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혜원 시 모음

1.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1 /용혜원

그대를 만나던 날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내가 하는 말들을
웃는 얼굴로 잘 들어주고
어떤 격식이나 체면 차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하고 담백함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 같아
둥지를 잃은 새가
새 둥지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오랫만에 마음을 함께
맞추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사람입니다.

2.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2 /용혜원

그대의 눈빛 익히며
만남이 익숙해져
이제는 서로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차가운
이 거리에서
나, 그대만 있으면
언제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내 마음에 젖어드는
그대의 향기가 향기로와
내 마음이 따뜻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만
안겨줄 것을 믿고
나도 그대 가슴에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우리 한가롭게 만나
평화롭게 있으면
모든 기름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우리 사랑의 배를 탔으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3.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  용혜원

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내 마음이 그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보이는 것마다
만나는 것마다
어찌 그리도 좋을까요
사랑이 병이라면
오래도록 앓아도 좋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 뒤로는
내 영혼이 그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온 세상 모두 아름다워
보이는 것마다
만나는 것마다
어찌 그리도 좋을까요
사랑이 불꽃이라면
온 영혼을 사두어도 좋겠습니다.

4.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  용혜원

어느 날 하루는 여행을 떠나
발길 닿는 대로 가야겠습니다.
그 날은 누구를 꼭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서 좋을 것입니다.
하늘도 땅도 달라 보이고
날아갈 듯한 마음에 가슴 벅찬 노래를 부르며
살아 있는 표정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골 아낙네의 모습에서
농부의 모습에서
어부의 모습에서
개구쟁이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정류장에서 만난 삶들에게 목례를 하고
산길에서 웃음으로 길을 묻고
옆자리의 시선도 만나
오며 가며 잃었던 나를 만나야겠습니다.
아침이면 숲길에서 나무들의 이야기를 묻고
구름 떠나는 이유를 알고
파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저녁이 오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하룻밤에 만들고 싶습니다
돌아올 때는 비밀스런 이야기로
행복한 웃음을 띄우겠습니다.

5.우리의 만남은 /  용혜원

우리의 처음 만남은
오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인가
서로를 모른 채
스쳐 지나가듯 만났을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는 서로가 낯 모르는 사람으로
눈길이 마주쳤어도
전혀 낯선 사람으로 여겨
서로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만남 속에
마음이 열리고
영혼 가득히 사랑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만남이
우리의 사랑이
이 지상에서
곡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기쁨입니다 축복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숨김 없이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눈동자 속에
그대의 모습이 있고
그대의 눈동자 속에
나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주님의 손길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우리의 삶은 하나의 약속이다 /  용혜원

우리들의 삶은 하나의 약속이다.
장난기 어린 꼬마아이들의
새끼손가락을 거는 놀음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다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설혹 아픔일지라도
멀리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지라도
작은 풀에도 꽃은 피고 강물은 흘러야만 하듯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잊혀진 약속들을 떠올리면서
이름 없는 들꽃으로 남아도
나무들이 제자리를 스스로 떠나지 못함이
하나의 약속이듯이

만남 속에 이루어지는 마음의 고리들을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켜야 한다.
서로를 배신해야 할 절망이 올지라도
지켜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하늘 아래 행복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

삶은 수많은 고리로 이어지고
때론 슬픔이 전율로 다가올지라도
몹쓸 자식도 안아야 하는 어미의 운명처럼
지켜줄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봄이면 푸른 하늘 아래
음악처럼 피어나는 꽃과 같이
우리들이 진실한 삶은 하나의 약속이 아닌가

7.셋방살이 /  용혜원

잡초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이
머무를 곳은 단칸방인 셋방살이
넓디넓은 세상바닥에
발붙일 땅도 없어서
움츠리고 살아감도
죄도 없이 죄 지은 목숨처럼
어깨는 늘 처지고
뱃속은 늘 허전하기만 하였다.

도시의 곳곳엔 공룡의 전시장을 만들듯이
많고 많은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헛물켜듯 바라만 보다가
연중 행사로 찾아오는 봄 그리고 가을
콧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탐스런 열매를 맛보기도 전에
보증금 월세를 올리려는
집주인 마나님의 싸늘해 보이기만 한 눈빛은
이웃나라 처절한 전쟁소식보다
코 앞에 닥친 급보 중의 급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
행복의 둥지는 쉽게 마련될 것만 같은
나이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애숭이가
오직 사랑하는 마음과 꿈에 부푼 마음으로
신혼 살림을 시작해 수년 동안
이리저리 걷어채이듯 셋방살이를 하다 보면
통곡도 못하고 눈물을 삭이며
애증이 쌓여서 어처구니 없는
사내 꼴이 되는 일들이 많고 많았다.

온 세상을 향하여 못난
욕지거리를 수도 없이 해대며
어금니에 힘을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가 머무를 방 한 칸 얻기가
어렵고 어려운 인생문제 물기였다.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버려진 삶처럼 아무도 관심 없이 외로움이 되어
머무를 곳을 찾아 철새가 되는 것이다
낯선 곳으로 값싼 곳으로
찾고 찾아 대문을 두드리면
애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우리 집은 잠만 잘 사람에게
세를 준다는 이유로 말도 못 붙이고
새로 짓고 새로 도배를 했기 때문에
신혼부부에게만 방을 준다기에
마른 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때가
많고 많았던 슬픈 이야기 같은 삶을 살았다.

인생이란 누구든 한번 왔다 가는
머물다 가는 길인데
어차피 모든 인생은 세상살이인 것을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셋방살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우리네 삶은 늘 슬펐다.

어린 자식들 굴비 엮듯 줄줄이 데리고
산동네 달동네 머무를 곳을 찾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
어렵사리 얻은 셋방에
한 식구 덩그렇게 앉으면
감사가 있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애비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마음에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이다.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혼수이불을 넣은
장농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데
언젠가 푸른 대문에 이름 석 자 써놓을 날을
고대하며 바라며
오늘도 이 땅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삿짐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8.사랑이 그리움뿐이라면 /  용혜원

사랑이 그리움뿐이라면
시작도 아니하겠습니다.

오랜 기다림은 차라리 통곡입니다.
일생토록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지금이라도 달려와
웃음으로서 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얀 백지의 글보다는
당신이 보고 있으면
햇살처럼 가슴에 비춰옵니다.

사랑도 싹이 나 자라고
꽃 피어 열매 맺는 사과나무처럼
계절 따라 느끼며 사는 행복뿐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 이별이 있었다면
시작도 아니했습니다.

9.내 작은 소망으로 /  용혜원

내 작은 가슴에
소박한 꿈이라도 이루어지면
그 작은 기쁨에 취하여
내 마음의 길로만 갑니다.

언제나 당신 앞에 설 때면
짖궂은 개구쟁이처럼
더렵혀진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아픔도
사랑의 빛으로 주셨으니
그 빛 하나 하나가
우리 가슴에 사랑으로 비추입니다.

오늘은 내 작은 소망이나마
그 빛 하나 하나가
우리 가슴에 사랑으로 비추입니다

오늘은 내 작은 소망이나마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마음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주여!
기도의 다리를 놓아주십시오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10.나도 파도칠 수 있을까 /  용혜원

바람이 바다에
목청껏 소리쳐 놓으면
파도가 거세게 친다.

나는 살아오며 제대로 소리지르지
못한 것만 같은데
바람을 힘입어 소리지르는 바다

해변가에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돌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폭풍우 몰아치듯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마음에 욕망이
불붙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내 마음에도
거친 바람이 불어와
목청을 행구고 지나가면
세상을 향해 나도 파도칠 수 있을까

늘 파도에 시달려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이 바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소리치고 싶은
열정이 남아있는 탓일까

갯바람을 쐬면
도시에서 온 나는
갯적은 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세상을 향해 나도 파도치고 싶어진다.

11.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  용혜원

수줍게 돋아나는
봄날의 잎새들 마냥
내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풋풋하고 청순한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
하늘이 내려준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삶의 길에서 모두들
그토록 애타게 찾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쳤습니다.

그대를 본 순간부터
그대의 얼굴이 내 가슴에
자꾸만 자꾸만 들이닥쳤습니다.

그대는 내 마음을
와락 끌어당겨
오직 그대에게만 고정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살아가며 모든 아픔들이 삭혀지고 나면
우리 사랑은 아름다워지고
더 가까워지고만 싶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낙엽지는 날까지
그대 내 앞에 서 있던 날처럼
사랑하고만 싶습니다.

12.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  용혜원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잠시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와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기쁠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날마다 언제나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은 지상에서 영원까지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의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지상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이여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3.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  용혜원

삶이란 바다에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
낭만이 흐르고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서로의 눈빛을 통하며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흐르는 계절을 따라
사랑의 거리를 함께 정답게 걸으며
하고픈 이야기를 정답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함께 놓을 수 있으며
마주 바라보며 식사를 함께 할 수 있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편안히 눕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를 소유할 수 있으며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나눌 수 있으며
함께 꿈을 이루어 가며
기쁨과 웃음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삶의 울타리 안에
평안함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삶이란 들판에
거세지 않게 가슴을 잔잔히 흔들어 놓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14.우리 함께 가는 길에  /  용혜원

그대를 만남이
그대를 찾음이
나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행복이기에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하나 하나가
한 떨기 꽃이 될 수만 있다면
그대 가슴에 안겨 주고만 싶습니다.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대에게만은
별이 되어 빛나고 싶습니다.
꽃이 되어 피어나고 싶습니다.

15.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  용혜원

 그대를
늘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무대도
언제 어느 때에
막이 내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내 눈앞에 있을 때
나의 삶은 희망입니다.

어느 날 혹여나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그대가 곁에 있다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힘으로
나는 날마다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심장이
그대로 인해 숨쉬고 있기에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16.계절이 지날 때마다  /  용혜원

계절이 지날 때마다
그리움을 마구 풀어놓으면

봄에는
꽃으로 피어나고
여름에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가을에는
오색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겨울에는
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 내리며
내게로 오는 그대

그대 다시 만나면
개구쟁이 같이
속없는 짓 하지 않고
좋은 일들만 우리에게 있을 것만 같다.

그대의 청순한 얼굴
초롱초롱한 눈이 보고 싶다
그 무엇으로 씻고 닦아내고
우리의 사랑을 지울 수는 없다.

사사로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남은 삶을 멋지게 살기 위하여
뜨거운 포옹부터 하고 싶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그대 내 앞에 걸어올 것만 같다.

17.그대 내 가슴에 손을 얹으라 /  용혜원

뼈마디 마디마디
핏줄 핏줄마다
그리움으로 채워 놓고
그리움으로 흐르게 하더니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생각나게 하는 그대

왜 내 마을을 헤집어 놓으려 하는가

거부하는 몸짓으로
거부하는 손짓으로
아무런 말하지도 않는 침묵이
내 가슴에 못을 박는다.

구름이 흘러가도 흔적이 없듯
그대 그리움만 만들어 놓고
어디로 그리도 빨리 치닫는가

핏발 선 눈동자로 바라보며
낚시에 물린 목숨처럼
나를 조롱하지 말라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언제나 텅 비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그대여

사랑으로 인해 열 오른 몸
애처롭게 우는 울음으로
다시 그리움으로 금이 가지 않도록
그대 내 가슴에 다소곳이 웃으며 손을 얹으라

그대를 언제나 사랑하는 내 마음은
재처럼 사그라들지 못하고
날마다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그대 내 가슴에 손을 얹으라

18.내 목숨 꽃 지는 날까지 1 /  용혜원

내 목숨 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할퀴었던
상처투성이에서도
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내 마음도 마음껏
풀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한동안 모아두었던
그리움도 꽃으로 피워내고 싶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꽃향기로
웃음이 가득한 꽃향기로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뒤쫓아오고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앞서갑니다.

내 목숨 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19.내 목숨 꽃 지는 날까지 2 /  용혜원

내 목숨 꽃 피었다가
그 어느 날 소리 없이 지더라도
흐르는 세월을 탓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모두들 떠나는
사람들 속에
나도 또 한 사람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떠나야만할
이 삶을 기뻐하며 살고 싶다.

삶의 시간들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만나는 사람,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가

내 고독에 너무 깊숙이 파묻혀
괴로워하지 않고
작은 기쁨도 잔잔한 사랑도
함께 나누며 살고 싶다.

내 목숨 꽃 피었다가
바람이 볼 때마다 떨어지더라도
모든 것을 감사하며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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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 모음 67편

1.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2.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3.보통 사람

김남조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4.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5.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6.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7.그대 있음에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8.물망초

김남조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9.사랑

김남조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10.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11.사랑한 이야기

김남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12.상사(想思)

김남조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13.아가(雅歌) 2

김남조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네게로 가리

14.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15.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16.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17.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18.가을 햇볕에

김남조

보고싶은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19.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20.나의 시에게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21.너에게

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22.다시 봄에게

김남조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23.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24.산에 와서

김남조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25.산에 이르러

김남조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26.산에게 나무에게

김남조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27.상심수첩

김남조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천 몇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 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28.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29.새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30.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31.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32.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33.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34.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35.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36.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37.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38.시인(詩人)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39.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40.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41.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42.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43.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44.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45.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46.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47.어머님의 성서(聖書)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48.연

김남조

연 하나
날리세요
순지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49.영원 그 안에선

김남조

이별의 돌을 닦으며
고요하게 있자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려는 잎들이
잠시
최후의 기도를 올리듯이

아무것도 허전해하지 말자
가을나무의 쏟아지는 잎들을 뜯어 넣고
바람이 또 무엇인가를
빚는다고 알면
그만인걸

눈물 다해
한 둘레 눈물 기둥
불망인들 닦고 닦아
혼령 있는 심연 있는
거울이 되도록만 하자

이별의 문턱에 와서
마지막 가장 어여쁘게 내가 있고
영원 그 안에선
그대 날마다
새로이 남아 계심을
정녕 믿으마

말로는 나타 못낼
위안의 저 청람빛,
하늘 아래 생겨난 모든 일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거두어 주시리라

50.오늘

김남조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51.올해의 성탄

김남조

정직해야지
지치고 어둑한 내 영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내밀한 광기
또 오욕
모든 나쁜 순환을 토혈인 양 뱉고
차라리 청신한 바람으로
한 가슴을 채워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지등을 들고 성당에도 가지만
자욱한 안개를 헤쳐
서먹해진 제 영혼을 살피는 날이다

유서를 쓰는,
유서에 서명을 하는,
다시 그 나머지 한 줄의 시를 마지막인 양 끄적이는
어리석고 뜨거운 나여

만약에 만월 같은 연모라도 품는다며는
배덕의 정사쯤 쉽사리 저지를
그리도 외롭고 맹목인 열에
까맣게 내 두뇌를 태워 가고 있다

슬픔조차 신선하지가 못해
한결 슬픔을 돋우고
어째도 크리스마스는 마음놓고 크게 우는 날이다
석양의 하늘에 커다랗게 성호를 긋고
구원에서 가장 먼 사람이
주여, 부르며 뿌리째 말라 버린 겨울 갈대밭을
달려가는 날이다

52.은혜

김남조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53.음악

김남조

음악 그 위험한 바다에 빠졌었네
고단한 도취에 울어버렸네

살아 보아도
내 하늘에 무궁한 구름은
哀傷,
많은 詩를 썼으나 어느 한 귀절도
나를 건져 주지 못했다

사람 하나
그 복잡한 迷惑에 반생을 살고
나머지 쉽사리 입는
상처의 버릇

눈 오는 숲
나무들의 화목처럼
어진 일몰 후
편안한 밤처럼 ……
있고 싶어라

참말은 무섭고
거짓말은 부끄럽워

54.의자

김남조

세상에 수많은 사람 살고
사람 하나에 한 운명 있듯이
바람도 여러 바람
그 하나마다
생애의 파란만장
운명의 진술서가 다를 테지
하여 태초에서 오늘까지 불어 와

문득 내 앞에서
나래 접는 바람도 있으리라
그를 벗하여
나도 더 가지 않으련다

삶이란 길가는 일 아니던가
모든 날에 길을 걷고
한 평생 걸어 예 왔으되
이제 나에게
삶이란

도착하여 의자에 앉고 싶은 것
겨우겨우 할 일 끝내고
내명 얻으려 좌선에 든
바람도사 옆에서
예순 해 걸어온 나는
예순 해 앉아 있고 싶노니

55.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김남조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테니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나 당신이 방황을 할 때
그저 이유 없이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까요.

56.인인(隣人)

김남조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난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둥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잇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57.잠

김남조

그의 잠은 깊어
오늘도 깨지 않는다

잠의 집
돌벽 실하여
장중한 궁궐이라 하리니
두짝 문 맞물려 닫고
나는 그
충직한 문지기라

숙면의 눈시울이어
평안은 끝없고
만상의 주인이신 분이
잠의 恩賜를
그에게 옷 입히시니
자장가 없이도
잠은 더욱 깊어라

그의 잠은 깊고
잠의 평안
한바다 같아라
잠의 은사를 배례하리니
세월이 흘러
내가 잠들 때까지
잠을 섬기는
나는 그 불침번이리

58.장엄한 숲

김남조

삼천 년 된 거목들의 숲은
겨우내 끝이 안 보이는 설원雪原
나무들은
그 눈 벌에 서 있습니다

어느 겨울
그 중의 한 나무가
눈사태에 떠밀려 쓰러질 때
하느님이
품 속에 안으셨습니다
나직이 이르시되
아기야 쉬어라 쉬어라 ……

하느님께선
이 나무가 작은 씨앗이던 때를
기억하시며
거대한 뿌리에서 퍼져나간
젊은 분신들도 알으십니다.

쉬어라 쉬어라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날
자애로운 안도安堵이셨습니다
가령에
삼천 년을 노래해온 새가 있다면
쉬어라 쉬어라고 하실 겝니다
이 나무 기나긴 삼천 년을
장하게 맥박쳐 왔으니까요

레드우드 품종의
그 이름 와워나로 불리우는
이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수면이요 안식이며
이후 삼천 년 동안
그는 잠자는 성자일 겝니다

장엄한 숲에서
이 겨울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한 설원에서

59.저무는 날에

김남조

날이 저물어 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 간다
사람의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 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지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이 품안에
눈감는 것

60.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61.참회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62.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 쓰면 한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63.평안스런 그대

김남조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 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있는
겨울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모두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64.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나본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테어 났기에
어쩔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 질까 두려워 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져 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65.하느님의 동화

김남조


절망이 이리도 아름다운가
홍해에까지 쫓긴 모세는
황홀한 어질머리로 바다를 본다

하느님이 먼저 와 계셨다
이르시되
너의 지팡이로 바다를 치면
너희가 건널 큰 길이 열릴 것이니라.
하느님께선
동화를 쓰고 계셨다
지팡이 끝이 가위질처럼
바다를 두 피륙으로 갈라
둥글게 말아 올리며
길을 내는 대목,
동화는
이쯤 쓰여지고 있었다

모세의 지팡이
물을 쳤으되
실바람 한 주름이 일 뿐이더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믿음으로 길이 열려
그들이 모두 바다를 건넜다

홍해 기슭 태고의 고요에
홀로 남으신 하느님,
오늘의 동화는
괜찮게 쓰인 편이라고
저으기 즐거워 하신다

66.허망(虛妄)에 관하여

김남조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67.후 조
             

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마주 불러 볼 정다운 이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선다

갓 추수를 해간 허허한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인생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었음을
눈 멀 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한 개의 그리움
별이여 이 타는 듯한 가책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정복한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에 그 옛날에
이러 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없는 얘기 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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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시 모음 70

1.感懷

김시습

事事不如意 사사불여의 :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
愁邊醉復醒 수변취부성 : 시름 속에 취했다가 다시 깨노라
一身如過鳥 일신여과조 : 새가 날아가듯 내 이 몸은 덧없고
百計似浮萍 백계사부평 :그 많던 계획도 마름풀잎처럼 떠버렸네
經事莫 (厭+食 포식할 염)腹 경사막염복 : 경사(經事)를 뱃속에 너무 채우지 말게
才名空苦形재명공고형 : 재주와 이름은 헛되이 몸만 괴롭힌다네
唯思高枕睡 유사고침수 : 베개 높이 베고서 잠잘 생각이나 하리니
更載夢虞庭 갱재몽우정 : 꿈에나 순임금 만나 말을 나눠 보리라.

2.관소 灌蔬

김시습

蕭散遺人事(소산유인사) : 쓸쓸히 인생만사 잊고
持瓢灌小園(지표관소원) : 박을 들고 작은 밭에 물을 준다
風過菜花落(풍과채화락) : 바람이 스치지 나물꽃 떨어지고
露重芋莖飜(노중우경번) : 이슬이 심하게 내려 토란 줄이 뒤집히네
地險畦町短(지험휴정단) : 땅이 험해 밭 두둑 짧고
山深草樹繁(산심초수번) : 산이 깊어 초목은 무성하도다
晩年勸學圃(만년권학포) : 늙어서 채소재배 배우기를 권하나
不是效如樊(불시효여번) : 번지를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라오

3.구우久雨

김시습

茅連日雨(모첨연일우) : 초가에 연일 비 내려
且喜滴庭際(차희적정제) : 처마에 물방울지니 우선은 기쁘구나
底事消淸晝(저사소청주) : 무슨 숨겨진 일로 깨끗한 하루 보낼꺼나
窮愁著隱書(궁수저은서) : 궁색하고 근심스러우니 은서나 지어볼리라

4.기우 1寄友

김시습

望中山水隔蓬萊(망중산수격봉래) : 눈 앞에 산과 물은 봉래산에 가리고
斷雨殘雪憶幾回(단우잔설억기회) : 그친 비와 녹은 눈 속에서 얼마나 그리웠는지
未展此心空極目(미전차심공극목) : 이 마음 펴지 못해 공연히 눈만 치뜨고
夕陽無語倚寒梅(석양무어의한매) : 석양에 말없이 차가운 매화나무에 기대어본다

5.기우 2寄友

김시습

爲因生事無閑暇(위인생사무한가) : 살아가는 일로 한가할 때가 없어
孤負尋雲結社期(고부심운결사기) : 구름 찾아 결사하는 기약을 홀로 저버렸다
走殺紅塵何日了(주살홍진하일료) : 달려가 세상풍진 없애는 일 어느 때나 다할까
碧山回首不勝思(벽산회수불승사) : 푸른 산을 돌아보니 그대 생각 못잊겠구나

6.기우 3寄友

김시습

落盡閑花春事去(낙진한화춘사거) : 다 진 한가한 꽃나무, 봄날은 가는데
一封消息却來無(일봉소식각래무) : 한 통의 소식조차 오지를 않는구나
想思夢罷竹窓靜(상사몽파죽창정) : 그리운 꿈 깨니 대나무 창은 고요하고
望帝城中山月孤(망제성중산월고) : 서울 바라보니, 산 위의 달은 외롭기만 하다


7.기우 4寄友

김시습

東望鷄林隔片雲(동망계림격편운) : 동뽁으로 조각구름에 가린 계림 바라보니
胡然未易得逢君(호연미이득봉군) : 어찌하여 그대 마나기 이렇게도 쉽지가 않은가
請看天外孤輪月(청간천외고륜월) : 청컨대, 하늘 밖 외로운 궁근 달을 보시게나
兩地淸輝一樣分(양지청휘일양분) : 두 곳에 맑고 밝은 빛 꼭 같이 보내주고 있다오

8.落葉낙엽

김시습

落葉不可掃(낙엽불가소) : 낙엽을 그냥 쓸어서는 안 되네
偏宜淸夜聞(편의청야문) : 맑은 밤 그 소리 듣기가 좋아서 라네
風來聲慽慽(풍래성척척) : 바람 불면 우수수 소리내고
月上影紛紛(월상영분분) : 달 떠오르면 그림자 어지러워요
鼓窓驚客夢(고창경객몽) : 창을 두드려 나그네 꿈 깨우고
疊?沒苔紋(첩체몰태문) : 섬돌에 쌓이면 이끼 무늬도 지우지요
帶雨情無奈(대우정무내) : 비에 젖은 낙엽을 어찌할꺼나
空山瘦十分(공산수십분) : 늦은 가을, 빈산이 너무 초라해
.
9.도중途中

김시습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맥의 나라 이 땅에 첫눈이 날리니,
맥국초비설 춘성목엽소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해지네.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가을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추심촌유주 객구식무어 객창에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보겠네.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웠고,
산원천수야 강요지접허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고홍락일외 정마정주저 나그네 발걸음 가는 길 머뭇거리네
.
10.途中卽事도중즉사

김시습

一村蕎麥熟(일촌교맥숙) : 온 고을에 메밀이 익어
十里割黃雲(십리할황운) : 십리 길을 누런 구름으로 갈라놓았다
歸思西風遠(귀사서풍원) :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서풍은 멀기만 한데
千山日已?(천산일이훈) : 온 산에 해는 이미 땅거미 진다
.
11.도중途中

김시습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맥의 나라 이 땅에 첫눈이 날리니,
맥국초비설 춘성목엽소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해지네.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가을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추심촌유주 객구식무어 객창에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보겠네.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웠고,
산원천수야 강요지접허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고홍락일외 정마정주저 나그네 발걸음 가는 길 머뭇거리네
.
12.途中卽事도중즉사

김시습

一村蕎麥熟(일촌교맥숙) : 온 고을에 메밀이 익어
十里割黃雲(십리할황운) : 십리 길을 누런 구름으로 갈라놓았다
歸思西風遠(귀사서풍원) :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서풍은 멀기만 한데
千山日已?(천산일이훈) : 온 산에 해는 이미 땅거미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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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蘆原卽事노원즉사

김시습

草綠長堤小逕斜(초녹장제소경사) : 긴 언덕 풀은 푸르고 작은 길 비탈지고
依依桑有人家(의의상자유인가) : 산뽕나무 무성한데 인가가 나타난다
溪楓一抹靑煙濕(계풍일말청연습) : 시냇가 단풍나무 문지르니 푸른 안개에 젖어있고
十里西風吹稻花(십리서풍취도화) : 십리 길에 하늬바람 벼꽃에 불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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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晩意만의

김시습

萬壑千峰外(만학천봉외) : 온 골짜기와 봉우리 저 너머
孤雲獨鳥還(고운독조환) : 외로운 구름과 새 돌아오네
此年居是寺(차년거시사) :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만
來歲向何山(내세향하산) : 내년에는 어느 산을 향할까
風息松窓靜(풍식송창정) : 바람 자니 소나무 창 고요하고
香銷禪室閑(향소선실한) : 향불 스러지니 스님의 방 한가롭다
此生吾已斷(차생오이단) : 이승을 내가 이미 끊어버렸으니
棲迹水雲間(서적수운간) : 내 머문 자취 물과 구름에만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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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目羞목수

김시습

經書今棄擲(경서금기척) : 경서 이제 내던지고
已是數年餘(이시수년여) : 이미 몇 년이 지났구나
況復風邪逼(황복풍사핍) : 하물며 다시 사악한 바람에 쫓겨
因成齒髮疎(인성치발소) : 이빨과 머리털도 성글어졌다
奇爻重作二(기효중작이) : 일 효가 겹쳐져 이 효로로 보이고
兼字化爲魚(겸자화위어) : “兼”자가 변하여 “魚”자로 보인다
雪夷看天際(설이간천제) : 눈이 덮인 속에서 멀리 하늘 끝을 바라보니
飛蛟滿大虛(비교만대허) : 나는 모기들만 하늘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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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몽중작 夢中作

김시습

一間茅屋雨蕭蕭(일간모옥우소소) : 한 칸 초가에 우수수 비 내리니
春半如秋意寂廖(춘반여추의적료) : 봄이 한참인데도 가을처럼 마음이 적료하다
俗客不來山鳥語(속객불래산조어) : 세상 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는데
箇中淸味?誰描(개중청미천수묘) : 그 중에 맑은 맛은 누구에게 부탁하여 그려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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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無題 무제

김시습

終日芒鞋信脚行(종일망혜신각행) : 종일토록 짚신 신고 내키는 대로 걸어
一山行盡一山靑(일산행진일산청) : 산을 다 걸으면 또 푸른 산
心非有想奚形役(심비유상해형역) : 마음은 물건이 아닌데 어찌 육체의 노예가 되며
道本無名豈假成(도본무명기가아) : 진리는 이름이 없거늘 어찌 위선을 행하리오
宿露未晞山鳥語(숙노미희산조어) : 밤이슬 마르지도 않는 새벽에 사내들 지저귀고
春風不盡野花明(춘풍부진야화명) : 봄바람 살랑 살랑 불어오고 들꽃은 밝구나
短?歸去千峰靜(단공귀거천봉정) : 짧은 지팡이 짚고 돌아가니 수 천 봉우리 고요하고
翠壁亂煙生晩晴(취벽난연생만청) : 맑은 저녁 하늘 이끼 낀 푸른 절벽에 안개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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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薄暮 1박모

김시습


風棲鵲?松枝(파풍서작료송지) : 바람이 두려워 나무에 깃던 까치 소나무 끝에 시끄럽고
天氣層陰日暮時(천기층음일모시) : 하늘 기운 층층이 어두워져 저물어 가는 때
雪打明窓淸坐久(설타명창청좌구) : 눈발이 창을 때려 오래도록 고요히 방에 앉아
更看山月上城?(갱간산월상성추) : 산의 달, 성 모퉁이에 떠오르는 것을 다시 본다


19.薄暮2 박모2

김시습

爐灰如雪火腥紅(노회여설화성홍) : 화로의 재가 눈 같은데 불빛 고기 살같이 붉고
石鼎烹殘茗一鍾(석정팽잔명일종) : 돌솥에는 차를 끊이고 있다
喫了上房高臥處(끽료상방고와처) : 차 마시고 상방에 높이 누운 곳에
數聲淸磬和風松(수성청경화풍송) : 몇 차례 맑은 경쇠소리 솔바람에 화답한다

20.渤海 발해

김시습

渤海秋深驚二毛(발해추심경이모) : 발해에 가을 깊으니 새치머리 놀라게하고
鴻飛遵渚求其曹(홍비준저구기조) : 기러기도 물가에 내려 제 무리를 찾는구나
莫思閑事祗自勞(막사한사지자노) : 한가한 일 생각치 말자, 나만 피곤하구나
且與?杓同死生(차여당표동사생) : 음악과 술과 생사를 같이하여
逞盡丈夫平生豪(령진장부평생호) : 장부의 평생호기를 다 부려보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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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訪隱者 1방은자

김시습

白石蒼藤一逕深(백석창등일경심) : 흰 돌과 푸른 등나무 사이로 좁은 길 깊숙이 나 있고
三椽茅屋在松陰(삼연모옥재송음) : 솔 그늘 아래 석가래 세 개 걸친 작은 띳집이 보인다
紛?世上無窮爭(분운세상무궁쟁) : 분분한 세상살이 끝없는 싸움
不入伊家一寸心(불입이가일촌심) : 한 치 작은 그 집엔 들어가지 않으리라


22.訪隱者 2방은자

김시습

自言生來懶折腰(자언생래라절요) : 태어나서부터 허리 굽히기 싫어
白雲靑?恣逍遙(백운청장자소요) : 흰 구름 푸른 산을 마음대로 소요한다네
松風吹送前山雨(송풍취송전산우) : 솔바람 불어 앞산의 비를 보내어
一朶紫荊花半凋(일타자형화반조) : 한 떨기 자형화가 반이나 시들어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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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俯仰 부앙

김시습

俯仰杳無垠(부앙묘무은) : 내려보고 쳐다봐도 아득히 끝없는데
其中有此身(기중유차신) : 그 가운데 이 몸 태어나 사는구나.
三才參竝立(삼재참병립) : 삼재에 참여하여 나란히 서니
一理自相分(일리자상분) : 한 가지 이치가 자연히 나누어진다.
形役爲微物(형역위미물) : 몸에 구속되어 보잘것없는 사람 되니
躬行卽大君(궁행즉대군) : 몸소 실천하면 큰 인물이 되는 법이도다.
古今何間斷(고금하간단) : 예와 지금에 무슨 단절이 있을까
堯舜我同群(요순아동군) : 요임금 순임금도 나와 한 무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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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사청사우 乍晴乍雨

김시습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 잠깐 개었다 비 내리고 내렸다가 도로 개이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 인심이야
譽我便是還毁我(예아편시환훼아) : 나를 칭찬하다 곧 도리어 나를 헐뜯으니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 명예를 마다더니 도리어 명예를 구하게 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불쟁) :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네
寄語世人須記認(기어세인수기인) : 세상 사람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알아두소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 기쁨을 취하되 평생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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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산거山居

김시습

山勢周遭去(산세주조거) : 산세는 주변을 둘러싸고
江流?妙廻(강류표묘회) : 강물은 흘러 옥빛처럼 흘러간다
一鳩鳴白晝(일구명백주) : 비둘기 한 마리 한낮을 울어대고
雙鶴啄靑苔(쌍학탁청태) : 한 쌍의 학은 푸른 이끼 쪼아댄다
笏看雲度(주홀간운도) : 홀을 잡고 흘러가는 구름 바라본다
吟詩逼雨催(음시핍우최) : 시 읊으며 비를 재촉하노라
我如陶然靖(아여도연정) : 나는 도연명과 같아서
守拙碧雲堆(수졸벽운퇴) : 푸른 구름 더미에 쌓여 졸함을 지켜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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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서금오신화후 1書金鰲新話後

김시습

矮屋靑氈暖有餘(왜옥청전난유여) : 작은 집에 푸른 담요엔 따스한 기운 넉넉하고
滿窓梅影月明初(만창매영월명초) :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하고 달이 처음 밝아온다
挑燈永夜焚香坐(도등영야분향좌) : 기나긴 밤을 등불 돋우고 향 사르고 앉으니
閑著人間不見書(한저인간불견서) : 한가히 세상에서 보지 못한 글을 짓고 있노라


27.서금오신화후 2書金鰲新話後

김시습

玉堂揮翰已無心(옥당휘한이무심) : 옥당에서 글짓는 것은 이미 마음에 없고
端坐松窓夜正深(단좌송창야정심) : 소나무 창에 단정히 앉으니 깊은 밤이라
香?銅甁烏?靜(향관동병오궤정) : 향관과 동병과 오궤는 고요하기만 한데
風流奇話細搜尋(풍류기화세수심) : 풍루스런 기이한 이야기 자세히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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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서민 敍悶

김시습

八朔解他語(팔삭해타어) : 여덟 달만에 남의 말 알아들었고
三朞能綴文(삼기능철문) : 세 돌에 글을 엮을 수 있었네
雨花吟得句(우화음득구) : 비와 꽃을 읊어 싯구를 얻었고
聲淚手摩分(성루수마분) : 소리와 눈물 손으로 만져 구분했네
上相臨庭宇(상상림정우) : 높은 정승 우리 집에 찾아 오셨고
諸宗?典墳(제종황전분) : 여러 종중에서 많은 책을 선사했네
期余就仕日(기여취사일) : 내가 벼슬하는 날에는
經術佐明君(경술좌명군) : 경학으로 밝은 임금 도우려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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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설복노화 雪覆蘆花

김시습

滿江明月照平沙(만강명월조평사) : 강에 가득한 밝은 달빛 모래벌을 비추고
裝點漁村八九家(장점어촌팔구가) : 어촌 열 아홉 가구를 환하게 장식하는구나
更有一般淸絶態(갱유일반청절태) : 다시 하나의 맑고도 뛰어난 자태 있으니
白雪覆蘆花(개개백설복노화) : 차갑게도 흰 눈이 갈대꽃을 눌러 덮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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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설효1雪曉

김시습

滿庭雪色白(만정설색백개개) : 뜰에 가득한 눈빛은 희고 아름다워라
瓊樹銀花次第開(경수은화차제개) : 옥나무 은빛 눈꽃이 차례로 피어나는구나
向曉推窓頻著眼(향효추창빈저안) : 새벽 되어 창문 열고 자주 눈을 돌리니
千峰秀處玉崔嵬(천봉수처옥최외) : 일천 봉우리 빼어난 곳에 옥이 높게도 쌓였구나


31.설효2雪曉

김시습

我似袁安臥雪時(아사원안와설시) : 내가 원안처럼, 눈에 누워있어
小庭?掃捲簾遲(소정용소권렴지) : 조그마한 뜰도 쓸기 싫고, 발마저 늦게 걷는다
晩來風日茅暖(만래풍일모첨난) : 늦어 부는 바람과 해, 초가집 처마 따뜻해져
閒看前山落粉枝(한간전산락분지) : 한가히 앞산을 보니, 나무가지에서 떡가루가 떨어진다


32.설효3雪曉

김시습


東籬金菊褪寒枝(동리금국퇴한지) : 동쪽 울타리에 금국화의 퇴색된 울타리
霜千枝垂(상친천지개개수) : 서리 내의 천 가지에 하나하나 널어 놓았다
想得夜來重壓雪(상득야래중압설) : 생각건데, 밤동안에 무겁게 눌린 눈
從今不入和陶詩(종금불입화도시) : 이제부터 도연명의 화운시에도 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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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소우疏雨

김시습

疏雨蕭蕭閉院門(소우소소폐원문) : 소슬한 가랑비에 문을 닫고
野棠花落擁籬根(야당화락옹리근) : 해당화 뜰어져 울타리밑에 쌓였구나
無端一夜芝莖長(무단일야지경장) : 까닭없이 밤새도록 지초 줄기 자라나
溪上淸風屬綺園(계상청풍속기원) : 개울 위로 불어오는 맑은 바람 기원과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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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수락산성전암 水落山聖殿庵

김시습

山中伐木響丁丁(산중벌목향정정) : 산속에 나무치는 소리 정정거리고
處處幽禽弄晩晴(처처유금농만청) : 곳곳에 깊숙한 산새는 늦어 갠 날을 노래한다
碁罷溪翁歸去後(기파계옹귀거후) : 바둑을 마친 개울가 늙은이 돌아간 뒤
綠陰移案讀黃庭(녹음이안독황정) : 푸른 그늘에 책상을 옮기고 황정경을 읽는다
35.
수파령水波嶺

김시습

小周遭水亂回(소헌주조수난회) : 작은 봉우리를 둘러 물이 어지러이 휘돌고
千章喬木蔭巖(천장교목음암외) : 일천 그루 높은 나무 바위 가에 그늘지운다
山深不見人迹(산심불견인종적) : 산 깊어 사람의 자취 보이지 않고
幽鳥孤猿時往來(유조고원시왕래) : 깊은 산에 외로운 원숭이만 때때로 오고간다

36.食粥식죽

김시습

白粥如膏穩朝餐(백죽여고온조찬) : 흰죽이 곰 같아 아침 먹기 좋구나
飽來偃臥夢邯鄲(포래언와몽감단) : 배불러 번듯이 누워 한단의 꿈을 꾼다
人間三萬六千日(인간삼만육천일) : 인간생애 삼만 육천 일에
且莫多苦辛(차막휴휴다고신) : 아직은 편하다고 말하지 말라, 쓰고 신 일 많으리니

37.新漲신창

김시습

昨夜山中溪水生(작야산중계수생) : 어제 밤 산속에서 계곡물 붙더니
石橋柱下玉??(석교주하옥갱장) : 돌다리 기둥 아래 옥구슬 부딪는 소리
可憐嗚咽悲鳴意(가련오열비명의) : 가련토록 흐느끼며 구슬피 우는 뜻은
應帶奔流不返情(응대분류불반정) : 체인 물이 흘러가 되돌아오지 못함이겠지

38.尋訪

김시습

靑藜一尋君(청려일심군) : 청려장 짚고 그대 찾으니
君家住海濱(군가주해빈) : 그대 집은 바닷가에 있었구나
寒花秋後艶(한화추후염) : 국화꽃은 늦가을이라 더욱 곱고
落葉夜深聞(낙엽야심문) : 깊은 밤 낙옆 지는 소리 들려온다
野外金風老(야외금풍로) : 들 밖에 바람소리 세차고
頭夕照?(첨두석조훈) : 처마 위엔 저녁빛이 어둑해진다
寧知今日遇(녕지금일우) : 어찌 알았겠나, 오늘 그대 만나
團坐更論文(단좌갱론문) : 다정히 둘러 앉아 다시 글을 논할 줄을

39.我生 아생

김시습

我生旣爲人(아생기위인) : 내는 이미 사람으로 태어났네
胡不盡人道(호불진인도) :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리오.
少歲事名利(소세사명리) : 젊어서는 명리를 일삼았고
壯年行顚倒(장년행전도) : 장년이 되어서는 세상에 좌절하였네.
靜思縱大?(정사종대뉵) :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우니
不能悟於早(불능오어조) : 어려서 깨닫지 못한 탓이네
後悔難可追(후회난가추) : 후회해도 돌이키기 어려워
寤?甚如?(오벽심여도) : 깨닫고 보니 가슴이 방아 찧듯 하네.
況未盡忠孝(황미진충효) : 하물며 충효도 다하지 못했으니
此外何求討(차외하구토) : 이외에 무엇을 구하고 찾겠는가.
生爲一罪人(생위일죄인) : 살아서는 한 죄인이요
死作窮鬼了(사작궁귀료) : 죽어서는 궁색한 귀신이 되리
更復騰虛名(갱부등허명) : 다시 헛된 명예심 또 일어나니
反顧增憂悶(반고증우민) : 돌아보면 근심과 번민이 더해지네.
百歲標余壙(백세표여광) : 백년 후에 내 무덤에 표할 때는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 꿈속에 죽은 늙은이라 써주시게나
庶幾得我心(서기득아심) : 행여나 내 마음 아는 이 있다면
千載知懷抱(천재지회포) : 천년 뒤에 속마음 알 수 있으리.

40.夜雪야설

김시습

어제 늦게 흐린 구름 컴컴하더니
오늘밤에 상서로운 눈 퍼 붓는다.....

솔 덮어 가벼운 것 수북하더니
대 때리면 가늘게 우수수한다

촛불 심지 자르며 아담한 시(詩)이루었고
기울어진 평상도 꿈에 들기는 넉넉하다

깨어진 창에 나는 조약돌 부서지고
괴벽(壞璧)은 휘장을 흔들어 댄다

병풍에 기대면 등잔 불꽃 짧고
통에 꽂으면 물에 잠겨서도 탄다

한 그릇 녹여서 茶 달이는데
야반지경 적요해진다

41.야심夜深

김시습

夜深山室月明初(야심산실월명초) : 깊은 밤, 산실에 달 밝은 때
靜坐挑燈讀隱書(정좌도등독은서) : 고요히 앉아 등불 돋워 은서를 읽는다
虎豹亡曹相怒吼(호표망조상노후) : 무리 잃은 호랑이와 표범들 어르렁거리고
梟失伴競呵呼(치효실반경가호) : 소리개 올빼미 짝을 잃고 다투어 부르짖는다
生爭似安吾分(이생쟁사안오분) : 편안한 삶 다툼이 어찌 내 분수에 편안만 하리오
却老無如避世居(각로무여피세거) : 도리어 늙어서는 세상 피하여 사는 것만 못하리라
欲學鍊丹神妙術(욕학련단신묘술) : 오래 사는 범을 배우려 하시려면
請來泉石學疏(청래천석학용소) : 자연을 찾아 한가하고 소탈한 것이나 배워보시오

42.野鳥 야조

김시습

綿蠻枝上鳥(면만지상조) : 나무 위의 새소리 잇달아
隨意便能鳴(수의편능명) : 제 뜻대로 거침없이 울어댄다
適志從吾好(적지종오호) : 뜻이 맞으면 내 기분대로 따르고
安心只欲平(안심지욕평) : 마음을 편하게 하여 평화롭고자 한다
驕榮爭似隱(교영쟁사은) : 부귀영화 교만함이 어찌 숨어 삶과 다투랴
苦學不如耕(고학불여경) : 고생스레 배움이 어찌 농사만 하리
詩酒消閑日(시주소한일) : 사와 술로 한가한 날 보내며
陶然送平生(도연송평생) : 기분 좋게 한 평생 보내고 싶어라

43.蓮經讚 연경찬

김시습

雲起千山曉(운기천산효) : 온 산 새벽인데 구름 일고
風高萬木秋(풍고만목추) : 바람은 높이 불어 나무마다 가을이네
石頭城下泊(석두성하박) : 성 아래 돌 머리에 묵으니
浪打釣魚舟(낭타조어주) : 물결은 고깃배에 부딪는다.

44.詠妓三首

김시습

綠羅新剪製春衫 理線針玉手織
녹라신전제춘삼 리선점침옥수직

自敍一生人命薄 隔沙窓語細??
자서일생인명박 격사창어세남남

초록 비단 말라 봄옷을 마련?제
바늘 따라 실 따라서 고운 손길 노닐더니
서러워라 이내 일생 왜 이리도 박명한가.
창가에 의지하여 소곤소곤 속삭이네.

誰家園裏曉鶯啼 亂春心意轉迷
수가원이효앵제 료란춘심의전미

自愧妾身輕似葉 食須東里宿須西
자괴첩신경사엽 식수동리숙수서

어드메 뒷동산에 꾀꼴 소리 요란하냐.
춘심을 자아내니 심사 더욱 산란하다
가엾어라 여자의 몸 갈잎 같은 신세런가
동쪽 집 저녁 먹고 서쪽 집 침방 드네.

死茅束者何斯 一見飄風姓不知
사균모속자하사 일견표풍성부지

狂且狡童如鬼? 去時批額奪兒
광차교동여귀역 거시비액탈계아

꿈결인 듯 얼핏 마난 그 사나이 누구더냐
한 번 보고 헤어지니 성명조차 모를레라.
교할해라 그의 거동 귀신인 듯
금비녀 은비녀도 떠날 적에 다 빼앗겼네

45.우중민극(雨中悶極)

김시습

連空細雨織如絲(연공세우직여사) : 베를 짜는 양 가랑비 하늘에 가득하고
獨坐寥寥有所思(독좌요요유소사) : 적적히 홀로 앉으니 생각나는 바가 많구나
窮達縱云天賦與(궁달종운천부여) : 궁하고 달하는 것 하늘이 준 것이라 하지만
行藏只在我先知(행장지재아선지) : 가고 머물고는 내게 있음을 알고 있다네
麥?秋聲急(비비맥롱추성급) : 부슬부슬 비 내리는 보리밭에 가을소리 급하고
漠漠稻田晩色遲(막막도전만색지) : 막막한 벼밭엔 저녁빛이 늦어 드는구나
老大生何事好(노대이생하사호) : 늙어서 편안한 삶에는 어떤 일이 좋은가
竹床凉乍支(죽상량점사지이) : 대나무 평상에 서늘한 돗자리에서 턱이나 괴는 것이네


46.우중서회雨中書懷

김시습

滿溪風浪夜來多(만계풍랑야래다) : 개울 가득한 풍랑 밤새 많아지니
茅屋蓬扉奈若何(모옥봉비내약하) : 초가집 사립문은 어찌 해야하는가
亂滴小聲可數(난적소첨성가수) :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 헤아릴 수도 있으니
塊然身在碧雲窩(괴연신재벽운와) : 외롭도다, 이내 몸은 푸른 구름 속에 있는 듯하여라

47.월색月色

김시습

長空月色正嬋娟(장공월색정선연) : 높은 하늘에 달빛이 고와
枕夜凉人未眠(의침야량인미면) : 싸늘한 밤, 베개 베고 누워도 잠은 오지 않네
何處斷腸江上笛(하처단장강상적) : 어디선가 애끊는 강 위의 피리소리
一聲吹破碧雲天(일성취파벽운천) : 한 곡조 피리소리 푸른 하늘 구름을 흩어버린다

48.월야우제 月夜偶題

김시습

滿庭秋月白森森(만정추월백삼삼) : 뜰에 가득한 가을달 흰빛 창창하고
人靜孤燈夜已深(인정고등야이심) : 외로운 불빛, 사람은 말이 없고 밤은 깊어간다
風淡霜淸不成夢(풍담상청불성몽) : 살랑거리는 바람, 맑은 서리에 잠은 오지 않고
紙窓簾影動禪心(지창염영동선심) : 종이 창의 발 그림자에 부처마음 이는구나

49.월야月夜

김시습

絡緯織床下(낙위직상하) : 여치는 평상 아래에서 베짜듯 울고
月白淸夜永(월백청야영) : 밝은 달빛, 맑은 밤은 길기도하여라
靈臺淡如水(영대담여수) : 마음은 물 같이 담담하고
萬像森復靜(만상삼부정) : 만물은 가득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風動鳥搖夢(풍동조요몽) : 바람 불어 새는 꿈에서 깨고
露滴鶴驚(노적학송경) : 이슬방울에 학은 놀라 움추리는구나
物累不相侵(물루불상침) : 만물의 질서는 서로 침해하지 않으니
箇是招提境(개시초제경) : 그것이 바로 부처님 나라의 경지이로다

50.渭川漁釣圖 위천어조도

김시습

風雨蕭蕭拂釣磯(풍우소소불조기) : 비바람에 날이 쓸쓸하여 낚싯대를 떠나니
渭川魚鳥識忘機(위천어조식망기) : 위천의 물고기와 새들도 알아보고 미끼를 문다
如何老作鷹揚將(여하노작응양장) : 어찌하여 늙어서도 매처럼 용맹을 떨쳐
空使夷齊餓採薇(공사이제아채미) : 백이숙제로 하여 헛되이 굶어죽게 하였나

51.유객有客

김시습

有客淸平寺(유객청평사) : 청평사의 나그네
春山任意遊(춘산임의유) : 봄 산을 한가로이 노니노라
鳥啼孤塔靜(조제고탑정) : 탑은 고요한데 새는 울고
花落小溪流(화락소계류) : 꽃잎은 개울에 떨어져 흘러가네
佳菜知時秀(가채지시수) : 맛있는 나물 때맞춰 돋아나고
香菌過雨柔(향균과우유) : 향기로운 버섯은 비 맞아 부드럽네
行吟入仙洞(행음입선동) : 시를 읊으며 선동에 들어서니
消我百年憂(소아백년우) : 나의 백년 근심이 살라지네

52.유거幽居

김시습

幽居臥小林(유거와소림) : 숲 속에 누워 그윽히 사니
靜室一煙氣(정실일연기) : 고요한 방안에 한 줄기 향기오른다
夜雨林花爛(야우임화란) : 밤비에 숲 속 꽃이 찬란하고
梅天風氣凉(매천풍기량) : 육칠 월 날씨에 바람은 서늘하구나
葉濃禽語警(엽농금어경) : 나뭇잎 짙고 새들은 지저귀고
泥濕燕飛忙(니습연비망) : 진흙에 질퍽하고 제비는 바삐 날아다닌다
何以消長日(하이소장일) : 긴 날을 어찌 보낼 것인가
新詩寫數行(신시사수행) : 새로운 시나 몇 줄 지어볼까나

53.煮茶 1자다

김시습


松風輕拂煮茶煙(송풍경불자다연) : 솔바람 다 달이는 연기 몰아 올리고
斜橫落澗邊(뇨뇨사횡락간변) : 하늘하늘 기울어져 골짝물가로 떨어진다
月上東窓猶未睡(월상동창유미수) : 동창에 달 떠올라도 아직 잠 못 자고
?甁歸去汲寒泉(설병귀거급한천) : 물병 들고 돌아가 찬물을 기는다


54.煮茶 2자다

깁시습


自怪生來厭俗塵(자괴생래염속진) : 나면서 풍진 세상 스스로 괴이하게 여겨
入門題鳳已經春(입문제봉이경춘) : 문에 들어가 “봉”자를 쓰니 이미 청춘 다지나갔다
煮茶黃葉君知否(자다황엽군지부) : 달이는 누런 찻잎 그대는 알까
却恐題詩洩隱淪(각공제시설은륜) : 시 짓다가 숨어사는 일 누설될까 오히려 두렵다

55.장지 壯志

김시습

壯志桑弧射四方(장지상호사사방) : 큰 뜻으로 뽕나무 활 사방에 쏘면서
東丘千里負淸箱(동구천리부청상) : 동쪽나라 천리길 푸른 상자지고 다녔네
欲參周孔明仁義(욕참주공명인의) : 조공과 공자에 참여하여 인의를 밝히며
又學孫吳事戚揚(우학손오사척양) : 또 손자와 오기의 병법을 배워 척야의 무술 익혔네
運到蘇秦懸相印(운도소진현상인) : 우수가 닿으면 소진처럼 정승이 되고
命窮正則賦離騷(명궁정칙부이소) : 운명이 궁하면 정칙처럼 이소경이나 지으리
如今落魄無才思(여금낙백무재사) : 지금은 낙백하여 한 치의 재사도 없으니
曳杖行歌類楚狂(예장행가류초광) : 지팡이 끌고 노래하기가 초나라 광접여와 같네

56.정야 靜夜

김시습

三更耿不寐(삼경경불매) : 깊은 밤 근심에 잠은 오지 않고
明月滿東窓(명월만동창) : 밝은 달만 동쪽 창에 가득하구나
杜口傳摩詰(두구전마힐) : 임 막고 왕유를 전하고
無心學老龐(무심학노방) : 무심코 늙은 방씨의 은거함만 배웠네
最憐淸似水(최련청사수) : 물처럼 맑은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安得筆如(안득필여강) : 어찌 깃대 같은 붓을 얻을 수 있을까
剪燭拈新語(전촉념신어) : 초심지 자르며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排聯押韻雙(배련압운쌍) : 배율시를 지으며 운을 맞춘다

57.제소림암題小林菴

김시습

禪房無塵地(선방무진지) : 선방 티끌 없는 그곳에
逢僧話葛藤(봉승화갈등) : 스님을 만나 얽힌 이야기 나눈다
身如千里鶴(신여천리학) : 몸은 천 리를 나는 학 같고
心似九秋鷹(심사구추응) : 마음은 가을 철 매 같도다
石逕尋雲到(석경심운도) : 돌길에 구름 찾아 여기에 와
松窓獨自?(송창독자빙) : 소나무 창가에 홀로 기대어본다
無端更回首(무단갱회수) : 까닭 없이 다시 머리 돌려보니
山色碧(산색벽릉증) : 산 빛은 푸르고 험하기만 하구나

58.주경 晝景

김시습
天際雲晝不收(천제동운주불수) : 하늘가 붉은 구름 낮에도 걷히지 않고
寒溪無響草莖柔(한계무향초경유) : 차가운 개울물 소리 없고 풀줄기는 부드럽네
人間六月多忙熱(인간육월다망열) : 인간세상 유월은 바쁘고도 무더우니
誰信山中枕碧流(수신산중침벽류) : 산 속에서 푸른 물 베개한 줄을 누가 믿어줄까

59.晝意 주의

김시습


驟暄草色亂紛披(취훤초색난분피) : 갑자기 따뜻하여 풀빛 어지러이 날리고
睡覺南軒日午時(수교남헌일오시) : 남쪽 마루에서 잠 깨니 해가 한참 낮이다
更無世緣來攪我(갱무세연래교아) : 다시는 세상인연으로 날 괴롭히지 않으리니
心身鍊到化兒(심신련도화영아) : 마음과 몽이 수련되어 어린아이로 되었다네

60.중추야신월1中秋夜新月

김시습

半輪新月上林梢(반륜신월상림초) : 둥그레한 초승달 나무가지 끝에 뜨면
山寺昏鐘第一鼓(산사혼종제일고) : 산사의 저녁종이 처음으로 울려온다
淸影漸移風露下(청영점이풍로하) : 맑은 그림자 옮아오고 바람과 이슬이 내리는데
一庭凉氣透窓凹(일정량기투창요) : 온 뜰에 서늘한 기운 창틈을 스며든다

61.중추야신월2中秋夜新月

김시습

白露溥溥秋月娟(백로부부추월연) : 흰 이슬 방울지고 가을달빛 고운데
夜近床前(야충즐즐근상전) : 밤 벌레소리 시꺼럽게 침상에 앞에 들려오네
如何我閒田地(여하감아한전지) : 나의 한가한 마음 흔들어 놓으니 나는 어찌하랴
起讀九辯詞一篇(기독구변사일편) : 일어나 구변의 노래 한 편을 읽고있도다

62.卽事 즉사

김시습

有穀啼深樹(유곡제심수) : 뻐꾸기가 울창한 나무숲에서 우네
前村桑?紅(전촌상심홍) : 앞 고을에는 오디가 푹 익었다
農雲峯上下(농운봉상하) : 짙은 구름은 산봉우리로 오르내리고
疏雨?西東(소우태서동) : 가랑비는 뚝 위로 오락가락
懶覺身無事(라각신무사) : 게을러 몸에 할 일 없음을 알고
衰知酒有功(쇠지주유공) : 몸이 쇠약해짐에 술에 공덕이 있음을 알았다
已得歸歟興(이득귀여흥) : 이미 돌아갈 마음 얻었으니
江山屬此翁(강산속차옹) : 강산이 이 늙은이의 것이라오

63.촌등村燈

김시습

日落半江昏(일락반강혼) : 해가 지니 강의 절반이 어둑해져
一點明遠村(일점명원촌) : 한 점 등불 아득히 먼 고을 밝힌다
熒煌穿竹徑(형황천죽경) : 등불의 불빛은 대나무 좁은 길을 꾾고
的歷透籬根(적력투리근) : 또렷하게 울타리 밑을 비춰오는구나
旅館愁閒雁(여관수한안) : 여관에 들려오는 기러기 소리 수심겹고
紗窓倦繡鴛(사창권수원) : 비단 창가 비치는 원앙 수놓기 권태롭구나
蕭蕭秋葉雨(소소추엽우) : 우수수 가을잎에 내리는 비
相對正銷魂(상대정소혼) : 마주 바라보니 내 넋이 녹아버리는구나


64.춘유산사春遊山寺

김시습
春風偶入新耘寺(춘풍우입신운사) : 봄바람 불어 우연히 신운사에 들러보니
房閉僧無苔滿庭(방폐승무태만정) : 스님도 없는 승방, 뜰에 이끼만 가득하다
林鳥亦知遊客意(임조역지유객의) : 숲 속의 새들도 나그네 마음 알고
隔花啼送兩二聲(격화제송양이성) : 꽃 넘어 저곳, 새는 두세 울음 울어 보내네

65.閑寂 한적

김시습

自少無關意(자소무관의) : 젊어서부터 세상일에 무관심하여
而今?素心(이금협소심) : 지금은 욕심 없는 마음이 유쾌하다
種花連竹塢(종화연죽오) : 꽃을 심어 대숲 언덕에 연결하고
蒔藥避棠陰(시약피당음) : 아가위 그늘 피해 약초를 모종낸다.
苔蘚人?少(태선인종소) : 이끼 끼어 사람 자취 드물고
琴書樹影深(금서수영심) : 나무 그늘 깊이 거문고와 책이 있도다.
從來樗散質(종래저산질) : 전부터 허약한 체질이라
更來病侵尋(갱래병침심) : 다시 병이 침입해 찾아드는구나.

