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가들이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삼도헌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지난 여름에 필자는 서울의 어느 서예전시장에서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그 전시를 관람하던 서예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면서 생각해 본 문제이다. 서예를 지도하는 스승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제자들에게 전시된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가운데 낙관(落款)을 잘 새기지 못했다는 등의 말이 오가면서 낙관이란 용어를 원래의 뜻과는 다른 인장이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다른 방문객에게 조용히 낙관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역시 손가락으로 전시된 인장(印章)을 가리켰다. 그들은 인장낙관이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낙관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말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뒤 작자가 직접 그 작품에 년월(年月), 성명(姓名), 시구(詩句), 발어(跋語)를 쓰든가 성명(姓名)이나 아호(雅號)를 쓰고 인장을 찍는 전체를 의미한다. 낙관은 제관(題款)이라고도 하는데 서예작품 전체의 중요한 유기적 구성성분이다. 그것은 전체화면을 안정시키거나 분위기를 돋구기도 하고,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거나 예술적 의경을 조성하여 더욱 풍부한 정취를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서화작품에서 낙관은 전체구도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하여야 한다.

낙관은 상관(上款)과 하관(下款)으로 나누거나 장관(長款)과 단관(短款)으로 나누기도 한다. 상관은 시()의 명칭이나 작품을 받을 사람의 성과 이름을 기록하고, 하관은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 년월, 글씨를 쓴 장소 등을 기술한다. 특정인에게 작품을 주지 않을 때 일반적으로 상관은 생략하고 하관만 하는데, 이것을 단관(單款)이라고도 한다. 또한 화면의 구도상 여백이 많아서 전체화면을 채우고 빈자리를 보충하기 위해서 본문과 관계있는 문장을 길게 덧붙이고 성명, 아호 등을 적어 글자수가 많아지게 하는 형식을 장관이라고 하고, 이와 반대로 화면 구도상 아호와 성명을 적고 인장을 찍을 공간만 있어서 글자수가 적어지게 하는 형식을 단관이라고 한다. 고대 시기에는 서화작품에 낙관을 하지 않았다. , 원대를 지나면서 조금씩 낙관을 하게되었고, , 청대에 접어들면서 거의 제도화되어 작품제작의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서화작품에서 낙관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성의 표시이기도 하고, 후세에 한 작가의 작품이 진적인지 위작인지를 가리는 귀중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는 낙관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본문보다 낙관글씨는 작아야 한다. 왼쪽 모서리에 본문보다 작으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처리해야 한다. 둘째, 하관을 하는 서체는 본문과 어울려야 한다. 예컨대 전서작품은 행서낙관, 예서작품은 해서나 행서낙관, 해서작품은 해서나 행서낙관, 행서작품은 행서나 초서로 낙관할 수 있다. 행서는 서화작품에서 낙관하기에 가장 무난한 서체이다. 셋째, 낙관에는 작가의 연령이나 신분을 밝히기도 하는데 젊은 사람이 나이를 쓴다든가 ○○거사, ○○도인 등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넷째, 윗사람이나 친구 등의 부탁으로 본문을 쓰고 낙관을 할 때는 항렬이나 선후배를 따져서 격에 맞게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쌍관(雙款)한 예를 아래에서 살펴보자.

첫째, 상대를 높이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하면된다. ①○○道兄指正 ○○拜贈(○○도형께서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은 절하면서 선사합니다. (여기서 도형(道兄)은 상대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고, 지정(指正)은 남에게 작품을 보낼 때 자신의 작품에 잘못된 곳이 있으니 바로 지적해 달라는 겸손의 의미가 있다.) ②○○先生正之 ○○○題贈(○○선생께서는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는 제()하여 바칩니다. 여기서 正之는 자신의 작품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는 겸사이다.) ③○○女史雅正 ○○○(○○여사께서는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그렸습니다. 여기서 아정(雅正)은 지정(指正)과 같은 의미로 자신의 작품 중에 잘못된 부분을 고쳐달라는 겸사이다.) ④○○吾兄七十壽書()此以祝(○○형의 칩십세 수연(壽筵)에 이를 써서(그려서) 축하합니다.) 辛巳初冬寫()○○○博士(將軍, 社長)敎正 ○○○敬獻(신사년 초겨울에 ○○○박사(장군, 사장)께 그려서(써서) 드리니 잘못된 곳을 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는 삼가 바칩니다.)

둘째, 상대와 신분이 비슷한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면된다. 辛巳秋爲○○○○○() (신사년 중추에 ○○을 위하여 제작하였다. ○○○쓰다(그리다). 辛巳晩秋○○仁兄(大雅)之屬 ○○○()(신사년 늦가을에 ○○仁兄(大兄)의 부탁으로 ○○○이 씁니다.<그립니다>. 여기서 인형(仁兄)은 친구끼리 상대편을 대접하여 부르는 말이고, 대아(大雅)는 평교간(平交間)에서나 문인(文人)에 대하여 존경한다는 뜻으로 상대자의 이름 밑에 쓰는 말이다.) ③○○仁兄大人雅屬卽正 ○○○(○○인형(仁兄)의 부친의 부탁으로 제작하였으니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

셋째, 특별한 신분일 때 혹은 익살스럽게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한다. ①○○法家 指正 ○○○ 敬寫(스님께서는 보시고 바로 고쳐 주십시오. ○○○이 삼가 그렸습니다. (여기서 법가(法家)는 승려를 높여서 한 말이다.) ②○○道友補壁 ○○○塗鴉(도형(道兄)의 벽을 보충하십시오. ○○○이 먹으로 그렸습니다. 여기서 보벽(補壁)은 서화를 벽에 걸어 벽을 채운다는 뜻이니 겸사이면서도 익살스러운 말이고, 도아(塗鴉)는 종이 위에 먹을 새까맣게 칠하였다는 뜻이니 곧 글씨가 서툴다는 겸사이다.)

이와 같이 낙관은 본문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기 위하여 구도나 장법상 전체 화면에 어울리게 하여야 한다. 쌍관이든 단관이든 인장의 날인까지 마쳐서 낙관이 마무리 되면 본문과 어울려 서화작품의 격조를 높이는 열할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인장자체를 낙관이라고 하거나 낙관이 삐뚤게 새겨졌다는 말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지도자들은 용어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된다고 본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 전시장에 비치된 도록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서예계에서 인쇄되는 작품집을 보면 그 작품에 대한 정보를 표기할 때 각양각색으로 작가마다 차이가 있다. 이번 기회에 국제적으로 미술품을 표기할 때 어떻게 하는지에 대하여 소개하고 서단의 작품표기가 통일 내지는 표준화되기를 기대하는 바램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다.

서예작품의 표기에서 가장 오류가 많은 것은 작품크기를 알리는 높이(세로)X너비(가로)를 바꾸어서 대부분 너비(가로)X높이(세로)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작품의 도판에는 그 작품에 관한 정보를 정해진 순서대로 도판 밑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가로쓰기를 한다. 그 순서는 도판번호영어로는 본문 속에 오는 삽도는 Figure 또는 Fig.로 쓰고 도판은 Plate 또는 Pl.로 한다. 작가명, 작품명(영문의 경우 이탤릭체나 밑줄을 긋고 국문인 경우< >표를 한다), 제작연대. 재료, 크기(높이는 너비보다 먼저 써준다), 소장처(도시를 먼저쓰고 소장처는 다음에 쓴다). 등을 밝히는 설명문을 첨가한다.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도판 94. 이황, <書簡>, 1562. 紙本, 28.5X19.5, 서울. 한빛문화재단 소장.

작가가 개인전을 할 경우에도 도록에 이와 같은 표기의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즉 개인전 도록의 경우 작가의 성명은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이 가능하나 그 외의 사항은 순서대로 기록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개인전을 하는 작가는 최소한 <작품명>, 제작연대. 재료, 크기(세로X가로), 등의 순서대로 표기해 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누구든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통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점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낙관과 작품의 표기에 관한 문제는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중요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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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현과 김응현

 김충현과 김응현은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두 형제은 한국 현대 서예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김충현(호는 一中)은 1921년에 김윤동의 다섯 아들 중에 둘째로 태어났고, 김응현(호는 如初)은 1927년에 넷째로 태어났다. 세도 가문인 선대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4대조는 고종 시대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일제 강점기이었지만 조선시대의 관습대로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조선 후기의 서예 양식을 가학(家學)으로 습득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가 고증학을 바탕에 둔 예서 형식의 추사풍 서체가 유행하였다. 안동 김씨의 가문에서도 추사체를 받아들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의 서체에도 추사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료직에 물러나서 소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선대는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書에 조예가 깊었던 윤용구, 김용진 등과 교류를 함으로 형제들은 윤용구와 김용진의 영향도 받는다. 특히 김용진은 안동 김씨로서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손자이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관리생활을 하면서 후진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안진경체와 한예를 잘 썼고, 서예정법을 강조한 인물이다. 이들 형제가 안진경체와 예서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김용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미전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서예가들은 조선 후기에 사대부 가문에서 보수적인 인물이 대부분이다. 광복 이후에 이들은 서예계의 원로가 되어서 한국 서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1920년 대에 출생함으로 서예계에 나아가게 된 배경이 다르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성장 배경을 보면 사대부 출신의 원로 서예가의 후광이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선배 세대들이 갖고 있는 보수적인 성향을 버리지 않고, 광복 이후의 서예계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음은 지난 시대와 현대서예에 가교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한다.

 김응현을 조명해보면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의 가문으로서 항일적인 성향을 강하게 띈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 왜정 말기에 휘문 중학을 다닐 때는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일경의 눈을 피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도봉산에 숨어 들어가 보냈다. 이때 안진경체와 구양순체를 법첩에 의하여 철저하게 공부하였다. 이 경험이 그를 서예정법에 매달리게 하였다.

 김충현도 마찬가지이다. 항일 집안에서 자라면서 서예를 가학으로 공부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학교에 입학하여서는 습자 공부를 한 것이 서예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김충현도 김응현과 꼭 같은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즉, 조선 말에 사대부 가문이 통상적으로 하던 교육 방법에 의하여 한학을 배웠고, 서예는 가학으로 익혔다. 김응현처럼 법첩에 의거하여 중국 전통 서법을 고수하였다.

 김충현은 한글 학자인 정인보 밑에서 공부함으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김충현이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정인보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김충현의 사승 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에 살다(김충현의 글 모음집)에 의하면 소년 시절에 김용진에게 안진경체와 예서체의 체본을 받아서 임서로 익힌 후에 윤용구를 찾아가서 수정과 지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김용진은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서 가학으로 전수하는 서예보다는 중국의 전통 서법을, 그것도 당나라 이전의 서법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김충현의 조부는 반대하였지만, 할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김용진을 따랐다고 말하였다. 김충현은 자신의 말대로 김용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광복 이후에 김용진은 서예의 원로로 대우받으면서 국전에 참여하는 등, 한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은 김용진의 도움으로 국전을 통하여 쉽게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충현은 1932년에 삼흥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중동학교를 거쳐서, 광복이 된 1945년에는 경동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는 교사 생활을 계속하면서 겸하여 서예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들 형제가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배경에는 국전이 있다. 김충현은 국전의 초창기에 이미 초대작가가 되었고(55년, 4회), 김응현은 무감사 특선을 하였다.(4회, 28세 때) 그러나 이후에 그들이 걷고 있는 행보를 보면 국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김충현은 한글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두 형제는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국전이나. 서예활동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김충현의 서예관을 보자. 그가 언급한 말들을 정리해보면 그의 서예관을 엿볼 수 있다. 김충현의 서예관이 근, 현대 서예사에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서예론과 서법론의 논쟁에서 그의 서예관이 한 쪽의 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서예는 고법을 본 받아야 하고, 고법일지라도 년대가 올라갈수록 글씨에 창의력과 창조력이 돋보이지만 근대로 내려올수록 답습하기에만 여념이 없기 때문에 좋은 서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논리는 그가 서예를 배운 갬용진의 이론을 그대로 베껴오듯이 닮았다. 그의 서예론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이것은 한국 서예계에서 지금도 금과옥조로 신봉하는 이론이다. 서예를 익히는 방법론에서 특정인의 글씨를 임모하면 속기(俗氣)가 베어들어서 좀처럼 빠지지 않으므로 고대의 법첩을 익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고대의 글자는 임모하여 배우되 현대 서예가의 글자를 임모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배울 때는 옛 법을 익히되 익히고 나서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라는 것이 법고창신의 뜻이다. 그러나 그의 언급은 조금 다른 뉴앙스를 풍긴다. 당시의 서예계의 현황을 보면 김충현의 지론에는 다분히 서예계에 대한 비판적인 요소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미전 때는 ‘김돈희체’가 조선미전의 출품작에서 유행하였고, 국전 시대에는 ‘소전체’가 유행하였음을 비판하는 말로 느껴진다. 이들이 공모전을 장악하고, 서예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데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전을 장악한 세력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고 서예이론에서 서법론을 주장함으로 서예론자인 이들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근, 현대 서예사에서 조명하는 이유는 바로 서예이론을 두고 벌인 논쟁 때문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이론 논쟁이 아니고 당시의 서예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을 공격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고, 그 결과가 한국 서예사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사승 관계가 중세의 도제제도적 속성을 지녔고, 비평이라고 존재하지 않았던 서예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은 높이 싸주어야 할 것이다.

