다양한 필법을 구사하여 자신의 개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으니 실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순기능

공모전은 수상작 발표와 함께 대중의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큰 힘이 있고, 신진작가선발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금의 많은 서예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효과로 인하여 공모전의 수상작품이나 입․특선의 선발경향은 서예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鮮展이나 國展時節에는 어느 대가의 서풍이 유행하고, 어느 시기엔 唐楷․北魏楷書․木簡風 등이 유행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공모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은 시각적 충격을 주는 작품을 생각하게 되며, 보다 아름답게, 보다 강하게, 보다 특이하게 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여기에는 미술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서예창작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공모전은, 안목을 갖춘 심사위원이나 선배들의 시각을 통해 자신의 잘잘못을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입상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낙선을 하게 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이를 도약의 기회로 삼는다면 더 큰 발전을 예약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출품자들은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평소보다 많은 시간 작품완성에 골몰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작가들에게 그 동안에 익혔던 運筆․結構․章法 등등에 관하여 보다 자세하고 많은 것을 체득할 수 있게 한다. 작품하기에 좋은 문장을 분석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향을 보기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각종 전시회의 도록을 살펴보기도 한다.

전시장에서는 좋은 작품만이 좋은 학습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작품이다. 항상 눈에 익어있는 내 작품에서는 큰 결점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남의 작품에서는 사소한 것도 쉽게 보이며 좋은 작품에서는 좋은 면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공모전은 많은 이들의 다양한 수준의 작품을 통해 나의 작품을 제고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휘호대회는 공모전에서보다 더욱 많은 것을 얻게 한다. 각지에서 온 다양한 필법을 구사하는 여러 사람들의 운필법을 경험할 수 있고 직접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휘호에만 열중하기 보다는, 숨을 한 번 돌리고, 방해가 되지 않게, 주변에서 휘호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

3. 역기능

한국의 서예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생과 민주라는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중요시해야할 것은 실력과 권위의 문제이다. 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출품자보다 실력이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출품을 하면 입선도 하지 못할 사람이 심사를 하는 경우도 문제지만, 그 심사위원과 관련된 출품자가 많다면, 심사과정에서 사사롭고 불합리한 일들이 적잖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면, 서단은 공정함을 잃게 되고, 그 권위는 땅에 떨어지며 대중들의 마음은 냉정하게 서예를 떠날 것이다. 요즈음은 대상을 수상하고 입특선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그리 없는데, 이것은 공모전이 공정하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는 이들은 그나마 심각한 불황으로 기진맥진한 서예계에 한바탕의 상처라도 입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이의를 제기해도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조용히 서단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은 통렬한 시각으로 현시대의 공모전을 바라본 전종주선생의 지적이다.


일부 기성작가들은 부패한 공모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들은 실제로 출품자들을 먹이사슬로 엮어서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명리만을 쫓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16)


또한 전․예․해․행․초에 능한 사람이 각기 다르고, 한글이나 그림에 능한 사람들이 따로 있지만, 모든 것을 혼자서 다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유로 어쩌다 어느 한 문하에 입문하면 거의가 평생동안 그 문하에서 사제관계를 유지하며 스승과 똑같은 필치를 구사하게 된다. 또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필사적으로 이를 쟁취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글씨를 잘 쓰는 법만 강조하며, 다양한 창작이나 교육내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답습만을 해가며 공모전에 출품을 하고 있다.17)

사실, 공모전에 분명한 목적도 없이 출품을 계속한다면 공모전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기간 연구하고, 그 연구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작품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쉽게 마무리를 하게 되면서 질적 수준이 저하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Ⅳ 공모전과 서예교육


1. 서예교사

우리나라 서예는 광복이후 60년대 중반까지 초등학교에서 습자시간이 설정되었지만 이후 그것마저 폐지되어 지금은 미술시간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었다. 공교육에서 서예를 허술하게 다루다보니 자연 사교육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사교육을 담당하는 서예교사의 자격기준도 허술한 건 마찬가지다. 이는 서예의 전문성을 잘 모르는 공무원들도 책임이 있지만, 그 기준을 분명하게 정하지 못하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는 서예인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 수백의 서예공모전이 ‘대한민국’을 표방하고 있고 모두가 공정하며 최고 수준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서예를 알지 못하는 공무원들은 이들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공무원의 잣대로 도지사나 장관 등등의 명칭을 들먹일 뿐, 인품․작품제작능력․교수능력 등등을 문제로 삼지 않는다. 삼개단체에서 초대작가가 되었거나, 제법 권위있다는 공모전에서 수상한 상장도 인정되지 않지만, 초보자들이 응모하는 공모전이라도 상장구석에 ‘○○장관’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바로 자격이 된다. 또한 서예과목교사자격증이 없기에 어느 과목이라도 교사자격증만 있다면 결격사유가 없다. 더구나 지금 성황을 누리고 있는 각종의 문화센터 등은 아예 그러한 기준마저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제는 서예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교직과목을 이수하게 하고 그들에게 서예교사자격증을 만들어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서예교육이 시작되고, 이러한 바탕에서 다시 공모전이 이어지며, 그 공모전의 수상결과가 다시 서예교사 자격기준이 되고 있으니, 이는 원천적으로 상당히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2. 한국적 서예와 서예이론

공모전은 서예교육의 결과이다. 출품자들은 배우고 익히지 않은 것을 공모전에 발표할 수가 없다. 지금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개성이 강한 인터넷시대이다. 그러므로 궁중에서 모든 언행을 통제받고 숨죽이듯이 지낸 궁녀들의 한글이, 찢어진 청바지에 배꼽을 드러내놓은 젊은 이들의 생기발랄한 젊은 가슴속으로는 파고들까 의문이 된다. 古人들이 작은 붓으로 쓴 碑文을, 우리가 왜 그렇게 큰 붓으로 재현하려고 애써야할까를 재고해보고, 서예작품의 규격도 우리의 현실에 맞게 고쳐야한다. 우리나라에 산재해있는 古人의 명적들을 탁본하고, 탁본한 자료중에 학습하기에 좋은 것들은 모아서 법첩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생각해보자. 간혹 탁본을 하러가면 정말 좋은 글씨들이 많은데, 이렇게 무조건 중국의 글씨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가 고민해야한다. 공모전에, 우리 풍의 글씨를 우선해서 선발하면 사람들은 우리글씨에 눈을 돌릴 것이다. 무조건 우리의 법첩이라고 사람들이 배울 리는 만무하다. 정말로 좋은 비문을 교재로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글씨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면, 많은 이들이 배우고 이러한 운동에도 동참할 것이다. 공모전은 서예교육의 결과로 나타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공모전을 통해 새바람을 진작시키고 선도하는 역할도 있어야 한다. 누가 안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가능한 곳부터, 나부터 하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의 서예이론과 비평문화정착을 위해 논문부문의 신설이 시급하다. 이는 대학에 서예과가 신설된 지 15년이 되었고, 수도권 몇몇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은 인재들도 많아졌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서예인들이 서예와 서예이론을 함께 병행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으나, 모든 것을 수준있게 잘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공모전에서 한글부문․한문부문․사군자부문․전각부문을 나누어 놓은 것처럼,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한 서예이론을 전공한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논문부문을 신설해야 한다. 글씨가 아닌 논문부문에서 그들을 초대작가로 만들어 그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전념하여 논문을 쓰고, 서론이나 관련 서적을 번역하고, 평론을 하는데 마음을 기울이게 한다면 한국서예문화는 더 큰 발전을 기약할 것이다.

그해 실시된 공모전에 대하여 비평가에게 글을 부탁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예술작품에서 비평은 매우 중요하다.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작품을 보다 의미있게 감상할 수 있고 흥미진진하게 이해할 수가 있으며,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창작의욕을 일으키게 한다.18) 이점에 대하여 김병기선생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공정하고 권위있는 서단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문에 바탕을 두고서 객관적인 평을 할 수 있는 권위있는 평론이 먼저 활성화 되어야한다. 평론이 활성화되면 서단의 어지러운 상황을 교통정리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예단체는 평론의 도움을 받아 남발된 초대작가를 정리하고 공모전 때마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우수한 작품을 입상작으로 선발함으로써 공정성과 권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서예의 장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19)


3. 출품시의 유의사항

공모전에 출품하는 사람들이나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은 다음의 몇 가지를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이는 공모전의 당락과도 직접 관련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하는 것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작품을 하기 전에 우선 내용파악을 하였으면 한다. 예전에는 한문에 문리를 얻은 선비들이 글을 썼기에 당연히 알고 글을 썼지만, 요즈음은 내용은 접어두고 글씨부터 배우는 것이 다반사다. 문인화 작가들도 화제내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림의 분위기와 畵題의 내용이 다르면, 작가의 실력이 의심스러워지고, 겸하여 작품의 격을 심하게 떨어진다. 또한, 자신이 지은 시가 아니라면 반드시 출전을 밝혀두는 것이 좋다. 그 당시에는 기억이 날 수 있어도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면 글씨를 쓴 자신도 어디에서 골라 쓴 것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감상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알면서 보게 되니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誤字·脫字에 대하여 신중해야 한다. 서예작품은 글을 쓰는 것인데, 정작 글자를 빠뜨리거나 잘못 쓴다면 엉뚱한 뜻이 되기도 하고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서예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문서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요즈음 인쇄되어 나오는 한시를 번역한 책에서 오자가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를 부채질한다. 한문독해능력이 약하고 원전을 볼 수 없는 이들은 해석이 되어있는 책을 구입하는데, 이를 참고로 하는 작가라면 아무리 확인해도 오자나 탈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시나 확실히 알고 있는 시가 아니라면, 항상 원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놔야 할 것이다.

셋째, 자신의 개성이 승화된 글씨를 써야 한다. 법첩을 임서해도 모양만을 보고 그대로 베껴 쓰는데 열중한다면 이 역시 창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벌들이 이 꽃 저 꽃 찾아다니며 흡입하는 바로 그것을, 벌이 아닌 주사기로 빼내서 모아놓으면 꿀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법첩을 늘 임서하지만 나의 개성이란 침으로 법첩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결국 법첩은 법첩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법첩에서 요구하는 주된 用筆․結構․章法을 생각하고, 輕重․方圓․主賓․剛柔․虛實 등등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모양을 흉내내기에 바쁘다면, 아무리 국그릇을 드나들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 숟가락처럼, 서예의 본령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서예가들이 남의 흉내를 내다가 중도에서 좌절하고 많다. 어느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지만, 정작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4. 관객을 위한 배려

서예전은 해마다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으나 거의가 개막시간 정도만 조금 붐빌 뿐 그 이후에는 관람객이 매우 드물다. 어느 누구는 “사람 보러 가지 뻔한 글씨 보러 가냐?”고 말한다. 이는 서예전이 전시의 본래 목적을 잃었다는 반증이다. 작품이 언제나 비슷하고 변한 것이 없다면 뻔한 전시장에 대중들의 바쁜 발걸음이 옮겨질리 만무하다. 이러한 관점을 통감하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는 예술의 전당 이동국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서예인구가 500만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자기작품 남의작품 다 떠나서 그 자체의 감동을 위해 전시장을 찾는 유료관객이 예술의 전당의 기획전의 경우 앞에서 본대로 대체로 50-100명 남짓한 것이 사실이다. 작가만 있고 관객 즉 그것을 소비할 사람이 없는 예술이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를 이제 대중들이 심판하고 있다.20)


작품을 할 때에는, 다양한 고전을 깊이 공부하고 많은 생각을 하여, 훨씬 변해진 모습으로 대중앞에 나서야 하며, 대중들이 관심이 없다고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로 우리가 다가가야하며, 대중을 위한 서예교육에도 눈을 돌려야한다. 서예학원이나 대학․초중등학교․문화단체․문화센터 등에서도 서예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강좌가 필요하다. 이는 전문교육과는 달리 일반인의 관심을 증대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공모전전시장에서 서예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전문작가가 직접 안내를 해주는 방법이나, 그에 관한 자료를 제시해준다든가, 영상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끌어 주는 방법을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서예관련 유적지를 답사하고, 탁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탁본을 해본 사람들은 주변의 비석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고, 자연 거기에 쓰여진 글씨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실제의 작품을 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홈페이지나 인터넷카페를 이용하여 동시에 전시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으려면 우선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고 그만한 비용을 수반하지만, 인터넷은 책상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여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그 내용을 읽어나갈 수 없었더라도, 홈페이지나 서예전문카페의 화면에 작품내용을 비롯하여, 서체에 대한 설명, 작품제작의도 등을 곁들인다면 관객들은 전시장에서보다 더 진하게 감동할 수 있다.

인터넷카페를 통해서 대상작을 결정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공모전이 한문․한글․사군자 등등의 부문에서 최고작을 뽑아놓고 그중에서 대상작을 결정하는데, 바로 이부분에 대한 결정을 서예에 관심이 있는 카페회원들에게 맡겨보는 것이다. 설령 투표를 하러 카페에 입장한 사람이라도 투표만 하고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저곳 돌아보며 다른 서예작품을 감상하고, 한시를 감상하며, 서예에 관련한 질문과 대답을 돌아보면서, 서예에 매료될 수도 있고, 그 단체의 목적이나 취지 등을 알게도 될 것이다. 수상작이 결정되면, 대상․우수상․특선․입선작 모두를 카페에 올려놓고 회원들에게 작품사진아래에 ‘꼬리글’을 달도록 한다면, 대중들은 나름대로 그에 대한 평을 쓸 것이다. 이는 심사위원에게는 공정을 유도하고, 대중들에게는 관심을 유도하는 좋은 제도가 될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이들은 서예를 감상하는 층이 될 것이고, 서예작품을 구매하는 층이 될 것이고, 또 서예에 입문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Ⅴ 마치며


작품에 임하는 작가는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공모전에 출품을 하는 입장이거나 어느 누가 심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수상에만 관심을 갖기보다는, 나의 개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여유있게 평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진정한 작가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작품은 스승이 하는 것도 아니요, 선후배가 하는 것도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내 호와 이름을 쓰고 내 도장을 찍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작품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작가의식이 있어야 한다. ‘가훈써주기’와 같은 행사는 가급적 자제하였으면 한다. 그냥 써주면 받아가는 사람들이야 좋겠고,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고맙기 한량이 없겠지만, 그들은 싸구려로 얻은 작품이라고 그냥 싸구려로 생각하며, 다른 기회가 되면 또 그렇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남에게 주기도 하니 더 큰 문제이다. 결국 작가는 서예의 보급을 위해 인심을 쓰고 있으나,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바로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셈이다.

