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지장심(地藏心)
지장심은 보시하는 마음으로 주는 마음이다. 지장보살님은 전생에 줄 것이 없어서 속옷까지 벗어 주고 추운 겨울에 땅속에 몸을 감추었다고 하여 지장(地藏)이라 한다고 지장보살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지장보살님은 지옥문전에서 스님 모습을 하시고 항상 주장자를 드시고 지옥 중생을 구원하고자 눈물로 지내시는 분으로 슬픈 붐야 중생을 구제하시고 눈물의 애민심으로 우리 마음에 나투어 화현하시는 분이시다.
301, 보덕심(普德心)
보덕심은 보덕각시로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이시다. 불교 영험설에는 고통이 많은 마을 중생을 구제하고자 미모의 처녀로 화현하시여 험한 청년들을 제도하시는 모습을 방편으로 보이시는 것으로 미모 처녀에게 장가를 가고자 동네 청년들이 야단법석이라 차례로 금강경, 법화경등을 암송하게 하여 한 청년하고 결혼을 하여 첫 날밤에 갑자기 처녀가 생을 달리함으로 슬프하다가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오시여 무덤으로 인도하여 무덤속에서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나므로 마랑 부인이 아니고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고자 보덕각시로 화현한 것을 확인시켜서 마씨 아들인 마랑을 발심시킨 것으로 자기 집을 절로 만들어 평생 수행함으로 동네에 악한이 없이 부처님 신행으로 발심을 한 동네 청년들이었다.
302, 불정심(佛頂心)
법화경 말씀에 보면 “부처님께서 이마로 광명을 놓아 광명이 3갈래로 나누어 삼천대천 세계에 비치니, 한 갈래는 천상세계이고, 한 갈래는 인간세계이고, 한 갈래는 지옥세계로 광명이 비추어 부처님 회상에서 대중들이 두렵고 환희심이 서로 교차 하드라”. 하셨다. 불정심(佛頂心)은 광명으로 밝고, 맑게, 생명에 빛으로 살라는 것이다.
303, 월인심(月印心)
304, 해인심(海印心), 305, 법인심(法印心)
월인심․해인심․법인심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다. 달이 천만강에 인(印) 비치는 것이니, 마음에 법으로 인(印) 인정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함이니, 물이 삼라만상에 순응하므로 생명력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인(印)은 도장으로 서류에 도장을 찧어서 전하고 인정함으로 실권이 넣어 가는 것으로 인(印)은 인도의 문화라 할 것이고 불타(佛陀)의 깨달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306, 수행심(修行心): 중생의 원력심(願力心)이 수행심이다. 불보살님 마다 원력이 있으시고 중생도 원력심이 있지만 눈앞에 물질의 욕망으로 즐거움을 찾아서 집착하여 목숨을 걸고 몸덩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목숨을 걸어서 참으로 목숨을 받쳐서 찾아야 할 마음의 주인공은 잊어버리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윤회하는 것이다. 수행심은 마음에 주인공을 목숨 받쳐 찾는 마음이다.
307, 평등심(平等心)
빛은 평등하지만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장애로 그림자가 나타나므로 어두운 것처럼, 마음도 본성은 빛나고 평등하지만 경계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한 마음 작용으로 번뇌의 그림자로 어두운 고통을 받는 것이다. 평등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본래면목이고 수행심이다.
308, 일미행(一味行)
법계(法界)의 일미는 각해(覺海)의 마음이다. 깨달음 바다 한 맛은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남고, 미래가 다함이 없고, 중생의 원력심이 다함이 없고, 불보살님의 원력이 다 함이 없으므로 각해의 일미행은 다함이 없는 마음이다.
309, 무심행(無心行)
무심을 무아심(無我心)으로 바꾸고 싶고 무아심은 공심(空心)이므로 유(有) 있다는 모양과 이름이 아니고, 무(無) 모양과 이름이 아닌 진리의 에너지도 아닌 것이 유무에 자재한 것으로 인연의 연결 고리인 것으로 무아심이라 마음으로 관하지 않으면 나타나지를 않는 마음이다. 무아심을 얻으면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하여 아라한(阿羅漢)의 성인이라 한다.
310, 공덕해(功德海)
공덕의 바다를 마음이라 한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부터 지혜와 복덕이 원만 구족한 자리라, 부처님의 마음이나 중생의 본성이 동일한 것이지만 중생은 번뇌의 욕망으로 보배로 삼았고, 부처님은 진리로 보배로 삼는 것이라, 삼라만상이 청정하면 공덕해(功德海)라 할 것이다.
311, 성취자(成就子)
성취를 인도 말로는 “사바하”이다. 부처님을 원만 성취자라 한다. 지구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 중에 석가 부처님은 가장 수승한 32상 80종호를 갖추시고 지혜도 6신통를 하셨다. 인간의 잠재력을 증명하신 것으로 인간의 무한한 마음의 힘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생명존엄을 강조하시면서 평등을 강조하신 것이다. 남을 자신으로 관찰하므로 스스로가 존엄함을 깨달아서 실천하므로 서로서로 인연 관계로 더불어 사는 우리의 인연 고리인 것이다. 스스로가 미워하면 미운 세상이 나타나고 즐거워하면 즐거운 세상이 나타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라 할 것이다.
312, 대각심(大覺心)
큰 깨침을 석가 부처님의 깨침이고, 깨침은 바름을 실천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바름을 알지만 실천하기가 힘든 것이다. 재물이 없고 권력이 없어도 바름을 실천 할 수 있고 바름을 실천하는 것을 크게 보지 마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양심에 가책이 있으면 바름으로 거듭 생각하여야 한다. 조그마한 일이라고 하여 눈감으면 한 번 두 번 습성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므로 잘못을 깨닫지를 못하고 나아가 권력과 재물이 합세하여 큰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도리 킬 수 있는 자를 깨침이라 할 것이다.
313, 선지자(善知子)
선지자는 선지식을 말한다. 화엄경에 선재동자가 구법 길에 53선지식을 찾는 만행 길에는 보살․스님․음여․고기장수․도살쟁이, 세상살이하는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친견하면서 각각 스스로의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돌은 견고한 것을 가르쳐 주고 대나무는 곧은 것을 가르쳐 주고 물은 부드러운 것을 가르쳐 주고 두두물물이 다 스승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식을 배우고 하지만 자연의 습리를 보고 듣고 깨치는 것이니 모든 것이 선지식인 것이다.
314, 찰해주(刹海主)
나라의 왕이니, 현재 말로는 대통령이라 할 것이다. 사바교주 석가모니불․극락세계 아미타불․도솔천주․도리천주인 제석천왕․사천왕천 천주, 부처님께서는 욕계․색계․무색계의 28천주가 있고 헤아릴 수 없는 찰해주가 많다. 조그마한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도 스스로의 주인으로 찰해 주인공인 것이다. 찰해의 다스리는 방법은 청정불성(淸淨佛性)을 찾는 것이다.
315, 향운심(香雲心)
향기가 구름처럼 자욱한 봄철은 겨울 엄동 설한에 흙 속에 움추린 생명들이 따스한 기운으로 흙 속에서 숨바꼭질하는 모습은 누가 힘으로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자연의 습리로 모든 생명에 대자유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귀로 소리에 얽어 매이고 눈으로 모양에 얽어 매이는 것이니 귀와 눈의 집착을 놓아 버리고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라.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면 소리와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자재 하느니라.
316, 자비행(慈悲行)
생명의 소리가 자비행이다. 사냥꾼이라도 토끼가 상처를 입고 자신에게로 찾아오는 토끼를 총으로 죽이지는 않는 것이다. 가정집에 산 노루가 대문 안으로 들어온 것을 죽이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으로 자비심이라 할 것이다. 죽일 수도 있지만 대개가 죽이지를 않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뒷 동산에서 개미굴을 파 해치고 개미를 못 살게 하는 어린 아이들을 볼 수 있지, 이 아이는 자라면 난폭한 행동에 물들기가 쉬운 것이다. 세수 물그릇에 하루살이가 빠져 허우적 거리면 물에서 건져 풀잎에 놓아주면 다시 날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런 힘든 일이 아닐 지라도 하루살이에게는 생사 문제인 것이다. 자비심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317, 무주심(無住心)
머무는 마음이 없는 마음으로 6조 혜능스님은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已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봐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집착심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6조 스님은 이 말씀에서 부처님 법에 인연이 된 것이니, 글자도 모르는 나무꾼으로 속가 말로 출세를 한 것이고 부처님 법을 계승한 6조 스님으로 돈오(頓悟)사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318, 미타심(彌陀心)
서방 정토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미타불 전생에 법장스님으로 48대 원력을 성취하신 분으로 극락세계를 건립하시고 주인공이신 분이다. 아미타불 원력에 십념 왕생원(十念 往生願)이 있어 지극한 마음으로 열 번만 아미타불 하면 극락에 간다는 아주 쉬운 아미타 부처님의 말씀이 누구든지 극락 발원을 하게 한다. 극악 무도한 사람도 십념왕생원을 하면 극락을 가는 것이니 얼마나 좋은 것인가? 거짓말이라면 아미타불이 되시지 못했을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은 악한 사람도 이러한 방편으로 구제하시는 것이다.
319, 정례심(頂禮心)
이마로 절하는 마음은 마음과 몸으로 몸숨 바쳐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의 마음으로 진리를 성취하게 다는 일심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 몸숨을 바치는 마음으로 성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몸을 위하는 편이고 심지어는 국가 대사라 할지라도 몸을 의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면 몸보다 마음편으로 마음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정례심은 바름 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의 맹세인 것이다.
320, 광명화(光明華)
깨침의 광명은 마음의 광명으로 지혜라 하고 자연의 광명은 태양의 빛으로 생명에 에너지인 것이다. 마음의 광명인 지혜가 없으면 가치관이 없으므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고통스러워하고 고통에서 벗어 날 줄을 모르고 항상 원망만 하는 것이다. 지혜가 있으면 번뇌를 관찰하므로 번뇌가 바로 진리 당체임을 아는 것이 마침 어두운 방에 불빛이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방이 밝은 것처럼 마음에 지혜가 생기면 번뇌의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321, 금강자(金剛子)
견고한 것을 금강이라 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금강자는 삿된 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므로 불법을 옹호하는 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지장보살님께 주신 육환장은 지옥문을 열 수 있는 금강자 라 할 것이고 스님의 법상에 법장도 금강자 라 할 것이다. 금강자는 번뇌를 조복 받고 마군을 조복 받고 바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322, 향수해(香水海)
도리천주인 제석천왕이 계시는 수미천으로 중심하여 사방으로 향수해 라 한다. 하늘의 이슬을 감로수 라 하여 관세음보살님이 중생을 병을 치료하시는 약수로 알고 있는 것이 우리의 관음 신앙이다. 지구에 향수는 청정수 라 물이 청정하면 병도 치료하고 죽을 생명도 살아나고 만물이 청정수를 먹으면 생명이 살아나는 힘이 있다.
323, 천화대(千華臺)
많은 꽃으로 장엄한 부처님의 도량인 사찰을 말하고 법회 의식으로 6법 공양으로 등, 꽃․향․차․과일․쌀등 자연의 열매를 공양함으로 자연의 은혜와 감사를 체험하는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천화대는 부처님의 장엄 도량을 말한다.
324, 대덕심(大德心)
부처님 말씀에 장로 수보리 야 하신 장로를 대덕이라 할 것이다. 산중 대덕스님 하면 산중 어른으로 산중의 어른 말씀이 법이고 질서이고 대중을 이끌어 가는 길이다. 수행도량은 문서의 법보다도 유동성이 있는 자유자재한 마음의 법으로 자비희사가 수시로 적용되는 것으로 일정한 규칙보다도 시기에 따라서 살활 자재하는 법이 장로법인 것이니 대덕심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다.
325, 금색심(金色心)
부처님 몸을 금색신이라 하고 금색심은 부처님 마음을 말한다. 보배 중에 금이 천만년을 지나도 금빛은 변하지를 않고 처음처럼 항상 빛을 발하고 또 삿 된 기운이 범하지 못하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말씀에는 삿 된 것이 범하지를 못하는 것이므로 금색심이라 한다.
326, 은색심(銀色心)
은색은 수행의 색깔이다. 스님들의 옷은 희색으로 은색을 상징하는 것이 희색은 불괴색이라 하여 허물어지지를 않는 것이 모든 색은 희색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항상 수행심으로 호화로운 색깔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빨강색은 정열적이고 공격적이고 위험이고 주의하여야 하고 죽음의 색이고 푸란색은 생명색으로 생명에 기운을 일으키고 움직이는 힘을 주고 피로하지 않고 기분이 상쾌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 서로 서로가 좋아하는 것이다. 희색은 사색하는 색으로 은색심은 수행자의 마음이다.
327, 법기행(法起行)
전법하는 자을 법기행자 라 할 것이다. 신행학교를 하면 2백명, 3백명이 입학을 하는데 부처님 법을 모르고 몸에 위한 욕심으로 살아가다가 목숨이 다하면 울고 야단 법석이지, 권력과 재물, 자식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니, 세속적으로 생각하여도 쓸쓸한 것이다. 마음의 공부를 하면 죽어도 앉아 죽을 수 있고 서서 죽을 수 있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고 죽음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이 죽음이란 것이 다시 거듭 나는 시작이므로 얼마나 기쁜 일 인가? 마음은 생사가 없고 시비선악에 관계하지 않고 항상 자재한 것이니 우리가 마음을 찾아보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므로 생사에 두려움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328, 대희심(大喜心)
하늘보고 박장대소를 하는 웃음을 대희심이라 할 것이다. 분별심이 없는 도인의 마음이라 하고 함이 없는 마음이라 할 것이고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없는 마음이다. 하루에 웃을 일이 많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누구나 바라는 마음이지만 몸의 행위가 실천이 안 되는 것은 수행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관하는 일을 반복하면 몸의 악습이 자연히 사라지고 무의식으로 반복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행위인 것이다. 이것을 대희심이라 할 것이다.
329, 대해심(大海心)
태평양 바다가 대해 라 하지만 대해는 우리 마음이다. 마음에 태평양을 비교하면 태평 가운데 한 조각배가 태평양이란 것이니,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가? 마음은 모양과 이름 할 수 없으므로 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이 있으면 상대적인 큰 것이기 때문에 마음은 상대가 없이 큰 것이므로 마하심(摩訶心)이라 한다. 이러한 마음이 각자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으니, 지구는 하나만 있어도 크다고 야단인데 두두물물이 비교 할 수 없는 큼을 간직하고 있으니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법이다.
330, 서정주(西淨主)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으로 서방 정토 주인공을 나는 서정주 라 한다. 서정주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니, 몸으로 서정주의 행을 실천하고, 입으로 서정주의 말씀을 하고, 마음으로 서정주의 마음씀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정주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는 것이 결국은 스스로가 실천하여야 되는 것이다. 다만 남이 시켜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강제적인 힘에 의하여 억지로 실천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실천하는 것이니, 세상에는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치적으로 스스로의 행위인 결론이다.
331, 대원심(大願心)
대원심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마음은 크다 하면 크고 작다 하면 작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크고 작다는 말은 맞지가 안고 자신이 크다 작다고 인식 할 뿐이다. 마음은 우주법계보다도 크고 작기는 개자씨 보다도 작은 것으로 비교 할 수 없는 것이므로 모양과 이름 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이 대원심으로 주인공이 바로 자신인 것이니, 비교 할 수 없는 존재 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생명존엄성이다.
332, 위덕자(威德子)
부처님을 위덕왕이라 한다. 위의의 덕을 갖추신 분으로 중생들이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명호을 들으면 무슨 인연이라도 환희심이 나는 분이시다. 부처님을 살해하려는 생각을 일으켜도 부처님을 보면 따르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많은 생으로 선한 공덕을 수행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위덕인 것이다. 이러한 위덕은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도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을 위하여 보시하는 공덕을 많은 생으로 수행한 공덕인 것이다.
333, 견명심(見明心)
밝음을 보는 것은 맑음을 보는 것이므로 빛이 밝고 물이 맑고 흙이 청정하여 기름진 것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것은 밝음과 어둠이 고르므로 잘 사는 것이고 기후가 냉온이 고르므로 생명이 잘 사는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고르면 명당이라 하고 생명이 모여드는 곳이라 생명이 잘 사는 것이라 이것이 견명심인 것이다.
334, 안심궁(安心宮)
생명이 편안한 곳이 안심궁으로 정토(淨土)라 할 것이다. 정토는 서로서로 더불어 사는 생명 세계를 말하므로 환경운동을 말하고 환경 경제는 물질의 욕심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보호하므로 자연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무가 자라서 공기를 청정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한 씨앗이 자라면서 무수한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 정토인 것이다. 정토의 근본은 청정이므로 청정은 무수한 생명을 잘 살게 하는 것이고, 오염은 생명을 더불어 죽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35, 무상심(無相心): 상이 없는 마음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무아심(無我心)을 말한다. 내가 없는 마음은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보살님의 마음이라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우리가 몸으로 바른 일을 실천하고, 입으로 바른 말을 실천하고, 마음으로 바른 뜻을 스스로 실천하면 싫어함이 없는 것이라, 무아심은 바름을 실천함으로 성취되는 마음가짐이다.
336, 무위심(無爲心): 함이 없는 마음은 도인의 마음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마음이 선악에서 무수히 헐덕이는 마음을 다스리고 희비애락에 본심을 잊어버리고 경계의 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킴으로 본래 청정한 마음을 망각하고 욕심내고 진심 내고 어리석음으로 즐거움을 삼아 살아가는 것이니, 무위심으로 살아가면 희비애락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편안한 마음이 되고 가치관이 확연하여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337, 본심월(本心月): 본래 원만 구족한 마음으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자연모습 그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빛이 부처이고 생명이라 빛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물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흙이 있는 곳은 생명체가 있고, 기후의 냉온이 고르면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몸의 형상과 이름에 집착하여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 물, 공기, 흙, 기온의 에너지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망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오히려 배반하고 오염시키면서 도리어 욕망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이익을 추구하니 생명을 죽이면서 자신이 잘 살기을 바라는 것이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이 본심월을 알면 본래 모습을 찾는 것이다.
338, 정심행(正心行)
바른 마음은 직심이다. 직심은 과거심도 아니고 미래심도 아닌 것이다. 참회하는 마음은 과거심으로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고 돌이켜 보는 것으로 현재의 바른 마음이고, 희망은 미래심으로 계획하고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결정심을 현재에 하고 있는 것이 직심이다. 바른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우리의 본심이고, 두두물물의 본성자리인 평등심이다.
339, 정언심(正言心)
바른 말은 진실한 말로 본심에서 참된 말을 하라는 것이다. 경계의 대상을 보고 듣고 분별하면 바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상의 모양과 이름으로 나타난 현상을 보고 듣고 하기 때문에 본성의 진실을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언을 하려면 모든 보고 듣고 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마음으로 관찰하라, 모든 형상과 이름의 연결 고리가 나타나는 것이니, 모두가 하나인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멸하는 것이다.
340, 금강심(金剛心)
세상에서 견고한 것을 금강이라 한다. 모든 물질은 금강이 될 수가 없다.
물질은 변화하는 것이지, 견고한 것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제일 견고한 것이라, 모양이 없으므로 견고한 것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 말씀인 금강경은 공심(空心)으로 금강을 삼은 것이다. 공심은 유무에 자재한 것이다.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도리가 공심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여 텅빈충만이라 할 것이다. 무소유로 주인공인 것이다.
341, 묘법심(妙法心)
묘법은 모양과 이름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면 천태만상으로 나열되는 시간과 공간을 축소 할 수 있고 늘릴 수 있는 자라면 묘법을 볼 수가 있다. 물이 평범하게 강물로만 보이지만 물이 나무에 순응하면 나무가 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이 물과 빛과 흙의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지 나무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닌 것이니, 이 도리를 알면 묘법이라 하고 부처님 가르침인 깨달음을 묘법이라 한다.
342, 기타림(祇陀林)
기타림(Jetavana) 승림(勝林)이라 번역, 중인도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 수달장자가 이 땅을 태자에게 사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니 이것이 바로 기원정사(祇園精舍)인 불교의 최초 사원이고 금강경을 설하셨다.
343, 삼정심(三淨心)
삼정심은 바른 뜻․바른 일․바른 말로 부처님의 십계명이고, 미래 용화세계의 미륵불의 십선(十善) 사상으로, 우리의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인 몸으로 살생보다 생명 문제을 실천하고, 도적질보다 경제 문제을 실천하고, 음행보다 성 문제를 실천하여 바른 일을 수행하고, 입으로는 망어․기어․양설․악구등은 진실한 말인 언어 문제를 바른 말을 수행하고, 마음으로는 욕망․성냄․어리석음을 지혜로 바른 뜻을 수행하면 십선(十善)이라 하여 극락도 가고 성인도 되고, 저지르면 지옥․아귀․축생, 악도에 윤회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이 분명한 것이니, 우리의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가 진리이고 법인 것이다.
344, 여여심(如如心)
여여심을 진여심(眞如心)이라 하고 여여(如如)는 여거여래(如去如來) 거래가 없어 여여한 자리라 가고 옴이 없는 것이라, 불성이 허공에 충만하니 거래가 없이 여실한 것이다. 빛이 부처이니 빛이 충만한 것이니, 왕래가 없는 것이다.
345, 선재심(善財心)
선재 선재(善哉)라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수보리 야 너의 말이 맞다 하시고 선재 선재라 착하고 착하다하신 것은 수보리에게 수기한 것이므로 나의 말과 같다는 것이니, 수보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란 것이다. 또 화엄경에는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제방으로 친견하시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친견하여 발심하는 것이니, 불보살님들의 마음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싫어함이 없어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이 수행행자가 되어야 한다.
346, 응공자(應供子): 응공을 부처님이라 하고, 보살님이라 하고, 스님이라 한다. 응공자는 바른 법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세상에는 마음이 스승이고 바름이 법이라, 한 스님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스승님이 누구입니까? 묻자, 삼성하반월(三星下半月)이지, 마음심(心)자를 파자로 말한 것이 이성계가 국사 스님을 모실려고 유생들을 전국에 순방하게 하여 오대산 바위 위에 검푸른 얼굴에 스님에게 세상에 제일 가는 스승을 찾자 삼성하반월이라 하자 절을 3번하고 모신 스님이 바로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스님이시다. 마음이 스승이라 바른 마음이 응공자인 것이다.