 법첩을 임모하라는 그의 주장은 단순히 글자의 모양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글자의 듯을 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글자의 의미를 해석해야만이 서예에 작가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보수적인 서예이론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한다. 이 주장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글자의 의미보다는 형태에서 미를 구하자는 즉, 조형미에 중점을 두는 서예론자를 겨냥하였음을 다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서예 교육론에서도 ‘법첩이 워낙 많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보편성이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지도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년대가 높은 법첩일수록 좋다. 년대가 낮은 글씨나, 괴이한 글씨는 단지 참고로 그쳐야 한다.(서예. 11월호. 20p. 1973)’라고 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현대의 서예가들이 조형미를 강조하여 자체를 흩뜨려서 씀으로 법첩에 벗어나는 것은 괴이한 글씨가 된다. 그의 언급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조형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그치는 것이 좋다’라는 말에는 절대 부정에서 한 걸음 물러 선 느낌을 주고 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도 전통 서법론으로는 새로운 이론의 미학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의 사조를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김응현의 서예론도 그의 형과 같다.

 “여초(如初-김응현의 호)가 본격적으로 서법 수련의 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당 이후의 글씨를 익힌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임창순. 如初碎金(여초의 書 세계). p252. 이화문화사. 1987)”라고 말한 임창순의 말에서 김응현의 서예론을 엿볼 수 있다.

 김응현은 유희강에게도 서예를 배웠다. 유희강은 엄격한 고법주의자이므로 그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김응현은 법고원속(法古遠俗)을 주장하면서 고전에 법을 두어야 하고, 속된 것은 멀리 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속(俗)의 개념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주장을 검토해보면 김충현의 지론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김응현은 누구보다도 김정희를 서예의 전범으로 삼았다. 그의 서예론을 펼치면서 김정희를 사례로 든 경우가 아주 많다.

 “완당은 고전 없이 일점일획도 멋대로 한 일이 없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梣溪(침계)라는 두 글자를 예서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溪자는 예서에 있으나 梣자는 예서에 없는 지라 해서로 써 준 일이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완당이 얼마나 법을 지키고 작자(作字)에 세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김응현. 동방문자와 정음의 서법. 서예예술. 동방연서회. 1월호. p36. 1988)”

 이 외에도 김정희의 서예를 인용하여 자신의 서예이론의 근거로 삼는 글을 여러 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한국 서예사에서 그의 위치를 어떻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는 연구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조선 말기의 한국 서예는 서예라는 개념보다는 서법 내지 붓글씨라는 생각이 강하였다. 한문을 공부하면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붓글씨 즉, 오늘의 개념에서는 필사의 개념이 강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여 조형미를 구현한다기 보다는 실용적인 용도로서 ‘달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서체는 송설페가 주종을 이루고, 과거시험을 볼 때 주로 사용하는 글씨체로서 즉 과장체(科場體)를 익혔다. 흔히 서당글이라고 부르는 글자체이었다.

 조선 후기에 김정희가 중국의 고증학을 공부하여 도입함으로 비각의 글씨체를 본 받는 즉, 법첩의 글씨가 유입되었다. 이후에는 필사의 붓글씨가 법첩을 근간으로 삼는 서예가 나타났다. 김응현은 광복 이후의 서예사에서 과장체(서당글)를 배격하고 법첩의 글씨를 받아들인 인물로 자리 매김하고자 한다. 이로서 고대 중국에서 사용하였던 여러 서체를 받아들여서 서예에 법첩을 적용함으로 오늘의 서예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그뿐 아니고, ‘동방연서회’라는 사숙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서예를 일반인에게 확산시킨 공로도 인정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움과 창의력, 작가의 개성적인 독창력을 중요시하는 현대 미학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통의 맥을 이어간다는 명분아래에 서예가 너무 보수적으로 흐르게 하여 현대인의 미적 감각을 서예에 수용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충현과 김응현이 한국 서예사에 남긴 업적 중의 하나는 동방연서회를 조직하여 민간에서 서예 교육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1958년에 깁용진을 초대 회장으로 하고, 김충현이 간사장을 맡아서 발족하였다. 이후에는 김충현이 회장을 맡아서 단체를 이끌었다. 김응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창립 취지는 “한국 서예계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기사반정(棄邪反正)의 원동력이 되고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김용진-김충현-김응현의 서예론이 동방연서회가 지양하는 서예론이 되었다. 두 번 째는 사(邪)를 버리고 바른 서예를 세운다는 것이다. 손재형 계열의 서예가들이 서예론에서 조형미를 주장하면서 글자의 모양을 괴이하게 바트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다.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중국의 고대 법첩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회도 가졌고, 고서화 감상회도 가지면서 서예에 대한 연구와 탐구도 하였다.

 1969년 5월에 회장을 맡았던 김용진이 작고하자 (그는 연서회에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주었다.) 제 2기의 성격을 띄고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때는 김충현 대신에 아우인 김응현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운영 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동방연서회를 거쳐간 인원이 거의 2000여 명이나 되었지만 조직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으므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였다. 이때의 취지도 서법의 정도를 세운다는 것과 서예 강좌를 활성화한다는 것이었다.

 김응현이 68년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한글 서예에 시비를 건 저변에는 동방연서회라는 민간 조직이 배경으로 존재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서예계에서 국전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음도 주지해야 한다.

 1972년에는 김응현이 동방연서회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서 동방연서회에서 교육하는 서예이론이 김응현의 서예론이 바탕을 이루었다. 이것은 기사반정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한국 서예계의 중심 세력에 도전이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동방연서회는 1973년에 ‘書通’지를 발간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서예 교육을 펼쳤다. 이로서 70년 대의 동방연서회는 개인의 사숙 단계를 벗어나서 사회 교육을 하는 단체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것은 서예인구가 70년 대에 들어서서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 교육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었음을 뜻한다.

 1972년에 신문회관에서 가진 세미나에서 김응현이 발표한 요지의 글은 동방연서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준다. 동방연서회를 이해하는 것은 70년 대의 한국 서예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국전의 서예부는 보통 80-90 점의 작품이 진열되는 데 대체로 4-5 종의 부류로 나뉘어져 형식이나 수법이 동일한 바 서체의 질은 따질 것 없이 천편일률적인 괴이한 형상이 오히려 통상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타락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단체전이란 명색의 전시는 더욱 단조로운 일인지(一人枝)에 거치는 폐단을 드러 낸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단지 국전을 바라보는 김응현의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70년 대에 서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개인 사숙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많아졌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70년 대의 서예계는 개인의 서숙이 (서예학원 또는 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시대적 특징을 지닌다. 덩달아서 서숙기관은 생계수단으로 삼는 전문적인 서예인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지에 그치는 폐단’이라는 지적은 그와 같은 시대 사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김충현의 사례를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를 돌아보자. 196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로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은 전문 서예인으로도 살아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뜻한다. 60년 대인 이때는 김충현같은 서예의 대가들은 서숙을 열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일반 서예가들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이었다. 김응현과 동방연서회를 이끌면서 서예 강좌를 개설하고, 서예 교육 교본을 출판하는 등 생활의 방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1965년에 한일 협정으로 일본의 서책이 밀려오면서 출판사업은 접었다. 1969년에는 동방연서회를 떠나서 인사동에 일중묵연(一中墨緣)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이 사실은 독립하여 서숙을 가질 만큼 사회 여건이 성숙하였음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70년 대가 되면서 많은 서예가들이 개인 서숙을 열었다. 그만큼 서예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서예인이 나타났음을 말한다.

 김충현은 처음부터 국전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전의 실권은 손재형이 쥐고 있었으므로 국전에서 자신이 입지를 세울 수가 없었다. 70년 대의 후반에 이르러서 국전을 벗어나서 작가로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국전의 운영의 실세들과 거리를 둔 김응현과는 다르게 김충현을 손재형의 계열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은 강력히 부인한다. 이런 면에서는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론에서 같은 유파이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김응현도 국전의 심사위원도 함으로 국전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골적으로 손재형 일파에는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72년도 조선일보 기사는 서울에 관인 서예학원이 7개소, 인가 받지 않는 곳이 10개소라고 하였다. 74년도 기사에서는 관인 서예학원이 25개소, 개인지도를 하는 서예학원은 50여 개소라고 하였다. 70년 대에 서예 인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다.

 ‘한국 서예의 문제점’이라는 글을 통하여 당시의 서예계 상황을 살펴보자.(書通. 창간호. 1973.)

 “요즈음 흔히들 한국 서예가 부흥한다고 말한다. 거리마다 연구소가 난립하고, 서예전이 뒤를 잇고, 필물점이 치부하고 있다. 외적 상황으로는 수긍이 간다. 그런데도 악필른 천하를 횡행하고, 본질을 외면한 잡기가 서예로 행세한다. 이런 사이비 서예가의 난무와 대중의 무지는 상승하여 우리 서예계는 타락하고 있다.”

 70년 대는 한국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당시에 대학생의 눈을 통하여 바라 본 서예계의 문제점을 보면 “남성이 적어서 지속적인 발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라고 지적하였다. 생활의 여유를 가진 주부층이 서예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광수는 이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교양주의 문화’라고 하였다. 광복 이후에 여성에게 개방된 교육 기회는 많은 고학력 여성을 배출하였다. 60년 대부터 전개된 산아제한 운동은 저자년 출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여 가정주부를 육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경제적인 여유는 주부 계층의 인구가 문화를 향수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이들은 방송국, 박물관, 도서관, 심지어는 백화점에서까지 문화교실을 열었다. 서예는 인기있는 과목이었다.

  이런 이유로 70년 대에는 많은 서예학원이 생겨났고, 이들이 서예전을 열었다. 이런 이유로 서예 전시회가 많아진 반면에 질은 낮아졌다는 지적은 맞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김충현과 김응현은 서예계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이들에게 질이 높은 서예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마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리즘의 문화 향수층이라는 것이다. ‘교양주의’로서 만족한다는 것이다. 서통지에서 지적한 문제점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대학생의 지적은 국전의 비리에 관한 지적과, 근본이 없는 서법이 횡행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문화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그릇에 담긴 물처럼 사회의 배경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형태를 만들려고 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김충현과 김응현을 조명해봄으로 70년 대로 접어드는 시대의 서예사를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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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10대 명루(名樓)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수많은 유명한 누각을 남겼으며 그것은

오늘날 중국문화의 귀중한 보물로 지정되여 보존하고있다. 

 

 1. 귀주 귀양 갑수루(甲秀樓)

갑수루는 명조(1598년)시기에 건립되었으며

오늘날 성급 문물보호단위에 선정되었다.

높이는 약 20m에 달하며 외형이 화려하고 웅위롭다.

누각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보면 산과 강, 대지가 한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안겨온다.

 

 32. 산동 료성 광악루(光岳樓)

 

 주체적 구조는 1374년에 건립된 것으로서 송원~명청 과도기의 대표적인

 

건축이며 중국 현존의 명조 누각중 최대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형식상에서 광악루는 송원 누각의 유제를 답습했고,

 

구조상에서는 당송시기의 전통을 계승했다.

 

 

 

3. 산서 영제 관작루(鹳雀樓)

 

 관작루는 북주(기원 557년~581년)시기에 건립되었다.