공모전은,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질을 높이고, 다른 서파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다. 하지만, 초대작가나 수상에 목표를 두고, 수상만을 위해 애쓴다면 분명 이는 서예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어느 해에 한번 받은 대상이나 우수상이라는 명예가 언제나 그 사람의 작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부단히 정진하고 연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작가는 언제라도 그 명예와 권위가 추락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서예기법이나 쓰기자체에 대한 교육외에, 관객들이 서예에 친숙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교육방법이나 공모전도 생각해야 한다. 인터넷의 홈페이지나 카페를 적극 활용하여 전시장에 젊은 학생들을 끌어들여서 이들에게 서예를 알게 하고 서예에 흥미를 갖도록 도와주고, 그들의 느낌을 존중해주며 그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요즘 서예계가 여러모로 어려워졌으나, 이젠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비난하기 이전에 나부터 바르게 선택하고 나부터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알고 있어도 실천으로 옮겨놓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좋은 제도가 있어도 바르게 실천하고자하는 의지가 없다면 역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공모전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지금의 서예계가 진정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간파하여 끊임없이 반영하고 기획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응모자들도 진정 서예계의 미래를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면, 모든 계파를 떠나 동참하고 활성화시켜야 한다.


주)

1) 고대서예는 줄곧 실용과 더불어 떨어질 수 없었으며 서예의 존재형태도 주로 다음과 같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새김과 주조의 수단을 빌어 骨․金․石․碑․崖 등에 형태를 남겼으니, 예를 들면 甲骨文․金文․大小篆․碑誌․墓誌․磨崖文字 등이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쓰는 수단을 빌려 종이나 비단 등에 문자를 남겼으니 예를 들면 書契․公文․信札 등이 그러하다.

2) 郭魯鳳, 「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 中國美術學院博士學位論文, 1999. , p.81.에서 재인용.

3) 郭魯鳳, 上揭書, p.82.에서 내용요약.

4) 서화협회: 신구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向學後進)의 교육 및 공중(公衆)의 고취아상(高趣雅想)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8년 6월 16일 서화애호가 김진옥(金鎭玉)의 집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협회취지서와 규칙을 채택하는 한편 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 간사 김균정(金均楨)을 선출하였다.

5) 조선미술전람회: ‘선전(鮮展)’으로 약칭되었다. 이보다 앞서 오세창(吳世昌) ·고희동(高羲東) ·안중식(安中植) 등이 조직한 서화협회(書畵協會)와 서화협회전이 심상치 않은 민족의식과 주체성 있는 단합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데 주목한 조선총독부는 1922년 조선에서의 문화정책을 표방하고 최대 규모의 종합미술전으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정하고 작품을 공모하여 그해 6월 1일 제1회 전람회를 열었다. 동양화 ·서양화 ·조각 ·서예 ·사군자의 5개 부문으로 나누어 공모 시상하였으며 1944년 제23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6) 1945년 11월, 사회각계층의 인사80여명으로 ‘조선교육심의회’를 조직하고 각종교육문제를 분과별로 토의하게 되었는데, ‘교과서분과위원회’에서는 최현배 장지영이 크게 활약하고 조진만 황신덕 피천득 등이 이들에 협력하여 같은 분과 소속위원인 조윤제의 반대를 꺾고 “한자사용을 폐지하고 초등 증등학교의 교과서는 전부 한글로 하되, 다만 필요에 따라 한자를 도림(괄호)안에 적어 넣을 수 있음”이란 결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이결의안은 전체회의의 토의를 거쳐 1945년 12월 8일 통과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한글전용”에 대한 최초의 공식결의로서 이것이 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시행된 한글전용정책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안이 통과되자 미군정청은 바로 이를 재가하여 우리나라 각급학교의 교과서는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나오게 되었다. 한글학회, 「한글학회이사회회의록 제1권」『한글학회50년사』, 1771 pp418-41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5.에서 재인용

7) 대한미술협회: 광복 직후 좌익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를 모체로 재조직된 미술 단체이다. 숙명여고 강당에서 가진 준비대회에서 선출된 23명이 전국에서 98명의 회원을 추천하여 결성하였고, 초대회장에 고희동(高羲東)과 평의원 15명, 상무위원 10명이 선출되었다.

8)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하여 국전(國展)이라고 한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미술인의 보호와 육성을 위하여 문교부 내에 미술분과위원회를 두고 여기에서 국전 규약을 만들어 이듬해 11월 경복궁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9) 송하경, 『신서예시대』, 도서출판 불이, 1996. pp.12-14.내용참조.

10) 대한민국미술대전: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0회를 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국전) 1982년 1월 16일 제도를 개편하면서 기성작가전과 분리하여 순수한 작가 발굴 및 육성을 위하여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되다가 이후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고 있다.

11) 한국미술협회: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미술협회가 한국미술협회의 모태(母胎)이며, 정부 수립 후 대한미술협회로 개칭되었다. 1955년 위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미술계의 양대 산맥인 홍익대학파와 서울대학파가 갈등을 빚으면서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로 분리되었다. 이후 5 ·16군사정변 속에서 민족미술의 발전 도모와 상호간의 협조를 표방하면서 두 미술가 단체는 통합되었고, 1978년 사단법인체로 등록하여 조직이 강화되었다.

12) 대한민국서예대전: 1989년 사단법인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된 뒤, 같은 해 9월 23일부터 10월 6일까지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이후 매년 열리는 서예 공모전이다.

13) 대한민국서예전람회: 198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폐지되고, 1992년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가 창립된 뒤, 이듬해 4월 2일부터 30일까지 제1회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서가협회가 주최하는 서예공모전으로, 한국 서단(書壇)의 화합과 신뢰를 구축하고, 한국 서예계를 빛낸 참신한 신인들을 발굴·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14) 오후규, 「IT시대에서의 서예철학과 서예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101.

15) 오후규, 「2002년도 대한서예연감」『월간서예』, 미술문화원, 2003.2. p.113.

16) 전종주, 「한국 현대서예의 방황과 오류」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79.

17) 최병식, 「한국서예에 대한 재검증과 서예교육의 개선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66. 에서 내용참조.

18) 李完雨, 「21세기 한국서예의 방향」『동양예술』, 한국동양예술학회 2000.

p.38.

1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p.33-34.

20) 이동국, 「서예 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p.52.


參考文獻

곽노봉,「中國書法與中國當代書壇現狀之硏究」, 中國美術學院博士學位論文, 1999.

김병기, 「한국서예 무엇이 문제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송하경, 『신서예시대』, 도서출판 불이, 1996.

오후규, 「2002년도 대한서예연감」『월간서예』, 미술문화원, 2003.2.

──, 「IT시대에서의 서예철학과 서예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이동국, 「서예 활성화 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李完雨, 「21세기 한국서예의 방향」『동양예술』, 한국동양예술학회 2000.

전종주, 「한국 현대서예의 방황과 오류」 『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최병식, 「한국서예에 대한 재검증과 서예교육의 개선방안」,『서예학』제3호,

한국서예학회, 2002.

이 글은 2004년 9월 4일 광명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書藝作品은 어떻게 感想하여야 하는가?

서예는 동양 특유의 미적 예술이다. 따라서 서예를 감상한다는 것은

사람의 사상, 정감, 취미, 심미안 등을 개발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서예의 수준을 이끌어 올리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반백응(潘白鷹)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가의 창조를 보는 것만 아니라 감상자들도 창조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음악의 대가로 그의 작품은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만큼 훌륭한 창조물이라는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베토벤의 작품이라도 어려울 뿐이고 심지어는 듣기가 괴로울 정도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스스로가 그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

서예는 이러한 것이 더욱 요구되어지는 예술이다.

그리고 좋은 글씨의 오묘함은 진정한 감상자가 있어야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제대로 발휘하여 새로운 창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예를 감상하려는 자가 어느 정도 이에 대한 기초가 있어야만 제대로 서예를 감상할 수가 있지 그렇지 못하면 깨닫기가 힘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서예는 회화와 같이 현실 중의 각종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예술이다.

그러나 서예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점과 획의 구성은 매우 특수한 예술언어와 리듬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폭의 좋은 작품을 대하노라면 백 번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으며,

감람을 씹는 것과 같이 처음에는 떫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 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사람의 시각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형체와 동태미에서 풍기는 맛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인류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형성된 획득물이며,

나아가서는 수만 년동안 인류가 경험하였던 의식 속에 집중되었거나 개괄되었거나

 추상적으로 상당히 공고되었던 어떤 것들에 대한 연상과 정감의식이 통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곧 서예의 창조와 감상의 현실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동한(東漢)은 "좋은 글씨의 형체는 앉은 것 같고, 서 있는 것 같고, 나는 것 같고,

움직이는 것 같고, 오고 가는 것 같으며, 눕고 일어나는 것 같으며, 근심하는 것 같으며,

 기뻐하는 것 같으며, 벌레가 잎사귀를 갉아 먹는 것 같으며,

 날카로운 칼과 창 같으며, 강한 화살 같으며, 물이나 하늘같으며,

 구름이나 안개 같으며, 해와 달과 같으며, 종횡으로 방방 뛰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글씨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점과 획 그리고 형체가 반드시 사람들이 대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모양 그리고 동태적인 것을 연상시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훌륭한 예술이라는 말이다.


 물론 서예가들이 하나의 획으로 어떤 사물의 형상과 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사물의 형태와 동태적인 미감을 충분히 표현할 수는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작가가 창작을 할 때 무한히 다양한 객관적 현실 가운데 아름다움을 받아들여,

점과 획 그리고 형체에 집중적으로 표현시킴으로써

작가가 가지고 있는 사상 감정을 이에 충분히 발설하는 것이다. 

글씨체로 볼 때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등은 각기 다르며 저마다 고유한 풍격과 유파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각기 다른 성격, 기질, 예술의 연원, 생활경험 등을 삽입하면

작품의 풍격도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견해도 전부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은 법도가 있고 의젓하기가 태산이 내려앉은 듯하여 장중하면서도

후박한 기상으로 호방한 풍격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안진경의 글씨를 평하여 말하길 법은 갖추고 있으나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마치 껍질이 두꺼운 만두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과 씩씩한 장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글씨에 대한 견해가 각각 다르고 감상하는 기준도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견해야 어찌되었건 좋은 작품에는 반드시 필법(筆法), 묵법(墨法), 장법(章法), 기운(氣韻) 등의네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힘이 꼭 점과 획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예작품이란 글자들이 모여서 행을 이루고, 행들이 모여서 장을 이루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점은 한 획의 규범이 되며, 한 자가 한 작품의 부분적인 미가 전체적인 미에 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행서나 초서는 한 글자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 글자와 저 글자 도는 이 줄과 저 줄을 보면서 그 속에 담겨진 필력·필세·필의·성기고 빽빽한 것·긴장되고 해이한 것·균형·서로의 획들이 어떻게 배합되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하며, 필묵이 있는 곳에서부터 없는 곳에 이르기까지를 살펴야 하며 조밀한 곳에서부터 성긴 곳에 이르기까지도 자세히 살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종합하면 한 폭의 서예작품을 예술적으로 치라 할 때에는 반드시 글자와 글자,

행 과 행 사이의 간격과 대소 획들을 적절히 배합시키고,

먹의 농담을 서로 어울리게 하고, 신축성을 고려하여 전체가 일맥상통하게 하여야만

진정한 예술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몇 가지 처리방법이 온당치 못하면

엉성하고 산만하거나 무질서하게 되어 문체가 나지도 않게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피로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읽기도 어려워 감상 을 곤란하게 만든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敍)>는 불후의 명작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형체와 짜임새 속에 편안하고 안온한 맛이 있으면서도 매우 다양한 변화가 엿보인다. 필획을 둥글게 돌리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었으며, 펄펄 나는 획들은 생동감이 서려 있으며, 인위적인 운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니 작품 전체에서 아름답고 윤기 있고 청신한 아름다움이 저절로 풍겨난다.


 당대(唐代) 감상가인 이사진(李嗣眞)은 일찍이 구름 속에서 삐져나온 태양이요, 연꼿이 물 속에서 나온 형상이요, 음양과 춥고 더움의 사계절 변화가 고르게 조화되어 있으며, 맑은 바람이 소매에서 나오고 밝은 달이 품 속에 들어가는 모습이라는 말로 왕희지의 글씨를 연상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안진경(顔眞卿) 행초의 풍격은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다.

그의 <제질문고(祭嫉文稿)>는 이러한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그는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에 저항하다 장렬하게 죽은 조카에 대한 비분강개한 정이

행간에 가득 담겨져 있고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강하고도 뻣센 획으로 담수에 써내려 갔으니

격조는 격앙되어 있어서 이전에 형성하였던 침착하고 후박한 풍격을 찾을 수 없다.

초서의 대가인 장욱(張旭)의 <고시사첩(古詩四帖)>을 보면 표일한 기세로 기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새가 춤을 추며 나는 것 같으니 그 묘한 맛이 고금에 드물다 할 것이다.

장욱은 일생의 희노애락,궁핍함, 우수, 유쾌함, 원망, 그리움 등을 모두 술에 섞어 마시면서

무료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가슴속에 있는 모든 불평과 정서를 모두 초서 위에 배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 즉 산수, 벼랑, 계곡, 짐승, 곤충, 물고기, 초목, 꽃, 해와 달

그리고 별, 풍우, 불, 번개, 구름, 춤, 전투 등에서 기쁘고 놀라운 현상들까지도 모두 상징화하여

초서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의 경력과 시대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확하게

작품을 평가하기가 곤란하다. 이 점은 옛사람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과제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경직화되기가 쉽고, 행초는 매끄럽게 되기가 쉽고,

큰 글씨는 산만해지기가 쉽고, 작은 글씨는 구속되기가 쉽다.


그러므로 해서를 쓸 때에는 단정하면서도 활발하게 하여야 하며,

행초를 쓸 때에는 날아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침착해야 한다.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짜임새를 긴밀하게 하여야 하며,

작은 글씨를 쓸 때에는 너그럽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 기이한 것에는 바른 것을 배합하여야 하고,

바른 것은 기이한 것을 보충하여 기이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하며,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경직되지 않게 하여 세련되고 피곤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비록 작가에 대한 요구사항일 뿐만 아니라 감상자들도 이러한 각도에서 

작품의 우열을 감상하여야 한다.

예술이란 모방 혹은 복사하거나 사진 찍듯이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감상자들은 왕왕 기계적으로 비첩의 맛을 추구하고 심지어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옛사람의 작품에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환경과 사상 감정이 있기 때문에

배우고 따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법은 중요한 것이지만 옛 법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된다.

 감상할 때는 다른 사람의 약점만 들추지 말고 장점을 흡수하여야 한다.