347, 불자행(佛子行)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상호를 보고 거역하지 않고 생각하면 불자인 것이고,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칭명하면 불자인 것이고, 나아가 삼귀의 계와 5계를 받아 불명(佛名)을 받아 수지하면 불자인 것이다. 불자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은 생사가 없고 시비선악에 관계하지 않으므로 자유자재한 것이지만, 우리는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불자는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야 불자행이다.
348, 무생심(無生心)
태어남이 없는 것은 번뇌가 없어 생사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태어난 것이고 마음이 사라지면 죽은 것이라, 허공에 뜬 구름이 일어나면 태어난 것이고 사라지면 죽은 것이라 호흡을 들어 쉬면 산 것이고 날 쉼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보고 듣고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생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무생심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已生其心)의 도리이다.
349, 법도행(法度行)
법도는 통도(通度)를 말한다. 부처님 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통도사는 자장스님께서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시어 말세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꿈에서 받으시고 우리나라에 5대 보궁을 개설하여 지금도 청정법신인 사리 친견으로 불자들의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하시는 인연의 원인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니, 공덕이 헤아릴 수가 없다.
350, 무량행(無量行)
무량행은 다함이 없는 마음이고,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고, 끝없는 마음이고, 싫어 한이 없는 마음이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사람의 생각으로 미치지을 못하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으로는 변화하는 과정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라, 변화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이 지속 할 뿐이라, 영원이라 한다.
351, 복혜심(福慧心)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신 분이 부처님이라 하여 양족존(兩足尊)이라 하신다. 양족은 부처님의 두발이 아니고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신 분을 말한다.
중생들도 양족이라 본 성품 자리는 본래부터 양족한 것이니, 다른 말로 구족이라 한다. 중생 스스로가 보고 듣고 욕망으로 마음의 보배를 삼아 스스로가 윤회하는 것이다. 물질 욕망의 보배가 보배가 아니고 고뇌의 원인인 것을 깨달으면 마음의 본성을 찾아 스스로가 항상 빛을 발하여 뭇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 양족(兩足)인 것이다.
352, 여실행(如實行)
여여심은 진실심이고 참된 마음이라 스스로가 진실한 마음을 발심하여야 한다. 접촉의 감각으로 즐거움으로 살아가다가 슬펴하고 시비의 안팎에서 살다가 마음의 진실을 알고 부터는 스스로가 진실의 주인공으로 진실을 실천하니, 스스로가 편안하고 인연 법으로 진실이 고리 고리 연결되는 미묘 법을 아는 것이다.
353, 보살행(菩薩行)
보살의 정신 지위는 자리이타(自利利他)자타를 다 구제하는 힘이 있다. 대승의 보살정신은 남을 구제하므로 자신을 구제하는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터라고 하는 것이다. 지장보살님은 지옥 중생을 다 구제하고 부처님이 되신다는 것이 지장보살님의 마은이고, 관음보살님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다 구제하신다는 원력 보살님들이시다. 보살의 원력은 물이 모든 생명에 순응하므로 싫어함이 없이 생명을 구제하는 보살님이시다.
354, 무착심(無着心)
무착심하면 마음을 비우는 마음이다. 진심이 일어나는 것은 보고 듣고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일어난 것이다. 보고 듣고 하여도 집착심이 없으면 잘못이라 하여 성질 부릴 것이 아니고 잘못을 관찰하여 잘 되게 하는 것이고, 잘 된 것은 남의 가르침으로 배우고 훈습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보고 듣고 집착하여 소리대로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355, 응심자(應心子)
응심이란 그윽한 마음으로 듯듯한 마음이고 항상심이라 평상심이라 할 것이다. 허덕이는 마음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맑고 청명하여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바다 수면은 천태만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이 고요하면 삼라만상이 나타나는 모습에 집착함이 없이 순응함이라 그리치는 법이 없는 것이므로 불 보살님 마음이라 하여 물, 공기, 흙이 생명에 순응하므로 생명에 기운이라 생명력이라 한다.
356, 지혜장(智慧藏)
마음의 본성을 지혜장이라 하여 공덕과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이 보배 창고는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더 증장되는 것이므로 미묘한 법이라 묘법장이라 한다. 지혜장은 부처님도 탄생시키고 보살님도 탄생시키고 지옥도 구제하고 축생도 구제하고 아귀도 구제하는 것이니 삼라만상을 만드는 보배 창고인 것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자신인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확인하지 못하고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살생하고 잘못으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니, 발심하여 지혜장을 발견하고 이 보배를 사용하여도 누가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니, 서로서로 확인하여 부처님도 되고 보살님도 되는 것이 불제자들의 길이다.
357, 복덕장(福德藏)
복덕장은 마음이라 마음에는 무궁 무진한 보배가 충만하여 사용하면 할수록 복덕장에는 복덕이 증장되는 것이라, 마음에 모양과 이름을 비우면 모든 모양과 이름에 순응하지만 마음에 모양과 이름이 가득하면 다른 모양과 이름에 순응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이 청정하면 생명마다 힘의 생명력이 되지만 물이 오염되면 오염물을 접하는 생명마다 죽는 것이다. 복덕장은 생명력이다.
358, 오성자(悟性子)
성품을 깨친자가 오성자이다. 나라법의 법이 평등한 것은 판결된 법은 전 국민에 혜택을 주는 것이 법이고 진리도 조그마한 법이 한 개인에게 나타나면 모든 생명에 평등하므로 혜택을 받는 것이지, 빛을 생명이 보면 잘 자라는 것이고 꽃피고 열매 맺으면 벌, 나비, 새,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니, 대승사상에서는 도리어 사람들이 자연에서 구제를 받는 것이다.
359, 도명심(道明心)
도명심은 성품을 본 마음이다. 두두물물이 다 성품이 있고 성불의 원인이 되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불상보다도 자연적인 바위의 생김새가 부처님을 닮았다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10여년전 경남 양산 어느 암자 바위에는 하늘의 뇌성이 3번이나 쳐서 바위가 부처님 모습이 나타나서 전국에서 친견하는 야단법석이 일어나고, 통도사 월하스님은 천광(天光)약사여래불이라 하셨다. 바위에 하늘의 벼락이 3번이나 한 곳에 쳐서 바위 모습이 누구나 보면 부처님이라 하니, 이름도 천광 약사 여래불이라 칭명하고 불제자들은 누구든지 절을 하고 원력을 세워므로 바위가 성품이란 것이다. 바위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한 부처님의 성품을 확인시키는 것이니, 도명심이라 할 것이다.
360, 법미심(法味心)
일미(一味)는 바닷물이 짠맛으로 일미인 것이다. 고추가 작지만 매운맛으로 세상에서 제일이라 이것이 일미이고 법미인 것이다. 한 티끌 속에 우주가 함축되어 있고 한 티끌로 지구가 형성되는 것이고 한 씨앗으로 산천이 푸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이 마음이라 하시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셨다. 삼라만상의 주인공은 마음이란 것이니, 내 마음으로 꽃밭에 꽃 씨앗을 뿌리고 물주고 가꾸면 꽃피고 벌 나비 오고 열매 맺어 새들이 오면 노래하는 꽃 정원이 되는 것이 내 마음에서 성취되는 것이니, 지옥 극락도 마음이 주인공인 것이다.
361, 정토궁(淨土宮): 정토는 서방 극락정토인 아미타불 세계가 있고, 사바세계 정토는 더불어 사는 생명정토인 것이다. 환경 정토는 물, 공기, 흙, 에너지의 자연 환경을 청정하게 하면 생명 고리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다. 나는 미생물이 살 수 있는 물은 청정수라 한다. 미생물이 살아 갈 수 있다면 먹이 사설이 형성되면서 환경 정토가 형성되는 것이다. 샛강마다 반딧불이가 지천이고 잠자리가 춤을 추면서 매미소리가 숲 속에서 노래 할 적에 정토인 것이다.
362, 칠보궁(七寶宮)
금은 칠보가 보배가 안이고 몇 백년 된 고서가 보물인 것을 보고, 지금까지 생각한 보배의 가치관이 바꾸어진 것이다. 보배는 물질이 아닌 정신 가치관으로 인간들이 물질에만 보배라 하여 인식되어서 정신의 가치관을 쓰레기처럼 방치하고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역마다 조상 얼이 무궁 무진한 것이지만 정신 가치관을 발굴하려들지 않고 잊어버리고 산다. 자신의 마음가짐이 얼이고 보배인 것을 모르고 평상시 아무 생각이 없이 말을 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모든 것이 스스로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법으로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세계를 만들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므로, 바른 마음가짐은 모든 문제에 원인이 되는 것이다.
363, 법공(法空):
부처님 법도 경전으로 문자 법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고, 특히 문자 속에 뜻을 선(禪)의 마음이라 하시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부처님 마음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선(禪)인 것이다. 법공(法空)은 문자보다 마음으로 전하는 선(禪)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문자 속에 문자을 여인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364, 무위(無爲)
내가 몸이 있는데 몸이 없는 역할을 하려면 일반적으로는 바보 천치라 하고 고상하게 말하면 도인 마음이라 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하지, 무아(無我)사상은 내가 없다는 마음가짐을 말하므로 장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내가 있어 내 라는 모양과 이름이 나타나므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내가 없으면 일어나지 안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사라는 것은 공기처럼 만물에 순응하면서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365, 정덕(淨德)
청정이 복덕인 것은 물이 청정하면 생명이 잘 자라고 병은 없어지고 치료되고 생명력이 증장 되면서 열매가 더욱 증식되는 것은 청정의 생명력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청정하면 지혜의 가치관이 확연하여 사리가 분명하고 판단력이 빠르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66, 덕산(德山)
공덕림은 사찰을 말하고 사찰을 총림이라 하여 숲의 나무처럼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도량인 것이다. 총림(叢林)에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행정원등 대중이 300명 이상 운집하여 수행하는 곳이 총림이라 하여 항상 대중의 뜻을 존중하면서 숲의 나무처럼 서로 탁마 의지하면서 수행하신다. 덕산은 마음의 덕을 숲처럼 자라게 하여 남을 구제하라는 것이다.
367, 시명(是名)
진리는 모양과 이름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게 표현하여 마음(心)이라 하고, 진리라 하고, 법성(法性)이라 하고,, 법장(法藏)이라 하여, 마음을 다른 이름으로 인연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이름도 본래는 없는 것을 내가 태어나니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시명(是名)은 그림자를 말한 것으로 이름과 모양이전의 이치를 보고 듣고 하라는 말이다.
368, 적멸(寂滅): 부처님의 사리탑을 적멸궁이라 한다. 부처님은 돌아가시지를 않고 적멸하셨다 하고 사리의 법신으로 항상 청정으로 자비 설법을 하시지만 중생들이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하므로 진리를 보고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자연이 청정을 가르치고 내 마음에 원만 구족한 청정을 깨달으면 이것이 본래 원만 구족한 청정 법신인 것이고 내 밖에 법을 찾지 마라 수고로울 뿐이다.
369, 명심화(明心華)
마음을 밝은 구슬이라 하여 명주(明珠)라 한다. 명주는 여의주(如意珠)라 하여 관세음보살님이 용두 관음으로 구름 속에서 용을 타시고 용의 여의주를 가지고 계시므로 관자재보살이라 하고, 우리가 마음을 관하면 자재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밝은 마음의 명주를 찾는 것이다.
370, 정법행(正法行)
바른 법은 바른 마음이고 바른 행이고 바른 일이다. 부처님 언행을 배우고 수행하면 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 중생은 모양과 이름으로 집착하여 살아가므로 항상 즐겁다 하다가 슬펴 울고 희비애락이 죽 끊듯 한다. 바른 것이 부처님의 법이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마음의 바름을 깨달아야 바름을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371, 선법화(禪法華)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중생들의 본심이므로 두두물물에 생명존엄성이 있는 것으로 자비심의 생명력을 말한다. 개미도 움직이는 불성이 있는 것이 생명력으로 자비심인 것이 우리의 본심가 같고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 마음을 아시고 개미를 자비심으로 잘 살게 하시고, 우리는 이 마음을 인식하지만 개미를 미물이라 하여 없이 여기면서 죽이는 짖을 밥먹듯 하는 것이고, 개미는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차별인 것이다. 개미의 미물에도 선심(善心)은 있지만 모를 뿐이다.
372, 일해성(日海性): 태양이 마음 성품이란 것이다. 태양은 항상 빛을 발하지만 생명의 근기에 따라 살아가므로 장단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빛을 항상 발하지만 본성을 망각하고 경계의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여 분별하므로 번뇌에서 윤회하는 것이다. 경계의 반연을 놓아 버리고 텅텅 빈 마음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흰 것이 오면 희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으로 자재한 것이 마음인 것이다.
373, 자성화(自性華)
자성 청정으로 사라는 것이다. 본성이 청정하여 모양과 이름으로 표현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 누가 간섭 할 수 없고 혼자 분명하여 따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본성은 각자 스스로가 주인공이라 다른이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374, 혜명심(慧明心)
혜명은 나타난 지혜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 마음이 계승하여 온다는 것이 혜명이다. 혜명의 적자 설도 있고 본래 혜명의 청정심을 스스로가 찾는 것으로 경계를 방하착하면 마음속에 본래 원만 구족한 자리를 발견하면 바로 청정으로 이 청정이 자연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어 각자 스스로가 찾는 것이다. 마침 글자를 만들어 가르치고 배워서 스스로가 자신을 알아서 실천하므로 구제가 되는 것이니, 지금까지는 구제라 하면 남의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구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쳐서 스스로를 구제하면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다.
375, 불외자(不畏子): 두려움이 없는 자는 생사의 두려움이 없는 자를 말한다. 생사의 두려움이 없는 마음은 몸의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은 마음으로 보면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이다. 마음은 생사시비선악에 관계하지를 안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면 성취되는 것이다. 청정하다는 것은 마음이 텅빈 마음으로도 말 할 수 있다. 내라는 모양이 없으므로 남에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불외자라 한다.
376, 정행자(正行子)
부처님을 정행자 라 할 것이다. 바른 일, 바른 말, 바른 뜻을 실천하신 자는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제자는 이러한 마음을 배우고 수행하므로 본성 청정을 실천하여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질의 욕락이나 애욕의 쾌락은 일시적인 즐거움이라 돌아서면 괴로운 것으로 즐거움이 영원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377, 무염자(無厭子)
싫어함이 없는 자는 불 보살님의 마음으로 불제자들의 길이다. 화엄경 보현품에는 보살심의 실천 원력을 세우신 보현행자는 불 보살님들의 마음은 신․구․의․업(身․口․意業)에 싫어함이 없다 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행위가 바로 몸, 말, 마음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니, 이 행위에 순응하므로 자재하고 싫어함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에 순응하므로 구제하는 것이니, 중생이 불만이 없는 것이다. 물이 모든 생명에 순응하므로 생명력이라 하는 것이다.
378, 무주심(無住心)
머무는 마음이 없는 마음이 집착 없는 마음으로 내란 모양과 이름이 없는 마음으로 내가 없는 무아상(無我相)이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것이니, 항상 광명을 발하는 태양 자체인 것이다. 태양은 항상 빛을 발하지만 인연에 따라 빛을 보는 것도 있고 못 보는 것도 있는 것이다. 태양은 공간과 시간에 구애 없는 것인데 만상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는 것이 다른 것이다.
379, 여실행(如實行)
부처님 같이 하라는 것이 여실행이다. 실다움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이름하여 실다움이라 한 것이지, 영리한 준마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서 목적지에 가고 영리하지 못한 말은 가다가 풀도 뜨어 먹고 이산 저산 구경도 하고 가다가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깔끔하지 못하고 분잡한 것이니, 주인이 싫어하는 것이다. 여실행은 준마처럼 진실하고 여여하여 그대로 진리이고 법이고 실천인 것이다.
380. 무각심(無覺心)
부처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시지만 무각심은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의 본심이 본래 성불이라 깨칠 것이 없다는 대승 법문인 것이다. 두두물물이 본래 성불인데 석가 황면 노자가 잠잠한 마음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게 한 것이니, 방망이를 맞아도 한참을 맞을 것이니, 걱정이로다.
불명 이해 원고가 삭제된 것을 다시 켐퓨터 작업을 한 것이다.
(03년 8월 30일. 오전 7시. 통도사부산포교원. 법사 실에서.)
381, 봉정심(鳳頂心)
봉정암에는 금강산에서 아름다운 바위 대회를 하자 전국 바위들이 금강산을 가다가 시간이 늦어서 설악산에 쉬어 지금의 바위들이 잘 생긴 바위들이라는 전설이다. 봉정은 아름다운 바위들로 부처님 같기도 하고, 봉황새 머리 같기도 하고, 스님 같기도 하고, 신선 같기도 하여 보는 자들에 마음이 신비롭고 물, 바람, 구름, 바위들의 조화로 극락세계의 하늘 나라에 온 기분으로 세상의 어지러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청정하게 하여 산다고 잊어버린 본심을 찾게 하는 곳이라 여가가 있어 자주 가면 마음에 힘을 얻는다.
382, 감로자(甘露子)
감로수는 부처님전에 청수를 올리고 기도하기를 감로수로 변하여 중생의 약수가 되게 하여 달라는 중생들의 지극심을 볼 수 있고, 어릴 적에 스님께서 사찰에 간장독에 아금청정수 변위감로장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我今淸淨水 變爲甘露漿 奉獻三寶前 願受哀納水) 장독에 글귀를 볼 수 있었다.
감로미는 몇 일을 먹지 않고 배가 고프면 한 방울의 물이라도 감로미로 달고 맛이 있고, 배가 부려면 아무리 성찬이라도 맛이 없는 것이라 감로미는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383, 예경심(禮敬心)
부처님전에 예경하는 수행은 부처님 닮게다는 마음이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수행으로 자신을 하심하고 대상을 존경하는 수행으로 인사하는 마음이고, 부처님전에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받쳐 절합니다 는 마음의 맹세인 것이다.
384, 명주심(明珠心)
밝은 구슬이 마음이라, 밝음 구슬 속에 대상의 마음 그림자도 나타나는 것이라 삼라만상이 나타나므로 명주심이라 한다. 여의주(如意珠) 뜻대로 성취되는 구슬이라 밝은 마음을 말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만물이 나타나는 것이 청정수가 모든 생명에 순응하는 것과 같다. 불 보살님은 상이 없이 순응하므로 성취를 시키시는 것이다.
385, 법공심(法空心)
진리를 법이라 하지만 법은 문서로 나타나지만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나타나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진리라 한 것은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방법론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지만 문자에 집착하면 동쪽을 가려고 하지만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386, 무불심(無佛心)
부처님은 마음의 주인공이라 하지만 주인공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라 이름 할 것이 없는 것이니, 부처가 있으면 부처의 종 놀이를 하여야 하고 있다 없다 시비를 하지만 주인공이 없으니 시비가 없는 세상이다. 무불심은 시비 없는 세상으로 모양과 이름이 끊어진 것이고 언어 도단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387, 무색심(無色心)
물질을 여인 마음을 말하고, 공심(空心)의 정신세계를 말한다. 색공불이(色空不二)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닌 세계는 물질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물질이 생기는 것이라. 물질의 근본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 물질의 원소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 구성원이다.
388, 법왕심(法王心)
법왕을 부처님이라 하지만, 심왕(心王)을 말한다. 심왕은 마음이 삼라만상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이라, 마음의 청정본심에서 원만 구족한 지혜와 복덕을 실천한다면 경계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처음 발심하기가 힘든 것은 인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의 애욕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생명존엄이 결여된 생각에 치우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으로 즐거움에 만족하는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참아서 견디어 성취하는 일들을 잊어버리고 생각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니, 지혜가 없는 지식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심왕(心王)은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389, 삼매자(三昧子)
삼매심은 하나되는 것으로 바위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에서 관계가 없는 것이다.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쪼개어서 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 실천하는 것이니, 바위가 내 마음이란 것이다. 억겁을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널리고 하는 심통 자재한 것이니, 지금 생각이 만년 전을 생각 할 수가 있고, 만년 미래를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니, 신통이 아니고 심통인 것이라 할 것이고 신통은 만년전 자신을 생각하면서 현재 형성하면 생각과 행동, 말을 하므로 형성이 되는 것이니 신통인 것이다.
390, 묘법장(妙法藏)
마음의 도리는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라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있는 것이 마음이라 마음은 있다 없다에 자재한 것이다. 물이 온도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양을 관찰하면 냉하면 얼음, 구름, 비, 이슬, 안개, 눈으로 형성되고 온도가 높으면 공기, 수증기로 형성되면서 생명에 순응하면 생명의 모양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미묘한 묘법장이라 마음 작용하고 같은 것이다.
391, 일미심(一味心)
한 맛이 일미 라 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일미 라 할 것이다. 집이 마음이란 것은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집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마음가짐이라 일미심인 것이다.
392, 대승심(大乘心)
분별심이 없는 큰마음을 대승심이라 하고 자연스러움을 대승이라 한다. 빛이 생명에 순응하고, 물이 생명에 순응하고, 공기가 생명에 순응하고, 흙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이라 하고, 대승심으로 살아가는 진리인 것이다.
393, 공유심(空有心)
공(空)은 정신을 말하고, 유(有)는 물질을 말하는 것으로 정신과 물질을 겸비한 것으로 육신과 정신이 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산 사람의 정신은 공유정신으로 청정 법신은 생사가 없는 정신으로 항상 청정으로 살면 공유 정신이라 할 것이다.
394, 원융심(圓融心)
원융 무애심을 말한다. 둥근 원을 그리면 시작 점이 마지막 점의 만남으로 둥근 원이 형성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회향심(廻向心)으로 회향은 마지막이 아닌 것으로 다시 시작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를 입학하고 거듭 거듭 하는 것으로 생(生)과 사(死)가 반복이 되는 것이 윤회라 윤회를 고통으로 보지만 본 마음을 찾으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원융 무애 라 할 것이다.
395, 본각심(本覺心)
근본심을 깨닫는 것으로 원래 원만 구족한 지혜와 복덕의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의 본심을 확인하면 견성(見性)으로 성품을 본 것으로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의 본심이 부처님의 마음과 동일하지만 중생 스스로가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아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라 바로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아야 본각심(本覺心)이라 할 것이다.
396, 타파심(打破心)
마음으로 화두를 타파하면 깨달음이라 한다. 화두를 타파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므로 성취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한 문제를 관찰하면 형상과 이름 이전의 형성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 인연 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할 수 있는 마음의 가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치관이 나타나면 이름과 형상의 집착심이 타파되고 마음의 가치관이 확립되는 것이다.