 

외형이 아름답고 구조가 독특하며 지리적 위치가 우월한 등

 

장점이 있어 당조의 시인들은 관작루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4. 호남 악양 악양루(岳陽樓)

 

 악양루는 역사가 유구한 문화 고성- 악양에 위치하고 있다. 악양은 산, 강, 루를

 

구비하고 있고 풍경이 그림과 같이 아름다우며 수많은 명승고적을

 

 소유하고 있다. 악양루는 기원 220년 전후에 건립되었으며

 

오늘날까지 17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악양의

 

악양루, 무창의 황학루,남창의 슬왕각 등을

 

통털어 "강남 3대 명루"로 부르기도 한다.

 

 5. 호북 무창 황학루(黃鶴樓) 

황학루는 삼국시기(기원 223년)에 건립되었으며

 

당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당조시기에 이르러 황학루는 점차 명승고적으로 변화되었으며

 

역대의 문인들은 이 곳에 들릴때마다 유명한 시편을 남기곤 했다.

 

6. 강서 남창 등왕각(藤王閣)

당대의 이원명이 지은 것으로써 색채미가 집대성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등왕각을 건설한 이원명의 경우 왕의 동생으로써

 

건축을 하는데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모든 양식을 바로 등왕각에 대입하여

 

아주 당당하고 화려하게 치장된 것이 특징이다,

 

등왕각의 건축술은 지배계급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웅장하고 세련된 초특급 건물인 것이다,

 

 7. 강소 남경 열강루(閱江樓)

 

열강루는 문화경관과 자연경관을 혼연일체로 한

심양루는 최초 민간술집이였으며 오늘날까지

 

12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심양루는 전형적인

 

송조 건축형태의 누각이며 또한 관광과 음식점을 일체화시킨

 

관광지이기도 하다.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또한 젊은 활력을 띤 심양루는

 

 독특한 풍치로 각지의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으며

 

그 풍부한 문화적 의미로 장강변의 한개 반짝이는 명주로 각인될 것이다.

 

 9. 서안 고루(鼓樓)

 

 명조(1380년)시기에 건립되었으며

 

명조 강희와 건륭시기 전후로 두번에 거쳐 복원했다.

 

 누각위에는 큰 북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북을 쳐 시간을 알렸으므로

 

"고루(鼓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어 오늘날 누각위의 북은 사라졌지만

 

고루는 아직도 위엄있게 우뚝 서있다.

 

서안 고루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고루이다.

 

90년대 이후로 정부에서는 대규모적인 수리를 진행했으며

 

 문물자원을 진일보 개발, 이용하고 문화관광사업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누각에 북을 다시 설치했다.

 

10. 남경 고루(鼓樓)

 

 남경 고루는 남경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조(1382년)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방대한 건축규모는 중국내에서 보기 드물며

 

상, 하 두층으로 나뉘어 있는 누각은 웅위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누각은 최초 명조시기 왕과 비를 맞이하거나 시간을 알리는 장소였다.

 

 명조가 멸망한후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며 청조가 건립된 후 다시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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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전노자老子

 

노담

 

요약

 

BC 510년경에 만들어진책으로, 자연에 순응하면서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살아야 한다는 동양적 지혜의정수를 담고 있다. ‘노(老)’는저자 노담의 성이고, ‘자(子)’는학자나 그 저술을 가리키는말이다. 따라서 ‘노자’란 노선생의 학설을 정리한책이라는 뜻이다. 전문 약5,400자이며, 보통 81장으로나누고, 제1~제37장을 상편,제38~제81장을 하편이라한다.

 

저작자노담(老聃)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노자는 ‘유약겸양부쟁(柔弱謙讓不爭)’의 덕을 설파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굴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부드러움은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필승의 방책이다. 버드나무 가지가 눈사태에도 부러지지 않듯 노자는 유연함을 생명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리고 유연함의 극치를 추구하여 자연스러운 흐름과 모든 고정된 형태를 부정하는 경지에 이른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센 것을 꺾는 데 물보다 더 뛰어난 것 또한 없다. 이는 물이 철저하게 약하기 때문이다. 「제78장」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물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쇠와 돌을 마음대로 부린다. 형태가 없는 것은 도저히 파고들 틈도 없는 그 어떤 곳이라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제43장」

 

형태가 없는 것을 ‘무’라 한다. 이 무의 움직임을 ‘무위(無爲)’라 한다. 노자의 승부사로서의 진면목은 무위로 이기는 것을 가장 높이 산다는 데 있다.

 

훌륭한 무사는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잘 이기는 사람은 함부로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늘 남에게 겸손하다. 「제68장」

 

능동적인 것보다 수동적인 것이 중요하다. 이 가르침을 지키면 나아가도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도 휘두르는 것같이 보이지 않으며, 적을 쳐도 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무기를 들어도 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제69장」

 

노자는 이처럼 ‘무’를 활용한 승리야말로 병법의 궁극으로 쳤다. 승부란 무조건 이긴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투쟁을 피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상대에게 패배의 굴욕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상대도 모르게 승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움츠리게 하고 싶으면 먼저 펴게 해 주고, 약하게 만들고 싶으면 먼저 강하게 해 주며, 멸망시키고 싶으면 먼저 융성하게 해 주고, 빼앗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제36장」

 

늘어날 만큼 늘어났으면 줄어드는 것이 도리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에 이기는 것은 이런 자연의 법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무위자연’(무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 식 승리법은 약자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강자가 계속 강자이기 위해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이었다.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니 천하의 ‘여자’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손을 뻗지 않고도 남자를 마음대로 부린다. 큰 나라가 스스로 겸양하면 작은 나라가 저절로 따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양하면 큰 나라는 스스로 작은 나라를 받아들인다.

 

큰 나라는 모든 나라를 수용해 모든 사람을 잘살게 하기를 원하며, 작은 나라도 큰 나라의 그늘 아래 있기를 바란다. 서로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큰 나라가 먼저 겸양해야 한다. 「제61장」

 

무위로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무위로 다스리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노자의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최고의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백성이 군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다음으로 좋은 군주는 백성이 군주를 공경하며 찬양한다. 그보다 하수는 백성이 두려워하는 군주이며, 최악의 군주는 백성들에게 경멸 당한다. 군주는 백성의 자연스러운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뛰어난 군주는 함부로 명령하지 않고, 만사를 백성에게 맡겨 둔다. 그리하여 잘살게 되면, 백성은 그저 군주의 공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리 된 줄로 안다. 「제17장」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노자가 전하고 싶은 말은 ‘대책 없이 있어라’라는 것이 아니다. 군주가 어떤 시책을 세웠는지조차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통치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이상적인 지도 방식은 농부의 작업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농부는 농작물을 잘 키우기 위해 밭을 갈고 성장을 방해하는 원인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다음 일은 자연에 맡기고 조급해하지 않는다. 농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흙 속의 돌멩이와 잡초, 해충 등은 인간의 간사한 지혜와 그 지혜로 인해 끝없이 비대해지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옛 성인은 백성을 영악하게 만들지 않고, 우둔하고 소박하게 만들었다. 백성이 영악하면 정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묘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간사한 꾀를 부리지 말고 무위의 정치를 해야 한다. 「제65장」

 

위정자가 재능을 중시하지 말아야 백성들은 다투지 않고, 귀한 물건을 중시하지 말아야 도둑이 생기지 않으며,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제3장」

 

백성들의 마음에서 욕망을 없애고, 대신 육체는 편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성인이 나라 다스리는 법이다.

 

이 부분을 두고 노자가 우민정치를 주장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노자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의 사상은 결코 위정자가 백성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우민정치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정자들이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 때문이다. 백성이 반항하는 것은 그들이 술책을 부려 억압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목숨을 잃는 것은 그들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제75장」

 

천하에 금기가 많으면 백성이 가난해지고, 통치자가 지략이나 권모술수를 많이 쓰면 쓸수록 세상은 어둡고 혼란스러워지며,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불행한 사건은 더 많이 일어나고, 법률이 정비되면 될수록 범죄는 늘어난다. 「제57장」

 

2천 수백 년 전의 말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경쟁 사회의 정신적 피폐와 기술 문명의 발전에 따른 환경 파괴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한층 격렬해지는 생존 경쟁의 장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 길은 단 하나, 현세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의욕에 넘치지만, 나는 멍하니 모든 것을 잊고 있다. 나는 어리석어 무엇 하나 분별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명민하지만, 나는 도리에 어둡고 어리석다. 나는 정처 없이 출렁이는 바다이며, 그냥 스쳐 가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지만, 나는 우둔하고 촌스럽다. 나 홀로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자연이라는 어머니 품에 안기리라. 「제20장」

 

노자가 말하는 ‘나’라는 주체성은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바다처럼 형체도 없이 출렁이고, 무작정 부는 바람처럼 어떤 세속적 개념으로 잡을 수 없는 자유의 주체성이다.

 

천지는 영원하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도 이와 같다. 사람 앞에 서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람 앞에 설 수 있다. 내 몸을 잊었기에 오히려 내 몸을 온전히 한다. 「제7장」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때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닌 인간은 번뜩이는 지혜의 빛과 의지의 불꽃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노자는 너무 넓어서 어떤 관점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인격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았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이 많으면 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욕망의 문을 닫는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마음의 엉킴을 풀어 헤친다. 자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풍진 세상과 어우러진다(和其光, 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주이라 한다. 그러므로 현동에 이른 사람을 보면, 친밀하게 대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이롭게 해야 할지 해롭게 해야 할지, 존경해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사람들은 가늠하지 못한다. 외부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대하다. 「제56장」

 

인간이란 자연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 철학의 토대는 인간이란 자연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에 있다. 따라서 인간적 지혜의 이상적 형태는 만물을 지배하는 자연 법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변화하는 실체로 파악하고, 우주 만물의 변화 속에서 일정한 법칙을 찾아낸다.

 

그 법칙이란, 모든 현상의 배후에 깔려 있는 시공을 넘어선 본체와 그 운동 원리이다. 그 본체를 그는 ‘도’라고 했다. ‘도’는 ‘무(無)’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각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도는 한정될 수 없는 본체이므로 ‘무’라 할 수밖에 없지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된 현상, 곧 만물로 나타나므로 ‘유’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무는 극소를 나타내고, 유는 극대를 나타내므로 도는 소(小)이면서 대(大)이다. 이처럼 도는 모든 대립을 통일하는 존재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도 안에 포괄되는 대립 관계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무는 늘 유로 바뀌려 하고, 유는 늘 무로 바뀌려 한다. 이렇게 대립하고 서로 전환하려는 운동이 도의 법칙이다.

 

대립 상태를 내포하면서, 그 대립적인 것으로 바뀌려 하는 것이 도의 운동이다(反者, 道之動). 늘 소극을 지키려 함으로써 한없이 적극으로 통한다. 그것이 도가 작용하는 형식이다(弱者, 道之用). 만물도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유’, 곧 현상 일반에 도달한다. 그 유의 근원을 더 파고 들어가면 ‘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른다. 「제40장」

 

서로 대립하는 것의 상호 전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됨으로써 끝없는 생성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노자의 자연관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각에 사로잡혀 대립하는 것의 일면[예를 들어 미추(美醜)에서의 미]만을 고집함으로써 자연의 변화에 어긋나는 작위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끝없는 미망(迷妄)에 빠지는 것이다.

 

책 속의 명문장

 

道可道, 非常道 / 도가도, 비상도

진정한 도는 절대 불변의 고정된 도가 아니다. 만물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진정한 인식은 사물을 늘 변화 속에서 파악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아름답다고만 생각할 뿐, 아름다움이 곧 추악한 것임을 모른다. 모든 대립적인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의 일면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上善若水 /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기르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이 물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功遂身退, 天之道 / 공수신퇴, 천지도

공을 세우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하늘의 도리이니, 끝까지 올라가면 이제 남은 것은 내려가는 일뿐이다. 성공했다고 그 지위를 끝까지 지키려 하다가는 재앙을 부를 따름이다.

 

大道廢, 有仁義 / 대도폐, 유인의

사람들이 인이니 의니 하게 된 것은 무위자연의 대도가 사라지고 작위(作爲)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뒤부터이다. 도덕이 필요 없는 세상이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이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만족하고 물러설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오래 지탱할 수 있다.

 

大巧若拙, 大辯若訥 / 대교약졸, 대변약눌

진정한 기교는 치졸해 보이고, 진정한 웅변은 어눌하게 들린다. 모든 진실은 작위를 버리고 자연의 길을 따르므로 오히려 진실되게 보이지 않는다.