 편견은 결코 예술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주마간산으로 대충 보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기법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세심히 살피고 완비하여야만 비로소 유파와 운필의 기법등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永字八法(영자팔법)의 意味(의미)
해서(楷書)의 기본적인 필법을 갖춘 문자로서 '永'字가 있다. 이 '永'字에는 문자구성상 특징이 되는 필획이 비교적 고루 갖추어져 있어 옛 부터 이 문자를 연습함으로써 필법의 기초를 연마하는데 활용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글씨입문의 초보단계에 이 '영자팔법(永字八法)'의 숙달을 통해 필법을 익히고 있다. 永字八法에는 다음과 같은 각 부분의 명칭이 있는데 각 필획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어원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설명을 가해보기로 한다.
一. 側(측;곁. 옆) :
이것은 점획(點獲)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永字의 첫머리 점이 마치 側(옆)으로 기울어 있다는데서 유래한 것 이다. 그러므로 '側'으로써 점획을 쓸 때에는 반월형(半月形)으로 기울어진 머리를 연상케 하는 모양이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점획에는 실로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어서 모두를 '側'로 처리해서는 물론 안 된다.
마치 기러기가 날아가다 내릴 때 그 기울기를 연상하게 되는데. 비록 짧고 간단한 획이지만 그 당야한 변화는 글씨에서 표정 또는 정서(情緖)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양이 토란, 괴석, 강낭콩, 등에 비유 되었다. 1에서 가볍게 역입하여 2에서 붓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45° 정도로 쓰러져 있는 붓의 탄력으로 3에서 가볍게 뺀다.
二, 勒(늑 o r륵. 굴레. 묶다.) :
말을 말안장으로 누르는 느낌과 같다 하여 지닌 이름이다. 특히 이 획의 수필은 벼랑에서 말을 힘껏 누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획은 이른바 '一'字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보기에는 가장 원시적인 획인데 흔히 '한일字 조차 제대로 쓰기 힘들다' 고 한탄하듯 얼핏 단순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실은 이 단순함 속에 의미 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획 수가 적고 구성이 단순하면 할수록 쓴 사람의 성격이 잘 나타나는 법이다. 이 일획(一畵)은 글씨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결구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획(畵)의 성공여부로 작품 전체의 우열을 결정하게 되는 수가 적지 않다. 앞서 말한 통속적인 말과는 반대로 '한일字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대부분의 글자는 바르게 쓰게 된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1에서 역입하여 2에서 45°로 눌러 3에서 붓이 나갈 방향으로 틀어 엎어 가지고 4쯤에서 붓을 약간 들어 허리와 같은 탄력을 만들어 5, 6에서 점을 찍는 방법으로 하여 뗀다.
그 기울기는 앞머리의 윗부분과 뒤의 마지막 아래 부분을 수평으로 맞춘다.
위의 획에서 1번과 6번의 점을 종이 위의 수평으로 보고 머리 부분의 위를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아래를 수평선에 놓으면 획의 기울기가 알맞다는 이야기가 된다.
三, 弩(노; 활쏠노) :
마치 활을 당겨 힘껏 당길 때의 세(勢)를 닮았다고 해서 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내리긋는 수획(竪劃)이다.
竪;더벅머리 수; 아래 위 모양이 더벅머리 같음을 말한다.
竪劃(수획)의 본질은 그 명칭으로도 짐작이 되는 것처럼 수직이 원칙이다. 그런데 단순한 수직이 아니라 상하끝부분에는 돌을 튕겨낼 만한 弦(현)이 매어져 있는 것이어서 여기에는 집중된 힘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상하의 힘에 대응해서 중간부분에는 탄력성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소 彎曲性(만곡성)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성질을 통해서 생각할 때, 수직은 단순한 직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각적인 직선일 필요가 있는 것이며 그런 만큼 중간부분의 彎曲性과 이 上下의 힘찬 상대관계는 이 획의 佳拙(가졸;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요건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 획에 있어 중요한 점은 봉(鋒)의 움직임에 따라 전체의 가졸(佳拙; 좋고 나쁨)을 결정하게 되는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漢字는 縱書(종서)이므로 이 획이 수직으로 보이지 않거나 중심을 통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문자가 굽거나 흐느적거리게 보이게 되어 결국 전체의 구성이 우습게 되어 버린다.
세로획은 가로 획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며 수로와 현침이 있다.
현침획은 О부분 정도에서 붓을 차차 들면서 뺀다. 끝 부분이 서미(쥐꼬리)의 형태이면 좋다.
四, 趯(적; 뛸적):
이것은 공이 튀는(躍약) 것 같은 筆勢(필세)에서 붙어진 이름이다. 공이 벽에 부딪혔을 때, 그 탄력으로 벽을 차고 튀어나오듯이 이 획이 갖고 있는 내용도 그 힘의 변화와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 획이 갖고 있는 중요한 의의는 내용에 있어서의 힘의 분배와 그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늑(勒)'이나 '노(弩)'에 있어서는 기필에서 수필까지 사이에 시간적으로 극단적인 불연속성이 없으나 이 획은 '跳躍(도약)'이 주체인 만큼 오히려 극단적인 리듬감이 수반된다. 이러한 리듬감이 주체가 되면 필모(筆毛)의 성질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기도 한다. 즉, 강모필(剛毛筆)은 특별히 의식을 하지 않아도 탄력성이 있으나 연모필(軟毛筆)은 기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적은 뛴다는 뜻인 데 구(銶)라고도 한다. 흔히 갈고리, 파임만 잘하면 잘 쓰는 글씨라 할 만큼 어렵기도 하고 중요한 획이다.
4까지는 세로획과 같고 5에서 약간 왼쪽으로 틀어서 약간 뉘어져 있는 붓을 세우며 6으로 나간다.
구법(구양순)은 서서히 획을 긋듯이 빼며, 안법(안진경)은 뛰어 나가듯이 뺀다.
五, 策(책; 채찍) :
이 획은 말에 채찍을 치는 타(打) 필세(筆勢)를 가진 것을 가르쳐 생긴 명칭이다. 보통, 말에 채찍을 댈 때에는 옆으로 하되 위를 향해서 치게 된다. 이 획은 얼마만큼 勒(늑)의 성질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으나 筆勢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획이 勒과 전적으로 다른 것은 수필이다. 이 수필의 경묘함은 의미가 깊은 바 있어 많은 연습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식 이름으로는 "오른쪽 삐침"이라고도 한다. 1, 2, 3은 가로 획과 통하는데 그 속도나 처리가 경쾌해야 하며, 4에서는 빠르게 뺀다.
六, 掠(약; 스쳐지나가다. 매질하다) :
이 획은 두발(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모양을 생각하게 하는데서 온 말이다. 긴 머리를 빗을 때, 먼저 빗을 머리 위에서 부터 넣고 머리털을 따라 끝부분까지 빗어 내리게 되는데 이 빗에 힘을 넣는 방법과 筆意(필의)가 흡사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획의 특징은 마치 빗을 머리에서 뗄 순간에는 엉킨 머리털을 세게 풀어주어야 할 때, 순간적인 힘이 빗에 가해지는 것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鋒에 가해지는 힘이 순간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보통 쓰이는 '약(掠)'이 모두 이러한 운필에 따라야 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 명칭이 생긴 어원을 깊이 생각할 때, 거기에 이러한 '봉(鋒)의 약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적어도 바른 운필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음 '啄(탁)'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며, 그 근본적인 차이는 수필에서의 봉을 다루는 방법 여하에 달려있다 하겠다.
"홱 재갈 약"자이다. 우리식 이름으로는 "긴 왼 삐침"이라 한다.
이 획은 커다란 획의 일부분 같은 모양인데, 보통 머리를 빗으로 빗는 것같이 하여 끝부분에서 힘을 주어 빗어 내리는 맛이라 한다.
5에서 약간의 전절을 가하여 6에서 서비가 되도록 한다.
七, 啄(탁; 쪼을 탁. 두드리다) : 이 획은 새가 모이를 쪼을 때의 주둥이를 닮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닭이 쌀을 쪼을 때 보면 주둥이를 콕콕 하고 재빨리,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움직이는데 이때의 주둥이 움직임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掠'(약)에 비하면 붓은 훨씬 가볍고 예리하고 빠른 것이 된다. 이 획은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긋는 것이어서 '책(策)'과는 반대의 형상을 보이고 있으나 운필은 비슷한 면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 서 '책(策)'은 '늑(勒)'의 변형이라기보다는 '탁(啄)'과 한 그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이 획은 마치 '측(側)'처럼 가벼운 運筆(운필)이 특징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지나치게 경묘해지는 나머지 조잡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경계가 필요하다.
짧은 왼 삐침이라 할 수 있으며 오른 삐침의 반대 모양이다. 새가 모이를 쪼는 동작에서이름이 붙어 졌다. 구법은 위쪽으로 약간 굽는 듯하며 안법은 수직이거나 아래로 굽는 듯 하게 쓴다.
八, 磔(책; 찟다. 가르다):
이 획의 고기를 자르는 기분으로 붓을 이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고기를 자를 때 처음에는 칼에 가볍게 힘을 넣었다가 점차 힘을 세게 더하면서 최후에 쭉 빼는 방법과 같은 뜻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필에 있어서는 이 기분을 그대 로 붓에 나타내면 좋은 것이 된다. 이 기분은 관념상으로는 매우 쉬운 것 같으나 실제 운필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책은 힘든 획의 하나로 치는 것이다. 이 획의 특징은 한 획 속에 가는 부분과 굵은 부분이 두드러지게 섞여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특징은 한 문자의 최종 획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책은 그 문자의 성패나 분위기를 본질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다. 문자 속에서 이 획이 특히 눈에 잘 띤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찟을 책"자인데, 마치 잘 드는 카로 고기를 가르는 기분으로 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파책이라고 하는데 획에 가까운 것이 파이고 경사진 것을 책이라 한다. 파임은 글씨에서 액센트라 할 수 있다.
4에서 붓을 약간 틀어서 5로 지긋이 뺀다. 안법(안진경)은 4에서 탄력으로 뛰어나간다. 즉 4에서 붓을 세워 면을 바꾸어 중봉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서각과 전각, 그리고 사경

서각

서각은 말 그대로 서()와 각()이 합쳐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은 필서(筆書)이고,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은 각서(刻書)이다. 전통적으로 각서를 하는 경우는 각서자가 직접 글을 쓰지 않고 서가가 쓴 글을 새기기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칼로 글자를 새기기만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글자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뜻의 전달에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글자를 분명하도록 잘 새기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예술인 대접을 받지 못 하였다. 장인 취급을 받았다.

사찰이나 제실, 또는 정자 등에 걸려있는 편액이나 주렴, 기타 건물의 명칭을 새긴 현판, 제영(題詠), 기문(記文), 상량문(上梁文)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것은 그때의 명필가가 주로 글씨를 썼고, 각자공(刻子工)은 글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새기는 역할만 하였다. 이것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물이 아니고, 실용적인 용도로 새겼으므로, 새기는 사람은 기능적인 역할만 열심히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창의력을 쏟아부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글자를 잘 새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서각하는 사람을 장인으로 바라본 것은 한, , 일이 거의 같았다. 일본에서는 각자(刻字)라 하였고, 중국에서는 각서(刻書)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서각(書刻)으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서각을 예술의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외에도 인쇄용 목판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각자공으로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생활 용구에 장식적 목적으로 글자를 새기는 일이 흔하였다. 목각 분야의 전문인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사상에서는 기()와 공()은 천민이 하는 일이다. 라는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오래 동안 예술의 영역의 진입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각자공이 빚어내는 글자나 문양은 민족 정서 속에 녹아 있는 원초적인 전통미를 형성하였다.

70년 대로 접어들면서 이처럼 전통 공예를 하는 장인들을 발굴하여 한국미를 보존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갖자장 오옥진(吳玉鎭)이 무형 문화재 각자장 106호 지정되어 예술인의 대우를 받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그럼으로 현대 한국 서각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오옥진은 원래 소목장이었다. 그러다가 활자의 복원과 문헌 복원에 관여하면서 글자를 새기는 전문가로 변신하였다. 장인에서 예술가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희귀본인 목판본의 복원도 있었고, 문서 복원도 있었다. 고지도의 복원(판각으로)도 있었다. 이때의 새김질은 창의성의 발휘보다는 사실에 충실하게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것을 전통 서각이라고 말한다.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일반인들도 서각에 관심을 가지고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82년에는 전통 서각가들이 한국서각협회를 결성하였다.

사람들이 서각을 배우려 찾아오므로 사승 관계의 제자도 생겼다. 일부의 젊은 서각가들은 스승이 하는 전통 기법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변화가 없는 동일한 방법을 반복하여 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결과로서 현대서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유파가 태어났다. 이들의 핵심이 되는 주장은 자서자각(自書自刻)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쓴 글씨를 새기므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들이 모여서 199011월에 현댁서각연구회를 만들었다가 1991년에 현대서각협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매년 전시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 기존의 한국서각협회와 조금의 마찰이 있었으나 서예협회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원로 서각가가 자신을 예술인이라는 개념에 깊이 사로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장 쟁탈 따위의 이해가 걸린 문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전통 서각은 글씨를 분명하고, 잘 살려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서예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각자공은 보조적인 역할만 하였을 뿐이다.

1989년에 이현춘, 유장식, 안민관 3인이 서울의 백악 갤러리에서 현대서각 3인전을 열었다. 이들은 전통 서각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고 입체 성향의 서체와 작품 양식을 추구하였다. 전통적인 서각 작품은 판액, 현판, 주렴이나, 기타 여러 가지 판자성의 벽걸이 개념이 바탕이었다. 이들은 작품을 입체적 개념으로 제작하였으므로 조각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작품을 당시의 관중은 놀라움으로 바라 보았다. 미술전문지에서도 관심을 표하였다.

일반적으로 현대 서각의 기점을 이 3인전에 두고 있다. 이들은 서각의 개념을 바꾸므로 서각이 나아갈 길을 활짝 넓혔다. 서각을 재해석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서각을 예술로 받아들인 곳이 20년 쯤 앞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평면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하나의 아류로 취급받고 있다. 한국은 작품의 참신성과 다양성으로 이들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다.

‘3인전의 작가 중의 한 사람이 이현춘은 현대서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는 문자를 새겼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예술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쓴 글자를 내가 아무리 잘 새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작품이 될 수 없다. 즉 과거에 서각의 글씨를 쓴 사람(書家)와 새긴 사람인 각()이 이원화 됨으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또 하나는 서각은 글자를 새기지만 글자를 그대로 부각시켜야 함으로 쓰는 행위와 동일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서각은 회화나 조각 또는 전각처럼 독립된 장르가 아니고 단지 서예일 뿐이다.”