66.해월 海月

김시습

年年海月上東?(연년해월상동추) : 해마다 바닷달 동켠에서 떠올라
來我床前遺我愁(내아상전유아수) : 내 평상으로 와 근심을 가져주네
萬里更無纖?隔(만리갱무섬예격) : 만리장공에 조금도 막히는 것 없어
一天渾是玉壺秋(일천혼시옥호추) : 온 하늘이 모두 옥병같은 가을이로다
秦宮漢苑人橫笛(진궁한원인횡적) : 진나라 궁궐과 한나라 정원에서 피리 부는 사람
楚水吳江客艤舟(초수오강객의주) : 초나라 오나라 강가에서 배를 대는 나그네
離合悲歡應共伴(이합비환응공반) : 만나고 헤어짐과 슬퍼하고 기뻐함 함께 하리니
停杯且莫問從由(정배차막문종유) : 잠시 술잔을 멈추고 그 이유를 묻지 말아라

67.還山환산

김시습

山中四月盡(산중사월진) : 산 속엔 4월이 다가고
客臥動輕旬(객와동경순) : 나그네는 가볍게 열흘이 지나간다
四壁圖書?(사벽도서주) : 사면 벽에는 도서에 좀이 슬어
三間?席塵(삼간궤석진) : 삼간 방 책상엔 먼지만 쌓였다
菁花多結實(청화다결실) : 우거진 꽃에는 열매 많고
杏子已生仁(행자이생인) : 살구 열매엔 이미 씨가 생겼다
靜倚屛風睡(정의병풍수) : 고요히 병풍에 기대어 잠드니
風爲入幕賓(풍위입막빈) : 바람은 휘장 속으로 들어와 손님이 된다

68.曉意 효의

김시습

昨夜山中雨(작야산중우) : 어젯밤 산속에 비 내려
今聞石上泉(금문석상천) : 오늘 아침 바위샘 물소리 난다
窓明天欲曙(창명천욕서) : 창 밝아 날 새려하는데
鳥?客猶眠(조괄객유면) : 새소리 요란하나 나그네는 아직 자네
室小虛生白(실소허생백) : 방은 작으나 공간이 훤해지니
雲收月在天(운수월재천) : 구름 걷혀 하늘에 달이 있음일게
廚人具炊黍(주인구취서) : 부엌에서 기장밥 다 지어놓고
報我懶茶煎(보아라다전) : 나에게 차 달임이 늦다고 나무란다

69.희정숙견방喜正叔見訪

김시습

寂寂鎖松門(적적쇄송문) : 솔 문을 닫아걸고 외로이 사니
無人踏鮮痕(무인답선흔) : 이끼 흔적 밝는이 아무도 없구나
澗聲搖北壑(간성요북학) : 바윗 물소리 북쪽 골짝을 흔들고
松??東軒(송뢰점동헌) : 소나무 바람소리 동헌에 물결친다
世事寧緘口(세사녕함구) : 세상일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閒情似不言(한정사불언) : 한가한 정은 말하지 못하는구나
喜君來一訪(희군래일방) : 그대 찾아오니 너무 기뻐서
相對敍寒溫(상대서한온) : 마주 보며 그간 온갖 일을 풀어본다

70.희청喜晴

김시습

昨夜屢陰晴(작야루음청) : 어제밤 여러 번 흐렸다가 날이 개니
今朝喜見日(금조희견일) : 오늘 아침 해를 보니 기쁘기만 하다
陰陰夏木長(음음하목장) : 여름 나무는 자라서 그늘지고
鳴寒(혜혜명한찰) : 가을을 알리는 매미는 쓰르르 울어댄다
樹有與樗(수유력여저) : 나무로는 가죽나무와 참나무가 있고
穀有稗與(곡유패여려) : 곡식에는 피와 조가 있도다
世我苦相違(세아고상위) : 세상과 나는 괴롭게도 서로 어긋나고
年來添白髮(년래첨백발) : 나이는 많아져 백발이 늘어난다
開襟納新凉(개금납신량) : 옷깃을 헤치고 새로이 시원함 드니
淸風轉청풍전표) : 맑은 바람 더욱 휘몰아 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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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 모음 30편

《1》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서·남·북으로
틔어 있는 골목마다
수국색(水菊色)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ㅡ무슨 일을 하고 싶다.
ㅡ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ㅡ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2》4월의 노래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3》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4》갑사댕기

박목월

안개는 피어서
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5》개안(開眼)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6》구름 밭에서

박목월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7》그것은 연륜이다

박목월

어릴적 하찮은 사랑이나
가슴에 백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주 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


《8》기계(杞溪 ) 장날

박목월

아우 보래이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쿵둥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안 그런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목발 받혀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9》길처럼

박목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같다

《10》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1》나무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12난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13》내가 만일

박목월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어 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14》내리막길의 기도

박목월

오르막 길이 숨 차듯
내리막 길도 힘에 겹다.
오르막길의 기도를 들어주시듯
내리막길의 기도도 들어 주옵소서.

열매를 따낸 비탈진 사과밭을
내려오며 되돌아 보는
하늘의 푸르름을
뉘우치지 말게 하옵소서.

마음의 심지에 물린 불빛이
아무리 침침하여도
그것으로 초밤길을 밝히게 하옵시고

오늘은 오늘로써
충만한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어질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수록
안으로 환하게 눈 뜨게 하옵소서.

성신이 제 마음 속에
역사하게 하옵소서.
하순의 겨울도 기우는 날씨가
아무리 설레이어도
항상 평온하게 하옵소서.

내리막 길이 힘에 겨울수록
한 자욱마다 전력을 다하는
그것이 되게 하옵소서.
빌수록
차게 하옵소서.

《15》달

박목월

桃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挑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16》메리 크리스마스

박목월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네 개의 까만 눈동자.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17》박꽃

박목월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18》빈 컵

박목월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19》산도화

박목월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20》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21》아침마다 눈을 뜨면

박목월

사는것이 온통 어려움 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 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로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22》어머니의 언더라인

박목월

유품으로는
그것 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님의 유품은
그것 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가 헐어 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 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23》우회로

박목월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24》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25》이 후끈한 세상에

박목월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그 너르고도 후끈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간'이 빚어지고
남과 더불어 짜는
그 오묘한 생활의
그물코에
오늘의 보람찬 삶
세상에는
완전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밧줄로 서로 맺어져
우리는 서로 돕게 된다.
다만 에고의 색맹자만이
나와 남사이에 얽혀진
그 든든하고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밧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이 후끈한 세상에
오늘의 찬란한 아침이 열린다.

《26》이런 詩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27》이별가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28》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29》평온한 날의 기도

박목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양지 바른 창가에 앉아
인간도 한 포기의
화초로 화하는
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시간.

주여, 이런 시간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시고
그 자애로우심과 미소지으심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시는
그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강물같이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순탄하게 시간을 노젓는
오늘의 평온 속에서
주여, 고르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

3월의 그 화창한 날씨 같은 마음속에도
맑고 푸른 신앙의 수심(水深)이 내리게 하시고
온 천지의 가지란 가지마다
온 들의 푸성귀마다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듯
믿음의 새 움이 돋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30》하관(下棺)

박목월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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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 모음 41편

1.가을비 소리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2.가을에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低俗저속에 抗拒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잎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雁行안행-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菊花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白露백로는 霜降상강으로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즘어진 구름은
이제는 楊貴妃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開闢개벽은 또 한번 뒷門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3.견우의 노래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가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홈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 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 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4.곶감 이야기

서정주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얻어 호강하는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5.광화문(光化門)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6.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꽃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7.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젓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임아

8.기다림

성정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9.꽃

서정주

가신 이들의 헐떡이던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 그 기름 묻은 머릿박 낱낱이 더위
땀 흘리고 간 옛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우에 있어라

쉬여 가자 벗이여 쉬여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여서 가자

맞나는 샘물마닥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볼 하늘을 보자

10.꽃피는 것 기특해라

서정주

봄이 와 햇빛 속에 꽃피는 것 기특해라
꽃나무에 붉고 흰 꽃 피는 것 기특해라
눈에 삼삼 어리어 물가으로 가면은
가슴에도 수부룩히 드리우노니
봄날에 꽃피는 것 기특하여라.

11.내 永遠은

서정주

내 永遠은
물 빛
빛과 香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뿐 女先生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 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의 길이로라
내 永遠은.

12.노을

서정주

노들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능수 버들엔 바람이 흐르고

새로 꽃이 ? 들길에 서서
눈물 뿌리며 이별을 허는
우리 머리 우에선 구름이 흐르고

붉은 두볼도
헐덕이든 숨 ㅅ결도
사랑도 맹세도 모두 흐르고

나무 ㅅ닢 지는 가을 황혼에
홀로 봐야할 연지 ㅅ빛 노을.

13.눈물나네

서정주

눈물 나네 눈물 나네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 서울 하늘에
오랜만에 흰 구름 보니
눈물이 다 나오시네.

이틀의 연휴에
공장 쉬고
차 빠져나가
이 서울 하늘에도
참 오랜만에
검은 구름 걷히고
흰 구름이 떠보이니
두 눈에서
눈물이 다 나오시네.

14.늙은 사내의 詩

서정주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깍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깍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깍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은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마음달래자

15.대낮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느니

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16.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17.모란 그늘의 돌

서정주

저녁 술참
모란 그늘
돗자리에 선잠 깨니
바다에 밀물
어느새 턱 아래 밀려와서
가고 말자고
그 떫은 꼬투리를 흔들고,
내가 들다가
놓아 둔 돌
들다가 무거워 놓아 둔 돌
마저 들어 올리고
가겠다고
나는 머리를 가로 젓고 있나니......

18.무등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 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위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무제(無題)

서정주

마리아, 내 사랑은 이젠
네 後光후광을 彩色채색하는 물감이나 될 수 밖에 없네.
어둠을 뚫고 오는 여울과 같이
그대 처음 내 앞에 이르렀을 땐,
초파일 같은 새 보리꽃밭 같은 나의 舞臺무대에
숱한 男寺黨남사당 굿도 놀기사 놀았네만,
피란 결국은 느글거리어 못견딜 노릇,
마리아.
이 춤추고, 電氣전기 울 듯하는 피는 달여서
여름날의 祭酒제주 같은 燒酒소주나 짓거나,
燒酒로도 안 되는 노릇이라면 또 그걸로 먹이나 만들어서,
자네 뒤를 마지막으로 따르는-
허이옇고도 푸르스름한 後光을 彩色하는
물감이나 될 수밖엔 없네.

20.밤이 깊으면

서정주

밤이 깊으면 淑숙아 너를 생각한다. 달래마눌같이 쬐그만 淑숙아
너의 全身전신을,
낭자언저리, 눈언저리, 코언저리, 허리언저리,
키와 머리털과 목아지의 기럭시를
유난히도 가늘든 그 목아지의 기럭시를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서러운 음성을

서러운서러운 옛날말로 우름우는 한마리의 버꾸기새.
그굳은 바윗속에, 황土황토밭우에,
고이는 우물물과 낡은時計시계ㅅ소리 時計의 바늘소리
허무러진 돌무덱이우에 어머니의時體시체우에 부어오른 네 눈망울우에
빠앍안 노을을남기우며 해는 날마닥 떳다가는 떠러지고
오직 한결 어둠만이적시우는 너의 五藏六腑오장육부. 그러헌 너의 空腹.공복

뒤안 솔밭의 솔나무가지를,
거기 감기는 누우런 새끼줄을,
엉기는 먹구름을, 먹구름먹구름속에서 내이름ㅅ字자부르는 소리를,
꽃의 이름처럼연겊어서연겊어서부르는소리를,
혹은 그러헌 너의 絶命절명을

21.벽(壁)

서정주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22.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서정주

뻐꾸기는
강을 만들고,
나루터를 만들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것들은
나룻배에 태워서 저켠으로 보낸다.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
이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섬을 만들고,

그 섬에단 그렇지
백일홍 꽃나무 하나 심어서
먹기와의 빈 절간을......

그러고는 그 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만 길 바닷속으로 가라앉히곤
다시 끌어올려 백일홍이나 한 번 피우고
또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힌다.

23.석류꽃

서정주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넘어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24.소곡(小曲)

서정주

뭐라 하느냐
너무 앞에서
아- 미치게
짓푸른 하눌.

나, 항상 나,
배도 안고파
발돋음 하고
돌이 되는데.

25.시월이라 상달되니

서정주

어머님이 끊여 주던 뜨시한 숭늉,
은근하고 구수하던 그 숭늉 냄새.
시월이라 상달되니 더 안 잊히네.
평양에 둔 아우 생각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안 잊히네, 영 안 잊히네.

고추장에 햇쌀밥을 맵게 비벼 먹어도,
다모토리 쐬주로 마음 도배를 해도,
하누님께 단군님께 꿇어 업드려
미안하요 미안하요 암만 빌어도,
하늘 너무 밝으니 영 안 잊히네.

26.신부

서정주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
郞하고 첫날밤은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
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
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면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
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
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제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
아 버렸읍니다.

27.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 애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려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 두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28.입맞춤

성정주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석류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29.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30.찬술

서정주

밤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31.첫사랑의 詩

서정주

초등학교 3학년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깍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밑에 놓아 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32.추석

서정주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匕首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匕首를 다 녹슬어
시궁장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는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었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33.추일미음(秋日微吟)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34.추천사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35.편지

서정주

내 어릴 때의 친구 淳實이.
생각히는가
아침 山골에 새로 나와 밀리는 밀물살 같던
우리들의 어린 날,
거기에 매어 띄웠던 그네(추韆)의 그리움을?

그리고 淳實이.
시방도 당신은 가지고 있을 테지?
연약하나마 길 가득턴 그 때 그 우리의 사랑을.

그 뒤,
가냘픈 날개의 나비처럼 헤매 다닌 나는
산나무에도 더러 앉았지만,
많이는 죽은 나무와 진펄에 날아 앉아서 지내왔다.

淳實이.
이제는 주름살도 꽤 많이 가졌을 淳實이.
그 잠자리같이 잘 비치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시방은 어느 모래 沙場에 앉아 그 소슬한 翡翠의 별빛을 펴는가.

죽은 나무에도 산 나무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난들에도 구렁에도 거의 다 앉아 왔거든
이젠 자네와 내 주름살만큼이나 많은 그 골진 사랑의 떼들을 데리고
우리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갓트인 蓮봉우리에 낮 미린내도 실었던
우리들의 어린날같이 다시 만나세.

36.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37.피는 꽃

서정주

사발에 냉수도
부셔 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 해 버려요.
햇볕에 새 붉은 꽃 피어 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 째로 접히는 그늘일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38.가벼히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더래도
가벼히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어 놓고 가려한다.

39.학(鶴)

서정주

天年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鶴이 나른다.

天年을 보던 눈이
天年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한번 天涯에 맞부딪노나

山덩어리 같아야 할 忿怒가
草木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넘어
누이의 綏틀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울음은 海溢
아니면 크나큰 齊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쭉지에 묻을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땐들 골라 못추랴.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우름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 다하지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나른다.

40.화사(花蛇)

성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41. 질마재의 노래

서정주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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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 모음

1.가을날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2.내 가슴에 장미를

노천명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3.당신을 위해

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4.별을 쳐다보며

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5.새해 맞이

노천명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상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 안에도---
나무판자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 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6.성탄

노천명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새벽
어두운 밤을 헤치는 성탄의 노랫소리
집집이 불빛 찬란히 흐르고
사람들 메마름 가슴에 즐거움 깃들였나니
형제여 메리 크리스마스!

인류 구속(救贖)하러 오시는 왕의 왕
베들레헴 가난한 집 마구간으로
겸손히 오신 날
당신의 고초스러운 생---
가시관에 쓴 잔이 약속된 날이어니

땅 위의 영광을 당신에게 돌리나이다
가슴속 헤치며 드는 저 성당 종소리
탕자도 도둑도 당신의 죄 많은 아들들이
성당이 첨탑을 우러러보며 십자를 긋습니다

오는 이 나라 겨레들은
또 하나의 이스라엘 백성

저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소서
주여 외로운 이들에게 강복(降福)하소서
당신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야겠나이다

7.언덕

노천명

창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눈만 뜨면 내다보는 언덕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안 뵌다.

방 안 풍경이 보기 싫어
온 종일 언덕을 바라본다.
사람이 지나가면 눈이 다 밝아진다.

전봇대모양 우뚝 선 사람이 둘
혹시 나 아는 이 아닐까

가슴이 답답하면 언덕을 본다.
눈물이 나면 언덕을 본다.
이방인 같아 쓸쓸하면 언덕을 본다.
언니랑 조카가 보고프면 언덕을 본다.

8.유월의 언덕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9.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기 지나가 버리는 마음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삶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10.저녁별

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11.푸른 오월

노천명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그에 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미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 할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 메선 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 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 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라도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

12.구름같이

노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13.길

노천명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14.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15.묘지

노천명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16.비연송(悲戀頌)

노천명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17.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18.사월의 노래

노천명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 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 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19.임 오시던 날

노천명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20.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21.장미

노천명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22.전승의 날

노천명

거리거리에 일장깃발이 물결을 친다
아세아민족의 큰 잔칫날
오늘 싱가폴을 떨어뜨린 이 감격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남양 형제들에게 꽃다발을 보내자
비둘기를 날리자

눈이 커서 슬픈 형제들이여
代代로 너희가 섬겨온 상전 영미는
오늘로 깨끗이 세기적 추방을 당하였나니

고무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나오너라
종려나무 잎사귀를 쓰고 나오너라
오래간만에 가슴을 열고 웃어 보지 않으려나

그 처참하던 대포소리 이제 끝나고 공중엔
일장표의 비행기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 불러 평화를 받아라

23.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4.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25.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번의 눈짓, 한번의 손짓,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
드릴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26.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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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 모음 24편

1.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2.구성동(九城洞)

정지용

골작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 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3.그의 반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문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4.다시 海峽

정지용

正午 가까운 海峽은
白黑痕跡이 的歷한 圓周!

마스트 끝에 붉은旗가 하늘 보다 곱다.
甘藍 포기 포기 솟아 오르듯 茂盛한 물이랑이여!

班馬같이 海狗 같이 어여쁜 섬들이 달려오건만
一一히 만저주지 않고 지나가다.

海峽이 물거울 쓰러지듯 휘뚝 하였다.
海峽은 업지러지지 않었다.

地球우로 기여가는것이
이다지도 호수운 것이냐!

외지곳 지날제 汽笛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悽凉하구나.

海峽의 七月해ㅅ살은
달빛 보담 시원타.

火筒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濟州島사투리 하는이와 아주 친했다.

수물 한살 적 첫 航路에
戀愛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5.말

정지용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6.바람

정지용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왼통 빨개졌네.

내사 아무치도 않다.

호호 칩어라 구보로!

7.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8.비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서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¹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9.산 너머 저쪽

정지용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우 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 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맞어 쩌르렁!

산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10.산에서 온 새

정지용

새삼나무 싹이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11.새빨간 기관차

정지용

으으릿 느으릿 한눈파는 겨를에
사랑이 수이 알어질가도 싶구나.
어린아이야,달려가자.
두뺨에 피여오른 어여쁜 불이
일즉 꺼져 버리면 어찌 하자니?
줄 달음질 쳐 가자.
바람은 휘잉. 휘잉.
만틀 자락에 몸이 떠오를 듯.
눈보라는 풀. 풀.
붕어새끼 꾀여내는 모이 같다.
어린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새빨간 기관차처럼 달려가자!

12.석류

정지용

장미꽃처럼 곱게 피어 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석류열매를 쪼기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ㅅ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조름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13.슬픈 인상화

정지용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여름 저녁때.....

먼 해안 쪽
길옆 나무에 늘어 슨
전등.전등.

헤엄쳐 나온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 오는
축향의 기적 소리... 기적소리...

이국정조로 퍼득이는
세관의 깃 발.깃 발.

세멘트 깐 인도측으로 사폿사폿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

그는 흘러가는 실심한 풍경이여니..

부질없이랑쥬 껍질 씨비는 시름....

아아, 에시리. 황
그대는 상해로가는구료....

14.옥류동玉流洞

정지용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瀑布 소리 하잔히
봄우뢰를 울다.

날가지 겹겹히
모란꽃닙 포기이는듯.

자위 돌아 사폿 질ㅅ듯
위태로히 솟은 봉오리들.

골이 속 속 접히어 들어
이내(晴嵐)가 새포롬 서그러거리는 숫도림.

꽃가루 묻힌양 날러올라
나래 떠는 해.

보라빛 해ㅅ살이
幅지어 빗겨 걸치이매,

기슭에 藥草들의
소란한 呼吸 !

들새도 날러들지 않고
神秘가 한끗 저자 선 한낮.

물도 젖여지지 않어
흰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또리도
흠식 한양

옴짓
아니 ?다.

15.유리창

정지용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 새처럼 날러갔구나 !

2
내어다 보니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잣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유리를 입으로 쫏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小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누뤼알
아,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머언 꽃 !
도회에는 고운 화재가 오른다.

16.저녁햇살

정지용

불 피어오르듯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

수저븐 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네 눈은 고만스런 혹 단초
네 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점.

빨어도 빨어도 배고프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 햇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고파라

17.조약돌

정지용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청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 오르는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 이러뇨

48.춘설

정지용

문 열자 선뚝! 뚝 둣 둣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옹송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19.風浪夢 1

정지용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끝없는 우름 바다를 안으올때
葡萄빛 밤이 밀려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물건너 외딴 섬, 銀灰色 巨人이
바람 사나운 날, 덮쳐 오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당신 께서 오신다니
당신은 어찌나 오시랴십니가.

窓밖에는 참새떼 눈초리 무거웁고
窓안에는 시름겨워 턱을 고일때,
銀고리 같은 새벽달
붓그럼성 스런 낯가림을 벗듯이,
그모양으로 오시랴십니가.

외로운 조름, 風浪에 어리울때
앞 浦口에는 궂은비 자욱히 둘리고
行船배 북이 웁니다, 북이 웁니다.

20.피리

정지용

자네는 인어를 잡아
아씨를 삼을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따뜻한 바다속에 여행도 하려니.

자네는 유리 같은 유령이 되여
뼈만 앙사하게 보일 수 있나?

달이 이리 창백한 밤엔
풍선을 잡어타고
花粉 날리는 하늘로 둥 둥 떠오르기도 하려니.

아모도 없는 나무 그늘 속에서
피리와 단둘이 이야기 하노니.

21.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22.호면

정지용

손바닥 울리는 소리
곱드랗게 건너간다

그 뒤로 흰게우가 미끄러져 간다

23.호수

정지용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24.紅椿(홍춘)

정지용


椿나무 꽃 피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아이들 제춤에 뜻없는 노래를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조름조는 마을길에 고달펴
아름 아름 알어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 오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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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 모음 35편
 
1. 가을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화 꼴 짜기를 지나 마른나무
가지 위에 다른 까마귀 같이

2.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 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슬한 자양
에 스며 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3.꿈을 생각하며

김현승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 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4.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눈물을 지어 주시다.

5. 새해 인사

김현승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6. 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 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7. 일요일의 미학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音符에다 부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만에 편히 쉬던 신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 한다.

8. 지각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9. 희망이라는 것

김현승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 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

10. 가을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11. 겨우살이

김현승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12. 겨울 까마귀

김현승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울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깍∼ 

13. 겨울 나그네

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너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 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장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 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 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解凍)의 기적 소리 기적처럼 울려와
땅 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14. 고독

김현승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15. 고독의 끝

김현승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16. 다형(茶兄)

김현승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17.동체시대(胴體時代)

김현승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 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18. 떠남

김현승

떠남 너의 뒷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보석은 진주나 낙엽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자연은 빛을 잃고 기적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마음의 집

김현승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찢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속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榮光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東洋의 智慧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風船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

20. 마지막 지상에서

김현승

산 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지평선을 넘어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21. 만추의 시

김현승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 ∼ 또 깊이 ∼ 

22. 무등차(茶)

김현승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23. 보석

김현승

사랑은 마음의
보석은 눈의
술.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밤의 숨소리가
그 절정에서 눈을 감고.

어느 것은 영혼의 의미마저 온전히 빼어 버린
깨끗한 입술

그것은 탄소(炭素)빛 탄식들이 쌓이고 또 쌓이어
오랜 기억의 바닥에 단단한 무늬를 짓고.

그것은 그 차거운 결정(結晶) 속에
변함 없이 빛나는 애련한 이마아쥬.

그리하여 탄환보다도 맹렬한 사모침으로
그것은 원만한 가슴 한복판에서 터진다.

나는 이것들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단단한
하나의 취(醉)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붙는 태양을 향하여 어느 날
이것들을 던졌다.

그러나 이 눈의 눈동자, 입을 여는 혀의 첫마디,
이 적과 같이 완강한 빛의 맹세는
더 무너질 것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그 빛의 뜨거운 품안에서
더욱 더 새롭게 타는 것이다.

24. 절대고독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는.

25. 창

김현승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26. 파도

김현승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27.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28. 행복의 얼굴

김현승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29. 희망

김현승

희망,
어두운 땅 속에 묻히면
황금이 되어
불같은 손을 기다리고,

너의 희망,
깜깜한 하늘에 갇히면
별이 되어
먼 언덕 위에서 빛난다

너의 희망,
아득한 바다에 뜨면
수평선의 기적이 되어
먼 나라를 저어 가고,

너의 희망,
나에게 가까이 오면
나의 사랑으로 맞아
뜨거운 입술이 된다.

빵 없는 땅에서도 배고프지 않은,
물 없는 바다에서도
목마르지 않은
우리의 희망!

온 세상에 불이 꺼져 캄캄할 때에도,
내가 찾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 끝으로
희망에서 불을 붙여 온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때에도
우리의 무덤마저 빼앗을 때에도
우릴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우리에게 한 번 주어 버린 것을
오오, 우리의 신(神)도 뉘우치고 있을
너와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30. 감사

김현승

감사는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의 詩로...... .

31. 길

김현승

나의 길은
발을 여이고
배로 기어간다
五月의 가시밭을.

너의 길은
빵을 잃고,
마른 혀로 입맞춘다
七月의 황톳길을.

그대의 길은
사랑을 잃고,
꿈으로만 떠오른다
十月의 푸른 하늘을.

우리의 길은
머리를 잃고,
가는 꼬리를 휘저으며 간다
山河에 머흘한 구름 속으로.

32. 내일

김현승

나는 이렇게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명일(明日)의 하루를
넘치게 하라.

내일은 언제나 내게는 축제의 날,
꽃이 없으면 웃음을 들고 가더래도.......

내일,
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

33.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34. 바다의 육체(肉體)

김현승

푸른 잉크로 시를 쓰듯
백사장의 깃은 물결에 젖었다.

여기서는 바람은 나푸킨처럼 목에 걸었다.
여기서는 발이 손보다 희고
게는 옆으로 걸었다.

멀리 이는 파도-- 바다의 쟈스민은 피었다 지고,

흑조빛 밤이 덮이면
천막이 열린 편으로
유성들은 시민과 같이 자주 지나갔다.
별들은 하나하나 천년의 모래 앞에 씻기운
천리 밖의 보석들......

바다에 와서야
바다는 물의 육체만이 아님을 알았다.

뭍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파도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내 꿈의 수평선을 머얼리 그어 둘 테다!

나는 이윽고 푸른 바다에 젖는 손수건이 되어
뭍으로 돌아왔다.

35. 오월의 그늘

김현승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그늘,
밝음에 너는 옷을 입혔구나
우리도 일일이 형상을 들어
때로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 밝음, 이 빛은
채울 대로 가득히 채우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그늘―너에게서……

내 아버지의 집
풍성한 대지의 원탁마다
그늘,
오월의 새 술들 가득 부어라!

이팝나무―네 이름 아래
나의 고단한 꿈을 한때나마 쉬어 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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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옥 시 모음 70편

 

《1》

괜찮아 그대만 있으면 

 

서명옥

 

잔잔한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지만 

그대 마음은 흔들림이 없고 

 

시선 머무는 곳에 

예쁜 장갑 하나 그대 시린 

손에 끼워 주고 싶다

 

자주 볼 수 없어 

그리운 마음뿐이지만 

외로움도 기다림도 

괜찮아 그대만 있으면……

 

《2》

그 날처럼 

 

서명옥

 

꼭 비 온다는

약속은 없지만

내 가슴엔 비가 내린다

 

이유 없이

사람이 그리운 날

어느 간이역 기다림은 꽃이 되고

 

어두운 창가

별빛만 가득한데

못내 아쉬운 짧은 여운

《3》

그 사람 

 

서명옥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 사람은 내 맘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바람 같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고파지면 익숙해진 

그 길을 따라 먼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눈빛 

머리 쓰다듬어 주는 손길 속에 

그 사람만 생각하는 내가 돼버렸습니다

 

어찌하나요 눈감아도 

눈을 떠도 떠오르는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내 맘 그대는 알까요 

☆★☆★☆★☆★☆★☆★☆★☆★☆★☆★☆★☆★

《4》

그대 생각 

 

서명옥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가슴속 묻어둔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그냥 좋아요 

 

혹여 기다림에 지쳐 

내가 먼저 부르거든 살짝이 왔다가 

가실 때는 그대 마음만 두고 가세요

 

잠시라도 그대 흔적 

지워질까 포근히 내 몸을 

감싸면 되살아나는 불꽃 연정 

 

하얗게 밤을 지새워도 

난 괜찮아요 어둠은 걷히고 그대를 

만날 수 있는 내일이 있으니까요

☆★☆★☆★☆★☆★☆★☆★☆★☆★☆★☆★☆★

《5》

그대가 있는 아침 

 

서명옥 

 

작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봄비 오는 소리

 

나무 아래 

놓인 의자 그리움이 

앉아 있네 

 

이때쯤이면 

기다려지는 

다정한 목소리 

 

즐거운 하루를 

알려주는 참 좋은 기분

그대가 있는 아침

☆★☆★☆★☆★☆★☆★☆★☆★☆★☆★☆★☆★

《6》

그대는 기분 좋은 사람

 

서명옥

 

화사한

봄꽃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수놓을 만큼

하늘은 파랗고

산새들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면

어느새 그리움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토라져도 즐겁고

즐거워서 행복한 그대는

기분 좋은 사람입니다

☆★☆★☆★☆★☆★☆★☆★☆★☆★☆★☆★☆★

《7》

그래도 될까요 

 

서명옥

 

옅은 분홍빛

커튼을 젖히면

창문 틈새 부는 바람

봄을 알리는 소리

 

꿈결 귓전에

들리는 음성 나도 몰래

눈을 떠보면 언제인지

좋은 아침이라는 문자

 

오랜 인연이었다고는 하나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은 사람

애틋한 기억만 되살아나는데

 

오늘 밤에도

그대 마음속으로

살포시 들어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

《8》

그런 날도 있더라 

 

서명옥

 

내게 주어진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 

 

지친 몸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은 날 

 

소박한 저녁 밥상에 

지난 얘기 나누며 

같이 웃어 줄 수 있는 사람 

 

늦은 밤 

작은 벤치에 앉아

 

밤새도록 함께 

있고 싶은

그런 날도 있더라 

☆★☆★☆★☆★☆★☆★☆★☆★☆★☆★☆★☆★

《9》

그런 날이 있습니다 

 

서명옥

 

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홀로 있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짓누르는

무거운 어깨

훌훌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다만 가을이 

슬프지 않은 것은

함께 가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

《10》

그렇게 사는 거야

 

서명옥

 

보고 싶을 때

허물없이 찾아가

눈빛만 봐도 맘이 통하는 사람

 

비싼 커피 아니면 어때

음식점 후식 커피 마시며

세상 얘기 다 들어주는 사람

 

인생사는 게 별거 있겠어

서로 위해 주며 사는 거지

 

아프면 위로해 주고

힘들면 토닥여 주고 서로 보듬어 

주며 그렇게 사는 거야

☆★☆★☆★☆★☆★☆★☆★☆★☆★☆★☆★☆★

《11》

그리운 사람 하나 

 

서명옥

 

왜 그런지 오늘밤에는

잠이 올 것 같지 않네

창밖에 하얀 눈이 올 것 같아서

 

이런 날 가끔 내 맘속에 

찾아와 주는 손님 같은

그대는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작은 탁자 위에

그리운 사람 하나

웃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듣고 싶은

임의 목소리 날 울리게 하네 

☆★☆★☆★☆★☆★☆★☆★☆★☆★☆★☆★☆★

《12》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서명옥

 

창문 밖 풍경이

따사로워 그리움이 

짙어지는 날 

 

꽃이 피는 봄날은 

오고 흘러가는 구름 보면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다 

 

내 마음 한 자락 

그대 뜨락에 기웃거리면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두근거리는 

이내 맘 그대 넓은 

가슴으로 잠재워 주소서

☆★☆★☆★☆★☆★☆★☆★☆★☆★☆★☆★☆★

《13》

기다림의 꽃 

 

서명옥

 

멀거나 가깝거나

약속된 만남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꽃 송이 헤아리며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다림의 꽃

 

재촉하는 마음

얼마를 더 견뎌야

너를 볼 수 있을까 

☆★☆★☆★☆★☆★☆★☆★☆★☆★☆★☆★☆★

《14》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서명옥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더라도

다정한 눈빛 고운 사람이 되고 싶다

 

혹여 화나는 일이

슬픈 일이 있더라도

속내 감추며 웃는 사람이 되고 싶고

 

기쁠 때 함께이기보다는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허름한 찻집이라도

분위기 띄워 주며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그저 에쁘게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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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길 위의 인생 

 

서명옥

 

기약 없이 만났다가

싫어지면 떠나는 그런 슬픈

인연이 아니었음 좋겠습니다 

 

가끔 허한 빈자리 

채움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주는 

그런 사이였음 좋겠습니다

 

살다가 살다가

더러 힘든 날이 오면

아낌없는 용기와 힘을 주는

든든한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후회 없이

살며 사랑하며 길 떠나는 인생 

마지막까지 두 손 놓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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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꽃잎 연서 

 

서명옥 

 

아름다운 

꽃도 때로는 빗물에 

젖어 보고 싶겠지 

 

누가 봐 주지 

않아도 가끔은 바람에 

흔들려도 보고 

 

펼쳐지는 

꽃잎에 고운 사연 적어 

내 마음 띄워 보내면 

 

달콤한 속살거림

이것이 행복이라 말하리

보내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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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날마다 좋은 그대

 

서명옥

 

이슬 먹고 자란

한 송이 꽃 그댈 위해

피었답니다

 

그 꽃망울 터트리기

위해 숱한 밤을 지새웠고

쓰다만 편지지엔 하얀 그리움 가득

 

부르면 올 것만 같고

다가서면 안길 것 같은

날마다 좋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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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내 마음 가져가세요

 

서명옥

 

들 뜬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날

열린 창문으로 향긋한

바람 불어오면

 

작은 탁자 위에

사진 하나 참 좋은 인연

그리움 키우며 지샌 밤이

몇 날이던가

 

아직도 못다 한 말

가슴속 깊이 남았는데

부탁해요 기회는 지금

내 마음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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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서명옥

 

하루의 여정길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사는 사람이 있지요

 

부재중 전화도

볼 틈도 없이 긴 하루가

끝나면 어느새 어둠이 찾아오고

 

늘 그렇듯이

애틋한 그리움이 몰려오는 시간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꾹꾹 숫자를 누르면

다정한 목소리에 심쿵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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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내 마음의 뜨락에서 

 

서명옥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겨울 이별을 앞두고

먼지 쌓인 수첩 속

빛바랜 사진 꺼내 놓고

 

울컹대는 마음

잔작에 잘해줄 걸

작은 후회가 밀려드는 밤

 

내 마음의 뜨락에선

너를 향한 마음이

편지를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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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명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단점이 있어도 보고도 

못 본척 해야만 합니다 

 

단점을 들추다 보면 

애틋한 마음이 잠깐은 

사라지기 때문이겠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작은 허물조차도 

참아주는 속 깊은 사람 

 

가끔 미안해지는 마음 

더 잘해주고 싶어 손 내밀면 

살며시 다가와 손잡아 주는 

그대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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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서명옥

 

바쁜 틈을 타

언제라도 안부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할말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보고 싶다고

다정히 말 건네면

웃어 주는 사람입니다

 

맑은 날보다

햇빛 찡그린 날

빗방울 떨어지면

 

조그마한 찻집에서

얘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그립습니다

☆★☆★☆★☆★☆★☆★☆★☆★☆★☆★☆★☆★

《23》

너에게 가는 길 

 

서명옥

 

자주 볼 수 없어도

매일 주고받는 말 한마디

애틋한 정이 쌓이고

 

그저 느낀 대로

진실한 마음 건네고 나면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가끔 그리우면 

하늘 한 번 쳐다봤지만

봄빛이 아름다워 너에게 가는 길

 

차창 밖 봄의 미소가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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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너에게 보내는 편지

 

서명옥 

 

외로움으로 잠 못 이룰 때

너를 만나 빈 가슴 채울 수 있었다

 

쓸곳이 없어 공간 못 채운 편지지

너로 인해 밤새 칸을 빼곡히 쓸 수 있었고

 

무심히 내다 본 밤하늘에 별빛도

지금은 네 생각으로 하나 둘 세면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지붕 위에 능소화 꽃 

너와 나를 위해 웃어주던 날

이토록 행복함은 네가 있기 때문 

 

널 기억하고

문득 생각날 때 한 통의 전화로

외로운 맘 달래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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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네가 보고 싶던 날 

 

서명옥

 

보고 싶었다고

속깊은 얘기 나눴어도

돌아서면 쓸쓸한 날이 있지

 

차 한잔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도 신나지 않는 건

네가 곁에 없기 때문일까

 

아무런 생각 없이 

네가 머무는 하늘 바라보면

가슴은 먹먹해지고

 

스치는 자동차

불빛 따라 다가서는

네 모습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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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눈송이 같은 그대

 

서명옥

 

야윈 나뭇가지 위

밤새 하얀 눈꽃이 피었네요

 

그러길 몇 번

아마도 임 그리워 피는

꽃 같아 나도 몰래 서성입니다

 

달콤한 말 한마디

외로움 눈녹듯 사라지고

 

같은 하늘 아래

나만의 뜨락에 사는

눈송이 같은 그대

당신 겨울은 따뜻한가요

☆★☆★☆★☆★☆★☆★☆★☆★☆★☆★☆★☆★

《27》

눈을 감으면 

 

서명옥

 

긴 하루의 여정길 

곱게 문을 닫고 

지친 몸 하늘에 뉘면 

 

귓가에 들리는 

다정한 별의 속삭임 

노곤함이 사라진다 

 

눈을 감으면 

어느 틈에 왔다 갔는지 

머리맡에 놓인 그리움 연서 

 

보고 또 보아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너를 향한 이 마음

어찌하면 좋을까 

☆★☆★☆★☆★☆★☆★☆★☆★☆★☆★☆★☆★

《28》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서명옥 

 

아무런 목적 없는 

만남일지라도 

찰나의 기대감은 있다 

 

오늘은 내가 뜻하는 

하루를 만들어줄까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 생각뿐

 

타고난 성격은 고칠 순 

없지만 그녀에게만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

《29》

당신과 함께 하는 봄 

 

서명옥 

 

아침 햇살 

맑은 공기 마시며 

차 한 잔에 당신을 그려봅니다 

 

그냥 할 말 없어도 

목소리 듣고 싶어 버튼을

누르면 다정한 목소리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데 

지금 봄이 오는 소리 들리나요

 

못 견디게 그리워

불러보는 한 사람

당신도 내가 그립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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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당신이 있어 참 좋다

 

서명옥

 

힘들 때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내겐 힘이 되고

 

달콤한 말로 

잘해주기 보다는

진실한 마음이 더 좋다

 

언제나 나만을

생각하고 함께 마음 나누는

당신이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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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따뜻한 동행 

 

서명옥

 

당신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당신의 작은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날도 있습니다

 

가끔 위로받고 싶은 날

포개진 마음 따뜻한

동행이고 싶습니다

 

그렇게 늘 함께할

사람 있어 별 하나 없는 밤도

외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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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먼 훗날에 우리는 

 

서명옥

 

꼭 할 말이 있어서도 아닌

묻고 싶은 말도 없는데

그냥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날은 눈이 좋다고

비가 오는 날은 보고 싶다고

언제든지 목소리 들려주고 싶은 사람

 

가끔 무심한 듯 소식 없으면

서운해지고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되는 사람

 

이렇게 가슴속 연정

품고 사는 우리는 먼 훗날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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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서명옥

 

처음엔 

안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몇 날 며칠 

아무도 모르게 

분홍빛 연서 써놓고 

 

밤하늘 별빛 보며 

뒤척이던 밤

 

어느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 있어 

그저 행복해 하는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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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바람 편에 띄우는 연서

 

서명옥

 

힘들게 쌓아논 

모래 탑 바람에 무너질까

너를 품고 산 세월

 

가끔 힘들면

하늘 한번보고

구름 속을 헤매어도

 

네가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세월 가도

놓지 못할 인연

지울 수 없는 너이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내 모든 걸 주고 싶은 맘

바람 편에 실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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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별이 된 그대 

 

서명옥

 

어쩌다 오는

그리움이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을 터인데

 

온종일 내 가슴속에

사는 그대는 내 생각도 

하시는지 묻고 싶어요

 

해는 기울어

석양에 노을이 지면

찻잔 속에 어리는 얼굴

 

별이 된 그대

꿈이어도 좋아요

이 밤 함께할 수 있다면

☆★☆★☆★☆★☆★☆★☆★☆★☆★☆★☆★☆★

《36》

봄날의 수채화 

 

서명옥

 

너에게 가는 동안

난 천사가 되어 마음 기부하는 

착한 사람이 된다

 

하찮은 풀꽃도

길가에 작은 돌멩이도

예쁘고 소중해 보인다

 

내게 오는 봄내음도

오늘따라 향기롭다

 

그런날이 매일 있었으면

이런 행복이 자주 생겼으면

 

네가 좋아하는 

향기 품은 연서 가슴에 안고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37》

봄바람 불면 

 

서명옥

 

하던 일 멈추고

잠시 그대 생각에 잠기면

자꾸만 멍해지는 기분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걸어보지만

허무한 마음뿐

 

애틋한 기다림은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행여나 그대 오실까

서쪽 하늘 바라보면

알싸한 이 가슴엔

봄바람만 불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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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봄비 닮은 그대 

 

서명옥 

 

좁다란 길목

작은 탁자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누가 볼까

애틋한 마음 흐르는

빗물에 내 사연 띄우고

 

고운 인연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봄비 닮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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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사는 동안

 

서명옥 

 

뜨락에 빨간 장미

한 잎 따다 작은 꽃병에 

꽂아 놓고 

 

밤이 오길 기다려 

향기 품은 연서 

누군가에게 보내면

 

생각만 해도 

벅차오르는 뿌듯함 

너무나 소중해

 

생이 다 하는 날까지 

누구도 걷지 않은 길 

힘차게 달린다 언제나 널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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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사람이 좋아지는 이유

 

서명옥 

 

스치는 인연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듯

 

잘 지내느나고

아프진 않냐고 가끔

안부 전해주는 사람이 좋다

 

그냥 해 보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데 가는 거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더라

 

차 한잔에 인생 쓴맛도

배우며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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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랑의 수채화 

 

서명옥

 

잊는다고

잊혀질 이름이라면

가슴속에 넣고 살진

않았을 겁니다

 

지운다고 지워질

그리움이라면

매일 수첩 속에 간직하진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먼 하늘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보곤 하는데

 

그대 있는 곳에도

비는 내릴까요

빗방울 하나에 그대를 위한

사랑의 수채화 그리고 싶어요

☆★☆★☆★☆★☆★☆★☆★☆★☆★☆★☆★☆★

《42》

세월이 흘러도 늘 좋은 사람

 

서명옥 

 

보여지는 마음보다

보이지 않는 속마음이 고운

사람이 있습니다

 

다정한 얼굴로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그 사람에게선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요

 

하루가 훌쩍 지나

어두운 밤이 찾아와도

외롭지 않는 건 말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당신은

늘 좋은 사람입니다

☆★☆★☆★☆★☆★☆★☆★☆★☆★☆★☆★☆★

《43》

소중한 약속 

 

서명옥 

 

보이지 않을 때 

그리워하는 사람보다는 

눈앞에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이 되자 

 

하룻밤 지나면 

잊혀지는 사람이기 보다는 

늘 가슴속에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다

 

원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바라는 것 없이 주는 마음이면 좋겠다

 

살다가 힘든 날이 오면 

투정 부리기보다는 토닥여주며 

묵묵하게 우리 이렇게 살자 

☆★☆★☆★☆★☆★☆★☆★☆★☆★☆★☆★☆★

《44》

아직도 널 

 

서명옥

 

긴 긴 여름 날 

뜻밖의 더위도 

네가 있기에 더운 줄 몰랐다 

 

소리 없이 

익어가는 하얀 밤도 

너만 생각하며 웃을 수 있었고 

 

추운 겨울 

창문 틈새로 부는 

시린 바람도 견딜 수 있는 건

너와의 언약 때문이리라 

 

아침 햇살 

눈부시게 밝아오면 

언제나 널 부르는 소리 

가시질 않는 긴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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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아직은 꽃이고 싶다 

 

서명옥

 

길섶에 피어있는

들꽃도 향기가 있듯이

나 자신을 가꿀 줄 아는

고운 여인이 되고 싶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인생살이

즐거운 날만 있으랴만은

 

그래도 사는 날까지

웃음 주고 기쁨 받는 

사랑스런 여자가 되고 싶다

 

오늘같이 좋은 날

만남 뒤에 긴 여운

내일이면 지워질지라도

언제나 그대만의 꽃이 되고 싶다 - 

☆★☆★☆★☆★☆★☆★☆★☆★☆★☆★☆★☆★

《46》

알고 있나요 

 

서명옥

 

새벽 빗소리 잠 깬 아침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함께 함이 행복이라 

뒤돌아서면 휑한 빈자리

그 날 밤은 잠 못 이룬다는 거 

 

덩그러니 놓여있는 

숲 속 작은 의자 

홀로 앉고 싶지 않아 

 

이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 줄 것 같은 예감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 

그댄 알고 있나요

☆★☆★☆★☆★☆★☆★☆★☆★☆★☆★☆★☆★

《47》

어쩌면 좋을까 

 

서명옥

 

그렇게도 기다렸던

하얀 눈은 오건만 그날처럼

마음 같이할 그대는 먼 곳에 있고

 

나뭇가지 흔드는

매서운 바람은 가슴속을

후비고 지나가는데

 

어쩌면 좋을까

가로등 불빛 아래

그대 그리워 나도 몰래

별만 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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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언제나 그대는 

 

서명옥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만 보아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말없이

애써 숨기려 해도

내 마음을 알아버린 사람입니다

 

피곤함 풀어주는

다정한 목소리 따스한 웃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이 온다 해도

언제나 그대는 변하지 않는

내 인생의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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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우리가 만난 날에는

 

서명옥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무수히 많은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만난 날에는 

그저 기쁨을 주는 시간이 되자 

 

그리움에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지라도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자 

 

만나면 헤어짐이 싫고 

또다시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오랜 시간 흘러도 변함 없는 

하얀 정 꽃피우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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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런 날도 있더라 

 

서명옥

 

저만치 와 있는 봄 

겨울 이별은 아직 먼 듯 

꽃바람 부는 날 

 

함께 하는 

사람 있어 하루가 즐겁고 

마음 머무는 곳 

 

그리움이 먼저 

달려와 차 한잔 마시고 싶은 

이런 날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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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런 오늘이 좋다 

 

서명옥

 

새 소리가 

아침잠을 깨우고 

 

열린 창문가엔 

향긋한 바람이 분다 

 

한 잔의 커피가 

내 입술을 적시면 

 

온다네 불어온다네 

봄바람에 그대 향기가. 답글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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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이런 우리가 되자 

 

서명옥 

 

어느 바람이 몰고 온 

향기인지 향수 같은 비누 냄새 

코끝을 자극한다 

 

차츰차츰 익어가는 

빨간 사과 풋풋함은 없어도 

단맛 나는 것처럼 

 

그대와 나

점 점 닮아가는 모습

긍정의 힘은 하나 되어

 

함께 가는 길

더러는 힘이 들어도 

감싸주고 배려하는 

이런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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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인생의 소중한 벗이 있다면

 

서명옥

 

날마다 기억하지

않아도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가 잘 통해

긴 이야기 나누면서

정이 든 사람이지요

 

만나지 않아도

그 마음 알 수 있고

부르지 않아도

내 곁에 머무는 사람

 

이렇게 좋은 벗 하나가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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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장미 한 송이 

 

서명옥 

 

꽃비 내리는 날 작고 아담한 

어느 간이역에 가 보셨나요 

 

그곳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 

하나같이 표정이 밝아요 

아마도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겠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다 

하여도 사랑이라면 애달픈 그리움 

 

만약에 그대가 먼저 

부른다면 언제든지 달려갈게요 

 

혹여 고백이라도 

하신다면 잠깐만요 제가 먼저 

장미 한 송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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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진실한 사랑은 

 

서명옥 

 

어울림 속에서 

둘이 또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건 

사랑하는 거래요

 

건네는 말 한마디 

꾹꾹 눌러 담은 애틋함과 

걱정이 담겨있는 것은 그만큼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이래요 

 

가끔 힘이 들 때 

위로의 말보다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게 진실한 사랑인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만남은 기다림을 

배우게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대가 내게 준 선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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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집 하나 짓고 싶다

 

서명옥

 

우연히 길을 걷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마음 한 자락 내려 놓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벗 하나 만나

삶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아침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다정스레

눈빛 마주하고

 

저녁이면 해지는

노을 바라보며 사랑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에 집 하나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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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참 좋다 오늘 

 

서명옥

 

부드러운 바람

따스한 햇살과 구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아카시아 꽃향기

뜨락에 장미 모두 다

사랑스런 오월의 향기

 

조금 부족해도

나눔의 시간 소중히 담고

돌아오는 길엔

 

너도 웃고 나도 웃고

덩달아 하늘도 웃었던

오늘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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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추억을 걷다 

 

서명옥

 

작은 노트 하나

책장을 넘기면 빼곡히

담겨진 그날의 사연들

 

그리움은 무채색이라

마음에 담아두지만

추억은 꺼내볼 수 있어

또다시 그 길을 걷는다

 

긴 시간을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하는 우리는 

 

언제쯤 그리움

접어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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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편해서 좋은 사람 

 

서명옥

 

맑은 하늘에

물감으로 수채화 그림

그리고 싶은 날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그리운 사람

얼굴을 그린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편해서 좋은 사람

 

가끔 힘들어할 때

속마음 감추고 등 뒤에서

꼭 안아주고 싶은데

그대는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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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평생 만나고 싶은 사람 

 

서명옥

 

삶의 한 모퉁이에서

외롭거나 힘들 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햇살 좋은 창가에

마주 앉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편지로 대화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맘이 통하고 생각이 깊어

내 맘을 헤아려주는 참 좋은 인연

 

인생의 길목에서

평생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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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풍경 같은 하루 

 

서명옥

 

밤하늘별을 세다

하얀 밤 꼬박 세우고 

눈부신 아침을 맞는다

 

눈빛만 보아도

가슴 떨리던 그때 그날들

그런 날이 몇 날이었던가

 

뜨락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 머리에 이고

발길 따라 걷는 길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 지을까

콧노래 절로 나는

풍경 같은 하루 

☆★☆★☆★☆★☆★☆★☆★☆★☆★☆★☆★☆★

《62》

하늘빛 그리움 

 

서명옥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은 

뭉클해지고 

 

늘 등뒤에서 

말없이 지켜주며 

더 없는 마음 베푸는 사람 

 

마주하지 않아도 

두고두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사람이기에 

수많은 날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하늘빛 그리움

☆★☆★☆★☆★☆★☆★☆★☆★☆★☆★☆★☆★

《63》

한사람 

 

서명옥

 

늦가을 찬 서리 내리고

뜨락 자작나무엔 

가슴 시린 바람이 분다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현도 없이

그렇게 가을은 여운만 남길 테지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하얀 백지에 내 마음 담아

고운 빛 연서 그대에게 보내고

 

나만 알고 싶고

나만 부르고 싶은 그 이름

오직 한 사람 

☆★☆★☆★☆★☆★☆★☆★☆★☆★☆★☆★☆★

《64》

한층 깊어진 삶 

 

서명옥 

 

바쁜 일상 속 고단함을 

화려한 조명과 함께 내 몸을 

맡기고 현란하게 춤을 추고 싶다 

 

나이 듦에 주위 시선 

의식하게 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를 위해 살고 싶다 

 

한층 깊어진 삶 

가끔 흔들리며 사는 것도 

일상에서 조금 비껴가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추운 겨울 내 삶의 

봄날을 위해 오늘도 하루의 

길 위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

《65》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서명옥

 

찬바람 가르며

낙엽이 뒹구는 가을 길을

당신과 함께 걸으면

 

마음 안에 스며드는 행복

그것은 나만의 기쁨

 

늦은 밤 내 목소리

듣고 싶다며 잘 자라는 인사는

애틋한 당신 마음이 스며있고

 

오래된 고목 나무처럼

묵묵히 내 곁을 

지켜봐 주는 당신이 좋아서

 

내 마음 살짝 숨겨놓고

숨박꼭질도 해보지만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

《66》

항상 그 자리에 

 

서명옥

 

우리가 사는 세상 

녹녹치 않지만 

꿈이 있다면 살만한 거지 

 

물질로 인정받는 세상 

조금 못 가진들 어떠리 

마음 편한게 제일인 거지 

 

초심으로 돌아가

욕심 다 내려놓고 

마음 비우니 살만한 세상 

 

멈추지 않는 세월 

붙잡진 못해도

나는 항상 그 자리에 

☆★☆★☆★☆★☆★☆★☆★☆★☆★☆★☆★☆★

《67》

휴식 같은 그대 

 

서명옥

 

하루의 시작과

저물어 가는 여정길도

그대만 생각하면 기분 좋아지고

 

이른 아침 반가운

첫 인사로 내 마음 들뜨게 하는

비타민 같은 사람

 

속내를 털어놔도

편안하게 들어주고

말없이 챙겨주는 고마운 사람

 

단 하루도 잊은 적 없고

어딜가도 따라다니는

휴식 같은 그대가 있어

 

준비없이 가을은 와도

결코 외롭진 않을 이 순간

내일의 희망을 걸어봅니다 

☆★☆★☆★☆★☆★☆★☆★☆★☆★☆★☆★☆★

《68》

겨울 창가에서 

 

서명옥

 

눈은 오질 않고

창문 틈새로 부는 바람

따뜻함이 그리운 계절

 

세파에 동요되지 않고

살아온 삶 겨울이 춥다 한들 

마음마저 추울까

 

열심히 살아온 인생길

내게 사랑을 듬뿍 주어야지

그리고 꿋꿋하게 걸어야겠다

☆★☆★☆★☆★☆★☆★☆★☆★☆★☆★☆★☆★

《69》

뜨락에 머무는 가을

 

서명옥

 

하얀 달빛이

창문가로 비추면

환한 웃음 짓는 얼굴 하나

 

잡으면 멀어질 것 같고

멀어지면 다가와 내 마음속에

머무는 사람

 

흐린 날이건 

맑은 날이건

늘 똑같은 기다림이건만

 

어제와 다른 오늘

뜨락에 머무는 가을

아쉽게도 짧은 시간 긴 여운

☆★☆★☆★☆★☆★☆★☆★☆★☆★☆★☆★☆★

《70》

부치지 않은 편지 

 

서명옥

 

항상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

거침없이 살아온 내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오래된 바위틈

이끼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은데

 

송두리째 흔들던

구멍 난 가슴 갈바람에

씻겨질까 두려워

 

형광등 불빛 아래

조곤조곤 써 내려간

부치지 않은 편지 어떻게 전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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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시 모음 51편

☆★☆★☆★☆★☆★☆★☆★☆★☆★☆★☆★☆★

《1》

너를 보내고

 

이정하 

 

너를 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찻잔은 아직도 따스했으나 

슬픔과 절망의 입자만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리석었던 내 삶의 편린들이여, 

 

언제나 나는 뒤늦게 사랑을 느꼈고 

언제나 나는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그대가 걸어갔던 길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툭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눈물이었다. 