 

노담은 춘추시대 말기의 현자로,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 적이 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라고 한다. 초(楚)나라 출신으로, 주나라 왕실에 소속되었으나 주나라의 덕이 쇠약해지자 함곡관을 떠나 행방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 자료가 없어 우화적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며, 설령 그의 존재를 긍정한다 해도, 『노자』라는 책의 저자가 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노자』는 『노자서(老子書)』 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고도 부른다. 그 용법이나 문자들을 보건대, 전국시대 이후의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상적으로는 전국시대의 양주(楊朱), 송견(宋銒), 윤문(尹文), 전병(田騈), 신도(愼到), 장주(莊周)와 같이 훗날 도가(道家)주로 분류되는 학파의 설이 혼재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도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사상을 집약하고 체계화해 노담이라는 이름에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도’를 체현한 성인만이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정치론은 이윽고 법가의 설과 결탁해 군주 독재 체제의 확립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원리를 설파한 군사론은 ‘손자’의 병법과 연관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늘날 통용되는 『노자』는 후한 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하상공(河上公) 주석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의 주석본이다. 1973년에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굴된 『노자』 고사본 2종류는 전한(前漢) 초기나 그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현존하는 텍스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데, 내용은 위의 2가지 주석본과 별 차이가 없고, 다만 상편과 하편의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현대 중국에서는 노자가 달성한 변증법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사상 전반은 귀족 계급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비판해 왔으나, 비림비공[批林批公주, 린뱌오(林彪)주와 공자를 비판한 것] 운동 이후로는 그 사상의 병가적 또는 법가적인 측면을

평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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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전장자莊子

 

요약

 

BC 290년경에 만들어진책으로, 전국시대의 사상가인장자[이름은 주(周)]의저서이다. 전문 6만 5,000여자이며, 「내편(內篇)」7편[〈소요유(逍遙遊)〉,〈제물론(齊物論)〉,〈양생주(養生主)〉,〈인간세(人間世)〉,〈덕충부(德充符)〉,〈대종사(大宗師)〉,〈응제왕(應帝王)〉]과〈병무(騈拇)〉 이하「외편(外篇)」 15편,〈경상초(庚桑楚)〉 이하「잡편(雜篇)」 11편 등 모두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붕도남(大鵬圖南)

 

북녘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그 등넓이는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고,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을 덮는 검은 구름과도 같다. 이 새는 바다에서 큰 바람이 이는 계절이 오면 천지(天池)라는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괴이한 일들이 실려 있는 『제해(齊諧)』라는 책을 보면,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3,000리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하늘을 날아올라 6개월 동안 쉼 없이 날갯짓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지상에서는 아지랑이와 먼지가 피어오르고, 모든 생명체의 입김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늘은 파랗다. 그 빛깔은 하늘의 본래 색깔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9만 리 먼 하늘에서 붕이 내려다보는 이 지상 세계도 파란색일 것이다.

 

물이 깊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한 잔의 물이 마루에 괴면 작은 풀잎이 배처럼 뜰 수 있지만, 거기에 잔을 올려놓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이 두껍게 쌓이지 않으면 날개를 띄워 올릴 힘을 얻을 수 없다. 9만 리 높은 하늘에 올라야만 붕의 날개가 강한 바람의 힘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붕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자유롭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매미와 비둘기가 그 붕을 비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해도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끝에도 못 닿고 때로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어찌 9만 리 먼 하늘까지 올라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정말 웃기는 놈이다.”

 

교외로 소풍을 나가면 하루 세 끼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백 리 길을 가려면 하룻밤 동안 곡식을 찧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려면 세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조그만 날짐승이 대붕의 비상을 어찌 알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조균(朝菌,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드는 버섯의 일종)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런 것이 짧은 수명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00년 동안은 잎이 피어나 자라는 봄이고, 또 500년 동안은 잎이 지는 가을로 천 년 동안 단 한 줄의 나이테를 만든다. 아득히 먼 옛날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8,000년 동안은 봄이고 또 8,000년 동안은 가을이었다. 그런데 지금 고작 700년을 산 팽조(彭祖)는 장수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본받으려 한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소요유(逍遙遊)〉

 

조삼모사(朝三暮四)

 

말은 ‘그렇다’와 ‘아니다’가 명확하다. ‘도’(만물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는 끝없이 변화하므로 완전한 존재일 수 있는데, 그 변화는 개별 사물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 곧, 그런 것은 그렇고, 아닌 것은 아니어야 한다. 말이란 의미가 정해지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 말로 표현하는 대상은 개별 존재임과 동시에 보편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은 풀포기와 큰 기둥, 문둥이와 미녀 서시(西施)를 그 예로 들어 보면, 전자는 작고 큼에서, 후자는 추하고 아름다움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실은 동일한 현상이다. 아무리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괴이쩍은 사물이라 해도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똑같다.

 

이러한 형식뿐 아니라 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파괴로 보이는 현상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완성일 수 있고, 완성으로 보이는 현상도 파괴가 될 수 있다. 곧, 모든 존재는 형식에서나 운동에서나 구별이 없다.

 

이러한 만물제동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사물을 ‘용(庸)’(자연의 모습)에 맡긴다. 용(庸)은 용(用)과 통한다. 사물은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올바른 모습을 드러낸다. ‘용(用)’은 다시 ‘통(通)’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러운 작용에는 무리가 없다. ‘통(通)’은 또한 ‘득(得)’으로 이어진다. 무리 없이 작용할 때 사물은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인식은 만물의 실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 그대로 두려는 의식마저 사라진 상태가 ‘도’와 일체화한 경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선택을 고집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런 것을 두고 ‘조삼모사(朝三暮四)’라 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원숭이 조련사가 어느 날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아침에는 3개, 저녁에는 4개를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서 말을 바꾸었다.

 

“미안, 미안.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지.”

 

그러자 원숭이는 좋아라 했다.

 

실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노여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시비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의 구별을 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천균(天鈞)’(만물제동의 원리, 자연의 조화)에 맡긴다. 이것을 ‘양행(兩行)’(양은 사물과 나, 행은 장애가 없음. 사물과 나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곧, 모든 모순과 대립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무한한 자유의 경지)이라 한다. 〈제물론(齊物論)〉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이 소를 잡다)

 

인간의 생명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롭다.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앎의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앎의 작용으로 선악을 구별한다. 그러나 선이건 악이건 간에 사회적 명성이나 형벌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 지나지 않으니, 그러한 선악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면 평안하고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어느 날, 유명한 요리사 포정(庖丁)이 위(魏)나라 혜왕(惠王) 앞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았다.

 

포정이 소를 손으로 잡고, 어깨에 힘을 넣어 발의 위치를 잡으며 무릎으로 소를 누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고기와 뼈가 깨끗이 발라졌다. 그 리듬을 탄 칼질 소리는 마치 ‘상림무(桑林舞)’(은나라 탕왕이 즐기던 무곡)나 ‘경수회(經首會)’(요임금이 즐기던 무곡)처럼 들렸다.

 

“아! 참으로 신기로다!”

 

혜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포정은 그 말을 듣고 칼을 놓더니 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공하오나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이 극한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저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감각이 멈추고 마음만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입니다. 소의 몸에 자연스레 나 있는 틈을 따라 칼질을 하므로 커다란 뼈는 물론이고 근육이나 살이 마구 얽힌 부분이라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발라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고, 꽤 솜씨 있는 요리사라 하더라도 1년에 한 번은 칼을 바꿉니다. 왜냐하면 뼈에 부딪쳐 날이 빠지거나 오래 사용하는 사이에 칼날이 무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보십시오. 19년이나 사용한 것입니다. 벌써 수천 마리의 소를 발랐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지 않습니까?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일 충분한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육과 뼈가 얽힌 어려운 부분에 이르면 마음을 다잡고 긴장합니다. 눈을 한 점에 집중하면, 동작은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칼이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모를 지경에 이릅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흙덩어리처럼 뼈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면 긴장을 풀고 칼을 든 채 일어서서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봅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잠시 그렇게 선 채로 있다가 이윽고 냉정을 되찾으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혜왕은 감동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 참된 삶을 누리는 방법)의 이치를 터득했노라.” 〈양생주(養生主)〉

 

무용(無用)의 용(用)

 

목수 석(石)이 제나라를 여행하다가 곡원(曲轅)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을 모신 사당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굵기는 백 아름이나 되며,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고, 지상에서 7~8척 높이가 된 지점에서야 가지가 뻗어나 있었다.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지만 해도 수십 개는 되었다. 그 주위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으나 목수 석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한동안 그 나무를 바라보던 제자가 스승 석에게 달려가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렇게 훌륭한 나무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석이 대답했다.

 

“건방진 소리 말거라. 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배를 만들면 그냥 가라앉을 테고, 널을 짜면 금방 썩을 것이고, 그릇을 만들면 곧 망가질 것이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를 테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 게야. 그러니 저건 재목으로 쓸데가 없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저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게야.”

 

목수 석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대체 나를 어디다 비교해서 쓸모없는 나무라 하느냐? 필시 인간에게 유용한 나무에 비교했을 테지. 하기야 배나 귤, 유자 같은 열매는 익으면 사람들이 따 먹고, 그러다 보면 가지도 부러질 테지.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질 것이야. 결국 그 나무들은 맛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삶이 괴롭고, 그러니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어 버리지. 스스로 세속의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날까지 오로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이제 천수를 마감하려는 때에 이르러 마침내 아무 쓸모 없는 나무가 되었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야. 만일 내가 쓸모 있는 나무였다면 벌써 베어졌을 것이야.

 

다시 한 번 말해 두겠는데, 너나 나나 어차피 자연계의 사소한 현상에 지나지 않아. 그런 물건이 다른 물건의 가치를 정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너처럼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야말로 실제로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야. 그런 쓸모없는 인간이 나처럼 쓸모없는 나무의 진가를 알아볼 리 없지.”

 

다음 날 아침, 목수 석이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자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간절히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면서, 왜 사당 앞의 신목(神木)이 되었을까요? 신목이란 사람을 지키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목수 석이 대답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저 상수리나무도 겨우 신목이 되어 사당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야. 사람들이 비판을 하면 자신을 헐뜯는 소리라며 들은 척도 않아. 신목이 안 되었더라면 잘려 버리고 말았을 테지. 사람들이 저 나무를 신목이라 우러러보는 것도 당치 않아. 나무 자신은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따름이니까.” 〈인간세(人間世)〉

 

좌망(坐忘)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저도 이제 많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인의를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된 일이구나. 하지만 아직 모자란다.”

 

며칠이 지난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예악(禮樂, 예절과 음악)을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다.”

 

며칠 뒤, 안회는 다시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더욱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발전하였느냐?”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좌망?”

 

공자는 태도를 바꾸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손발과 몸을 잊고,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텅 비어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선악의 구별이 없어지고, 도와 함께 변화하면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대종사(大宗師)〉

 

책 속의 명문장

 

壽則多辱 / 수즉다욕

“아들이 많으면 두려움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일이 많아지며, 오래 살면 욕됨이 많아진다.” 요임금의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많은 집착에 얽매인 단계이며 『장자』가 이상이라고 한,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 「천지(天地)」

 

蝸牛角上 / 와우각상

달팽이(蝸牛) 뿔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동을 부리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말이다. 위나라 혜왕이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대진인(戴晋人)이라는, 장자와 같은 유형의 인물이 두 나라가 싸우는 형국을 달팽이 뿔 위의 싸움이라는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편 데서 생겨난 말이다. - 「칙양(則陽)」

 

鑑於止水 / 감어지수

흐르는 물은 거울이 될 수 없지만, 고인 물은 어떤 모습도 비추어 낸다. 그처럼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동의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 삼지 않고, 가라앉은 물을 거울로 삼는다)와 같은 뜻이다. - 「덕충부편(德充符篇)」

 

莫逆之友 / 막역지우

마음속에서부터 서로를 이해하며 뜻이 통하는 친구. - 「대종사」

 

螳螂之斧 / 당랑지부

낫 같은 다리를 치켜들고 수레에 대항하는 사마귀의 모습을 빌려,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나무라는 말로 쓰인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노나라의 안합(顔闔)은 난폭하기로 유명한 위(衛)나라의 태자 괴외(蒯聵)의 선생으로 초빙되자,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蘧伯玉)에게 어떤 자세로 태자를 가르쳐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거백옥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마귀는 팔뚝을 휘둘러 수레에 맞섭니다. 제 능력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요. 선생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태자에게 강요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인간세」

 

『장자』 33편 가운데 장자 자신이 쓴 것은 「내편」 7편뿐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세의 장자학파 사람들이 장자에 가탁해 썼다는 것이 통설이다.