이로서 평면적이던 서예가 각을 통하여 입체적이고, 조형적인 개념으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 현대서각을 지향하는 사람은 서각이라는 말 그대로 서가 각을 앞선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따라서 자서자각(自書自刻)을 내세웠던 것이다

전통 서각을 하는 사람은 각()이 우선이므로 좋은 글씨라면 굳이 내 글이냐, 남의 글이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현대서각에서 글의 조형미를 주장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지만 현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새김질이 아닌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여 작품 제작을 하는 것까지 서각이라고 해야 하느냐, 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전통파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러한 갈등이 1990년 대 내내, 거의 10년이나 계속하였다. 그러나 1999년에는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여 현대서각협회라고 명칭을 통일하였다.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현대서각의 대표적인 작가로 떠오른 유장식을 통하여 현대서각이 걸어온 궤적을 되살려 보자.

1970년 대에 서울에서 오옥진이 문화재 보수와 목판을 재현하는 전통 서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가 하는 주된 작업은 현판이나 주렴 등의 문화재 보수이었다. 작업의 성격상 긴 칼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정기호와 안광석이 전각가로 활동하면서 서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각 기법을 서각 작업에 활용하고 있었다. 유장식은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익히면서 스스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서각을 잘 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영남권에서는 이름이 쟁쟁한 서예가들이 자신의 글을 현판으로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 과정을 서예를 하는 사람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전통서각은 나름대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계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예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받아서 글자를 새기는 전통 서예에 회의가 생기자 이성조를 찾아가서 정식으로 서예를 배웠다. 이로서 자서자각이라는 주장을 펼 수가 있었다. 3인전의 작품평을 김양동은 이렇게 하였다.

“3인의 작업은 문자가 지닌 고전주의를 진부하지 않는 형식으로 변형시키기면서 조형 공간 속에 놀라울 정도로 밀도있게 구축하여 놓고 있다.”(가나아트. 11-12월호. 1989)

1989년에 서협이 출범하자 서협의 공모전에 서각은 하나의 장르로서 당당하게 참여하게 된다. 이로서 서각은 서예의 한 장르로 정식으로 진입하였다.

1989년에 ‘3인전으로 이름을 얻은 이들은 대구에서 3미터 높이의 화강암으로 호국(護國)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의 재료는 나무가 아닌 화강암이었다. 이로서 나무라는 재료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에 변화를 가져왔다. 칼로서 새긴다는 방법론에서도 조각한다는 방식으로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실내의 벽걸이 형태가 아닌 실외에 설치한다는 조각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문자를 이용한 조형물의 형성을 두고 미술의 어느 장르로 분류해야 할 지를 두고 논란을 불러올 수 있었다. 정충락은 평 글에서 유장식의 조형 시각은 보다는 종합적인 조형 언어를 담고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예술의 좋은 본보기로 예술 장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유장식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까지 문자라 함은 평면적인 2차원의 표현 영역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문자는 원래 그림에서 가원되었고, 이러한 그림을 간소화하거나 합병시키는 방법으로 고대에 문자를 창조하였다. 오늘의 현대 문자각은 평면의 문자를 다시 상형화하여 입체화함으로 문자를 도시 공간 속으로 끌어냄으로 입체조형 영역인 환경조각으로 나타났다.”

서각이 건물의 부속물 내지 장식물인 것을 독립적인 조형물로 형상화하여 환경조각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생각이었다.

서각은 소재로서 목재를 많이 사용함으로 내부이 주거 공간을 부드럽고 안락한 장르로 꾸미려는 현대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서각의 존재 논리도 시장 친화성을 을 꼽고 있다. 전통 서각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유장식의 예에서 보았듯이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서각이라는 이름을 걸고 예술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단순히 예술이기 위한 것이 이유가 아니다. 시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의 서예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시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회환경이 변하고 있는데도 그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서예의 경우는 변신을 하면서 시장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적인 정서를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함으로 엇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다

2000년에 있었던 제 18회 한국서각협회전에 대한 정충락의 평은 고무적이다.

“2000년을 맞이 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친 새김질의 잔치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참가한 회원들의 수도 수려니와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격조 높은 예술성에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해마다 환조 형식의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금년은 달랐다. 조각과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자료도 나무를 비롯하여 쇠, 포맅코타, , 돌 등등 동원할 있는 것은 모두 등장하였다. 채색도 등장하였다

서각이 순수 예술로 정착하는데 10년에 끝났다.”(서예문화.10월호. 2000)

2004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제 1회 대한민국 서각대전을 개최함으로 미술의 한 장르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전통 서각이 현대서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서각가들이 예술가로서 표현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었다. 전통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용기가 있었다. 원로 서각가들이 못마땅해하는 일면도 있었지만 이전투구 형의 싸움을 하지 않고, 비교적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 큰 사회적 배경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서예인들이 작품 시장을 가지지 못한 체 오로지 공모전만 바라보아야 했던 상황과는 달랐기 때문에 서각가들이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시장이 형성된 원인으로는 서각이 비교적 한국적 정서에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예인들도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과감히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각

고래로부터 전각은 인장의 역할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명나라 때 문팽(1498-1537)이 전각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림이나 서예작품에 전각을 사용함으로 예술작품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희가 중국에서 금석학을 연구하여 많은 전각 작품을 남겼다. 그이 제자로 오규일을 꼽고 있으나 남아 있는 작품은 아주 드물다. 19세기 후반에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김태석에게 전해져서 전각의 명맥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각은 단순히 장인이 글자를 새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전을 주로 사용함으로 문자학에 조예가 깊어야 한다.

서각과 전각은 새긴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전통 서각과 전통 전각에는 차이가 있다. 서각은 주로 나무에 새긴다. 나무는 재질이 부드러워서 칼의 묘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를 드러낸다. 전각은 주로 돌에 새기므로 재질이 깨어지기 쉽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 전각은 인주에 묻혀서 종이에 찍어야만이 글자가 바르게 나타난다.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는 인주도 한몫을 한다 서각은 새기기만 하면 되지만 전각은 돌의 깨어짐(라고 한다.)도 관여한다.

과거에는 서예나 그림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대에는 독립된 장르가 되어 있다. 공모전에서도 독립된 장르로 참여하고 있다. 전통 전각으로는 크기가 작으므로 표현에도 제한을 받고 있고, 관람자의 시선을 끌기에도 역부족이라고 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오세창은 김정희로부터 이어오는 전각의 맥을 현대로 이어주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또 한 사람은 김태식이다. 이들의 제자들이 한국 전각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오세창에게 직접 전각을 배운 사람으로는 이기우가 있다. 이기우는 전각은 서예가 기초이므로 반드시 서예를 공부하고 나서 전각을 하라고 강조하였다. 김태식은 중국에서 전각을 배워서 국민당 정부시절에 명성을 얻었다. 국민당 정부의 옥새도 그의 작품이다. 귀국 후에는 제자를 양성함으로 그도 역시 한국 전각의 맥을 이어주었다. 전각은 전서가 기본이고, 해서와 예서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전각을 하려면 서예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독립된 전각가는 거의 없다. 오세창처럼 서예가로 알려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네모꼴의 좁은 면적에 글자를 넣어야 함으로 문자의 형태에 변화를 많이 주었다. 이로서 조형미를 나타내므로 예술의 장르로 진입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예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서예의 한 장르로 독립하였다. 이기우는 오세창에게 전각을 배운 이외에도 이한복의 지도를 받았고,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함으로 현대적 포치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기우의 제자인 김양동, 황창배의 작품이 회화성을 띄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태식의 제자로는 김재인, 고봉주, 정기호가 있다. 고봉주(1906-1991)는 일본에서도 전각 공부를 하였으므로 섬여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을 지니므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정기호는 중국의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종의 옥새를 만들었다는 황소산에게도 배웠다고 한다. 도제 제도에 의한 장인의 수업을 받았다. 정기호의 제자에는 현대 전각가인 민홍규가 있다.

오창석 풍의 전각을 하는 전각가로서는 이한복-이기우-이택익 계열이 있다. 정문경은 제백석 풍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정문경의 제자에 정병례가 있다.

1974년에 김영기(화가)와 이가원(한문학자)이 주동이 되어서 한국전각협회를 만들었다. 회원은 21명이었으나 대부분이 서예가이었고, 전문 전각가는 거의 없었다. 1974년에 제 1회 전각협회전을 개최하여 1978년까지 5회를 열었다. 1978년에는 한국전각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은 아주 미미하였다. 1990년까지는 협회전도 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7년에 미술대전의 공모전에 전각부를 신설하였다. 동아미술제에서도 한국의 전통미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처음ㅇ부터 전각부를 두었다.

1992년에는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한,,3국의 전각 교류전으로서 ‘92서울국제전각전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전각은 활기를 띄지 못하고 있고, 전문 전각인도 거의 없다. 교육도 전통적인 도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기호에게 사사하였다는 민홍규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에 그를 찾아갔을 때는 2년 동안은 온갖 허드레 일로 시간을 보냈다.’ 전각 교육의 실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후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각은 문자를 이용한 디자인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서예의 미래에 하나의 돌파구를 열어주리라고 생각된다. 전통 전각의 틀에서 벗어나서 현대 전각을 추구한 전각가로는 정병례가 있다. 그는 인장포10년 동안 운영하면서 전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정병례는 현대전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전통 전각에서 벗어나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선 사방 3cm 크기의 좁은 면적에서는 표현의 제한이 심하였다. 그 크기에서 벗어났다. 글자 이외의 온갖 조형을 새겨 넣었다. 빨간 인주색 대신에 오방색을 사용하였다. 오방색 이외로는 금니와 은니도 사용하여 회화화 하였다. 전통서각계에서는 곱지 않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현대전각을 하는 사람은 모각을 뛰어 넘으므로 서예에 존속되지 않는 독자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예가 미래에도 예술의 장르에서 존속하기 위해서는 전각의 디자인화를 통하여 시장을 확보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병례의 실험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사경

서예 분야에서 미술의 장르에 아직까지 정식(?)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는 사경이 있다. 사경은 서각보다 훨씬 더 장인의 솜씨를 요구하고 있다.

사경은 불경을 붓으로 필사하는 작업이다. 기본적으로는 서예의 한 영역이다. 신라 시대의 백지묵서(국보196)도 사경이므로 그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사경원, 금자원, 은자원을 두고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사경은 불교 경전을 복사하는 것이므로 임하는 자세에서 서예적 붓글씨와는 차이가 있다.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규범성도 철저히 지켜야 함으로 사경은 해서을 선호한다. 해서체는 기필과 행필, 수필 등에 흐름이 일관되게 순일한 상태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강조하는 서예가들은 사경을 소홀하게 다루었다. 사경은 신앙에 의한 자기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수가 많으므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정신성을 고양시키는 목적도 있다. 그러나 사경도 나름대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사경은 정신성의 발휘가 중요함으로 감성적인 표현은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사경의 미학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고갈되어가는 인간성을 되살리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럼으로 오늘날에 가치를 더해가는 것이 사경이다. 사경은 최근 10여 년 사이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사경은 서예의 한 영역으로 전통 필법의 기법 위에 존재한다. 서사 재료와 도구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서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서예보다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경필 사경과 컴퓨터 사경이 나타남으로 서예가 보이는 경직성을 탈피하고 있다. 현대사경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김경호를 꼽을 수 있다. 고려 사경을 모본으로 스스로 익힌 후에 현대사경을 쓰고 있다. 2000년에 결러리 동국에서 외길 김경호 사경전을 열었다. 그는 사경서체를 연구함으로 사경을 한국 서예의 한 분야로 수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경은 서예와 회화, 그리고 공예를 활용하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지녔지만 기본은 어디까지나 서예이다. 먹물 대신에 금니와 은니도 많이 사용함으로 서예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사경의 표지나 변상도까지도 그리므로 회화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김경호는 제자를 양성함으로 사경 인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20005, 20063, 그리고 20076월에 사경 개인전을 열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동시에 일반인에게 사경을 알리고, 보급하는데 큰 일을 수행하고 있다. ‘ 월간 서예문화지의 공모전에서는 사경을 하나의 장르로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로서 사경은 점차 서예의 한 분야로 수용되어 감으로 더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사경이 오늘날에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가 사경수행을 통하여 심리치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서예의 영역을 확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사경의 개인전도 요즘은 자주 열리고 있다. 앞으로는 미술대전에서도 사경이 한 부분으로 참여할 날이 올 것이다 2010년에는 사경 전시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므로 서예 근, 현대사에 또 하나의 흐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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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들이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삼도헌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지난 여름에 필자는 서울의 어느 서예전시장에서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그 전시를 관람하던 서예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면서 생각해 본 문제이다. 서예를 지도하는 스승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제자들에게 전시된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가운데 낙관(落款)을 잘 새기지 못했다는 등의 말이 오가면서 낙관이란 용어를 원래의 뜻과는 다른 인장이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른 방문객에게 조용히 낙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역시 손가락으로 전시된 인장(印章)을 가리켰다. 그들은 인장낙관이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낙관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말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뒤 작자가 직접 그 작품에 년월(年月), 성명(姓名), 시구(詩句), 발어(跋語)를 쓰든가 성명(姓名)이나 아호(雅號)를 쓰고 인장을 찍는 전체를 의미한다. 낙관은 제관(題款)이라고도 하는데 서예작품 전체의 중요한 유기적 구성성분이다. 그것은 전체화면을 안정시키거나 분위기를 돋구기도 하고,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거나 예술적 의경을 조성하여 더욱 풍부한 정취를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서화작품에서 낙관은 전체구도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낙관은 상관(上款)과 하관(下款)으로 나누거나 장관(長款)과 단관(短款)으로 나누기도 한다. 상관은 시()의 명칭이나 작품을 받을 사람의 성과 이름을 기록하고, 하관은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 년월, 글씨를 쓴 장소 등을 기술한다. 특정인에게 작품을 주지 않을 때 일반적으로 상관은 생략하고 하관만 하는데, 이것을 단관(單款)이라고도 한다. 또한 화면의 구도상 여백이 많아서 전체화면을 채우고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해서 본문과 관계있는 문장을 길게 덧붙이고 성명, 아호 등을 적어 글자수가 많아지게 하는 형식을 장관이라고 하고, 이와 반대로 화면 구도상 아호와 성명을 적고 인장을 찍을 공간만 있어서 글자수가 적어지게 하는 형식을 단관이라고 한다. 고대 시기에는 서화작품에 낙관을 하지 않았다. , 원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낙관을 하게되었고, , 청대에 접어들면서 거의 제도화되어 작품제작의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화작품에서 낙관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성의 표시이기도 하고, 후세에 한 작가의 작품이 진적인지 위작인지를 가리는 귀중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낙관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본문보다 낙관글씨는 작아야 한다. 왼쪽 모서리에 본문보다 작으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처리해야 한다. 둘째, 하관을 하는 서체는 본문과 어울려야 한다. 예컨대 전서작품은 행서낙관, 예서작품은 해서나 행서낙관, 해서작품은 해서나 행서낙관, 행서작품은 행서나 초서로 낙관할 수 있다. 행서는 서화작품에서 낙관하기에 가장 무난한 서체이다. 셋째, 낙관에는 작가의 연령이나 신분을 밝히기도 하는데 젊은 사람이 나이를 쓴다든가 ○○거사, ○○도인 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넷째, 윗사람이나 친구 등의 부탁으로 본문을 쓰고 낙관을 할 때는 항렬이나 선후배를 따져서 격에 맞게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쌍관(雙款)한 예를 아래에서 살펴보자.

