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가 - 허난설헌

 

엊그제 젊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었니

소년행락*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어서 서러운 말씀 하자니 목이 멘다

부생모육* 신고*하여 이내 몸 길러 낼 제

공후배필*은 못 바라도 군자호구 원하더니 → 이상적 소망과 현실적 소망

삼생의 원업*이오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나 있어

당시*의 용심*하기 살얼음 디디는 듯 → 조심스러움

삼오이팔* 겨우 지나 천연여질* 절로 이니*

이 얼굴 이 태도로 백년기약 하였더니

연광* 훌훌하고 조물이 다시*하야

봄바람 가을 물이 뵈오리 북 지나듯 봄바람 가을 물

설빈화안* 어대두고 면목가증* 되었구나

내 얼굴 내 보거니 어느 님이 날 괼소냐*

스스로 참괴하니 누구를 원망하리 → 화자의 체념적 태도(자탄). 수원수구. * 세월의 덧없음과 늙은 자신에 대한 한탄

삼삼오오 야유원에 새 사람이 나단 말가

꽃 피고 날 저물 제 정처 없이 나가 있어

백마금편*으로 어대 어대 머무는고

원근을 모르거니 소식이야 더욱 알랴

인연을 끊었건들 생각이야 없을소냐 → 남편에 대한 그리움. 설의법.

얼굴을 못 보거든 그립기나 마르려믄

열두 때 길도 길샤 서른 날 지루하다 → 화자의 한과 외로움 강조. 남편에 대한 그리움.

옥창에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고 지는고

겨울 밤 차고 찬 때 자취눈* 섞어 내리고

여름날 길고 길 제 궂은비는 무슨 일인고

삼춘화류 호시절의 경물이 시름없다*

가을 달 방에 들고 실솔*이 상에 울 제

긴 한숨 떨어지는 눈물 속절없이 생각만 많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려울사 * 임에 대한 원망과 애달픈 심정

돌이켜 풀쳐 생각하니 이리하여 어이하리

청등*을 돌려놓고 녹기금 빗겨 안아

벽련화 한 곡조를 시름 조차 섞어 타니

소상* 야우의 댓소리 섯도는 듯

화표* 천년의 별학*이 우니는 듯 → 처량하고 구슬픈 화자

옥수*의 타는 수단 옛 소리 있다마는

부용장* 적막하니 뉘 귀에 들릴소니

간장이 구곡되야 구븨구븨 끊어져라 * 거문고를 타며 달래는 외로움과 한

차라리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 하니 → 임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물

바람에 지는 잎과 풀 속에 우는 짐승

무슨 일 원수로서 잠조차 깨우는가

천상의 견우직녀 은하수 막혀서도

칠월칠석 일년일도* 실기*치 아니거든

우리 임 가신 후는 무슨 약수* 가렸길래

오거나 가거나 소식조차 그쳤는가 → 임과의 만남을 막는 장애물(지는 잎, 짐승, 은하수, 약수)

난간에 비기어* 서서 임 가신 데 바라보니

초로*는 맺혀 있고 모운*이 지나갈 제

죽림 푸른 곳에 새소리 더욱 섧다 → 감정이입

세상에 서러운 사람 수없다 하려니와

박명한 홍안*이야 나 같은 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지위*로 살동말동 하여라 * 임을 기다리는 마음과 기구한 운명 한탄

 

 

* 하마 : 벌써, 이미

* 소년행락 : 어릴 적 즐겁게 지냄

* 일러도 : 말해 봐도

* 부생모육 : 아버지께서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길러주심

* 신고 :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씀. 또는 그런 고생.

* 공후배필 : 높은 벼슬아치의 아내

* 군자호구 : 군자의 좋은 짝

* 원업 : 원망스런 업보

* 장안유협 경박자 : 장안의 호탕한 풍류객. 경거망동하는 사람.

* 당시 : 시집 간 당시

* 용심 : 마음을 씀

* 삼오이팔 : 15~16살

* 천연여질 :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 이니 : 나타나니

* 연광 : 변하는 사철의 경치

* 다시 : 많이 시기함

* 설빈화안 : 고운 머릿결과 꽃 같은 얼굴

* 면목가증 : 밉고 역겨운 용모

* 괼소냐 : 사랑할 것인가

* 백마금편 : 호사스런 행장(대유법)

* 자취눈 : 자국눈.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눈.

* 시름없다 : 근심과 걱정으로 맥이 없다.

* 실솔 : 귀뚜라미

* 청등 : 청사초롱. 신혼방에 걸어 놓은 등.

* 소상 : 중국 남부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경치가 좋기로 이름이 나 있어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았음.

* 화표 : 묘 앞에 세우는 문. 망주석 따위가 있다.

* 별학 : 특별한 학

* 옥수 : 아름다운 손

* 부용장 : 연꽃을 그리거나 수놓은 방장(방문이나 창문에 치거나 두르는 휘장).

* 일년일도 : 일 년에 한 번

* 실기 : 시기를 놓침

* 약수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 속의 강. 길이가 3,000리나 되며 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 비기다 : 비스듬하게 기대다

* 초로 : 풀 이슬

* 모운 : 저녁 구름

* 홍안 : 붉은 얼굴이라는 뜻으로, 젊어서 혈색이 좋은 얼굴을 이르는 말



갈래 : 규방가사, 내방가사, 서정가사
성격 : 체념적, 절망적, 원망적
주제 :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과 한탄
표현상의 특징 :
- 감정이입(실솔)과 객관적 상관물(자최눈, 구즌비)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표현함
- 대구와 비유 등 여러 가지 표현 기교와 고사를 인용하여 작품 전체에 유려한 느낌이 남
화자 : 남편에게 버림 받은 '나'
시적 상황 : 남편의 사랑을 잃고 외로이 세월을 보내는 화자가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노래하고 있다.
정서 : 체념, 절망, 원망
태도 : 체념적, 절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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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별곡(靑山別曲)]    - 작자 미상 고려 가요-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ᄃᆞ래랑 먹고 쳥산(靑山)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ᄒᆞ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ᄯᅩ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ᄅᆞ래 살어리랏다
ᄂᆞᄆᆞ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ᄅᆞ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ᄉᆞ미 지ᇝ대예 올아셔 ᄒᆡ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ᄇᆡ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ᄆᆡ와 잡ᄉᆞ와니 내 엇디 ᄒᆞ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래랑 먹고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살겠노라 살겠노라 청산에 살겠노라.

머루와 다래를 먹고 청산에 살겠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여,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고 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물 아래로 날아가는 새 본다.

이끼 묻은 쟁기(농기구)를 가지고 물아래로 날아가는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엇디 호리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럭저럭 하여 낮은 지내왔건만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없이 사랑할 이도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래 살어리랏다

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래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겠노라 살겠노라 바다에 살겠노라

나문재, , 조개를 먹고 바다에 살겠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미 대에 올아셔 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외딴 부엌을 지나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奚琴)을 켜는 것을 듣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권의지로가(勸義指路辭)

여보소 사람들아! 이 내 말 들어보소.

큰 길은 어디 두고 사로로 가는가?

요순 때 닦은 길이 예부터 일렀는데,

너희는 무슨 일로 사로로 들었으며,

중니 때 높은 날이 이제까지 밝았는데,

너희는 무슨 일로 밤으로 다니는가?

인의로 길을 삼고 오륜으로 집을 삼아

이 길을 잃지 말고 저 집으로 가시거라.

그래도 모르거든 또 한 말 들어보소.

대개는 내 말할테니 찾기는 네 하여라.

천지 생겨날 때 오행이 갖췄으며,

사람이 태어날 때 오륜이 갖췄으니,

천지가 천지 아니고 오행이 천지오.

사람이 사람아니고 오륜이 사람이라.

하늘이 높았는데 이내 몸 돌아보며,

먼 일을 모르거든 눈 앞을 살피거라.

천지와 만물도 이 몸에 갖췄거든

요순과 공맹인들 오륜 밖의 사람일까?

가다가 쉬지 말고 만나 보게 가려무나.

남 없이 혼자 갈 때 더욱 조심 하려무나.

내 몸에 어진 일은 작다고 말지 말고,

남에게 싫은 일은 좋다 하고 하지 말라.

네 마음 정일하여 궐중을 잡아라.

계 견을 잃은 후에 찾을 줄 다 알아도

내 마음 잃은 후에 찾을 줄 모르는가?

탕무와 걸주 사이 만리 같건마는

처음에 갈라 질 때 의리에서 갈라졌고,

공맹과 양묵 사이 방촌인 듯 하지만

나중에 얻은 것이 초월 같이 되었으니,

이 사이 생각하면 그 아니 두려운가?

공맹의 말을 하고 공맹의 법을 하면,

공맹이 되려니와

도척의 옷을 입고, 도척의 말을 하면

이 아니 도척인가?

너희도 이를 보아 길을 바로 잡아라.

뷔귀도 나는 싫다. 이 마음 속이겠나?

빈천도 나는 좋다. 이 마음 여의겠나?

모첨의 쑥 길 때에 장자도 오나가나

누항에 해 높을 때 단표가 있고 없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어도

이 마음 얻은 것이 이 가운데 즐거워라.

천종 만사도 이 마음 옮기겠나?

금옥 은백으로 이 마음 옮기겠나?

진초의 부로도 생각하면 거짓이고,

조맹의 귀함도 생각하면 근심이라.

진실로 얻는다면, 가진 것이 내가 많다.

진실로 닦는다면, 귀한 것이 내가 많다.

연성 백벽은 값이나 생각게 하니

공경 대부는 제가 도로 배앗는다.

이 마음 이 기운을 하늘에서 타고나서

일월 같이 달렸으니 일시도 어려운데

제 뉘라고 갚혀질까?

진가의 백만병이 노설에 무너지니,

필부의 가진 뜻은 위무로도 어렵도다.

졸지에 생각하면 강자상에 못 찼으나

돌이켜 생각하니 천지간에 메였도다.

이 마음 이렇커든 둘 곳이 없겠는가?

마음으로 터를 삼고 적실로 집을 삼아

연비 어약을 다 주어 넣어 두고

일사 일물이 다 이 집안 것이로다.

맹자 호연장에 거기 대강 일러 있고,

주자 태극도에 그림까지 전했으니,

위선 위악이 이리 자세 하지만은

사람이 정이 없어 권치 못한 탓이런가?

천장 만구 밖에 그림까지 보였거늘

너희는 무슨 일로 이 길을 모르는가?

허령한 이 마음은 사람마다 두지만은

지성으로 지키어 공경으로 익혀라.

전지와 노비는 다툴 이나 있지만,

인의와 예지는 뉘라서 말리겠니?

마음껏 찾아내어 힘껏 가지거라.

일신의 윤한 덕이 남에게도 미치리라.

평생 여택이 자손에도 흐리리라.

경장 귀보는 이 밖에 또 없거늘

너희는 무슨 일로 귀한 줄 모르는가?

네 마음 깨끗이해 하류에 거치 말라.

당상에 올라 앉아 곡직을 말하리라.

내 마음 물이 되어 갈래갈래 흘러 간다.

이 물을 모르거든 물길을 알려무나.

중욕이 가시 되어 가는 길 가로 막고

인심이 잔도되어 가늘 길 끊어졌다.

소상죽 베어 내어 가지를 쓸어 치고

공정백 베어 내어 잔도를 이었구나.

인심이 홍수로 구로를 열었고

인심이 촉도라도 오정이 내었으니

하물며 묵은 길을 얼마나 다닐소냐?

탄탄 대도를 하늘 같이 닦아 두고

백만 창생을 다 가게 만든 후에

그 때야 다시 차려 대로로 의논하자.

중후한 장자는 이로써 되겠지만

사군자의 행신대도는 이만 갖고 안 되리라.

이 마음 찾은 후에 가으로 가지마라.

이 길에 나선 후에 가운데를 잃지마라.

동서 남북에도 안 속한 것 중이로다.

형용 성취도 보지 못 할 일이로다.

요순이 이 아니면 사해를 편케 하며

공맹이 이 아니면 일관을 법하겠나?

우탕 문무들도 얻은 것이 중이로다.

염락 관민들도 찾는 것이 중이로다.

예부터 이를 가져 대통을 전하시니,

생지 곤학도 얻은 것이 다 한가지

성인도 이 길이요, 현인도 이 길이라.

주문공 없은 후에 중도를 뉘 전할까?

현황 조화간에 알 이 없이 부쳤으니,

지의 중용을 맛 안 지 오래로다.

요순은 대성이라 배우면 요순이오.

정주는 대현이라 내 어이 못같을까?

이 중을 차려 있어 일마다 준비해라.

백사를 생각하면 경중이 다 있으며

만물을 헤아리면 장단이 다 있으니,

인의로 형을 삼고 예지로 추를 삼아

일전 일량을 가는 대로 나누어라.

과문 불입은 안자라도 하시려던

불개 기락은 우직인들 못 할 건가?

전성인 후성인이 역지즉 개연이라.

너희도 이를 보아 권을 알아 잡았어라.

마음에 이뤄 있고 골수에 배었으면,

조용히 얻어 있어 자연히 맞으리라.

절서를 알아낸 건 천지의 중이로다.

성인이 다시 나도 이 내 말 바꿀 건가?

천만인 모인 데도 나 혼자 말이로다.

하늘 땅 두 사이에 나와 셋 뿐이로다.

이 길에 나선 후에 요순의 길이려니,

처음에 이것 둘 때 네게 하여 두었지만,

인심이 번복하여 물욕에 묻혀 있다.

문전을 모르는데 원로를 어찌 알리?

물욕에 거추스뤄 별 뜻은 말아라.

주색에 깊이 취해 싸다니지 말아라.

행장을 다시 갖춰 새 마음 먹어라.

명심하여 생각하고 각골하여 잊지마라.

잘 가노라 닫지 말고 못 가노라 중지 말라.

그림자를 돌아보아 말을 따라 가거라.

흐르는 물이 되어 찬 후에 흘러가라.

싼 양식 다 먹거든 덕으로 가거라.

짚은 막대 다 닳거든 의를 짚고 가거라.

진실로 그렇게 살면 귀한 데가 많으리라.

삼달덕 모든 길로 성의관 찾아 가서

이천에 배를 띄워 지수로 건너서

명도께 길을 물어 가다가 저물거든

회암에 들어 자고 기수의 목욕하고

춘복을 떨쳐 입고, 무의 바람 쐬여

중점을 따라가면,

수인장 돌아들어 행단에 오르리라.

나도 첫 길이라 자세히 모르면서

남까지 가르치기 교만한 듯 하건마는

평생에 다닌 길을 모른다 할 것인가?

 

가다가 알 이 만나 다시 물어 가거라.[출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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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 /정철

 

옛한글

 

 























 

 

 

 

1. 은둔 생활 중 관찰사에 임명됨(부임의 여정)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페셧다. 平평丘구驛역 말을 가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현대어 풀이>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泉石膏 )이 되어, 은서지인 창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님께서)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경북궁 서문인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님께 하직을 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서 있다.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원주]는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구나.

2. 관내 순력과 관찰사로서의 포부
昭쇼陽양江강내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백髮발도 하도 할샤. 東동州주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하니, 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峰봉이 하마면 뵈리로다. 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 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는다, 몰아난다.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가타시고. 녜 일홈汲급長댱孺유 風풍彩채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현대어 풀이>소양강의 흘러내리는 물이 어디로 흘러든다는 말인가(임금 계신 한강으로 흘러들겠지)? 임금 곁을 떠나는 외로운 신하가 서울을 떠나매 (우국지정으로) 백발이 많기도 많구나.
동주[철원]의 밤을 겨우 새워(날이 새자마자) 북관정에 오르니, 임금 계신 서울의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웬만하면 보일 것도 같구나. 옛날 태봉국 궁예왕의 대궐 터였던 곳에 까막까치가 지저귀니, 한 나라의 흥하고 망함을 알고 우는가, 모르고 우는가.
이 곳이 옛날 한(漢)나라에 있던 '회양'이라는 이름과 공교롭게도 같구나. 중국의 회양 태수(太守)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급장유의 풍채를 이 곳 회양에서 다시 볼 것이 아닌가?(선정 포부를 밝힘)

3. 만폭동 폭포의 장관
營영中듕이 無무事사하고 時시節졀이 三삼月월인 제, 花화川쳔 시내길히 楓풍岳악으로 버더 잇다. 行행裝장을 다 떨티고 石셕逕경의 막대 디퍼, 百백川쳔洞동 겨테 두고 萬만瀑폭洞동 드러가니, 銀은 가튼 무지게, 玉옥 같은 龍룡의 초리, 섯돌며 뿜는 소리 十십里리의 자자시니,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현대어 풀이>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3월인 때, 화천(花川)의 시냇길이 금강산으로 뻗어 있다. 행장을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고,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니, 은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의 꼬리 같은 폭포가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멀리서 들을 때에는 우렛소리(천둥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 날리는 것 같구나!

4. 금강대에서의 신선적 풍모
金금剛강臺대 맨 우層층의 仙션鶴학이 삿기 치니, 春츈風풍 玉옥笛뎍聲셩의 첫잠을 깨돗던디, 縞호衣의玄현裳샹이 半반空공의 소소 뜨니, 西셔湖호 녯 主쥬人인을 반겨셔 넘노는 듯
<현대어 풀이>금강대 맨 꼭대기에 학이 새끼를 치니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선잠을 깨었던지, 흰 저고리 검은 치마로 단장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서호의 옛 주인 임포를 반기듯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구나!

5. 진헐대에서의 조망
小쇼香향爐노 大대香향爐노 눈 아래 구버보고, 正졍陽양寺사 眞진歇헐臺대 고텨 올나 안즌마리, 廬녀山산 眞진面면目목이 여긔야 다 뵈나다. 어와, 造조化화翁옹이 헌사토 헌사할샤. 날거든 뛰디 마나, 셧거든 솟디 마나. 芙부蓉용을 고잣는듯, 白백玉옥을 믓것는듯, 東동溟명을 박차는듯, 北북極극을 괴왓는듯. 놉흘시고 望망高고臺대, 외로올샤 穴혈望망峰봉이 하늘의 추미러 므슨 일을 사로리라 千쳔萬만劫겁 디나도록 구필 줄 모르는다. 어와 너여이고, 너 가트니 또 잇는가
<현대어 풀이>소향로봉과 대향로봉을 눈 아래 굽어보고, 정양사 진헐대에 다시 올라앉으니, 여산 같이 아름다운 금강산의 참모습이 여기서야 다 보인다. 아아, 조물주의 솜씨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저 수많은 봉우리들은 나는 듯 하면서도 뛰는 듯도 하고, 우뚝 섰으면서도 솟은 듯하니, 참으로 장관이로다. 또, 연꽃을 꽂아 놓은 듯, 백옥을 묶어 놓은 듯, 동해를 박차는 듯, 북극을 괴어 놓은 듯하구나.
높기도 하구나 망고대여, 외롭기도 하구나 혈망봉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그 지조가 놀랍구나.) 아, 너(망고대, 혈망봉)로구나. 너같은 높은 기상을 지닌(지조가 높은) 것이 또 있겠는가?

6. 개심대에서의 조망
開개心심臺대 고텨 올나 衆듕香향城셩 바라보며, 萬만二이千쳔峰봉을 歷녁歷녁히 혀여하니 峰봉마다 맷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맑거든 조티마나, 조커든 맑디 마나. 뎌 긔운 흐터 내야 人인傑걸을 만들고쟈. 形형容용도 그지업고 체체勢셰도 하도 할샤. 天텬地디 삼기실 제 自자然연이 되연마는, 이제 와 보게 되니 有유情정도 有유情정할샤. 毗비盧로峰봉 上샹上샹頭두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東동山산 泰태山산이 어느야 놉돗던고. 魯노國국 조븐 줄도 우리는 모르거든,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띠하야 젹닷말고. 어와 뎌 디위를 어이하면 알 거이고. 오르디 못하거니 나려가미 고이할가
<현대어 풀이>개심대에 다시 올라 중향성을 바라보며 만 이천 봉을 똑똑히 헤아려 보니, 봉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깨끗하지 말거나, 깨끗하거든 맑지나 말 것이지, 맑고 깨끗한 저 산봉우리의 빼어남이여! 저 맑고 깨끗한 기운을 흩어 내어 뛰어난 인재를 만들고 싶구나. 생긴 모양도 각양각색 다양도 하구나. 천지가 생겨날 때에(만 이천 봉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제 와서 보니 모두가 뜻이 있게 만들어진 듯하여 정답기도 정답구나!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 올라 본 사람이 누구이신가?(아마도 없으리라.) (공자님은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음을 알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다고 했으니,) 동산과 태산의 어느 것이 비로봉보다 높던가? 노나라가 좁은 줄도 우리는 모르거든, 하물며 넓거나 넓은 천하를 공자는 어찌하여 작다고 했는가? 아! 공자와 같은 그 높고 넓은 경지를 어찌하면 알 수 있겠는가?(공자의 호연지기를 도저히 따를 수 없네.) 오르지 못하는데 내려감이 무엇이 괴이할까?

7. 화룡소를 보며 선정에의 포부를 다짐
圓원通통골 가는길 獅사子자峰봉을 차자가니, 그 알페 너러바회 化화龍룡쇠 되여셰라. 千쳔年년 老노龍룡이 구비구비 서려 이셔, 晝듀夜야의 흘녀 내여 滄창海해예 니어시니, 風풍雲운을 언제 어더 三삼日일雨우를 디련는다. 陰음崖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스라
<현대어 풀이>원통골의 좁은 길로 사자봉을 찾아가니, 그 앞의 넓은 바위가 화룡소(化龍沼)가 되었구나. 마치 천 년 묵은 늙은 용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것같이 밤낮으로 물을 흘러 내어 넓은 바다에 이었으니, (저 용은)바람과 구름을 언제 얻어 흡족한 비를 내리려느냐? 그늘진 낭떠러지에 시든 풀을 다 살려 내려무나.(선정의 포부가 나타나 있다.)

8. 십이폭포의 장관
磨마訶하衍연 妙묘吉길祥샹 雁안門문재 너머 디여, 외나모 써근 다리 佛블頂뎡臺대 올라하니, 千쳔尋심絶졀壁벽을 半반空공애 셰여 두고, 銀은河하水슈 한 구비를 촌촌이 버혀 내여, 실가티 플텨이셔 뵈가티 거러시니, 圖도經경 열 두 구비, 내 보매난 여러히라. 李니謫뎍仙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하게 되면, 廬녀山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 하려니.
<현대어 풀이>마하연, 묘길상, 안문재를 넘어 내려가 썩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불정대에 오르니 (조물주가)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을 공중에 세워 두고, (거기에 십이 폭이 걸렸는데)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잘라내어 실처럼 풀어서 베처럼 걸어 놓았으니, 산수도경에는 열 두 굽이라 하였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더 되어 보인다. 만일, 이백이 지금 있어서 다시 의논하게 되면, 여산 폭포가 여기보다 낫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9. 동해로 가는 감회
山산中듕을 매양 보랴, 東동海해로 가쟈스라. 籃남輿여 緩완步보하야 山산映영樓누의 올나하니, 玲녕瓏농 碧벽溪계와 數수聲셩啼뎨鳥됴는 離니別별을 怨원자하는듯, 旌졍旗긔를 떨티니 五오色색이 넘노는듯, 鼓고角각을 섯부니 海해雲운이 다 것는 듯 鳴명沙사길 니근 말이 醉취仙션을 빗기 시러, 바다할 겻테 두고 海해棠당花화로 드러가니, 白백鷗구야 날디 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난.
<현대어 풀이>내금강 산중의 경치만 매양 보겠는가? 이제는 동해로 가자꾸나. 남여를 타고 천천히 걸어서 산영루에 오르니, 눈부시게 반짝이는 시냇물과 여러 소리로 우짖는 산새는 나와의 이별을 원망하는 듯하고(감정이입), 깃발을 휘날리며 오색 기폭이 넘나드는 듯하며, 북과 나팔을 섞어 부니(풍악을 울리니) 바닷구름이 다 걷히는 듯하다. 모랫길에 익숙한 말이 취한 신선(작자)을 비스듬히 태우고 해변의 해당화 핀 꽃밭으로 들어가니, 백구야 날지 마라, 내가 네 벗인 줄 어찌 아느냐?

10. 총석정의 장관
金금난窟굴 도라드러 叢총石셕亭뎡 올라하니, 白백玉옥樓누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工공슈의 셩녕인가, 鬼귀斧부로 다다만가 구태야 六뉵面면은 므어슬 象샹톳던고.
<현대어 풀이>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에 올라가니, 옥황 상제가 거처하던 백옥루의 기둥이 네 개만 서 있는 듯하구나. 옛날 중국의 명장(名匠)인 공수(工 )가 만든 작품인가? 조화를 부리는 귀신의 도끼로 다듬었는가? 구태여, 육면으로 된 돌기둥은 무엇을 본 떴는가?

11. 삼일포에서의 사선 추모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로 차자가니, 丹단書셔는 宛완然연하되 四사仙션은 어데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데 가 또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郎냥湖호 거긔나 가 잇는가. 淸쳥澗간亭뎡 萬만景경臺대 몃 고데 안돗던고,
<현대어 풀이>고성을 저 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룰렀던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가?

12. 의상대에서 본 일출의 광경
梨니花화는 발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낙山산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대예 올라 안자, 日일出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하니, 祥샹雲운이 집픠는 동, 六뉵龍뇽이 바퇴는 동, 바다헤 떠날 제는 萬만國국이 일위더니, 天텬中듕의 티뜨니 毫호髮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詩시仙션은 어데 가고 咳해唾타만 나맛나니. 天텬地디間간 壯장한 긔별 자셔히도 할셔이고.
<현대어 풀이>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앉아,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쯤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듯, 여러 마리 용이 해를 떠받치는 듯, 바닥에서 솟아오를 때에는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터럭도 헤아릴 만큼 밝도다. 혹시나 지나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무를까 두렵구나(이백의 시구 인용). 이백은 어디 가고 (간신배가 임금의 은총을 가릴까 염려스럽다는) 시구만 남았느냐? 천지간 굉장한 소식이 자세히도 표현되었구나.

13. 경포의 장관과 강릉의 미풍 양속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텩튝을 므니발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나려가니, 十십里리 氷빙紈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댱松숑 울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잘샤 모래를 혜리로다. 孤고舟쥬 解해纜람하야 亭뎡子자 우헤 올나가니,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테 大대洋양이 거긔로다. 從둉容용한댜 이 氣긔像샹, 闊활遠원하댜 뎌 境경界계, 이도곤 가잔 데 또 어듸 잇닷 말고. 紅홍粧장 古고事사랄 헌사타 하리로다. .江강陵능 大대都도護호風풍俗쇽이 됴흘시고, 節졀孝효旌졍門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비屋옥可가封봉이 이제도 잇다할다.
<현대어 풀이>저녁 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밝아, 우개지륜을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 모래알까지도 헤아릴 만하구나. 한 척의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가 거기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의 경계여, 이 곳보다 아름다운 경치를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고려 우왕 때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 호사스런 풍류이기도 하구나.
강릉 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기도 하구나.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정문이 동네마다 널렸으니, 즐비하게 늘어선 집마다 모두 벼슬을 줄 만하다는 요순 시절의 태평 성대가 이제도 있다고 하겠도다.

14. 죽서루에서의 객수
眞진珠쥬館관 竹듁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나린 믈이 太태白백山산 그림재를 東동海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漢한江강의 木목覓멱의 다히고져. 王왕程뎡이 有유限한하고 風풍景경이 못 슬믜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객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사랄 띄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하살가, 仙션人인을 차자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현대어 풀이>진주관[삼척] 죽서루 아래 오십천의 흘러내리는 물이 (그 물에 비친)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옮겨)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임금 계신 한강으로 돌려 서울의 남산에 대고 싶구나. 관원의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고, 나그네의 시름도 달랠 길 없구나. 신선이 타는 뗏목을 띄워 내어 북두성과 견우성으로 향할까? 사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를까?

15. 망양정에서의 파도 조망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므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데, 블거니 뿜거니 어즈러이 구는디고.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나리난 듯, 五오月월 長댱天텬의 白백雪셜은 므사 일고.
<현대어 풀이>하늘의 맨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오르니, (수평선 저 멀리)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파도)를 누가 놀라게 하기에, 물을 불거니 뿜거니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은산을 꺾어 내어 온 세상에 흩뿌려 내리는 듯, 오월 드높은 하늘에 백설(파도의 물거품)은 무슨 일인가?

16. 동해의 달맞이
져근덧 밤이 드러 風풍浪낭이 定뎡하거늘, 扶부桑상 咫지尺쳑의 明명月월을 기다리니, 瑞셔光광 千쳔丈댱 이 뵈난 닷 숨난고야. 珠쥬簾렴을 고텨것고, 玉옥階계랄 다시 쓸며, 啓계明명星셩 돗도록 곳초 안자 바라보니, 白백蓮년花화 한 가지를 뉘라셔 보내신고. 일이 됴흔 世세界계 남대되 다 뵈고져. 流뉴霞하酒쥬 가득 부어 달다려 무론 말이, 英영雄웅 은 어데 가며, 四사仙션은 긔 뉘러니, 아메나 맛나 보아 녯 긔별 뭇쟈 하니, 仙션山산 東동海해예 갈 길히 머도멀샤.
<현대어 풀이>잠깐 사이에 밤이 되어 바람과 물결이 가라앉기에, 해 뜨는 곳이 가까운 동햇가에서 명월을 기다리니, 상서로운 빛줄기가 보이는 듯하다가 숨는구나.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다시 걷어올리고 옥돌같이 고운 층계를 다시 쓸며, 샛별이 돋아 오를 때까지 꼿꼿이 앉아 바라보니,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 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온 백성에게 은혜가 골고루 미치도록 선정을 베풀고 싶다.) 신선주를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사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 보아 영웅과 사선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선산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

17. 꿈 속의 선연
松숑根근을 볘여 누어 픗잠을 얼픗 드니, 꿈애 한 사람이 날다 닐온 말이, 그데를 내 모르랴, 上샹界계예 眞진仙션이라. 黃황庭뎡經경一일字자를 엇디 그릇 닐거 두고, 人인間간의 내려와셔 우리를 딸오는다. 져근덧 가디 마오. 이 술 한 잔 머거 보오. 北북斗두星셩 기우려 滄챵海해水슈 부어 내여, 저 먹고 날 머겨날 서너 잔 거후로니, 和화風풍이 習습習습하야 兩냥腋액을 추혀 드니, 九구萬만里리 長댱空공애 져기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四사海해예 고로난화, 億억萬만 蒼창生생을 다 醉취케 멩근 後후의, 그제야 고텨 맛나 또 한 잔 하쟛고야. 말디쟈 鶴학을 타고 九구空공의 올나가니, 空공中듕 玉옥蕭쇼 소리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여 바다를 구버보니, 기픠를 모르거니 가인들 엇디 알리. 明명月월이 千천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 데 업다.
<현대어 풀이>(드러난)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 선잠이 얼핏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내가 모르랴? 그대는 하늘 나라의 참 신선이라, 황정경 한 글자를 어찌 잘못 읽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잠시 가지 말고 이 술 한 잔 먹어 보오." 북두 칠성과 같은 국자를 기울여 동해물 같은 술을 부어 저 먹고 나에게도 먹이거늘, 서너 잔을 기울이니 온화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양 겨드랑이를 추켜올리니, 아득한 하늘도 웬만하면 날 것 같구나. "이 신선주를 가져다가 온 세상에 고루 나눠 온 백성을 다 취하게 만든 후에, 그 때에야 다시 만나 또 한 잔 하자꾸나." 말이 끝나자, 신선은 학을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니, 공중의 옥퉁소 소리가 어제던가 그제던가 어렴풋하네.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깊이를 모르는데 하물며 가인들 어찌 알리. 명월이 온 세상에 아니 비친 곳이 없다.

 

江湖(강호)()이 깊퍼 竹林(듁님)의 누엇더니,

關東(관동) 八百里(팔ᄇᆡᆨ니)方面(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셩은)이야 가디록 罔極(망극).

延秋門(연츄문) 드리慶會南門(경회 남문) 라보며,

下直(하직)고 믈너나니 玉節(옥졀)이 알셧다.

平丘驛(평구역) 黑水(흑슈)로 도라드니,

蟾江(셤강)은 어듸메오, 雉岳(티악)이 여긔로다.

昭陽江(쇼양강) 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孤臣(고신) 去國(거국)白髮()도 하도 할샤.

東洲(동쥬)ㅣ 밤 계오 새와 北寬亭(븍관뎡)의 올나,

三角山(삼각산) 第一峰(뎨일봉)마면 뵈리로다.

弓王(궁왕) 大闕(대궐) 터희 烏鵲(오쟉)이 지지괴니,

千古(천고) 興亡(흥망)을 아, .

淮陽(회양) 녜 일홈이 마초아 시고.

汲長孺(급댱유) 風彩()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營中(영듕)無事()時節(시졀)三月(삼월)인 제,

花川(화쳔) 시내길히 風岳(풍악)으로 버더 잇다.

行裝(ᄒᆡᆼ장)을 다 티고 石逕(셕경)의 막대 디퍼,

百川洞(ᄇᆡᆨ쳔동) 두고 萬瀑洞(만폭동) 드러가니,

()  무지게, ()  ()의 초리,

섯돌며  十里(십리)자시니,

들을 제우레러니 보니눈이로다.

(금강) ()仙鶴(션학)이 삿기 치니,

春風(춘풍) 玉笛聲(옥뎍셩)의 첫돗던디,

縞衣玄裳(호의 현샹)半空(반공)의 소소 ,

西湖(셔호) 主人(주인)을 반겨셔 넘노 .

 

小香爐(쇼향노) 大香爐(대향노) 눈 아래 구버보고,

正陽寺(정양) 眞歇臺(진헐) 고텨 올나 안마리,

廬山(녀산) 眞面目(진면목)이 여긔야 다 뵈.

어와, 造化翁(조화옹)이 헌토 헌.

거든 ᄯᅱ디 마나, 셧거든 솟디 마나.

芙蓉(부용)을 고잣 , 白玉(ᄇᆡᆨ옥)을 믓것 ,

東溟(동명)을 박 , 北極(북극)을 괴왓 .

놉흘시고 望高臺(망고), 외로올샤 穴望峰(혈망봉)

의 추미러 므일을 로리라,

千萬劫(쳔만겁) 디나록 구필 줄 모

어와 너여이고, 너 ᄀᆞ.

 

開心臺(ᄀᆡ심) 고텨 올나 衆香城(듕향셩) 라보며,

萬二千峰(만이쳔봉)歷歷(녁녁)히 혀여,

()마다 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디 마나.

뎌 긔운 흐터 내야 人傑(인걸)고쟈.

形容(형용)도 그지업고 軆勢(톄셰)도 하도 할샤.

天地(텬디) 삼기실 제 自然(ᄌᆞ연)이 되연마,

이제 와 보게 되니 有情(유졍)有情(유졍).

 

毗盧峰(비로봉) 上上頭(샹샹두)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東山(동산) 泰山(태산)이 어야 놉돗던고.

魯國(노국) 조븐 줄도 우리거든,

넙거나 넙은 天下(텬하) 야 젹닷 말고.

어와, 뎌 디위어이면 알 거이고.

디 못거니 려가미 고이.

 

圓通(원통) 길로 獅子峰(ᄉᆞᄌᆞ봉)자가니,

그 알너러바회 化龍(화룡)쇠 되여셰라.

千年(천년) 老龍(노룡)이 구서려 이셔,

晝夜(듀야)의 흘녀 내여 滄海()예 니어시니,

風雲(풍운)을 언제 어더 三日雨(삼일우)디련.

陰崖(음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어.

 

磨訶衍(마하연) 妙吉祥(묘길샹) 雁門(안문)재 너머 디여,

외나무 佛頂臺(불뎡) 올라,

千尋絶壁(쳔심졀벽)半空(반공)애 셰여 두고,

銀河水(은하슈) 한 구 촌촌이 버혀 내여,

티 플텨이셔 뵈티 거러시니,

圖經(도경) 열두 구, 내 보매여러히라.

李謫仙(니뎍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게 되면,

廬山(녀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 려니.

 

山中(산듕)양 보랴, 東海()로 가쟈.

藍輿緩步(남여완보)山映樓(산영누)의 올나,

玲瓏(녕농)碧溪(벽계)數聲啼鳥(수셩 뎨됴)離別(니별)() ,

旌旗(졍긔)티니 五色()이 넘노 ,

鼓角(고각)을 섯부니 海雲(ᄒᆡ운)이 다 것 .

鳴沙(명사)길 니근 醉仙(ᄎᆔ션)을 빗기 시러,

바다두고 海棠花(ᄒᆡ당화)로 드러가니,

白鷗(ᄇᆡᆨ구)디 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

 

金蘭窟(금난굴) 도라드러 叢石亭(총셕뎡) 올라,

白玉樓(ᄇᆡᆨ옥누)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工倕(공슈)의 셩녕인가, 鬼斧(귀부)로 다.

六面(뉵면)은 므어슬 ()톳던고.

 

高城(고셩)을란 뎌만 두고 三日浦(삼일포) 자가니,

丹書(단셔)宛然(완연)四仙(ᄉᆞ션)은 어가니.

예 사흘 머믄 ()의 어머믈고.

仙遊潭(션유담) 永郎湖(영낭호) 거긔나 가 잇.

淸澗亭(쳥간뎡) 萬景臺(만경) 몃 고안돗던고.

 

梨花(니화) 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山(낙산) 東畔(동반)으로 義相臺(의샹)예 올라 안자,

日出(일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

祥雲(샹운)이 집픠, 六龍(뉵뇽)이 바퇴,

바다 날 제萬國(만국)이 일위더니,

天中(텬듕)의 티毫髮(호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詩仙(시션)은 어가고 咳唾(해타)만 나맛.

天地間(텬디간) ()긔별 셔히도 셔이고.

 

斜陽(샤양) 峴山(현산)躑躅(텩튝)을 므니,

羽蓋芝輪(우개지륜)鏡浦(경포)려가니,

十里(십 리) 氷紈(빙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松(댱송) 울흔 소개 슬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혜리로다.

孤舟解纜(고쥬 ᄒᆡ람)亭子() 올나가니,

江門橋(강문교) 너믄 겨大洋(대양)이 거긔로다.

從容(둉용)댜 이 氣象(긔샹) 濶遠(활원)댜 뎌 境界(경계),

이도곤    어듸 잇단 말고.

紅粧(홍장) 古事()리로다.

江陵(강능) 大都護(대도호) 風俗(풍쇽)이 됴흘시고.

節孝旌門(졀효졍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屋可封(비옥가봉)이 이제도 잇다 .

 

眞株館(진쥬관) 竹西樓(듁셔루) 五十川(오십쳔) 린 믈이,

太白山(태ᄇᆡᆨ산) 그림재東海()로 다마 가니,

하리 漢江(한강)木覓(목멱)의 다히고져.

王程(왕뎡)有限()風景(풍경)이 못 슬믜니,

幽懷(유회)도 하도 할샤, 客愁(ᄀᆡᆨ수)도 둘 듸 업다.

仙槎(션사) 워 내여 斗牛(두우)()살가,

仙人(션인)丹穴(단혈)의 머므살가.

 

天根(텬근)을 못내 보와 望洋亭(망양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이니 하밧근 므서신고.

득 노고래, 뉘라셔 놀내관,

블거니 거니 어즈러이 구디고.

銀山(은산)을 것거 내여 六合(육합) ,

五月(오월) 長天(댱텬)白雪(ᄇᆡᆨ셜)은 므일고.

 

져근덧 밤이 드러 風浪(풍낭)(),

扶桑(부상) 咫尺(지척)明月(명월)을 기리니,

瑞光(셔광) 千丈(쳔댱)이 뵈  고야.

珠簾(쥬렴)을 고텨 것고, 玉階(옥계)다시 쓸며,

啓明星(계명셩) 돗도록 곳초 안자 라보니,

百蓮花(ᄇᆡᆨ년화) 가지뉘라셔 보내신고.

일이 됴흔 世界(셰계) 대되 다 뵈고져.

流霞酒(뉴하쥬) 득 부어 려 무론 말이,

英雄(영웅)은 어가며, 四仙(ᄉᆞ션)은 긔 뉘러니,

나 맛나 보아 녯 긔별 뭇쟈 ,

仙山(션산) 東海()예 갈 길히 머도 멀샤.

 

松根(숑근)을 볘여 누어 픗을 얼픗 드니,

이 날려 닐온 말이,

 내 모, 上界(상계)眞仙(진션)이라.

黃庭經(황뎡경) 一字()엇디 그닐거 두고,

人間(인간)의 내려와셔 우리 .

져근덧 가디 마오. 이 술 잔 머거 보오.

北斗星(븍두셩) 기우려 滄海水(창ᄒᆡ슈) 부어 내여,

저 먹고 날 머겨서너 잔 거후로니,

和風(화풍)習習(습습)兩腋()을 추혀 드니,

九萬里(구만리) 長空(댱공)애 져기면 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四海(ᄉᆞ)예 고로 ,

億萬(억만) 蒼生()을 다 ()(),

그제야 고텨 맛나   쟛고야.

말 디쟈 ()九空(구공)의 올나가니,

空中(공듕) 玉簫(옥쇼)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여 바다구버보니,

기픠거니 인들 엇디 알리.

明月(명월)天山萬落(쳔산 만낙)의 아니 비쵠 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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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곡 - 정극인

 

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 엇더한고 흉년조차 들어서

옛 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를 것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송죽 울울리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

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어니 흥이야 다를소냐

시비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일이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이 혼자로다.

이봐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쟈스라

답청이란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채산하고 나중에 조수하세

갓 괴여 익은 술을 갈건으로 받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화풍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준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아뢰거라

소동 아이에게 주가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 맑은 물에 잔 시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는 것은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것인가

송간세로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두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천촌만락이 곳곳이 벌여있네

연하일휘는 급수를 재폈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고

단표누항에 허튼 혜음 아니 하니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

 

<상춘곡(賞春曲)> -정극인

 

상춘곡(賞春曲)

 

정극인(丁克仁)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ᄒᆞᆫ고,

녯 사ᄅᆞᆷ 風流(풍류)ᄅᆞᆯ 마ᄎᆞᆯ가 ᄆᆞᆺ 미ᄎᆞᆯ가.

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ᄒᆞᆫ 이 하건마ᄂᆞᆫ,

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ᄆᆞᄅᆞᆯ 것가.

數間茅屋(수간 모옥)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

松竹(송죽) 鬱鬱裏(울울리)風月主人(풍월 주인) 되여셔라.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杏花(도화행화)ᄂᆞᆫ 夕陽裏(석양리)예 퓌여 잇고,

錄樣芳草(녹양 방초)ᄂᆞᆫ 細雨中(세우 중)에 프르도다.

칼로 ᄆᆞᆯ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神功(조화 신공)物物(물물)마다 헌ᄉᆞᄅᆞᆸ다.

수풀에 우ᄂᆞᆫ 새ᄂᆞᆫ 春氣(춘기)ᄅᆞᆯ ᄆᆞᆺ내 계워 소ᄅᆡ마다 嬌態(교태)로다.

物我一體(물아 일체)어니, ()이ᄋᆡ 다ᄅᆞᆯ소냐.

柴扉(시비)예 거러 보고, 亭子(정자)애 안자 보니,

逍遙吟詠(소요 음영)ᄒᆞ야, 山日(산일)寂寂(적적)ᄒᆞᆫᄃᆡ,

閒中眞味(한중 진미)ᄅᆞᆯ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山水 구경 가쟈스라,

踏靑(답청)으란 오ᄂᆞᆯ ᄒᆞ고,

浴沂(욕기)來日ᄒᆞ새. 아ᄎᆞᆷ에 採山(채산)ᄒᆞ고,

나조ᄒᆡ 釣水(조수)ᄒᆞ새.

ᄀᆞᆺ 괴여 닉은 술을 葛巾(갈건)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노코 먹으리라.

和風(화풍)이 건ᄃᆞᆺ 부러 綠水(녹수)ᄅᆞᆯ 건너오니,

淸香(청향)은 잔에 지고,

落紅(낙홍)은 옷새 진다.

樽中(준중)이 뷔엿거ᄃᆞᆫ 날ᄃᆞ려 알외여라.

小童(소동) 아ᄒᆡᄃᆞ려 酒家(주가)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ᄒᆡᄂᆞᆫ 술을 메고,

微吟緩步(미음 완보)ᄒᆞ야 시냇ᄀᆞ의 호자 안자,

明沙(명사) 조ᄒᆞᆫ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ᄅᆞᆯ 굽어보니, ᄯᅥ오ᄂᆞ니 桃花(도화)ㅣ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ᄆᆡ이 긘 거인고.

松間 細路杜鵑花(두견화)ᄅᆞᆯ 부치 들고,

峰頭(봉두)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千村萬落(천촌 만락)이 곳곳이 버려 잇ᄂᆡ.

煙霞日輝(연하 일휘)ᄂᆞᆫ 錦繡(금수)ᄅᆞᆯ 재폇ᄂᆞᆫ ᄃᆞᆺ.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有餘(유여)ᄒᆞᆯ샤.

功名(공명)도 날 ᄭᅴ우고, 富貴(부귀)도 날 ᄭᅴ우니,

淸風明月(청풍명월) ()예 엇던 벗이 잇ᄉᆞ올고.

簞瓢陋巷(단표 누항)에 훗튼 혜음 아니 ᄒᆞᄂᆡ. 아모타,

百年行樂(백년행락)이 이만ᄒᆞᆫᄃᆞᆯ 엇지ᄒᆞ리.