 

장자가 살았던 연대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몽현[蒙縣,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邱縣)]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고, 옛날에 몽현의 옻나무 밭을 지키는 관리였다. 그리고 위(魏)나라 혜왕(惠王), 제나라 선왕(宣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다고 한다. 위나라 혜왕의 재위 시기는 BC 370~BC 319년이고, 제나라 선왕의 재위 시기는 BC 319~BC 301년이므로, 장자는 BC 4세기 후반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장자의 경력에 대해서는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 아내가 있었고[〈지락편(至樂篇)〉], 제자가 있었다는 것[〈산목편(山木篇)〉, 〈열어구편(列禦寇篇)〉]을 알려 주는 에피소드나, 그의 가난에 대해 말하면서 감하후(監河侯)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는 이야기[〈외물편(外物篇)〉], 넝마를 입고 위나라 혜왕을 만난 이야기[〈산목편(山木篇)〉] 등으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사기』에는 장자를 재상으로 삼으려는 초나라 위왕(威王)의 요청에 대해 진흙탕에 뒹굴어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로 보기 좋게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장자는 만물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도(道)’라 하고, 그 ‘도’에서 보자면 모든 사실에는 구별이 없다[만물제동(萬物齊同), 곧 만물은 모두 동일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고 했다. 그리고 이 ‘도’와 일체화하는 것, 곧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자유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을 위한 수양을 ‘심재(心齋)’주, ‘좌망(坐忘)’주이라고 했다. 또한 자연을 훼손하는 인위적 행위를 배척하고, 인위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쓸모 없는 것이 실제로는 유용하다고 말했다.

 

훗날 『장자』는 무위자연의 처세 철학을 주장하는 『노자(老子)』와 일체화되어, 노장 사상(老莊思想)주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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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 시대의 사상

 

한·당 시대의 사상(漢唐時代의 思想)은, 한나라(漢: 기원전 206~기원후 220) 시대로부터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를 지나 수나라(隋: 581~618) · 당나라(唐: 618~907) ·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時代: 907~960)에 이르기까지 약 1천년 동안의 중국의 중세(中世) 시대에서 전개된 사상을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한나라 시대에는 경학(經學)과 황로술(黃老術),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노장(老莊)의 현학(玄學),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로 분류한다.

 

경학과 황로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유교, 훈고학, 경학, 도가, 신선술, 방술, 도교입니다.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

 

양웅(揚雄: 

기원전 53~ 기원후 18)

 

배경편집

 

전한(前漢: 기원전 206~기원후 8)과 후한(後漢: 25~220)의 양한(兩漢) 4백년 간의 통일기에는 선진 시대(先秦時代)와 같은 자유사상이나 제자백가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로부터 살아남은 문헌들을 수집 ·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따라서 훈고학(訓誥學), 즉 훈고학적 경학(經學)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오랜 전쟁의 영향과 정치적 속박을 싫어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사상이 환영을 받았다. 훈고학은 한나라(기원전 206~기원후 220) 시대부터 당나라(618~907) 시대까지 송나라(960~1279) 시대에 성리학이 발생할 때까지 유행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유가 계열로는 훈고학적 경학이 있었다면, 도가 계열로는 노장사상의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위주로 하여 도를 닦아 목숨(壽 ·수: 생명 에너지)을 기르며 신선술(神仙術)과 방술(方術)을 구하는 황로술(黃老術)이 있었으며, 또한 형명법술(刑名法術: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기술)을 숭상하는 법가 계열의 학문 경향이 있었다.

 

대표적 사상가편집

 

한나라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는 《회남자(淮南子)》를 저술하고 노장사상의 청정무욕(淸淨無欲)을 말한 유안(劉安: 기원전 179~122), 금문학(今文學)의 입장에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 음양설(陰陽說) ·유자지학(儒者之學) · 재이지변(災異之變)을 말한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 유가 · 도가의 두 학문을 혼합하여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저술한 양웅(揚雄: 기원전 53~ 기원후 18), 훈고학의 대표자인 정현(鄭玄: 127~200)을 들 수 있다.

 

한편, 신비사상으로 차 있던 한나라시대에서 왕충(王充: 27~99?)은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허망한 이론을 싫어하여 《논형(論衡)》을 저술하여 당시의 학문 경향을 비판하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을 펼쳤다.

 

금문학과 고문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서경 (책), 오경박사입니다.

 

한나라 초기에는, 고조(기원전 206~195) 때의 육가(陸賈: 기원전 ?~?)와 문제(재위 기원전 180~157) 때의 가의(賈誼: 기원전 200~168)가 유학자로서의 식견을 보였다.무제(재위 기원전 141~87)는 오경박사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고,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104)는 〈현량대책(賢良對策)〉 등을 지어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건의하여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확립하였다.

 

한나라 시대에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 참위설(讖緯說) · 재이설(災異說)이 유행하였는데, 자연계의 현상을 포함한 하늘의 운행인 천도(天道)와 인간의 행위인 인사(人事)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전한의 동중서를 비롯한 금문경학자(今文經學者)들은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사상으로 하늘(天)과 인간(人)의 관계와 사회와 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나라(新: 8~23) 왕망(王莽) 때는 유흠(劉歆: ?~23)이 《서경(書經)》의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今文尙書)》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금문가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입장에서 《금문상서》는 공자가 예부터 전해져 오는 도(道)에 의거하여 새로이 편찬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공자를 왕자(王子)의 덕과 자격을 갖춘 사람인 "소왕"(素王)으로 높이고,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위서(僞書)라 주장하면서 《고문상서》는 공자의 편찬을 통해 전수된 정통적인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고문가는 공자는 예부터 전해져 오는 도(道)를 좋아하여 이 도에 대해 해설했을 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도를 먼저 이룬 큰 스승인 "선도대사"(先道大師)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문상서》는 진시황의 분서(焚書)로부터 살아남은 문헌으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고(誣告)일 뿐이라고 하면서 금문가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 금고문 논쟁은 후한(後漢: 25~220) 말기에 정현(鄭玄: 127~200)이 금문가와 고문가의 여러 철학 이론을 모두 채용하여 경전의 뜻을 통일시킴으로써 완화되었다. 정현은 고문가의 철학을 위주로 하여 금문가의 참위설 등을 종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훈고를 통해 모든 유교 경전들에 대한 통일적인 해석을 완성하여 한나라 · 당나라 시대 훈고학의 지표가 됨으로써 경학의 권위를 높였다.

 

현학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현학, 주역, 도덕경, 장자 (책), 하안, 왕필, 곽상, 죽림칠현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220~589) 왕조들의 계통도: 위진 시대는 220~420, 남북조 시대는 439~589

 

배경편집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 220~589)에는 노장(老莊)의 현학(玄學)이 풍미하였다. 현학에서 3현(三玄)이라 함은 《주역(周易)》·《노자(老子)》·《장자(莊子)》를 지칭한다. 전쟁과 난리가 끊이지 않은 어지러운 때에 성명(性命: 본성과 천명,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명령)을 보존하고 세상에 명성을 드날리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의사(意思)를 가지고 《노자》와 《장자》의 드넓은 세계를 좋아하였다.

 

대표적 사상가편집

 

현학의 대표적 사상가는 삼국 시대위나라(魏)의 하안(何晏: 193?~249) · 왕필(王弼: 226~249) 그리고 서진(西晉)의 곽상(郭象: 252?~312)이다. 하안(何晏)은 유무(有無)를 논하고, 왕필(何晏)은 체용(體用)을 해설하고, 곽상(郭象)은 《장자》를 풀이하였는데, 이들 삼인과 더불어 현학의 학풍이 크게 일어났다. 그 밖에 완적(阮籍: 210~263) ·혜강(嵆康: 223~262) 등의 죽림7현(竹林七賢)이 나타나서 현언(玄言)을 숭상하고 예법(禮法)에 구애되지 않으며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처신코자 하는 청담(淸談)이 성행하였다.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와 왕필(王弼)의 《주역주(周易註)》의 주석들은 모두 도가의 입장에서 유가의 경서를 풀이한 것이다. 특히 왕필은 《노자주(老子註)》도 또한 저술하였다. 왕필의 《주역주》와 하안의 《논어집해》는 모두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한나라시대 유학의 부서재이(符瑞災異: 상서로운 징조와 괴이한 징조)의 설을 교정한 것이었다.

 

불교와 도교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중국의 불교, 격의불교, 천태종, 화엄종, 선종, 도교입니다.

 

격의불교편집

 

불교는 전한 말기과 후한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 불교사상의 시원(始原)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 시대의 불교는 중국 불교의 초창기로서 일반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 후 3국시대를 지나 진(晋)에 이르는 동안 불교 승려와 신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사찰의 건립과 불경의 번역 등이 점점 활발해졌다.

 

당시의 불교 수용 과정에 있어서 노장사상은, 유교와는 대립했던 것과는 달리 불교 이해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도안(道安) · 혜원(慧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노장사상의 형이상학적 철학과 사상을 원용하여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을 해석했는데 이것을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도가사상과 도교편집

 

위진시대로 오면서, 도가사상을 지녔거나 이해하고 있던 당시의 사대부 가문들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청담학파들의 사상은 순수 도가사상이라기보다는 도가사상을 바탕으로 거기에 불교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도가사상에다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종교적 성격을 띤 도교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나, 그 후 도교는 불교와 더불어 대립하여 논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 비록 교단과 조직 면에서는 대립을 보였지만, 도교는 불교의 교리와 의식을 모방하여 자체의 형태를 정비하게 되었다.

 

삼교합일 사상편집

 

또한 불교 사상과 도가 사상의 동일성 또는 합일을 주장한 사상도 출현하였다. 남제(南齊)의 장융(張融)은 "道也與佛 逗極無二(도야여불 두극무이)"라 하여 도교와 불교가 그 사상적 극치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는 "內外兩敎 本位一體(내외양교 본위일체)"라 하여 도교와 불교가 융회(融會)함을 강조하여 사회적 공존성을 말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후대의 유교 · 불교 · 도교의 3교 합일 사상의 단서를 제공하였는데, 수나라(隋)의 유학자 왕통(王通: 584년~617년)은 "三敎於是呼可一矣(삼교어시호가일의)"라 주장하였다.

 

중국 불교의 전성기편집

 

수나라 · 당나라 시대의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성장해 온 불교 사상이며 중국에서 불교의 연구는 이 시대에서 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불경(佛經) 한역(漢譯)이나, 도안 · 혜원 · 승조(僧肇) · 도생(道生) 등의 불교사상을 소승적(小乘的) 불교라 한다면, 수나라 · 당나라시대의 불교는 점차 대승적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불교 교의의 연구와 실천이 전문화하고 심화함에 따라서 소의경전 또는 소의논서를 중심으로 종파를 형성하여 10여 종으로 분립하였으며, 종파불교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으며 또한 중국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 가장 심오한 철학을 형성한 종파로는 천태종 · 화엄종 ·선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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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공자의 제자 또는 공자의 문인은 그 수가 많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만도 70명을 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중니 제자 열전〉에 그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孔子)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70인을 칠십자(七十子)라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육십일자(六十一子) 또는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고도 한다.[1]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제자로는 자로(子路) · 염유(冉有) · 유약(有若) · 안회(顔回) · 중궁(仲弓) · 자공(子貢) · 자하(子夏) ·자유(子遊) · 증자(曾子) 등이 손꼽힌다. 《논어》〈선진〉편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선진(先進; 먼저 나온 사람. 선배)'과 '후진(後進; 뒤에 나온 사람, 후배)' 그룹으로 나뉜다. 선배 그룹은 공자와 나이 차이가 20여세 정도인 사람들로, 자로 자공 유약 등이다. 후배 그룹은 공자와 40세 정도 차이가 나는 사람들로 안회 증자 자하 자유 자장 등이다. 이들 선배 그룹과 후배 그룹을 '弟子'라고 하는데, '아우뻘(弟)인 사람, 아들 뻘(子)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들뻘인 후배 그룹들이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 전했다. 증자를 이은 맹자, 자하 자유 등을 이은 순자가 그들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인 공자가 사망한 후에 여러 파로 분파된 것으로 보이는데, 크게 2분하면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 안으로 반성을 함. 마음 수양을 중시함. 仁 중심)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 예를 높임. 예를 닦음. 禮 중심)의 2파로 나뉘었다.[2] 이 두 파를 공문의 2유파(孔門의 二流派)라 한다. 이들 선진시대(先秦時代) 유가의 두 줄기의 흐름은 후대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문의 2 혹은 8 개의 유파편집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가 죽은 뒤에 여러 파로 나뉘었다. 《한비자(韓非子)》의 〈현학편〉에 의하면, 유가에는 자장(子張) · 자사(子思) · 안씨(顔氏) · 맹씨(孟氏) · 칠조(漆雕) ·중량씨(仲良氏) · 손씨(孫氏) · 악정씨(樂正氏) 등의 8파(八派)가 있었다.