첫째, 상대를 높이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하면된다. ①○○道兄指正 ○○拜贈(○○도형께서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은 절하면서 선사합니다. (여기서 도형(道兄)은 상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고, 지정(指正)은 남에게 작품을 보낼 때 자신의 작품에 잘못된 곳이 있으니 바로 지적해 달라는 겸손의 의미가 있다.) ②○○先生正之 ○○○題贈(○○선생께서는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는 제()하여 바칩니다. 여기서 正之는 자신의 작품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는 겸사이다.) ③○○女史雅正 ○○○(○○여사께서는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그렸습니다. 여기서 아정(雅正)은 지정(指正)과 같은 의미로 자신의 작품 중에 잘못된 부분을 고쳐달라는 겸사이다.) ④○○吾兄七十壽書()此以祝(○○형의 칩십세 수연(壽筵)에 이를 써서(그려서) 축하합니다.) 辛巳初冬寫()○○○博士(將軍, 社長)敎正 ○○○敬獻(신사년 초겨울에 ○○○박사(장군, 사장)께 그려서(써서) 드리니 잘못된 곳을 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는 삼가 바칩니다.)

둘째, 상대와 신분이 비슷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면된다. 辛巳秋爲○○○○○() (신사년 중추에 ○○을 위하여 제작하였다. ○○○쓰다(그리다). 辛巳晩秋○○仁兄(大雅)之屬 ○○○()(신사년 늦가을에 ○○仁兄(大兄)의 부탁으로 ○○○이 씁니다.<그립니다>. 여기서 인형(仁兄)은 친구끼리 상대편을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고, 대아(大雅)는 평교간(平交間)에서나 문인(文人)에 대하여 존경한다는 뜻으로 상대자의 이름 밑에 쓰는 말이다.) ③○○仁兄大人雅屬卽正 ○○○(○○인형(仁兄)의 부친의 부탁으로 제작하였으니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

셋째, 특별한 신분일 때 혹은 익살스럽게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한다. ①○○法家 指正 ○○○ 敬寫(스님께서는 보시고 바로 고쳐 주십시오. ○○○이 삼가 그렸습니다. (여기서 법가(法家)는 승려를 높여서 한 말이다.) ②○○道友補壁 ○○○塗鴉(도형(道兄)의 벽을 보충하십시오. ○○○이 먹으로 그렸습니다. 여기서 보벽(補壁)은 서화를 벽에 걸어 벽을 채운다는 뜻이니 겸사이면서도 익살스러운 말이고, 도아(塗鴉)는 종이 위에 먹을 새까맣게 칠하였다는 뜻이니 곧 글씨가 서툴다는 겸사이다.)

이와 같이 낙관은 본문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기 위하여 구도나 장법상 전체 화면에 어울리게 하여야 한다. 쌍관이든 단관이든 인장의 날인까지 마쳐서 낙관이 마무리 되면 본문과 어울려 서화작품의 격조를 높이는 열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인장자체를 낙관이라고 하거나 낙관이 삐뚤게 새겨졌다는 말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지도자들은 용어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된다고 본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 전시장에 비치된 도록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서예계에서 인쇄되는 작품집을 보면 그 작품에 대한 정보를 표기할 때 각양각색으로 작가마다 차이가 있다. 이번 기회에 국제적으로 미술품을 표기할 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소개하고 서단의 작품표기가 통일 내지는 표준화되기를 기대하는 바램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다.

서예작품의 표기에서 가장 오류가 많은 것은 작품크기를 알리는 높이(세로)X너비(가로)를 바꾸어서 대부분 너비(가로)X높이(세로)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의 도판에는 그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정해진 순서대로 도판 밑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가로쓰기를 한다. 그 순서는 도판번호영어로는 본문 속에 오는 삽도는 Figure 또는 Fig.로 쓰고 도판은 Plate 또는 Pl.로 한다. 작가명, 작품명(영문의 경우 이탤릭체나 밑줄을 긋고 국문인 경우< >표를 한다), 제작연대. 재료, 크기(높이는 너비보다 먼저 써준다), 소장처(도시를 먼저쓰고 소장처는 다음에 쓴다). 등을 밝히는 설명문을 첨가한다.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판 94. 이황, <書簡>, 1562. 紙本, 28.5X19.5, 서울. 한빛문화재단 소장.

작가가 개인전을 할 경우에도 도록에 이와 같은 표기의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즉 개인전 도록의 경우 작가의 성명은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이 가능하나 그 외의 사항은 순서대로 기록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개인전을 하는 작가는 최소한 <작품명>, 제작연대. 재료, 크기(세로X가로), 등의 순서대로 표기해 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누구든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점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낙관과 작품의 표기에 관한 문제는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중요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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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현과 김응현

 김충현과 김응현은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두 형제은 한국 현대 서예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김충현(호는 一中)은 1921년에 김윤동의 다섯 아들 중에 둘째로 태어났고, 김응현(호는 如初)은 1927년에 넷째로 태어났다. 세도 가문인 선대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4대조는 고종 시대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일제 강점기이었지만 조선시대의 관습대로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조선 후기의 서예 양식을 가학(家學)으로 습득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가 고증학을 바탕에 둔 예서 형식의 추사풍 서체가 유행하였다. 안동 김씨의 가문에서도 추사체를 받아들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의 서체에도 추사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료직에 물러나서 소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선대는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書에 조예가 깊었던 윤용구, 김용진 등과 교류를 함으로 형제들은 윤용구와 김용진의 영향도 받는다. 특히 김용진은 안동 김씨로서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손자이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관리생활을 하면서 후진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안진경체와 한예를 잘 썼고, 서예정법을 강조한 인물이다. 이들 형제가 안진경체와 예서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김용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미전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서예가들은 조선 후기에 사대부 가문에서 보수적인 인물이 대부분이다. 광복 이후에 이들은 서예계의 원로가 되어서 한국 서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1920년 대에 출생함으로 서예계에 나아가게 된 배경이 다르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성장 배경을 보면 사대부 출신의 원로 서예가의 후광이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선배 세대들이 갖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을 버리지 않고, 광복 이후의 서예계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음은 지난 시대와 현대서예에 가교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한다.

 김응현을 조명해보면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의 가문으로서 항일적인 성향을 강하게 띈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 왜정 말기에 휘문 중학을 다닐 때는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일경의 눈을 피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도봉산에 숨어 들어가 보냈다. 이때 안진경체와 구양순체를 법첩에 의하여 철저하게 공부하였다. 이 경험이 그를 서예정법에 매달리게 하였다.

 김충현도 마찬가지이다. 항일 집안에서 자라면서 서예를 가학으로 공부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학교에 입학하여서는 습자 공부를 한 것이 서예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김충현도 김응현과 꼭 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즉, 조선 말에 사대부 가문이 통상적으로 하던 교육 방법에 의하여 한학을 배웠고, 서예는 가학으로 익혔다. 김응현처럼 법첩에 의거하여 중국 전통 서법을 고수하였다.

 김충현은 한글 학자인 정인보 밑에서 공부함으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김충현이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정인보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김충현의 사승 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에 살다(김충현의 글 모음집)에 의하면 소년 시절에 김용진에게 안진경체와 예서체의 체본을 받아서 임서로 익힌 후에 윤용구를 찾아가서 수정과 지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용진은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서 가학으로 전수하는 서예보다는 중국의 전통 서법을, 그것도 당나라 이전의 서법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김충현의 조부는 반대하였지만, 할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김용진을 따랐다고 말하였다. 김충현은 자신의 말대로 김용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광복 이후에 김용진은 서예의 원로로 대우받으면서 국전에 참여하는 등, 한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김용진의 도움으로 국전을 통하여 쉽게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충현은 1932년에 삼흥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를 거쳐서, 광복이 된 1945년에는 경동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는 교사 생활을 계속하면서 겸하여 서예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들 형제가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배경에는 국전이 있다. 김충현은 국전의 초창기에 이미 초대작가가 되었고(55년, 4회), 김응현은 무감사 특선을 하였다.(4회, 28세 때) 그러나 이후에 그들이 걷고 있는 행보를 보면 국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김충현은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두 형제는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국전이나. 서예활동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김충현의 서예관을 보자. 그가 언급한 말들을 정리해보면 그의 서예관을 엿볼 수 있다. 김충현의 서예관이 근, 현대 서예사에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서예론과 서법론의 논쟁에서 그의 서예관이 한 쪽의 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예는 고법을 본 받아야 하고, 고법일지라도 년대가 올라갈수록 글씨에 창의력과 창조력이 돋보이지만 근대로 내려올수록 답습하기에만 여념이 없기 때문에 좋은 서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논리는 그가 서예를 배운 갬용진의 이론을 그대로 베껴오듯이 닮았다. 그의 서예론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이것은 한국 서예계에서 지금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이론이다. 서예를 익히는 방법론에서 특정인의 글씨를 임모하면 속기(俗氣)가 베어들어서 좀처럼 빠지지 않으므로 고대의 법첩을 익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고대의 글자는 임모하여 배우되 현대 서예가의 글자를 임모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배울 때는 옛 법을 익히되 익히고 나서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이 법고창신의 뜻이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조금 다른 뉴앙스를 풍긴다. 당시의 서예계의 현황을 보면 김충현의 지론에는 다분히 서예계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미전 때는 ‘김돈희체’가 조선미전의 출품작에서 유행하였고, 국전 시대에는 ‘소전체’가 유행하였음을 비판하는 말로 느껴진다. 이들이 공모전을 장악하고, 서예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데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전을 장악한 세력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고 서예이론에서 서법론을 주장함으로 서예론자인 이들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근, 현대 서예사에서 조명하는 이유는 바로 서예이론을 두고 벌인 논쟁 때문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이론 논쟁이 아니고 당시의 서예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고, 그 결과가 한국 서예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사승 관계가 중세의 도제제도적 속성을 지녔고, 비평이라고 존재하지 않았던 서예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은 높이 싸주어야 할 것이다.

 법첩을 임모하라는 그의 주장은 단순히 글자의 모양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글자의 듯을 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글자의 의미를 해석해야만이 서예에 작가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보수적인 서예이론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한다. 이 주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글자의 의미보다는 형태에서 미를 구하자는 즉, 조형미에 중점을 두는 서예론자를 겨냥하였음을 다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서예 교육론에서도 ‘법첩이 워낙 많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보편성이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지도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년대가 높은 법첩일수록 좋다. 년대가 낮은 글씨나, 괴이한 글씨는 단지 참고로 그쳐야 한다.(서예. 11월호. 20p. 1973)’라고 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현대의 서예가들이 조형미를 강조하여 자체를 흩뜨려서 씀으로 법첩에 벗어나는 것은 괴이한 글씨가 된다. 그의 언급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조형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그치는 것이 좋다’라는 말에는 절대 부정에서 한 걸음 물러 선 느낌을 주고 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도 전통 서법론으로는 새로운 이론의 미학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의 사조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김응현의 서예론도 그의 형과 같다.

 “여초(如初-김응현의 호)가 본격적으로 서법 수련의 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당 이후의 글씨를 익힌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임창순. 如初碎金(여초의 書 세계). p252. 이화문화사. 1987)”라고 말한 임창순의 말에서 김응현의 서예론을 엿볼 수 있다.

 김응현은 유희강에게도 서예를 배웠다. 유희강은 엄격한 고법주의자이므로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김응현은 법고원속(法古遠俗)을 주장하면서 고전에 법을 두어야 하고, 속된 것은 멀리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속(俗)의 개념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주장을 검토해보면 김충현의 지론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김응현은 누구보다도 김정희를 서예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의 서예론을 펼치면서 김정희를 사례로 든 경우가 아주 많다.

 “완당은 고전 없이 일점일획도 멋대로 한 일이 없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梣溪(침계)라는 두 글자를 예서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溪자는 예서에 있으나 梣자는 예서에 없는 지라 해서로 써 준 일이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완당이 얼마나 법을 지키고 작자(作字)에 세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김응현. 동방문자와 정음의 서법. 서예예술. 동방연서회. 1월호. p36. 1988)”

 이 외에도 김정희의 서예를 인용하여 자신의 서예이론의 근거로 삼는 글을 여러 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한국 서예사에서 그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는 연구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조선 말기의 한국 서예는 서예라는 개념보다는 서법 내지 붓글씨라는 생각이 강하였다. 한문을 공부하면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붓글씨 즉, 오늘의 개념에서는 필사의 개념이 강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여 조형미를 구현한다기 보다는 실용적인 용도로서 ‘달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서체는 송설페가 주종을 이루고, 과거시험을 볼 때 주로 사용하는 글씨체로서 즉 과장체(科場體)를 익혔다. 흔히 서당글이라고 부르는 글자체이었다.

 조선 후기에 김정희가 중국의 고증학을 공부하여 도입함으로 비각의 글씨체를 본 받는 즉, 법첩의 글씨가 유입되었다. 이후에는 필사의 붓글씨가 법첩을 근간으로 삼는 서예가 나타났다. 김응현은 광복 이후의 서예사에서 과장체(서당글)를 배격하고 법첩의 글씨를 받아들인 인물로 자리 매김하고자 한다. 이로서 고대 중국에서 사용하였던 여러 서체를 받아들여서 서예에 법첩을 적용함으로 오늘의 서예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뿐 아니고, ‘동방연서회’라는 사숙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서예를 일반인에게 확산시킨 공로도 인정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움과 창의력, 작가의 개성적인 독창력을 중요시하는 현대 미학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통의 맥을 이어간다는 명분아래에 서예가 너무 보수적으로 흐르게 하여 현대인의 미적 감각을 서예에 수용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이 한국 서예사에 남긴 업적 중의 하나는 동방연서회를 조직하여 민간에서 서예 교육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1958년에 깁용진을 초대 회장으로 하고, 김충현이 간사장을 맡아서 발족하였다. 이후에는 김충현이 회장을 맡아서 단체를 이끌었다. 김응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창립 취지는 “한국 서예계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기사반정(棄邪反正)의 원동력이 되고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김용진-김충현-김응현의 서예론이 동방연서회가 지양하는 서예론이 되었다. 두 번 째는 사(邪)를 버리고 바른 서예를 세운다는 것이다. 손재형 계열의 서예가들이 서예론에서 조형미를 주장하면서 글자의 모양을 괴이하게 바트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다.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중국의 고대 법첩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회도 가졌고, 고서화 감상회도 가지면서 서예에 대한 연구와 탐구도 하였다.