 

<불우헌집(不憂軒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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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가1 / 윤선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리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빚이 깨끗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구나

조코도 그칠 이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을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의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리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光明)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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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설(愛蓮說)]

 

수륙에 자라나는 풀과 나무의 꽃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나는 오직 연꽃을 사랑하노니 연꽃은 진흙에서 나오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깨끗이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 속은 비어있으나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를 뻗어내지도 않는다.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으니 우뚝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가까이서 무례히 희롱할 수 없으며 가지고 놀 수도 없구나.

 

내가 이르기를, 국화는 꽃 가운데 초야에 묻혀 은거하는 자요,

모란은, 꽃 중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와 같다.

 

! 국화에 대한 사랑은 도연명 이후로 들은 적이 드물고,

연꽃에 대한 사랑이 나와 같은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많을 것이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晋陶淵明獨愛菊 (진도연명독애국)

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자이당래, 세인심애목단)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여독애연지출어이이불염)

濯淸漣而不妖 (탁청련이불요)

中通外直, 不蔓不枝, (중통외직, 불만부지)

香遠益淸, 亭亭淨植 (향원익청, 정정정식)

可遠觀而不可褻玩焉 (가원관이불가설완언)

予謂, ", 花之隱逸者也 (여위, ", 화지은일자야)

牧丹, 花之富貴者也 (목단, 화지부귀자야)

, 花之君子者也" (, 화지군자자야.")

! 菊之愛, 陶後鮮有聞 (! 국지애, 도후선유문)

蓮之愛, 同予者何人? (연지애, 동여자하인?)

牡丹之愛, 宜乎衆矣 (모란지애, 의호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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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 - 윤선도

 

[춘사 1]

앞개울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 거의 끝나고 밀물 밀려 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춘사 2]

날이 따뜻하도다 물 위에 고기 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낚시대는 쥐어있다 탁주병은 실었느냐?

 

[춘사 3]

동풍이 문득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춘사 4]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춘사 5]

고운 햇볕이 쬐이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시를 놓을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탁영가(濯纓歌)의 흥이나니 고기잡이도 잊겠도다!

 

[춘사 6]

석양(夕陽)이 비추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안류정화(岸柳汀花)는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찌 삼공을 부러워할소냐 만사를 생각하랴!

* 안류정화 : 해안 언덕의 버드나무와 물가에 핀 꽃

*삼공 : 높은 벼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춘사 7]

방초(芳草)를 바라보며 난초 지초도 뜯어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一葉扁舟)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갈 때는 안개뿐이오 올 때는 달뿐이로다!

* 방초 : 아름다운 풀

* 일엽편주 : 나뭇잎 크기의 작은 배

 

[춘사 8]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니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낙홍(落紅)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인세홍진(人世紅塵)이 얼마나 가렸던고.

* 낙홍 : 떨어진 꽃잎

* 인세홍진 : 인간세상의 욕망의 먼지

 

[춘사 9]

낚시줄 걷어 놓고 봉창(篷窓)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구나 소쩍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남은 흥이 무궁(無窮)하니 갈 길을 잊었구나.

*봉창 : 나웃배의 창

 

[춘사 10]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얼마나 더되랴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시대로 지팡이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어부의 생애는 이럭저럭 지내노라

[하사 1]

궂은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기쁜 흥을 금할 수 없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연강첩장(烟江疊嶂) 누구라서 그려냈는가?

* 연강첩장 : 안개 낀 강과 첩첩 가파른 봉우리

 

[하사 2]

연 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靑蒻笠)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蓑衣)는 가져 왔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쫓는가 제가 쫓는가?

*청약립 : 풀 줄기 등으로 만든 푸른색 삿갓

*녹사의 : 초록색 도롱이 옷

 

[하사 3]

마름잎에 바람부니 봉창이 서늘하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바람 고요할소냐 가는 대로 배 두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북포남강(北浦南江)이 어디 아니 좋을러니!

* 북포남강 : 북쪽 포구와 남쪽 강

 

[하사 4]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오강(吳江)을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까 두려워라!

*천년노도 : 천년의 성난 물결, 죽은 오자서의 한

*어복충혼 : 고기 뱃속의 충성스런 혼, 멱라수에 빠져 죽은 굴원의 충혼

 

[하사 5]

만류녹음(萬柳綠陰) 어린 곳에 일편태기(一片苔磯) 기특하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다리에 닿았거든 어인쟁도(漁人爭渡)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가다가 학발 노옹 만나거든 뇌택양거(雷澤讓居) 본을 받자

*만류녹음 : 수많은 버드나무의 푸른잎과 그늘

*일편태기 : 한조각 물가의 이끼

*어인쟁도 : 어부들의 뱃길 다툼

*뇌택양거 : 연못에서 고기잡을 때 순임금에게 모두 자리를 양보

 

[하사 6]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처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배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엇더타 관내성중(款乃聲中)에 만고심(萬古心)을 그 누가 알겠는가?

*관내성중 :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는 중에

*만고심 : 만고에 변하지 않는 마음(다른 해석본: 근심)

 

[하사 7]

석양(夕陽)이 좋다마는 황혼(黃昏)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 소나무 아래 비스듬히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벽수앵성(壁樹鶯聲)이 곳곳에 들리는구나!

*벽수앵성 : 푸른 숲 꾀꼬리 소리

 

[하사 8]

모래 위에 그물을 널고 띠풀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하나 파리는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진실로 다만 많은 근심은 상대부(桑大夫) 행여 들을까 두렵워라

*상대부 : 출세주의자, 전한 상홍양이 공을 세운 후 벼슬에 집착하여 반란을 꾸민 사건

 

 

[하사 9]

밤사이 풍랑 일 줄을 미리 어이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야도횡주(夜渡橫舟)를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즈버 간변유초(澗邊幽草)는 진실로 보기 좋구나!

*야도횡주 : 밤에 강을 가로질러 가는 배

*간변유초 : 계곡 시냇가의 그윽한 곳의 풀

 

[하사 10]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가로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와실 : 달팽이 집, 작고 초라한 집

 

[추사 1]

물외(物外)에 조용한 일이 어부생애 아니더냐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이 한가지나 추강(秋江)이 으뜸이라

 

[추사 2]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은 물결에 실컷 놀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추사 3]

흰 구름 일어나니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동호(東湖) 가고 썰물에 서호(西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백빈홍료(白蘋紅蓼)는 곳곳마다 절경이로다!

*백빈홍료 : 흰 마름꽃과 붉은 여귀꽃

 

[추사 4]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산 보이는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興)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석양이 비치니 모든 산이 금수(錦繡)이로다

 

[추사 5]

은순옥척(銀脣玉尺)이 몇 마리나 걸렸느냐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갈대꽃에 불붙여 골라서 구워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술병을 기울여서 표주박에 부어다오

*은순옥척 : 은빛나는 입술모양의 옥같이 귀한 월척

 

[추사 6]

옆 바람 곱게 부니 다른 돛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명색(瞑色)은 나오니 청흥(淸興)이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쩐지 홍수청강(紅樹靑江)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명색 : 어둑어둑한 빛

*청홍 : 풍류적이고 고상한 흥

*홍수청강 : 붉은 단풍나무와 푸른 강물

 

[추사 7]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묘연(渺然)하니 청광(淸光)을 누구를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자

*묘연 : 아득하고 넓으니

*청광 : 맑은 달빛

 

[추사 8]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것이 어디인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속세의 먼지가 못 미치니 부채질하여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추사 9]

옷 위에 서리 내리되 추운 줄을 모르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가 좁다 하나 부세(浮世)와 어떠하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렇게 하고 모레도 이렇게 하자

*부세 : 덧없는 세상, 부운세상(浮雲世上)

 

[추사 10]

송간석실(松間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자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공산납엽(空山落葉))의 길을 어찌 알아 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흰 구름이 좇아오니 여라의(女羅衣)가 무겁구나

*송간석실 : 소나무 사이에 돌로 지은 집

*공산낙엽 : 빈 산의 낙엽

*여라의 : 소나무에 기생하는 하루살이, 가벼운 옷

 

[동사 1]

구름 걷힌 후에 햇볕이 두텁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폐색(天地閉塞)하되 바다는 예전과 같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비단 펼친 듯 하여 있다

*천지폐색 :하늘과 땅이 닫히고 막힘

 

[동사 2]

낚시줄대를 손질하고 뱃밥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동정(瀟湘洞庭)은 그 물이 언다하더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이때 낚시야 이만한데 있으랴!

*소상동정 : 소상강과 동정호

 

[동사 3]

얕은 갯가 고기들이 먼 바다 다 갔느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어느 듯 날 좋은 때 어장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동사 4]

간밤에 눈 갠 후에 경치가 달라졌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것이 선계(仙界)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동사 5]

그물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 바다를 건너본 것이 몇 번인가 헤려보았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느닷없는 강한 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동사 6]

날아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났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이 자욱해졌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뉘라서 그 조용한 아압지(鵝鴨池)에 초본참(草本慚)을 싯었던고

*아압지 : 연못의 거위 떼를 놀라게 하여 이를 이용하여 성을 함락

*초본참 : 병자호란으로 초목까지 입은 치욕

 

[동사 7]

단애취벽(丹崖翠壁)이 화병(畫屛)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고주사립(孤舟蓑笠)에 흥 겨워 앉았노라

*단애취벽 :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

*거구세린 :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물고기

*고주사립 : 외로운 배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동사 8]

물가의 외로운 소나무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한탄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소리를 염증내지 마라 진훤(塵喧)을 막는도다!

*진훤 : 더러운 때와 소리

 

[동사 9]

창주(滄州)에 우리의 도(道)를 옛부터 일렀느니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양구(七里羊裘)는 그 어떠함이런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모름이 삼천육백날 낚시는 손 곱을 때 어떠하던고?

*창주 : 푸른 물가, 시골, 은자들이 사는 곳

*칠리양구 : 후한 광무제 때의 은사로 칠리탄에서 엄자릉이 양피옷을 입고 낚시하던 곳

*삼천육백 낚시 : 강태공이 위수가에서 삼천육백일 때를 기다리며 낚시하는 고사

 

[동사 10]

아아! 저물어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려진 길에 흥에 겨워 돌아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서봉(西峰)에 달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노라

 

 

어부사시사 (윤선도)

 

[춘사 1]

 

앞개울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 거의 끝나고 밀물 밀려 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춘사 2]

 

날이 따뜻하도다 물 위에 고기 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낚시대는 쥐어있다 탁주병은 실었느냐?

 

[춘사 3]

 

동풍이 문득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東湖)를 돌아보며 서호(西湖)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춘사 4]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도 깊은 소(연못)에 온갖 고기 뛰어논다.

 

[춘사 5]

 

고운 햇볕이 쬐이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시를 놓을까?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탁영가(濯纓歌)의 흥이나니 고기잡이도 잊겠도다!

 

[춘사 6]

 

석양(夕陽)이 비추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안류정화(岸柳汀花)는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찌 삼공을 부러워할소냐 만사를 생각하랴!

* 안류정화 : 해안 언덕의 버드나무와 물가에 핀 꽃

*삼공 : 높은 벼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춘사 7]

 

방초(芳草)를 바라보며 난초 지초도 뜯어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一葉扁舟)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갈 때는 안개뿐이오 올 때는 달뿐이로다!

* 방초 : 아름다운 풀

* 일엽편주 : 나뭇잎 크기의 작은 배

 

[춘사 8]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니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낙홍(落紅)이 흘러오니 무릉도원이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인세홍진(人世紅塵)이 얼마나 가렸던고.

* 낙홍 : 떨어진 꽃잎

* 인세홍진 : 인간세상의 욕망의 먼지

 

[춘사 9]

 

낚시줄 걷어 놓고 봉창(篷窓)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구나 소쩍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남은 흥이 무궁(無窮)하니 갈 길을 잊었구나.

*봉창 : 나웃배의 창

 

[춘사 10]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얼마나 더되랴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시대로 지팡이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어부의 생애는 이럭저럭 지내노라

 

[하사 1]

 

궂은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기쁜 흥을 금할 수 없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연강첩장(烟江疊嶂) 누구라서 그려냈는가?

* 연강첩장 : 안개 낀 강과 첩첩 가파른 봉우리

 

[하사 2]

 

연 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靑蒻笠)은 쓰고 있노라 녹사의(綠蓑衣)는 가져 왔느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쫓는가 제가 쫓는가?

*청약립 : 풀 줄기 등으로 만든 푸른색 삿갓

*녹사의 : 초록색 도롱이 옷

 

[하사 3]

 

마름잎에 바람부니 봉창이 서늘하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여름바람 고요할소냐 가는 대로 배 두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북포남강(北浦南江)이 어디 아니 좋을러니!

* 북포남강 : 북쪽 포구와 남쪽 강

 

[하사 4]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오강(吳江)을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까 두려워라!

*천년노도 : 천년의 성난 물결, 죽은 오자서의 한

*어복충혼 : 고기 뱃속의 충성스런 혼, 멱라수에 빠져 죽은 굴원의 충혼

 

[하사 5]

 

만류녹음(萬柳綠陰) 어린 곳에 일편태기(一片苔磯) 기특하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다리에 닿았거든 어인쟁도(漁人爭渡)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가다가 학발 노옹 만나거든 뇌택양거(雷澤讓居) 본을 받자

*만류녹음 : 수많은 버드나무의 푸른잎과 그늘

*일편태기 : 한조각 물가의 이끼

*어인쟁도 : 어부들의 뱃길 다툼

*뇌택양거 : 연못에서 고기잡을 때 순임금에게 모두 자리를 양보

 

[하사 6]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처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배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엇더타 관내성중(款乃聲中)에 만고심(萬古心)을 그 누가 알겠는가?

*관내성중 :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는 중에

*만고심 : 만고에 변하지 않는 마음(다른 해석본: 근심)

 

[하사 7]

 

석양(夕陽)이 좋다마는 황혼(黃昏)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 소나무 아래 비스듬히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벽수앵성(壁樹鶯聲)이 곳곳에 들리는구나!

*벽수앵성 : 푸른 숲 꾀꼬리 소리

 

[하사 8]

 

모래 위에 그물을 널고 띠풀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하나 파리는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진실로 다만 많은 근심은 상대부(桑大夫) 행여 들을까 두렵워라

*상대부 : 출세주의자, 전한 상홍양이 공을 세운 후 벼슬에 집착하여 반란을 꾸민 사건

 

[하사 9]

 

밤사이 풍랑 일 줄을 미리 어이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야도횡주(夜渡橫舟)를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즈버 간변유초(澗邊幽草)는 진실로 보기 좋구나!

*야도횡주 : 밤에 강을 가로질러 가는 배

*간변유초 : 계곡 시냇가의 그윽한 곳의 풀

 

[하사 10]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가로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와실 : 달팽이 집, 작고 초라한 집

 

[추사 1]

 

물외(物外)에 조용한 일이 어부생애 아니더냐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漁翁)을 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이 한가지나 추강(秋江)이 으뜸이라

 

[추사 2]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은 물결에 실컷 놀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추사 3]

 

흰 구름 일어나니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동호(東湖) 가고 썰물에 서호(西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백빈홍료(白蘋紅蓼)는 곳곳마다 절경이로다!

*백빈홍료 : 흰 마름꽃과 붉은 여귀꽃

 

[추사 4]

 

기러기 떠 있는 밖에 못 보던 산 보이는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석양이 비치니 모든 산이 금수(錦繡)이로다

 

[추사 5]

 

은순옥척(銀脣玉尺)이 몇 마리나 걸렸느냐

노 저어라 노 저어라

갈대꽃에 불붙여 골라서 구워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술병을 기울여서 표주박에 부어다오

*은순옥척 : 은빛나는 입술모양의 옥같이 귀한 월척

 

[추사 6]

 

옆 바람 곱게 부니 다른 돛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명색(瞑色)은 나오니 청흥(淸興)이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쩐지 홍수청강(紅樹靑江)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명색 : 어둑어둑한 빛

*청홍 : 풍류적이고 고상한 흥

*홍수청강 : 붉은 단풍나무와 푸른 강물

 

[추사 7]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묘연(渺然)하니 청광(淸光)을 누구를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자

*묘연 : 아득하고 넓으니

*청광 : 맑은 달빛

 

[추사 8]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것이 어디인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속세의 먼지가 못 미치니 부채질하여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두어라!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추사 9]

 

옷 위에 서리 내리되 추운 줄을 모르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가 좁다 하나 부세(浮世)와 어떠하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렇게 하고 모레도 이렇게 하자

*부세 : 덧없는 세상, 부운세상(浮雲世上)

 

[추사 10]

 

송간석실(松間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자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공산납엽(空山落葉))의 길을 어찌 알아 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흰 구름이 좇아오니 여라의(女羅衣)가 무겁구나

*송간석실 : 소나무 사이에 돌로 지은 집

*공산낙엽 : 빈 산의 낙엽

*여라의 : 소나무에 기생하는 하루살이, 가벼운 옷

 

[동사 1]

 

구름 걷힌 후에 햇볕이 두텁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폐색(天地閉塞)하되 바다는 예전과 같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비단 펼친 듯 하여 있다

*천지폐색 :하늘과 땅이 닫히고 막힘

 

[동사 2]

 

낚시줄대를 손질하고 뱃밥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동정(瀟湘洞庭)은 그 물이 언다하더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마도 이때 낚시야 이만한데 있으랴!

*소상동정 : 소상강과 동정호

 

[동사 3]

 

얕은 갯가 고기들이 먼 바다 다 갔느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어느 듯 날 좋은 때 어장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동사 4]

 

간밤에 눈 갠 후에 경치가 달라졌구나!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것이 선계(仙界)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동사 5]

 

그물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앞 바다를 건너본 것이 몇 번인가 헤려보았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디서 느닷없는 강한 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동사 6]

 

날아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났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이 자욱해졌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뉘라서 그 조용한 아압지(鵝鴨池)에 초본참(草本慚)을 싯었던고

*아압지 : 연못의 거위 떼를 놀라게 하여 이를 이용하여 성을 함락

*초본참 : 병자호란으로 초목까지 입은 치욕

 

[동사 7]

 

단애취벽(丹崖翠壁)이 화병(畫屛)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이야! 고주사립(孤舟蓑笠)에 흥 겨워 앉았노라

*단애취벽 :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

*거구세린 :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물고기

*고주사립 : 외로운 배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동사 8]

 

물가의 외로운 소나무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한탄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소리를 염증내지 마라 진훤(塵喧)을 막는도다!

*진훤 : 더러운 때와 소리

 

[동사 9]

 

창주(滄州)에 우리의 도()를 옛부터 일렀느니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양구(七里羊裘)는 그 어떠함이런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모름이 삼천육백날 낚시는 손 곱을 때 어떠하던고?

*창주 : 푸른 물가, 시골, 은자들이 사는 곳

*칠리양구 : 후한 광무제 때의 은사로 칠리탄에서 엄자릉이 양피옷을 입고 낚시하던 곳

*삼천육백 낚시:강태공이위수가에서삼천육백일 때를기다리며 낚시하는 고사

 

[동사 10]

 

아아! 저물어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려진 길에 흥에 겨워 돌아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서봉(西峰)에 달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노라

 

어부사시사(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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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家月令歌 농가월령가- 丁學遊 정학유 -

머릿노래

천지 조판하매 일월성신 비치거다

일월은 도수 있고 성신은 전차 있어

일년 삼백육십일에 제 도수 돌아오매

동지 하지 춘추분은 일행을 추측하고

상현 하현 망회삭은 월륜의 영휴로다

대지상 동서남북, 곳을 따라 틀리기로

북극을 보람하여 원근을 마련하니

이십사 절후를 십이삭에 분별하여

매삭에 두 절후가 일망이 사이로다

춘하추동 내왕하여 자연히 성세하니

요순 같은 착한 임금 역법을 창제하사

천시를 밝혀 내어 만민을 맡기시니

하우씨 오백년은 인월로 세수하고

주나라 팔백년은 자월로 신정이라

당금에 쓰는 역법 하우씨와 한 법이라

한서온량 기후 차례 사시에 맞아드니

공부자의 취하심이 하령을 행하도다

 

정월령

정월은 맹춘이라 입춘 우수 절기로다

산중 간학에 빙설은 남았으나

평교 광야에 운물이 변하도다

어와 우리 성상 애민중농 하오시니

간측하신 권농윤음 방곡에 반포하니

슬프다, 농부들아 아무리 무지한들

네 몸 이해 고사하고 성의를 어길소냐

산전수답 상반하여 힘대로 하오리라

일년 흉풍은 측량하지 못하여도

인력이 극진하면 천재는 면하리니

제각각 근면하여 게을리 굴지 마라

일년지계 재춘하니 범사를 미리하여

봄에 만일 실시하면 종년 일이 낭패되네

농기를 다스리고 농우를 살펴 먹여

재거름 재워 놓고 한편으로 실어내니

보리밭에 오줌치기 작년보다 힘써 하라

늙은이 근력 없어 힘든 일은 못하여도

낮이면 이엉 엮고 밤이면 새끼 꼬아

때맞게 집 이으면 큰 근심 덜리로다

실과나무 보굿 깎고 가지 사이 돌 끼우기

정조날 미명시에 시험조로 하여 보자

며느리 잊지 말고 소국주 밑하여라.

삼춘 백화시에 화전 일취 하여 보자

상원날 달을 보아 수한을 안다하니

노농의 징험이라 대강은 짐작노니

 

정초에 세배함은 돈후한 풍속이라

새 의복 떨쳐입고 친척 인리 서로 찾아

남녀노소 아동까지 삼삼오오 다닐 적에

와삭버석 울긋불긋 물색이 번화하다

사내아이 연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요

윷놀아 내기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세알하니 병탕에 주과로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엄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선하여 오신채를 부러하랴

보름날 약밥 제도 신라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와 바꿀소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생밤이라

먼저 불러 더위팔기 달맞이 횃불 켜기

흘러오는 풍속이요 아이들 놀이로다

 

이월령

 

이월은 중춘이라 경칩 춘분 절기로다

초육일 좀생이는 풍흉을 안다하며

스무날 음청으로 대강은 짐작나니

반갑다 봄바람에 의구히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속잎이 맹동한다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도다

멧비둘기 소리나니 버들 빛 새로와라

보쟁기 차려 놓고 춘경을 하오리라

살진밭 가리어서 춘모를 많이 갈고

목화밭 되어두고 제 때를 기다리소

담뱃모와 잇 심기 이를수록 좋으니라

원림을 장점하니 생리를 겸하도다

일분은 과목이요 이분은 뽕나무라

뿌리를 상치 말고 비오는 날 심으리라

솔가지 꺾어다가 울타리 새로 하고

장원도 수축하고 개천도 쳐 올리소

안팎에 쌓인 검불 정쇄히 쓸어 내어

불 놓아 재 받으면 거름을 보태리니

육축은 못다하나 우마계견 기르리라

씨암탉 두세 마리 알 안겨 깨어 보자

산채는 일렀으니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요 조롱장이 물쑥이라

달래김치 냉잇국은 비위를 깨치나니

본초를 상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라

창백출 당귀 천궁 시호 방풍 산약 택사

낱낱이 기록하여 때 맞게 캐어 두소

촌가에 기구 없어 값진 약 쓰올소냐

 

삼월령

 

삼월은 모춘이라 청명 곡우 절기로다

춘일이 재양하여 만물이 화창하니

백화는 난만하고 새소리 각색이라

당전의 쌍제비는 옛집을 찾아오고

화간의 범나비는 분분히 날고기니

미물도 득시하여 자락함이 사랑홉다

한식날 성묘하니 백양나무 새잎 난다

우로에 감창함을 주과로나 펴오리라

농부의 힘든 일 가래질 첫째로다

점심밥 풍비하여 때맞추어 배불리소

일군의 처자권속 따라와 같이 먹세

농촌의 후한 풍속 두곡을 아낄소냐

물꼬를 깊이 치고 도랑 밟아 물을 막고

한편에 모판하고 그나마 삶이 하니

날마다 두세 번씩 부지런히 살펴보소

약한 싹 세워 낼 제, 어린아이 보호하듯

백곡 중 논농사가 범연하고 못 하리라

포전에 서속이요 산전에 두태로다

들깻모 일찍 붓고 삼농사도 하오리라

좋은 씨 가리어서 그루를 상환하소

보리밭 매어 두고 뭇논을 되어 두소

들농사 하는 틈에 치포를 아니할까

울 밑에 호박이요 처마 밑에 박 심우고

담 근처에 동과 심어 가자하여 올려 보세

무우 배추 아욱 상치 고추 가지 파 마늘을

색색이 분별하여 빈땅 없이 심어 놓고

갯버들 베어다가 개바자 둘러막아

계견을 방비하면 자연히 무성하리

외 밭을 따로 하여 거름을 많이 하소.

농가의 여름 반찬 이 밖에 또 있는가

뽕 눈을 살펴보니 누에 날 때 되겠구나

어와 부녀들아 잠농을 전심하소

잠실을 쇄소하고 제구를 준비하니

다래끼 칼 도마며 채 광주리 달발이라

각별히 조심하여 냄새를 없이 하소

한식 전후 삼사일에 과목을 접하나니

단행인행 울릉도며 문배찜배 능금 사과

엇접 피접 도마접에 행자접이 잘 사나니

청다대 정릉매는 고사에 접을 붙여

농사를 필한 후에 분에 올려 들여놓고

천한 백옥 설한중에 춘색을 홀로 보니

실용은 아니로되 산중의 취미로다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하소

앞산에 비가 개니 살진 향채 캐오리라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랒 으아리를

일분은 엮어 팔고 일분은 무쳐 먹세

낙화를 쓸고 앉아 병술을 즐길 적에

산처의 준비함이 가효가 이뿐이라

 

사월령

 

사월이라 맹하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

보리 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도 방장이라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면화를 많이 갈소 방적의 근본이라

수수 동부 녹두 참깨 부룩을 적게 하고

갈 꺾어 거름할 제, 풀 베어 섞어 하소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 보세

농량이 부족하니 환자 타 보태리라

한잠하고 이는 누에 하루도 열두 밥을

밤낮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먹이어라

뽕따는 아이들아 훗그루 보아하여

고목은 가지 찍고 햇잎은 제쳐 따소

찔레꽃 만발하니 적은 가물 없을소냐

이 때를 승시하여 나 할 일 생각하소

도랑 쳐 물길 내고 우루처 개와하여

음우를 방비하면 뒷 근심 더으나니

봄 나이 필무명을 이때에 마전하고

베 모시 형세대로 여름 옷 지어두소

벌통에 새끼 나니 새 통에 받으리라

천만이 일심하여 봉왕을 옹위하니

꿀 먹기도 하려니와 군신분의 깨닫도다

파일날 현등함은 산촌에 불긴하니

느티떡 콩진이는 제때의 별미로다

앞내에 물이 주니 천렵을 하여 보세

해 길고 잔풍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수기를 둘러치고 은린 옥척 후려내어

반석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끓여내니

팔진미 오후청을 이 맛과 바꿀소냐

 

오월령

 

오월이라 중하되니 망종 하지 절기로다

남풍은 때맞추어 맥추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 하오리라

드는 낫 베어다가 단단이 헤쳐 놓고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 두드리니

불고 쓴 듯하던 집안 졸연히 흥성하다

담석에 남은 곡식 하마 거의 진하리니

중간에 이 곡식이 신구상계 하겠구나

이 곡식 아니려면 여름농사 어찌할꼬

천심을 생각하니 은혜도 망극하다

목동은 놀지 말고 농우를 보살펴라

뜬물에 꼴 먹이고 이슬풀 자로 뜯겨

그루갈이 모심기 제 힘을 빌리로다

보리짚 말리우고 솔가지 많이 쌓아

장마나무 준비하여 임시 걱정 없이하세

잠농을 마칠 때에 사나이 힘을 빌어

누에섶도 하려니와 고치나무 장만하소

고치를 따오리라 청명한 날 가리어서

발 위에 엷게 널고 폭양에 말리우니

쌀고치 무리고치 누른 고치 흰 고치를

색색이 분별하여 일이분 씨로 두고

그나마 켜오리라 자애를 차려놓고

왕채에 올려내니 빙설 같은 실오리라

사랑홉다 자애소리 금슬을 고루는 듯

부녀들 적공들여 이 재미 보는구나

오월오일 단옷날 물색이 생신하다

외밭에 첫물 따니 이슬에 젖었으며

두 익어 붉은 빛이 아침볕에 눈부시다

목맺힌 영계 소리 익힘벌로 자로 운다

향촌의 아녀들아 추천을 말려니와

청홍상 창포비녀 가절을 허송마라

노는 틈에 하올 일이 약쑥이나 베어두소

상천이 지인하사 유연히 작운하니

때맞게 오는 비를 뉘 능히 막을소냐

처음에 부슬부슬 먼지를 적신 후에

밤 들어 오는 소리 패연히 드리운다

관솔불 둘러앉아 내일 일 마련할 제

뒷논은 뉘 심고 앞밭은 뉘가 갈고

도롱이 접사리며 삿갓은 몇 벌인고

모찌기는 자네 하소 논 삶기는 내가 함세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

가지모 고추모는 아기딸이 하려니와

맨드라미 봉선화는 네 사천 너무 마라

아기어멈 방아찧어 들 바라지 점심하소

보리밭 찬국에 고추장 상치쌈을

식구를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

샐 때에 문에 나니 개울에 물 넘는다

메나리 화답하니 격양가가 아니던가

 

유월령

 

유월이라 계하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대우도 시행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마구리 소리 난다

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베어내고

늦은 콩팥 조 기장은 베기 전에 대우들여

지력을 쉬지 말고 극진히 다스리소

젊은이 하는 일이 기음매기 뿐이로다

논밭을 갊아 들어 삼사차 돌려 맬 제

그 중에 면화밭은 인공이 더 드나니

틈틈이 나물밭도 북돋아 매 가꾸소

집터 울밑 돌아가며 잡풀을 없게 하소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 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인 후에

청풍에 취포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농부야 근심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오조 이삭 청태콩이 어느 사이 익었구나

일로 보아 짐작하면 양식 걱정 오랠소냐

해진 후 돌아올 제 노래 끝에 웃음이라

애애한 저녁 내는 산촌에 잠겨 있고

월색은 몽롱하여 발길에 비치구나

늙은이 하는 일도 바이야 없을 소냐

이슬 아침 외 따기와 뙤약볕에 보리 널기

그늘 곁에 누역 치기 창문 앞에 노 꼬기라

하다가 고달프면 목침 베고 허리 쉬움

북창풍에 잠이 드니 희황씨 적 백성이라

잠깨어 바라보니 급한 비 지나가고

먼 나무에 쓰르라미 석양을 재촉한다

노파의 하는 일은 여러 가지 못하여도

묵은 솜 들고 앉아 알뜰히 피어내니

장마의 소일이요 낮잠자기 잊었도다

삼복은 속절이요 유두는 가일이라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가묘에 천신하고 한때 음식 즐겨보세

부녀는 헤피 마라 밀기울 한데 모아

누룩을 드리어라 유두국을 켜느니라

호박나물 가지김치 풋고추 양념하고

옥수수 새 맛으로 일 없는 이 먹여보소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말고

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내어라

비오면 덮어두고 독전을 정히 하소

남북촌 합력하여 삼구덩이 하여 보세

삼대를 베어 묶어 익게 쪄 벗기리라

고운 삼 길삼하고 굵은 삼 바 드리소

농가에 요긴키로 곡식과 같이 치네

산전 메밀 먼저 갈고 포전은 나중 갈소

 

칠월령

 

칠월이라 맹추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

화성은 서류하고 미성은 중천이라

늦더위 있다한들 절서야 속일소냐

비 밑도 가볍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가지 위의 저 매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랑는고

칠석에 견우 직녀 이별루가 비가 되어

성긴 비 지나가고 오동잎 떨어질 제

아미 같은 초생달은 서천에 걸리거다

슬프다 농부들아 우리 일 거의로다

얼마나 남았으며 어떻게 되다하노

마음을 놓지마소 아직도 멀고머다

골 거두어 김매기 벼 포기에 피 고르기

낫 벼려 두렁 깎기 선산에 벌초하기

거름풀 많이 베어 더미 지어 모아 넣고

자채논에 새 보기와 오조 밭에 정의아비

밭가에 길도 닦고 복사도 쳐 올리소

살지고 연한 밭에 거름하고 익게 갈아

김장할 무우 배추 남 먼저 심어 놓고

가시 울 진작 막아 허실함이 없게 하소

부녀들도 셈이 있어 앞일을 생각하소

베짱이 우는 소리 자네를 위함이라

저 소리 깨쳐듣고 놀라서 다스리소

장마를 겪었으니 집안을 돌아보아

곡식도 거풍하고 의복도 폭쇄하소

명주 오리 어서 뭉쳐 생량전 짜아내소

늙으신네 기쇠하매 환절 때를 근심하여

추량이 가까우니 의복을 유의하소

빨래하여 바래이고 풀먹여 다듬을 제

월하의 방추소리 소리마다 바쁜 마음

실가의 골몰함이 일변은 재미로다

소채 과일 흔할 적에 저축을 생각하여

박 호박 고지 켜고 외 가지 짜게 절여

겨울에 먹어 보소 귀물이 아니 될까

목화밭 자로 살펴 올다래 피었는가

가꾸기도 하려니와 거두기에 달렸느니

 

팔월령

 

팔월이라 중추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로 돌아 서천을 가리키니

선선한 조석 기운 추의가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간에서 들리구나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백곡을 성실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들구경 돌아보니 힘들인 일 공생한다

백곡이 이삭 패고 여물들어 고개숙여

서풍에 익은 빛은 황운이 일어난다

백설 같은 면화송이 산호 같은 고추다래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볕 명랑하다

안팎 마당 닦아 놓고 발채 망구 장만하소

면화 따는 다래끼에 수수 이삭 콩가지요

나무군 돌아올 제 머루 다래 산과로다

뒷동산 밤 대추는 아이들 세상이라

아람도 말리어라 철대어 쓰게 하소

명주를 끊어 내어 추양에 마전하고

쪽 들이고 잇 들이니 청홍이 색색이라

부모님 연만하니 수의도 유의하고

그나마 마르재어 자녀의 혼수하세

집 위에 굳은 박은 요긴한 기명이라

댑싸리 비를 매어 마당질에 쓰오리라

참깨 들깨 거둔 후에 중오려 타작하고

담뱃줄 녹두 말을 아쉬워 작전하라

장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쾌 젓 조기로 추석 명일 쉬어 보세

신도주 오려 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며느리 말미받아 본집에 근친 갈 제

개 잡아 삶아 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

초록 장웃 반물 치마 장속하고 다시보니

여름 동안 지친 얼굴 소복이 되었느냐

중추야 밝은 달에 지기 펴고 놀고 오소

금년 할일 못다하여 명년 계교 하오리라

밀대 베어 더운갈이 모맥을 추경하세

끝끝이 못 익어도 급한 대로 걷고 갈소

인공만 그러할까 천시도 이러하니

반각도 쉴새 없이 마치며 시작느니

 

구월령

 

구월이라 계추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 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이슬 재촉는다

만산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구월구일 가절이라 화전 천신하세

절서를 따라가며 추원보본 잊지 마소

물색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마당 집마당에 개상에 탯돌이라

무논은 베어 깔고 건답은 베 두드려

오늘은 점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밀따리 대추벼와 동트기 경상벼라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는 콩팥 가리

벼타작 마친 후에 틈나거든 두드리세

비단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이삭으로 먼저 갈라 후씨를 따로 두소

젊은이는 태질이요 계집사람 낫질이라

아이는 소 몰리고 늙은이는 섬 욱이기

이웃집 운력하여 제일하듯 하는 것이

뒷목 추기 짚 널기와 마당 끝에 키질하기

일변으로 면화틀기 씨아 소리 요란하니

틀 차려 기름 짜기 이웃끼리 합력하세

등유도 하려니와 음식도 맛이 나네

밤에는 방아 찧어 밥쌀을 장만할 제

찬 서리 긴긴 밤에 우는 아기 돌아볼까

타작 점심 하오리라 황계 백주 부족할까

새우젓 계란찌개 상찬으로 차려 놓고

배추국 무나물에 고추잎 장아찌라

큰 가마에 앉힌 밥 태반이나 부족하다

한가을 흔할 적에 과객도 청하나니

한 동네 이웃하여 한 들에 농사하니

수고도 나눠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 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아무리 다사하나 농우를 보살펴라

조 피대 살을 찌워 제 공을 갚을지라

 

시월령

 

시월은 맹동이라 입동 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공을 필하여도

남은 일 생각하여 집안 일 마저 하세

무우 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냇물에 정히 씻어 염담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도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박이무우 아람 말도 얼잖게 간수하소

방고래 구두질과 바람벽 맥질하기

창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수숫대로 덧울하고 외양간도 떼적치고

깍지동 묶어 세고 과동시 쌓아 두소

우리집 부녀들아 겨울 옷 지었느냐

술빚고 떡 하여라 강신날 가까웠다

꿀 꺾어 단자하고 메밀 앗아 국수 하소

소 잡고 돝 잡으니 음식이 풍비하다

들마당에 차일치고 동네 모아 자리 포진

노소 차례 틀릴세라 남녀 분별 각각하소

삼현 한패 얻어오니 화랑이 줄무지라

북치고 피리부니 여민락이 제법이라

이풍헌 김첨지는 잔말 끝에 취도하고

최권농 강약정은 체괄이 춤을 춘다

잔진지 하올 적에 동장님 상좌하여

잔 받고 하는 말씀 자세히 들어보소

어와 오늘 놀음, 이 놀음이 뉘덕인고

천은도 그지없고 국은도 망극하다

다행히 풍년 만나 기한을 면하도다

향약은 못하여도 동헌이야 없을소냐

효제 충신 대강 알아 도리를 잃지마소

사람의 자식 되어 부모 은혜 모를소냐

자식을 길러 보면 그제야 깨달으리

천신만고 길러내어 남혼 여가 필하오면

제각기 몸만 알아 부모 봉양 잊을소냐

기운이 쇠진하면 바라느니 젊은이라

의복 음식 잠자리를 각별히 살펴드려

행여나 병나실까 밤낮으로 잊지 마소

고까우신 마음으로 걱정을 하실 적에

중중거려 대답말고 화기로 풀어내소

들어온 지어미는 남편의 거동 보아

그대로 본을 뜨니 보는 데 조심하소

형제는 한 기운이 두 몸에 나눴으니

귀중하고 사랑함이 부모의 다음이라

간격없이 한통치고 네것내것 계교 마소

남남끼리 모인 동서 틈나서 하는 말을

귀에 담아 듣지 마소 자연히 귀순하리

행신에 먼저 할 일 공순이 제일이라

내 늙은이 공경할 제 남의 어른 다를소냐

말씀을 조심하여 인사를 잃지 마소

하물며 상하분의 존비가 현격하다

내 도리 극진하면 죄책을 아니 보리

임금의 백성 되어 은덕으로 살아가니

거미 같은 우리 백성 무엇으로 갚아 볼까

일년의 환자 신역 그 무엇 많다 할꼬

한전에 필납함이 분의에 마땅하다

하물며 전답 구실 토지로 분등하니

소출을 생각하면 십일세도 못 되나니

그러나 못 먹으면 재 줄여 탕감하리

이런 일 자세 알면 왕세를 거납하랴

한 동네 몇 홋수에 각성이 거생하여

신의를 아니하면 화복은 어이할꼬

혼인 대사 부조하고 상장 우환 보살피며

수화도적 구원하고 유무상대 서로 하여

남보다 요부한 이 용심 내어 시비 말고

그 중에 환과고독 자별히 구휼하소

제각각 정한 분복 억지로 못하나니

자네를 헤어보아 내 말을 잊지 마소

이대로 하여가면 잡생각 아니 나리

주색잡기 하는 사람 초두부터 그리할까

우연히 그릇 들어 한번하고 두번하면

마음이 방탕하여 그칠 줄 모르나니

자녀들 조심하여 작은 허물 짓지 마소

 

십일월령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하였는고

몇 섬은 환하고 몇 섬은 왕세하고

얼마는 제반미요 얼마는 씨앗이며

도지도 되어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시곗돈 장릿벼를 낱낱이 수쇄하니

엄부렁하던 것이 나머지 바이없다

그러한들 어찌할꼬 농량이나 여투리라

콩길음 우거지로 조반석죽 다행하다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즐기리라

새 책력 분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할꼬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리하다

공채 사채 궁당하니 관사 면임 아니온다

시비를 닫았으니 초옥이 한가하다

단귀에 조석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잔불 긴긴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서 잣고 짜네

자란 아이 글 배우고 어린아이 노는 소리

여러 소리 지꺼리니 실가의 재미로다

늙은이 일 없으니 기직이나 매어 보세

외양간 살펴보아 여물을 가끔 주소

갓 주어 받은 거름 자로 쳐야 모이나니

 

십이월령

 

십이월은 계동이라 소한 대한 절기로다

설중의 봉만들은 해저문 빛이로다

세전에 남은 날이 얼마나 걸렸는고

집안의 여인들은 세시의복 장만할 제

무명 명주 끊어 내어 온갖 무색 들여내니

자주 보라 송화색에 청화 갈매 옥색이라

일변으로 다듬으며 일변으로 지어내니

상자에도 가득하고 횃대에도 걸렸도다

입을 것 그만하고 음식 장만 하오리라

떡쌀은 몇 말이며 술쌀은 몇 말인고

콩 갈아 두부하고 메밀쌀 만두 빚소

세육은 계를 믿고 북어는 장에 사서

납평날 창애 묻어 잡은 꿩 몇 마린고

아이들 그물쳐서 참새도 지져먹세

깨강정 콩강정에 곶감 대추 생률이라

주준에 술 들으니 돌틈에 샘물 소리

앞 뒷집 타병성은 예도 나고 제도 나네

새 등잔 세발심지 장등하여 새울 적에

웃방 봉당 부엌까지 곳곳이 명랑하다

초롱불 오락가락 묵은 세배 하는구나

 

맺는노래

 

어와 내말 듣소 농업이 어떠한고

종년 근고 한다 하나 그 중에 낙이 있네

위로는 국가 봉용 사계로 제선 봉친

형제 처자 혼상 대사 먹고 입고 쓰는 것이

토지 소출 아니러면 돈지당을 어이할꼬

예로부터 이른 말이 농업인 근본이라

배 부려 선업하고 말 부려 장사하기

전당잡고 빚주기와 장판에 체계놓기

술장사 떡장사며 술막질 가게보기

아직은 흔전하나 한번을 뒤뚝하면

파락호 빚꾸러기 살던 곳 터도 없다

농사는 믿는 것이 내 몸에 달렸으니

절기도 진퇴 있고 연사도 풍흉 있어

수한 풍박 잠시 재앙 없다야 하랴마는

극진히 힘을 들여 가솔이 일심하면

아무리 살년에도 아사는 면하느니

제 시골 제 지키어 소동할 뜻 두지 마소

황천이 지인하사 노하심도 일시로다

자네도 헤어보아 십년을 가령하면

칠분은 풍년이요 삼분은 흉년이라

천만가지 생각 말고 농업을 전심하소

하소정 빈풍시를 성인이 지었느니

이 뜻을 본받아서 대강을 기록하니

이 글을 자세히 보아 힘쓰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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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미 인 곡 / 정 철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이 몸 태어날 때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緣分(연분)이며 하늘이 모를 일이런가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ㅎㆍ나 졉어 잇고 님 ㅎㆍ나 날 괴시니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ㅁㆍㅇㆍㅁ 이 ㅅㆍ랑 견졸 ㄷㆎ 노여 업다.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대가 전혀 없다.

 

平生()ㅎㆍㄴㄷㆎ 녜쟈 ㅎㆍ얏더니

평생에 원하되 함께 지내자 하였더니

 

늙거야 므ㅅㆍ 일로 외오 두고 그리ㄴㆍㄴ고.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 님을 뫼셔 廣寒殿(광한전)의 올낫더니

엊그제 님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더ㄷㆎ 엇디ㅎㆍ야 下界(하계)에 ㄴㆍ려오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왔느냐

 

올 저긔 비슨 머리 얼퀴연디 三年(삼년)이라

올 때에 빗은 머리 헝클어진지 삼년이라

 

脂紛(연지분) 눌 위야 고이

연지분이 있지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할꼬

 

음의 맺친 실음 疊疊(첩첩)혀 이셔

마음에 맺힌 시름이 첩첩이 쌓여 있어

 

니 한숨이오 디니 눈믈이라

짓는 것이 한숨이고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라

 

人生有限(유한) 도 그지업다

인생은 끝이 있는데 시름은 끝이 없다

 

無心(무심)歲月(세월)은 믈흐 고야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는 듯 하는구나

 

炎凉(염량) 아라 가  고텨 오니

더위와 추위가 때를 알고 가자마자 다시 오니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 할샤.

듣고 보고 느낄 일도 많기도 많구나

 

<서사> : 임과의 인연과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 한탄

 

東風이 건듯 부러 積雪(적설)을 헤텨 내니

동풍이 문득 불어 쌓은 눈을 헤쳐 내니

 

()밧긔 심근 梅花(매화) 두세 가지 픠여셰라.

창밖에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였구나

 

冷淡(냉담) 暗香(암향)은 므일고.

가뜩이나 쌀쌀하고 적막한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고

 

黃昏(황혼)이 조차 벼마빗최니

황혼의 달이 좇아와 배갯머리에 비치니

 

늣기  반기  님이신가 아니신가.

흐느끼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梅花(매화) 것거 내여 님 겨신보내오져.

저 매화 꺾어 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 싶구나

 

님이 너보고 엇더타 너기실고.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까

 

디고 새닙 나니 綠陰(녹음)

꽃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깔렸는데

 

(나위) 적막(적막)繡幕(수막)이 뷔여 있다.

비단 포장이 적막하고 수놓은 장막이 비어 있다

 

芙蓉(부용)을 거더 노코 孔雀(공작)을 둘러 두니

연꽃을 수놓은 비단 휘장을 걷어 놓고 공장을 수놓은 병풍을 둘러두니

 

득 시날은 엇디 기돗던고.