 

또 《맹자》[공손추] 편에 의하면 공자의 사후에 자하(子夏) · 자장(子張) · 자유(子遊)의 3인이 유약(有若)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자 증자(曾子)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유약은 공자 제자 가운데 연장자(선배)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 《논어》에 그가 예를 중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마음에 인격(仁)을 닦는 것을 강조하는 증자가 반대한 것이다.

 

이 8파는 다시 2파, 즉 증자(曾子)를 중심으로 한 내성파(內省派)와 자유(子遊) · 자하(子夏) 자유(子游) 자장(子張)을 중심으로 한 숭례파(崇禮派)로 나뉘었다.[2] 증자를 이은 것이 맹자이고, 자하 자유 계열을 계승한 사람이 순자이다. 8파 가운데 맹씨(孟氏)는 맹자, 손씨(孫氏)는 순자를 가리킨다. 순자는 손경(孫卿)이라고도 불렸다.

 

안씨(顔氏)는 공자의 제자 안회를 가리키며, 《장자》에 공자와 안회의 대화가 매우 자주 나오는 것으로 봐서, 장자(莊子) 계열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한유, 곽말약) 칠조(漆雕)는 《논어》에 '칠조개'로 나오는 사람으로, 유협(遊俠; 무사)의 무리였다. 악정씨(樂正氏)는 《맹자》에 '악정자(樂正子)'로 나오는 맹자 제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중량씨(仲良氏)는 그 유래나 계열이 명확하지 않다.

 

《맹자》〈등문공〉편을 보면, 초나라에 허행(許行)을 중심으로 진상(陳相) 등의 무리가 공자의 학설을 따랐다. 이들은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형성된 유가 그룹인 것 같다. 이들 초나라 그룹의 유자 계열 가운데 후대에 유명한 사람이 《초사》를 쓴 굴원이다. 그는 간신들과 싸우다 쫓겨나서 방황하다 죽었다.

 

또한 연나라 임금 쾌(噲)가 재상 자지(子之)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는 선양(禪讓)을 했다. 이는 요->순->우가 왕위를 물려주던 방식으로, 가장 현명한 신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다. 맹자나 순자가 이상적인 통치로 강조했던 것을 연나라에서는 실행을 했다. 그 선양의 결과 반란이 일어나고 쾌와 자지 등은 모두 비극적으로 살해되었다. 이들 역시 유가 학설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초나라와 연나라의 이 두 계열은 《한비자》〈현학〉편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진시황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편찬했다. 이 책은 제자백가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유가적인 통치를 주장한 것이다. 진시황은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따라 7국을 통일하려 했다. 반면 《여씨춘추》는 1년을 12달로 나누어 각 달마다 해야 할 일을 기록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진시황이 확장을 주장했다면, 《여씨춘추》는 안정과 조화를 주장했다. 진시황의 법가 노선과 여불위의 유가 노선이 충돌했고, 결국 진시황은 여불위를 죽였다. 이 대립에서 진나라에 미친 유가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내성파편집

 

맹자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 이름은 삼參)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의 '인(仁; 사랑 인격)' 사상에 근거한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대가족 중심의 씨족제(氏族制)하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효를 중시하였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이다.

 

자사는 "천(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와 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성(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도(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사상가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이다. 맹자는 인(仁) · 의(義)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주장한 성선설(性善說)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견해는 자사의 종교적 관념으로서의 천(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 맹자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나라(960~1279) 시대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가(儒家)의 도통(道通: 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論語)》, 증자의 《대학(大學)》, 자사의 《중용(中庸)》, 맹자의 《맹자(孟子)》의 4서가 성립되었다.

 

숭례파편집

 

순자

 

자유(子遊) · 자하(子夏)의 파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예(禮)라고 하는 외적 규범을 중시하였으며, 그리고 이들 양자 간에도 차이가 있었음을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도 지적하고 있다.

 

유가의 내성파에 속한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를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순자인데, 그는 자궁(子弓: 자유(子遊)라고 하는 설도 있다)의 학통을 이은 것 같고, 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적 천(天)의 사상에서 탈각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출하였으며 예(禮)를 강조하였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성인에 의해 정해진 예(禮)에 따라서 교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성악설에 의거하여, 예(禮)를 법(法)에 접근시켜 국가 통치의 원리로 했다.[3] 그는 예(禮)와 법(法)을 동일시함으로써 법(法)을 사회질서의 이념(理念)으로 끌어올려 사상의 한 유파로서의 법가(法家)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4]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이사(李斯)와 한비자(韓非子)는 순자의 문하생이었다.[3]

 

순자의 사상은 송나라(960~1279)의 성리학의 학풍 이래로 이단적인 학이라 취급되어 왔으나 근년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들편집

 

아래 명단은 《사기》(史記) [중니 제자 열전]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공자가어(孔子家語)》 및 기타 《논어》의 주석 등에서 주장하는 제자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안회민손염경염옹염구중유재여단목사언언복상전손사증삼담대멸명복부제원헌공야장남궁괄공석애증점안무요상구고시칠조개공백요사마경번수유약공서적무마시양전안행염유조휼백건공손룡염계공조구자진조칠조차안고칠조도보양사적상택석작촉임부제공량유후처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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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경

 

십삼경(十三經)은 유가(儒家)에서 중시하는 13종의 경서(經書)를 총칭하는 말이다. 중국 송대에 확정했다.

 

구성편집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중용》(中庸), 《대학》(大學) 포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아》(爾雅)《효경》(孝經)

 

경서편집

 

사서(四書) :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삼경(三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이라고도 함)》의 총칭.

 

오경(五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삼례(三禮) :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의 세 책.

 

춘추삼전(春秋三傳)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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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 이외희

내게 살며시

다가온 이 바람은

어디서 무얼 하러 왔을까?

머물지 않고

끝없이 스쳐만 가는

이 바람은

어디로 무얼 하러 가는 걸까?

살짝 다가왔다가

수줍어 살그머니

떠나가는 바람은

하고 싶은 말은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온종일 휘파람만

쓸쓸히 불어 대는

네 모습 같구나

 

하나의 삶 / 정유찬

누구나

원하는 것은 같다

그것을 달리 표현할 뿐

우리는

모두가 다른 방법으로

같은 사랑을 원하고

모두다

같은 의도로

독특한 삶을 추구한다

이렇게

삶의 다른 모습들이 합쳐져

하나의 큰 삶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각기 다른 모두가 만드는

하나의 삶을 산다.

 

부활의 장미 / 정문규

피었다 지는 것이야

쉬운 일이지만

그 향기까지야

쉽게 잊혀지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쯤이야

쉽게 한다고 하지만

그리워하는 것까지야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먼 훗날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사무친 가시가 되고

당신은 숨가쁜 꽃봉오리가 되는

하나의 뜨거운 몸이 되어요

 

 매화 풍경    /    박종영

겨울 강을 건너온 매화 꽃잎 한 개

절정을 위해 상큼한 바람 앞에 서서

백옥의 여인이다

이내 펄럭이는 치맛자락

그때마다 하얀 속살이 좀처럼 인색하게

붉게 퍼진다

낡은 세월 모두 밀어내는

그대 향기 같아

그 추억의 허리춤을 살며시 당기면

저절로 안겨오는 그리움을 어쩌랴

 

흔들림에 닿아 /이성선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 곳이 더 크게 나를 껴 안는다

흔든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용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봄바람 (양채영·시인, 1935-)

너는

매화꽃 가지에

은은히 숨어 있다

목련꽃에서는 더 환하다

절벽 난간 붉은 진달래꽃

신라적 노인의 헌화가의

간절한 숨소리로

너는 하늘거린다

새소리에도 봄물살에도

허리를 뒤틀며

재잘대고 깔깔댄다

눈을 감아도 너는

내 볼을 부비며

내 가슴을 파고든다

 

 

글쓰기 짧은시 모음

 

/ 김정란

어느 하늘을 돌아왔을까

내 쓸쓸함의 새 집 짓는 소리

살과 살 사이에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그 집 창가에 오래도록

머리 기대고 울지 않는, 우는 여자 하나

나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 머무는 새……젖는 날개

언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 김충규

비가 내린다 하늘의 한 끝에서

함께 출발한 빗방울들은

동시에 땅으로 닿지 않는다 그저

제 보폭으로 걸어 내려올 뿐이다 일찍

도착한 빗방울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쉰다

다 내려와 함께 뭉쳐 냇물을 이룰 때까지 냇물을

이룬 후 강을 이루고 강이 되어 멈춰 있다 큰 뜻 품은

놈이 바다로 향할 때 뒤에서 물살로 세계의 등을 떠민다

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 나희덕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비 잠시 그친 뒤 / 허형만

한나절 퍼붓던 비잠시 그치자

잠자리 무리지어 된장잠자리 노랑잠자리

날개띠잠자리 무리지어 날 수만 있다면

일곱 번이든 여덟 번이든 아픔의 껍질을 벗고

그리움의 속내도 벗고

훠이훠이 청산이 좋아라 잠자리 무리지어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친 뒤.

 

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을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하얀 비 / 송경동

양철지붕 두드리며 밤새 내리는 비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두드리는 겨울 찬비가 될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의 음계에 맞춰

내 노래 조율하는 법을 몰라 내 노래는 내가 죽어도

내 목 밖에서 객처럼 서성거릴 것인가

밤새 내 영혼을 두드리는 하얀 비

 

바람편지 /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가을비 내리는 날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행복

밤이 깊도록

벗 할 책이 있고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됐지

그 외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친구여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인은 있어야 하겠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승부에 집착하지 말게나

3욕이 지나치면

벗을 울린다네.

 

겨울나무 /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마지막 사랑 / 장석주

사랑이란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이다

나 그대에 취해

그대의 캄캄한 감옥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아기 하나 태어나고 바람이 분다

바람부는 길목에 그토록 오래 서있었던 까닭은

돌아오는 길 내내

그대를 감쌌던 내 마음에서

그대 향기가 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멀리 되돌아 오는 길이다

헤어짐을 준비하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보내줄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사랑은 결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외려 너를 점점 멀리 두는 데

익숙해지는 일이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조용히 너를 보내겠다는 뜻이다.

보내고 나서 나는, 하염없이

슬픔에 빠져 있겠다는 뜻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가슴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게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를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도 못 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바람 속을 걷는 법 3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허구 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 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사 랑 /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네가 가던 그날은 /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사랑의 진리 / 원태연

 

만날 인연이 있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지나쳐도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헤어져야 할 인연인 사람은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엇갈린 골목에서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진리이기도 하다.

 

잡초 / 이 성 재

 

한겨울 잡초는 제 몸을 말려

동면하듯 누워 지낸다.

 

오로지 몸을 세울 그날을 위해

겉을 감추고

때가 되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는다.

 

세월의 옷을

갈아입는다.

 

세월에 무딘 내 몸은

한겨울의 옷은 갈아입었지만

마음의 옷은 아직도

지난 겨울의 옷 그대로구나.

 

하여

너는 잠시 나의

스승이 된다.

 

산 아래 살면서 / 김 선 자

 

이른 아침

신문을 집어 들고

산을 본다

 

모진 말 견디기 힘들 때

마당에 나와 서서

산을 본다

산도 수심 가득히 나를 본다

 

내가 슬프면

산도 슬프고

내가 외롭고 힘들면

산도 외롭고 힘드나 보다

 

산 아래 살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우리 마음 속에서 싹이 트는 것을‥‥‥‥

 

헹구는 마음      / 김 성 자

 

안개 자욱한 새벽길
누구의 발자국
지나가지 않은 숲가에
선한 아기 눈망울 같은
이슬들을 모아

이별이 머물던 자리
칼바람이 지난 자리
그 울음이 묻은 상념
헹구고 헹군다.