 

한 줄기 눈물이었다. 

 

가슴은 차가운데 눈물은 왜이리 뜨거운가. 

 

찻잔은 식은 지 이미 오래였지만

내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내 슬픔, 

내 그리움은 이제부터 데워지리라. 

 

그대는 가고, 

나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나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할까 

안개가 피어올랐다. 

 

기어이 그대를 따라가고야 말 

내 슬픈 영혼의 입자들이. 

☆★☆★☆★☆★☆★☆★☆★☆★☆★☆★☆★☆★

《2》

작은 기도

 

이정하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게 하소서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면 

그 아픔마저 행복하다 생각하게 하소서 

그리워할 누가 없는 사람은 

아플 가슴마저도 없나니

 

아파도 나만 아파하게 하소서 

둘이 느끼는 것보다 몇 배 도하더라도 

부디 나 한 사람만 아파하게 하소서 

간구하노니 

이별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

그냥 한번 해보는 연습이게 하소서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다시는 헤어져 있지 않게 하기 위한 

그런 연습이게 하소서 

☆★☆★☆★☆★☆★☆★☆★☆★☆★☆★☆★☆★

《3》

가까운 거리

 

이정하

 

그녀의 머리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라도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댄 이런 나를 타이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여전히 난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우린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왜 서로보다 하고 있는 일이 먼저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자는 말,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

《4》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이정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면 

내가 다가가면 

그대는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간 뒤, 

그 상처와 그리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한 순간 가까웁다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는 마음이 더 앞섰기에.

☆★☆★☆★☆★☆★☆★☆★☆★☆★☆★☆★☆★

《5》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이정하

 

가까운 것 같아도

사실,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겠습니까.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겠습니까.

 

가늠할 수 없는 그 거리,

 

그대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오늘은 아픔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리운 것,

갖고픈 것을 멀리 두어야만 하는지…

☆★☆★☆★☆★☆★☆★☆★☆★☆★☆★☆★☆★

《6》

가을이 저무는 창가에서 

 

 

이정하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울지 마

내 시월의 창들아

그 슬픈 눈으로

곱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지 마

너의 흔들리는 그 눈빛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끌 수 있다면

네 투명한 마음속에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너에게 악수를 건네리

 

슬퍼하지마

내 시월의 창들아

이렇게 넓은 세상 속에서

또 낙엽은 지고

연인들은 쓸쓸히 헤어지고

저만치서

이별과 절망의 발자국을 뚜벅뚜벅 울리며

겨울은 걸어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 두꺼운 외투를 하나씩 준비하자 

그대와 나의 오랜 이별을 위하여

☆★☆★☆★☆★☆★☆★☆★☆★☆★☆★☆★☆★

《7》

간격

 

이정하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엄청난 것도아니면서

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

나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

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

 

그대와 나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한 몸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

《8》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9》

그대 긴 그림자

 

이정하 

 

잊을게요

그대가 말했지만

그게 아닌 눈빛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써 기다려 

우리 가슴이 식을 수 있다면

애초에 그댈 

만나지도 않았었겠지요

 

사랑했어요

그대가 말했지만

아무 대답 못 하고 

난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처럼 

서로 다가 갈 수가 없는 것인지

깊어질수록 

왜 가혹한 형벌이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애닯다

내 가는 길 

묵묵히 돌아서는 내 뒷모습은 

그대에게 어떤 상처로 남을까

그대를 떠나오면서 

난 보았습니다

내가 떠난 빈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쓸쓸히 

무너지는 그대 긴 그림자를 !

☆★☆★☆★☆★☆★☆★☆★☆★☆★☆★☆★☆★

《10》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이정하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또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만

어김없이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그런 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해 봅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 준 모든 것들,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는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내 그리움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놓고, 펑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 없는 당신이여.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

《11》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정하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는 구석진 방에는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

《12》

그를 만났습니다.

 

이정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반갑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방금 만나고 돌아오더라도 

며칠을 못 본 것 같이 허전한 

그를 만났습니다.

 

 

내가 아프고 괴로울 때면

가만히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를 만났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어디 먼 곳에 가더라도 

한 통의 엽서를 보내고 싶어지는

그를 만났습니다.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그를 만났습니다. 

☆★☆★☆★☆★☆★☆★☆★☆★☆★☆★☆★☆★

《13》

그립다는 것은 

 

이정하 

 

 

그립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내 안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지금은 너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내 안 어느 곳에 

네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너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일이다

☆★☆★☆★☆★☆★☆★☆★☆★☆★☆★☆★☆★

《14》

기다린다는 것 

 

이정하

 

귀향하는 열차를 기다립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또한

곁에 있건 없건 그 대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뜻.

일의 결과를 기다리고,

해가 뜨고 지길 기다리고,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끝내는 죽음마저 기다리는,

그리하여 기다리는 그 순간이 모여

우리 삶이 되질 않았던가.

그 중에서도 내 가장 소중한 기다림, 그대여.

내 인생의 역에 기차가 거짓말처럼 들어와 서고,

그대가 손을 흔들며 플랫폼으로 내려설

그 눈부신 시간을 기다리네.

기다리고 또 기다리네.

그대여, 어서 오기를.

그래서 먼 여행 끝의 피곤함을

모두 내게 누여라.

☆★☆★☆★☆★☆★☆★☆★☆★☆★☆★☆★☆★

《15》

기다림의 나무

 

이정하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가는 그대는 바람이었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대 얼굴이 잊히어 갈 때쯤

그대 떠나간 자리에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리리.

 

눈이 내리면 늘 빈약한 가슴으로 다가오는 그대.

잊혀진 추억들이 눈발 속에 흩날려도

아직은 황량한 그곳에 홀로 서서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노래를 부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서글펐던 지난날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나를 흔들고 지나갔던 그대는 바람이었네.

☆★☆★☆★☆★☆★☆★☆★☆★☆★☆★☆★☆★

《16》

길의 노래 

 

이정하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 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줄을 알겠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네 생각마저 접으면 

어김없이 서쪽하늘을 붉게 수놓은 저녁해.

자신은 지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며, 

내 사랑 또한 고운 빛깔로 마알갛게 번지는 

저녁 해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너의 뒷모습까지 

감싸줄 수 있는 서쪽 하늘, 

그 배경이 되고 싶었다...

☆★☆★☆★☆★☆★☆★☆★☆★☆★☆★☆★☆★

《17》

꽃 잎

 

이정하

 

그대를 영원히 간직하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어쩌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쓸데없는 집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마저 버려야

비로소 그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음을..

 

사랑은 그대를 내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는 것임을..

 

오늘 아침 맑게 피어나는 채송화 꽃잎을 보고

나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꽃잎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햇살을 받치고 떠 있는 자줏빛 모양새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 씨앞을 잉태하는, 

 

그리하여 씨앗이 영글면 훌훌 자신을 털어 버리는

그 헌신 때문이 아닐까요?

☆★☆★☆★☆★☆★☆★☆★☆★☆★☆★☆★☆★

《18》

끝끝내 

 

이정하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 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

《19》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이정하

 

나는 작은 틈새가 두려웠다.

 

나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어떤 날은

꿈 속에서도 불안했다. 

 

며칠 못 보아도 불안했고

자주 만나도 불안했고

함께 있어도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가면 갈수록 벌어지는 

'현실'이란 틈새.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그 작은 틈새가 나는 두렵다.

☆★☆★☆★☆★☆★☆★☆★☆★☆★☆★☆★☆★

《20》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정하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밖에는

☆★☆★☆★☆★☆★☆★☆★☆★☆★☆★☆★☆★

《21》

내가 웃잖아요 

 

이정하

 

그대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지요. 

 

그대가 마시다가 남겨 둔 차 한 잔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 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을 수 있지요. 

 

가세요 그대, 내가 웃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

《22》

내가 할 수 없는 한가지 

 

이정하

 

세상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대는 나보고 사랑하지 말라 하시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대에게 더 목매단다는 것을 

 

물은 물고기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수 있지만 

물고기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음을 

 

당신 대수롭지 않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그 차이가 

내 슬픔의 시작인 것을 

 

그러니 그대는 그저 모른척 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내겐 곧 

숨쉬며 살아가는 일이기에

☆★☆★☆★☆★☆★☆★☆★☆★☆★☆★☆★☆★

《23》

눈 오는 날 

 

이정하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

《24》

눈물겨운 너에게 

 

이정하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 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했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을 내 가슴속에 

오래 오래 영원히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

《25》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하 

 

창가사이로 촉촉한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같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맞춤하는 

이른 아침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모카 향기 가득한 커피 잔에 

살포시 녹아 가는 설탕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하루시작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분히 흩어지는 벗꽃들 사이로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봄바람같이 

마음 가득 설레이는 자취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른 포도밭에 떨어지는 봄비 같은 간절함으로 

내 기도 속에 떨구어지는 눈물 속에 숨겨진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어제와 오늘..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내일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26》

돌아가는 길

 

이정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그대를 돌아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갈수록 그대와 멀어지는 길.

차마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그 길을

나는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그대에게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수천 번도 더 갔던 길이라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었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만치 멀리 서 있는 당신

당신은 아시는지요?

그대에게 가지 못해 슬픈 게 아니라

그대에게 갈 수 없어 슬펐다는 것을.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빈 몸뚱어리로

그저 발만 내딛고 있었습니다.

☆★☆★☆★☆★☆★☆★☆★☆★☆★☆★☆★☆★

《27》

동행 

 

이정하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혼자였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기대도 싶은 때 그의 어깨는 비어 있지 않았다

잡아줄 손이 절실히 필요할 땐

그는 저만치서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산다는 것은 결국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 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틀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혼자서 걸어 가야하는 것이다

들어선 길 이상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내 삶에 절실한 것은 없다

☆★☆★☆★☆★☆★☆★☆★☆★☆★☆★☆★☆★

《28》

무소유

 

이정하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도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함께 서 있으나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는 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 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오래간다.

☆★☆★☆★☆★☆★☆★☆★☆★☆★☆★☆★☆★

《29》

부끄러운 사랑 

 

이정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 듯싶은데 

난 그때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나에게는 머언 나라의 종소리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당신들의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 

분식집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그런 여자였지요. 

공무원도 해보고 사무실에도 있어 보았지만 

그 돈으로는 동생들 학비조차 되지 않더라고 

밤마다 흠뻑 술에 젖는 

그런 여자 였지요. 

 

그녀를 만나고서부터 

내겐 막니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막니가 생겨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그녀에게서 느꼈을 때 

그녀는 이미 먼 길 떠난 뒤였지요. 

 

사랑이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숲속 길을 둘이 걷고 

조용한 찻집 한 귀퉁이에 마주 앉아 

귀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주어도 

채울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아직 난 잘 모르고 있으므로 

내게 아픈 막니를 두고 떠나간 그 여자처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게 

한쪽 어깨를 비워 둘 뿐입니다.

☆★☆★☆★☆★☆★☆★☆★☆★☆★☆★☆★☆★

《30》

부르면 눈물날 것 같은 그대

 

이정하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대의 이름이 있습니다

 

별이 구름에 가렸다고 해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가 내곁에 없다고해서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랑엔 

늘 맑은 날만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구름이 끼여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만약 구름이 없다면 

어디서 축복의 비가 내리겠습니까 

어디서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을 

이어주는 무지개가 뜨겠습니까 

 

내 안에 그대가 있습니다.

☆★☆★☆★☆★☆★☆★☆★☆★☆★☆★☆★☆★

《31》

비 오는 날의 일기 

 

이정하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하루종일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린 날 내마음은

어느 후미진 찾집의 의자를 닮지요.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지요.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당신을 만난 그 날 비가 내렸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니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소나기라도 뿌리는 이런 밤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집니다.

그럴수록 난 당신이 그리웁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안녕 그대여,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비가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아요.

☆★☆★☆★☆★☆★☆★☆★☆★☆★☆★☆★☆★

《32》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 

 

이정하 

 

미리 아파하지 마라.

미리 아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순간이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대 떠난다고 해서

내내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만 있지 마라.

퍼낼수록 더욱 고여드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현관문을 나서 가까운 교회라도 찾자.

그대, 혹은 나를 위해 두 손 모으는 그 순간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리 아파하지 마라.

그립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지 마라.

☆★☆★☆★☆★☆★☆★☆★☆★☆★☆★☆★☆★

《33》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

《34》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

 

이정하

 

세상엔 수도 없이 많은 길이 있으나 

늘 더듬거리며 가야하는 길이 있습니다. 

 

눈부시고 괴로워서 눈을 감고 가야 하는 길, 

그 길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행로입니다. 

 

그 길을 우리는 그대와 함께 가길 원하나 

어느 순간 눈을 떠보면 나 혼자 힘없이 

걸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그대가 먼저 

걸어가는 적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의 길은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형벌의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햇빛 따사로운 아늑한 길이 저 너머 펼쳐져 있는데 

어찌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35》

사랑이란 이름의 종이배 

 

이정하

 

1

때때로 난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픔을 자꾸 감추지만

난 그 아픔마저 나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2

그러나 언제나 사랑은

내 하고 싶은 대로하게끔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종이배처럼

그저 물결에 휩쓸릴 뿐이었다.

내 원하는 곳으로 가주지 않는 사랑

잔잔하고 평탄한길이 있는데도

굳이 험하고 물살 센 곳으로 흐르는 종이배

사랑이라는 이름의 종이배.

☆★☆★☆★☆★☆★☆★☆★☆★☆★☆★☆★☆★

《36》

사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정하 

 

 

살다 보면

사랑하면서도 끝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둘이 함께 도망을 가십시오.

몸은 남겨 두고 마음만 함께.

현실의 벽이 높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지만 어찌합니까.

현실을 외면한 사랑은 두 사람이 다치기 십상인데.

나만 아플 테니 그대는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먼저 가 있으면 언젠가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혹시 못 가게 되더라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또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으니.

☆★☆★☆★☆★☆★☆★☆★☆★☆★☆★☆★☆★

《37》

 

삶의 향기

 

이정하 

 

당신의 삶이 단조롭고 건조한 이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가슴아픈 일로 인해 

가슴이 시려오는 때도 있으며, 

주변의 따뜻한 인정으로 인해 가슴이 훈훈해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고, 살아 있기 때문에 

절망스럽기도 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햇살이 비치는 나뭇잎의 섬세한 잎맥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삶이 단조롭고 건조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는 얼마나 살 만한 것인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

《38》

서로 사랑한다는 것 

 

이정하

 

당신은 아는가,

그를 위하여 기도할 각오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이 컴컴한 어둠 속에 내가 그냥 있겠다는 것은

내 너를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정녕 아는가,

그리하여 사랑은 자기 것을 온전히 줌으로써

비워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완성된다는 것을.

☆★☆★☆★☆★☆★☆★☆★☆★☆★☆★☆★☆★

《39》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슴앓이 

 

이정하 

 

나로 인하여

그대가 아프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떠나겠습니다.

 

사랑이 서로에게

아픔만 주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사랑으로 떠나겠습니다. 

 

우리 사랑은

어쩌면 당신 방에 있는

창문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은 문이로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창문 같은 것, 

 

그대여,

이제 그만 커튼을 내리세요.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 나를

너무 야속하다 생각지 마세요. 

 

떠남이 있어야 

돌아옴도 있는 것

난 단지 그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뿐이랍니다.

☆★☆★☆★☆★☆★☆★☆★☆★☆★☆★☆★☆★

《40》

 

 

 

세상의 수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 

 

이 정 하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었거든 

사랑했다 말하지 말고 

떠날 일입니다. 

떠난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쓸쓸히 걷는 모습 또한 

보여 주지도 말 일입니다 

서로 가는 길이 틀릴지라도 

이 땅 위에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는 

그대에게 상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의 삶에 힘겨운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 진정 나를 떠났거든 

내가 있었다는 기억마저 

잊어 버릴 일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 

인연이 끊기지 않아 어쩌다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세상의 수 많은 사람중의 한 삶이 

거니 가볍게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의 앞날을 

기꺼이 축복할 수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될 일입니다. 

이별했다고 해서 서로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지 말일입니다

☆★☆★☆★☆★☆★☆★☆★☆★☆★☆★☆★☆★

《41》

스스로 빛나는 별 

 

이정하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린 그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 

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이 각기 제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제 나름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제 나름의 이름으로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납니다. 

누가 호명해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빛나는 별. 

그 별처럼 우리의 이름도, 

우리의 삶도 스스로 반짝거렸으면 좋겠습니다.

☆★☆★☆★☆★☆★☆★☆★☆★☆★☆★☆★☆★

《42》

슬픔의 무게

 

이정하

 

구름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비가 내린다.

 

슬픔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만한 힘이 없을 때

눈물이 흐른다.

 

밤새워 울어본 사람은 알리라.

세상의 어떤 슬픔이든 간에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눈물로 덜어내지 않으면

제 몸 하나도 추스릴 수 없다는 것을.

☆★☆★☆★☆★☆★☆★☆★☆★☆★☆★☆★☆★

《43》

어디까지가 그리움인지

 

이정하

 

걷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랑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대가 그리우면 난 집밖을 나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난 그대 생각을 안고 새벽길을 걷습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가 이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따뜻함이 

절실할 때입니다. 

 

새벽길을 걷다보면 사랑한다는 말조차 

아무런 쓸모 없습니다. 

 

더도 말고 적게도 말고 그저 걷는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립습니다

☆★☆★☆★☆★☆★☆★☆★☆★☆★☆★☆★☆★

《44》

어디에도 없는 그대 

 

이정하

 

그대라는 두 글자엔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그대라고 부르기만 해도 

금새 내 눈이 젖어오는 건 

아마도 우리 사랑이 

기쁨이 아닌 슬픔인 탓이겠지요 

 

지금 내 곁에 없어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리운 그대여

 

이렇게 깊은 밤이면 

더욱더 보고 싶어지는 그대여

 

그대는 아십니까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내내 당신에게 

흘러가고 있는 강이 되었다는 것을 

쉬임 없이 당신을 향해서 흐르고 있는 

사랑의 강이 되었다는 것을

 

그 강의 끝간 데에 아마 노을은 지리라

새가 날고 바람은 불리라

 

오늘밤쯤 

그대의 강가에 닿을 수 있을는지

막상 달려가 보면 망망대해인 그대

어디에도 없는 그대

☆★☆★☆★☆★☆★☆★☆★☆★☆★☆★☆★☆★

《45》

이별 노래 

 

이정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46》

저녁 길을 걸으며 

 

이정하

 

해질 무렵, 오늘도 나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또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없기도 합니다.

아픈 우리 사랑도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릴 수만 있다면

내 온 힘을 다 바쳐 곱게 가꿔 나가겠지만

그것이 또 내 가장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무작정 거리에 나서

그대에게 이르는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을 

더듬어 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여름, 무던히 내리쬐던 햇볕도 마다 않고

온 몸으로 받아 내던 잎새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 꽃잎들도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언젠가

떨어지고 말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먼저 알고 있겠지만,

그때까지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떨어진 꽃잎 거름이 되어 내년에 더더욱 활짝

필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

《47》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정하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샆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아파하렴.

☆★☆★☆★☆★☆★☆★☆★☆★☆★☆★☆★☆★

《48》

창문과 달빛 

 

이정하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

《49》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

《50》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이정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것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51》

흔들리며 사랑하며 

 

이정하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기로 하자.

찾고 헤매고 또 헤매이고

언제나 빈손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하자.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사랑,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랴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야하는 길이었기에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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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 모음 77편

☆★☆★☆★☆★☆★☆★☆★☆★☆★☆★☆★☆★

가시나무 

 

천양희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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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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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천양희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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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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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극極 

 

천양희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括?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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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천양희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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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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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묻는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삽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속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산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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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천양희

 

수평선이 되고 싶다 

 

한 평의 바다도 

못 가진 채 

수초처럼 걸려 

흔들리는 당신에게 

 

허전하게 편하거나 

편하게 허전한 

수평선 하나 주고 싶어 

 

우리가 껴안은 

수많은 해안선 

 

세상의 끈이 이렇게 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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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힘

 

천양희

 

산이 불탄 끝에 어두워진다 

재의 바람이 낮게 

산을 쓸며 지나간다 

바람맞을 나무는 이제 없다 

품속같은 숲 사라지고 

새소리 어느덧 사라지고 

구불텅한 언덕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 슬픈 시간이 갔다 

까맣게 속 탄 나무들 가지들 

남은 무엇이 있어서 

무어라 무어라 말할듯도 하다 

가지 한자락에도 

산은 저토록 그리움으로 

속이 탔다는 것인가 

어린 꽃잎 하나 

불쑥 내밀고 있다 

苦生도 저렇게 눈부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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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거울 

 

천양희

 

자신을 잘 모를 때 

자신을 과신할 때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할 때 

힘든 일을 인내해야 할 때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옥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잘못된 일 때문에 후회할 때 

실패한 일 때문에 좌절할 때 

희망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고 

절망보다 더 나은 교사는 없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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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다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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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천양희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입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 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 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 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잎들이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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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부침 

 

천양희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이 어제 같아 변한 게 없다 

날씨는 흐리고 안개 속이다 

독감을 앓고 나도 정신이 안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삶이 몸살 같다, 항상 

내가 세상에게 앙탈을 해본다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말라고 

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우린 서로 

기를 쓰며 기막히게 살았다 

벼랑 끝에 매달리기 

하루 이틀 사흘 

세상 헤엄치기 

일년 이년 삼년 

 

생각만으로도 점점 붉어지는 눈시울 

저녁의 길은 

제자리를 잃고 헤매네 

무엇을 말이라 할 수 있으리 

걸어가면 어디에 처음 같은 우리가 있을까 

돌아가면서 나 묻고 있네 

꿈도 짐도 내려놓고 

하루는 텅텅 빈 채 일찍 저물어 

상한 몸을 가두네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이 눈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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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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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적다

 

천양희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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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했을까요?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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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천양희

 

눈을 보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었네요. 

눈물은 왜 눈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고이기만 할까요. 

고여서 자꾸 넘치기만 할까요. 

 

눈을 맞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덧 눈이 쌓여 눈길이 되었네요. 

눈길은 왜 눈물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쌓이기만 할까요. 

쌓여서 자꾸 높아지기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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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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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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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천양희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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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경계 

 

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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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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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벽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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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 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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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진 

 

천양희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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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포 

 

천양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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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무늬고동 

 

천양희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텉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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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천양희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거야? 

 

어린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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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맞다 

 

천양희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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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편지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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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천양희

 

철물점 지나다 

버려진 바퀴를 본다 

구르지 않는 바퀴를 보면 

명퇴당한 아비들 같아 

덜커덕, 숨이 멎는다 

한때 신나게 굴러갔을 저 바퀴 

바퀴는 굴러갈 때 바퀴인 것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소년은 아직 바퀴의 속력을 모를 것이다 

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달려간다 

속력은 모두 바퀴 때문이란 걸 모를 것이다 

구르는 바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는 것 

그것이 바퀴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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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천양희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바람 속에서 쉰다네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만 쉰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갈 수 없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가면 죽는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 속에서 쉬고 싶다네 

발 없는 새처럼 쉬었으면 한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 

바람같이 소리치고 있다네 

내 발 어디에 있지?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가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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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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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되다 

 

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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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천양희

 

 

내집 주소를 기억하지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주소 불명 

수취인 불명 

나는 지금 

행방불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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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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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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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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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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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눈 

 

천양희

 

허공에서 소리치며 

눈이 내려온다 

가로수들이 그걸 받으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썩은 잎들은 따뜻해 

추억의 길들 오래 적막하다 

서른이 되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가로등이 반짝, 켜지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다른 길 예감할 수 없다 

길바닥 하나 덮겠다고 

눈발은 종일 몸 바꿔 뒤척인다 

그러나 눈송이들이여 

백색 정토! 설국(雪國)이나 설궁(雪宮) 

그건 늘 우리의 함정이었다 

한번 내린 눈은 

때가 되면 세상이 곧 

물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의 길 사이로 눈발이 빠져나간다 

눈발이 눈의 발이 하늘로 들려 있다 

눈은 녹고 그래서 눈에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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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천양희

 

세상을 뜻대로 읽고 싶어 

가출을 출가로 

불성을 성불로 

유수를 수유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거꾸로 읽고 싶어 

정부를 부정으로 

선생을 생선으로 

교육을 육교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 

가능을 능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바꿔 읽어보다가 

 

세상을 세상대로 읽고 싶어 

不二를 이불로 

불행을 行不로 

유일을 일류로 착각하다가 

 

삶은 삶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나는 나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각자를 자각으로 쓰고 말았네 

실상을 상실로 쓰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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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천양희

 

소리 하나로 산을 휘어잡은 새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바람보다 먼저 산을 

깨우고 계곡 아래 물살도 산정으로 당긴다 당기듯이 

소리친다 소리치며 산그림자 가볍게 

놓아버린다 숲속이 숲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산이 속으로 울다니!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새여,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소리 하나로 

산을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시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은 시인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몸보다 먼저 혼을 

깨우고 한순간을 영원으로 밀어올린다 밀어올리듯이 

소리친다 세상 속이 세상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세상이 속으로 울다니!속으로 

우는 것들은 소리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시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시여 시 하나로 

세상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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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천양희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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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천양희

 

그가 넘어야 할 고개 

그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지요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웬 고개가 그렇게도 많은지요 

우이령 넘고 우듬재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박달재 넘고 추풍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가 남았다고 했지요 

웬 고개가 그렇게도 높은지요 

새재 넘고 고모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아홉 고개 열 고개 넘었는데 

웬 고개가 그렇게도 험한지요 

인재 넘고 한계령 넘었는데 

이제 다 넘었으려니 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무등재 넘고 불이령 넘었는데 

보릿고개 하나 더 남았다고 했지요 

보릿고개가 고비라고 했지요 

그건 그가 넘어야 할 

스무 고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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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천양희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 

참 생생生生하지요. 

첫눈이 첫발자국이 첫만남이 

또 얼마나 푸릇푸릇합니까. 

저 보리밭 저 청솔밭 

참 청청하지요. 

첫해 첫날이 

또 얼마나 새록새록합니까.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 

참 멸멸滅滅하지요. 

노을이 낙엽이 작별이 

또 얼마나 뉘엿뉘엿합니까. 

저 서산 저 저녁강 

참 냉랭하지요. 

가는 해 가는 날이 

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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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게 묻는다면 

 

천양희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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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풀 

 

천양희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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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천양희

 

건설중인 빌딩 꼭대기에 

둥지를 튼 송골매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느니 

아파트 공사장에 

까치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멜버른이 아닌 우리나라 서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느니 

이것이 사랑하며 얻는 길이거니 

득도의 길이거니 

아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는 것 

 

나,오늘 무우전(無憂殿)에 들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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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돌아보다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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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 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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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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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 

 

천양희

 

가마우지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공포증도 폐쇄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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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천양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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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천양희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깍는다고 깍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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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천양희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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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것 

 

천양희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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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천양희

 

웃는 아침을 위하여 

나팔 꽃이 피면 안되나 

나팔꽃은 아침을 위하여 

웃으면 안되나 

아침이 나팔꽃을 위하여 

있으면 안되나 

 

아침에게는 나팔꽃도 희망이고 

나팔꽃에게는 아침도 

희망이니까 

 

우리가 만났다 헤어지는 날에도 

너를 위하여 

내가 웃으면 안되나 

나를 위하여 

너가 웃으면 안되나 

 

나에게는 너가 희망이고 

너에게는 내가 

희망이니까 

 

보아라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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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봄의 시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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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천양희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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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땅 언덕 위에

 

천양희

 

시로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시로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시로서

집을 짓고 시로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가 햇빛이 되고 불빛이 되고

시가 고향이 되고 나라가 되고

시로서 따뜻하고 시로서

사람들이 행복한 곳

정든 땅 언덕위에 

시 같은 피, 시같은 땀

씨 뿌릴 수 있을까

시같은 인생 시같은 일생

거둘 수 있을까

정든 땅 언덕위에

시의 세상

시의 나라

시의 집을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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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다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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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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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천양희

 

내 생의 업 중에 큰 업이 

시업(詩業)이지 하다가도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도 안 되는 그걸로도 

업이 될까 싶다가도 

누가 나더러 

그 시 참 좋데요, 할 때마다 

나 혼자 감동 먹어 

시로써 배부른 나에게는 

말도 안 되지 싶다가도 

또 누가 나더러 

시만 써서 어떻게 사냐고 할 때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술만 마시고도 시선(詩仙)이 되었는데 싶다가도 

평생 시로써 업을 삼더라도 

시선은커녕 시인도 못 되지 싶다가도 

그런데 왜 하필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 안 되었으면 하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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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다는 것 

 

천양희

 

세상의 행동 중에 참는 게 제일이라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참기로 했지요 

날마다 참으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요 

참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살 길은 갈수록 구불텅거리고 

살림은 출렁대며 흔들렸지요 

누가 고해(苦海)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그때 나는 절벽에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들을 생각했지요 

발밑에 밟히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참으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때서야 힘든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힘들게 산다는 것은 힘쓰고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참고 살수록 삶은 더 구비쳤지요 

오늘도 나는 인파 속에서 자맥질하지요 

힘껏 살고 싶어 힘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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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꽃 

 

천양희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사막에서 몇 십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연꽃 씨앗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늪에서 몇 천 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사람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어디에서 몇 년이나 견뎌야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꽃은 세상이 궁금해서 

첫 꽃을 피운다 

☆★☆★☆★☆★☆★☆★☆★☆★☆★☆★☆★☆★

청사포에서 

 

천양희

 

청사포 앞 바다엘 간다. 

부산 아지매 사투리가 생선처럼 튀는 아침 

바다의 자리는 생생하게 빛난다 

투명한 물 속 

저 환한 화엄계! 

수평선이 세상을 수평으로 세운다 

허공에 넘실대는 갈매기소리 공허하다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흐르는 물이 말하네 

수족관에서도 꼬리치는 물고기들 

바다로부터 잊혀지고 

나는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를 듣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다 

나는 덮치는 저 소리. 미친 듯이 

나를 살게 하느니 ……

☆★☆★☆★☆★☆★☆★☆★☆★☆★☆★☆★☆★

최고봉 

 

천양희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

추억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볏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

친구

 

천양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 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하나밖에 없다 

 

천양희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

하늘을 볼 때마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록이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 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

하루 

 

천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 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 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하루살이 

 

천양희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가 죽습니다. 

하루가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하루의 하루살이가 되기 위해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딥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더 넘게 허물벗기를 합니다. 

천 일동안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다 하루살이가 되면 

하루를 살다 죽어버립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견디는 하루살이. 

그것은 하루살이의 운명입니다. 

☆★☆★☆★☆★☆★☆★☆★☆★☆★☆★☆★☆★

한 아이 

 

천양희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

한 자리 

 

천양희

 

바람 불다 비가 와 햇빛이 솔밭 가지로 

지나가버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새들은 어디 갔나 

네 이름 묻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나를 놓 

을? 

나를 놓을 어디? 

 

바람 부니 꽃이 꽃자리 살펴보던 때가 

그냥 지나가버려 

바위 위에 바위처럼 앉아 

꽃들은 다 어디 갔나 네 이름 받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내 마음 뿌릴? 

마음 뿌릴 어디? 

 

바람이여, 나는 너무 늦게 

흔들린다 나도 가끔 

세상 빠져나가고 싶은 바람이다 

바람을 꽃처럼 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산 자로서 

조용히 접혀 있다 

☆★☆★☆★☆★☆★☆★☆★☆★☆★☆★☆★☆★

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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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시인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란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유쾌한 사랑을 위하여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사람의 가을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첼로처럼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우울한 날은 

 

우울한 날은

우울하게 죽은 자의 무덤에 간다.

구름내와 눈물내가 어둡게 나는

우울의 이마를 짚으러 간다.

권력의 톱으로도 썰지 못하고

시간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못 쓰러뜨린

이 세상의 우울이란 우울

모두 거머쥐고 죽은 자의 무덤

그 곁에 망각처럼 누우러 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지척이어서

꿈으로 닿는 길도 지척이어서

손씻고 손씻고

아아 나는 가벼워져. 

 

☆불의 사랑 

 

어디에서 이토록 뜨거운 생명을 만나랴

참혹한 추락이 예비되었지만

불이 있어

지상은 늘 아름다웠다.

감히 수천의 날개를 파닥이며

별을 떨어뜨리며

저 무상을 향해 무릎을 펴는

불이여, 네 이름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과 초월을 꿈꾸랴

네 심장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파멸과 맞서는 사랑을

우리가 감히 떠올릴 수 있으랴

 

☆마흔 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가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목숨의 노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시집 ; 어린 사랑에게

 

☆초여름 숲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채탄 노래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일까.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이도 많건만

 

내 마음은 얼마나 깊어

그대 하나 묻기에도

한 생애가 걸리는 것일까.

끝 모를 모래 바람 부는 것일까.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축구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새 아리랑 

 

님은 언제나 떠나고 없고

님은 언제나 오지 않으니

사방엔 텅 빈 바람

텅 빈 항아리뿐

비어서 더욱 뜨거운 이 몸을

누가 알랴

 

그 위에 소금 뿌려

한세월 곰삭은

이 노래를 누가 알랴

 

기를 쓰고 피어나는 이 땅의 풀들

저 눈 밝은 것들은 알랴

 

떠나는 발자국이 님인 것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님인 것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님인 것을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 님을 기다리며

밭고랑처럼 길고 긴 생애를 사느니

 

세상에는 없는

고무신 같은

된장국 같은

백자 항아리 같은

기막힌 이 사랑을 누가 알랴

 

냉수 한 사발의 사랑이

폭풍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너무 울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이 살갗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님과 나 사이에는

꽃이라고 할까

새라고 할까

청산처럼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이 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온몸으로 흔들리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에는 사시사철 기다림이 피어나느니

 

곁에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안을 수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결혼한 것은 님이 아니리

 

멀리 있는 것

그래서 두 눈이 아리도록 그리운 것만

우리 님이리

아리랑이리

 

홀로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굽이굽이 새겨둔 설움

바라만 보아도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

 

질경이 같은

엉겅퀴 같은

뙤약볕 같은

어지럽고 슬픈 살냄새

허리 구부리고 울던 흰옷들의

쓰라린 사랑이여

 

천굽이로 살아나는

아리랑이여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네루다 풍으로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정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2004. 2 

 

☆시(詩)가 나무에게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걸어 나와라

피 흘려라

푸른 심장을 꺼내 보여다오

해마다 도로 젊어지는 비밀을

나처럼 언어로 노래해 봐

네 노래는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너무 아름답고 무성해

나의 시 속에 숨어 있는 슬픔보다

더 찬란해

땅속 깊은 곳에서 홀로

수액을 끌어올리며 부르던 그 노래를

오늘은 걸어 나와

나에게 좀 들려다오

나무야, 너 왜 거기 서 있니?

 

2004. 5 

 

☆지는 꽃을 위하여 

 

잘 가거라, 이 가을날

우리에게 더이상 잃어버릴 게 무어람

아무 것도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가진 것 다 버리고 집 떠나

고승이 되었다가

고승마저 버린 사람도 있느니

가을꽃 소슬히 땅에 떨어지는

쓸쓸한 사랑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른 봄 파릇한 새 옷

하루하루 황금옷으로 만들었다가

그조차도 훌훌 벗어버리고

초목들도 해탈을 하는

이 숭고한 가을날

잘 가거라, 나 떠나고

빈들에 선 너는

그대로 한 그루 고승이구나

 

2004. 3 

 

☆나무가 바람에게 

 

어느 나무가

바람에게 하는 말은

똑같은가 봐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바람불면 몸을 흔들다가

봄이면 똑같이 초록이 되고

가을이면 조용히 단풍드나봐

 

☆겨울 사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비의 사랑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시집: 어린 사랑에게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시집 ; 어린 사랑에게

 

☆땅에서 나온 사랑 

 

아들아, 너를 어이 땅에 묻으리

꽝꽝한 땅에다 네 맑은 눈을

아침 햇살 빛나던 은구슬 치아를

벌써 책장 넘기던 의젓한 일곱 살

아까운 내 보배를 어이 묻으리

하늘이 가라앉고

땅 위의 모든 온기가 사라졌도다

이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다시는 입을 일 없는 아비의 비단 도포

언 땅에 깔고

올올이 애통한 어미의 속저고리 벗어

너를 싸노니

너 죽인 병도 여기까진 따라오지 못하리

어미 아비 검은 숯이 되어

천 길 절벽 굴러 떨어질 때

해와 달도 함께 꺼져버렸으니

시간이 어디 있어

내 아들을 범접할까

 

* 경기도 양주 윤씨 분묘에서 비단으로 싼 350년 전의 어린이 미라가

발견되었다. 

 

☆콧수염 달린 남자가 

 

콧수염 달린 남자가

키스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구두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이

입술을 뚫고 들어와

갑자기 내 인생을 쓱쓱 문질러준다면

놀랄 일이야

보수주의와 위선으로 무성한

은사시나무를 뿌리째 흔들며

바람 부는 날

그의 눈이 수말의 눈처럼 껌벅거리다가

내 어깨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나는

쉰내가 나의 삶의 코를 틀어막는다면

그렇게 화해에 이르고 말까

언젠가 무주구천동에서 보았던

열녀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버릴까

 

☆축복의 노래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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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필은 점획을 표현하기 위해 붓을 대고 뗄 때까지의 방법을 말한다. 즉 용필은 기필, 행필, 수필의 단계를 말하며 점획의 표현의 기본이 된다. 운필은 용필과정에서 붓의 방향, 압력, 속도 등의 변화를 주면서 움직이는 것인데 여기서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이 작용하게 된다.

아름다운 글씨를 쓰려면 단순히 선을 긋는다 해도 이러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용 필 (用筆)

    용필은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즉 필획을 시작하는 기필(起筆 : 시필이라고도 한다. 용필의 3단계 중 붓을 대어 점획을 쓰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때 굵기, 방향, 위치 등에 따라 점획의 느낌이 달라진다.) 과 획이 이어져 나아가는 행필(行筆 : 송필이라고도 한다. 기필과 수필의 중간 단계로 붓을 옮겨가는 과정이다. 행필은 직선적인 것과 곡선적인 것이 있다. 이때 굵기의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이것을 마무리 하는 수필(收筆 : 종필이라고도 하며 점획을 마무리하는 끝 부분의 붓 사용을 말한다. 수필은 점획의 특징에 따라 여러 가지 필법이 있다.)의 단계를 말한다.

    모든 점획은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쳐서 표현하게 되는데, 기필은 붓을 대는 모양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붓끝이 필획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장봉(藏鋒)과 이와 반대되는 노봉(露鋒)이 바로 그것이다.

    행필에서는 획의 굵기와 방향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방향이 바뀌면서 모가 생기는 것을 절(折), 모가 생기지 않고 방향이 바뀌는 것을 전(轉)이라 한다. 행필과정에서 붓끝이 필획의 중심을 지나는 중봉(中鋒)획은 매끈하고 원만하며 무게가 나타난다. 그리고 붓끝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행필한 것은 측봉(側鋒)이라 한다.

    수필은 점획의 끝맺음으로 그 방향과 굵기의 변화에 유의하여야 한다. 기필과 수필 방법에 따라 방필과 원필의 표현이 가능하다. 방필(方筆, 方的 필획)은 방형(方形)의 필획을 일컫는 것으로, 그 모양이 방정하고 돈필(頓筆)할 때 골력(骨力)이 밖으로 향해 펴지는 까닭에 '외탁필(外拓筆)'이라고도 부른다. 장중한 느낌을 주며 용비어천가, 월인청강지곡의 한글자에서, 장천비(張遷碑), 맹법사비(孟法師碑)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원필(圓筆)은 방필의 필획에는 모[角]가 나 있는데 반해, 각(角)이 나지 않는 둥근 형상의 필획을 말한다. 원필은 그 점획이 원경(圓勁)하고 절골(節骨)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내함필(內含筆)'이라고도 한다. 원필은 우아한 느낌이 있는데 훈민정음해례본 한글자에서, 또 조전비(曹全碑)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에서 그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에서는 방원겸필(方圓兼筆)이 보여지고 있다.

     

     

     

    ▣  운 필 (運筆)

    용필도 넓은 의미로는 운필의 범주에 속한다. 즉 용필은 붓의 위치에 따른 것만으로 제한되며, 운필은 용필 방법에 따라 붓 움직임을 수용하여 필획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운필이란 점?획을 형성하기 위해 붓이 움직이는 과정과 그에 따른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운필법이라고 하면 붓이 움직이는 상태를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운필의 상태에 따라 생기는 획의 성질은 크게 보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첫째, 획은 어느 방향으로 긋느냐에 따라 문자의 형태나 필세에서 받는 느낌이 달라진다. 그런데 획의 방향 각도는 문자의 형태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큰 변경을 더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굵기의 성질은 비교적 다양하여 굵은 획, 가는 획 등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서 독자적인 표현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셋째, 속도는 획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앞에 말한 첫 번째 두 번째 것의 성질과는 달리 자형(字形)이나 서체(書體)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할뿐더러 그 표현의 영영도 풍부하다.

    넷째, 붓의 경중(輕重)인데, 이것은 선질(線質)의 표현에 있어서 더욱 높은 성질을 갖고 있다. 획의 무겁고 가벼움은 주로 운필에 있어서의 붓의 경중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역량에 따라서 빠르면서도 무겁고, 느리면서도 가벼운 획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깊이 있는 중량감의 차이가 바로 書자체의 예술성을 좌우하는 요건이 된다.

          ※ 참고

      - 경(輕)과 중(重)

       점획의 경(輕)과 중(重)은 제(提)와 안(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필(下筆)을 가볍게 하면 나타나는 점획이 가늘고, 무거우면 점획이 굵은 것은 당연하다. 경중(輕重)과 제안(提按)이 동일한 것 같은 착각이 들지도 모르나, 양자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곧 제안(提按)은 점획간의 기필(起筆)과 행필(行筆)과 수필(收筆)에 있어서, 용력(用力)에 따라 조세(粗細)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고, 용필(用筆)의 경중(輕重)은 점획의 내적 변화 뿐만 아니라 비첩(碑帖)의 풍격(風格)과 특징까지도 표현되는 것이다.

      서법(書法)은 용필(用筆)의 경중에 따라 각기 특징을 지니는 것이어서, 모든 작품에서 느낌도 달리 한다.

      용필(用筆)이 경(輕)하면 영활하고 수려함을 느끼게 하는 바, 이러한 예를 예서(隸書)의 [조전비(曹全碑)]에서 볼 수 있으며, 용필(用筆)이 중하여 단장하고 침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장천비(張遷碑)]에서 볼 수 있다.

      용필(用筆)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필호(筆毫)가 종이에 닿는 부분에 따라 세 유형으로 나눈다. 호(毫)의 중간에서 봉(鋒)까지의 사이를 삼등분하여 붓이 지면에 닿는 부분이 3분의 1일 경우, 이것을 '용일분필(用一分筆)'이라 하고 3분의 2일 경우를 '용이분필(用二分筆)', 그리고 호(毫)의 하반부(下半部)가 종이에 닿는 경우를 '용삼분필(用三分筆)'이라고 한다.

      이것을 각각 비첩(碑帖)에서 찾아보면

      일분필(一分筆) : 예기비(禮器碑), 장맹룡비(張猛龍碑), 황보탄비(皇甫誕碑)

      이분필(二分筆) : 장천비(張遷碑), 정문공비(鄭文公碑),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삼분필(三分筆) : 서협송(西狹頌),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작품은 용필(用筆)의 경중(輕重)으로 특징지어져 있어서 어떠한 비첩(碑帖)이든 간에 임첩(臨帖)에 앞서 용필(用筆)의 경중을 심중(心中)에 두나면, 보다 용이하게 원작품의 격조와 화합을 통일시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용필(用筆) 상의 특징을 소홀히 한다면 일분필(一分筆)의 [예기비(禮器碑)]를 삼분필(三分筆)로 써서 비중(肥重)하여 수경(瘦勁) 관작(寬綽)한 [예기비(禮器碑)]의 특징을 잃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어느 획은 일분필(一分筆)을 쓰고, 다른 획은 이분필(二分筆)로, 또 다른 획은 삼분필(三分筆)로 써서 필획의 조세적(粗細的) 변화를 뚜렷히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이와는 경우를 달리 하여 어느 서가(書家)는 일분필(一分筆)을 쓰고, 어느 사람은 이분필(二分筆)을, 어느 서가(書家)는 삼분필(三分筆)을 써서, 각자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할 수도 있다.  

       - 전(轉)과 절(折)

      '전(轉)'이란 붓을 종이에 대고 둥글 게 굴려 돌려서 모나게 꺾어 뿔이 나지 않는 필획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때 손가락으로 필관(筆管)을 굴리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원적(圓的) 점획의 용필 방법을 '전이성원(轉以成圓)'이라 하는 바, 그 요령은 행필(行筆) 과정에서 붓이 머무르지[정주(停駐)] 않고 속도를 고르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전(轉)에 비해 '절(折)'은 방적(方的) 점획을 만드는 용필법(用筆法)으로서 '절이성방(折以成方)'이라 한다. 절(折)은 한 획의 중간에서 소위 '일필삼과(一筆三過)'라 하여, 관절의 작용으로 꺾는 것이 있기는 하나, 주로 한 획의 개시(開始)나 결속 할 때 방향을 바꾸는 데 쓰인다.

      절필(折筆)로서 개시(開始)[기필(起筆)]와 결속[수필(收筆)], 또는 가로획에서 세로획으로, 세로획에서 가로획으로 꺾는 방법에 대해 증명하겠다.

      가로획의 절필(折筆) 방법 : 기필(起筆 : 필봉(筆鋒)이 종이와 접촉하는 시초)은 좌측 상방을 향해 일단 대었다가, 아래로 돈필(頓筆)하여 머무른 다음, 절봉(折鋒)하여 우(右)로 향해 행필(行筆)하며, 수필(收筆)할 때에는 우측 하방으로 돈필(頓筆)한 다음, 절봉(折鋒)하여 좌(左)로 향해 수필(收筆)한다.

       세로획의 절필(折筆) 방법 : 좌측 상방으로 기필(起筆)하여 종이에 댄 다음, 절봉(折鋒)하여 우측 하방으로 돈필(頓筆)하고, 아래로 향해 행필(行筆)하며, 수필(收筆)할 때에는 눌러 머무르자마자[돈주(頓駐)] 즉시 절봉(折鋒)하여 위로 향해 제필(提筆)한다.

      횡절적(橫折的) 방법 : 기필(起筆)은 상술한 횡획 방법과 동일하게 한 다음, 행필(行筆)하다가 꺾고자 하는 곳에서 돈필절봉(頓筆折鋒)[이것도 절필(折筆)이라고 한다] 하여 아래로 향해 행필(行筆)한다.

      수절적(수折的) 방법 : 기필(起筆)은 세로획의 방법과 같으나 내리 긋다가 꺾고자 할 때, 머물러 누른 다음 절봉(折鋒)하여 위로 향해 행필(行筆)한다.

      개괄(槪括)해서 설명하자면 절필(折筆)의 방법은 필봉(筆鋒)이 왼쪽으로 가려면 먼저 오른쪽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려면 왼쪽이 먼저 닿아야 하며, 위로 가기전에 아래를 먼저 대고, 아래로 쓰려면 위를 먼저 댄 다음에 쓰기 시작해야 하는 법으로, 이것이 곧 '역입(逆入)의 원칙'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절필(折筆)의 중점은 돈필(頓筆)하였다가 꺾는 데에 있다.

      이상에 말한 방법들은 유의하여 반복 훈련만 하면 자연 요령을 얻어, 그 이치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 방(方)과 원(圓)

       기본 점획의 주된 특징은 방(方)이 아니면 원(圓)이고, 그렇지 않으면 방(方)에 원(圓)을 겸하거나, 원(圓)에 방(方)을 겸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글씨는 분류의 원칙을 방(方)과 원(圓)으로 구분한다.

      방필(方筆, 方的 필획) : 방형(方形)의 필획을 일컫는 것으로, 그 모양이 방정하고 돈필(頓筆)할 때 골력(骨力)이 밖으로 향해 펴지는 까닭에 '외탁필(外拓筆)'이라고도 부른다.

      '방필(方筆)의 용필(用筆) 방법'은 기필(起筆)할 때 돈봉(頓鋒)으로 붓을 내려 역필(逆筆)→절봉(折鋒)→행필(行筆)하고, 수필(收筆)할 때에도 역시 돈필(頓筆)→절봉(折鋒)한 다음 결속한다. 그래서 방필법(方筆法)에 의한 점획은 방정(方整)하고 추경(추勁 : 필세에 힘이 있다.)한 것이 특징이다.

      원필(圓筆) : 방필의 필획에는 모[角]가 나 있는데 반해, 원필은 각(角)이 나지 않는 둥근 형상의 필획을 말한다. 원필은 그 점획이 원경(圓勁)하고 절골(節骨)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내함필(內含筆)'이라고도 한다.

      원필은 기필할 때 '과봉(과鋒)'으로 쓴다.

      '과봉(과鋒)'이란 봉(鋒)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봉(筆鋒)을 감싸듯 하는 법으로 붓을 종이에 대었을 때 봉(鋒)이 완전히 뭉치도록 하는 법이다. 이렇게 하여 행필(行筆)할 때에는 필봉을 똑바로 세워서 운행하고, 수필(收筆)할 때에는 봉(鋒)을 굴려서 거두면, 자연 둥글고 입체적인 원필(圓筆)의 형상이 된다.

      방(方)과 원(圓)을 겸비한 점획의 방법은 대체로 방필과 원필을 혼용하는 것으로 알면 무방하다.

      방필과 원필의 차이를 우리는 비첩(碑帖)에서 볼 수 이다. 방(方)과 원(圓)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장천비(張遷碑)>, <맹법사비(孟法師碑)>  : 방필

      <조전비(曹全碑)>.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 원필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 방원겸필(方圓兼筆)  

      - 장봉(藏鋒)과 노봉(露鋒)

      '장봉(藏鋒)'이란 원필(圓筆)의 경우처럼 봉(鋒)을 휩싸서 감추듯 기필(起筆)하여 필획이 개시되는 곳과, 결미(結尾)되는 곳에 봉(鋒)의 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장필(藏筆)의 방법으로서 기필에는 역봉(逆鋒)을, 수필에는 회봉(回鋒)을 쓴다. 이른 바 '역입도출(逆入倒出)'이 그것이다.

      장봉 용필로 쓰는 점획이 함축적 감각을 주는 것은 봉망(鋒芒, 鋒의 끝)이 노출되지 않고, 점획 안에 모든 기력이 포장되어 있는(藏鋒以包其氣) 까닭이다.

      '노봉(露鋒)'은 필법(筆法)에 있어서 장봉(藏鋒)과 반대 현상으로 지칭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봉(中鋒)과 편봉(偏鋒)과의 관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노봉(露鋒)은 서법의 점과 획에 항상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점과 획 간의 호응이나, 혹은 행(行)과 관(款)간의 기승(起承)에 많이 운용(運用)된다. 그리고 노봉(露鋒)은 신정(神情)이 밖으로 나타나는 듯한 감각을 주며, 자(字)와 행(行)간의 좌호우응(左呼右應)과 승상계하(承上啓下)의 신태(神態, 露鋒以縱其神)를 보여준다.

      노봉으로 쓴 글씨는 점과 획에 봉망(鋒芒)이 노출되고, 노출된 봉망(鋒芒)은 두 현상을 보인다. 곧 봉망(鋒芒)이 점과 획의 정중간(正中間)에서부터 나오는 것과, 점과 획의 한편으로 치우쳐서 나오는 것이 있다. 전자는 중봉(中鋒)인 경우여서 원경(圓勁)하며, 후자는 편봉(偏鋒)이어서 편약한 것이니, 전자가 좋은 것임은 당연하다. 원경(圓勁)한 노봉은 삐침, 파임, 꺾임등 획에서 삐칠 때 쓰이는 것으로, 반드시 중봉(中鋒)[鋒이 필획의 정중간(正中間)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야 하며, 노봉(露鋒)이 아무리 첨세(尖細)하더라도 편획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자면 물론 많은 연습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 중봉(中鋒), 측봉(側鋒), 편봉(偏鋒)

      '중봉(中鋒)'은 정봉(正鋒)이라고도 한다. 중봉이란 행필(行筆)에 있어 필봉(筆鋒)이 획의 정중간을 점하고 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붓이 종이에 닿았을 때, 만호(萬毫)가 가지런히 펴진 다음 획이 가는 길의 정중간에서 필봉이 가도록 하는 것이 중봉(中鋒) 용필(用筆)이다.

      중봉용필을 '중봉직하(中鋒直下)'라고도 칭한다. 모필(毛筆)은 동물의 털을 재료로 해서 원추체(圓錐體)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펴질 수 있고 모아질 수 있으며, 먹은 필첨(筆尖)을 따라 아래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중필용필은 상하좌우로 고르게 스며, 퍼지고 호(毫)의 사면팔방이 모두 종이에 닿게 되어 원주형(圓柱形)의 필획을 이룬다.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의 각 체의 서법은 모두 중봉을 위주로 하여 운용하게 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전서(篆書)는 오직 중봉으로만 쓰는 것이 기본이어서, 이 주옹 용필은 바로 서법의 전통적 필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봅 운용을 하면 자연 '만호제착(萬毫齊着)'도 되는 것이니 정확한 집필과 운완으로 모름지기 부단한 연습이 또한 요구된다.

      이에 반해 '측봉(側鋒)'은 측(側)으로 "세(勢)"를 취한다는 뜻이다. 영자팔법(永字八法)에 "점(點)"법은 "측(側)"법이 일컬었음에 비추어 '측봉(側鋒)'은 곧 점법(點法)으로 기필(起筆)하는 것이니 '중봉(中鋒)'이 장봉원필(藏鋒圓筆)이라면 '측봉(側鋒)'은 노봉방필(露鋒方筆)이다.

      '측봉(側鋒)'은 점을 이룰 때 필봉이 편측(偏側)의 상태를 형성하나 운필할 때는 필호의 탄성과 수완(手腕)의 동작으로 말미암아 붓을 세우면 편측(偏側)되었던 필봉이 획의 중앙으로 거두어 들어가게 마련이라 필모(筆毛)는 종이 위에 퍼지게(평포,平鋪) 된다.

      역세(逆勢)로 점을 이루는 목적은 호를 펴기(鋪毫) 위하여서이다. 그리하여 측봉을 필봉이 편(偏)으로부터 굴려서 획의 중앙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다.

      '편봉(偏鋒)'은 필호가 종이 위에 드러누워 일어설 수 없다면 '측봉(側鋒)'은 드러우웠다가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다르다. 그리하여 측봉은 운필할 때 편봉의 성분을 띄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붓이 서서가지만, 편봉은 누워서 꼼짝 못하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편봉'은 점획의 한곁으로 필봉이 기울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옆으로 획을 그을 때 필봉이 상단이나 하단으로 치우쳐 가거나 아래로 그을 경우 왼쪽으로 치우쳐 그어졌다면 이것은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먹을 바른 것이 되겠다. 그리고 수필에 봉회(鋒回)는 물론 되지 아니하려니와 호가 드러누은 그대로 들리고 만다.

      편봉은 '병필(病筆)'과 '패필(敗筆)'의 가장 큰 원인이된다. '병필'과 '패필'이란 점과 획 상의 병폐를 말하는 것으로, 초학자 뿐 아니라 상당히 조예가 있는 서가에게도 항상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서가에 있을 때 병폐는 더욱 면하기 어렵다.

      '병필'을 시정 내지 방지하려면 글씨를 쓰기에 앞서 반드시 임하고자 하는 비첩(碑帖)의 필법을 정확하게 검토하여 파악하고 신중을 기할 일이다.

      첫째 붓이 종이에 닿자마자 생각도 없이 점획을 써서는 안된다. 신중히 붓을 내리되, 낙필(落筆)한 다음에는 잠깐 쉬는 듯이 마음을 가라앉혀서 행필(行筆)해야 한다.

      둘째, 한 획을 쓸 때마다 필력을 다해서 움직여야 한다. 가령 삐칠 경우라면 힘을 들인다고 해서 필봉을 누르자마자 그대로 내리 삐치거나 하면 안된다. 너무 빨리 사납게 하면 필관이 옆으로 누워 내려오게 되는 나머지, 삐친 획의 하반이 끊겨지고, 갑자기 가늘게 변해서 삐친 끝이 길게 노출된다. 이 현상을 '허첨(虛尖)'이라고 한다.