가뜩이나 시름이 많은데 날은 어찌 길던가

 

鴛鴦錦(원앙금) 버혀 노코 五色線(오색선) 플텨내여

원앙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 풀어내어

 

금자견화이셔 님의 옷 지어내니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님의 옷 지어내니

 

手品(수품)니와 制度(제도)시고.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격식도 갖추첬꾸나

 

珊瑚樹(산호수) 지게 우白玉函(백옥함)의 다마 두고

산호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아두고

 

님의게 보내오려 님 겨신 라보니

님에게 보내고자 님 계신데 바라보니

 

()인가 구름인가 머흐도 머흘시고.

산인가 구름인가 험하기도 험하구나

 

千里萬里 길흘 뉘라셔 자갈고.

천리만리 길을 누가 찾아갈까

 

니거든 여러 두고 날인가 반기실가.

가거든 열어 두고 나를 본 듯이 반기실까

 

하룻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 녈 제

하룻밤 서리 기운에 기러기 울며 갈 때에

 

危樓(위루)에 혼자 올나 水晶簾(수정렴)을 거든마리

높은 누각에 혼자 올라 수정발을 걷으니

 

東山이 나고 北極(북극)의 별이 뵈니

동쪽 산의 달이 떠오르고 북극의 별이 보이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

임이신가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淸光(청광)을 쥐여 내여 鳳凰樓(봉황루)의 븟티고져.

맑은달빛을 일으켜 내어 궁궐에 부치고 싶다

 

() 거러 두고 八荒(팔황)의 다 비최여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세상 다 비추어

 

深山窮谷(심산궁곡) 졈낫그소셔.

깊은산골짜기에도 대낮같이 만드소서

 

乾坤(건곤)閉塞(폐색)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생기가 막히고

 

白雪(백설)비친 제

흰 눈이 한가지 색으로 덮혀 있을 때

 

니와 새도 긋처 잇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도 끊어져 있다

 

瀟湘南畔(소상남반)도 치오미 이러커든

소상강 남쪽도 추위가 이와 같거늘

 

玉樓(옥루) 高處(고처)야 더옥 닐러 므.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陽春(양춘)을 부처 내여 님 겨신쏘이고져.

따뜻한 봄기운을 일으켜 내어 임 계신데 쏘이고 싶다

 

(모첨) 비쵠  玉樓(옥루)의 올리고져.

초가집 처마에 비친 해를 대궐에 올리고 싶다

 

紅裳(홍상)을 니믜 翠袖(취수)()만 거더

붉은 치마를 여며 입고 푸른 소매를 반만 걷어

 

日暮脩竹(일모수죽)의 혬가림도 하도 할샤.

해 저물 무렵 긴 대나무에 헤아림도 많기도 많구나

 

  수이 디여 긴 밤을 고초 안자

짧은 해가 쉬이 넘어가 긴 밤을 꼿꼿이 앉아

 

靑燈(청등) 거른 겻鈿箜篌(전공후) 노하 두고

푸른등 걸어놓은 곁에 전공후 놓아 두고

 

의나 님을 보려 밧고 비겨시니

꿈에나 님을 보려 턱 받치고 기대어 있으니

 

鴦衾(앙금)샤 이 밤은 언제 샐고.

원앙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 밤은 언제 샐까

 

<본사> : 사계절 임을 그리워 하는 마음

 

도 열두   도 셜흔 날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져근덧 각마라 이 시닛쟈

잠깐 동안 생각을 말고 이 시름을 잊자 하니

 

쳐 이셔 骨髓(골수)텨시니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쳐 있으니

 

扁鵲(편작)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명의가 열명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아아 내 병은 이 임의 탓이로다

 

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가 되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죡죡 안니다가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므든 애로 님의 오올므리라.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셔도 내 님 조노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쫒아가려 하노라

 

<결사> : 임을 향한 영원한 사랑

 

사미인곡 원문 + 현대어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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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시 모음 37편

《1》가을 당신에게

박두진

내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속도와 거리는,
당신이 내게로 오시는 거리와 속도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이 시대의 붉은 피를 씻을 수 있는 푸른 강물,
그 강물까지 가는 길목 낙엽 위에 앉아 계신,
홀로이신 당신 앞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별에까지 들리고, 달에까지 들리고, 가슴속이 핑핑 도는 혼자만의 울음,
침묵보다 더 깊은 눈물 듣고 계시는,
홀로 만의 당신 앞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2》갈대

박두진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하고
언어는 이슬 방울,
사상은 계절풍,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 흘림,
영원 -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 갈긴 칼에
선혈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하면
갈대는
고독

《3》겨울 나무 너

박두진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4》꽃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5》꽃과 항구(港口)

박두진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6》꽃사슴

박두진

꽃이김에 모가지가
난만해져 있었다.

피 뻗혀
서른 울음.

간만에 極光(극광) 하나
피고 있었다.

넋이는 고운
칠색.

金剛(금강)에,
金剛에,

푸른 물이 눈동자를
씻고 있었다.

입 한번 다물으면
영원한 침묵.

두 뿔은 먼
星座(성좌)에 걸어 놓고,

네 굽,
네 굽,

까만 굽이 山줄기를
뛰고 있었다.

白樺(백화) 하얀
山崍(산내).

방울방울 땅에 젖어
꽃피 淋?(임리) 떨구며,

골골을 못 잊어워
울어예는 사슴.

한밤에,
한밤에,

모가지가 꽃에 척척
이겨지고 있었다.

《7》너는

박두진

눈물이 글성대면,
너는 물에 씻긴 흰 달.
달처럼 화안하게
내 앞에 떠서 오고,

마주 오며 웃음지면,
너는 아침 뜰 모란꽃,
모란처럼 활짝 펴
내게로 다가오고,

바닷가에 나가면,
너는 싸포오
푸를 듯이 맑은 눈 퍼져 내린 머리털
알 빛같이 흰 몸이 나를 부르고,
달아나며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푸른 숲을 걸으면,
너는 하얀 깃 비둘기.
구구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안긴다.
아가처럼 볼을 묻고 구구 안긴다.

《8》당신 사랑 앞에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 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라까 라보니여

《9》도 봉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10》魔法(마법)의 새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흐르는 창녀이다가
한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11》묘지송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12》默示錄(묵시록)

박두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어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어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알칡이어 거기 있거라.

《13》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의 풀밭

박두진

벗꽃이 조금씩 제절로 흩날리는
바다가 바라 뵈는 언덕
풀 밭에 잠자는 꽃에 물든 바람이어.
아직은 땅 속에 잠자는 폭풍이어.
그, 비둘기는 깃쭉지, 작은 羊은 목 줄기에서
지금은 죽음,
소년과 아낙네와 젊은이의 피 뿌림의
꽃잎보다 더 고운 따스한 피의 소리.
그 위에 무성하는
풀뿌리 밑의 울음소리. 가늘은 넋의 소리.
간간한 사투리소리.
그 풀 언덕 바다가 바라 뵈는
조금씩 흩날리는 꽃이 흩는 풀밭 속에
지금은 죽음,
손으로 눈을 가린
봄. 햇살.
날아 올라보고 싶은 비둘기여.
뛰엄뛰고 싶은 羊들이어.
살고 싶은 소년이어.
울어보고 싶은 아낙네여.
말 해 보고 싶은 젊은이여.

《14》별

박두진

아아 아득히 내 첩첩한 산길 왔더니라. 인기척 끊이
고 새도 짐승도 있지 않은 한낮 그 화안한 골길을 다
만 아득히 나는 머언 생각에 잠기여 왔더이라

백엽 앙상한 사이를 바람에 백엽 같이 불리우며 물
소리에 흰 돌 되어 씻기 우며 나는 총총히 외롬도
잊고 왔더니라


살다가 오래여 삭은 장목들 흰 팔 벌이고 서 있고 풍
운에 깍이어 날선 봉우리 훌훌훌 창천에 흰 구름 날
리며 섰더니라

쏴아 - 한종일내 - 쉬지 않고 부는 물소리 안은 바람
소리 ... 구월 고운 낙엽은 날리여 푸른 담 위에
흐르르르 낙화 같이 지더니라.


어젯밤 잠자던 동해안 어촌 그 검푸른 밤하늘에 나
는 장엄히 뿌리어진 허다한 바다의별드르이 보았느니.

이제 나의 이 오늘밤 산장에도 얼어붙는 바람 속
우러르는 나의 하늘에 별들은 쓸리며 다시 꽃과 같이
난만하여라.

《15》별 밭에 누워

박두진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16》사랑이 나무로 자라

박두진


바다로 돌담을 넘어
장미가 절망한다
이대로 밤이 열리면
떠내려가야 할 끝
그 먼 마지막 언덕에 닿으면
꽃 등을 하나 켜마.

밤별이 총총히 내려
쉬다 날아간
풀 향기 짙게 서린
바닷가 언덕
금빛 그 아침의 노래에
하늘로 귀 쭝기는
자유의 전설이 주렁져 열린 나무 아래
앉아 쉬거라.

사랑이 죽음을
죽음이 사랑을 잠재우는
얼굴은 꿈, 심장은 노래
영혼은 기도록 가득 찬
또 하나 바벨탑을 우리는 쌓자.

파도가 절벽을 향해
깃발로 손짓하고
사랑이 나무로 자라
별마다 은빛 노래를 달 때
그 커다란 나무에 올라
비로소 장미로 지붕 덮는
다시는 우리 무너지지 않을
눈부신 집을 짓자.

《17》山脈(산맥)을 간다

박두진

얼룽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품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잇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咆哮(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듯 밀려 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18》새벽바람에

박두진

칼날 선 서릿발 짙 푸른 새벽,
상기도 휘감긴 어둠은 있어,

하늘을 보며, 별들을 보며,
내여젓는 내여젓는 백화(白樺)의 손길.

저 마다 몸에 지닌 아픈 상처에,
헐덕이는 헐덕이는 산길은 멀어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히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돌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불르며 가자.

서로 갈려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단 꽃이 피리라.

《19》서한체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20》소

박두진

푸른 하늘인들 한 줄기 선혈을 안 흘리랴?
의지의 두 뿔이 분노로 치받을 때

태산인들 딩굴으며 무너지지 않으랴?
전신이 노도처럼 맞받아 부딪칠 때

오늘 한 가락 고삐에 나를 맡겨
어린 소녀의 이끌음에도 순순히 따라 감은

불거진 멍에에 山 같은 짐을 끌고
수렁에 철벅거려 종일을 논 갈음은

네굽 놓아 내달리는 벌판의 자유
찌르는 뿔의 승리를 모르는 바 아니라

오늘은 오오래인 오늘은 다만 참음
언젠가는 다시 벅찰 크낙한 날을 위하여

눈 스르르 감고 새김질하는 꿈 한나절
먼 조상 포효하던 산악을 명상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절렁대는 요령에
대지 먼 외줄기길 千里를 잰다.


《21》시인 공화국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22》아버지

박두진

철죽 꽃이 필 때면,
철죽 꽃이 화안하게 피어 날 때면,
더욱 못견디게
아버지가 생각난다.

칠순이 넘으셔도 老松처럼 정정하여,
철죽꽃이 피는 철에 철죽 꽃을 보시려,
아들을 앞세우고
冠岳山,
서슬진 돌 바위를 올라 가셔서,
철죽 나물 캐어다가
뜰 앞에 심으시고
철죽 꽃이 피는 것을 즐기셨기에,
철죽 나물 캐어 드신
흰 수염 아버지가
어제같이 산탈길을 걸어 내려오시기에,

철죽 꽃이 피는 때면,
철죽 꽃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린다.

물에 젖은 둥근 달
달이 솟아오르면,
흰옷을 입으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달 있는 川邊길을
늦게 돌아오노라면
두진이냐 ?
저만치서 커다랗게 불러 주시던
하얗게 입으셨던 어릴 때의 아버지

四月은 가신 달,
아아, 철죽 꽃도 흰 달도
솟아 있는데,
손수 캐다 심어 놓신
철죽 꽃은 피는데,

어디 가셨나
큰기침을 하시며,
흰옷을 입으시고
어디 가셨나.

《23》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24》오도(午禱)

박두진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25》저 고독

박두진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26》절벽가(絶壁歌)

박두진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27》精(정)

박두진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 소리 여울 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헤엄치던 물고기의 비늘무늬
처음 걸리던 하늘의 무지개
처음 밤의 별빛 달빛, 그때
처음 사람들의 입맞춤의 첫대임
첫번째 황홀의 울음 울던 부끄러움
처음 타오르던 노을빛 네게서 어린다.

그때 처음 사람들의 첫 낱말
처음의 오해 처음의 노여움
처음 사람의 첫 증오 피흘림
처음 만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서러움
네게서 보인다.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 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있다.

《28》天台山 上臺(천태산 상대)

박두진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29》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30》칠월의 편지

박두진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 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 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31》토루소

박두진

지금은 멀디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다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 쯤을까
아가씨여.

《32》푸른 하늘 아래

박두진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
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
어서 오너라.……

《33》피닉스

박두진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속에서도,
아직은 숨어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34》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35》항아리

박두진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36》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빛이 싫여 달빛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빛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휠훨휠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위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37》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깔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사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리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
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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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 모음 17편

1.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을
부즈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2. 교목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셔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저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3.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約束)이며!

한 바다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4.남한산성

이육사

넌 제왕(帝王)에 길들인 교룡(蛟龍)
화석(化石) 되는 마음에 이끼가 끼어

승천하는 꿈을 길러 준 열수(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예 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디 비바람 있음직도 않아라.

5.노정기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여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것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짱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프러 올랐다.

항상 흐렸한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쌋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즌 소라 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드려다보며

6.말

이육사

흐트러진 갈기
후줄근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수굿한 목통
축 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헤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말이여!

7.바다의 마음

이육사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
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
여기 바다의 은총(恩寵)이 잠자고잇다.

흰 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
바다는 하늘을 간질여 본다.
여기 바다의 아량(雅量)이 간직여 있다.

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
바다는 대륙(大陸)을 푸른 보로 싼다.
여기 바다의 음모(陰謀)가 서리어 있다

8.반묘(班猫)

이육사

어느 사막의 나라 유폐된 후궁(后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에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러라.

그 적은 포효는 어느 조선(祖先) 때 유전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로우리라.

그보다 뜰 아래 흰나비 나즉이 날아올 땐
한낮의 태양과 튤립 한 송이 지킴직하고

9.산

이육사

바다가 수건을 날여 부르고
난 단숨에 뛰여 달여서 왔겠죠
천금(千金)같이 무거운 엄마의 사랑을
헛된 항도(航圖)에 역겨 보낸날

그래도 어진 태양(太陽)과 밤이면 뭇별들이
발아래 깃드려 오고

그나마 나라나라를 흘러 다니는
뱃사람들 부르는 망향가(望鄕歌)

그야 창자를 끊으면 무얼하겠오

10.소년에게

이육사

차디찬 아침이슬
진주가 빛나는 못가
연(蓮)꽃 하나 다복히 피고

소년(少年)아 네가 낳다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세라

큰강(江) 목놓아 흘러
여을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夕陽)을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져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단여도
분수(噴水)있는 풍경(風景)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西風) 뺨을 스치고
하늘 한가 구름 뜨는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은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11.잃어진 고향

이육사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 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12.자야곡

이육사

수만호 빛이래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나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최소리

숨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듸찬 강맘에 드리느라

수만호 빛이랴야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우에 이끼만 푸르러라.

13.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그러매 눈감고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4.청포도

이육사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음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닷가 가슴을 열고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며
두 손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5.파초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海月)처럼 게을러 은(銀)빛 물결에 뜨나니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추겨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즈막 날엔
기약(期約)없이 흩어진 두낱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女人)들의 잡아 못논 소매끝엔
고은 손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星座)와 새로운 꽃들을 볼때마다
잊었던 계절(季節)을 몇번 눈우에 그렷느뇨

차라리 천년(千年)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16.편복

이육사

광명을 배반한 아득한 동굴에서
다 썩은 들보라 무너진 성채 위 너 홀로 돌아다니는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왕자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자집 곳간으로 도망했고
대붕도 북해로 날아간 지 이미 오래거늘
검은 세기의 상장이 갈가리 찢어질 긴 동안
비둘기 같은 사랑을 한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유령이여!

앵무와 함께 종알대여 보지도 못하고
딱따구리처럼 고목을 쪼아 울리지도 못하거니
마노보다 노란 눈깔은 유전을 원망한들 무엇하랴

서러운 주문일사 못 외일 고민의 이빨을 갈며
종족과 홰를 잃어도 갈곳조차 없는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제 정열에 못 이겨 타서 죽은 불사조는 아닐 망정
공산 잠긴 달에 울어 새는 두견새 흘리는 피는
그래도 사람의 심금을 흔들어 눈물을 짜내지 않는가!

날카로운 발톱이 암사슴의 연한 간을 노려도 봤을
너의 먼-선조의 영화롭든 한시절 역사도
이제는 아이누의 가계와도 같이 서러워라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

운명의 제단에 가늘게 타는 향불마자 꺼졌거든
그 많은 새즘생에 빌붙일 애교라도 가졌단 말가?
상금조처럼 고운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거니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의 요정이여!

17.황혼

이육사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鍾)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黃昏)아 내일(來日)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정정(情情)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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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모음

 

★밀물  /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소금 인간   / 정끝별

​돌도 쌓이면 길이 되듯 모래도 다져지면 집이 되었다

발을 떼면 허공도 날개였다

사람도 찾아들면 소금이 되었고 돌이 되었다
울지 않으려는 이빨은 단단하다

태양에 무두질된 낙타 등에 얼굴을 묻고

까무룩 잠에 들면 밤하늘이 하얗게 길을 냈다

소금길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품었다

내보낸 길마다 칠할의 물이 빠져 나갔다

눈썹 뼈 밑이 비었다
모래 반 별 반, 저걸 매몰당한 슬픔이라 해야할까?

낙타도 사람도 한때 머물렀으나

바람의 부력을 견디지 못한것들의 백발이 생생하다
한철의 눈물도 고이면 썩기 마련,

한 번 깨진 과욕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누군가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머문만큼 늙을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맨몸으로 소금산에 든 자여,

마지막 시야를 잃은 고요여, 머리를 깨뜨려라.

모래로 흩어지리니,
세상 절반을 품었던 두 팔, 없다.

가죽 신발 속 절여진 발, 흔적도 없다

★사랑의 병법   / 정끝별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둥지새   / 정끝별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사 랑   /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이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 정끝별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소 쉰다 

★현 위의 인생   / 정끝별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에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강진 편지   / 정끝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栢)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 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 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세상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얼굴을 파묻다  / 정끝별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춘수(春瘦)  / 정끝별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입동  / 정끝별 

이리 홧홧한 감잎들 
이리 분분히 소심한 은행잎들 
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요 잎들 모아 
서리 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상강  / 정끝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추억의 다림질   / 정끝별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블루 블루스  / 정끝별

땅 속 저 깊은 흙구덩이에서도 
검게 그을린 씨앗으로 남아 
여덟 개의 꽃잎을 만들어냈다는 
이천 년 만에 핀 젖빛 목련 

여래나 금륜왕이 올 때까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히말라야 산록의 우담화 
삼천 년 만에 피는 꽃 

얼음 토탄이 되어서도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씨앗 
푸른 등꽃을 닮은 알래스카 루핀 
일만 년 만에 핀 꽃 

그러나 
흙 속에서 얼음 속에서 
싹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간 
세상 모든 씨들 
마음 속에서 죽어간 
하 많은 기다림의 씨들 

★천생연분  /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오래된 장마  / 정끝별

새파란 마음에 
구멍이 뚫린다는 것 
잠기고 뒤집힌다는 것 
눈물 바다가 된다는 것 
둥둥 
뿌리 뽑힌다는 것 
사태지고 두절된다는 것 
물벼락 고기들이 창궐한다는 것 
어린 낙과들이 
바닥을 친다는 것 
때로 사랑에 가까워진다는 것 
울면, 쏟아질까? 

★물을 뜨는 손  / 정끝별

물만 보면 
담가 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나가는 것이라고 
무심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 정끝별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 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가지에 걸린 공  / 정끝별

창공의 공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출한 동안童顔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 
백년 묵은 은행나무 가지 꼭대기에 
수은등과 나란히 걸려 있었어 

대낮의 아이들이 뻥이야 맘껏 차버린 
놀라워라 고 뻥 한번 따라 올라봤으면! 
차고 던지고 굴리고 튕기고 날리던 
공터의 찬 발들이 쏜살처럼 쏘아 올렸을 
오래된 뱃속의 허공 

그러나 너무 세게 차지는 마라 
공마다 가늠할 수 있는 속도와 높이는 다른 법 
가지 사이사이가 모두 삼천포다 

가지를 벗어날 수 없는 둥근 허기가 
안에서부터 제 거죽 몸을 먹어치우는 사이 
초겨울 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가지에 걸린 공을 가늠하고 간다 
제 집으로 들앉을 셈인가 

★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 열매가 익어 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 꼭지를 숨 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 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났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 익어가던 자리에 주먹만한 허공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 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떨어진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속 좋은 떡갈나무  / 정끝별

속 빈 떨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 정끝별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벗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공전(空轉)  / 정끝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그만 파라, 뱀 나온다  / 정끝별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바람을 기다리는 일  / 정끝별

찔레와 포플러와 길과 물과 함께 있던 
늘어진 버드나무 밑에 함께 기대앉던 
자운영과 골풀을 쓰러뜨리며 함께 눕던 
우포 물 언저리 빗방울로 맺히던 

물위에 초록 기둥을 세우고 
좀개구리밥꽃처럼 작은 방을 들이고 
소금쟁이 지나는 길목에 덜컥 꽃을 피우고 
개구리마저 튀어 오르는 물밑으로 열매를 맺고 

큰물이 흔쾌히 거두어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 
발목을 쥐고 있는 
물에 뜬 사랑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저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늦도록 꽃  / 정끝별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희 망  / 정끝별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구멍을 제 몸 속에 넣고 다닌다 
두 눈을 움푹 파헤치고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구멍에 빠질 때마다 
한 삽씩 네 눈에서 퍼냈던 
꽃 핀 모래가 
신기루 
그 허방이었니? 

★두 문 두 집  / 정끝별

네게 닿고 싶어 
서로를 보듬고 설 수 있는 짚단이 되고 싶어 
까칠한 배꼽 감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우선 문이 있어야, 
나그네처럼 
사막을 헤매던 모래집이 말했어 
그만 자고 싶어 
탯자리를 향해 행렬 짓는 
늙은 코끼리처럼 남아프리카 케냐 어디쯤 
페루의 새처럼 남아메리카 어디쯤 
하지만 우선 이 문을 버려야, 
진흙뻘처럼 
기다림에 지친 붙박이집이 말했어 

★날아라! 원더우먼  /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외칠 때마다 
군살 없는 근육질 허리에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뒷심  / 정끝별

모든 그림자는 빛의 뒤편으로 무너진다는데 
모든 풀은 바람 뒤로 밀리고 바람 뒤로 눕는다는데 
모든 줄다리기는 뒤편을 향해 당겨진다는데 
모든 말은 침묵 뒤편으로 고인다는데 
모든 사람들은 뒤가 실해야 당당히 설 수 있다는데 
모든 사랑은 기다림 뒤편에서 완성된다는데 
모든 그림자에게 뒤는 내려앉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풀에게 뒤는 맞서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줄다리기에서 뒤는 버티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말에게 뒤는 숨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뒤는 돌아보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사랑에게 뒤는 젖기 위해 있다는데 
모든 앞에 대항하는 바로 그 심心 

★한 집 눈물  / 정끝별

집에 빠진 나 한 집 
생에 그늘이 될 만한 집 한 채는 있어야 해요 
집은 나 한 집 하기 나름인걸요 
도장에 미장 새시하고 조명 갈고 
버디칼 걸고 유리창까지 닦는다 
환해진 집에 황홀한 나 한 집 

집이 기침을 하면 나 한 집 약 먹는다 
집이 오줌누고 싶어하니 나 한 집 똥눈다 
집이 술잔을 들면 나 한 집 담배를 피워 문다 
집이 바지를 벗자 나 한 집 단추를 푼다 
집이 심심해하니 나 한 집 아이 낳아 준다 

집은 날로 의기양양 나 한 집 업신여기고 
나 한 집 더럽히고 나 한 집 깔아뭉개더니 
너 나가 너 나가 다 나가 나 한 집 내차네 
집을 ?i아다니느라 빚더미로 오른 나 한 집 
나 한 집 옹골차게 등쳐먹은 잔인한 집 
집에 내?i긴 가엾은 나 한 집씨 

★봄마늘  / 정끝별

욕설같이 불쑥 주먹같이 
흰마늘쪽이 꿈틀, 
매운 눈 비비며 
폭음처럼 질주하는 
숨가쁜 휘발성 
시퍼렇게 물오른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 향기 하얀 남도 마늘꽃 
오 싱싱한 봄밤 
꽃이 아니어도 풀이 아니어도 
하르르 피워내는 
저 화냥기 좀 봐 
쉿! 쉿! 
당차게 뿜어대는 저 독기 좀 봐 
봄바다를 게릴라처럼 
상추 고추 사이 봄마늘 마늘고추장 
마늘향기 하얀 남도 마늘씨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 정끝별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피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한 주먹  / 정끝별

발레니나가 되겠다던 
화가가 되겠다던 
일곱 살배기 딸이 한 판 붙고 온 날 
한 주먹이 되겠다네 
세 놈을 한 방에 쓰러뜨린 수 있는 한 주먹 
여자애라고 얕잡아보지 않을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나도 한 주먹 있었으면 좋겠네 
한갓 시인이 되겠다는 
한낱 풍경 감식가나 되겠다는 
나를 갈고리에 걸고 내 마음을 파먹는 
떠들썩한 빈말들 한 방에 날려버릴 한 주먹 
한 주먹 키우겠다며 밤마다 

한, 주먹, 쥐었다 
한, 주먹, 폈다 

★밥 심  / 정끝별

돌고 돌다 
설설 
기고 기다 
급기야 
바닥에 박히는 
부동심법 

저 찰진 
호구의 
힘 

좆, 팽이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주름을 엿보다  / 정끝별

뼈와 뼈 사이에 살이 있다 
벌어지고 구부러진 틈으로 
검은 송사리 떼가 일구어놓은 물결이 
살과 살을 잇는다 
배를 묶어두는 밧줄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허공을 이어놓고 
풀어내고 가두는 인연을 당길 때마다 
흔들림을 정지시키며 
배들을 튕겨주는 힘줄 
송사리 떼가 들락이며 제 길을 넓힐 때마다 
살과 살은 부드럽게 접혀지고 
뼛속까지 출렁이는 
이 오래된 계단을 따라 
연하디연한 무릎 주름이 걸어들어간다 

가만 보면 
겹겹이 뜬 노곤한 봄날,누군가의 
눈물 맺힌 밧줄이 풀리고 있다 

★사과 껍질을 보며  / 정끝별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 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다 

★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박깜박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통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옹관甕棺.1  / 정끝별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 찬 항아리다 

★또 하나의 나무  / 정끝별

오십년째 이름없이 살던 참나무 한 그루 
오늘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 되셨다 
임학계 거목 김장수 씨 화장 유골이 
살아 아끼시던 이 참나무 아래 묻혔으니 
나무와 함께 살다 나무 곁으로 가셨으니 
첫 겨울 개똥지빠귀 한 마리 놀러와 
옹이에 앉아 휘파람 불어주고 있으니 
참,나무 되어 장수하시겠다 

손가락이 흰 자작의 딸이 아니었기에 
어깨 처진 고배에 고배를 자작하였으니 
언어를 호미 삼아 죽정밭 한 평쯤 자작하였으니 
별똥을 쏟아내는 개똥벌레처럼 
뼛속까지 하얗게 질린 채 자작거렸으니 
나도 죽어 자작 나무 되어 
별을 먹은 나무 되고 싶다 

불힘 좋은 몸들, 
나무들의 향기가 낯익다 

★소금호수  /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는 신발이 웃는다 

★요요  / 정끝별

당신이 나를 지루해할까 봐 
내가 먼저 멀리 당신을 던져봅니다 
달아날 수 있도록 풀어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포기의 복수 
포기의 쾌락 
그리고 포기의 보상 
당신은 늘 첫 떨림으로 달려옵니다 
던졌다 당기고 
풀렸다 되감기고 
사라졌다 되돌아오는 
천 갈래 던져진 그물 길 
오요, 오요, 오 요요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는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명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게임의 법칙  / 정끝별

그래? 내 입과 두 눈에 
네 손가락들을 깊숙이 박아봐! 
그래? 날 던져봐! 
잘 굴러갈 거야 
네 빗장뼈를 타고 코불쏘뿔처럼 달려가 
네 심장의 핀들을 모조리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그래 너! 
지금은 날 요리조리 애무하고 있지만 
그래 나? 
아직은 아직은 터질 듯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 너? 
언젠가 날 내던지고 말걸, 그 순간 
그래 나! 
네 검은 허파속을 돌진해 
뚝 끊긴 지평선 너머까지 돌진할 거야 
온옴으로 끝장내줄 거야 
어때? 
의심에 질린 맞수들의 
스트-라이크 사랑 

★와락  / 정끝별

반 평도 채 못 되는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生의 벼락 
헐거워지는 네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허공의 나무  / 정끝별
-박수근 풍(風)으로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까마득한 날에  / 정끝별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삼매三昧  / 정끝별

직박구리가 목련꽃에 머리를 쑥 박고 
이 뭐꼬! 꽁지를 한껏 치켜세운 채 
검은 직박구리가 흰 목련꽃잎을 
용맹정진 긴 부리로 촉 촉 
장좌불와長座不臥! 가지에 힘껏 발톱을 박고 
금세 한 목련 다 지고 
목련 가지 끝 잎눈 하나가 
하늘 경經 한 장을 바짝 끌어당기자 
푸른 두 귀가 쫑긋, 
벌어진 봄의 잎이란 무릇 
세 그루 건너 
배꼽마당처럼 허벅진 배꽃더미는 
직박구리 봄의 무아無我다 

★산사춘  / 정끝별

갈 수 없는 것 맞지? 
봄바람에 사태 졌던 
흰 꽃잎 
발목 삔 잎들만 남았으니 
꽃 핀 길 
걸어 잠근 가시만 남았으니 
취할 수 없는 거 맞지? 
바람에 길이 막혔으니 
영혼의 뿌리까지 다 내주어 버렸으니 
다시 그 꽃, 
피울 수 없는 거 맞지? 
이른 노을에 물들어 
붉게 맺히는 인연의 
시린 열매

★강그라 가르추  /  정끝별

한 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통속  /  정끝별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살배기 딸도 그랬다

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더니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성골과 진골을, 콩쥐외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긴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고 하고

코스닥이 뭐예요?라고 묻는 광고에 사람들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 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한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러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리라

★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막고 품다  /  정끝별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 정끝별

11시 39분 28초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지 오래인 아버지가
큰오빠 부축에 기별 없이 들이닥치셨는데
자고 갈란다, 막내딸 출가 십오년에 처음 일이었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은 저녁상을 달게 물리시고는
사진 한 장 찍어둬라, 양품에 손녀딸 안으셨는데
백세주 한병에 겨우신 듯 잠자리에 드셨는데
해소 천식에 밤새 누우셨다 앉으셨다
보타진 뒷목줄기를 어둠에 꺾어 묻고 하셨는데
무량타 한 장 더 찍어둬라, 아침을 드시고는
손녀딸 인사에 자욱이 말씀 잇지 못하셨는데

아버지가 11시 39분 28초를 풀어놓고 가셨다
막내오빠가 첫월급 기념으로 사드렸던
이제는 아침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는
오래된 오리엔트의 시계(視界)
하루 두번 11시 39분 28초를 밥먹듯 돌았던
오매불망 오리엔트의 금도금
그냥 둬라, 방향 잃고 두루 두절된
아버지의 고장난 유산
한밤이면 들이닥치는 천식의 유전
사진 속 아버지는 11시 39분 28초중이시다

★걷는다  /  정끝별

이급 시각장애 아버지 이온엽(48) 씨가
일급 정신지체장애 아들 이기독(20) 군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걷는다
넘어질 때면 무거운 머리부터 넘어지곤 하는 아들을
너펄너펄 걷게 하는 건
등뒤에서 아버지가 붙잡고 있는 끈이다
새벽 우유배달하는 아버지는 새벽이라서 어둡고
지하방에 누워 있는 아들을 씻기고 먹이는 아버지는
지하라서 어둡지만
담벼락 밑 낮은 패랭이는 알고 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끈에 묶여 걷는 까닭
아들이 툭툭 패랭이꽃을 더욱 멍들게 하는 까닭
아버지 신발 뒤축이 담벼락 쪽으로 닳아가는 까닭
걷는 게 온통 업(業)이고
걷는 게 기독(基督)이라는 걸
뱃속을 나와서도 끊지 못하는
질긴 탯줄이라는 걸
업이 기독을 앞세우고 걷는다
넘어진 꽃이 눈먼 뿌리를 뒤세우고 걷는다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  /  정끝별

남자의 직업은 배우였어 한때 잘나갔던 연기파 배우였지 그러던 어느날 남자가 희박해지기 시작했어 처음에 카메라맨은 렌즈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 렌즈를 닦고 닦았지만 남자는 점점 흐릿해져갔어 그제서야 카메라맨은 그 남자가 희미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자네는 요즘, 촛점을 잃어가고 있어" 감독도 자기 눈을 의심했어 하지만 금세 사태를 파악했어 "이보게, 자넨 휴식이 필요해, 자네가 선명해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구" 애인도 자꾸만 혼잣말을 시작했어 "어쩌나 당신, 텅텅 비었네" 더욱 희미해진 남자는 집으로 퇴각했어 집에서도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어 아내는 짜증스럽게 투정했어 "인기척 좀 하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이들도 놀라서 외쳤어 "아빠, 온통 바랬잖아!"
누구와도 대화해본 적 없던 남자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남자
한번도 제 안을 들여다본 적 없던 남자
이 가엾은 영화 속 주인공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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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 모음 25편

《1》四行詩

김영랑


1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2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3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4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러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5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만 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6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까지

7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 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8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2》5월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3》5월 아침

김영랑

비 개인 5월(五月)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지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만은

이 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蒼空)을 흔드오
자랑찬 새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 버렸대서야
불혹(不惑)이 자랑이 아니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魂)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익(靜謚)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少年)인가 보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中年)이고
내사 불혹(不惑)을 자랑튼 사람

《4》가늘한 내음

김영랑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라빛

오! 그 수심뜬 보라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윈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후끈한 마음

아니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라빛

《5》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뻔질한
은 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론 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6》내 마음 아실 이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기인뜻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혼자 마음을......

아! 내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마음에 때때로 어리누는 띠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밤 고이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배인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7》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8》뉘 눈결에 쏘이었소

김영랑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봉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일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여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어쩌면 이런 시구절이 나오는지
새삼 또 새삼스럽게도 그 감성의 풍부함에 놀랍습니다

《9》달

김영랑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10》독(毒)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뒤!>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11》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12》두견(杜鵑)

김영랑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새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 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젖한 이 새벽을,송구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바르르 떨리겠구나...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릴것을...
아니 울고는 차마 죽어 없으리오
불행의 넋이여!
우지진 진달래 와지직 이 삼경의 네 울음.

《13》땅거미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실리우다 휜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오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 날의 놓친 마음

《14》마당 앞 맑은 새암

김영랑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15》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원 설움이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6》무너진 성터

김영랑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17》북

김영랑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18》사랑은 하늘

김영랑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19》수풀 아래 작은 샘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 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 보는
수풀 속의 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이 쏟아져 동이 갓을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얽혀져 잠긴 구슬손결이
웬 별나라 뒤 흔들어 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휜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와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새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내려가 볼꺼나 내려가 볼꺼나

《20》언덕에 바로 누워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21》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22》淸明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23》淸明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24》풀 위에 맺혀지는

김영랑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25》하날갓 다은데

김영랑

내옛날 온꿈이 모조리 실리어간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고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래자
헛되나 마음가는 그곳 뿐이라

눈물을 삼키며 깃븜을 찻노란다
허공을 저리도 한업시 푸르름을

업듸여 눈물로 따우에 색이자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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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숙 고현정 고형렬 고형진 고혜경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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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희 구영주 구인환 구자운 구재기 구중회 구혜영 구효서

권갑하 권경인 권구현 권기호 권달웅 권대웅 권동기 권명옥 권복례 권상로

권순자 권애숙 권영민 권영준 권영하 권오육 권용태 권일송 권천학 권태응

권태현 권택명 권혁소 권혁웅 권현숙 권현형 권혜창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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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혜 김기린 김기림 김기만 김기문 김기석 김기우 김기진 김기연 김기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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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김상용 김상윤 김상환 김상훈 김생수 김석규 김석송 김상현 김상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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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학 김선현 김선호 김성규 김성금 김성기 김성동 김성수 김성오 김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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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김소해 김송배 김수돈 김수목 김수복 김수열 김숙자 김수영 김수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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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종 김승희 김시운 김시철 김시태 김신용 김양식 김언희 김영언 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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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출 김일태 김재석 김재원 김재진 김재칠 김재혁 김재흔 김점희 김종

정란 김정묘 김정수 김정애 김정웅 김정원 김정환 김정구 김정숙 김정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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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김지원 김지하 김지향 김지헌 김지현 김진경 김지연 김지연2 김지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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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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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거영 박건호 박경석 박경순 박경원 박귀례 박기동 박기영 박남수 박남원

박남주 박남준 박남훈 박남희 박노해 박덕규 박덕중 박두규 박남철 박남철2

박두진 박라연 박만기 박명숙 박목월 박몽구 박미숙 박미영 박봉순 박봉우

박부민 박분필 박상건 박상배 박상봉 박상수 박상순 박상우 박상일 박상천

박서원 박선욱 박성근 박성룡 박성우 박세영 박송죽 박수서 박소향 박소향2

 

박수완 박숙이 박순옥 박승미 박시교 박시향 박신지 박양균 박양진 박영근

박영우 박영호 박영희 박완호 박용래 박용재 박용철 박용하 박은희 박의상

박이도 박이화 박익흥 박인환 박일규 박재삼 박재열 박정남 박정대 박일

박정만 박정숙 박종국 박종해 박종화 박종훈 박주관 박주일 박정원 박정원2

박주택 박지영 박진관 박진성 박진숙 박진옥 박진용 박진형 박찬선 박찬

 

박찬일 박창기 박철석 박청호 박춘희 박태일 박태진 박팔양 박해석 박철

박해옥 박현령 박현서 박현수 박현자 박현태 박형준 박형진 박형희 박혜경

박혜숙 박혜진 박호영 박홍원 박화목 박훈산 박흥진 박희선 박희진

방진실 방철호

배경란 배경숙 배두순 배용제 배인환 배정원 배준석 배진성 배찬희 배현순

배창환 배한봉

백남천 백무산 백미혜 백상열 백성민 백우선 백운호 백재석 백주은 백학기

백준찬 백창수 백창우 백추자 백석

변영로 변종태 변준석 변학규

복효근

서경온 서경은 서규정 서범석 서봉석 서상규 서석화 서소로 서린 - 서림 -

서안나 서원동 서은숙 서재남 서정우 서정윤 서정주 서주홍 서정학 서정학2

서지월 서천우 서홍관 석병호 석용원 설동원 설의웅 설정식 석화 - 서하 -

서휘

설창수 설태수

성기완 성낙희 성미정 성석제 성지희 성찬경 성춘복

소재호

손광세 손근호 손동연 손석철 손선희 손순미 손옥경 손인식 손정모 손정봉

손종일 손진은 손채주 손택수 손해일

 

송기원 송명호 송종찬 송준영 송찬호 송창우 송해월 송희철 송문헌 송무 -

송선영 송수권 송영택 송영희 송용구 송재학 송정란 송정숙 송종규 송욱 -

송명 -

시리 -

신경림 신광철 신규호 신기선 신달자 신대철 신동문 신동엽 신동집 신동춘

신미균 신병진 신석정 신석초 신세훈 신애성 신재순 신정민 신정숙 신정식

신중신 신지연 신지혜 신진호 신해욱 신현림 신혜림 신진 -

심원장 심재휘 심종규 심호택 심훈 -

안갑선 안경원 안근찬 안덕상 안도현 안명옥 안성길 안성호 안용민 안윤하

안장현 안정옥 안준철 안찬수 안초근 안혜경 안혜초 안효희 안희두

양건섭 양명문 양명호 양문규 양봉선 양성우 양수창 양승준 양애경 양왕용

재선 양전형 양정자 양주동 양준호 양지예 양치상 양현근

엄승화 엄원용 엄원태

여규용 여상현 여선자

연왕모

염명순 염창권

오규원 오만환 오문강 오보영 오봉옥 오상순 오석균 오석만 오선홍 오세영

오승강 오시열 오양심 오용수 오일도 오장환 오재동 오정국 오정방 오정환

오창렬 오철환 오탁번 오태환 오환영

온형근

용혜원

우무석 우미자 우종규

원구식 원용문 원재길 원재훈 원태연 원희석 원성스님

위승희

유강희 유경환 유국진 유문호 유미성 유수연 유승도 유안진 유영 - 유용선

유용주 유인숙 유인채 유자란 유자효 유재영 유정집 유정탁 유운 - 유정 -

유종인 유종호 유진오 유창섭 유치환 유태수 유한나 유해자 유혜목 유하 -

유홍준 유화운

강로 윤곤강 윤권호 윤금초 윤동재 윤동주 윤미라 윤보영 윤삼하 윤석산

윤석중 윤성택 윤수진 윤수천 윤순찬 윤승천 윤여홍 윤예영 윤용기 윤은경

윤의섭 윤인영 윤일현 윤재걸 윤재순 윤재철 윤정구 윤제림 윤종대 윤중호

윤지영 윤지용 윤형근 윤호병 윤홍선 윤홍조 윤후명

은빈-

음예원

이가림 이갑상 이건청 이경남 이경림 이경순 이경아 이경임 이경자 이경-

이계윤 이광수 이광웅 이국헌 이근배 이기반 이기봉 이기윤 이기철 이길원

이나명 이난수 이남일 이달균 이대흠 이동녘 이동백 이동순 이동식 이동주

이면우 이명기 이명주 이문길 이문영 이문재 이민영 이민하 이병금 이륭-

이병기 이병천 이병초 이복란 이복웅 이봉래 이사라 이산하 이상국 이상-

이상백 이상범 이상옥 이상화 이상희 이생진 이선관 이선영 이선옥 이선이

이성교 이성률 이성목 이성복 이성부 이성선 이성재 이성진 이세룡 이세방

이세일 이소리 이소연 이수명 이수복 이수영 이수익 이수정 이수천 이수화

이숙희 이순호 이승수 이승익 이승주 이승하 이승협 이승훈 이승철 이승철2

이시영 이신강 이양우 이언빈 이연주 이영걸 이영광 이영수 이승희 이승희2

이영순 이영식 이영유 이영춘 이옥련 이외수 이용악 이용채 이우걸 이우석

이우영 이운용 이운진 이원규 이원섭 이위발 이유경 이육사 이윤택 이원-

이윤학 이은경 이은림 이은무 이은미 이은방 이은별 이은봉 이은상 이응인

이응준 이인석 이인원 이인자 이인해 이인혁 이장욱 이장희 이재금 이일-

이재기 이재무 이정란 이정록 이정숙 이정우 이정하 이제하 이정화 이정화2

이종숙 이종암 이종웅 이종은 이준관 이준호 이준후 이지언 이지엽 이지영

이진명 이진엽 이진우 이창기 이창대 이창수 이창숙 이창호 이창윤 이창윤2

이청화 이추림 이충이 이태건 이태극 이태수 이풀잎 이풍호 이하석 이탄-

이하윤 이학성 이한용 이한직 이해영 이해완 이해인 이향숙 이향아 이향지

이현암 이형기 이형선 이혜선 이혜영 이호우 이홍섭 이화은 이효윤 이활-

 

이훈강 이훈식 이흥규 이희목 이희승 이희자 이희중 이희철 이희숙 이희숙2

인이숙 인태성

임강빈 임경림 임노순 임동윤 임동확 임문혁 임석래 임수경 임승빈 임보-

임영조 임정현 임학수 임화- 임후성 임희구

자수정

장경기 장경린 장광열 장기연 장기주 장대송 장만영 장미숙 장병천 장서언

장석남 장석주 장성희 장순금 장순하 장승리 장승진 장영수 장옥관 장용환

장윤우 장인수 장정일 장종권 장진숙 장철문 장혜랑

전광옥 전동균 전병철 전봉건 전성호 전소영 전연옥 전영경 전영애 전은영

전재복 전재승 전현실

정경진 정공량 정공채 정기석 정끝별 정다혜 정대구 정동주 정두리 정렬-

정병근 정복여 정삼희 정상하 정성수 정세일 정세훈 정소슬 정소진 정숙-

정숙지 정승렬 정아지 정안면 정양- 정양주 정연덕 정영상 정영선 정영숙

 

정영자 정은숙 정의홍 정이랑 정익진 정인섭 정일근 정재윤 정재학 정재희

정주연 정지용 정진규 정찬우 정찬일 정철훈 정한모 정한용 정해종 정해철

정현종 정호승 정화진 정희성 정훈-

 

조경숙 조계숙 조구자 조남야 조남익 조동범 조두섭 조말선 조벽암 조병화

조상기 조상현 조석구 조석현 조연향 조영순 조영출 조예린 조완호 조용미

조우성 조원규 조윤호 조윤희 조은길 조인선 조재도 조재영 조운 - 조은-

조정권 조정인 조종현 조주숙 조주환 조지훈 조찬용 조창환 조태일 조하혜

조향미 조향-

주경림 주근옥 주금정 주문돈 주수원 주요한 주용일

 

지천웅 지철승 지정란 지창영 지영희 지영환 지은숙 지인 지순

 

진명희 진수미 진승범 진영대 진용선 진의하 진이정 진창진 진태숙

차기환 차수경 차승호 차옥혜 차정미 차창룡

채바다 채상근 채성병 채영묵 채호기 채희문

천상병 천수호 천양희 천혜은

최갑수 최광임 최금녀 최금진 최남선 최도선 최동룡 최동현 최동호 최두석

최명자 최문수 최문자 최미순 최범영 최병준 최상고 최상호 최석우 최선-

최선영 최성민 최승권 최승범 최승자 최승철 최승호 최영미 최영복 최영-

최영철 최원규 최원발 최을원 최일화 최재서 최재형 최재효 최영숙 최영숙2

최정례 최정애 최정희 최종진 최종천 최지원 최진연 최창렬 최하림 최준-

최해춘 최휘웅

추명희

피천득

하길남 하덕조 하시현 하종오 하태성 하현식 하영 - 하일 -

한광구 한영옥 한영숙 한기찬 한기팔 한명희 한무학 한문수 한분순 한상원

한성기 한용운 한이각 한이나 한정숙 한택수 한하운 한강 -

함기석 함동선 함민복 함성호 함영숙 함윤수 함형수

허금주 허만하 허문영 허성욱 허소라 허소미 허수경 허순위 허영미 허영선

허영자 허형만 허홍구

현춘식 현희-

호소향

홍경임 홍관희 홍금자 홍금희 홍사용 홍석하 홍성란 홍수희 홍승혜 홍신선

홍영철 홍예영 홍완기 홍우계 홍윤숙 홍윤표 홍은택 홍일선 홍일표 홍인숙(Grace)

홍해리 홍희표

금찬 황동규 황명걸 황병승 황봉룡 황석우 황선하 황송문 황영순 황명-

황운헌 황인숙 황인술 황지우 황충상 황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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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의 관직들. 중국관직에대해서 조금 알아보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황제에게 간하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하던 관원. 진(秦)나라 때 간대부 (諫大夫)라 부르던 것을 후한 시대에 간의대부로 개칭하여 황제의 고문과 응대 등을 맡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 원래 한무제(漢武帝)때 비롯된 공신(功臣)의 명호 (名號)였으나 후한시대에 표기장군(驃騎將軍) 다음가는 무관직이 되었다.