397, 해탈자(解脫子)
육신의 생사는 인연 법으로 거듭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형성되고 마음은 선악업(善惡業)으로 거듭하지만 선악에서 해탈하여야 본성을 본다고 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마음에 무아(無我)정신은 몸은 지수화풍으로 형성되고 소멸되는 인연 법이라 몸이 자연으로 오고 가고 하는 인연 법을 관찰하면 몸의 이름과 모양이 변화하는 과정을 깨달아서 집착심이 없으므로 고뇌가 없으므로 무아 라 하고 해탈자 라 할 것이다.
398, 불국화(佛國華)
불국토는 극락세계이고 불국 정토를 말한다. 사철을 불국 정토라 할 것이다. 사찰은 부처님의 집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되는 것은 마음 청정을 말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여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불성 청정이 본래 있어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깨닫게 하여 고통이 없는 정토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요즈음 환경운동이 생명존엄 운동으로 깨달음 운동이므로 불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실천하게다는 원력이 발심(發心)인 것이다.
399, 불퇴심(不退心)
바름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바름의 양심을 저버리고 욕망으로 자신의 몸에 집착하여 양심을 팔고 나라를 팔고 의리를 팔고 생명존엄을 저버리고 이익을 취득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바름에서 항상 정진하면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혜가 생기고 복덕이 생기고 거짓은 시간이 가면 재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중생의 복덕과 지혜는 바름에서 불퇴심인 것이다.
400, 수선행(修禪行)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수행자의 본심으로 청정심을 말한다. 항상 청정심으로 사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청정심은 바른 마음이므로 바름의 얼을 잊어버리면 선심(禪心)이 아닌 것이다. 수선행은 바른 마음의 지속심인 것으로 실천을 말한다.
401, 항복심(降伏心)
자신의 번뇌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으로 탐진치 삼독심을 다스릴 수 있으면 불 보살님의 마음으로 바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라, 물이 생명에 순응함과 같은 것으로 청정수가 바로 부처님인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름과 모양으로 불 보살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불 보살님에게 예배하면서 돌아서면 물, 공기, 흙을 오염시키므로, 불 보살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이름과 모양으로 부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부처는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없어야 부처을 찾는다 하셨다.
402, 초심자(初心子)
초심은 진리의 발심을 말한다. 바름의 길을 입문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으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아니고 싫어함이 없는 순응하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바름은 청정이고 맑음이고 밝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름의 깨달음이다. 우리는 바름을 마음에서만 찾으려 하니 힘든 것이고, 자연의 청정을 찾으면 바름을 싶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깨침은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하므로 청정을 깨닫고, 바위를 보고 깨칠 수 있고, 폭포 물소리 듣고 깨칠 수 있고, 솔 나무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깨칠 수 있고, 겨울 낙엽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칠 수 있고, 두두물물이 스승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초심자의 마음은 삼라만상의 바름을 볼 줄 아는 마음이다.
403, 원각심(圓覺心)
삼라만상이 부처의 본성이 있어 본래 원만 구족한 존재라는 것이다. 개체마다 본성이 있어 스스로가 주인공으로 스스로의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 부처님의 마음과 동일함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누가 가르치고 지배를 할 수 없고 억압 할 수 없는 존엄성이 완성되어 있어 원각심이라 한다.
404, 지혜월(智慧月)
지혜은 관찰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가치관으로 달이나 거울, 바다에 많이 비유하는 것이다. 마음을 관찰하면 인연 법으로 나타나는 형상 이전의 과거와 형상 이후의 미래가 연결되는 고리가 현재심이라 할 것이다. 현재의 마음을 관찰하면 미래를 알 수 있고 현재의 마음씀을 관찰하면 미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직심의 실천에 있는 것이니, 바른 일, 바른 말, 바른 뜻의 실천은 지혜의 보배 창고인 것이다.
405, 대명주(大明主)
밝음 마음이 주인공이다. 마음의 본성은 청정 법신이라 자연 그대로이고, 마음의 본 성품이 부처님의 마음 같아 부족한 점이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다. 중생은 바름을 망각하고 욕망의 꿈속에서 순간의 즐거움을 찾아 헤메는 착각 속에서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어 순간 순간의 생각이 지속하지를 못하고 분별하므로 지옥과 극락을 순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니, 마음에 밝은 주인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생각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호흡, 보고 듣고 하는 마음을 코끝으로 집중시켜 시간과 공간을 축소시켜 보라, 내 마음속 주인공의 대명주를 볼 것이다.
406, 발심자(發心子)
청정심으로 발심하면 선악심을 분별 할 수 있는 마음에 가치관이 확립되는 것이므로 악심을 일으키지 않고 선심으로 수행 할 수 있는 것이라 남을 구제 할 줄 알고 지옥 중생을 위하여 애민심으로 자비심이 발로하여 남에게 바른 길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가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407, 상도심(常道心)
스님들은 평상심이 도라 한다. 항상 바른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도라 순간으로 일어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욕망, 성냄, 어리석음, 시기, 질투, 고르지 못한 말, 살생, 훔침, 삿된 행위를 하지 않는 수행심이 바름으로 항상심으로 수행하면 평상심이 도란 것이다.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지 호흡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지만 어려운 것은 공기가 청정하여야 하고 힘이 있어야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평상시는 호흡하는 것이 아무런 생각이 없지만 죽음의 문에는 호흡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를 직각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평상시는 모르고 사는 것이니 도(道)심을 잊고 사는 것이므로 공기의 감사와 은혜를 망각하고 오히려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욕망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니, 인간 욕심의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408, 적묵심(寂黙心)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른 마음이다. 시비하는 마음이 아니라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상대의 잘못을 보아도 상대의 마음을 도리어 편안하게 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남을 이익되게 하는 마음이니 불보살의 마음이라 할 것이고 항상 스스로가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발심자라 할 것이다.
409, 일진심(一眞心)
한번 참된 마음을 발심하면 부처가 되는 인연이라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있다는 마음을 발심하면 씨앗이 움트는 것은 자연의 힘을 입어야 하는 것이니, 숙세의 선한 인연이라 하고 선한 공덕이 없으면 장애가 많고 잘되는 일도 갑자기 실패하는 길로 가는 것이니, 항상 남을 위하고 스스로가 수행을 하여야 잘 되는 것이므로, 자연 보호는 남을 위하는 보살행이라 할 것이다.
410, 근수행(勤修行)
쉼이 없이 보살행을 수행하는 마음이라 스님이라 하면 마음을 바르게 하고 고르게 하고 남에게도 이 마음으로 가르치고 수행하게 하는 것이 스님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사회 생활을 보면 살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생활을 하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생활에 물들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회는 어지려운 것이고 오염된 사회라 청정하게 하려면 벌을 받고 언론에서 야단법석이지, 최소한 정토가 되려면 생명존엄으로 상대을 위하는 생명 경제가 되면 너와 나를 속이지는 안는다.
411, 선심자(禪心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중생의 본심인 것이라 항상 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마음의 본심은 바른 마음이라 부처님은 바름을 실천하신 분이시고, 중생의 본심은 바름이나 실천을 하지 못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중생이라도 바름을 실천하는 수행자도 있고, 마음으로는 바름을 알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자도 있고, 바름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고, 악심으로 남을 괴롭게 하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고통이 너무 많아 고통인 줄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어 사람의 마음은 천태만상인 것이다.
412, 광명장(光明藏): 마음은 광명의 보배 창고인 것이다. 아무리 사용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보배 창고 인 것으로 사용하면 사용 할 수록 창고는 더욱 가득한 것이라, 다함이 없는 보배 창고인 것이다. 이러한 보배 창고가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모르고 중생들은 살면서 남의 보배만 욕심을 내는 것이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마음을 찾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마음은 망각하고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는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다.
413, 법계성(法界性)
마음이 우주 공간에 가득한 것이라 빈틈이 없는 것이니, 남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픈 것이고, 남이 배부르면 내가 배부른 것이다. 물질 세상에는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마음으로는 말이 되는 세상이다. 극락에는 팔이 길면 길수록 좋고 지옥은 팔이 길면 길수록 안 좋은 것은 마음 때문이다. 극락에는 남을 먼저 생각하므로 팔이 길면 자신보다 남에게 밥을 먼저 먹이므로 좋은 것이고, 지옥은 반대로 욕심이 많아 먼저 자신이 먹을려고 함으로 팔이 길면 고생이고 먹지를 못하는 것이다. 마침 여우란 놈이 영리하다고 하지만 항아리 속에 먹이를 먹지 못하는 것은 욕심이 많아 항아리 속에 먹이를 지고 놓지 안아 먹지 못하는 것이고, 또 여우가 먹이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가 물 속에 먹이를 물고 있는 여우 그림자를 보고 욕심을 내어 먹을려고 입을 열어 물고 있는 먹이를 놓쳐 버리는 욕심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414, 본래심(本來心)
청정이 지혜라 물이 청정하면 모든 생명들이 잘 자라고 병든 생명도 살아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고요하고 편안한 것이지만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모양을 보고 집착하여 인식하므로 대상에 마음을 일으키므로 자신의 본심을 망각하고 착각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보고 듣고 한 것을 놓아버리고 본심에서 살아가면 자신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다.
415, 법관심(法觀心)
마음을 관찰하면 보이지 않는 모양과 이름이 나열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지혜가 나타난다. 관법은 인연 법으로 모양과 이름의 온 곳으로 돌아가면 모양과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니, 모양과 이름에 집착 할 것이 없으므로 무아(無我)라 하여 자유자재한 마음으로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하여 아라한(阿羅漢)이라 한다.
416, 환희심(歡喜心)
기쁜 마음은 극락 가는 첫 걸음이고 성인이 되는 첫 길이다. 우리는 기쁜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내고 스스로가 재앙을 받아 고통스러워한다. 경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화낸 일이 없는 것이고, 우리들은 남의 말에 현혹되어 대개 마음을 써는 것으로 본심의 바른 마음을 잊고 사는 것이라 남을 말을 잘 믿는 습관이 있다.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본심의 바름에서 살아가면 항상 환희심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417, 수순행(隨順行)
불 보살님의 마음은 수순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원만 성취시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에 수순하시므로 중생을 인도하시고, 물, 공기, 흙의 에너지는 생명들에 수순하므로 원만 성취하는 것이다. 수순하면 모양과 이름이 없으므로 자유자재함을 성취하는 것으로 중생에게는 수순하는 마음을 잊어버리면 성취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418, 원통심(圓通心)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이 원통심이다. 자비의 권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은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님하고 소리내어 부르면 관세음보살님께서 소리에 순응하시므로 원만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는 자비심이 있어 항상 스스로가 보살피는 것으로,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종자 번식을 새가 열매를 먹고 먼 곳으로 가서 배설하므로 씨앗이 움트고 종자 번식을 하는 것이므로 나무 열매는 새의 먹이로 새를 구제하고 새는 먹고사는 은혜에 감사하므로 열매의 씨앗을 산 넘어 날아가서 배설하므로 종자 번식을 하는 것이니, 서로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방법이 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419, 일면불(日面佛)
일면불, 월면불 화두 공안이 있지만 지금도 공안중이다. 일면불은 서산 백제 미소 3존 마애불을 보면 아침에 마애불의 얼굴 표정은 용기를 주는 미소를 하시는데 아침 햇살의 비추는 방향에 따라 마애불의 얼굴 표정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저녁 노울 햇빛에 마애불 표정은 편안한 표정을 느끼게 하여 백제 마애불의 미소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도올 김 용옥은 서울 승가사 마애불을 야밤에 친견하면 학창시절 애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15세 행자시절 부산 마하사에서 탁자 밑 양초 쓰레기 초통에서 연기가 나고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방석으로 불을 끄고 나서 지장보살님 얼굴을 보니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이불 속에 숨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내 마음에 일면불이라 할 것이다.
420, 월면불(月面佛)
마음을 달에 비유를 많이 하는 것은 밝고 맑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삼라만상을 나투는 것이 마침 밝은 달이 천만 강에 비추면 천만 강에 달이 나타나는 것이 화신으로 달 그림자라 하고 원숭이는 물밑에 있는 달을 나무 열매인 줄 알고 물 속에 달을 따려고 밤새도록 물에 들어가지만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해가 뜨면 달은 사라지고 없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이 원숭이의 어리석음이라 하지만, 달을 마음에 비유한 것은 맑고 밝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421, 수산자(水山子)
물과 산은 바로 청정법신 부처님이시다.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고향으로 지옥과 극락을 사후 문제로 말하지만 결국은 현실의 오염과 청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미래의 지옥과 극락인 것이다. 오염은 죽음이고 청정은 산 것이라, 죽어서도 청정하면 청정법신이라 영원한 것이다. 마음이라 이름하면 인간 중심을 말하는 듯하지만 마음의 근본은 청정으로 자연 청정 마음 청정을 말한다.
422, 평상심(平常心)
일상적인 마음이고 듯듯한 마음으로 남이라도 허물이 없는 마음일 것이고 영원심이라 할 것이다. 고락심은 순간, 순간 지속이 돼지을 않고 순간, 순간 마음이 간단이 많고 굴곡이 많아 고통이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 소리가 울음이라 왜 웃음을 짖지 않고 울음소리를 먼저 하는 것일까? 처음 소리는 우주의 원음이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에 “옴”소리를 청정법신으로 우주의 원음이라 하지, 태아의 첫 소리가 “앵” 하는 소리는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탈바꿈하면서 태어나는 생명의 첫 소리인 것이지, 울음소리가 안인 것인데 우리가 웃음소리로 인식하고 있는 고정심이다.
423, 각성자(覺性子)
마음 성품을 깨달으면 견성(見性)이라 하여 마음 공부를 하는 자는 선지식이라 하여 친견을 하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물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본심은 유무을 초월하고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자유자재한 것이라 초조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이고 죽음이 눈앞에 와도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라 저승사자는 모시고 염라대왕은 인사를 하고 아미타 부처님은 영접을 하시니 마침 귀한 손님이라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인 것이다.
424, 본연심(本然心)
근본 인연으로 자연의 도리인 것이고 생명의 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많다고 하나 생명들은 생노병사가 다 있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고통스럽다 하지말고 고통을 즐겁게 생각하고 삶의 밥법으로 생각하면 스스로가 즐거운 것이다. 다만 욕망으로 살아간다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425, 돈각심(頓覺心)
깨침은 직심(直心)이고 선(禪)으로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번뇌가 많아 머리가 두통이 날 지경이라도 바른 마음만 가지면 일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번뇌가 많은 것은 잘못을 숨기고 속이고 하기 때문에 번뇌가 치성한 것이다. 바른 생각만 하면 바른 행이 나타나고 바른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426, 안정심(安靜心)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선정심이라 할 것이다. 선정심에 들면 지혜가 나타나므로 가치관이 확립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미래와 과거를 아는 마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가 없는 상통하는 것으로 번뇌의 허덕이는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물건을 보면 갖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므로 자신의 마음을 억제 할 줄 모르고 남의 좋은 일을 보면 시기하고 싸움을 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자신이 통제가 아니 되는 것은 선정심이 없기 때문이다.
427, 무외자(無畏子)
관음경에 보면 관세음보살님을 두려움이 없는자라 하시고 조건 없이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이라 무외대비심(無畏大悲心)이라 한다. 대자대비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생명에 순응함으로 무연대비(無緣大悲)로 구제하시는 것이다.
428, 일지엽(一枝葉)
한 가지 줄기에 한 잎사귀는 연잎으로 다른 나무나 풀잎하고는 특이한 것이다. 연잎은 물방울이 착하지 못하는 것이 오염되지 않는 연꽃처럼 보인다.
429, 일지화(一枝花)
한 줄기에 한 숭이 꽃은 연꽃으로 시궁창에서 피지만 오염에 물들지 않고 청정으로 오염물을 청정하게 하고 불교 꽃이라 하고 부처님을 연꽃에 비유하는 것은 오욕락에 물들지 않고 청정의 진리를 성취하신 분으로 천인사(天人師)라 한다.
430, 원명심(圓明心)
밝음은 시종이 없는 것이라 처음과 끝을 말 할 수가 없다. 마음을 둥근 원상으로 표현하고 일원상(一圓相)이라 하여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둥근 원을 그리려면 처음점이 끝점으로 만나면 원의 그림이 형성되면서 진리라 표현한다. 시종이 만나면서 둥근 원이 되는 것은 시종의 지속으로 시종이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한함을 말하는 것이다.
431, 자연성(自然性): 자연성은 순수함을 말하는 것으로 진리의 성품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대상의 힘이나 억압이나 강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바위처럼 아득한 옛적부터 생긴 것으로 자연의 비바람으로 마멸되어 과정을 자연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의 성품도 번뇌의 고락의 강약이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품은 시종이 없는 아득한 그윽한 모습이다.
432, 수성심(水性心)
물은 습한 것이 성품이라 물이 냉온에 따라서 얼음․수증기․구름․비․눈․안개․이슬․물로 형성되면 중생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말하고 진리인 것은 모든가 물이란 것이지만 물이라 이름해도 맞지를 않는 것이다. 두두물물이 마음이라 하여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말하지만 마음이라 하면 잘 모르고 진리로 마음이라 하면 이해가 되지만 중생 세계는 분명한 것을 말하므로 두두물물이 마음이라 하면 모른다.
433, 자광심(慈光心)
자비 광명은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수행하면 부처님의 마음이 자신의 본성임을 아는 것으로 귀로 소리에 집착하고 눈으로 모양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상대의 경계를 비우고 방하착하면 본심의 청정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즐겁고 싫어함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번뇌인 것이다.
434, 대적심(大寂心)
사찰에 가면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곳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청정 법신은 모양과 이름이 없는 것으로 자연의 진리이고 마음의 본 성품 자리를 말하지만 방편으로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내어 법당에 모신 것이다.
435, 만공심(滿空心)
텅빈 충만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여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 정신이 바로 물질이고, 물질이 바로 정신인 것으로 무소유(無所有)정신을 말한다. 무소유 정신을 공무정신으로 공무원들의 공유(空有)정신인 것이다. 시민 공원을 공유지라 하고 국유지라 하고, 요즈음은 지방 자치제로 세금도 지역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436, 삼보심(三寶心)
세상에서 3가지 보배를 삼보(三寶)라 할 것이다. 삼보는 부처님, 법, 청정 대중인 승가를 삼보라 하여 항상 진리로 수행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르고, 고르고, 맑고, 밝은 본심의 청정으로 살라는 것이다.
437, 법왕궁(法王宮)
부처님을 법왕이라 하신다. 법왕심은 우리의 본심으로 항상 같이 하는 것이므로 긍정심을 가지고 항상 쾌활하게 살면 재앙이나 삿 된 것은 스스로 물려 가는 것으로 바르게 살면 바르지 못한 것은 서서히 바르게 되고, 맑지 못한 것은 서서히 맑아지는 것은 바름의 힘인 것이다. 바름의 힘은 서서히 개인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 우리라는 대중성이 있는 것으로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면서 더불어 사는 정토가 형성되는 것이다.
438, 법성심(法性心)
법의 성품은 삼라만상의 동일성이다. 모든 생명이 물․공기․흙․빛의 자연의 은혜를 받으면서 자라면서 나무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열매는 모든 생명에 먹거리로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니, 은혜와 감사를 서로 서로 하는 자연의 도리가 법성심이다. 사람도 법성심만 찾으면 부처님도 될 수 있고, 극락 지옥에 가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의 행위인 것으로 바른 뜻․바른 말․바른 일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439, 위덕심(威德心)
위엄과 자비 덕상을 갖추신 분으로 엄하고 인자한 아버지 상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32상 80종호를 갖추신 부처님을 친견하면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따르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나타나는 분위기는 다생으로 수행하신 결과라 할 것이다. 인연이 있는 자는 만나면 더욱 만나고 싶고 부부라도 얼굴을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원인은 전생에 살생한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440, 호법심(護法心)
바름 마음을 일으키면 호법신들이 옹호하는 것이라. 바른 법을 수행하면 호법 선신들이 옹호하시고 바른 마음을 가지면 도우는 사람이 생기고 주위 분위기가 좋고 따르는 무리가 많은 것이다. 재물 보시도 복덕이 많지만 바른 가치관은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441, 우경심(牛耕心)
밭가는 소는 마음 닦는 수행자를 말한다. 심우도(尋牛圖)는 소 찾는 그림으로 마음 닦는 과정을 그린 그림으로 소를 마음으로 표현하여 서서히 흰 소가 되어 결국은 소도 없고 찾는 수행자도 없고 텅텅빈 허공만 나타나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본래모습인 것이다. 찾는 차례가 다 망상으로 부질없는 일인 것을 깨달음으로 본래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42, 향화심(香花心)
부처님께 꽃과 향으로 공양을 올리면 자연의 모습에 감사와 은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육법 공양이라 하여 자연의 꽃, 향, 등불, 과일, 쌀, 청정수의 차를 올리는 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자연의 청정인 생명존엄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은혜하는 것으로 오염시키지 않으므로 은혜하는 것이고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지 안으므로 청정 본심을 찾는 것이다.
443, 정주심(淨主心)
맑은 마음으로 사려는 청정심을 말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욕심이 없고 지옥도 가지 않지만, 오염은 자신의 생명도 죽고 다른 생명을 죽이고 지옥을 스스로 가는 것으로 중생들은 살아생전에 욕심으로 살다가 지옥 고통을 받으면 도리어 원망하는 어리석음이 욕망인 것이다.
444, 법의주(法意主)
진실은 바름을 빛나게 하고 거짓을 바르게 하고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천진성을 말한다. 밤손님이 어린 갓난아이에게 칼로 위협을 하자 어린 아이는 웃고 마는 것이라 천진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라 밤손님이 도리어 질겁을 한 것이다. 진실하면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고 거짓에는 목숨을 받치는 정의감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나타나면 분명하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힘이라 지혜 스러운 법의주가 되는 것이다.
445, 도명심(道明心)
이치에 밝고 분명한 자로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이다. 영어나 한자를 많이 알면 지식이라 하지만 지혜는 영어나 한자를 몰라도 지혜는 있는 것이다.
지혜는 모양과 이름에 집착이 아닌 가치관을 말한다.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려면 사물의 모양이나 이름이전으로 생각이 들어가야 과거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마음으로 종힁무진하면 자유자재한 마음으로 모양이나 이름에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다.