      '병필'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전신 정력으로 운용하지 않은 탓이니, 가로와 세로 획에 있어 바른 획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바른 획은 손바닥을 세워(虛掌) 필관의 수직을 유지하고 중봉을 하는 데 있다.

      셋째, 하필(下筆)에 '역입(逆入)'하고, 행필(行筆)에는 '평출(平出)'하여야 한다. '역입(逆入)'이란 오른쪽으로 행필(行筆)할 때에는 일단 왼쪽을 향해서 행필(行筆)한 다음에 절봉(折鋒)해서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평출'은 행필할 때 필호가 펴지게 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호가 평포가 되어야만 필호가 낱낱이 털이 세워져서 '만호제착(력)[萬毫齊着(力)]'이 되어 중봉용필하는 것이 된다.

      이상 용필(用筆)의 주요방법에 대해 설명하거니와, 모든 방법을 체득한 다음, 기본연습으로서 방필과 원필을 막론하고 일점 일획에 적어도 3차의 전절(轉折)이 되어야 한다.

      황소중(黃小仲)이 "唐 이전의 書는 모두 艮으로부터 시작하여 乾에서 끝나며, 南宋 이후의 書는 巽에 비롯하여 坤에서 마친다."고 한 것은, 이 삼절(三折)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 다음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팔괘의 방위로 호의 팔방을 지적하고, 그 起止의 방향이 비록 같지 않다 하여도 일필에 삼절(三折)을 함에 있어서는 한가지다.

      포세신(包世臣)의 설(說)에 의하면, 후인이 글씨를 쓸 때 모두 仰筆하고 尖鋒하게 하니, 鋒의 尖한 곳이 巽이다. 붓을 치키면(仰) 획이 양에 있게 되며, 그 음은 부호(副毫)에 먹을 적실 뿐이어서, 획의 형태만을 이룰 뿐이니, 坤에 이르면 鋒이 그치게 되어 좋은 것은 겨우 일면이 될 뿐이다.

      鋒이 尖한 곳인 巽은 筆鋒의 서북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필봉의 尖한 곳을 대게 되면, 상면의 삼분지일(三分之一)에 미칠뿐 획의 중간에는 미치지 못하니, 획의 하면(下面)에는 더욱 미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이것은 측봉(側鋒)으로 巽에 시작해서 坤에서 끝난다(始巽終坤).

      중봉(中鋒)을 운용하려면 붓을 좌로 향해 조금 기울이듯 해서, 종이에 대는 즉시 역으로 하지 않으면 평포할 수 없으니, 하필(下筆)은 스스로 艮에 시작하여 乾에 그쳐야 된다고 하겠다.  

       - 필력과 필압

      글씨를 잘 쓰려면 필법의 정확성과 정획형의 정확한 표현 이외에 획형중에 무형의 필력을 가해야 한다.

      붓을 잡는, 집필 그 자체에도 힘을 주어야 하고 필봉을 움직이는 그 순간에도 힘을 주어야 하는데 항상 힘을 가한다고 해서 글자가 잘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한 개의 획을 쓰는 과정에서는 힘을 주어야 할 곳이 있고, 힘을 덜 주어야 할 곳이 있다. 힘을 주어 누르는 정도 즉, 필압에 따라 글씨의 정획이 굵고 가늘게 표현되는 동시에 힘의 표현도 되는 것이다. 항상 힘을 주면 긴장이 되고 각 書字가 바라는 방향으로 운필이 불가능하게 된다.

       - 필의

        필의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로서 글씨를 쓸 때나 써놓은 글씨를 볼 때 느껴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외형의 자태에서 풍기는 형체미와 그 속에 내재하여 있는 의미성을 맛볼 수 있을 때에 쓰는 말이다. 또는 글씨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느낌으로 맛볼 때 글씨로부터 풍기는 의미성을 筆意라고도 한다. 따라서 의미없는 글씨, 개성없는 글씨는 죽은 글씨가 되고 마는 것이다.

      

     

     

    ▣  임 서 (書)

    아름다운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법첩이나 체본을 선택하여 임서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가능하다 데생이나 사생이 조형 예술의 기초 학습인 것처럼 임서는 서예표현의 기초를 닦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임서는 학습자의 수준이나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데 단순히 글자의 모양에 중점을 두는 경우와, 내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다. 임서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현대적 관점에서는 자형의 모사보다 표현능력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보다 새로운 시도가 요구된다.

      - 특징적 임서

      서예가 예술로서의 성격이 강조되기 위해서는 먼저 감성을 풍부하게 하여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져야 한다. 특징적 임서는 서예표현을 위한 기초 과정으로 법첩을 임서할 때 자형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직감적으로 느낀 글자의 골격과 점획의 변화를 대담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와 같이 특징을 살려 임서할 경우 부드럽고 폭넓은 서예 표현의 감각을 터득할 수 있다.

      - 자의적 임서

      자의적 임서는 자형을 충실하게 익힐 뿐 아니라 문자와 점획의 표현에서 개성을 발휘하는 방법으로 의임이라고도 한다. 즉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발휘함에 따라 자형과 점획에 변화를 꾀하게 되어 창작 능력을 높인다. 이 방법은 법첩의 구조를 파악하고 선질을 자의적으로 변화 시키는 경우와, 자형을 엄격하게 따라 쓰되, 품격을 취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표현 의지를 담아서 표현해야 한다.

      - 사실적 임서

      사실적 임서는 법첩이나 체본을 그대로 모방하여 쓰는 방법으로 형림이라고도 한다. 글씨에는 외적인 모양과 내면적인 품격이 있는데, 여기서는 외적인 것에 비중을 둔다. 임서 과정에서 자형을 소홀히 하면 그 법칙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법첩이나 체본에 충실함으로써 그 속에 숨어있는 서법의 기초를 바르게 익힐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특징적 임서는 법첩의 자형과 골격, 변화 등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야 하며, 사실적 임서는 자형과 선질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가능하다. 자의적 임서는 법첩의 자형과 점획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을 살릴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임서하기 전에 필의와 운필의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변화가 가능하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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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집필법, 완법, 방필법,

1. 집필법

大凡學書 指欲實 掌欲虛 管欲直 心欲圓. 又曰 腕竪則鋒正 鋒正則四面勢全. 次實指 指實則筋骨均平. 次虛掌 掌虛則運用便易.  ---李世民〈論筆法〉

 

대저 글씨를 배움에, (먼저 바른 집필법을 알아야하니 붓을 잡을 때에는) 손가락은 실하게 하고, 손바닥은 비게 하며, 필관은 곧게 하고, 필심은 둥글게 해야 한다. 또 말하길 수완이 서면 필봉이 바르고, 필봉이 바르면 사면의 세가 온전해진다. 다음으로 손가락을 실하게 하니, 손가락이 실하면 곤골이 고르게 된다. 다음으로 손바닥을 비게 하니, 손바닥이 비면 운용하기가 간편하다.

 

筆在指端 則掌虛 運動適意 騰躍頓挫 生氣在焉. ---張懷瓘《執筆法》

 

붓이 손끝에 있으면 손바닥이 비어 운동이 쾌적하게 될 것이며, 올리고 뛰고 누르고 꺾어도 생기가 여기에 있게 된다.

 

  

夫書之妙 在于執管 旣以雙指苞管 亦當五指共執. 其要指實掌虛 鉤擫간(言+干)送 亦曰抵送 以備口傳手授之說也. 世俗皆以單指苞之 則力不足而無神氣 每作一點畫 雖有解法 亦當使用不成. 曰平腕雙苞 虛掌實指 妙無所加也. -韓方明《授筆要說》

무릇 글씨의 미묘함은 집필법에 있으니, 이미 두 손가락으로 필관을 감싸서 잡고(중지와 식지) 또한 다섯 손가락으로 함께 붓을 잡아야 한다. 그것은 손가락은 실하게 손바닥은 비어있게 잡아야하며, 구(鉤) 엽(擫: 대지로 식지와 중지에 마주하여 밖으로 밀쳐내는 것) 간(<言+干>: 무명지의 손톱과 살이 만나는 곳에 붓대를 대고 밖으로 밀어내는 것) 송(送: 소지를 무명지 아래에 붙여 무명지의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저 송이라 말하니 이것이 입으로 전해지거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세속에서는 모두가 한 손가락으로 필관을 감싸서 잡으니 이렇게 붓을 잡으면 힘이 부족하여 신기가 없어진다. 매번 하나의 점과 획을 그어도 비록 해법이 있으나 또한 사용하지 못한다. 수완을 평평히 하고 쌍구로 잡으며 손바닥은 비게 하고 손가락은 실하게 잡으면 미묘함이 여기에서 더해질 것이 없다.   

 


書有七字法 謂之撥鐙 自衛夫人幷鍾王 傳授于歐顔褚陸等 流于此日. 然世人罕知其道者. 所謂法者 擫壓鉤揭抵拒導送是也. -李煜《書述》

서법(書法)에 칠자법(七字法)이 있는데 이를 발등법(撥鐙法)이라고 한다. 이는 위부인과 종요 왕희지로부터 구양순 안진경 저수량 육간지 등을 거쳐 오늘까지 전해지나, 세상사람들 중에 그 도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칠자법이라 이르는 것은  擫壓鉤揭抵拒導送이다.


주: 발등은 세 가지로 해석이 된다.

1. 발로 말의 등자를 밟는 것을 앝게 밟아야 전동하기가 쉬움을 뜻함.

2. 붓을 잡을 때에 호구(虎口)로 속은 비고 둥글게 잡은 것이 등자와 같다는 의미.

3.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잡고 등(燈)의 심지를 돋우는 모습과 같음을 이르는 말.



              

雙鉤懸腕 讓左側右 虛掌實指 意前筆後 此古人所傳用筆之訣也. 然妙在第四指得力 俯仰進退 收往垂縮 剛柔曲直 縱橫運轉 無不如意 則筆在畫中 左右皆無病矣. -豊道生《書訣》

쌍구로 붓을 잡고 팔을 들어 왼쪽 팔꿈치는 뒤로빼고 오른쪽 팔꿈치는 앞으로 기울이며 손바닥을 비게 하고 손가락을 실하게 하며 뜻이 앞서고 붓이 뒤에 있어야 하니, 이것이 고인이 전하였던 용필의 비결이다. 그러나 묘함은 넷째손가락이 힘을 얻는데 있다.  구부리거나 올리며, 나아가고 물러나며, 거두고 수축하며, 강하고 부드러우며, 굽고 곧은 것을 자유롭게 움직여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 붓이 획중에 있어 좌우에 모두 병이 없게 된다.


*讓左側右: 단정히 앉아 글씨를 쓸 때에 두 팔꿈치는 벌려야 하는데 좌측 팔꿈치는 양보하여 바깥쪽에 있게 하고 우측 팔꿈치는 기울여 안에서 움직이게 하여 구속되거나 긴장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掌虛指實者 指不實則顫掣而無力 掌不虛則窒碍而無勢 -豊道生《書訣》

손바닥이 비고 손가락을 실하게 하는 것은 손가락이 실하지 않으면 떨리면서 힘이 없고 손바닥이 비지 않으면 막혀서 세가 없어지게 된다.


*붓을 잡을 때에는 힘을 쓰는 것이 적당해야 한다. 붓을 너무 긴밀하게 잡으면 필획이 죽고 너무 느슨하면 힘이 없어지며, 팔은 자유롭게 해야 한다.  

     

撥者 筆管着中指無名指尖 令圓活易轉動也. 鐙卽馬鐙 筆管直 則虎口間空圓如馬鐙也. 足踏馬鐙淺 則易出入 手執筆管淺 則易轉動也. -陳繹曾《翰林要訣》

발(撥)이란 필관에 중지(中指)와 무명지(無名指)의 끝을 붙여서 원활하고 쉽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등(鐙)은 곧 말의 등자(鐙子)로 필관을 곧게 하면 호구(虎口)사이가 비어 둥근 것이 말의 등자와 같은 것이다. 발로 말의 등자를 얕게 밟으면 출입이 쉬운 것처럼, 손으로 필관을 얕게 잡으면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筆居半則掌實 如樞不能轉掣 豈能自由轉運回旋 乃成稜角. 筆旣死矣 寧望字之生動乎! -徐渭《筆玄要旨》

붓이 손가락의 중간에 있으면 손바닥이 실하게 되어 중심을 회전하거나 끌 수가 없으니 어찌하여 자유롭게 움직이고 회전(回轉)할 수가 있는가? 그래서 능각(稜角)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붓이 이미 죽었으니 어찌 글자의 생동(生動)을 바랄 수가 있을까?


筆在指端 掌虛容卵 要知把握 亦無定法 熟則巧生. 又須拙多于巧 而後眞巧生焉. 但忌實掌 掌實則不能轉動自由 務求筆力從腕中來 筆頭令剛勁 手腕令輕便 點畫波掠 騰躍頓挫 無往不宜. 若掌實不得自由 乃成棱角 縱佳亦是露鋒 筆機死矣. 腕竪則鋒正 正則四面鋒全 常想筆鋒在畫中 則左右逢源 靜躁俱稱 學字卽成 猶養于心 令無俗氣 而藏鋒漸熟. 藏鋒之法 全在握筆勿深. 深者 掌實之謂也. 譬之足踏馬鐙 淺則易于出入 執筆亦如之. -宋曹《書法約言》

붓이 손가락의 끝에 있고 손바닥은 비어 계란이 들어갈 만해야 하지만, 집필법에는 또한 정해진 법이 없어, 익숙해지면 기교가 생겨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졸박함이 교묘(巧妙)한 것보다 많아진 후에 진정한 기교가 생겨난다. 그러나 손바닥이 실한 것[實掌]을 꺼리니, 손바닥이 실하면 회전하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대문이다. 필력은 수완(手腕)으로부터 구하면 필두(筆頭)는 그로해서 강하면서 굳세지고 수완은 그로해서 가볍고 편해진다. 그렇게 되면 점과 획과 파책과 삐침과 올리고 뛰고 누르고 꺾음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만약 손바닥이 실하면 자유로울 수 없어 이에 능각(棱角)이 만들어지기에, 비록 아름다울지라도 또한 노봉이 되니 붓이 이미 죽은 것이다. 수완이 서면 필봉이 바르게 되고, 바르면 사면의 세가 온전해진다. 항상 필봉이 획가운데 있음을 생각하면 곧 좌우에서 근원을 만나 차분하거나 역동적인 것이 모두 어우러지며, 글자를 배우면 곧 이루어지고 마음에 수양이 되니, 그로해서 속기가 없어지며 장봉이 점차 익숙해진다. 장봉의 법은 온전히 집필을 깊게 하지 않는 데에 있다.  깊은 것은 손바닥이 실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비유하면 발로 말의 등자를 밟음에 얕게 밟으면 출입이 쉬우니 붓을 잡는 것도 이와 같다. 


起筆收筆正直以待作書 及其運也 上下斜側 惟意所使 至筆旣定 端若引繩 此之謂筆正. -蔣和《書法正宗》

기필과 수필에는 붓을 똑바로 세워서 글씨쓰기를 기대하지만 그 운필에 미쳐서는 상하로 기울이기도 한다. 오직 마음으로 운용하는 바가 붓에 이르러 이미 안정되면 단정한 것이 줄을 끄는 것과 같으니 이를 필정(筆正)이라고 한다.


執筆大中食三指宜死 肘宜活. 低則沈着 高則飄逸 下筆宜着實 然要跳得起 不可使筆死在紙上. 作書不可力弱 然下筆時用力太過 收轉處筆力反松 此謂過猶不及. -梁巘《評書帖》

붓을 잡으면 대지 중지 식지 세 손가락을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지만 팔꿈치는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붓을 낮게 잡으면 글씨가 침착해지고 높게 잡으면 글씨가 표일해진다. 낙필할 때에는 착실하게 하면서 발딱 일어나도록 해야지 붓이 지면에서 죽도록 해서는 안된다. 글씨를 쓸 때에 힘이 약해지면 안된다. 낙필할 때 힘을 지나치게 쓰면 수필이나 전필할 대 도리어 느슨해지게 되니, 이를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이라고 한다.

            

把筆無定法 要使虛而寬. 歐陽文忠公謂余 當使指運而腕不知 此語最妙. 方其運也 左右前後 却不免欹側 及其定也 上下如引繩 此之謂筆正 柳誠懸之言良是. -蘇軾《東坡集》

붓을 잡는 데에는 정해진 법이 없고 비게 하면서 너그럽게 해야 한다. 구양문충공이 나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수완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정말로 미묘하다. 그 운필에 미쳐서는 좌우전후로 기울어짐을 면하지 못하지만, 그 안정됨에 미쳐서는 상하가 줄을 끄는 것과 같아 이를 필정(筆正)이라 이르니 유성현의 말이 진실로 옳다.


* 필정(筆正): 붓을 바로 하면[필정(筆正)] 봉이 감추어지고, 붓을 기울이면[필의(筆欹)] 봉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붓을 바로하면 중봉전법(中鋒篆法)이요 붓을 기울이면 측봉예법(側鋒隸法)이다. 붓을 바로하면 둥글고 붓을 기울이면 각이 진다. 행초서를 쓸 때에  용필은 지극히 활발하고 지극히 둥글지만 방원을 겸하여 사용한다. 그 수필에 미쳐서는 방원(方圓)과 장로(藏露)를 논할 것도 없이 필봉을 모두 획의 가운데로 거두어들이니 이것이 진실로 필정(筆正)이라 이르는 것이다.  

 

 

古之所謂實指虛掌者 謂五指皆貼管爲實 其小指實貼名指 空中用力 令到指端 非緊握之說也. 握之太緊 力止在管而不注毫端 其書必抛筋露骨 枯而且弱 -包世臣《藝舟雙楫》

예전에 지실허장(指實虛掌)이라고 말한 것은, 다섯 손가락 모두를 필관에 실하게 붙이는데 소지(小指)는 명지(名指)에 실하게 붙이며, 공중에서 힘을 써서 손가락 끝에 이르도록 하지만 너무 힘을 주어 잡지 말라는 것이다. 잡는 것이 너무 긴장되면 힘이 필관에 머물러 붓끝으로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 글씨는 반드시 근육은 없어지고 뼈가 드러나며 마르면서도 나약하게 된다.


2.완법

元章告伯修父子曰 “以腕着紙 則筆端有指力無臂力也.” 曰 “提筆亦可作小楷乎?” 元章笑顧小吏 索紙書其所進《黼嵖表》筆畫端謹 字如蠅頭 而位置規矩一如大字. 伯修父子相顧嘆服 因請筆法 元章曰 “此無他 自今以後 每作書時 無一字不提筆 久之自熟矣.” -米芾《提筆法》

미불이 백수부자에게 말하길“수완(手腕)을 지면에 붙이면, 붓끝에는 지력(指力: 손가락의 힘)만이 있고 비력(臂力: 팔의 힘)은 없다”고 하니, “제필(提筆) 또한 소해(小楷)를 쓸만합니까?”라고 말하였다. 미불이 웃으며 소리(小吏)를 돌아보면서, 종이를 찾아 《보차표》를 써 보이니, 필획이 단정하고 근엄하여 글자가 파리의 머리만하나 위치와 법도는 한결같이 대자(大字)와 같았다. 백수부자가 서로 돌아보며 탄복하면서 필법을 청하니, 미불이 말하길 “이것은 다른 것이 없고 지금 이후로는 매번 글씨를 쓸 때에 한 글자를 쓰더라도 반드시 제필로 써서 오래되면 자연히 익숙하게 된다”고 하였다.

: 嵯와 통함.     元章: 미불의 자


枕腕以書小字 提腕以書中字 懸腕以書大字. 行草卽須懸腕 懸腕則筆勢無限 否則拘而難運. 今代惟鮮于郞中善懸腕書 問之 則瞑目伸臂曰 膽!膽!膽! -陳繹曾《翰林要訣》

침완(枕腕)으로는 소자(小字)를 쓰고 제완(提腕)으로는 중자(中字)를 쓰고 현완(懸腕)으로는 대자(大字)를 쓴다. 행초서를 쓸 때에는 현완으로 해야 하니, 현완으로 하면 필세가 무한(無限)하다. 그렇지 않다면 구속되어 운필하기가 어렵다. 요즈음에 선우랑중은 현완(懸腕)으로 글씨를 잘 쓰기에 이에 대해 물어보니 눈을 감고 팔을 펼치면서 “대담하게! 대담하게! 대담하게 써보세요!” 라고 말했다.


 

古人貴懸腕者 以可盡力耳 大小諸字 古人皆用此法 若以掌貼桌上則指便粘著于紙 終無氣力 輕重便當失准 雖便揮運 終欠圓健. 盖腕能挺起則覺其竪 腕竪則鋒必正 鋒正則四面勢全也.  -徐渭《論執管法》

고인(古人)이 현완법을 귀히 여긴 것은 팔을 들면 힘을 다 사용할 수 있기에, 크건 작건 모든 글자에 고인들은 모두 이법을 사용하였다. 만약 손바닥을 탁자위에 붙이면 손가락이 종이에 달라붙어 마침내 힘을 사용할 수가 없다. 경중(輕重)에 법도를 잃게 되면 비록 운용은 편할 것이나 마침내는 원만하고 튼튼한 필세가 줄어든다. 대체로 손목을 일으키면 그 수직을 알 것이니, 손목이 수직이 되면 봉은 반드시 바르게 되며, 봉이 바르게 되면 사면의 세가 온전해진다.    


* 설명: 손목을 높이 들면 운동범위가 넓어 종횡으로 자유롭게 되며 여유롭게 운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맹부가 말하길 “고인은 하필(下筆)을 할 때 천인(千仞)의 세가 있어야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손목을 높이 들은 후에 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握管太緊則力止于管而不及毫 且反使筆不靈活 又安能指揮如意哉! -趙宧光《寒山帚談》

붓을 잡는 것이 너무 긴밀하면 힘이 필관에 머물러 필호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용필이 영활하지 못하게 되니 또한 어찌 손가락을 운용함이 마음과 같겠는가!


* 설명: 필력은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을 거쳐 붓끝으로 이르는 것이니 어느 한 곳이라도 긴장하여 힘을 쓰면 안된다. 전인에게는 “기는 열손가락을 거쳐 하나의 점으로 집중시켜야한다”라는 설이 있다. 붓을 잡음이 너무 긴밀하면 힘이 필관에 머물러 있고 손목부분이 너무 긴장되면 힘이 손목에 머물러 있게 된다.


筋生于腕 腕能懸 則筋脈相連而有勢 指能實 則骨體堅定而不弱. -豊坊《書訣》

근육은 손목에서 생기므로, 손목을 들면 곧 근맥이 서로 이어져 세(勢)가 있게 되며 손가락이 실하게 되면 골격과 몸체가 견고하고 안정되어 약해지지 않는다.


* 설명: 근은 글자의 근육이다. 손목을 들면 붓이 원활해지므로 기세가 펼쳐진다. 큰 작품을 쓸 때에는 일어서서 쓰는 것이 가장 좋다. 일어서서 쓰면 필력을 발휘하기에 쉬워지고, 또한 앞과 뒤를 보고 좌우를 맞춰보면서 전체를 보게 된다. 서서 쓸 때에는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오른 다리를 반보정도 내밀며 왼손으로는 탁자를 누르고 상체는 약간 앞으로 기울인다. 이렇게 하면 허리부분의 힘까지도 발휘하기가 쉬워진다.


 

3.방필법

   

右軍書于發筆處最深留意 故有上體過多而重 左偏含蓄而遲 盖自上而下 自左而右 下筆旣審 因而成之. 所謂文從理順 操縱自如 造化在筆端矣! -湯臨初《書指》

우군의 글씨는 발필처에서 가장 깊이 유의하였으므로 상체가 지나치게 무겁고, 좌측을 지나치게 함축하면서 느리게 한다. 대개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고 좌로부터 우측으로 써가니, 하필하면서 이미 살피고 그로 인하여 이루게 된다. 이는 문(文)이 따르고 이(理)가 순응하여 조종이 자유로우니 조화가 필단에 있음을 이르는 것이로다! 


要筆鋒無處不到 須是用逆字訣. 勒則鋒右管左 努則鋒下管上 皆是也 然亦只暗中機栝如此 著相便非. -劉熙載《書槪》

필봉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야하니 모름지기 역을 사용하는 것이 글자의 비결이다. 가로획은 필봉을 우측으로 하고 필관은 좌측으로 하며, 세로획은 필봉을 아래로 하고 필관을 위로 하니 모두가 이것이다. 그러나 또한 암중에 권능(權能)이 이와 같으니 상(相)을 드러내면 문득 그르게 된다.


凡字每落筆 皆從點起 點定則四面皆圓 筆有主宰 不致偏枯草率. 波折鉤勒一氣相生 風骨自然遒勁. 董文敏謂如大力人通身是力 倒輒能起.  -周星蓮《臨池管見》

무릇 글자에서 매번 낙필을 할 때에는 모두가 점으로부터 시작하니 점이 정해지면 사면이 모두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운필에는 주재(主宰)함이 있으면 너무 마르고 경솔함에 이르지 않는다. 파책(波磔) 전절(轉折) 구륵(鉤勒)이 하나의 기운으로 상생하면 풍골(風骨)이 자연 주경(遒勁)하게 된다. 동기창은 큰 힘을 쓰는 사람이 전신에 힘이 있어 넘어지면 문득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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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란 무엇인가?

중국 고대 서론은 매우 방대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곱가지의 명제는 심미론에서

출발하여 그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기법론과

창작론․감상론도 포함되어 있다.

첫째, <骨氣論>은 서예의 <形質>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으로,

중국 서예의 심미 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요점이라 하겠다.

둘째, <神彩論>은 形質로부터 심화하여 神彩에 이르는 것으로,

形과 神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셋째, <自然天趣論>은 기본으로 <神彩>에 대한 것을 확대하여

설명한 것으로, 이에 대한 핵심은 바로 <我神>에 있다.

그런데 이 <我神> 가운데에는 또한 정감과 인격 정신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나누면 넷째, <寄情論>과 다섯째, <人格象徵論>이라는

두 개의 명제로 나누어진다.

그 의미를 볼 때, 후자는 전자의 내재적인 기초가 되기 때문에

인격의 배양은 매우 중요한 명제로 대두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여섯째, <學養論>이라는 것이 파생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째, <通變論>에 이르러 앞에서

설명한 모든 명제들을 총집결하여, 서예의 가장 기본적인

규율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일곱 가지의 명제는 고대에 거의 동시적으로

생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부단히 발전하여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완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상당히 완전한 규모를

갖추면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고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1. 骨氣論


1)書以筋骨爲先

• 필력이 좋은 자는 골력이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한 자는 획에 살점이 많다.

골력이 많고 획에 살점이 적은 것을 근서라 하고,

획에 살점이 많고 골력이 적은 것을 묵저라고 부른다.

(진)위부인<필진도>

• 글씨에는 근․ 골․ 혈․ 육이 있다. (청)주리정『서학첩요』

2)書以氣味爲第一

• 글씨를 배우는 요점은 오직 정신과 기운을 취하여 아름답게

하는 데에 있다. 만약 형상과 모양만을 모방한다면,

비록 형체는 같을지라도 정신이 없게 되어 글씨가 이루어진

바를 알지 못할 따름이다.(송) 채양『채충혜공 문집』

• 서론 중에서 골은 통상적으로 골력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필획에 내재된 힘이며, 이것으로부터 筋이라는 서법적

필의라는 말이 파생된다. 그리고 기라는 것도 서룬 중에서

여러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氣勢․ 氣韻․ 氣脈(行氣)등과

서예의 여러 요소 중에서 神氣와 書券氣 및 서예의 정신적

의취인 氣味 등을 통틀어 기라고 볼 수 있다.

骨은 서예의 비교적 형상적인 점과 획의 형태나 질감 그리고 힘과,

이것으로부터 형성된 미감에 편중된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氣는 서예의 형상 가운데 비교적 추상적인

형식감에서 어떤 정신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데에 주로

편중되어 있다. 따라서 골기론을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골력에 관한 기법과 의의 및 미학의 특징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2. 神彩論

• 神彩僞上, 以形傳神

神彩僞上, 形質次之

서예의 묘한 경지는 정신과 풍채를 으뜸으로 치고,

형태와 본질이 그 다음이다.(남조,왕승건)『필의찬』

형태와 정신의 관계를 체현하는 이론이 바로 神彩論이다.

따라서 형질의 필법․ 묵법․ 장법 등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정신으로 쓰고자 하는 것이 최종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설명은 신채가 서예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말이다.

<情神爲上, 捨形得神>이라는 것은 서예의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이다. 이것은 결국 감상자와 작가가 이미 서예의

물질적인 형태의 감상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서로 교류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3. 自然天趣論

• 書者, 散也

글씨라는 것은 마음을 한산하게 하여야 한다.

글씨를 쓰려고 할 때에는 먼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한가하게 하고, 뜻에 맡기고 성품을 방종하게 한 뒤에

써야 한다.(한)채용, 『필론』

• 書初無意于佳乃佳爾

글씨를 씀에 있어서, 처음에 아름다움에 뜻을 주지 않았을 때

비로소 아름답게 된다. (송) 소식,『평초서』

<逸品>設

拙者勝巧

졸박한 것은 교묘함을 이긴다. (청)옹 방강『복초재문집』

<自然天趣>의 경지는 중국 고대 예술의 각 부분에서

최고로 숭상하는 경지이다. 서예에서도 중요한 심미적인

이론으로 별도의 창작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미학

사상의 근원은 전국 시대의 노장 사상에서 기인한다.

고대 서론 중에서 서예의 최고 경지를 말할 때 항상<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放縱>이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진부한 법도에 구속을 받지 않고 뜻을 따라 나아간다는 것으로

쓰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이를 마음에 작용이 없는 한가로움,

<安閑>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4. 寄情論


<寄情論>은 중국 고대 문학 이론 중에서 중요한 명제 중의

하나이다. 문학 이론 중에서 선진 시대에<詩言志>라는 유명한

관점이 있다.(《尙書․堯典》)

서예가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주로 도덕과 교화의 목적으로 편중되고 있었을 때에는

서론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5. 人格象徵論

<人格象徵論>은 고대 서론 중 핵심이 되는 명제의 하나이다.

고대 서론 중에서 인격과 정신은 가장 높은 경지의 서예의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안진경의 글씨는 <堅正勻靜>하다고 하였다면, 이는 곧 그

글씨가 가지고 있는 장중하면서도 넓은 기본적 풍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

리고 이것은 또한 장중하면서도 깊고 연박한 것으로 알려진

대사학자 사마천의 인격과도 같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소식의 글씨에서 가로획과 세로획에 있어서 기울어진

것이 많은 것은 일종의 <天眞爛漫>한<豪杰之氣>로 표현하고 있다.

6. 學養論

<學養論>은 서예가가 서예 이외의 학문을 닦아,

자신의 학식과 수양을 높임으로써 심미 능력을 배양하여

서예의 경지를 높인다는 이론이다.

명나라 동기창이 말한 <讀萬券書, 行萬里路>라는 여덟

글자는 중국 고대 예술가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수양에

대한 관점을 알려 주고 있다.

7. 通變論

처음 글씨를 배우는 자들은 글자의 구성과 형세를 제대로

맞추는 데 주력하나 오직 평정함만을 추구해야 된다.

글씨가 이미 평정하게 되었으면 이번에는 다시 험절함을

추구하여야 한다.

이미 글씨가 험절해졌으면 이번에는 다시 평정함으로

돌아와야 한다.

첫 단계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 같으나 중간 단계는

오히려 지나친 것 같으며, 마지막 단계는 이치를 통하게 된다.

이치를 통할 정도가 되면 글씨도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어

노숙하게 된다. (당)손과정,『서보』

貫通古今, 方能變新

<通變論>은 고대 서예 창작론 중의 하나로 모든 예술 발전의

내재적인 규율이다.

서학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通變>의 정신으로 고루한

서예에 다시 한번 새로운 광채를 발휘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곽노봉 선역,『중국 역대서론 정태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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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서예) 감상하는 법


서법감상의 심미표준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서법감상의 기초를 정확하게 진행하는 것이고, 서법감상의 방법을 장악하는 것은 서법감상의 관건을 진행하는 것이다.

 

1. 서법의 심미표준


남조의 서가 왕승건은 <筆意贊>에서 말하기를" 서의 묘한 도는 신채가 제일 우선이고 형질은 그 다음이다. 이것을 겸한 사람은 고인에 이을 수 있다"라고 한다. 이 말 속에는 형질로서 신채를 쓰기를 강조하고 이 두 가지를 겸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形"은 점획 및 이것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서법공간의 결구를 포함하고, "神"은 서법의 神采의미를 주요하게 가르친다.

 

(1) 서법의 점획


서법의 점획은 무한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은 원래 추상이고 구성적인 서법의 형상도 확실히 지적하는 바가 없으며 오히려 그 중에서 전체의 미적특질을 포용하기를 요구한다. 이와 같이 서법의 점획에 대하여 특수한 요구를 들고 나오게 한다. 즉 역량감, 절주감과 입체감을 가지고 있도록 요구한다.

 

가.力量感

점획의 역량감은 선조미의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로 점획은 사람의 마음속에 불며 일어나는 힘의 감각이 있다 일직이 한나라의 채옹은<九勢>에서 점획은 전문적인 연구에 의해서 나왔으며 " (장두획미)해야 힘이 그 글자 중에 있다" , "붓의 중심은 항상 점획 가운데를 지나야 한다", " 점획은 세가 다하면 힘으로 그것을 거두어들인다"라고 가르친다.

점획은 심장규각이 되도록 요구하고, 붓이 갔으면 반드시 되돌려야 하며,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 힘의 정도를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장두획미하고 규각을 드러내지 아니함은 중간의 행필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중간 행필은 반드시 삽세이며 중봉을 취해야 하고 점획로 하여금 혼돈하고 순화되고, 온순하게 하면서도 부드럽지 않게 함으로 힘이 그 속에 있다. 단지 이것은 점획의 起止이며 전부가 深藏圭角하고 봉망을 드러내지 않는것은 아니다.(대전과 소전은 모두 장봉이다) 서법중에 가끔은 장봉과 노봉의 결합을 필요로 하는데 특히 행초서 중에서 천변만화하고 감상할 때 起止적인 연접과 호응에 주의를 해야 하고 중단에 글씨가 경박하거나 부활이 않되기를 주의를 요한다.

 

나. 節奏感

절주는 원래 음악이 음부에서 규율의 고저, 강약, 장단의 변화를 말한다. 서법은 창작과정에서 운필과 용력의 대소와 속도 쾌만의 차이에서 경중, 조세, 장단, 대소등의 서로 다른 형태의 교체변화를 만들고 서법의 선조점획으로 하여금 절주를 만들어낸다.

한자의 필획장단, 대소차이, 이런 것이 서법중의 점획 선조의 절주감을 더해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태적인 서체(전서, 예서, 해서)의 절주감은 비교적 약하고 동태적인 서체(행서, 초서)의 절주감은 비교적 강하고 변화 또한 매우 풍부하다.

 

다. 입체감

입체감은 중봉용필의 결과인데 중봉으로 쓴 필획은 "햇빛에 비추어 보면 획의 중심에 짙은 먹의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중봉의 결과이고 선조의 꺾이는 부분에서도 또한 측 봉과 편 봉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점획선조가 포만하고 원형의 실함을 나타내고, 깡마르지 않고 윤 갈이 있게 된다. 때문에 중봉용필은 역사 이래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서법 창작 중에 측 봉 용필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소전을 제외하고는 기타의 모든 서체에서 측 봉은 떨어질 수가 없다 특히 행 초 서중에서 측 봉은 중봉의 보조와 덧붙이기 역할을 해서 여러 곳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2) 서법의 공간결구

서법의 점획선조는 한자의 형체와 필순원칙의 전제하에 따라서 교체조합하고, 공간을 분할하며, 서법의 공간결구를 형성한다. 공간결구는 각 글자의 결체, 행간의 행기, 그리고 전체적인 포국의 3가지 부분을 포함한다.

 

가. 각 글자의 결체

한 글자의 결체는 정제평정, 장단의 조화, 소밀의 균형등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바른 틀 안에서 바르게도 하고 기울게도 하며 여기저기 섞어 변화를 주며, 자연스런 형상을 만들게 되며, 평정 중에서 험절을 나타내어야 하며 험절 중에서 의취를 구해야 한다.

 

나. 전체적인 행의 행기

서법작품중의 글자와 글자는 상하가 혹은 전후가 서로 이어지고 소위"연철"을 이루어서 상하의 승접, 호응연관을 요구한다. 해서, 예서, 전서등의 정태적인 서체는 비록 자자독립하고 붓놀림은 끊어지지만 필의는 연속된다. 행서와 초서등의 동태적인 서체는 자자연관, 유사견인하게 된다. 이외에도 전체적인 행간의 행기는 대소변화, 글자의 똑바름과 기울임 그리고 호응, 허실변화등에 주의해서 절주감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행간의 행기가 자연스럽게 연관되고 혈맥이 환하게 통하도록 한다.

 

다. 전체적인 포국

서법작품은 점을 모아서 글자를 만들고 글자가 이어져서 행을 이루며 행을 모아서 문장을 만들며 점획선조는 공간의 분할을 구성하게 되며 이렇게 구성된 것이 전체적인 서법의 전체포국이라고 할 수 있다. 글자와 글자, 행과 행간의 소밀은 바르게 되어야 하고, 여백을 계산해서 공간을 채워 나가야 하며, 평정하고 균형있게 해야 하며, 글자가 바르게 서고 기울게 선 것이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하며, 이렇게 들쭉날쭉하고 울퉁불퉁해야 변화가 많게 된다. 그 중에서 해서, 예서, 전서등의 정태적인 서체는 평정과 균형을 위주로하고, 초서등의 동태적인 서체는 변화가 엉키어 있고 질탕하고 기복해야 한다.

 

(3)서법의 신채의미

神采는 원래 사람의 얼굴의 신기와 광채를 말한다. 서법중의 신채는 점획선조와 결구조합중의 표출된 정신, 격조, 기질, 정취와 의미의 전체적인 총칭이다 "신채가 우선이고 형질이 다음이며 이것을 겸비한 사람은 고인에게 알릴 만 하다." 이 말은 "형질 (점획선조및 그 결구포국의 형태와 외관)"보다는 신채를 높게 말한 것이다 형질은 신채가 있다는 전제와 기초를 말한다. 때문에 서법예술 신채의 실질은 점획선조 및 그 공간조합의 총제적인 조화이다. 신채를 추구하는 것은 서법가의 최고의경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서법중의 신채의 획득은 한편으로는 창작기교의 정묘함과 익숙함에 의해서 생겨나니 이것은 전제와 기초가 된다. 또 한편으로는 창작할 때의 마음의 상태, 창작 중의 심수쌍창, 물아일치등에서 진정한 감정을 표현 하고 자기의 지식과 학문수양과 심미의취를 표현 한다.

 

 

2. 서법감상의 방법


서법감상은 기타의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데 인류인식활동의 일반적인 규율을 따른다. 서법예술의 특수성에 따라 서법감상은 방법상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의 몇개의 방법을 따를 수 있다.

 

(1)전체에서 국부로 , 국부에서 전체로


서법감상할 때 먼저 전제적으로 한 번 보고 표현수법과 예술풍격의 개괄적인 인상을 보는 것이다. 나아가서 용필과 결자, 장법, 묵운등의 국부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은 법과 의를 겸하고 있는지, 생동활발한지의 여부를 보는 것이다. 국부에 대한 감상이 끝나고 난 후 다시 멀리 물러서서 전체를 보고 처음에 보고 얻은 대략적인 인상을 수정하고, 거기다가 새롭게 이성적으로 파악한 것을 더한다. 예술표현수법과 예술풍격의 협조여부를 주의깊게 보고 어느 곳이 精采이고 어느 곳이 부족한지를 보아전체적인 느낌과 세부적인 느낌을 충분히 반영하도록 한다.

 

(2)정지되어 있는 형태와 운동적인 과정을 파악해서 연상하도록 한다.


서법작품의 창작물은 정지적이지 동적이지는 않다. 감상할 때 작자의 창작과정에 따르고 글자의 선을 따라서 이동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작품의 전후(말, 시간)시간에 의거하고, 작자의 창작과정 중 용필의 절주를 생각하고, 작자의 감정의 부동의 변화를 헤아리고, 정지적인 형태뿐만아니라 운동의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작자의 창작과정을 그대로 모사하고 작자의 창작의도와 감정변화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3) 서법형상에서 구체형상까지 연상해서 작품의 意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감상하는 과정중에 서법형상과 실제생활중에 서로 유사한 진행을 비교해서 서법으로 하여금 형상의 구체화를 연상하도록 한다. 그 다음에 서법형상화와 비슷한 사물의 심미특징으로 부터 작품의 심미가치까지 작품의 의경을 이해해야 한다 안진경 해서를 감상할 때가 대표적인 것이다.

 

(4) 작품창작의 배경을 이해하고 작품의 정서와 격조를 정확히 파악한다.


어떤 서법작품이든지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다 때문에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고 작품 속에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 지식과 작자의 인격수양, 심미정취, 창작심경, 창작목적등등을 헤아려서 작자의 창작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작품의 정서와 격조를 파악해야한다. 작자의 인격수양, 창작심경, 창작환경 이런 것은 모두가 작품의 정서와 격조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거기다가 서법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서풍과 심미풍조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점이 서법작품을 감상하는데에 어렵게 하고 동시에 서법감상의 묘미를 생기게 한다.

결론적으로 서법감상과정 중에 개성 심리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감상하는 방법에는 고정된 모범적인 틀은 없다. 이상의 서법감상의 방법은 감상하는 과정 중에 몇 개의 것을 교체 사용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감상 중에 반드시 각종서법기능, 기교와 서법이론지식을 종합해서 자기의 심미평가능력을 극대화하고 작자의 창작의도를 작품 속에서 몸소 느끼도록 한다. 노력은 감상 중에 평을 하게하고 평 중에 감상을 있게 하며 작품이 역사적 환경중에 놓인 처지를 고찰하게 하며, 정확하고 공정하게 , 객관적인 평가를 하게 한다. 당연히 정확하게 감상하는 방법을 장악하고 난 후에 감상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은 감상능력의 지름길을 만들어 준다. 揚雄이 " 능히 천 종류의 검을 보고난 후에 능히 검을 알고 천편의 賦를 읽고 난 다음에야 부에 능하다"라고 한 이 말이 진실로 의미 있는 말이다.

 

 

 

 

 

 

중국의 서첩 인용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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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공부를 위하여 우리는 교재를 선택하고 그것을 꾸준히 임서하는 길을 걷게된다. 최근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법첩을 서체별로 정리해 보았다.
(초보자를 위한 참고용일 뿐이다)

  • 전서

    - 석고문, 태산각석
    소전과 대전의 양식을 고루 갖추고 있는 석고문을 먼저 쓰는 추세이다.
    금문과 같은 대전을 공부할 수도 있고, 소전을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태산각석도 이와 유사하다.

  • 소전

    - 등석여 전서, 이양빙 삼분기
    등석여와 같은 청대의 소전이나, 당나라 때 이양빙의 삼분기가 좋다.

  • 금문

    - 산씨반, 모공정, 대우정 3가지 정도면 족하다.

  • 예서

    - 을영비, 석문송, 예기비, 사신비, 서협송, 장천비, 광개토대왕비
    예서는 한나라 시대의 예서를 공부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해서를 공부할 때도 한예를 근본으로 하여 배워야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우리나라가 자랑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법첩이다.

  • 목간

    - 무위한간, 거연한간
    예서가 꽃을 피울 무렵 사용한 민간서체 목간은 비문과 달리 생생한 육필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목간, 죽간, 백서들이 여기에 속한다.

  • 행서

    - 난정서, 집자성교서, 흥복사 단비, 안진경 쟁좌위고(행초), 황정견행서, 소식행서, 미불 촉소첩, 왕탁 행서
    행서는 왕희지를 비롯하여 당대 안진경 쟁좌위고를 비롯한 3고와 개성을 존 중한 송대의 소식, 미불, 황산곡 등이 유명하다.
    또한 청대의 왕탁은 왕희지에서 근본을 삼고 있으면서 현대적 미감을 보여주고 있어 행서에서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다.

  • 초서

    - 왕희지 초서, 손과정 서보, 왕탁 초서, 부산초서 들이 있다.

  • 해서

    - 장맹룡비, 정문공비, 원현준묘지명, 채경옹묘지명 그밖의 묘지명
    - 구양순 구성궁예천명, 안진경(공자가묘비)
    육조시대 해서는 장맹룡비와 정문공비가 가장 훌륭하여 북위시대 대표적인 글씨로 인정되고 있다. 방필을 사용하여 북방의 굳세고 힘찬 기상을 대표하는 장맹룡비와 북방의 기상에 남방의 부드러움을 겸비하여 웅혼한 기상을 내포하고 있는 정문공비는 매우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다.
    그 외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묘지명을 참고해 볼만하다.
    당나라 해서는 육조서에 비교해보면 같은 해서라도 서풍이 매우 다르다.
    구양순, 안진경을 훌륭한 교재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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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鋒에 관한 小攷

義石 洪愚基


Ⅰ 서언(序言)


20세기 한국의 서예는 공모전을 위한 준비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초대작가라는 명예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기이다. 공모전에 당선되기 위하여 작가들은, 개성적인 글씨보다 영향력있는 몇몇 작가의 글씨풍을 선호하였고, 공모전에 유리하다는 이유때문에 몇몇 서체와 몇몇 비첩만이 서예교육의 중심에 있었다. 출품자들은 다른 작품보다 더 드러나게 보이기 위하여 변화가 풍부한 가늘고 작은 글씨보다는 힘이 있어 보이는 굵고 큰 글씨를 선호하였고, 모험적인 면보다는 정해진 틀에서 안전하게 작품을 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붓도 세필보다는 큰 붓을 주로 사용하였고 작품의 규격도 너무나 커서 실용의 범위를 벗어나 단지 전시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작가들의 생각이 여기에 묶여있는 동안 우리 한국의 서예는, 그 근본이 되는 서예이론이나 서예사, 우리 한국의 서예 등에 관하여는 너무나도 소홀하게 다뤄졌음으로,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에서부터 심각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예는 대체로 붓에 먹물을 찍어 점획을 긋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기 때문에, 글씨의 서사과정에 붓의 역할은 대부분의 과정을 차지한다. 이렇게 중요한 붓을 다루는 데에 서예인들이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봉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시작하는 사람에서 깊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까지 모두가 이 중봉을 중요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없으나, 막상 작품에 임하여서는 그렇지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작품은 그 기초적인 틀에 속박되어 있는 것 같고, 어떤 작품은 필법을 멋대로 벗어나 붓을 마구 휘두른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서법을 잘못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중봉은 구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 편리할뿐더러,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어느 경지로 인도하는 안내자와 같은 것이다. 자전거를 배울 때, 처음에는 이리저리 쓰러져 불안하지만, 중심을 잡을 줄 알고, 이리저리 방향을 틀을 수 있으며, 브레이크를 잡고 타고 내릴 수만 있다면, 편리하게 즐기면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붓의 다양한 성능을 분명하게 알고, 붓이 꼿꼿이 서서 쓰러지지 않아 그를 자신의 수족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주경(遒勁)하고 아름다운 필획을 구사할 수가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고는 그동안 많은 서예인들이 생각하여 왔던 중봉에 대한 대강의 견해를 살펴보고 그 중봉으로 나타나는 효과를 살펴보는 것으로 중봉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Ⅱ 중봉용필(中鋒用筆)


1. 필성(筆性)


“군자의 성(性)은 중인(衆人)들과 다르지 않다. 배워서 사물의 능력을 잘 빌릴 뿐이다”1)라는 말처럼, 사람의 능력은 사물에 대한 이해와 운용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이 만약 자동차를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다면 필요한대로 자동차를 다양하게 운용할 수 있으나, 운전을 하지 못하면 고철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붓이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안다면 우리는 그 붓의 성질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붓을 다룰 수 있다. 다음은 먼저 붓의 특성을 대략 다섯 가지로 분석해본 것이다.

첫째, 붓은 부드러우면서 탄성이 있다. 요즘의 펜은 사용법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이 바로 글씨를 쓸 수 있지만, 붓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루기가 어려워, 이를 마음대로 다루려면 많은 세월의 고된 연습이 필요하다. 경필(硬筆)은 누구나가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신 일정한 선만을 그을 수밖에 없지만, 부드러운 붓으로는 그 탄력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둘째, 많은 털을 모아 만들었기 때문에 붓끝을 모으거나 펴서 획의 굵기를 조절할 수도 있다. 또한, 많은 털은 먹물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한번 먹물을 찍어 많은 글자를 단번에 쓸 수도 있게 한다. 붓에 먹물이 많을 때에는 푹 번지는 획을 그을 수 있고, 먹물이 적을 때에는 비백(飛白)효과를 얻을 수가 있다. 붓에 같은 먹물이 있어도 붓을 눌러주고 들어주며 지속완급을 조절하는 것으로도 이러한 효과들을 얻을 수 있다.

셋째, 붓털이 길기 때문에 새끼줄처럼 꼬이게 할 수도 있고 곧게 펴서 운필할 수도 있다. 붓털을 가지런하게 하면 먹은 편하게 붓끝으로 흘러내려 행필이 또한 포만(飽滿)하고 후실(厚實)해진다. 반대로 붓털이 굽거나 꼬이면 먹물이 편안하게 아래로 내려오지 못해 다양한 비백효과를 만들어 낸다. 마치 강에 굴곡이 심하면 그 유속이 느려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붓을 잘 사용하는 사람은 운필의 빠르고 느림과 붓털을 꼬고 펴며 누르고 들어주는 것을 이용하여 다양한 선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넷째, 끝이 뾰족한 많은 털을 묶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끝을 모으면 봉이 뾰족하여 옆에서 보면 어느 쪽으로 보아도 둥근 송곳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를 이용하여 붓을 들어주거나 눌러주면서 굵기를 조절할 수도 있으며, 필봉의 중심을 중간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고, 필획의 가장자리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性을 이용하지 못하면 필호가 꺾여 드러눕게 되고, 지면에 작용하는 힘도 일치하지 않아, 점획이 추하고 기괴해진다. 필호에는 주부(主副)가 있어, 주호(主毫)는 골을 세우고 근육으로 싸는 역할을 하고, 부호(副毫)는 선의 고움을 얻는 역할을 한다.

다섯째, 그 절면(切面)을 보면, 서양의 그림붓은 평면적인데 반하여, 서사에 사용하는 동양의 붓은 원형이다. 서양의 붓은 넓적하기 때문에 몇 가지 효과밖에 기대할 수가 없어 주로 면에 색을 칠하기 위한 것으로 활용하지만, 동양의 붓은 절면이 원이기에 작용력과 반작용력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고 팔면으로 출봉하며 다양한 선질효과를 낼 수가 있다.2) 이는 굳이 붓을 돌리지 않아도 어느 방향으로든 여러 가지 효과를 만들어 낼 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2. 중봉(中鋒)


1) 수봉(竪鋒)․조봉(調鋒)

수봉은 필봉을 바르게 들어 지면의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수직으로 세우는 것으로, 이것은 중봉용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글씨를 쓰기 전에는 주호(主毫)와 부호(副毫)가 고르게 서서 엉기거나 굽는 현상이 없으나, 붓이 일단 종이에 닿으면 종이위에 눕게 된다. 하지만 붓이 누워서 끌려가고 끌려온다면 필획은 단조로워지고, 붓끝에도 힘이 이르지 않아 편박한 필획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필봉을 똑바로 세우면[수봉(竪鋒)] 중봉으로 유도되어 중함(中含)하는 효과와 원적(圓的)인 입체감을 주기 때문에, 역대로 서가들은 수봉을 매우 중시하였다. 물체에 작용하는 힘은 힘을 주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즉 수직에서 작용력이 가장 크게 나타나고, 수직과 각도가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작용력은 더욱 작아진다. 45도 방향에서 힘을 가하면 직각방향에서 똑같은 힘을 주었을 경우에 비해 절반의 작용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일정한 힘을 주어 그만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만큼 힘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붓을 수직으로 세워서 전체의 역량을 종이에 집중시키는 수봉은, 중앙으로 필봉을 유도할 뿐 아니라, 역감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힘을 강하게 준다고 역감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붓을 똑바로 세웠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필획은 상당히 달라진다.

모든 필획에는 반드시 중심이 있고 외계가 있다. 중심은 주봉에서 나오고 외계는 부호에서 나온다. 필봉에 처음․중간․마지막을 모두 실하게 해야 하고, 호(毫)는 상하좌우를 모두 가지런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글씨를 쓰다보면 제안(提按)을 거듭하고 전후좌우로 방향을 바꿔가며 운필하여야 하니 필봉이 항상 중심에만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좋은 필획은 조정과 전환을 그치지 않는 데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운필방법을 조봉(調鋒)이라고 한다. 조봉의 기본수단에는 제안돈좌(提按頓挫)가 있으며, 제안에 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의 견해가 나타난다. 첫째는, 필봉을 누르는 것을 안필(按筆)로 사용하고, 필봉을 들어주는 것을 제필(提筆)로 사용하여 필획의 굵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둘째는, 필봉을 모으는 것[斂心]을 제필(提筆)로 보고 필봉을 펴는 것[展筆]을 안필(按筆)로 여겨서 필획의 굵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어느 방법을 사용하건 제와 안은 붓을 모아주고 펴서 필획의 굵기를 조절하며 다양한 필획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진역증(1333-1340)은 “성근 곳에서는 풍성하게[날만(捺滿)] 하고, 빽빽한 곳에서는 수척하게[제비(提飛)] 하며, 평이한 곳에서는 풍성하게 하고, 험절한 곳에서는 수척하게 하라. 날만은 살찐 것이요, 제비는 수척한 것이다”3)라 하였다. 이는 용필이 무거운 곳에서는 제비(提飛)해야 하고, 용필이 가벼운 곳에서는 바로 실안(實按)을 해야, 너무 무거워 축처지거나 너무 가벼워 표령하는 단점을 벗어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안필(按筆)은 반드시 제(提)의 기초위에서 눌러가고, 제필은 곧 안(按)을 한다는 전제에서 제기(提起)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提)를 빼놓고 안(按)을 말하거나 안(按)을 빼놓고 제(提)를 말하는 것은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있을 수가 없다. 조봉은 동시에 환향(換向)과 조정작업(調整作業)을 계속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환향은 붓의 사용면을 바꾸는 것이지 필심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유희재(1813-1881)는 「예개」에서 “필심(筆心)은 장수요 부호(副毫)는 병졸이다. 병졸은 바꾸어 대신할 수도 있지만 장수는 대신할 수가 없다. 논자(論者)가 매번 필심(筆心)을 바꾼다고 말하나 사실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2) 포호(鋪毫)․과봉(裹鋒)

오육(吳育)은 포호설의 시조로, 그는 포호와 이양빙의 전서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양빙의 전서를 보면 필획이 가늘고 꼿꼿하여 부호가 종이에 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포호에는 사포(斜鋪)와 평포(平鋪)가 있다. 사포는 편봉이나 측봉을 의미하고, 평포는 중봉을 의미한다. 평포는 붓끝을 가지런히 벌려 그 벌어진 길이가 곧 획의 넓이가 되는 방법이다. 포(鋪)라는 것은 포호중봉으로 행필할 때에 진력(盡力)으로 필호를 벌려 필봉을 평포하는 것이다. 필봉이 치우치지 않으면 만호가 일력(一力)이 되니 이렇게 해야 비로소 필력이 고르게 유지될 수가 있고, 빼어나면서 맑고 아름다운 필획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4) 이는 모든 호망(毫芒)이 지면에 접촉할 때에 서로 같은 작용을 일으키고, 글씨를 쓰는 사람의 손을 통해 전달하는 힘이 고르게 점획속에 주입하게 되면 어떻게든 치우침이 있을 수가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포세신(1775-1855)은 필첨을 곧바르게 내리고[필첨직하(筆尖直下)], 장봉으로 내전(內轉)할 것[장봉내전(藏鋒內轉)]을 강조하였다. 필첨을 바르게 내리는 것은 필봉을 바로 세워 종이위에서 행필하기 위함이다. 필봉이 종이위에 똑바로 서서 움직이면, 필봉의 자유운동과 수시조정을 보증할 수가 있어서 엉키지 않는다. 오육은 “붓으로 필봉을 펴서 종이위에 평포(平鋪)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한다”고 했다. 종이위에 평포하는 것은 필봉을 똑바로 내린 결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상에 평포할 때에 장봉을 따로 하지 않고 내전(內轉)을 하는 것이다.