공부시랑(工部侍郞)

공부는 산택(山澤),영조(營造),공장(工匠)등을 맡아 보는 관청. 시랑은 이관청의 두번째 벼슬이다. 원래 임시직이었으나 수나라 때 상설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조정의 고문직. 진나라 때 9경(卿)의 하나인 낭중령(郎中令)의 속관으로 설치된 것이 한무제 때 광록훈(光祿勳)의 속관으로 마련되었다. 종2품의 관직 으로 실권은 별로 없었다.

교위(校尉)

둔병(屯兵)을 맡아 보는 관직. 한무제 때 성문교위(城門校尉)와 사례교위(司隷校尉)의 두 교위가 처음 생겨 녹봉 2천석을 받았는데, 그 후 차차 무관직으로 변하여 한직(閑職)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광록훈(光祿勳)에 속하여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의 관직. 한무제 때 비롯되었는데 훈공에 따른 일종의 세습직이었다.

낭관(郎官)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때에는 시랑(侍郞)과 낭중 (郎中)을 낭관이라 했으나, 당나라 이후 낭중과 원외랑(員外郞)을 낭관이라 칭했다. 한나라 때에는 상서(尙書;장관)의 보좌를 겸했고 후에 각 사(司)의 직무를 주관했다.

녹상서사(錄尙書事)

궁정의 문서를 맡던 관직. 후한 장제(章帝) 때 태부(太傅)와 태위(太尉)에게 이 직무를 겸하게 하는데서 시작되어 화제(和帝) 때 이후 상설 기관이 되고,그 관위(官位)는 삼공(三公) 위에 있었다. 즉 어린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그를 대신하여 집정하고 재상직을 겸했다.

대사농(大司農)

중앙 관직인 9경(卿) 중의 하나. 현재의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서 녹봉은 쌀 2천 석이었다.

대사마(大司馬)

원래 대장군(大將軍)과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주어지던 칭호. 한무제 때 그 지위는 승상(丞相) 위에 있었다. 그 후 애제(哀帝) 때 승상의 이름을 없애고 대사도(大司徒)라 칭했으나 여전히 대사마의 지위는 대사로 상위에 있고 대 사공(大司公)과 함께 삼공(三公)이라 칭하여 최고의 정무장관(政務長官) 위 치에 있었다. 그 후로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 대사마를 태위(太尉)로 개칭하 고 다른 두 관원, 즉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삼공이라 칭했다.

대장군(大將軍)

최고의 무관직. 후한 때 이 직위가 처음으로 설치되어 삼공(三公)보다 상위 에 놓았으나 수나라 때에 이르러 한직이 되었다.

대홍로(大鴻로)

외국의 빈객(賓客)과 귀순한 외이(外夷)를 맡아보던 관직. 원래 전객(典客)이라 하던 것을 한무제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도독(都督)

위문제(魏文帝)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활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관명이 아니라 산관(散官)의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독우(督郵)

한나라 때 태수(太守),군수(郡守) 등의 보좌관으로 설치된 관직. 각 현(縣)

의 행정 감독을 주 임무로 했으나 당나라 때 폐지되었다.

무위장군(武衛將軍)

궁정의 경비를 주임무로 하는 무관직. 즉 무위영(武衛營)의 대장으로서 한나라 시대에 비롯 되었다.

미인(美人)

한나라 시대의 여관(女官) 계급. 녹봉은 2천 석으로서 명나라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별가(別駕)

각 주(州) 자사(刺史)의 보좌관. 한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언제나 자사를 따라다니며 주내를 순찰했기 때문에 이 명칭이 생겼다. 정식 명칭은 별가종사사(別駕從事使)로 한때 장사(長史)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복야(僕야)

관청의 주인, 또는 장(長)의 직위. 진나라 때 시작되어 한나라로 계승되어 군인, 궁인(宮人)상서(尙書), 박사(博士) 등에 모두 복야가 있었으나, 그 후상서복야 외에는 모두 폐지되고 이것만이 전문직이 되었다.

봉거도위(奉車都尉)

천자 측근에서 수레에 배승(陪乘)하는 무관직. 한무제 때 시작되었는데 녹봉은 2천 석이었다.

비서랑(秘書郞)

궁중의 도서 및 문서를 담당하던 관직. 비서감(秘書監), 비서령(秘書令), 비서승(秘書丞) 등의 명칭으로 개칭되기도 했는데 명문 자제 중에서 등용했다.

영군(領軍)

호군(護軍)과 함께 근위병을 지휘하던 무관직. 위나라 조조(曹操)가 처음으 로 이 관직을 설치했다.

의랑(議郞)

낭중(郎中)에 소속되어 평의(評議)에 참가한 고문직. 진나라 때 폐지되었다.

자사(刺史)

칙령으로 각 주군(州郡)의 장(長)을 감찰하던 관직. 한나라 초에 설치되었으며, 후한 시대에 이르러 지방 행정의 변천에 따라 그 호칭이 여러 번 변했다 . 위진(魏晋) 시대에 자사는 주목(州牧)과 동격이 되어 지방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다.

장사(長史)

진한(秦漢) 때 승상(丞相) 및 태위(太尉)의 속관으로둔 관직. 또 이와는 별도로 진나라 때의 지방관으로서 군수의 속관으로 이 관직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변경에 있는 군의 군승(軍丞;부군수격)으로 이 직위를 두었다.

전농(典農)

후한 말기에 중원(中原)에 두었던 관직. 식량의 징수와 감독을 담당했는데 대사농(大司農) 휘하에 있었다.

전장군(前將軍)

대장군에 속한 일곱 장군의 하나. 선봉을 맡은 장군으로 녹봉은 2천 석이다.

절충교위(折衝校尉)

징발된 군사를 맡아보던 무관직.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조조의 장수 악진(樂進)이 절충장군이 된 데서 비롯된 관직이다.

종사(從事)

보좌관에 대한 총칭. 한나라 때 자사(자사)의 속관이던 별가(別駕)ㄳ치중(治中)공조(功曹) 등이 모두 종사였고, 또 각 부(部)군(郡)국(國)에도 종사가 있었다.

주부(主簿)

정부 각 부처의 문서와 부적(簿籍)을 맡아보던 관직.

중랑(中郞
중랑장의 별칭.

중랑장(中郞將)

진한(秦漢) 때 궁중의 경비를 맡던 낭중령(郎中令)에 속한 오관서(五官署)좌서(左署)우서(右署)의 대장. 지위는 장군 다음가는 것으로서 중랑이라고도 불렀다. 후한말에 이르러 동서남북의 중랑장이 증설된 때에 호분(虎賁)과 사흉노(使匈奴)의 중랑장이 있었다.

중서(中書)

한나라 무제 때 궁중의 의전(儀典)과 문서를 맡아보기 위해 설치한 관직. 처음에는 환관 중에서 임명했으나 후에 중서령(中書令)이라 개칭하여 궁중의사무에 관한 일을 통괄하게 하고 환관의 임명을 중지하고 일반인으로 이 직책을 맡게 했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때 중서성(中書省)을 두어 중서감(中書監)과 중서령(中書令)의 직제를 마련하여 궁중의 기밀 문서를 맡아 보게했다.

집금오(執金吾)

궁성 주위를 순시하며 경비를 맡던 무관직. 녹봉은 2천 석이었다.

태복(太僕)

왕명의 전달과 시종직을 주무로 하던 관직. 진한(秦漢) 시대부터는 9경(卿)의 하나로서 천자의 어가(御駕)와 어마(御馬)의 관리를 맡는 직책으로 바뀌었다.

태부(太傅)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 주(周) 시대에 태사(太師)ㄳ태부ㄳ태보(太保)의 삼공(三公) 중 두변째 고위직이었으나 진(晋) 시대 이후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태사(太師)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최고의 관직. 주(周) 시대의 삼공(三公)의 하나로 설치되어 주로 지육(智育)을 담당했다. 진(晋) 시대 이후 삼공은 삼사(三師)로 개칭되어 명예직으로 전환 했으나, 어느 왕조에서나 최고의 현직으로 예 우 했다.

 

태상(太常)

 

9경(卿) 중의 하나로서 의전(儀典)을 맡아 보던 관직.

 

태수(太守)

 

지방의 군(郡)을 다스리던 관직. 원래 군수(郡守)라 칭하던 것을 한나라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그 후 역대 왕조가 이 직책을 두었으나 송나라 이후에 는 군을 부(府)로 개칭했기 때문에 지부(知府)로 명칭을 바꾸었다.

 

태위(太尉)

 

삼공의 하나로 삼공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으며, 전국 최고의 군사장관으로, 모든 군사를 장악하였따. 동한의 태위는 실질적인 승상이었따. 항 때 대사마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동한 영제 말년에 다시 태위를 대사마와 함께 두었다. 제 1품이었으며, 녹봉은 1만석이었다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직책을 맡아보던 관직. 한나라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태보(太子太保)와 함께 동궁 삼사(東宮三師)로 불리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단순한 예우용 직함으로 변해 태자와는 아무 관도 없게 되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궁중의 의론(議論)을 맡아보던 관직. 진(晋)나라 때 비롯되었으나 수나라 이후부터 단순한 산관(散官)이 되고 말았다.

 

표기장군(驃騎將軍)

 

대장군 다음가는 무관직. 일곱 장군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녹봉은 4천 2백 석이었다. 수나라 때는 응양랑장(膺揚郞將)으로 명칭이 바뀌어 차차 권한이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무산계(武散階)의 명칭으로 화했다.

 

하남윤(河南尹)

 

수도를 다스리는 행정관. 하남은 수도 낙양(洛陽)을 말하고 윤은 행정 책임 자를 가리킨다.

 

행군사마(行軍司馬)

 

장군의 보좌관. 한나라 때 설치되어 부내(府內)의 사무를 총괄하는 한편 출정 때는 참모가 되어 장군의 부직(副職)이 되었다. 별명을 군사마(軍司馬)또는 군사(軍司)라 칭했으며, 당나라 시대 이후에는 출정할 때 장수(將帥)및 절도사(節度使) 밑에 반드시 행군사마가 있어 군대의 요직을 차지했다.

 

현승(縣丞)

 

현령(縣令)의 보좌관. 현은 군(郡) 다음가는 행정 구역으로 한 군에 10정도 의 현이 있었다. 그 장관을 현령, 그 다음을 현승이라 했다.

 

현위(縣尉)

 

현(縣)의 치안을 맡아 보던 관직. 후에 전사(典史)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주(周)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近衛官)으로 출발한 관직. 한나라 때 궁중의 근위관을 호분중랑장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 이후 이 칭호가 남용되어 무게를 잃어 가다가 당나라 때는 중급 장교정도의 지위로 떨어졌다.

 

황문상시(黃門常侍)

 

환관을 가리키는 말. 원래 황문이란 궁문(宮門) 또는 궁서(宮署)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한 시대에 이르러 환관을 가리키게 되었다.

 

효기교위(驍騎校尉)

 무관직의 명칭. 한나라 초에 설치했던 직책으로서 기병을 지휘하는 교위직이었다. 수나라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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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관제

가장 명확히 구별해야 할 개념 중 하나가 봉건제와 군현제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이용된 제도이며 그만큼 효과가 큰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봉건제란 황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다스릴 수 없으므로 황제와 혈연으로 묶여있는 , 즉 종법제도를 바탕으로 제후를 봉하여 구역을 나눠주는 것을 뜻한다. 제후들의 구역은 각자의 방식으로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으므로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군현제는 좀 더 중앙 집권적이다. 황제와 직속 관계에 있는 관리를 각 지방으로 파견하는 제도인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소수의 관리만을 직접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좀더 효율적으로 전국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의 가능성도 많이 낮출 수 있는 제도이다.

우선 하나라는 역사적 증거물이 없는 신화적 나라이기 때문에 관제제도에 대해서도 크게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처음엔 현자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는 형식이었으나, 우 왕에 이르러 아들 계가 추대되면서 선양제가 사라지고 상속제가 부활했다는 왕위계승에 대해 알 수있었다.

은나라는 전설의 도시로 여겨졌지만 최근 은허나 갑골문자가 발견되면서 타당성을 가지게 된 나라이다.그러나 역시 자료는 많지 않다.

은나라는 신권정치를 펼쳐 절대 권력을 과시하였고, 앞에서 언급했던 제도인 봉건제를 도입하여 제후에게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주었다.

대체적인 관제는 왕의 밑에 제후가 있고, 밑에는 같은 방식으로 봉해진 가신이 있었다.

주나라, 여기선 우선 봉건제도를 왜 도입해야 했는지를 언급하겠다.

땅이 크고 혹은 복속 국가들이 많이 생기게 되면 반란의 여지가 커지지 마련이다.

이를 막고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왕은 배신 가능성이 더욱적은 혈연관계의 사람들을 제후로 봉하게 되는 것이다.

왕이 제후를 봉할 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그 의식을 책명이라고 명하며, 읍토와 백성을 수여한다는 임명서인 간책을 수여하였다. 통시에 황실권위의 상징인 이기(청동제와 제기)와 거마구, 의복, 금옥의 장식, 깃발류와 관구등을 선사하였다.

그리하여 제후들은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가 작은 단위인 읍을 복속시키고 통치했다.

제후역시 혈족을 중심으로 경, 대부를 지배조직으로 편성하고 그들에게도 역시 관직과 관리구역을 주어 그 지역을 수호하게 하였다.

봉건제는 분명히 나라를 지키는데 나름대로의 이점이 있었지만 한계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 주 목적은 친척을 봉건하여 주 왕실의 번영이 되게 하자, 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후의 세력이 점차 강력해짐과 동시에 주 왕실과의 혈연적 관계도 조금씩 옅어져 왕실의 권위는 명목화 되었다.

그런 이유들로 반란과 혼란이 일어났다. 제후들이 서로 세력을 확장하려하면서 봉건제도가 해체되었다.춘추시대는 제후국이 백여 개가 넘게 존속해서 각각의 전통 기풍이 매우 컸다. 그 제후 국중 패권을 잡은 나라를 춘추 오패(제,진,초,오,월) 라 한다.

반면에 전국시대에서 전국칠웅(한,위,조,제,진,연,초)이 성립되고 관료제가 정비되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찾지 못했다.

진나라는 전국을 36군으로 나누고 그 군을 다시 현으로 나눴다. 중앙정부기구는 삼공구경제로서 한나라와 같아서 한나라와 함께 설명하겠다.

각 군은 지방관으로서 수, 군수보좌역으로 문서와 사법을 관장하는 승,군의 군사를 주관하는 위, 군수를 감찰하는 감어사를 두었고 현에는 령을 두고 그 아래에 현승과 현위를 두어 업무를 하도록 하였다.

군현의 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국가공무원가 같은 의미로 봉록을 받되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이제도가 바로 앞서 말한 봉건제와 차이가 있는 군현제이다.

한나라는 황제의 직접통치에 의한 전제적 관료국가 체제를 계승했으므로 중앙과 지방관제 역시 진제를 답습했다. 외조내조의 구분은 전한의 무제 시대 이후 황제 권력 강화를 목표로 생겼다.

중앙관제에 대해 보자면 황제 밑에3공이 있었는데 3공중 승상은 황제를 보필하여 백관을 통솔하였고 조선의 영의정과 비슷한 지위였고,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직이다. 국가주요사안은 모두 승상을 거쳐 보고되었다, 태위는 당시 상설기관은 아니었으나 군사를 담당하였다. 어사대부는 중앙, 지방관리, 궁정내부 황제측근들을 감시,감찰하고 탄핵의 임무까지 가진 오늘날 감사원장과 비슷한 동시에 부승상의 자격으로 행정에도 참여했다.  그 아래에는 9시 혹은 구경이 있었다.

우선 태상은 황실의 종묘, 제사 관련 업무, 또한 태학의 학생 선발 및 교육의 임무가 있었고,  광록훈은 궁정 내무 관리들의 감시와 통솔을 맡았다.

위위는 황제의 경호 및 궁성을 수비하는 일을 하였으며, 정위는 형법이나 사법 관련 업무를 맡았다. 대홍려는 외교적인 사안의 업무를 보았고, 종정은 황실 종친 및 외척 관련 업무를, 태복은 황제가 직접 타거나 황제의 수레를 끄는 말을 사육, 관리하였다. 대사농은 정부 재정을 관리하였고, 소부는 황실에서 소비하는 재정을 담당했다. 이 밖에 수도의 치안 담당인 집금오, 토목공사를 책임지는 장작대장, 대장추를 더해 12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음은 지방조직인데, 군은 지방통치의 중심기관이었고, 그 장관으로는 태수와 군사지위관 위를 두고 있었다. 태수 밑으로는 부관인 승이 있었고, 군수와 승아래에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격인 공조 , 연사등의 속관이 있었다. 공조는 그 지방의 호족 출신자가 임명되었고,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현은 군에 통할되어있었으나 현도 역시 향과 정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향에는 유질, 색부, 유요가 임명 파견되어 호적, 징세, 요역등을 담당하였고 정에는 정장이 있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였다.

수나라 관제는 상서, 문하, 내사, 비서, 내시 등의 5성, 어사, 도수로 이루어진 2대 , 그리고 태상, 광록, 위위, 종정, 태복, 대리, 홍로, 사농, 대부, 국자, 장작 등의 11시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추적 기능은 상서,문하의 2성에 집중되어있어 상서성은 이부, 예부, 병부, 도관, 탁부, 공부등의 6조를 두었다. 이는 후에 당나라 관제의 기초가 된다.

지방조직으로는 주, 군, 현을 두었고 장관이 각각 자사, 태수, 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와 군의 면적차이가 크지 않아 군을 폐지하고 현을 군에 직속시켰다.

수나라 역시 중앙집권제를 꾀하기 위해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영향을 받아 관제를 성립했고, 이는 발해의 관제제도에 영향을 미친다,.

3성 6부제로 운영하였는데 3성에는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이 있었다./

중서성은 정책의 기초나 그 시작을 수립하였고, 문하성은 중서성이 수립한 정책을 기준에 맞춰 심의하였다. 마지막 상서성은 심의를 통과하여 결정된 정책을 시행하는 일을 하였다.

6부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가 있다. 이부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했고,호부는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였고,예부는 과거라든가 나라의 교육과 관계된 일을 담당하였다. 병부는 군사를 관리하고 성을 수호하는 일을 하였고, 형부는 법률이나 사법, 형벌까지 맡았고 마지막 공부는 토목의 모든 책임을 맡았다.

송나라는 지금의 내각에 해당하는 중서성과 국무부에 해당하는 추밀원으로 크게 나눌수있다, 중서성에는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와 부재상인 참지정사가 있는데 이들의 권한은 거의 같았다.  추밀원은 군사관으로서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권에는 통수권과 지휘권이 있었는데 이는 천자만이 통할하고 군사령관은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추밀원을 통해 천자의 명령이 군사령관에게 전해질 때야 움직일 수 있다. 추밀원에는 추밀사, 추밀부사가 있었고, 중서와 추밀원은 양부 또는2부로서 국정을 논하는 최고기관이었다. 모든 정무는 이들의 합의로 이루어졌고, 천자는 최후 결재를 하였다.

송대는 재정을 가장 중요시 여겨 삼사(재무부)의 권한이 컸고 장관인 삼사사는 황제에게 직속되어있었다. 또한 송대 관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특수감찰기관의 발달이다. 태조때 무덕사가 있어 관리, 백성을 감시하였는데 태종에 이으러 황성사로 고쳐 확장, 정비하고 관부에는 외척이나 심복을 임명하고 전국적으로 관료를 감찰하였으므로 중앙집권이나 독재가 신장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인 각 노에는 감사를 두고 후에 따로 제거상평사를 설치하여 상호감시하게 하고, 주에는 지주를 두는 한편 그 밑에 통판을 두어 지주의 권한을 제한 시켰다. 이런 식으로 권력이 어느 누구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모든 권한은 천자에게로만 집중시키는 조직이었다.

원나라는 3대관청인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가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중앙의 주요기구였다. 중서성은 황제의 명인 법령을 입안, 기초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호, 예 병, 형,공의 행정6부를 두고 법령의 시행을 맡았다. 중서성의 장관인 중서령은 가장 영예로운 관직으로 황태자가 겸하였다. 아래에 우승상, 좌승상, 평장정사등의 재상과, 참지정사,우승, 좌승의 부재상을 두어 중요한 사안을 합의,결정하였다.

추밀원은 군사 조직의 통할기관으로서 이것역시 장관인 추밀원사는 황태자가 겸하였다.  그 아래에 지원, 원사, 동지, 부사등의 관직이 있었는데, 중대한 군사기밀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중서성에서 평장정사가 파견되곤 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는 관료기구의 감찰기관으로 장관인 어사대부, 차관인 중승 아래에 많은 감찰 어사를 두어 부정을 적발하고 민간의 풍기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

지방을 살펴보면 3대관청에 비해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게 직속되어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있었다. 지방행정관청으로 선위사가, 지방재무청으로 전운사가, 지바감찰청으로 숙정염방사가 있었다, 이 관청들 아래에는 노, 부, 주, 현,사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관청의 수령은 대부분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감찰하는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을 임명하였다(복속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그들에게 관직을 주어 반란의 여지를 줄임, 색목인은 서방계 사람들, 제색목인의 줄임말,여러종류의 사람들.)

명의 지방관제는 일단 행정단위가 성아래 부 아래 주아래 현으로 구분되어있었다.

총 13개의 성(산동, 산서, 하남, 섬서, 사천, 호광, 강서, 절강, 복건, 광동, 광서, 운남)과 그 성의 각각 아래에 부, 주, 현이 있었다.

성은 크게 일반민을 지배하는 행정기관인 승선포정사사, 군사를 통괄하는 도지휘사사, 감찰 및 사법을 담당하는 일종의 사법기관인 제형안찰사사가 있었다. 특징은 이 각각의 기관은 서로에게 조언을 할 권리도 없었을 정도로 독립적이었다.

승선포정사사에는 포정사(조선시대 관찰사와 비슷)오 참정, 참의가 각각 종 2품,3품,4품의 벼슬이었고,제형안찰사사에는 안찰사(일종의 대법관),부사, 첨사가 각각 정 3품,4품,5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지휘사사는 도지휘사(최고사령관), 도지휘동지(부사령관), 도지휘첨사(도지휘사 아래 부서장)가 각각 정 2품,종 2품, 정3품이었다.

다시 승선포정사사 아래에 있는 부,주, 현의 행정단위에 대해 설명 하겠다.

부는 우리나라의 도/군과 비슷한 단위로서 면적의 크기에 따라 상중하3등급으로 나눴다. 지부, 동지, 통판, 추관 의 정 4,5,6,7품의 관직이었다. 주는 부 아래의 행정단위 로서 부에 직속한 속주와 포정사사에 속한 직예주로 구분되었다. 지주, 동지, 판관, 이목이 각 종5,6,7,9품의 관직으로서 자리했다. 현은 가장 하급의 행정단위로서 부와 마찬가지로 3등급을 매겼는데, 단지 면적이 아닌 인구 수로 구분되었다. 지현,현승, 주부가 정7,8,9품관직이었고 조선시대 현감(마을사또)정도의 직위였다. 전사라는 무급관리가 있었는데, 이는 봉사(?)자 정도이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했으나 이민족 국가로서의 독특한 면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우선 (홍타이지) 황제의 측근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기록의 보존을 위해 설치했던 내삼원을 내각으로 개편했고 주요사무는 만주족 중신과 황족으로 이루어진 의정왕대신 에서 처리하였다. 후에 군사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군기처를 설치하여 중요한 일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점차 실권이 강해져 독립기관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내각을 보통 업무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정왕대신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청은 모든 기관을 각각 황제직속으로 두었다. 중앙사무를 담당한 6부와 대리시는 명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변경지대의 사무를 맡은 이면원과 궁중관계의 사무를 담당한 내무부 등은 명대에 없었던 새로운 기관이다;.

지방행정을 살펴보면 전국을 18성으로 나누어서 성 밑에 부가 있고 부가 다시 주, 현, 청으로 나누어졌다, 이는 명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별도로 성 직속의 주, 청을 두어 특색을 주었다.

성에는 포정사, 안찰사가 민정,감찰을 분담하였다. 각 성마다 순무를 두고, 2성마다 총독을 두었는데 순무와 총독은 명대에 시작된 제도로서 처음에는 임시직이었으나 점차 상설화 되어 청대에 이르러 지방 최고장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에는 또한 제독, 총원, 학정사, 도원등이 각각 군사, 교육, 성 내의 업무를 분담처리 하였다. 부, 주, 현에는 지부, 지주, 지현이 있었다.

봉건제, 주나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종법제도를 바탕이고, 유럽은 계약관계인 것이 특징이다. 유럽은 쌍무적 계약관계로서 주군과 봉신간의 상호적 의무를 가진다. 조건은 주군이 봉신에게 봉토를 주는 대신 봉신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주군이 위험할 때 봉신이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땅을 매개로 상호간의 의무로 묶여 있는 것이다. 계약에 명시된 의무를 한명이라도 저버리면 계약은 파기, 둘 다 지배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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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 모음 60편

1. 5월의 느티나무

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2. 각씨 붓꽃을 위한 연가

복효근

각씨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씨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씨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씨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3.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습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4. 고목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5.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복효근

겉보기엔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6. 길 혹은 질

복효근

길은 전라도 사투리로 질이다
길은 질이다
질이어야 한다
신생의 자세로
다시 탯줄에 매달리기 위하여
자궁에 이르는
이 길은
질이어야 한다

7. 꽃 등심

복효근

정육점 진열장 한 켠에
꽃처럼 예쁜 이름표가 붙어있어

소의 시체의 한 부분일 뿐인
한 덩어리 고기가
꽃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니

채식으로 오직
채식으로 맑아진 피와 영혼이
제 갈비뼈 사이에 피운 꽃

기껏해야 짐승의 시체나 먹고사는
육식의 이 야만의
족속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등심초 꽃 이름으로
숯불 위에 몸을 누이는
살꽃의 소신공양

8. 꽃 아닌 것 없다

복효근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

9. 꽃잎

복효근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혀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 소꿈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 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10. 낙엽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찬란한

신.

11. 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복효근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12.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13. 네 속눈썹 밑 몇 천리

복효근

그 빛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내 마음이
대책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그 속에 머물러
한 천년만 살고 싶은
혹은
빠져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꺼이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네 속눈썹 밑
그 깊은 빛 몇 천리

14.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15. 다친 새를 위하여

복효근

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16.당신

복효근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17.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18. 대숲에서 뉘우치다

복효근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보라

둘째딸 인혜는 그 소리를 대나무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라 했다
언젠가 청진기를 대고 들었더니 정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우긴다

나는 저 위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대나무 텅 빈 속을 울려 물소리처럼 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아이는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는다

내가 대숲에 흐르는 수천 개의 작은 강물들을
아이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저 지하 깊은 곳에서 하늘 푸른 곳으로 다시
아이의 작은 실핏줄에까지 이어져 흐르는
세상에 다시없는 가장 길고 맑은 실개천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 보라

그 푸른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입을 헹구고
푸른 댓가지가 후려치는 회초리도 몇 대 아프게 맞으며

19. 대신 매를 맞고

복효근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마음이 한 움큼 뜯겨나가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 어젯밤 술에 취해 방배동에서 모 시인과 다퉜는데
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평소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딸아이 피부약을 내 감기약인 줄 알고 먹고서
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20. 덮어준다는 것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21. 동행

복효근

한 점 얻어먹어 보겠다고
뒷집 새댁 부탁으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본 적도 있는데
아내 잘못 만나
파리 한 마리 잡는데도
관세음보살한테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다 잘하면 나도 극락 가겠다

22. 마늘촛불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23. 막막한 날엔

복효근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24. 명편

복효근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25. 목련 후기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26. 목련꽃 브라자

복효근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27. 목련에게 미안하다

복효근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목련이 핀다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

어디엔가 늘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
목련에게 미안하다

28. 물 꽃

복효근

물수제비 뜨는 돌이
물을 스치며 피우는 꽃
무색무취
순간의 꽃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그대 중심에 깊숙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에
그대를 꽃 피우는…

29. 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30. 버마재비 사랑

복효근

교미가 끝나자
방금까지 사랑을 나누던
수컷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암버마재비를 본 적이 있다
개개비 둥지에 알을 낳고 사라져버리는
뻐꾸기의 나라에선 모르리라
섹스를 사랑이라 번역하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한 해에도 몇 백 명의 아이를
해외에 입양시키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자손만대 이어갈 뱃속의
수많은 새끼들을 위하여
남편의 송장까지를 씹어먹어야 하는
아내의 별난 입덧을 위하여
기꺼이 먹혀주는 버마재비의 사랑
그 유물론적 사랑을
☆★☆★☆★☆★☆★☆★☆★☆★☆★☆★☆★☆★


복효근

저 등 하나 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
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
보리를 찾아서

복효근

남해금산의 보리암은
바다새의 둥지처럼
절벽에 매달려 있었네

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고
바라다뵈는 바다가 그림 같다고 말하지 말라
바랑에 쌀을 짊어지고 아둥바둥 오르는
쭈그렁 보살님네들이 더 아름다운 곳

길 아닌 길만 더듬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
혹은, 뛰어들 수 있는 바다
언제나 끝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나그네에게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보리암은 절벽에 있었네
바닷새는 벼랑에 살고 있었네

남해금산은
가만히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풀어주고 있네 *
☆★☆★☆★☆★☆★☆★☆★☆★☆★☆★☆★☆★
비누에 대한 비유

복효근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 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
산길

복효근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
산삼

복효근

야생화 모임에서 산엘 갔다네
오늘 주제는 앵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가 질문을 했네
만약 이러다가 산삼이라도 큰 놈 하나 캐게 되면
자네들은 누구 입에 넣어 줄 건가
잠시 고민들 하더니
친구 한 놈은 아내를 준단다
또 한 친구는 큰자식에게 준단다
그럼 너는 누구 줄 건데 하길래
나도 비실비실 큰딸에게 줄 거야 했지
그러고 보니
에끼 이 후레아들놈들아
너도 나도 어느 놈 하나
늙으신 부모님께 드린다는 놈 없네
우리 어머니 들으시면 우실까 웃으실까
다행히 제 입에 넣겠다는 놈은 없네
더 다행인 것은 산삼이 없네
눈앞에 앵초 무더기 환하게 웃고 있네
☆★☆★☆★☆★☆★☆★☆★☆★☆★☆★☆★☆★
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새의 울음소리에는

복효근

내 새벽잠을 가만 흔들어 깨우는
저 새의 울음소리는
새 울음만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의 비유로 말해야 옳다
비를 머금은 구름의 노래이거나
지하를 떠돌다 돌 틈을 빠져나와
계곡을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소리이거나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자장노래 소리이거나
그렇다 저 소리를
새의 울음소리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눈감은 채 들어보면
그 옛날 그 여자가 부르던 노래
하마 은하의 강물 곁에 살림을 차리고
쌀 씻으며 부르는 노래
새 울음소리에는 지나온 천 개의 하늘이 있고
살아보지 않은 천 개의 강물 소리가 있다
그리운 노래가 있다
꿈꾸는 별들의 뒤척임 소리가 있다
새는 인드라의 그물코에 앉아
그 가운데 몇 개의 소리를 가져와
지금 내 귓가에 내려놓는 것이다
☆★☆★☆★☆★☆★☆★☆★☆★☆★☆★☆★☆★
생(生)

복효근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있다 애(愛)와 증(憎), 삶과 죽
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
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
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불꽃
☆★☆★☆★☆★☆★☆★☆★☆★☆★☆★☆★☆★


복효근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공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
숫돌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슬픔에 대하여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
아기 돌탑

복효근

산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작고 못생긴 돌 조각으로 쌓은 탑 있네
누가 쌓았을까
산처럼 커야 한다고
백장암 삼층탑처럼 높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들패랭이 같은
용담꽃 같은
온 천지 들꽃 같은
애기 돌탑


위에

아래

그것은
돌이
아니라네 탑이라네
산길 가다보니 돌멩이 하나 하나가
두고 온 그대
떠나간 내 모든 그대 얼굴이네

어느덧 지리산도
소슬한 한 채 탑으로 서 있네
☆★☆★☆★☆★☆★☆★☆★☆★☆★☆★☆★☆★
아름다운 번뇌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아침

복효근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헹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이제 늙은 감나무는 열예닐곱 청춘처럼
어디 뵈지도 않는 꾀꼬리소리와 머언 먼 태양에게도
푸른 손을 흔들어 뵈는데
저들의 수작에 어쩌자고 나는 끌어들여서
늙은 감나무 잎사귀를 다 채우고도 그대로 남은
저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내 두 귀 가득 채우는가
내 뇌혈관 맑은 실핏줄까지가 아릿하고 또 말갛게 틔어오는데
그 바람에
여보, 뭐해 찌개가 졸아서 다 타잖아
어쩌고저쩌고
이른 아침 듣는 아내의 지청구도 꾀꼬리 소리만 같았다
☆★☆★☆★☆★☆★☆★☆★☆★☆★☆★☆★☆★
어머니에 대한 고백

복효근

때 절은 몸뻬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가
뼈 속 절절히 아름다웠다고 느낀 것은
내가 내 딸에게
아저씨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무렵이었다
☆★☆★☆★☆★☆★☆★☆★☆★☆★☆★☆★☆★
엉겅퀴의 노래

복효근

들꽃이거든 엉겅퀴이리라
꽃 핀 내 가슴 들여다보라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잃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 돋힌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주리라
사랑을 보여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
연잎의 마음

복효근

비가 쏟아지자 덕진연못의 수문엔 콸콸 붉덩물이 들고 있었다
모든 연잎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 몸을 큰 잔으로 만들어 빗물을 받았다
투명한 빗물을 정한수처럼 받들고 빗줄기의 매를 맞는 연잎에선
지장보살지장보살 곡진한 비나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지금까지 나는
연꽃의 아름다움과 연향의 꽃다움만을 노래해왔다
내 이념의 사치와 과소비를 뉘우치며 오래 서있는 동안에
연잎들은 받아든 맑은 빗물을 붉덩물 연못에 합장배례하듯 연신 부어주었다
연못이 흙탕물로 넘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흙탕물은 어두운 세상 쪽으로 연꽃 대궁 몇 개를 빚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연꽃이기보다는 연잎이기를 꿈꾸었다
이 역시 사치가 아니기를 나도 마주 합장하였다
☆★☆★☆★☆★☆★☆★☆★☆★☆★☆★☆★☆★
외줄 위에서

복효근

허공이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
일생(一生)은

복효근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의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
☆★☆★☆★☆★☆★☆★☆★☆★☆★☆★☆★☆★
자비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
쟁반 탑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
저녁 강에서

복효근

사는 일 부질없어
살고 싶지 않을 때 하릴없이
저무는 강가에 와 웅크리고 앉으면
내 떠나온 곳도
내 가야 할 그 곳도 아슴히 보일 것만 같으다

강은 어머니 탯줄인 듯
어느 시원(始原)에서 흘러와 그 실핏줄마다에
하 많은 꽃
하 많은 불빛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핀다

이 강에 애면글면 매달린 저 유정무정들이
탯줄에 달린 태아들만 같아서
강심(江心)에서 울리는 소리
어머니 태반에서 듣던 그 모음만 같아서
지금은 살아있음 하나로 눈물겹다

저문 강둑에 질경이는 더욱 질겨
보일둥말둥 그 끝에 좁쌀 같은 꽃도 부질없이 핀다
그렇듯
세상엔 부질없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오늘 밤 질경이 꽃 한 톨로
또한 부질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직 하류는 멀다
언젠가 이 탯줄의 하류로 하류로 가서
더 큰 자궁에 들어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내일도 나는 한 가닥 질경이로
살아야겠는 것이다

저 하류 어디쯤에 매달려
새로이 돋는 것이 어디 개밥바라기별뿐이겠느냐
나는 다시 살고만 싶다
☆★☆★☆★☆★☆★☆★☆★☆★☆★☆★☆★☆★
접목接木

복효근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
주택복권의 추억

복효근

아는 사람은 안다
돼지꿈을 꾸고
복권 몇 장을 사가지고 있는 동안의
턱없는 설레임을 ……
군 입대할 적 어머니가
병역수첩 맨 뒷장에
꼭꼭 접어 넣어주던 부적처럼
한 주 동안이 든든했다
더러는 남의 돼지꿈까지 사다가
복권을 샀다 당첨되지 않아도
좋았다 퇴근길
찬송가를 부르며 바구니를 내밀던
맹인에겐 한 푼도 주지 못했지만
복권을 갖고 있는 동안
복지국가 건설에 한몫했다는 자부심 ……
아는 사람은 안다
거, 왜 표어도 있잖은가
"내가 산 복권 한 장
국민주택 벽돌 한 장"
버스표 파는 가판대
주택복권 진열칸 앞에서
두근대며 번호 맞춰보던 추억을,
술취한 퇴근길 가끔은
내가 쌓는 남의 집들에 막혀
내 전셋집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도
돼지꿈 속에서 한 주 동안
턱없이 행복했던 추억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 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폐차와 나팔꽃

복효근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비켜라 경적을 울려대며
회생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달릴 줄만 알았던
한참 광 나던 시절엔 어찌 알았으리
필요로 하는 것들에게
하나하나 내어주고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
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
페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 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가 아름다운 어느 아침
☆★☆★☆★☆★☆★☆★☆★☆★☆★☆★☆★☆★
한 수 위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보이는 돈이
천원짜리 구지폐 넉 장이다
-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이씨요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
함박꽃 그늘 아래서

복효근

어느 아득한 눈나라 북녘에서 왔을까
백두대간 지리산 능선에는
하 눈부셔서
눈감아야 오롯하게 보이는 꽃 있어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
지그시 눈감고 들여다보면
불타는 꽃 심장 속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는 마음의 빛깔이랑
그 꽃 가슴 둘러싼 시원(始原)의 하늘빛도 비쳐와

여염집 키 큰 목련만 보아도 가슴 뛰는데
가시덩굴 바위틈
함박꽃, 그 꽃덩이 보면
나는 그만 숫총각이 되고 만다네

열아홉 숫총각이 되어
봉화산 영취산 속리산 태백산 금강산 넘어 넘어서 가면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그 꽃 그늘 아래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
허물

복효근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매미의 허물 속
없는 매미가 나무 위에 우는 매미를 증명하듯
저 매미는 또 매미 다음에 올 그 무엇의 거푸집인 것이냐
매미의 저 울울(鬱鬱)한 노래가 또 무엇의 어머니라면

세상의 모든 죽음을 어머니라 불러야 옳다
허공에 젖을 물리는 저 푸른 무덤들
☆★☆★☆★☆★☆★☆★☆★☆★☆★☆★☆★☆★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홍시

복효근

누구의 시냐
그 문장 붉다

봄 햇살이 씌워준 왕관
다 팽개치고

천둥과 칠흑 어둠에 맞서
들이대던 종주먹
그 떫은 피

제가 삼킨 눈물로 발효시켜
속살까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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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모음

 


박재삼 시 모음 27편

1. 12월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3.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박재삼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4. 나는 아직도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5. 나무 그늘

박재삼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6.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박재삼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7. 낙과소리를 들으며

박재삼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8. 라일락꽃을 보면서

박재삼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9. 無言으로 오는 봄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10. 무제(無題)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11. 바람의 내력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12. 밤바다에서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天下에 많은 할말이, 天下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13.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14. 사랑의 노래

박재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15. 사랑하는 사람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16. 슬픔을 탈바꿈하는

박재삼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17. 신록(新綠)

박재삼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18. 新綠을 보며

박재삼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19. 아름다운 사람

박재삼

바람이 부는 날은
별들이 갈대로 쓸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사람아.

달이 높이 뜬 날은
별들은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을 보며 고개 숙인
아름다운 사람아.

20.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21. 일월 속에서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22.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23. 첫사랑 그 사람은

박재삼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24. 추억(追憶)에서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漁物)전에는
바닷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25. 햇빛의 선물

박재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26. 혹서일기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27. 흥부 부부상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닿는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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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결구 84법이란

 

1.天覆 : 宇宙宮官 ---要上面蓋盡下面宜上淸而下濁

윗면이 아랫면을 모두 덮을 수 있어야하며 위는 맑고 가볍고 경쾌하게 하여야하고 아래는 무겁고 탁하게 해야한다.

 

2.地載 : 直且至里 ---要下 載起上 宜上輕而下重

아래획이 윗획을 싣고 있는 듯이 해야하고 위에는 가볍게 아래획은 무겁게 처리하여야 글씨가 어우러진다.

 

3.讓左 : 助幼卽却 ---要左高而右低右邊須讓左邊

왼쪽이 높고 오른쪽은 낮아야 하는데 우변은 반드시 왼편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왼편은 크게 오른편은 작게 해야한다.

 

4.讓右 : 晴 蝀 績 峙 ---要右高而左平左邊須讓右邊

우측은 높고 좌측은 우측과 평평하게 해야하는데 좌변이 우측에 양보를 하는 것처럼 좌측을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5.分疆 : 體輔願順 ---左右平不相讓如兩人幷立

좌우를 고르게 하여 서로 양보하는 것이 없도록 하여 마치 두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하여야한다.

 

6.三勻 : 謝樹衛術 ---中間正而勿偏左右致拱揖之狀

중간은 바르면서 치우치지 말아야하며 좌우의 것들은 공손하게 읍하고 있는 모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7.二段 :鑾 嚮需留 ---要分爲兩半相其長短略加饒減

두부분으로 나뉘어지게 하여야하는데 서로 그장단을 맞추기 위하여 획이 적은 것은 크게하고 획이 많은 부분은 줄여서 작게 써야하는 것이다.

 

8.三停 : 章意素累 ---要分爲三截量其疏密以布勻停

세마디로 나뉘어지게 써야하는데 그 성글고 빽빽한 것을 생각하여 고르게 배치되도록 하여야한다.

 

9.上占地步 : 雷雪普昔 ---要上面闊而 輕下面窄而 

윗면은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해야하고 아랫면은 좁으면서 획을 무겁게 하여야한다.

 

10.下占地步 : 衆界要禹 ---要下面闊而 輕上面窄而 

아랫면을 활달하게 하면서 획이 가볍게 하여야하고 상면은 좁으면서 획이 탁하고 무겁게 하여야한다.

 

11.左占地步 : 數敬劉對 ---要左邊大而 細左邊小而 

좌변이 크면서 획이 가늘게 하여야하고 우변은 작으면서 획이 굵어야한다.

 

12.右占地步 : 騰施故地 ---要右寬而 瘦左邊窄而 

오른쪽은 넓으면서 획이 마르고 왼쪽은 좁으면서 획이 살쪄있어야 한다.

 

13.左右占地步 : 弼辦衍仰 ---要左右都瘦而長中間獨肥而短

좌우가 모두 마르면서 길어야하고 중간부분만이 통통하면서 짧아야한다.

 

14.上下占地步 : 鸞鶯釁---要上下寬而稍扁中間窄而勿長

위아래가 넓으면서 조금 납짝하게 하여야하고 중간은 좁으나 길게하지 말아야한다.

 

15.中占地步 : 蕃華衝擲 ---要中間寬大而 輕兩頭窄小而 

중간부분을 관대하게 하면서 획을 가볍게 해야하고 위아래나 좌우는 좁으면서 획이 무거워야한다.

 

16.俯仰勾  : 冠寇密宅 ---要上蓋窄小而勾短下腕寬大而勾長

위의 덮개는 좁고 작게하고 구<갈고리>를 짧게하고 하완은 관대하게 하면서 구를 길게 하여야한다.