446, 홍법심(弘法心)
법을 전하는 전법자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열반으로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결집하면서 부처님 마음을 전해 받은 가섭존자가 아난이 부처님의 시봉을 하면서 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요즈음 녹음기처럼 아는 것이지만 결집하는 자리에 가섭존자가 참가를 못하게 한 것은 마음을 알지 못한 자로 아난은 다시 용맹정진하여 마음을 알고 결집에 참가한 것을 보면 부처님 마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47, 서원심(誓願心): 불 보살님들의 서원이 다 함이 없고, 중생들의 서원이 다 함이 없고, 미래가 다 함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진리 성취가 아득한 시간이라 생각하지 말고 직시에 앞뒤를 생각하지 말고 곧 바름을 실천하라, 몸으로 바른 일을 실천하기를 서원력으로 삼고, 입으로 바른 말 하기로 서원력으로 삼고, 마음으로 바른 뜻을 실천하기로 서원력을 삼고, 바른 일, 바른 말, 바른 뜻의 삼정심(三淨心)을 서원력으로 삼고 실천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자신의 본성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448, 장엄화(莊嚴華): 장엄은 극락세계 장엄이 수승 할 것이다. 아미타경에는 극락 세계는 사방 흙이 금이고 산천 나무풀이 금이라 재물에 욕심이 없고 생각만 하면 물질이 생각대로 성취됨으로 욕심이 없는 세계이고 남녀 관계가 없이 생각만 하면 화생으로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과정이 마침 유전자 뿌리세포의 생명 탄생을 생각하게 한다. 남녀 관계가 없으므로 시기 질투 음행 삿된 마음이 없는 것이고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구조상 상상 근기의 복락이라 할 것이다.
449, 평등심(平等心): 평등심을 우리는 인식하지를 못한다. 평등심은 자연으로 산소가 공기이고 물이고 생명인 것이다. 호흡하는 공기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우리는 5분만 질식하면 사망인 것이지만, 평상심은 공기의 은혜를 모르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도리어 욕심으로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물질의 욕망으로 생명을 돈으로 죽이고 힘으로 죽이고 먹기 위해 죽이고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죽이고 장사하면서 죽이고 가축을 기리면서 사고 팔고 죽이는 것이니, 이것이 업으로 나타나지만 잘 모르는 것이니, 평등심을 모르는 것이다.
450, 관찰심(觀察心)
마음을 관찰하면 선(禪)이라 하여 부처님 마음으로 통 할 수 있고, 자신의 본성을 찾는 길이다. 마음으로 보고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보고 듣고 하는 것이 경계에 집착하여 천태만상으로 분별하지만 보고 듣고를 마음으로 관찰하면 하나가 됨이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451, 안주심(安住心)
편안을 찾는 마음은 집착심이 없는 마음이고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 보살님의 마음이고 우리의 본성인 것이라, 두두물물이 다 본성이 있으므로 낱낱이 두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누가 흉내를 낼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바다 변에 조약돌을 보라 모양새가 각각으로 같은 것이 없는 것이 자연으로 생긴 것이 인위적인 시간과 공간에 구애을 받지 안는다.
452, 적정심(寂淨心)
물그릇에 황토 물을 요동시키면 흙물이 되면 물 속이 보이지를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맑은 물이 되고 흙물이 고요하면 적정(寂靜)이라 할 것이다. 마음으로 경계를 보고 듣고 집착하여 고정인식으로 고집한다면 고뇌일 것이다. 그러나 경계의 모습과 이름을 마음에서 비우고 반연하는 것이 고요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의 생각이 기억나고, 또 미래를 깊이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453, 성덕(聖德)
넓고 큰 것을 자비심이라 하고 성인의 덕성으로 마하 반야 라 하여 큰 지혜는 큰마음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마음은 미워도 싫어함이 없는 자비심이고 부모 마음으로 부모가 자식을 꾸중하는 것은 미워서 그려한 것이 아니고 자식이 미래에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미래심인 것이다. 큰마음은 과거를 뉘우치는 현재심이 과거심이고, 미래의 희망을 원력으로 설계하고 기획하는 마음의 미래심을 현재심으로 실천하므로 과거․현재․미래가 동일 한 것이 큰마음의 성덕심이다.
454, 조복심(調伏心)
흙 물그릇 물을 맑게 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수행하는 마음을 조복심이라 하고 번뇌의 삿된 마음을 스스로가 조복 할 수 있어야 청정심이라 할 것이다. 경계의 모양과 이름을 보고 듣고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을 비우고, 본심의 원만 구족한 지혜와 복덕으로 바름을 실천하면 번뇌 마음을 조복 할 수 있는 것이다.
455, 신행자(信行子)
부처님 가르침을 수행하는 자로 불제자라 하고 불법승(佛法僧)삼보에 귀의하는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불법승인 불성(佛性)을 찾는 선(禪)을 한다.
선(禪)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바름을 실천하는 마음이다.
456, 흥운심(興雲心)
비행기를 따고 하늘을 날면 구름이 산천에 자욱한 것을 보면 구름을 따고 싶은 어린 동심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 자세가 일어난다. 등산을 하면 산마루를 따고 가면 하늘을 걸어가고 있는 마음을 하고 있고 시인이 되어 시 한 수를 지어보곤 하여 자신의 깊숙한 마음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다. 흥운심은 항상 마음을 즐겁게 하고 미래 상상력의 원력심을 증장시키는 희망심이다.
457, 이구자(離垢子)
번뇌을 해탈한자로 부처님을 말하지만 중생의 본심을 말하므로 자리 이타행의 보살심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자비심의 실천자 요즈음 말로는 봉사자를 말한다.
458, 공덕해(功德海
바다를 공덕 바다라 하는 것은 싫어함이 없이 천만 갈래의 샛강 오염물을 받아 들여 청정으로 거듭나는 것이니,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마음의 본심을 말하는 것이다.
459, 자인심(慈忍心)
참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머니 마음을 자비심이라 하지, 어머니하고 부르면 아들의 허물을 시비하지 않고 가슴으로 포응하면서 자식의 잘못을 어머니 가슴으로 감싸주시면서 자식의 허물이 부모님의 허물로 변하는 관계가 일어나면서 부모님 마음은 불 보살님의 마음으로 나타나 시비을 초월하는 자비심이 자신의 본심이라 할 것이다. 본심에서는 시비 선악이 없는 청정법신의 자리이다.
460, 대희자(大喜子)
대희 대사 대세지 보살님은 우리들은 잘 모르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자비심의 화신으로 생명의 소리에 순응하시는 분으로만 대세지보살님은 생명력 자체이므로 자비심을 화현 보다도 살아가는 자체를 말한다. 아미타불의 좌우보처는 관음, 대세지보살이지만 우리는 지장보살님만 찾는다.
461, 수승행(殊勝行)
수승한 수행력은 정진력으로 생명력인 것으로 만리 장천을 날려는 기러기의 생명력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피로하지 않은 힘의 근원을 유전자 연구에서 발견하여 약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피로한 것은 병으로 치료 할 수 있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을 사람의 생리 작용으로 보고 사람으로 태어나면 맞당히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지만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수행자도 있다. 잠을 자는 것은 몸의 집착심으로 집착심이 마음에서 비워지면 의식 세계에서 무의식 세계로 마음은 잠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462, 원일화(圓一華)
대각심(大覺心)이고, 원각심(圓覺心)으로 청정심의 본심을 말한다. 청정의 본성은 사람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근본인 것이다. 청정이 불성(佛性)으로 부처 라 하여 빛이라 한다.
463, 비로심(毘盧心)
청정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마음으로 자연을 청정 법신이라 하여 자연 자체을 부처로 보는 것으로 법신은 생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력인 것이다. 씨앗이 자라는 힘은 영원한 것이라, 한 씨앗이 썩고 모양과 이름을 거듭하는 것은 모양과 이름은 다르지만 씨앗의 생명력은 다른 생명력의 새싹으로 거듭 나는 것이니, 씨앗의 물질이 생명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공(空)의 정신으로 정신인 생명력이 거듭 물질의 새싹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원한 생명력인 것이다. 영원한 생명력을 법신(法身)이라 할 것이다.
464, 무생심(無生心)
남이 없는 것은 번뇌가 없는 불 보살님을 말한다. 부처님 법을 물으면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하신다.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 이 문에 들면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는 절 입구나 선방 입구에 있는 말씀을 자주 보는 것이다. 중생이 안다는 것이 장애인 것이라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마음 본성에 장애를 하는 것이니, 보고 듣고 한 경계를 방하착하고 자신의 본성에서 보고 듣고 하라는 것이다.
465, 수승주(殊勝珠)
마음의 주인공은 밝은 구슬과 같아서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는 것이 마침 마음과 같아 수승주는 마음의 본성으로 주인공이고 달이고 해의 실상을 말한다.
466, 무용심(無用心)
씀이 없는 마음이라 보고 듣고 하는 마음은 씀이 있지만 형상과 이름에 집착한 것이라 장애가 일어나므로 유무 자재를 하지 못한다. 씀이 없다는 것은 형상이 있다는 마음을 타파하므로 형상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리어 씀이 있는 것이다.
467, 자성심(自性心)
자신의 본심을 자성심이라 하고 중생과 부처가 다 자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살아가는 것이 다 자신이 만드는 행위인 것으로 몸으로 바른 일을 실천하고, 입으로 바른 말을 실천하고, 마음으로 바른 뜻을 실천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자성으로 통하는 것이다. 과거를 원망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바로 바름을 실천하면 자성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최상의 길이다.
468, 경심대(鏡心臺)
마음은 거울 같아서 경심대(鏡心臺)라 하고, 저 세상에는 업경대(業鏡臺)라 하여 염라대왕의 선악 분별하는 마음의 거울 틀이고, 스님은 허심대(虛心臺)라 하여 허공 같은 마음이라 한다. 경심대는 현재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청정심이라 할 것이다.
469, 멸진정(滅盡定)
번뇌가 다함이 없지만 번뇌가 다하면 마음이 고요하여 지혜가 생기는 것이라, 마치 거울이 맑음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잘 보이는 것이고, 바다가 바람의 번뇌가 불면 파도가 산처럼 일어나므로 바다 수면에 형상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멸진정은 지혜를 말한다.
470, 법만심(法滿心)
텅빈 충만은 진리를 말한다. 이름과 모양의 물질 세계는 텅빈 것이고 이름과 모양이 아닌 진리 세계는 충만한 것이라 텅빈 충만이라 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공은 정신이나 정신에 집착이 아닌 것이고, 묘유는 물질이나 물질의 집착이 아닌 것이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이라 무소유(無所有)의 공무(空無)정신으로 공무원의 공심(空心)이라 국민을 위한 공무원은 현재의 불 보살님의 마음으로 실천하고 있는 미래의 불 보살님들의 마음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다.
471, 해공자(解空子)
부처님 제자 수보리를 해공 제일 제자라 하여 금강경 말씀에 수보리를 선재 선재라 하신 부처님은 수보리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시는 말씀이다. 마음을 비우고 집착심이 없는 제자는 수보리가 으뜸이란 것이다. 금강경 말씀은 마음을 공(空)이라 하시고, 금강이라 하시고, 텅빈충만이라 하시고, 시종이 하나인 공심의 무소유 정신인 것이다.
472, 무명자(無名子), 473, 무상심(無相心)
이름과 모양이 없다는 말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심이 없는 자로 싫어함이 없는 자라 고정인식으로 고뇌하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라 하여 이름과 모양으로 집착하여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생전에는 천하에서 자신이 제일로 생각하고 남을 억압하고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두렵고 울고 슬펴서 안절부절이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름의 집찹이 원인인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만 마음에서 놓아 버리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474, 불매자(不昧子)
전 백장 후 백장 스님 이야기는 대도인도 인과에 떨러집니까? 안 떨러집니까? 하니 불락인과(不落因果)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5백생으로 여우 몸을 받아 고생을 하는데 하루는 스님 설법회에서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답을 듣고 여우 몸을 벗었다. 전 백장은 도인은 인과에 장애가 없다 하였고 후 백장은 도인도 인과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도인(道人)일지라도 인과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475, 공적심(空寂心)
모양과 이름의 분별심은 생사심이지만 공적심은 우리의 본심으로 지혜와 복덕이 원만구족한 마음으로 바름의 지혜라 할 것이다. 바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것으로 모양과 이름의 분별심도 아닌 것으로 허공에 가득하면서도 모양으로 보이지를 않고 소리로 들이지도 아는 것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공적심은 본래 마음으로 중생이 귀의할 곳이다.
476, 부동심(不動心)
본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으로 태산 같은 마음이고 왕래가 없는 마음으로 생사가 없는 마음으로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마음으로 항상 머물러도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가고 옴에 자유자재하는 것이다.
477, 상주심(常住心)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마라 부처님을 모양과 이름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므로 소리와 모양을 떠난 자리에서 보고 듣고 하는 것이므로 상주법신(常住法身)이라 하여 청정을 말하므로 청정은 항상 생명력으로 공기․물․흙으로 항상 같이 하지만 중생이 자신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자신으로 생각하므로 상주설법을 보고 듣고 하면서 모르는 것이다.
478, 삼계주(三界主)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이시므로 삼계 스승이시고 주인공이시다. 삼계는 욕계․색계․무색계로 부처님께서 하늘, 인간을 귀신 지옥등 모든 세계을 28천으로 나누어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무소유의 주인공이시므로 물질의 주인공이 아니고 정신의 주인공이시다.
479, 여시자(如是子)
부처님 경전 첫머리에는 항상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하신다. 부처님 제자 아난이 부처님과 같이 설법을 하므로 아난은 항상 이와 같이 여시(如是)라 하여 부처님 말씀을 한 것이다. 여시자는 아난을 말하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아난이고, 부처님 마음은 가섭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는 부처님 말씀이 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모든 것이 청정법신으로 영원한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중생의 마음에 상주설법을 하시는 것이다.
480, 심우자(尋牛子)
심우도(尋牛圖)는 사찰 벽화로 많이 알려져 있다. 수행자가 소를 찾는 그림으로 마음 수행 차례를 표현한 것이다. 소를 마음으로 그림으로 표현하여 수행자가 소를 찾아 깊은 산중으로 다니면서 누른 소가 흰소로 변하고 소의 그림자도 없어지고 수행자와 소도 없어지고 자연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심우자는 다르게 목우자(牧牛子)라 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를 말한다.
481, 지족심(知足心)
부처님의 경제관은 지족심으로 족할 줄 아는 마음으로 무소유를 말한다. 금강경에는 지구에 가득한 금은 보배보다도 부처님의 말씀 한 게송을 알면 공덕이 더 수승하다고 하신 것이다.
482, 백의자(白衣子)
백의자는 관세음보살님이시다. 흰옷 차림에 약병을 가지신 분이 관세음보살님으로 중생의 병고를 항상 자신의 병고로 생각하시고 중생의 어머님이시다. 관음경 말씀은 마음으로 관세음보살하면 소리에 순응하시는 분으로 싫어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483, 해탈심(解脫心)
생사 해탈은 몸으로는 할 수 없는 것으로 마음으로 물질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없으므로 물질에 장애를 받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왕래가 없으면 생사가 없는 것이라,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번뇌가 없고 생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몸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484, 무위심(無爲心)
함이 없는 마음은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자연에서는 도인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불보살 마음이라 하고, 씀이 없는 마음으로 대용(大用)이라 상대에 관계하지 않는 마음으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아닌 것이다. 무위심은 장단에도 관계하지 않고 시비 선악에도 싫어하지 않고 생사에 장애가 없는 마음으로 자유자재한 마음이다.
485, 환희장(歡喜藏)
무의식의 환희심으로 조건에 관계하지 않고 마음의 잠재력인 마음의 본래 모습은 지혜와 복덕의 보배 창고인 여래장(如來藏)인 것이다.
486, 사홍심(四弘心)
부처님의 네 가지 큰 발원심으로 스스로의 원력으로 중생을 다 구제하고, 번뇌를 다 끊고, 법문을 다 배우고, 불도를 다 배우리라 하신 스스로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이시고 각자 스스로의 마음으로 본 성품으로 돌아가자는 원력인 것이다.
487, 연기행(緣起行)
서로 서로 관계의 고리인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말 할 수 없는 것으로 연기 법으로 보면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인 것으로 찰나, 찰나 모습과 이름이 변천하므로 고정인식으로 모양을 보고 소리를 듣고 이름과 모습을 말하면 고정인식의 거짓이라 실상을 보지 못한 것이다.
488, 정도행(正道行)
바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것이다. 깨침을 바름이라 하고 맑음․밝음으로 평등, 자유란 표현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참희심에 관계하지 말고, 미래의 희망를 바라지 말고, 현재심으로도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대용심(大用心)으로 목숨을 다해 실천하면 무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잡듯이 하고 외 아들를 천길 우물 속에서 구하는 마음의 간절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살아가라. 이 마음을 지속한다면 정도행이라 할 것이다.
489, 무진행(無盡行)
다함이 없는 행으로 보현보살의 마음으로 실천행 보살심을 말하고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 보살님의 마음이고 우리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불 보살님의 마음은 자비심으로 중생의 모양과 소리에 싫어함이 없이 순응하시는 분이시고, 자비심은 중생의 본래 모습이라 원력심으로 다 함이 없는 마음인 미래심이라 할 것이다.
490, 황면자(黃面子)
누른 얼굴은 황금색으로 부처님 얼굴을 말한다. 황면노자(黃面老子)로 부처님의 다른 존칭으로 부처님의 몸에서 빛이 발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얼굴만 보아도 환희심을 발심하고 삿 된 마음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니, 얼마나 수승한 공덕인가? 질투, 시기 억압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환희심을 발하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가피력이다. 선지식을 친견하면 삿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에 바름의 가피력을 입는 것이므로 선지식을 친견하는 법회를 하는 것이다.
491, 진실행(眞實行)
봄이 오면 산천초목이 움트는 자연의 이치를 진실이라 하면 거짓말은 아닌 것이다. 움트는 기운은 누가 억압․시기․질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자연의 따스한 기운으로 산천초목의 본래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빛의 진실성, 물의 진실성, 흙의 진실성은 싫어함이 없이 삼라만상에 순응하여 모양과 이름의 본래 모습을 원만 성취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피력인 것이니,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시다.
492, 묘음심(妙音心)
음성 세계는 고통의 소리에 순응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지중한 것이다. 소리 성품을 묘음성(妙音聲)여래불이라 하여 소리로 아는 부처님을 말한다. 눈, 귀, 모든 것이 구조와 작용은 각각이지만 귀의 작용으로 소리를 듣고 아는 것을 묘음성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소리가 귀로 통하여 마음으로 하나가 된 것을 묘음성 부처님이라 한다.
493, 향적심(香積心)
코의 작용으로 향기를 느끼는 것이니, 향적 여래불(香積 如來佛)이라 한다. 부처님은 한 국토의 주인공이시므로 향기의 상서러운 장엄의 세계는 극락 세계가 제일이지만, 향기로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가짐으로 사는 세계에는 향적 여래불께서 주인공이시다.
494, 법희심(法喜心)
법희 여래는 혀로 맛을 아는 것은 혀의 맛이 마음으로 상통하면 아는 마음으로 청정심의 여래장인 본심으로 하나가 됨이라 진여심이 법계에 두루하여 자연으로 더불어 하나가 본성하고 둘이 아니므로 법희 여래불이라 한다.
맛 세계의 주인공은 법희 여래불이시다.
495, 지승심(智勝心)
몸으로 접촉하여 마음으로 상통하여 아는 것으로 하나가 됨으로 지승 여래불이라 한다. 몸은 지수화풍으로 물질의 원소로 삼라만상을 형성하고 삼라만상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가 항상 청정법신으로 금강 불괴신으로 영원한 것이므로 지승 여래불이라 한다.
496, 법명심(法明心)
뜻으로 분별 사량하는 마음이 부처님의 팔만사천의 법문이라, 일 찰나에 9백 생멸심으로 법진 번뇌가 다하면 여래장의 묘진여심(妙眞如心)이라 법명여래(法明如來)라 한다.
497, 천진심(天眞心)
천진심은 어린 아이의 순진한 미소의 마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와 나의 분별이 없고 상대의 시비에도 반응이 없는 희비애락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두려움도 없고 시기․질투․원망․증오가 없는 마음으로 청정 무구심(淸淨無垢心)을 말한다.
498, 무구심(無垢心)
청정한 마음이 무엇인가? 소리가 경계에 있는가? 내 마음에 있는가? 소리는 내 마음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고, 귀도 아닌 것이지만 경계와 소리와 귀와 마음으로 상통하면 소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경계로 인식하지만 소리를 아는 것은 내 마음인 것이므로 소리가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이 내 마음밖에 경계라 하겠지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일반 상식으로 자연은 마음밖에 일로 생각하지만 오해인 것으로 마음의 문제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연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면 무구심이라 할 것이다.
499, 멸진자(滅盡子)
번뇌가 없는 자는 부처님으로 다른 명칭으로 금인(金人)이라 한다. 금은 항상 빛을 발하여 밝음을 말하고 어둠과 삿 된 것을 스스로 다스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바름의 공덕은 삿 됨이 스스로 해결되는 가피력이 있는 것으로 바름을 실천하면 옹호자들이 스스로가 마음을 일으켜서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이 선신의 의무와 권리인 것이다.
500, 정인심(正印心)
바름의 도장은 깨침인 것이다. 중생심은 정인심이 있는 것이지만 간직한 것을 망각하고 눈으로 모양에 본심을 망각하고 안다고 하고, 귀로 소리에 본심을 망각하고 안다고 오인하여 마음으로 분별심을 일으켜서 고통 서러워하는 것이다. 아는 마음만 놓아 버리면 자유자재한 마음의 본심을 볼 것이다.
501, 일모혜(一毛慧)
한 티끌이 우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한 개를 떠난 우주가 없는 것이다. 바름은 이웃하지 않는 것이고 두려한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분별하지 마라.
오로지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 바름의 실천이고 바름을 상대성으로 보지말고 바름을 경계에 비교하지 말고 본래모습의 원만구족의 성품에서 보라.
무간 지옥의 고통이라도 한 생각만 있으면 무간 지옥을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무간옥에서 부처님을 한번 생각 할 수 있는 힘은 마음의 힘으로 가피력이라 할 것이다.
502, 자아심(自我心)
스스로의 마음은 너나의 마음이 아니고 우주 전후의 마음도 아니고 소소 령령한 뚜려한 것이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것으로 헤아릴 수 없고 싫어함이 없고 적나나하고 탕탕하여 무애 자재함이라 누구의 간섭이나 억압을 할 수 없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닌 것이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503, 돈발심(頓發心)
몰록 발심을 할 때가 많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佛性)인 부처님 마음이 스스로가 본래 구족한 것이라 하면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은 중생의 보고 듣고 하는 고정인식으로는 당연한 인식으로 이 고정인식을 타파하여 발심하게 함이 돈발심이라 한다.