 1969년 5월에 회장을 맡았던 김용진이 작고하자 (그는 연서회에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주었다.) 제 2기의 성격을 띄고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때는 김충현 대신에 아우인 김응현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운영 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동방연서회를 거쳐간 인원이 거의 2000여 명이나 되었지만 조직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였다. 이때의 취지도 서법의 정도를 세운다는 것과 서예 강좌를 활성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응현이 68년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한글 서예에 시비를 건 저변에는 동방연서회라는 민간 조직이 배경으로 존재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서예계에서 국전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음도 주지해야 한다.

 1972년에는 김응현이 동방연서회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서 동방연서회에서 교육하는 서예이론이 김응현의 서예론이 바탕을 이루었다. 이것은 기사반정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 서예계의 중심 세력에 도전이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동방연서회는 1973년에 ‘書通’지를 발간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서예 교육을 펼쳤다. 이로서 70년 대의 동방연서회는 개인의 사숙 단계를 벗어나서 사회 교육을 하는 단체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것은 서예인구가 70년 대에 들어서서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 교육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었음을 뜻한다.

 1972년에 신문회관에서 가진 세미나에서 김응현이 발표한 요지의 글은 동방연서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준다. 동방연서회를 이해하는 것은 70년 대의 한국 서예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전의 서예부는 보통 80-90 점의 작품이 진열되는 데 대체로 4-5 종의 부류로 나뉘어져 형식이나 수법이 동일한 바 서체의 질은 따질 것 없이 천편일률적인 괴이한 형상이 오히려 통상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타락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단체전이란 명색의 전시는 더욱 단조로운 일인지(一人枝)에 거치는 폐단을 드러 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단지 국전을 바라보는 김응현의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70년 대에 서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개인 사숙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많아졌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70년 대의 서예계는 개인의 서숙이 (서예학원 또는 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시대적 특징을 지닌다. 덩달아서 서숙기관은 생계수단으로 삼는 전문적인 서예인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지에 그치는 폐단’이라는 지적은 그와 같은 시대 사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김충현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를 돌아보자. 196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로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은 전문 서예인으로도 살아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뜻한다. 60년 대인 이때는 김충현같은 서예의 대가들은 서숙을 열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서예가들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이었다. 김응현과 동방연서회를 이끌면서 서예 강좌를 개설하고, 서예 교육 교본을 출판하는 등 생활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1965년에 한일 협정으로 일본의 서책이 밀려오면서 출판사업은 접었다. 1969년에는 동방연서회를 떠나서 인사동에 일중묵연(一中墨緣)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이 사실은 독립하여 서숙을 가질 만큼 사회 여건이 성숙하였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70년 대가 되면서 많은 서예가들이 개인 서숙을 열었다. 그만큼 서예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서예인이 나타났음을 말한다.

 김충현은 처음부터 국전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전의 실권은 손재형이 쥐고 있었으므로 국전에서 자신이 입지를 세울 수가 없었다. 70년 대의 후반에 이르러서 국전을 벗어나서 작가로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국전의 운영의 실세들과 거리를 둔 김응현과는 다르게 김충현을 손재형의 계열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강력히 부인한다. 이런 면에서는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론에서 같은 유파이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김응현도 국전의 심사위원도 함으로 국전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골적으로 손재형 일파에는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72년도 조선일보 기사는 서울에 관인 서예학원이 7개소, 인가 받지 않는 곳이 10개소라고 하였다. 74년도 기사에서는 관인 서예학원이 25개소, 개인지도를 하는 서예학원은 50여 개소라고 하였다. 70년 대에 서예 인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다.

 ‘한국 서예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 상황을 살펴보자.(書通. 창간호. 1973.)

 “요즈음 흔히들 한국 서예가 부흥한다고 말한다. 거리마다 연구소가 난립하고, 서예전이 뒤를 잇고, 필물점이 치부하고 있다. 외적 상황으로는 수긍이 간다. 그런데도 악필른 천하를 횡행하고, 본질을 외면한 잡기가 서예로 행세한다. 이런 사이비 서예가의 난무와 대중의 무지는 상승하여 우리 서예계는 타락하고 있다.”

 70년 대는 한국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대학생의 눈을 통하여 바라 본 서예계의 문제점을 보면 “남성이 적어서 지속적인 발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라고 지적하였다. 생활의 여유를 가진 주부층이 서예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광수는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교양주의 문화’라고 하였다. 광복 이후에 여성에게 개방된 교육 기회는 많은 고학력 여성을 배출하였다. 60년 대부터 전개된 산아제한 운동은 저자년 출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여 가정주부를 육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경제적인 여유는 주부 계층의 인구가 문화를 향수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이들은 방송국, 박물관, 도서관, 심지어는 백화점에서까지 문화교실을 열었다. 서예는 인기있는 과목이었다.

  이런 이유로 70년 대에는 많은 서예학원이 생겨났고, 이들이 서예전을 열었다. 이런 이유로 서예 전시회가 많아진 반면에 질은 낮아졌다는 지적은 맞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계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이들에게 질이 높은 서예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마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리즘의 문화 향수층이라는 것이다. ‘교양주의’로서 만족한다는 것이다. 서통지에서 지적한 문제점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대학생의 지적은 국전의 비리에 관한 지적과, 근본이 없는 서법이 횡행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문화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그릇에 담긴 물처럼 사회의 배경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형태를 만들려고 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조명해봄으로 70년 대로 접어드는 시대의 서예사를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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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백 번을 쓰면 조금보이고
천 번을 쓰면 남을 가르칠만하며
만 번을 쓰면 명필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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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인 문구

 

歸陽귀양: 봄이 돌아오고 있다

發陽발양: 양기가 발생 한다

馥舒복서: 덕을 베푼다

增綠증록: 푸른빛을 더하여 준다

補神보신: 정신을 도와 준다

凜嚴름엄:추위에도 름름하다

賞雪상설: 눈을 구경한다 즉 평화로운 마음

迎律영률: 장의 音聲음성(소리)을 듣느다

種德종덕: 덕행을 남 모르게 하는것

廣敬관경: 恭敬공경을 널리한다

寶儉보검: 검소한 것이 보배란 뜻

處和처화: 평화로운 곳에 산다

守德수덕: 덕을 지키는 일

淸心청심: 마음을 맑게 한다

寬和관화: 너그럽고 온화하다

曲卽全 : 굽은 것이 완전한 것이다

吉祥 : 좋고 상서로움

德化: 덕이 조화를 이루다

樂道 : 도를 즐기다

明德 : 덕을 밝히다

明善 : 선을 밝히다

聞道 : 도에 대해 듣는다

守拙 : 졸박함을 지키다

守中 : 중용을 지키다

守眞 : 진실을 지키다

時雨 : 때에 맞게 내리는 비

愼德 : 덕을 삼가 하다

愼獨 : 몸가짐을 삼가다

安禪 : 명상에 안주하다

養神 : 정신을 기르다

仁義 : 어질고 의로움

仁者壽 : 어진이가 장수한다.

日日新 : 나날이 새롭다

入德 : 덕을 세우다

張樂 : 항상 즐겁다

作善: 착한 일을 하다

中和: 알맞게 조화됨

中卽正 : 알맞으면 바로 선다

行義 : 옳은 일을 행하다

玄天 : 오묘한 자연의 조화

好善 : 착한 일을 좋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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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모음 (교육자료) **

 

1.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 태평어람

 

2. 행복이란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다.

 

3.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4.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5. 말을 많이 하는 것과 말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6.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주느니라. [공자:명심보감]

 

7.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몽테뉴]

 

8. 백 권의 책에 쓰인 말보다, 한 가지 성실한 마음이 더 크게 사람을 움직인다. [프랭클린]

 

9.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10. 건강을 이기는 미(美)는 없다.

 

11. 프로에게서 자기 수련과 극기심을 배워라 [카우틸랴]

 

12. 겉으로 보기에 무척 연약해 보이는 모든 것이 바로 힘이다. [파스칼]

 

13.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괴테]

 

14. 힘으로서 사람을 복종시키지 말고 덕으로서 사람을 복종시켜라, [맹자]

 

15. 힘으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나 불운이다. [펄벅]

 

16.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생각은 에너지인 것이다. [엔드류메터스]

 

17. 자비·검약·겸허를 몸가짐의 삼보(三寶)로 하라. [노자]

 

18. 타인에 대한 존경은 처세법의 제일 조건이다. [아미엘]

 

19. 공포로 인해 타협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케네디]

 

20.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걸음 더 진보한다.

 

[뉴턴]

 

2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얻는 행동이 최선이다. [허치슨]

 

22. 햇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는 법이다. [벨]

 

23. 웃지 않는 노인은 바보다

 

24.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지 말고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켜라. [맹자]

 

25. 기다림만으로 사는 사람은 굶어서 죽는다. [이탈리아속담]

 

2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 [성경]

 

27. 끝을 맺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가 없다. [노자]

 

28. 한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사랑이다. [찰리 채플린]

 

29. 좋은 희망을 품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루터]

 

30. 오늘이라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단테]

 

31. 남자는 야생동물이면 여자는 이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자이다. - 폴리스 바이언

 

32. 남자는 언제나 여인의 첫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낭만이

 

되려고 한다. - ?

 

33. 남자란, 말하며 접근할 때는 봄이지만 결혼해 버리면 겨울이다. - 셰익스피어

 

34. 죄는 미워하고, 죄수는 사랑하라. - Mohandas k. Gandhi

 

35. 나는 한 가지 책임만 아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 Albert Camus (프랑스작가)

 

36. 사랑의 고통은 다른 어떠한 즐거움보다 달콤하다. John Dryden (영국의 시인,극작가)

 

37. 사랑은 여자의 섬세함을 줄이고, 남자의 섬세함을 늘인다. - 장 파울(리히터) <티탄>

 

38. 사랑하면서 바보가 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면서 현명해 질 수 없다.

 

- T. 라이크 <사랑과 육욕>

 

39. 사랑은,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문학을 가르친다. 에우리피데스 <스테네비우스>

 

40. 사랑은 나이들어 생기 없는 사람들을 젊게 만들며, 젊음을 찾는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젊게 만든다. - W. 카트라이트 <클로우에게>

 

41. 사랑은 사람들을 재주꾼으로 만든다. - 몰리에르 <남편 수업>

 

42. 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다만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사는 것을 겁낸다. [하운드]

 

43. 만약 제군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나가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보라. [프랭클린]

 

44.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는 날이다. [샹포르]

 

45.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탈무드]

 

46. 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인생을 만들라. 인생은 짧고 곧 지나간다. [오울디즈]

 

47. 열의없이 성취된 위업이란 아직 하나도 없다. [애머슨]

 

48. 버들가지는 약하나 다른 재목을 묶는다. [하버트]

 

49. 오늘 달걀을 한 개 갖는 것보다 내일 암탉을 한 마리 갖는 편이 낫다. [토머스 플러]

 

50. 왕은 배, 민중은 물이다. 물은 큰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 [순자]

 

51. 우선 자연을 따르라. 그리고 나서 자연을 정복하라. [베이컨]

 

52. 타인의 결점은 우리들의 눈앞에 있고 자신의 결점은 우리의 등 뒤에 있다.

 

53. 태만은 천천히 움직이므로 가난이 곧 따라잡는다. [프랭클린]

 

54. 작은 도끼라도 찍고 찍으면 큰 참나무는 넘어진다. [세익스피어]

 

55. 절제는 모든 미덕의 진주고리를 이어주는 비단의 실이다. [홀]

 

56.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나폴레옹]

 

57. 일이 재미있으면 인생은 낙원이다. 일이 의무라면 인생은 지옥이다. [고리끼]

 

58. 금전은 비료와 같은 것으로 뿌리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베이컨]

 

59.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니체]

 

60. 내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과거는 쫓아버려라. [오슬러]

 

61.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떻게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는가 이다. [앤드류 매튜스]

 

62. 독수리는 마지막 성공을 거둘 때까지 온 생명을 바쳐 노력한다. [여안교]

 

63. 어쨌든 노력을 계속 하시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과

 

용기가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다란벨]

 

64.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나폴레옹]

 

65. 명성을 구하여 달리는 자는 명성에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명성에서 도망쳐 달리는 자 는, 명성에 붙잡힌다. [탈무드 ]

 

66. 목표란 우리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앤드류 매튜스]

 

67.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날 그날이 일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에머슨]

 

68. 햇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는 법이다. [벨]

 

69. 안심하면서 먹는 한 조각 빵이 근심하면서 먹는 잔치보다 낫다. [이솝]

 

70. 마음의 통일(일심, 一心)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원효]

 

71. 행운은 자주 문을 두드리나 미련한 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덴마크속담]

 

72. 술이 만든 친구는 그 술처럼 하룻밤 뿐이다. [독일 속담]

 

73. 선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다.[보봐르]

 

74. 살아가는 기술이란 하나의 공격 목표를 골라 그곳에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앙드레 모로아]

 

75.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 [호이토 맨]

 

76. 사랑이란 늙는다는 것을 모른다.[스땅달]

 

77. 바다의 물이 마르면 나중에는 밑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도 마음은 알지 못한다.