 

17.平四角 : 國固門閉 ---上兩角要平下兩角要齊忌挫肩垂脚

위의 양각을 평평하게 하여야하고 아래 양각은 가지런하게 하여야하는데 어깨가 뒤틀리거나 다리부분이 축늘어진 것은 좋지않다.

 

18.開兩肩 : 南丙兩而 ---上兩肩要開下兩脚要合忌直脚却肩

위의 양어깨는 벌어지게 하여야 하고 아래 양다리는 모이도록 해야하는데 곧게 나란히 내려온 다리나 좁은 어깨를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

 

19.勻畵 : 壽 疆 畵 ---黑白點 須要均勻

흑백점획을 모름지기 고르게 해야한다.

 

20.錯綜 : 馨聲繁繫 ---要三部交錯均勻不致互相障碍

세부분의 교착을 고르게 해야하는데 서로 장애가 되게 하여서는 안된다.

 

21.疏排 : 瓜介川不 ---疎排要疎闊各 要開展

소배는 성글고 활달하게 해야하며 각 삐침획은 펼쳐지는 듯이 하여야 한다.

 

22.縝密 : 繼 爟 纁   --- 要緊縮若疏開則 

점획을 긴밀히게 하여야한다. 만약 벌려놓으면 흩어져보이게 된다.

 

23.懸針 : 車申中巾 ---懸針須鋒不宜中  則無精神

현침은 반드시 봉이 드러나게 해야하는 것이니 중수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중수로하면 정신이 없어 보인다.

 

24.中竪: 軍年單畢 --- 不宜懸針懸針則不穩重

중수는 현침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현침으로 하면 온중하지 않다.

 

25.上平 : 師明牡野 ---上平是小的在左邊上面要平齊

상평은 작은 것이 좌변에 있는 것인데 상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26.下平 : 朝敍叔細 ---下平是小的在右邊下面要平齊

하평은 작은 것이 우변에 있는 것인데 하면을 평평하게 맞추어서 써야한다.

 

27.上寬 : 守可亨市 ---下面不宜過大上面要疎展

하면을 너무 크게 쓰지 말아야하며 상면은 넓고 시원하게 해야한다.

 

28.下寬 : 春卷夫太 ---上面緊小短促下面要開展

상면을 줄여서 좁게하고 하면을 넓고 시원하게 벌려줘야한다.

 

29.減捺 : 變癸食黍 ---複捺要減少不減少則主客不分

파책이 두개이상 있게 되는 경우에는 그중에 하나는 줄여서 점이나 작은 파책으로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객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30.減勾 : 禁埜梨---複勾要減少不減則輕重不辨

갈고리가 두개이상 있을 경우에는 줄여서 철주처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중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31.讓橫 : 喜婁吾玄 --- 都要長才不像

횡획을 모두 반드시 길게 해야한다. 그래야 비로소 들려지는 모양이 되지 않는다.

 

32.讓直 : 甲干平市乖 ---要直 正長而不偏短

직획을 바르고 길게 해야하니 그래야 너무 작아지지 않는다.

 

33.橫勒 : 此七也乜  ---橫勒若過於放平則無筆勢

횡평이 만약 방평보다 지나치게 되면 곧 필세가 없어진다. 乜: 사팔뜨기 먀

 

34.均平 : 三云去不 ---長短須平均相配相齊則失威

장단이 반드시 고르게 서로 어울려야 한다. 길이를 서로 같게하면 위엄을 잃게된다.

 

35.縱波 : 丈尺吏臾 ---縱波的波須要藏頭收尾

종파의 파책은 장두로 해야하고 수미로 해야한다.

 

36.橫波 : 道之是足 ---橫波的波先要拓頸寬胸

횡파의 파책은 목부분을 넓게하고 가슴부분을 시원하게 해야한다.

 

37.縱戈 : 武成幾夷 ---縱戈的戈過彎曲則無力

종과의 과는 지나치게 구부러지게되면 힘이 없게 되는 것이다.

 

38.橫戈 : 心思志必 ---橫戈的戈不宜挺直勾平

횡과의 과는 몸이 곧으며 구가 평평해서는 않된다.

 

39.屈脚 : 烏馬焉爲 ---屈脚的勾要共包兩點

굴각의 구는 두개의 점을 감싸고 있도록 해야한다.

 

40.承上 : 天文支交 ---承上的 要使叉對正中

승상의 삐침은 교차되는 부분이 정중앙에 있도록 해야한다.

 

41.曾頭 : 曾善英羊 ---曾頭的字要上開下合

증두의 점은 위는 벌어지고 아래는 모여야한다.

 

42.其脚 : 其具與典 ---其脚的字要上合下開

기각의 점은 위는 모이고 아래는 벌어져야한다.

 

43.長方 : 罔周同冊 ---長方的字四面要直而寬大

장방의 글자는 사면이 곧으면서 넓고 커야한다.

 

44.短方 : 西曲回田 ---短方的字兩肩要平開

단방의 글자는 양어깨가 평평하고 벌어져야한다.

 

45.搭勾 : 民衣良長 ---搭勾的字要 搭否則筆勢苟且

탑구의 갈고리는 다른 갈고리보다 더욱 올려서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필세가 구차하여진다.

 

46.重徶(중별): 友及反皮  ---  宛轉勿使兩 平行

중별의 별획은 모름지기 완만하게 구부러지게 해야한다. 두개의 삐침을 나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47.攢: 采孚妥受 --- 點的點須朝向否則像 

찬점의 점은 반드시 조회를 받듯 아랫쪽을 향하여 모이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섬돌과 같이 된다.

 

48.排點 : 無照點然 ---排點的點勿平板如布棋要貴變化

배점의 점은 평평한 판에 바둑돌을 놓는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49.勾努: 菊葡蜀曷 ---勾努不宜向內  則外難方圓

구로는 안으로 향하여 싸려고 하지 마라. 안으로 싸는 모양이 되면 밖으로 방원을 만들기 어렵다.

 

50.勾裹구과 : 甸句勾勺 ---勾努不宜用直努直努則外難飽滿

구과에는 직노를 사용하지 마라. 노획을 곧게 하다보면 안으로 포만한 느낌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51.中勾 : 東束米未 ---中勾的字但求偏正生硏

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다만 치우치고 바르게되는 것을 잘 생각하여 할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처럼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52.綽勾 : 乎手予于 ---綽勾的字亦喜硏生偏正

작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역시 치우치고 바른 것에 대하여 잘생각하여 할 것인데 갈고리가 보통의 각도보다 조금 느슨하게 좌측방향으로 올라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53.伸勾 : 紫訾紫觜 旭勉 ---伸勾的字惟在屈伸取體

신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오직 굽어진 곳에서 몸을 취해야한다.

 

54.屈勾 :  鳩輝  ---屈勾的字要知體力屈伸

굴구가 들어가는 글자는 체와 힘과 굴신을 알아야 한다.

 

55.左垂 :  幷亦弗 ---左垂的字右邊不得太長

좌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우변을 너무 길게 해서는 안된다.

 

56.右垂 : 升叔拜卯 ---右垂的字左邊須要縮短

우수가 들어가는 글자는 좌변을 짧게 해야한다.

 

57.蓋下 : 會合金舍 ---蓋下的蓋左右要平均分

개하의 개는 좌우가 고르게 배분되어야한다.

 

58.: 琴谷呑吝 --- 下的 兩邊要平展

진하의 진은 양변이 모두 고르게 벌어져야한다.

 

59.縱腕 : 風鳳飛氣 ---縱腕要長但 蜂腰鶴膝

종완은 길게 해야하나 봉요나 학슬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60.橫腕 : 見毛尤兎 ---橫腕也要梢長亦忌蜂腰鶴膝

횡완 또한 조금 길어야하나 또한 봉요나 학슬이 되지 말아야한다.

 

61.  : 尹戶居庶 --- 忌短 牛頭鼠尾

종별은 짧은 것을 꺼리나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62.  : 考老省少 --- 喜長也 牛頭鼠尾

횡별은 길은 것이 좋으나 또한 우두 서미가 되는 것을 꺼린다.

 

63.  : 參彦形  --- 在以下 之首對上 的胸

연별은 하별의 머리부분이 상별의 가슴부분을 대하고 있어야한다.

 

64.散水 : 沐波池海 ---散水在以下一點之起鋒應上一點之尾

산수는 아래 한점의 기봉하는 부분이 상일점의 꼬리 부분에 상응하여한다.

 

65.: 土止山公 ---此等字宜肥然忌擁腫擁腫則顯更肥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도톰하게 써야하나 부어있는 느낌은 좋지 않다. 부어있는 느낌이 들면 살찐 것이 더욱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66.: 了卜才寸 ---此等字瘦瘦忌枯削枯削則形更瘦

이러한 등등의 글자는 수척하게 써야하나 수는 삐쩍마른 것을 꺼린다 삐쩍마르면 모양이 더욱 수척해보이기 때문이다.

 

67.: 上下士千 ---疎本稀排乃用豊肥碩壯

소는 본래 드문드문하게 배열하는 것이나 풍비석장함을 사용하여야한다.

 

68.:  齎龜  ---密要安疎須知輕細勿宜粗重

밀은 성글게 쓰는 것이 편안한 것인데 가볍고 가늘게 써야함을 알고 두텁거나 무겁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69.: 晶品 ---堆重 勻注意結合的地方勿使過疎過密

퇴는 골고루 배치시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그러나 결합하는 곳은 너무 성글거나 너무 조밀하게 하지말라.

 

70.:   ---繁複中取均勻整潔否則形體刺眼難看

복잡하고 중복이되는 획이 많은 경우는 고르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체가 눈을 자극하여 보기싫게 된다.

 

71.: 入八乙己 ---偏中要能勻稱勻稱則其形勢始相安

편중이된 글자는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니 균형이 맞아야 그자세가 비로소 편안해진다.

 

72.:  巒樂欒 ---圓是要圍滿成圓形不要露鋒芒

원은 주위가 꽉차서 원형을 이루어야하니 봉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73.: 毋勿乃力 ---斜中須取方正如不能方正則形體更斜

기울어진 속에서 반듯한 것을 취해야하니 반듯하지 못하면 형체가 더욱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74.: 主王正本 ---正要四方不偏如磐石泰山之安而不搖動

정은 사방 어느 곳으로든 치우침이 없어야한다. 반석이나 태산과 같이 편안하여 동요되는 것이 없어야한다.

 

75.: 哥昌呂圭 ---重的字下半要大亦不可太大上面宜梢小

중첩된 글자는 아래에 있는 것을 크게 해야하는데 너무 크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상면은 약간 작게 해야한다.

 

76.: 竹林羽弱 ---倂的字右邊要梢寬左邊要梢窄能讓

같은 모양으로 나란한 글자는 우변을 조금 더 크게 해야하는데 좌변은 약간 작으면서 양보하는 기분으로 써야한다.

 

77.: 自目耳葺 ---長的字不要使短使短則變原形

긴 글자는 억지로 짧게 쓰려고 하지 마라. 짧아지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진다.

 

78.: 白曰工四 ---短的字不要求長求長則不成體

납짝한 글자는 길게 쓰려고 하지마라. 길게 쓰면 원래의 형체를 만들지 못하다.

 

79.:   囊戇 ---大的字要 簇如 散則不能站立

큰글자는 모아서 긴밀하게 써야하니 흩어지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게 된다.

 

80.:  口小工 ---小的字要豊厚莊嚴否則更形小

작은 글자는 豊厚하고 莊嚴하게 써야하니 그렇지 않으면 모양이 더욱 작아지게 된다.

 

81.: 妙舒飭好 ---向的字雖相向但手足仍須廻避得當

향세의 자형으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향세를 이루고 있더라도 수족에 해당되는 부분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여서 알맞도록 해야한다.

 

82.: 孔乳兆非 ---背的字雖相背而脈絡仍是貫通

背勢로된 글자는 비록 서로 배세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서로 어울어져 그맥이 관통할 수 있어야한다.

 

83.: 一二十  ---孤的字筆 忌輕浮枯瘦否則更孤

획이 별로 없는 글자는 필획이 가볍고 들뜨고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리나니 그렇지 않으면 더욱 외로와지게 되는 것이다.

 

84.:日月弓乍 ---單的字筆 要俊麗淸長亦忌枯瘦

간단한 글자는 필획이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맑고 길어야하는데 이것 또한 마르고 수척한 것을 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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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言名句


1,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양전) : 書中自有千種祿(서중자유천종녹)

집을 부하게 하려고 좋은 밭 사지 말라 책 속에 저절로 천종의 봉록이 있다


築家不用遑忙急   誠實營中自有機

집을 짓기 위해 황망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성실하게 경영 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기회가 올 것이다.


2, 娶妻莫恨無良媒(취처막한무량매) :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

장가들려는데 좋은 중매 없다 한탄마라 책 속에 얼굴이 옥 같은 여자가 있다


作詩莫恨無才藻   堅讀古書自有方

시를 짓는데 문재가 없음을 한탄할 필요 없다

고전을 꾸준히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것이다


3, 養子不敎父之過(양자불교부지과) : 訓導不嚴師之惰(훈도불엄사지타) :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음은 부모의 잘못이요

훈도를 엄하게 하지 않음은 스승의 게으름이다

司馬溫公勸學文(사마온공권학문)-司馬光(사마광)


養忍不堅多俗氣  山行漸少惰浸身

참을성을 기르는데 꾸준하지 못함은 俗氣가 많기 때문이고

산행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게으름이 몸에 배었기 때문.


4, 讀書不破費(독서불파비) : 讀書萬倍利(독서만배이) :

독서에는 비용이 들지 않고 독서는 만 배의 이익이 있다

王荊公勸學文(왕형공권학문)-王安石(왕안석)


登山不破錢 萬倍益健康

등산은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건강에는 만배의 유익함이 있다

5, 有田不耕倉廩虛(유전불경창름허) : 有書不敎子孫愚(유서불교자손우) :

밭이 있어도 갈지 아니하면 창고가 비고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들이 어리석어진다

白樂天勸學文(백낙천권학문)-白居易(백거이)


買書不讀不憐錢 雖讀不行不愛儂

책을 사되 읽지 않는다면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고

읽되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6,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물위금일불학이유내일) :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 있다 하지 말라朱 文公勸學文-朱憙(주희)


勿謂今日不儉而有來日 오늘 아끼지 않고서 내일을 기약하지 마라


7,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 燈火秒可親(등화초가친) :

산뜻한 기운 들판 마을에 드니 등불 점점 가까이 할만 하고

符讀書城南(부독서성남)-韓愈(한유)


月虧凉氣掠 早晩待解消

추석 지나) 달이 기우니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데

조만간에 (골치 아픈 일) 해결 되기를 바라네


8,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

따뜻한 봄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구름은 기이한 산봉우리에 가득하네

四時(사시)-陶岑(도잠;365-427)


秋田黃稻裕 西海鱸魚肥

가을 들판엔 익어가는 벼가 넘치고 서해 바다엔 농어가 살쪄 가네


9,,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

이 산 속에 있지만 구름 깊어 있는 곳을 모른다 하네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賈島(가도;779-843)


只存此盤中 薄手不尋脈 이 바둑판 위에 있지만 수가 얕아 맥점을 못 찾겠네


10, 遍身綺羅者(편신기라자) : 不是養蠶人(불시양잠인) :

온 몸에 비단을 감고 있는 이 누에치는 사람들은 아니었네

蠶婦(잠부)-無名氏(무명씨)


包裏杆多者 才能盖劣人

캐디백 안에 골프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 골프 치는 실력은대개 졸렬하다


11, 粒粒皆辛苦(입립개신고) : 알알이 농부의 고생의 산물인 것을

憫農2(민농2)-李紳(이신)


片片皆辛苦 매 편마다 고생의 산물


12, 難將一人手(난장일인수) : 掩得天下目(엄득천하목) :

어려우니라, 단 한 사람의 손으로 천하의 이목을 가린다는 것이

讀李斯傳(독이사전)-李鄴(이업)


易將三者口 取得一人癡

쉽구나, 세 사람의 입으로 한 사람 바보 만들기가


13,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

오늘은 한나라 궁궐 여인이지만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 첩이 된다네


今夜對樽人 明朝胡地苦

오늘 밤 술을 대하고 있지만

내일 아침이면 胡地에서 고생하리


14, 十年磨一劍(십년마일검) : 霜刃未曾試(상인미증시) :

십년동안 한 자루 칼을 갈아

서릿발 같은 칼날 아직 실험조차 하지 않았소


四年詩律講 落齒未曾圖

사년 동안 시율을 공부 했지만

한유의 落齒차운시를 시도도 못해 봤구나


15,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본래 같은 뿌리에서 생겼는데 서로 볶고 달임이 이다지도 성급한가


本是同家生 參差何此異

본시 한 집안에서 났는데 높고 낮음이 왜 이렇게 다른가


16, 所經多舊館(소경다구관) : 太半主人非 (태반주인비) :

지나가는 곳은 옛 집이 많으나 태반이 주인이 바뀌었구나.

(商山路有感(상산로유감)-白居易)


所經我痕跡 太半主人非

지나는 곳 모두 내 흔적이 남았는데 태반이 주인은 다른 사람.


17,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游子身上衣(유자신상의) :

인자하신 우리 어머니 손에는 실은 떠도는 이 몸의 옷을 옷을 짓기 위한 것,

( 游子吟(유자음)-孟郊)


平所樽中自 明朝後悔留

평소 술자리에서의 자신감도 다음날 아침 후회만 남는 것


18, 誰言寸草心(수언촌초심) : 報得三春輝(보득삼춘휘) :

어려워라,한 치 풀같은 아들의 마음으로

봄날 햇빛 같은 어머님 사랑에 보답하기가

(游子吟(유자음)-孟郊)


誰知我寸心 草屋三春輝

누가 알까, 나의 조그만 마음 초옥에서 三春의 햇빛을 받고 싶은 마음을


19, 何日平胡虜(하일평호로) : 良人羅遠征(양인나원정) :

어느 날에나 오랑캐를 평정하여 낭군은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이백,子夜吳歌)


何日平胡慮 心身罷厭征

어느 날에나 고통스런 마음을 평정하여 몸과 마음이피곤한 여정에서 벗어날까


20, 醉來臥空山(취래와공산) : 天地即衾枕(천지즉금침) :

취하여 돌아와 빈산에 누우니 천지가 바로이불이요 베개로구나(이백,友人會宿)


今秋欲陟山 閒臥楓爲枕

올 가을에는 산에 올라 단풍잎을 베개 삼아 한가하게 누워보고 싶네


21, 我願君王心(아원군왕심) : 化作光明燭(화작광명촉) :

不照綺麗筵(부조기려연) :偏照逃亡屋(편조도망옥) :

저희들은 임금님 마음이밝게 비치는 꽃불이 되어

화려한 잔치자리만 비추지말고 도망 다니는어려운 집안들도두루 비춰주셨으면

(섭이중, 償田家)


猶憶小兒時 黑宵燈盞燭 英熙呀玩吧 寫此孤茅屋

아직도 기억 난다 어렸을때 깜깜한 밤에 등잔 불 켜고

영희야 놀자를 쓰던 외딴 초가집을


22, 丈夫非無淚(장부비무루) : 不灑離別間(불쇄이별간) :

대장부 눈물 없는 것 아니지만 이별할 때엔 눈물은 뿌리지 않는다네

(離別(이별)-陸龜蒙)


丈夫堪灑淚 忍受別離間

장부라도 눈물을 흘릴만 하지만 이별하는 때에는 참고 견디겠다


23, 蝮蛇一螫手(복사일석수) : 壯士疾解腕(장사질해완) :

독사가 손 한번 물었다면 장사는 속히 팔을 잘라낸다네

(離別(이별)-陸龜蒙)


敬畏解剖人 夜深完一腕

경외감을 가지고 인체 해부 실습을 하는데

밤이 깊어서야 한쪽 팔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24, 歸去來山中(귀거래산중) : 山中酒應熟(산중주응숙) :

그래 산으로 돌아가야지 산속에는 응당 술도 익어가겠지.(도연명, 問來使)


頻陟小時山 山中栗應熟

어렸을때 자주 오르던 산 산중의 밤은 잘 익어 있겠지


25, 人亡餘故宅(인망여고댁) : 空有荷花生(공유하화생) :

사람은 죽고 없는데 옛 집만 남아 부질없이 연꽃은피어있네(이백, 對酒憶賀監)


訟終餘怨恨 空有酒心生

송사는 끝났지만 원한은 남아 공연히 생겨나는 술 한잔 생각


26, 天清一雁遠(천청일안원) : 海闊孤帆遲(해활고범지) :

하늘은 맑은데 외기러기 멀리 날고

바다는 넓어 외로운 돛단배 천천히 떠간다

(送張舍人之江東(송장사인지강동)-李白)


天濁雁非見 海貧蟹信遲

하늘이 흐려 날아가는 기러기는 볼 수가 없고

바다도 가난해졌는지 꽃게 소식 느리다.


27, 陶令日日醉(도령일일취) :不知五柳春(부지오류춘) :

素琴本無絃(소금본무현) :漉酒用葛巾(록주용갈건) :

도연명은 날마다 취하여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봄이 온 줄도 몰랐다

거문고엔 본래 줄이 없었고 갈건으로 술을 걸렀다네

(戱贈鄭溧陽(희증정률양)-李白)


有些奇怪事 頻看艶華春 未過醉醇境 試眠帶漉巾

다소간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화려한 봄날은 많이 봐 왔지만

술 취한 상태는 겪어보지 못했다는 것

도연명이 사용 했다던 술 거르는 갈건을 쓰고 잠을 자봐야겠다.


28, 空負頭上巾(공부두상건) : 吾于爾何有(오우이하유) :

공연히 머리에 갈건을 저버리니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리

(嘲王歷陽不肯飲酒(조왕력양불긍음주)-李白)


可愛郵來禮 吾于爾作東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 귀엽기도 하구나 내 그대에게 한턱 쏘겠노라


29, 擧目山河異(거목산하이) : 偏傷周顗情(편상주의정) :

눈을 들어 멀리를 보니 산과 물이 고향과 달라 친구 주의의마음을슬프게 하네

(金陵新亭(금릉신정)-무명씨)


會計餘粮異 偏傷庄戶情

결산을 해보니 남은 양식이 전과 달라 농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네


30, 少壯不努力(소장불노력) : 老大徒傷悲(노대도상비)

젊고 장대할 때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헛되이 마음 아프고 슬퍼지리라

(沈約, 長歌行)



施財爲兄弟 貧老勿傷悲

형제들을 위해 재산을 사용했기에

가난하게 노년을 맞는다 해도 마음 아프고 슬퍼할 필요 없겠지


31,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밑의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도연명, 잡시)


綠油四葉草 葉上滾玲瓏

푸르딩딩한 네잎 클로버 잎새 위에는 영롱함이 굴러 다니네


32, 此間有眞意 欲辯已忘言

이 사이에 진의가 있으나 그것을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었노라


口中多有意 欲辯恐過言

입 안에 상당한 뜻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것을 말하려 해도 지나친 말이 튀어 나올까봐 걱정


33, 江南佳麗地(강남가려지) : 金陵帝王州(금릉제왕주) :

강남은 아름답고 고운 땅이고 금릉은 제왕의 도읍지로다(鼓吹曲(고취곡)-謝脁)


本是三多地 華人滿濟州

원래 세가지가 많았던 땅 중국인인 넘쳐나는 제주


34, 生年不滿百(생년불만백) : 常懷千歲憂(상회천세우) :

사는 해 백년도 차지 못하는데 항상 천년의 근심을 품는구나(고시 19)


 活着三千甲 未知一日憂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도

하루의 근심(죽는 날)은 몰랐어라


35, 世間那有楊州鶴(세간나유양주학) :

세상에 어찌 양주학 같은 신선이 있을까(綠筠軒(녹균헌)-蘇軾)


九泉那有爆彈酒 구천에 어찌 폭탄주가 있겠는가?


36, 處世若大夢(처세야대몽) :胡爲勞其生(호위노기생) :

세상살이 큰 꿈과 같은데 어찌 그 삶을 고생하며 살것인가

(春日醉起言志(춘일취기언지)-李白)


略說紅樓夢 石頭經雜生

홍루몽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 하자면

돌덩어리 하나가 온갖 사람들의 삶을 구경한다는 것이다.


37, 蘇武在匈奴(소무재흉노) 十年持漢節(십년지한절) :

소무는 흉노 땅에 있으면서 십년동안이나 한절을 간직했다 (蘇武(소무)-李白)


日日務如奴 年年望好節

매일 노예처럼 일하는 것은 매년 호시절을 원하기 때문


38, 人生無根蔕(인생무근체) : 飄如陌上塵(표여맥상진) :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는 것 길 위의 먼지처럼 부질없이 나부낀다

(도연명, 잡시)


八十浮萍跡 千載土中塵

팔십년 부평 같은 삶 천년의 흙속 티끌


39, 盛年不重來(성년불중래) :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

청춘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 두 번 오기 어려워라(도연명, 잡시)


老年何急到 異客又新晨

늙음이 오는 것이 왜 이다지도 급한가? 나그네길에 또 신새벽을 맞이하는데...


40, 白日掩荊扉(백일엄형비) : 虛室絕塵想(허실절진상) :

대낮에도 사립대문 닫고 빈 방에서 塵世想念을 끊는다

(歸園田居2(귀원전거2)-陶淵明)


黑夜開荊扉 來朋佩酒想

깜깜한 밤에도 사립문 활짝 열어 놓고 친구가 술병 차고 오기를 기다리네


41, 相見無雜言(상견무잡언) : 但道桑麻長(단도상마장) :

서로 만나면 잡된 말 하지 않고 뽕나무나 삼나무의 성장에 대해서만 말한다

(歸園田居2(귀원전거2)-陶淵明)


相見伴樽言 每談子女長

서로 만나면 술을 곁들여 애기 하는데 매번 애들커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네.


42, 落葉風不起(낙엽풍불기) : 山空花自紅(산공화자홍) :

낙엽은 지는데 바람은 일지 않고 산은 고요한데 꽃들은 절로 붉게 피는구나

(妾薄命2(첩박명2)-陳師道)


闊野商風起 孤家柿自紅

넓은 들판에 가을 바람 이니 외딴집에 열린 감은 붉어지네


43,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좋아하였으니 술을 좋아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도다.

(이백, 獨酌)


俯仰逢飑雨 黑屎惹飛天

눈 깜짝할 새에 들이 닥치는 스콜(Squall)성 비는

시커먼 똥덩어리 같은 구름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야기시키는 것.


44, 但得醉中趣(단득취중취) : 勿謂醒者傳(물위성자전) :

이 모두가 술에 취한 중에 얻는 것 취하지 않은 자에게 말해도 허사다


Q正傳是 魯迅傳來傳

아큐정전은 노신이 전해준 전기이다


45, 素心正如此(소심정여차) : 開逕望三益(개경망삼익) :

素心은 이와 같고 정원에 오솔길 만들고 三益을 바랄 뿐


脫俗遊三逕 素望正如此

세속의 때를 벗고 삼경에서 노니는 것 소박한 바램은 바로 이것.


46, 胡馬依北風(호마의북풍) : 越鳥巢南枝(월조소남지) :

오랑캐 땅 말들은 북풍에 몸을 맡기고 월나라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틀어요

(고시 19, 行行重行行)


浮雲縱自風 歸雁遠南枝

뜬 구름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겨두고

돌아가는 기러기는 남쪽 가지 위로 멀어지네


47, 思君令人老(사군영인노) : 임 생각에 나는 늙어가네(고시19, 行行重行行)


人老尙思君 늙은 사람 되어서도 여전히 그대를 생각하네


48, 努力加餐飯(노력가찬반) : 힘써 식사 충분히 하고 건강하소서

(고시 19, 行行重行行)


爲身非隔飯 몸을 위해서 끼니를 거르지 말거라


49, 衆鳥欣有託(중조흔유탁) :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 :

새들은 의지할 곳 있음 기뻐하고 나도 내 초막집을 좋아하노라

(도연명, 讀山海經)


舊時欣苟假 新願作吾廬

옛 시는 그럭저럭 짬을 보내는 즐거움이고 새로운 소원은 내집을 짓는 것이네


50, 落月滿屋梁(락월만옥량) : 猶疑照顏色(유의조안색) :

서쪽으로 기운 달이 추녀 끝을 비추니 아직도 이백이 눈앞에 있는 듯하다

(두보, 夢李白)


殘炎滿屋梁 朝夕唯秋色

남은 더위 집 안에 가득하니 아침 저녁으로만 오로지 가을색이로구나


51, 冠蓋滿京華(관개만경화) : 斯人獨憔悴(사인독초췌) :

높은 벼슬아치들 서울에 가득한데 이 사람 내 친구는 홀로 초췌하다

(두보, 夢李白)


鐵鷄滿華城 斯友獨施情

화성 바닥에 철수탉(구두쇠)천지인데 오직 이 친구만은 은정을 베풀줄 안다


52, 慈烏彼慈烏(자오피자오) :烏中之曾參(오중지증삼) :

자비한 까마귀, 저 까마귀여 새 중에서도 증자 같은 효자로구나.

(慈烏夜啼(자오야제)-白居易)


海参其爽味 水裏之人參

해삼의 그 상큼한 맛 바다에서 나는 인삼이라네


53, 但恨多謬誤(단한다류오) : 君當恕醉人(군당서취인) :

다만 그릇됨이 많음을 한탄하노니 그대는 마땅히 술취한 이 몸을 용서 하게나

(음주, 도연명)


酩酊吾言謬 君當恕醉人

술김에 내가 한 말 잘못 되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술취한 이 몸을 용서 하게나


54, 羈鳥戀舊林, 池魚思故淵

새장에 갇힌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연못의 물고기는 놀던 못을 생각하네

(歸田園去, 도연명)


斷牙狼逸林 啕恨怪深淵

이 부러진 늑대가 일탈해 있는 숲 속

울부짖는 소리에 담긴 한은 그 얼마나 심연한가?


55, 曖曖遠人村, 依依墟里烟

어슴프레 시골 마을 저 멀리 보이고 모락모락 마을에서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歸田園去, 도연명)


處處契丹村 山中篆篆烟

곳곳의 거란(양화척)촌 산중의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56, 戶庭無塵雜, 虛室有餘閑 久在樊籠裏, 復得反自然

집 안에는 잡된 세속 지저분한 일 없고

조용하고 텅 빈 방은 한가로움 있다네

오랫동안 좁다란 새장 속에 갇혔다가

이제야 또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歸田園去, 도연명)


所願

枝鶯喧噪噪 澗水逝涓涓 隨讀隨眠境 何由不可憐

가지 위의 꾀꼬리 재잘재잘

시냇물 흐르는 소리 졸졸졸

책 보고 싶으면 책 보고 자고 싶으면 자는 경지를

무슨 연유로 사랑하지 않으리


57, 人生不相見(인생부상견) :動如參與商(동여삼여상) :

사람살이 서로 만나지 못함은 아침 저녁에 따로 떠오는 참성과 상성 같구나

(贈衛八處士(증위팔처사)-杜甫)


人生不相見(인생부상견) :動如參與商(동여삼여상)

解易須先讀 先秦夏與商

주역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읽어야 할것이 있는데

선진 시대인 하와 상의 역사와 문화이다.


58, 絶代有佳人(절대유가인) : 幽居在空谷(유거재공곡) :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사람 있어 빈 산골에 조용히 숨어 사네 (佳人, 두보)


絶代有愁人 幽居在西野

세상에 드문 근심 안고 있는 사람 서편 들판에서 幽居하네


59, 爲人强記覽(위인강기람) : 過眼不再讀(과안불재독) :

사람됨이 암기력이 좋고 널리 책을 읽는데 한 번 본 책은 다시 읽지 않는다

(送諸葛覺往隨州讀書(송제갈각왕수주독서)-韓愈)


爲人强浩善 一見就鐘情

사람됨이 호방하고 선량하여 한번 보면 바로 반하게 된다


60, 兒童誦君實(아동송군실) : 走卒知司馬(주졸지사마) :

아이들도 선생의 자 군실을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 사마를 안다

(司馬溫公獨樂園(사마온공독락원)-蘇軾)


四十知華語 五十誦唐詩

40때 중국어를 알고 오십에 당시를 외웠네


61, 豈是池中物(개시지중물) :

어찌 연못 속의 교룡에 불과한 것이겠습니까

(上韋左相二十韻(상위좌상이십운)-杜甫)


亦是杯中物 역시 술!


62, 今代麒麟閣(금대기린각) : 何人第一功(하인제일공) :

요즈음 기린각에 누가 제일가는 공신인가

(投贈哥舒開府二十韻(투증가서개부이십운)-杜甫)


今代圍棋界 何人第一名

지금의 바둑계에서 누가 제일인자인가?


63, 生涯獨轉蓬

생애 홀로 쑥대밭을 전전하네

(投贈哥舒開府二十韻(투증가서개부이십운)-杜甫)


生涯浮騙海

평생을 사기꾼들 득실대는 바다에서 표류하네


64, 紈袴不餓死(환고불아사) :儒冠多誤身(유관다오신) :

귀족들은 굶어죽지 않으나 선비들은 자기 몸 그르치는 일도 많습니다

(贈韋左丞(증위좌승)-杜甫)


樂透中頭漿 槪行錯誤身

로또 1들 당첨자 대부분 몸을 망치게 되더라


65, 致君堯舜上(치군요순상) :再使風俗淳(재사풍속순) :

황제를 요순보다 훌륭하게 해드리고 다시 풍속을 순박하게 하려했지요

(贈韋左丞(증위좌승)-杜甫)


於海心腔浩 於山性品淳

바닷가 출신들은 마음이 호탕하고산골 출신들은 성품이 순박하더라


66, 殘杯與冷炙(잔배여냉자) :到處潛悲辛(도처잠비신) :

술 찌꺼기와 식은 불고기 이르는 곳 마다 눈물과설움으로뼈아픔을 맛보았지요

(贈韋左丞(증위좌승)-杜甫)


炙醢古人肉 讐骸用尿腔

옛날 사람들 인육을 건포와 젓갈 형태로 먹었으며

원수의 해골은 오줌통으로 사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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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모음


1.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2.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3.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1939>

 

4.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1941.3.12>

 

5.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6>

 

6.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 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12>

 

7.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

 

8.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흰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9.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10.또 태초(太初)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11.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5>

 

12.무서운 시간(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13.십자가(十字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31>

 

14.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1.6.2>

 

15.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16.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1941.5.31>

 

17.또 다른 고향(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1941.9>

 

18.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깊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19.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11.5>

 

20.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21.내일은 없다


------ 어린 마음이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22.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偉人)들!

<1934.12.24>

 

23.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 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1935.1.18>

 

24.창공(蒼空)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 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理想)에 타고,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1935.10.20>

 

25.조개 껍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1935.12>

 

26.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자 밖에는 더 못쓰는 걸.

<1936.12>

 

27.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듯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28.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1936.2.10>

 

29.황혼(黃昏)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一字)를 쓰고…… 지우고……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3.25>

 

30.이별(離別)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그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31.모단봉(牡丹峰)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女兒)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1936.3.24>

 

32.가슴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두다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1936.3.25>

 

33.가슴2


불 꺼진 화(火)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7.24>

 

34.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1936.3>

 

35.닭


한 간(間)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 무리가 밀려나오는
삼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물도록------

<1936.봄>

 

36.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는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1936.5>

 

37.오후(午後)의 구장(球場)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히 품기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38.산림(山林)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따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연륜에 짜들은 유암(幽暗)한 산림이,고달픈 한 몸을 포옹(抱擁)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 우으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1936.6.26>

 

39.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936.12. 또는 37.1.추정>

 

40.양지(陽地)쪽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41.꿈은 깨어지고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42.곡간(谷間)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허리에 송아지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성이에 퍼-렇게 자랐다.

3년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골짝은 나그네의 마음처럼 고요하다.

<1936.여름>

 

43.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1936.9.9>

 

44.빗자루


요오리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덩이를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

아아니 아니
고놈의 빗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랬지 그랬어
괘씸하여 벽장 속에 감췄더니
이튿날 아침 빗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1936.9.9>

 

45.비행기


머리에 푸로펠러가
연잣간 풍차보다
더-빨리 돈다.

땅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숨결이 찬 모양이야.

비행기는 ------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봐.

 

46.무얼 먹고 사나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47.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1936.가을>

 

48.눈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1936.12>

 

49.버선본


어머니
누나 쓰다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1936.12.초>

 

50.오줌싸개 지도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초>

 

51.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12.추정>

 

52.기왓장 내외


비오는날 저녁에 기왓장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웁니다.

대궐지붕 위에서 기왓장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1936. 초 추정>

 

53.황혼(黃昏)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감기고……

저- 웬 검은 고기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딩구오…… 딩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1937.1>

 

54.밤


외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 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1937.3>

 

55.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거(伴倨)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은 묘지엔 아무도 없고,정적(靜寂)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이 폭 젖었다.

<1937.4.15>

 

56.풍경(風景)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치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오스라질듯 한껏 경쾌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

이 생생한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외 하루 거닐고 싶다.

------ 우중충한 오월 하늘 아래로,------ 바닷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

<1937.5.29>

 

57.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버려놓고
밀려가고 밀려오고.....
제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 하루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1937.봄>

 

58.그 여자(女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59.한난계(寒暖計)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八月)  교정이 이상(理想)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1937.7.1>

 

60.소낙비


번개, 뇌성, 왁자지근 두다려
머언 도회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937.8.9>

 

61.비애(悲哀)


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
알듯 모들 듯한 데로 거닐고자!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 --- 이 젊은이는
피라밋처럼 슬프구나.

 

62.명상(瞑想)


가츨가츨한 머리칼은 오막살이 처마끝,쉬파람에 콧마루가 서운한 양 간질키오.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1937.8.20>

 

63.바다


실어다 뿌리는
바람처럼 시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침히
고개를 돌리어 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꾸 설워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 보고 돌아다 보고
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1937.9>

 

64.산협(山峽)의 오후(午後)


내 노래는 오히려
설운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暝想)은
아- 졸려.

<1937.9>

 

65.비로봉(毘盧峰)


만상(萬象)을
굽어 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白樺)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정말 구름이
비가 된다.

옷자락이
춥다.

<1937.9>

 

66.창(窓)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1937.10>

 

67.유언(遺言)


후어-ㄴ 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 봐라------
평생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 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1937.10.24>

 

68.반딧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69.거짓부리


똑, 똑, 똑,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룻밤 자고 갑시다
밤은 깊고 날은 추운데
거 누굴까?
문 열어 주고 보니
검둥이의 꼬리가
거짓부리 한걸.

꼬기요, 꼬기요,
달걀 낳았다.
간난아 어서 집어 가거라.
간난이 뛰어가 보니
달걀은 무슨 달걀,
고놈의 암탉이
대낮에 새빨간
거짓부리 한걸.

<1937.>

 

70.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71.비오는 밤


솨- 철석!  파도소리 문살에 부서져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떼처럼 살래어,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삼경(三更).
염원.

동경의 땅 강남(江南)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1938.6.11>

 

72.이적(異蹟)


밭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바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 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餘念)없이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1938.6.19>

 

73.사랑의 전당(殿堂)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古風)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었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1938.6.19>

 

74.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38.9.15>

 

75.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76.고추밭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놓고,
고추는 방년(芳年)된 아가씬 양
땡볕에 자꾸 익어간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밭머리에서 어정거리고
손가락 너어는 아이는
할머니 뒤만 따른다.

 

77.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1938.추정>

 

78.애기의 새벽


우리 집에는
닭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단다.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

<1938.추정>

 

79.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1938.추정>

 

80.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알으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1938.추정>

 

81.달같이


연륜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어 나간다.

<1939.9>

 

82.장미(薔薇)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놓은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 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구슬피
화륜선 태워 대양에 보낼거나

프로펠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에 보낼거나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 내 가슴에 묻어다오.

 

83.산골물


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옷자락 물결 속에서도
가슴속 깊이 돌돌 샘물이 흘러
이 밤을 더불어 말할 이 없도다.
거리의 소음과 노래부를 수 없도다.
그신듯이 냇가에 앉았으니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가만히 가만히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1939.9.추정>

 

84.위로(慰勞)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 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1940.12.3>

 

85.팔복(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12.추정>

 

86.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1941.11.29>

 

87.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1.24>

 

88.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드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4.14>

 

89.사랑스런 추억(追憶)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비둘기 한 때가 부끄러운 것도 없이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942.5.13>

 

90.쉽게 씌어진 시(詩)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6.3>

 

91.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92.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 상자를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
몇 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 금휘장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1942.5.12>

 

93.  달을 쏘다 (산문)

 

 달을 쏘다


번거롭던 사위(四圍)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었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얀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쩍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私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想華)도 좋고, 어린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다 손 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의 편지 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군아, 나는 지금 울며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으로 이런 단안을 내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히 서서 닥터 빌링즈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설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94.별똥 떨어진 데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방듯이 받들어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박이 내려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위치에 또 다른 밝음(明)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킨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잡기에는 나 자신이 둔질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 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에 나에게 있어 어런 적처럼 한낱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소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박깜박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 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화사(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홰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훠언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 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서 너나 나나 이 가장지길에서

주저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럴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든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년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서가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95.화원에 꽃이 핀다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란, 릴리, 창포, 튜울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않게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귀또리 울음이 끝어짐과 함께 단품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룻밤 사이에 소복히 흰 눈이 내려,  내려 쌓이고 화로에는 빨간 숯불이 피어오르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 화롯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독자제현!  여러분은 이 글이  씌어지는 때를 독특한 계절로  짐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철로나 상정하셔도 무방합니다.  사실 1년 내내 봄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 이 화원에는 사철내  봄이 청춘들과 함께 싱싱하게 등대하여  있다고 하면 과분한 자기선전일까요.  하나의 꽃밭이 이루어지도록 손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생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석한 것은 못 됩니다.  한 해 동안을 내다 간직해두어서야  겨우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민에 짜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爐邊)의 사색에 졸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1년은 이루어집니다.
시간을 먹는다는 (이 말의 의의와 이 말의 묘미는 칠판 앞에 서보신 분과 칠판 밑에 앉아보신 분은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루를 휴강한다는 것보다 (하긴 슬그머니 까먹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다 못한 시간, 숙제를 못해왔다든가 따분하고 졸리고 한 때, 한 시간의 휴강은 진실로 살로 가는 것이어서, 만일 교수가 불편하여서 못 나오셨다고 하더라도 미처 우리들의 예의를 맞출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들의 망발과 시간의 낭비라고 속단하셔선 아니 됩니다.  여기에 화원이 있습니다.  한 포기 푸른 풀과 한 떨기의 붉은 꽃과 함께 웃음이 있습니다.  노우트 장을 적시는 것보다 한우충동(汗牛充棟)에 묻혀 글줄과 씨름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효과적인 성과가 있을지를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을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참말 나는 온정으로 이들을 대할 수 있고, 그들은 나를 웃음으로 맞아줍니다.  그 웃음을 눈물로 대한다는 것은 나의 감상일까요.  고독, 정숙도 확실히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여기에 또 서로 마음을 주는 동무가 있는 것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화원 속에 모인 동무들 중에, 집에 학비를 청구하는  편지를 쓰는 날 저녁이면 생각하고  생각하던 끝 겨우 몇 줄 써보낸다는 A군, 기뻐해야 할 서유(書留:통칭 월급봉투)를 받아든 손이 떨린다는 B군, 사랑을 위하여서는 밥맛을 잃고 잠을 잊어버린다는 C군, 사상적 당착에  자살을 기약한다는 D군……  나는 이 여러 동무들이 갸륵한 심정을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 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우는데 지날 뿐인가요.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겠습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종전의 X가 있는 것은 시세의 역효과일까요.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 ------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爐邊)에서 많은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96.종시(終始)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시 살림집은 외따로 한 체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기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 금납구(禁納區)였다.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윽이 자아냈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이렇듯 수도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사건이란 언제나 큰 데서 동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작은 데서 더 많이 발작하는 것이다.
눈 온 날이었다.  동숙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 시간 남짓한 문안 들어가는 차시간까지를 낭비하기 위하여 나의 친구를 찾아 들어와서 하는 대화였다.
「자네 여보게 이 집 귀신이 되려나?」
「조용한 게 공부하기 작히나 좋잖은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 줄 아나?  전차간에서 볼  수 있는 광경, 정거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때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감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인생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는 것은 16세기에서나 찾아볼 일일세, 단연 문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한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틈이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하여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으로 단정해버렸다.  그 뒤  매일같이 이 자국을 밟게 된 것이다.
나만 일찍이 아침 거리의 새로운 감촉을 맛볼 줄만 알았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에 포도는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했고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이 많은 무리를 죄다 꾸역꾸역 자꾸 박아 싣는데 늙은이, 젋은이,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꾸러미를 안 든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그들 생활의 꾸러미요, 동시에 권태의 꾸러민지도 모르겠다.
이 꾸러미들을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뜯어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짜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 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써 요사(夭死)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가로 하고 단념하자!
차라리 성벅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눈은 하늘과 성벽 경계선을 따라 자꾸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서 캄플라지한 옛 금성(禁城)이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지 성밖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알 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 가닥 희망은 성벽이 끊어지는 곳이다.
기대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 되어서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국, 체신국, 신문사, 소방서,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놈을 눈 내린 겨울에  빈 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림에 올리어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사실 요즘 아이스케이크 간판 신세를 면치 아니치 못할 자 얼마나 되랴.   아이스케이크 간판은 정열에 불타는 염서(炎署)가 진정코 아수롭다.
논을 감고 한참 생각하노라면 한 가지 거리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률이란 거추장스러운 의무감이다.  젊은 녀석이 눈을 딱 감고 버티고 앉아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번쩍 눈을 떠본다.  하나 가까이 자선할 대상이 없음에  자리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보다 오히려 아니꼽게 본 사람이 없으리란 데 안심이 된다.
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라는 것이다.  따은 그러리라고 얼마큼 수긍하였었다.  한자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어디서 내리시나요」쯤의 인사는 주고받을 법한데 일언반구 없이 뚱 -- 한 꼴들이 작히나 큰 원수를 맺고 지내는 사이들 갇다.  만일 상냥한 사람이 있어 요만쯤의 예의를 밟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전차 속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이상자로 대접할 게다.  그러나 기차에서는그렇지 않다.  몀함을 서로 바꾸고 고향 이야기, 행방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주고 받고 심지의 남의  여로(旅勞)를 자기의 여로(旅勞)인 것처럼 걱정하고, 이 얼마나 다정한 인생행로냐?
이러는 사이에 남대문을 지나쳤다.  누가 있어 「자네 매일같이 남대문을 두 번씩 지날 터인데 그래 늘 보곤 하는가」라는 어리석은  듯한 멘탈 테스트를 낸다면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기억을 더음어 본달것 같으면 늘이 아니라 이  자국을 밟은 이래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쳐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하기는 나의  생활에 긴한 일이 아니매 당연한 일일 게다.  하나 여기에 하나의 교훈이 있다.  횟수가 너무 잦으면 모든 것이 피상적인 것이 되어비리니라.
이것과는 연관이 먼 이야기 같으나 무료(無聊)한 시간을  까기 위하여 한마디하면서 지나가자.
시골는 제노라고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인데 처음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배운 서울 말씨를 섣불리 써가며 서울  거리를 손으로 형용하고 말로써 떠벌려  옮겨놓더란데, 정거장에 턱, 내리니 앞에 고색이 창연한 남대문이 반기는 듯 가로막혀 있고, 총독부 집이 크고, 창경원에 백 가지 금수가 봄직했고, 덕수궁의  옛궁전이 회포를 자아냈고, 화신 승강기는 머리가 횡-했고, 본정엔 전등이 낮처럼 밝은데 사람이 물밀리듯 밀리고 전차란 놈이 윙윙 소리를 지르며 지르며 연달아 달리고 ------ 서울이 자기 하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우쭐했는데 이것쯤은 있을 듯한 일이다.  한대 게도 방정꾸러기가 있어    「남대문이란 현판이 참 명필이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다.
「암 명필이구말구, 南자 大자 門자 하나하나 살아서 막 꿈틀거리는 것 같데」어느 모로나 서울 자랑하려는 이 양반으로서는 가당한 대답일  게다.  이분에게 아현동 고개 막바지에, ---- 아니 치벽한  데 말고, ---- 가까이  종로 뒷골목에 무엇이 있던가를 물었더면 얼마나 당황해했으랴.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묻은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낸다는 재주가 없다.  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닭이다.  너무 막연하다.  사람이란 횟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보다.  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주하나보다.
시그날을 밟고 가는 기차는 왱 - 떠난다.  고향으로 향한 차도 아니건만 공연히 가슴은설렌다.  우리 기차는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가(假)정거장에서도 선다.  매일같이 웬 여자들인지 주룽주룽 서 있다.  제마다 꾸러미를 안았는데 예의 그 꾸러민 듯싶다.  다들  방년(芳年)된 아가씨들인데 몸매로 보아하니 공장으로 가는 직공들은 아닌 모양이다.  얌전히들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판단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나 경망스럽게 유리창을 통하여 미인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피상적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투명한 듯하여 믿지 못할 것이 유리다.  얼굴을 찌깨논 듯이 한다든가  이마를 좁다랗게 한다든가 코를 말코로 만든다든가 턱을 조개턱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악희(惡戱)를 유리창이 때때로 감행하는 까닭이다.  판단을 받는 당자에게 오려던 행운이 도망갈는지를 누가 보장할소냐.  여하간 아무리 투명한 꺼풀일지라도 깨끗이 베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윽고 터널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가운데 지하철도도 아닌 터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터널이란 인류 역사의 암흑시대요,  인생행로의 고민상이다.
공연히 바퀴 소리만 요란하다.  구역날 악질의 연기가 스며든다.  하나 미구에 우리에게 광명의 천지가 있다.
터널을 벗어났을 때 요즈음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첫차에 나갔을 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차에 들어올 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시작하여 언제 그치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이네들이야말로 건설의 사도들이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다.
그 육중한 트럭을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한 데 있어 트럭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新京行)이니 북경행(北京行)이니 남경행(南京行)이니라고 써서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불 수 있다.  그것이 고력(苦力)에 위안이  안 된다고 누가 주장하랴.
이제 나는 곧 종시(終始)를 바꿔야 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형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출처 : '윤동주 서시의 하늘과바람과별과시에 관한것' - 네이버 지식iN)


윤동주

1917 :12월 30일 북간도 명촌동 출생

1925: 명동소학교 입학

1929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1 :대남자(大拉子)의 중국인학교 다님

1932: 용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김

1936 :숭실중학 폐교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 리쿄오대학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오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1945 :2월 16일 큐우슈우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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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시모음


1.거


거울속에는소리가없오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으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져오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오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2.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3.가정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 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4. 거리

- 여인이 出奔한경우


백지위에한줄기철로가깔려있다.
이것은식어들어가는마음의圖解다.
나는매일虛爲를담은전보를발신한다.
명조도착이라고.
또 나는
나의일용품을매일소포로발송하였다.
나의생활은이런재해지를
닮은거리를점점낯익어갔다.