중봉용필에서 매우 중요한 또 하나는 과봉(裹鋒)이다. 포세신에 의하면 “과봉은 저수량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서호(703-782)나 안진경(708-784, 一作709-785)이 사용하였고, 소동파(1036-1101) 등이 능하였다”5)라고 말하고 있으나, 포호와 과봉의 분별은 청대의 서가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용필의 제안(提按)을 나누어 포호를 안(按)으로 과봉을 제(提)라고 하였다. “과봉은 서사할 때에 전체의 필봉이 원추모양을 유지하는 용필방법으로 평포(平鋪)와 상대되는 말이다. 봉을 모아 안으로 집결하면 붓은 획의 중심으로 움직이고 선조는 전체가 간명하게 모여 주경감(遒勁感)과 탄력감(彈力感)을 준다.”6) 필봉이 원추모양을 유지하니 어느 방향으로 붓이 움직이더라도 중봉이 되기 때문에 운필에 자유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며, 부드러워지고 서로 호응하는 필획을 구사할 수 있다. 붓이 자유롭게 움직이니 필호에는 자연스런 변화가 나타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경하고 다양한 필획이 나타나게 된다. 포과(鋪裹)는 상대적이면서도 보완적인 관계에 있어 서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아름답고 역감이 있는 필획을 만들어 낸다.


3) 측봉(側鋒)․편봉(偏鋒)

일반적으로 “전서를 쓰는 데는 중봉을 많이 사용하고 예서를 쓰는 데는 측봉을 겸용하며 전법은 원필이고 예법은 방필이다. 이는 측봉용필이 실질상으로는 예법에 기원한다는 것을 초보적으로 제출한다.”7) 전서에서 예서로의 발전은 중봉필획에서 측봉(側鋒)이 가미된 자유로운 필획으로 변화한 것이다. 곡선을 위주로 하는 전서에서 직선을 위주로 하는 예서로의 변화는, 문자를 간단하게하고 서사속도를 빨리 하여, 문자가 실용과 대중속으로 파고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중이 문자를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예술미가 가미된 것은 결국 화려한 한자예술의 꽃을 피우는 기반이 되었다. 다시 그것은 해서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초서가 탄생하는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중봉에서 측봉으로의 변화는 결국 중국서예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화갱은 「임지심해」에서 “정봉에서는 굳셈을 취하고 측봉은 연미함을 취한다. 왕희지(321-379, 一作303-361, 一作307-365)의 글씨인 「난정서」는 연미함을 표현할 때에 때로 측봉을 사용하였다. 나는 매가 토끼를 잡을 때에 먼저 공중에서 빙빙 돌다가 그런 후에 날개를 옆으로 하여 스쳐지나가면서 내려와 움켜쥐는 것을 매번 보았다”8)라고 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이와 같아서 붓을 잡아 곧바로 아래로 내리는데 필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점과 획을 서사할 때마다 따로 역입을 하고 회봉을 하면서 장봉과 중봉을 도모한다면, 그로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튼실하고 주경한 느낌은 있으나 필맥이 끊어지고 절주감을 잃을 것이다. 마치 박자를 놓치고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래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는 것처럼 글씨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횡획은 필봉을 세로로 입필하고 수획은 필봉을 가로로 입필한다”9) 이러한 논리는 필세의 왕래를 편리하게 하였고, 전법에 비하여 기필을 빠르고 간편하게 하였다. 측봉은 중봉과 편봉사이에 끼어있는 용필방식이다. 고인(古人)이 점법(點法)을 측법이라 한 것도 점이 측봉으로 세를 취한다는 의미가 있다. 편봉용필은 필호에 긴장감이 없어 그 필획에 부박(浮薄)한 느낌이 들지만, 측봉용필이나 중봉용필은 필호에 긴장감이 있어서 필획에 입체감이 드러난다. 중봉운필은 필호를 지상에 평포하고 측봉운필은 필호를 지상에 사포한다. 필모가 지상에 사포하면, 조봉을 통해 필모를 지상에 평포하도록 한다.

이른바 편봉은 운필할 때에 붓대가 기울어져 필봉이 획의 한쪽 변에 있고 필신(筆身)은 획의 다른 한쪽 변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쪽 면은 매끄러우나 다른 면은 톱니와 같이 고르지 못하게 되고, 먹이 종이에 스며들지 않아 필획은 편평(扁平)하며 종이위에 떠있는[부로(浮露)] 느낌을 주게 된다. 편봉은 필모가 종이위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요, 측봉은 누웠으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봉과 측봉은 서로 비슷하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3. 중봉(中鋒)에 관한 제설(諸說)


왕세정(1526-1590)은 “정봉이나 편봉이란 말이 고본에는 없었으나 근래에 축윤명(1460- 1526)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를 말했을 따름이다”10)라고 하였다. 이처럼 중봉론11)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던 것은 명말에서 청에 이르는 시기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중봉이나 편봉 등에 대하여 그전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봉설의 연원은 채옹(133-192, 一作132-192)의 「구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세」에서 “장두(藏頭)는 원필로 종이에 대어 필심을 항상 점획의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이다12)”라 하였다. 후에 이세민(597-649)은 「필법결」에서 이르기를 “대저 완(腕)이 수직이면 봉(鋒)이 바르고 봉이 바르면 사면의 세가 온전해진다”13)라 하였다. 이 두 가지 설은 후세 중봉관의 근원이 되었다. 사실 중봉설의 전신은 정봉설(正鋒說)이다. 정봉이란 말은 강기(1155- 1235, 一作1163-1203)의 「속서보」에서 “안진경(708-784, 一作709-785)과 유공권(778-865)에 이르러 비로소 정봉을 사용했으며, 정봉에는 표일한 기운이 없다”14)라고 한 것이 처음이다. 당대(唐代)의 풍방은 「서결」에서 “고인(古人)이 전서․팔분․해서․행서․초서를 썼지만, 용필은 다르지 않았고 반드시 정봉을 위주로 했으며 간간히 측봉을 사용하여 고운 자태를 취했다”15)라고 했다. 여기서 정봉과 대립적인 것이 측봉과 편봉이다. 이로부터 많은 이들이 중봉에 대하여 말했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중봉에 대한 역대의 이론은 대체로 다음 세 종류의 중봉관(中鋒觀)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중봉관은, 필첨이 시작에서 끝까지 점획의 중간에 있어야 비로소 중봉․정봉이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편봉․측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송대의 진유(陳槱)는 “이양빙(李陽氷)은 홀로 그 묘함이 뛰어나서 항상 진적(眞跡)을 보면 그 자획이 시작하고 멈추는 곳에 모두 약간의 봉망(鋒芒)이 드러났다. 햇빛에 이를 비춰보면 중심에 있는 한 줄의 선에 먹이 배로 짙었으며 그 용필은 힘이 있고 곧게 내려 치우치지 않았으므로 봉은 항상 필획의 가운데에 있었다(惟陽氷獨擅其妙 常見眞跡 其字畫起止處 皆微露鋒鍔 映日觀之 中心一縷之墨倍濃 蓋其用筆有力且直下不欹 故鋒常在畫中)”16)고 했고, 서현의 전서에 대하여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이는 필봉이 항상 필획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주봉과 부호에서 연출되는 작용에 의해 중앙과 양변의 먹색이 달라짐으로 해서 입체감을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또한 양변은 보드랍고 중실하며 공제효과(控制效果)와 역감(力感)이 있음으로 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필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봉을 완전하게 운용하려면 전서를 제외한 다른 서체에서는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학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중봉관은, 예․해․행․초서의 하필(下筆)과 전절처(轉折處)에서 필봉을 정중앙으로 유지할 수없다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중봉용필은 마땅히 행필할 때에 부단히 필봉을 조정하여 측봉으로부터 중봉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세」의 “필심을 항상 점획의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令筆心常在點畫中行)”는 말에서 ‘令’의 의미를 부각시킨 것이다. 필첨을 항상 중심으로 유지할 수가 없기에 끊임없는 제어를 통해 필봉을 점획의 중심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봉과 정봉은 개념을 달리한다.

세번째 중봉관은, 구양수(1007-1072)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소동파는 「동파제발」에서 “그 운필은 전후좌우로 기울어지고 치우침을 면할 수가 없으나, 그 안정됨은 상하로 줄을 끄는 것과 같다. 이것을 필정(筆正)이라 한다17)”고 기록하였다. 상술한 두 번째의 중봉관과 모양이 비슷한 곳은 중봉용필이 정봉이나 측봉으로부터 상호보완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서로 다른 점은 단지 점획전절처(點畫關節處)18)에서 필봉을 상하로 줄을 끄는 것과 같이 해서 정봉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청대의 왕주(1668-1743)는 “중봉은 필획의 가운데에서 봉을 움직이는 것이니 평측언앙(平側偃仰)을 뜻에 따라 구사하는 것이다. 필봉이 이미 안정되면 단정하기가 마치 줄을 끄는 것과 같으니[단약인승(端若引繩)], 이러면 필봉이 위나 아래로 치우치지 않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아 팔면으로 출봉하게 된다. 붓을 팔면으로 출봉하게 되면 마땅하지 않는 것이 없다”19)라고 했다. 왕주가 여기서 말한 ‘단약인승(端若引繩)’이란 글자의 필획이 단정하기가 뽑아놓은 묵선과 같이 곧은 것을 가리킨다. 단(端)은 단정한 것이고 인(引)은 뽑아내는 것이다. 용필에서 비록 중봉이 위주가 되는데, 필필정봉이 되면 변화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변화를 추구하려면 마땅히 정용․측용․중용․편용․역용․순용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필할 때에는 필봉이 마땅히 획의 가운데로 돌아와야 하고 점획의 안으로 감춰져야 팔면으로 출봉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왕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봉의 핵심은 환필(換筆)에 있다. 환필을 할 수 있으면 행필에 중봉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환필의 환(換)은 곧 채옹의 「구세」에 있는 ‘영(令)’을 구체화한 것이다. 팔면출봉(八面出鋒)은 곧 이세민의 「필법결」의 사면세전(四面勢全)이며, 본질상으로 말하자면 중봉관 또한 「구세」와 「필법결」의 본의에 위배되지 않는다.20)

이와 같은 관점에서 첫 번째의 중봉관을 논하지 않는다면, 곧 중봉은 측봉과 편봉의 대립면이 아니며, 또한 정봉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또한 필필중봉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확실하게 용필의 핵심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확한 중봉관은 필봉의 정측의 사용을 폐하지 않고, 환필(換筆)로 수단을 삼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정봉과 측봉은 상제상성(相濟相成)하며 그로써 수준높은 선질의 점획을 서사할 수가 있다.



Ⅳ 중봉효과(中鋒效果)


1. 입체감(立體感)


중봉용필을 통해서 얻어지는 효과는 입체감(立體感)의 표현이다. 미불(1051-1107)은 “득필(得筆)하면 비록 가늘어 수염과 같아도 발(發)하면 또한 둥글고, 득필하지 못하면 두터워 서까래와 같아도 또한 납작하게 된다”21)고 하였다. 중봉운용을 하면 서법중에서 골력이 있게 되고, 점획중에 골력(骨力)이 있으면 자체(字體)는 자연히 웅건해진다. 중봉용필의 골력과 입체감은 깊고 두터움으로 나타나고 여기서 표현되는 정발(挺拔)하면서 중함(中含)한 필획들에 대하여 고인들은 추획사(錐畫沙)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추획사는 송곳으로 마른 모래에 긋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에 대하여 異見을 가지고 있다. 마른 모래에 글씨를 쓰면 전서(篆書)를 연상하듯이, 획의 들어가고 나간 자취가 없이 필획이 둔중하고 획의 양면이 보드라우나 삽기(澁氣)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젖은 모래에 글씨를 쓰면 예서나 해서를 쓰는 것처럼, 획에 삽기가 넘친다. 안진경은 「술장장사필법십이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후에 저수량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용필은 마땅히 인인니(印印泥)와 같아야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하여도 깨닫지를 못하다가, 후에 강도(江島)에 모래가 평평한 곳[사평지정(沙平地靜)]을 보고 글을 쓰고 싶어져 날카로운 끝으로 그어가며 글을 쓰니 그 험경한 모양이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이로부터 용필은 추획사와 같이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장봉(藏鋒)으로 하면 획이 침착해진다. 그 용필이 항상 지배(紙背)를 투과(透過)하도록 하면 이는 공(功)을 이룸이 지극한 것이다.22)


강의 섬에서 모래가 평평한 곳이라면, 인간이나 비바람과 새와 같은 등등의 외적(外的)인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 시간을 요한다. 물이 지나갔으나 어느 정도 오랜 기간이 지나지 않아 약간은 젖어있는 상태이다. 그곳에 썼던 필획에서 경험(勁險)한 모양이 있었다는 것이나, 인인니(印印泥)를 연상하여 추획사(錐畫沙)를 생각한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도장을 찍듯이 막대기를 곧바로 세우고 눌러가며 글을 썼을 것이다. 도장은 비스듬하게 하면 찍을 수가 없다. 직각으로 곧바르게 눌러야 도장이 바로 찍힌다. 힘있게 누르든 힘이 없이 약간을 누르든 곧바르게 눌러야 한다. 이는 붓끝을 곧바로 아래로 내리는 필첨직하(筆尖直下)를 의미이며, 행필부분을 정봉(正鋒)으로 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마른 모래에서는 송곳을 비스듬히 그어도 똑바로 세우고 그은 것과 다르지 않은 느낌을 얻으며, 지배를 투과하는 느낌으로 막대기를 눌러 그어도 모래가 다시 덮여 획의 변화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젖은 모래에서는 도장을 찍듯이 막대기를 곧게 세워 글을 쓰면 측봉으로 글을 쓸 때와 많은 차이가 보이며, 힘을 주어 획을 그어도 사뭇 다른 필획을 얻을 수 있다. 측봉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 그어진 획속으로 모래가 다시 덮여 탁하고 연약한 필획이 만들어진다. 더구나 이글에서 등장하는 저수량․장욱․안진경 등이 활약한 시기에는 전서가 아닌, 해서와 행초서가 유행하였던 시기라고 보여지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 해주고 있다. 장욱이 인인니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마른 모래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을 비추어 볼 때 당시의 모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른 모래보다는 젖어있는 모래일 가능성이 많다.


2. 생동감(生動感)


중봉은 옥루흔(屋漏痕)으로도 비유를 한다. 옥루흔은 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으로, 구불구불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물줄기를 연상하게 한다. 물줄기는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비어있는 공간을 반드시 채우고 지나간다. 전진하는 방향과 같지 않더라도 주변에 낮은 곳이 있으면 그곳을 채우고 다시 흐름을 지속한다. 우리에겐 매끄러운 면으로 보여지는 곳도 물줄기는 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옥루흔에서는 바로 이러한 ‘생기(生氣)’ ‘생동감(生動感)’을 강조한 것이다. “생기가 있다는 것은 획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획이 매끄럽지 않아야하며 거칠어서도 안된다. 획은 윤기가 있으면서도 까칠까칠해야한다. 대체로 미끄러운 획보다는 다소 거친 편이 낫다는게 일반적인 견해이다.”23)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절주감(節奏感)이 있고 역동감(力動感)이 있으며 다양한 획질을 의미한다. 획이 주변상황에 따라 알맞고 자유롭게 대응하여 사람들에게 꿈틀대거나 질주하는 역감(力感)을 준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자형(字形)에 생명력을 갖추게 하면 생명의 미를 드러내지만, 필력이 없으면 병든 환자처럼 창백하고 생기가 없게 된다.”24) 생명력은 붓에서 필획으로 힘을 관주하는 데에서 비롯되며, 어느 글자든지 전체작품에서 웅건한 힘이 넘치게 한다. 만약 병든 사람의 피부라면 창백한 색깔을 나타내고, 죽은 사람의 피부라면 그것은 단지 곱거나 활발한 느낌이 없는 삐쩍마른 느낌이다. 당연히 획에는 건강미가 넘쳐야 한다. 당의 서예가 서호(703-782)가 「논서」에서 말한 다음의 비유는 마치 정곡을 찌르는 듯하다.


무릇 매는 채색이 부족하나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골이 굳세고 기(氣)가 용맹하다. 훨훨 나는 꿩이 색을 갖추었으나 날아가는 것이 백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것은 살이 쪄서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25)


이는 중봉용필을 매에 비유하고 편봉용필을 꿩에 비유하여, 중봉용필은 매처럼 아름다운 색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근골이 뛰어나고 살이 적으며 생동감이 있음을 말한 것이고, 편봉용필은 꿩과 같이 아름다우나 살이 많아 백발자국도 날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3. 지졸감(至拙感)


중봉으로 운필을 하다보면 필획에서 지졸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 지졸미는 질박하고 소박한 자연미를 뜻한다. 질박이나 소박에서 사용하는 글자를 살펴보면, 질(質)은 꾸미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성질인 본바탕을 뜻하고, 소(素)는 물들이기 전의 흰 비단이며, 박(朴)은 박(樸)과 통하는 글자로 가공하지 않은 통나무를 뜻한다. 그러므로 질박하거나 소박하다는 것은 물들이거나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다. 고인들은 시각적으로 끌리는 연미함보다는 못난 듯하면서 어눌한 拙을 강조하였다. 뾰족한 것보다는 원만한 것, 가벼운 것 보다는 무거운 것, 원색적인 것보다는 은근한 것, 얇은 것보다는 두터운 것,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것 등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후자를 중요시 여긴 것이라기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대부분의 글씨가 후자쪽이 부족하므로 후자를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예 역시 이러한 면을 중시하고 있고 중봉은 바로 이러한 미를 체현하기 위한 필법이다. 서예는 양강(陽剛)의 아름다움이나 음유(陰柔)의 아름다움으로 나누어 설명은 하고 있으나, 결코 전적으로 강한 것이나 전적으로 부드러운 것을 추구하거나 고집하지는 않는다. 서예는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서로 조화를 시키면서 골과 육이 알맞게 조화된 중화의 미를 추구한다.

졸(拙)에는 자연소박미가 있고, 교(巧)에는 인공수식미가 있으며, 교하면 달콤하면서 연미하고, 졸하면 새롭고 기이하다. 사람들은 졸할망정 교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데, 반드시 어렵고 힘든 예술구상과 반복되는 고된 훈련을 거쳐야 졸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졸은 일종의 대교지졸(大巧至美)한 것으로 자유의 산물이다. 일단 마음에서 얻고 손에서 응하면 대미지졸(大美至拙)한 경계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교는 경박하지 않으면서 민첩하게 하고 졸은 혼탁하지 않으면서 혼고(渾古)하게 해야 한다. 대자연의 교와 졸의 통일은 필묵의 교졸이 이루어지고 천법(天法)에 맞아야 교졸이 합일된다.



Ⅴ 결어(結語)


어느 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다 문득 이를 닮은 필획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는 고인 물은 세상만물을 담아내고 있을지는 모르나, 흐르는 물에서는 리듬감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입체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움직임에는 고요한 움직임도 있고 격동하는 움직임도 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은 결국 변화를 의미하며, 흐름의 모양도, 깊이와 넓이도, 흐름의 중심도 역시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물줄기가 휘돌아 나갈 때에는 중심이 바깥으로 향하고 바위에 부딪쳐 방향이 바뀔 때에는 중심이 바위에 닿는다. 개울물처럼 넓은 면을 흐를 때에는 물의 깊이와 힘을 느끼지 못하지만, 넓은 면으로 바위를 부딪치면서 떨어지는 폭포에서는 강렬한 飛白의 역감을 받았다. 많은 양의 물이 좁은 공간을 지날 때의 빠름과 강물처럼 느리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웅장한 기세에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느낌을 필획으로 담아내고 싶었고 중봉의 의미에 담아내보고 싶었다.

서법은 선(線)으로 인품과 형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선이란 어떤 것인가? 자연의 모습을 닮은 것이다. 평면적이기 보다는 입체적이며, 죽어서 고정된 것이 아닌 살아서 꿈틀대고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선이다. 어떻게 필획이 평면적인 종이위에 입체적으로 나타나는가? 그 필봉을 곧바로 내려 넘어지지 않기에 봉이 항상 획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먹색이 중심으로부터 양변으로 침투하여 만들어진 농담(濃淡)의 변화는 필획에 사주포만(四周飽滿)을 얻게 하고 입체감(立體感)과 생명감 그리고 대미지졸(大美至拙)한 필획을 바탕으로 충실한 역도를 드러낸다. 서예가의 우열은 그 관건이 중봉을 사용할 수 없느냐, 중봉을 사용할 수 있느냐이다. 중봉을 사용할 수 있으면 둥글고 윤택하며 풍성하고 아름다운 필획을 그을 수 있고 둔(鈍)한 붓이라고 하더라도 예리하게 할 수 있고 붓이 예리한 것이라도 둔하게 할 수가 있다. 중봉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은 비록 일생의 힘을 다하더라도 좋은 글씨를 써내기 어려울 것이다.

끝으로, 본논문의 주제와 약간 벗어나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다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한국의 서예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중국의 역대서론들을 비롯하여 우리 선인들과 중국․일본 등지에서 그동안 연구되었던 많은 서예관련 논문들을 번역하여 체계를 세우는 작업이다. 그러한 작업이 선행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도 서예에 관련한 다양한 서적이나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서예비평도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써준 체본만을 보고, 오랜 세월 손에 익숙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서예에서 벗어나, 알고 쓰고, 이해하면서 감상하는 차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한 서예를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예를 감상하는 층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배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어느 몇몇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범서예인적인 차원이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1세기에는 서파를 나누고 수많은 공모전을 통해 입상자를 나누는 차원에서 벗어나, 서예이론을 정립하고 비평문화가 더욱 활성화된다면 21세기 한국의 서예문화도 한 차원 승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

1) 荀子,『荀子․勸學篇』(卷1),『漢文大系』(15), 東京: 富山房, 明治43年, pp.4-5: 君子生非異也 善假於物也.

2) 白鶴,「筆性論」,『書法硏究』, 上海: 上海書局, 1992, 총49집, pp.111 -112에서 內容參照.

3) 陳繹曾, 「翰林要訣」,『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483: 疎處捺滿 密處提飛 平處捺滿 險處提飛 捺滿卽肥 提飛則瘦.

4) 白鶴,「運筆十四勢論」,『書法硏究』, 上海: 上海書局, 1989. 총38집. pp.27-28: 所謂鋪就是平鋪中鋒 其中包含兩層含義一是指在行筆時 要盡力開張平鋪毫鋒 不偏不倚萬毫一力 這樣才能達到筆力勻稱 挺秀明麗之目的.

5) 陶明君,『中國書論辭典』, 長沙: 湖南美術出版社, 2001, p.137: 包世臣《藝舟雙楫》: “河南始于履險之處裹鋒取致, 下至徐顔, 益事用逆, 用逆而筆駛, 則裹鋒側入, 姿韻生動, ……後世能者, 多宗二家, 東坡尤爲上座, 坡老書多爛漫, 時時斂鋒以凝散緩之氣, 裹鋒之尙, 自此而盛.” 又云: “二王眞行草俱存, 用筆之變備矣, 然未嘗出裹鋒也.”

6) 陶明君, 上揭書 p.137: 指書寫時整个筆鋒保持圓錐狀的用筆方法 與平鋪對言 因裹鋒集結內斂 筆行畫中 故線條渾融凝練 富于遒勁感和彈力感.

7) 劉小晴,「側鋒初探」,『書法硏究』, 上海: 上海書局, 1982, pp.91-92: 篆法多用中鋒 隸法兼用側鋒 篆法圓隸法方 這就初步提出側鋒用筆實質上起源于隸法.

8) 劉小晴, 「側鋒初探」,上揭書 p.94에서 再引用.

9) 無名氏, 「書法三昧」: 橫畫須直入筆鋒 竪畫須橫入筆鋒. 劉小晴, 上揭書, p.93에서 再引用.

10) 王世貞《藝苑卮言》: “正鋒偏鋒之說古本無之, 近來專欲攻祝京兆故借此爲談耳.”

11) 중봉은, 명의 왕불이 「서화전습록 ․ 논서」에서 “당나라 때의 서예가들은 글자에 중봉을 취하여 규범의 실마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 시초가 아닌가 한다.

12) 蔡邕, 「九勢」『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7 : 藏頭圓筆屬紙令筆心常在點畫中行.

13) 李世民, 「筆法訣」『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118: 大抵腕竪則鋒正 鋒正則四面勢全.

14) 姜夔,「續書譜」『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385: 至顔柳始正鋒爲之 正鋒則無飄逸之氣.

15) 豊坊 「書訣」 『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506: 古人作篆分眞行草書 用筆無二 必以正鋒爲主 間用側鋒取姸.

16) 陳槱,「負暄野錄 ․ 篆法總論」,『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376.

17) 蘇軾, 『東坡題跋』 上海: 上海遠東出版社 1996. p.308: 方其運也 左右前後却不免欹側. 及其定也 上下如引蠅. 此之謂筆正.

18) 轉折處나 收筆處와 같은 곳을 말한다.

19) 王澍, 「論書剩語」: 所謂中鋒者謂運鋒在筆畫之中 平側偃仰 惟意所使及其旣定也 端若引繩 如此則筆鋒不倚上下 不偏左右 乃能八面出鋒 筆至八面出鋒 斯無往不當矣. 劉小晴, 『中國書學技法評注』, 上海: 上海書畵出版社, 2002, p.39에서 再引用.

20) 許洪流, 『技與道』, 浙江人民美術出版社, 2001. pp.156-159에서 內容參照.

21) 朱大熙,「竪鋒 鋪毫 換向」,『書法硏究』, 上海: 上海書局, 1989, 1期, p.124: 米南宮的所謂得筆 雖細如髭發亦圓 不得筆 雖粗如椽亦扁.

22) 『書畫篆刻實用辭典』, 中國: 上海書畵出版社, 1988, p.55: 後問于楮河南 曰‘用筆當須如印印泥’ 思而不悟 後于江島 遇見沙平地靜 令人意欲悅書 乃遇以利鋒畫而書之 其勁險之狀 明利媚好 自玆乃悟用筆如錐畫沙 使其藏鋒畫乃沈着 當其用筆 常欲使其透過紙背 此功成之極矣.

23) 宣柱善,『書藝通論』, 益山: 圓光大學校出版局, 1998, p.69.

24) 金開誠 王岳川,『中國書法文化大觀』,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6, p.140: 又使字形具有生命力 顯示生命的美 無筆力者則病態蒼白 了無生氣.

25) 徐浩,「論書」,『歷代書法論文選』, 杭州: 上海書畵出版社, 1979, p.276: 夫鷹隼乏彩 而翰飛戾天 骨勁而氣猛也 翬翟備色 而翶翔百步 肉豊而力沈也.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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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愚基, 「書藝의 力感에 關한 硏究」, 京畿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 2003.

이 글은 2004년 10월 16일 구로학술발표회 발표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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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국문자의 형성시기  

최초의 중국문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산동 거현의 능양하 대문구문화 말기 유적지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시대는 약 기원전 2500 - 2000년의 도기 위에 새겨진 부호이다. 그것은 (아침
단) 자의 초기 자 형으로 구름이 감돌고 있는 산 위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산간에 살고있는 단족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조자법에서 볼 때 이는 이미 원
시적인 상형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며 응당 제2류의 회의자 또는가장 진보된 형태인 제3류의
형성자이다. 이 대문구 도문은 한자의 꼴을 갖추고 있는 갑골문의 선구가 된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기원전 2000년 전에 중국은 모종의 계통을 지닌 문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
적인 중국문자의 기원문제는 여전히 더욱 많은 자료의 출토를 기다릴 일이지만 상나라 후기
의 갑골문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성숙된 문자체계를 갖추고 있다.

 

II. 서사 공구와 서사 재료

중국 문자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글을 쓰는 방향이 위에서 아래이며 좌에서 우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것은 모두 서사 공구, 즉 모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붓 필)자의 초기 형태
는 (오직 율) 자이다. 갑골문의 율자는 한 손으로 붓의 필관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필관은
대남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뒤에 와 율위에 (대나무 죽)이란 의부를 더하여 필자가 되었다.
갑골문의 서자는 손에 잡은 붓이 먹물병 위에 있는 모양이며, 점은 먹물을 묻혀야 글씨를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상대에는 보편적으로 붓이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
실 기원전 4000여년의 반파유적지의 도기 위에 그려진 채색 그림에 서도 붓을 사용한 흔적
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글자를 썼던 중요한 재료는 죽간이다. 대나무를
길게 쪼개어 생긴 평탄한 표면에 글씨를 썼으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는 종서가 횡서 보
다 편했으며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 댓조각을 잡아야 했으므로 글씨를 다 쓰고
난 뒤에 는 우에서 좌로 하나하나 배열하는게 쉬웠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써나가는 중국 특유의 서사습관이 되었다.

III. 서체의 변천

서는 문자를 소재로 하는 조형적인 선의 미술이며, 작자의 미의식가 그 생명을 단적으로 표
현한 것이 다. 주로 수필을 사용해 왔는데 모필만큼 치묘한 작용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 서
의 소재인 한자의 발 생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화문자 즉
상형에 발단하여 처음에는 부호시 대에 사물의 기억, 기술등 오로지 필요한 일을 충족할 따
름이었으나, 시대의 추이에 의해 문화의 진전 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그간 많은 통달
한 사람들이 미적표현을 하게되자 감상의 대상이 되어 동양예술의 정수라 일컬을 만큼 승화
하였다.

전 서
사 주는 갑골문, 금문 등을 간소화하여 대전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서적은 석고문이다. 그
모양은 북과 비슷하며 글씨가 크고 잘 정돈되었다. 그 후 진나라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
고 이사에게 소전을 만들게 하였다. 대표적인 글씨로 태산각석이 있다.
 
예 서
한 나라때 완성된 예서는 글자의 모양과 필법에서 전서와 다른점이 많다. 예서가 만들어진  
까닭은 전서의 결구가 복잡하여 실용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초기의 예서는 직선에 가까
운 소박한 획이었으나 파책이 생기는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서적으로 조전비,
예기비, 사신비등이 있다.
 
해.행.초서
중국의 삼국 시대와 육조 시대는 해서, 행서, 초서가 완성된 시기이다. 초서는 예서의 점, 획
을 단순화하여 빨리 쓸 수 있게 만들었고, 해서는 예서의 파책을 억제하여 자형을 방정하게
나타내었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과 안진경의 가묘비는 해서의 대표적인 서 적이다. 초서
를 읽기 쉽고, 해서를 빠르게 쓸 수 있도록 절충하여 만든 서체가 행서이며 동진 시대의 왕
희지, 왕헌지 등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 갑골문 , 금문 , 석고문 , 대전과 소전, 전서의 특징

가. 갑골문

갑골문은 선조에 대한 제사와 농작물의 풍흉, 폭우, 오랑캐의 정벌, 10일 마다의 재앙, 꿈의
뒷탈 등에 대하여 점을 친 내용을 담고 있다. 상왕국의 통치 질서는 신정적 결합과 혈연적
조직이 복합되어 있었다. 신정적 결합은 연맹 관계에 있던 각 부족을 대표한 정인들로 구성
된 정인 기구를 통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고 정사에 반영하는 점복 행사와 각 부족의 수호신
을 상왕실의 주관아래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혈연적 조
직은 상왕의 왕자들을 비롯한 상왕실의 근친을 특정한 지역에 파견하여 다스리도록 하는 소
위 분봉 및 상왕실이 다른 부족과 결혼을 통해 유대를 강화하는 통혼관계가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통치조직을 가지고 있던 상왕은 점복을 통하여 파악한 신의 뜻을 지상의 질
서에 반영하는 대리자로서 신권통치가 가능하였다. 문자의 결합이나 구성 등으로 보아 아직
도 원시성을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회화문자의 단계는 이미 벗어난 것으로 설문의 육서에
의하여 분류하면 확실히 상형과 지사의 비율이 높지만 이미 회의와 형성자도 상당한 양을
점하고 있다. 가차(임시로 빌림)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진화가 이루어진 문자라
고 할 수 있다. 문구는 매우 간단하고 질박하여 어느 정도 원시성을 보여주지만 문장의 결
구와 품사등을 통하여 볼 때 오늘날의 중국어의 기본형식을 이미 갖추고 있다. 갑골문은
1899년 청말의 앙의영에 의하여 최초로 그 존재가 인식되어 20세기 초반 안양의 발굴에 의
하여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은허는 상의 7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으로 기록된 곳으로 갑골문

은 이 시기, 즉 상말(기원전 15 -12세기)의 유물로 본다.

(1) 갑골문의 서풍변화

갑골문을 5기로 나눈 동작빈은 그 분류기준의 하나로 서풍의 차이를 들고 있다. 제 1기의
서풍은 다양 한데 주로 웅혼하며 힘이 있다. 제 2기는 근칙하
며 일반적으로 문자의 외형은 단장, 대소가 조화되고 행간도
균등하고 정돈되어 조밀도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제 3기
는 퇴미(점차로 쇠퇴함)라고 평한 것이 주다. 제 4기는 경초
하여 문자는 험하게 우뚝 서고 또 호방한 곳이 있다 .제 5기
는 엄정하며 규칙 이 있어 변별이 쉽다. 갑골문 서풍 변천의
흐름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고 위엄이 있는 것이 있고 다음에
는 기술이 발전하여 잘 다듬어진 것이 나타나고 이어서 퇴폐
적인 것이 출현한다. 그 다음에는 복고조가 나타나며 최후에
는 잘 다듬어지고 있으나 규모가 작고 약한 것이 된다. 상대
의 금문과 갑골문의 서체를 비교해 볼 때 결각한 것(갑골문)
과 주조한 것(금문)의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는 서풍에 있는
것이며 문자의 구조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상대 금문의 서체
는 갑골문 제 5기의 서체에 가까운 것이 많다.

(2) 재례각사

제을 또는 제신 시대 사슴뿔에 새긴 각사로 제 5기 갑골문이다. 한면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
져 있고 다 른 한면에는 2행 28자가 새겨져 있다. 상왕이 사냥하면서 신하 재풍에게 상을
내린 일을 기록하고 있어 재풍각사라 한다. 이것은 서예에 심오한 조예가 있었음을 보여주
는 것으로 3천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작품이다.

나. 금문

학자들이 한 대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삼대(중국 고대 3왕조)의 것으로 간주되었던 많은
청동제의 제사용 그릇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경의 북송왕조 때부
터였다. 최근세기 동안에 이들 청동기는 미술사가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중요한 연구의
초점이 되면서 일본과 서구의 박물관 수집품 사이에 모습을 나타냈다. 현존하는 상과 주의
청동기 가운데 아주 일부에만 있는 명문은 제품 전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음각으로 주조되었
다. 가장 짧은 명문은 하나의 문자로만 되어있으며 가장 긴 것으로 알려진 서주의 명문은
497개의 문자에 달하는 명문이다. 모든 명문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부호와 설
명이다. 부호(기호, 도상기호)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그 청동기를 사용했거나 그 청동기가
바쳐진 대상의 조상 집단이나 개인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상기호 부갑으로 구
성된 것은 도상기호로 표시되는 성족에 속하는 아버지 (갑)헝로 해석된다. 대부 분의 도상기
호는 주보다는 상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선조의 기호를 사용한 것은 상말기의 제도로
간주되어 왔다. 설명문을 싣고 있는 명문에서도 시호까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들은 대
게 그 그릇으로 주조하게 되었던 상황에 관한 설명이다. 상의 것으로 간주되는 청동기 가운
데 극히 일부분만 설명 문이 있는데 (따라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금문은, 서주의 것으로 보
아도 무방하다) 50 개 문자 정도의 비교적 짧은 문장이다.

(1) 금문의 서풍 변화

서주 시대의 청동기는 시기에 따라 그릇의 종류, 형태, 문양 등에 변화를 보이는데 명문,즉
금문의 서체, 서풍, 내용 등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상 말기로부터 서주 전기의 강왕까지 의
것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유동감이 있는 선을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문자의 크기는 가지
런하지 않으나 생기가 넘치고 있다. 중기에 이르면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긴장된 선
으로 문자의 크기도 균일하게 쓰여졌고 상하좌우의 간격도 가지런하다. 전기의 것과 같은
생기는 없으나 아직은 운필에 따라 다소의 유동 감이 남아 있다.  후기에 이르면 펜글씨와
같이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필력을 잃고 있으며 특히 말기에 이르면 문자나 서풍이 어지러
워진다. 전체적으로 생기도 없고 아름다움도 상실된다.

(2) 작품 소개

금문을 또한 종정문 이라고도 하는데 서풍의 시대적이 특징으로 삼을만한 것으로 다음과 같
은 것들이 있다. 주장반의 명문은 처녀처럼 조용한 특색이 사람들에게 조용하고 온순 편안
한 느낌을 준다. 모공 명문은 주장반과는 또 다르다. 자형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곡선은 미
끈하여 마치 봄빛에 나부끼는 화려한 꽃가지와도 같다. 산씨반 명문은 몸단장을 대충하고
화장도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동시에 거친 야성이 보인다. 이자백반 명문은 맑
고 깨끗한데 점차 말쑥하게 분장하여 대가집 규수처럼 기색은 맑고 신선하며 행동은 적당히
조신하다. 대맹은 주 강앙 때의 그릇이며 명문은 주 금문서예 중에서 걸출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주 목왕 때의 제기로 명문의 서법은 한적하며 소박하고 자연 스러워 힘들여 새기
지 않은 격조를 지니고 있어 서주 금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 석고문과 봉산각석

석고문은 현존하는 최초의 각석문자로 모두 10 개의 석고(북모양의 돌)에 차례대로 10단락
이 한 조가 되는 사언시를 새긴 것인데 그 중심 내용은 임금이 사냥한 일을 기술한 것이다.
당 초에 발견되었으며 흔적은 이미 절반 이상이 훼손되고 없으며 제 9단은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가장 훌륭한 탁본으로 북송 때의 것이 있다. 운필, 구성, 장법, 격조
는 물론 글자의 구체적인 모양이 모두 위 로는 괵계자백반의 명문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태
산각석과 상통하고 있다. 즉 주대의 금문과 진대의 소전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서예역사에 있어 크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으며 청대 전서로 유명한 서예가 오
창석,곽석여,오대징 등ㅇㄴ 석고문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진전은 진대의 전서 다시말
해서 소전이고 청전은 청대 오창석 등의 전서를 말한다.)

태산각석은 시황제 28년( 기원전 219년) 동으로 순수할 시 태산에 올랐다가 승상 이기등이
진시황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165자가 실려있 다. 소전은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이사에게 대전을 근거로 하여 통일되지 못했던 문자를 정리하고 수정하여 획의
순서를 정하고, 행을 나누는 표준자체를 만들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사의 서체 흔적으 로는
봉산각석 등이 있다.

 

 

D.대전과 소전

소전이 만들어 지기 이전의 문자이며 중국의 넓은 땅 만
큼이나 문자 또한 지방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 했는데 이
것이 대전이다. 소전은 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여러 가지 문자를 한가지로
통일하기 위해 재상인 이기에게 명령하여 만들어진 문자이다.

E.전서의 특징

전서는 각국이 문자를 달리하고 있는 혼란시대에 나타났다. 시황은 제상인 이기에게 명하여
종래의 문자를 정리하여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이체문자는 폐지하였다. 한의 전서는 남아
있는 것이 적으며 후한의 허신의 작 설문해자 15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전의 사조라
말할 수 있다. 전서는 장식성 이 풍부하고 아름다워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전서의 자형은 선
의 굵기가 비슷하고 시작되는 부분과 끝 부분이 둥그스름 하며, 특히 소전은 자측과 우측이
대칭을 이루는 것이 많고 대체적으로 세로를 길 게 쓰며 정중하고 경건한 문자이다.

**예서 : 예서의 특징 , 팔분서


A.예서의 특징

예서는 주대에 제정되었으나 실용서체에는 적합하지 않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막이란 자
가 각고십 년, 옥중에서 만들었다고 한다.전서가 색세이며 장방형인 것을 방세로 바꾸어 옆
을 넓게 하고 획을 생 략하였기 때문에 훨씬 쓰기 쉽게 되었다. 주로 잔역에 종사하는 자가
사용하였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 다.예서는 또한 전서의 보조체로서 탄생딘 것이지만 진이
멸망하고 한이 되자 시대의 정체로서 표면 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서는 소전 이
후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서체이며 시대적으로 수많은 예서가 쓰여 왔는데 전서보다 쓰기가
편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진나라때 한 사람이 시황제에 게 죄를 지어 감옥에 있으면
서 만들어낸 서체라 하여 진예라고 하는 명칭
도 있다.예서의 자형은 팔자 모양으로 양쪽이
균제하여 안정감이 있으며 획의 질이 상당히
부드러우며 같은 방향의 획간은 거의 평행 균
등하고 명쾌하다.

B.팔분서

예서 가운데의 한 서체이며 글씨 모양이 양쪽
으로 팔자 모양으로 쓰여 이쓴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서 : 해서의 변천사

A. 해서의 변천사(위진의 서 , 남조의 해서 , 북조의 해서)

해서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접하고 있는 글씨체이다. 해서의
(해) 자는 (본뜨다. 본보다.)와 같 은 의미를 가진 문자로서, 해서라고
하면 가장 규범이 되고 표준이 되는 글씨라는 뜻에서 진서, 혹은 정
서라고 불린워진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한말에 시작디어 위진남북조
시대에 성행하였으며 당 나라 때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여 서법을 완
전히 정착시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발달되 어 현
재에 사용되고 있는 해서를 해서의 양대 산맥으로 분류되는 육조해
와 당해를 중심으로 꼭 필요 하다고 생각되는 서가와 유적을 기술해
보았다.

1.해서의 출현과정과 한왕조

중국 역사상 문자가 서로써 가장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대는 한 대로
써 진왕조로부터 삼국 시대로 옮겨가는 약 400년간 게속된 왕조이다.
이 시기는 정치 .문화의 발달은 물론이고 서예사에서 보아도 어느 시
대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문자를 정리 분석한 (설문해
자)가 완성되었고 , 종이 의 제조법도 이때에 확립되었다. 이 시대에는 서사 도구 즉, 붓이
나 죽, 목간, 종이 등이 발달하였고 따라서 글씨는 실생활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
다. 글씨가 실용화 되면서 비문등의 글씨와는 다른 빠르고 단순한 형태의 글씨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예서와 결합하여 행서가 생겨났는데 이 모든 서체들이 복합적으로 정리 발전되면
서 해서가 출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서의 기반위에서 초서,행서,해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 대야 말로 모든 서체가 다 나타난 시기로써 서예사에서 가장 지대한 공헌을 남긴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위진남북조 시대의 해서

한 대의 장초를 이어받아 행서와 초서가 발전되었으며 해서가 정착된 시대로서 북조에는 석
비가 주류  를 이루었고 남조에는 첩서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북비, 남첩이라고 부
르는 것도 이 때문이 다.

가.위.진의 서

위(A.D.220 - 265)에서 서진(A.D.265 - 316)까지의 시대로 해서의 형태가 채 정리되지 못하
고 예서 의 자취가 남아있던 시기인데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좋은 문서에는 행압서가 사용
되었고 한편으로는 한의 장초에서 비롯된 초서가 발달된 때였다. 또 이 시대는 위엣 금비령
을 내렸고, 서진때에도 역시 무제의 금비령 때문에 전하는 묵적이 극히 적다. 그러나 이때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해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요이다. 종요 외
에도 이 당시에 많은 서가들이 있으나 전하는 묵적 으로는 종요의 것 외에는 거의 없다.

1)종요의 서(A.D.151 - 230)

종요의 자는 원상,위나라 장시사람.벼슬이 상국에 이르렀고 그의 유적은 모두 해서인데 현존
하는 것 들은 위작으로 보인다.

2)해서의 발전과정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찬보자비등이 있으며, 또 서진 이후 130
여년간 계속 된 5호 16국 시대에도 광무장군비가 있는데 예서의 필의이나 해서에 가깝다.

3)위.서진의 서풍

삼국에서 서진 5호 16국에 이르는 이 시대는 중국 서예가 쇠퇴해가는 시대였으나 행초서는
발전하여 훗날 왕희지의 서에 영향을 주었다.

나.남조의 해서

영가의 난에(316) 의해 밀려난 진왕실의 일족이 강남지방의 통치에 힘쓰다 318 년에 제위에
올라  진 강(남경)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동진이다. 이 왕조는 문벌귀족들에 의해지지
되었으며, 그중에서 도 특히 명문으로 불 리는 가문이 왕씨였다. 이때의 서가들은 위진의 서
풍을 계승하게 되었으나, 진 무 제의 금비령이 풀리지 않았던 때여서 서가들이 비단이나 종
이에 글씨를 썼기 때문에 행초가 발달하였 다. 이때에 서성으로 존경받는 왕희지가 출현하
여 중국서도사에 빛나는 장을 열었다.그 후 앙희지가 나왔다.

1)왕희지의 서

 동진의 서법은 왕희지 부자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그 경지는 오늘날까지 아무도 뛰어넘
지 못하고 있다.왕희지의 생졸년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303 -361, 321 -369)귀족출신으로
우군장군이란 벼슬 에 재직했기에 왕석군이라 불리웠으며, 궁직을 떠난 뒤에는 산은에 살았
다.어려서 위부인에게 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여 초서는 장지를 정서(해서) 는 종요를 배웠으
며, 또한 여러 종류의 글씨를 구하여 그 장점만을 취하여 연마.정진하였다.전설에 의하면 팔
분,해, 행, 초, 비백등 각체의 서에 능하였으며, 특 히 예서, 지금의해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그의 묵적은 모두 해.행.초 삼체에 한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처
럼 뛰어난 왕석군의 서가가 하나도 없고 세전하는 묵적은 모두 탑모본 이나 , 임모본으로서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2)왕헌지의 서

헌지의 자는 자경,왕희지의 일곱째 아들로 벼슬이 중서령에 이르렀고 부친 서의 기초위에
자기 나름 대로의 풍격을 이루어 세칭 이왕이라고 불린다. 전하는 해서 유적으로는 락신부
13행이 있다. 이것은 락수의 여신에 대한 것을 부한 유명한 문장인데 불과 13행밖에 남아
있지 않다.

3)지영의 서

생졸 연대는 미상이며, 진 왕조때 태어나 수대 사이에 있었던 승으로 왕희지의 7세 손으로
전하며 이 름은 법극이다. 왕희지의 서법을 이어 받아 점차 서법의 규범으로 존중받게 되었
다.초서와 해서를 잘 썼으며, 손과정의 서보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4)남조의 서풍

남조는 위진 이후 반영하던 문벌귀족의 황금시대였다.정치,경제,문화등 기타 모든 것이 귀족
들의 손 에 의해 장악되었다. 남조 4개 왕조의 수도가 공히 건강이었으며 특히 양대의 건강
의 인구는 백수십만 에 도달하였다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은 남조의 귀족
문화는 이왕의 서와 잘 조화되었 고, 따라서 이러한 이왕의 글씨는 남조의 서풍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남 조시대는 북조와 달리 금비령 때문에 비서가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송의 찬룡안비 등이 있을 뿐이다.

다.북조의 해서

서기 317년에 화북의 중원을 버리고 떠난 진왕조 이후 화북 땅에서는 소위 5호 16국의 단명
한 왕조가 항쟁을 계속하다,선비족이 세운 위왕조에 의해 화북의 통일이 이루어졌다.(439 세
조) 우리가 일반적 으로 알고 있는 육조체라고 부르는 서가 바로 이 북위의 서를 일컫는 말
로서 북비라고 한다. 이때에는 금비령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비문이 남아 있는데 북비
특유의 서체가 형성 발전되었고 남조의 서풍과는 또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비각 이
외에도 조상기등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비

비에 대하여 말할 때는 반드시 북위시대를 말하게 되는데 서의 형으로나 내용면 모두 충실
하게 포함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해서 비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ㄱ)장맹룡비

522년에세워진 것이다. 전문 26행에 매행 46자로 청대에 이르러 비학의 발달과 함께 더욱
추중되었다 운필은 근엄하고, 결구는 평정속에 곡함이 있다.

ㄴ)고정비

서기 523년에 새겨진 것으로 청대 건륭제 때 산동의 덕현에서 출토되었다. 모든 서는 전성
기가 되면, 어떠한 형태로든 규범이 정해지게 되는데 이 비의 점과 획의 배치가 모두 그러
한 규범에 맞게 되어 있다. 비문은 24행에 매행 46자인데, 북비의 방정미를 갖추고 있어 장
맹룡비와 더불어 북비의 걸작을 꼽힌다.

ㄷ)경사군비(540년)

이 비석이 주는 느낌은 남조의 서풍이다. 파법을 멀리 뻗치지 않으면서, 짧게 힘주어 썼다.
오른쪽 어깨등도 일부러 각을 주지 않고, 여유있게 붓을 이동시키고 있다.

2)묘지명

사자를 장사지낼 때 방형의 돌에 사자의 이력과 성명을 각입하여 묘혈안에 매장한 것인데
대략 서진 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은 북조 특히 위왕조 때
로서, 낙양을 비롯하 여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근일에도 가끔 발견되고 있다. 땅속에 묻
혔고 또한 뚜껑을 씌운 것이 많 아 출토되었을 때 비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3)북조의 서풍

북조의 서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몇차례의 변화 조정을 볼 수 있다.첫째로 위의 효문제
가 낙양으 로 천도하기 전 옛 서진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유적으로는 에서도 해서도 아닌
서체를 형성했다.이 는 운남성남령의 찬보자비의 서풍과 유사하다.이때 남조에서는 송의 효
무제의 이건 3년에 해당되는 데 이미 동진의 왕희지.헌지에 의해 이루어진 새로운 양식의
서가 유행하던 때였다. 둘째 효문제 출현 으로 낙양천도와 함께 이루어진 한화 정책으로 낙
양의 옛문화와 새로이 수입된 남조의 수도인 건강의 문화가 충분히 융하되지 못한 채 탁발
족 정신의 바탕위에 종합된 문화가 출현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용문 조상기이다. 조상기는
남조의 신서풍인 해서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이들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그러나 위왕
조 말기가 되면서 남조의 신양식과 옛부터 있어온  구양식을 교묘하게 조하시켜 비교적 훌
륭한 서를 만들어낸 것이 장맹룡비 등이다.효문제 사후 한화정책은 현저히 후퇴하였으나 위
왕조가 동서로 분할되면서 부터 제 앙조 이후 남조의 신양식인 이앙의 서가 점차 북조로 옮
겨 왔다 동위의 서는 남조의 지영보다 빠른 시대지만 이왕의 영향을 받은 서롯 마치 지영의
서를 보는 듯 하다. 결론적으로 남방이나 북방 모두 동일한 서풍의 서가 생기게 되는데 이
는 문화의 중심에서 발달한 서 와 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자연발달적인 서의 두 가지
로 분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 에는 그 도읍의 서풍이 차차 사방으로 전파되어
초당에 이르러 결국 통일되고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 다.

 

**행서 : 행서의 특징

초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닌 중간정도의 것이 행서인데 걸어가는데
비유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희지 (동진때의
사람) 의 난정서가 행서의 대표격 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행서는
전한말에 기존의 다른 서체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 자연히 발생한 것
이 아닌가 생각된다. 행서는 약동 감이 풍부하며 정신유로에 적합하
며 읽기 쉽고 친숙하므로 실용상으로나 예술상으로 널리 쓰여직 있
다.

A.행서의 특징

글씨 자체가 걸어가는 것에 비유된 만큼 중심선이 이동하거나 경사
지면서 균형을 이루고, 중심을 이 동시키며 글자가 휘어진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큰 글씨가 있
는가 하면 작은 글씨가 있고 조밀의 변화가 많으며 해서 같이 줄이
똑바르지 않으면서도 별로 비뚤어 진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데에 행서의 멋이 있는 것이
다.

 

 

**초서 : 초서의 특징, 초서의 종류

알기 어렵게 휘갈겨서 쓰여진 서체가 초서인데, 비유하면 뛰어가는 형세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자가 만 들어진 것은 전서에서 비롯 된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되었다.

A.초서의 특징

여러자를 한 줄로 꿰어놓은 듯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을 들 수 있겠으나 최초의 초서가
생길 적에는 전서나 해서 보다도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하며 한나라 이전에는 거의
모든 초서가 한자씩 떨어 져 있었다. 요즈음 같이 이어서 쓰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이어쓰니 시간 도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지만 전서에서 초서로 그
모양을 개발해 왔으니 처음 쓰여질 때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서체의 아름다움
이 느껴진 것은 우선 균일하지 않고, 대소, 태세, 장단의 조 화 가 변화 무쌍한 데서  일 것
이고, 직선과 곡선의 조형 또한 아름다움의 핵이라 할 수 있다.

B.초서의 종류

서보 : 당대의 손과정이 쓴 것으로 붓글씨를 쓰는데 대
하여 적은 서법 이론이다.초서를 배우는데 교본 용으로
는 가장 적당하며 이론도 명쾌하게 밝혀져 있으나 글씨
는 더욱 명쾌하게 쓰여진 것이 자랑할 만한 서체이다.

광초 : 당대 장욱의 글씨가 대표적인 광초이다. 이는 너
무가 휘갈겨 쓴 것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 전 서 (篆 書)

1) 석 고 문 (石 鼓 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세겨져 있다하여
석고 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현재 통용되
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
나라에서 만들어졌다 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
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
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 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
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
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2) 태 산 각 석 (泰 山 刻 石)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아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백
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 고, 청조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3) 낭 아 대 각 석 (瑯 牙 臺 刻 石)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
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 정도 전해지고 있
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
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2. 예 서 (隸 書)

1) 을 영 비 ( 乙 瑛 碑 )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
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 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
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
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
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
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
다.

2) 예 기 비(禮 器 碑)

예기비가 새겨진 것은 약 1800여 년전 후한의 환제 영수(永壽) 2년의 일이며, 한래비 라고도
부른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 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
을 면해 주는 등,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
던 허물어진 공 자묘(이곳은 한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즉 예기 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
고,묘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
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한비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
느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을 지키고 있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운필이
정교하여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는 비로서 새김도 훌륭하고 글자수도 많아 예서를 익히는데
적당하다. 그리고 예기비의 선조(線條)에 관하여서는 유(여윔),경(단단함),청(맑음),정(곧음)이
언급되 어진다. 즉,예기비는 선조가 여위어 신정(神情)이 넘치며 단단해서 골격이 튼튼하고
맑아서 모습이 명랑하며 곧아서 태도가 준 수하다고 말해진다. 따라서 예기비에 대한 감상
은 필획의 선조를 통해 그 신정과 골격,모양,자태를 터득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 다.

3) 사 신 비 (史 晨 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 재 산동성 곡부{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
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
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
로 알고 아울러 상 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
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
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 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있
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4) 서 협 송 ( 西 狹 頌 )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사각형의 결 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
미 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크기의 그림이 그
려져 있고 다시 오단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
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 운데 단연 돋보인다.

5) 조 전 비( 曺 全 碑 )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그전
에 이 비는 한비의 하나에 불과하 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나, 20C 영국 고고학자인 스타
인이 한인들의 진적(眞蹟)을 발견함으로써,조전의 우려한 서풍이 한말의 퇴폐한 풍조와 일치
하지 않다는 것과 이 비의 자형이나 필화의 모양새는 예법이 완성된 극치점을 보이고 있다
는 사실이 알려졌 다. 이 비의 서법은 300년간의 정칙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진
적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면할 길이 없다. 또 하나 조전 비의 단정한 모습에서 결체나 용필
의 비밀을 엿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단장하면서도 아리땁고 중후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풍 모와 중심 밀집과 좌우서전(左右舒展)의 결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이 비는 몇 단점에
도 불구하고 한비의 치보(致寶)라 일컬어 지고 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
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
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
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즉 최고 권력자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
시에 그 참모격이던 간의 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
에 속해 있었던 것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6) 장 천 비 ( 張 遷 碑 )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
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
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 고 힘찬 점획,완강한 네모꼴의 구성,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
다. 충분히 뻗은 점획,자유롭고 메이지 않 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중 방필 웅강(方筆雄强)
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또,후한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
체를 보이고 있어서 ,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 구(四字句)로 된 명문이 있다.


3. 해 서 ( 楷 書 )

1) 장 맹 룡 비 ( 張 孟 龍 碑 )

육조 시대의 대표적인 해서이다. 서도에서의 힘은 적절한 조화가 따라야 한다. 결구법이 바
로 그것인데, 장비액(張碑額)은 그런 것의 본보기라 하겠다. 본문도 점획의 배치에 따라 소
박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으로 당대(唐代)의 서와 같은 정제미 를 나타내고 있다. 경중
의 배합,각도의 변화, 그리고 글자의 흐름에 따라 그것들을 조절하는 의욕적인 필력, 이러한
모든 요소 가 큰 비석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흔적들을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할 것, 여기에 서도의 비결이 있다. 북위서 가 유행하던 때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용
문(龍門)의 강함과 예리함,정도소(鄭道昭)의 온화함, 고정비의 완성된 계획성 등이 함축되어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진다. 비면은 해서로 26행,한 행에 24자씩 새겨져 있고, 비음은
이 비를 세움에 있 어서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의 관위 성명을 연서한 것이 10여단 있다. 이
비의 비액에서 '청송(淸頌:덕을 칭송한다)'으로 표현 되는 바와 같이 송덕비이다. 장맹룡은
당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믿는 유교를 선양하였다. 그 공
적이 컸기 때문에 향당(鄕黨)들이 이에 감탄하여서 장맹룡의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고, 그
의 일대기에 관한 것과 칭송이 그 내용이다.