 

[명심보감]

 

78.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79. 인생에 있어서 많은 고통을 면하는 최상의 방법은 자기의 이익을 아주 적게 생각하는

 

일이다. [쥬베르]

 

80. 한때의 분한 감정일랑 참으라. 그러면 백일의 근심을 모면할 것이다. [경함록]

 

81.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 [코르네이유]

 

82. 게으름은 쇠붙이의 녹과 같다. 노동보다도 더 심신을 소모시킨다. [프랭클린]

 

83. 기회는 새와 같은 것, 날아가기 전에 꼭 잡아라. [스마일즈]

 

84.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 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폴레옹]

 

85. 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 [파스칼]

 

86. 한 번 실수하는 것보다 두 번 묻는 것이 더 낫다. [독일속담]

 

87.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 [주베르]

 

88.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다. [필페이]

 

89.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 많은 기쁨을 즐길 수 있다. [알렉산더 듀마]

 

90. 네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라. 그러면 최선의 것이 돌아오리라.[M.A. 베 레]

 

91.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날 그날이 일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에머슨]

 

92. 얇은 얼음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 우리의 안전은 속도에 있다.[애머슨]

 

93.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겸손은 죽어 있는 것이다. [에센바흐]

 

94. 인간이란 미소와 눈물 사이를 왕래하는 시계추와 같은 것이다. [바이런]

 

95.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96. 위대한 것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니체]

 

97. 진리는 적이건 아군이건 모두 초월한다. [쉴러]

 

98. 가난은 많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뿌리는 무식입니다. [존슨]

 

99. 일을 쫓아라. 일에 쫓기지 말라. [프랭클린]

 

100. 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인생을 만들라. 인생은 짧고 곧 지나간다. [오울디즈]

 

101. 행동에 부주의하지 말며,말에 혼동되지 말며, 생각에 방황하지 말라.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

 

102.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파스퇴르]

 

103. 용기가, 그것이 만약 정당한 것이라면 모든 것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베에토벤]

 

104. 사랑은 신뢰의 행위다.믿으니까 믿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로망롤랑]

 

105. 위대함에는 신비성이 필요하다. 너무 알면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드골]

 

106. 요구받기 전에 먼저 충고하지 말라. [에라스무스]

 

107. 커다란 비결은 결코 낡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생을 끝까지 사는 것이다. [시바이쩌]

 

108.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빅토르 위고]

 

109. 행복한 결혼이란 죽을 때까지 따분하지 않은 대화의 연속을 말하는 것이다. [앙드레 모루아]

 

110. 거짓말에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나라에 거짓말이 넘쳐나고 있다. [독일 속담]

 

111. 친절한 말은 봄볕과 같이 따사롭다. [러시아속담]

 

112. 좀 모자라는 사람은 말이 적은 바보일지 모르지만, 말 많은 바보보다는 낫다.[라 브뤼 에르]

 

113. 처음 시작은 가장 용기 있는 자 만이 할 수 있다.[노르웨이 속담]

 

114. 계단을 밟아야 계단 위에 올라설 수 있다.[터키속담]

 

115.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앙드레 말로]

 

116. 좋은 성과를 얻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차고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

 

117.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운동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에디슨]

 

118. 세계와 나의 어머니를 저울질 한다면 세계 쪽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랑구랄]

 

119.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는 자존심까지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C.힐티]

 

120. 병의 덕택으로 건강장수에의 길이 열린다.[불교]

 

121.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인간이 된다. [힌두교 경전]

 

122.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 정 스님]

 

123. 인생이란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게임이다.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

 

124. 부자로 죽기 위해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미친 짓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베날리]

 

125. 큰 부자에게는 아들은 없다. 다만 상속인만이 있을 따름이다.[유태 격언]

 

126.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다.

 

[루소]

 

127. 사랑은 달콤하다. 그러나 빵이 수반할 경우에만 그렇다. [유태격언]

 

128. 사랑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다. [헤르만 헤세]

 

129. 그대로 인하여 세계를 잃는 일이 있어도 세계를 위하여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바이런]

 

130.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적으면 그만큼 더 떠든다. [몽테스키]

 

131. 많이 팔려면 먼저 많이 사 보라. [문용은]

 

132. 몸가짐은 각자가 자기의 모습을 비치는 거울이다. [괴테]

 

133. 가장 곤란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알랭]

 

134. 남의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엘마 윌러]

 

135.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샘솟는다. [에머슨]

 

136. 생활은 습관이 짜낸 천에 불과하다. [아미엘]

 

137. 행복은 습관이다. 그것을 몸에 지니라. [허버트]

 

138.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네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콩도르세]

 

139. 돈은 거름과 같아서 뿌리지 않으면 썩기 쉽다. [베이컨]

 

140. 의욕적인 목표가 인생을 즐겁게 한다. [로버트 슐러]

 

141. 부모의 좋은 습관보다 더 좋은 어린이 교육은 없다. [슈와프]

 

142. 금전, 쾌락 혹은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에픽테토스]

 

143.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 [파스칼]

 

144. 대문자만으로 인쇄된 책은 읽기 힘들다. 일요일밖에 없는 인생도 그것과 찬가지이다. [장 파울]

 

145. 일은 쉬면서 인생은 여유있게 보내라. [장 파울]

 

146. 끝까지 하면 프로다. [김창완]

 

147. 5% 지시, 95% 확인. [허명회]

 

148. 지식이 비즈니스다. [피터 드락커]

 

149. 넓게 배우고, 의문이 있으면 곧 묻고, 삼가 이를 깊이 생각하라. [중용]

 

150. 학문 없는 경험은 경험 없는 학문보다 낫다. [서양격언]

 

151. 성공하는 사람은 송곳처럼 어느 한 점을 향하여 일한다. [보비]

 

152. 책 속에 고래등과 같은 기와집이 숨어 있다. [진종황제]

 

153.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말의 근본이다. [순자]

 

154.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지니고 있다. [E.리스]

 

155.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156. 악은 바늘처럼 들어와 참나무처럼 퍼진다. [이디오피아 속담]

 

157. 너무 고르는 자가 가장 나쁜 것을 갖는다. [영국속담]

 

158.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

 

159. 사업이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면 오래 가지 못한다. [오쿠라 기하치 로]

 

160.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161.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수치다.[소크 라테스]

 

162. 들이마신 숨은 언젠가는 뱉어야 한다. 돈, 명예, 권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윤태익]

 

163.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이너스 폴 링]

 

164. 병의 덕택으로 건강장수에의 길이 열린다. [불교]

 

165. 일곱 번의 70배까지 용서하라.[그리스도]

 

166. 무거운 돈지갑을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스라엘 속담]

 

167.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마하트마 간디]

 

168. 승자는 문제 속에 뛰어든다. 패자는 문제의 변두리에서만 맴돈다. [빅토르 위고]

 

169 . 불가능은 소심한 자의 환상이요 비겁한 사람의 도피처이다. [나폴레옹]

 

170.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절반은 독자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볼테르]

 

171. 행복은 지배하여야 하고 불행은 극복해야 한다. [러시아 속담]

 

172.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삶이란 결코 불가능하다. [알베르 까뮈]

 

173.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더한 위험이 찾아온다. [에리카 종]

 

174. 중용(中庸)도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된다.[아서 캐슬러]

 

175. 즐거움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 [마저리 샤프]

 

176. 오늘 죽을 것처럼 행동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간디]

 

177. 모르는 것보다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마크 트웨인]

 

178. 장사를 하려면 가장 먼저 체면과 자존심부터 버려라.[김찬경]

 

179.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카렐루]

 

180. 무례함은 강한 체 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다. [에릭 호퍼]

 

181.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 조각조각 떨어뜨려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 [크리슈나무르티]

 

182.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절망할 자격도 없다. [버나드 쇼]

 

183. 용기는 악운을 깨뜨린다. [세르반테스]

 

184.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알랭]

 

185.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 자는 때로는 자신을 멸망시킨다. [토마스 칼라일]

 

186. 우선순위를 세밀하게 정할수록 긴급한 일이 줄어든다. [지노 시아베랄라]

 

187. 대충대충 하려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 [성신제]

 

188.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데일카네기]

 

189. 이긴다고 생각하면 이긴다. 승리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의 편이다.[가토 마사오]

 

190. 가난하되 만족하면 더할 나위 없는 부자다. [셰익스피어]

 

191. 주먹을 꽉 쥔 손과는 악수를 할 수 없다. [인디라 간디]

 

192. 말하지 않은 좋은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켄 블랜차드]

 

193. 마음이 좁은 자는 생각이 극단에 흐른다.[달라이라마]

 

194. 일곱 번의 70배까지 용서하라. [예수 그리스도]

 

195. 위대한 사람은 목적을, 소인들은 공상을 가지고 있다. [와싱턴 어빙]

 

196. 성공의 비밀은 목표의 지속성에 있다. [벤저민 디즈라엘리]

 

197. 사는 게 지겹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레오 부스카글리아]

 

198. 날마다 하던 방식대로 하고 있다면 그건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찰스 케터링]

 

199. 인생은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요나스 서크]

 

200. 용서처럼 완전한 복수는 없다. [조쉬 빌링스]

 

201.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니체]

 

202. 존경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피히테]

 

203. 구름이나 소나기가 없이는 결코 무지개가 서지 않는다. [J.H.빈센트]

 

204. 모든 공포는 믿음의 결핍으로부터 나온다.[간디]

 

205. 의욕만 있다면 할일은 얼마든지 있다.[쿠사카 카민도]

 

206. 움직이는 사람만이 넘어질 수 있다.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207.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끝내 나를 강하게 만들리라.[니체]

 

208.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알랭]

 

209 . 빈둥대는 것과 공허하게 있는 것보다 더 유해한 것은 없다. [마르쉘 휼]

 

210. 오늘을 잡아라! [로빈 일리엄스]

 

211. 삶은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랜마 모세]

 

212. 진정한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마이클 조던]

 

213. 생각을 바꿔라. 그러면 세상을 바꾼다. [스튜어트 B. 존슨]

 

214.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합니다. [케니 로저스]

 

215. 절반은 전체보다 더 크다. [헤시오드]

 

216. 죽고 싶은 생각이 들면 일을 하라. [볼테르]

 

217. 쉽게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빌 게이츠]

 

218. 용기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괴테]

 

219. 고백한 죄의 반은 용서 받은 것이다. [영국속담]

 

220 . 금은 진흙 속에 있어도 금이다 [영국속담]

 

221. 말이 만든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깊고 심하다. [모로코속담]

 

222. 짖는 개를 두려워 말고 짖지 않는 개를 두려워하라. [터키속담]

 

223. 피는 피로써 씻을 수 없다. [페르시아속담]

 

224. 둘이서 동시에 노래할 수는 있으나 동시에 지껄일 수는 없다. [독일속담]

 

225. 쓴맛을 모르는 자는 단맛도 모른다. [독일속담]

 

226. 행복한 사람에게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독일속담]

 

227. 비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술이다. [조나단 스위프트]

 

228. 위험을 알면 위험이 사라진다.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

 

229. 스스로 일해서 얻는 빵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 [S. 스마일즈]

 

230. 아침에 당신을 벌떡 깨울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한다.[빌리 와일더]

 

231. 영원한 해결책은 없다. [프라이스 프리쳇]

 

232.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이러스]

 

233. 현재를 즐겨라. [호라즈]

 

234.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찰스다윈]

 

235. 새로운 요리는 새로운 식욕을 낳는다.[토마스 풀러]

 

236. 역경이 닥치기 전에는 자신의 능력을 모른다.[벤 존슨]

 

237. 지나간 일로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에드먼드 버크]

 

238. 준비하지 않은 자는 기회가 와도 소용 없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239. 행운의 여신은 용기 있는 자를 좋아한다.[버질]

 

240 . 미소만들기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노사카 레이코]

 

241. 인내는 성공의 반이다. 인내는 어떠한 괴로움에도 듣는 명약이다.[플라토우스]

 

242. 타인을 믿기 전에 자신을 믿어라. [쥴리언 롤시]

 

243. 쉽게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빌게이츠]

 

244. 행복을 찾는 일은 불행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에릭 호퍼]

 

245. 사랑은 일종의 전쟁이다.[오비드]

 

246. 용기가 없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괴테]

 

247. 고백한 죄의 반은 용서받은 것이다. [영국속담]

 

248. 금은 진흙 속에 있어도 금이다. [영국속담]

 

249. 기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약은 감탄하는 것이다. [탈무드]

 

250. 진정한 영업은 '고객구매'후 시작된다.[질 그리핀]

 

251. 여행은 정말 남는 장사이다.[한비야]

 

252.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카렐루]

 

253. 무례함은 강한 체 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다. [에릭 호퍼]

 

254. 진리를 보기 원하는 자, 조각조각 떨어뜨려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크리슈나무르티]

 

255.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절망할 자격도 없다. [버나드 쇼]

 

256. 용기는 악운을 깨뜨린다. [세르반테스]

 

257. 인간은 의욕하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에 의해서만이 행복하다. [알랭]

 

258. 미래는 건강의 유지에 있다. [에드가 라쉔베르거]

 

259. 성공의 비밀은 목표의 지속성에 있다. [벤저민 디즈라엘리]

 

260. 따분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프리드리히 니체]

 

261. 내가 부자인 것은 소유한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J. 브라서튼]

 

262. 날마다 하던 방식대로 하고 있다면 그건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찰스 케터링]

 

263. 인생은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고쳐나가는 과정이다. [요나스 서크]

 

264. 성공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65. 가정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다. [버지니아 사티어]

 

266. 구름이나 소나기가 없이는 결코 무지개가 서지 않는다. [J.H. 빈센트]

 

267. 독립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시작하지 말라. [쿠사카 키민도]

 

268. 관리를 적게 할수록 경영성과가 높아진다..[잭 웰치]

 

269. 모든 공포는 믿음의 결핍으로부터 나온다.[간디]

 

270. 지나간 일로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에드먼드 버크]

 

271. 미소 만들기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티켓)의 출발점이다. [노사카 레이코]

 

272. 시작하라. 그 자체가 천재성이고 힘이며 마력이다. [괴테]

 

273. 사람은 목표를 잃었을 때 죽어간다. [빅터 프랭클]

 

274. 새벽녘의 계획이 하루 일을 결정한다 [손자병법]

 

275. 지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이윤이 높다. [프랭클린]

 

276.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잠깐 쉬어가는 일입니다. [제리 길리아스]

 

277. 성서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이다. [파스칼]

 

278. 행복지수는 비교 지수와 반비례한다. [금오 김홍경]

 

279. 생각만으로는 일이 실현되지 않는다. [워너메이커]

 

280. 실행 불가능한 일이 실행 가능한 일을 방해하도록 하지 말라.[존 우든]

 

281. 위대한 발상은 책장에서 오래 썩지 않는다. [존 M. 섀너핸]

 

282. 미래는 자신들의 꿈이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283. 작게 시작하라! 그것이 가장 빨리 성공하는 길이다.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

 

284. 독서는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선물이다.[세프라 코브린 피첼]

 

285. 한계까지 가보면 분명해진다. [니콜라스 펀]

 

286. 진리는 전혀 순수하지 않고 절대 간단하지도 않다. [오스카 와일드]

 

287. 인생은 위대한 선물이다.[존 러복]

 

288. 지식은 나눌 수 있지만 지혜는 나눌 수 없다.[헤르만 헤세]

 