 

5. 아침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끌음이앉는다. 빔새
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
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
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
있다. 다만내치사한책이여러장찢겼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
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6.수염


(수수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모두를이름)
1
눈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는삼림인웃음이존재하
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유령은수족관이지만대단히유려하다
그것은음울하기도한것이다


4
계류에서―
건조한식물성이다
가을


5
일소대의군인이동서의방향으로전진하였다고하는것은
무의미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운동장이파열하고균열한따름이니까

6
심심원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포대
간단한수유의월야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계획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구걸이기는하였다

9
소한것은밀한것의상대이며또한
평범한것은비범한것의상대이었다
나의신경은창녀보다도더욱정숙한처녀를원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여, 사무로써산보라하여도무방하도다
여,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폐쇄주의로다

 

 7.이런 시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끄집어내어놓 고보니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꼈을터인데 그이틀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 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 을지었다.「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 을수없소이다.내차례에 못을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 는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 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8.1933. 6. 1


천평위에서 삼삽년동안이나 살아온사람 (어떤과학자) 삼십
만개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역시)인간칠십 아니이
십사년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나)
나는 그날 나의자서전에 자필의부고를 삽입하였다이후나
의육신은 그런고향에는있지않았다 나는 자신나의시가 차압당
하는 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9.화로


방거죽에극한이와닿았다. 극한이방속을넘본다. 방안은견딘
다. 나는독서의뜻과함께힘이든다. 화로를꽉쥐고집의집중을잡
아땡기면유리창이움푹해지면서극한이흑처럼방을누른다. 참다
못하여화로는식고차갑기때문에나는적당스러운방안에서쩔쩔맨
다. 어느바다에호수가미나보다. 잘다져진방바닥에서어머니가
생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화로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
다. 나는겨우폭동을기억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창을가로막으면빨래방맹이가내등의더러운의
상을뚜들긴다. 극한을걸커미는어머니―기적이다. 기침약처럼
따끈따끈한화로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체온위에올라서면독서는
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10. 이상한 가역반응


임의의반경의원(과거분사의시세)


원내의일점과원외의일점을결부한직선


두종류의존재의시간적영향성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직선은원을살해하였는가

 

현미경
그밑에있어서는인공도자연과다름없이현상되었다.
같은날의오후

물론태양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에존재하여있었을뿐만
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보조를미화하는일까지도
하지아니하고있었다.


발달하지도아니하고발전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분노이다.


철책밖의백대리석건축물이웅장하게서있던
진진5의각바아의나열에서
육체에대한처분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목적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냉정하였다.

태양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전방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변비증환자는부자집으로식염을얻으려들어가고자희망하
고있는것이다」라고

............

 
11.절 벽(絶壁)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香氣가만개滿開한다.
나는거기묘혈을 판다.
묘혈도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 않는다.
향기가만개만개한다.
나는잊어 버리고재차거기묘혈墓穴을판다
묘혈은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묘혈로 나는꽃을깜빡잊어 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 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12.위치(位置)


중요한위치에서한성격의심술이비극을연역(演繹)하고있을즈음범위에는타인이없었던가. 한주(株)-분(盆)에심은외국어의관목(灌木)이막돌아서서나가 버리려는동기요화물(貨物)의방법이와 있는의자(倚子)가주저앉아서귀먹은체할 때마침s내가구두(口讀)처럼고사이에낑기어들어섰으니 나는내책임의맵시를어떻게해보여야하나. 애화(哀話)가주석(註釋)됨을따라나는슬퍼할준비라도 하노라면나는못견뎌모자를쓰고밖으로나가 버렸는데웹사람하나가여기남아내분신(分身)제출할것을잊어 버리고있다.

 

 

13.최후


사과한알이 떨어졌다.
지구地球는 부서질그런정도로 아팠다.
최후最後이미여하如河한정신情神도
발아發芽하지아니한다.

 

 


14.오감도(烏瞰圖)


- 時弟一號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같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0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 時弟二號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뛰어 넘어야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 時弟三號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 時弟四號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26.10.1931   以上 책임의사 이상

- 時弟五號


전후좌우를제(除)하는유일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목불대도(翼殷不逝目不大覩)
반왜소형의신의안전(眼前) 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된축사(畜舍)와구별될수있을란가

- 時弟六號


앵무  ※  2필
             2필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는것은내가2필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추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은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時弟七號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에피는현화(顯花)·특이한4월의화초·30륜(輪)·30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청한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를관류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한월아(月芽)·정일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4월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同)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하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 時弟八號

제1부시험  수술대             1
               수은도말평면경  1
               기압                2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치를해독함.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순차수술실로부터시험인을해방함.익일.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수은도말2회.
ETC 아직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2부시험 직립한평면경  1
               조수             수명

야외의진공을선택함.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평면경을후퇴시킴.(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상지의종단까지.다음수은도말.(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완전히2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익일.초자를전진시킴.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혹은멸형)기타.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불상.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 時弟九號


매일같이 열풍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 내 소화기관에 묵직한 총신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를 느낀다. 그러더니 나는 총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방 총탄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어배앝었더냐.

- 時弟十號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 유계(幽界)에 낙역되는 비밀한 통화구다.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라가리라.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한다.

- 時弟十一號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접목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적 들어 마룻바닥에 메어부딪는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사수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흠사한 내 해골이다. 가지났던 팔은 배암과 같이 내 팔로 기어들기 전에 내 팔이 혹 움직였던들 홍수를 막은 백지는 찢어졌으리라. 그러나 내 팔은 여전히 그 사기컵을 사수한다.


- 時弟十二號


때묻은 빨래 조각이 한 뭉덩이 공중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 하늘 저편에 전쟁이 끈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전이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 죽이는 불결한 전쟁이 시작된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도 한번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 時弟十三號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읽어 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촉(燭)대 세움으로 내 방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런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 時弟十四號


고성 앞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내 모자를 벗어 놓았다. 성 위에서 나는 내 기억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거리껏 팔매질쳤다.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 문득 성 밑 내 모자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걸인은 성 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 공중을 향하여 놓인 내 모자의 깊이는 절박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걸인은 표표한 풍채를 허리 굽혀 한 개의 돌을 내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기절하였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속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 時弟十五號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렵혀 놓았다.
3.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영이되어 떨고 있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등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보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15.한個의 밤

 

여울에서는滔滔한소리를치며

沸流江이흐르고있다.

그水面에아른아른한紫色層이어린다.

 

十二峰봉우리로遮斷되어

내가서성거리는훨씬後方까지도이미黃昏이깃들어있다

으스름한大氣를누벼가듯이

地下로地下로숨어버리는河流는거무튀튀한게퍽은싸늘하구나.

 

十二峰사이로는

빨갛게물든노을이바라보이고

 

鐘이울린다.

 

不幸이여

지금江邊에黃昏의그늘

땅을길게뒤덥고도 오히려남을손不幸이여

소리날세라新房에窓帳을치듯

눈을감는者나는 보잘것없이落魄한사람.

 

이젠아주어두워들어왔구나

十二峰사이사이로

하마별이하나둘모여들기始作아닐까

나는그것을보려고하지않았을뿐

차라리 草原의어느一點을凝視한다.

 

門을닫은것처럼캄캄한色을띠운채

이제沸流江은무겁게도사려앉는것같고

내肉身도千斤

주체할道理가없다.

 

 16.명경(明鏡)

 

여기 한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접힌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만적 하는 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편으로 옮겨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런? 어디 觸診......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하더니

나갔든길에 안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든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표지-

 

 17.悔恨의 章

 

가장 무력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懶怠는 安心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職務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 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적다

나에겐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것이다.

 

 18.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B+C=A

A+B+C=B

A+B=C=C

 

二線의交點 A

三線의交點 B

數線의交點 C

 

3+1

1+3

1+3 3+1

3+1 1+3

3+1 3+1

1+3 1+3

1+3

3+1

 

(태양광선은, ?렌즈때문에수검광선이되어일점에있어서혁혁히빛나고혁혁히불탔다. 태초의요행은무엇보다도대기의층과층이이루는층으로하여금?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낙이된다. 기하학은?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는지, 유우크리트는사망해버린오늘유우크리트의촛점은도달에있어서인문의뇌수를마른풀같이소각하는수검작용을나열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거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재촉한다. 사람은절망하라. 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절망하라)

 

 19.선(線)에 관한 각서(覺書) 5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광선을보는가, 사람은광선을본다, 연령의진공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결혼하는가, 사람은광선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미래로달아나서과거를본다, 과거로달아나서미래를보는가,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과동일한것도아니고미래로달아나는것이과거로달아나는것이다. 확대하는우주를염려한는자여, 과거에살라, 광선보다도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상봉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다,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피스토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속도를조절하는날사람은나를모은다. 무수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현재를과거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만반복되는과거, 무수한과거를경청하는무수한과거, 현재는오직과거만을인쇄하고과거는현재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경우에있어서도구별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과거를현재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건망이여,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

 

도래할나는그때문에무의식중에사람에일치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미래는새롭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광선을드디어선행하고미래에있어서과거를待期한다. 우선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체조의기술을습득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과거의나의파편을如何히할것인가.

 

사고의파편을반추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불완전이다, 연상을죽이라, 하나를아는자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은다음의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최대한달아나라, 사람은두번분만되기전에xx되기전에조상의조상의성운의성운의성운의태초를미래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유보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영원에살고과거를애무하고과거로부터다시과거에산다. 童心이여, 충족될수야없는영원의동심이여.

 

 20.애야(哀夜)

-나는 한 매춘부를 생각한다

 

애절하다. 말은 목구멍에 막히고 까맣게 끄을은 홍분이 헐떡헐떡 목이 쉬어서 뒹군다. 개똥처럼.

달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그 도랑 안에 있는 엉성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눈병이 난 모양이다. 전등불 밑에 菊科植物이 때가 끼어 있었다.

包主마누라는 기름으로 빈들거리는 床 위에 턱을 괴고 굵다란 男性的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 뒤를 밟은 놈이 없을까, 하고 나는 包主마누라에게 물어 보았다.

 

방바닥 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의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역시 고양이였다. 눈이 오듯이 영혼이 조용하게 내려앉고, 고양이는 내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였는데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서운 ??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내 어린애 똥 같은 우엉과 문어요리와 두 병의 술이 차려져 왔다.

 

괄약근--이를테면 항문 따위--여자의 입은 괄약근인 모양이다. 자꾸 더 입을 오므리고 있다. 그것을 자기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코는 어지간히 못생겼다. 바른쪽과 왼쪽 뺨의 살집이 엄청나게 짝짝이다.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어서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해 있었더니, 여자는 입술을 조용히 나의 관자놀이 쪽으로 갖고 가서 가볍게 누르면서 마치 입을 맞출 때와 같은 몸짓을 해보였다.

 

기름냄새가 코에 푸욱 맡혀 왔다. 때마침 천장 가까이 매달려 있는 전등에서 노란 국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나는 극한 속에서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말도 안 나온다. 바리캉으로 이 머리를 박박 깎아 버리고 말까.

오후 비는 멈추었다.

 

다만 세상의 여자들이 왜 모두 賣淫婦가 되지 않는지 그것만이 이상스러워 못 견디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얼마간의 지폐를 교부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손이 새파랗다. 조그맣게 되어 가지고 새로운 주름살까지도 보이고 있다.

여자는 나의 손을 잡았다. 고급장갑을 줍는 것처럼-- 그리고 나한테 속삭였다. 그것은 너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나에겐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벌써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일이었고 하나만 있는 일일 것이다.

내 마음 속의 불량기는 벌써 無料로 자리에 앉아 있다. 전신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의 목구멍 속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여자의 체중을 盜取했다. 그것은 달마인형처럼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白紙는 까많게 끄슬려 있었다. 그 위를 땅의 행렬이 천근 같은 발을 끌고 지나갔다.

 

분주한 발걸음소리가 나고 창들의 장막은 내려졌다. 자색 광선이 요염하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온통 황색이었다.

손가락은 가야 할 곳으로 갔다. 눈을 감은 병사는 개흙진 沼澤地로 발을 들여 놓았다. 뒤에서 뒤에서 자꾸 밀려드는 陶醉와 같은 실책.

피의 빛을 오색으로 화려하게 하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린애와 같은 失足-- 진행해 감으로써 그것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술은 대체 누구를 위해서 차려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기는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이 명백하지만.

여자는 흡사 치워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술을 다 마셔 버렸다. 홍수와 같은 동작이다. 그리고 간간이 그 페스트 같은 우엉을 괄약근 사이에다 집어넣었다.

이 여자는 이 형편없는 비위생 때문에 금방 병에 걸려 벌떡 소처럼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여자는 화려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배가 고픈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나는 그런 혜안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면 역시 얼마나 石碑 같은 체중이겠는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이만 술로 여자는 취할 것 같지 않다. 또한 여자는 자주 내가 한시바삐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여자의 면전에서 浮沈하고 있었던 표적이 실종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마음을 튼튼히 갖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호주머니 속의 은화를 세었다. 재빠르게-- 그리고 채촉했다.

선금주문인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한결 더 훤하다. 脂粉은 고귀한 직물처럼 찬란한 光芒조차 발했다. 향기 풍부하게--

 

하나 이 은화로 교부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다. 이만저만한 바보가 아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의 두 볼은 둔부에 있는 그것처럼 깊은 한 줄씩의 주름살을 보였다. 기괴한 일이다. 여자는 도대체 이렇게 하고 웃으려고 하는 것이다.

골을 내려고 하는 것인가 위협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울려고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위협이다.

여자는 일어났다. 그리고 흘깃 내 쪽을 보았다. 어떻게 하려는가 했더니 선 채로 내 위로 버럭 덮쳐 왔다. 이것은 틀림없이 나를 압사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손을 허공에 내저으면서 바보 같은 비명을 울렸다. 말(馬)의 체취가 나를 독살시킬 것만 같다.

놀랐던 모양이다. 여자는 비켜났다. 그리고 지금의 것은 구애의 혹은 애정에 보답하는 표정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했다.

나는 몸에 오한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부드럽게 웃는 낯을 해 보였다. 여자는 알겠다는 것의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아-- 얼마나 무섭고 純重한 사랑의 제스처일까. 곧 여자는 나가 버렸다.

찰싹찰싹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장지문 너머에서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심각하다. 아무래도 한 마리인 것 같다. 실없는 놈들이다.

 

말-- 말이다. 쌍말이다. 땀에 젖은 瘡痍투성이의 쌍말임에 틀림없다. 구멍은 없는가. 유령처럼 그 속에서 도망쳐 나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가 정작 참아야 할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흥분해 보자.

밟혀 죽을 게 아닌가. 튼튼해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뼈가 있다. 뼈는 여자를 매혹할 것이다.

消毒箸를 집어서 새까만 우엉을 하나 집어 본다. 역청에 담갔던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아 보인다. 입은 그것을 기다린다.

무섭게 짜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여자가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맞이할 수가 없다. 나의 얼굴 전체가 짜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에게 이유를 물었다. 나는 답변하기가 거북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이 없느냐고 말했다. 여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듯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있다.

나는 한 모금 마셨다. 고추장이 먹고 싶다.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자 여자의 백치 비슷한 표정마저도 꿈같이 그리웁게 보인다.

여자는 환상 속에서 고향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말한테서는 垈土와 거름냄새가 났다.

 

 21.황(?)

 

1.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멈춰 있다.

...... 모이를 주자...... 나는 단장을 부러뜨렸다. 아문젠옹의 식사처럼 메말라 있어라 x 아하

...... 당신은 Mademoiselle Nashi 를 아시나요. 난 그 여자 때문에 유폐돼 있답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 아니야 영 틀린 것 같네...... 개는 舊式스러운 권총을 입에 물고 있다 그것을 내 앞에 내민다...... 제발 부탁이니 그 여잘 죽여다오 제발 부탁이니...... 하고 쓰러져 운다.

 

어스름속을 헤치고 공복을 나르는 나의 隱袋는 무겁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내일과 내일과 다시 내일을 위해 난 깊은 침상에 빠졌다.

발견의 기쁨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빨리 발견의 두려움으로 하여 슬픔으로 바뀌었는가에 대하여 나는 숙고하기 위해 나는 나의 꿈마저도 나의 龕室로부터 추방했다.

우울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가고 이윽고 다람쥐 같은 봄이 와서 나를 피해갔다 나는 권총처럼 꺼멓게 여윈 몸뚱이를 깊은 衾枕속에서 일으키기란 불가능했다.

꿈은 여봐라고 나를 혹사했다. 탄알은 지옥의 마른 풀처럼 시들었다.

--건강체 인 채--

 

2.

나는 개 앞에서 팔뚝을 걷어붙여 보았다. 맥박의 몽테 크리스토처럼 뼈를 파헤치고 있었다...... 나의 墓堀

4월이 절망에게 MICROBE와 같은 희망을 플러스한데 대해, 개는 슬프게 이야기했다.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안심을 하고......

나는 피스톨을 꺼내보였다. 개는 백발노인처럼 웃었다......

수염을 단 채 떨어져 나간 턱.

 

개는 솜(綿)을 토했다.

벌(蜂)의 충실은 진달래를 흩뿌려 놓았다.

내 일과의 중복과 함께 개는 나에게 따랐다. 들과 같은 비가 내려도 나는 개와 만나고 싶었다...... 개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개와 나는 어느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없는 문패 표면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노와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했다.

...... 나는 내가 싫다...... 나는 가슴 속이 막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 어디?......

개는 고향 얘기를 하듯 말했다. 개의 얼굴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 동양 사람도 왔었지. 나는 동양 사람을 좋아했다. 나는 동양 사람을 연구했다. 나는 동양 사람의 시체로부터 마침내 동양문자의 奧義를 발굴한 것이다......

...... 자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말하자면 내가 동양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이지?......

...... 얘기는 좀 다르다. 자네, 그 문패에 씌어져 있는 글씨를 가르쳐 주지 않겠나?

...... 지워져서 잘 모르지만, 아마 자네의 생년월일이라도 씌어져 있었겠지.

...... 아니 그것뿐인가?......

...... 글쎄, 또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자네 고향 지명 같기도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 연기가, 바람과 양치류 때문에 수목과 같이 사라지면서도 좀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 아아, 죽음의 숲이 그립다...... 개는 안팎을 번갈아가며 뒤채어 보이고 있다. 오렌지빛 구름에 노스텔지어를 호소하고 있다.

 

 22.무제(無題)

 

故王의 땀...... 모시수건으로 닦았다...... 술잔을 넘친 물이 콘크리트 수채를 흐르고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정다워 난 아침마다 그 철조망 밖을 걸었다.

야릇한 헛기침 소리가 아침 이슬을 굴리었다 그리고 순백 유니폼의 소프라노

내 산책은 어쩐 일인지 끊기기 일쑤였다 열 발짝 또는 네 발작 나중엔 한 발짝의 반 발짝......

눈을 떴을 땐 전등이 마지막 쓰게[被物]를 벗어 버리고 있는 참이었다.

땀이 꽃 속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폐문시각이 지나자 열풍이 피부를 빼앗았다.

 

기러기의 분열과 함께 떠나는 낙엽의 귀향 散兵...... 몽상하기란 유쾌한 일이다...... 祭天의 발자국 소리를 작곡하며 혼자 신이 나서 기뻐하였다 차가운 것이 뺨 한 가운데를 깎았다. 그리고 그 철조망엘 몇 바퀴나 가서 低徊하였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또다시 부뚜막에 생나무를 지피고 있다 눈과 귀가 토끼와 거북처럼 그 철조망을 넘어 풀숲을 헤쳐 갔다.

第一의 玄?. 녹슬은 金環. 가을을 잊어버린 양치류의 눈물. 薰?來往

아침해는 어스름에 橙汁을 띄운다.

나는 第二의 玄?에게 차가운 발바닥을 비비었다. 金環은 千秋의 恨을 들길에다 물들였다. 階□의 刻字는 안질을 앓고 있다-- 백발노인과도 같이...... 나란히 앉아 있다.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다 과연 야릇한 헛기침소리는 眼前에 있었다 한 마리의 개가 쇠창살 안에 갇혀 있다 양치류는 선사시대의 만국기처럼 무쇠우리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가로운 아방궁 뒤뜰이다.

문패-- 나는 이 문패를 간신히 발견했다고나 할까--에 年號 같은 것이 씌어져 있다. 새한테 쪼아먹힌 문자 말고도 나는 아라비아 숫자 몇 개를 읽어낼 수 있었다.

 

 23.斷章(단장)

 

실내의 조명이 시계 소리에 망가지는 소리 두 時

친구가 뜰에 들어서려 한다 내가 말린다 十六日 밤

달빛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바람 부는 밤을 친구는 뜰 한복판에서 익사하면서 나를 위협한다.

탕 하고 내가 쏘는 一發 친구는 粉碎했다. 유리처럼(반짝이면서)

피가 圓面(뜰의)을 거멓게 물들였다. 그리고 방 안에 범람한다.

친구는 속삭인다.

--자네 정말 몸조심해야 하네--

나는 달을 그을리는 구름의 조각조각을 본다 그리고 그 저 편으로 탈환돼 간 나의 호흡을 느꼈다.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양말과 양말로 감싼 발-- 여자의--은 비밀이다 나는 그 속에 말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의심한다.

헌 레코오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24.각혈의 아침

 

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 둘이 다 시들어 간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어니 그들의 어느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아니한 성냥을 몇 개비고 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鉛粉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리코오드 고랑을 사람이 달린다 거꾸로 달리는 불행한 사람은 나 같기도 하다 멀어지는 음향소리를 바쁘게 듣고 있나보다

발을 덮는 여자 구두가 가래를 밟는다 땅에서 빈곤이 묻어온다 받아 써서 통념해야 할 암호 쓸쓸한 초롱불과 우체국 사람들이 수명을 거느리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뱃속에 통신이 잠겨 있다.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 나는 콧속 털을 잡아뽑는다

밥 소란한 정적 속에서 미래에 실린 기억이 종이처럼 뒤엎어진다

벌써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다 푸른 하늘이 새장 속에 있는 것 같이

멀리서 가위가 손가락을 연신 연방 잘라 간다

검고 가느다란 무게가 내 눈구멍에 넘쳐 왔는데 나는 그림자와 서로 껴안는 나의 몸뚱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맹이까지 빨간 사과가 먹고 싶다는둥

피가 물들기 때문에 여윈다는 말을 듣곤 먹지 않았던 일이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종자는 이제 심어도 나지 않는고 단정케 하는 사과 겉껍질의 빨간 색 그것이다.

공기마저 얼어서 나를 못 통하게 한다 뜰을 鑄型처럼 한 장 한 장 떠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병석에 나는 조심조심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까 뜰에 바람이 불어서 무엇인가 떼굴떼굴 굴려지고 있는 그런 낌새가 보였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

 

가브리엘 天使菌(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

이 살균제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흔이었다(고?)

 

폐속 페인트 칠한 십자가가 날이면 날마다 발돋움을 한다

폐속엔 요리사 천사가 있어서 때때로 소변을 본단 말이다

나에 대해 달력의 숫자는 차츰차츰 줄어든다

 

네온사인은 색소폰 같이 야위었다

그리고 나의 청맥은 휘파람 같이 야위었다

 

하얀 천사가 나의 폐에 가벼이 노크한다.

황혼 같은 폐속에서는 고요히 물이 끓고 있다

고무전선을 끌어다가 성베드로가 도청을 한다

그리곤 세 번이나 천사를 보고 나는 모른다고 한다

그때 닭이 홰를 친다-- 어엇 끊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

 

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

 

 25.황(?)의 記

-?은 나의 목장을 수호하는 개의 이름이다. (1931년 11월 3일 命名)

 

記 一

 

밤이 으슥하여 ?이 짖는 소리에 나는 숙면에서 깨어나 옥외 골목까지 황을 마중 나갔다. 주먹을 쥔 채 떨어진 한 개의 팔을 물고 온 것이다.

보아하니 황은 일찍이 보지 못했을 만큼 몹시 창백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주치의 R의학박사의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 속에선 한 개의 훈장이 나왔다.

--犧牲動物供養碑 除幕式紀念-- 그런 메달이었음을 안 나의 기억은 새삼스러운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개의 腦髓 사이에 생기는 연락신경을 그는 癌이라고 완고히 주장했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의 창으로 뛰어난 메스의 기교로써

그 信經腱을 잘랐다. 그의 그 같은 이원론적 생명관에는 실로 철저한 데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가 얼마나 그 紀念章을 그의 가슴에 장식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장례식 중에 분실된 그의 오른팔--현재 황이 입에 물고 온--을 보면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 그가 공양비 건립기성회의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무릇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균형한 건축물들로 하여 뒤얽힌 병원 구내의 어느 한 귀퉁이에 세워진 그 공양비의 쓸쓸한 모습을 나는 언제던가 공교롭게 지나는 길에 본 것을 기억한다. 거기에 나의 목장으로부터 호송돼 가지곤 解剖舞의 이슬로 사라진 숱한 개들의 한 많은 혼백이 뿜게 하는 살기를 나는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더구나 그의 수술실을 찾아가 예의 황의 절단을 그에게 의뢰했던 것인데--

나는 황을 꾸짖었다. 주인의 苦悶相을 생각하는 한 마리 축생의 인정보다도 차라리 이 경우 나는 사회 일반의 예절을 중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를 잃은 후에 나에게 올 자유-- 바로 현재 나를 염색하는 한 가닥의 눈물-- 나는 흥분을 가까스로 진압하였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그 팔 그대로를 공양비 부근에 묻었다. 죽은 그가 죽은 동물에게 한 본의 아닌 계약을 반환한다는 형식으로......

 

記 二

 

봄은 5월 화원시장을 나는 황을 동반하여 걷고 있었다. 玩賞花草 종자를 사기 위하여......

황의 날카로운 후각은 파종후의 성적을 소상히 예언했다. 진열된 온갖 종자는 不發芽의 불량품이었다.

하나 황의 후각에 합격된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대리석 모조인 종자 모형이었다.

나는 황의 후각을 믿고 이를 마당귀에 묻었다. 물론 또 하나의 불량품도 함께 시험적 태도로--

얼마 후 나는 逆倒病에 걸렸다. 나는 날마다 인쇄소의 활자 두는 곳에 나의 病軀를 이끌었다.

 

지식과 함께 나의 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하루 아침 나는 식사 정각에 그만 잘못 假睡에 빠져 들어갔다. 틈을 놓치려 들지 않는 황은 그 금속의 꽃을 물어선 나의 半開의 입에 떨어뜨렸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眼藥을 무난히 넣게 했다.

病집이 지식과 중화했다-- 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 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記 三

 

腹話術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나는 뇌수가 擔任 지배하는 사건의 대부분을 나는 황의 위치에 저장했다-- 냉각되고 가열되도록--

나의 규칙을-- 그러므로-- 리트머스지에 썼다.

배-- 그 속-- 의 結晶을 가감할 수 있도록 소량의 리트머스액을 나는 나의 식사에 곁들일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배의 발언은 마침내 삼각형의 어느 정점을 정직하게 출발했다.

 

記 四

 

황의 나체는 나의 나체를 꼬옥 닮았다. 혹은 이 일은 이 일의 반대일지도 모른다.

나의 목욕시간은 황의 근무시간 속에 있다.

나는 穿衣인 채 욕실에 들어서 가까스로 욕조로 들어간다.

--벗은 옷을 한 손에 안은 채--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를 짊어진 채 내가 해체대의 이슬로 사라진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피부는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다.

거기에 나는 파란 잉크로 함부로 筋을 그렸다.

이 초라한 포장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해골에 대하여......

묘지에 대하여 영원한 景致에 대하여

 

달덩이 같은 얼굴에 여자는 눈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얼굴엔 입맞춤할 데가 없다.

여자는 자기 손을 먹을 수도 있었다.

 

나의 식욕은 일차방정식 같이 간단하였다.

나는 곧잘 色彩를 삼키곤 한다.

투명한 광선 앞에서 나의 미각은 거리낌없이 表情한다.

나의 공복은 음악에 공명한다-- 예컨대 나이프를 떨군다--

 

여자는 빈 접시 한 장을 내 앞에 내놓는다--(접시가 나오기 전에 나의 미각은 이미 요리를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여자의 구토는 여자의 술을 뱉어낸다.

그리고 나에게 대한 체면마저 함께 뱉어내고 만다.(오오 나는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요리인의 단추는 오리온좌의 略圖다.

여자의 육감적인 부분은 죄다 빛나고 있다. 달처럼 반지처럼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알맞게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해 한다.

帽子-- 나의 모자 나의 疾床을 감시하고 있는 모자

나의 사상의 레테르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대로 죽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드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될 터이니까!

그림 달력의 장미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붉은 밤 보랏빛 바탕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嘲笑

다만 남아 있는 오리온좌의 뒹구는 못[釘] 같은 星員

나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얼굴을 변장하고 싶은 오직 그 생각에 나의 꺼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감추어 본다.

 

정수리 언저리에서 개가 짖었다. 불성실한 지구를 두드리는 소리

나는 되도록 나의 五官을 취소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을 포기한 나는 기꺼이-- 나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 이 나머지 세포를 써버리고 싶다.

바람 사나운 밤마다 나는 차차로 한 묶음의 턱수염 같이 되어 버린다.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봄이 나를 뱉어낸다. 나는 차가운 압력을 느낀다.

듣자 하니-- 아이들은 나무 밑에 모여서 겨울을 말해 버린다.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기 길에 못이 서너 개--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26. 정식(正式) 

정식·1 
해저에 가라앉는 한 개 닻처럼 소도(小刀)가 그 구간(軀幹) 속에 멸형(滅形)하여 버리더라 완전히 닳아 없어졌을 때 완전히 사망한 한 개 소도(小刀)가 위치에 유기(遺棄)되어 있더라

정식·2 
나와 그 알지 못할 험상궂은 사람과 나란히 앉아 뒤를 보고 있으면 기상(氣象)은 몰수되어 없고 선조가 느끼던 시사(時事)의 증거가 최후의 철의 성질로 두 사람의 교제를 금하고 있고 가졌던 농담의 마지막 순서를 내어 버리는 이 정돈(停頓)한 암흑 가운데의 분발은 참 비밀이다 그러나 오직 그 알지 못할 험상궂은 사람은 나의 이런 노력의 기색을 어떻게 살펴 알았는지 그 때문에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 하여도 나는 또 그 때문에 억지로 근심하여야 하고 지상 맨 끝 정리(整理)인데도 깨끗이 마음 놓기 참 어렵다

정식·3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표본 두개골에 근육이 없다

정식·4 
너는 누구냐 그러나 문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외치니 나를 찾는 일심(一心)이 아니고 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한들 나는 차마 그대로 내어버려 둘 수는 없어서 문을 열어주려 하나 문은 안으로만 고리가 걸린 것이 아니라 밖으로도 너는 모르게 잠겨 있으니 안에서만 열어주면 무엇을 하느냐 너는 누구기에 구태여 닫힌 문 앞에 탄생하였느냐

정식·5 
키가 크고 유쾌한 수목이 키 작은 자식을 낳았다 궤조(軌條)가 평편한 곳에 풍매(風媒)식물의 종자가 떨어지지만 냉담한 배척이 한결같아 관목은 초엽(草葉)으로 쇄약하고 초엽은 하향하고 그 밑에서 청사(靑蛇)는 점점 수척하여 가고 땀이 흐르고 머지 않은 곳에서 수은(水銀)이 흔들리고 숨어 흐르는 수맥(水脈)에 말뚝 박는 소리가 들렸다.

정식·6 
시계가 뻐꾸기처럼 뻐꾹거리길래 쳐다 보니 목조 뻐꾸기 하나가 와서 모으로 앉는다 그럼 저게 울었을 리도 없고 제법 울까 싶지도 못하고 그럼 아까 운 뻐꾸기는 날아갔나


27.이런 시詩 / 이상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무지 어디서인가 본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

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 밤에 한소내기 하였으니 필시必是 그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돌

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처량凄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作文

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

없오이다. 내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 생각

하리다. 자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럼이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 그

만찢어버리고싶더라.

 이상(1911-1937) 선『 건축무한육면각체


 

 

날개 - 단편소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 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함이 되오?

굿바이.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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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 모음 46편

1.고향

신동엽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2.그 가을

신동엽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3.그 사람에게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4.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신동엽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5.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6.꽃 대가리

신동엽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 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 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ㅅ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7.너는 모르리라

신동엽

너는 모르리라
그 날 내 왜
넋나간 사람처럼 고가(古家) 앞
서 있었던가를

너는 모르리라
진달래 피면 내 영혼 속에
미치는 두 마리
짐승의 울음

너는 모르리라
산을 열 굽이 넘고도
소경처럼 너만을 구심(求心)하는
해와 동굴과 내 사랑

너는 모르리라
문명된 하늘 아래 손넣고 광화문 뒷거리 걸으며
내 왜 역사 없다
벌레 삥·····니까렸는가를

하여
넌 무덤 속 가서도 모를 것이다
너 안 보는 자리서
찬 돌 쓸어안으며
그 숱한 날 얼마나 통곡했는가

그리하여
넌 할미꽃 밑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 날 왜 내
눈물먹은 네 진주에 손대지
안했는가를.
그리고 그것은 몰라야 쓴다.

8.너의 무덤에서

신동엽

온 종일
한가한 공동묘지엔
흔건히 지쳐
해가 딩굴다

함부로 갈큇발이
헤비고 간
가난한 애장 우에
계절은 땀을 흘리며
거기 나물 뜯던 언덕을
아련히 기어가는 하오(下午).

각시풀 다듬던 연한
너의 뼈마디는
지층을 적시며
오늘도 산화(酸化)하는가.....
정(貞)이.

정(貞)이
밤마다 새푸랗니
놀래였나
지표가 구겨졌다.

9.노래하고 있었다

신동엽

노래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풍경
바라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물결
양털 같은 세월 위서
너는 노래하고 있었다.

죄없는 사람
가로수 밑 걸으며
또각또각 구둣소리
눈녹아 하늘로 번질 때

하늘은 바람
대지 위 고요

노래하고 있었다.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들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로수 위
구름 위
보이지 않는 영화로운
미래로의 소리로,

거대한 신은
소맷깃 뿌리며
부처님 같은 얼굴로

내 괴로움 위서
노래하고 있었다.

10.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1.눈 날리는 날

신동엽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한(恨),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12.눈동자

신동엽


묻지 말고 이대로 보내 주옵소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눈동자여

말곳 하면, 잘못
꿈 깨어져 버릴
깨끗한 얼굴

눈물 감추우며
제발 이대로 돌아가게
못본 척 해주소서

내 목숨 다 주고도
떠나기 싫은 눈동자여.

13.단풍아 산천

신동엽

즐거웁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뒤집혔어도
즐거웁게 가을은 돌아오고 있었지

여보세요
신령님
말씀해 주세요

산과 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그인
나와 인연이 있을까요

흐들갑스레 단풍은 피어나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둔갑 떨었어도
단풍은 내 산천 물들여 울었지

보세요
상천(上天)계신 한울님
만날 수 있을까요
옥(玉)으로 깎을
출렁일 가슴

보세요
새 배타고
목성(木星)에나 가면
우린 이 지구사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피 터지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한반도 대관령 주막집에서
입 가리고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지

14.둥구나무

신동엽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남쪽 산 북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 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동쪽 마을 서쪽 도시
등 갈린 전지(戰地)

바위도 무쇠고
투구고 증오고
빨아들여 한 솥밥
수액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15.마려운 사람들

신동엽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 땅 살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16.미쳤던

신동엽

스카아트 밑으로
강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는 흰 구원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17.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18.별 밭에

신동엽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 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기슭.

별 밭에선 지금 한창
영겁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 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19.보리 밭

신동엽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버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태백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20.봄은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21.봄의 소식(消息)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22.불바다

신동엽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신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23.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으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안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 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24.사랑

신동엽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북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처럼 깡똥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 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25.사랑의 고정

신동엽

사랑의 고정(苦情)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답니까?
말슴 마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도
겉으로 웃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랍니다.

천지신명이 대자연에 밝으니
나는 아무델 가나
알머리처럼 따가워라.

너의 방에선 너의 보금자리 남새가 난다.

자신(自信)이 흔들리는 지라
자꾸
역확인(逆確認)을 얻으려고

<자신 있느니라고>
강조해 보는 것이리라.

석(石)을 두고의 순수한 상모(想慕)가 아니다.
어느 누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빌미로써의 석(石).
또는 그것에 반동적으로 대립하기 위한
방패로써의 석(石).

26.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7.살덩이

신동엽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오,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28.삼월

신동엽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앞
걸어가는 행렬(行列)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槍)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29.새로 열리는 땅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넘으면
정전지구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 거니노라면
초연 걷힌 밭 두덕 가
새벽 열려라.

30.새해 새 아침은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하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31.序詩(서시)

신동엽

아담한 산들 드믓 드믓
맥을 끊지 않고 오간
서해안 들녘에 봄이 온다는 것
것은 생각만 해도, 그대로
가슴 울렁여 오는 일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또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을 맞아 오고
겨울이 풀리면 다시 또
봄.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고웁게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딀 때 걷워딀 듯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 짤랑
꽃가마 타 보고
환갑 잔치엔 아들딸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조용히 묻혀가도록 내 버려나
주었던들

또, 가욋말일찌나, 그러한 세월
복 많은 歌人(가인)이 있어
(蜂蝶風月(봉접풍월)을 노래하고
장미에 찔린 애타는 연심을 읊조리며
수사학이 어떠니 표현주의가 어떠니
한단들 나 역 모르는 분수대로
그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
태백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 제비 돌아와 흙 묻어 나르면
솟아오는 슬픔이란 묘지에 가 있는
누나의 생각일까.....?

산이랑 들이랑 강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머지 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것이라.

잘 있으라.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구름이 끼던
두번 다시 상기하기 싫은
人種(인종)의 늦장마철이여

이러한 노래 나로 하여
처음이며 마즈막이게 하라
진창을 노래하여 그 진창과 함께
멸망해 버려야 할 사람이
앞과 뒤를 헤쳐 세상에
꼭 하나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두고 두고, 착한 인간의 후손들이여

이 자리에 가는 길
서낭당 돌을 던져

구데기.
그런 역사와 함께 멸망한 나의
무덤, 침 한번 더 뱉고
다시 보지 말아져라.

32.수운이 말하기를

신동엽

水雲(수운)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
맨발로 삼천리 누비며
감꽃 피는 마을
원추리 피는 산 길
맨주먹 맨발로
밀알을 심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하눌님은 콩밭과 가난
땀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
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
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
쓰레기 줍는 소년
아프리카 매 맞으며
노동하는 검둥이 아이,
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
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하눌님이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강아지를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개에 의해
은행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은행에 의해
미움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
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
한반도의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
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33.어느 해의 유언

신동엽

뭐…….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34.여름 이야기

신동엽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젯트편대가
강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뒷곁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 딸기가
익고
있었다.

35.여자의 삶

신동엽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 그믐
그리고 석양
눈ㅅ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 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수운 피만
흰 볼기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어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
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여자는
물.
갈대가 아니라, 물.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물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신.

겁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 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넌,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넌,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넌,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 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36.영(影)

신동엽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먹먹한 가슴 굳어만 갈 뿐
나타나줄 것같은
비가 내리는
어둔 저녁에도
너는 없었다.
대폿집 앞에 서면
부서지고 싶은 대가리
대가리를 흔들면서
전찻길을 건넌다.

댕그랑 땡
미친 가슴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지는
통쾌한 중량의 동전잎
버스에 오르면 울고 싶은 재미에
하루를 산다.
너는 말할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그러면서도
너는 내 눈을 지켜보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는 내리는데
숙명처럼
나는 널 생각하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버둥이는
내 눈을 너는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가로수에 잎이 트면
그리고 보리 이랑이
강과 마을을 물들이면
나는 떠나갈 것이다.

37.완충지대(緩衝地帶)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목포처럼
역사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嶺) 넘으면
완충지대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38.이곳은

신동엽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간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定)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을 싣고 찬란하게
찌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쏠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도 없이 옛 마을터엔 훵훵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39.이리 와 보세요

신동엽

이리 와 보세요
당신 눈에 살색(殺色)이 도는군요.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엔 우둔이
당신 입엔 시의(猜疑)가
오랜 대(代)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교만한 종자야요
또, 당신은
피가 병균으로 차 있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눈이 순정과 지혜로
맑게 빛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토양에서 자란
맘과 몸이 착실한
사내의 씨.

그리고, 마음과 힘을 쏟아
정성껏
나의 몸에 씨를 심거줄 사내.