504, 일념지(一念智)
한 생각 잘하면 극락이 나타나고, 한 생각 잘못하면 지옥이 나타나는 것이니, 한 생각이 우주를 형성시키고 마멸시키는 것이다. 개울에 둥근 돌은 물도 잘 흐르지만 모난 돌은 물도 모나게 흐르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이 둥근 모양이면 화합하는 생각이 잘 일어나고 험상찍한 얼굴은 인상부터 써는 것이라, 지혜인은 얼굴에 여연하지 않고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라 모양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한 생각이 모양과 이름을 만드는 것이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505, 연등심(燃燈心)
부처님께 등 공양은 마음의 빛으로 지혜를 말하고, 부처님 마음을 빛으로 생각하고 맑음․밝음․고름․바름이 평등이고 자유라 한다. 부처님 오심을 연등으로 감사하는 것은 생명에 빛으로 오심으로 거듭 태어남을 뜻하는 것이다.몸의 탄생은 부모님이고 마음의 탄생은 부처님이시다.
506, 선다심(禪茶心)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고 중생의 본성인 것으로 다심(茶心)이 선심(禪心)과 다르지 않아 차 마시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란 것이다. 조선 말기 초의(草衣)스님은 선심 다심(禪心 茶心)을 말씀하시면서 선심의 마음을 일반 생활선(生活禪)으로 대중화시킴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게 한 것은 본래심으로 잊어든 마음을 찾은 것으로 자연과 선심(禪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507, 선미심(禪味心)
맛의 공양은 쌀, 과일, 꽃을 부처님께 공양하면 부처님 마음으로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다. 열매의 결실을 맺는 것은 빛․물․공기․흙․자연의 은혜를 받은 것이고, 열매는 자연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거듭 생명을 구제함은 양식으로 자연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깨달음으로 스스로가 배반하지 않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희심에서 웃는 마음으로 발심하여 모든 행위에 싫어함이 없는 불 보살심의 실천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이다.
508, 선과심(禪果心)
자연의 열매 결실을 부처님께 공양함은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체험함으로 열매의 과일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사고 팔고 하는 것이지만 중생은 경제의 돈으로만 생각하고 돈을 많이 받으면 기뻐하고 작으면 싫어함이니, 선과심(禪果心)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이 자신의 목숨이므로 물, 공기, 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509, 무루심(無漏心)
다함이 없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말한다. 중생의 원력은 무한한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고 중생의 능력이고 생명력이다. 우리가 나약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생명력으로 보면 무한한 능력이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무엇이든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명력은 공기, 물, 빛, 흙이 1차 생명력이라면, 2차 생명력은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나는 생명체들이다. 무루심은 무의식을 개발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고정인식을 바꾸어 놓는다.
510, 대덕심(大德心)
복덕이 많은자를 대덕이라 하지만 경제보다도 마음의 진리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자를 대덕이라 한 것은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생명들은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비가 오면 생명들이 스스로가 자라는 것이고 빛을 보면 스스로가 자라는 것이므로 대덕이라 할 것이다.
511, 화엄장(華嚴藏)
화엄은 원만한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성취를 말하므로 꽃이 피면 원만성은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므로 분명한 것은 결실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화엄이라 할 것이다. 태양이 빛을 발하므로 생명들이 생명력을 얻는 것을 불가사의한 것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512, 무쟁심(無諍心)
다툼이 없는 마음을 얻으면 아라한(阿羅漢)의 성인이라 한다.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려는 마음은 중생심으로 욕망으로 중생세계는 본능이라 하지만 잘못된 인식이다. 번뇌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마음으로 투쟁을 하면 힘으로 대상을 억압하고 시기 질투 테러 전쟁으로 남의 목숨을 강제로 항복시켜서 이익을 차지하고 자유 평등을 구속시켜서 생명력의 무한한 능력을 강탈하므로 반대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자유를 찾아 목숨을 버리는 희생이 반복되는 것이므로 욕망을 본능이라 하여 사람의 가치관을 물질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본능이란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513, 관음자(觀音子)
관세음보살님을 관음자 라 한다. 소리를 관하면 관하는 자와 관할 것이 서로 상통하여 하나가 됨으로 진리라는 가치관의 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을 보면서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아는 것은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이다. 관음자가 한 분이 더 탄생하는 것이다.
514,수기심(授記心)
부처님께 수기를 받는 것은 미래세에 부처님이 된다는 예언인 것이고 부처님 당시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깨달은 자가 부처님의 제자이시고, 요즈음은 5계 10계를 받고 삼귀의계를 실천하면 불자(佛子)라 한다. 계를 받고 부처님 명호를 받는 것은 불자가 되는 인연으로 미래세에 부처님이 되라는 원인의 인연이 되는 수기인 것이다.
515, 호법자(護法子)
부처님의 법을 바름이라 하고 바름은 삿 된 번뇌가 스스로 물려나고, 바름을 옹호하는 선신들을 불교에서는 국왕 대신들을 외호신이라 한다.
516, 안국심(安國心)
극락세계를 안국이라 하고 정토라 하여 더불어 사는 세계로 나 자신보다도 먼저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상(我相)이 있으면 성취 할 수 없는 세계라 할 것이고 집착심이 없으므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517, 관찰심(觀察心)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모양을 보고 귀로 이름을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면 시간과 공간을 자재 할 수 있는 것이라 마음은 모양과 이름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고 듣고 하면 과거 현재 미래에 상통하는 것이다.
518, 길상화(吉祥華)
봄이 오면 산천에 초목이 움이 트고 옹기종기 땅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모습이 길상이고 꽃피고 향기 진동하는 모습이 길상으로 생명마다 결실로 열매가 산천에 지천이니, 생명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답고 참으로 길상이다. 청정하면 더욱더 길상인 것은 공기가 청정하면 전염병이 없고 모든 열매가 충실하고 풍년이 들고, 물이 또한 그러하므로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면 대상의 경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니 참으로 길상인 것이다.
519, 무량수(無量壽)
무량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아미타불을 무량수 무량광(無量壽 無量光)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부처님을 말한다. 무량은 다함이 없는 것으로 부처님의 원력이 다 함이 없고, 중생의 원력이 다 함이 없고, 시간의 미래가 다함이 없고, 생명이 다 함이 없는 것이다. 석가부처님은 중생이 다 정각을 성취하길 원력이시고, 아미타불은 극락 정토에 다 태어나기을 원력이시고, 지장보살님은 중생이 다 고통을 여이기를 원력이시고, 관음보살님은 생명의 소리에 싫어함이 없이 순응하시는 것이 원력이시다. 생명은 모두가 생명력이 있고 자비심이 본래 원만 구족하여지만 몸에 집착하여 살기 때문에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집착심만 타파하면 본성 자리가 나타나는 것이 무량심인 것이다.
520, 법음성(梵音性)
하늘의 음성은 성인의 마음이고 중생의 본성인 것이다. 하늘의 음성을 들을려고 하지말고 자신의 본성를 관찰하고 항상 호흡하는 것처럼 놓치지를 말라. 마음을 호흡 끝에서 관하기를 놓아버리면 자신의 마음을 놓아버림으로 죽은 사람이라 항상 남의 시비만 하는 것이니, 고통이라 할 것이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라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521, 화안심(和安心)
미소 얼굴은 석가불과 가섭의 염화 미소(拈花微笑)을 생각한다. 편안한 마음은 누구든지 바라는 마음이지만 바라는 마음이 욕망으로 바라는 것이니, 마음과 육신의 행위가 같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과 육신이 행위가 같으므로 가장 편안한 것이고 너와 나의 마음이 같으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 우리라 한다.
522, 등명화(燈明華)
연등 공양은 부처님께 가난한 여인이 등불 공양을 하여 미래세에 부처님이 된다는 수기를 받은 것으로 공양을 정성으로 하므로 국왕 대신의 등 공양보다도 먼저 수기를 받은 것은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하였으므로 현재에 수기를 받은 것이라 하셨다.
523, 해운심(海雲心)
해운은 길상이라 하여 새로운 것으로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작은 즐거움이 큰 괴로움보다도 좋은 것이다. 욕망의 큰 즐거움보다도 작은 마음의 즐거움이 행복한 것이다. 길상은 상서러운 일은 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원력이 다함이 없고 미래가 다함이 없고 시간과 공간이 다 함이 없는 것이다. 길상은 다함이 없는 마음의 무의식 세계를 발굴하는 것이다.
524, 덕명심(德明心)
밝고 맑은 청정심을 말하므로 깨침의 마음으로 본래 원만심을 말하는 것이다. 야생화가 스스로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어서 번식하는 것이지만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자라는 것이므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므로 자연을 깨달아야 은혜와 감사하는 마음을 찾는 것이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감사와 은혜로 일을 하는 마음의 길이 나타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불편하고 불만 원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괴롭다고 한다.
525, 금강대(金剛臺)
금강대는 부처님의 연화대 라 할 것이고 밝음과 맑음은 본래 원만심으로 잊어버리거나 오염을 시키는 것이라 중생은 욕망에서 본래심을 잊어버리거나 오염을 시키는 것이다. 운석인 혜성이 별똥으로 지구에 떨어지면서 공기의 마찰로 마멸되고 남은 운석을 주어 절단하면 쇠덩이로 된 것을 보면서 바로 저것이 금강(金剛)이로구나 생각을 하기도 한다. 부처님 경전 중에 반야경을 금강이라 한다.
526, 법륜월(法輪月)
부처님 법을 전하는 것을 법륜이라 하고 달월(月)자를 불명(佛名)에 사용하는 것은 밤에는 달이 빛을 발하고 생명의 힘을 주는 것이니, 달․해․마음이 생명세계에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 마음의 가치관을 지혜라 하여 어둠의 욕망을 해결하는 지혜라 하여 번뇌를 해결하는 것이다.
527, 염화심(拈花心)
부처님과 가섭존자의 마음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전하는 정법의 바름 마음을 인가한 것이니, 염화심은 이심전심을 말하지만 불명(佛名)으로 염화심은 불명일 뿐이고 염화심의 마음 자세로 남을 인정하는 마음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음의 길인 것이다.
528, 보리수(菩提樹)
보리수 나무을 정각수(正覺樹)라 하기도 한다. 불타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성취하신 것으로 정각수라 하고 보리수 나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보리수 열매를 연마하여 염주를 만들어서 염불 할적에 손에 들고 염불의 회수를 세고 절을 하면서 절의 회수를 세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보리수는 정각수이지만 염불수(念佛樹)라 할 수 있다.
529, 길상자(吉祥子)
불타께서 고행하실 적에 부드러운 풀을 주는 아이를 길상동자라 하고 풀을 갈고 앉으시니 길상초(吉祥草)라 하셨다. 길상이란 말은 구체적으로 부처님의 가슴에 상서러운 표시를 길상이라 하여 만(卍) 형상의 표시를 길상이라 하고 절을 표시하고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과 인간에 스승이신 분으로 길상이라 하지만, 요즈음은 사회 철학관 표시를 대나무 깃발에 만(卍)자 표시를 하여 길상이라 하고 승리를 뜻하지만 뜻하고는 다른 뜻으로 전달되고 있어나 헌법적으로 저지하지 못하여 타 종교에서는 불교라 하여 이미지가 다르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 안타 갑다.
530, 수미주(須彌主)
수미산주는 도리천주로 인간의 수복을 권장하시는 천주이시므로 불법을 항상 옹호하시는 선신으로 중생을 불법의 대해로 이끌어 준다. 하늘의 수복이 수승하지만 도를 깨친 수복에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미주의 수복은 다 함이 있어도 도(道)의 수복은 다 함이 없는 것으로 항상 마음의 본성을 찾게 하고 잊어버린 본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531, 일법심(一法心)
바른 법으로 깨침을 말한다. 마음 가운데에 문자도 형상도 없는 본래 법이 있는데 시간과 공간에 장애 함이 없어 순수하고 청정하여 누가 보고 듣고 한 것이 아니라 항상 홀로 광명을 발하여 삼라만상을 장양하고도 다 함이 없는 법이 두두물물이 이 마음을 원만 구족한 것이다. 한 법이란 한 개의 법이 아니고 청정으로 하나를 말하므로 개개 스스로가 본래 원만을 찾으면 하나가 되는 것이다.
532, 여산심(如山心)
산 같은 마음은 부동심으로 본래심의 청정심을 말하고 항상심으로 듯듯한 마음으로 다 함이 없는 마음이고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고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보살님의 마음이고 우리의 본래심이다.
533, 무생심(無生心)
생(生)이 없는 마음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생사심으로 허덕이지는 않는 것이다. 목숨이 다한 사람이 안 죽을려고 발부둥하면 할수록 역 경계가 나타나는 것으로 헛소리를 하고 환상이 나타나고 사자가 보이고 고함을 치고 고통이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라, 10명중 9명은 이러한 지경으로 이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나(相)라는 모양과 이름에 집착한 마음으로 욕망으로 몸에 집착심이 문제인 것이라, 집착심만 버리면 죽는 것은 여름에 무성한 나무 잎이 가을 단풍으로 변하여 털어지는 것이 생사심인 것을 알면 죽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인연 법으로 온 곳으로 돌아가는 이치인 것을 알면 편안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 있는 것이라 깨끗한 마음이라 듯듯한 마음이고 본심이라 할 것이다.
534, 무념심(無念心)
생각이 없다는 말은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는 것이다. 마음을 일으켜서 시비한다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만 말을 하는 것은 습관이라 하고 행위인 것이지만, 스스로가 참지를 못하고 마음을 일으키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니, 참은 수행을 연마하여야 하는 것이다.
535, 염불심(念佛心)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염불심이라 하고 염불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관하는 것도 염불이고 선(禪)이라, 염불선(念佛禪)이라 할 것이다. 염불은 불보살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칭송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여 마음으로 관하는 마음이 초심에는 없는 것이 사실이라, 형상과 이름에 집착하여 도리어 욕망심으로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라, 마음의 가치관을 등지고 마음을 마음 밖에서 찾는 격이라 할 것이다. 염불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로 염불하면서 대상의 경계를 자신의 마음으로 관하므로 하나로 통하는 것이니, 부처님 마음이라 할 것이고 자신의 본심이라 할 것이다. 바로 눈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봄으로 아는 것이라 경계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536, 여해심(如海心)
넓고 큰 자비심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바다 같은 마음으로 오염의 자연을 싫어함이 없이 받아줌으로 청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성인 자비심은 모든 생명에 있는 마음이지만 있는 줄도 모르는 마음도 있고, 있는 것을 알면서 욕망으로 사려는 사람도 있고, 자비심을 실천하려고 정진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청정 본심은 꽃 나무에 물주는 마음도 자비심이고,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마음도 자비심이고, 물을 청정하게 하는 마음도 자비심이고, 청소하는 마음도 자비심이고, 염불하는 마음도 자비심이고, 참선하는 마음도 자비심이지, 수행하는 마음은 뜻으로 보면 다양한 마음인 것이다.
537, 지성해(池成海)
못이 바다가 되는 것은 물을 보고 말 한 것이다. 물은 냉온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달라지는 것으로 찬 기온이면 얼음이 되고 눈, 구름이 되지만, 더운 열을 만나면 공기 수증기가 되고, 물이 나무를 만나면 나무가 되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이 되고 짐승을 만나면 짐승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같은 것이다.
538, 무위심(無爲心)
함이 없는 마음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불보살님의 마음이고 우리의 청정본심으로 모양과 이름의 집착심이 아닌 고정인식을 타파한 자리라 할 것이고 빈 마음으로 삼라만상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리로 빈 그릇처럼 그릇에 마음대로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자유자재라 할 것이다.
539, 관법심(觀法心)
마음으로 산 계곡 물소리를 관하면 물소리가 마음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이다. 물소리를 관하면 물이 나무가 되고 사람이 되고 산천초목이 되고 구름도 되고 비도 되고 안개도 되고 이슬도 되고 두두물물이 물이 아니것이 없는 것이다.
관법심은 물이 마음이고 마음이 물인 것으로 하나인 것이다.
540, 만공심(滿空心)
만(滿)은 물질의 유(有)를 말하고, 공(空)은 정신의 무(無)을 말하는 것으로 만공은 유무의 물질과 정신을 말하므로 텅빈충만이라 할 것이다.
541, 일행자(一行子)
염불 한 마디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 자신의 본성이란 것을 알아서 한 마디 염불이나 한 번 마음으로 관하면 깨달음의 씨앗이 되어서 인연 따라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니, 부처님의 종자를 심어서 깨달음의 열매를 성취하는 것이다. 한 번 발심이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542, 정혜심(定慧心)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나타나는 것은 하늘에 구름이 없으면 태양이 빛을 스스로 발하는 것이라 마음도 번뇌의 구름이 없으면 지혜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라 그릇 물이 흙물이 가득하면 물에 그림자가 나타나지를 못하고 그릇 물에 흙물이 가라않고 맑은 물이 되면 형상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라 마음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고요하고 맑으면 지혜의 가치관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다.
543, 무유심(無有心)
상이 없는 마음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고 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물이 나무에 순응하면 물이라 하지 않고 나무라 하고, 물이 잡초에 순응하면 물이라 하지 않고 잡초라 하므로 물이 순응하므로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 상대의 근기에 따라서 이름과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의 순응하는 마음이 불 보살님의 마음이고 모습과 이름은 근기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지만 지혜자는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물의 이치를 관하는 것이다.
544, 무명심(無名心)
형상과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집착심이 없다는 말이다. 물, 공기, 흙의 에너지는 생명력으로 나타나서 모든 생명에 힘으로 순응 할 뿐이고 자랑이나 상이 없는 것으로 무명심이라 할 것이다.
545, 시명심(是名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지 마음이라 이름 할 수 없는 것은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이 마음이란 것이다. 마음이 보고 아는 것이지 모양과 이름을 보고 듣고 아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진리라는 말과 글은 표현한 것이지 글에 집착을 하면 어릴 아이는 모르는 것이고 목마르고 배고프면 우는 것이라 우는 소리에 엄마는 젖을 먹이는 것이니, 우는 소리가 배고프다는 소리인 것이다.
546, 무행자(無行子)
행위를 일으키지 마라. 불법(佛法)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이것이 불법인 것이다. 무행자는 바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547, 파경자(破鏡子)
깨진 거울은 모양의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타파하면 마음에 그림자인 번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거울을 깨끗이 하라 하니 본래는 거울이 없는 것이라 하여 본래 마음은 거울이 아니란 것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지만 청황적백으로 나타나는 것이 마음이라 하여 미묘한 법이라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청정수는 모양과 이름이 없으므로 생명력으로 삼라만상에 순응 할 뿐이다.
548, 무성자(無聲子)
소리 없는 자의 소리 없는 말은 소리로 소리 없는 자라 인식을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란 것이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수동자가 말 없는 말을 하고 남순 동자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구나, 나는 성지곡 백양산을 3시간씩 등산을 하면 계곡의 힘찬 물소리를 듣고 아! 저수지도 없는데 주야 장천으로 깊은 산 속에서 많은 물이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은 나무숲의 소리 없는 생명력인 것이다. 물이 산 기운이고 나무 기운으로 나무는 가뭄으로 물이 없으면 물을 주고 비가 많이 왔어 홍수가 지면 나무는 물을 흡수하여 홍수를 방지하는 것이다. 나무가 저수지 역할을 하는 것이니 말 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549, 응공자(應供子)
부처님도 응공이라 하고, 아라한도 응공이라 하고, 스님도 응공이라 하는 것이니, 바름을 실천하시는 분으로 중생에 고통을 싫어함이 없이 수순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의 똥오줌을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으로 응공자인 것이고, 자식이 조상에게 응공자인 것은 부모 자식의 관계는 천하에 하나뿐이고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550, 응관자(應觀子)
응관 법계성(應觀 法界性)묵묵히 법계성을 마음으로 보라는 것은 법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호흡을 하면서 콧구멍을 손으로 막으면 질식을 하는 것은 공기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라, 3․4분 정도라도 질식을 하면 죽음이란 지경이 나타나지만 평상시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욕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고 자연을 파괴시키는 것은 자연의 재앙을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마음으로 관찰하면 자연의 재앙이 일어나는 인연처를 아는 것이다.
551, 정행심(正行心)
바른 행위란 바른 일, 바른 말, 바른뜻을 실천하므로 부처님의 전법이고 자신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인 선(禪)을 수행하고 부처님의 말씀인 교(敎)을 수행하는 것이 불제자인 것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바른 가치관을 일깨어 주는 것이다.
552, 근행심(勤行心)
용맹심으로 바른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자라야 대장부라 할 것이다. 생사 일에 여연하지 않고 바른 행위를 실천하므로 어물거리는 시비 선악을 결단하여 가치관이 분명하지 못한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다. 용맹심은 지혜인의 실천행인 것이다.
553, 수정심(修定心)
선정을 닦는 마음을 수정심이라 할 것이다. 축구 선수가 공을 차는 것은 골인이 목적이지만 반대 선수는 골인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반대로 골인하는 것이지만 골인하기 위하여 무수한 단련을 연마하는 것이 수행이고 용맹정진인 것이다.
554, 각해성(覺海性)
깨달음의 바다 성품은 자신들의 마음속으로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모양과 이름이 있는 것은 상(相)이라 집착심이 일어나는 것이라, 무상심(無相心)으로 모양에 집착심이 없는 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555, 일허심(一虛心)
괌섬에서 발생한 태풍 14호 매미는 03년 9월 11일 추석 다음날에 우리나라 부산 경남 바다변을 해일로 초토화시켜서 천지 개벽을 일으켜 나라에서는 특별 수해 지역으로 선포하고 복구에 힘을 쓰고 있다. 마음을 비우는 수행은 참으로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마음을 한 번 비우고 관세음보살 한 번하면 욕망의 마음이 비워지고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심이 일깨어지는 것이라, 자신의 본심을 일깨우는 작업이 수행심이라, 관세음보살님을 한 번 친견하는 것이다.
556, 고불심(古佛心)
옛 부처님도 모르는 것을 가섭이 알 수 없는 것이지, 부처님이라 이름한 것이니 진리가 아닌 것이지만 말 없는 말을 하여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글자로 부처님이라 하지만 글자로 보면 부처님을 알 수도 없고 부처님이 아닌 것이니, 자기 모순이라 문자의 맹점인 집착이라 문자을 떠난 문자 속에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고불심은 시작도 끝도 없는 마음이다.