289. 소심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적다. [실러]

 

290. 성공은 세 번 실망한 후에 찾아온다. [코르넬리아 토프]

 

291.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셰익스피어]

 

292. 운명은 용감한 자를 사랑한다.[버질]

 

293. 부귀영화는 언제든지 아낌없이 보낼 각오를 하고 있으라. [아우렐리우스]

 

294. 기회가 오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스마일즈]

 

295. 별은 캄캄한 밤에만 볼 수 있습니다. [에머슨]

 

296. 천년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시오. [아우렐리우스]

 

297.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진실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N. 부알로]

 

298.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능력일지라도 기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나폴레옹]

 

299.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지 제공받는 것이 아니다.[블랙]

 

300.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셰익스피어]

 

301. 부귀영화는 언제든지 아낌없이 보낼 각오를 하고 있으라. [아우렐리우스]

 

302. 기회가 오지 않을 때에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스마일즈]

 

303. 마음 편안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 [프랑스속담]

 

304. 무지할수록 독단적이다. [윌리엄 오슬러]

 

305. 가장 유능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는 사람이다.[괴테]

 

306.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로버트 슐러]

 

307. 작은 실수가 오랜 공을 무너뜨린다. [토마스 풀러]

 

308. 해답은 알지만 부정하고 싶을 때 우리는 조언을 구한다.[에리카 정]

 

309 . 우리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 [조지 러셀]

 

310. 사람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이다.[솔로몬]

 

311. 마음에 품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힐]

 

312. 무언가 자꾸 반복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그것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313. 폭력은 무능한 자의 마지막 위안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314. 상상력은 우리가 날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연입니다.[로렌 바콜]

 

315. 지식은 힘이라기보다는 그 이상이다. [S. 존슨]

 

316. 진실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진실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N. 부알로]

 

317.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능력일지라도 기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나폴레옹]

 

318.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셰익스피어]

 

319. 운명은 용감한 자를 사랑한다.[버질]

 

320. 용감한 사람은 자기 운명을 창조해 간다.[세르반테스]

 

321. 사랑은 그 종류가 하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가 넘는 다. [그라시안]

 

322. 꿈을 품어라.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인형과 같다. [그라시안]

 

323.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헤겔]

 

324.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마이크 머독]

 

325.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은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은 구실을 찾아 낸다. [아라비아 속담]

 

326. 사랑은 삶의 최대 청량제이자, 강장제이다. [피카소]

 

327.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촛불이 되거나 또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이디스 워튼]

 

328.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노력하는가가 문제이다. [쿠베르텐]

 

329 .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 [윌슨]

 

330. 주장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먼저 그것을 실천한 뒤에 주장하라. [공자]

 

331. 무언가 자꾸 반복하다 보면 우리 자신이 그것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332.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고 사람은 그 일로 평가된다. [탈무드]

 

333.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국속담]

 

334. 강물을 보고 고기를 탐내기보다는 집에 돌아가 그물을 엮어라. [회남자]

 

335.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다. [루소]

 

336. 충분히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되 일단 계획을 세웠거든 꿋꿋이 나가야 한다.[레오나르 도 다빈치]

 

337.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앤드류 랑그]

 

338. 사랑의 치료법은 더욱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다. [H.D.도로우]

 

339. 사랑하며 가난한 것이 애정 없는 부유함보다 훨씬 낫다. [L.모리스]

 

340. 사랑은 일에 굴복한다. 만일 사랑으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원한다면 바쁘게 되라.

 

그러면 안전할 것이다. [오비디우스]

 

341.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 후라이가 된다. [고인 수]

 

342.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오드리 햅번]

 

343.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오드리 햅번]

 

344.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오드리 햅번]

 

345. 사교의 명수는 모욕을 유머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다.[그라시안]

 

346. 사람들은 말하는 내용으로 당신을 판단한다. [그라시안]

 

347. 사랑은 나의 영혼을 누군가에게 던지는 것이다.[그라시안]

 

348. 사랑은 모든 시간을 재구성하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만든다. [그라시안]

 

349. 사랑은 분신을 만드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그라시 안]

 

350. 상대에게 은혜를 베풀면 혀끝의 독도 감사로 변한다.[그라시안]

 

351. 선(善)도 그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그라시안]

 

352.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이다. [그라시안]

 

353.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니체]

 

354.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헤르만 헤세]

 

355. 양심은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내면의 소리다 [헨리 루이스 멘켄]

 

356. 행복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면 그 공장의 주인은 바로 웃음이다.

 

357. 세상이라는 것은 거울이기 때문에 들여다보면 자기가 보인다. [덱커레이]

 

358. 나는 시련의 순간마다 웃음 능력을 보았다. 웃는 순간 모든 슬픔은 희망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봅 호프]

 

359. 게으름은 천천히 움직이므로 가난이 곧 따라잡는다. [플랭클린]

 

360. 일과 오락이 규칙적으로 교대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 생활이 즐거워진다.

 

[톨스토이]

 

361. 아무 것도 시도할 용기를 갖지 못한다면 인생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반센트 반 고 흐]

 

362. 사람들이 그들의 궤도에서 벗어나 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까?

 

[세네카]

 

363. 일상생활을 바꾸지 않는 한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마이크 머독]

 

364. 아마추어와 프로 작가의 유일한 차이는 인내심에 있다. [마쓰모토세이츠]

 

365. 회복의 유일한 길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체이즈]

 

366.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랭]

 

367. 가장 행복한 삶은 가장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삶이다. [드와이트]

 

368. 우리는 영혼을 움직이는 침묵이 필요하다 [마더 테레사]

 

369.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 가장 어디에 있고 싶은지 생각하라. [빈스 롬바디]

 

370 . 진실을 말할 때는 그것을 숨길 때만큼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라시안]

 

371. 통찰력 없이 일하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다. [토마스 칼라일]

 

372. 불가능은 소심한 자의 환상이요 비겁한 사람의 도피처이다. [나폴레옹]

 

373. 가르친다는 것은 곧 두 번 이상을 배우는 것이다. [조셉 쥬베르]

 

374. 강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물과 같아야 한다 [노자]

 

375. 안으로 훌륭한 부모가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 없이 능히 성취한 사람은 드물다.[명심 보감]

 

376. 가정은 삶의 보물상자가 되어야 한다. [코르뷔제]

 

377. 가정이란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인생의 커다란 목표이다. [J.G. 홀랜드]

 

378. 행복이란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자라며, 남의 집 정원에서 뽑아지는 것이 아니다.

 

[D.W. 제럴드]

 

379. 감정을 잘 다스렸을 때 비로소 소박한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다. [달랑베르]

 

380 . 수가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

 

381. 항상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노자]

 

382. 가장 귀중한 사랑의 가치는 희생과 헌신이다.[그라시안]

 

383. 가장 귀중한 사랑의 가치는 희생과 헌신이다.[그라시안]

 

384. 굳은 결심은 가장 유용한 지식이다. [나폴레옹]

 

385. 교육의 최고의 성과는 관용이다. [헬렌켈러]

 

386.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헤세]

 

387. 교육은 최대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허버트 스펜서]

 

388. 교육의 목적은 인간성의 조화적 발달에 있다. [페스탈로치]

 

389.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라. [플랭클린]

 

390.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리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하는 인간은 강도 아 닌 조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하다. [톨스토이]

 

391. 고생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계는 발전하고 있다.[톨스토이]

 

392. 건강이 육체와 관련이 있듯 정성과 마음을 다하는 태도는 영혼과 관계가 있다. [톨스 토이]

 

393. 굶주린 사람에게 배고픔의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충고를 대식가(大食家)가 어찌 진지 하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

 

394. 거지의 사랑을 받게 된 사람이야말로 군주중의 군주이다. [칼릴 지브란]

 

395. 감히 도전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지그 지글라]

 

396.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 [주베르]

 

397. 아마추어는 남을 상대로 싸우지만 프로는 자신을 상대로 싸운다. [아놀드 베네트]

 

398. 고난의 한복판에 기회가 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399. 재능은 한계가 있지만, 노력엔 한계가 없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400. 좋은 항아리가 있으면 아낌없이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질지도 모른다! [탈무드]

 

401. 침대 속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본다고 해도 별로 신통한 생각을 얻을 수 없다[F. 카프 카]

 

402. 부자의 큰 행복은 자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라 브뤼에르]

 

403. 분노는 바보들의 가슴속에서만 살아간다.[아인슈타인]

 

404. 병을 앓아본 사람이 아니면 불행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을 갖지 못한다. [앙드레지드]

 

405. 밝은 성격은 어떤 재산보다도 귀하다. [앤드류 카네기]

 

406. 불필요한 것을 사면 필요한 것을 팔게 된다. [B.프랭클린]

 

407. 반생이 지나서야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조지 허버트]

 

408. 제일 많이 바쁜 사람이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다.

 

409.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혓바닥을 억제하지 못한다. [초서]

 

410.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간은 묻지 않았는 데도 말을 해주는 수다쟁이다. [에우 리피데스]

 

411. 확실한 일을 실행할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괴테]

 

412. 희망은 멀리 있는게 아니다. 바로 내 곁에 있다. 나의 일상을 점검하자.[릴케]

 

413. 친절한 마음가짐의 원리, 타인에 대한 존경은 처세법의 제일 조건이다. [마미엘]

 

414. 공포로 인해 타협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케 네디]

 

415.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라. 그러면 내일에는 한걸음 더 진보한다. [뉴턴]

 

416. 만약 제군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으면 나가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보라.[프랭클린]

 

417. 오늘이라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단테]

 

418. 안심하면서 먹는 한 조각 빵이 근심하면서 먹는 잔치보다 낫다.[이솝]

 

419. 열의 없이 성취된 위업이란 아직 하나도 없다. [애머슨]

 

420.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탈무드]

 

421. 햇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는 법이다. [벨]

 

422.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 [성경]

 

423. 재물을 잃은 손실은 적지만 지혜를 잃은 손실은 크다. [증지부경전]

 

424. 마음의 통일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원효]

 

425. 살아가는 기술이란 하나의 공격 목표를 골라 그리로 힘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앙드레 모로아]

 

426. 사랑이란 늙는다는 것을 모른다. [스땅달]

 

427.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 [코르네이유]

 

428.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스콧 니어링]

 

429.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다. 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오스본]

 

430.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 [T.플러]

 

431. 옥도 닦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예기]

 

432. 생각함으로써 생기고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며 교만함으로써 실패한다. [지자]

 

433. 미래를 신뢰하지마라. 죽은 과거를 묻어 버려라. 그리고 살아 있는 현재에 행동해라. [롱펠로우]

 

434. 배가 항구에 있어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다.[괴테]

 

435. 성공은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다.[플로베르]

 

436. 괴로움을 견디려면 죽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폴레옹]

 

437.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그라시안]

 

438. 험한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 처음에는 천천히 걷는 것이 필요하다.[세익스피어]

 

439. 현명한 자는 적으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아리스토파네스]

 

440 . 일곱 번의 70배까지 용서하라. [그리스도]

 

441.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겸손은 죽어 있는 것이다. [에센바흐]

 

442. 집은 책으로,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워라. [앤드류 랑그]

 

443. 문제아 뒤에 문제 부모가 있다.[A.S. 니일]

 

444. 다른 사람의 좋은 습관을 내 습관으로 만든다! [빌 게이츠]

 

445. 무엇보다도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셰익스피어]

 

446.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의리 없는 벗은 사귀지 말라.[명심보감]

 

447.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소포클레스]

 

448. 무지할수록 독단적이다. [윌리엄 오슬러]

 

449 . 가장 소름끼치는 불신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불신이다.[토마스 카라일]

 

450. 회복의 유일한 길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체이즈]

 

451. 목표가 미래의 당신을 결정해 준다. [줄리어스 어빙]

 

452. 바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 바쁜가'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453. 무례함은 강한 체 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다. [에릭 호퍼]

 

454. 꿈이 없다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칼 샌드버그]

 

455.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

 

456. 인생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로버트 브라우닝]

 

457. 일의 성패는 능력보다 신념에 달려 있다. [클라우드 M. 브리스톨]

 

458. 강인한 의지 없이는 뛰어난 재능도 없다. [효뇨레 드 발자크]

 

459. 일의 성패는 능력보다 신념에 달려 있다. [클라우드 M. 브리스톨]

 

460 .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니체]

 

461.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떻게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는가 이다.

 

[앤드류 매튜스]

 

462. 나는 최선을 고를 수가 없다. 최선이 나를 고른다.[타고르]

 

463.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힘이다. 내가 그것을 말할 때, 어떤 사람도

 

비웃지 못하도록 하라.[디오도어 루빈]

 

464. 명성을 구하여 달리는 자는, 명성에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명성에서 도망쳐

 

달리는 자는, 명성에 붙잡힌다.[탈무드]

 

465. 마음의 통일(일심, 一心) 없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원효]

 

466. 햇빛은 하나의 초점에 모아질 때만 불꽃을 피우는 법이다. [벨]

 

467. 행운은 자주 문을 두드리나 미련한 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덴마크속담]

 

468. 오늘을 붙들어라! 되도록 내일에 의지하지 말라!

 

그날 그날이 일년 중에서 최선의 날이다. [에머슨]

 

469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470.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 [호이토 맨]

 

471.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파스퇴르]

 

472. 요구받기 전에 먼저 충고하지 말라. [에라스무스]

 

473. 커다란 비결은 결코 낡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생을 끝까지 사는 것이다. [시바이쩌]

 

474. 처음 시작은 가장 용기 있는 자 만이 할 수 있다. [노르웨이 속담]

 

475. 계단을 밟아야 계단 위에 올라설 수 있다. [터키속담]

 

476. 큰 부자에게는 아들은 없다. 다만 상속인만이 있을 따름이다.[유태 격언]

 

477. 내가 성공한 것은, 어느 때이건 반드시 15분 전에 도착한 덕택이다. [넬슨]

 

478.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에머슨]

 

479. 두려움은 언제나 무지에서 샘솟는다.[에머슨]

 

480. 그대로 인하여 세계를 잃는 일이 있어도 세계를 위하여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바 이런]

 

481. 돈은 거름과 같아서 뿌리지 않으면 썩기 쉽다.[베이컨]

 

482. 대문자만으로 인쇄된 책은 읽기 힘들다. 일요일밖에 없는 인생도 그것과 마찬가지이 다. [장 파울]

 

483.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 [파스칼]

 

484.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셸리]

 

485. 지식이 비즈니스다.[피터 드락커]

 

48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

 

487. 돈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남아도는 것은 그 두 배나 슬픈 일이다. [톨스토 이]

 

488. 일곱 번의 70배까지 용서하라.[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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