40.조국(祖國)

신동엽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굿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41.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 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42.진달래 산천(山川)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꾳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의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아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43.초가을

신동엽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 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맥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 밑, 또
오는 것인가…….

44.풍경(風景)

신동엽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
토막가 서성거리는 초병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
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 준 와이사쓰를 입고
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
오늘 밤, 사해(死海)가의
이스라엘 선술집서,
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 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핀,
지중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엔,
온 종일, 상륙용 보오트가
나자빠져 딩굴고.

흰 구름, 하늘
젯트 수송편대가
해협을 건느면,
빨래 널린 마을
맨발 벗은 아해들은
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

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
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
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
팔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
동방대륙에서
서방대륙에로
산과 사막을 뚫어
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

노오란 무꽃 핀
지리산 마을.
무너진 헛간엔
할멈이 쓰러져 조을고

평야의 가슴 너머로.
고원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지대로.
모여 간 탱크 부대는
지금, 궁리하며

고비 사막,
빠알간 꽃 핀 흑인촌
해 저문 순이네 대륙
부우연 수송로 가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촌 아가씨들이
빨래하며,
아심 아심 살고
있을 것이다.

45.한마음

신동엽

한 마음 가엽서라
돛도
삳도 없이

오날은 어델 흘러가나뇨

온 길을 돌아갈 수 없음이여.
유리창 넘어로 보히는
만지기 영 틀린
없어진 탑이여.

한 마음
가엽서라
나약한 사람 우에서
살아가는 

가다가 슬어질
가난한 마음이여.

46.五月(오월)의 눈동자

신동엽

지금 난 너를 보고 있지 않노라.
훈풍 나부끼던 머리칼
오월의 푸라타나스 가로(街路) 저 멀리
두고 온 보리밭 어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바람이 기어드는 가슴
나뭇잎 피는 산등성에 서서
술익는 마당
두고 온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남해바다 멀리
한번도 나의 울 안에
춤춰본 적 없는
푸른 빛 희열에 찬 생의 향기를
그윽한 새 잎에 받들어
나는 지금 마셔 주고 있노라,
온 마음 밭으로 깊이깊이 들여마셔 주고 있는 것이노라.

지금 난 너의 눈동자를 보고 있지 않노라.
지나온 하늘
草綠庭園(초록정원)에 딩굴던
태양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학창시절의 호밀밭 전쟁이 뭉개고 간 꽃잎의 촉촉한 밤하늘을
회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훈풍에 날리던 머리칼
山頂(산정)을 돌아 오르면
온 세계의 아름다웠던
천만가지 머언 오월의 향기를
나의 피알 속에
상기 살아있는 피 한 방울 감격 속에서
이렇게 새 잎 타고 불어오는 바람 언덕에 서서
오늘도 내일도 그제도
머리다발 날리며
마셔보고만 싶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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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 모음 41편

《1》.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2》가을비

신경림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 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 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3》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4》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고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5》그 여름

신경림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왔다

구름을 몰고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다

《6》기차

신경림

꼴뚜기젓 장수도 타고 땅 장수도 탔다
곰배팔이도 대머리도 탔다
작업복도 미니스커트도 청바지도 타고
운동화도 고무신도 하이힐도 탔다
서로 먹고 사는 애기도 하고
아들 며느리에 딸 자랑 사위 자랑도 한다
지루하면 빙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끝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투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차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면
이마를 맞대고 함께 걱정을 한다
한 사람이 내리고 또 한 사람이 내리고.....
잘 가라 인사하면서도 남은 사람 가운데
그들 가는 곳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냥 그렇게 차에 실려 간다
다들 같은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7》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8》까치소리

신경림

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
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
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
큰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
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
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
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
뜰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그들도 까치 소리를 들을까
소나무숲 잡목숲의 철 이른 봄바람
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

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
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9》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갛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10》나무

신경림

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 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11》나무를 위하여

신경림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꺽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몬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추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12》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13》날개

신경림

강에 가면 강에 산에 가면 산에
내게 붙은 것 그 성가신 것들을 팽개치고
부두에 가면 부두에 저자에 가면 저자에
내가 가진 그 너절한 것들을 버린다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훨훨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러나 어쩌랴 하룻밤새 팽개친 것
버린 것이 되붙으며 내 몸은 무거워지니
이래서 나는 하늘을 나는 꿈을 버리지만
누가 알았으랴 더미로 모이고 켜로 쌓여
그것들 서섯히 크고 단단한 날개로 자라리라고
나는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강에 가면 강에서 저자에 가면 저자에서
옛날에 내가 평개친 것 버린 것
그 성가신 것 너절한 것들을 도로 주워
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면서

《14》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신경림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
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
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
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

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
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

《15》냇물을 보며

신경림

소녀들이 한떼 새옷을 입고 나들이를 나왔다
재넘어 바람에도 재잘대고 깡총대고
감추려 해도 부끄러운 속살 자꾸만 드러나서
벼랑을 뛰어내리기 전엔 엄살도 떨어보이는데
달음박질에 도는 바위너설에 햇살이 더 곱다
마을 앞은 게걸음으로 저자는 깨끔발로 지날 즘엔
새옷에 때도 묻고 종아리엔 얼룩도 지겠지
방죽이 가로막으면 서로 팔을 끼고
어기영차 밀어서 길을 터라 힘은 곱으로 솟고
그때쯤 몸은 더렵혀지고 갈기갈기 찢겨 있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지친 다리 끌고라도
저 들판만 지나면 넓고 푸른 바다인 것을
새파란하늘에 두듕실 구름만 떠 있을 것을
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발걸음 크게 허공에 차리

《16》농무(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7》눈

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

《18》늙은 소나무

신경림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19》동해바다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하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는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20》뗏목

신경림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
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21》만남

신경림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던 날
미움과 노여움 속에서 헤어지면서
이제 우리 다시 만날 일 없으리라 다짐했었지
그러나 뜨거운 여름날 느닷없는 소낙비 피해
처마 아래로 뛰어드는 이들 모두 낯이 익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 손에 밴 기름때 한결같고
묻지 말자 그동안 무얼 했느냐 묻지 말자
손 놓고 비 멎은 거리로 흩어지는 우리들
후즐근히 젖은 어깨에 햇살이 눈부시리
언제고 다시 만날 걸 이제서 맏는 우리들
메마른 허리에 봄바람이 싱그러우리

《22》매화를 찾아서

신경림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23》목계 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 여울 모질거든 바위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끊어 넘는 토방 뒷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24》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살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25》빛

신경림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26》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 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 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27》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신경림

새벽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길고 오랜 비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백날 백밤 온 세상을 뒤덮는
진눈깨비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 속에서 태어난다
비바람을 야윈 어깨로 막는
안간힘 속에서 태어나고
진눈깨비 맨가슴으로 받는
흐느낌 속에서 태어난다

새벽은 먼저 산길에 와서
굴 속에 잠든 다람쥐를 간지르고
풀잎을 덮고 누운
풀벌레들과 장난질치지만
새벽은 다시 산동네에도 와서
가진 것 날선 도끼밖에 없는
늙고 병든 나무꾼을 깨우고
들일에 지쳐 마룻바닥에 쓰러진
에미 없는 그의 딸을 어루만지지만
새벽은 이제 장거리에 와서
장사 채비에 신바람이 난
주모의 치맛자락에서 춤을 추고
해장국집에 모여 떠들어대는
장꾼들과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어둠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굳은 다짐 속에서만 밝는다
비바람 진눈깨비 다시 못 오리라
힘껏 낀 어깨동무 속에서만 밝는다
다람쥐도 풀벌레도 산짐승도
늙고 병든 나무꾼도 장꾼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깨동무를 하고
크고 높이 외치는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28》세월

신경림

흙 속을 헤엄치는
꿈을 꾸다가
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지하실 바닥 긁는
사슬소리를 듣다가
무덤 속 깊은 곳의
통곡소리를 듣다가……

창문에 어른대는
하얀 달을 보다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다가……

《29》싹

신경림

어둠을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이렇게 재재발 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
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
서로 안고 간질이며 낄낄대는 까닭을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깊이 숨을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를 꺼내어
가만히 햇빛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던 까닭을

《30》쓰러지진 것들을 위하여

신경림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 십만이 모이는 유세 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31》압록강에서

신경림

강은 가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가르지 않고
마을과 마을을 가르지 않는다.
제 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이며
쪽배를 띄워 서로 뒤섞이게 하고,
도움을 주고 시련을 주면서
다른 마음 다른 말을 가지고도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건너 마을을 남의 나라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버려 두지 않는다.
한 물을 마시고 한 물 속에 뒹굴며
이웃으로 살게 한다.

강은 막지 않는다.
건너서 이웃 땅으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짐즛 몸을 낮추어 쉽게 건너게도 하고,
몸 위로 높이 철길이며 다리를 놓아,
꿈많은 사람의 앞길을 기려도 준다.
그래서 제가 사는 땅이 좁다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멀리 가서 꿈을 이루고,
척박한 땅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강 건너에 농막을 짓고 오가며
농사를 짓다가, 아예
농막을 초가로 바꾸고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새터전으로 눌러 앉기도 한다.

강은 뿌리치지 않는다.
전쟁과 분단으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제 고장 사람들이
뒤늦게 찾아와 바라보는
아픔과 회한의 눈물젖은 눈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제 조상들이 쌓은 성이며 저자를
폐허로 버려 둔 채
탕아처럼 떠돌다 돌아온
메마른 그 손길을 따듯이 잡아 준다.
조상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수없이 건너가고 건너온
이 강을 잊지 말란다.

강은 열어 준다, 대륙으로
세계로 가는 길을,
분단과 전쟁이 만든 상처를
제 몸으로 말끔히 씻어 내면서.
강은 보여준다,
평화롭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어두웠던 지난날들을
제 몸 속에 깊이 묻으면서.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32》어둠 속으로

신경림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들 가고있다
꽃으로 피어 서로 시새우던 안타까움을 두고
뜨거운 햇볕에 몸을 익히던 어려움을 잊고
달빛과 이슬에 들뜨던 부끄러움을 버리고
한낱 과일로 떨어져 푸섶에 썩기 위하여
섬돌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도 듣지 못하는
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도 보지 못하는
깊고 긴 어둠 속으로 허둥대며 가고 있다


《33》여름날

신경림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34》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35》장미에게

신경림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흘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손등에 뚜렷한데야

《36》정월의 노래

신경림

눈에 덮여도
풀들은 싹트고
얼음에 깔려서도
벌레들은 숨쉰다.

바람에 날리면서
아이들은 쉬 놀고
진눈깨비에 눈 못 떠도
새들은 지저귄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37》진달래

신경림


1
냇물 타고 내려온 복대기가
마당을 덮은 가겟집
씨리목 산울타리에
진달래가 섞여 피었다

키가 큰 그 집 의붓딸이
나는 좋았다
가겟방 들마루에 나앉으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 뜨는 게 보이고

그애 제 죽은 애비 자랑에
툭하면 밤이 깊었다
후미진 골짝 돌자갈 밑에 누워
소쩍새 울음에 눈물 삼킬 그애 애비

2
나는 삼짇날 그애 꿈을 꾼다
산울타리에 섞여 피던
진달래를 본다
재봉틀에 손 찔리며
쏟아지는 잠 쫓는 그애의 딸을 본다

골목 안을 서성대는
가난한 어머니를 본다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이 길고 질긴 줄은

소나무 사이로
달 뜨는 걸 본다

《38》집으로 가는 길

신경림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39》초원

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40》파도

신경림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간다
바람에 몰려서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려지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41》파장(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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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 모음 40편

1.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2.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3.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4.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5.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6.별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7.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8.서시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9.수평선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10.순례자(巡禮者)의 잠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11.숲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12.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13.이유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14.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15.자전(自轉)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16.풀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 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17.23층의 햇빛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18.가는 곳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19.가을의 書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20.감자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21.거리 시(詩)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22.고독

강은교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23.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24.그 여자 1

강은교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25.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26.꽃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27.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28.눈발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29.돌아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30.등불과 바람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31.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32.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33.물방울의 시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34.물에 뜨는 법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35.배추들에게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36.봄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37.붉은 해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38.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39.연애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40.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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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모음


1.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2.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 속의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草綠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3.샘가에서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은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4.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람의 판유리 깔아놓은 서해.
저 무대까리, 목이 안 보이는
아예 목이 없는 바다
아무것도 껴안을 수 없어
안기기만 바라는 바다
마냥 소리쳐도 말이 안 되는 바다
마냥 부대껴도 춤이 안 되는 바다 


5.바다   

부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6.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7.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8.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빠진 자국 찾아 들어갔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9.연애에 대하여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너어간다 손이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여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이불 위로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10.밥에 대하여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11.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12.네 살엔 흔적이 없다


 누워 있는 네 눈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네 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거기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써보거나,
하늘에 없는 별자리를 그려보거나
네 살엔 흔적이 없다 너는 벌써 받아
숨긴 것이다 가만히 손톱으로 네 살을
누르면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또
몇 점 눈꽃 송이 네 눈으로 내려앉고 

13.아들에게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純의 감침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入場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 끝에서 왔고 칼끝을 향해 간다
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14.금기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15.음악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16.밤은 넓고 드높아 


밤은 넓고 드높아 수없이 깔린 별들
서로 싸운다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낮게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

이것은 돌아가는 길인가, 오는 길인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순간에 너를 부른다
네 얼굴을 보여다오,
바늘을 입에 문 물고기처럼 

17.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18.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19.입술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20.앞날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21.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22.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찰랑이는 채석강 연안 바닷물이
쨍알쨍알 보채는 나를 달랜다
목까지, 눈까지 잠겨 작은 물결
물새떼 흉내를 내는지 물새떼
작은 물결 흉내를 내는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마냥 발길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래며 바다는
속이 탄다 검은 오지항아리 속
자글자글 끓는 바다는 나를 달랜다
이러면 어쩌나,낸들 어쩌나
오늘도 난 바다에게 짐만 되었다 

23.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바닷가 언덕 위 이름 모를 꽃들,
제 뺨을 잎새에 부비며 어두워진다
발 밑에 제 이름 묻고, 그림자를
묻고,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꽃들,
눈먼 파도에 시달리다 물거품이 되는
꽃들, 마라, 눈을 떠라,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 시들고 말 거야
아, 이 저녁엔 간지럼처럼 찾아오는
죽음, 베일 아닌 죽음이 따로 있을까
아, 눈시울에 떠는 한 아름의 꽃들,
폭풍 지나가면 곤소금 뒤집어쓰고
허연 뿌리 드러낼 저것들이 오늘
저녁 네게 던지는 빛은 얼마나 강한가 

24.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25.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많이 꼬이고 꼬여 설레이면서
몸을 바꾸고
바뀐 몸 누여 두고
푸른 바람으로 내릴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 헤매는 거리의
지워진 발자국일까

참으로 불편한 잠을
너는 자고 싶었다
그 잠에서 깨일 땐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고 싶었다

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네 속삭임도, 형체 없는 네 웃음도 저항이었어 

26.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거기, 名山이 大德이 이를 보이며 껄껄 웃고

너울거리는 강과, 강의 엉덩이를 핥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너울을 넘어 그가 나를 부르고,
반갑게 내가 대답하고

그가 나를 불러 낄낄거리는 名山과 大德의
뜨거운 이마를 짚게 하고,
내가 소리쳐 太平歌를 부르고

해가 지면 거기 가서 누울 수도 있으리라
나무들은 검은 둥치를 습기찬 언덕에 비비고
풀숲으로 타닥타닥 겁 많은 벌레들이 튈 때

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이 몸, 거친 몸, 이 어이 거친 몸  
 

27.


1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우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白旗(백기)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 바퀴 소리

이제 같은 하늘 바깥을 떠돌고
亡者(망자)들은 무덤 위로 얼굴을 든다
-치욕이여, 치욕이여 언제 너도 白旗를 날리려나

2
그 겨울 눈은 허벅지까지 쌓였다
窓(창)을 열면 아, 하고 복면한 산들이 솟아 올랐다

잊혀진 祖上(조상)들이 일렬로 걸어왔다
끊임없이 그들은 흰 피를 흘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온 몸에서 전깃줄이 울고, 얼음짱에
아가미를 부딪는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 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28.여기가 어디냐고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 여기가 어디냐고?
-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29.겨울산

 
1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性)과 광기를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일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2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30.병든 이후


나는 당신이 그리 먼데 계신 줄 알았지요 지금 내 살갗
에 마른버짐 피고 열병 돋으니 당신이 가까이 계신 줄 알
겠어요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이 조금 빨리 오셨을 뿐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당신 손 잡고 멀리 가고 싶지만 한 발
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오는 당신, 우리 한몸 되면 나의 사랑 시들줄을
당신은 잘 아시니까요. 

31.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32.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시집< 아, 입이 없는것들 59 > 

33.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어떤 하늘이
이 열린 장미의
이 무사무념의 장미꽃 호수 속에서
비추이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장미「장미의 숲」

어떻든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쏙아지가
못돼야 켕기는 것 있고, 켕기는 게 오래되면 화병도 나
고, 화병이 오래 가면 무사무념까지 간다. 여름 대낮에
큰 대(大)자로 누워 침 흘리는 들장미가 아름다울 리 없
다. 쏙아지가 없으니 켕기는 것 없고, 켕기는 것 없으니
화병도 안나고, 화병 안 나니 무사무념도 없다. 어찌든지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바짝 약오른 살모사
의 곧추 세운 모가지처럼, 한겨울 법당에서 살모사 등을
세운 깡마른 비구니처럼.
 

34.거울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35.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파블로 네루다, 「遊星」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수로부인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36.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37.이별 2


아직 그대는 행복하다 괴로움이 그대에게 있으므로
그러나 언젠가 그가 그대를 떠나려 하면 그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질 것이다
괴로움이 그에게로 옮아갈 것이므로 

38.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39.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검은 산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40.발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 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요
하루에도 몇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41.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보라
비린내 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42.비 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43.비 2


머리맡에 계시는 것 같아 깨어보면 바깥에 계십니다
창을 열고 내다보면 빗줄기 너머에 계십니다 지금 빗줄기
사이로 달려가면 나 없는 사이 당신은 내 방에 들어와 뽀
오얗게 한숨이나 짓다가 흐트러진 옷가지랑, 이부자리랑
가지런히 매만지다가 젖어 돌아오는 내 발소리에 귀기울
이는 건가요?

< 그 여름의 끝> 중에서. 


44.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詩가 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行動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天使가 되는
<어느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灰色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詩에는 終止符가 없다
당대의 廢品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正當性을 밝혀냈고 反復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 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表現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詩는 貴族的인가 어째서 貴族的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45.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46.비단길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리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47.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48.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
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
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
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
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
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
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
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灰層이 깊었다

─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 지성사, 1996 


49.편 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

50.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하게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든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소녀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나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를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51.숨길 수 없는 노래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52.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53.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괴로와하기 전에 기다리고
기다리기 어려울 때
한 번 숨을 끊고 들여다보는 물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머리 풀듯이 괴로움 풀고
속절없이 한 세상 지나가면
이 물은 다시 흐를 것인가

형벌이여,
민물에 떠밀리는 이끼처럼
지금의 인후咽喉에 남아 있는
최초의 떨림!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54.편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55.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56.출애급出埃及


1
오늘 다 외로와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영화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의 영화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 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애인愛人,
나는 퀭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동방박사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천국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욕정慾情에 떠는 늙은 자궁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분노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주主여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57.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시집:'90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58.기다림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59.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60.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 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61.무언가 아름다운 것


1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를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뭔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지요

2
저녁이면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요
넘어져 다쳤는지 몰라요
어쩌면 더 먼 곳에서 다쳐
이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도
엎드리면 꽃들의 울음소리 들렸어요
난 꽃들이 등물하는 줄만 알았지요 

62.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서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때로 나는 한 마리
체체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4.벽지가 벗겨진 벽은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5.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그리다'는 말이 '구부리다'는
말의 추억을 가지듯이
고개 숙인 양달개비 푸른 꽃은
어느 깨진 하늘의 사금파리일까

지금 이곳이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양달개비꽃은 푸르고,

이질 설사의 배설물 같은
흰 개망초꽃 사이,
퍼질러 앉은 오십대 여인들의
엉덩이가 유난히 커 보인다

이 세상에 당신은
계 모임 하러 왔던가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66.차라리 댓잎이라면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있수?
그거 차마 못 봐요, 미쳐요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67.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3


아침부터 전해오는 새깃보다 가벼운 이 떨림,
나는 목구멍 눈구멍 다 열어놓고 떨림이 가시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기쁨의 시작인가, 불안인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한 마리 수줍은 짐승으로 만드는 떨림,
이윽고 나는 내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짐승들을
다만 내 눈시울로 떨게 한다 멀구나 멀어,
이 떨림이 멎는 곳은 어디인가 


68.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69.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7

 
햇빛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새들은 자꾸 목을 감춘다
기숙사 담벽 아래 흰 매화꽃들이 검은 가지에 소복이 앉아 미끄러질 듯하고
아까부터 벤치에 앉은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보지만
그건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70.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9

 
집 나온 지 며칠 자꾸 바람이 불어 하늘 한쪽에 집들이 떠다니고,
나도 나무도 팔다리가 따로 놀고 얼굴을 더듬으면 탈일 뿐이다
어디 눈물샘이 있는지 더듬어보지만 울어본 지 오래여서 울 수가 없다
그대 집은 플라스 디탈리, 내 사랑은 바람부는 강을 건너 그대 집에 닿았는가
내게는 바람 외에 다른 살이 없다 꽉 찬 幻化여,
나는 이제 제정신이 들 것만 같다
육십년 후 이맘때 플라스 디탈리 중국집 근처를 떠돌 幻化여,
지금 내가 울면 그대도 따라 울 것인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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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모음


1.게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순하고 착한 노인은 못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독 짖는 늙은이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 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들도 경험한다. 그들도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 게들은, 왕게든 털게든 대게든, 늠름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자세로 수족관 유리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 게는 일종의 괴상한 광물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 이게 그 게 찌꺼기인지, 저게 그 게의 잔해인지,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2.뼈의 음악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3.모자를 쓴 태양

 

칸나꽃 수만 송이를 토해내던 태양이
여기서는 돌덩어리를 굽고 있을 뿐이다
두개골이 뜨겁다
어딘가에 바삭바삭한 미라들이 있을 것이다
큰 모자를 쓰고 올 걸 그랬다
눈이 부시다
칸나!
태양에 바치는 숫처녀의 심장처럼
붉은 칸나를 본 게 지난 해 여름이었나
정말 장미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싱싱한 심장 같은 꽃이었다
두근거리는 대지 위의 초목들과
나비들의 향기
그러나 이 물 마른 땅엔
번쩍거리며 누워있는 모래들이 있을 뿐이다
물을 벌떡벌떡 들이킨다
태양의 모자는 녹아버린 것 같다

 

4.지평선                                                    

1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방에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텅 빈 원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사막의 태양
소리 없이 몰려와 지평선을 뭉개버리는 화산재 같은 구름들

2
지평선은 언제까지 지평선일까
가도 가도
원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내가 가면 거대한 공허가 따라온다

3
여기가 무밭이었다면
사방이 무뿐인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였다면
무잎을 갉아먹으며 나는 나비를 꿈꾸었을까
날마다 이 부에서 저 무로 꾸물꾸물 기어다니며
도대체 내가 무밭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인지
눈 먼 애벌레인 나는 끝없이 펼쳐진 무밭을
그 무의 장관을 과연 상상하기나 했을까
밤이면 무꽃들 속으로 별들이 내려오고
별밭에 무꽃들이 흔들리는 어마어마한 무밭에서
내가 애벌레가 아니라
무밭의 주인이었다면  
무재벌을 꿈꾸었을까
둘러보고 사방을 둘러봐도 무 하나 없다
배추 한 포기 없다
둥근 황무지는 울타리가 없다
가없는 곳에서 가없는 곳으로 바람 분다
서늘하다
지금은 고비의 5월

 

5.거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呪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것은 눈꺼풀이 없는 눈, 눈썹이 없는 눈, 눈동자가 없는 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마가 늘 깨어 있으려고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튼 거울이 하나의 눈이라면 그 눈은 우리를 무심하게 보고 있다. 그 무심은 허공과 다르지 않다. 허공은 얼마나 큰 거울인가.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맑고 고요한 거울이 허공이다. 무수히 흘러가는 것과 절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명상하기 위해 인간은 거울을 만든 것이 아닐까?

 

6.흰 개

시베리안허스키는 아니었다
그날 나는 늙은 개를 따라가고 있었다
흰 털이 더러운
그 개는
북극 늑대의 혈통 같았다
며칠 굶주렸는지
쓰레기자루 앞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다른 음식쓰레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두툼한 외투 차림에 가방을 든 사람들이
직립보행하는 대도시의 아침
스모그가 태양과 함께 중천을 향하는 소음 속에서
앙상한 몸뚱이를 네 발로 떠받친 늙은 개는
꺼칠했고
핼쑥했고
고독했다
큰길가에서 벗어나
간혹 노숙자들이 해바리기를 하는 공원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그 떠돌이 개를 나는 따라가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까닭은 묻어두자
아무튼 그 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해야겠다
그날 나는 천지간에 자욱한 눈보라와
아무런 발자국이 없는 설원을 보고 있었다
백야에 눈이 크게 열리는
흰 올빼미도 상상하면서

 

7.진달래꽃

 
그동안 없었던 일이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콜걸들이 쳐들어왔다
누가 보기에도 민망한
엉덩이며 젖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광고전단지들이 골목길에 뿌려진 것이다

실낙원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간다
한눈을 팔면
등교길 동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었다

영원한 봄이 없는 줄 알지만
싸구려 매음굴에 우글거리는 음습한 욕정들을
저 동산으로 옮겨서
진달래꽃이나 철쭉꽃으로
벌겋게 피워봤으면…… 

 

8.그림자

 
등에 펜이 꽂힌 채
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물병좌 저쪽 무변(無邊)에
물안개처럼 일어선 그림자가 구부정하게
고개 돌려 나를 굽어볼 때
등 구부리고 밤의
백지 위에
뭔가를 뿜어내던 나도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본다.
큰 밤을 초라한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은 아닌지,
앙상한 손으로
백지 위에
오늘은 이렇게 쓴다,
등에 쟁기 박힌 하늘소가
별밭을 갈아엎는다, 라고.

 

9.흔   적

 

맑은 하늘에 비행기구름 두 줄

생겨났다 이내 사라진다.

'저 흔적을 남기려고 제트비행기가 날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믄요'

'비행기구름은 오래 가지 않나 보죠?'

'그러믄요. 그림자 얹는 하늘이니까요'

잠시 하늘 보던 시인과 농부는 다시 밭일을 한다.

호미 끝에 대가리 찍힌 지렁이가

갈 생각을 않고 몸을 뒤틀고 있다.

죄 없기가 이처럼 힘들다.

콩밭의 모기들이

대낮인데 목덜미를 쏘아댄다.

敵 없기가 이렇게 힘들다.

'아무하고나 싸우면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그러믄요, 헛것과 싸워도 흔적은 남지요'

 

10.가락동 수산물 시장

상자들거대한 내장을 메꾸기 위해트럭들이 온다
밤 열시 희디흰 상자마다 시체들이다
비린내는 코를 찌른다
거대한 내장의 냄새는 이런 것일까
물고기의 썩은 내장으로 뒤덮인 하수도의 악취가이런 것일까
바다에서 트럭들이 몰려온다
장의차 같은 트럭들이썩기 전에 썩기 전에 싱싱한 시체를 팔겠다고 얼음투성이 상자들을 싣고 온다
저것은 우럭 상자저것은 오징어 상자저 톱밥 상자는게들이 잔뜩 들어 있다
어떤 도살장에도 이렇게 활발한 칼놀림은 없다밤에도 칼들이힘찬 지느러미처럼 움직인다
거대한 인간의 내장을 메꾸기 위해장어 껍질 벗기기수조에 붉은 고무통에
장어들이 국수처럼 수북하다
가죽치마를 두른 남자는 칼을 들고 장어를 한 마리씩 도마 위에 솟은 못 앞으로 데려가서 대가리를 못에 박고긴 껍질을 잡아당겨 홀딱 벗긴다
그래도 두피는 붙어 있다
벗겨진 몸은 빨개도 못에 층층이 꿰이는 대가리들은 눈을 뜬 채 검게 번들거린다
살점은 알뜰하게 도려내진다
남는 것은피 흘리는 대가리와 기다란 뼈장어의 십자가에는 오직 높이 솟은 못 하나와 대가리와 긴 뼈가 있을 뿐이다
보리새우수염이 긴 보리새우들은 꼬부랑 할아버지마냥 죽어서 좌판 위에 나란히 모로 줄을 맞춰 누워 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보리새우는 등이 굽은 채고무통 얕은 물 속에서 숨쉰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머뭇거리는 새우의 발걸음으로 앞으로 한 발, 뒤로 두 발,혹은 제자리걸음,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는 누렇게 익었을까, 보리새우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쯤바다 밑의 보리들은 물결칠까,이삭이 패었을까, 멍게 멍게는 가락동이 어딘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바다 밑 단풍철에 붉게 물든 주먹처럼 주먹처럼 주먹밥처럼 멍게는 있다
멍게는 해삼보다 헐값인 존재다 존재?가락동 시장에 무슨 존재가 있단 말인가

 
11.그로테스크 : 최승호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내장까지 다 얼어붙은 채 동사(凍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얼어죽기는커녕 눈보라가 칠 때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몸에 설편(雪片)들이 들러붙어 나를 더 뚱보로 만들고 있었다.

옥상 위 뚱보의 고독, 그렇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고독이 빙하기에 있었다. 내려다보면 거리는 텅 빈 백색 동굴처럼 고요했다.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것만 같은 적막의 거리. 소음도 소란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개 한 마리 없었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빌딩 옥상 위에서 허구헌 날 망원경도 설안경(雪眼鏡)도 없이 얼음과 눈에 파묻힌 문명의 폐허를 지겹도록 지켜보는 것, 별로 살아남고 싶지도 않았지만 산 자의 몫은 이것이다.

시간은 얼음과 더불어 굳어버린 것일까. 옥상에서 바라볼 때 적어도 인간적인 시간은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변화를 몰고 올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거는 얼음으로 굳어진 현재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것도 없고 흘러오는 것도 없이 모든 사물들이 굳어 머무는 세상의 한 꼭대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종말의 현장 검증에 필요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계속 이렇게 소금 기둥처럼 얼어붙은 채 결빙된 선과 면과 굳어버린 각도와 구도들을 한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내가 화가였다면 이 장엄한 설경(雪景)을 거의 흰 물감만으로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능 있는 화가였다해도 지금은 그림 그릴 심정도 아니고 붓 하나 없다. 물감도 없고 관객도 없고 뭐든지 없다.

사정이 그렇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진종일 눈보라가 쳤다. 이미 지워버린 세상을 완벽하게 뭉개버리겠다는 기세로 유리조각 같은 눈발들이 끝없이 날아왔다. 하늘도 땅도 없고 오직 눈보라만 보였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 왠지 불안했다. 밑이 보이지 않으니까 추락할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 빌딩이 붕괴되기를……현기증 속에서 그런 자살 같은 생각을 했다. 왜 나만 혼자 죽지도 못하고 빙하기에 불멸의 존재인 양 남아 있으란 법이 있는가. 이건 끔찍한 형벌이다. 옥상은 나의 감옥이고.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물론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존재의 이유, 그럴듯한 말이다. 똥주머니가 대가리 안에 들어 있는 문어처럼, 이유는 대가리 안에서 만들어져 문어발처럼 너희들을 움직였다. 너희들은 이제 다 얼어죽었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는 나 하나만의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소금기둥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굳어 있는 나에게 사실 이유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없는 게 낫다. 생각은 그렇지만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바로 이 점이 문어와 나의 차이인 듯하다. 문어는 존재의 이유를 몰라도 움직이지만 나는 움직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 나도 두족류로 태어나볼걸 그랬다. 대가리에 발이 달려 결국 가슴이 생략된 두족류 말이다.

밤이다. 보름달이 광활한 얼음도시를 비추며 떠오른다. 텅 빈 건물마다 들어찬 어둠, 이제는 최후의 그 늙은 유령도 어디서 얼어죽은 것 같다. 날마다 교회 지붕에 항아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빙하기의 유령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오래 방황하지 말고 용단을 내려 제 목을 끊는 순간 얼굴을 집어 던져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게해야 미혹에서 깨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훌륭한 충고 같다. 누구에게 충고해 본 적은 없지만 기억해 둘만한 말을 모처럼 하는 것같다.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가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2.뙤약볕 : 최승호

맑은 날엔 자갈이 내 뼈이다.
흐린 날엔 내 피가
폐수인지 녹물인지 놀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개미들이 내 발톱마냥 걷고 있다.

어느 날 몸뚱이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눈부시다.

13.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4. 나는 숨을 쉰다 : 최승호

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때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 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와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함께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러
갈아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기침을 하면서
숨은 ㅡ 쉬지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을 쉴것이다.

15.밤의 다리 : 최승호

그는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치 이승도 저승도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다리 : 벅찬 고통에 지쳐 찾아온 사람들에게
행복의 얼굴로 물귀신들이 유혹하는 곳
다리 : 흰뱀 같은 수은등이 허공에 목을 늘이고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속삭이면 물고기 밥이 된 시체가 떠오르는 곳

죽음에의 의지는 늘
큰형님 뻘인 삶에의 의지가 꾸짖고 달래주기 바란다
이승도 저승도 둘 다
두려움 없이 맞서고 맞이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게 철들 때까지

16.터벅터벅 걸어갔던 길 : 최승호

누런 먼지의 회오리 일으키며
대한통운 트럭이 달려오고
비키느라 뒤뚱거리며 뛰던 닭들이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었다

저 길든 날짐승들이 하늘 나는 법을 되찾고
뭘 잡아 먹으려고만 날개치는 새가 아니라
더러는 드넓게 높이 나는 즐거움 누리려고 날아오르듯
나 자유로운 날

하지만 나 역시 뒤뚱거리며 뛰는 불안한 날들을 살고 있었다
사육되면서 도살의 날을 향해 다가간다고
무력감으로 우울이 뚱뚱해져 간다고
중얼대면서 터벅터벅
긴 가문 날 뙤약볕 속을 걷고 있었다

문득
주황색 대한통운 트럭 위에 덜컹대며
짐짝들처럼 코뚜레 꿴 황소들처럼 실려갔던 날들의
늙은 예비군의 비애가 스쳐가고
다시 터벅거리며 산을 돌아 산길 가면 마을 가까이

먼지 쓴 꽃들이 길섶을 따라 피어 있었다
길 한복판을 비켜서
비켜서 사는 비애로 얼룩진 여린 마음씨들과도 같이
꽃들은 길섶을 따라 피어 있었다

17. 깊은 밤 : 최승호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면 방안은 어둠
들여다볼 수 없고 붙잡을 데 없는 텅 빈 칠흑의 어둠
나는 텅 빈 공간을 떠내려가는 지구인이다
대한국민이다
내가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다
결실이 아니라
악몽을 정리하는 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당신 사람이요 깻망아지요
배를 깔고 엎드린 나에게 흐린 목소리가 묻는다
몇 시나 되었을까
베개 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칠흑의 어둠 구석 야광시계의 둥근 유리알 속에서
푸른 열두 개의 숫자들이
일그러진 애벌레들 모양 귀기 서린 빛을 뿜는다
당신 사람이요 넙치요
나는 지옥이 어딘지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여
북어처럼 힘 못 쓰는 인간들이
북어 대가리처럼 입을 찢어질 듯이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질러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인간들이
쇠망치에 얻어맞은 못대가리처럼
찌든 내 큰 골로는 모르겠다
새끼줄에 엮인 무잎들이 부스럭거린다
베개 속의 왕겨들이 부스럭거린다
왜 이렇게 밤은
영영 날이 새지 않을 것처럼
길게 계속되는 것일까

18. 무인칭의 죽음 : 최승호

나에게서 인간이란 이름이
떨어져 나간 지 이미 오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흩어지면 여럿이고
뭉쳐져 있어 하나인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난 널 해치지 않았는데
왜 날 이렇게 똥덩이같이
만들어놨어, 그러고도 넌 모자라
자꾸 내 몸을 휘젓고 있지
조금씩 떠밀려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가는
변기의 생,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19.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20. 자동판매기/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21.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22.세속도시의 즐거움·2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23.멍게/최승호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깊은 존재인가?

 

바다에서 온 지우개 같은 멍게

멍게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


소리를 내면 벌써 입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멍.

 

 24.텔레비전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넘어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나와
붉은 강물에 뛰어들었네
불멸을 향한 절규들,
울음 울던 말매미들이 사라지고
단풍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개울가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25.고비/최승호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나에겐 아무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나는 늘 삼매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의 혀가 있었다 해도 침묵했을 것이다

 

모래들이 흘러 나오는 유방

붕괴된 궁둥이에서 흩어지는 돌 조각들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죽였다고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양들 수

천 마리 낙타 수백 마리가 내 품 안에서 죽어가도 나는 그저 무

심, 내가 고비였다면 나는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무심과 무

자비로 일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비도 아니고 돌도 아니

 

붉은 해가 훨훨 솟아오른다

마치 박제처럼 건조한 밤을 불사르듯이

사막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바늘없는 텅 빈 시계처럼 돌아가는 사막의 하루.

 

 26.입적/최승호

 

꽃이 없으면 어찌 하느님이 피어날 수 있으며

새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님이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무들을 믿고 물고기들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 사막에서

하나님은 그저 입적入寂해 있을 뿐이다

거친 모래

태양에 그을은 돌들

십자가도 없다 교회도 없다 구원도 없다

예수는 아마 이런 곳에서

홀로 영혼의 고비들을 넘겼으리라

 

 27.그림자/ 최승호

 

개울에서 발을 씻는데 

잔고기들이 몰려와

발의 때를 먹으려고 덤벼든다

떠내려가던 때를 입에 물고

서로 경쟁하는 놈들도 있다

내가 잠시

더러운 거인 같다

물 아래 너펄거리는

희미한 그림자 본다

그 너덜너덜한 그림자 속에서도

잔고기들이 천연스럽게 헤엄친다

어서 딴 데로 가라고 발을 흔들어도

손으로 물을 끼얹어도 잔고기들은

물러났다가 다시 온다

 

 28.무서운 굴비/최승호 

 
 나는 왜 굴비를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석쇠 위에 구워 먹거나 찌개 끓여도
얌전히 있는
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굴비를
 
굴비는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조기라 한다
혹은 건석어(乾石魚)

굴비, 나의 적(敵), 나의 반역(反逆), 나의 비굴
비굴한 삶은 통째로
굴비를 닮아간다
그물을 뒤집어 쓰고 퍼덕이다가
결국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굴비를
나는 왜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29.거울/최승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鑄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30.담쟁이덩굴 / 최승호

 

허공이

드높은 담이었다면

담쟁이 덩굴들은 더듬더듬 기어 올라 가다가

허공을 훌쩍 넘어 갔을 것이다

 

허공 너머에

또 무슨 알 수 없는 담이 겹겹이 치솟아 있는지 모르겠으나

넘어가고 넘어간 뒤에도 무수한 덩굴손들은

끝없이 뻗어 나가고 힘차게 뻗어나가지 않았을까

 

참으로 질긴 담쟁이 덩굴이라면

담쟁이덩굴의 근성으로

허공이 바다 밑으로 주저 앉는다 해도 기어 오르고

줄기가 토막 다 해도 거대한 낙지발처럼 꿈틀꿑틀 뻗어 나갔을 것이다

 

 31.오동나무 /최승호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虛)란 실(實)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虛의 정신으로 꽉 메워진
텅 빈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앗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 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 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32.구름들 /최승호

 

구름에 걸려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덧없이 죽여 놓고
구름들이 조용히 여름 대낮을 흘러간다
보라! 큰 감자 모양의 구름
어떤 구름은 상어를 닮았다

구름은 넘어지는 법이 없다
넘어진 사람들을 넘어서
구름들이 낮과 밤을 흘러가고
남대문 시장에 북적거리던 인파가
오늘은 동대문시장에서 씨끌벅적 출렁거린다

옷,옷들,옷가게의 점원들
하나의 몸뚱이를 휘감는 천들이 있고
흘러가는 구름 아래 수많은 옷들이 있다
벌거벗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구름을 걸친 채 누워 있는
알몸뚱이를 보았는가
이 세상 옷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는 값이 비싸다
어느 여행객에게 수의를 입히고
먼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으나
느린 장의차에서는 벌써
구름 냄새가 피어오른다

 

 33.네모를 향하여/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34.선술집 /최승호

돈 버는 일도 禪이어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이 없다.

본래 영원한 가난이여,
무일푼인 노을과 저녁 어스름이 찾아와도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이
그 아름다운 빈털터리들의 장엄 앞에서
술을 마시노니

괴로움의 증류여,
나의 선술집인 수평선이여,
뭉게 구름같은 술꾼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라.