557, 선심자(禪心子)
선심(禪心)은 부처님 마음이고 중생의 본래 마음이고 생명들의 생명력이라, 생명력은 공기, 물, 흙의 자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연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사물에 순응하므로 이름과 모양이 나타나는 것으로 중생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실상을 알려고 하고 성인은 모양과 이름속에 생명력으로 실상을 여기는 것이다.
558, 전심자(傳心子)
너나 마음이 상통하는 마음을 전심(傳心)이라 하고 모두가 하나되는 마음으로 물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공기가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흙이 생명에 순응하므로 생명력으로 변하여 각각 스스로가 원만 성취하는 것이다.
559, 보적심(寶積心)
청정이 지혜이고 보배인 것은 마음 청정이면 마음의 번뇌를 다스릴 수 있어 고해의 생사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물, 흙, 공기가 청정하면 생명들은 잘 사는 정토가 되는 것이다. 보배는 물질이 아닌 청정을 말하는 것이다.
560, 춘초심(春草心)
봄이 오면 산천 초목이 움이 트는 것은 천지의 기운인 것으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천지에서 생기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이라 봄은 생명의 계절인 것이다.
561, 성상심(性相心)
성(性)은 마음이고 상(相)은 몸으로 성상심은 마음과 몸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됨으로 원만 성취되는 것으로 스스로가 마음으로 물건을 하나 들면 움직이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것으로 생명이 없는 물건이 생명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562, 용장심(龍藏心)
용궁의 부처님 말씀을 용장이라 하면 진리 말씀이 바다 속으로 감추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 진리를 말하는 가 것이다. 중생의 마음속에 용장은 여래장(如來藏)이라 하여 나타나지 않은 마음으로 본래 있는 마음으로 중생이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고 보배를 진리을 등지고 물질의 욕망으로 보배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563, 서래심(西來心)
서천축의 뜻은 서쪽의 바람 기운으로 부처님의 지혜의 기운이 동쪽으로 오는 것은 생명력이 태양을 중심하여 지구 동쪽으로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이 새벽의 기운이 생명력으로 생명을 자라게 하고 오후의 햇빛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것이라, 같은 빛이지만 새벽의 빛은 생명에 힘으로 자라게 하고 저녁의 빛은 피로를 편안을 주는 것이다.
564, 대오성(大悟性): 크게 깨달음은 성품을 아는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孝道)하라 하면 잘 모르지만 호흡하는 콧구멍을 잡고 있으면 눈에 충혈이 나타나고 당장 호흡을 못하여 죽을 지경인 것이다. 이것은 공기의 고마움을 아는 것으로 은혜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행위인 것이다. 자연에 은혜 할 줄 알면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고 이것이 효도 인 것이다. 공부를 가르치면 스스로가 마음이 밝고 맑고 스스로가 아는 것으로 깨달음으로 시비를 스스로가 판단 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지혜인 것이다.
65, 고인심(古人心)
역사는 항상 시간이 흐르면 시비가 판단되는 것으로 가치관을 말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일시적인 기록으로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란 기록은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긴자의 기록으로 내려오고 있지만 사라진 역사를 찾아보면 멸망한 역사 속에 바른 가치관을 많이 발굴되는 것은 스스로가 수행을 하고 마음속에 자신을 개발하고 있는 정신이 고인심으로 나타나는 현실이다.
566, 심상심(尋常心)
평상심을 찾는 마음은 코끝에 호흡을 관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마음으로 살면 본심을 잊어버리는 마음은 없는 것으로 생명에 물 같은 마음으로 생명력으로 사는 것이다. 생명에 빛․물․흙의 기운으로 살면 항상 평상심으로 생명력인 것이다. 평상심이 없으면 생명은 죽은 것으로 자비심이 없는 생명인 것이다.
567, 정음자(淨音子)
청정의 소리는 생명의 소리이고, 관음의 소리이고, 정토의 소리이고, 서로 서로의 생명 관계의 인연 법인 것이다. 농사을 짖는 자가 있으므로 밥을 먹는 것으로 농부에 은혜와 감사로 사는 것이고, 옷을 입으므로 옷 만드는 사람에 감사와 은혜로 사는 것이므로 서로 서로의 관계 고리인 것으로 모두가 부모님 같고 스승님 같고 자신보다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므로 남을 없이 여기고 억압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잘못 된 고정인식으로 타파시켜야 할 문제이다.
568, 대장심(大藏心)
대장경은 부처님 말씀으로 팔만사천 마음의 길이라 하여 팔만사천 대장경이라 한다. 중생의 번뇌가 팔만사천이란 것이니, 헤아릴 수 없는 뜻으로 말한 것이지 팔만사천 뿐이겠는가? 대장경은 문답식으로 중생이 질문하면 부처님께서 해답하신 것으로 부처님 계실 적에 보고, 들은 것을 후래에 기록한 것으로 마음에 길이라 하여 경(經)이라 한다.
569, 홍원심(弘願心)
큰 원력으로 지장 보살님처럼 지옥을 다 구하고 성불하신다는 원력이시고, 관세음 보살님은 자비심으로 중생의 본심인 자비심을 다 일깨워주신다는 것이고, 문수 보살님은 중생을 다 지혜를 성취시켜주신다는 것이고, 보현 보살님은 중생의 복덕을 다 성취시켜 주신다는 것이니, 보살님은 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홍원심이다.
570, 불기심(不起心)
불법(佛法)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하셨다. 마음의 본성은 지혜와 복덕이 충만하여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경계의 대상에 집착하여 탐․진․치의 마음을 일으킴으로 이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는 것이다. 본심은 고요함으로 만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571, 불위심(不爲心)
함이 없는 마음으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심이 없는 마음으로 무아심(無我心)은 상(相)이 없는 마음으로 인연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 저것의 인연 고리가 마음으로 삼라만상이 연결되는 것이지만 마음인 줄 모르는 것은 나(我)라는 모양과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572, 일편심(一片心)
한 조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삼라만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고,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면 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라, 내 마음에 한 생각이 일어나면 산 것이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죽는 것이다.
573, 은공심(恩供心)
은혜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자연의 공기․물․ 흙의 기운을 체험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으로 살면서 자연의 은혜을 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으로 실천 행에는 부처님께 6법(法)공양을 볼 수가 있는데 자연에서 생긴 열매를 가꾸고 추수하여 자연의 은혜와 사람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곡물을 부처님 전에 공양함으로 우리의 노력 정진심이 마음으로 승화되면서 자연과 마음의 정성이 부처님 마음으로 상통하는 것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574, 일적수(一滴水)
한 방울의 물이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미묘한 법으로 부처님의 아들, 딸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각해(覺海)에 무애 자재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인연 법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상(相)이 없는 마음은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너나가 하나되는 것으로 우리(不二)의 마음을 말한다.
한 방울의 물이 법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575, 대견심(大堅心)
금강 불괴신은 영원한 마음으로 청정법신의 자연을 말한다. 부처님을 청정법신이라 하고 스님을 열반이라 하여 청정법신으로 사리를 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리는 부모님의 몸도 아니고 스스로가 수행하여 정신으로 생긴 살아 생전에 뼈 속에 영시려운 뼈가 생긴 것으로 광명으로 방광도 하는 불가사의한 법신으로 생사를 초월한 힘을 가진 것이다. 사리는 청정법신으로 금강 불괴신으로 영원한 몸인 것이니, 중생의 귀의처가 되고 복전이라 한다.
576, 보은심(報恩心)
살아간다는 것이 은혜 속에 살면서 욕망으로 마음이 병이 생긴 것으로 원망 만하고 은혜 하는 마음 자세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 중생이라 항상 못 살겠다고 불편 하는 것이니, 어리석음이라 한다. 병이 들면 병이 없고 건강한 몸을 생각하면서 비교 할 수 없는 은혜 속에 행복이란 것을 느끼는 것이다.
577, 일념자(一念子)
한 생각이 부처도 되고 지옥도 가고 극락도 가고 하는 것으로 부처와 마군은 한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지옥이고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극락인 것이다. 중생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욕망이라 고통의 원인이란 것을 모르고 잘 살기를 바라고 잊어버린 본래 마음을 찾을려고 하지를 않는다. 본래 모습을 찾으면 자연스럽고 너와 내가 싫어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578, 정안심(正眼心)
부처님의 불안(佛眼)이 있고, 법안(法眼)이 있고, 천안(天眼)이 있고, 심안(心眼)이 있고, 정안(正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안이 있으면 심안도 통하고, 법안도 통하고, 천안도 통하고, 나아가서 본래모습인 불안도 통하는 것이다.
579, 정로심(正路心)
정로문(正路門)은 마음의 문으로 출입하는 문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나 이름도 없는 것으로 무애자재한 것으로 누구나 출입 할 수 있는 것으로 분별심이 없고 시비 선악심이 아닌 것이다.
580, 자경심(自警心)
스스로가 경책하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천방지축이라 방향 감각이 없는 것으로 어린 아이가 물 속으로 기어가는 격이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퇴계 선생은 어린 아이가 물 속으로 가면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선(善)이라 하셨다.
581, 삼학심(三學心)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을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이라 하고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을 나는 삼정(三淨)이라 하여 바른 일, 바른 말, 바른 뜻을 실천하면 부처님 마음이고 말씀이고 우리의 본성 자리로 실천 한 것 만큼 성인의 가피력을 입는 것이라 한다.
582, 영산자(靈山子)
영산회상은 부처님의 설법하신 곳으로 하늘 천신들이 춤을 추고 법계 중생들이 한 자리에서 설법을 들은 광경을 춤으로 추는 승무가 현재에 있어 영산재라 하여 사찰의 개산재를 하는 곳이 많은 것이다. 사찰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부처님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사찰은 천상 세계를 지상에 건설한 것이고, 극락 세계를 지상에 건설한 것이라, 사성 육범(四聖六凡)의 시방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583, 덕명심(德明心)
복덕과 지혜가 원만 구족한 자리라 본심의 불성(佛性)을 말하므로 청정심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은 만덕상으로 생명에 물이고 빛이고 공기이고 흙인 생명에 힘으로 생명력인 자비심을 말하는 것이라 부모님의 모성애이고 부처님의 마음이고 중생의 본심인 것이므로 항상 청정한 덕명심으로 수행하므로 수행하라는 것이다.
584, 보광월(普光月)
어둠에 달빛이 온누리에 빛나므로 마음에 번뇌가 사라지고 본심이 청정하여 항상 광명을 발하므로 마음의 공덕장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무진장이라 진리의 공덕은 마침 씨앗이 거듭 나면 많은 열매을 맺고 열매가 씨앗으로 거듭하므로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보광월인 마음의 빛이다.
585, 선지심(禪智心)
선정에 들면 지혜는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것이므로 마침 그릇에 물이 고요하면 그림자 형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므로 마음에 지혜를 바라지말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생각을 사색 할 수 있는 것으로 소리와 모양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면 번뇌라 하고 마음으로 집착심을 놓아버리고 관찰하면 인연 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586, 대명심(大明心)
대명심은 깨달음이라 마음이 청정하면 항상 태양 자체의 광명처럼 어둠이 없는 것이지만 중생이 몸에 집착하여 자신이라 함으로 모양과 이름이 나타나므로 고통의 시비 선악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라 집착심만 놓아 버리면 바로 지혜라 할 것이다.
587, 정명심(淨明心)
청정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밝음이라 청소를 깨끗하게 하면 병도 예방되고 악취도 없고 파리 모기 벌레가 생기지를 않는 것이라 파리 모기를 죽이는 업을 짖지 않아도 청소를 청정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파리 모기가 생기지를 않는 것이다. 정명심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588, 무초심(無初心), 589, 무종심(無終心)
무시 무종이라 시작과 끝이 없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라 마음은 이름 할 수 없고 모양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고, 마음이라 한 것은 할 수 없이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지 집착심이 아닌 것으로 마음은 모양과 이름에 따라 순응하므로 자재한 것이다. 무시 무종은 함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590, 무행심(無行心)
함이 없는 무위심으로 도인의 마음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집착심이 아닌 것으로 모양과 이름의 고정인식에 서 벗어남으로, 우리 마음이 경계에 따라 순응하는 것으로 살아가지만, 욕망으로 재물에 집착하고 사람에 집착하므로 고통이 일어나 괴로워하는 것이다. 무행심은 모든 것을 방하착하라는 것이므로 자재하는 것이다.
591, 불광심(佛光心)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온 누리에 생명력의 자비심으로 나타나므로, 물이 부처이고, 공기가 부처이고, 빛이 부처이고, 모든 것이 생명이고 부처인 것이다. 용광로 쇠물에도 생명이 있고 살아가는 것으로 뜨거운 기운이 생명인 것이고 돌맹이에도 생명이 잇는 것으로 냉온의 차이가 생명의 기운인 것이다. 부처님을 모양과 이름으로 찾으면 찾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금강경 말씀으로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한 것이지, 부처님 이름이 있다 하면 집착심이 일어나는 것이라 부처님 이름을 방하착하므로 두두물물이 부처라 하는 것이다.
592, 법초(法草)
봄이 오면 세상 천지가 푸른 것은 한 잎의 소식이다. 단풍 한 잎을 보고 가을을 알고 낙엽 한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겨울을 안다. 손가락 끝에 짠물으로 바닷물을 알고 법의 소식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성냥불이 온 천지를 태우는 것처럼 마음에 소식은 조그마한 틈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마침 저수지 댐이 개미굴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법초는 바다변 조그마한 잡초라 바다도 육지도 되는 자재한 힘이 있는 것이다.
593, 화엄(華嚴)
부처님의 불가사의 한 도리를 화엄이라 하고 화엄은 언어 문자 이전으로 모양과 이름을 초월하는 것이라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라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고 화엄이라 한 것이므로 만상에 집착이 없으므로 삼라만상을 화엄이라 하고 장엄의 아름다움은 극락 세계 화엄 장엄이 가장 수승한 것이라 할 것이지만 마음의 화장세계 장엄은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고 원력이 다함이 없는 중중 무진한 법계의 미묘 법인 것이다.
594, 법궁장(法宮藏)
부처님 집으로 진리의 전당이 법당이라 할 것이고, 진리의 보배가 자신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여래장(如來藏)이라 할 것이다. 마음 속에 복덕과 지혜가 본래 원만 구족한 자리라 티끌만큼도 부족함이 없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인이 일어나는 것으로 항상 성품 길인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면 법궁장이라 할 것이다.
595, 법수해(法水海)
진리의 바다는 부처님의 세상이고 마음이고 말씀이므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므로 바른 뜻을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실천하므로 원만 성취되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 한 톨의 씨앗도 나누고 심으면 많은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라, 많은 세계가 한 티끌로 인하여 형성되는 것이니, 한 마음의 법이 지옥도 가고, 극락도 가고, 부처님도 되고, 중생도 되고, 삼라만상이 형성되는 것이므로 마음이 청정하면 법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596, 무진심(無盡心)
다함이 없는 원력이 불 보살님의 원력으로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라 생명력으로 순응함으로 물이 생명에 순응함과 같고, 빛이 생명에 순응함과 같고, 흙이 생명에 순응함으로 자유자재한 것이라 무진심은 다함이 없는 마음으로 청정심을 말하는 것이므로 생명력으로 중생에 순응함으로 자유자재함이라 한다.
597, 금연대(金蓮臺)
부처님의 연화대를 말한다. 금빛 찬란한 연꽃은 청정한 마음으로 정토를 말하므로 마음이 청정하면 자연도 청정한 것이다. 저승과 이승이 둘이 아니고 몸으로 보면 둘이지만 마음으로 보면 하나인 것으로 청정한 마음은 부처님이나 자신의 본성은 동일한 것이라, 빛나고 찬란한 광명의 지혜를 실천하라는 말이다.
598, 정행심(正行心)
바른 행위는 스스로의 마음, 말, 행동으로 자신의 본심에서 보고 듣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밖에서 보고 듣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밖에서 보고 듣고 인식하므로 집착이라 번뇌하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므로 마음을 모양과 이름에서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라, 바름을 모르면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599, 안양심(安養心)
국락세계를 안양국(安養國)이라 한다. 극락세계의 주인공은 아미타불로 전생에 법장스님으로 48대원(大願)의 원력으로 성취된 세계로 바른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10번만 불려도 왕생극락(往生極樂)한다는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부처님 제자라면 모두가 찾는 세계이다. 아미타불은 무량광 무량수(無量光 無量壽)라 하여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이 바름을 실천하면 시간과 공간에 관계가 없는 것을 말한다.
600, 평상심(平常心)
조주스님은 평상심이 도라 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바른 뜻을 실천하고, 입으로 바른 말을 하고, 몸으로 바른 일을 하는 것이 평상심이고 진리이고 진리 속에 항상 살아가는 것이지만, 진리를 알지 못하고 본심을 등지고 눈으로 모양에 집착하고, 귀로 소리로 몸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킴으로 항상 고뇌하는 것이다. 집착만 놓아버리면 고뇌가 바로 진리인 것이다.
601, 무진행(無盡行)
성인의 마음이고 중생의 원력인 것이다. 중생의 원력은 다함이 없는 것으로 희망이고 밝음이고 맑음이고 고름이고 진리의 발심을 말한다. 발심(發心)의 시작은 다함이 없는 공덕의 문이라 할 것이다. 이 문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 숫자로 는 말할 수 없다.
602, 무착(無着)
육조스님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基心)의 금강경 말씀에 마음이란 것을 아시었다. 마음을 집착이 없이 하라는 것이다. 눈과 귀로 이름에 집착하면 장애가 일러남이라, 주객이 일어나고, 시비가 일어나고, 선악이 일어나고, 생사가 일어나고, 팔만사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집착을 놓아 버려라.
603, 법광심(法光心)
빛은 생명에 힘이라 하고, 공기, 물이 다 생명에 힘이고 자연의 도움으로 생명이 살아가는 것이지만 중생은 은혜를 모르고 욕심으로 반대로 도리어 오염시킴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명이 떼죽음을 하는 것이다.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는 것이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자도 있고, 생명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생활이고 살아가는 방법이라 하고 오염을 시키면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 하지 않지만 엄연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종교에서도 짐승이나 자연을 선물로 생각하므로 생명의 죄 의식이 없는 종교도 있다. 자연인 물, 공기, 흙의 먹거리를 오염시키면 생명이 다 죽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604, 대안심(大安心)
신라 원효스님을 발심시킨 스님이 대안스님이라 한다. 하루는 서라벌에 소문이 대안스님이 계(戒)를 파괴하여 아이를 낳아 마을을 다니면서 젖동냥을 한다는 것이다. 소문이 일파만파로 나자 원효 스님이 듣고는 대안스님을 친견하려 갔는데, 그 날도 바위 굴 안에서 아들아 하면서 젖을 먹이는 것이라, 스님 스님 원효가 왔습니다. 하니, 바위 굴 밖으로 나오시는 것이라 아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너구리 새끼들이라 내가 바위굴을 토굴로 정하여 공부를 하려고 하니 굴에는 너구리 새끼들이 있고 너구리 어미가 밖에서 변을 당한 것이라 오지를 않아서 내가 마을에 가서 젖동냥을 하여 먹이는 것이라, 사람도 먹을 것이 없는데 너구리 먹을 젖동냥을 하면 누가 줄 것인가 그래서 내 아들이라 하면서 젖을 구걸하여 기려는 것이지 하시므로 원효 스님은 그 때에 자비심을 발심 한 것이라 한다. 원효 스님에게 대승심을 발심하게 한 보살이라 할 것이고 스승님이신 것이다.
605, 대광심(大光心)
부처님의 마음이고 지혜를 말한다. 모든 것을 만족하게 갖춘 것을 화엄(華嚴)이라 한다. 화엄이 대광이라, 부처님의 마음이고 중생심의 본성인 것이다. 광명은 중생의 생명력인 것이다. 생명력은 자비심이고 지혜라 할 것이다. 자비심은 생명력이라, 물, 공기, 빛을 말한다. 이 자비심은 거래와 이유가 없는 것이라 무연 자비심(無緣 慈悲心)인 것이다.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는 대 자비심인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자가 와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생명을 주는 것이다. 또 아무리 생명이 사용하여도 다함이 없는 것이라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606, 화엄궁(華嚴宮)
화엄궁은 부처님의 마음을 말한 것이고 중생의 본성을 말한 것이다. 해인사에 가면 팔만사천 장경각이 있다. 이것을 화엄궁이라 할 것이다. 화엄궁은 여래장인 것이다. 중생심 가운데 원래 원만 구족한 보배 창고인 것을 중생이 오욕의 즐거움에 집착하여 지혜와 복덕을 갖춘 보배를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인도하시는 선각자이므로 중생의 인도자이고 빛이고 물이고 공기이고 바름이고 맑음이고 밝음이라 할 것이다.
607, 덕운심(德雲心)
상서러운 기운을 말한다. 하늘에 서기 방광하는 가피력을 상서러운 기운이라 할 것이다. 봄이 오면 산천에 새싹이 돕는 것을 본다. 중생은 천지 기운이 용솟음치는 상서러운 봅의 소식은 듣지 못하고 남의 시비만 하는 구나? 천지에서 꿈틀거리는 흙 속의 속삭이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 눈으로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귀로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608, 초실심(初實心)
생명에서 처음 열매를 말한다. 충남 천안 광덕사(廣德寺)는 우리나라 호도 시배지라 천연 기념물 398호로 국가에서 지정하여 지역 정신 문화를 새롭게 한 것이 산 승이다. 고구마, 감자. 시배지도 있고, 거창의 목화 시배지는 국가에서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불교에서 첫 열매라 하면 발 보리심인 발심(發心)이 첫 열매라 할 것이다. 깨달음의 열매는 보리수(菩提樹) 나무라 하여 염주(念珠)로 만들어 수행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염주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의 구슬로 원력심으로 승화시키면 원력이 성취되는 것이다.
609, 만행자(萬行子)
만행을 하면 삼라만상이 다 스승님으로 보인다. 분별심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아상(我相)이란 마음이 사라지고, 인상(인상)이란 마음이 사라지므로, 집착심을 버리는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아상이 있으면 만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이 아상이 있으면 생명에 순응 할 수 없는 것이라, 생명에 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은 아상이 없는 것이다. 오직 생명에 순응 할 뿐이다. 만행자는 물처럼, 공기처럼, 흙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마음 역시 이러한 것이므로 대자대비라 조건이 없는 것이라 상대가 없는 것이다.