2) 고 정 비 ( 高 貞 碑 )

당의 구양순과 더불어 이지파(理智派)의 대표격으로 이 비석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고정비
는 구양순의 비와 쌍벽을 이룰 만한 해서의 비문이다. 이 비문의 작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
으며 그 출토 시기도 얼마되지 않아서,이 서체에 관해 논의하는 사 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
니라 이 비를 수록한 책도 그리 많지 않다. 한 책에 의하면 고정이라는 사람은 비서랑의 벼
슬을 지냈고 나이 26세에 죽었다고 한다. 이 비는 그가 죽은 지 9년이 지나고서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에서 그려지고 있는 고정이 명족 (名族)이었고 게다가 외척(外戚)이었던 것을 생
각해 본다면 이 비를 쓴 사람은 당시 제일의 명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비는 구양
순의 비와 마찬가지로 필의 기수(起收)가 매우 자연스럽고 형태의 조합이 합리적이어서 비
난할 여지가 없는 구조를 이 루고 있다. 더불어 전서의 균형감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어서
회화적인 미가 뛰어나다.

3) 구 성 궁 예 천 명 ( 九 成 宮 醴 天 銘 )

이 비는 당태종 6년(632)에 당태종이 수나라의 인수궁을 수리하면서 만든 구성궁에 샘물이
뿜어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여 만 든 비이다. 문장은 위징이 쓰고 글씨는 황제의 명에 따라
구양순이 특별히 정성들여 썼다. 이는 구양순의 나이 75세의 서(書 )로 구양순이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나, 이미 글씨는 구양순 자신의 자체였다. 해서의 필법이 극에 달했다고 평가
된다. 전 각은 양문으로 되어 있고 구성궁예천명의 여섯 글자가 2행에 있고, 본문은 24행으
로 되어 있다. 남북서풍을 융합한 수대의 서 풍을 전,예서에 바탕을 둔 구성법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방형의 형태로 씌어져 있다. 내핍법(內逼法) 혹은 배세(背勢)에 따르고 있으므로
점,획이 중심에 모여 있으나, 비의 결체는 여유가 있고 전절(轉折)과 구부러진 곳의 용필은
아주 훌륭하다. 새 시대 감각을 불어 넣은 것으로 화도사비(化度寺碑)와 더불어 구양순의 대
표작이다. 해서를 쓰는데 있어서 정통이라 할 수 있으나, 너무도 정제된 필획의 구성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형태만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4) 안 근 례 비 ( 顔 勤 禮 碑 )

안씨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비문 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立碑)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되
어 진다. 비는 사면각이나 세째 면은 갈아 없어졌고, 약 1천 6백 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
다.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중에서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안진경의
필법은 구양순의 경우와 다른 바 없으나 구 법(歐法)보다도 약간 붓을 세우며, 안서(顔書)의
가로획은 우상향세(右上向勢:손에 쥔 붓을 그대로 댄 후 일단 조금 띄웠다 오른 쪽으로 그
음)의 수법을 사용한다. 구(歐)의 배세(背勢), 안(顔)의 향세(向勢)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인
조형수법은 해서 기법의 양극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의 내용은 안진경이 그의 조
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이다.


4. 행 서 ( 行 書 )

1)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
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
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
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
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 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
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
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
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 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
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2) 집 자 성 교 서 ( 集 字 聖 敎 序 )

홍복사(弘福寺)의 승려 회인(懷仁)이 칙령에 의해 궁중에 비장(秘藏)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집자한 서이다.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끝에 집대성한 것이다.{감
형 3년(672) 12월 8일 경성법려건립(京城法侶建立)} 변이나 방 을 취합하거나 점획을 해체,
합병시키거나 했는데, 사진술(寫眞術)도 없던 당시에 그 노고가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
음이 있 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奬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 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 을 이루고 있
다.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이 성교서는 당대(塘代)의 모본이기는
하나 왕희지 행서 의 진수를 파악하는데 불가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
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와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
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
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뚤림은
각도나 용필에 일정한 벽이 없이 종횡 무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 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이 집자성교서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
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의 시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

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
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 이라 구분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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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사 연표

 

한국

ㅡ시대 작가 작품 비 고ㅡ

선사시대 울주 반구대암각화(盤龜臺岩刻畵) 신석기 말엽청동기

고조선 창원 다호리 고분(古墳)에서 붓 출토 B.C. 1세기경

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 장수왕 때. 모두루는 인명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566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5세기 후반

백제 무녕왕릉매지권(武寧王陵買地卷) 525?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 654. 사택지적은 인명

신라 영일냉수리비(迎日冷水里碑) 443, 503?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524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536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545550

창녕진흥왕척경비(昌寧眞興王拓境碑) 561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 568

황초령진흥왕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 568

마운령진흥왕순수비(磨雲嶺眞興王巡狩碑 568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552, 612? 우리말식 한문체

경주남산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 591

통일 최치원(崔致遠)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887

신라 김생(金生)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일컬음

고려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 954. 김생의 글씨를 집자

장단열(張端說) 정진대사비(靜眞大師碑) 965

석탄연(釋坦然) 문수원중수기(文殊院重修碑) 1130. 행서

이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13361339? 행서

조선 훈민정음(訓民正音) 1446. 판본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7. 판본체

석보상절(釋譜詳節) 1447. 판본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7. 판본체

동국정운(東國正韻) 1448. 판본체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 판본체

이용(李瑢)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 1452. 안평대군

이용(李瑢)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 발문(跋文) 안평대군

이문건(李文楗) 한글고비 536. 최초의 한글비

황기로(黃耆老) 초서(草書) 초서의 대가

신사임당 신사임당필첩(申師任堂筆帖) 여류 서예가

한호(韓濩) 기자묘비(箕子廟碑).권도원수대첩비 전면 한석봉(韓石峯)

이광사(李匡師) 행서(行書) 4언시 원교체(圓嶠體) 이룩

김정희(金正喜) 완당척독(阮堂尺牘). 1867

김정희(金正喜) 세한도(歲寒圖)병제 추사체(秋史體) 이룩

이하응(李昰應) 난초(蘭草) 흥선대원군. 난초를 잘 그림

민영익(閔泳翊)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 문인화에 뛰어남

오세창(吳世昌)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서화협회 결성(1918)

 

중국

ㅡ시대 작가 작품 비고ㅡ

() 귀갑(龜甲), 수골(獸骨) 갑골문(甲骨文)

() 산씨반(散氏盤) 금문(金文)

전국(戰國) 석고문(石鼓文) 대전(大篆)

() 태산각석(泰山刻石) B.C.219. 소전(小篆):이사 정리

낭야대각석(瑯邪臺刻石) 소전(小篆)

전한(前漢) 마왕퇴출토백서(馬王堆出土帛書) 죽간(竹簡) 과도기적 서체

오봉원년목간(五鳳元年木簡) B.C.57

후한(後漢) 을영비(乙瑛碑) 153. 예서(隸書)

예기비(禮器碑) 156. 예서(隸書)

사신전비(史晨前碑) 169. 예서(隸書)

구정(仇靖) 서협송(西狹頌) 171. 서명(署名)이 있는 最古作

조전비(曹全碑) 185. 예서(隸書)

장천비(張遷碑) 186. 예서(隸書)

삼국(三國) ··초서 등장

() 왕희지(王羲之) 난정서(蘭亭敍) 353. 행서(行書)

찬보자비(寶子碑) 405. 예서와 해서의 중간

남북조(南北朝) 용문조상기(龍門造像記.龍門二十品) 495520. 해서(楷書)

장맹룡비(張猛龍碑) 522. 해서(楷書)

() 구양순(歐陽詢)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632. 해서(楷書)의 극치

저수량(遂良)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653. 해서(楷書)

손과정(孫過庭) 서보(書譜) 687. 초서(草書)

안진경(顔眞卿) 안근례비(顔勤禮碑) 779. 해서(楷書). 1922년 발견

() 채양(蔡襄) 척독(尺牘) 행서(行書)

소식(蘇軾)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1082. 행서(行書). 東坡

황정견(黃庭堅) 황주한식시권발(黃州寒食詩卷跋) 1100. 행서(行書)

미불() 촉소첩(蜀素帖) 1088. 행서(行書)

() 조맹부(趙孟) 난정첩십삼팔(蘭亭帖十三跋) 1310년 송설체(松雪體)

예찬(倪瓚) 정무본난정서발(定武本蘭亭敍跋) 1372. 서화가

() 축윤명(祝允明) 출사표(出師表) 1514. 해서(楷書). 고전파

문징명(文徵明) 도연명음주이십수(陶淵明飮酒) 1554.행초서.고전파

동기창(董其昌) 행초시권(行草詩卷) 초서(草書). 고전파

장서도(張瑞圖) 이백시권(李白詩卷) 초서(草書). 개성파

왕탁(王鐸) 시권(詩卷), 시폭(詩幅) 연면초(連綿草). 개성파

부산(傅山) 조폭삼종(條幅三種) 연면초(連綿草). 개성파

진홍수(陳洪綬) 시폭(詩幅) 행초(行草). 시인. 화가

() 석도제(釋道濟) 나부산도책대제(羅浮山圖冊對題) 호 석도(石濤). 화가

정섭(鄭燮) 절회소자서(節懷素自敍) 板橋. 대를 잘 그림. 碑派

등석여(鄧石如) 전서칠언련(篆書七言聯) 전예(篆隸)에 뛰어남

이병수(伊秉綬) 다보탑비제자(多寶塔碑題字) 대자(大字)에 뛰어남

옹방강(翁方綱) 행서시폭(行書詩幅) 행서(行書). 첩파(帖派)

완원(阮元) 석거보급서(石渠寶) 서예 이론가. 北碑南帖論

하소기(何紹基) 행서폭(行書幅) 비파(碑派)의 거장

조지겸(趙之謙) 전서액(篆書額) 전예(篆隸). 전각(篆刻)

오준경(吳俊卿) 임석고문(臨石鼓文) 호 창석(昌碩). 전각(篆刻). 화가

 

출처: 서예술 천국
서 예 사 연 대 표
중 국 한 국
하(夏) BC2000

 

고조선

 

은(殷) BC1500 갑골문, 금문

 

 

주(周) BC500 석고문

 

 

진(秦) (BC221-BC206) 소전

 

 

전한(前漢) (BC202-BC08) 고예(古隸) 신라(BC57-)

 

목간(木簡)류 고구려(BC37-)

 

백제(BC18-)
후한(後漢) (252-220) 석문송(148)

 

 

을영비(153)
예기비(156)
서협송(171)
장천비(186)
三國(위,오,촉) (220-280)

 

 

 

서진(西晋) (280-317) 난정서(353)

 

 

동진(東晋) (317-412) 십월첩

 

 

북위(北魏) (386-534) 조상기, 장맹룡비(522), 고정비(523) 고구려 광개토대왕비(414)
서위(西魏) (534-556)

 

 

 

진(陳) (557-589)

 

신라 창녕진흥왕척경비(562)
북한산비(567)
단양적성비
수(隋) (581-618)

 

백제 무녕왕릉매지권(525?)
사택지적비(?)
당(唐) (618-907) 공자묘당비(627) 신라 무열왕릉비(666)
구성궁예천명(632) 통일신라 김생의 백율사석당기
저수량의 맹법사비(642)

 

최치원의 쌍계사진감선사공탑
집자성교서(672)

 

비(924)
쟁좌위(764)

 

 

안씨가묘비(780)

 

 

오대(五代) (907-960)

 

고려(918-1392) 탄연의 문수원중수비(1130)
북송(北宋) (960-1127)

 

 

 

남송(南宋) (1127-1279)

 

 

 

(元) (1271-1368) 조맹부의 행서천자문

 

 

명(明) (1368-1644)

 

축윤명의 출사표(1514) 조선시대 (1392-) 안평대군의 백화문편액
문징명의 전후적벽부(1545)

 

허목의 척주동해비
동기창의 행초서권(1603)

 

한호의 선죽교비
청(淸) (1644-1912) 등석여, 이병수

 

김정희의 추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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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書藝의 定義와 3大要素
서예는 문자를 표현한 독특한 예술이다. 특히 모필을 사용하여 문자를 표현하기 때
문에 애초부터 문자를 기록한다는 서사적 기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예는
실용가치 뿐 아니라 예술적 행위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글
씨 쓰기 행위와 다르며, 문자디자인과도 구별된다.

 

반드시 모필을 사용하여야 하고, 글자간의 구도와 행간의 구도인 章法을 강구해야하며 먹을 다루는 법(墨法)을 제대로 사용하였을 때 비로소 서예라 할 수 있다.

 

서예는 3대 요소인 筆法, 筆勢, 筆意의 예술적 기교를 포괄하여야 한다.
筆法은, 글자의 점과 획을 쓸 때 붓을 움직이는 법을 총칭한 것이다. 필법은 크게 붓
을 잡는 집필과 붓을 움직이는 用筆로 나뉘는데, 좁은 의미의 필법은 용필을 의미한
다. 집필법은 손가락을 사용하는 指法과 팔을 사용하는 腕法으로 나뉘며, 용필은 起
筆, 收筆, 圓筆, 方筆, 中鋒, 側鋒, 露鋒, 臧鋒, 提按, 轉折 등이 있다. 글씨를 쓰는 사
람과 서체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며, 그 미감도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필력은 획을 긋는 내재적인 힘을 말한다. 점획과 점획 사이, 글자와 글자 사이, 그리
고 행과 행 사이의 상호 호응관계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붓이 가지 않
은 곳이라 할지라도 기세가 끊어져서는 안되며, 점과 획의 모양이 각각 다르다 할지
라도 그 필세는 항상 혼연일치 되어야한다.

 

필의는 글씨 속에 표현된 작가의 감정과 취향을 가리킨다. 글씨 속에 글자의 자연적
인 정취와 우미한 기운,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의 고상한 인품이 함께 표현될 때
필의가 나타난다.

 

필법과 필세는 서예의 技巧에 해당하고, 필의는 서예의 根本에 해당한다.
서예의 구조는 문자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법칙과 글씨를 쓰는 사람의 심미적 정취
가 하나로 만나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장법은 글자와 글자, 행과 행 사이
의 전체적인 관계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강구하는 법칙이다.

묵법은 붓과 먹 그리고 종이의 상호변화와 효과를 추구하는 법이다. 농묵, 담묵, 간
묵, 갈묵, 습묵, 고묵, 창묵 등이 있다. 이것은 글씨를 쓰는 사람과 서체 및 용도에 따
라서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으며, 각각의 적용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미감을 표현할
수 있다.

2. 書體의 種類와 美學的 特徵

중국 서예의 서체는 篆書, 隸書, 草書, 楷書, 行書로 나뉜다. 각 서체의 형성은 다른
서체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각 서체마다 독특한 형체와 특징
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적 표현 역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전서는, 商나라 때의 갑골문과 周나라 때의 金文, 戰國시대의 篆書, 秦나라 때의 小
篆을 포괄한다. 이들 서체는 서사도구가 각기 달라 미감 역시 다르게 나타난다. 갑골
문은 딱딱한 거북이 껍질과 동물의 뼈 위에 칼로 새긴 것이므로 가늘면서도 딱딱하
면서, 모가 나 있고 직선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새긴 것으로, 갑골문에 비하여 유창하고 자형이 단정하다.

 

예서는 佐書, 史書라고도 한다. 소전을 계승하여 통행되었던 서체인데, 晉나라의 관
리들이 산적한 행정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기존의 소전을 흘려 쓰면서부
터 생겨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서체는 전국시대에 진나라 때 생겨나 한나라 때 정체
로 정해져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서에 없던 파책이 생겼으며, 글자가 매우 간
략해졌다. 또한 상형적인 모양이 사라지고 곡선이 직선화되었으며 정방형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해서는, 正書 또는 眞書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해서의 본의는 법칙을 준수하여 모범
이 될 수 있는 표준체를 말한다. 따라서 해서는 자체가 단정해야 한다. 해서는 漢나
라 때에 이미 초보적인 형태가 등장하였고, 예서가 변형되어 생긴 것이다. 이 서체
는 魏晉南北朝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당나라 때에 최고 성행하였다. 왕희지, 왕헌지,
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등 중국의 서예대가들은 모두 해서에 능하였다.

 

초서는, 아주 일찍이 등장하였다. 글자를 간편하게 흘려 쓰는 습관은 전서시대에도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서가 독립적인 서체로 발전한 것은 한나라 때이
다. 초서는 章草, 今草, 狂草 3단계로 발전하였다. 장초는 예서처럼 파책이 있는 것
을 말하는데, 예서가 한창 유행하전 한나라 때에 생겨났다.

 

금초는 小草라고도 하는데, 해서가 나온 뒤에 나타났으며, 장초의 기초위에 해서의 필세와 필의가 가미되어 발생하였다. 장초의 파책을 없애고 붓의 움직임을 더욱 빠르게 하였다. 광초는 大草라고도 하는데 금초보다 더 빠르고 활달하게 붓을 놀려서 쓰는 것을 말하며, 당나라 때 시작되었다.

행서는 行押書라고도 하는데 해서와 초서사이에 끼어있는 서체로서 간결하면서도
유창하다. 행서는 한나라 때 생겨나 위진남북조시대에 성행하였다. 행서의 발전은
해서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해서를 간략하게 쓰면서 획과 획 사이를 물 흐르
듯이 다닌다고 해서 ‘행서’라고 하였다. 왕희지의 <蘭亭集序>를 천하제일 행서로 평
가한다.

3. 그림과 글씨의 관계, 글씨와 글의 관계

먼저 그림과 글씨의 관계를 알아보자.
중국 사람들은 ‘글과 그림은 근원이 같다(書畵同源)’라는 말을 자주 쓴다. 즉 서예와
회화는 시작이 같다는 말이다. 중국의 글자인 한자는 상형문자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장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갑골문과 금문, 그리고 전서, 예서 등은 도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또한 실용적 필요성에 의해 서사기능을 감당하던 ‘書’가, 漢末 이후에 등장한 草書 단계에 오면, 그림과 같은 예술적 선묘감과 율동미를 갖추게 된다.

 

양자 관계가 이처럼 하나로 인식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국의 그림과 글
씨가 모두 붓이라는 동일한 도구를 사용하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붓은 짐승
의 가는 철로 만들기 때문에 ‘모필’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붓은, 끝이 평평한 서양화
붓과 달리 중심이 뾰족하게 모이도록 만든다. 뾰족한 붓끝을 中鋒이라 한다.

 

중국의 그림이나 글씨에서는 붓끝이 선의 중심을 지나가도록 하는 中鋒筆法을 주로 쓴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에 있어서 선의 질감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장르가 분화된 근대 이후, 水墨畵나 文人畵가 여전히 서예 영역에 속해있는 것도 중국 그림의 이런 전통과 관련이 있다. 또한 중국 그림이 면보다는 선을 중요시 하는 것도 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면 글씨(서예)와 글(문학)은 어떤 관계인가? 글씨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혼합되
어 있기 때문에 공간적이며 시간적이다. 반면에 글은 시간적이다. 왕희지의 글씨를
통하여 그 관계를 알아보자.

옆 페이지 상단의 글은 왕희지가 晉 穆帝 서기 353년 3월 삼짇날 당시의 42명의 명사
들과 절강성 소흥 난저(蘭渚)에 있던 정자에 모여 곡수연(曲水宴)을 베풀고, 여기서
지은 시를 모아 만든 시집의 서문을 쓴 것이다. 먼저 작가는 연회의 시간, 장소, 이
유, 참석자의 면모를 밝혔고, 이어서 연회장소와 풍광을 서술하였다.

 

또 참석한 사람들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한잔 술에 시 한수를 읊조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 담긴 그윽한 정을 풀어내는 모습(暢敍幽情)을 그렸다. 그러므로 이 글은, 수미가 일관하도록 감정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그 행간에는 인생과 자연을 대하는 시인들의 감흥과 상상력이 나타나 있다. 인간의
自足과 悲哀가 교착하고 있어, 현실 속을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세계로 초원하려고
한다. 조물주가 만든 영원한 시간,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서 오는 슬픔이
대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유한한 삶이지만 인간의 감회로 빚어낸 문학
은 영원할 것이라며 작가는 끝을 맺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영원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애절한 소망, 유한한 인생에 대
한 애상, 그러면서도 유한한 삶을 영원한 세계에 담아보려는(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중용적 사유가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
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속에 작자의 감정과 정서가 녹아 있다.

그러면 왕희지는 이러한 정감과 사상을 공간적으로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글자는
크고 작은 것, 길고 짧은 것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물 흐르듯이 내려가고 가로열
을 맞추지 않아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점과 획이 서로 어울려 다양하면서도 변
화된 글자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 글자마다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어떤 필획은 평온하고, 어떤 것은 험준하며, 어떤 것은 편안히 쭉 편 듯 하고, 어떤 것은 안으로 수축하고 있다. 해서처럼 반듯하면서도 초서처럼 유려하다. 붓을 마음껏 휘둘러 한글자도 구속됨이 없으면서도, 필획의 시작과 끝이 적당하고 중봉이 필획을 관통하는 법도가 매우 정확하다. 공간적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적 미학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즉, 왕희지가 추구하려고 했던 시간의 중용적 세계를 공간의 중용적 미학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예는 글자를 형상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이지만, 일을 시간적 흐
름에 따라 기술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다. 이 두 차원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
로 서예이다. 따라서 서예예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

4. 書藝의 美學的 世界

서예의 미학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書論에 대한 천착이 우선되어야 한다. 중
국에는 위진시대에 처음 서론이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서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채옹의 <九勢>를 인용하여 보자.

서예는 자연에서 시작된다. 자연의 법칙이 이미 생겨있으니,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이미생기니 형세가 나타난다.
夫書肇于自然, 自然旣立, 陰陽生焉. 陰陽旣生, 形勢出矣.

서예가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자연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
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음양이 생겨난다는 것은, 서예가 자연의 외형만을 모방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변화도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림이 각 물상의 기계적인 조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의 유기적 만남을 묘사하듯이, 서예 역시 점과 획의 動靜, 剛柔, 虛實 등 상호 유기적인 관계와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그림처럼 서예 역시 자연 이미지로서의 예술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승건(426-485)은 <서부(西賦)>에서 서예의 미학을 ‘택운생황(托韻笙簧)’으로 표
현하였다. 이는 서예가 표현한 글자의 형상이 음악적 운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운’은 사혁이 회화에서 제시한 ‘기운생동(氣韻生動)’과 일맥상통한다
고 할 수 있다. 기운생동은 대상의 외형에 집착하지 않고, 내재미를 추구한다.

 

때문에 비록 화려한 색채나 수려한 수사가 없어도 대상 속에 작가의 개성적 특징이 저절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운생동’은 수식과 기교의 외부적 장치 속에 들어있는 본질을 파악하는 미학이다. 서예도 이와 같은 예술적 경지라고 할 수 있
다. 따라서 그는 “서예의 오묘한 도는 심미적 정신을 최상으로 하고, 외형미는 그 다
음이다.(書之妙道, 神彩爲上, 形質次之)”라고 말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예는 문자기록에 그치거나 단순히 먹물을 바르는 행위
가 아니라, 그림의 선과 면처럼 점과 획 사이의 미묘한 변화와 율동을 통하여 균형
의 미와 더 나아가 심미적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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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藝

붓 잡는 법을 알기 전에, 중봉(中鋒)과 만호제착(萬毫齊着)을 알기 전에 먼저 서예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서예는 점과 선·()의 태세(太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루어진다.

 

서예의 특징

 

먼저 글자를 쓰는 것으로써 서예술이 성립된다. 점과 선의 구성과 비례 균형에 따라 공간미(空間美)가 이루어진다. 필순(筆順),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다. 필순에 따른 운필의 강약 등으로 율동미가 전개된다. 자연의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자라는 추상적인 것을 소재로 한다. 먹은 옛날부터 오채(五彩)를 겸하였다고 하며 검정색이지만 농담(濃淡윤갈(潤渴선염(渲染비백(飛白) 등이 운필에 따라 여러 색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영묘(靈妙)한 결과를 낳는다.

다른 예술 분야들이 밖으로 향하는 힘의 방향을 지니고 있다면 서예는 안으로의 끝없는 세계로 파고드는 예술이다. 따라서 다른 예술 분야는 낭만파 고전파 등의 시대사조들이 패러다임 교체의 방법으로 격렬히 변해온 반면, 서예는 수천년의 역사를 두고 매우 완만하게 혁명적 변화 없이 발전해 왔다.

서예는 주변적인 수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 요소들과 분리시켜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주변적인 요소란 작자의 상황이나 인격, 쏟아 부은 노력 등을 들 수 있다. 인격과 분리된 서품은 아무리 그것이 뛰어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사람이 지니는 연륜이나 인생 경험 따위가 '경력'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서예의 미적 요소에는 다른 예술에는 없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추가되는데 그것이 바로 서예 작품에 쓰인 문자의 뜻이다. 석고문에서 낚시하는 내용이 나올 텐데 이 부분에서의 주요 포인트는 '물 수()'자이다. 전서의 상형자는 대부분 그렇듯이 써 놓은 그 자체가 물이 흐르는 느낌을 주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분위기는 전체가 물 흐르는듯한 느낌을 주게 써야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만주 벌판을 정벌하던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쫀쫀한 전서로 썼다고 하면 어떨까.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는 호방한 글씨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말한 서예의 특징을 알고 그 후에 글씨를 쓰는 법을 베우는 것이 순서라 할 수 있겠다.

 

서예를 배움의 자세

글씨를 배움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만 심도 있는 흥취를 배양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글씨를 배우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서예란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될 것이다. 서예는 일종의 유익한 활동이며, 개인의 사상과 덕행에 대한 수양이며, 예술수양이며, 문화수양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통하여 침착함과 인내심을 길러 심신의 건강과 우아한 흥취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방면에 대한 상식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면, 전시회를 통하여 많은 작품을 보아야 하며, 서예이론에 대한 많은 참고서와 지식을 쌓아야 하며, 명산대천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비석과 묵적(墨迹), 편액(篇額)들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항상 서예의 대가와 기초가 잘 닦여진 동호인과의 교류를 통하여 서예의 흥취를 높이고, 명작들을 감상하여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정도가 되면 서예에 대한 흥취는 초보적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예를 배우려면 그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 하며, 항심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구생법(九生法)

 

글씨는 주변환경이나 쓸 당시의 정신 상태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어수선한 환경이나 맑지 못한 정신으로서는 좋은 글씨를 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변 상황도 그렇지만 서()의 직접적인 매개체가 되는 문구나 용품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갖추고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 논한 것으로서 구생법(九生法)이라는 것이 있다. () 이라고 하는 것은 "새롭다, 혹은 새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곧 썩거나 묵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갖추어야 할 아홉가 지 생()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생필(生筆)이다. 글씨를 쓰고나서 붓을 빨지 않아 먹이 굳은 채로 있는 것을 다시 사용해서는 온전한 글씨가 될 수 없 다. 깨끗이 빨아 호()도 가지런히 정돈된 붓이 바로 생필(生筆)이다.

 

두번째는 생지(生紙)이다. 화선지를 바람이 부는 곳에 놓아 두거나 하면 조직이 팽창해서 글씨를 쓸 경우 먹발이 좋지 않을 뿐 만 아니라 붓이 지면에 닿기 바쁘게 번지게 된다. 오랫동안 바람을 쏘이거나 햇빛에 직접 노출된 화선지는 적합치 않다.

 

세번째는 생연(生硯)이다. 먼지나 때가 묻지 않은 벼루를 말한다. 벼루에는 사용할 때만 물을 붓고 쓰고 난 후에는 반드시 먹을 깨끗이 닦아서 말려두지 않으면 안된다. 갈아 놓은 먹을 그대로 놓아두면 찌꺼기가 응고되어 좋은 먹물을 얻을 수 없다.

 

네번째로 생수(生水)이다. 먹을 갈 물은 새로 푼 물이라야 한다는 뜻에서 생수라고 한다.

 

다섯번째로 생묵(生墨)이다. 먹물은 필요한 만큼만 갈아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겨둔 먹물이 너무 오래되면 광택이 없어지 고 좋은 먹빛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즉시 간 먹을 바로 쓰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먹을 간 뒤 30분 정도의 여유를 두어 먹 과 물이 충분히 용해된 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좋다.

 

여섯번째로 생수(生手)이다. 글씨는 손으로 쓰는 것이므로 손의 상태가 좋을 때 쓰는 것이 이상적이다. 손이 피곤하면 역시 좋 은 글씨를 쓸 수 없다.

 

일곱번째로 생신(生神)이라는 것이다. ()이란 정신을 말한다. 글씨를 쓸 때는 고요한 생각, 자기의 정신을 한 곳에 모아 그 야말로 정신을 통일시켜 잡념없는 생생한 기분으로 쓰지 않으면 안된다.

 

여덟번째로 생안(生眼)이다. 눈의 상태가 나쁘면 글씨를 쓰는데 많은 장애가 생긴다.

 

마지막으로 생경(生景)이다. 이것은 글씨를 쓸 당시의 주위 환경을 말한다. 날씨도 맑고 주위도 깨끗이 정리된 상태에서 글씨도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지켜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제적으로 이 아홉가지를 모두 갖춘 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이 아홉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노력한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서예는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가?

글씨를 배우려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방법과 단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함에 있어 만약 세부적인 계획이 없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문제는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글씨를 배울 때는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힘만 들고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 헛수고를 면할 수 없다.

글씨를 배울 때의 첫 단계는 붓을 움직이기 전에 준비 작업이 있어야 한다. 먼저 글씨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한 다음 서예에 관한 기초적인 책들을 읽어야 한다. 그런다음 비첩(碑帖)을 써야 하며, 어떤 글자들을 익혀야 하며, 어떤 붓을 써야 하며,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며, 올바른 자세와 글씨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만 헛수고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로는 곧 붓을 움직이는 초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배울 때 먼저 글씨체를 받아서 쓰면서 알맞은 비첩을 선택하여 임모(臨摹)를 하여야만 직접적으로 초학자들의 모방실력을 배양할 수 있다. 만약 시작하기가 좀 곤란하다면 먼저 기본필획에서 시작할 수 있다.예컨데 점. 횡획. .() .. () 등등을 익혀서 어떻게 붓을 대어 진행시켜 나가며 어떻게 붓을 거두는 가를 체득한다.

그러면 어떠한 서체에서부터 시작하여야만 옳은 길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서예계에서는 아직까지 이설이 분분하다.전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도 있으나 아무래도 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수월하다고 생각된다.그리고 해서를 시작할 때 당해(唐楷)나 위비(魏碑)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데 이는 개인의 상황에 근거를 두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세 번째 단계로는 해서의 기초가 비교적 착실하다고 느껴졌을 때 행서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주의할 점은 처음 해서를 배운 사람의 것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안진경의 해서를 썼으면 행서도 그의 것을 쓰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만일 글씨의 조화를 이루려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처음 배운 비첩과 같은 계열의 것을 쓰는 것이다. 현격하게 다른 것을 쓴다면 그 만큼 글씨의 진보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행서는 일반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성교서(聖敎序)나 난정서(蘭亭序) 혹은 이북해(李北海)의 이사훈비(李思訓碑)라든지 안진경(顔眞卿) 미불() 황정견(黃庭堅)의 행서를 쓸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행서가 이미 숙달된 상태에서 예서(隸書)나 전서(篆書)를 쓰는 과정이다. 예서는 한나라의 비를 쓰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든다면 사신비 ,장천비,예기비,을영비, 조전비, 등이 있다. 전서를 배우려면 먼저 소전을 배운뒤에 대전을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소전의 가로획이 가지런하고 세로획은 곧바르고, 둥근 획과 꺾어지는 획들이 손에 어우러지고, 짜임새를 쉽게 익힐수 있고, 붓을 자유스럽게 움직일수 있기 때문이다. 소전은 이사(李斯.이양빙(李陽氷) 등석여(鄧石如) 등의 서가의 전서를 공부한 뒤에 석고(石鼓) 갑골(甲骨) 등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이상의 여러 체를 골고루 습득한 후에 초서(草書)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초서는 반드시 장초(章草)를 먼저 써야 한다.왜냐하면 장초는 용필이 응련침웅(凝煉沈雄)하고 초법(草法)도 비교적 규범적이어서 초서의 필법과 초결(草訣)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상을 종합하여 말하면 글씨를 배우는 단계가 바로 초학자의 열쇠이며, 좋은 글시를 쓰느냐 못쓰느냐의 관건인 것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무시한다면 성공의 길로 가기에는 무척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기본이란 무엇인가?

ㅡ 인재 손인식 (서예가)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아주 다양한 것이 기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본을 필요로 하여 익히고 적용하며 또 활용합니다.

서예에도 특유의 기본이 있습니다. 먹을 갈고 붓을 움직여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곳곳에 그 나름 데로의 기본이 있습니다.

그 기본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기본의 쓰임은 항상 다릅니다. 가로긋기와 내려긋기가 다르고 한문서예와 한글서예의 기본이 다릅니다.

 

한문과 한글의 각 서체 또한 다 다릅니다. 기본이 다르니 결과가 달라야 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 이치를 어기지 않는 것도 기본입니다.

 

기본은 처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도 있고 마지막에도 있습니다. 하나의 선에도 있고 한글자의 구성이나 전체의 장법에도 있습니다. 첫 머리 표현기능을 좀 익혔다고 기본이 다 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서예의 기본 닦기는 매우 어려울까요?. 그렇습니다. 잘못 접근하면 매우 어렵습니다.

 

여기 저기 각 서체를 좇아가서 공식 외우듯 기본을 닦으려 하면 정작 기본은 저 멀리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바른 기본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기술좀 익히다가 지치는 경우가 이래서 생깁니다. 기능이 완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자꾸만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면, 기본은 처음부터 완성까지 펄펄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본은 의외로 쉬운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열려 있습니다. 기본을 열린 곳에서 열린 마음으로 찾으면 쉽지만 막힌 곳에서 닫힌 곳에서 고정된 생각으로 찾으면 평생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당나라의 해서에서, 왕희지의 난정서에서, 조선의 궁체에서 기본을 찾으려 하면 원하는 기본을 다 찾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완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은 완성을 지향합니다. 기본은 포괄적인 이해를 요구합니다. 기본을 아는 것이 기본이지만 진정한 기본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을 행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진정한 기본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기본은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합니다.

 

서예의 참다운 기본은 자기의 작품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느낌을 붓글씨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작품에 자기의 느낌은 없고 다른 사람의 방법과 느낌이 가득 차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기술만 있지 자기기본은 없는 것입니다.

 

기본이란 먹물이 모자랄 때 먹물을 찍을 줄 알고 갈필이 필요할 때 갈필을 내는 것입니다. 붓이 갈라지면 다스려야하고 반듯한 붓을 으깰 줄도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중봉과 편봉의 특성을 아는 것이 기본이고 진한 먹과 흐린 먹의 특성을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안다면 진정으로 기본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예의 기본은 실기와 이론을 함께 갖추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기에서 표현기능의 정복이 더디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론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 이론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기수련과정이 맹목적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심도가 있는 반복실험이 없이는 심오한 이론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이제 진정한 기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야말로 기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분명히 밝히건대 위에서 밝힌 '기본에 대한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그만 덮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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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용어

【ㄱ】

  • 가로쓰기-서제를 가로로 배열하여 쓰는 방법으로 글자의 윗 부분을 맞추어씀.
  • 가리개=곡병(曲屛)-두 쪽짜리의 병풍으로 물건을 가리건 구석 장식용 등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임.
  • 간가(間架)-점과 획의 간격을 조형적으로 알맞게 하는 것.
  • 간찰(簡札)-간지에 쓴 편지글.
  • 갈필(渴筆)-먹이 진하거나, 속도를 빨리 하여, 종이에 먹이 묻지 않는 흰 부분이 생기게 쓰는 필획.
  • 강약(强弱)-필획의 표현이 강하고 약한 정도.
  • 강호(强豪)-털의 성질이 강한 붓, 황모(黃毛), 낭호(狼豪), 서수(鼠鬚) 등으로 만들어진 것.
  • 개형(槪形)-글자의 외형(外形).
  • 결구(結構)-점, 획을 효과적으로 조화 있게 결합하여 문장을 구성하는 것.
  • 겸호(兼豪)-강모(强毛)를 호의 가운데에 넣고 두 종류 이상의 털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초보자에게 적합함.
  • 경중(經重)-필획의 표현 느낌이 가볍고 무거운 정도.
  • 경필(硬筆)-모필(毛筆)에 맞서는 말로서, 현대의 필기 도구인 연필, 볼펜, 만년필 등이 이에 속함.
  • 고묵(古墨)-옛날에 만든 먹.
  • 골법(骨法)=골서(骨書)-붓 끝으로 점획의 뼈대만 나타나게 쓰는 방법.
  • 골서법(骨書法)-체본 위에 투명지를 놓고 문자를 골법(骨法)으로 쓰고, 그 다음 붓으로 그 골서(骨書)를 따라 연습하는 방법.
  • 곡직(曲直)-필획의 표현이 굽거나 곧은 정도.
  • 구궁법(九宮法)-투명 구궁지를 체본 위에 놓고 보면서 다른 구궁지에 도형을 그리듯이 연습하는 방법.
  • 구궁지(九宮紙)-모눈이 그어진 습자지. 필획의 위치, 간격, 장단 등을 이해하기 쉽게 1칸을 가로로 3, 세로로 3으로 나누어 선을 그어 놓은 종이.
  • 금석문(金石文)-청동기나 돌에 새겨진 문자.
  • 금석학(金石學)-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
  • 기필(起筆)-점과 획의 시작으로 처음 종이에 붓을 대는 과정.

【ㄴ】

  • 낙관(落款)-서화(書畵) 작품에 제작 연도, 아호, 성명 등의 순서로 쓰고 도장을 찍는 것.
  • 노봉(露鋒)-기필(起筆)에 있어서 봉(鋒)의 끝이 필획에 나타나는 것.(→장봉)
  • 농담(濃淡)-필획의 표현이 짙고 옅은 정도.
  • 농묵(濃墨)-진하게 갈려진 먹물.
  • 농서법(籠書法)-체본 위에 투명지를 놓고 문자의 윤곽을 그린 후 붓으로 그 윤곽을 채우듯이 연습하는 방법.

【ㄷ】

  • 단구법(單鉤法)-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붓대가 지면과 수직이 되도록 잡고, 가운데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으로 안에서 받쳐 작은 글씨를 쓸 때의 붓 잡는 방법.
  • 단봉(短鋒)-붓의 털의 길이가 짧은 붓. 주로 회화용으로 쓰임.
  • 담묵(淡墨)-묽게 갈아진 먹물.
  • 대련(對聯)-세로가 긴 족자나 액자를 두 개로 하여 한 작품을 이루도록 한 것. 낙관은 좌측의 것에만 함.
  • 두인(頭印)-두인이라는 용어보다는 수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게 바람직하다.두인의 머리두는 두령,두목등 안좋은 의미에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수인(首印)

【ㅁ】

  • 마묵(磨墨)-먹을 가는 것.
  • 먹(墨)-나무나 기름을 불완전 연소시켜 만들어진 그을음에 아교와 향료를 섞어서 만든 서예 용재.
  • 먹색(墨色)-먹의 질과 농도, 운필 방법, 지질(紙質)에 따라 나타나는 먹의 색.
  • 먹즙-시판용 먹물로서 물을 섞어 사용. 부패를 막기 위해 방부제를 넣었으므로 붓의 털에는 좋지 않음.
  • 먹집게-먹이 닳아 손으로 잡고 갈기에 불편할 때 먹을 끼워 쓰는 도구.
  • 모사법(模寫法)-체본 위에 투명지를 놓고 위에서 투사하여 연습하는 방법.
  • 모필(毛筆)-동물의 털을 묶어 붓대에 끼워 쓰는 붓을 일컬음.
  • 묵상(墨床)-먹을 올려놓는 상.
  • 문방(文房)-옛날 문인(文人)들의 거실. 즉 서재(書齋)를 말함.
  • 문방사우(文房四友)=문방사보(文房四寶)-문방에 필요한 4가지 용구, 용재로서 종이, 붓, 먹, 벼루를 말함.

【ㅂ】

  • 반절(半切)←전지(全紙)
  • 반흘림-정자와 흘림 글씨의 중간 정도의 한글 서체.
  • 발묵(潑墨)-서화에서 먹물이 번지는 정도.
  • 방필(方筆)-기필과 수필에서 보가 는 방형(方形)의 필획으로 장중한 느낌이들며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한글 판본체에서 볼 수 있음.
  • 배세(背勢)-마주 보는 두 획을 안 쪽으로 휘게 쓰는 것으로 방필의 경우에 많이 나타나며, 구양순의 해서체에서 볼 수 있음.
  • 배임(背臨)-임서의 한 방법으로 체본을 보고 형임, 의임을 충분히 한 후에 체본을 보지 않고 연습하는 방법.
  • 배자(配字)-글자간의 사이를 아름답게 배치하는 것.
  • 백문(白文)-전각의 한 방법. 음각으로 새겨 도장의 문자가 희게 찍히는 것.
  • 법첩(法帖)-옛날의 훌륭한 글씨의 명적을 탁본하여 서예 학습을 위해 책으로 만든 것.
  • 벼루(硯)-먹을 가는 용구. 재료에 따라 옥연(玉硯), 목연(木硯), 도연(陶硯), 동연(銅硯), 칠연(漆硯), 와연(瓦硯), 석연(石硯) 등이 있음.
  • 병풍(屛風)-두 쪽 이상의 것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들어 세워 두는 것으로 원래는 실내의 바람을 막는 가구의 한 종류.
  • 봉(鋒)-붓의 털의 끝 부분으로 붓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
  • 봉니(封泥)-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전한(前漢)시대에 끈으로 엮어진 목편(木片)의 문서를 말아서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으로 찍은 것.
  • 봉서(封書)-궁중 내에서 근친이나 근신(近臣) 간에 전해지는 사사로운 편지글.
  • 붓말이개-붓을 휴대 할 때 붓의 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발.
  • 비문(碑文)-비석에 새겨진 문자.
  • 비수(肥瘦)-필획이 굵고 가는 정도.

【ㅅ】

  • 사군자(四君子)-매(梅) 난(蘭) 국(菊) 죽(竹)을 말함.
  • 사절(四切)←전지(全紙)
  • 서각(書刻)-글씨를 물체에 새김.
  • 서법(書法)-집필, 용필, 운필, 장법(章法) 등 서예 표현에 필요한 방법이나 법칙.
  • 서사상궁-조선 중기 이후 한글의 사용이 활발해지면서 궁중에서 교서(敎書)나 편지 등을 쓰던 상궁.
  • 서식(書式)-글씨를 쓰는 목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양식(樣式). 일상적인 것으로는 엽서, 일기, 노트 등이 있고, 예술적인 것에는 족자, 액자, 선면 등이 있음.
  • 서제(書題)-붓으로 글씨를 쓸 때 필요한 글귀. 옛날에는 스스로 지어 썼으나, 요즘은 명구(명구) 격언, 시, 시조, 고전 등에서 부분 또는 전체를 발췌하여 사용.
  • 서진(書鎭)=문진(文鎭)-글씨를 쓸 때 종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누르는 도구.
  • 서체(書體)-문자의 서사(書寫) 표현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형(形)과 양식(樣式). 즉,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등을 말함.
  • 서풍(書風)-같은 서체라도 사람에 따라 문자의 표현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 즉 서가(書家)의 개성.
  • 선면(扇面)-부채 모양의 종이.
  • 세로쓰기-서제를 세로로 배열하여 쓰는 방법으로 글자의 오른쪽을 맞추어 씀.
  • 세자(細字)-매우 작게 쓰는 글자.
  • 송연묵(松煙墨)-소나무의 그을음에 아교와 향료를 섞어 만든 먹.
  • 수인(首印)-서화의 앞부분에 찍는 도장.
  • 수필(收筆)-점, 획의 끝마무리 과정.
  • 쌍구법(雙鉤法)-붓을 잡는 방법의 하나. 엄지와 집게손가락, 가운데손가락 끝을 모아 붓을 잡고, 약손가락으로 붓대를 밀어서 받치고 그 약손가락을 새끼손가락이 되받쳐 쓰는 방법. 큰 글씨를 쓰는데 적합함.

【ㅇ】

  • 아호인(雅號印)-호를 새긴 도장. 주로 주문(朱文), 양각(陽刻)임.
  • 양각(陽刻)-글자를 볼록판으로 새기는 것.
  • 양호필(羊毫筆)-붓의 호를 양털로 만든 붓으로 성질이 부드러움.
  • 액자(額子)-틀에 끼워 표구하는 방법. 틀의 모양에 따라 횡액, 종액 등으로 나눌 수 있음.
  • 억양(抑揚)-한 글자를 쓸 때 좌우의 방향으로 자유롭게 운필하면서 필압의 변화를 주는 필획의 표현.
  • 여백(餘白)-종이에 먹으로 나타난 글씨나 그림의 부분이 아닌 나머지 공간.
  • 역입(逆入)-기필할 때에 붓을 거슬러 대는 방법.
  • 연당(硯堂)-벼루에서 먹을 가는 부분의 명칭.
  • 연적(硯滴)-먹을 갈 때 필요한 물을 담아 두는 용기.
  • 연지(硯池)-벼루에서 물이 고이는 부분.
  • 영인본(影印本)-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
  • 영자팔법(永字八法)-영자를 통해 한자의 기본 점획을 익히도록 만들어 놓은 운필방법 여덟 가지.
  • 예둔(銳鈍)-필획의 표현이 예리하고 둔한 정도.
  • 오지법(五指法)-붓을 잡는 방법. 다섯 손가락을 모두 이용하여 붓대의 윗 부분을 잡고 쓰는 방법으로 큰 글씨에 적합함.
  • 완급·지속(緩急·遲速)-붓이 움직이는 속도가 완만하고 급하며, 느리고 빠른 정도.
  • 완법(腕法)-글씨를 쓰는 팔의 자세. 현완법(懸腕法), 제완법(提腕法), 침완법(枕腕法)이 있음.
  • 용필(用筆)-점과 획을 표현하는 데 붓의 사용 위치에 따른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의 과정.
  • 운지법(運指法)-체본의 글자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듯이 연습하는 방법.
  • 운필법(運筆法)-붓을 움직여 가는 것, 즉 용필(用筆)에 따른 붓의 운행의 변화에 의해 필획이 표현되는 방법.
  • 원필(圓筆)-기필과 수필의 형이 둥근 원형의 필획으로 우아 유창한 기분이 들며 한글 판본체인 훈민정음 원본에서 볼 수 있음.
  • 유연묵(油煙墨)-기름을 태워서 생기는 그을음에다 아교와 향료를 섞어 만든 먹.
  • 유호(柔豪)-붓의 털이 부드러운 것.
  • 육절(六切)←전지(全紙)
  • 육필(肉筆)-손으로 직접 쓴 글씨.
  • 윤갈(潤渴)-먹의 농담, 속도에 의해 나타나는 필획이 윤택하거나 마른 느낌.
  • 음각(陰刻)-글자를 오목판으로 새기는 것.
  • 의임(意臨)-시각적인 자형(字形)보다 내면적인 정신을 좇아 임서하는 방법.
  • 인고(印稿)-도장을 새길 때 인면(印面)에 써넣을 글자를 구성한 원고.
  • 인구(印矩)-서화에 낙관을 할 때 도장을 정확하게 찍게 위해 사용하는 도구.
  • 인보(印譜)-도장을 찍어서 모아 엮은 책.
  • 인재(印材)-도장의 재료로서 옥, 금, 동, 나무, 돌 등이 있음.
  • 임서(臨書)-옛날의 훌륭한 법첩을 체본으로 하여 그대로 본 떠 써서 배우는 방법.

【ㅈ】

  • 자간(字間)-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
  • 자기비정(自己批正)-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학습 목표에 비추어 비평(批評) 정정(訂正)하는 것.
  • 자형(字形)-글자의 형. 점획의 굵기, 장단, 위치, 방향, 간격, 접필의 방법이나 위치 등에 의해 결정됨.
  • 장단(長短)-문자의 점획의 길이가 길고 짧은 정도.
  • 장법(章法)-글자를 배자하는 방법.
  • 장봉(長鋒)-붓 털의 길이가 긴 붓.
  • 장봉(藏鋒)-점획을 쓸 때 붓의 끝이 필획에 나타나지 않는 것(→노봉露鋒)
  • 장액필(章腋筆)-노루털로 만든 붓.
  • 전각(篆刻)-서화에 사용되는 도장에 문자를 써서 새기는 일이나 그 도장.
  • 전절(轉折)-획과 획의 방향을 바꾸는 것. 방향을 바꿀 때 모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전(轉), 모가 나게 하는 것을 절(折)이라고 함.
  • 전지(全紙)-화선지 한장 크기의 단위. 세로로 1/2자른 것을 반절, 전지의 1/4 1/6 1/8의 크기를 사절, 육절, 팔절이라고 함.
  • 절임(節臨)-비문이나 법첩의 부분을 택하여 임서하는 방법.
  • 접필(接筆)-글씨를 쓸 때 점과 획이 서로 겹쳐지는 것.
  • 정간지(井間紙)- 정서(淨書) 할 때 글자의 줄이나 간격을 맞추기 쉽게 줄이나 칸을 그어 깔고 쓰는 종이.
  • 정서(淨書)-체본을 보고 충분히 연습한 후 화선지에 낙관까지 양식에 맞게 깨끗이 쓰는 것.
  • 제완법(提腕法)-팔의 자세 중 하나. 왼손은 종이를 누르고 오른 팔꿈치를 책상 모서리에 가볍게 대고 쓰는 방법으로 중간 정도 크기의 글씨에 적합함.
  • 제자(題字)-文集, 시집 등과 같은 표제(表題)의 문자나 그 쓰는 방법. 형식이나 지면에 알맞게 써야 함.
  • 종액(縱額)-세로로 긴 액자.
  • 종이 받침-글씨를 쓸 때 화선지 밑에 먹이 묻어 나지 않게 까는 것으로 담요나 융을 주로 사용.
  • 종획(縱劃)-세로로 긋는 필획.
  • 주묵(朱墨)-붉은 색의 먹.
  • 주문(朱文)-양각으로 새겨 도장의 문자가 붉게 찍히는 것.
  • 중봉(中鋒)-행필에서 붓의 끝이 필획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중봉을 이루기 위해 지켜야할 사항
  • 직필(直筆)-붓대를 지면에 수직으로 세워 쓰는 것.
  • 진흘림-한글 서체의 한 종류로서 흘림의 정도가 가장 심하여 글자와 글자까지도 서로 연결해 쓸 수 있는 방법.
  • 집필법(執筆法)-손으로 붓을 잡는 방법. 쌍구법, 단구법, 오지법이 있음.

【ㅊ】

  • 첨삭(添削)-교사가 학생의 작품을 목표에 따라 고치거나 보완해 주는 것으로 주로 주묵(朱墨)을 사용해서 함.
  • 체본-서예 학습에서 임서를 할 때 본보기가 되는 글씨본.
  • 측봉(側鋒)=편봉(偏鋒)-붓의 끝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행필하는 것(→중봉)
  • 침완법(枕腕法)-팔의 자세로 왼손을 오른손의 베개처럼 받치고 쓰는 방법. 작은 글씨를 쓰는 데 적합.

【ㅌ】

  • 탁본(拓本)=탑본(榻本)-돌, 금속, 나무 등에 새겨진 문자나 문양 등을 직접 종이에 베끼어 내는 것.

【ㅍ】

  • 파세(波勢)=파책-예서의 횡획의 수필에서 붓을 누르면서 조금씩 내리다가 오른쪽 위로 튕기면서 붓을 떼는 방법. 예서의 특징임.
  • 판본체(版本體)-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모양을 본든 글씨체로 목판에 새겨진 문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 팔절(八切)←전지(全紙)
  • 표구(表具)-서, 화 작품을 액자나 족자 등으로 감상할 수 있게 모양을 갖추어 아름답게 꾸미는 일.
  • 필맥(筆脈)-필획의 뼈대.
  • 필방(筆房)-서예에 필요한 여러가지 용구를 파는 곳.
  • 필법(筆法)-운필과 용필을 통틀어 일컫는 말.
  • 필사(筆寫)-문자를 직접 써서 베끼는 것.
  • 필산(筆山)-쓰던 붓을 얹어 놓는 용구.
  • 필세(筆勢)-운필의 세기.
  • 필세(筆洗)-붓을 빠는 그릇.
  • 필속(筆速)-필획을 긋는 속도.
  • 필순(筆順)-필획을 긋는 순서.
  • 필압(筆壓)-붓의 압력, 즉 누르는 힘.
  • 필의(筆意)-운필에서 점, 획의 상호 간에 보이지 않는 연결성.
  • 필적(筆跡)-붓으로 쓰여진 문자나 그 문자가 실려 있는 책이나 문서.
  • 필획(筆劃)-붓으로 그은 선.

【ㅎ】

  • 항간(行間)-여러 줄의 글씨를 쓸 때 줄과 줄 사이의 간격.
  • 행필(行筆)-송필(送筆)-점과 획이 기필에서 시작되어 나아가는 과정.
  • 향세(向勢)-마주 보는 두 획을 서로 바깥쪽으로 부푼 듯이 휘게 쓰는 것으로 원필의 경우에 나타나며, 안진경의 해서체에서 많이 볼 수 있음.
  • 현완법(懸腕法)-팔의 자세로 왼손으로 종이를 가볍게 누르고 오른쪽 팔꿈치를 지면과 나란하게 들고 쓰는 방법으로 큰 글씨나, 중간 정도 이상의 글씨에 적합함.
  • 현판(懸板)-횡액의 형식을 말하기도 하고 서각(書刻)된 것을 일컫기도 함.
  • 형임(形臨)-자형(字形)에 치중하여 사실적으로 임서하는 방법.
  • 호(豪)-붓의 털.
  • 혼서체(混書體)-판본체에서 궁체로 변해가는 과정에서의 한글 서체의 한 종류.
  • 화선지(畵仙紙)-書, 畵 전문 용지로서 보통 전지 한장의 크기가 가로 70㎝,세로 130㎝ 정도임.
  • 황모필(黃毛筆)-족제비 털로 만든 붓.
  • 횡액(橫額)-가로가 긴 형의 액자.
  • 횡획(橫획)-가로로 긋는 필획.
  • 흘림-정자의 점과 획을 서로 연결하여 쓰는 한글 서체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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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현서법(八玄書法)에는 여덟가지 붓놀림이 있는데 

 

①역기(逆起), ②륙낙(衄落), ③돈산(頓散), ④역행(力行), ⑤주류(住留), ⑥좌침(挫沈), ⑦돈리(頓離), ⑧제수(齊收)로 나누어 글쓰기의 기능성을 강조한 반면, 

 

우리가 서예학원에서 배울 때 일반적으로

영자팔법(永字八法)이란 이론이 있다. 

 

영자팔법의 이론은 엄밀히 말해서 글자의 구조나 모양성을 나타낸 것이지 

붓을 펴고 쓰고 하는 기능성의 서법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팔현서법은 점(点)하나를 쓸 때 붓을 종이에 대는 시작부터 붓을 눌리고, 

다시 붓을 세우고, 붓을 끗고, 붓을 머물고, 붓을 들고, 붓을 꺽고, 붓을을 거두고, 하는 것이 

글자의 모양 보다는 그 기능과 서법의 원리 원칙을 열거하고 순서있게 중복 시킴으로써 글자를 만들어 내기에 

이 팔현서법의 여덟가지 기능만 익히면 세상의 어느 글자도 다 쓸 수 있게 되는데 반해 

일반적으로 소개된 영자팔법(永字八法)은 길영(永)자가 갖고 있는 가지 가지의 모양세를 나타 내기위해 한자로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팔현서법은 글씨 쓰기의 근본원인과 기능성을 말한데 반해 영자팔법은 글씨의 결과인 모양이나 뽄대가리에 치중한 글씨의 구조적 형체를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 영자팔법은 글씨를 열심히 쓰면 나타나는 결과이지 서법의 원리는 아니다. 

 

팔현서법이 점(点)에서 시작되는 기법과

영(永)자 팔법에 대한 서법의 비교 

 

八點書法 

점(点)하나에도 여덟번이 서법이 들어가서 중첩된것이 이 팔점서법이다. 

 

永字八法 

길영(永)자 전체에 8덟가지 모양이 나와야 한다는 서법이론이다. 

 

그러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팔점서법으로 길영(永)자를 쓴다면 어떻게 되며, 

몇가지의 서법이 들어가야 하나 한번 열거 해 보기로 하겠다. 

 

처음 점을 찍을 때 역기(逆起). 륙낙(衄落), 돈산(頓散), 역행(力行), 주류(住留), 좌침(挫沈), 돈리(頓離), 

다시 역행(力行), 주류(住留), 좌침(挫沈), 돈리(頓離), 제수(齊收) 

다시 역기(逆起), 륙낙(衄落), 돈산(頓散), 역행(力行), 주류(住留), 좌침(挫沈), 역행(力行) 하면서 제수(齊收) 

다시 역기(逆起, 륙낙(衄落), 돈산(頓散), 역행(力行) 하면서 제수(齊收), 

다시 역행(力行), 역기(逆起), 륙낙(衄落), 돈산(頓散), 역행(力行) 하면서 제수(齊收) 

이렇게 ⓐ의 팔현서법의 길영(永)자에는 31번의 서법의 법체가 들어가게 된다. 