 

 35.뼈의 음악/ 최승호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36.발효/최승호  

 

부패해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37.쌍봉낙타 / 최승호

 

 만약 내가 야생 쌍봉낙타였다면, 그리고 수컷이었다면, 혼자 사막을 떠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그게 그거인 사막에서 나는 방황이라는 말을 모르는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별로 씹을 것이 없이도 우물우물 되새김빌을 하면서 막막한 시간을 되씹어야 했을 것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사막에서, 가장 높은 것은 나의 머리, 커다란 나의 두 눈은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공기에 둘러싸여 텅 비어 있는 먼 곳을 날마다 바라보지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면 돌, 모래, 마른 풀, 그리고 고개를 들면 광활한 無와 다름없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늘어뜨리고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언젠가 내가 쏟아놓은 똥무더기가 바짝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갑자기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철이면 털이 빠져 너덜너덜한 내 모습은 거의 걸레나 다름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나의 암갈색 털들, 그 묵은 털들은 다 바람이 데려갈 털들이다. 해마다 털갈이를 거듭하다 보면, 그리고 고독에도 익숙해져서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채 우물우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많이 늙어 있다. 사막이 늙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땅이기 때문이다. 나의 앙상한 뼈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을 땅, 죽은 땅은 한낮이면 무척 덥다. 그 더위 속에서 오늘 나는 고개를 들고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는 늙은 쌍봉낙타를 나 역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38.대설주위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39.뭉게구름 -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40.비둘기 벽화/최승호

 

번쩍거리던 고드름들이 사라졌다. 그 대신, 건물 벽에는, 오래 가는 것,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길쭉하게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끈끈하게 흘러내리다 굳어버리는 카오스 같은 것. 똥의 힘은 그렇다. 무질서하게, 자연스러운 벽화를 만들어낸다. 겨울날의 비둘기들이, 벽 틈에 웅크린 하늘거지들처럼 볕을 쬐면서, 아무 뜻도 없이 배설물로 그려나간 희멀건 벽화를, 봄날의 절벽 같은 베란다에서, 나는 바라본다. 도회지의 비둘기는 鳥類가 아니라, 시궁쥐가 속한 쥐과 동물에 가깝다. 비둘기들은 이제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길바닥의 찌꺼기를 주워먹다가, 발가락이 뭉개져도, 아스팔트에서 날개가 쓰레기로 변할지라도.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 최승호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새홀리기 꿩 깝작도요 멧비둘기 집비둘기 소쩍새 물총새 청딱다구리 가막딱다구리 오색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노랑할미새 알락할미새 직박구리 때까치 물가마귀 딱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오목눈이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멧새 쑥새 노랑턱멧새 어치 까치 큰부리까마귀 자라 아무르장지뱀 도마뱀 누룩뱀 무자치 구렁이 능구렁이 유혈목이 대륙유혈목이 살모사 쇠살모사 까치살모사 산줄점팔랑나비 뿔나비 푸른부전나비 암먹부전나비 먹부전나비 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산제비나비 긴꼬리제비나비 호랑나비 꼬리명주나비 대만흰나비 큰줄흰나비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남방노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굴뚝나비 물결나비 노랑누에나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두줄물결자나방 포플라잎말이명나방 뜰길앞잡이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빨간먼지벌레 노랑선두리먼지벌레 오이잎벌레 쑥잎벌레 열점박이잎벌레 풀색꽃무지 목하늘소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장수허리노린재 깜보라노린재 얼룩대장노린재 큰광대노린재 광대노린재 참나무노린재 끝검은말매미충 늦털매미 말매미 애매미 호박벌 나나니 검은물잠자리 물잠자리 날개띠좀잠자리 깃동잠자리 밀잠자리 묵은실잠자리 명주잠자리 콩중이 벼메뚜기 왕귀뚜라미 모메뚜기 실베짱이 참밑들이 산느타리 잣버섯 노란갓벚꽃버섯 넓은솔버섯 애기낙엽버섯 흰삿갓갈때기버섯 자주졸각버섯 밀버섯 밤버섯 뽕나무버섯 그늘버섯 붉은꼭지버섯 못버섯 알광대버섯 암회색광대버섯아재비 독우산광대버섯 흰주름갓버섯 갈색먹물버섯 노랑먹물버섯 족제비눈물버섯 검은비늘버섯 비늘버섯 다색끈적버섯 젤리귀버섯 황소비단그물버섯 붉은비단그물버섯 접시껄껄이그물버섯 황금무당버섯 젖버섯아재비 새털젖버섯 잿빛젖버섯 노루궁뎅이 담자고약버섯 분홍껍질고약버섯 바늘버섯 갈색꽃구름버섯 구름버섯 옷솔버섯 아까시재목버섯 치마버섯 기와소나무비늘버섯 해면버섯 털목이 아교뿔버섯 붉은목이 먼지버섯 말불버섯 좀말불버섯 애기방귀버섯 작은주발버섯 긴대주발버섯 녹청균 콩버섯 콩꼬투리버섯 다형콩꼬투리버섯 구실사리 개부처손 물쇠뜨기 속새 산고사리삼 꿩고비 고비 황고사리 고사리 고비고사리 부싯깃고사리 청부싯깃고사리 개면마 만주우드풀 십자고사리 낚시고사리 관중 바위족제비고사리 뱀고사리 개고사리 거미고사리 일엽초 은행나무 일본잎갈나무 잣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향나무 가래 말즘 실말 조릿대 실새풀 숲개밀 포아풀 갈대 용수염풀 그령 쥐꼬리새 잔디 강아지풀 금강아지풀 바랭이 주름조개풀 기장대풀 띠 큰기름새 조개풀 개솔새 솔새 옥수수 대사초 길뚝사초 산거울 그늘사초 넓은잎천남성 천남성 닭의장풀 꿩의밥 골풀 주걱비비추 큰원추리 애기원추리 산달래 산부추 참산부추 달래 털중나리 참나리 비짜루 각시둥굴레 둥글레 층층둥굴레 진화정 풀솜대 애기나리 선밀나물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마 도꼬로마 국화마 각시붓꽃 꽃창포 붓꽃 범부채 개불알꽃 병아리난초 제비난초 은대난초 타래난초 옥잠난초 홀아비꽃대 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이태리포플러 왕버들 분버들 버드나무 능수버들 호랑버들 키버들 가래나무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개박달나무 물박달나무 오리나무 까치박달 서어나무 난티잎개암나무 개암나무 참개암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참느릅나무 비술나무 왕느릅나무 당느릅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산팽나무 검팽나무 산뽕나무 뽕나무 혹쐐기풀 모시물통이 개모시풀 꼬리겨우살이 겨우살이 쥐방울덩굴 족도리 애기수영 수영 개대황 참소리쟁이 소리쟁이 왜개싱아 이삭여뀌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고마리 미꾸리낚시 여뀌 바보여뀌 기생여뀌 개여뀌 마디풀 취명아주 명아주 댑싸리 자리공 석류풀 쇠비름 털좀나도나물 쇠별꽃 별꽃 벼룩나물 술패랭이꽃 대나물 동자꽃 장구채 종덩굴 요강나물 자주조희풀 개버무리 큰꽃으아리 외대으아리 으아리 참으아리 할미밀망 사위질빵 동강할미꽃 할미꽃 노루귀 미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연잎꿩의다리 큰제비고깔 흰진범 진범 백부자 진돌쩌귀 노루삼 승마 촛대승마 눈빛승마 동의나물 으름 꿩의다리아재비 댕댕이덩굴 함박꽃나무 오미자 생강나무 애기똥풀 피나물 금낭화 산괴불주머니 무 갓 배추 유채 황새냉이 왜갓냉이 미나리냉이 속속이풀 꽃다지 장대나물 바위솔 세잎꿩의비름 꿩의비름 기린초 바위채송화 노루오줌 돌단풍 바위떡풀 괭이눈 물매화 말발도리 물참대 매화말발도리 고광나무 산수국 까마귀밥나무 가침박달 쉬땅나무 조팝나무 떡조팝나무 당조팝나무 꼬리조팝나무 갈기조팝나무 참조팝나무 국수나무 뱀딸기 가락지나물 양지꽃 민눈양지꽃 세잎양지꽃 물양지꽃 딱지꽃 큰뱀무 뱀무 산딸기 곰딸기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줄딸기 터리풀 오이풀 긴오이풀 짚신나물 찔레꽃 생열귀나무 개살구나무 귀룽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산사나무 아광나무 야광나무 아그배나무 산돌배나무 마가목 차풀 고삼 다릅나무 조록싸리 참싸리 싸리 큰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갈고리 갈퀴나물 네잎갈퀴 광릉갈퀴 노랑갈퀴 나비나물 활량나물 칡 돌콩 콩 새콩 낭아초 땅비싸리 아까시나무 벌노랑이 족제비싸리 황기 붉은토끼풀 토끼풀 전동싸리 활나물 쥐손이풀 이질풀 괭이밥 병아리풀 산초나무 소태나무 광대싸리 흰대극 회양목 개옻나무 화살나무 참회나무 버들회나무 참빗살나무 푼지나무(청다래넌출) 노박덩굴 미역줄나무 고추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당단풍 복자기 노랑물봉선화 물봉선 갈매나무 짝자래나무 왕머루 새머루 담쟁이덩굴 피나무(달피나무) 연밥피나무 뽕잎피나무 찰피나무 수박풀 수까치깨 개다래 쥐다래 다래 물레나물 고추나물 남산제비꽃 태백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잔털제비꽃 고깔제비꽃 제비꽃 흰털제비꽃 알록제비꽃 뫼제비꽃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노랑제비꽃 아마풀 보리수나무 부처꽃 달맞이꽃 음나무 오갈피 두릅나무 시호 참반디 사상자 개사상자 미나리 참나물 노루참나물 개발나물 바디나물 참당귀 구릿대 신감채 강활 묏미나리 큰참나물 기름나물 어수리 산딸나무 층층나무 노루발풀 꼬리진달래 진달래 산철쭉 철쭉꽃 산앵도나무 좁쌀풀 참좁쌀풀 까치수영 큰까치수영 고욤나무 감나무 노린재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 쥐똥나무 개회나무 자주쓴풀 구슬붕이 용담 칼잎용담 박주가리 산해박 백미꽃 애기메꽃 메꽃 새삼 실새삼 지치(지초) 꽃마리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누린내풀 조개나물 황금 산골무꽃 골무꽃 참골무꽃 배초향 벌깨덩굴 개박하 꿀풀 익모초 광대수염 쉽사리 향유 꽃향유 산박하 속단 배풍등 까마중(까마종이) 독말풀 참오동 현삼 밭뚝외풀 논뚝외풀 절국대 알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나도송이풀 송이풀 파리풀 질경이 큰꼭두서니 꼭두서니 갈퀴꼭두서니 솔나물 갈퀴덩굴 개갈퀴 딱총나무 덜꿩나무 가막살나무 백당나무 병꽃나무 인동 괴불나무 각시괴불나무 올괴불나무 돌마타리 금마타리 마타리 뚝갈 쥐오줌풀 산토끼꽃 체꽃 하늘타리 노랑하늘타리 수원잔대 자주꽃방망이 잔대 초롱꽃 더덕 도라지 금불초 바위구절초 뚱딴지 담배풀 솜나물 단풍취 돼지풀 도꼬마리 골등골나물 등골나물 벌등골나물 미역취 버드쟁이나물 가새쑥부쟁이 쑥부쟁이 갯쑥부쟁이 개미취 옹굿나물 까실쑥부쟁이 참취 눈개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개망초 망초 머위 붉은서나물 쑥방망이 우산나물 톱풀 산구절초 구절초 제비쑥 더위지기 참쑥 산쑥 쑥 멸가치 진득찰 가막사리 삽주 지느러미엉겅퀴 큰엉겅퀴 엉겅퀴 지칭개 각시취 큰각시취 빗살서덜취 사창분취 당분취 구와취 톱분취 은분취 서덜취 분취 산비장이 뻐국채 큰수리취 국화수리취 수리취 절굿대 흰절굿대 조뱅이 쇠서나물 민들레 조밥나물 벋은씀바귀 벌씀바귀 씀바귀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 고들빼기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

  (1998. 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나무로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무덤에 핀 할미꽃이거나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관박쥐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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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 모음

1.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2.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3.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4.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황지우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5.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6.겨울 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7.길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8.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 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 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 꽃이 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 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 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9.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10.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욱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1.너무 오랜 기다림

황지우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12.눈 맞는 대밭에서

황지우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13.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14.늙어 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15.들녘에서

황지우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16.等雨量線 1

황지우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 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저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17.메아리를 위한 覺書

황지우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
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 소리 들릴락말락
(우리는 어느 溪谷[계곡]에 묻힐까 들릴까)
줄넘기하는 쌍무지개
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

18.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19.발작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20.붉은 우체통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21.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22.상실

황지우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草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 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2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쭬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24.雪景

황지우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부린다.

25.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26.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27.손을 씻는다

황지우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義手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28.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29.아직은 바깥이 있다

황지우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30.안부 1

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31.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32.이 문으로

황지우

이 문으로 들어가면 넓고
이 문을 나오면 좁다
이 문에는 종교성이 있다
풀잎 하나가 풀잎의
전체를 보여 준다
제자리 걸음으로
수십 킬로 먼 곳까지 다녀온다
끼니 때마다 내 밥의
1/3을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갇혀 있음으로
내 몸이 무장무장 투명해진다
새들이 내 흉곽으로 기어들어와
날개 짓는 소리가 소란하다
내려가고 싶다
유리 같은 땅

33.이 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바깥으로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릴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껏 보았을 때

빽밀러에 國道 포플라 가로수의 먼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목탄화 같은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도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여구차가 따뜻한 봄 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34.인사

황지우

개가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색종이 뿌리듯
가을 금남로 은행잎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더니
뒤에서 빵빵거린다
뒤돌아보며 은행나무를 가르키자
영업용 택시 기사도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웃는다
차라리 모르는 얼굴에는 인간의 光背가 있다

집에 도착해서도 프라이드 차창에 붙어 있는
금빛 스티커 오늘은 하느님이 색종이 뿌려 주시는
황금나무 밑을 지나온 거다

35.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36.재앙스런 사랑

황지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37.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황지우

내가 먼저 待接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38.출가하는 새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라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

39.화광동진(和光同塵)

황지우

이태리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 하자!
눈알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悲劇詩人)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 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40.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황지우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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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시 모음 89편

《1》봄비 

강계순

참혹하게 쓰러졌던 나뭇잎 위에 
색색이 천을 놓아 
하나씩 하나씩 
궁핍의 겨울을 꿰매는 손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만유의 어깨 위에 내려 
빈혈의 혈관을 채워 주고 
서릿발 같던 하늘 
비단 안개로 닦아 내어 

천지에는 
자근자근 땅 밟으며 일어서는 
병후의 시력.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천년을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혼 불러내어 
일으켜 세워 주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보는 
약손. 

《2》봄비 마중 

강사랑

예쁜 임이 오신다기에
노란 우산 하나 들고 봄 마중 갑니다.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풍경을 한 아름 안고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어오십니다.

봄 바구니에 쑥과 냉이를 가득 담고
해맑은 미소 한가득 담아 오십니다.

진달래와 개나리를 닮아
가녀린 몸이지만
오시는 임 반기려 커다란 목련을 피웠습니다.

노란 우산 살며시 감추고
먼 길 오신임을 온몸으로 맞이하면
설렘에 순간의 행복은 기쁨의 눈물 되어
소리없이 대지의 깊은 곳까지 적십니다.

내일은 온 세상에 봄꽃이 만발할 것 같습니다. 

《3》봄비가 되어 

강선옥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대지를 적시고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살포시 새벽을 거두며
상큼한 아침을 깨웁니다.

소곤소곤 내리는 봄비는
온 세상의 산천초목을 깨우고
어머니의 손길처럼 어루만집니다.

새벽을 깨우는 봄비의 속삭임처럼
늘 잔잔한 미소와 같이
사랑의 호수에 물을 담아 
흐르는 시냇물이 되어
깊고, 넓게,
긴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행복의 천사가 되어 
봄비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4》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강해산

오늘도 허전한 가슴 채우려
봄비 내리는 도시 속으로 나들일 간다.
가끔 복잡한 소음 속에 묻혀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싫지만은 않다.
모든 걸 벗어 던지고 뛰어든 불나방처럼
스스로 타서 재가 될 운명인 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모를리 없지만
오늘은 당당한 모습으로 활보하고 싶다.
언제부턴가 봄비가 싫어져 
일부러 안으로 안으로만 숨어 지냈는데
이렇게 비 내리는 감상에 젖어 
스스로 외로움을 떨치려 거릴 나선다.
시끄러운 음악과 걸 맞는 몸짓으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마음의 가면을 쓴다.
아, 돌아서면 사라지는 환상 속으로
신기루 속 엘도라도를 향해 걸어간다.
살얼음 위를 걷는 위태로운 모습으로……. 

《5》새벽을 걷는 봄비

고은영

절망을 맛보지 않은 자는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
한 때 나의 절망은 위험 수위를 넘었고
미치광이처럼 광폭하게 내게로 달려들었다

이 도봉산 언저리에
산 안개 뿌연 장막의 심연으로
봄 비가 추적추적 밤을 적신다 
몇 개의 가로등만 구획을 가르고
점점이 고독한 빛들은 흩어진 채 출렁인다

아, 빗줄기 
그리움에 흠씬 젖은 리듬은 
어김없이 새벽 침묵을 깨트리고
피를 토하듯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하고 있다

《6》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7》당신은 봄비 같은 내 사랑입니다

공재룡

황사 같은 먼지 얼룩진 세월 속에
그저 옷깃 스친 인연이란 이유하나
눈비가 오는 날도 따스한 체온으로
나에게 등을 맞대어 준 당신입니다. 

남처럼 가진 것도 잘난 것 없는 나
힘겨워 인생 고갯길밖에 없었는데
늘 내 곁에 그림자 같이 함께해 준
눈물겹도록 고마운 내 사랑입니다. 

천둥 치는 날에 곁에 남아 주었고 
반평생 지나 24평 아파트 장만에
세상 다 얻은 듯 천사의 미소 주는
당신은 진정 봄비 같은 사랑입니다.

《8》봄비가 가슴으로 내립니다

곽승란

꽃잎들이 서러움이라도
토해 내는 듯
비가 내립니다.

가뭄으로 여기 저기 
뜨거운 악마의 손길을
저지하는 듯 비가 내립니다

방긋 방긋 새순들의
노래가 들리 듯 
조용히 비가 내립니다.

보낸 아쉬움이 너무도 커서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버린 듯 
봄비가 하염없이 
내 가슴에 내립니다

나의 마음은
햇살처럼 고운 듯 비가 내리지만 
가슴 한켠에 그리움으로 내립니다.

《9》봄비에게 길을 묻다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람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10》봄비에 젖은

길상호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려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11》봄비 

김덕성

봄비가 내린다 

봄비는 
결코 눈물이 아닌 
사랑의 온정 

희망을 잃고 
우러르는 나무에게 
하늘이 내려 주는 
생명수 

사랑을 안고 
활짝 웃는 나무 
두 팔 벌려 
감사하고

《12》봄비

김병호

아직 엄마의 젖도 먹을
힘도 없을 텐데
눈도 옳게 뜨지 못했는데
몹쓸 비가 간난아기의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구나

빗소리에 놀란 간난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아직도 남은 추위에
감기가 걸리지 않을까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
깊은 잠이 든다

봄비는 마른 가지에 붙은
겨울을 녹이는 듯 
아랑곳없이 봄을 재촉하고
꽉 다문 땅 끝 입술을 적시며 
생동의 발걸음이 찬란하다.

《13》봄비 

김석전

비가 그쳤네
햇빛이 반짝어리네
세수한 산과 들이
수군거리오
"어이 시원하구려."
"어이 시원하구려."

《14》봄비 

김세영

간밤 빚은 은하의 눈물 
촉촉이 젖은 봄 물 머금고
초록빛 싱그러움 그렁그렁

옹골차게 돋아나다
푸른 물 주르르 흘릴 것 같은
봄 눈망울 초롱초롱

마치 아기의 눈망울 같아
아니면 맑은 호수 같아
'풍덩'하고 빠져도 좋을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

《15》봄비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16》봄비 

김영준 

투신하여 내 몸을 꽂고 나면 
어느 만큼 지나 
그 자리, 구멍마다 
제 이름 달고 투항하는 풀잎 
그렇게 온갖 것들이 일어서고 난 후 
드디어 그 눈짓 속에 파묻히는 
나무 

3월 지나며 
어디선가 잦은 꿈들이 뒤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꿈속에서 
많은 이름들이 가방을 열고 나온다 

《17》봄비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18》봄비 

김윤배

세상이 빗방울 위에 놓인다

겨우내 마른 소리를 내며 떠나려던 나무들이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발등에 누워 젖고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내, 지난 겨울이 저랬?가
숲이 빗방울을 조용히 내려서고
오랜 잠 괴로워했던 산갈대
툭툭 마디를 꺾는다
내, 지난 봄이 저랬던가
저처럼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얹혀
스거운 나이를 버리면
내 굽은 그림자가 끌고 온
메마른 마음 햇솜처럼 부풀어
꽃망울 벙그는 세상을
혼자는 갈 수 있으리
내 비록 네 마음 속에
싹 틔울 꽃씨 하나 묻어두지 못한
붙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19》비옷을 빌려입고 

김종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 년 전
善竹橋가 있던
비 내리던
開城

호수돈 女高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려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20》봄비가 내립니다

김지순

상큼한 미소로 다가와 
유혹하던 그대 있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처럼 
한없이 흔들어 놓은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잎 뾰족하게 내밀며 
제가 봄이에요라고 말하는 그대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좋아하고 
잿빛 하늘을 좋아하고 

신선한 바람을 좋아하는 
그대가 아닌 내가 오늘은 있습니다 

흐린 하늘 너무도 예쁜데 
가슴은 텅 빈 벌판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비가 내리는 걸 아는 걸까요 
지금 봄비가 내리고 있네요

《21》봄비 여자 

김찬일 

여간 걸어도 줄지 않을 것 같은 
들길 걷다 봄비 만났네 
내리는 빗줄기에 가려, 먼 들판은 
풍경의 잔해로 눈꺼풀에 스며들고 
들판 자욱이 봄 안개로 피어있던 
야산의 진달래만, 허전한 눈망울 채웠네. 
아직 찬비였지만 봄비에 젖은 진달래꽃 
가슴에 붉은 아픔으로 떨어지고 
봄 아지랑이에 숨어 
지금까지 겨울 꿈 키워 온 여자 마을 
봄비 따라 흘러가 보이지 않았네 
아 아 겨울이면 잉잉거리는 바람으로 나타나 
빈 나무가지 흔들던 여자 
흰 눈 내리면 눈 위에 이름 모를 새 
발자국으로 찍혀 있던 여자 
그 오광대 각시 탈 망상같던 여자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키워 온 
겨울 꿈 꺾어 놓고, 봄비의 여자 
그 몸 벗어 놓고 봄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네 

《22》아내의 봄비 

김해화

순천 웃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 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뒤돌아
생선 오천원 조갯살 오천원
도사리 배추 천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 가다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원에 떨이미 해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23》봄비 그친 뒤 

남호섭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 안개다. 

산 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24》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5》봄비 오는 밤에

도지현

자작자작 
빗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풍기는 기름 냄새
가까이 다가갈수록 
빗소리는 더 거세지고
노릇노릇 지져진 부추부침개
시절을 안주 삼는
서민들의 애환이 
하루의 곡예를 잊기 위해
눈물을 털어 넣고 한을 토한다
그렇게라도해야지만
다시 내일을 일으킬 수 있음이니

자작자작 부침개 부치는 소리
끝없는 내레이션이 되어 흐르는데

《26》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 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27》봄비의 언어

박광호 

봄비엔
감미로운 삶의 진실과
사랑의 언어를 품고 있다.

음지에 잔설을 녹여
대지에 온기를 불어넣고
산 너울 계곡마다 봄 안개를 피우며 
침묵의 겨울 강을 건너 온
나목들의 애틋한 잎눈을 보듬는다.

새 삶의 봄 노래를 들려주며
움츠린 가슴에 희망을 안기는
봄비는
예외 없이 인간의 가슴에도
싹을 틔어준다.

남녘의 봄바람 불어오고
봄볕이 대지에 내려앉을 때
온 누리엔 푸름의 꿈으로
펼쳐 질 것이다.

《28》봄비소리

박금란

타이르듯 내리는 봄비소리
엄마가 불러준
‘......망치를 들고......’ 낮은 자장가가
되살아 돌아오니

구겨진 사랑 곱게 펴
차곡차곡 마른빨래 개듯
마음에 담네

민들레 귀 세우고
봄비 음악 담아
쫑긋 노란 꽃잎
우주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꿈을 꾸네

산목련 꽃잎
빗줄기를 젖줄기로
환한 세상 열어가는 꿈
나누어주니
전쟁고아 장수가 되어
나라를 구하고

북녘에서 피어난
남북을 잇는 무지개 꿈
봄비가 되어

자본주의에 불구가 되어
주저앉은 노숙자를
말갛게 씻겨주니

북녘세상 남녘세상 
하나 되는 세상
4.16리본 개나리 꽃잎으로 주르르 이어져
휴전선 허무네

가시철망도 녹이는
민족의 봄비는
우리 마음속에 담겨
평화의 노래 찰랑이네

우주의 노래 민족의 노래
날선 제국주의도
스르르 잠들게 하네
영원히 잠들게 하네 

《29》봄비

박동수

차분히 속옷 적시고야
꽁꽁 얼었던 짙은 그리움을
눈물이듯 내리는 봄비에
초록빛 뿜어내고
가슴속에 묻어둔 진한 사랑 
꽃망울로 밀어 낸다

질퍽이는 길을
맨발로 추적추적 걸어오는
그대 발걸음소리
수많은 색색으로 피워낸
꽃잎을 모아

봄비 오는 길 위에
꽃길을 만들고
차마 수줍어도 
봄비 따라 오는 님
오래오래 기다리리라

《30》봄비 내리면 

박소향

봄비 
자주자주 내리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기억의 줄기들이 
꽃을 타고 
내릴텐데 
어쩌나요. 
꽃은 
피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피라 할 수도 없는 
심술굳은 
 
그리움을요 

《31》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데서 우레 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32》봄비를 맞으며 

박영웅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갑자기 그립다.

작은 풀꽂 한 송이도
노래가 되는 벌판에 서면

비로소 어깨 위에 쌓인
먼지의 무게가 느껴지고
흔들리는 시간을 실감한다.

초록빛 산허리를 돌아가는 안개여
가슴에 맺히는 빗방울이여

잊고 살아왔던 별 하나
몹시 그립다.

《33》그 봄비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34》듣기 좋은 봄비 소리 

박종영

저 하늘 높은 구름이 
비 내리는 기운을 잃었던가 

오랜 가뭄이 봄 나무를 바삭거리게 하고 
며칠째 안개로 마음을 훔치고 가 
치미는 울화 보채더니 
오늘은 빗 임이 속닥거리며 내린다 

어느 임의 발길을 따라 
종종 걸음걸이 비구름 머리에 이고 
서늘한 눈물을 뿌린다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고 
무수한 방울을 뭉쳐 내려보내는 
숨 가쁜 하늘의 숨소리, 

시냇물로 흐르다 
몸섞이며 일어서는 
물풍선의 포옹이 또르르 영롱하다 

기나긴 강물의 여로가 지금부터 시작인가 
물기를 입에 물고 할랑대는 새싹, 
연두빛깔이 비 갠 석양에서 곱다 

《35》봄비의 저녁

박주택

저 저무는 저녁을 보라
머뭇거림도 없이 제가 부르는 노래를 마음에 
풀어놓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봄비에
얼굴을 닦는다, 저 저무는 저녁 밖에는 
돌아가는 새들로 문들이 덜컹거리고
시간도 빛날 수 있다는 것에 비들도 자지러지게
운다, 모든 약이 처방에 불과할 때
우리 저무는 저녁에는 꽃 보러 가자
마음의 목책 안에 고요에 뿌리를 두고
한눈 파는 문들 지나 그림자 지나
혼자 있는 강 보러 가자
제 몸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은
물을 맑히며 정원으로 간다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처럼
저녁이 있다 보라,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수많은 것들은 떠나간 마음만큼
돌아오는 마음들에 불멸을 빼앗기고
배후가 어둠인 저녁은 제 몸에
노래의 봄비를 세운다

《36》봄비 

방원조

실바람 아지랭이
몰래 숨기고
언 세상 녹이려고 보슬비 와요

소곤소곤 봄 얘기
풀어 내리면
고개 내민 새싹은 세수하지요

《37》봄비 오는 날

백원기 

봄비가 보슬보슬 내려 
아침부터 차분한 마음이다 
들쑥날쑥하던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고 
선생님 들어오신 
정돈된 교실처럼 
앞을 보며 귀 기운다 

서툰 걸음 바로 걷듯 
흐린 생각 깨끗이 닦아 
내 갈 길 바로 찾고 
무릎 치며 갈 수 있길 
두 눈 감아 빗소리를 듣는다 

들판에는 새 생명이 소생하고 
이사 하는 사람 부자 된다는 
봄비 오는 희망의 아침 
마른 땅이 촉촉이 웃는다 

《38》봄비 

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아려 -ㅁ 풋이 나는, 지난 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보니, 아, 나아가보니 ㅡ
이제는 젖빛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나!
아, 안올 사람 기두르는 나의 마음!

《39》봄비 

허난설헌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제
뜬시름 못내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장 위에 지네

봄비는 보슬보슬 찬바람 숨어들제
뜬지름 못내 이겨 병풍을 기대서니
담장 위에 살구꽃 지며 갈 길 몰라 하더라

《40》봄비 닮은 그대 

서명옥 

좁다란 길목
작은 탁자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

누가 볼까
애틋한 마음 흐르는
빗물에 내 사연 띄우고

고운 인연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할 봄비 닮은 그대

《41》봄비 

선미숙

내 작은 창을 두드리며 봄이 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잊지 않고 옵니다.

지독하게 춥고 길었던 한철을 견뎌내며
오랜 기다림에 지쳐가던 나무들은
머지않아 파란 웃음으로 반기겠지요

길가에 풀잎도 가녀린 몸을 일으키며 
겨울을 털어 냅니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은 
가슴에 스민 봄을 어쩌지 못합니다.

깊게 얼었던 땅을 뚫고 
돋아나는 싹이 더욱 푸르듯
아팠던 만큼 다져진 마음에 찾아올 사랑은 
이제 철부지가 아닐 듯합니다.

눈을 뜨게 해준 아픔이 고맙습니다.
내가 버린 그 세월이 나를 키웠습니다.
원망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비와 함께 고운 임도 봄을 안고 오겠지요.

《42》봄비 내리는 날 

손병흥 

긴 침묵 어린 온통 무거워져버린 마음속에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순식간에 자리한 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봄기운 가득한 흔적들 
추억들을 불러모아 살며시 스며드는 발자국 

머뭇거리듯이 다가서 버린 그리움이란 꽃향기 
저절로 가장 멋진 푸른빛이 되어버린 이른 봄날 

촉촉해진 대지위로 새싹 돋게 하는 그 멋진 풍경 
그냥 그렇게 활짝 핀 봄 싣고 부슬부슬 내리던 날 

마냥 떠오르는 아련해진 사람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빗방울 되어 돋아난 아직도 내 안에 머물렀던 정겨움 

《43》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 소리가 들려온다
향국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 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 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물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뒤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44》봄비 

송연우 

애기 엄마 냄새가 난다 
창문에 기대어 선 별 목련나무 
꽃눈에 맺힌 빗방울 
젖꼭지처럼 물고 있다 
놀랠까 살금살금 발끝으로 건넌다 
연잎에 나부시 엎드린 
아침 이슬처럼 
다만, 맑음으로 
흙 밑의 풀싹들 
기지개 켜는 손 
일으키는 소리 
젖은 손 하나가 내 안에서 
중얼거리는 듯 
나무의 굳은 시간들 
부드러운 가위질로 잘라내며 
온 세상 
풀빛과 꽃 빛으로 솟음치게 한다

《45》봄비 

송정숙

봄비는 어머니다 
젖을 먹이듯 어루만져 
싹을 틔우고 
얼른 얼른 자라라 기도발로 
만물을 키워준다 

동전 한 닢 밭지않고 
높고 낮음 없이 
무상으로 받는 자연의 혜택 
이것만 알고있으면 
우리는 행복하고 즐겁다 

《46》봄비

신경희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창가에 흩어지는 빗방울이
당신의 소식인가 싶어서
창가에 다가섰습니다. 

맑은 빗방울 하나를 
손 위에 올려놓고
투명한 물방울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당신의 웃음이 내게 다가섰습니다. 

먼 하늘 끝에는 
당신이 있을 것 같아
눈을 들어 멀리 까지 내다보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마을에서
저 봄비를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당신도 문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음은 먼저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겠지요. 

《47》봄비 

안덕상

벌겋게 타오르는 산불 지지 누르려
너는 주룩주룩 쏟아지지만

너 달려오는 소리에 놀란 뿌리들
검은 산 빛 깨뜨리고
더 큰 불 지펴 놓고야 말겠다

마른 삭정이도 한껏 젖으며
이 밤 자고 나면
불이야, 크게 소리치며

《48》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49》봄비 내리는 저녁 

안종환 

차가운 눈물 
방울져 흐르는 
유리창을 넘어 

멀리서 
아주 멀리서부터 
낮게 깔리어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는 
저 지친 기적소리 

흐느끼며 떠나는 
그대의 마지막 
긴 한숨 소리 

《50》봄비

양광모

심장에 맞지 않아도
사랑에 빠져 버리는
천만 개의 화살

그대,
피하지 못하리

《51》봄비 

여관구

비가 가늘어서
가시 사이로
숨어 내리는 이른 아침

젊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싶은
둥치 굵은 탱자나무는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이다.

마음이 깎이어
피부마저 얇아져서
추위를 막을 수 없더니

가는 비에
튼 살 사이로
진통을 새싹으로 밀어낸다.

가시 끝 봄비에는
눈물 맛이 섞여 있다. 

《52》4월 봄비 

오보영 

들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고 

메말라진 
가슴을 

적셔주고 싶어서 
소리 없이 네 곁으로 다가왔단다 

우리 서로 
차분히 

돌아보면서 
못다 피운 초록 잎새 
돋우자구나 

《53》봄비의 서곡 

오석란 

이제 막 벙그는가 했는데
나뭇가지 아래로
하나씩 둘씩 추락하는 꽃잎들

꽃향기를 탐내던 봄비가
유리창에 무수한 보표를 그려 음표로 매달리고
지나는 바람이
슬쩍 와 타주하듯 들려주는
봄비의 서곡

젖은 대기를 뚫고 날아오르던
새 한 마리
깃털이 젖는 줄도 모르고
봄날의 파적삼아 적요를 쪼고 있다

《5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55》봄비 

오정현

엄마의 술병은 손바닥만 한 방에서
엄마가 잠들어 있는 머리맡을
오래된 술친구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술병에 봄비가 촉촉이 내릴 때면
엄마의 눈가에도 비가 내렸다.

거리를 헤매고 집으로 돌아오는 빗방울이
엄마의 술병을 채우고
꽃바람 부는 밤바다에서
술병은 꼬꾸라져 철썩거렸다.

나는 술을 따르다
확 쏟아 버렸다.

엄마의 술병은 영취산에
진달래꽃을 피우러 가고 없는데
봄비가 내린다. 

《56》봄비에 울먹이는 미소들 

유일하 

꽃눈으로 날리어 
촉촉한 대지에 뿌려진 너. 

화사했던 미소의 향연은 
샘이 난 구름이 울어서 
화가 난 바람이 울어서 
속절없이 널 허무하게 한거야! 

세상을 미워해도 그들은 몰라 
때마침 지나간 봄비를 미워해! 

넌 내년에 다시필 수 있지만 
난 다시올 수 없는 과거를 
묻을 수밖에 없어! 

다음 생에는 
너처럼 꽃으로 태어나 
벌들과 달콤한 사랑할 거야! 
그때는 너희들의 
단란한 친구가 되겠지! 
그러니 슬퍼하지 마! 

《57》봄비 

이가원

살짝이
살짝이 오세요

서두르지 말고
달려오지 말고
돌아보지도 마시고

사뿐 사뿐
사뿐히 오세요

그대 오시는 길에
예쁜 꽃잎 다칠까 봐

그대 오시는 길에
그 꽃잎 아플까 봐

그대 오실때
그 꽃잎 떨어질까 봐 

《58》봄비에 젖어 

이경옥

보슬거리며 내리는 빗방울이
내 작은 어깨 위로 흐르면
난, 그대의 가슴으로 파고들고픈
구멍 꿇린 마음이 된다
어쩌면 어제의 아픔보다
오늘의 행복함에 젖고 싶어서일까

내리는 빗방울 바라 보는 눈빛에서
그대를 더욱 생각게 하는 것은
하지 못하는 말을 품은
그대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일까
어제처럼 오늘도 비가 내리면
난, 그대의 생각 속에 머문다

《59》봄비

이경임 

새벽 2시에서 3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초침소리처럼

나의 출생신고에 사용된 숫자들처럼
나의 사망신고에 사용될 숫자들처럼

천진한 울음처럼
발랄한 체념처럼

그렇게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시계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마음 우물 속 개구리처럼

분주하게 폴짝거리며 힘 빼지 말고

하늘을 꼭 껴안고 더 많이 놀아야지
땅과 뒹굴며 더 많이 놀아야지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봄비의 촉감처럼

죽음의 촉감과 더 친밀해져야지

《60》봄비

이동순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 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 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61》봄비 속에 서 있는 그대에게

이상철 

속살거리는 봄비에
목련이 꽃 깍지를 벗듯이
따스한 내 입김에
그대 두꺼운 옷을 벗으려오.

투둑 거리는 봄비에
애기 꽃이 꽃망울을 부풀리듯
따스한 내 눈길에
그대 가슴에 불 지피려오.

꽃밭에 튀는 봄비에
새싹이 떡잎을 벌리듯이
나로, 나로 하여금
그대 두 팔에 안기게 하려오.

《62》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63》봄비 내리는 오후 

이승복 

막깨어나는 새싹곁에 
봄비가 내리는 오후 
생각의 껍질을 벗어 
눈감아 침몰하는 나 
내게서 사랑은 조용히 
먼발치서 흔드는 몸짓 
외줄타는 철지난 낙엽 
애달파했던 허기짐에 
몰래 귀동냥하는 사랑 
후조의 숨바꼭질 사랑 
붉게 그대의 향기가 
신기루 되어 보이는 
가슴차고 앉은 빈자리 
그림자로 따라 붙는 
고운님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봄비 내리는 오후 

《64》봄비 

이윤호

약속이라도 한듯이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겨울비라고 할 수도 없고
이른 봄비라고도 할 수 없는
그래도 우수가 코 앞이니
봄비라고 하겠다

농부의 땅이 해갈되어
기분은 좋다만은
내 기분은 영 내키지
않는다

아침부터 영화 한 편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오자는
마누라의 등쌀이
성가시어

《65》봄비에 젖은 사랑

이재옥

아름다운 것은 느리다는 걸 증명하듯
나뭇가지의 졸린 그리움 사이로
추적추적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립니다

당신을 만났던 별빛 쏟아지던 거리와
노을이 뜨거워서 철철 낭만이 흐르던 저녁
혼자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던 야릇한 미소
알몸 위로 쏟아지던 가냘픈 한숨까지
당신과의 모든 것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해한 손목 같은 튤립 붉은 꽃잎에 
첼로의 저음으로 나부끼는 봄비는 
날개 붓을 휘저어 사랑을 적시고 
온 세상을 적십니다

고뇌로 점철된 퇴색된 추억이 
비바람에 밀려도 아니
폭풍우에 세상 끝까지 실려가 뭉개져도
항거하지 못할 봄비의 의뭉한 허밍에 
사랑이 까무룩 잠들 듯 젖어 갑니다

《66》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통통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67》봄비

이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68》봄비 그리고 꽃비 

이호정

바람 불더니 꽃잎 날리고
진자리에 비가 앉습니다

뜨락에 핀 라일락
꽃향기 찬비가 시샘하는지
온종일 향기를 지웁니다

창가에 앉아서
네가 좋아했던 봄비를
내가 좋아 했던 찬빗방울을
헵니다

《69》봄비에 젖은 그리움

장성우

싸늘한 세상 그리움 내린다

봄비 내리는 사랑 
가슴 서서히 적시고
눈물 없는 세상 따뜻하게 한다

흐르는 세월 
비로 변한 겨울 있기에
혼자서 아픈 봄비를 맞고자 한다

황사로 오는 계절
봄비이기에 아픈 추억 
애틋한 그리움으로 불러서
이해하지 못한 사랑되어 흐르고 있다

《70》봄비처럼 그대 내 가슴에 내립니다 

장세희

초록향기 머금은 정원에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새싹들은 저마다 여린
솜털을 감추느라 아우성입니다.

봄비가 내리면 나는
왜 이렇게 설레일까요

그대가 유난히 생각이 나는
저 봄비의 속삭임

봄비가 속삭입니다.
보고 싶었어 라고
내 사랑아 잘 지냈니 라고
그대 목소리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밤 너무나 보고 싶어 
내 눈에 이슬 맺히게 한 바로 그대가
처연하게 오시고 있나 봅니다.

회색빛 하늘에서 봄비가
꿈결처럼 부드럽게 내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저 몸짓

내게는 그대가 봄비보다
더 감미롭게 내립니다.

포근하고 보드랍고 
잔잔하고 애틋하게
그대 봄비처럼 오늘
내 가슴에 내리고 있습니다.

《71》봄비 

장옥관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

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눈 희미한 콧노래

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

한 땀 한 땀
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

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
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

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

《72》봄비 

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 해도
반길 수 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73》봄비 

정동숙

주린 배 움켜쥐고 
소리 없는 울음 삼키며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 소리에 기대어 
꺼이꺼이 목놓아 울어 보지만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쏟아 낼 듯한 하늘은
인색하리 만큼의 
동냥젖을 내주고는 

마른 목적실 겨를도 없이
정체돼 있는 구름 사이로
파랗게 미소짓고 있다

또 기다린다
속절없이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되어……

《74》춘흥 

정몽주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중이라 가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 불어나니
새싹들 여기 저기 솟아오르네

《75》봄비 

정민기 

바람의 손을 빌려 
빗방울을 훌훌 털고 일어난 
꽃잎이 환하다 
산자락은 커튼처럼 안개를 치고 
철 지난 늦잠을 자고 있다 
언제 찾아왔나! 작은 새 한 마리 
울고 간 흔적이 비친다 
임시로 열어놓은 우산 아래, 
지구에서 가장 예쁜 꽃을 심고 
나 지금 그 꽃을 위해 거름이 된다 
창문에 너의 생각 실루엣처럼 놓고 
이내 빗방울처럼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오늘 나는 비를 맞으며 봄을 걸었다

《76》봄비 

정소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77》봄비 오는 어느날 

정숙진 

연두빛 봄비가 
잎새에 속살거리는데
우리사랑 
우산속에서 속삭이네

거리는 연두빛으로 촉촉한데
우리입술도 함께 촉촉하네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은 
그칠줄 모르고 
우리의 포옹은 
따스하게 스며드네

얼마나 흘렀을까
우산은 저만치 굴러가 있고 
빗물은 슬며시 가슴을 만지네
화들짝 놀라 추스리고
빗길을 걷는 우리는
연두물이 들었네

《78》봄비 

정진규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 버린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 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 나의 땅 문서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품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다

《79》봄비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 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 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80》봄비야

조수정

네가 오려고 혹독히 앓았나 봐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
너처럼 대지 위에 떨어지는 눈물이란다

사뿐히 음악처럼 내려앉지만
대지의 깊은 곳을 적시고
생명을 움트게 하지
사랑은 생명인 거야

봄비야
너는 기다림을 아름답게 해
겨울의 상처를 씻어내리고
기적 같은 꽃몽오리를 피워내지

말하지 않아도 돼
조용히 임하는 네 발자국
그 속삭임은 천지를 깨우는구나
곧 그의 나라를 보게 될 거야

《81》봄비 

주용일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82》봄비 내리는 창가에서 

지소영 

당신의 창문이 보이지 않아
비가 되었습니다
창호지 뒤로 아련히 
웃풍처럼 흔들리는 것들을 보며 
온돌의 따뜻함에 잠들고 말았던 기다림 
색 없는 봄비였습니다

너의 줄기 사이로 내밀었던 봉오리
연두색 희망에 포장하듯 물을 주기도 하고
행여 꾸겨질까 
오른팔을 조심스레 받치고 
떨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날들

어딘가에서는 
상앗빛 추억 
소라의 고동처럼 들리고
첫사랑처럼 잠 못 이루던 타임머신의 그 자리에서
아직도 너로 나인 소망 한그루 
바람처럼 그리움으로 불고 있습니다 

갈 길을 보고 
돌아올 길을 그려 보고
되돌려야 할 길을 빗질해 봅니다
가슴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소중한 빛깔로
색칠을 하면서

미완성 작품이지만
불안한 그림자이지만
울퉁불퉁한 당신의 바다가 거친 파장이었던 이유도 배웠고
기대일 언덕 없는 외로움도 알았습니다 

우리라는 따스한 언어에 
당신도 나도, 그도 그녀도 
당당한 진실로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3》봄비 소리에

최병창

보이지 않는 진동이 
마법의 순간처럼 흐르고 있었네

겨울이 풀려날 즈음, 신기하게도
온몸의 세포가 느린 행진을 시작하고 
겨우내 묵혀 두었던 살갗 위 비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시점에

스멀스멀 온기가 온몸으로 살아나듯
채 마르지 않은 
낱말들이 미동하듯 흘러내리고 있네

목마름에 눈뜨려는 빗소리를 
기다리지 않은 생명 어디 있겠는가
소리마저 미끄러지듯 봄비가 흘러내리네

끌어 안듯 속내까지 흠뻑 적시며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장맛비보다
겨우내 묵혀둔 머릿결 잔잔히 빗어 내리듯
소리마저 외롭다고 서툴게 뒤척이는 
그래서 흠모하며 집중하는 봄비인가보네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어 
꽤 오랜 시간을 다듬은 순간,
누구라도 기다림을 살필 자유는 있는 것

봄비가 소리처럼 내리고 있네
소리가 봄비처럼 내리고 있네,
이 비 그치면 눈을 뜬 새싹들은 
펴지 못한 날개를 다독일 테고 
먼데 소리로 닫혀있던 눈과 귀도 불러들일 것이네. 

《84》봄비 

한효상

조용히 내리는 봄비 
들뜬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대와 마주 보며 
해 맑은 웃음 지며 걸었던
그 길에 어제 같은 비가 내린다 

라일락 꽃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우리 사랑
꽃피웠는데 

덩그런 그리움만 
내 가슴에 남겨 놓고서 
그대는 어디쯤 가고 있나요 

《85》봄비 그리움 

한효상

그대 마음이 시리면
내 마음은 잘강잘강
찢어집니다

그대 가슴이 아리면
내 가슴은 멍울 져서
긴 밤을 뒤척입니다

찢겨져 구멍난 가슴엔
송곳바람이 웅웅 거리며
할퀴고 갑니다

그대 떠난 빈들엔 
초록이 움트고 봄비는 아픈 비가
되어 그리움을 키웁니다

《86》봄비

홍명여

오랜 침묵을 깨는
격정의 선율
늑골 깊숙이 파란이 일고 
촉촉이 스미는 리듬에 맞춰 
진통하는 대지
지구는 숨죽여 지켜보는데

풀싹,
어둠을 뚫고 일어서는 
저 여린 당참,
방울방울 맺히는 초록빛 꿈 
그대!
봄이다
찬란한 그리움이다.

《87》봄비

홍수희

사랑 때문에
울고 싶은 날이다

사랑 때문에
젖은 유리창이 되고 
싶은 날이다

추억상자를 조심스레 
열기만 열면

스프링처럼 간단히 
튀어 오를 것 같은

너의 웃음소리 
오간 데 없이

꽃은 피는데 자꾸 
피는데 지치도록 
그리운 얼굴 때문에

하루 왼종일 
빗물에 젖어 울어보고 
싶은 날이다, 봄비 

《88》사랑의 봄비 

홍종흡

겨울 눈 녹은 양지 녘에
들꽃 씨 하나 겨울잠 깨어나 
하늘 향해 하품하는 이른 봄날
솔바람 찾아오는 싸리울에는

매화나무 가지 끝마다
새초롬 피어나려 애쓰는 꽃눈이
첫날밤 지새운 아내의 눈처럼
불그스레 물들어 피어나는데

새벽일 마다 않고 일어나
아침상 차리는 아내의 손끝은 
선녀가 내민 손처럼 참으로 고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가

이제 고생 그만 시켜줄 게-!
머쓱해 한마디 하는 사내 눈에는
이른 봄 피어나는 매화 꽃눈처럼
사랑의 봄비가 흘러내린다

《89》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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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 군립공원


도립공원

No

산이름
높이
위 치
1
가지산
1.240
경남 밀양 울산 경북 청도
2
금오산
977
경북 구미 김천
3
남한산성
460
경기 성남 광주
4
대둔산
878
충남 금산 논산 전북 완주
5
덕숭산
495
충남 예산
6
두륜산
700
전남 해남
7
마이산
685
전북 진안
8
모악산
794
전북 김제 완주
9
선운산
336
전북 고창
10
수리산
475
경기 안양 군포 의왕
11
연화산
528
경남 고성
12
조계산
884
전남 순천 승주
13
천관산전남 장흥
14
청량산
870
경북 봉화
15
칠갑산
561
충남 청양
16
태백산
1.567
강원 태백 경북 봉화
17
팔공산
1.193
대구 경북 영천 경산 군위
18
팔영산
609
전남 고흥
19
황매산경남 합천
시.군립공원

No

산이름
높이
위 치
1
강천산
584
전북 순창 전남 담양
2
기백산
1.313
경남 함양
3
내연산
710
경북 포항
4
명지산
1.267
경기 가평
5
방어산
530
경남 진주
6
봉명산
408

경남 사천 곤명 용산.하동[시]

7
비슬산
1.084
대구 경북 청도
8
신불산
1.209
울산 경북 울주
9
아미산
961
강원 홍천
10
운문산
1.188

경북  청도 경남 밀양

11
월아산
482
경남 진주
12
응석산
1.099
경남 산청
13
장안산
1.237
전북 장수
14
천마산
812
경기 남양주
15
호구산
618
경남 남해
   
도립공원
20
화왕산
757
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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