610, 자성화(自性華)
우리의 마음은 본래 지혜와 복덕이 부처님과 똑 같다는 것이므로 자성이라 한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다. 중생들은 즐거워하는 것이 전도된 마음이라, 몸이란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자신이라 하고 분별하므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천차만별로 나열되면서 시비선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분별심을 자성이라 하지 않고 분별심은 진리의 당처로 돌아가야 자성이라 한다.
611, 청정해(淸淨海)
청정해는 마음을 말한다. 마음의 본성은 마침 거울과 같아서 앞에 나타나는 모양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거울 자체는 모양이 없는 것으로 거울 속은 빈 것이므로 모양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도 청정하다는 것은 맑고 맑아서 오염이 없으므로 모양과 이름이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612, 마하심(摩訶心)
마하는 인도말로 크다는 말이다. 너와 나를 주객으로 말하면 분별하는 시비가 일어나지만, 너와 내가 우리라는 것은 대승심이라 할 것이다. 대승심(大乘心)은 자연스러운 것을 말한다. 큰마음은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물․공기․흙의 자연스러운 것이고, 물이 생명력으로 생명에 싫어함이 없이 순응하는 것이고, 물이 나무에 순응하면 물이라 하지 않고 나무라 하고, 물이 잡초에 순응하면 물이라 하지 않고 잡초라 한다. 물이 생명력으로 생명에 순응하므로 자유자재한 것이므로, 물이 생명력이라 대승심이라 하고 마하심이라 할 것이다.
613, 반야(般若)
슬기를 말한다. 지혜의 밝음․맑음․빛․아름다움을 말한다. 꽃이 반야가 있는가? 꽃이 향기 나고 열매 맺는 것이 불성(佛性)이고 지혜이고 마음이라 할 것이다. 삼라만상을 반야로 본다면 두두물물이 다 부처인 것이다. 청정을 부처라 하고 오염을 중생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정과 오염으로 보면 우리의 행위가 분명한 것이다. 부처를 이름과 모양으로 보지 않고 청정법신(淸淨法身)으로 보면 시비선악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을 안다. 절에서 기도를 하면서 집에 가면 물, 공기, 흙의 먹거리를 오염시키면 생명력을 죽이는 것이라 기도가 아닌 것이다.
614, 청정화(淸淨華)
청정은 법신(法身)을 말한다. 도시 복잡한 소음 공해로 스트레스가 마음에서 일어나면 산 계곡 물소리를 생각하면 마음에 용기가 나고 미소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깊은 산 계곡 흐르는 물을 손으로 한 오금 마셔도 산천의 모습을 보고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전국 샛강을 보면서 악취 나고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마을 앞에 개똥벌레의 반딧불이 모습을 기억한다. 요즈음 생각하면 반딧불이 동네는 하늘 아래 제일 청정한 동네라 할 것이다. 반딧불이 동네는 하늘 아래 제일 청정한 동네라 할 것이다. 반딧불이가 은하수처럼 살 수 있는 동네는 정토인 것이라,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고향이라 청정이라 할 것이다.
615, 수월경(水月鏡): 달이 물을 거울이라 함이니, 하늘 달은 하나인데 일천 강에 달이 나타남이라, 강의 청정함을 노래함이니, 청정 국토를 말한 것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만 경계에 다라서 모양과 이름으로 나타남이나 본성은 물들이 없는 것이다. 수경월은 청정을 말한 것이다.
616, 반야월(般若月)
반야는 지혜를 말하고 달에 비유한 것이다. 캄캄한 밤에 달빛이 얼마나 빛나는가? 밤에는 달이 빛을 발하는 하늘인 것이다. 캄캄한 밤에 달이 주인공이라 어릴 적에는 옥토기가 절구통을 찧으면서 하늘에 양식을 만들어 주어 복을 주는 것이라, 달님에게 기도하면서 복덕과 지혜를 구하는 순박한 마음이 토끼처럼 순박하고 청정하게 살기를 희망한 것이다.
617, 무상화(無相華)
상(相)이 없는 마음은 집착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집착심이 없으면 장애가 없는 마음이라, 자유 자재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빛이 모양과 이름이 없으므로 허공에 가득한 것이고, 물이 모양과 이름이 없으므로 삼라만상에 순응하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고정된 것이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상이 없으므로 무상(無相)이라 한 것이다.
618, 안심장(安心藏)
편안한 마음이고 아름다운 마음이라 할 것이다. 항아리에 흙물을 저으면 혼탁하여 바닥이 보이지를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흙물은 갈아 않고 맑은 물이 나타남으로 물위에 비치는 사물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도 번뇌가 번잡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여 지혜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므로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하여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욕망이나 애욕에 시비 선악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가치관이 나타나므로 지혜라 하고, 마침 방에 전기 불을 만나는 것과 같다.
619, 월면심(月面心)
달을 마음에 비유하여 말을 한다. 달빛이 청명한 보름달을 바라보는 마음은 온통 한 마음으로 달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은 온통 칠흑 같은 밤에 유난히 빛나는 달을 바라보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바라보는 마음은 온통 한 마음으로 달뿐인 것이다. 하늘의 달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면 월면심(月面心)이라 할 것이다. 달은 자연과 내 마음이 하나되는 청정법신의 원래 구족한 본심이라 생사, 시비, 선악이 없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620, 서웅심(西雄心)
서방 정토의 주인공은 아미타불이시다. 아미타불을 무량광 무량수(無量光 無量壽)라 하여 빛을 부처라 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부처님이 아미타불이시다. 빛을 부처라 하고, 맑음, 밝음, 고름이 청정법신이라 생사가 없고 집착이 없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만 죽음은 삶의 시작이란 것을 알면 죽음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 회향(廻向)이라 할 것이다. 회향심은 거듭하므로 생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621, 관조심(觀照心)
마음을 한 곳에 멈추고 관찰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음의 힘이 일어남으로 지혜라 한다. 지혜는 가치간으로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기운이나 섭리로 상통하므로 모양과 이름에 관계하지 않으므로 장애가 없는 것이다.
622, 월광화(月光華)
월광은 달빛이라 삼라만상에 음양의 기운으로 음의 기운이라 숨은 빛으로 천지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므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명력이다. 부처님의 말씀으로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할 것이다. 여래장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중생의 본심이라, 중생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것이라 감추어진 진실이라 할 것이고 아직은 모르는 것이고, 본래 구족한 원만성은 있으나 잊어버린 것이라 없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인연이 도래하면 나타나는 진리라 아직은 지도하고 의지하려고 하는 미완성된 힘이라 할 것이다.
623, 여실행(如實行)
열매를 말한다. 열매는 결과이고 성공이고 생명 자체가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생명에 꽃향기가 나는 시기는 그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고 힘이 왕성한 시기이고 뭇 생명이 찾아오고 서로가 기운이 상통하는 시기이므로 생명을 자랑하고 소문이 나는 것이라 다른 생명을 부려는 것으로 음의 기운은 양의 기운을 찾거나 찾아오는 것으로 음양이 만남으로 또 하나의 생명은 열매로 탄생하고 열매는 차차 성분을 완성시킴으로 다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힘을 저장함으로 씨앗이란 종자가 되어, 흙 속에서 씨앗의 몸을 썩이면 썩는 생명력은 새 생명력으로 새싹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의 생명력이고 진실성이라,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인 주인공의 본성이라 마음이라 한 것이다.
624, 지명화(智明華)
밝은 지혜는 항상 빛을 발하지만 인연 따라 생명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빛이 생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빛을 멀리하는 것이다. 빛은 원근이 없고 시비 선악의 분별이 없는 것이다. 빛은 움직임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여(如如)한 것이다. 중생이 스스로 모르는 것이고, 본래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인 욕망으로 밝음을 찾는 것이라 지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625, 청량심(淸凉心)
청량심은 아름다운 마음이고, 봄철에 새싹이 움트는 기운이고, 삼복 더위에 시원한 바람의 기운이고, 엄동 설한에 따스한 기운이라 할 것이다. 음 기운은 양의 기운을 서로가 찾는 것이 생명력이고 생태계의 움직임이라 할 것이다. 생명력은 가장 아름다운 청량심이라 할 것이다.
626, 선정심(禪定心)
선(禪)은 마음을 말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라, 가치관이 확립되는 것으로 사물을 볼 적에 사리 분별을 분명하게 함으로 거짓과 진실을 알 수 잇는 것으로 스스로가 아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귀와 눈으로 보고 듣고 알려고 하지만 이것은 분별하는 마음이고 지혜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이 씨앗은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오이 열매를 잘도 맺는 것이고 빨강 꽃의 씨앗은 다시 빨강의 꽃을 맺는 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말로는 유전자의 길이 본래 원만성인 꽃의 씨앗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청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성취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움직이는 대로 성취되는 것이다. 오염으로 움직이도 성취는 되지만 악(惡)의 길이 성취되는 것이고, 청정으로 움직이면 선(善)의 길이 성취되는 것이다.
627, 여의심(如意心)
중생도 여의심은 있지만 혼자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경제의 힘을 성취하려고 하고, 성인의 여의심은 물, 공기, 흙의 먹거리가 청정하기를 바라는 것이 여의심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국법에 도전하여 승소를 하였다면 전 국민이 이 법으로 다스려지는 것이므로 법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가 사람에게만 상통하고 잡초의 생명에는 상통하지 못하면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고 생명력이라 할 것이다.
628, 광명심(光明心)
캄캄한 방에 전기 불을 켜면 빛이 나타나므로 방안에 물건이 있는 대로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이 밝기 때문이다. 빛이 없으면 방안에 있는 물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두운 방에 손으로 전기 불을 켜면 이것이 밝은 마음인 것이다. 중생의 마음에 지혜와 복덕이 원만 구족하여 있지만 마음이 어둠으로 보고 듣지 못하고 인식도 못하는 것이라 마음 밖에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라, 상대를 귀와 눈으로 인식함으로 마음으로 관찰하려고 하지 않고 눈으로 보았다 하고, 귀로 들었다 하는 것이 어리석은 소리인 것이다.
629, 옥광심(玉光心)
옥은 돌이지만 기운을 많이 발생시키는 것이다. 옥의 기운은 생명에 의로운 힘을 발산하는 에너지원이다. 생명에 장애되는 힘을 억제하고 의로운 힘을 증장시키는 힘이 있다. 옥은 오염된 힘을 청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고 삿 된 기운을 맑은 기운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더운 열을 따스하게 하고 찬 기운을 따스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성격이 강한 사람은 옥을 가까이 하면 성격이 부드러운 성격으로 변한다.
630, 수월심(水月心)
맑은 물에 달은 분명하고 두려한 것으로 마음을 물이나 달에 많이 비유를 하는 것이다. 시인들이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마음이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청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 본래모습 그대로, 아름다움 모습 그대로, 산천 모습 그대로, 공기말고, 물 맑은 그대로, 흙의 먹거리가 청정하다면, 바로 수월심인 것이다. 고요한 그믐날 밤 달빛 아래 강물 속에 달을 보면 달의 마음이 온통 가득하여 다른 생각이 없다. 이것을 일심이라 할 것이고 수월 청정심(水月 淸淨心)이라 할 것이다.
631, 법연화(法蓮華)
부처님을 상징하는 꽃이 연꽃이라 불연화(佛蓮華)라 하고, 법연화라 할 것이다. 연꽃은 청정을 뜻한다. 연꽃의 특징은 한 줄기에 한 잎사귀가 피고, 한 줄기에 한 봉우리 연꽃이 피는 것으로, 저습지에서 자라면서 물을 청정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성분이 있으므로, 부처님은 오욕에 물들지 않고 진리를 성취하셨다고 연꽃에 비유하는 것이므로, 불교 꽃이 연꽃이라 사찰 건물이나 조각 작품에는 온통 연꽃 무늬인 것이다.
632, 선행자(善行子)
선행자는 선지식을 말한다. 마음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으로 깨달음의 선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의 원력심은 끝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무궁무진한 마음으로 중생의 자부심이라 할 것이다. 마음을 바로 보면 삼라만상이 다 스승인 것이다, 스스로가 마음이 선하면 악한 것도 선한 것으로 나타나고 마음이 악하면 선한 것도 악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한 일을 악한 사람이 하면 악이 되고, 악한 일이라도 선한 사람이 일을 하면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633, 복혜궁(福慧宮)
부처님의 집을 법당(法堂)이라 하고 마음의 집이라 하고 진리의 전당이라 하고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여 천상 인간에 스승님이신 분을 말하고, 중생의 본심인 불성(佛性) 자리를 복혜궁(福慧宮)이라 할 것이다. 복혜궁은 복덕과 지혜가 본래 원만 구족한 중생의 여래장(如來藏)인 보배 창고를 말한다.
634, 원만성(圓滿性)
본래 구족한 복덕과 지혜를 원만성이라 할 것이다. 성품이 원만한 것이라 푸른 것으로 원만한 것이고, 빨간 것은 빨강으로 원만한 것이다. 일미진중함시방(一味塵中含十方) 한 맛 가운데 법계가 있다는 말은 섭리를 말한 것이다. 한 잎사귀의 푸른 것을 보면 천지에 봄이 온 것을 아는 것이다. 닭 한 마리가 조류독감으로 나타나면 전 세계의 닭들이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조류독감은 청정으로 답을 찾을 것이다. 오염과 청정의 화두인 것이다.
635, 효심자(孝心子)
효는 생명존엄에서 보아야 하는 갓이다. 옛적에는 부모의 원수를 자식이 대신함으로 효자라 하기도 하지만 원수는 원수로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생명효(生命孝)에서 보아야 되는 것이다. 원수라는 마음을 마음에서 비우므로 영원한 원수를 갚은 것이다. 효는 철저한 자비심을 바탕하여야 진실한 효인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존엄하면 남의 생명도 존엄한 것이다. 스스로가 자연을 오염시키면서 잘 살기를 바라고 욕망, 질투, 시기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면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자신은 청정수를 마시고 청정을 바라면서 스스로의 행위는 오염을 시킨다면 자연을 죽이는 일이고 스스로가 죽는 일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636, 수행자(修行子)
특정인만 수행자가 아닌 것은 각자 스스로가 책임질 행위가 있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 살자는 것이다. 흙의 먹거리와 물의 에너지 공급을 박으면서 생명은 성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욕망인 어리석음으로 진리를 배반하고 도리어 자연을 많이 파괴함으로 경제를 성취하는 것이라면 미래는 실패의 길이고 생명이 더불어 공멸(共滅)하는 시기가 오는 것이라, 각자 스스로가 책임이라 할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연의 체험이고 감사와 은혜인이라 할 것이다.
637, 본성월(本性月)
성품의 근본은 공(空)하여 불생 불멸(不生 不滅)이라, 생사의 모양과 이름에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항상 청정으로 영원한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소리를 들었다 하면 소리에 집착이고 모양을 보았다 하면 모양에 집착인 것이다. 소리와 집착이 없는 마음을 본성월이라 할 것이다.
638, 보현행(普賢行)
화엄경 부처님의 말씀에 보현행자(普賢行者)는 몸과 말과 뜻에 싫어함이 없는 마음이라 마침 빛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물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공기가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 불 보살님의 마음과 같음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마음을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639, 선혜월(禪慧月)
선(禪)을 마음이라 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마음을 관찰하면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시공에 초월하고 장애가 없는 것이라 무애자재하는 것이다. 마음은 모양과 이름이 아니므로 모양과 이름에 장애가 없는 것으로 허공처럼 삼라만상에 주인공이라 할 것이다.
640, 길상자(吉祥子)
길상이란 상서러운 일이라, 서기 방광하는 것이고 희고 검은 오색으로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라, 무쇠가 방광을 하고 죽은 나무가 방광을 하는 것이 길상자인 것이다. 죽은 사람에서 사리가 나오고 방광하는 모습은 범부에게는 상서러운 것이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아름다운 지혜가 있어 유무에 자재한 것이고 신통변화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641, 대심행(大心行)
큰마음을 마하심(摩訶心)이라 하고 대승심(大乘心)이라 한다. 대승심은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주객이 하나인 마음을 말한다. 사람의 몸이 눈, 귀, 코, 각각이지만 하나 하나가 자신을 말한다. 눈병이 났어 눈을 미워하고 눈을 없애 버리면 눈이 없는 장애자가 되는 것이고 눈병이 나도 약으로 치료하면서 눈을 자랑하고 사랑하고 보살피면 눈병이 나아서 눈병자라 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승심이고, 마하심이고, 대심행이라, 대자대비심으로 중생의 어버이 마음이라 할 것이다.
642, 여산(如山)
산은 오온산(五蘊山)을 말한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을 말한다. 몸과 마음이 태산처럼 높으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오온이 공(空)한 것을 알아야 고뇌를 초월하는 것이다. 오온이 공한 것은 무아(無我)사상인 것이다. 본래 내가 없다는 것을 인연 법으로 관찰하면 온대로 가기 때문에 모양과 이름이 없는 것을 알고 오온의 상이 다 인연 법으로 온 것이므로 본래 공한 것이라 집착 할 오온이 없는 것이라 자유자재한 것이다.
643, 현수(賢修)
어진 것은 현인으로 덕망이 잇다는 말로 재물을 보시하여 병을 구제하고 남의 목숨을 구제하고 자신의 고통도 참는 마음으로 견디면 덕망이 되고 복덕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 말을 하고, 한 번 행동을 하고, 한 번 마음을 써는 것은 다 자신의 법이고, 사회의 법인 것으로 마음으로 관찰하는 마음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644, 일응(一應)
일응은 마땅히 공양하는 자세이다. 응공이라 하여 아라한(아라한)이라 하고 스님이라 한다. 스님의 정신 지위가 하늘 사람이 공양을 바치고 삿된 일이 스스로 물려가고 장애가 없어지고 심리작용으로 시기 질투가 없어지고 질병이 없어지고 슬펴하고 병으로 죽는 사람이 없고 자살하는 억압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 서로 서로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자비심으로 기뻐하는 것으로 무쟁삼매(無諍三昧)라 한다.
645, 성공(性空)
성품은 공한 것으로 항상 실체가 없는 것이다. 유(有)라 하면 무(無)이고, 무(無)라 하면 유(有)인 것이다. 물질이 있다고 하나 마음으로 관찰하면 실상이 없는 것이고, 마음이 없다고 하나 경계를 보고 듣고 하면 있는 것이라, 유는 무이고, 무는 유인 것이다. 무엇을 있다고 할 것이며, 무엇을 없다고 할 것인가? 성공(性空)은 텅빈 충만인 것으로 물질의 유는 텅빈 것이고 정신의 무는 충만한 것이 무소유(無所有)인 것이다.
646, 대각(大覺)
석가 부처님을 대각 세존이라 하신다. 지혜의 완성을 대각이라 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다. 인간으로 대각을 성취하신 분으로 복덕과 지혜의 본래모습 그대로를 보이신 분으로 인간 능력의 가능성을 보이신 분으로 인간의 잠재력을 확인하여 보이신 것이다.
647, 관공(觀空)
마음을 관하면 마음을 본다고 하여 공(空)의 도리를 아는 것으로, 인연 법을 말하는 것이다. 인연 법으로 보면 독립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모든 생명체는 물, 공기, 흙, 빛으로 자연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므로 자연을 체험하고 감사와 은혜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 주어진 그대로가 복을 받은 것이고 원만구족된 세계라 아름다운 것이다.
648, 원각(圓覺)
원각 속에 살면서 원각을 모른다는 말이다. 공기를 호흡하면서 공기의 감사를 모르고 사는 것을 말한다. 물을 마시면서 물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이고, 빛을 받아 살면서 빛의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도리어 물,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는 것이다. 물, 공기, 흙, 빛의 감사와 은혜로 사는 것이 기도인 것이고 원각을 아는 것이다.
649, 무등(無等)
비교 할 수 없는 마음을 무등이라 한다. 가장 신비하고 성서러운 힘이라 불가사의한 것이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다함이 없는 원력을 말한다. 불 보살님의 원력이 다함이 없고 중생의 원력도 다 함이 없는 것이라, 중생의 생각이 다함이 없고, 생명이 다 함이 없는 것이고, 미래가 다함이 없는 것이다.
650, 일조(一照)
태양이 뜨는 것을 일조라 하고 하루라 하면, 부처님의 탄생을 일조라 하고 싶다. 입으로 한 번 불 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일조라 하고 싶고, 관세음보살님 하고 한 번 관하면 대천 세계의 생명력이 성숙하여 천지 만물이 움이 트는 것이다. 일조(一照)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651, 일광(一光)
부처님께서는 해와 달이 헤아릴 수 없고 대천세계라 하셨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지구의 해와 달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파리의 미충이 해와 달을 볼 수 있는 것일까? 미충은 정추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고, 성인이 인간을 경계하는 것은 탐욕을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악도에 가는 원인은 탐욕으로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탐욕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이므로 생사의 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마음의 지혜가 일광이라 한 번 마음이 밝은 것은 미충이나 악도를 한 번 면하는 것이다.
652, 대장심(大藏心)
부처님 말씀을 팔만사천 대장경이라 하시고, 이 말씀의 마음이 우리 마음 속에 보장되어 있는 것을 대장심이라 한다. 대장심은 아무리 사용하여도 다함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원수라도 싫어함이 없는 것이 마침 공기, 물, 흙, 빛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653, 여시행(如是行): 부처님 말씀인 경전 머리마다 여시(如是)라는 말씀은 부처님 말씀이란 것이다. 여시행은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처럼 스스로가 실천하라는 말이다. 바른 뜻․바른 말․바른 일이라 할 것이다. 바로 전후 좌우를 놓아 버리고 바름을 실천하면 선(禪)이고, 바름이 밝음의 지혜 종자가 되는 것이다. 비름을 바로 실천하면 과거의 악행이 선의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미래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654, 무진보(無盡寶)
다함이 없는 보배는 마음이고 허공이라 할 것이다. 마음과 허공은 모양으로 찾으면 없는 것이고 이름도 없는 것인데 이름한 것이다. 마음은 공(空)으로 주인공이라 하고, 허공도 공(空)으로 삼라만상에 주인공이라 한다. 모양과 이름이 없지만 삼라만상에 순응하고 삼라만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아 허공이고 마음인 것이다.
655, 법계심(法界心)
마음의 공간을 법계라 한다. 마음은 지구를 천만개를 담아도 부족한 것이다. 마음은 형상과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거이므로, 나의 마음이 법계에 가득하지만, 너의 마음도 법계에 가득한 것이라, 마침 한 방에 불빛이 여러개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는 거와 같다.