 

혹자는 이렇게 많이 법수가 들으가니 더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여덟번의 법수만 알고 익힌다면 이 팔법으로 모두 연결되는 것이니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며 

글씨 쓰기가 능해 질 수록 법수를 하나하나 생략해 가면서 자기나름대로의 서법체를 익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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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의 관직들. 중국관직에대해서 조금 알아보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하던 관원. 진(秦)나라 때 간대부 (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로 개칭하여 황제의 고문과 응대 등을 맡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 원래 한무제(漢武帝)때 비롯된 공신(功臣)의 명호 (名號)였으나 후한시대에 표기장군(驃騎將軍) 다음가는 무관직이 되었다.

 

공부시랑(工部侍郞)

 

공부는 산택(山澤),영조(營造),공장(工匠)등을 맡아 보는 관청. 시랑은 이관청의 두번째 벼슬이다. 원래 임시직이었으나 수나라 때 상설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조정의 고문직. 진나라 때 9경(卿)의 하나인 낭중령(郎中令)의 속관으로 설치된 것이 한무제 때 광록훈(光祿勳)의 속관으로 마련되었다. 종2품의 관직 으로 실권은 별로 없었다.

 

교위(校尉)

 

둔병(屯兵)을 맡아 보는 관직. 한무제 때 성문교위(城門校尉)와 사례교위(司隷校尉)의 두 교위가 처음 생겨 녹봉 2천석을 받았는데, 그 후 차차 무관직으로 변하여 한직(閑職)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광록훈(光祿勳)에 속하여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의 관직. 한무제 때 비롯되었는데 훈공에 따른 일종의 세습직이었다.

 

낭관(郎官)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때에는 시랑(侍郞)과 낭중 (郎中)을 낭관이라 했으나, 당나라 이후 낭중과 원외랑(員外郞)을 낭관이라 칭했다. 한나라 때에는 상서(尙書;장관)의 보좌를 겸했고 후에 각 사(司)의 직무를 주관했다.

 

녹상서사(錄尙書事)

 

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 후한 장제(章帝) 때 태부(太傅)와 태위(太尉)에게 이 직무를 겸하게 하는데서 시작되어 화제(和帝) 때 이후 상설 기관이 되고,그 관위(官位)는 삼공(三公) 위에 있었다.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그를 대신하여 집정하고 재상직을 겸했다.

 

대사농(大司農)

 

중앙 관직인 9경(卿) 중의 하나. 현재의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서 녹봉은 쌀 2천 석이었다.

 

대사마(大司馬)

 

원래 대장군(大將軍)과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주어지던 칭호. 한무제 때 그 지위는 승상(丞相) 위에 있었다. 그 후 애제(哀帝) 때 승상의 이름을 없애고 대사도(大司徒)라 칭했으나 여전히 대사마의 지위는 대사로 상위에 있고 대 사공(大司公)과 함께 삼공(三公)이라 칭하여 최고의 정무장관(政務長官) 위 치에 있었다. 그 후로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 대사마를 태위(太尉)로 개칭하 고 다른 두 관원, 즉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삼공이라 칭했다.

 

대장군(大將軍)

 

최고의 무관직. 후한 때 이 직위가 처음으로 설치되어 삼공(三公)보다 상위 에 놓았으나 수나라 때에 이르러 한직이 되었다.

 

대홍로(大鴻로)

 

외국의 빈객(賓客)과 귀순한 외이(外夷)를 맡아보던 관직. 원래 전객(典客)이라 하던 것을 한무제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도독(都督)

 

위문제(魏文帝)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활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관명이 아니라 산관(散官)의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독우(督郵)

 

한나라 때 태수(太守),군수(郡守) 등의 보좌관으로 설치된 관직. 각 현(縣)의 행정 감독을 주 임무로 했으나 당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위장군(武衛將軍)

 

궁정의 경비를 주임무로 하는 무관직. 즉 무위영(武衛營)의 대장으로서 한나라 시대에 비롯 되었다.

 

미인(美人)

 

한나라 시대의 여관(女官) 계급. 녹봉은 2천 석으로서 명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별가(別駕)

 

각 주(州) 자사(刺史)의 보좌관. 한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언제나 자사를 따라다니며 주내를 순찰했기 때문에 이 명칭이 생겼다. 정식 명칭은 별가종사사(別駕從事使)로 한때 장사(長史)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복야(僕야)

 

관청의 주인, 또는 장(長)의 직위. 진나라 때 시작되어 한나라로 계승되어 군인, 궁인(宮人)상서(尙書), 박사(博士) 등에 모두 복야가 있었으나, 그 후상서복야 외에는 모두 폐지되고 이것만이 전문직이 되었다.

 

봉거도위(奉車都尉)

 

천자 측근에서 수레에 배승(陪乘)하는 무관직. 한무제 때 시작되었는데 녹봉은 2천 석이었다.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감(秘書監), 비서령(秘書令), 비서승(秘書丞) 등의 명칭으로 개칭되기도 했는데 명문 자제 중에서 등용했다.

 

영군(領軍)

 

호군(護軍)과 함께 근위병을 지휘하던 무관직. 위나라 조조(曹操)가 처음으 로 이 관직을 설치했다.

 

의랑(議郞)

 

낭중(郎中)에 소속되어 평의(評議)에 참가한 고문직. 진나라 때 폐지되었다.

 

자사(刺史)

 

칙령으로 각 주군(州郡)의 장(長)을 감찰하던 관직. 한나라 초에 설치되었으며, 후한 시대에 이르러 지방 행정의 변천에 따라 그 호칭이 여러 번 변했다 . 위진(魏晋) 시대에 자사는 주목(州牧)과 동격이 되어 지방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다.

 

장사(長史)

 

진한(秦漢) 때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둔 관직. 또 이와는 별도로 진나라 때의 지방관으로서 군수의 속관으로 이 관직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변경에 있는 군의 군승(軍丞;부군수격)으로 이 직위를 두었다.

 

전농(典農)

 

후한 말기에 중원(中原)에 두었던 관직. 식량의 징수와 감독을 담당했는데 대사농(大司農) 휘하에 있었다.

 

전장군(前將軍)

 

대장군에 속한 일곱 장군의 하나. 선봉을 맡은 장군으로 녹봉은 2천 석이다.

 

절충교위(折衝校尉)

 

징발된 군사를 맡아보던 무관직.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조조의 장수 악진(樂進)이 절충장군이 된 데서 비롯된 관직이다.

 

종사(從事)

 

보좌관에 대한 총칭. 한나라 때 자사(자사)의 속관이던 별가(別駕)ㄳ치중(治中)공조(功曹) 등이 모두 종사였고, 또 각 부(部)군(郡)국(國)에도 종사가 있었다.

 

종정(宗正)

 

진한(秦漢)때의 9경(卿)의 하나. 황실에 관한 제반 사무를 통할하던 벼슬로 원칙적으로는 황족(皇族)이 이에 임명되었다. 진(秦) 때에는 외척도 그의 통할을 받았다.

 

좌장군(左將軍)

 

대장군에 속한 일곱 장군의 하나. 녹봉은 2천 석이었다.

 

주부(主簿)

 

정부 각 부처의 문서와 부적(簿籍)을 맡아보던 관직.

 

중랑(中郞)

 

중랑장의 별칭.

 

중랑장(中郞將)

 

진한(秦漢) 때 궁중의 경비를 맡던 낭중령(郎中令)에 속한 오관서(五官署)좌서(左署)우서(右署)의 대장. 지위는 장군 다음가는 것으로서 중랑이라고도 불렀다. 후한말에 이르러 동서남북의 중랑장이 증설된 때에 호분(虎賁)과 사흉노(使匈奴)의 중랑장이 있었다.

 

중서(中書)

 

한나라 무제 때 궁중의 의전(儀典)과 문서를 맡아보기 위해 설치한 관직. 처음에는 환관 중에서 임명했으나 후에 중서령(中書令)이라 개칭하여 궁중의사무에 관한 일을 통괄하게 하고 환관의 임명을 중지하고 일반인으로 이 직책을 맡게 했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중서감(中書監)과 중서령(中書令)의 직제를 마련하여 궁중의 기밀 문서를 맡아 보게했다.

 

집금오(執金吾)

 

궁성 주위를 순시하며 경비를 맡던 무관직. 녹봉은 2천 석이었다.

 

태복(太僕)

 

왕명의 전달과 시종직을 주무로 하던 관직. 진한(秦漢) 시대부터는 9경(卿)의 하나로서 천자의 어가(御駕)와 어마(御馬)의 관리를 맡는 직책으로 바뀌었다.

 

태부(太傅)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주(周) 시대에 태사(太師)ㄳ태부ㄳ태보(太保)의 삼공(三公) 중 두변째 고위직이었으나 진(晋) 시대 이후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태사(太師)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최고의 관직. 주(周) 시대의 삼공(三公)의 하나로 설치되어 주로 지육(智育)을 담당했다. 진(晋) 시대 이후 삼공은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전환 했으나, 어느 왕조에서나 최고의 현직으로 예 우 했다.

 

태상(太常)

 

9경(卿) 중의 하나로서 의전(儀典)을 맡아 보던 관직.

 

태수(太守)

 

지방의 군(郡)을 다스리던 관직. 원래 군수(郡守)라 칭하던 것을 한나라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그 후 역대 왕조가 이 직책을 두었으나 송나라 이후에 는 군을 부(府)로 개칭했기 때문에 지부(知府)로 명칭을 바꾸었다.

 

태위(太尉)

 

삼공의 하나로 삼공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으며, 전국 최고의 군사장관으로, 모든 군사를 장악하였따. 동한의 태위는 실질적인 승상이었따. 항 때 대사마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동한 영제 말년에 다시 태위를 대사마와 함께 두었다. 제 1품이었으며, 녹봉은 1만석이었다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직책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태보(太子太保)와 함께 동궁 삼사(東宮三師)로 불리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단순한 예우용 직함으로 변해 태자와는 아무 관도 없게 되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궁중의 의론(議論)을 맡아보던 관직. 진(晋)나라 때 비롯되었으나 수나라 이후부터 단순한 산관(散官)이 되고 말았다.

 

표기장군(驃騎將軍)

 

대장군 다음가는 무관직. 일곱 장군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녹봉은 4천 2백 석이었다. 수나라 때는 응양랑장(膺揚郞將)으로 명칭이 바뀌어 차차 권한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무산계(武散階)의 명칭으로 화했다.

 

하남윤(河南尹)

 

수도를 다스리는 행정관. 하남은 수도 낙양(洛陽)을 말하고 윤은 행정 책임 자를 가리킨다.

 

행군사마(行軍司馬)

 

장군의 보좌관. 한나라 때 설치되어 부내(府內)의 사무를 총괄하는 한편 출정 때는 참모가 되어 장군의 부직(副職)이 되었다. 별명을 군사마(軍司馬)또는 군사(軍司)라 칭했으며,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출정할 때 장수(將帥)및 절도사(節度使) 밑에 반드시 행군사마가 있어 군대의 요직을 차지했다.

 

현승(縣丞)

 

현령(縣令)의 보좌관. 현은 군(郡) 다음가는 행정 구역으로 한 군에 10정도 의 현이 있었다. 그 장관을 현령, 그 다음을 현승이라 했다.

 

현위(縣尉)

 

현(縣)의 치안을 맡아 보던 관직. 후에 전사(典史)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주(周)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近衛官)으로 출발한 관직. 한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을 호분중랑장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 이후 이 칭호가 남용되어 무게를 잃어 가다가 당나라 때는 중급 장교정도의 지위로 떨어졌다.

 

황문상시(黃門常侍)

 

환관을 가리키는 말. 원래 황문이란 궁문(宮門) 또는 궁서(宮署)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한 시대에 이르러 환관을 가리키게 되었다.

 

효기교위(驍騎校尉)

 

무관직의 명칭. 한나라 초에 설치했던 직책으로서 기병을 지휘하는 교위직이었다. 수나라 이후 폐지되었다.

 

 

한나라 관직체계

 

황제 ─ 태위, 사도, 태공 (3공의 직) 

│ 

│ 

├── 사례교위 - 경시총감 

├── 사성교위 - 저격병사령 

├── 장수교위 - 호족부대사령 

├── 보병교위 - 이궁경비사령 

├── 월기교위 - 월족부대사령 

├── 둔기교위 - 기병대사령 

├── 성문교위 - 성문경비사령 

├── 대장추 - 황후시종장의 

├── 장작대장 - 궁전황릉의 영선 

├── 집금오 - 수도의 치안유지 

├── 종정 = 궁내대신 - 황족사문 

├── 대사농 = 대장대신 - 황실재정 

├── 소부 = 내무대신 - 황실개정 

├── 대항로 = 변경대신 - 주위제주과 외 외교 

├── 영위 = 사법대신 - 사법 

├── 태복 = 행행대신 - 차마관리 

├── 위위 = 황궁경찰장관 - 궁문경비 

├── 광록훈 = 근위대신 - 황제의 신변경호 

└── 대상 = 의전대신 - 국가종묘 외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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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오려나 / 공석진

 

보일 듯 말 듯

솜털 갯버들

가물어 지친 개울에

비 내리면

만개하려나

혹독한 겨울 지나

으스스히 부는

꽃샘바람쯤이야

마음 너그러지면

사랑이 오려나

쑥쑥

,이 봄에

몸이 마르는 소리


겨울 끝에서 / 김용호

 

더디게 오는 봄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 내부에는

주기적으로

봄의 그리움이 생성되었습니다.

이 모양 없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지난해의 봄이

내 기억 속에 쉼 없이 깜빡거립니다.

지난해 민들레꽃 피는 고샅길을

아장아장 걸었던 노랑 병아리처럼

겨울 끝에서

봄이 아장아장 걸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초롱꽃 / 初月 윤갑수

 

수줍어 고개 떨군 서글픈 초롱꽃

바람에 종소리 젱그렁

울릴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삽 다리 건너온 햇살은

얼굴 비추건만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땅 끝 세상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만 아른거릴 뿐이다.

 

파도 같은 사랑 / 초암 나 상국

 

그대와 나 사이 밀물과 썰물은 늘 불규칙하게

그렇게 왔다가 갔다

파도가 높이 칠수록 바다는 넓어졌고

내 사랑은 점점 더 야위어만 같다

 

사랑이라는 걸 알았을 땐 / 초암 나 상국

 

바람이 흔들고 간 자리 꽃 향이 그윽합니다

언제나 응달지던 자리에 어느 날부터

햇볕이 들기 시작 하였고

설레이는 마음 처음에는 정확히 그 감정이 뭔지를 잘 몰랐습니다

아니 애써 무관심 한 척 외면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외면하려 할수록 깊어가는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햇빛이 사라지고 또 다시 응달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알았습니다

때 늦은 후회가 밀려들면서 가슴을 저리도록 난도질을 합니다

 

행여나 / 초암 나 상국

 

행여나 그대 오려나 기린의 모가지로 기다리며

그리움으로 지새운 나날들 그 얼룩 위로 이젠

두께를 알 수 없는 먼지가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채석강처럼 쌓여

무너져 내릴 듯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오늘을 살며

행여나 그대 오는 길

잊지는 않았는지....

이별 후에 / 초암 나 상국

 

된서리 맞은 듯 바삭하게 말라버린 마음의 상처

차라리 흰눈이라도 내려서 모든 기억을

백지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사랑이라는 덫 / 초암 나 상국

 

뿌리칠 수 없는 그대의 매혹적인 유혹의 덫에 걸려

보이지 않는 오라 줄에 묶여 사랑의 포로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여도 좋으리

그대의 품 안에 안주하여 그대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만 있다면

그대의 덫에 걸려주리라

 

누드화 / 초암 나 상국

 

그녀는 예뻤다 원초적 사랑을 위해서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

허울 좋은 망상도 때 묻은 사치도 벗고 신비에 휩싸여 있었던

자존심마저 벗으니 더는 버릴 것도 애써 가릴 것도 없었다

 

사랑은 그런거더라 / 초암 나 상국

 

널 죽도록 사랑하는데 넌 나의 사랑은 쳐다도 보지않고

넌 널 외면하는 사랑에 목을 메더라

우리 같이 서로를 사랑하면 좋을텐데

사랑은 그런거더라 이기적인 사랑에 눈이 머는 거

 

눈 오는 밤에 / 초암 나 상국

 

눈 오는 밤에 창문 넘어 먼 산을 바라보니

오랫동안 잠 못 이루며

베갯잇 적시었던 사랑이 불현듯 되살아나

텅 빈 가슴속으로 눈처럼 다복다복

수북이 쌓이어만 간다

보고 싶다 / 초암 나 상국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을 하니 보고 싶은 그녀가

팽구르르 춤을 춘다

실컷 보라는 듯 만저보고 싶다

생각을 하니 날 잡아 보라는 듯

자취를 감추네

깨고 보니 꿈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사랑타령 / 초암 나 상국

 

사랑은 주고받는 거라는데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애도 아니면서 어리광을 부리듯

나만 바라봐주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해 줄 것을

바라며 보이지 않는 오라 줄로 꼼짝 못 하게

얽어맨 것은 아닌지 몰라

사랑타령도

정도껏 해야 하는데

 

진짜 친구 / 성백군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만

우리는 모두 세상 삶 동안에

진짜 친구 하나씩 가지고 산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십오 분을 견디겠다고 900번을 세는데

처음에는 일 초에 숫자 하나씩 느긋한데

시간이 갈수록 열이 오르고 땀이 나오고……,

견디기가 힘들면 셈이 빨라진다

십 분에 900번으로 끝난다

 

피곤한데

엄두가 나지 않는데

몸살감기로 아파 죽겠는데

이미 그 모임에 사회를 맡았으니 가야 한다고

비틀거리며 따라나서는 몸

 

사람아, 세상에 속아

친구 같은 것은 없다고 친구를 부정하는 사람아

네 안에 있는 몸과 마음

그만한 친구가 어디 있는가?

가짜 친구에게 속아 진짜 친구를 홀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느니, 그게

평생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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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진 시 모음 50편

《1》
가을 사랑 고백

공석진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던
어느 가을날 오후
메모가 적힌 시집 한 권
등기 우편으로 보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면
낙엽 한장씩
책갈피에 꽂아 주세요'

밤사이 바람이 불어
그대 흔들릴 것 같아
낙엽 잔뜩 모아
다시 소포로 보내 주었다

《2》
가을 숲으로 가자

공석진


숲으로 가자
상처뿐인 빈자리
아파서
많이 아파서
신음하는 숲으로 가자

바람 이는 소리에
행여 임이 오실까
하얗게 새는 밤
동 터 오는 새벽
사랑은 절망한다

하도 그리워
파리해진 낙엽
정이 땅에 떨어져
숨죽이는 숲에
입 맞춘다

입술 깨물며
조붓이 닫히는 숲
길 떠나지 못하는
슬픈 가을
숲으로 가자  

《3》
가을 유감

공석진

낙엽이 지네
서러움이 밀려오네
치열했던 사랑이
갈빛으로 스러지네

그리 가려면
쉽게 오지나 말지
그리움에 치를 떨어
목놓아 울게 하나

회한悔恨만 남기고
멈추어 선 시간 앞에
가슴에 남긴 틈을
상처로 비집고 들어서나

화려한 축제가 끝난 뒤
사무치는 고독은
떨어지는 낙엽으로
이리저리 해매이고

가물가물 나락에 빠지듯
이미 중독된 그리움은
절망이 뒹구는 가을 뒷켠
커피향 가득 머금은 채

작별 인사도 없이
하얗게 잊혀진
사랑으로 가고 있네
추억으로 가고 있네 

《4》
가을걷이

공석진

태양은 중천을 넘어서
가을걷이에 분주한 황금 들녘
추억을 베고 행복을 턴다

다들 흥에 겨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이면
이 순간 만큼은 나라님이 부럽지 않네

하지만 걷어야 할 것이
어찌 알량한 곡식 뿐이랴
스쳐 지나는 옷깃도 걷어야 하거늘

골수로 사무치는 회한도
심장에 파고드는 그리움도
차가운 가슴으로 묻어야 하리

어찌 무심하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장단에 흥에만 겨워
절정의 가을을 보낼 것이냐

볏단을 태워 흔적을 지우듯
한 맺힌 응어리를 털어내어
가을을 걷으리니

무진 힘들게 하던 애증도
고독으로 빚은 술로 위로하여
들판에 눈물을 뿌리리라  

《5》
가을전송

공석진

가을을 전송합니다
화려함 남겨두고
빛 바랜 옛 추억을
나들 길로 보냅니다
고독을 만끽하세요
위태로운 정이 매달린
험한 비탈 위
정처 없는 낙엽으로
이별을 강요하신다면
수신을 거절하렵니다
발신자도 없는
이름뿐인 천사
언제든 떠나려는
배낭 짊어진
당신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누워
아릿하게 남아있는
바람꽃 향기를
추억하렵니다  

《6》
감악산 단풍

공석진

선홍의 자태로 유혹하고
황금빛 정염이 샘늪을 덮치면
일엽관음이 부럽지 않다

벅차오는 숨을 고르며
빠져드는 남정은
점입비경에 숨이 멎는다

어차피 지고 말 운명이라도
온갖 욕정, 바람에 실어
세속 만물을 탐하리

빛 고운 화장으로 단장하여
정신 혼미한 오르가슴 느끼다가
나락으로 떨어져 해탈의 다리를 건너

격렬한 정사에 상한 몸
법당 앞 석탑에 기대어 앉아
옛 절정을 더듬는 잠을 청한다

탄식하는 목탁 소리 우울하여
이승의 고갯마루를 저물도록
알몸으로 배회하다가

허름한 종루 한구석에 안장되어
합장하는 스님 눈가에 이슬 고이면
감악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7》
감악산 한우

공석진

정수리에
심장에 국부에
맥을 끊어 놓겠다는
일제의 쇠말뚝질

뜯겨진 생살
감악산 등허리
허연 뼈가
아프게 도드라지고

코청을 구멍 내
급소 다친 한우
씹어도 씹어도
바람들어 푸석푸석하다 

《8》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9》
광덕산

공석진

모여라 모다 모여라
풍후한 정 넘치는
광덕(廣德) 가슴 복판
찬바람 비운 자리
마음 맞추면
우정 쏟아진다지

외암(外巖) 초가에
분홍꽃비 내려
모여든 즈믄 아이
꽃샘 미룬 자리
눈 맞추면
사랑으로 머문다지

하냥다짐 각오하는
절박한 벗이여
노란 리본 매단
겨운 청솔가지
하나된 그리움 여럿
세파 이길 큰 힘 된다지

《10》
나무

공석진

길가
나무 두 그루

같은 날
같은 나이로
심어졌을 텐데

한 놈은 튼실하게
한 놈은 비실하게

너 때문이다
그늘만 없었다면

원망 마라
찌는 태양
갈증이 더할수록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이다

깨죽대는 놈에게
일갈을 한다

게으른 자여
내 그늘에 눕지 마라  

《11》
나에게 나를 묻다

공석진

그대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악어 소굴로
뛰어드는 누우입니다

그대여 사랑을 아는가
나만을 사랑하려
철옹성을 구축하여
다가오는 사랑에
화살을 퍼붓는 겁보입니다

그대여 길을 가는가
까마득한 숲에서
언제나 같은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 바람입니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어서 가보게
그대의 가슴으로  

《12》
낙엽유감

공석진

낙엽을 맞으며
이별을 한다
이별을 준비하며
낙엽을 밟는다

보지 않기 위해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고개 숙인다
뒷모습 감춘다

때마침 가을비 내려
낙엽 우수수 떨어져
갈색 이별을 재촉한다
우리 이제 헤어져요

지난 여름
뜨거웠던 사랑
빛 바랜 추억
낙엽에 입 맞춘다 

《13》
늙는다는 건

공석진

늙는다는 건
나를 비우는 것이다

머리를 비운 기억상실
가슴을 비운 욕망상실
뼈를 비워 아픈 바람을 맞으며
살은 점점이 분해되어
허공으로 비산飛散하는 것

늙는다는 건
살아서 몹시 그리운 사람
저승에서 만날 수 있을까
서러움보다는 설레임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나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새벽을 맞이하는 것

아, 오그라져 바스라져
폐기직전의 해골 닮은 나를
그대는 기억할 것인가
잊혀지는 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터럭 같은 인생
무거운 몸으로 신세를 지느니
물 위에 소금쟁이처럼 가벼워져도
영육이 자연스레 해체되어
완벽하게 환생할 수 있도록
내 사랑을 위하여
오래오래 살아야 할 일

《14》
늦가을의 상념

공석진

밤사이 비바람 몰아치더니
하늘이 뿌연 부유물을 걷어내고
예쁜 미소를 보냅니다

키 높은 구름이 바쁘게 흘러가고
길가 코스모스는 목 아프게
구름을 좇아갑니다

어느새 내 마음도 님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가을은 종종걸음으로
산 중턱을 넘어섭니다

호수알 눈동자
해맑은 미소
보석같은 님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워

뼈마디 삭이는 추억으로
입술 깨물며 조촘조촘
늦가을의 상념에 빠져봅니다. 

《15》
다 왔어

공석진

산을 가다 보면
일행이 길을 묻곤 한다
"얼마나 더 가?"
"다 왔어"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길
힘들어도 갈 수 있다
포기하지 않게
가자! 가자!
희망을 다독이는 말
'다 왔어'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고
나중에는 허탈하지만
지칠 땐 어떤 말보다
힘이 되어 주는 말
'다 왔어'

《16》
대둔산

공석진

삼선바위 기암괴석
비경에 탄성 발하노니
보아라
숨 멎는 남도 금강이여

하늬바람 구축하는
청운에 심신 누이려니
가거라
숨통 조이는 티끌이여

선녀 몸 감은
낙수에 정맥 식히려니
쉬거라
숨 가쁘게 뻗어 오던 백두여

깎아지른 벼랑 휘가르는
석양에 울혈 버리려니
오거라
속세 상념의 소용돌이여

목하 마천대 딛고
천지 덮는 운무 걷으려니
기사회생하거라
파국 답파하는 대둔이여! 

《17》
동치미

공석진

동치미는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다

연탄가스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생사의 갈림길에도

힘 겨루기로 머리 자근거려
골치 썩는 고부갈등도

한 사발 복용하기만 하면
위력적으로 퇴치한다

허구한 날 배가 고파
흙이라도 퍼먹던 시절

뒷간을 수시로 드나드는
원인 모를 생배 앓이도

뱃속 회충의 요동조차
간단히 잠재우는 약

당당히 약방 선반 위 자리잡아야 할
신비의 명약이다  

《18》

등산길

공석진

나를 앞서 가는 뚱뚱한 사람은
어제 어리숙한 고객을 만났는데
잘 하면 돈 좀 되겠다며
간식으로 육포를 씹으며
자기는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살이 안찔 수가 없다고

옆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다니는 골프연습장에
눈도장 찍은 아줌마하고
술 약속을 했는데
친구 분양해서 같이 만나자고
키득키득 웃어대고

내 뒤따라오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정치하는 사람들
주위 동료 친구들
대충 잡아도 열대여섯 명은
세치 혀로 때려 잡았다

나는 앞 뒤 사람들 사이에
고립되어 느릿느릿 걷는데
나 때문에 바쁜 발걸음
걸기적댄다고 발끝 채여
오도가도 못하고 중간에 끼인
나는 그저 침묵이다 

《19》
마니산

공석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돌계단을 오르다
털퍼덕 주저앉아 하산을 갈등한다
중도하차는 나를 배신하는 일

민족정기를 도모하는
호국보훈 유월의 산행
좀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강렬한 빛으로 분사하여
은총으로 분배하는 왕겨빛 태양
불끈 솟는 양지의 힘
홑이불 벗기듯 산등성 안개는
바다 건너 서쪽으로 꼬리를 감추고

하늘 아래 수많은 명산을 거느리는
마니산 성지 산기슭 더욱 깊어져
가슴 벅차 얼굴 벌개지도록
세상으로 등을 떠미는
한사코 불어오는 강화도 서풍  

《20》
만추

공석진

늦은 가을을 만취하노라
사랑도 취하고
미움도 취할 때
다가 올 모진 겨울도
취할 수 있으리
화려했던 단풍도
땅에 떨어져
추한 모습으로 구르는데
한번도 화려해본 적 없이
본색을 잃어 가는 나는
농염의 이 가을을
취하지 않고
어찌 보낼 것이냐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억 저 편에
한낱 먼지로 사라질 것을
만추에 만추가 서러워
만취하노라 

《21》
무더위

공석진

완벽하게
세상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다리에
잔뜩 힘주고
버텨주던 빌딩들도

한번 건들면
폭발할 것 같던
충혈된 시선들도

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가진 자들의 호들갑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사람들의
멍한 무기력

그 사람들 앞에
살아보려는
의지를 불사르는
걸인의 구걸

버스터미널 한쪽 구석
낡은 선풍기
탈탈탈
의미 없이 돌아가고

지쳐 널브러진
사람들의 의식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소나기에 대한 꿈은
정녕
없는 것이냐  

《22》
물구나무서는 산

공석진

문득 찾아와
눈물을 쏟는 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립다
나는 느끼고 싶다
날개가 되어 자유롭고 싶다

역삼각형의 꼭지점이 세상을 찌르고
거꾸로 서는 육중한 육신을
지탱하기 힘들어 연거푸 쓰러져도
온갖 세상 욕심 홀로 감당하기에는
고독하여 상심한 내가 역부족이다

난들 허구헌 날 밟히고만 싶겠는가
등을 내어주는 건 쓸쓸하여 안되겠다
가슴 내어주는 건 허전하여 안되겠다
짓밟는 고통은 밤새 욱신거린다

뒤집어 뒤집어져 비틀거리며
쏟아져 내리는 장엄한 풍경소리는
무구한 세월 동안 꾹꾹 다져져
가슴 속에 응어리진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무거운 등짐이 사라지고
소멸이 되는 순간 적멸하기전
신음하는 바다에게 달려가
정녕히 애정 어린 충고를 하리니

오! 연인이여
부글부글 끓어 속 썩이지 말고
당신도 물구나무서보구려
몰염치한 세상 욕정 남김없이 쏟아내
너무 늙어 화석이 될지언정
후회없는 늦은 사랑을 나눠 봅시다 

《23》
미안합니다

공석진

염치없는 나를 혼내줄 독주를 앞에 놓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건배를 제의한다.
악착같이 홀로 살아남으려
부축하여 함께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무관심으로 홀로 된다는 것이 내내 서럽게도
당신을 허허심장에 방치해서 미안합니다.
'나도 외롭다, 나도 외롭다.' 강변하면서
정작 당신의 고독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아프지 않다는 이유로
당신의 통절한 아픔을 나누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 멀어지는데
곁에 있어도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해서 미안합니다.
천년 만년 사랑한다 말을 해놓고
숱하게 이별을 고려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에도
지나가는 바람쯤으로 쉽게 망각해서 미안합니다.

소중한 당신이여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심한 갈증을 축여 줄
한 대접의 물 마중을 나가지 않는 일이
하아 이다지도 후회 스러운 일인 걸
이제서야 등신같이 머쓱하게 외칩니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 


《24》
변산邊山

공석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공연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구름 뒤 숨어 얼굴 감추는
새벽녘 숫기 없는 당신을
끝끝내 대면하지도 못하고
허기진 배 채우는데 급급하여
저 또한 간단히 외면하였습니다
행여 조우할까
더욱 가라앉은 내소사를 내내 걷다가
억만년 층층이 쌓인 그리움이었을
가슴 곳곳 구멍 뚫린 채석강을
포말에 발목이 잡히도록 헤매었습니다
그래, 훗날을 기약하마
내 기어이 변산을 떠나는구나
바다에 몸 던질 절박 없는 날
흙먼지 뒤집어쓴 변산 상사화相思花
동병상련에 긴 한숨 내쉬고
연인처럼 격렬하게 포옹하고 싶었던
격포의 빈 가슴만 헤집어 놓고 왔습니다
아, 은밀하게
분홍빛 바람이 불지 않은 날에는
변산에 가지 마세요 

《25》
북소리

공석진

목덜미 수줍게


바람을 불어
귓불마저 빨개지면

가슴 한마당


진군進軍의
북소리가 울린다

《26》
북한산

공석진

산은
시작부터 심통을 부렸다
세상 유혹에 곁 한번 주지 않은 내가
그리도 서운했을까
상심한 징조가 사납다

한참을 올랐더니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산은 곧 허리를 허락을 한다
눈부신 초록을 보여주고
새들의 여름맞이가 분주하다

거북바위가
정상을 오르려는 일념으로
나는 본 체 만 체
백운대만 쳐다본다
가야지, 가야지

마음을 비워야만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
끊임없이 정상에 도달해야 하는
세상사람들의 욕망을
어찌해야 하는가

사모바위 주변으로
모여든 남정네들은
떠나버린 옛 애인이
너무 그리워서
해후를 꿈꾸며

천일 기도하다가
바위로 굳어버린
사모바위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는 비봉은
기세등등한 자세로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지 말고
이제 그만 내게 오라는
욕정이 집요하다

나는 이미 심한 질투로
마음 몹시 상하다가
어쩔 도리 없이
시퍼런 기세에 눌려
하산하고 말았다

기다려다오
이별이 잦은 망각의 세월 속
내 곧 다시 돌아오리니
너무 근심치 마라
너무 서러워 마라.  

《27》
불암산

공석진

수락산에 사랑 구하고
불암산에서 불알 놀란다
양미간 찌푸리던
부처 닮은 불암도
먼지에 눈결 흐려져
가뜩이나 큰 눈 훔치며
슬쩍슬쩍 곁눈질로
세상 여자 힐끗거렸다

그럼 그렇지
돌부처도 별 수 있나
뒤통수 긁적이는 본능
무너질 수도 있지
빙판이 도사리고 있는
산길을 걸으며
속세는 원래 그런 거다
부처 같은 말을 읖조렸다 

《28》
비우기

공석진

몸을 비우려고
물만 마시는 날이
벌써 여남은째
비워야 채워지는 걸
나이 쉰에 깨닫는다

마음을 비우기까지
또 얼마나 천겁(千劫)을
기다려야 하는지

비우는 연습을
가선지게 하면서
오늘도 물 두어 잔에
담구어 색 바랜
나를 버린다 

《29》
사모바위

공석진

당신은 어떤 욕심도 움켜쥐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의 궤적들을
잠시 만나고 헤어질 뿐
오랜 세월
흔들리지 않으시고
그리 설운 그리움으로 앉아 계십니까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이기적인 천성이 갑절로 불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자리를 차고 앉아
밀어내려 애쓰지만 추락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춤을 추는 저급한 감성입니다

비우지 못하여 평생 짐이 되어버린
우울에 갇힌 꼽추는
지는 태양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등이 굽어
허공에 눈물을 뿌려대지만
당신은 언제나
파란 노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30》
산은 고독하다

공석진

산은
고독하다

홀로 사랑한들
그 누가 알아주랴

잊혀져 가슴 아린
낯선 사람

마른 정情 스치어
생채기주는 사람

겸허하게
너를 용서하련다

물이 낮은 곳으로만
찾아가듯

나를 낮추어
너를 맞으리니

주저치마라
두려워마라

햇살이 눈부셔 허리굽은
길 섶 들꽃처럼

산은 기다림에
고독할 뿐이다 

《31》
산이 되고 싶소

공석진

산이 되고 싶소
공허한 사람 모두
그리움 가득
채우고 가라
그러고 싶소

내 등을 타고
내 허리를 밟으며
세상 설움 모두
버리고 가라
그러고 싶소

그리하여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합쳐
산처럼 쌓여
정녕 산이 되면

미처 오지 못한
사람들 위해
꽃숲에 첩경을 놓아
비묻어오기 전
길마중 나갈 테요 

《32》
석양은 붉다

공석진

가느란 바람에도
소리 없이 낙하하는
초췌한 낙엽으로
세상을 단념하는가

노화는 진화
해는 질수록
먹먹한 가슴에
뿌려진 눈물만큼 선명하다

생 가슴앓이
아물지 않은 상처로
잿빛으로 채색하듯
미련 두고 떠나진 않으리

서녘 하늘 태양은
초경(初經)의 혈흔처럼
기세 등등하게
그대로 멈춰 서있을 것이다  

《33》
선자령을 오르며

공석진

'한번 가 보시오!'
덜덜 치를 떠는 계곡물이
우려(憂廬)하며 급하게 하산하였다

칼로 베이는 서걱임쯤이야
볼이 떨어져 나가듯
절단된 삶의 군더더기
한발 한발 유기시키는데

아, 천국의 문지기!
세상 풍파 동장군에 대항하다
삭풍에 입 돌아간 풍차
덩치 크다 몸 성하랴
하얗게 벗은 아랫도리가 시렸다

삽시에
하늘 정원 발을 딛고서
절정의 반전에 환호하는 내게
길목 지키고 선 선자(仙子)
'어서 와 내 등을 밟으시오!'
갈채를 보냈다 

《34》
송악산

공석진

비 바람에 막히어
발 묶인 그리움

지켜보는 마라도
슬퍼 마라
한숨 지을 때

성난 바다
둔덕에 비스듬
산을 저격하였다

검푸른 파도
송악의
구멍난 가슴을 쳤고

지척에 산방이
상련의 동병을
끙끙 앓았다 

《35》
시산제

공석진

눈물겨운 인내력에
데구루루
햇살은 기슭에 구르는데

세상은 인정머리 없다고
발붙일 여지도 없다고
섣부른 상상의 유회

속 좁은 생각을 속죄하려
올리는 제사에
기분이 흡족하여
혼을 다하여 산을 베푼다 

《36》
시월

공석진

여름 내내 잠복해 있던
그리움을 앓는 거겠지
고열로 단풍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처럼 아픈 잎새
뚝뚝 떨어지는데
어쩔거야
나 하나쯤 잠시 자리를 비운들

사는 게 급급하여
이까짓 변화쯤
몸 사려 참지를 못하고
숨막히게 난방을 해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낭만은
을씨년스러운 찬바람에 혼절하였다

붙잡지 마라
마침내 나는 떠나리
집요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빗발치는 아우성을
은행나무 밑 벤치에 앉혀 놓고
침묵으로 까맣게 채색하는
단호한 망각의 시월  

《37》
여성봉

공석진

"어머!" 부끄럼 반 난처함 반
"이야!" 신기함 반 호기심 반
애써 욕정 웃음 뒤에 감추고
한 놈도 예외 없이 뚫어져라
한곳만 바라보는 뭇남정네들
"성가시게 왜 거기 박혀서..."
주목받지 못하여 사뭇 쓸쓸한
나무가 쓰러진다 


《38》
오르지 않는 산

공석진

너무 높아서
혹은 너무 가파라서
오르지 못하는 산
인적 없는 그 산에
한 남자가 올랐답니다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도
마음 흔드는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산이 있다면
그야말로
고독하기 짝이 없는 일

우리는 누구나
험산 같이 외로운 존재라해도
일생을 문 걸어 잠근
산으로 사는 건
참으로 몹쓸 짓입니다

지금 저는
사람이 살지 않던 산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39》
오봉

공석진

뭉근하게 끓던 사랑이
느슨해진 지각을 뚫고
세상 밖으로 치솟았다

우이령 넘나드는 여인
기세 눌려 외면하려니
순정을 치한 색정이라
오명뒤집어 쓴 서운함
뜨신 눈물로 쏟아지고

봄 곁눈질하는 길목은
하루 종일 질퍽거렸다 

《40》
오봉이 여성봉을 탐하다

공석진

양기와 음기 조화로다
낙엽옷을 입은 여성의 해진 올
가을 바람이 조금씩 당겨
하반신을 드러내누나
건장한 놈 다섯이
주위를 살피다가
서로 먼저 차지하려
풀어 헤친 낙엽 위를 헤집어
양지 바른 곳 자리를 펴다
나신이 눈 부셔 꼼짝 못하고
굳어 버렸다 

《41》
우면산은 잠들고 싶다

공석진

지친 소는 잠들고 싶다
뚫리고 파이고 잘리어
흉하게 변한 성형의 종말
피부는 흘러내려
이기적인 안락을 덮친다

애당초 워낭소리는 경종(警鐘)이었다
아비규환 속 때늦은 후회
비 묻은 손으로 갈기는
가혹한 채찍 폭우는
최후의 방주(方舟)를 허락치 않는다

이유 없이 코뚜레 잡혀
평생을 노역에 시달려
바보처럼 상처안고 살아
생이 아프다고 신음 대신
피눈물을 뿌리는 구나

탐욕을 채우려는 오만은
잠들고 싶은 우면牛眠의 밤을
숙면을 방해하려
벌건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다 

《42》
월출산 큰 바위 얼굴

공석진

하늘에서 만삭인 달 내려와
월출산 홀로 우뚝 섰고
서해에서 장대한 바위가 솟아
큰 바위 얼굴로 자리잡았다

호남 땅 영암에 기세등등
분연히 일어선 구정봉을
천황봉이 밀고 사자봉이 받쳐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킨다

대륙에 한민족 기개 떨친
광개토 대왕 기를 받았는가
풍전등화 조국을 구해낸
충무공의 얼을 계승하는가

숭고한 애국 선열의 넋이ㅁ
민족혼으로 동방의 등불 밝혀
글로벌 세상 호령하라
삼척장검을 건네 주고 있다 

《43》
이별이 슬픔에게

공석진

이별이 슬픔에게 말하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헤어짐은 절망이 아니다

차 오르는 슬픔아
차라리 날선 시선으로
울컥울컥 심장을 찌르어다오

무력한 자존심이
바닥까지 비워지면
흐뭇하게 가슴을 내어주마

속절없는 상처야
단단히 아물어라
다가올 그리움 아프지 않게 

《44》
정 그리우면

공석진

애써 지우려 하지마
그저 세월에 맡기다가
보고파지면

가을 언덕에 올라가
저 여기 있어요
외쳐 보렴

혹시 아니
향기 그윽한 사랑이
꽃구름 타고 올지

그러다가
情 그리우면
情 그리우면

어느 낙엽비 우수수 내리는 날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버리렴 

《45》
죄인

공석진

나는 죄인입니다
천 번 죽어 마땅한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뚜벅
뚜벅
뚜벅

"죄인 1004번!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믿습니다"

"네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석방!"

먹장구름 사이
가느란 햇살
눈물이 쏟아진다  

《46》
지하철

공석진

잿빛 교도소
하루에도 수만 번
견고한 쇠문이
열리고 닫힌다

들어갈 땐
낯선 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장막을 친다

갇힌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듯
무장해제되어
손잡이에 매달렸다

쏟아지는 사람들
악어 입 오물 토해
위선의 탈을 벗기어
세상 밖으로 내몬다

남겨진 자에게
던져진 수의(囚衣)
무감각한 회개
전원 사면 복권이다

반복되는 구속과
석방의 악순환  

《47》
천국으로 가는 길

공석진

천국으로 가는 기차
예매가 시작되었다네
인터넷 구입이 마감되고
암표마저 동이나
다른 교통편 알아보느라
세상은 난리북새통이네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급행으로 갈 일 무에 있나
이 몸은 추억 가득 든
배낭 들쳐 메고
운동 삼아 걸어서 하늘까지
자늑하게 가려네

비록 지연되어
마중 나온 사람
지쳐 널브러지고
하늘나라 신천지 등기부
내 땅 확보 무산되어도
무심하게 가려네

천국으로 가는 동안
꽃잎 사복사복 밟히는
쌔뜩한 무지개 길 따라
미리내 곳곳 여행하며
길 걷다 손 흔들어
구름사다리 얻어 타려네

천국으로 가는 길
사랑하는 이 동행한다면
멀면 멀수록
늦으면 늦을수록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네  

《48》
코스모스

공석진

겨울
발목까지 잘리운
그리움은
더욱 깊숙이
뿌리내렸다

꽃잎
떨구려 마라
님 오실 그 날
흙먼지 뒤집어 쓴
미소로 맞을지라도

평생
한곳에서
님을 기다려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겠다  

《49》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공석진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멀리 보내기 위하여
가능한 뒤로 당겨야 하고
스스로 낮춰야 하고
결국은 놓아야 하거늘

앞으로 앞으로만
위로 위로만
손에 쥐려고 애쓰는 건
늦겨울 앙상한 고목처럼
참으로 볼품없는 것

버리기도
비우기도
연습 없이는 안 되는 일
습관처럼 모두 내려놓아야
갱생하는 길

화살처럼 살아야 한다
느리지만 빠른 듯
빠르지만 느린 듯
아프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게  

《50》
흐린 날이 난 좋다

공석진

흐린 날이 난 좋다

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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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 시 모음 30편

《1》
가을 끝

      나해철

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 저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 

《2》
겨울 버스

  나해철

코끝이 어는 승강장에 서면
너처럼 오고 또 너처럼 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가족을 모아 고향을 일구고 싶은 아버지의 꿈과
산 바위 위에서나 소리쳐 부르는 스무 살 동생의 터질 듯
한 가슴과
끝끝내 기다림의 불쏘시개만 넣고 마는 새벽마다의 시
뱃속까지 시원하고 다디단 바람의 어느 봄
일렁이며 터져 남이나 북 개울과 마을을 환히 밝힐
그 날의 빛들을 생각한다.
길이 멀고 끝이 없으면 그만큼 더디 오고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될수록 애터지게 오지 않는
너는 그러나 온다.
황혼 그리고 어둠이 들어 모두들 쓰러져 눕기 전
언제나 눈부신 소리로 먼저 온다.
얼어붙은 손끝과 가슴 하늘과 산 그림자가 깨어나며
달려가 맞이하는 기다림의 끝. 평화와 따뜻한 것.
버스에 오르면 풀밭처럼 잡목림처럼 안기고 섞이어
살의 온기로 데우고 서로 녹여
살붙이로 하나가 되는 사람들.
희망은 너처럼 오지 않고 또 너처럼 온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쁨과 눈물겨움
감사와 복된 춤 노래와 빛이 터지는
그날의 이 땅 위에 서듯
흙도 피도 얼어붙는 칼바람 속에서 버스에 오르면
기어코 너처럼 오고야 마는 우리들의 희망에 대해서 생
각한다.
몸은 덥혀지고
누군가를 데우면서.  

《3》
그건 아야해

    나해철

풀을 꺾는 내 아이에게
풀은 아프다고 알려줬다.
아이는 꺾인 것을 보면
언제나 아야해
그건 아야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바보와 같은 이 행성.
이쪽과 저쪽에서 끊임없이
버려지는
귀한 그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자식과 아내, 그 행복,
불도저에 밀리는 가족과
족속, 그들의 평화와 기도.
이대로 간다면
사랑과 따뜻함을 다 익히기도 전에
증오와 파괴의 추문은
해일처럼 밀어닥칠 것이고
너는 지극한 슬픔,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울 것이다.
아이야 너는 오늘도
꽃을 꺾는 한 어른에게
아야해, 그건 아야해
작은 풀밭의 나라를 떠나며
풀꽃들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4》
그리운 이에게

    나해철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라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5》
까치

      나해철

감나무 가지 위의 까치 세 마리
어둠의 빗장을 끄르고 있네

돌쩌귀 미끌리며 문 열리는 소리

살아 있으므로 느끼는 것은
오직 한가지
문 밖에 황홀히 빛나는
자유

반가워 나아가니
문 밖은 아직 어둡고
까치들만 앞서 날아가 또 다른 문을 열고 있네. 

《6》
나무숲에서

    나해철

나무는 언제라도 무리져 직립한 채 있다.
베인 가슴으로 이 시대 영혼이 이렇듯 숲에 들면
그 자리 그대로 곧추선 나무들 때문에
우리는 다시 고귀한 무엇이 된다.
살 속에 흐르는 가락은 절로 넘치는데
거리와 작은 방 광장에서
그립고 눈물겨운 것들을 위하여 노래하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살기로 하거나
밤 깊도록 불밝히고 섰자면
바보와 천한 것들로 쓰러져
이 끝과 저 끝에서 씻기우거나 아파하다가
산에 들면 다시 지상의 고운 한 생명으로
구부러진 영혼의 곱추를 세운다.
이 흙 위에 새와 꽃바람
사람과 사람이
깨끗이 어울려 살날이 오리라
기다림과 바램으로
자주 울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늘과 양지의 나무들
숲의 꿈을 꾸면 무성하여 숲이 되고
밀림은 밀림이 되고
산맥이 되리라 기원하면 곧추서서 그리 되는
희망의 땅과 숲에 들자
새벽바람의 숨쉼으로
맑은 하늘의 이마로 푸르름으로
다시 서자. 

《7》
남몰래 흘리는 눈물

      나해철

꽃 그늘 졌다
지금 꽃 그늘 아래서
어룽어룽 그늘진 꽃 무데기를 본다
송이마다 꽃들은
조금씩 다르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무한히 고요히
햇빛 밖에 그늘 밖에
있다
누가 소리하나
남몰래 남몰래라고
목이 타서
꽃들은
세상 너머나 바라보는 듯
그날밖에 햇빛 밖에
가만히 있는데  

《8》
내 마음의 가을

        나해철

붉은 단풍잎처럼 얇아서
디뎌 밟으면
바스러질 무엇이 거기 있다
그때쯤이면
꼭 무엇이던가 디뎌 밟으며
떠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일까
견디어낼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요즈음 몇 일에
십 년이 늙었다
고개를 숙이면
단풍 든 이파리가 아주 말라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9》
내 마음의 겨울

      나해철

입김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사라진다
건너가보지 못하고
소멸이다
그와 같다
내 마음 

《10》
내 마음의 첼로

      나해철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운다 

《11》
넥타이

      나해철

그렇게 말고 이렇게
매듭을 묶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니
그 후로 그렇게 말고
이렇게도 인생을
묶으며 살아왔다
아니 늘 이렇게만
살았다
이렇게 묶을 때마다
네가 준 내 인생 때문에
사무쳐 목이 메인다  

《12》


      나해철

눈이 허리까지 내려 쌓인 날
태어났다 했었지
골짜기 깊은 곳에서
붉은 동백처럼 피어났겠구나
그래 네 사랑은
눈에 갇힌 동백과 같았다
붉어서 아프고
흰 눈 속이어서 아팠다
하얗게 바랜
내 가슴의 흰 눈밭에
너는 붉게 피어서
동백같이 아팠다  

《13》


  나해철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달아 너의 몸 아래 내 몸 눕히려면
어두워야만 한다
황홀한 네 빛이
내 영혼에 가득하기까지는 밤이 와야 한다
햇빛에서는 아름다운 네 모습 볼 수 없어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달아 이지러져서 내 심장 멎게 하다가
터질 듯 차올라 내 가슴
달뜨게 하는 달아
너를 만나려면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밤뿐인 사랑
어둠뿐인 사랑이다  

《14》
담쟁이

  나해철
 
살았을 뿐이다
살아내야 할 시간을
견디며
빈자리에
푸른 잎을 토해냈을 뿐이다
다만
절체절명
사는 일을 위하여
살아냈을 뿐이다
오늘 너는
흰 절벽을 푸르게 덮었다고 하는구나!
시간들이
직벽으로 서 있었는가?
절벽에서 살아왔는가?
절체절명
이 시간
살이 터지며 또 푸른 것
하나 토하자꾸나 

《15》
동해일기·3

      나해철

바다에 서면
이제는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난다
부서진 유리창처럼
상처의 숲을 이룬 가슴이
구석구석 따뜻해지면 평화로워진다 

《16》
두엄자리

      나해철

두엄은 썩어서 금비가 되는데
지푸라기, 돼지똥, 닭똥 그리고 오줌이
섞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료가 되는데
벼가 먹고 보리가 마셔서
살이 통통 오르는 영양식이 되는데
헛헛한 내 가슴은
썩어도 어디 붙일 데 없다
가슴을 두엄자리에 내려
독새풀, 엉겅퀴, 억새, 물풀들과 포개져서
다 탄 재와 똥오줌에 달구어져
질 좋은 퇴비가 되면 좋겠는데
땅 위에 떠서 흔들리는 저 가벼운
내 가슴
누구를 만나 껴안아도
안기는 건 저같이 무게도 없는
빈 뼈의 집  

《17》


    나해철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 끝에도
주먹만큼 별들은 매달려
외로워
외로워 말라고
파랗게 빛나는데
아직은 심장에 따뜻한 피 흐르는
내 가슴과 어깨 위에
어찌 별들이 맺혀 빛나지 않겠는가
사람들아 나를 볼 때도
겨울 나무를 만날 때도
큰 눈에 어린 눈물보다 더 큰
별이 거기 먼저 글썽이고 있음을 보라
☆★☆★☆★☆★☆★☆★☆★☆★☆★☆★☆★☆★
《18》
봄날과 시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
《19》


      나해철

불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따스하게 찬 것들을 덥히고
온전히 재가 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꽃밭마다 몸을 던져
죽어서도 온기로 남아 있는 그대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불 주위의 새벽에
침묵으로 앉았다. 우리는 덥혀졌으며
추운 거리와,
거리의 방패, 구둣발을 잊었다.
가장자리와 가운데 어디서나 불은 타오르고
하늘의 흐린 별까지 닿아 올랐다.
눈시울에 몇 장의 낙엽처럼 떠오르는
지난 새벽과 정오, 황혼의
이 땅, 절망과 증오, 답답함과 비애에 대해서
오래 말들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불과
불의 순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은 귀하고
이 흙 위의 우리들 삶에
눈물겨운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알았다.
불 속에 한줌의 슬픔을,
누구는 한움큼 마른 뼈를 넣고 또 던지며
우리는 기다렸다.
새벽 불의 완성을,
우리들 기도의 간절한 끝을.
☆★☆★☆★☆★☆★☆★☆★☆★☆★☆★☆★☆★
《20》


    나해철

비오는 날을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
《21》
비 오는 날은

    나해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
《22》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나해철

사랑하는 사람들만
무정한 세월을 이긴다
때로는 나란히 선 키 큰 나무가 되어
때로는 바위 그늘의 들꽃이 되어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온 산과 들이 비워진다 해도
여윈 얼굴 마주보며
빛나게 웃어라
두 그루 키 큰 나무의
하늘쪽 끝머리마다
벌써 포근한 봄빛은 내려앉고
바위 그늘 속 어깨 기댄 들꽃의
땅 깊은 무릎 아래서
벌써 따뜻한 물은 흘러라
또 다시 겨울이 와서
세월은 무정타고 말하여져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벌써 봄 향기 속에 있으니
여윈 얼굴로도 바라보며
빛나게 웃어라
☆★☆★☆★☆★☆★☆★☆★☆★☆★☆★☆★☆★
《23》
세탁기

      나해철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서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
《24》
쓸쓸한 그것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
《25》
오래 되었네

      나해철

오래 되었네
꽃 곁에 선 지

오래 되었네
물가에 앉은 지

오래 되었네
산길 걸어 큰 집 간 지

오래 되었네
여럿이서 공놀이 한 지

오래 되었네
사랑해 사랑해 속삭여 본 지

오래 되었네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낸 지

오래 되었네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다정하게 불러 본 지

오래 되었네
산 밑 집에서 들을 바라보며 잠든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있어 본 지

오래 되었네
고요히 고요히
앉아 있어 본 지
☆★☆★☆★☆★☆★☆★☆★☆★☆★☆★☆★☆★
《26》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7》
웃음소리

      나해철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버렸어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던 것들을
찢어 부수고 보여주었어
하늘을
푸른 하늘을
시간과 공간이
바람처럼 떠도는
푸르른 하늘로 된 세상을
열어주었어
한 번의 명랑한
당신의 웃음소리가
찢어주었어
내 생의 가면을
☆★☆★☆★☆★☆★☆★☆★☆★☆★☆★☆★☆★
《28》


    나해철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
《29》
화해를 위하여

      나해철

새벽이면 이슬에 새들은 부리를 닦고
풀잎들도 정결해진다
외로운 그대
이 땅 어디나 펼쳐진 부드러운 산자락과
푸르른 들판을 보라
곳곳에 희고 허리 굽은 억새로 노동하며 모여 있는
우리를 보아라
그대의 꿈은 이방의 것
그대의 쇠는 모질다
그대는 빛 속에 우리는 뒷전에 있으나
지금 우리는 새벽에 있고
그대는 차라리 어둠에 있다
새벽은 모두가 새로와지는 것
호젓한 능성이 이 땅 한줌 흙으로 태어난 형제여
아교와 같은 어둠을 벗고
이제 돌아오라
헹구어진 얼굴로
잠방이인 채로 황토 묻은 발걸음으로
새벽에 선 우리들 싱그런 가슴으로 오라.
☆★☆★☆★☆★☆★☆★☆★☆★☆★☆★☆★☆★
《30》
후회

    나해철

해준 것 없구나
사랑이여
반지도 팔찌도
옷도 구두고
집도 자동차도
해주지 못했구나
그대 목마를 때
한 종지 물만 건네주었구나
그대 눈시울 젖을 때
입술만 대어 닦아주었구나
속절없는
사랑이라는 말만
사랑이라는 말만
들려주고 또 들려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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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향 시 모음 55편 

《1》
가슴에 담은 사랑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사랑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 가진 것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줄이요.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넓어
채워도 채워도 목이 마르고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고
받고 또 받아도 모자랍디다.