갓 벙글은 목련꽃
속살처럼
순결함을 위해
마음을 헹군다.
하늘에 닿고 싶은 내 마음
그래서 오늘도 헹구며 살아간다.

 

봄 편지 /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기다림의 대천항 연가 / 송미숙

 

파도를 품에 보듬어

해지는 밤바다는 빈 밥그릇

두 손 모으는 정화수에

기다림은 하이얀 소금 꽃

어디 먼 바다 우렛소리

등댓불 걱정스레 깜박이는데

나아질 수 없는 상사병

아낙은 정화수 곁에서

밤샘으로 하는 뱃멀미로

천만년 긴 시간이 흐르고

떠오르는 태양, 밥그릇 가득

웃음소리 담는다.

 

하얀 미소 속의 구절초 / 송미숙

 

비바람 없는 날은

소쩍새 울음으로

허기진 세월 허기로 달래는

후미진 절벽 모퉁이에

먼산바라기 여인의 고운 자태로

기다림이 익숙한 목이 긴 꽃

세파에 꺾이어 홀로 피어

시나브로 어둠이 내리면

지친 세상이야기들

퇴근하는 발자국소리로

임의 눈물 가득 채운

꽃병을 꿈꾸는 하이얀 미소……

 

봄비 그리고 꽃비 / 이호정

 

바람 불더니 꽃잎 날리고

진자리에 비가 앉습니다

뜨락에 핀 라일락

꽃향기 찬비가 시샘하는지

온종일 향기를 지웁니다

창가에 앉아서

네가 좋아했던 봄비를

내가 좋아 했던 찬빗방울을

헵니다

 

봄이 오면 / 정해정

 

봄이 오면

가로수 꽃비가

내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대

생각에

나는 봄이 된다.

보라 빛

나폴 나폴

나비가 날아와

꽃술에

입맞춤 할 때

나는 봄이 된다

웃음 꽃

한 잎 두 잎

연두 빛

초록 마음에도

봄이 왔다.

 

석류 / 문태준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가을 하늘에 수놓는 마음 / 최영애

 

길을 걷다 주운 것은

벌레 먹은 낙엽뿐인데

내 가슴은

당신을 불러 세워요

당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아

새싹처럼 올라오는 마음

당신에게 전하는 마음 한 잔으로

청량한 가을 하늘을 수놓아요

 

/ 최영애

 

하얗게 덮어 가는

그리움 위로

설레는 작은 세상

추억의 오솔길은

사는 이유가 되고

희망이 되니

그 계절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아

조심스레 엮어 봤던 소망들

하늘 정원

그 길에도 올려 보니

어쩜 저리 예쁜지

 

동백꽃 / 안광수

 

기다리다 못내 울음으로

터뜨린 가련한 동백꽃

그리운 님이여

서글픈 마음이 어찌

내 모습보다 더하겠나요

온몸이 찢어지듯 물든

내 모습이 아픔보다 힘든

그대 그리움에 물든 내 모습

발길 닿는 곳이면 따라

가고픈 사정을 손꼽아

통곡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온몸이

희생돼도 님 곁에 있고

싶어요

 

비가 내리면 / 안광수

 

비가 내리면

그 사람이 생각나고

울고 있는 그 사람이

그리워지며

멍든 가슴에

빗물로 그 사람이

문질러 주니

더욱더 그리워지는

빗물의 소리를

지금도 마음은

그 사람 옆에

있으니까

 

하늘 바라기 / 박종영

 

여름 한 철,

해만 사랑 하다가

영 돌아서지 않는 목줄기,

초가을 바람에 옷고름 풀고

헤픈 웃음 쏟아내도

더욱 미움만 타네

그래서 세상인심은 돌고 도는 것,

골고루 바라기 할 것이지

오메, 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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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모 시 모음 55

가을 편지 ㅡ양광모ㅡ

 

9월과 11월 사이에

당신이 있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천진한 웃음 지으며 종일토록 거니는

흰 구름 속에

아직은 녹색이 창창한 나뭇잎 사이

저 홀로 먼저 얼굴 붉어진

단풍잎 속에

이윽고 인적 끊긴 공원 벤치 위

맑은 눈물처럼 떨어져 내리는

마른 낙엽 속에

잘 찾아오시라 새벽 창가에 밝혀 놓은

작은 촛불의 파르르 떨리는

불꽃 그림자 속에

아침이면 어느 순간에나 문득 찾아와

터질 듯 가슴 한껏 부풀려 놓으며

사ㄹ랑 사ㄹ랑 거리는 바람의 속삭임 속에

9월과 11월 사이에

언제나 가을 같은 당신이 있네

언제나 당신 같은 가을이 있네

신이시여,

이 여인의 숨결 멈출 때까지

10월에 살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ㅡ양광모ㅡ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태양은 당신의 미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당신의 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노래는 당신의 콧노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붉은

노을은 당신의 빰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풋풋한

과일은 당신의 입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날씬한

사슴은 당신의 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무는 당신의 어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들녘은 당신의 가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바람은 당신의 손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당신의 발걸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약속은 당신과의 만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는 당신의 숨소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은 보석은

당신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입니다

 

가장 위대한 시간 ㅡ양광모ㅡ

 

꽃은 언제 피어나는가

태양은 언제 떠오르는가

바람은 언제 불어오는가

다시!

사랑은 언제 찾아오는가

희망은 언제 솟아나는가

용기는 언제 생겨나는가

또 다시!

 

겨울 편지 ㅡ양광모ㅡ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 찾아와 다오

그리움으로 몆 번이고 하늘 바라볼 때

문득 내 가슴에 살포시 내려 앉아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은 오지 말아 다오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아온 듯 아닌 듯 애태우지는 말아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도 아닌 척 찾아와 다오

내 일찌기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 눈으로

무섭게 무섭게 폭설로 쏟아져 다오

부탁이 있다

첫눈처럼이 아니라도 찾아와 다오

봄날에야 내리는 마지막 눈발처럼이라도

한 번은 약속이었다는 듯이 내 가슴에 다녀가 다오

 

결국엔 만날 사람 ㅡ양광모ㅡ

 

내 가슴에

한 번은 만날 사람 있어요

 

내 가슴에

결국엔 만날 사람 있어요

 

그를 만나

영원보다 길게

태양보다 뜨겁게

운명보다 더 운명적으로

사랑 나눠야 할 사람 있어요

 

만약 그가 끝끝내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다 해도

내 가슴에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 있어요

 

겨울이 길다고 어찌 봄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겠어요

 

내 가슴에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사람 있어요

 

굿나잇 슬픔이여 / 양광모

 

슬픔이여 안녕!

안녕 슬픔이여!

다르지

 

굿바이 내 사랑!

굿모닝 내 사랑!

이 다르듯

 

나이를 먹었나봐 자꾸만

안녕 슬픔이여!

인사를 하네

 

하하, 별 일이야 있으려고

굿나잇 슬픔이여!

 

권주가 / 양광모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사랑은 또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우리 살아가는 동안

세 잔쯤은 흠뻑 마셔야 하리

 

사랑이여 내게 오라!

사랑이여 영원하라!

사랑이여 행복하라!

 

그대 가슴에 별이 있는가 / 양광모

 

그는 가슴에 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가슴에 별이 없어

슬픈 사람이다

 

우연히 바라본 밤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두 손 가지런히

모아지지 않는다면

 

그는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홀로 떨어지는

별똥별 같은 사람이다

 

가을이 와도 밤하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아

 

그대,

가슴에 별이 있는가

 

그리운 어머니 / 양광모

 

서러운 날엔

서쪽 바다로 가네

 

노을이 있고

개펄이 있고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해질 무렵에야

노을 빛 얼굴로 돌아오시던

어머니, 이제 막 개펄에서

잡은 꼬막을 넣어 보글보글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 주실 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어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 밥상에 다가앉다가

왠지 그만 목이 꽉 메이겠지만

 

서러운 날엔

서쪽 바다로 가네

 

아직 내가 걸어가야 할 길 멀지만

그리운 어머니 서쪽 바다 일출 되어

내 발길 비춰주는 곳으로

 

꽃으로 지고 싶어라 / 양광모

 

바람 한 점에

꽃잎 수십 점

 

꽃잎 한 점에

시름 수십 점 흩어지네

 

꽃으로 피어나지 못했어도

꽃으로 지고 싶은 봄날에는

 

왜 사냐 건 웃지요

왜 웃냐 건 또 웃지요

 

꽃을 모아 시를 쓰네 / 양광모

 

나는 예쁜 꽃들을 모아

시를 쓰네

 

장미는 주어

 

백합은 목적어

목련은 형용사

 

철쭉은 부사

국화는 동사

 

코스모스는 토씨

 

그러면 그 시는 꽃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언약을 위해 바쳐지려니

 

그 시를 건네는 사람의 손에

향기를 남기고

그 시를 받는 사람의 가슴에

꽃잎을 남기고

그 시를 주고받는 사람의 생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으리

 

당신은 이것을 시적 비유라

생각할 테지만

나는 이것을 인생에 대한 지침이라

말하고 싶네

 

꽃을 모아 시를 쓰듯이

맑은 마음을 모아

고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꽃잎이 모여 꽃이 됩니다 / 양광모

 

꽃잎이 모여 꽃이 됩니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됩니다

햇살이 모여 노을이 됩니다

냇물이 모여 바다가 됩니다

미소가 모여 웃음이 됩니다

기쁨이 모여 행복이 됩니다

두 손이 모여 기도가 됩니다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됩니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됩니다

작은 것이 모여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꿈속 그대 / 양광모

 

그대가 나비일런가

나비가 그대일런가

고운 날개 몸에 걸치니

꿈길 백리 꽃길 천리 열리네

향그런 바람 타고 날아오를 제

온 세상 꽃 수줍어 고개 숙이니

그대여 날개짓 조심하시오

내 가슴 속 태풍 불어온다네

 

나는 참 떨리는 사랑을 / 양광모

 

그대를 만난 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커다란 바윗돌 쿵쿵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 첨벙첨벙

물위를 걸어오는 소리

문득, 문득, 들려오기에

이것이 사랑인가, 이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참 떨리는 사랑을 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에 그대는 다시 더욱 커다란 바위가 되어

 

나의 그리움은 밤보다 깊어 / 양광모

 

그대를 사랑하기엔

하루가 짧고

 

그대를 사랑하기엔

일생이 짧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

새벽 밝아 오니

 

그대를 향한 그리움

밤보다 깊다.