656, 일다심(一多心)
마음이 법계(法界)라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다. 봄철 나무에 한 잎 푸른은 천지가 푸른 것을 알고, 한 잎 낙엽으로 천지에 가을을 안다. 길가에 조그마한 야생초에 꽃을 보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알고, 천지의 생명력을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조그마한 야생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만 중요하고 상대를 남이라 하고 분별하고 싫어한다면 바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된다. 길가에 민들레꽃이 피었는데 길가는 나그네는 아무런 마음 없이 짓밟아버리지만 민들레의 생명력은 거듭 거듭 새롭게 살아나는 생명력이 있다. 민들레의 생명력이 바로 자신의 생명력인 것이다.
657, 초발심(初發心)
바른 마음이 첫 마음이다. d;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한다면 시비 선악심은 그림자인 것이다. 아무리 두려운 생사심(生死心)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바른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고 싫어하는 분별심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서 욕망을 비우지 못하면 항상 두렵고 싫어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므로, 원인은 욕망을 버리고 바름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면 스스로가 편안을 찾는 것이고 과거의 모든 허물이 스스로 좋아지고 미래의 일을 자연스럽게 좋아지는 것이다. 초발심은 바로 바름을 말한다.
658, 대행심(大行心)
큰 움직임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삼라만상이 일어나는 것이고, 마음이 사라지면 삼라만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스스로 일으키는 마음이 천지를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생각을 일으키면 나타나는 일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현드폰 카메라, 인터넷 빛의 정신 문화가 아무런 생각 없이 호기심에서 생명존엄성을 억압하고 기밀을 누설한다면 생명을 억압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이고 살상 무기가 되는 것이다. 생명력이 없는 시스템이 생명력을 억압하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 사람의 마음이 개입함으로 말없는 시스템이 생명력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욕망이나 호기심이 기계의 통제를 받는 골이 되는 것이다. 기계가 감정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는 무한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시시로 인성을 확인하고 항상 호흡하는 것처럼 수행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실명제 하자는 말이 바로 인터넷 사용자의 책임제를 말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고발하고는 제공자는 주소를 삭제하고 공개한 내용은 우주 공간에 미아가 되어 허공 속에 돌아다니는 것이므로 생명에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것이고, 나쁜 정신문화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실명제를 말하는 것이다.
659, 중도심(中道心)
중도심은 시비 선악심이 아닌 바른 마음을 말하고 부처님의 말씀이고, 유교에서는 마음이 악하다는 악성설(惡性說)이 있고, 선하다는 선성설(善性說)도 있지만 다 마음을 근본하는 말이라, 바름이란 근본으로 찾아가면 악도 마음이고 선도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마음씀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씀은 철저한 수행의 실천이라 할 것이다.
660, 명위심(名爲心)
이름이 마음이라 한 것이지, 마음은 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자유자재한 것이다. 마음이란 말은 방법론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이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있는 곳이 없이 눈이 가면 마음도 가고, 귀가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소리에 가는 것이다. 소리도 마음이고 보는 형상도 마음인 것이다. 삼라만상이 마음인 것이고 생명인 것이다. 생명은 공기, 물, 흙, 빛이 생명이고 마음인 것이다.
661, 겁외심(劫外心)
겁외심은 마음 밖에 일이다. 마음이 삼라만상인데 마음 밖에 일이라면 삼라만상을 떠난 일이다. 마음을 떠난 또 하나의 마음이 있다는 말이다. 자신 속에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몸을 자신이라 하지만 몸 안에 참나가 있다는 것이다. 참 생명을 말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력을 말한 것이다. 생사의 죽고 사는 마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력을 말한 것이다.
662, 불자심(佛子心)
부처님의 제자 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아들 딸들은 부처님 마음을 배우고, 말씀을 배우고, 행동을 배우고, 닮아 가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진언(眞言)이라 하시고 참된 말씀으로 진리라 하는 것이므로 중생은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므로 진리는 고금 동서의 차이가 없는 것이고 사람만 위하고 길거리 잡초는 싫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불자심은 산천초목의 생명력인 자비심으로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나아가 산천초목이 자신가 다르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663, 몽각심(夢覺心)
번뇌를 깨달아서 진리를 성취하는 것이 꿈을 깨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의 오욕으로 즐거움으로 살아간다면 시비 선악이 헤아릴 수 없고 생사의 굴레에서 해탈 할 수 없는 것이다. 몸의 집착으로 자신 중심으로 살아가다가 자신이 죽으면 원망하고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만큼 고통이 오는 것이다. 평상시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 미래의 편안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집착하여 여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꿈인 것을 깨닫는 것이 몽각심이다.
664, 회향심(廻向心)
시종일여(始終一如)가 회향심이다. 나무의 열매가 끝이 아니고 흙 속의 씨앗이 처음이 아닌 것이라, 열매와 씨앗은 동일한 것이다. 끝과 시작이 아닌 것이다. 탄생과 죽음을 시작과 끝으로 보지 말고 탄생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죽음은 태어나는 길인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를 입학하는 것이 회향심이다, 회향심은 항상 새로운 설(元旦)이다.
665, 동광심(東光心)
하늘의 별인 은하수가 계절 따라 위치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은 동쪽에 해가 뜨는 것이라 하고, 지구는 끝이 있어 바다로 나아가면 지구 끝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 하여 땅 끝이라 하지만, 남극의 지구 끝에 도착하면 반대쪽인 북극도 있는 것이라 끝에서 끝을 찾아가면 지구가 둥근 것을 아는 것이다. 서울은 부산에서 보면 북쪽이 지만 서울을 평양에서 보면 남쪽인 것이다. 서울은 움직이지를 안지만 사람이 위치를 정하여 말을 하는 것이라, 본래 동서남북이 없는 것이다.
666, 원효심(元曉心)
새벽에 동트는 햇살을 보면 마음에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낀다. 새로운 마음이라 할 것이다. 정월 보름날 새벽에 부산 해운대 동백섬 모래사장에 가면 새벽 기도하는 인파가 인산인해인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새벽의 기운을 체험하면 온 종일 기분이 좋고 동트는 정월 대보름 달을 보면 새로운 마음이 용솟음치고 일년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667, 원력심(願力心)
중생의 원력심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부 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다. 원력심은 본래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불 보살님의 원력심이 불 보살님을 성취시킨 것이라, 중생들이 원력심도 불 보살님의 마음을 발심시키는 것이다. 중생이 원력심이 없이는 불 보살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668, 정광심(頂光心)
부처님께서 법화경 말씀에 이마로 세 갈래 광명을 놓으시니, 대천 세계가 손바닥 보는 것처럼 밝아서 하늘 나라와 인간 세상, 지옥세계가 나타남으로 모인 대중은 환희심으로 부처님전에 귀의하였다. 능엄경에는 이마의 백호광명을 놓으시어 다라니 주문을 문수보살에게 부촉하여 아난을 구하여 오라 하셨다. 정광심은 마음 광명의 지혜인 것이다.
669, 자타심(自他心)
너와 내가 우리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말이다. 마음으로 관하면 모양과 이름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관하면 무아(無我)의 공(空)도리를 아는 것이라, 자타(自他)가 하나인 것이다.
670, 상생자(相生子)
서로 의지하는 인연 법으로 상의상존(相依常存)하는 마음이다. 공기, 빛이 생명에 에너지가 되고 생명은 서로 먹거리로 나눔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상생의 정토인 것이다. 서로가 살려고 잡아먹는 것이 아니고 씨앗이 자라려면 공기․물․빛․흙의 자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자란 씨앗은 꽃피고 열매를 맺어서 많은 열매를 나눔으로 생명에 양식이 되는 것으로 상생하는 것이다. 농부가 곡식을 추수하여 먹거리를 만들어 나눔으로 생명의 양식이 되고, 베 짜는 사람은 사람들의 추위를 막아 주고 더위를 막아 주는 것으로 서로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671, 허공장(虛空藏)
허공은 빈 것으로 삼라만상에 주인공이라 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보배 창고인 것이다. 공기와 빛이 없으면 모든 생명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허공처럼 하라는 것은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마라는 것이다. 집착하므로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허공처럼 하면 무애자재하는 것이다.
672, 양족심(兩足心)
양족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복덕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를 원만 구족하신 분으로 중생들에게 마음 본성의 본래 모습은 복덕과 지혜가 원만구족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중생의 본심을 잊어버리고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아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라 진리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다.
673, 칠보궁(七寶宮)
극락세계는 칠보궁으로 산천초목이 바로 금은 보배로 형성되어서, 마침 우리 지구의 흙처럼 형성되어, 마음만 먹으면 물질의 복은 마음대로 성취되는 것이라, 욕망이 없는 것이다. 천안들은 지구의 물을 보배라 하듯, 생명에는 빛, 흙이 보배인 것인데 중생들이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자연의 감사와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오염으로 서로 생명을 죽이면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중생이 자연의 은혜를 알면 극락세계의 정토라 할 것이다.
674, 견면심(見面心), 675, 견불심(見佛心)
인사를 하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다. 사람이 불상인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부처님의 얼을 생각하므로 스스로가 부처님의 마음이나 말씀을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한 마디의 욕설이나 성냄으로 재앙이 일어나고, 한 마디의 부처님 염불로 부처님을 갊아 가는 것이다. 착한 것은 잘 보이지를 않지만 악한 것은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것이다. 나무가 물이 없어 죽어 가는 것은 잘 보이지만, 평상시에 푸른 나무는 잘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자비심인 자연의 생명력으로 바로 물․공기․흙․빛의 생명력을 깨달으면 견면심이고, 견불심이다.
676, 정예심(頂禮心)
불자들은 조석으로 부처님 전에 목숨 받쳐 이마로 큰절을 하는 것이다. 지극 정성으로 목숨을 받쳐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라, 다르게 말을 하면 한 생각의 일념으로 오로지 부처님 생각하라는 것은 망상을 하지 마라는 것이다.
677, 인로자(引露子)
바른 길을 인도하는 자을 선지식이라 한다. 선지식은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시는 안내자를 말한다. 지옥의 보살님인 지장보살님은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시고, 불 보살님들은 중생의 욕망의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즐거움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678, 봉불심(奉佛心)
마음에 부처를 성취시키는 것은 바름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름을 실천하면 바로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다. 절에서 염불을 하면서 집에 가서 공기, 물, 흙의 자연을 오염시키면 기도한 것이 못되고, 염불하는 자의 마음 자세가 아닌 것이다. 가피력이 없다는 것은 염불을 하면서 마음은 마음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하면 가피력이 없는 것이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는 것이다.
679, 세심행(洗心行)
마음을 씻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한 번 관세음보살하면 자비심이 한 번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자세는 관세음보살하면서 마음으로 바라는 소원이 있는 것은 잘 못 기도하는 마음 자세이다. 원력으로 참회하는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번뇌의 마음을 텅텅 비우면 빈 허공처럼 삼라만상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680, 일승자(一乘子)
부처님을 일승(一乘)이라 한다. 삼승(三乘)은 성문, 연각, 보살(聲聞, 緣覺, 菩薩)로 성문은 사성제(四聖啼) 법문을 듣고 깨달은 자고, 연각은 12인연 법문으로 깨달은 분이고, 보살은 6바라밀행을 실천하시는 분이라, 보살은 깨달음 중생이라 태어나는 생사가 있어 중생을 제도함으로 다음 생은 부처님이 되시는 미륵 보살이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을 말한다.
681, 피안자(彼岸子)
저 언덕은 열반의 언덕이라 고해의 바다를 건너서 극락세계를 말한다. 고해를 건너는 방법은 6바라밀의 보살의 길이 있다. 보시, 지계, 정진, 인욕, 선정, 지혜를 말한다.
682, 향화심(香花心)
꽃피고 향기가 진동하면 뭇 생명의 축복이라, 반드시 열매의 결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은 아무리 조그마한 생명이라도 죽이면 싫어하는 생명력이 잇다. 하물며 생명의 에너지인 공기, 물, 흙을 오염시키고 자신은 잘 살기를 바라는 일이 어리석음이라 할 것이다. 향화심은 자연의 체험이고 감사와 은혜의 공덕인 것이므로 열매는 은혜를 회향함으로 뭇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행이다.
683, 귀명자(歸命子)
불자는 오계(五戒)를 받아 목숨이 다하는 때까지 잘 수행함으로 진리를 성취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오계인 다섯 가지(살생, 훔침, 간음, 거짓, 술)을 금함으로 자비, 복덕, 청정, 진실, 바름의 보살행이 나타나는 것이다. 몸의 욕망을 수행함으로 본심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684, 보살심(菩薩心)
보살은 깨달음 중생이라 하여 생사로 윤회하면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성인이시다. 성인은 모양이나 이름보다도 마음의 가치관으로 보기 때문에 모양은 사람보다도 못하여도 마음은 사람보다 나은 것이 많다. 인간은 모양과 이름으로 마음을 일으킴으로 마음의 작용을 잘 모르는 것이 많아 자유자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685, 불매자(不昧子)
선지식도 인과를 받습니까? 하자 불락인과(不落因果)라 하여 5백 생에 여우의 몸으로 살았지만, 한 번 선지식을 만나 불매인과(不昧因果)란 말을 듣고 여우의 몸을 해탈하였다는 백장스님의 이야기이다.
686, 돈오심(頓悟心)
청정심이고 바름을 말한다. 깨달음은 실천이지만 청정과 비름의 가치관으로 보면 중생들의 본래모습을 잊어버린 것이고 환상의 즐거움에 집착하여 시비 선악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본래모습을 중생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687, 상주심(常住心)
상주심은 자비심이고 생명력인 것이다. 길거리에 민들레꽃이 피어 보는 자가 아름다운 마음이 일어나면 이것이 자비 법문이라 말을 하지 않고 자비 설법을 하는 것으로 상주 설법이라 하여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자연을 떠나지 않고 산천초목 자체가 부처님이시고, 바람소리, 물소리가 자연의 설법이란 것이고 생명의 소리인 것이다. 생명의 소리를 떠난 설법은 거짓이고 죽은 소리인 남의 말을 하는 그림자인 것이다.
688, 자광심(自光心)
자비의 지혜 광명은 생명존엄인 것이다. 청정을 떠난 남의 말을 하는 것은 거짓이라 할 것이다. 마침 오염을 시키면서 청정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혜는 실천인 것이다. 실천을 하면 집착의 고정인식을 벗어날 수 있다.
689, 화엄장(華嚴藏): 화엄은 삼라만상을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깨치심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을 화엄이라 하고 화엄은 복덕과 지혜의 보배 창고인 것으로 부처님의 묘법장(妙法藏)이시고 중생 본심의 보배 창고인 것이다.
690, 공덕주(功德主)
공덕주는 부처님이시고 나아가 자신이 바로공덕주인 것이다. 움직이는 주체자가 되는 것은 공덕과 지혜의 보배 창고인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장이고 새로움의 불가사의한 공덕주인 것이다. 다른 말로 창조주라 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이 공덕주인 것이다.
691, 정토주(淨土主)
극락세계를 정토라 하고 낙토라 하기도 한다. 정토의 주인공은 아미타불이시다. 아미타불의 전생은 법장스님의 원력으로 극락세계를 만들어 주인공이 되시고 극락의 모든 것은 아미타불의 생명이란 것이다. 사바 세계의 인간들의 원력으로 정토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원력이 있어 정토는 원력으로 정토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오염을 청정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지혜가 있지만 눈앞에 물질의 즐거움에 집착한 것이라, 청정은 항상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고통이 많은 이유이다. 바로 청정을 실천하면 자신이 정토주가 되는 것이다.
692, 선다심(禪茶心)
조주스님은 누구든지 차 한 잔 마시라 하셨다. 이것이 스님의 법이고 도(道)라 하신다. 차 마시는 마음이 선다심(禪茶心)이다. 높은 산 계곡 구름 속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 걱정 밖의 소식인 것이다. 욕망이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693, 무애심(無碍心)
무애심은 마음으로 관찰하면 모양과 이름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무애자재라 하는 것이다. 바람이 무애자재하는 것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모양이 일어나면 이름이 생기고 이름과 모양이 나타나면 집착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는 것이다. 바람이 산천에 푸른 잎사귀 춤을 추면 산천의 무애 자재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694, 수림화(樹林華)
산천의 숲은 생명의 보배 창고인 것이다. 오염을 청정으로 변화시키는 자연의 힘의 원천인 것이다. 그 나라의 산천을 보면 국력을 볼 수 있는 것이고 국민의 살아가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무가 일어면 짐승이 있고 새와 무골충들의 생명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695, 평등심(平等心)
평등심을 모양과 이름으로 찾으려면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물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을 평등심이라 하고 싶은 것은 물은 생명을 차별하지 않고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흙, 공기, 빛이 생명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평등한 것이라 한다. 우리의 생명존엄도 생명이 살아가는데 대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696, 해탈심(解脫心)
마음에 모양과 이름을 아무리 담아도 채우지를 못하는 것이고, 살아생전에 선악의 행위를 마음에 담아도 채워지지를 않는 것이다. 마음이 모양과 이름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허공에 차고도 남는 것이고 모자라는 것이다. 마침 방안에 여러 개의 불빛이 장애 없이 빛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자애가 일어나고 마음을 비우면 자유자재한 마음이라 해탈심이라 할 것이다.
697, 무차심(無遮心)
무차 법회라 하면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남녀노소 분별이 없이 누구나 법문을 경청 할 수 있는 야단법석을 말한다. 간혹 법회에 참석하면 미리 연락을 하여 참석 자리를 마련한 모임을 많이 보는데 법회라면 분별이 있으면 법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차 법회는 누구나 모임에 동참하여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698, 발로심(發露心)
아침 이슬길이라면 첫발 걸음을 말한다. 밤사이에 마당에 자욱하게 내린 눈길을 혼자 발자국을 만들면서 걸어보면 천지에서 마음의 환희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순순한 마음이 일어나는 일이라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길을 가다가 꽃을 보면 아름다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 마음이 발로심이다.
699, 인연자(因緣子)
우리의 삶이 인연의 고리이다. 무수한 고리로 형성된 고리의 관계인 것이다. 잘 사는 것은 인연의 고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미소하는 마음으로 서로가 연결 고리를 만들면 화목하다고 하는 것이고, 울음으로 서로가 마음 아픈 고리를 만들면 악한 인연이라 하고 원망, 원수, 고통의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의 한 가지 행위가 바로 자신의 나아 갈 길인 것이다.
700, 금색심(金色心)
부처님 마음을 금색심이라 하면 금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영원한 진리를 말한다. 영원한 진리는 생명력으로 무수한 모양과 이름의 변화 속에 지속되는 모양과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생명력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명력이 움직이면 살았다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면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701, 대원경(大圓鏡)
마음을 대원경이라 한다. 마음 거울을 대원경이라 하고 요즈음 말로는 유전자로 나타나는 정보인 것이다. 거울을 마음으로 부처님은 말씀 하셨고 과학은 유전자라 한다. 머리 가락 속에 그 생명의 움직임이 그대로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명부의 저승 염라왕은 업경대의 마음 거울을 사용하여 죽은 자의 선악을 구별하고 판단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들은 염라 왕의 거울을 무서워하면서 생전에 자신의 행위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원인을 모르고 결과를 알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의 수고러운 짓이다.
702, 무수자(無壽子)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라 할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목숨을 말한다. 아미타불을 빛이라 하여 시공을 초월한 자리를 말한다. 빛으로 와 빛으로 가는 것이 청정법신 자리인 것이다. 청정법신은 생사․시비․선악․시공(生死․是非․善惡․時空)에 관계하지 않고 무애자재한 것이다.
703, 자금광(紫金光)
붉은 금빛 광명은 찬란한 빛을 말한다. 아미타경에는 청 빛은 청 빛의 광명을 놓고, 흰 빛은 흰 빛 광명을 놓고, 황 색은 누른 빛으로 광명을 놓아, 청황적백(靑黃赤白)의 자연의 모습을 말하고 인간의 과학이 칼라시대인 것이다.
704, 무변심(無邊心)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말한다. 시간이 다함이 없고 미래가 다함이 없고, 중생의 원력이 다함이 없고, 불 보살님의 원력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잠재의식을 개발하라, 유전자 생명력을 개발하라 무궁무진한 미래 세계가 나타날 것이다.
705, 적멸궁(寂滅宮)
적멸궁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 오대보궁(五大寶宮)이 있고, 그 중 통도사는 불찰(佛刹)이라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국토를 말하는 것이다. 사리를 청정법신이라 하여 열반(涅槃)의 정신세계로 생사가 둘이 아닌 것을 말한다.
706, 강월심(江月心)
달을 마음에 비유한다. 달이 강에 나타나는 것은 그림자 달이라 하여 어리석음의 중생심을 말하고, 하늘의 달을 가르치는데 중생들이 가르치는 손가락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을 듣고 보고하면서 문자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킴으로 장애가 있어나고 고뇌하는 것이다. 강월심(江月心)은 고요한 밤중에 강물의 달을 바라보면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를 않고 오직 일심으로 깊은 생각에 들 수 있는 것이다.
707, 성월심(性月心)
마음을 달에 비유하기도 하고 성월심은 성품이라 하기도 한다. 성품의 본바탕을 말하면 바름이고, 맑음이고, 밝음이라 할 것이다. 일체 생명은 존엄이 있고 존엄은 지혜와 복덕이 본래 원만 구족한 자리이다. 생명존엄이 나타나면 흙․빛․공기․물이 서로가 스스로가 도우고 생명존엄이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708, 연지심(蓮池心)
연지심은 연못으로 연꽃을 생각한다. 연꽃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시궁창의 오염에서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꽃을 피우고 물을 청정하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꽃이다.
709, 일경심(一境心)
한 경계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경계로 보고 생명들이 도전을 하는 것이다. 일경심은 복덕과 지혜가 본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중생심이 일어나면 싫어하고 시비 선악하는 것이지, 성인은 부족한 것을 충족시키면서 항상 생명이 자유를 찾게 하고 보살펴 주시면서 생명이 서로 더불어 사게 하는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힘이 가피력이다.
위의 불명 이해 709번까지는 뜻풀이를 하였지만, 그 후는 풀이를 하지 않는다. 반복하여 불명 이해를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불명의 뜻을 알게 되어 있다. 불명 풀이는 마음의 본성 자리에 계합하려고 노력하여 본 것이고, 반복, 반복 읽어보면 마음의 가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속 주인공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일.