사랑은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소복소복 모아놓고
간직만 하고 있으면 좋은 줄이요.

쌓아놓고 보니
모아놓고 보니

병이 듭디다.
상처가 납디다.

달아 날까봐
없어 질까봐
꼭꼭 숨겨 놓았더니

시들어 갑디다.
힘이 없어 조금씩 죽어갑디다.

때로는 바람처럼 떠나도 보고
때로는 물처럼 흘러도 가고
자유롭게 자유롭게 놀려야 한답디다.

가슴을 비우듯 보내주고
모아둔 만큼 내어 주고

쌓아둔 만큼 내어 주고
죽을 만큼 아파도 안 봐야 한답디다.

아플 만큼 아파야 무엇인지 안단 걸
수 없이 이별 연습을 하고 나서야
알 수 있겠습디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디다.


《2》
가을 단상

박소향

나는 너에게
목화 꽃처럼 피어나는
뭉개 구름이면 좋겠다

순백의 향기로
가슴 가득 떠다니는 솜털 같은 기다림과
잊지 않을 사랑 하나
혼자 못할 이별의 아픔이면 좋겠다

먼지 나는 길 위에
나뭇잎만 벗이 되는 쓸쓸한 하늘
눈 속에 멈춰지는 시인의 넋처럼
이니스프리의 호도위로 떠도는 빛

비애로 젖은 물 위에
가슴을 씻어 내리며
나는 또 운다

누군가의 몫으로 거기 남은
목마른 사랑의 빚

슬픔의 껍데기를 계절의 옷처럼 갈아입고
한맺힌 노래를 그리움처럼 부르다가
나는 또 끝내
목메이게 아파할지 모른다

마음 속을 물들이는
가을 숲의 영혼
하늘 밑을 수놓는 낙엽의 수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빛 고운 이 가을
나는 너에게
언제라도 잊지 않을
긴 그리움이면 좋겠다  

《3》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박소향

가을은 어디를 보나 한 장의 아름다운 엽서다.

한 계절 물오른 열매들이
화사한 볼륨을 저리 자랑하는 것도

일찍이 봄부터 돌락 해온
햇볕과의 굳은 약속 때문은 아닐까.

떠나야 할 제 시간을 알기에
작별의 치장 저리 황홀히 하는지 모른다.

목메인 상처도.
알 수 없는 슬픔도
다 거기 내려놓고
가을 빛 만큼 물들 수 있다면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다면

이 가을
난 한 장의 낙엽이어도 좋다.

《4》
고독으로부터

박소향

가슴을 닫은 자의 모든 정열은
다 시시하다

그 순간 네게
고독은 영원히 부재다

세월에 둘러싸여
더 이상 뜨겁지 않은 것들은
문을 닫아라

문틈 사이로 스며들지 모르는
고독을 위하여  

《5》
구월이 오면

박소향

여름날의 조각들이 잘게 부서지는
등굽은 길에 비가 그치면
멧새 앉았다 간 소슬한 자리마다
들국이 피고
바람에 갇혀 우는 갈대 숲도
바보 같은 그리움이 된다는 걸
당신은 안다

홀로 뜨는 정염의 달이
조용히 우는 물결을 포옹할 때
까마득한 정신은 불륜의 섬이 되고
뜨겁게 달아오른 꿈 마져도
죄가 되는 가을
가을이 온다는 걸
나는 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제 가슴에 하나씩 사랑의 씨를 심는
구월이 문을 열면
차가운 바람의 살을 지나
새하얀 종아리로 언어의 강을 건너던
당신의 가슴이 더 그리우리란 걸
사람들은 안다 

《6》
그대 곁에 있을 동안

박소향

언제까지 나만 바라보리란
바보 같은 믿음에도
힘이 되는 그대

어디선가 꼭 한번
만나야만 하는 물처럼
땅을 짚고 흐르다가
나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며 그리워할
그대에게 흐르는 시간들은
환한 신방에 걸린 노을같이
얼마나 또 그렇게 아름다운지

이유 없이 떠난 길도
겁없이 부유하고
곁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소중하게 가슴으로
한올 한올 엮어두지

그대 잠시만 침묵해도
먼지처럼 풀풀 눈물이 날리고 

《7》
그대 뒤로 남긴 시

박소향

그대 잠깐 스쳐 가는 바람처럼
설레며 지나는 계절풍이었습니까
이내 가슴이 비어 돌처럼 구르다가
어느 강가에서 이름 없이 잊혀질까
또 그리 하셨습니까

살아감이 힘이 들어
미련은 없다 하지만
이승만큼 더 좋은 곳이라도 찾을까 싶어
쓰디쓴 바람 그 뒤에 멈춘 채
저를 남기신 것입니까

진정 사랑하는 가슴이었다면
헤어지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쓸쓸한 저녁이 되어도
그대 앞에 저를 두어야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라고
소리내어 한 번
젖은 웃음 남기고 가는
억지스런 그리움이려 했습니까

모르셨습니까
그대 그림자 뒤에서
지나온 발자욱마다
산책하듯 지나치는 거리마다
우리가 주시했던 모든 눈길마다
나는 시가 되고
눈물이 되고 있는 것을…… 

《8》
그대 마지막 그리움이 되라

박소향

어쩌다 한번 슬픈 사랑으로
조각조각 떨어지는 추락의 꿈 하나

비 뿌리는 구름처럼
머리위로 쏟아지려니

한번은 오고야 말 시간들이
혼의 불씨로 남아
그 기다림을 배우라 하네

가슴이야 늘 물처럼 젖어있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사랑 하나가
갈바람 소리에 섞여 떠나가는 걸

아직 눈물은 남아 이름뿐인 그대지만
내 마지막 그리움으로 가슴을 털며 울어주리

고뇌의 시간들이 떠나갈 시간
사반의 십자가 처럼 나는 또 남고

비 뿌리는 길 끝 이쯤에서 그대 오늘도
내 마지막 그리움이 되리 

《9》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박소향

지금
흔들릴 수 있는 시간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지금
흔들리는 한 그림자를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

흔들려 본 사람들은 안다
하얗게 언 구름을 들추면
출렁이는 황혼이 커피향처럼 번진다는 것을

그대 지금 견딜 수 없다면
흔들려라 

《10》
그대가 나에게 와서

박소향

가만히 손을 내밀면
내게 했던 그대의 말
먼 가지 끝에
동그랗게 걸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이 되게 하던
그대 사랑의 말들

처음 꽃이 되고
처음 별이 되어
잠도 오지 않던 설레임의 밤
먼 곳으로 강이 흘렀다.

꽃씨가 꿈을 꾸는 들길에서
봄이 찬란해지고
눈부신 비가 오롯이
그리움을 자꾸 모으던 시간

병이 날 것 같은 입맞춤
들꽃 지는 언덕에
오래도록 빛이 비췄다.
그대가 나에게 와서

《11》
그대가 있음으로 혼자일 때 아름답다

박소향

혼자 보는 하늘은 깊고 푸르지만
쓸쓸하다
홀로 느끼는 바람은
꽃향기처럼 가슴을 물들이지만
둘이서 느낄 수 없는 투명한 고독이 있다

잠시 머물다 가버린 나그네의 체취처럼
내 마음의 골방에 깊은숨을 남기고 간
그대라는 단 하나의 특별한 이름

혼자 떨어져 있으므로 혼자는
무색의 삶 속에서 채색된 물가으로 날개 짓을 하는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음이다

더 가질 수 없으므로 혼자는
외로운 아름다움 일 수 있다
더 소유할 수 없으므로 혼자는
침묵에 기댈 수 있는 투명한 눈물일 수 있다

다 채울 수 없는 부족함으로 혼자 남았을 때
둘이 아님으로 느낄 수 있는 목마름의 꽃이
마음의 빈터에 피어남은

그대 거기 있지만
확실히 혼자 이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이리라  

《12》
그대만 한 그리움은 없습니다

박소향

하늘이 열리는 동녁 끝으로
안개가 가득
해 오름을 받치고 선 아침

보헤미안 음악 같은
커피향을 피워놓고
가슴에 얹힌
그대 숨소리를 쓸어 내린다

겨울의 입김이
흔들리는 숨결 한줌 떨구고
어설피 지나가는 창가
수북수북 그리운 그리움에 갇힌다

무채색의 소낙비가
철못든 인연 모두 날리는데
불어난 그리움 추스릴수 없어
하얗게 칠해버린 피안의 세월이여

차가운 외등이
홀로 불을 켜는 또 밤이오면
그대 향한
아름다운 분노가 시작된다

가까워서 더 그리운 사람
그대 때문에……

《13》
그대에게

박소향

살아있는 것이
내게 힘이 되는 그대
하지만 때로
반쯤 나는 죽은 듯이 산다.

반쯤 눈 가리고
반쯤 귀 막고
반쯤 입 닫고
감각을 잊은 듯이 그렇게

붉게 익어 터져야 할 계절에
넋 놓고 매달린 풋과일처럼
무던히도 철 못 드는 마음

내 마음 빈곳에 그대를 담지만
문득문득
한없이 열리는 나를 닫아주곤 한다.

눈 다 뜨면 모습 보이지 않을까
귀 다 열면 목소리 듣지 못할까
말 다 하면 그 맘 혹 닫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반쯤만 열어놓은 창안으로 그댈 맞는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도 숨 쉴 수 있도록

《14》
그대에게 띄움

박소향

누군가를 울렁이게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거라고
보리 섶의 연기처럼 피우다 만 편지 한 장
백지에 써 보았는가.
겨울비보다 더 외로운 새벽 기차소리가
차가운 명암을 달고 모질게 지나가는
낯선 방의 창가에
우수수우수수 녹슨 설레임이 쌓이고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은 아침에
잃어버린 자아를 추스리며
아직도 몸 사리고 있는 사랑을 믿는가
남은 그 백지에 써 보았는가
그리고
그간 갖지 못했다고 말했던 모든 것은
내 안에 이미 있었단 걸 몰랐다 라고
추신으로 남기며 울어 보았는가 

《15》
그리움으로

박소향

산꼭대기
구름 한 조각 걸리어 쉬는데
무엇이길래
설운 바람 지나는 자리마다
배어나는 진한 눈물

여기까지 살아도 남은 것 없어
소리 없이 터트리는
회한의 외침인가

벼랑 끝
해 넘어 가기 전 바위 그림자에
어제도 없었을 눈물 꽃 하나 뿌려 놓고
내려가라 떠미는 바람에 밀려
가마귀 쫒기는 좁다란 산길을
설움에 지쳐서 떠밀려 가네

무엇이길래
조마조마 망설이며 볼 수 없는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안고 이렇게
서럽도록 부대끼고 있는가

흐르다가 없어질 맘이라면
산꼭대기 먹구름처럼
애처롭게 어정거리지나 말 것을

산 공기 저녁놀에
어스름 별빛
마음으로 너를 접는데

그리움의 벽이 다 허물어지고 나면
그때나 이 산길을 내려갈거나
그립다 가다보면
다 떠밀려 와 있으려나  

《16》
기다림

박소향

기다린다는 것은
신열 끝에 묻어 오는
끓어오르는 숨막힘을 스스로 익히는 것이다

기다림에 본질은 없다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목마른 형벌 하나 더 메고 가는 것이다

하나의 껍질을 뚫고
돌아서 나온 흔적을 보는 것이다

밤과 낮을 잊고
새벽을 잊는 것이다

손가락 끝에서
규칙적으로 나를 살리는
혈맥의 느낌을 잊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잠들지 못한 영혼이
수줍게 자위하며 벌거벗고 앓다가
황홀하게 숨질 수도 있는
아름다운 병인 것이다 

《17》
기억의 편린 그 간이역에서

박소향

누군가의 고독한 편린들이
눈감고 잠시 쉬었다가 가는 곳,
그 평온한 절망 속에
내가 기대고 있슴은
사랑보다 더 절박한 시간들은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숨막히는 사랑이
마음을 열고 잠시 앉았다 가는 곳,
그 치열한 그리움에
내가 또 기대고 있슴은
더 사랑한 기억으로
오늘 거기 머물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한 기억
내가 사랑한 기억
우리가 사랑한 모든 기억들이
흙 내음을 풍기며
사라지는 그 때에도
나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잠시 잠간
우리들의 간이역이었던
쓸쓸함의 기억 그 자리에 

《18》
길에서 길을 잃다

박소향

아아, 어쩌다가
길을 잃었다

일상의 수중에 없던
여분의 생각만큼
무수히 갈라져 보이는
무의식의 길들

차갑게 꼬리치며 흩어지는
저 길들이
머리칼을 간지럽히는
저녁 눈발처럼
순간
너무나 가벼웁다

길을 잃고 헤맨 게
아니었다

불투명한 생의 속박에서
무뎌진 감각의 문을 닫듯
눈앞에서 환히 보이는
마음의 길을 잃은 거였다

짙은 화장의 두께만큼
새카맣게 가라앉은
세월의 무게가
제 연륜을 못 이겨
저리도 흐트러진
길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아, 어쩌다가
정신 놓고 사라지는
막막한 길 위에서
오래도록 홀로 선
내 흔들림
흔들림  

《19》
꽃밥

박소향

바람 한 술과 봄비 한 술
노을 한 줌과 이슬 한 줌

외로운 별 한 줌 그리고
해오름녘 안개 한 줌

무지개 빛
천기누설을 품고 피는 꽃

꽃들이 꽃밥을 먹는다.

꽃들이 지은 밥을 먹으면

바람과 노을이 깃들어 향기가 나고
소망의 별이 빛나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마운 목숨 하나 새벽마다 피어
살아가는 순간순간 행복할 것이다.

아름답고 착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꽃
꽃들의 그 비밀한 사랑을 말로 할 수 있을까

꽃에게서 받는 꽃밥 한 술은
작은 축복의 배부름일 것이다.

《20》
너에게서 쉬고 싶다

박소향

모래알이 바다의 깊이를 세는 동안
기억의 창살 너머
노을 진 청춘이 발갛게 솟아 오른다

먼데 바람 사이로
생명의 춤사위 비릿한데
아직 오지 않은 답장처럼
차례차례 무너지는 하얀 올가즘

목선이 망가진 가슴을 열어
길고 긴 밀담을 시작하는 영시
산다는 건 기다림이라고
가끔씩 들려오는 물살의 말은
아무도 들을 수 없어 참 다행이었다

짧은 눈물로 선을 긋던 그 깊이에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은 모두 끝났으니
아직도 복받친 설움에 우는 바다여
늦게 찾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에게서 쉬고 싶다

《21》
눈 내리는 저편

박소향

해가 저물어요.
어머니 캄캄한 자아가 온몸으로 비껴가고
허전히 발목을 쥐는 빈 물결만
곤고하던 내 그리움을 끌어안아요.

당신의 커다란 사랑이
흰 눈발처럼 품에 와 안기고
세상을 떠돌던 영원의 한때가
언제부터인지 거기 쉬고 있어요

바람이 부는 그 어딘 가로
슬픔은 향해가고
안달하던 영혼이 혼자 남아
죽도록 그리워만 하고 있어요.

아, 이별이 없는 곳 눈물이 없는 곳
맨 처음 당신을 안고 비상하던 첫 비행의 날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오늘을
운명처럼 예감했어요

멀리 떠나와도 그리움은 늘 그 자리이고
결국은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하루
이틀
사흘
당신을 만나 행복하던 그때

《22》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박소향

당신의 이름을 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도 잊고
슬픔도 잊고
기도도 잊은 저녁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기를
가만히 울음을 그치고 기다리는 시간
이상기류처럼 내 안에 흐르는
건조한 아집의 흔적

사랑했던 날들은 꿈결 같은데
변명과 오해들이 계절의 끝자락에 매달려
환절기 열병으로 앓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인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것
내 안에서 숨을 쉬는
당신을 향한 하얀 비상

눈물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더딘 시간 속에 침묵하는 기다림은
이유가 없습니다

마른 풀꽃처럼 사위는 식어진 눈물
이별이 두려워 떨고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시간이 두려워질 뿐입니다  

《23》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이길

박소향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립니다
언제부터인지 한밤이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마음이
외로운 잠에 섞여 꿈인 듯 생시인 듯
고르지 않은 체온 곁으로 나란히 눕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나의 일상
그 빈곤한 연가가 되어버린 멍청한 시간들에
군데군데 흠집 난 가슴을 열어 보이며
조금은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내가 보여준 그 한 페이지는
전부일 수도 아님 일부일 수도 있음을
속속들이 내보이지 않고도 말해야했습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는
당신의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아픈 가슴에 기대어 숨을 쉬는 나의 기도는
오늘도 눈물바다입니다

부드러운 시간에 길들여지지 못한 묵상은
그래서 또 길을 잃습니다
살갗에 와 닿는 당신의 목소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가슴을 비늘처럼 벗겨냅니다

암담하고 뜨거운 이 궁지에서
내가 부를 이름은 오직 당신뿐이기에
물기 없는 손끝에서
전화선처럼 매달리는 당신의 옷자락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편견과 오해 같은 삶의 편린들이
배고픈 사막처럼 나를 울릴 때
슬프게 바라보는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세요

삭막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내기 위하여
황량한 고독 속에서 더 충만하기 위하여
내가 찾는 유일한 회복은 당신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
슬픈 출발을 날마다 하고 있는 동안은요 

《24》
당신께 행복을 팝니다

박소향

마음을 아름답게 열면
하얀빛이 비춰요
눈이 부셔 뜰 수가 없는
그 빛은 눈을 감아도 보이지요

가슴을 아름답게 열면
사랑 빛이 비춰요
마음이 부셔 기쁠 수밖에 없는
그 빛은 어디서든 빛나지요

눈을 아름답게 열면
빛이 보이죠
사랑이 보이죠

그래서 나는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가슴을 열어요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게
당신에게 행복은
내가 팔 수 있게요 

《25》
독도 그 영원의 노래

박소향

광풍노도에 떠밀려 억겁의 세월
흔들리지 않는 뿌리 바다 깊이 내리고
홀로 여한 섬이 되었나니
저 멀리 동해 한 쪽에서
푸른 조국의 뼈대 하나가
지친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수많은 역사의 침노 앞에서도
뜨거운 육지 말없이 바라보며
바닷길 지나던 열사들
영혼의 안식처도 되어 주는구나.

절망과 희망이 지나온 세월 속에 뒤엉켜
기도의 발자국마다 응어리를 풀어내고
마침내
흰 옷자락 핏물 들여 일구어낸 오늘
그대는 열렬히 눈감은 옛 선조들의
눈물 동상이려니

덧없는 욕심 바닷물만큼 출렁여도
내 것이 아니어든
끝까지 가질 수 없음을 알게 하고
억지로 잃은 것은 언제든
제 주인을 찾으리란 걸 알게 하는 힘
독도여

이 민족의 변치 않는 사랑 있으니
동쪽 끝에 우뚝 선 오천년의 절개로
저물지 않는 희망 노래 영원하여라  

《26》
돌아보면 언제나 거기에

박소향

비 그치고
계절도 그쳐 가는 강가에
햇살이 휘돌아간다

조약돌이 마악 줄어드는 저녁 시간에
초록에 섞인 바람 지난 기억을 모우고
빠듯한 나의 가슴속에도
차가운 계절을 집어넣고 있다

돌아보면 거기
언제나 서 있을 것 같은 당신

당신의 물 그림자에 저녁별이 뜨면
낯선 이름 하나 붙이고 돌아서던
캄캄한 그 길 위에 밤이 깊고 있겠다

또로록 또로록 풀벌레 낮게 울어
잠들지 않는 새벽 물소리
하얀 사랑 지금도
만들고 있겠다  

《27》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싶다

박소향

마지막 분신마저
훨훨 떠나 보내는 홀씨처럼

벗어야 할 허물
다 털어 내도 좋은

망각의 강 하나
흐르게 하고 싶다

언젠가
날 떠날 너를 위해

언젠가
네가 떠날 날 위해

망각의 강 하나
가슴에 흐르게 하고 싶다  

《28》
무정

박소향

그리하여 지금은 이별도 뜨겁지 않은 시대
흰 달이 종일 주름을 펴는 동안
절실한 것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가을도 목놓아 울지 않는다
한소끔 우러난 하늘이 도화살처럼 번져
젖은 연기가 불감증 마냥 피어오르면
까닭 없이 몸만 뜨거웠던 여자
허름한 저 풍경에
발갛게 불이라도 지르면 가벼워질까
한 때 치유를 꿈꾸며
상처에서 떨어져 나간 얼룩은
내 몸의 한 시한부 였거나
바람의 혀끝에서 한 됫박 재가 되고 싶은
몇 토막 불씨였을 것이다
산 일 번지 고사목이 죽음을 애쓰는 동안
풍화된 세월도 수척해져 너그러워졌는가
지금은 사랑도 뜨겁지 않은 시대
절실한 것은 모두 떠나고 없는 부식의 시대
무능해진 가슴마다 죄의 부유물이 들끓어
어떤 것은 넘치게 빠져 있고
어떤 것은 불행히도 주어지지 않는
물이 차면 떠오르는 거품의 섬 같은
아무도 목쉬게 울지 않는 

《29》
무죄와 유죄

박소향

마음은
훔쳐도 무죄

사랑은
맘껏 가져도 무죄

그러나
둘 다 잃는 것은 유죄 

《30》
물처럼 흐르다가

박소향

물처럼 흐르다가 만나자
지나간 세월 뒤에 나는 남고
기억은 또 남아
우리 떠나도 마음 지켜주네

서쪽 하늘 노을이 다 할 때
그 때 헤어짐도
붉은 해 따라 어제로 넘기우리니
지나간 것은 생각지 말자

없어지고 사라지는 날들 속에
우리 또 남으리니……

비 젖어 크는 나무처럼
가지도 주고
열매도 주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때

마음 편한 행복을
서로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니
아직
줄 것이 남아 있는 동안은
행복해 하자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물이 되어 흐르자  

《31》
바다의 소야곡

박소향

너 없이도 늘 푸른
바다로 간다
상처가 나면 어떠랴
고독마저 보이지 않는 그 바다에
푸르게 묻히고 싶다

바람에 잠긴 노을은
꿈을 꾸는데
허옇게 바닥을 드러내놓고
달려드는
저 파도를 어쩔 것인가

을씨년스런 시간 속에 묻혀
묵은 껍질을 벗지 못한 나는
꿈이라도 꾸어야지
가슴을 비운 물거품처럼
지치기라도 해야지

어딘가에서
상처를 내고 숨어버린
사랑했던 날들이여

바람이 빠져나간 머리카락 사이로
실신한 바다가 보일 때까지
침묵에 시달리게 하라
혼돈의 밤 물결 위에 가라앉은
너를 그만 잊게하라 

《32》

바람 부는 날의 어느 것 하나

박소향

굴곡진 시간 사이로 바람이 샌다
평범한 것 중
지극히 평범한 것 중에 들지 못했던
그 시간 사이로 바람의 때가 묻어난다

어디쯤에서 버렸는지
어디쯤에서 잃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아 한 쪽
비어있는 한 구석이 오늘따라
이리도 시리다

눈물로 커 가는 나이테
하얗게 늘어난 머리카락 수만큼
가슴의 껍질도 두꺼워 지고
사랑도 때로 구멍이 뚫려
숭숭 바람이 새더라

그래도
죽어라 사랑한다는 그 말에
푹죽 처럼 터지는 설레임 있어
가을 한 철 고이 익은 열망
꽃씨처럼 거둔다  

《33》
바람 부는 봄날에는

박소향


흐득 익어간 봄날이
저린 걸음으로 창밖을 기웃거린다

아무도 모르게 옷속으로 파고드는
파란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도
봄꽃 닮은 가슴으로 하얗게 물들고

조금씩 부족한 목마름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나도

바람부는 이 봄날
남몰래 피고지는 들꽃인지 모른다  

《34》
백서

박소향

그리움의 조각들이
비처럼 내리는 날

고독을 불러모아
나를 채우고 싶지는 않다.

너 없는 빈 자리
안개처럼 스미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고 싶지는 않다.

실컷 울다가
실컷 지치다가
그리우면 그 때 갈 것이다.

꽃처럼 흩날리는 이별의 향기
깨끗하게 지워질 너의 그림자

침묵 속에 깃드는
어둠과 빛의 아, 슬픈 사랑 

《35》
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그리움을요  

《36》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박소향

봄은 여전히 나를 찾아와
낯익은 기억으로 부풀어오르다가
솜털에 날린 바람 한 자락
옆자리에 툭 떨궈놓고 간다

나부(裸婦)의 살결처럼 물오른 산야에
가지의 입김 푸르게 살아나면
태초의 첫날처럼
얄미운 꽃잎 환히 피어나겠다

봄은 그렇게 나를 찾아와
괜시리 없는 눈물 만들어 주고
이름 모를 풀꽃 하나
허전히 눈물샘에 깃들이게 한다

아 그 봄날 나도
사랑 꽃씨 한 알 네 가슴에 묻어
나 없는 한 동안도
여전히 봄이오면 피어나게 해야겠다

《37》
사는 일이 쓸쓸할 때

박소향

사람 없이 혼자로도
행복하고 싶을 때
오후가 밀려드는 강가에 가 보라

거기 무수한 혈흔의 그리움이 숨어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지나가는 쓸쓸한 행복
조금 보일지도 모른다

사랑없이 혼자로도
충만하고 싶을 때
빛살 한 가득 화려한 저녁 바다로 가보라

거기 끊을 수 없는 절망까지 노을에 타는
눈부신 허무가 표안나게 쏟아져
씁씁한 소망 하나 수줍음도 없이
내가 던진 무수한 말에 물들어 갈 것이다

이제는
가슴 다 닳아버린 너처럼
미칠 듯 갑갑한 열정이 발갛게 터져
벌어진 틈새로 사랑은 졸고

어느 날 문득
사람 없이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있는 걸 익히게 되는
사는 일이 쓸쓸하게 될 때

나는
농익은 나이가 들고
이별을 하고
바보가 될 것이다 

《38》
사랑한 후에

박소향

절망의 순간을 알기 전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없는 꽃잎들이
사랑의 기억으로 하얗게 부풀어올라
허전한 미련들로 눈물겹게 일어서는 그 날을
당신의 사랑처럼 기다려야 했다

흩어지는 구름이 추억처럼 쏟아내는
노을의 마지막 불빛 자화상위로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그대 영혼이
쓸쓸한 입맞춤의 숨결처럼 그리웠다

아, 나는 언제고 그대 품이고 싶어라
부드러운 사연으로
가슴 벅찬 그리움을 발자국처럼 남기는
나 언제고 그대 품안이고 싶어라

빗발치는 마음의 문을 닫을 시간이면
창을 열고 찾아 드는 별들의 노래처럼
사랑이 꿈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39》
사랑한다면

박소향

살면서
한번쯤
마음껏 사랑하여라

그리고
한번쯤
마음껏 절망하여라

그것으로
인생이
한번쯤
흔들릴 수 있도록…… 

《40》
사랑할 수 있는 시간

박소향

사랑할 수 있어
아름다운 시간들 속에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날 문득
벅찬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사랑을
열병처럼 앓다가

감당키 어려운 아픔을 안다는 것
그것도 행복한 일이다.

따스한 바람 안고
봄 햇살에 꽃피듯
간절히 마음으로

기쁨의 날들을 기다리는 것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영원하지 않을 영원을 영원처럼 믿고
사랑을 위해 하루를 산다는 것
그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41》
새해 소망의 기도

박소향

새해가 되면
가슴 가득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 흘려 정진하게 하소서
결과에 상관 없이
내가 노력한만큼 감사하게 하시고
베푼 것 보다는 받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갖게 하소서
높은 곳 보다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하시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릴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하소서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라도
원망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한 가슴을 갖게 하시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서의 손도 갖게 하소서
사람이 사랑으로, 세상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허물이 덮혀지는
그 사랑을 내가 먼저 실천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축복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먼저 당도한다는
믿음으로 늘 준비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42》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박소향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딘 줄 아세요?
거기는 가슴에서 머리까지랍니다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는데
평생을 걸리는 사람도 있고
머리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손으로 재보면 두 뼘밖에 안 되는데
평생을 걸려서야 가 볼 수 있는
그렇게 먼 거리랍니다

가슴은 뜨겁고
가슴은 너그럽고
가슴은 사랑하는데
머리는 냉정하고
머리는 이기적이고
머리는 계산을 한답니다

두 뼘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의 가슴과 머리.
어쩌면 저도 지금
도달하지 못하고
가고 있는 중인지도요

가슴에서 머리까지
가장 먼 거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43》
水程 노을

박소향

갈라진 대지의 살 냄새가 허공에 날리면
빛위 틈새로 꽂히는 혈의 황혼
목 울을 타고 흘러내린 열정의 숨 끝에
가시지 않은 목마름처럼 그가 늘 숨어 있다

서서히 쓰러져 가는 노을의 얼굴만큼
하루를 달구던 가슴 한 쪽에 기대
붉은 취기가 되고 싶은 나는
너를 조금씩 닮아가나 보다

네가 없는 거리만큼 쓸쓸한 계절이
또 있을까
바람마저 앉지 않는 마른 가지에
조용히 눕는 수정水程 노을

손가락 마디마디 실핏줄을 건드리며
결코 빈 허공일 수 없는 네 등줄기에
빈곤한 시어 숨길 수밖에 없는 나는
수줍은 저녁별이라도 되어야지

뜨겁게 타다만 정염의 혀끝에
순수의 눈물로 비틀대며 부서지는
초라한 이름이라도 되어야지

살얼음진 언덕에 눈부신 발아를 꿈꾸는
씨앗의 그 환한 희망의 노래처럼
이제 맘껏 너를 흔들며
감추었던 나신裸身을 벗어야겠다 

《44》
슬픈 바다의 향기

박소향

한때 그 시간의 바다는 슬펐다
빗줄기마저 씻어내지 못한
때묻은 가슴 한 쪽에 허전한 속 내음을 흘리며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시장기
텅 빈 내장의 절규하는 소요가 슬프고
손가락에 끼워져 떠날 듯 말 듯 망설이는
의미 있는 허무가 슬프다

이렇게
무작정 버려져도 아무 할 말 없고
목숨보다 귀하게 다림질하던 그리움 한쪽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도
할 말이 없다

나를 슬프게 하는 바다
슬픈 바다의 향기가 시간 속에 멈추어 있다
순간으로
또한, 영원으로

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다는 건
왜 그런지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45》
시월의 열정

박소향

그렇게 터질 것을
그리 터지고 나야 개운할 것을
결국 상처자국을 남기고야 마는
시월의 붉은 열정은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에
충분히 멋진 낙화洛花였으리
상처 없이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저 낙엽의 몸짓이 빈 말이 아니라면
노을빛 강가에 조용히 날아오르는
나는 한 마리 은빛 새이리

《46》
아름다운 사람

박소향

궂이 빛나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어도 하얘 보이고
아무리 감추려 해도 고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날에는 따뜻해 보이고
바람부는 날에는 넓은 창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쓸쓸한 날
문득 풍성하게 넘치는 사랑으로 든든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은 얼고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너머로 눈꽃송이처럼
눈부신 그리움이 되어 넘실되는 사람

오이처럼 싱그럽고
초코렛처럼 달콤하여 얼어버린 마음 녹이러
가고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더 미안해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더 사랑하는 사람
언제라도 슬픔을 내려놓고
기대어도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거칠은 얼굴도 고옵게 봐주는 사람
빗나간 마음도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보다
옷차림보다
마음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

가진 것 보다 없는 것 보다
못 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더 먼저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와 위로와 힘과 사랑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가진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47》
여름비

박소향

가마귀 날아간 칠월칠석 들길에
여름비 내리고
먼 산 안개에 젖어
마을로 가까워오면

촌로의 모자처럼 낮게 걸린 저녁이
출출한 툇마루에 걸터앉아
젖은 연기처럼 번진다

능소화 담장 위로
몇 조각
그리움 저무는 소리
곰방대 물고 앉은 할아버지 목소리

길 건너 옥수수 밭에는
아직도 쏴아쏴아 여름비 소리 

《48》
월셋방 세레나데

박소향

하 세월이 흘리고 간 시간의 뒤안길에서
분주히 하루의 시름을 뜯어내는 사람들
요란한 상층권은 세상에게 떠맡기고
한 귀로 흘려버린 신문지 속 헛된 세상
땅거미지는 지붕 끝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이끼 낀 가난
찿아올 저녁을 기다리는 무수한 고생이여

사는 일은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큼 힘이 들어
가슴에 묻어둔 꿈 월력처럼 말아두고
검푸른 전차칸에 소음처럼 태워가는
파도 같은 인생 노래
어둠의 마지막 시간이 내려놓는 최후의 전당

대문도 없는 벽에
아기처럼 보채는 흰 비니루가
창 틈에서 밤새 꽃샘추위로 펄럭이는데
얼굴 숙인 낮은 방이 절망만은 아닌 것은
그래도 해바라기처럼 웃을 수 있는
신앙 같은 사랑 때문이리라

아, 뻐근한 가슴 한 쪽으로
가만 가만 파고드는 슬픔섞인 용기여
헝클어진 상처 곁에
소리 없는 사나이의 위로여
긴 한숨 속에 그물처럼 걸려 식어버린
그들의 달빛 같은 세레나데  

《49》
유리遊離 눈물

박소향

무채색 혈흔이 낭자하게 떨어지다
산산이 깨어져 닿은 그 것에
살이 베인다

바닥까지 차오른 빗물을 끌어안고
숱하게 흔들리며 떠내려가던 밤
손끝에 걸리는 모든 것이
다 아팠다

작별의 날과 악수하던
끝 날 어느 시간처럼
쓰러질 듯한 어둠의 빈혈과
차가운 비悲의 유전流轉이
날마다 문을 여는 곳

서걱이며 방랑하는 억새꽃과 같이
울음투성이 허무에 가슴을 내어 주고
가끔씩 찾아오는 은빛 소망 하나
그 곳에 둔다

눈물의 자리에 견고히 존재하는
어떤 슬픔까지도
모든 사랑의 영지(靈地)임을...

유려(流麗)한 부산물에
조각조각 헤어진 나도
오늘
흐트러진 한 여자의 유서가 되고 있음이다

유리(遊離)눈물에 베어버린 살점을
님에게 건네며
가슴 어느 기슭 쯤에
내 숨의 자취를 남기듯이  

《50》
유토피아

박소향

불치의 영혼을 앓는
금지된 기도의 시작
조난 당한 꿈속에서조차 무너져 내리는
길 잃은 약속들
그 고통의 흐느낌 뒤에 오는 이탈의 바다 위에
고혹의 섬처럼 표류하는 마지막 열정

사랑을 맨 입에
그리움을 단숨에
허기진 영혼 속에 팽팽히 집어넣고
흘린 기다림을
다 못 채운 사랑을
밤새도록 발라먹고 있다

영원히 배부르지 않을 유토피아 식탁에서  

《51》
이별은 처음처럼 사랑은 마지막처럼

박소향

길 위에 서면 나는 묻는다.

길이 끝나면
그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작이 있을까
희망이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작별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곳까지
마음은 먼저 가는데
길 끝에 서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희망도
늪도……
흔들리는 안개의 계절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혼자 부르는
황홀한 노래의 몸 짓 뿐이라는 것.

희망과 꿈이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교차하는 그 곳에서
홀로 남은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

사랑을 준비하라고
내게 말한 너는
그곳에 늘 없었다.

길 끝에 서면
무엇인가 늘 아쉬웠던
그 날..

이별은 시작되고
그 시간……
사랑은 마지막이 된다. 

《52》
이별하는 일

박소향

비 오지 않아도
바람 불지 않아도
항상 있는 빛으로 피어 나는 꽃들처럼
계절이 오면 때가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너는 바람으로 거기 남았는가
멈출수 없는 숨결로
절규하며 부대끼는
물거품으로 남았는가

사랑하는 일이 힘들때
그렇게 한번 흔들려 볼 일이다
한번은 오고야 말 폭풍같은 날들을
기다릴 일이다

빈 등허리로 숨죽이며 혼자 우는 일
무디어진 소망이 앞에 있고
비로소 혼자임을 깨닫는 일이다  

《53》
처음의 사랑처럼

박소향

눈이 부셔
뜰 수가 없어
하얗게 거품을 날리며
손끝으로 빠져나가는
미친 사랑의 노래

목숨을 걸고라도
부서지고 싶은
처음의 사랑처럼
절망의 희열을 앓는다

풀리지 않는 매듭 사이에서
푸르게 날고 있는
마른 영혼의 춤사위는
황홀한 꿈의 흔적인가

멈추지 않는 그리움에
너를 숨기고
폭풍같은 허무의 잔에
시를 따른다

사랑을 알았던
그 시간을 위하여
너를 알았던
목쉰 눈물의
눈부신 꿈을 위하여  

《54》
흐르는 강물처럼

박소향


꿈꾸는 조약돌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우리들의 노래를 아십니까

거북처럼 달려 오던 봄이
소슬바람 이고 앉아
꽃 그늘 아래 퍼지는데
수척한 물살이 퍼 올리는 밤 노래는
누가 밝고 가는 시린 가슴입니까

당신이 남겨 놓으신 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궂이
잊으라 하시면
대체 슬퍼하는 내 그리움은
누구의 몫입니까

당신을 곁에 놓고도
눈뜨고 지키는 강 너머 불 빛
먼 물가에 김이 오를 때
새벽은 이내 꽃처럼 피어나고
한줄기 푸른 연기가 햇살에 따사롭습니다

아, 당신을 떠날 수 없는 나는
유리창에 부딪치는 차가운 입맞춤 같습니다
해 이른 봄 날
이름 모를 꿈 하나 강 물결에 떨궈 놓고
딸랑딸랑 바람소리에 섞여
당신의 사랑을 안고 나는 다시 걷습니다 

《55》
흐린 날의 기억

박소향

비가 내리는 동안
호수는 늦게까지 열려있었다

물 속에 잠긴 이른 저녁 길을
걷고 있는 동안도
구름 속의 하늘은 푸르러 있었다

살구나무 울타리에 걸려
한참이나 서성대던 장미빛 황혼으로
차가운 비의 유혹을 비집고 들어와 가슴에 고인
이 그리움은
절망이겠지

우리 헤어지던 흐린 날 이후
사소한 일상 속에 따라 다니던
그리운 얼굴 하나
툭!
젖은 비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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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시 모음 41편

《1》 12월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래도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 것도 녹진 않았다 

《2》 12월

강연호

그 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 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풍설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지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3》 내 영혼에 쌓이는 12월

고은영

봉숭아 대궁에 몰래 심던
연녹색 사랑도 떠나가고
지금은 돌아와 내 앞에 선
황혼의 나루터

이별은 들숨으로 와
내 속 사람에
까무러치는 울혈로 부각되었다

황혼도 아름다운 해거름
고백하는 정적은 침묵으로 눈감고
자연은 사무친 눈 속에 날 오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가난해야 하리니
철저하게 낮아져야 하리니

일제히 함성 하는 저
동짓달 긴 밤이 뱉는 절망 위에
꽁꽁 언 채 미끄러지는 의식 밑바닥
살아야 하는 절망을
나는 오히려 희망이라 말하리

툭툭,
노송에 앉은 눈 떨어지는 소리
영혼 갈피 갈피에
12월이 쌓이기 시작했다  

《4》 12월

곽춘진

너 올 때 슬그머니
내게 왔듯
뗘나야 하는 지금 이달
그러고 보니
나 또한 혼자서 너를 만나
지내 온 열 두 달의 끝달, 12월
이제 가야하는 마지막의
인사로
너를 혼자 보낼려는데
그런데
그사이 아마도 내가 너를
사랑했었나 보다
이렇게 미련 남는 것 보니
그래도 이젠 가야할 시간, 열두 달
붙잡을 새 없이 붙잡을 수 없이
가야한다니
내 이제 서러운 마음으로
너를 보낸다.  

《5》 섣달 그믐

김사인

또 한 잔을 부어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넣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6》 12월

김수미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그 속에 일 년의 모든 것이 갈무리됩니다.

햇살이 따뜻했던 봄.
파도 출렁이던 바닷가의 여름.
노랗게 붉게 물들던 가을.

이제
그 모든 빛을
하나로 감싸 안을 겨울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걸어왔던 발자국들이
기쁨과 슬픔의 흔적을 만들며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기쁜 순간의 찬란함은
내게 벅찬 가슴을 선물했고
슬픈 기억의 하얀 눈물은
아픈 상처를 어루만졌습니다.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내 기억 속에 간직하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의 밝은 태양을 품으렵니다.
우리에겐
내일이란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7》 12월을 맞으며

김영국

다 타고만 붉은 단풍이
한 줌의 재로 남은 가을이 진다
홀연히 길떠나는 11월
그리움만 남겨둔 채 떠나보내고
하얀 눈 꽃송이 날리는 12월을 맞이하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아름다운 추억들
접어 두었던 이상의 꿈들을
12월을 맞이하여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
결실의 알곡으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성탄의 축복이 깃든 12월
새로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지고
새해를 준비하는 희망으로
마음속의 묵은 때 말끔히 씻어 버리고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겸허하게 12월을 품에 안으련다. 

《8》 12월이 가기 전에

김용호

겨울 햇살은 오늘 한때 내 작업실
유리창에 잠시 머물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지나
빠알간 벽돌집 저편으로 사라 지려합니다.

그림자에 미끄러져 비스듬히 누운 많은 아쉬움도
이제 12월과 떠나려 합니다.

지나간 날들
돌이켜보면 얽혀서 지네 오던 세연 들에게
얼굴 가득 미소가 펴지도록
정다운 존재가 되어 주지 못함이 죄로 여겨집니다.

12월이 가기 전에
세연 들과
뜻 있음의 좋은 결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깊이 생각해보니
내세울 내 자랑거리가 없어 부끄럽습니다.

《9》 12월의 무언극

김종제

새들이 숲을 버리고 일제히 비상한다
나무들도 거친 옷을 벗어버리고 뒤를 좇아 비상한다
깃든 자리를 흩으리지 않은 채 둥지속에 꽃 한 송이씩 물고
하늘의 어딘가로 푸드득 날아간다
몇몇 꽃들은 이미 세상의 절벽 끝까지 기어 올라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고 몇몇 나무의 가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발 디딘 곳으로부터 나를 풀쩍 뛰어 날아 오르는 것들
나무에게 있어서 푸르렀던 것들
꽃에게 있어서 희거나 검거나 붉거나 노랗거나
숲에게 있어서 날개를 펼쳐 보이며 날아가는 것들
세상이라는 무대에 몸을 펼쳐 보이는 짓이다
말 없이 행하는 저 고요한 면벽의 저것들을 소리 없는 언어라고 하자
저것들을 살아있는 말이라고 하자
이제 봄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두텁게 얼어붙은 언어가, 말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 위로 고대에 사라진 상형문자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것이니
12월의 저 몸으로 쓰여진 글을 해석하라 

《10》 12월

노현숙

낡은 베란다의 문은 닫혀 있다
닫힌 문 안에서
다시 활짝 열어 젖히며
서로의 옷을 벗어 부칠 때
침묵으로 감아버리고 싶은
섣달 그믐날
나즈막한 지붕 아래
달빛이 내려앉고 있다 

《11》 12월에 꿈꾸는 사랑

도지현

하얗게 피어나는 기다림이 있다
천사의 미소 머금고
꿈 나래 펼치듯
아름다운 사랑이 오길 꿈꾼다

조그만 가슴에 품은 꽃씨 하나
하얀 그리움으로 피어나
애오라지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숙성 된 와인 맛 같은 사랑이고 싶은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과 대지에서
황홀하리 만치 아름다운
하얀색 주단을 깔아 놓은
순백의 영혼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싶다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굴레 속에
영원이라는 단어 아로새기고
가슴, 가슴마다 에는
순백의 순수한 사랑을 꽃 피우고 싶다

《12》 12월의 기도

도지현

하얗게 내린 눈 위로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
그 위로 또 눈이 쌓이더라도
다시 찍는 자국은
사랑의 흔적이게 하소서

차가운 바람
코를 베에 물고 가더라도
가슴은 봄 뜨락의
따사로운 햇볕이게 하소서

빈한한 가슴에
허기까지 겹쳤다 하더라도
신이시여
그들의 곳간은 풍요롭게 하소서

파리한 영혼 삭막하더라도
여름 숲 속의 윤기 나는 푸름
가을 들녘의 넉넉함이
가슴을 가득 채워
차가운 겨울밤 따스하게 지핀 온기,
신이시여
모든 이들에게 밝음을 주는
별보다 찬란한 등불을 주소서 

《13》 12월 끝자락에서

목필균

한줄기 바람으로 흐른다.
멈출 수없이 날아다닌 시공의
긴 터널 속에 박쥐처럼 드나들던
어둠과 빛이 뼈에 박히고
돌부리에 채여 멍든 엄지발톱이
이제쯤 깎여 나가 잊혀질만한 아픔도
연륜 속에 상처로 묻혀진다.

한 줄기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낯선 허공 속을 퍼덕거리며
미숙하게 날갯짓하는 작은 새가
내일이라는 반투명 공간을 향해
접었던 날개 다시 펼친다.  

《14》 12월의 연가

문현우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볼을 스친다
헐벗고 선 나목들

오늘따라 그대가 이렇게 생각남은
어인 연유인가
창 밖 회빛 하늘을 이고
저 멀리 아스라히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

보고픈 사람의 온기가
스며있을 것 같은
사진 속의 미소짓는 모습
부서져 내리는
숱한 의미와 사념의 부스러기들
성긴 응고체

잿빛 하늘 아래
몸을 움츠리며
떠오르는 형상 하나,
눈을 들어 허공을 보며
그리움을 띄워보낸다. 

《15》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16》 12월의 노래

박종학

마침내 달랑 한 장
그렇지만 마지막은 싫어요
처음 시작이라 불러 주세요
차가운 손길
하지만 마음만은 아니랍니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입니다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나를 보면 추억으로 여깁니다
나를 보면 삶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입니다
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나는 12월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과 함께
외로운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해를 뒤돌아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기쁨의 합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싶습니다
나는 12월입니다  

《17》 12월 저녁의 편지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8》 12월이라는 종착역

안성란

정신 없이 달려 왔다
넘어지고 다치고 눈물 흘리면서
달려간 길에 12월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니

지나간 시간이 발목을 잡아놓고
돌아보는 맑은 눈동자를
1년이라는 상자에
소담스럽게 담아 놓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여유를 간직할 틈도 없이
정신 없이 또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남겨버린다

지치지도 않고
주춤거리지도 않고
시간은 또 흘러 마음에 담는 일기장을
한쪽 두 쪽 펼쳐 보게된다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하는
인생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어버리는 삶이라지만

무엇을 얻었냐 보다
무엇을 잃어 버렸는가를 먼저 생각하며
인생을 그려놓는 일기장에
버려야 하는것을 기록하려고 한다

살아야 한다 것
살아 있다는 것
두가지 모두 중요하겠지만

둘중 하나를 간직해야 한다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많은 시간을 잊고 살았지만
분명한 것은 버려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싶다

하나 둘 생각해 본
다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하여
나는 12월을 보내면서
무엇을 버려야 할까. 

《19》 십이월

양전형

행인들이 이따금 어깨를 움츠린다
언뜻, 가야 할 때임을 알아챈 은행잎들
말없이 욕망의 손 내리더니
무리 지어 허정허정 먼 길 나섰다
아아 해마다 이맘때 도지는 지병
내 안에서 세상을 앓던 수많은 단풍잎들
줄줄이 떨어지는 병
뼈끝까지 시려 온다 또다시 가야겠다

그렁그렁한 눈물 탈탈 털어내며
사람아 사람아
가슴이 벌겋게 아린 사람아
내 안에 들어와
함께 별을 헤아리던 사람아
어차피 세상살이는 눈물로 시작되는 것

들찬 어깨에 동동 매달리며
한사코 가지 않겠다던
가랑잎의 허튼 맹세는 들먹이지 말자
꽃잎이 늘 바람을 용서하여 왔듯
우리도 한때는
향기 그윽한 어느 꽃들이었듯
쓸쓸한 세상 마냥 품고
뒹굴며 뒹굴며 먼 길 가자  

《20》 세모

엄원태

한 해가 저문다
파도 같은 날들이 철썩이며 지나갔다
지금, 또 누가
남은 하루마저 밀어내고 있다
가고픈 곳 가지 못했고
보고픈 사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생활이란 게 그렇다
다만, 밥물처럼 끓어 넘치는 그리움 있다
막 돋아난 초저녁별에 묻는다
왜 평화가 상처와 고통을 거쳐서야
이윽고 오는지를……
지금은 세상 바람이 별에 가 닿는 시간
초승달이 먼저 눈 떠,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21》 12월의 독백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22》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23》 12월의 연가

오순화

추억이 고운 계절
아름드리 흐벅지던 단풍잎도
제 품에 안겼다.

가을은 성큼성큼 걷다
앞서오는 초겨울 찬바람에
손사래치며 뛰어간다.

옛사랑 인사만 했는데 
아쉬운 것은 아쉬운 데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데로 
못다 부른 노래도 이제 그만.

새하얀 첫눈이
소복소복 보듬어 주리라.

12월에는
사랑과 욕망, 미움
품었던 꿈과 소망까지도
모두 사랑이란 이름으로 보내야한다.

그래야 채울 수 있기에 


《24》 12월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25》 12월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라하 회개하라
폭석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26》 12월의 노래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말을 많이 했던
빈 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27》 12월의 시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28》 12월의 엽서

이해인

소매끝에 묻어나는 바람냄새가
겨울이란 계절이 더 깊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정신없이 숨차게 지내온 시간속에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던 내 조급함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 해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새날에 부푼기대도
깨알같이 적었던 지키기위한 맹세도
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끝 마쳐야 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붉게 물들어 숨어버리는 찬란했던 태양을
깊은한숨으로 바라다 봅니다.
그저...침묵속에 마른 웃음이 나옵니다.

누구보다 강한 내가 되고 싶어서
잔인하게 벼랑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무언가 이루기를 소망했는데....
상처투성이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데....
세상은 또 한번에 허물을 벗습니다.

마음에 병이 났습니다.
삶에 지치고...
지친 나와는 상관없이 갈곳을 가는 냉정한 날들때문에
멍하니.. 침묵으로 볼수밖에는...
그저 끝자락을 붙잡고..조금만 천천히 떠나주기를...

그렇다고 아무것도 변할것도 없는데..
떼라도 쓰고 싶어집니다..
멀리서라도 지금을 기억하고 싶으니
조금만 조금만...더디 떠나주기를....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 또 부질없는 바램을 합니다.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29》 12월의 노래

이효녕

한해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
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인생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뭇가지에서 놀던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간 그 자리

나이테를 하나 더 만들어
겨울안개 뒤에 서있네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안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섣달눈은

가장 가벼운데도
달력 맨 끝에 서있다가
허공의 허파에서 계속 숨쉬네

차가워진 가슴과 들녘에 앉은
하얀 눈 사이로 다른 세상을 향하여

언제나 따스하게 안아주려는
또 한 세월을 향하여
그 숱한 생각들의 깊이를 향하여

한 해를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숨겨진 향기가 겨울안개 뒤에 서서
떠도는 바람이 가슴을 두드리네

오가는 세월을 안고
오 지워지는 세월을 안고.  

《30》 12월 우리는

임영준

돌아보지도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갈등으로 파국으로
뒷걸음쳐 다시 제 자리구나
정월에 심었던 기둥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처참히 누웠구나
갈 길은 멀고 식솔은 각각이고
고난의 변경이 멀지 않았구나
환골탈태하는 인걸이 없어
또 비감한 겨울을 지내야 하는구나

언제나 우리는
개운하고 찬란한 12월을 만나게 될까
과연 우리에게
개운한 12월이 있기나 한 것일까 

《31》 12월

임은숙

무수히 쌓여있는
낙엽들을
밀어내며 묻어버리며
긴 팔을 뻗어
뭔가 숨기려하는

12월은
그렇게 온다

털어내는
바람사이로
언뜻 스치는 기억 한 조각에
애써 태연한 척

바람 끝자락에 달라붙는
차가운 적막

아쉬운 듯 슬픈 듯
하얀 한숨을 흘리며

12월은
그렇게 온다 

《32》 12월의 일기

전진옥

한 장 남은 달력, 12월이군요
어느덧 겨울이 온 모양입니다
길 풀섶 작은 풀꽃마저도
제 미소 잃고 꽃향기마저 사르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허공 하늘에 바람 소리
휑하니 쓸쓸하지만
여름내 흘린 땀방울이
바람 소리 그립게 하듯
겨울 여백도 아름답습니다

떠나보내야 함은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하고
오고 가는 계절의 순환 앞에
또 새로운 무언의 희망이 열리니
처음처럼 새로이 태어나는 마음

온몸으로 솟구쳐 꿈을 펼쳐내는 태양처럼
내 삶의 이유가 아름답다면
올 한해도 나눔을 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33》 12월

장석주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34》 행복한 12월

정용철

나는 12월입니다
열한달 뒤에서 머무르다가
앞으로 나오니
친구들은 다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았네요

돌아설 수도
더 갈 곳도 없는 끝자락에서
나는 지금
많이 외롭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나는 지금
나의 외로움으로 희망을 만들고
나의 슬픔으로 기쁨을 만들며

나의 아픔으로
사랑과 평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이제부터 나를
행복한 12월이라 불러 주세요 

《35》 12월의 다짐

조미하

지난 시간 아쉬움보다
아직 남은 한 달에
감사하며 지내겠습니다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반성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겠습니다

나만을 생각했던 이기심에서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 가슴을
활짝 열겠습니다

버릴 것에 미련 두지 않고
비움으로써 자유로워지는걸
느끼겠습니다

보내는 마음과
맞이하는 기쁨이 교차하는 12월을
기꺼이 두 팔 벌려 반기겠습니다 

《36》 성탄전야

최영철

맛난 것 먹고 빵빵해진 일가족 오색 풍선 따라
땡그랑 땡그랑 배고프다 노래하는 자선냄비 따라
행복 몇 스푼 눈발로 내리고 있었대요
더운 국물이나 마셔 두려는 가난한 식탁에
저 멀리 하늘에서 뭉텅뭉텅 수제비 알로 오시다가
하얀 쌀 소록소록 눈발로 오시다가
그만 내려앉을 곳 잃고
성탄 폭죽 선물 꾸러미 어깨 위로 내리고 있었대요
하얀 쌀 수제비 빈 장독에 닿기를 기다리다
네 살 두 살 아이 재워주고 어마는 술집 나가고
아빠는 인형 뽑으러 가셨대요
인형 다 뽑으면 시름 다 가고 꿈 같은 새날 온다며
아이들 깰까봐 살금살금 문 잠그고 가셨대요
꿈결 아이들 구름 타고 다니며
하얀 쌀 수제비 받아 붕어빵 빚고 산새로 날리고
불살라 언 손발 쬐며 다 녹여버리고
엄마 아빠 오시면 야단 맞을까봐
그 불길 따라 하늘로 하늘로 올라 갔었대요
소방차 오고 아빠는 눈이 커다란
눈사람 인형 한 아름 뽑아 오셨대요
아이들 훨훨 날개를 단 줄 모르고
엄마는 실비주점 더러워진 접시를 닦으며
내년 봄 유아원 보낼 생각에
유행가 한 자락 흥얼거리고 있었대요 

《37》 한 해의 종착역 12월

최한식

어느덧 이 한해도 다 지나가고
이제 쓸쓸한 겨울 찬바람 많이
내 곁을 스치는구나,

좋은날 굿은 날 그 풍파 이겨내고
이 해의 마지막 종착역에 다달아 왔구나
아파하던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좋았던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그러나 이제는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내 마음에 석양이 물들어오니,

이해의 마지막 끝자락
오늘도 분주히 하나하나
정리를 해 본다.  

《38》 12월 시

최홍윤

바람이 부네
살아 있음이 고마워 살아야겠네!

나이가 들어 할 일은 많은데
짧은 해로 초조해지다 보니
긴긴 밤에 회한도 깊네

나목은 다 버리며
겨울의 하얀 눈을 기다리고

늘 푸른 솔은 계절을 잊고
한결같이 바람을 맞는데

살아 움직이는 것만
숨죽이며 종종걸음치네

세월 헤집고
바람에 타다

버릴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데
시간은 언제나 내 마음의 여백

세월이여, 나에게
한결같은 삶이게 해 주소서

《39》 12월 시

최홍윤

바람이 부네
살아 있음이 고마워 살아야겠네!

나이가 들어 할 일은 많은데
짧은 해로 초조해지다 보니
긴긴 밤에 회한도 깊네

나목은 다 버리며
겨울의 하얀 눈을 기다리고

늘 푸른 솔은 계절을 잊고
한결같이 바람을 맞는데

살아 움직이는 것만
숨죽이며 종종걸음치네

세월 헤집고
바람에 타다

버릴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데
시간은 언제나 내 마음의 여백

세월이여, 나에게
한결같은 삶이게 해 주소서

《40》 12월 1일

홍윤숙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41》 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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