 

내 사랑 지지 않는다 / 양광모

 

꽃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낙엽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사랑이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사랑에 져도

나는 지지 않는다

 

그 사람 지지 않는 한

내 사랑 지지 않는다

 

내 사랑은 가끔 목놓아 운다 / 양광모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너를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내 사랑은 가끔 목놓아 운다

내 사랑은 늘 목메어 운다

 

사랑아,

사랑을 위해 사랑을 떠나온 사랑아

 

꽃이라도 잎을 위해서는 져야만 하는 것

내 슬픈 목련 같은 사랑,

오늘도 흰 눈물 뚝뚝 떨어진다

 

내 안에 머무는 그대 / 양광모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아침이 밝아왔는데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이 밝아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어둠이 밀려왔는데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이 밀려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 안에 머무는 그대

당신을 만난 후로는

사랑 안에 내가 머뭅니다

 

내 안에 부는 바람 / 양광모

 

어떤 이는 팔 할이라도 말하고

어떤 이는 살아야겠다 말하고

어떤 이는 스치운다 말하지만

내 안에 부는 바람은 이리 말하네

날아올라라 저 하늘 끝까지

뛰어들어라 저 태양 속으로

잠들지 않는 내 안에 바람은

늘 그리 뜨겁게 속삭이네

 

내 일생쯤 너에게 / 양광모

 

사무치다는

말 좋으다

 

사랑에

사무쳐

 

그리움에

사무쳐

 

뼛속 깊이

사무쳐

 

심장 깊이

사무쳐

 

내 일생쯤 너에게

사무쳐 살아보고 싶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 양광모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존재하는 영혼의 불꽃이

당신을 사랑하도록 나를 운명짓기 때문에

 

너를 처음 만나던 날 / 양광모

 

내가 살아온

모든 봄날의

모든 꽃잎

 

내가 살아온

모든 여름날의

모든 빗방울

 

내가 살아온

모든 가을날의

모든 낙엽

 

내가 살아온

모든 겨울날의

모든 눈송이

 

너를 처음 만나던 날

일제히 쏟아져 내렸네

물론, 꿈만 같았지

 

너의 꽃말 / 양광모

 

진달래는 불타는 사랑

벚꽃은 흩날리는 이별

목련은 순결한 그리움

작은 꽃 한 송이,

너는 나의 운명

 

진달래처럼 사랑하다

벚꽃처럼 이별해도

목련처럼 그리워할

너의 꽃말은,

나의 운명

 

눈물 흘려도 돼 / 양광모

 

비 좀 맞으면 어때

햇볕에 옷 말리면 되지

 

길가다 넘어지면 좀 어때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되지

 

사랑했던 사람 떠나면 좀 어때

가슴 좀 아프면 되지

 

살아가는 게 슬프면 좀 어때

눈물 좀 흘리면 되지

 

눈물 좀 흘리면 어때

어차피 울며 태어났잖아

 

기쁠 때는 좀 활짝 웃어

슬플 때는 좀 실컷 울어

 

누가 뭐라 하면 좀 어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잖아

 

다시 일어서는 삶 / 양광모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눈물이여 이별이여 죽음이여

 

다시 돌아와 줄 수 있겠니

기쁨이여 사랑이여 영광이여

 

다시 손 내밀어 줄 수 있겠니

순수여 자유여 정열이여

 

다시 말해 줄 수 있겠니

희망이여 용기여 신념이여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나의 품으로 돌려줄 수 있겠니

그대, 스스로 일어서야 할 나의 영혼이여

 

달은 빛나건만 / 양광모

 

달이 밝으니

별이 빛을 잃고

 

사랑이 깊으니

마음이 갈 곳을 잃네

 

만월은 손가락 끝에 있건만

내 님은 어느 하늘 천 리 밖에 있는가

 

당신도 그런가요 / 양광모

 

비가 오는 날이면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이 흐린 날이면

그대가 너무 그리워요

 

비도 오지 않고

눈도 내리지 않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햇살 눈부시게 밝은 날이면

그대가 너무 너무 그리워요

 

어디선가

나를 그리워할

그대여, 당신도 그런가요?

 

동백에게 죄를 묻다 / 양광모

 

동백꽃 피었다 질 제

선운사에 발길 닿았네

바람은 천 년

부처님 미소는 일만 년

나그네, 찻잔 들었다 놓아도

영겁의 시간 흐르건만

동백꽃, 불타던 가슴아

봄 한 철이 어인 덧없음이냐

사랑이 수이 짐이

네 탓이라 말하리

 

마음 꽃 / 양광모

 

꽃다운 얼굴은

한 철에 불과하나

 

꽃다운 마음은

일생을 지지 않네

 

장미꽃 백 송이는

일주일이면 시들지만

 

마음꽃 한 송이는

백 년의 향기를 내뿜네

 

멈추지 마라 / 양광모

 

비가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그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목련꽃 피거든 / 양광모

 

순백의 웨딩드레스

곱게 차려 입은 봄의 신부

 

한 잎 한 잎 옷을 벗어

백의의 침대 만드네

 

뉘라서 저 장미 꽂보다 붉은

사랑 뿌리칠 수 있을까

 

오늘도 목련꽃 아래 서성이며

베르테르는 로테를 기다리네

 

사랑이여! 사랑이여!

목련꽃 피거든 모두 다 이루어지거라

 

무료 / 양광모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아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붉은 장미 무료

흰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바람 부는 봄날에는 / 양광모

 

벚꽃나무 아래

꽃비 흩날리니

술잔마다 꽃잎 떠있네

 

가난이 무슨 걱정이랴

오늘은 꽃잎 깔고

내일은 꽃잎 덮으리

 

바람 부는 봄날에는

동백꽃 닮은 여인을

만나고 싶어라

 

/ 양광모

 

어둠이 아니라 빛을 봄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봄

내가 아니라 우리를 봄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날에도

나의 눈에는 언제나 봄

 

비 오는 날의 기도 / 양광모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때로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는

폭우처럼 쏟아지게 하시고

미움과 분노는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하소서

 

천둥과 번개 소리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의 소리에 떨게 하시고

메마르고 가문 곳에도 주저 없이 내려

그 땅에 꽃과 열매를 풍요로이 맺게 하소서

 

언제나 생명을 피워내는

봄비처럼 살게 하시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가져다주는

단비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하늘 높이 무지개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사랑아 내 부르거든 / 양광모

 

사랑아,

내 부르거든

너 바람같이 달려 오거라

 

천 리 길

가시덤불

산과 바다

뛰어 넘어

 

사랑아,

내 찾거든

너 벼락같이 날아 오거라

 

천당 길

지옥 길

여름과 겨울

뛰어 넘어

 

사랑아,

내 목놓아 울거든

너 벼르던 운명처럼 다가 오거라

 

사랑을 위한 기도 / 양광모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나를 사랑한 사람보다 많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깊이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그를 사랑하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뜨겁게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순결하게 그를 사랑하게 하소서

 

어느 날 불현듯 나를 미워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그를 사랑하게 하시고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잊어버리더라도

변함 없이 그를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며 산 날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 날이 더 많게 하소서

 

그것이 자신의 영혼과 삶을

참사랑 하는 하나뿐인 길임을

사랑 속에서, 오직 사랑의 힘으로 깨닫게 하소서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 / 양광모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

차라리 나는 깊은 강이 되리

 

슬픔이 파도처럼 밀여올 때

차라리 나는 넓은 바다가 되리

 

슬픔이 절벽처럼 찔러올 때

차라리 나는 높은 산이 되리

 

그러며 끄떡없지

그러면 아무 일 없지

 

슬픔이 아무리 큰들

내 생보다야 더 크겠나

 

입술 지그시 깨물고

꿀꺽 목넘겨 그 슬픔 삼키리

 

그러면 끄떡없지

그러면 아무 일 없지

 

아내 / 양광모

 

장미꽃보다

아름답던 그 여인

 

코스모스로

동백으로

목련으로

피고 지더니

 

이제는 내 가슴속

무궁화 꽃 되었네

 

애인을 구합니다 / 양광모

 

애인을 구합니다

까다롭거나 사람을 많이 가리는

성격은 아니므로

그저,

 

예쁘고

상냥하고

날씬하고

세련되고

섹시하고

지적이고

유머가 넘치고

미소가 아름답고

문학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멋지게 추고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보석보다는 꽃을 더 좋아하고

신보다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안주보다는 술을 더 잘 먹으며

무슨 말을 하던지 깔깔깔 잘 웃어주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하늘처럼 생각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찾는다고 말하면

따뜻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 지으며

꼭 찾아봐 주겠노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줄 그런 여자를 구합니다

 

설마,

욕심이 과한 건 아니겠지요?

 

일주일쯤 함께 술을 마시며

지구에서 10억 광년쯤 떨어진 B612 행성에

작은 살림방 하나 마련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의논을 주고받을까 하노니

 

언약 / 양광모

 

사랑이란

천국으로 가는 계단

 

이따끔 미끄러져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나의 눈물은

당신의 미소보다 눈부시고

 

나의 상처는

당신의 사랑보다 찬란하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이것이

마지막 정열은 아니리니

 

오직 한 가지 맹세하는 것은

사랑이여, 지옥불 앞에서도 뒤돌아서지 말자

 

우리 더불어 / 양광모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자*

 

냇물이 냇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강이 되자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마을이 되자

 

내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우리 더불어 사랑이 되자

 

우산 / 양광모

 

삶이란

우산이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 양광모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뿌리마저 뽑아들고 동쪽바다 성끝마을

슬도(瑟島)로 가자

 

눈 기둥처럼 흰 등대

우뚝 서 있고

흐린 날이면 비가

맑은 날이면 파도가

슬픈 사랑의 노래, 365일 비파(琵琶)

연주하는 곳

 

이따금 섬 뒤편으로 날아드는

갈매기 두 마리,

우산 속에 몸 가리고 날개 부비면

등대의 심장에도 붉은 피 돌아

먼바다 돌고래 떼 가슴께 까지 불러들이는 곳

 

결국에야 갈매기 떠나고 나면

또 한 사연 현무암 바위에

작은 구멍 되어 새겨지고

바람 부는 날이면 수 만개의 구멍

일제히 잔울음 터뜨리는 곳

 

운명 같은 사랑 그리운 날엔

슬도 바위에 앉아

흰 새 되어 기다려 보라

 

가을 아침처럼 다가와

꺼지지 않는 불빛

가슴속 등대에 밝혀놓는 사람 있으니

그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조명빨 / 양광모

 

골목길 어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유난히 반들거리는

담쟁이 푸른 잎사귀의

머쓱한 표정

 

흉내내며, 나는

 

곤한 잠에 빠져 있는

백열전등 같은 아내의 얼굴 위로

무언의 빚, 무언의 빚

세례를 쏟아붓나니

 

네 덕분이었구나

내 삶은 조명빨이었다

 

/ 양광모

 

짝이 있다는 건 좋은 일

숟가락이건

젓가락이건

신발이건

친구건

연인이건

새건

꽃이건

은행나무건

바퀴벌레건

슬픔이건

술잔이건

짝이 있다는 건 기쁜 일

그것은 이 서운하기 짝이 없는 우주에서 혼자는 아니라는 뜻일려니

오늘은 그대와. 그대의 짝을 위해

짝 짝 짝

 

춘일서정 / 양광모

 

봄밤

꽃피는 소리에

잠을 깨고

 

봄비

꽃 지는 소리에

꽃잎을 헤아리네

 

욕심도 아서라 슬픔도 아서라

봄볕 꽃 그늘에도 꽃 피어난다

 

하루종일 비 / 양광모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꼭 저리하겠지

 

이른 새벽 첫차를 타고

서둘러 찾아오더니

 

늦은 밤 막차를 타고

아쉬워 아쉬워 돌아가네

 

그리도 보고

싶었던 겔까

 

하루종일 당신에게

묻고 싶었네

 

하루쯤 / 양광모

 

1년에 하루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웃기만 해도 좋을 일이다

 

1년에 하루쯤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그저 따뜻한 말만 건네도 좋을 일이다

 

그래도 364,

마음껏 아파하며 슬퍼할 수 있고

마음껏 투덜거리며 화낼 수 있으니

 

1년에 하루쯤은

모든 상처와 눈물 잊어버리고

그저 감사만으로 살아도 좋을 일이다

 

언제나 그 하루를

내일이나 모레가 아닌 오늘로 만들며

365일 중 하루쯤, 하며 살아도 좋을 일이다

 

한번은 처럼 살아야 한다 / 양광모

 

누구라도

한 때는 시인이였나니

오늘 살아가는 일 아득하여도

그대 꽃의 노래 다시 부르라

 

누구라도

일평생 시인으로 살순 없지만

한 번은 처럼 살아야 한다.

한 번은 인양 살아야 한다

 

그대 불의 노래 다시 부르라

그대 얼음의 노래 다시 부르라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 양광모

 

낮은 곳에선

모두 하나가 된다

 

빗방울이 빗물이 되듯

강물이 바다가 되듯

 

나의 마음자리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와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우리 함께 샘물 같은 사랑이 되자

 

행복의 길 / 양광모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잘 산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더욱 잘 산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그때 찾아옵니다

당신이 자신의 행복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때

 

사랑의 기쁨이 바로 그러하듯이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 양광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따뜻한 것이 그립습니다

따뜻한 커피

따뜻한 창가

따뜻한 국물

따뜻한 사람이 그립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조금이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워하는 일일게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립고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 그립다

돈도 그립고

사람도 그립고

어머니도 그립고

네가 그립고

또 내가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떤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자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사람이 그리워해야 사람이다

 

6월 장미에게 묻는다 / 양광모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붉은 열망과

푸른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6월 장미에게 묻는다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겠니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할 수 있겠니

 

누군가의 가시에 콕 찔려

다시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겠니

 

3월 예찬 / 양광모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곧 끝난다는 것 알지?

언제까지나 겨울이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 알지?

3월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기지개를 켜며 말하네

아직 꽃 피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활짝 피어나리라는 것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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